제35장. 성례

1. 성례의 정의.

성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여 교회에 부여하신 규례로서 거룩한 의식이다. 성례는 또한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으로서 신성하고 고귀한 의식이다. 성례는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되어지는 것으로서 성도들의 신분과 구원에 대한 법적, 행정적 보증이다. 따라서 성례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효력을 보증 받는다. 반면에 성례는 하나님을 향한 성도들의 감사와 충성과 신앙과 순종의 의식으로서 신실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2. 성례의 구분.

1) 구약의 성례.

구약 시대에는 할례와 유월절이라는 두 개의 성례가 있었다. 일부 개혁파 신학자들에 따르면 할례는 이스라엘에서 시작되었으며 다른 민족들이 이 언약의 백성들로부터 할례를 도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현재 인정받지 못한다. 고대 사회에서도 이미 애굽의 사제들은 할례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할례는 아시아, 아프리카, 심지어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발견되고 있는데 이 모든 나라들이 이스라엘로부터 할례를 도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타 민족의 할례와는 달리 이스라엘의 할례는 하나님과의 은혜 언약에 대한 성결의식이었다. 구약 시대의 할례는 피의 제사의식으로서 죄책과 죄의 오염을 제거하는 것을 상징하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를 삶의 전 영역에 침투시킬 의무를 부과하는 것을 의미했다. 유월절 역시 피의 성례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속의 희생을 통하여 애굽인들이 당해야했던 저주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대속의 희생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의미한다<요1:29,36><고전5:7>. 구원받은 가족은 죽임당한 어린 양의 고기를 먹었는데, 이것은 믿음을 소유하는 신앙적 행위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성찬 시에 떡을 떼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2) 신약의 성례.

신약의 성례도 두 가지로서 세례와 성찬이다. 그러나 신약의 성례는 외형적으로는 피 없는 성례이다. 그러나 내<영>적으로는 구약 시대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피의 성례이다. 그리고 또한 구약의 할례와 유월절이 상징하는 것과 같은 영적인 복을 상징하는 것이다. 로마 교회는 성례를 7개로 늘렸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세례와 성찬에 <견진성사, 고해성사, 서품성사, 혼례성사, 종부성사>를 추가시킨 것이다. 저들은 자신들이 추가시킨 성례들에 대한 근거를 성경에서 찾고자하였다. 그리하여 견진성사의 근거를<행8:17;14:22;19:6> <히6:2>로 하였고, 고해성사의 근거를<약5:16>로 하였고, 서품성사의 근거를<딤전4:14> <딤후1:6>하였으며, 혼례성사의 근거를<엡5:32>로, 종부성사의 근거를<막6:13><약5:14>로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잘못된 것으로서 전혀 타당성이 없는 억지였다. 로마 교회는 트렌트회의<Council of Trent> 이전에는 추가된 다섯 개의 성례가 사도들에 의해서 제정된 것이라고 거짓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트렌트회의를 통하여 그것들이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신 것이라고 사기 쳤다. 이러한 저들의 거짓과 사기극은 로마 카토릭 신학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었으며 사실상 로마 교회는 성례의 숫자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성례는 성경적일 때에 성례로 인정될 수 있으며 성례가 성경적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오직 하나님에 의하여 제정되어진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정하여 주신 성례는 오직 두 가지로서 세례와 성찬이다. 따라서 세례와 성찬 이외의 것들은 모두 성례가 아니다.

3) 신구약의 성례 비교

(1) 신구약 성례의 본질적 일치

로마 교회는 구약의 성례와 신약의 성례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로마 교회는 옛 언약의 의식 전체와 구약의 성례들 모두를 신약의 그것에 대한 모형이라고 주장한다. 구약의 성례가 이룩한 성화는 내적인 것이 아니고, 다만 법적인 것으로서 미래에 그리스도의 수난에 의거하여 인간에게 수여될 은혜의 전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들의 주장이 구약의 성례에 어떤 내적인 은혜도 전혀 수반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신약 시대에서와 같이 이 은혜가 성례 그 자체에 의하여 초래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이 성례에 예표 된 은혜의 완전한 실현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하여 비로소 이루어지기 때문에 구약의 성도들은 선조림보<Limbus Patrum>에 갇혀 있었다는 것이 저들의 주장이다. 성례는 객관적인 효력을 가진 것이 아니다. 성례는 그 의식을 통하여 참여자를 성화시키지 못하며, 다만 참여자 자신의 작용을 통해서<믿음과 사랑으로 받을 때> 만성화되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의 성례와 신약의 성례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고전10:1-4>에서 사도 바울은 신약의 성례의 본질적인 요소가 구약의 교회에 기인한 것으로 증거하고 있으며, <롬4 : 11>에서는 아브라함의 할례를 믿음의 의<義>에 대한 인침이라고 선포한다. 또한 성례들은 같은 영적인 실재들로 나타난다. 신약과 구약의 성례의 명칭들이 상호 교차적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으며, 할례와 유월절이 신약 교회에 대해서도 사용되어지고 있고<고전5:7><골2:11>, 세례와 성찬이 구약 교회에 대해서도 사용된다<고전10:1-4>.

(2) 신구약 성례의 형식적 차이

신약과 구약의 성례가 본질적으로 일치하고 있는 한편 차이점도 무시할 수없다. 성경은 그에 대한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① 이스라엘에서 성례는 은혜의 상징과 인침으로서의 영적인 의미 외에 국가적인 의식으로 사용 되어졌다.

② 성례와 더불어 이스라엘은 다른 많은 상징적인 규례들 <성례와 일치하는 제사 규례와 정결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신약에서는 오직 성례만이 존재한다.

<3> 구약의 성례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며 장차 누리게 될 은혜를 인치는 역할을 하는 반면 신약의 성례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완성된 구속의 제사를 기념한다.

③ 구약의 성례에 따르는 하나님의 은혜가 신약의 성례들을 신실하게 받음으로서 지금 얻는 은혜보다 적었다는 것은 성경의 분명한 증거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차별이 아니라 다만 시대적인-어쩔 수없는-상황이었다.>

3. 성례의 필요성.

로마 카토릭 교회는 세례가 구원받는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세례 받은 후에 죽음에 이르는 죄를 범한 자는 반드시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세례가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며, 다만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이므로 신자들의 의무적인 것에 속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고의적으로 성례를 기피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능멸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 대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성례가 필수적인 것은 당연한 것이나 그것이 구원의 절대적 필수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은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한 것이지 어떤 의식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신학적 진리에 근거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와 같은 진리를 다양하게 증거 한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외적인 형식만을 통하여 자신의 은혜를 전달하지 않으며 <요4:21,23><눅18:14>, 구원은 오직 믿음만을 통하여 이루어지며<요3:36;5:24;6:29><행16:31>, 성례는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믿음이 받아들여진 곳에서 시행되어지고<행2:41;16:14,15,30,33><고전11:23-32>, 아브라함 이전 시대의 성도들과 예수 그리스도 우편 십자가상의 강도는 성례와 무관하게 구원 받았다.

4. 세례

1) 세례의 정의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례의식으로서 다음과 같은 신학적의 의를 갖는다.

(1) 세례는 하나님의 은혜 언약에 대한 보증이며
인침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사 하신 은혜 언약의 보증과 인침으로서 그와 그의 후손에게 할례를 주셨다. 할례가 피의 의식이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의 피를 예표 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의 피를 통한 인류의 죄 사함에 대한 하나님 언약의 보증이며, 인 치심 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의 희생 제사를 단번에 완성하심으로 더 이상의 피의 의식이 요구되지 않게 되었으므로 피의 의식이었던 할례도 보다 더욱 완성된 성결의식으로 완성되어야 했던바 그것이 곧 세례였다. 세례는 피의 의식으로부터 자유 하는 동시에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여됨으로서 그 완전성과 영원성을 보장받는 하나님 은혜 언약의 보증이며 인침이 되는 것이다.

(2) 세례는 구원의 표징이다.

인류 구원은 인간의 어떤 조건이나 방법에 의존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이러한 구원의 완전성과 영원성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여 보증되어진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특성을 가지며,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언약의 보증에 의하여 구원에 대한 절대적인 보장을 받는 것이다. 세례는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언약에 대한 내적, 외적 표징이다. 수세 자는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여되어지는 외적인 세례의식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보장받으며, 세례 시에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내적 정결함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정립하게 된다.

(3) 세례는 하나님 은혜의 방편이다.

수세자는 세례의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적용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 카토릭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수세자는 세례의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외적<법적, 행정적>으로 적용받으며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각종 은혜를 내적으로 적용받는다. 따라서 일생에 단 한번 시여 받는 세례의식이며 또한 그 순간에는 깊이 느끼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그리고 또한 그때의 감동을 나중에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분명한 것은 세례의식을 통하여 하사 되어지는 하나님의 내적, 외적 은혜는 참으로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4) 세례는 삼위 일체 이름으로 시행되어지는 성례 의식이다.

세례는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되기 때문에 당연히 신적 권위를 갖으며, 또한 거룩성과 영원성과 완전성을 갖는다. 세례가 단 한번으로 영원하며 완전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그것이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인간들에 의하여 시여되어짐에도 불구하고 거룩하고 신성한 것은 인간의 이름으로 시여되는 것이 아니라,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여되어지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오직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천명하시고 자기를 통하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께 갈 수없다고 단언하시며 오직 자기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선포하시면서도, 세례에 대하여서는 자기 이름으로 시행하게 하지 않으시고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하라고 하신 것은, 이와 같은 세례의 신학적 의의 때문이었다.

(5) 세례는 하나님의 자녀로 인 치심을 받는 법적, 행정적 성례 의식이다.

세례는 하나님의 자녀로 인 치심을 받는 법정적, 행정적 절차의식으로서 그 효력에 있어서 영원불변의 특성을 갖는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는 세례와 관계없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자녀였으며, 또한 세례와 관계없이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제정하여 시행하게 한 것은 하나님께 어떤 변동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성도들의 불완전한 믿음 때문이다. 성도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수시로 확인 받으면서도 때때로 그 사실을 망각하고 불안해하며 필요 없는 근심을 하게 된다. 그러한 그들에게 있어 세례는 특별한 보증이며 안심을 주는 확증이다. 그들은 자신이 세례 받았다는 사실로 인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스스로 확인하고 안심하며 평안을 얻는 것이다.

(6) 세례는 성도들에게 신앙적 삶을 요구하는 성례 의식이다.

세례는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로 인 치심을 받는 법정적, 행정적 의식으로서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특별한 신분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부여하기도 한다. 수세 자들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할 사명적 책임과 의무를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세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보다 활발하고 본격적인 교통을 하게 되는 거룩하고 신성한 성례의식이며, 또한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순종의 성례의식이다. 세례를 받기 이전의 하나님의 자녀와, 세례를 받은 이후의 하나님의 자녀는 신분상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으나, 상태와 사명적 차원에서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세례 받기 이전의 하나님의 자녀들은 응석받이 어린아이와 같은 차원일 수 있으나, 세례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이제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를 위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충성 봉사하는 사명적 삶을 살아야하는 것이다. 세례가 거룩하고 신성한 것은 이러한 하나님 자녀들의 사명적 삶은 결국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통이 있을 수밖에 없으며, 또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하나님을 위한 아름다운 신앙적 삶이 수반됨으로 그들이 신분상으로만 거룩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 자체가 거룩한 의인적 삶이되기 때문이다.

(7) 세례는 성도들을 정결하게 하는 성례의식이다.

성도들은 세례의식을 통하여 자신의 내적, 외적 상태를 정결하게 씻음 받는다. 세례 시에 사용되는 물은 성도의 외적 상태를 정결하게 씻는 것이요, 이때에 성도의 내면 상태<영적인 상태>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정결하게 씻음 받게 된다. 세례 요한은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선포한다. 이와 같은 요한의 선포는 세례의 본질에 대한 엄숙한 선포이다. 요한의 물의 세례는 외형적인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한 하나의 정결의식에 불과하다. 같은 이유에서 수세 시에 사용되어지는 물은 수세자의 외적 상태를 정결케 하는 상징적인 의식에 불과하며 또한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상징하는 의식에 불과하다. 때문에 물을 붓거나 뿌리거나 하는 외적 양식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세례의 본질은 세례 시에 함께 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있다. 성도의 수세 시에 성령께서는 그의 내면<영>을 정결하게 씻으시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적 상태가 되게 하신다. 요한은 그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을 구약 시대의 제사에 비추어 불로 태운다는 개념으로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의 이러한 역사하심이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완전하게 정결케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영적 상태가 신분적인 차원에서의 정결케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학적 원리는 하나님께 중생의 은혜를 입은 자의 영적 상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세를 사는 동안에는 여전히 완전하지 않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2) 기독교 세례와 일반 세례의 구분.

(1) 일반 종교의 결례의식

기독교의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제정된 것이 분명하지만 당시의 종교적 상황에서 유추할 때에 전혀 새로운 종교적 의식은 결코 아니었다. 애굽인, 파샤인, 인도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종교적 결례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로마와 헬라의 종교들은 보다 더 세련된 종교적 결례의식을 시행하고 있었다. 그들의 종교적 결례의식들은 대개의 경우 물을 뿌리는 의식들이었지만, 때로는 바다에서 목욕하는 식의 형태를 취하기도 하였다. 터툴리안<Tertullian>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그들은 특히 신생아가 태어났을 때 그러한 결례의식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은 바울이 가르친 기독교의 세례가 신비적 종교들의 입교의식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신비적종교의 입교의식과 기독교 세례의 근본적인 차이를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주장이다. 종교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신비적 종교의 입교의식은 그들의 신들에 대한 순종의 맹세가 포함되어 있으나, 반면에 그들이 섬기는 신들의 이름으로 결례를 행하는 일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 신비적 종교에서 추앙되고 있는 신들의 영적 영향력이 그 결례의식에 어떤 연관을 이룬다는 사실도 전혀 확인 된바가 없다. 그들의 입교의식은 다만 하나의 종교적 입교의식의 범주를 초월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또 다른 많은 종교학자들은 기독교의 세례의식이 <타우로볼리움-taurobolium-여신에게 황소를 바치는 의식으로서 근동 일대에서 성행하였다.>의식에서 유추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러한 주장 역시 매우 잘못된 것이다. 그러한 종교적 의식들은 유럽 시대의 제사의식과 어떤 유사점이 있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전하고 가르친 기독교의 세례의식과는 전혀 비교조차 될 수 없기 때문이다.

(2) 유대인들의 결례 의식

유대인들에게도 많은 정결 규례들과 씻는 의식들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성례적인 성격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언약의 표징이나 인침은 아니었다. 이방인들이 야훼 하나님을 섬기게 될 때에는 할례를 받아야 했으며 후기에 이르러서는 물로 씻는 의식<세례>을 행했다. 이러한 풍습이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유행했었는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의 논란이 있지만, <슈에러-Schuerer> 박사는 미쉬나를 인용하여 그것에 대한 긍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월-Wall> 박사가 그의 저서<History of Infant Baptism>에서 인용한 유대의 권위 있는 학자들의 문서들에 의하면 이 세례는 두, 세 증인 앞에서 시행되었으며 이 세례를 받은 자들의 자녀들은 정결하다고 인정되어 세례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부모가 세례 받지 않은 상태 하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적령자<남자13세, 여자12세> 이전에는 아버지의 요청에 의하여 세례를 받게 되고, 적령자 이후에는 본인의 요청에 의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세례도 역시 일종의 결례<입교>적 의식이었을 뿐 기독교의 성례 와 같은 성격의 의식은 아니었다.

(3) 요한의 세례

학자들 중에는 요한의 회개의 세례가 이와 같은 이방인들의 입교적 세례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주장이다. 요한의 세례와 이방인들의 입교적 세례 사이에 어떠한 역사적 관계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요한의 세례는 결코 이방인의 입교적 세례와 같은 차원에서 인식할 수없다. 요한의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회개>의 세례로서 영적 전환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결례의 목적은 의식을 통하여 이방인들의 불결함을 제거함으로서 그들을 유대 공동체 안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반면에 요한의 세례는 세례를 받는 자를 새로운 영역 즉 하나님의 자녀의 영역으로 옮기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일반인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사람의 신분으로 전환되는 기독교의 성례의식에 대한 대 전제였던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요한의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에 대한 관계이다. 구<舊>루터파 신학자들은 요한의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가 목적과 효력에 있어서 동일하다고 주장한 반면 일부 후기 루터파 신학자들은 양자의 동질성이 전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개혁파 신학자들의 입장도 루터파와 같이 양분되어 있다. <트랜트 회의>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요한 세례의 효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의 효력과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정죄하면서, 요한의 세례는 구약의 성례들과 마찬가지로 다만 예표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정의하였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들은 진정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저들의 주장은 진리이다. <행19장>의 세례에 대한 사건은 이러한 진리를 보증하고 있다.

요한의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은 여러 세대,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계속되어진 주장이다. 현대 신학에서 이러한 주장은 특히 계속되어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벌코프> 박사도 그러한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목적론에 있어서는 유사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 요한의 세례는 그의 임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에 대한 준비의 세례였다. 요한은 세례를 주면서 계속하여 회개<준비>를 선포하고 있고 자신의 세례는 다만 물로 씻는 의식적인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영적인 것으로서 자신의 세례와 비교될 수 없는 것임을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3:11>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는 요한의 세례가 일반인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사람의 신분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준비의 회개였지 실제적으로 전환시키는 효력을 갖는 것은 아니었음을 밝히 증거 하는 것이다. 벌코프 박사는 요한의 세례도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그의 세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라 하여 모두가 동일하다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받은 상대가 누구냐? 하는 것에 따라 그 사명의 본질과 범위가 다른 것과 같은 차원의 것이다. 하나님께 사명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도들이 받은 사명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받으신 사명은 본질적으로 다르며 범위에 있어서도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제정하여 주신 세례라 할지라도 요한의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본질적으로도 다르고 범위와 효력에 있어서도 전혀 다르다. 이미 밝힌바 있듯이 이러한 진리에 대하여 성경은 <행19장>으로 보증하고 있다. 만약에 요한의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가 본질에 있어서나 효력에 있어서 동일한 것이었다면 사도들은 그들에게 다시 세례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
미쉬나<הנשׁט-mishnah> <영-mishnah>

미쉬나는 반복<反復>, 교훈<敎訓>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율법학자들의 구전<口傳>이며, 통상적으로 해설을 집성한 탈무드의 본문을 말한다. 주해의 부문을 <게마라>라고 하며, B.C.70-220년 경에 생존한 랍비들의 토론 문서를 통하여 작성되었다. 랍비들의 율법에 대한 토론들은 처음에는 일반적인 토론이었지만, 그것을 후대에 전해야한다는 명분에 의하여 문서화되었고, <탄나임>이라는 학자 의 노력에 의하여 계속적인 집성이 이루어졌으며 <유다.하나시-A.d.135-220>, 랍비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집대성되었다. <막7 : 3-15>의 <유전>은 미쉬나를 말한다.

3) 기독교 세례의 제정

기독교의 세례는 일반 종교의 의식적 결례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기독교의 세례는 부활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서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세례는 일반 종교들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영적 결과들을 전제로 하고 있다.

(1) 세례의 제정

기독교의 세례는 하나님의 주권적 권위에 의하여 제정되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의 사역을 마치신 후에 제정하셨고 부활하신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중보자로서의 충만한 권위로 세례를 정하셨으며 그 세례가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선포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 : 18-20>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 : 15-16>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권위에 의한 이 선포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다.

① 제자들은 온 세상에 나아가서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서 사람들을 회개하게 하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약속된 구세주로 고백하게 하여야한다.

② 믿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었으며, 하나님 나라의 법에 따라 살아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표징과 인 치심으로서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한다.

③ 하나님의 사람들은 말씀의 사역에 대한 지배를 받아야하는바 곧 복음의 선포와 새로운 언약의 신비와 특권과 의무에 관한 가르침을 배우고 또한 그것에 순종해야 한다.

(2) 세례의 형식

사도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εις το ονομα του πατρος και του υιου και του αγιου πνευματος> 세례를 주도록 명령 받았다. 벌게이트<Vulgate>는 첫 번째 단어들인 <이름으로>라는 <εισ το ονομα>를 <in nomine-이름으로>라고 번역하였고 루터는 그것을 따라서 <in namen>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리하여 이 언어 들은<삼위적 하나님의 권위로>를 의미하였다. <-의 권위로>라는 개념은 <εντω ονομαπ>나 또는 보다 더욱 짧게<εν ονοματι>라는 어구로 표현되고 있다<마21 : 9> <막16 : 17> <눅10 : 17> <요14 : 26> <행3 : 6 ; 9 : 27>. 전치사<εις-안으로>는 오히려 어떤 목적을 나타내며 따라서 <-관하여> 또는 <어떤 사람을 믿거나 또는 어떤 사람에게 진지하게 순종하는 것을 고백하려고>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 알렌<Allen> 박사는 마태복음을 주석하면서 이와 같은 해석법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례 받은 사람은 상징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 안으로 들어간다. 다시 말하면 그와 연합하여 그와 함께 교제를 나누게 된다.> 이와 같은 해석법은 타이어<Thayer>,로빈슨<Robinson>, 크레머, 쾨겔<Cremer-Koegel>, 발욘<Balijon> 등등의 학자들도 사용하고 있고 마이어<Meyer>, 알포드<Alford>, 알렌<Allen>, 브루스<Bruce>, 크로샤이데<Grosheide>, 반류덴<Van Leeuwen> 등의 주석가들도 역시 사용하고 있다. 이 용어의 이러한 의미는 <εις τον Μωυσην-고전10 : 2> <εις το ονομα ΙΙαυλου-고전1 : 13> <εις εν σωμα-고전12 : 13> <εις Χριστον-롬6 : 3 , 갈3 : 27>과 같은 병행적 표현에 의해 완전히 입증되어지고 있다. 따라서 전치사<에이스>를 번역함에 있어서 <안으로> 혹은 <에-관하여>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이다. 이름<ονομα>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쇔-משׁ-이름>의 의미로 사용되는데, <쇔>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는 모든 자질들을 의미하거나, 또는 하나님께서 그의 예배 자들이 갖추어지기를 원하시는 것들에 대한 총체적인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이즈만<Deissman>은 자신의 저서인 <성경연구-Bible Studies, p. 146>에서 <ονομα>라는 단어가 고대 파피루스문서에서 특별한 용법으로 사용되어진 사실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근거로 할 때에 세례의 형식은 세례를 통하여 <세례가 상징하는 것을 통하여>, 수세 자가 신적인 자기 계시 또는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 하에 들어가게 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계시적 요구에 따라 살아야할 의무와 책임을 갖게 되는 것으로 해석하게 된다.

(3) 사도들의 세례 형식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에 대하여 선포하실 때에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지 않고 다만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였다<행2 : 38 ; 8 : 16 ; 19 : 5> <롬6 : 3> <갈3 : 27>. 사도들의 이러한 세례로 인하여 세례의 형식에 대한 논란이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초대 교회시대의 어떤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러한 주장의 근거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성을 주장하였다. 또 어떤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삼위 일체 하나님을 대표하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제정된 삼위 일체 이름으로의 세례는 디다케 <Didache-12사도의 교훈>이 기록되었던 <A.D100>에 이르러 이미 모든 교회들에서 정식적인 세례로 시행되어지고 있었다.

****
기독교 역사를 고찰해 보면 한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다. <이 주장은 현대에도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초대 교회시대에 사도들이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교회는 언제나 <마28 : 19>의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쫓아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해야한다는 자들은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정리하여 더 이상의신학적 오류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여야한다. 세례가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되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례의 완전성과 영원성을 위하여서는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되어야한다. 왜냐하면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 되어야 완전한 하나님의 권위에 의한 세례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오직 유일한 중보자이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게 하지 않고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게 한 근본 원인은, 그것의 영원성과 완전성이 삼위 일체 하나님의 신적 권위에 의하여 시행되어져야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도들은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지 아니하고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여하라고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였을까?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초대 교회 당시의 신학적 경륜 안에서 해결하고자 한다. 당시의 사도들에게는 사실상 삼위 일체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신학적 정립이 없었다. 그들은 오직 유일한 메시야 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특히 하나님과 자신을 하나로 일치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를 통하여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동일한 존재로 인식하였으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오류를 바로 잡으셨다. 이미 밝힌바 있듯이 디다케가 성립될 무렵 교회들로 하여금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게 하신 것이다.

4) 역사적으로 본 세례의 교리

(1) 초기 기독교.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세례를 교회에 들어가는 의식으로 간주하였으며 또한 세례가 통상적으로 죄의 용서와 새 생명의 전달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세례가 영혼 구원의 절대적인 요소로는 보지 않았고 다만 갱신과정의 완성적인 요소로 간주하였다. 초대 교회시대에는 유아 세례를 시행하지 않았으며 세례는 일생을 통하여 한번만 받아야하였고 반복해서 받는 것을 금하였다. 그러나 2세기가 지나면서부터 세례에 어떤 신비한 효능이 존재한다는 사상이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어거스틴은 유아들의 세례에 그 효능이 자동적으로 발휘되어진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세례가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세례 받지 못한 자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아직 믿음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믿음과 관계없이 세례의 효력이 발휘되지만, 성인들의 경우에는 반드시 믿음이 전제되어진다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그는 세례가 원시적인 죄책을 제거하지만 본성의 부패를 완전하게 제거하지는 못한다고 하였다. 스콜라 신학자들은 처음에는 어거스틴의 견해를 지지하였지만, 나중에는 어거스틴의 견해에서 이탈하여 세례는 언제나 믿음과 관계없이 다만 의식을 통하여 그 효능이 발휘되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신학 사상 속에서 세례란 중생과 교회입문의 절대적 성례 의식이라는 로마 카톨릭의 세례에 대한 개념이 성립 되었다.

(2) 로마 카토릭.

로마 카토릭은 세례에는 세례가 상징하는 은혜가 내포되어 있으며 이 은혜는 거부하지 않는 모든 자들에게 수여된다고 주장하였고, 이 은혜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세례는 교회의 회원으로서 받는 자들에게 지울 수 없는 표징을 주기 때문이며,

② 세례는 원죄의 죄책과 세례 받는 시점까지 지은 모든 죄<자 범죄 포함>에 대하여 자유 함을 주며, 욕심은 여전히 남는다 할지라도 죄의 오염은 제거되어지고, 따라서 영원한 형벌과 현세에서의 죄에 대한 형벌로부터 자유하게 되며,

③ 세례는 성화시키는 은혜를 주입시킴으로써 영적인 갱신을 이루며 초자연적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형성시킬 뿐만 아니라,

④ 세례는 받는 자로 하여금 성도의 교통 안으로 들어오게 하며 유형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한다.

(3) 루터파 교회.

루터파의 종교 개혁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례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 루터는 세례 시에 사용되는 물을 보통의 물로 생각하지 않고 그 물이 본래적으로 신적인 권능을 가진 말씀을 통하여 은혜로운 생명의 물, 중생의 씻음이 되는 물로 변환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말씀이 지닌 이와 같은 신적인 효과를 통하여 성례는 중생을 유발한다고 믿었다. 루터는 성인들의 세례는 수세자의 믿음에 의하여 효력이 발생하고 믿음이 정립되지 않은 어린이들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 어린이들에게 믿음을 일으켜준다고 주장하였으나, 나중에는 그 문제에 대하여서 사실상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였다. 후기 루터파 신학자들은 유아의 믿음<하나님께서 주입시키시고 조성하여 주신>을 세례의 전제 조건으로 간주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다른 루터파 신학자들은 세례가 유아들에게 그와 같은 믿음을 즉각적으로 일으켜준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주장은 세례의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자동적으로 발생되어진다는 신학사상을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재세례파는 유아 세례의 합법성을 부인하고 거부함으로서 루터가 안고 있는 고민적 난제를 풀어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 있는 자들 중에서 유아 세례를 받은 자들에게 다시 세례를 받게 하였으며 그것을 재 세례라고 하지 않고 정상적인 최초의 세례라고 주장하였다. 재세례파의 개념에 의하면 어린아이들은 하나님의 권속이 될 수 없었다.

(4) 칼빈주의 교회.

칼빈을 중심으로 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세례란 신자들을 위하여 제정된 것이며 새로운 삶을 이루어내는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강화시키는 것일 뿐이라는 신학사상 위에서 세례론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유아들이 어떻게 신자로 간주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그들이 믿음을 표시할 수없는데 어떻게 영적으로 강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여야 하는 난관에 직면하였다. 일부 개혁파 신학자들은 단순하게 믿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은 언약의 후손들이므로 당연히 신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 것이며, 또한 영적인 강화는 세례 시에 단번에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또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어떤 신학자들은 언약의 자녀들은 가정적으로 이미 중생되어진 것으로 간주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들이 부모에 의하여 세례 받으려고 교회에 나올 때 이미 중생되어졌다는 것이 아니고, 신앙적 삶을 사는 부모와의 가정적 삶을 통하여 그들이 중생된 자로 성장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립하였다. <세례는 우리에게 물을 뿌리고 우리가 그것을 받을 때에만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서도 효과를 내는 것이다-제34조>

(5) 세례에 대한 오류적 개념들.

인본주의적 개념 하에 있는 신학자들은 세례란 외적인 언약의 상징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면서 그 문제에서 자유 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세례의 개념은 현대 교회에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소시니안파, 알미니안파, 재세례파, 합리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현대 교회들 중에는 세례의 영적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 경우가 많다. 세례가 신적 은혜의 인침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그것을 사람 편에서 단지 신앙을 고백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신학 풍조가 현대 교회의 보편적인 실정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5) 세례의 올바른 양식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를 제정하여 주셨지만 세례의 양식에 대해서는 제정하여 주시지 않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세례의 양식을 제정하여 주시지 않았는지에 대한 참된 진리를 깨달아야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의 양식을 제정하여 주시지 아니한 것은 세례란, 그 외형적인 양식에 그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세례의 내적인 것에 그 의의가 있기 때문이며, 또한 세례가 시행되어져야 하는 과정들의 특수성을 고려하셨기 때문이다. 세례는 성도들에 대한 법적, 행정적 인침이며 또한 성도들을 향한 법적 요구가 수반되어 있는 것이지만 성도들을 정결케 하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성도들의 정결은 외형적인 어떤 양식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내적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외적인 양식에 연연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의 양식을 제정하여 주시지 않으신 것은 교회가 세례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그 양식에 어떤 의의를 두고자 하는 오류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하나님께서 신약 교회의 건축 양식에 대한 제정을 하지 아니하신 원리와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의 양식을 제정하여 주지 아니하신 또 다른 이유는 세례가 시행되어지는 과정의 다양함이다. 일반적으로 세례는 교회 안에서 시행되어지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 <전쟁 시, 또는 성도의 갑작스런 임종시>에 세례를 시여하여야 하는 경우가 있다. 세례가 교회 안에서 시행되어지게 될 때에는 세례를 위한 준비가 있을 수 있음으로 어떤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세례를 시여해야 할 특별한 경우에는 사전에 아무런 준비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이러한 경우에 세례의 양식이 고정되어 있다면 매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며 때로는 세례를 시여할 수 없을 수도 있다. 특히 오직 침례가 유일한 세례의 양식으로 고정되어 있다면 그 침례의 양식 때문에 세례를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은 모든 점을 고려하시어 세례의 특별한 양식을 제정하여 주시지 않으셨고, 어떠한 경우에도 세례가 자유롭게 시행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것이 세례의 올바른 양식이라고 함부로 편협하게 고집하지 않아야한다. 물에 완전히 담그거나, 물을 뿌리거나, 물로 씻거나 하는 외적 양식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외적 양식은 자유롭게 하되, 반드시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할 것이며, 세례의 의의를 충분히 교육하고 세례를 주는 자와 받는 자가 다함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엄숙하고 경건한 세례의식을 거행함으로 그 세례의식이 거룩하고 신성할 수 있게 하면, 그것이 곧 올바른 세례양식이 될 것이다.

6) 세례의 합법적인 시행자들

로마 카토릭은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때문에 어떤 사람이 사제의 부재로 인하여 세례를 받지 못함으로 구원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것을 염려하여 비상시에는 다른 사람들도 세례를 줄 수 있도록 허용하였으며, 특히 조산원들의 세례시행을 허용하였다. 카토릭 교회는 심지어 이단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삼위 일체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으며, 또한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면 그것을 합법적인 세례로 인정하였다. 개혁 교회에서는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시행이 같은 범주에 속한 것으로 간주하여 가르치는 장로, 곧 목사가 유일한 세례 시행자라는 원리를 세웠다. 개혁 교회는 또한 로마 카토릭이나 다른 교파들의 세례를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나,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종파의 세례는 인정하지 않는다.

****
개혁파 교회에서 오직 목사만이 세례를 시여할 수 있다고 제정한 것을 목사들의 만행이라고 비난하는 자들이 있다. 저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목사 이외의 사람<장로, 강도사, 전도사>들도 세례를 시여할 수 있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개혁주의 교회에서 목사들에게만 세례의 시여권을 허용하는 것은 결코 목사들의 만행이 아니라 교회의 질서를 위한 것이었다. 만약에 장로나 강도사, 전도사들이 세례를 시여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진다면 과연 교회의 질서가 존재하겠는가? 그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에 어떤 예외 규정을 두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특별한 경우 <전쟁이나 갑작스러운 임종> 등등의 경우에, 그리하여 목사가 전혀 달려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일반 성도<물론 세례를 받은>라 할지라도 세례를 시여할 수 있는 예외 규정을 두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외 규정은 매우 엄격하게 제정되어야한다. 그것은 반드시 절대적 상황의 특별한 경우로 제한되어야 하며, 또한 그러한 특별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세례를 강력하게 요청하지 않는 자에게 함부로 세례를 시여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본인이 세례를 강력하게 요청한다 할지라도 세례가 구원의 필연적 조건이 아니므로 반드시 세례 받지 아니하여도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어, 그가 세례 없이 안심할 수 있게 하여야 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강력하게 세례를 요청하는 경우에 한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세례를 시여하는 엄격한 규정을 두어야하는 것이다.

7) 세례의 적당한 수령자들

세례는 적절한 자격을 갖춘 이성적인 존재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들과 그들의 신앙적 교육 하에 있는 그들의 자녀들에게 시여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로마 교회는 한 때 시계<時計>나 건물들에게 세례를 시여함으로, 세례의 본질을 망각하는 어리석은 오류를 범하였다. 세례를 받는 자들은 성인과 유아의 두 부류로 구분될 수 있다.

(1) 성인 세례

성인들의 경우에는 신앙고백이 선행되어야 한다<막16:16><행2:41;8:37;16:31-33>. 교회는 수세자에게 신앙고백을 요구하여야하며 수세자의 신앙고백에 의심이 가는 어떤 분명한 증거가 없다면 그의 신앙고백을 인정하고 그에게 세례를 시여하여야한다. 라바디에파<Labadist>는 밀실<密室>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마음의 밀실> 이라고 하였으며 성도들로 하여금 <마음의 밀실>에 들어가서 신앙고백을 하게 하였으며 사제들이 성도의 마음의 내적 상태를 판단하여 그 고백의 진위성을 분별 한 후에 세례를 시여 하였는데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사람의 내적 상태를 분별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 뿐 이시며 사람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있지도 아니하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방법을 기뻐하시지 아니하신다.

(2) 유아 세례

① 유아 세례의 역사적 근거

A. 개혁 교회의 신조

a. 벨기에 신앙고백은 제34조에서 신자들의 자녀들도 <이전에 이스라엘의 어린아이들이 부모에게 받은 약속에 의하여 할례를 받았듯이, 부모에게 주어진 언약에 의거하여 세례를 받고 인침을 받아야한다.>고 선언한다.

b.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어린 아이에게도 세례를 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그렇다 왜냐 하면 어린이도 어른과 같이 하나님의 언약과 교회에 속하여 있고, 그리스도의 피로써 그들도 죄에서 구원을 받고, 신앙을 불러일으키시는 성령이 어른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도 언약의 표시로서의 세례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에 접목되어서 불신자의 아이들과 구별되어야한다. 이것은 마치 구약의 할례에 의하여 구별이 된 것과 같다. 이 할례 대신에 신약 성경에서는 세례가 제정된 것이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c. 도르트 신조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이 들어있다. <신자의 자녀들은 선천적으로가 아니고 그들의 부모와 함께 받고 있는 은혜 언약에 근거하여 거룩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경건한 부모는 이 세상의 생활에서 그들을 유년 시절에 불러내기를 좋아하시는 하나님이 그들의 자녀들을 또한 택하시고 구원 하실 것에 관하여 의심할 것이 전혀 없다-창17:7-행2:39-고전7:14>.

B. 개혁주의자들의 견해

칼빈은 믿는 부모들의 유아들 또는 단지 한편만이 믿는 부모의 유아들은 언약 관계에 근거하여 세례를 받는다고 말한다<기독교 강요 제4권 16:6,15>. 16 세기와 17 세기의 개혁파 신학자 대부분은 이와 같은 칼빈의 견해에 뜻을 같이 한다. 그들은 신자의 자녀들이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말하는 자격이란 <그들이 언약 안에 있기 때문이며 중생뿐만 아니라 칭의와 새롭게 하시고 성화시키는 성령의 감화 등 모든 복들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풍부한 약속의 후사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자들 중에는 이와 같은 논리에 만족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세례가 약속의 인<印> 침, 곧 모든 언약상의 약속 이상의 것이며 미래의 선<善>에 대한 인<印> 침임과 동시에 현재의 영적인 소유에 대한 인 침임을 강조하였다. 유아 세례에 대한 논쟁은 19 세기말과 20세기 초에 네델란드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그들은 아직도 분명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 네델란드 지역은 아직도 알미니우스주의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한편 카이퍼<Kuyper> 박사에 의하여 세례는 가정적 중생<presumptive regeneration>에 근거하여 유아들에게 시행된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 견해는 오랫동안 유아 세례에 대한 근거로 인정받았으나, 역시 만족할만한 것이 아니라는 지적을 받았다. 카이퍼 박사의 제자인 호닉<Honig> 박사는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우리는 가정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과 섭리에 근거하여 신자의 자녀에게 세례를 시여한다. 신자들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입각하여 세례를 받아야한다. -Handbook van de Gereformeerde Dogmatiek, p.655>

C. 유아 세례의 역사적 근거

월<Wall>은 그의 저서 <유아 세례의 역사-History of Infant Baptism>에서 개종자의 세례에서는 개종자의 자녀들이 부모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고 증거 한다. 그러나 에더사임<Edersheim>은 이 점에 대하여 반대한다.<Life and Times of Jesus the Messiah, II, p. 746> 그러나 종교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개종자들의 세례에 그의 자녀들이 포함되었음이 분명하게 증거 되어지고 있다. 유아 세례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인 언급은 2 세기 후반의 저서들을 통하여 나타난다. 유아 세례에 대한 언급은 이레네우스<Ireneus>의 저서를 통하여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중생되는 모든 사람들, 즉 영아들과 소아들, 소년들, 청소년들과 노인들을 자신을 방편으로 하여 구원하려고 오셨다.-Adv. Haereses II, 22,4> 이러한 기록이 세례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신학자들은 그의 이 기록 속에서 당시에 유아 세례가 시행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왜냐 하면 초기의 교부들은 세례를 중생과 밀접하게 연관시켜 <세례> 대신에 <중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유아 세례가 2 세기 후반부에 일반적으로 시행되었다는 사실은 터툴리안과 오리겐의 저서들을 통하여 확인된다. 터툴리안은 유아 세례를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오리겐은 찬성하였다. 오리겐은 유아 세례가 사도들에 의하여 세워진 전통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는 사도들에게서 유아들에게까지 세례를 주라는 전통<명령>을 받았다.-Comm. in Epist .ad Romanos, lib V> 칼타고 회의<The Council of Carthage, A.D.253>는 유아 세례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단순히 그들이 생후 8일 이전에 세례를 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만을 논의하였다. 2 세기 이래로 유아 세례는 때때로 그 실행에 있어서는 소홀함이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시행되어져왔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어거스틴은 유아 세례가 사도의 권위로서 제정된 것이라는 교회 회의의 공식적인 결정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아 세례가 보편적으로 시행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유아 세례는 재세례파가 등장하여 그것을 반대할 때까지 아무런 이의 없이 합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② 유아 세례의 성경적 근거

성경에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명시적인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분명한 언급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유아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은 자료를 통하여 증거하고 있다.

A. 아브라함의 언약은 주로 영적인 언약이다. 그러나 이 언약은 국가적 성격도 아울러 띠고 있다. 이 영적인 언약의 표징과 인침은 할례이다. 이 언약을 세 개의 다른 언약들 가운데 두 개를 구성하는 것으로 나누는 침례교의 방식은 타당성이 없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몇 차례에 걸쳐서 언급하고 있으나, 그것을 언제나 단일한 언약으로 말한다<출2:24> <레26:42> <왕하13:23> <대상16:16> <시105:9>. 이러한 규칙에는 예외가 없다. 이 언약의 영적인 성격은 이 언약의 약속에 대한 신약의 해석 방식에서 입증된다<롬4:16-18> <고후6:16-18> <갈3:8,9,14,16> <히8:10;11:9,10,13>. 그리고 할례가 명백히 영적인 의미를 가진 의식<신10:16;30:6> <렘4:4;9:25-26> <행15:1> <롬2:26-29;4:11> <빌3:2>이었다는 사실과, 언약의 약속이 복음<갈3:8>으로까지 불렸다는 사실에서 또한 추정된다.

B. 이 언약은 지금도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는 것으로서 현 시대의 <새 언약>과 본질로서 동일한 것이다. 두 시대 사이의 연속성과 통일성은 중보자가 동일하다는 점에서<행4:12;10:43;15:10,11> <갈3:16> <딤전2:5-6> <벧전1:9-12>, 그리고 믿음이 또한 동일하다는 점에서<창15:6> <시32:10> <행10:43> <롬4:3> <히2:4> <히11장>, 은혜의 복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곧 칭의<시32:1,2,5> <사1:18> <롬4:9> <갈3:6> 중생<신30:6> <시51:10>, 영적인 은사들<사40:31> <욜2:28,32> <행2:17-21>, 영생<출3:6> <히4:9;11:10> 등등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입증된다.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 날 회개하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향하여 있을 것이라고 선포하며<행2 : 39>, 바울 사도는<롬4 : 13-18> <갈3 : 13-18>에서 율법의 수여가 약속을 폐하지 못하므로 약속은 새 시대 <신약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선포한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기자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맹세로 확증된 것이므로 신약의 신자들은 이 약속이 변함이 없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받게 된다고 증거 한다<히6:13-18>.

C. 유아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언약의 유익을 나누어가졌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할례를 상징적인 것으로 받았다. 성경에 따르면 언약은 분명히 유기적<有機的>인 개념으로서 언약의 실현은 유기적이고 역사적인 과정을 따라 이루어진다. 이러한 국민적 개념은 구약 시대에는 매우 보편적인 것 이었는데 놀라운 사실은 이 개념이 이스라엘 국가가 그 목적을 이루었을 때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언약이 이른바 영화<靈化>되어 신약 시대로 전이 된 후,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들도 나라<國家>라는 개념으로 표현되었다<마21:43> <롬9:25-26> <고후6:16> <딛2:14> <벧전2:9>. 유아들은 옛 세대에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중요한 일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언약이 갱신될 때에도 언제나 동석했으며<신29:10,13> <수8:35> <대하20:13>, 이스라엘의 회중 안에서 자리를 차지했으며, 종교적인 회중에도 동석했다<대하20:13> <욜2:16>. 한편 <사54:13> <렘31:34> <욜2:28>에 나타난 풍부한 약속에 근거해 볼 때, 이 어린이들에게 주어진 특권이 신약 시대에 이르러 감소되었다든지, 또는 교회 안에서 그들이 차지할 위치가 없다든지 하는 개념은 있을 수없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도 이들을 배제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마19:14> <행2:39> <고전7:14>.

D. 새 시대<신약 시대>에 들어오면서 할례는 신적인 권위에 의하여 세례로 대치되었다. 은혜 언약에 들어오는 상징과 인의 역할을 이제는 세례가 담당하게 된 것이다. 성경은 할례가 그 자체로서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한다<행15:1-2;21:21><갈2:3-5;5:2-6;6:12,13,15>. 세례가 할례의 자리를 대신 이어주지 않았다면 신약에서는 언약에 입문하는 의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할례를 세례로 대치하셨다<마28:19-20> <막16:15-16>.
세례와 할례의 영적인 의미는 같은 것이다. 할례가 죄를 끊고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을 지칭하듯이<신10:16;30:6> <렘4:4;9:25,26> <겔44:7,9>, 세례도 죄 씻음<행2:38> <벧전3:21> <딛3:5>과 영적인 갱신을 상징한다<롬6:4> <골2:11,12>. 특히 <골2:11-12> 본문은 할례를 세례와 연관시키면서 그리스도의 할례<곧 육신의 할례가 상징하는 마음의 할례>는 세례<곧 세례가 상징하는 내용>에 의하여 성취되었다고 가르친다<참조-갈3:27,29>. 그러나 어린이들이 옛 시대의 언약의 표지와 인을 받았다면, 그들은 분명히 새 시대에서도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구약의 경건한 자들은 더 풍성하고 더 완전한 시대를 대망하도록 약속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린이들을 언약으로부터 제외시키려면 명시적인 성경적 증거가 필요한데 성경은 오히려 반대로 증거하고 있다<마19:14> <행2:39> <고전7:14>.

③ 유아 세례에 대한 반대.

침례교파를 비롯한 유아 세례 반대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유아 세례를 반대한다.

A. 할례가 세례를 예표 한 것이 아니었다.

할례는 단순히 육체적이고 예표적인 의식이었으므로 할례, 그 자체는 자연적으로 없어질 운명이었다. 따라서 세례를 할례의 위치에 놓는 것은 단지 육체적인 의식을 계속하는 것이 된다. 그와 같은 육체적인 의식은 신약의 교회 안에서는 합법적인 자리가 없다. 예수께서 제정하신 세례는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다만 성령의 세례만이 교회 안에서 차지할 자리가 있을 뿐이다. 사도행전은 물세례로부터 성령 세례로 전이 하는 과정을 증거하고 있다.

****

이러한 주장은 세대주의자들인 불링거<Bullinger>, 오,헤어<O,Hair>등에 의하여 제기된 주장이다. 이들의 주장은 사실상 유아 세례 뿐만 아니라 성인 세례까지도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이 변증되어진다.

a. 할례는 하나님의 은혜 언약의 보증이며 인침으로서 세례에 대한 예표였으며, 따라서 만약에 세례로 완성되지 않았다면 폐지되지 아니하고, 여전히 교회에 존재하는 성결의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할례는 피의 의식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의 희생 제사를 완성하심에 따라 피로부터 자유 함과 동시에, 영원하고 완전한 성결의식인 세례로 완성되어지게 되어 있었다. 즉 할례는 사라지거나 폐지된 것이 아니라 세례로 완성되어진 것이다.

b. 할례를 단순한 육적인 의식으로 간주하고 세례<특히 성령 세례>를 영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서, 할례와 세례를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으로 대립시키는 것은, 구약 시대를 육적인 시대로 간주하고 신약 시대를 영적인 시대로 간주하여, 두 시대를 육적인 시대와 영적인 시대로 대립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대립은 구약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인류 구속역사는 신약 시대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시작된 것으로서 구약 시대에도 당연히 포함된다. 따라서 구약 시대의 할례는 단순히 육체적인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 성결의식이었다. 즉 이방인<선택 되지 아니한 자들>과 신분적으로 구별되는 법적, 행정적 정결의식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영적인 성결의식이었던 것이다. 신약 시대의 세례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에 대한 법적, 행정적 구별 의식임과 동시에 또한 영적인 성결의식이며, 또한 하나님을 향한 의무와 책임에 대한 순종의 서약인 것과 같이, 할례도 동일한 효력과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c. 사도행전이 물세례로부터 성령 세례로 전이하는 과정을 증거하고 있다는 저들의 주장은 참으로 비성경적이다.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세례가 종료되어지고 성령 세례가 새로이 등장하는 것이 되는바,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무지한 비신학적 수준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여 주신 세례가 사도들의 시대에서 이미 종료되어진다는 발상 자체가 저들의 신학적 무식함을 자증하고 있다.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지극히 짧은 기간 동안의 임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것으로서 임시적일 수가 없는 영원성을 갖는다. 이러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 날까지 세례를 시행하라고 명령하신 것<마28 : 19-20>을 통하여 증거 되어진다. 그리고 사도행전 어느 곳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가 종료되어진다는 증거가 제시되지 않는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물세례라고 말하는데 여기에서도 자신들의 신학적 무식함을 스스로 폭로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물세례가 아니다. 물은 다만 세례 시에 사용되어지는 의식적 도구에 불과하다. 그것은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여되어지는 하나님의 <주권적>세례인 것이다. 세례가 신성하고 거룩한 성례가 되는 것은 그것이 물세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례이기 때문이다.

B. 성경에 유아들이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명시되지 않았다.

성경에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라는 것이 명시되지 않았다. 따라서 유아들에게 세례를 시행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이다.

****

성경이 유아 세례에 대하여 명시한 바가 없다는 이유로 유아 세례를 시행하는 것이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저들은 오히려 성경에 유아 세례를 주지 말라는 것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근거로 하는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실제로 성경은 유아 세례 금지를 유추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유아 세례 찬성을 유추 할 수 있는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구약의 할례가 생후 8일 만에 시행되어진 것이 그 좋은 증거이다.

C. 성경에 유아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전례가 없다.

신약의 사도 시대에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 램버트<Lambert> 박사는 모든 가능한 증거들을 면밀히 검토한 후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신약의 증거들을 종합해보면 적어도 유아 세례는 사도 시대에 일반적으로 유행하던 관습이 아니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The Sacraments in the New Testament, p. 204> 이러한 신학적 유추는 당시의 유대교 풍습<어린이를 과소평가하는>을 통해서도 가능한 것이다.

****

신약 성경에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전례가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저들의 주장은 결국 저들의 성경을 보는 안목이 얼마나 좁은가? 하는 것을 자증한다. 우선 저들은 신약 성경에 유아들의 세례가 제외되었다는 사례가 명시되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하는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도처에서 유아세례의 당위성들을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삭개오의 가정적 구원을 선포했을 때<눅19 : 9>와 사도 베드로가 가정적 구원을 선포했을 때<행2 : 39>에 그 선포에서 어린 아이들이 제외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비상식적이다. 왜냐 하면 유대 사회가 어린 아이들을 과소평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종교적인 차원에서는 어린 아이들을 전혀 제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할례의식과 자녀들에 대한 종교적 교육을 통하여 분명하게 입증되어진다.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은 가족적 세례를 증거하고 있는데<행16 : 15, 33> <고전1 : 16>, 이 가족적 세례에서 어린 아이들이 제외되었을 것이라는 개념은 그들의 종교적 삶에 근거할 때에 전혀 비상식적이다.

D. 유아들에게는 세례의 제도를 이해할만한 능력이나 믿음이 없다.

유아들에게는 세례의 제도를 이해할 만한 능력이나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세례를 시여할 수없다

****

유아들에게 세례의 제도를 이해할 만한 능력이나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세례를 시여할 수없다는 주장은 궤변에 불과하다. 왜냐 하면 성인들의 세례 역시 세례의 제도를 이해할만한 능력이나 믿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성인들의 세례 문답 시에 그들이 질문에 충실하고 분명하게 대답했다고 해서 그들에게 정말로 세례의 제도를 이해할만한 능력이나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인정하고 세례를 받는 성인들 중에도 세례의 제도를 분명하게 이해할만한 능력과 구원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 결여되어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이유로 유아 세례가 거부되어져야만 한다면 성인 세례도 신중을 기하여야한다.

E. 유아들에게는 과연 중생하여 세례의 상징하는 은혜가 있는지 없는지를 분간할 수없다.

유아들이 세례를 받은 후에 그들이 성장하면서 과연 중생하여 세례의 상징하는 은혜대로 신앙적 삶을 살고 있는지를 분간할 수없다.

****

이러한 주장 역시 비판받아 마땅하다. 유아들에게 과연 중생하여 세례의 상징하는 은혜가 존재하는지를 분간할 수없기 때문에 세례를 시여할 수없다면, 그렇다면 과연 성인들에게서는 그것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분간할 수 있다는 것인가? 교회에서 세례를 시여하기 전에 하는 문답은 사실상 외형적인 것이다. 물론 응답자는 진심으로 대답하겠지만, 그것은 어떤 경우에 일시적일 수도 있으며 형식적일 수도 있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모양으로 중생의 은혜여부를 확인한다는 것은 비 진리적인 것이다. 사람에게 중생의 은혜가 있는지 없는지를 분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사람에게는 그것을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F. 유아들에게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지적인 신앙고백과 참다운 회개가 없다.

유아들은 세례를 받을 때에 세례를 받을만한 지적인 신앙고백과 참다운 회개를 하지 못한다.

****

이 주장 역시 비성경적이고 비기독교적인 주장이다. 저들은 부패로 인하여 오염된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대하여 참으로 무지하다. 비록 성인이라 할지라도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앙을 소유할만한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며 인간은 오히려 그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조차도 때로는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지적인 신앙고백과 온전하고 참다운 회개가 세례를 받는 전제 조건이라면 우리는 사실상 세례를 받을 수없으며, 그러한 지적인 신앙고백과 온전한 회개를 통하여 세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그 세례가 무효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일생 동안 수없이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세례가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거룩하고 신성한 성례의식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인간의 불완전성 때문이다.

G. 유아 세례를 받은 자들이 장성하여 참다운 기독교인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유아 세례를 받은 자들 중에 장성하여 온전한 신앙적 삶을 살지 않는 자들이 많다.

****

이 주장 역시 중대한 모순을 억지로 외면하고 있다. 교회가 유아 세례를 시여함에 있어서 부모의 신앙이 요구되고 또한 부모의 신앙적 교육이 전제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유아 세례의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인간의 장래는 <비록 성인이라 할지라도> 아무도 보장할 수없으며, 특히 그가 과연 하나님의 자녀인가? 하는 것은 비록 부모라 할지라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례를 받고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 중에도 교회를 떠나 우상 숭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택한 자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시여하는 것은 사실상 그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하고 시여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다만 수세자가 하나님의 자녀일 것이라는 가정 하에서 그에게 세례를 시여하는 것이다.

④ 유아 세례에 대한 신학적 정립

성인 세례가 그들의 신앙고백이나 회개를 전제 조건으로 하여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시행되듯이, 유아 세례도 부모의 신앙이나 그들의 신앙적 교육을 전제로 하여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시행되어진다. 만약에 세례가 신앙고백과 회개를 전제로 하여 시여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무관한 것이 되는 것이며, 그것은 결국하나님과 그들의 관계가 언약과 무관한 것이 된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은 보장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보장되고 인 침 받지 못한 구원은 결코 확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확실한 보장과 인침을 받은 것이며, 따라서 구원의 표징인 세례는 하나님의 언약을 근거로 하여 시여됨으로서 거룩하고 신성한 성례의식인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유아 세례라고 하여 그 본질에 어떤 차등이 있을 수없다. 유아 세례는 성인 세례와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나 효력 면에 있어서 전혀 차등 없이 동등하며, 그 의의에 있어서도 물론 당연히 동등하다.

8) 세례의 오류.

(1) 침례교파의 오직 침례.

침례교파들은 다른 교파와 입장을 달리하여 수세 자를 물에 완전히 침수시켰다가 일으키는 것이 유일한 세례의 양식이라고 주장한다. 저들은 아예 세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침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다른 교파의 세례를 약식 침례<또는 약식 세례>라고 말하고 자신들의 침례만을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저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옹립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한다.

① 용어의 문제

저들은 용어 자체가 세례가 아니라 침례라고 주장한다. 저들의 이러한 주장은 성경에 나오는 <세례를 준다>는 용어가 <βαπτω> 또는 <βαπτιζω>로서 그것은 곧 <담그다>라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βαπτιζω>>라는 말은 <βαπτω>의 강조형 또는 반복형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용법에서 이 단어는 반드시 구별되어 사용되지는 않는다. <βαπτω>는 종종 구약에서 사용되지만 신약에서는 단지 4회만 나온다<눅16:24> <요13:26> <계19:13>. 그러나 신약의 이 용어들은 기독교의 세례를 의미하지 않는다. 침례교파는 한때 이 동사가 오직 <담그다-dip>라는 의미로만 사용되어진다고 주장하였지만, 근래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주장을 할 수없게 되었다. 왜냐 하면 그들의 최대 권위자 중의 한 사람인 칼손<Carson>이, 이 용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기 때문이다.

<이 용어는 '담그다' 라는 의미 외에 부차적인 의미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즉 염색하다, 물들이다(dye)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담가서 물들이다-dye by dipping) 또는 (어떤 방식으로 물들이다-dye in any manner)를 의미하게 되었고, 그 경우에 이 단어는 양식을 표현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기 때문이다-Carson Baptism in its Mode and Subjects, pp.44 ff.>

한편 <βαπτιζω>라는 용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제정하실 때 사용한 용어로서 성경에 76회 나온다. 학자들은 <βαπτιζω>라는 용어가 <βαπτω>의 기본적인 의미에서 유래되었는가? 아니면 부차적인 의미에서 유래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큰 관심을 갖는다. 칼손 박사는 이 용어가 <담그다>라는 의미로서 <βαπτω>에서 유래되고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나는 어근 (βαπτω)가 두 가지 의미 즉 담그다 또는 물들이다 만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단 한 가지 의미만을 주장해왔다. 이 단어는 어근의 기본적인 의미에 근거되었고 결코 부차적인 의미를 인정하지 않았다...... 내 입장은 이 단어가 언제나 담그다를 의미하며 결코 양식(mode) 이외의 어떤 것을 결코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Op. cit., p. 55>

그러나 그 단어들은 고전적 헬라어와 신약적 헬라어에서 칼손 박사의 주장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이 분야에서 가장 박학<博學>한 학자라고 할 수 있는 게일<Gale> 박사는 칼손 박사의 입장을 지지하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결국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 하면 칼손 박사의 주장은 역사적으로 전혀 근거 없는 것이었으며 오히려 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칼손 박사의 허구적인 주장을 입증하는 형편이 되었기 때문이다. 윌손<Wilson> 박사는 자신의 탁월한 저서인 <유아 세례-Infant Baptism>에서 칼손 박사의 저서에 부분적으로 답변하면서 게일 박사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아마도(βαπτιζω)라는 말은 어떤 것을 반드시 물 속에 집어넣는 행위를 나타내지는 않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것이 물속에 잠기든지 아니면 그 위를 물이 덮던지 간에 그것은 사실상 대단한 문제는 아니다. 실로 물 속에 넣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고 가장 통상적인 방법이므로 그렇게 표현하게 되지만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 윌손이 연구 조사한 헬라어 용법에 의하면 세례가 다양한 방법으로 시행되어질 수 있음이 입증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세례는 재료로 그 대상을 둘러싸게 하거나, 또는 재료가 물인 경우에는 그 대상을 물에 담그거나 물을 붓거나, 물로 덮거나, 어떠한 방법으로 행했던지 간에, 헬라어 용법으로는 그 어떤 방식들이 합당한 세례로 인정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이어서 <βαπτιζω>가 신약에서 언제나 침수를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어진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βαπτιζω>가 오직 담근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또 다른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서도 입증 된다-참조<Armstrong..., The Doctring of Baptism><Seiss....The Baptist System Examined><Ayres....Christian Baptism><HIBBARD....Christian Baptism>

<βαπτω>와 <βαπτιζω>는 씻다, 목욕하다, 씻음으로서 정결하게 하다, 등등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된다. 뿐만 아니라 정결의 의식이 때로는 뿌림을 통하여 이루어지기도 했다는 사실이 성경을 통하여 입증되고 있다<민8:7;19:13,18,19,20> <시51:7> <겔36:25> <히9:10>.

****
이와 같이 성경이 <βαπτω>와 <βαπτιζω>가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어졌음을 증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용어들이 오직 완전 침수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면서, 오직 침례만을 주장하는 침례 교파들은 비난 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성경을 해석할 능력을 스스로 포기하였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아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마저 거부하는 악행을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② 요한의 세례와 사도들의 세례가 오직 침수였다는 주장.

침례교파는 요한의 세례와 사도들의 세례가 모두 침례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것은 전혀 근거 없는 억지 주장이며 비성경적이다. 우리는 침례 교파들의 어리석은 주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질문할 것이다.

A.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시행하였을 때에 그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로 침례를 행할 수 있었겠는가?

B.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듣고 하루에 삼천 명이 세례를 받았을 때
<행2: 41> 과연 그 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침례를 받을 수 있었겠는가?

C. 성경의 어떤 구절에 완전히 침수하는 침례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있었는가?

****

성경이 증거 하는 세례의 시행<행9:18;10:47-48;16:22-33>들은 그것이 침례일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정황들은 침례<완전 침수>보다는 오히려 세례<뿌리거나, 붓거나, 씻음>일 수 있는 가능성을 더욱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오직 침례였다고 주장하는 침례 교파들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책망 받아 마땅하다. 왜냐 하면 그들의 주장은 하나님을 위한 신학적<진리>의 사수가 아니라 자신들의 주장을 사수하기 위한 아집과 궤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③ 신학적 의미.

오직 침례만을 고집하는 침례 교파들은 오직 침례의 당위성을 침례의 신학적 의미를 통하여 성립시키고자 한다. 저들은 물 속에 완전히 잠기었다가 나오는 것을 죽음과 부활에 연관시킨다. 즉 물에 완전히 잠기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다시 나오는 것은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세 자가 물에 완전히 잠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죽는 것이요, 수세 자가 물 속에서 다시 나오는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사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학적 주장 외에 저들이 주장하는 오직 침례에 대한 또 다른 신학적 주장이 있다. 그것은 정결하게 씻는 것은 완전침수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

우리는 이 같은 저들의 주장에 우선 크게 한번 웃고자 한다. 물 속에 완전히 잠기었다가 나오는 것이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는 것은 문학적 표현은 될 수 있겠으나, 그것이 신학적 원리가 될 수는 없다.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그런 식으로 주장하려 한다면 차라리 땅속에 묻었다가 꺼내는 형식의 의식을 행하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을 것이며, 아예 십자가에 매달았다가 내려오게 하는 형식의 의식을 행하는 것이 더욱 실감나는 것이 될 것이다. 또한 오직 완전침수만이 정결하게 씻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도 참으로 전 근대적인 발상이다. 옛날에는 물 속에 완전히 잠기는 식의 목욕<그러나 얼굴은 나와 있었다.>을 즐겨 행하였음으로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있겠지만 깨끗하게 씻는 다는 것은 반드시 물속에 완전하게 잠겨야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침례교파의 만행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세례의 신학적 진정성을 정립하기 위하여, 오직 침례를 고집하는 저들의 악행을 성경에 근거하여 비판하고자 한다. 저들은 타 교파의 세례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다시 정식으로 침례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타 교단에서 입교한 자들에게 침례를 시행하고 있다. 그것은 분명한 재 세례 행위이다. 따라서 우리는 저들의 재 세례 행위에 대한 것을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근거로 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 한다.

1. 재 세례 행위에 대한 역사적 사건들

재 세례 문제는 이미 역사적으로 비판되어지고 정죄되어진 것이었다. 우리는 그 역사적 사례 몇 가지를 다음과 같이 고찰하기로 한다.

1) 노바티안<Novatianus-A.D200?-258?>의 사건

A.D.3 세기경 로마의 황제 데시우스<Decius-재위249-251>의 박해가 끝났을 때, 그 엄청난 박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 사람들은 <고백자-Confessor>라는 명예스러운 이름을 얻은 반면에,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신앙을 포기한 자들은 <배교자-apostat> 혹은 <변절자-lapsed>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데시우스 황제의 박해가 끝났을 때에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신앙을 포기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를 크게 후회하고 다시 교회에 들어오기를 희망하였다. 당시에 그 문제를 위임 맡아 처리하게 된 책임자는 칼타고의 감독이었던 씨프리안<Cyprianus>과 고백자의 이름을 얻은 노바티안<Novatianus>이었다. 씨프리안은 교회의 특성과 세례의 본래적 의의를 근거로 하여 그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교회에 복귀시켰다. 그러나 노바티안은 그것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노바티안은 변절자들이 교회에 다시 들어오려면 마땅히 회개한 후에 다시 세례를 받아야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세례 문제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일어났는데, 결국은 노바티안이 패하였다. 당시의 로마 감독이었던 코넬리우스<Corneilus>는 노바티안을 강력하게 비판하였고, 노바티안은 이에 맞서서 대항하였지만 결국은 정죄 당하였다. 노바티안은 이에 불만을 품어 추종자들을 이끌고 교회를 떠났다. 이 때에 교회 회의의 결정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여된 세례는 한번으로 충분하며 따라서 변절자들은 회개하는 것으로 족하다.>

2) 도나투스<Donations> 사건

A.D.4 세기경 당시에 칼타고의 감독직에 선출된 카이실리안<Caecilianius>이 감독직 안수를 받을 때, 세 명의 안수자였던 감독들 중에 하나가 변절자였기 때문에, 그의 감독직이 무효라는 주장이 도나투스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도나투스는 변절자 감독이 다시 세례를 받은 후에 카이실리안을 다시 안수하여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도나투스의 주장은 무시되었고 변절자 감독은 다시 세례를 받지 않았으며 카이실리안도 감독직을 그대로 수행하였다. 이 때의 교회 회의 결정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수여된 세례는 단 한번으로 영원히 유효 하며, 따라서 변절자 감독은 개인적으로 회개하면 된다.

3) 디오니시우스<Dionysius> 사건

디오니시우스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으로 재직할 때에 어떤 성도가 찾아와 자신이 이단자에게 세례를 받은 것을 뒤늦게 알았다고 하면서 다시 세례를 베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 때에 디오니시우스는 그에게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었는데, 그 성도는 자기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대답하였다. 디오니시우스는 다시 그에게 지금까지 성찬에 참여했느냐고 물었고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디오니시우스는 그에게 <세례는 세례를 시행한 자에게서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고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향을 받는 것이며, 또한 지금까지 성찬에 참여하였으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어 돌려보내었다. 물론 다시 세례를 베풀어주지 않았음은 두말 할여지도 없다.

4) 16세기 개혁자들의 사건

16세기 종교 개혁의 와중에서 로마 카토릭에 의하여 세례 받은 것은 이단자들에 의하여 받은 세례이므로 무효이기 때문에 다시 세례를 받아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그레벨<Conrad Grebel>, 만즈<Felix Manz>, 홉마이엘<Balthasanius Hubnaier> 등등을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과격파 개혁주의자들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모든 개혁주의자들로부터 단호하게 거부되었다. 특히 쯔윙글리는 그들과의 공개 토론을 벌여 그들의 비 진리적 신학 사상을 신랄하게 공격하였으며, 시정부로 하여금 재 세례를 주고받는 자들에게 엄벌에 처한다는 경고를 선포하게 하였다.

****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재 세례에 대한 문제는 기독교 역사 속에 여러 차례 제기되었으나, 그때마다 한결같이 거부되어졌고 무시되어졌으며 오히려 이단자로 정죄되었다. 재 세례에 대한 주장이 무시되고 정죄된 이유는 언제나 같은 논리였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수여된 세례는 수여자의 신학과 신앙 여부에 어떤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도구로 사용하여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유효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거룩한 진리는 다음과 같은 진리를 또한 함축하게 된다. 즉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세례를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잘못하셨다고 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곧 하나님의 완전성을 무시하고 거부하고 파괴하는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수여하신 세례를 잘못된 것이라고 하여 다시 침례를 주는 행위는 감히 하나님의 역사를 부정하고 무시하고 거부하는 악행으로서 주는 자나, 받는 자 모두가 다함께 용서 받을 수 없는 대죄임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2) 세례의 양식에 대한 성경의 증거

성경은 세례가 오직 완전 침수와 같은 침례의 형식으로 시행되어져야 한다는 어떤 근거를 제시하지 않으며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진행된 역사적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신구약 성경 어느 곳에서도 침례의 당위성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오직 침례만을 고집하는 침례교파는 사실상 신학적으로 대단히 무지한 자들이며 신학교에서 교회 역사조차 살펴보지 아니한 무식한 자들이라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더욱 자신들의 재침례 행위가 하나님 앞에 어떤 대죄를 범하는 것인지조차도 가늠하지 못하는 자들이 무슨 염치로 신학자 또는 목사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저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무지와 악행에 대한 철저한 회개부터 한 후에 남을 가르쳐야할 것이다.

****

우리는 침례교파의 오직 침례에 대한 주장 중에 참으로 웃지 않을 수 없는 주장을 접하게 된다. 1988년 침례교 목사<김충기>는 재 침례의 당위성을 <행19:1-7>을 근거로 하여 제시 하였다. 사도들이 그때에 잘못된 세례에 대하여 재 침례를 시행하였으므로 자신들의 재 침례는 당연히 성경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저들의 주장에 대하여 일단 웃지 않을 수없으며 저들의 어리석음과 신학적 무지 앞에 저들을 불쌍하게 보지 않을 수없음을 고백한다. <행19:1-7>에 나오는 사건은 잘못된 세례에 대한 재 침례가 아니라 아직 요한의 세례 밖에 모르는 자들에게 정상적인 세례를 시여한 것으로서 재 침례를 시행한 것이 아니라, 첫 세례를 시여한 것이다. 저들이 억지를 부린다는 사실은 저들의 주장에서도 증명된다. 저들은 본래부터 요한의 세례를 침례로 규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의 세례를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면 요한의 세례가 어떤 이유에서 잘못된 것인지를 먼저 밝혀야 할 것이다. 즉 그것이 침례가 아니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무엇 때문에 잘못된 것인지를 밝혀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그것을 밝힐 수가 없다. 왜냐 하면 그것을 밝힐 만한 신학적 지식과 경륜이 그들에게 있었다면 그들은 결코 <행19:1-7>을 근거로 하여 자신들의 재 침례의 당위성을 설명하려다가 오히려 자신들의 무지를 들어내는 망신을 자초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행19:1-7>은 결코 저들의 재침례에 대한 당위성을 보증해주지 않는다. 그 성경 구절은 신학자가 아닌 일반 성도들이 보아도, 그리고 신학적 차원에서 깊이 상고해 볼 필요도 없이 간단한 내용을 증거하고 있다. 즉 ,아직 세례를 받지 아니한 <요한의 회개의 세례만 받은> 자들에게 세례를 시여한 사건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재침례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으니 그러고도 망신을 안 당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저 무식하고 무례한 재침례자들을 향하여 회개할 것을 선지자적 차원에서 선포하는 것이다.

5. 성만찬<성찬>

1) 구약시대에 있는 성만찬의 전형

구약 시대에 기독교 세례의 전형인 할례의식이 있었듯이 또한 기독교 성찬의 전형인 유월절의식이 구약 시대에 있었다. 물론 유월절의식 이외에도 제사를 마치고 제사 음식을 나누어 먹는 관습들이 있었지만, 특히 유월절 의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찬의식에 대한 예표였고 전형이었다. 유월절 의식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기 직전에 하나님의 제정하심에 따라 시행되어진 식사<食事>였다. 그러나 유월절의 본래적 의의는 식사의 범위를 초월하는 제사의식이었다. 유월절 의식은 특히 최초의 속죄의 제사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고 완전한 대속죄제의 예표였고 전형이었다.<출12 : 27 ; 34 : 25>.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민족적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유월절 의식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고난과 그 고난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죄로 인한 고통과 그 죄로부터의 영원하고 완전한 자유를 예표 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 식사와 관련하여 성만찬을 제정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월절 의식의 요소들을 사용함으로서 유월절 의식을 성만찬 의식으로 자연스럽게 승화시켰다.

2) 성만찬에 대한 역사적 교리

(1) 종교 개혁 이전.

사도 시대에도 성찬의 거행에는 애찬이 뒤따랐다. 이때에는 애찬을 위하여 성도들이 음식을 준비해왔는데, 이 애찬이 처음에는 경건하고 아름다운 신앙적 애찬이었으나 나중에는 변질되어 성도들 간에 위화감을 주는 것이 되었으므로 바울 사도로부터 책망을 듣게 되었다<고전11 : 20-22>. 초대 교회시대에 애찬을 위하여 가져온 음식들은 봉헌물과 희생 제물의 성격을 갖게 되었고, 사제가 감사의 기도를 드림으로서 이 봉헌물을 축복하였다. 이러한 관례 속에서 성찬은 사제가 드리는 희생제사로 정착되어져갔고, 성찬 시에 사용되는 요소들은 사제의 감사 기도를 통하여 거룩한 것으로 성별되었다. 일부 초대 교부들<오리겐, 바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은 성례의 상징적인<영적인>개념을 유지하려 했고, 또 다른 교부들<시릴, 닛사의 그레고리, 크리소스톰>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모종의 방법을 통하여 성례의 빵과 포도주에 연합되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성찬론의 실제적인 발전을 오랫동안 지연시켰다. 그는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말하면서도 상징과 상징이 의미하는 것을 구별하였고 본질의 변화를 믿지 않았다. 그는 악인은 비록 빵과 포도주를 받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고 성찬의 기념적 성격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중세 시대에 이르러 어거스틴의 기념설은 점차 화체설로 대체되었다. 주후 818년에 파스카시우스 라드베르투스<Paschasius Radbertus>가 정식으로 화체설을 제기하였으나, 라바누스 마우루스<Rabanus Maurus>, 와라트람누스<Ratramnus>에 의하여 강한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이 이론은 아직까지 화체설이라는 정식 명칭으로는 정립되지 않았다. 이 교리를 화체설이라는 명칭으로 공식화 한 것은 힐데베르트<Hildebert of Tours, 1134>였다. 11 세기에 투어의 베렌가리우스<Berenger of Tours>, 랑프란크<Lanfranc> 사이에 이 문제로 인한 심각한 논쟁이 일어났는데 랑프란크는 <그리스도의 몸 그 자체가 사제의 손에 쥐어져서 쪼갬을 당하고 신자들의 이 사이에서 씹힘을 당한다>고 화체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랑프란크의 주장은 거부되었고 화체설이 성찬의 교리로 받아들여졌다. 힐데베르트는 이 교리에 화체설이라는 명칭을 부여하였고, 이 명칭은 공식 명칭으로 인정되었다. 이 교리는 1215년 제4차 라테란<Lateran>회의에서 정식으로 채용되었고, 트렌트 회의를 통하여 최종적으로 공식화되었다. 트렌트 회의는 화체설을 여덟 장과 열 한 규범으로 공식화하였다. 화체설<化體說-transubstantiation>이란 성찬 시에 빵과 포도주가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것으로서 그 요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되고 실재적이고 본질적으로 성례에 임재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계신다는 사실은 그가 본질적이고 성례적으로 몇몇 장소들에 동시적으로 임재 하셨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봉헌의 말씀들에 의하여 떡과 포도주의 실체(substance)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 온전하신 그리스도는 각 미사용 요품들(빵과 포도주)아래 또한 각 요품들 중의 각 조각들 아래 임재 한다. 성체의 한 조각을 먹는 자는 각기 그리스도 전체를 받는다. 그는 성체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communicant)이 요품들을 받기 이전에도 그것들에 임재 하신다.>

(2) 종교 개혁 동안과 그 이후.

종교 개혁자들은 한결같이 로마 카톨릭의 제의적 성찬론과 화체설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성찬론은 동일하지 않았다. 쯔윙글리는 그리스도께서 성찬 시에 육체적으로 현존하신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부인하면서 성찬 제정의 말씀을 하나의 비유적인 것으로 해석하여 성찬을 기념적인 의식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례 안에서 그리스도가 신자의 믿음에 대하여 영적으로 임재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한편 루터는 쯔윙글리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성찬을 제정한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성찬 시에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임재 하신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화체설에는 반대하였고, 따라서 공재설<Consubstantiation>을 주장하였다. 공재설은 오캄<Occam>이 자신의 저서 <제단의 성례에 관하여-De Sacramento Altaris>에서 장문<長文>으로 변증한 것으로서 그 요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성찬시에 그리스도는 빵과 포도주와 “함께, 안에, 그리고 그 밑에(in, with,andunder) 임재 하신다.>

한편 칼빈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쯔윙글리와 마찬가지로 성례 시에 그리스도께서 실체적으로 임재 한다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쯔윙글리와는 달리 성찬에서 주의 임재는 비록 영적이지만 실재적인<real> 임재임을 강조하였고, 그리스도의 임재가 영적인 <덕과 효력의 원천>이라고 주장하였다. 특히 그는 성찬을 하나의 의식으로 보지 않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로 보았으며, 또한 하나님을 향한 자녀들의 신앙고백이며 감사의 기념적인 의식으로 보았다. 반면에 소시니안 주의자들과 알미니안 주의자들, 그리고 메노나이트파<Mennonites>는 성찬이 다만 하나의 기념행사요 신앙고백 행위이며 도덕적 증진을 위한 방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아 통속적인 것으로 발전하였다. 슐라이에르막허는 성만찬이 은혜의 방편이며, 이 방편에 의하여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교제가 특별히 효과적인 방법으로 교회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그 밖에 많은 중재파 신학자들<Mediating>은 자신들이 루터파 교회에 소속하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재설을 거부하고 칼빈주의 견해를 지지한다.

3) 성만찬에 대한 성경적 명칭들

세례는 단일한 명칭이지만 성만찬은 4개의 명칭을 갖는다.

(1) 주의 만찬<성만찬-δειπνον κυιακον>

주의 만찬은 개혁주의 교회에서 가장 널리 사용하는 성찬 용어로서 <고전11:20>에서 비롯되어진다. <고전11:20-22>에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가 성찬에 애찬을 연결하여 남용하는 것을 책망하면서, 성찬시의 애찬과 일반적인 애찬<당시에는 부자들이 만찬을 개설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초대하는 관습이 있었으나, 그 만찬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기보다는 부자들의 자기과시용 잔치였다.>을 구분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여기에서 주의 만찬은 그러한 부자들의 자기과시용 잔치와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2) 주의 상<床-τραπεζα κυριου>

이 명칭은 <고전10:21>에 나오는 명칭이다. 고린도의 이방인들은 우상에게 제사를 드린 후에 둘러앉아서 제사음식을 나누어먹는 관습이 있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중에 이러한 관습에 참여하는 자들이 있었으므로 바울 사도는 그러한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바울 사도는 우상의 제사에 참여하여 그 음식을 나누어먹는 것과, 성찬 시에 애찬을 나누어 먹는 일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3) 떡을 떼는 것<κλασις του αρτου>

이 용어는 <행2:42>에 나온다. 이 용어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려할 때에 성만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애찬까지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 용어가 성찬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 명칭은 주께서 제정하신 바에 따라 떡을 뗀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다.

(4) 축사<ευχαριστια> 축복<ευλογια>

이 명칭들은 <고전10:16;11:24>에 나온다. 한편 <마26:26-27>에서도 주께서 떡을 떼 사 축복하시고, 잔을 가지고 사례하셨다는 기록이 나온다.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볼 때에 이 두 단어는 상호 교대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축복과 축사를 함께 지칭하고 있다. 축사와 축복의 잔은 일반적인 것들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다.

4) 성만찬의 제정.

(1) 성찬 제정에 관한 다양한 설명들.

성찬 제정에 관한 기록은 공관 복음서에 각각 하나씩 있으며 <고전11장>에 한번 나오는 것을 포함하여 도합 4번 나온다. 요한은 유월절의 먹는 일에 대하여 언급하지만 새로운 성례의 제정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는다. 성찬에 대한 기록들은 각각 독자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나 서로를 보완하고 있다. 성찬의 제정에 대하여 우리가 가장 주목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식사 도중에 그것을 제정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찬은 사실상 새로운 것이 아니라, 유월절 식사의식을 통하여 이미 제정되어진 것의 완성적이며 승화적인 것이었다. 어린양과 함께 먹었던 떡은 새로운 용도를 위하여 성별된 것이었다. 이 사실은 일반적으로 <축복의 잔>으로 부리는 세 번째 잔이 완성된 성례에서 두 번째 요소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이와 같이 구약의 예표적 이고 상징적 이었던 성례가 아주 자연스럽게 신약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성례로 완성되고 승화되었던 것이다.

(2) 성찬의 요소들

유월절 양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모든 피의 제사와 같이 유월절 양은 피 흘림이 죄 사함에 필요하다는 사실을 구약의 성도들에게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대속죄제를 예표하고 상징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념하는 국가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된 어린양이 출현하여 완전하고 영원한 피의 대속죄제를 드리게 되었을 때, 그것에 대한 상징과 예표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원형에게 자리를 내주고 은퇴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유월절에 먹었던 어린양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떡<예수께서 자신의 몸이라고 선언하신>으로 승화되어졌다. 어린양은 피의 제사를 의미하지만 떡은 피의 제사를 초월한다. 그것은 이제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의 제사를 종료시키는 완전한 속죄의 제사를 드릴 것이므로 더 이상 피의 제사가 요구되지 않을 상황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찬 시에 반드시 포도주를 사용할 이유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포도주를 사용하시면서 그것이 자신의 피라고 선언하셨다고 해서 성찬 시에 반드시 포도주를 사용해야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왜냐 하면 피의 의미인 어린양이 피로부터 초월한 떡으로 승화되었듯이 피를 의미하는 유월절 의식의 포도주가 이제는 피로부터 초월하는 것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도주를 사용하신 것은 그것이 피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의 보편적인 음료수가 포도주였기 때문이다. 만약에 포도주가 여전히 피의 의미를 가져야한다면 떡도 마찬지로 여전히 피의 의미를 가져야 할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당연히 일반적인 떡이 아니라 반드시 어린양이어야 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자신의 피라고 선포하셨던 의미를 붉은색의 포도주에서만 찾으려한다면, 이것이 내 몸이라고 선포하신 떡은 잘못인용 된 것이다. 그것은 어린양으로 사용되어졌어야 한다. 따라서 성찬 시에 사용하는 <잔>은 반드시 포도주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물이던 또는 다른 색의 음료수이던 관계없이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라는 사실을 명심하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영원한 대속죄제는 더 이상의 피의 제사를 종료시켰고, 따라서 피의 요소가 속성은 그대로 유지되면서도 피 없는 요소로 완성되고 승화되는 것은 이미 제정된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인 것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대속죄제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혀있던 담이 사라져버렸고, 구원의 복이 온 세상에 적용되었다. 따라서 민족적 성격을 가지고 있던 유월절 의식이 민족주의와 전혀 관계없는 차원의 성례로 온 인류에게 주어진 것은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분명한 증거이며 선포이기도 한 것이다.

(3) 성찬의 시행과 용어의 의미

① 상징적 시행

성찬의 제정에 관한 모든 기록들은 <떡을 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떡을 떼는 일이 죄인을 구속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이 찟길 것을 상징한다고 분명히 가르치셨다. 개혁주의자들은 성찬 시에 집례자가 떡을 떼는 일을 수찬 자들 앞에서 시행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왜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면전에서 떡을 떼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떡을 떼신 후에 잔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그것을 그의 제자들에게 주셨다. 어떤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잔에 포도주를 부은 것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잔>을 나누는 일은 성례의 필수적인 요건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윌링가<Wielingar> 박사는 오히려 떡이 떼어졌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잔>도 수찬 자들이 보는 앞에서 집례자가 잔에 부어야한다고 주장한다.<Ons Avondmaals Formulier, pp. 243 f.> 수찬 자들이 보는 앞에서 집례자가 떡을 떼는 일이나 잔에 붓는 시행은 성찬의 올바른 시행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의 시행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당시의 성찬과 교회의 성찬은 상황과 입장이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의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성찬으로서 소수의 인원 이었지만 교회의 성찬은 많은 성도들의 성찬이다. 따라서 집례자가 모든 성도들에게 일일이 떡을 떼어주고 잔을 부어준다면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성찬의식 제정에 있다. 예수그리스도는 직접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고 잔을 부어 주었으나 반드시 집례자가 그와 같은 방법으로 성찬을 거행 하도록 제정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장차 교회의 성찬이 많은 인원에 의하여 거행 될 것을 고려하신 것이었다. 따라서 미리 떡을 나누어 놓고 잔을 부어놓는 현행의 성찬은 합당한 것이다 .
한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누룩 없는 떡과 포도주를 성찬의 재료로 사용하셨다. 어떤 신학자들은 누룩 없는 떡과 포도주에서 어떤 영적인 의미를 찾으려한다. 그러나 누룩 없는 떡과 포도주에서 어떤 영적인 의미를 찾을 필요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룩 없는 떡과 포도주를 사용하신 것은 그때가 유월절이었으므로 누룩 없는 떡이 유일한 것이었기 때문이며, 포도주 역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는 보편적인 음료수였기 때문이지, 그것들에 어떤 특별한 영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예표적이고 상징적이었던 성례를 완성되어진 실제적 성례로 선포하신 이상, 그리고 또한 그것들을 자신의 <몸과 피>라고 선포하신 이상 우리는 완성된 실제의 성례 속에서 성례의 의의를 찾아야한다. 우리가 아직도 성례의 요소들에서 성례의 의의를 찾으려한다면, 그것은 그 성례가 완성된 실제의 것이 아니라 아직도 여전히 미완성적인 것으로 원형에 대한 상징적이며 예표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어떤 떡과 음료수를 사용하라고 명령하지 않은 이유를 알아야한다. 그것은 이미 완성된 실제의 성례에 있어서 성례의 요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례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찬 시에 누룩 있는 떡과 다른 종류의 음료수나 물을 사용하여도 무관한 것이다. 그럼에도 성찬의 요소들에 대하여 반드시 포도주만을 고집하려한다면 떡도 누룩 없는 떡을 반드시 사용하여야 할 것이며, 나아가서는 어린양을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찬 자들은 반드시 비스듬히 누워서 성찬을 시행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당시의 식사 관습에 의하여 비스듬히 누워서 떡과 잔을 받았기 때문이다.

② 명령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찬의 시행과 함께 말씀도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떡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받아 먹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이 명령을 주시면서 육체적인 먹음 뿐만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영적으로 소유하라고 하셨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명령은 사도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눅22 : 19>의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라는 것에서 증거 되어진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 말씀의 본질은 외면하고 전혀 엉뚱한 차원에서 해석하여 예수께서 제정하신 성찬이 다만 기념 식사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6:32,33,50,51> <고전11:26-30>의 증거들을 근거로 할 때에 성찬은 기념이상의 의미가 있음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다만 기념정도의 것이라는 주장은 성찬의 제정 과정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에 대한 선포들을 근거로 할 때에 무시되어질 수밖에 없다. 성찬이 기념 의식이라고 말할 때에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 사역<중보자로서의 구원 사역>을 기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잔과 관련된 말씀도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떡을 떼신 뒤에 잔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 <마시라>고 명령하셨다. <누가복음>은 그것을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고 증거 한다. 여기서 말하는 잔이란 <잔>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잔에 담긴 내용물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잔 그 자체는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찬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떡<그리스도의 몸>과 잔<그리스도의 피>를 영적으로 공유하는 성례의식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은 오직 사제들에게만 허용된다는 잘못된 성경 해석에 의하여 일반 성도들에게 <잔>을 허용하지 않는 로마 카토릭 교회의 성찬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③ 설명의 말씀

A. 떡에 대한 설명

떡에 관련된 명령의 말씀 뒤에는 설명의 말씀이 뒤따른다. 이 말씀에 있는 <이것은 내 몸이니>라는 표현이 심각한 논쟁을 야기 시켰다. 신학자들은 이 말씀을 다양하게 해석하였다.

a. 로마 카토릭은 <이니라-is>를 연사<連辭-명제命題의 주사主辭와 빈사賓辭를 맺어 부정 또는 긍정의 뜻을 나타내는 말>적인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리하여 이 말속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의도는 자기 손에 들고 있는 그것이 비록 떡일지라도, 그것은 실제로 자신의 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전혀 타당성이 없는 주장이다. 여러 가지 가능성으로 고려해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아람어로 말씀하셨을 것이고, 따라서 전혀 연사를 사용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로마 카토릭이 화체설을 옹립하기 위하여 <이것이 내 몸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자체적으로 모순이 된다. 화체설과 부합되는 해석은 차라리 <이것이 지금 내 몸이 되어지고 있다>가 될 것이다.

b. 칼스타트<Carlstaadt>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손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키셨다는 기발한 주장을 하였다. 그는 중성 “투토”<τουτο-“이”>가 남성 “알토스”<αρτος-“떡”>를 언급할 수없다고 주장하면서 그와 같은 주장을 한 것이다. 그러나 떡은 사물이기 때문에 중성으로 언급될 수 있으며 당시의 상황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고려할 때에 그러한 주장은 매우 유치한 것이다.

c. 루터와 루터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유적으로 말씀하셨을 것이라고 추론하면서도 <이니라-is>에 연연한다. 그들에 의하면 비유는 하나의 은유가 아니라 제유법<提喩法-synecdoche-일부로서 전체를 보이고 전체로서 일부를 보이는 법>이었다. 그들의 개념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너희가 그 떡을 가진 곳에는 너희가 그것 안에, 밑에, 함께 내 몸을 가진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자 하나님의 육체적 편재성에 대한 불가능적인 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d. 칼빈을 비롯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은유적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내 몸이니>라는 선포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요6:35> <내가 참 포도나무요-요15:1> 등등의 선포와 같은 것으로서 이미 제자들의 귀에 익숙한 내용의 선포이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떡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쯔윙글리의 주장을 거부하고, <떡은 하나님의 언약적인 자비를 인치고 영적인 자양분을 전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것은 내 몸이니>라는 말씀 이외에 <너희를 위하여 주는> 이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주시는 것이며,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너희를 위하여 준다>는 선언은 곧 하나님의 모든 자녀<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에 대한 메시야적 선포이다.

B. 잔에 대한 설명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중요한 선포를 하셨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눅22:20> 이 선포는 새로운 언약의 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출24:8>에 언급된 옛 언약의 피에 대한 철저한 대비이다. <출24:8>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고 예표 하는 것이다. 따라서 <너희를 위하여>라는 선포와 <새로운 언약의 피>에 대한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죄제를 의미하는 것이며, 결국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녀들에 대한 구속의 선포인 것이다. 이러한 성찬의 의미는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 이니라-고전11:26>에서 결론되어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대속죄제에 대한 영원한 기념적 성례의식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되어지는 성례의식인 것이다.

5) 성만찬에서 표징 되고 인 쳐진 일들

(1) 성례가 의미하는 것들

성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감각적이고 외적인 상징들을 통하여 영적인 진리들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성찬에 있어서의 외적인 상징에는 가시적인 요소들뿐만 아니라, 떡을 떼고 잔을 붓는 일, 먹고 마심으로서 떡과 잔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삼는 것, 성도들과 친교 하는 것 등등이 포함되는 바, 이러한 것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상징한다.

구약의 희생 제사에서 예표 된 인류 구속의 실제가 신약의 성례에 사용되는 요소들을 통하여 명확하게 표현된다. <너희를 위하여 주는> 또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등과 같은 성찬 제정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희생죄제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속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의 죄를 대신하여 치루어지는 희생적 대속죄제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②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을 상징한다.

성찬을 시행할 때에 성찬 수찬 자들은 성찬의 상징적인 것들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또한 받아먹는다. 이와 같은 성찬 참여는 비유적으로 해석할 때에 수찬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은 실제로 먹고 마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와 같은 사실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롬6 : 8>고 선포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모든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을 하실 때에 자신들의 죄와 함께 같이 죽은 것이다.

③ 성찬은 성도들의 새로운 생명을 상징한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사실은 곧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이 부여됨을 의미한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그와 같은 사실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롬6:8>고 선포함과 동시에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6:7>고 선포하고 드디어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고전5:17>이라고 선포한다.

④ 성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한다.

성찬 시에 수찬 자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공유한다는 것은, 그들이 곧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 사도가 선포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들은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결국 성령의 역사하심을 의미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과 영원히 함께 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⑤ 성찬은 성도들 상호 간의 연합을 상징한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통일성을 이루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다. 그들은 성찬 시에 같은 떡을 떼고 같은 잔을 나누면서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을 확인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통일성을 이루는 지체로서의 사랑과 우의를 다짐하는 친교를 갖게 된다.

(2) 성찬이 인치는 것들

성찬은 상징일 뿐만 아니라 인<印>침이기도 하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대단히 피상적인 성례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성찬을 단지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고백의 표식<badge>으로만 간주한다. 그러나 성례의 두 가지 특성인 표식과 인침은 서로 밀접한 상관성이 있다. 하나의 상징성으로서의 성례는 계시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보증이며 인침이다. 하이델베르그<Heidelberg> 요리문답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그리스도는 이 보이는 표징과 보증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것을 우리에게 확신케 하려고 한다. 즉 우리는 우리의 입으로 그를 기념하는 이 거룩한 표지를 받는 것과 같이 확실하게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의 참된 몸과 피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모든 고난과 죽음과 순종들이 마치 우리 자신들이 우리 자신의 인격 안에서 우리 죄로 인하여 고난당하고 하나님께 만족을 드릴 수 있는 것과 같이, 확실히 우리의 것이 된다는 사실을 이러한 가견적 표징들과 보증에 의해 우리들에게 확증시키려고 의도하신다.-Lord`s Day, 29 Q.79>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점들에 주목하여야한다.

① 성찬은 참여자에게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위하여 수치스럽고 비참한 죽음에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사실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을 인 쳐준다. 이러한 사실은 성찬이 단순히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자기 포기의 실재를 증언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찬에 믿음으로 참여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가 더 이상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의 대상임을 확신시켜 주기도 하는 것이다.

② 성찬은 믿음으로 참여하는 수찬자들에게 구속 사역의 모든 완전함에서 그들의 구주로서 그들을 위하여 자신을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약속해주며, 또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의 약속들과 복음의 모든 풍성한 은혜가 하나님의 거룩한 선물로서 그들의 것이 되었고, 따라서 그들이 그 선물들을 요구할 수 있다는 개인적인 확신까지도 아울러 보증해준다.

③ 성찬은 또한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한 수찬 자들에게 구원의 복이 실제로 그들의 것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증시켜준다. 인간의 몸이 떡과 음료수를 먹고 마심으로서 영양을 공급받아 신선한 삶을 살수 있는 것처럼,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영적으로 공급받는 수찬 자들은 자신들의 영혼이 영원한 영생이라는 사실을 확증하게 되는 것이다.

④ 성찬은 상호적인 성격을 가진 인침이다. 성찬은 성례에 참여하는 자가 하는 신앙고백의 표지이기도하다. 그들은 떡을 떼고 잔을 마실 때마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며 왕으로서의 그리스도께 충성을 서약하며, 그의 거룩한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 것을 서약한다. 성찬은 이러한 성도들의 신앙고백에 대한 인침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찬에 참여한 자는 성찬의 의의적 삶을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를 갖는다.

6) 성만찬에 있어서의 성례적인 연합과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의 문제

성찬이 시행될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성찬에 연합하시는가? 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음에도 신학자들 간에 일치된 견해를 이루지 못하였다. 이 문제는 앞에서 이미 논증한 바 있으나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또한 개혁주의 입장을 분명하게 정리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논증하기로 한다.

(1) 로마 카토릭의 견해

로마 교회의 견해는 화체설<化體說-transubstantiation>이다. 로마 교회는 성례적 연합을 <물질적 의미>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성찬을 시행할 때에 사제가 <이것은 내 몸이라-hoc est corpus meum>는 예전문을 낭독할 때에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된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빵과 포도주의 모양과 맛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며, 다만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이것은 내 몸이니>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 제정의 말씀과 <요6:50>을 제시한다.

****
이와 같은 로마 카토릭의 성례적 연합 이론은 정당화 될 수없다. 우리는 저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거부한다.

① 그리스도의 실체는 물질과 연합될 수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대속죄제를 위하여 인성을 취하셨으나, 그의 본질<본체>는 <영>적 실체로서 비물질적 이다. 따라서 물질과 연합될 수없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세적 삶을 사는 동안에 실체적 신체를 소유하셨지만, 그 실체적 신체가 성찬 시행 시에 떡과 포도주로 변화되어야 할 이유도 없지만 변화될 수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과 동시에 더 이상의 인성을 소유할 이유가 없음으로 잠시 취하셨던 인성을 더 이상 소유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② 로마 카토릭의 성경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문자적으로 해석 하는 것이 아니라 비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왜냐 하면 그것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비유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우리는 결국 성찬에서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된다. 그것은 기독교의 고결한 본질을 삼류 종교적인 것보다도 더욱 저급한 것으로 퇴락시키는 것이다. 일반적인 종교는 물론이요 3류 무속적 종교들에서도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살과 피를 실제로 먹는 식의 의식은 찾아볼 수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살과 피를 실제로 먹고 마신다는 개념은 기독교의 본질을 떠나서 일반 종교적인 차원에서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망령된 것이다. 따라서 로마 카토릭은 이 점에 대하여 크게 회개하고 각성해야 할 것이다.

(2) 루터파의 견해

루터파의 견해는 공재설<共在說-consubstantiation>이다. 루터에 의하면 떡과 포도주는 아무런 변화가 없이 그대로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찬에는 <떡과 포도주 안에> 그리고 <그 아래> 또한 <그것들과 함께> 몸과 피를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전 인격이 신비스럽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임재 한다. 이러한 루터파의 주장 결국은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몸과 피가 성찬 시에 <장소적으로 임재-localb presence>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적, 공간적 임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성자 하나님의 편만성을 제한하는 것이 된다. 때문에 저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장소적인 임재를 주장하지 않는다고 변명한다. 그리하여 성찬 시에 그리스도께서 임재 하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시공간적인 존재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
로마 카토릭이나 루터파의 이론들은 사실상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거의 비슷한 이론이다. 그리고 저들의 이론은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전제로 한다. 즉 성자 하나님께서 아직도 인성을 소유한 예수 그리스도로 존재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비 진리이며 비 성경적이다.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성자 하나님께서는 현재 삼위 일체 하나님의 제2 위에 계심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로 또한 존재하시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성자 하나님의 존재는 2중적인 것이 된다. 이것은 기독교의 신학이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의 지상 사역을 종료하시고 성자 하나님의 자리에 복귀하신 것을 선포하고 있으며, 우리는 신앙고백을 통하여 그 사실을 확인받고 있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이제 인성을 취한 예수 그리스도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성만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본질<본성>로서 <영>으로만 존재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찬에 실재적으로 임재 하느냐? 하는 것이나 또는 성찬 시에 떡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로 변화하느냐? 하는 것들은 처음부터 아예 성립조차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현재적인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구세주이신 메시야 곧 <영원한 구세주>로서 존재하신다. 그러나 이 진리를 오해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실재성을 부인한다거나,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적 실재성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 그리고 인류 역사 속에 실재적으로 존재하셨으며, 또한 현재에도 실재적으로 존재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승천하시기 전까지는 실재적 실체로 존재하셨고, 그 이후에는 <영> 곧 <그리스도의 영>으로 존재하신다. 이것이 성령의 조명함을 받지 못하는 일반인으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기독교의 형이상학적인 신학적 진리요, 원리이다.

(3) 쯔윙글리의 견해.

쯔윙글리의 성찬론은 <성찬이란 하나의 표징 또는 상징으로서 영적인 진리와 복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상징하는 것에 불과하며, 그 상징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단순하게 기념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의 표식<badge>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잘못 전해진 것이다. 쯔윙글리가 <성례는 단순한 기념의식으로 서신 자들이 서약하는 표지와 상징일 뿐이다>라고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성찬론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는 <성찬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위하여 역사하시는 것에 대한 인침이며 보증>이라고 자신의 저서를 통하여 주장하고 있으며, 성찬 시에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 하시어 <육적으로 임재 하는 것은 거부하고> 신자들의 믿음을 돕는 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4) 개혁주의의 견해.

칼빈을 비롯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과 루터의 공재설을 전적으로 반대하였고, 또한 다음과 같은 이유로 쯔윙글리의 성찬론을 반대하였다.

① 쯔윙글리의 견해는 성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희생시키면서 신자들의 신앙적 행위를 강조한다.

② 쯔윙글리의 견해는 또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을, 그의 이름을 믿고, 그의 죽으심을 의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개혁주의자들<특히 칼빈>의 성찬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성찬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과거의 역사, 곧 죽으신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재의 영적 사역 곧 영광 중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물론 육체적으로 또는 장소적으로 성찬에 임재 하시지는 않지만 몸과 피를 포함하는 전인적인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 임재를 하시는 것이다.>

칼빈의 표현은 사실상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성찬을 통한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신비적 연합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성찬 시에 영적인 임재를 통하여 신자들에게 주는 감화가 영적이면서도 실재적인 것이라고 가르쳤다.

7)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성만찬, 또는 그 효능.

(1) 성찬에서 받는 은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표징과 인침으로 제정하신 성찬은, 그 자체로서 이미 은혜의 방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제자들을 비롯한 모든 신자들을 위하여 그것을 제정하셨다. 따라서 신자들은 성찬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은혜를 받는다.

① 구원의 확신을 받는 은혜.

구원에 대한 확신을 소유한 성도들도 어떤 절박한 상황을 만나게 될 때에, 그로 인하여 구원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때에 그들은 성찬을 통하여 믿음을 회복하며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다시 갖게 된다. 이와 같은 역사는 성찬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② 하나님 앞에 더욱 가까이 가는 은혜.

성도들은 성찬 예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함께하심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고 순종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적 변화를 갖게 된다. 이러한 역사도 역시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③ 영적인 자양분을 공급받는 은혜.

성도들은 성찬 예식을 통하여 영적인 힘을 얻는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확인받으며,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명감을 더욱 확고히 하는 가운데 강하고 담대한 신앙적 삶을 살수 있는 힘과 용기를 공급받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도 역시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2) 은혜의 역사에 대한 방식.

① 로마 카토릭의 개념.

로마 카토릭 성도들에게 있어서 성찬 의식은 하나의 성례일 뿐만 아니라, 제사의식이다. 로마 카토릭은 성찬의 시행에서 그리스도의 실제적 희생을 강조하며,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제적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과 성도들의 화목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강조한다. 그러나 이 제사가 죄인에게 주는 공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로마 교회 당국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대답을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윌머즈<Wilmers>의 기독교 편람<Handbook of the Christian Religion>에서 볼 수 있다. 이 책은 로마 카토릭 교회의 많은 학교들이 교과서로 사용하고 있는 책으로서 348p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미사의 제사가 주는 열매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우리가 드리는 미사는 구속과 탄원의 제사로서>

A. 자연적 은총뿐만 아니라 초자연적 은총까지도 전달하며.
B. 죄와 죄에 대한 형벌의 사면을 전달한다.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 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마련하신 공로는 미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미사의 제사를 <구속의 제사>라고 주장함에 있어서 위에 인용한 마지막 문장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신 공로가 오직 미사를 통해서만 미사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 카토릭 교회는 성찬이 <사제의> 의식을 통하여 작용하는 것으로 가르친다. 그것은 결국 성찬이 <그 자체의 힘> 또는 <사제의 집례>로 인하여 효능을 발휘한다는 것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은 로마 카토릭의 견해에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나 수찬자의 믿음 여부가 배제되고 있다. 따라서 악한 자라도 성찬에 참여하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을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② 개혁주의의 개념.

개혁주의의 대표적인 개념은 성찬이 외형적인 의식을 통하여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찬은 그 의식자체가 은혜의 원인이 아니며, 그것은 다만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에 불과한 것이고, 성찬의 효율적인 작용은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은 수찬자들의 절대적인 믿음을 당연히 요구한다. 불신자들은 성찬에 참여하여 떡과 포도주를 받을 수는 있으나, 성찬이 상징하고 인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8) 성만찬에 초대된 대상자.

(1) 성찬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자.

주님의 상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이렇게 대답한다.

<자기의 죄 때문에 자신을 미워하면서도 그리스도 때문에 이 죄가 용서를 받으며 그들의 남아 있는 결함도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의해 가리어지는 것을 믿으며, 또한 자기들의 믿음이 더욱 굳세어지고 자기의 삶을 개선할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성찬은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 즉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만을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2) 성찬에 참여해서는 안 되는 자.

성찬은 성례로서 교회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교회 밖에 있는 자들은 성찬에 참여할 수없다. 뿐만 아니라 성찬의 참여에는 몇 가지 제한이 더욱 필요하다.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이라고 해서 누구나 성찬에 참여할 수 있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성찬 참여에 대한 다음과 같은 예외 조항이 필요하다.

① 세례를 받지 아니한 성도들은 성찬에 참여할 수없다.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찬은 수찬 자들의 신앙고백을 요구한다. 따라서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자는 성찬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자이어야 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한 자이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순종을 고백한 자라야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에 대한 판단은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그것에 대한 판단을 세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세례를 받은 자라면, 그와 같은 자격을 갖춘 것으로 인정하는 반면에, 아직 세례를 받지 아니한 자들은 그와 같은 믿음을 소유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② 어린이들은 성찬에 참여할 수없다.

어린이들에게는 아직 성찬에 참여할 만한 지적인 신앙이 존재하지 아니한다. 따라서 그들은 성인이 되어 교회에 참정권이 허락되어질 때까지 성찬의 참여가 보류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③ 세례 받은 성도 중에도 성찬에 참여할 수 없는 자가 있다.

성찬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모든 자들에게 주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성찬의 참여가 제한되어야 할 경우가 있다. 성도라 할지라도 그들의 영적인 신앙상태나 또는 외적인 신앙적 삶의 형태가 온전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을 때 또는 하나님과의 관계나 교회와의 관계 및 성도들과의 관계가 지극히 비정상적일 때에 그들은 성찬에의 참여가 제한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전11:28-32>을 통하여 이 문제에 대한 것을 가르치고 있다. 바울사도는 수찬 자들이 성찬에 참여 하기에 앞서 자신을 살필 것을 강조한다. 고린도교인들 가운데 일부는 나쁜 관습에 젖어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성찬에 참여하면 성찬의 의미가 퇴색될 수 있었다. 바울사도는 그것을 염려하여 수찬 자들에게 자신을 살피고 분별한 후에 성찬에 참여하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
그러나 바울사도의 가르침은 성찬의 참여에 대한 제한적 의미도 있지만 성도들이 언제나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신앙적 상태를 유지하게 하기 위한 교훈적 목적도 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자신을 살피고 분별하는 신앙적 삶을 살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하여 제정하신 성찬에 참여할 수 있어야한다. 한편 자신이 하나님 앞에, 교회 앞에 그리고 성도들 앞에 비록 떳떳하지 못하여 성찬의 참여를 스스로 제한하여야 하는 지경이라 할지라도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더 이상의 잘못을 범하지 않을 신앙적 각오를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은혜와 자비를 근거로 하여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이요 하나님의 사랑이며 은혜이기 때문이다.

****
현대 신학이 세례에 대한 신학적 의미들을 간과하고 있는 반면에 일부에서는 세례에 대한 신비주의 사상이 일어나고 있다. 일부 교파에서는 세례를 대단히 신성시하여 수세 시에 각종 특이한 의식을 행하는가 하면 거액의 헌금이나 헌물을 강요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세례를 시여하는 목회자를 높이 받들어 섬기는 풍조까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관행 속에서 세례 동기회 같은 모임이 결성되고 있으며 그러한 모임들을 통한 또 다른 파벌들이 교회 내에 형성되어짐으로서 교회의 하나 됨이 서서히 무너져가기도 하는 것이다.

'제자양육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37장. 부흥집회  (0) 2012.02.20
제36장. 교회건축  (0) 2012.02.20
제34장. 전도와 선교  (0) 2012.02.19
제33장. 기도원<祈禱院>  (0) 2012.02.19
제32장. 기도  (0) 2012.02.1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