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 광시좡족 자치구 개관

   공식 명: 광시좡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면적: 236,000KM2 
   인구: 48,220,000명 (2002 년)
   주도: 난닝 (南寧)
   종족: 한족 60%, 좡족 32%, 야오족, 먀오족 등
   종교: 소승불교(90%), 기타(5%) 
   기후: 봄 가을이 길다.
             대부분의 지방에는 겨울이 없다. 
   

2. 중국 광시좡족 자치구 현황

중국 남부에 위치한 자치구이며, 광둥성, 구이저우성, 윈난성과 접한다. 약칭은 구이[桂], 주도(主都)는 난닝[南寧]이다. 행정구역은 5개의 지구와 9개의 시,
10개의 현급 시, 59개의 현, 12개의 자치현으로 나뉜다. 지대가 높아 해발 1000m-1500m 정도이며 2/3 이상이 돌산이다.

주민의 60%는 한족(漢族)이기에 좡족 자치구라는 말이 무색하다.
좡족 외에 야오족[瑤族], 먀오족[苗族], 퉁족 등이 함께 살고 있으며 좡족은 총인구의 1/3 정도이다.
오랫동안 중국의 통치를 받다가 1958년 자치구가 되었다.

광서자치구는 연해지역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에 비해 개방이 늦었다.
서 남단에 위치하고 있어 동남아, 서 남아의 교차지역으로 중국 서남지역에서 해외로 향하는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농업과 공업부문은 개발이 부진한 편이나 계림(桂林)이라는 명승지를 중심으로 관광업이 비교적 발달해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사탕수수이며 전국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다.

3. 중국에서 광시 자치구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와 사건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인구수로 1위인 좡족은 90%이상이 중국 남부의 광시 좡족 자치구에 모여 산다.
과거 광시성으로 불렸던 광시 자치구는 지난 1958년 소수민족 자치구로 공식 지정됐다.
자치구의 전체 면적은 중국 전체 면적의 2.5% 정도에 불과하지만
중국에서 소수민족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좡족을 포함해 먀오족, 이족, 둥족 등 약 12개 이상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이들 소수민족은 사용하는 언어와 문자, 생활방식 자체가 한족과는 다르다.
하지만 소수민족이 자치구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8%가량에 불과하다.
자치구 내 한족 인구는 좡족의 거의 2배에 달한다.
한족 인구가 계속 늘어나면서 소수민족 자치구의 취지도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지난 1948년 전까지만 해도 한족들은 좡족을 퉁족으로 불렀다.
개견자 변이 붙은 ‘퉁’자는 야생 들개를 상징하는 글자다.
한족이 좡족을 천시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한족과 매우 다른 문화 때문이다.
지난 1965년에 이르러 한족 출신 저우언라이 총리의 제안으로
약 20가지로 중구난방 불러왔던 퉁족의 명칭을 모두 ‘좡족’으로 통일해 정리했다.
‘좡’자는 ‘강하다’ ‘억세다’의 뜻을 가지고 있는 한자다.

강하고 억센 민족들이 주로 살다 보니 광시 자치구는 ‘반란’의 땅으로 이름이 높다.
대개 정권의 반역자들이 이곳으로 도망치거나 귀양을 온 것이 이유가 됐다.
반역자의 자손들도 멸시와 차별대우를 받으며 대를 이어 사회불만세력으로 자라났다.
중국 역사상 최대 반란 가운데 하나인 태평천국의 난도 광시 좡족 자치구에서 일어났다.
특히 이 반란에는 좡족이 깊이 개입했다.
태평천국의 지도자 홍수전은 비록 광둥성에서 태어난 한족이지만,
그 아래서 각각 군자금을 모으고 군사들을 지휘한 서왕 소조귀, 북왕 위창휘, 익왕 석달개 등은 모두 좡족 출신이다.
이들 좡족이 지휘하는 반란군은 북상을 거듭해 당시 중국 제2의 도시 난징을 점령하기도 했다. 

중국의 최고권력자로 군림했던 덩샤오핑이 최초로 공산반란을 일으킨 곳도 광시 좡족 자치구다.
파리와 모스크바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덩샤오핑은 1929년 ‘덩빈’이란 가명을 사용해 광시에서 농민폭동을 주도했다.
비록 폭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덩샤오핑은 광시에서의 폭동을 계기로 공산 혁명가로 두각을 나타낸다.
지금은 과거 덩샤오핑이 농민폭동을 일으킨 광시 자치구 바이써시에 덩샤오핑의 동상과 함께
공산반란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이후 그가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 최고 권력을 잡은 뒤에는 광시 자치구에서 종종 여름휴가를 보내기도 했다.
또 신해혁명을 일으키고 오랑캐 타도를 외친 중국의 국부 쑨원도 광시를 북벌의 기지로 삼았다.
이들 외에도 광시성에는 예로부터 자체적인 무력을 보유한 군벌세력이 항상 존재해 왔다.

광시 자치구의 수도는 난닝이다. 난닝은 중국의 수도 베이징보다 베트남 수도 하노이와 더 가깝다.
난닝과 하노이 사이의 거리는 391㎞로 서울~부산보다 짧다.
광시 자치구 구이린의 울룩불룩 솟은 산봉우리들은 베트남 하롱베이와 거의 완벽할 정도로 흡사하다. 

본래 이 지역은 과거부터 낙월•백월•남월 등으로 불리던 곳이다. ‘월남’이란 이름은 남월을 거꾸로 읽은 이름이다.
남월의 수도는 광시 자치구보다 더 동쪽인 광둥성 광저우였다.
‘양광’으로 부르기도 하는 광시 자치구와 광둥성 일대는 원래 베트남인들이 살던 곳이었다.
그 때문인지 이 지역의 언어인 광둥어는 베이징어와 소통이 불가능하다.
현재도 광시성 구이린에는 베트남을 치기 위해 출병했던 한족 복파장군 마원의 주둔지와 유적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광시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오늘날 베트남에 자리를 잡았다. 때문에 베트남인들 가운데 일부는
광시 자치구의 영유권을 주장하기도 한다.

영유권 문제 때문에 중국과 베트남은 줄곧 긴장관계를 유지해왔다.
베트남의 독립영웅이자 국부인 호찌민은 한때 국민당 장제스에게 잡혀
1년6개월 동안 광시성의 한 감옥에 갇혀 있기도 했다.

지난 1979년에는 양국간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베트남에서 화교가 탄압받고 있다는 명분으로 중국군이 20만 대군을 동원해 베트남을 공격한 것이다.
중국과 베트남 간의 여러 얽힌 문제 가운데 국경 문제도 한 요인이 되었던 이 전쟁은
덩샤오핑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사상자는 오히려 중국군 에서 더 많이 나왔다.

중국과 베트남과의 국경 문제는 2008년12월31일, 측량작업과 경계비 설치를 위한 9년간의 작업을 모두 완료하고
육지 경계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음을 공식 발표 하며 일단락 되었으나
해안 경계선에 대한 것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4. 중국 화난지방 선교

광시 자치구가 속해 있는 중국 화난지방은 오랜 전부터 선교사가 들어가 사역한 지방이지만
현재는 공산주의와 여러 박해로 인해 지하에서 활동하는 일들이 많다.
그러던 중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으로 인해 중국 선교와 화난 지방의 선교 사역에 큰 계기가 마련되었다.

선교적 측면에서 볼 때 홍콩이 중국 영토가 되는 시점을 뱀에게 먹히는 두꺼비 이야기와 견주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중국 영토가 된 홍콩은 잠정적으로 거대한 공산 세력이 지배하는 중국에 흡수되어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선교 전략적 측면에서 홍콩 반환은 바로 뱀을 죽이고 몸 속에서 번식하는 두꺼비와 같이
중국선교의 극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 귀속되는 주권이양은 중국 대륙선교를 비전으로 품고 있고 기도하는 자들에게는 경이로운 일이다.

홍콩은 중국 디아스포라와 본토에 대한 복음전도, 제자훈련, 매체, 문서사역 등에 있어서
활동의 중심이자 재정의 원천이었다.
기독교 인구는 10%에 불과하지만 505개의 학교, 사회단체의 60%, 병원의 25%를 운영하면서
오랫동안 큰 영향력을 끼쳐왔다.
이 노하우는 홍콩에서 광둥성(廣東省)으로, 광둥성에서 화난(華南)지역으로,
화난지역에서 전 중국 대륙 안으로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
홍콩만큼이나 중국사역을 안전하게 준비하고 민첩하게 추진해 나갈 수 있는 효과적인 지역이 없기 때문이다.
전에는 밖에서 가능하던 일들이 이제는 안에서 가능해진 것이다. 

반환 전에는 홍콩인이 중국을 왕래하는 것이 단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통행증을 발급 받으면 여권 없이도 왕래가 가능하다.
외국인의 경우에도 여행사를 통하여서 비자를 받으면 수시로 왕래가 가능하다.
매일 기차로 왕래하는 수만 명의 승객들 중에 사명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수 많은 기독교 책자들이 대륙으로 운반 되고 있다.
세관에서는 모든 짐들을 철저하게 검사하려고 하지만 통행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에
열린 구멍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하여 기독교 자료들은 계속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외국인의 경우에도 통행증은 조건에 따라서 신청할 수 있다.

현재 중국 정부가 취하는 동남아시아 국가를 포섭하는 작업 가운데에도 지리적으로 근접한 화난 지역을 이용하고 있다.
바다를 끼고 있고 동남아와 가까우면서 비교적 산업적으로 덜 발달되었기 때문이다.
화난 지방은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고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오고 가며 복음을 나르는 길목으로
전 중국과 동남아 가운데 활로를 펼쳐 나아가는 그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 일을 통하여 화난지방이 더욱더 사역에 활기를 얻게 된 것은 자명한 일이다.
  

 

 

                                                    <중국선교의 개척자-허드슨 테일러>

 

 

    중국 선교의 개척자 허드슨 테일러의 비전 선언문 9가지

1. 믿음

*하나님을 의지하라.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향하면 하나님이 공급하심이 결코 끊이지 않을 것이다. ...

*우리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큰 믿음이 아닌, 커다란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실패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도우심은 실패하지 않는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쪽과 인간을 향한 쪽으로 양면성을 가진다. 즉 신실하신 하나님을 완전하게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이룰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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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희생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하나님을 위해 드린 모든 것은 얻은 것이고, 하나님께 드리지 못한 모든 것은 잃은 것이다.

*성도들이 지고 있는 십자가는 시간이 지난다고 더 편안해지지 않는다. 단지 향기로운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은 당신이 드리는 헌금이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드리기를 원한다.

 

3. 하나님의 주권

*그리스도가 성도의 모든 영역에 주가 되지 않으면, 어느 영역에서도 주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 오직 순종만 필요하다.

*우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무엇이든 그가 원하는 대로 행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4.선교

*선교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다.

*만약 흠잡을 데 없이 정직하게 행할 의향이 없다면, 선교사가 되지 않는 것이 좋다.

*선교사가 되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면 선교사가 될 시도를 해보라.

*선교사는 으레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그곳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지상 명령은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이다.

*중국에서는 양복보다 중국옷이 편하다.

 

5. 하나님의 인도

*오직 기도로써 즉 하나님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라.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방법은 기도가 먼저고 그 다음은 상식, 그 다음은 어린 아이처럼 끝까지 신뢰하는 것이다.

*성경을 사랑하라. 하나님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실 수도 없고 당신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시지 않는다. 또 당신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6.고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그의 고난에 동참해야만 한다.

*시련과 역경은 항상 비전의 확장과 축복을 가져온다.

*하나님의 충만한 축복은 깊은 고난을 통해서 경험하기도 한다.

 

7.거룩한 생활

*성도들은 결코 불순한 생각들을 용납하면 안 된다.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가장 거룩한 사람이다.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시간을 투자해야한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우리가 범하는 모든 죄의 근원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생활은 죄 없는 생활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죄와 공존하지 않는 것이다.

 

8.성도의 삶

*하나님은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우리의 기도에 침묵하실 수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물질보다 귀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신다. 그 다음 그분의 광대하심을 보여 주신다.

*열매와 비전은 다르다. 비전은 노력의 결과이고 열매는 삶의 결과다.

 

9.리더쉽

*작은 것은 작은 것이다. 그러나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이 큰 것이다.

*영적 비전은 양 무리를 도와야지 지배해선 안 된다.

 

[글.사진=갓앤톡]

 

 

 

 

 

 

중국선교의 목적은 세계복음화이다
 

중국선교의 궁극적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중국선교 사역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질문되어지는 것은 중국선교의 궁극적 목적이 과연 무엇인가이다. 특히 중국선교 현장에 뛰어든 수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사역과 활동들을 지켜 보면서 이 질문은 계속되었다. 왜 우리는 중국선교를 해야 하고, 중국선교를 하는 우리의 목적은 무엇이냐? 교회와 교단, 선교단체의 선교비전과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교회에서 파송을 받았기 때문에 중국선교를 하는 것이며, 해외에 한국의 지교회를 세우고 교회의 세력을 해외로까지 확장하기 위해서인가?
중국선교 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먼저 중국의 선교현장에서 자신을 통해 기독교 신자들이 생겨나기를 원하고, 그 다음으로는 그들과 지속적인 교제와 관계를 형성하면서 모임 내지는 교회를 형성하길 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임과 교회가 숫자적으로 또 신앙적으로 성장하고 성숙되기를 바라면서 열심히 사역을 한다. 한편 선교사들을 파송한 교회나 교단, 선교단체에서도 이런 활동을 하는 선교사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기도해주고 있다. 그러면 중국선교의 목적은 선교사들을 통해 생성된 모임과 교회들이 지속적으로 확장해 나가는 것이란 말인가? 다시 말해 중국의 여러 지역에 교회를 성장시키고 확장해 나가는 것이 중국선교의 궁극적 목적인가?
  중국의 선교현장에서 전도와 교회개척은 말할 필요도 없이 중요한 사역이며, 선교사가 우선적으로 관심을 갖는 문제이다. 또 결신자들을 중심으로 모임과 교회를 형성하는 것도 매우 당연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그 모임과 교회가 성장하고 성숙되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중국선교의 첫 번째 목적이 될 수는 있어도 궁극적 목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중국선교는 여러 단계의 목적이 있는데 전도와 교회의 개척, 성장, 성숙은 그 중 첫 번째 목적이라는 것이다.

 

중국선교의 첫 번째 목적- 전도와 교회개척, 성장, 성숙 


     중국선교의 첫 번째 목적은 전도와 교회의 개척, 성장, 성숙에 있음을 동의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중국에서 교회의 개념을 설정하는데 중요한 것은 교회의 건물이 아니라 초대교회처럼 진정 성령으로 거듭난 기독교인들이다. 그래서 교회의 개척, 성장, 성숙을 말할 때 교회의 건물보다는 기독교인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한편, 교회의 성장과 성숙은 현지에서 중국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회가 자치(自治), 자양(自養), 자전(自傳)을 통해 자생력을 이룩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자치는 교회발전의 기초이며, 자양은 교회발전의 조건이며 자전은 교회발전의 관건이다. 따라서 선교사의 교회개척 사역이 자치, 자양, 자전을 통해 자생력이 구축될 때 현지교회는 비로소 발전하게 되며, 선교사역은 성숙된다. 그것이 중국선교의 첫 번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중국선교의 두 번째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선교사에 의해 개척된 현지교회가 또 다시 교회 밖에서 혹은 타 지역에서 전도와 교회개척을 해나가는 것이다. 우리의 중국선교 사역이 또 다른 곳을 향한 전도와 선교사역으로 연결되는 것이 두 번째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세 번째 목적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세 번째 목적을 이룰 수 있는가? 다른 곳을 향한 전도와 선교사역을 통해 타지역에서 개척된 새로운 교회가 자치, 자양, 자전하므로 자생력을 또 갖게 될 때 중국선교의 세 번째 목적이 이룩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중국선교의 네 번째, 다섯 번째 목적도 있는가? 사실 중국선교는 「전도와 개척」 그리고 「자치, 자양, 자전을 통한 자생력 구축」이라는 두 가지의 끊임없는 목적을 향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이 지속적으로 나가면 결국 중국선교의 궁극적 목적은 다름 아닌 세계복음화에 있다는 귀결점을 찾게 된다. 세계복음화, 이것이 바로 중국선교의 궁극적 목적이다.

 

세계복음화를 위한 중국 교회의 발돋음 


     중국선교가 세계복음화로 지향되어 나가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중국교회가 자치, 자양, 자전의 자생력을 갖춘 교회가 되어져야 할 것이다. 또 기독교인과 교회공동체는 세계복음화에 대한 비전과 열정 그리고 자원(資源)이 있어야 하며, 국가적으로도 세계선교를 할 수 있도록 해외여행의 확대 내지는 자유화 정책이 수반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세계선교로 나아갈 수 있는 것도 이상의 조건들을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이후 한국 교회의 세계선교의 조건은 더욱 확실하게 지니게 되었다. 한국 교회는 세계선교를 감당하고 세계복음화를 이룩할 수 있는 세계적인 중요한 교회가 되었다.
  중국 교회는 어떠한가? 중국 교회와 선교전문가들은 중국에 공인, 비공인 기독교인을 포함해서 최소한 6천만 명에서 최대 1억까지 추산하고 있다. 중국의 12억 인구에서 볼 때 아직도 적은 숫자임은 분명하지만 단지 숫자적으로 보면 중국은 세계 최다 기독교인 보유국이다. 이들 6천만에서 1억의 중국기독교인은 세계선교를 감당할 수 있는 인재(人才)적 자원이 될 수 있다. 중국의 공인된 교회나 비공인된 교회의 상황을 볼 때 비록 상대적으로는 미약하고 부족할 수 있으나 전반적으로 교회의 자치, 자양, 자전이 이루어지고 있고 또 확대되어 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1990년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난 중국의 비공인된 교회의 세계선교로의 준비와 발돋움들, 예를 들어 선교특강과 교육의 실시, 외국어 학습 등을 통해 하나님께서 중국교회를 통해 세계복음화를 간절히 이루고 싶어하심을 느낄 수 있다. 또 적지않은 공인 또는 비공인 중국교회는 세계선교를 감당할 수 있는 영적인, 인재적인, 물질적인 자원을 이미 확보하고 있어 이들 교회들이 중국교회의 선두주자로서 세계선교에 참여하는데 자신감을 갖게 해준다. 비록 여전히 제한적이며, 일부 지역일 수도 있겠지만 현재의 중국인들은 과거에 비해 돈만 있으면 해외로 얼마든지 나가거나 여행을 할 수 있게 환경이 개선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국교회가 세계선교와 세계복음화를 감당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하는 것은 중국 내의 세계의 미전도 지역과 민족에 대한 전도와 선교를 감당할 수 있는 첨병(尖兵)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름 아닌 중국의 소수민족 기독교인이다.


       세계선교의 첨병인 중국의 소수민족 기독교인들이 세계선교의 첨병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세계의 미전도 지역과 민족들은 이들 소수민족들과는 지리적, 인종적, 문화적, 종교적 근사성(近似性)으로 말미암아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북한과 동남아시아의 불교국가들, 힌두교의 인도, 중동과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권 등은 세계의 주요 미전도 지역으로 평가되어 지고 있다. 중국의 동북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은 북한선교를, 서남지역의 먀오족(苗族)은 베트남, 미안마 지역의 선교를, 티베트족(藏族)은 인도, 네팔, 파키스탄 지역의 선교를, 다이족은 태국선교를, 서북지역의 위구르족(維吾爾族), 타타르족(塔塔爾族), 카자크족(哈薩克族), 후이족(回族)들은 카자크스탄, 키르키스탄, 아프카니스탄과 중동의 이슬람 지역의 선교를, 북부 지역의 몽고족(蒙古族)은 몽고선교를 감당할 수 있는 종족이 된다. 만약 이들 중국의 소수민족 기독교인들이 이상에서 열거한 세계의 미전도 지역과 민족을 향해 복음을 들고 나간다면 그들은 세계선교의 첨병으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소수민족 기독교인들이 세계선교의 비전과 근사성의 특성이 있다고 해서 세계선교와 세계복음화가 금방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무엇보다 중국소수민족의 교회가 성장해야 하고 성숙되어져야 하는 조건이 구비되어야 한다. 이것은 소수민족 전도와 선교와 직결되는 문제이다. 중국 소수민족 전도와 선교에 대한 접근과 방법은 과거에도 많이 제시되어 왔고 현재 중국 소수민족 전도와 선교는 다양하게 또 다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경제적인 접근, 지역개발적인 접근, 민족입양의 방법, 전도와 개척사역, 의료와 복지사역, 중보기도사역, 번역 및 문서사역 등이 있다. 그 가운데 전체의 중국교회가 세계선교와 세계복음화로 지향한다는 차원에서 볼 때 중국내의 한족(漢族)교회를 통한 소수민족 전도와 선교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한족교회가 소수민족 전도를 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소수민족들이 한족에 대한 적대감으로 인한 접근기피와 한족들이 소수민족들에 대한 우월감으로 인한 사역경시가 장애물이다. 즉 민족감정 문제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의 자원을 먼저 확보한 한족교회가 소수민족을 향한 직접적인 전도보다는 소수민족 교회에 대한 지원사역과 소수민족 기독교 지도자들에 대한 신학훈련에 착안하여 사역을 지혜롭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진행한다면 한족과 소수민족교회를 포함하고 있는 전체 중국 교회는 세계선교를 향해 나갈 수 있는 발걸음이 더 확고해질 수 있다. 다시 말해 한족교회는 직접적인 소수민족 전도보다는 교회지원과 지도자훈련사역에 초점을 맞추어 소수민족 교회의 자생력을 육성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에이(A)성의 지도자훈련을 담당하였던 필자는 그 지도자훈련반에 소수민족지도자들이 30퍼센트나 참여한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휴식시간에 이들 소수민족지도자들과 대화하면서 이들은 중국소수민족의 복음화를 진행하는데 있어 한족교회의 참여는 절대로 불가결의 요소라고 하였다. 특히, 한족교회의 여러 가지 자원들은 소수민족교회가 육성되고 자생력을 갖게 하는데 중요한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족교회를 도외시한 소수민족의 복음화는 생각하기 어렵다고 고백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한족교회에서 개최하고 있는 지도자훈련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길 갈망하며, 한족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과 신앙서적 등의 교회자원들을 공급받기 원하고, 교회목양과 전도의 방법을 배우기를 희망하고 있다. 먼저 자생력을 확보한 한족교회를 통해 이들 소수민족교회도 자생력을 갖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이다.

 

 

한족과 소수민족이 함께 하는 세계복음화의 발걸음 


     중국선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중국교회의 성장과 확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복음화에 있다. 21세기에 중국교회는 이미 앞서 나간 한국교회와 더불어 세계선교와 세계복음화로 향해 나가야 한다. 중국교회가 세계선교를 감당하기 위해 한족과 소수민족이 함께 나가야 한다. 한족들이 먼저 확보한 교회자원과 소수민족들이 세계의 미전도 지역과 민족 선교를 하기 위해 지니고 있는 유리한 조건이 연결되고 연합될 때 중국교회를 통한 세계선교를 더욱 힘차게 이루어질 것이다. 따라서 중국선교는 중국교회로 하여금 세계선교를 할 수 있고, 지향될 수 있도록 나가야 한다. 우리의 중국선교가 세계선교와 세계복음화와 연결되고 지향되어 나갈 때 우리의 중국선교는 궁극적인 목표로 향하게 될 것이다.

왕쓰웨 목사/ 본지 편집자문위원, 전 중국복음선교회 중국선교사훈련원 교무처장

뉴스

 

 

중국선교의 역사

 

1. 초기의 선교활동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온 지 13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매우 천천히 중국 땅에 뿌리를 내렸다. 초창기 세 번의 선교를 시도했다. 그래서 당시 네스토리안 기독인들(618-907), 원대의 프란체스코 수도사들(1271-1368), 그리고 明(1368-1644)과 淸(1644-1911)대의 예수교 선교사들 등 여러 선교사들이 있었지만, 이러한 선교 노력들이 중국인들이 영적인 생활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1) 네스토리우스파의 첫 시도(618-907年)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인들은 당대 초기에 비단길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왔다. 중국의 오랜 역사 속에서 가장 찬란했던 왕조들 중 하나였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제국이 되었다. 중앙 아시아, 페르시아 그리고 인도와의 교역은 당의 보호 하에서 번창했고, 수많은 외국인들이 비단길을 따라 수도인 장안으로 들어왔다. 군사력과 정치적 힘에 자신감이 있던 당의 왕실은 외국인들에 의해 전해지는 종교를 묵인했으며 후원하기까지 했다.

외국의 예술과 음악 역시 환영을 받았다. 당시 황제 자신이 종교를 연구하고 그것을 승인했다. 황제의 칙령으로 알로펜은 수도원 건축을 허락 받았고 포교 활동을 보장받았다. 당시 몇몇의 주요 도시들에 적어도 50개 이상의 교회가 세워졌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대체로 금욕주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여지며, 대개 서민들의 생활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지는 못했다.

AD 84년 황제의 칙령에 의해서 외래 종교의 수도원, 사원, 그 밖의 모든 재산들이 몰수당하고, 당의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본국과의 지원도 끊어지고, 중국인 지도자들을 세우지 않음으로 인해 중국인으로부터 고립되어 갔다. 10세기경 중국의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그 자취를 감추었다.


(2)원조(元朝:1279-1368年)∼송(宋)의 그리스도인

1280년경 몽골족은 위대한 징기스칸의 영도하에 동유럽에서 중국에 이르는 제국을 이룩하였다. 몽골족의 원나라는 1368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인들은 중국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13세기 초 로마 카톨릭의 선교사들도 들어왔다. 이러한 선교 활동들은 몽골 제국이 몰락하기까지 번영하였다. 몽골제국은 종교에 대해 비교적 관용했던 것에 주로 기인한다. 황제는 포고를 내려 모든 종교가 각기 나름대로 존중받을 것을 보장했다.

13세기 후반, 아득한 동방에 대한 로마의 관심은 마르코 폴로와 그의 삼촌들의 놀라운 중국 여행으로 인해 새롭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1266년 그들이 첫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들은 교황에게 쿠빌라이 칸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그는 기독교를 잘 알고 있고 또 그것에 헌신한 사람들을 최소한 100명 이상 중국으로 보내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로부터 20년 후 프란체스코파의 수도사인 몬테 코르비노 출신의 요한(John of Monte Corvino: 1247- 1328)을 중국에 보내고, 계속해서 교황은 로마 카톨릭의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더 많은 프란체스코 선교사들을 보내 수 천 명을 회개시켰다.

1305년에 6천여 명의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뻬이징에서 성당을 셋이나 세웠다. 송의 지도자들은 네스토리우스파와 프란체스코파 신자들을 추방하였고 또한 친 몽골파에 대한 적대감의 표현으로 그 종교의 개종자들을 몰아내었다.


(3) 명과 청대의 로마 가톨릭 선교

1582년에 드디어 마테오 릿치(Matteo Ricci: 1552-1610)는 중국 내에서의 예수회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의 전략은 지식 계층의 호응을 얻게 되면 가난한 사람들이나 하층계급의 복음화도 가능하리라는 생각에 근거한 것이다. 릿치는 천문학, 수학 시계수리, 지도 제작 기술로 황제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베이징에 머물 수 있게 되었고, 기독교 교회의 기반이 점차적으로 형성되었으며 중국의 기독교 문학이 발전해 갔다.

마침내 릿치는 2천여 명의 교인들과 기독교를 도와준 많은 영향력 있는 학자들을 남겨 둔 채 1610년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중국에 기독교회와 선교의 견고한 기초를 닦아 놓은 것이었다. 그 후 2세기 동안 잦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중국에서 계속 뿌리를 내렸다. 청의 위대한 황제 강희제는 자신을 개인 교수하고 고위 관리들을 가르치게 하기 위해서 베르비스트를 초빙했다. 1692년에 황제인 강희제는 기독교의 법적인 지위를 보장하는 칙령을 공포하였다.

1674년 첫 번째 중국인 성직자인 로웬 챠오가 주교로 임명되었다. 다양한 교단의 중국에서의 성공은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의식논쟁"은 일부 특정의 의식 즉, 조상숭배에 참석의 해야하느냐, 말아야하느냐 하나님의 이란 용어를 중국식으로 예수회는 대개 "상제(上帝)"나 "천(天)"을 사용했던 반면, 도미니크파 선교사들은 "천주(天主)"가 하나님의 유일한 정확한 이름이라고 주장했다. 이 의례논쟁은 1645부터 1745년까지 계속된다. 이에 반작용으로 황제인 강희제는 릿치에 의해 세워진 강령에 위배된 선교사들은 남아 있을 수 있었고, 후계자인 건륭제가 기독교를 반대하는 포고를 내림으로 선교사들은 추방되거나 은신했다. 서양 및 중국인 성직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은밀하게 복음을 전했다. 신자들은 순교 당하고 교인들은 흩어지게 되었다.



2. 기독교 선교 활동 역사

1807년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의 모리슨이 마카오에 도착한 후부터 1950-51년 사이에 중국에서 선교사들이 추방되기까지 개신교의 업적에 대한 기록은 아주 복잡하다. 개신교 선교의 시기를 다음의 4시대로 나눌 수 있다.
준비기(1807-1842), 개척기(1843-1869), 확장기(1861-1900), 발전기(1901-1949).


(1) 준비기(1807-1842)

19세기 중국의 힘이 쇠퇴해 가던 반면, 서양은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급속 성장해 갔다. 개신교 국가인 영국과 다른 서양 국가 상인들이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서 그전에 이루어 졌던 독점 체제를 와해시키기 시작했다. 청조는 밀(William Milne)과 프러시아 출신의 칼 구츨라프(Karl Gutzlaff), 미국 출신의 피터파커(peter Paker)와 선교사역을 위한 준비를 했다. 그들은 중국어를 배웠고, 성경을 번역하고 인쇄했으며, 기독교 서적과 전도지를 출판, 배포사역을 감당했다.

최초의 중국인 목사는 리안 아파(Liang Ah-Fa)로 목사 겸 복음 전도자였다. 홍콩은 99년 동안 영국에게 양도됨으로 선교회들은 선교사들을 동남 아시아에서 중국의 5개 항구 도시들과 홍콩으로 재배치시켰다. 그것에서 개신교 선교회들은 복음 전파, 교육사업, 의료 봉사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그들의 사역을 전개해 갔다.

그러나 불평등 조약들은 중국인들 사이에서 외국인들에 대한 분노를 가중시켰다. 이로 인해 기독교 선교는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 기간 중 선교 노력의 간접적인 결과 중 하나로 태평천국의 난(1851-1864)이 일어났다. 우상으로 가득 차고 부패한 중국을 정화시키라는 상제(上帝)의 소명을 받았다고 한 홍시우취엔(Hong Xiuquan)이 천국(天國)을 건설하고자 했다.

이 난은 급히 군대를 조직해 청의 군대를 지원함으로 무산되었다. 선교사들이 이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서구 국가들을 지지했으며 만주 왕조를 도와주었다. 태평군들은 실제로 만주인들 보다도 외국인들에게 더 호의적이었다. 그들은 중국이 서양과의 교역하는 것과 여행하는 것에 대하여 개방적이길 바랬다. 그들은 선교사들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서구 열강의 간섭으로 순수한 중국식 기독교운동은 무산되고 말았다.


(2) 확장기(1861-1900)

태평천국의 난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서양의 침략이 계속되는 상황하에 1861년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조약으로 중국 본토에서 땅을 소유하고 교회를 세우고 기독교를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 정치적인 장애물들을 모두 제거한 것이다. 만주 정부가 너무나 약하다는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 주었다.

허드슨 테일러의 지도하에 있던 중국 내지 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를 위시한 다양한 선교회들로 인하여 기독교는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이시기의 선교 활동은 일반 교육과 서양의 과학과 기술의 소개, 의료 및 사회적 봉사와 사회개혁에 크게 공헌한 것으로 특징 지워 진다. 선교사들은 아편, 노름, 매춘 및 전족(纏足)을 없애려는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또한 여성과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인권 운동을 벌이는 데에도 한 몫을 감당했다.

1870년대와 1880년대에는 구제의 손길을 폈다. 사회 봉사에 그들의 사역을 더욱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영국, 러시아, 일본, 프랑스, 독일 등의 중국 침략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것이다. 비근한 예로 선교사들은 중국에 대한 자신들의 통제력을 확장시키려는 서구의 제국주의자들에 의해서 조종당했다. 복음 전파의 결과들을 급히 얻으려는 일부 선교사들의 조급함으로 인하여 그들은 중국인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둔감한 태도와 도전적인 방법을 서슴치 않고 사용했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은 중국인들과 선교사들 사이에서 긴장과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반기독교 폭동이 양조우(楊洲:1868)와 티엔지(天津:1870)에서 발생하였고, 그곳에서 개신교와 카톨릭 선교사들은 엄청난 손실을 치렀다.

1900명 이상의 중국인 개신교 그리스도인들, 186명의 개신교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살해되었다. 3만 명 이상의 중국인 카톨릭 교인들과 47명의 외국인 성직자 및 수녀들 역시 살해당했다. 세력가들은 외세를 중국 밖으로 몰아내는 방편으로 이용하였다. 반제국주의 반서구운동은 중국의 기독교 교회를 뒤흔들어 놓았고 선교 사업은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890년경 선교 운동의 확장기 말엽에는 중국인 개종자의 수는 112,808명으로 늘어났다. 2,000여명의 외국인 선교사와 1600여명의 중국인 사역자들이 중국에서 봉사했다. 중국 교회는 크기와 질 양면에서 성장했다. 복음은 거의 중국의 모든 지역에 널리 확산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여전히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중국의 문화와 사회의 주류에 침투되지 못한 채 수많은 중국인들에게는 여전히 외국 기관으로 비춰졌다.


(3) 발전기(1900-1949)

중국 관리들과 빈곤한 농민들의 격분으로 인하여 1900년에 의화단 사건(The Boxer Rebellion)이 발생했다. 태평 천국의 난은 의화단 사건을 또한 지원했는데, 외국 8개국의 군대가 베이징에서 중국 반란군들을 몰아냄으로 의화단 사건은 종결을 맺었다. 의화단사건으로 서구 열강들의 세력을 증가시켰으며, 부상하는 민족주의 운동의 불만과 적의의 초점을 만주 왕실에 집중시키는 결과를 낳게 했다. 중국은 또다시 굴복했다. 제국주의 세력은 큰 배상을 요구했으며, 만주정부는 중국의 내부 및 외부적인 문제들에 대한 비난을 면치 못했다.

의화단 사건으로 반성과 함께 선교사들과 본토의 중국인 동역자들과 평등한 동반자 의식을 발전시켜 나갔고, 기독교가 중국의 변화하는 상황과 문화에 적절하게 대응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중국 그리스도인들 스스로에 의해서 새로운 교회들이 세워졌고, 독립 교회의수는 급속하게 증가되었다. 많은 중국인들은 확신과 소망을 갈구했다. 수많은 중국인들은 그리스도께로 인도되었다.

1911년 쑨원이 이끄는 공화국 혁명은 쇠약한 만주 왕정을 와해시켰다. 손문의 지도하에 있던 혁명 운동은 점차 대중성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국민당만이 명분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상호간에 피를 부른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온 인류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과학적인 지혜,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기독교 문명으로 간주되었던 서구를 본받으려든 중국 지식인들의 꿈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베르샤이유 조약으로 중국에서의 제국주의의 통치가 종식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독일이 중국에서 소유했던 지역을 일본에게 할양 받도록 조인하였다. 이러한 사건의 추이로 중국의 지식인들을 격분시켰으며, 민족주의자들은 직시하게 되었다. 베르샤이유 조약에 항의하는 시위가 1919년 5월4일 에 일어나고, 이를 기점으로 몇몇 지도자들은 서구의 자유주의로부터 등을 돌려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국에서 실행 가능한 혁명 이념과 전략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외세의 침략과 내부적인 위기를 견디며 중국의 민족주의가 중국적인 동일성의 기반으로써 유교문화를 대치하긴 했으나 중국을 하나로 묶어주는데 필요함을 인식하게 된다. 결국 공산주의자들은 한발 앞서서 중국의 문제들을 무신론적 유물론의 방법으로 해결함으로써 이러한 이념적인 공백을 메워 버렸다.

마오쩌뚱은 비록 1920년대에는 대수롭지 않은 인물로 남아 있었지만, 그 역시 마르크스주의에로의 유사한 지적인 전향을 경험했다. 국민당과의 내전 와중에 일본은 만주를 침략함으로써 중국에 대한 그들의 야욕을 넓혀 갔다. 중일전쟁이 격화되었을 때, 마오쩌뚱의 게릴라전 이론은 1938년 - 1940년 사이에 벌어진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성공적으로 입증되었다.

또한 긍정적인 개혁들로 인하여 그들은 점점 더 많은 대중적인 지지를 획득해 갔다. 1946년 미국의 마샬 장군은 연합 정부를 구성하라고 지시했으나, 공산당과 국민당 양자는 권력에 대한 그들의 야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전면적인 내란이 일어났고, 1949년 10월 1일에 제1회 인민 정치 자문 평의회를 개최하였고, 10월1일 마오쩌뚱은 베이징 자금성의 천안문에서 중화 인민 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3. 근대사와 기독교

(1) 교회에 대한 통제와 박해가 증가된 시기

1949-1966년의 기간 중, 교회는 일정 한도 내의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압력은 부단히 증가되어 갔다. 1950년, 총리 죠우언라이의 영도 하에서, "그리스도인 선언(Christian Manifesto)"에 서명한다. 그 목적은, 교회를 외국과의 유대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여, 다음 해에 결성할 삼자회의 기초를 다지는 데 있었다.

1950년대에 수많은 그리스도인 목사와 사역자들은 삼자회에 협조하기를 거부함으로 인해 결국 체포되어 수년간 투옥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은 1979년 후에야 비로소 복권, 석방되었다. 시골 교회는 이미 1950-1953년에 토지 개혁 운동 감행될 때 폐쇄되었다. 1958년 말기, 원래 64개였던 북경의 교회는 네 곳만이 개방되었고, 200개의 상해 교회는 23개로 줄었으며, 기타 다른 도시에도 1-4개밖에 남지 않는다.


(2) 문화혁명-전면적 종교 탄압

문화 대혁명은 1966년 5월에 젊은이들이 홍위병 집단을 구성하여 사대구습을 소멸하고, 구 지식인, 전문직업인, 종교인 그리고 마오쩌뚱과 좌파에 대해 반대할 우려가 있는 정부와 당의 지도자 등을 공격하였다. 대규모의 유혈극과 엄청난 수난이 있었다. 수 천 명의 사람들이 박해와 홍위병과 노동자들 간의 경쟁적인 파벌로 인한 싸움의 와중에서 자신의 생명을 잃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무시무시한 수난을 겪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혹독한 박해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특기할 만하다. 이때 극좌 분자들은 당과 종교의 "평화적 공존"은 불가능하다고 믿고, 종교는 "아편"이라고 규정했다. 1965년에는 극좌파가 득세하는데, 문혁 기간중의 박해는, 무력으로 종교를 없애야 한다는 신념의 자연스런 결과로 치닫는다. 모든 종교 단체 건물은 훼손되고 폐쇄되었다. 종교 서적 및 상징물은 모두 파괴되었고, 어떠한 종교적 신앙의 표현-십자가를 다는 것까지-도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은 수색되었으며 성경 및 다른 여러 책들은 모두 몰수되어 잿더미가 되고, 많은 이들이 투옥되거나 노역에 처해졌다. 어떤 이들은 혹형을 받았으며 또 어떤 이들은 그런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자살을 하기도 했다.


(3)비교적 완화된 정책의 실시

1977년부터 현재까지는 고무적인 양상, 문혁 기간에 극좌 분자에 의해 폐쇄되었던 종교 사무국은, 1977년초에 중국 공산당의 허가를 받아 일을 다시 시작했다. 같은 해에, 수년간 잠적했던 "애국" 종교 지도자들이 정부 기관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1978년 3월 다시금 조직되었다. 그 당시 정치적인 통제는 완화되어, 공산당은 빼이징 민주 벽을 개방할 정도로 상당한 언론의 자유를 허용했다. 각 도시의 재개방된 몇몇 교회들마다 사람으로 가득 찼으며, 그들의 대부분은 청년이었다. 도시와 농촌에서는 모두 가정 교회가 급성장하여 전도하거나 대규모 집회를 열기도 했다.

문혁의 정책이 급전되었으므로, 당 간부들도 "극좌 분자"로 몰릴까봐, 그리스도인들의 활동을 보고도 종종 못 본 척했다. 그 결과, 중국은 종교적 부흥 같은 것을 겪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더불어 거짓 종교인 마오져뚱 종교에 눈을 돌리기도 했으며, 특히 농촌에서는 미신이 다시 활개를 쳤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모여들었다. 이때 사찰과 회교 사원도 다시 개방되었다.






2] 중국의 기독교 상황

중국 정부의 종교에 대한 태도는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에 입각한 것으로, 19세기의 과학 사상을 근거로 하고 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종교란 인류의 구시대적 유물로서 그것이 혁명 과정을 저지시킬 수 없다고 단언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근본적으로 무신론이며 물질 세계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인간에게는 영혼이 없으며 사후에는 어떤 세계도 없다. 레닌주의는 이렇게 하여 독특한 중국의 색채를 띠게 되었다. 그리고 종교방면에 있어서 마오져뚱은, 철저히 공산주의 의 기본 교조에 의거한다. 마오져뚱의 천재성은 서양의 사상 체계를 중국 문화에 적용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 있다. 마오져뚱에게 있어서 중국은, "인간의 왕국"이고. "우리의 신은 바로 무수한 중국 인민들이다."라고 말한다.

떵샤오핑의 경제 개혁 정책이, 마오져뚱 말년 정책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해도 그의 기본 사상은 여전히 공산주의다. 1985년 3월에 발표한 담화문에서 중국 현대화의 궁극적 목표는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임을 표방하고 있다.

1982년 당과 정부는 현황을 검토한 후 두 개의 문서를 반포하는데, "19호 문서", "국민 헌법"성명 역시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신앙의 자유에 대한 존중과 보호는 종교 문제에 대한 우리 당의 기본정책이다. 이것은 장기적 정책으로, 장차 종교가 자연히 소실될 때까지 계속 집행될 정책이다. 종교 자유의 정책은 다만 현재의 전략일 뿐이며 종교는 장차 자연히 소멸될 것이니, 공산주의의 최종 목표와 상충되지 않는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으로 유해한 것이며, 국가의 진정한 통치권은 무신론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있어야 한다는 중국 정부의 관점은 현재도 변하지 않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애국" 종교 단체를 승인함으로 종교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중앙집권적인 통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정부는 8개의 국민 애국 종교 단체를 승인했고, 그중 다섯 개 단체는 기독교와 천주교에 속한다. 공산당은 이 단체들의 임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렸다.

각 급 애국 종교 단체의 기본 임무는, 정부에 협조하여 종교 신앙 자유의 정책을 실행하는 가운데 종교인들의 부단한 애국적·사회주의적 각성을 도모하며, 종교계의 합법적 권익을 대표하며, 종교인들이 정상적 종교 활동을 하도록 조직 및 지도하고, 종교와 관련된 공작을 잘 처리토록 한다. 모든 애국 종교 단체는 당과 정부의 영도에 복종해야만 한다는 내용이다.

또한, 18세 이하의 청소년에게 전도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19세 이하의 청소년들을 입교시키거나, 사찰로 보내 중이 되게 하거나 종교 경전을 학습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1983년 12월, 「중국 청년보」는 청소년의 무신론 교육 강화를 호소했다. 특히 초등학생들은, "미신의 해악과 종교의 악영향"에서 보호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삼자교회의 예배 시에 어린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실제상으로는 그리스도인 가정의 아이들은 출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출석을 금지시키면, 삼자 교회에 나오던 부모들이 가정 교회로 떠나갈 것임을 교회 지도자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 정책과 국제 관계

중국 공산당은 종교가 국제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종교계의 대외적 관계는…우리 나라의 정치적 확산에 중요한 작용을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국민헌법"에도 명시한 것처럼 중국 공산당도 이런 경고를 했다.

"세계의 종교적 반동 세력은, 특히 로마 교황청과 기독교 선교회는 각종 기회를 틈타 침투 활동을 벌여, "중국 재탈환의 발판 마련"을 위해 기를 쓴다. 종교적 방면에서 우리의 방침은, 국제적 우호관계를 적극적으로 발전시키되, 적대적인 외세의 침투는 어떠한 것이든 결연히 반대한다." 이처럼 중국은 종교적인 관점에서 두려워하며, 강하게 막고 있다. 이로 인해 라디오나 문서, 혹은 기타의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러 중국에 가는 것을 막고 있다.


1. 삼자교회

정부 통제의 신사회(新社會)내에 있는 여러 비공산주의적 조직을 감독하는 부서가 바로 통전부(統戰部)이다. 이 통전부의 기능은 사회 다수 단체의 지지, 또는 최소한 묵인을 얻어내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반대 세력을 약화, 고립화, 중립화시켜서 마침내는 분화 소멸시키는 것이었다. 통전부는 국가 내 소수 민족, 부농, 민족 자본가(상인과 공업가) 및 각종 종교 신도들의 협조를 얻어내는 임무를 감당한다. 통전부는 종교 사무국 간부를 관리 및 임명하며, 종교사무국은 "애국" 종교 단체를 관리한다(삼자 교회 및 중국 기독교 협회 포함).

삼자회는 종교 사무국 책임 하에서 교회라기 보다는 정부와 교회간의 중개인 역할을 하는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삼자회는 정부의 한 행정 기관으로, 개방된 모든 교회를 통제하며, 교회가 규정에 따라 활동하도록 감독한다. 헌법 제29조는 삼자회의 정치적 종교적 양방면에서의 목적을 설명하고 있다.

「본회는 중국 그리스도인들의 반제(反帝), 애국적 조직으로 다음과 같은 목적을 가진다. 즉 중국 공산당과 인민 정부의 영도 하에 전국의 그리스도인들의 단결을 도모하여 조국 사랑을 촉구하는 동시에, 국가의 법률을 준수하며, 자치, 자양, 자전의 원칙과 교회의 독립과 자주의 원칙을 견지하고 삼자 애국 운동의 성과를 보위하는 것, 또한 정부의 종교 신앙의 자유 정책 집행에 협조하고, 고도의 민주화와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갖춘 현대화된 사회주의 강국인 중국 건설에 적극 이바지하며, 대만의 조국 복귀를 촉진해 조국 통일을 실현하며, 패권주의에 반대해 세계 평화를 수호한다.」

1950년대 초 중국 공산당은 점차적으로 기존의 개별 종교 단체에 압력을 가하면서 그 기관들을 삼자회의통치권에 복속시켰다. 교인들은 반드시 교회의 정치 학습반에 출석해야 했으며, 특히 자아 비판 회에서는 자신들뿐만 아니라 남들도 비판해야 했다.


2. 가정교회

가정교회의 뿌리는 중국이 공산화되기 이전의 토착교회라고 할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기 전 가정교회와 토착화 운동은 서로 연관되어 있었다. 가정교회는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교회와는 조금 다른 그들 나름대로의 토착회 된 교회, 즉 소군교회, 진야소교회, 야소가정 등의 형태로 단체끼리 가정에 모여 집회를 가졌다.

오늘날 가정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취회소에 속했던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1949년 혁명 이후 가정 교회 모임들은 삼자회 가입을 거절한 목사와 동료 기독교인들을 배반하도록 종용하는 삼자회의 태도를 비난했다. 문화 혁명 시기까지 그러한 혼란 가운데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소그룹 모임뿐이었다. 가정교회는 문화혁명 기간 감옥에 갇혔던 성직자와 신자들이 석방되면서 그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기독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이런 모임이 정규적으로 계속되면서 교인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문화혁명 이후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피해서 지하로 잠입해 들어갔으며 이를 계기로 중국의 상황에 맞는 토착화된 가정교회가 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이 가정교회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 가정교회운동에서 기원하였으며 삼자운동기의 반대세력들의 모임에서 등장하게 되었고, 문화혁명기의 탄압을 통해 제도 교회가 사라져 가는 것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고 본다.

오늘날 중국 그리스도인의 80% 이상이 가정 교회 교인으로 그들은 중국 기독교의 대표적인 주류이다. 문화혁명의 종말을 고한 1976년 이후 가정 교회는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운남성의 한 지역을 예로 들면 그곳의 현 그리스도인들 중 95%가 1976년 이후에 그리스도께로 돌아온 사람들이다. 가정 교회는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백성을 보존시키시고 자신의 목적을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을 시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이다.

가정 교회들은 극심한 시련을 통해 정화되었다. 종파의 분열 같은 불필요한 요소들도 과감히 탈피해 나갔다. 단지 말씀 선포에만 의존하지 않고, 개인적인 친숙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즉각적인 믿음의 고백에 기반을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신자 개개인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간증들이 예배 시간에 포함되기도 한다.


(1) 가정교회의 유형과 조직

가정교회는 농촌 가정교회와 도시 가정교회로 분류할 수 있다. 중국 인구의 80%가 농촌에 거주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정교회 신자들도 농촌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농촌교회에는 연장자가 많지만 청년들과 어린이들도 참석한다. 대체로 나이 많은 연장자가 지도자로 있고 근래 들어 청년들이 훈련되어 설교나 전도활동을 담당하고 다른 지역을 파송되기도 한다. 도시교회는 농촌처럼 연령의 구분 없이 모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연장자들 모임과 젊은 지식인들, 고급중학교 이상 학력의 직장인들, 대학생들의 모임으로 구분되어 있다.

2,000명, 또 하나는 500명으로 구성된 가정교회는 주일 저녁에 계속 모임을 갖고 있다. 그중 일부 교인들은 주일 오전에는 삼자 교회에 참석하여 당국과의 마찰을 피하고 있다. 개방된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수용할 정도로 크지 않았으므로, 당국은 현재까지 주일 저녁의 가정 집회는 반대하지 않았다. 독립된 가정 교회에 대한 정책은 지방마다 각 지역 당국의 입안에 달려 있음을 반영한다.


가정교회는 3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1)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가정 교회들은 죄를 회개케 하는 영과, 한 때 십자가의 원수 되었던 자의 회심과, 그리고 병고침과 악한 영들로 인해 귀신들린 자들의 치유를 통해, 성령님이 역동적으로 일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한다.


2)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크다.

3) 대부분의 목사들이 투옥되는 바람에 평신도의 지도력이 성숙되었다. 최근에 들어 이전에 투옥되었던 교회 사역자들이 풀려났으며, 그 후 나이 어린 제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평신도 사역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3. 삼자교회와 가정교회의 문제점

(1) 삼자교회의 문제점

1) 목회자 문제. 목회자가 양적으로 부족하다. 또한 있다고 해도 부적격자가 많고 부패현상 또한 심각하다. 그리고 목회자간의 세대차이에서 오는 갈등, 복음적이고 충성된 목사와 정치적이고 완고한 목사간의 갈등이 크다. 그리고 농촌교회의 전임 목회자 부재 현상은 상당한 기간 동안 호전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고 있다.


2) 가정교회와의 갈등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3) 삼자교회의 정통성 문제. 중국이 더 과감한 시개혁과 정치체제 변화를 추구할 경우 삼자교회는 정통성 논리에서 가정교회의 입장보다 훨씬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4) 어린이 주일학교 운영 문제와 청년회 지도 및 운영 문제가 심각하다.

(2) 가정교회의 특성과 문제점

데이비드 애드니(David H. Adeney)는 가정교회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 가정교회는 토착적이다.
2) 가정교회는 가족단위에 기초한다.
3) 가정교회는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했다.
4) 가정교회는 그리스도의 主되심을 강조한다.
5) 가정교회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확신한다.
6) 가정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
7) 가정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이다.
8) 가정교회는 서로 돌아보며 나누는 교회이다.
9) 가정교회는 평신도의 지도력에 의존한다.
10) 가정교회는 성경적 가르침이 필요하다.
11) 가정교회는 고난으로 정결케 되었다.
12) 가정교회는 열심히 전도한다.

가정교회는 문제점도 안고 있다. 강성광은 가정교회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즉 사역자의 양적, 질적 부족, 이단문제, 무분별한 지도자 순종 의식, 과거의 방법을 맹목적으로 고집하는 경직성, 외지 사역자들의 그릇된 선교활동, 종파간의 차이점, 삼자교회와의 갈등, 삼자회와 중국 공산당으로부터의 새로운 압력, 복음의 편중 현상, 농촌과 도시의 균형적인 교회 성장의 문제, 물질적 유혹의 위기에 처한 신자들, 성경 및 신앙서적의 부족 현상 등이 있다.

또한 믿음의 시련이 가져다준 문제점으로, 고난의 경험이 없는 자들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 그리고 박해 기간 동안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배반하거나 신앙을 저버린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태도, 이로 인한 영적 자만심 그리고 다른 사람, 특히 서양인들을 포용하고 용납하며, 함께 나누는 일을 꺼려하는 일들이 새롭게 문제시되고 있다.

부흥하는 교회 가운데 훈련받은 사역자가 부족하다. 중국의 다양한 신학교 출신의 기독교인들 모두가 성숙하고 훈련받은 목회자와 복음 전도자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한탄하다. 삼자 애국 운동(TSPM)/CCC신학교의 600명 이상의 전임 신학생들과 가톨릭 애국 협회(CPA) 신학교의 700명의 신학자들로는 너무 적은 수여서 특히 신학적으로 훈련받은 연로한 지도자 세대가 빠르게 사라져감에 따라 더욱 현재의 필요들을 충당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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