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빈민촌 돌다 가축은행 도움 재활
ㆍ지구촌나눔운동, 자르갈란트서 빈민사업
하얀 나라 몽골
몽골의 겨울은 하얗다. 영하 30~40도를 넘나드는 건조하고 추운 날씨 탓에 한 번 내린 눈은 쉽사리 녹지도 않는다. 뭉치지도 못해 사막의 모래알처럼 바람에 흩날리며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며 긴 겨울을 난다. 이렇게 늘 눈을 볼 수 있다 해도 이곳의 겨울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 3년간 이어진 극심한 혹한과 폭설은 몽골을 얼릴 기세로 으르렁거렸고, 기온이 영하 52도까지 떨어지는 사상초유의 한파에 뼈만 앙상한 가축들의 사체가 곳곳에 쌓여갔다. 하얀 눈이 몰고 온 재앙이라고 해서 ‘차강조드(하얀 재앙)’라 불리는 자연재해가 3년간 지속되는 사이, 몽골 전체 유목민의 20%가 가축 600만두를 잃었다. 전 인구의 15%인 45만명이 이재민이 됐다.
몽골 울란바토르시 손깅하이르항구 자르갈란트 마을에서 가축은행의 지원을 받아 소를 키우고 있는 주민들. <사진 제공|조현주 소장>
유목민에게 가축을 잃었다는 것은 생계수단을 잃었다는 뜻이다. 먹고 살 길이 막힌 유목민들은 이동식 주택인 ‘게르’(몽골의 전통식 천막)만 들고 무작정 수도 울란바토르 시내로 몰려들었다. 남한의 15배, 한반도의 7배에 해당하는 국가에서 인구의 절반 이상이 그 넓은 땅을 다 팽개치고 작은 수도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시내에는 가축을 잃은 유목민들을 수용할 만한 일자리가 없다. 부푼 꿈을 안고 시내로 모여든 유목민들의 일부는 마땅한 대안이 없어서 시내 주변부로 모여들었고 ‘게르촌’이라 불리는 이주민 집단 빈민촌을 형성해 갔다. 또 다른 유목민 일부는 차가운 현실에 다시 시골지역으로 돌아갔다. 지금도 많은 유목민들이 어디에 정착해야 할지 몰라 시내로 몰려가다 시골로 돌아가기를 반복하고 있다.
가축 잃은 유목민들, 도시서 빈민생활
울란바토르 시내 중심에서 60㎞ 떨어진 울란바토르시 손깅하이르항구 자르갈란트 마을은 가축을 잃고 시내로 이주해오던 유목민들이 근교에서 시내 분위기를 살피기 위해 잠시 머물려다가 정착하기도 하고, 시내에서 살아본 유목민들이 적응하지 못 해 다시 시골로 이주해오는 곳이기도 하다. ‘행복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자르갈란트 마을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울란바토르 시에 해당하지만, 지역민의 87% 이상이 목축업에 종사하는 유목민 마을이다. 실제로 시내 중심을 벗어나 한 시간쯤 차를 타고 달려 나온 것뿐인데 도심의 아파트와 자동차 행렬은 온데간데 없고 드넓은 초원에 듬성듬성 보이는 게르와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도로가 완전히 다른 풍경을 연출해 낸다. 방금 전 달려온 도로가 타임머신의 활주로였나 싶을 정도로 어느새 21세기에서 13세기로 이동해 온 느낌마저 든다.
2002년 몽골에서의 지역사회개발을 결심하고 지구촌나눔운동(세계 빈곤문제 해결과 시민사회 발전을 위해 설립된 개발NGO) 몽골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처음 방문한 몽골은 얼음이 다 녹지 않은 듯 여전히 차가웠다. 무서운 ‘차강조드’의 터널을 지나 녹록지 않은 삶을 향해 발버둥치고 있는 자르갈란트의 주민들은 망연자실했다. “평생 가축을 돌보며 가축과 또 자연과 더불어 살아왔는데…”라며 말을 잊지 못하는 사람, “자연재해로 가축이 다 죽었다”며 자연을 향해 분노하는 사람, “이제 살 길이 없어요. 가축 돌보는 일 외에는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가축을 새로 구입할 돈도 없어요”라는 사람. 저마다 울분이 쌓인 사람들은 허공에 외치고, 낯선 외국인 무리를 향해 한탄했다. 타는 가슴에 하소연을 하긴 해도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는 않았다. ‘차강조드’ 이후 몽골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국제사회를 향해 공식적으로 SOS를 친 덕분에 많은 외국인들이 ‘몽골을 돕겠다’며 다녀간 모양이었지만,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를 지켜본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의심이 가득했고 기대도 없다. 마을대표인 동장은 대놓고 “한 1~2년 뭐 좀 해보겠다고 생색만 내다가 돌아갈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지구촌나눔운동을 향한 자르갈란트의 첫 표정은 ‘불신’이었다.
가축 살 돈 빌려주기 사업
몽골 자르갈란트 지역의 지역개발사업의 모토는 ‘소득 높고, 살기 좋은 자르갈란트 만들기’로 정했다. 유목민들을 위한, 그것도 갑작스럽게 가축을 잃어서 삶이 수렁으로 빠지기 시작한 사람들을 위한 소득증대사업으로는 ‘가축은행’이 결정됐다. 가축을 키워본 경험이 있어 기술은 있되 가축을 구입할 돈이 없는 가난한 유목민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가축을 빌려주고 가축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소액융자사업으로 가축을 구입할 ‘돈’을 빌려주고 가축을 키우며 생기는 우유 판매수입 등의 소득을 모아 매달 조금씩 돈으로 상환하도록 하는 것이다. 일정 기간 상환이 모두 끝나면 자연스럽게 가축은 수혜자의 소유가 된다. ‘가축은행’ 대출 희망자 접수를 받는다는 광고문이 온 마을에 내걸리자, 땅이 꺼져라 한숨만 내쉬던 유목민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첫 해인 2003년 4월에 24명의 유목민이 가축은행을 통해 젖소 두 마리씩을 구입했다.
그런데 가축은행의 첫 번째 대출금 전달식을 하고 나니 여기저기서 불편한 말들이 들려왔다. 유목민 1명당 60만투그릭(당시 60달러)씩 총 1만4000달러의 사업비를 이미 지출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고서는 잠시 왔다가는 외국인에게 돈을 갚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로 의견을 바꾸기 시작했다. 모두가 ‘아무도 상환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동의하는 듯했고, 나만 홀로 외롭고 또 조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초조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며 ‘분명 상환을 할 것이다’라는 자기 최면으로 희망을 놓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시 나에게 무의식중에 생긴 버릇은 틈 날 때마다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서있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 멀리서 희미하게 먼지를 내며 점점 커지며 다가오는 점 하나가 보였다. 가까워오는 점을 자세히 보니 한 필의 말위에 유목민 전통복장인 ‘델’을 입은 초원 위의 사람 모습이었다. 말이 가까워질수록 알 수 없는 기대로 내 심장도 거칠게 뛰었고, 그날 우리는 첫 번째 상환금을 받을 수 있었다. 한 달치 상환금인 3만투그릭가량의 적은 돈이었는데, 그날 말을 타고 달려오던 사람의 모습과 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꺼내어 건네준 돈을 받아든 감격은 6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미쳤다”고 말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말을 타고 달려온 첫 번째 타자 뒤로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우유를 팔아 모은 수입을 조금씩 사무실로 들고 왔다. 1년, 2년이 지나자 상환을 마친 사람들이 속출했다. 2007년까지 상환율은 93%로 집계됐고, 6년간 진행된 가축은행 사업으로 335가구가 총 620마리의 젖소를 구입했으며, 그 가축을 통해 다시 일어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1~2년 뭐 좀 해보겠다고 설치다가 돌아가겠지”라고 생각하던 마을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지구촌나눔운동 몽골사업소는 2002년부터 7년째 몽골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2004년부터는 SK텔레콤의 후원도 받아 더욱 안정적으로 사업을 꾸려가고 있다.
희망의 땅 ‘자르갈란트’
울란바토르시 손깅하이르항구 자르갈란트 마을에 있는 GCS-SKT 축산시범농장에서의 조현주 지구촌나눔운동(GCS) 몽골사업소장.
가축을 지원하다보니 9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눈이 내리는 긴 겨울을 나기 위해 가축을 위한 사료와 건초가 유목민의 생계와 직결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겨울철 값이 부쩍 뛰어올라 사료, 건초를 구입하지 못하는 가난한 유목민들을 위해 사료은행도 시작했다.
옛날 우리나라의 ‘추곡수매제도’처럼 여름철 저렴하게 건초와 사료를 구입해 두었다가 값이 몇 배로 뛰어오르는 겨울철에 여름철 구입가격으로 유목민들에게 다시 판매하는 것이다. 겨울철 건초와 사료의 양과 질은 젖의 양과 연결돼 유목민의 가계소득으로 직결된다.
7년째 살고, 일하고 있는 자르갈란트는 이제 고향 같다. 겨울은 여전히 속눈썹에 고드름을 달아야 할 만큼 혹독하고, 주민들은 지금도 지나가는 나를 보며 “더 잘 살게 도와 달라”며 다양한 하소연을 하지만 표정은 예전과 다르다. 냉기가 가득하던 자르갈란트 마을은 조금씩 조금씩 온기를 더해가고 있다. 하나같이 ‘불신’의 표정이던 주민들은 ‘신뢰’와 ‘희망’의 카드를 내보이고 있다. ⓒ
경향신문 조현주 지구촌나눔운동 몽골사업소장 20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