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北方 遊牧民族 時代(BC 20C~AD 12C)
가. BC 20C~ 몽골초원~카스피해간 중앙아시아에 유목민이 활동
  - 騎馬 군사력을 이용, 부족국가 또는 小국가 형성
  - BC 8C부터 약 500년간 黑海와 카스피海 북쪽에서 스키타이 (Scythae)문화를 꽃 피움
나. BC 209 흉노족(匈奴族, 훈족)이 유목민족으로서 최초의 통일국가 형성. 匈奴族은 東으로는 한반도, 西로는 터어키, 南으로는 만리장성, 北으로는 바이칼湖까지 영토 확대
다. 2C~ 선비족(鮮卑族)이 흉노족 지배 - 선비國은 5C경 華北에 진출, 북위 건국
라. 4C~6 C 중반 유연족(柔然族)이 몽골지역 지배
마. 6C중반~ 투르크系의 돌궐族이 몽골지역 지배
바. 8C중반~ 위구르族이 몽골~중앙아시아간 광대한 영토 지배
사. 916~1125 몽골族의 일부인 遼 부족(거란族)이 융성
 
2. 몽골帝國 時代(1206~1368)
가. 몽골은 12C 遼와 金에 예속 몽골초원~카스피해간 중앙아시아에 유목민이 활동
나. 징기스칸(汗)의 등장 - 1162 예수헤(父), 후엘렌(母) 사이에서 출생 (본명은 테무친, 중국식 한자어로 鐵木眞)
- 1206 몽골 통일 및 칭기스칸(Chinggis Khan, 우주의 지배자 라는 칭호를 받음)
- 1215 北京 점령
- 1227 서하 정복길에 병으로 사망 ※ 재위 22년중 大帝國 건설 (주치, 차카타이, 어거데이, 톨루이 등 네 아들과 동생에게 영토 분봉)
다. 몽골帝國의 興亡 2代 어거데이칸(Ogotai Khan-태종, 1229-1241)
   - 칭기스칸의 셋째 아들 - 금나라 정복(1234)
   - 3차례 고려 침공(1231, 1232, 1235)
   - 러시아 키에프 公國 정복
   (1240,칭기스칸의 장손자인 바투장군)
   - 폴란드 및 헝가리 침공(1241,바투장군)
   - 태종의 사후 5년간 황제계승권을 둘러싼 권력쟁탈전이
   벌어짐 투르게네의 섭정 (어거데이 부인, 1242-1246)
3代 구유크칸(Guyuk Khan, 1246-1248)
   - 황제 재임 2년만에 돌연 사망, 칭기스칸의 장손자인 바투가
   보낸 자객에 의한 사망설이 유력함
4代 뭉케칸(Munkhe Khan -헌종, 1251-1259)
   - 雲南, 티벳지역 평정(쿠빌라이)
   - 2차례 고려침공(1252, 1254)
   - 페르시아 및 소아시아 일대 장악(1258)
   - 남송 원정도중 장티푸스로 사망함(1259)
5代 쿠빌라이칸(Khubilai-세조, 1260-1294)
   - 어거데이의 아들 - 동생 Bukhe와 후계자 계승문제로 투쟁을
   벌여 승리하고 황제로 등극함.
   - 남송정벌(1272), 수도를 하라호린에서 上都, 北京으로 천도,
   국호를 元으로 고침 (1271)
   - 고려와 연합하여 두차례 일본정벌에 나섰으나
   태풍으로 실패 (1274, 1281)
   - 일본, 인도차이나 자바 원정
元의 멸망(1368. 6월)
   - 쿠빌라이한 사후 칸(汗) 계승권을 둘러싼 왕실 내부 분열
   - 라마승 횡포로 인한 재정파탄
   - 몽골인 지상주의 정책으로 인한 漢人들의 불만고조
   - 마지막 황제 토곤터무르(Toguntemur-순조, 1333년 즉위)
   - 朱元璋이 이끄는 명나라 군에 의해 멸망
   - 러시아,대몽골 독립전쟁 승리
   (몽골의 러시아 지배종료,1483)
 
몽골帝國(4대 汗國과 元)의 興亡日誌
汗國名 건국자 존속기간 위 치 멸 망
어거데이 어거데이 (징기스칸의 3남) 1224~1310 몽골남부 알타이山~
발카슈湖 일대
도읍지: 에밀
차카타이
汗國에 병합
차카타이 차카타이 (징기스칸의 차남) 1227~1380 중앙아시아~아프가니스탄 지역
도읍지 :
초기: 아마리크
후기: 東차카타이-악스 西차카타이-사말칸트
내부분열
티무르에게 멸망
킵차크 바 투 (징기스칸의 장손자) 1243~1502 러시아 볼가강유역
도읍지: 사라이
모스크바公國의 독립
티무르의 침입 내부분열
쿨 라 그 (징기스칸 4남의 아들) 1258~1410 이란, 이라크 등 서남아 일대
도읍지: 타브리즈
내부분열
티무르에게 멸망
쿠빌라이 (징기스칸 4남의 아들) 1271~1368 중국전토, 몽골지역
도읍지: 대도(북경)
내부분열
홍건적의 난 (주원장)
몽골帝國의 歷史的 意義
유럽-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 육상·해상교통로를 발달시킴으로써 동·서간 경제·문화교류 촉진
  - 기독교·이슬람교의 동방전파
  - 지리학·천문학·역학·수학·지도제작법 등의 전래
  - 新航路 발견 촉진
※ Washington Post紙 1995년 송년특집호는 지난 1천년간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칭기스칸을 선정
  - 인터넷보다 700년이나 앞서 국제통신망을 건설했다는 점을 인정
 
3. 明·淸 服屬 時代(1368~1911)
가. 明나라에 복속 - 1368 明의 朱元璋은 元을 멸망시킨 데 이어 몽골본토로 쫓겨난 몽골인들을 또다시 정복
- 1434 몽골인들이 몽골 영토의 일부를 회복하여 明에 대항,
- 1551 明과 평화협정 체결
나. 淸나라에 복속 - 1635 내몽골인들은 여진족의 중국정벌을 지원하여 만주족의 중국정벌에 기여
- 1636 만주족(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이 내·외몽골 점령
- 1717 淸이 몽골 全域을 장악
- 1727 청·러간 캬흐타 조약으로 현재의 몽·러간 국경선 확정
- 淸은 漢族과 만주족을 몽골지역에 이주시키는 등 同化政策 추진
다. 反淸 운동 - 1755~ 反淸·反봉건·反식민지 운동을 계속 전개
- 1911 辛亥革命으로 淸이 붕괴되면서 獨立運動 확산
※ 1912~ 1919 러시아 보호하에 자치주로 존립
 
4. 몽골 獨立以後 時機(1921~현재)
가. 독립 과정 - 1921.7.11 몽골혁명의 아버지라 불리는 수흐바타르(D.Sukhebaatar)는 몽골인민(혁명)당을 창당, 소비에트 적군(赤軍)과 연합하여 中國軍을 몰아내고 독립선포
※ 몽골은 이날(7.11)을 혁명기념일로 기념하고 있으며, 7.11~13을 몽골민족 최대의 축제인 “나담축제” 기간으로 선정
- 1924.11.26 새로이 제정된 헌법에 따라 몽골人民共和國 선포
※ 세계 2번째의 사회주의 국가
- 1946,1947 중국은 外몽골의 독립을 인정하였으나, 內몽골은 중국의 自治區로 편입
- 1961 UN 가입
나. 개혁, 개방정책 추진 - 舊소련의 개혁·개방의 영향을 받아 몽골도 개혁·개방시작-
- 1988.12 인민혁명당은 몽골판 페레스트로이카인 신칠렐(Shinechlelt) 정책 채택
- 1990.7 인민혁명당 일당독재 포기 및 자유총선 실시
- 1990.9 인민혁명당 소속으로 대통령에 선출(간선)된 Ochirbat는 민주화 및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가속화 정부조직법, 인권법, 사유재산법 등 제반입법 추진
- 1992.1 新헌법 제정 국호를 「몽골인민공화국」에서 「몽골(Mongolia)」로 변경 자유시장경제체제 지향 및 중립·비동맹 민주국가 표방
- 1993.6 Ochirbat 대통령 선출
- 1996.6 총선실시 야당연합(민족민주당+사회민주당)인「민주연합」압승으로 「인민혁명당」의 75년 통치 종식 및 「민주연합연립정권」출범 - 1997.5 N. Bagabandi 대통령 선출(直選)
- 2000.7.2 총선실시 : 인민혁명당의 압승(76석중 72석 획득)
- 2000.12.14 헌법개정
- 2001. 6 대통령선거 실시 N.Bagabandi 대통령 재선
- 2004. 6. 27 총선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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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종교관련 대대적인 감사
지난 6월 22일부터 28일까지 울란바트르 시내 종교기관과 종교관련 NGO기관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가 진행되었다. 이번 감사는 종교 시설물 관련 법령, 시의회의 2005년 결정 사항의 집행차원에서 실시되었으며, 다시 한 주간 연장하여 7월 5일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이번 감사는 특정 종교의 탄압 차원보다는 결정된 법령의 집행 차원이라고 분석된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많은 기독교 교회와 기관들이 이번 감사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몽골 종교국은 종교 시설물을 불교의 사원 개념으로 보기 때문에 기독교의 교회(에클레시아)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시각의 차이 때문에 기독교는 교회의 등록을 비롯한 여러 부분에서 불이익을 당하곤 한다. 한 예로 정부는 불교 사원의 수와 교회의 수를 맞추기 위해 더 이상의 교회 등록을 꺼리고 있는 상황이다. 몽골 정부의 교회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관계없이 몽골 교회가 성경적 에클레시아를 바르게 만들어 갈 수 있도록, 그리고 이번 감사에서 지혜롭게 승리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
  이예레미야  특파원 / (2009-06-29 20: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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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빈민촌 돌다 가축은행 도움 재활
ㆍ지구촌나눔운동, 자르갈란트서 빈민사업


하얀 나라 몽골

몽골의 겨울은 하얗다. 영하 30~40도를 넘나드는 건조하고 추운 날씨 탓에 한 번 내린 눈은 쉽사리 녹지도 않는다. 뭉치지도 못해 사막의 모래알처럼 바람에 흩날리며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며 긴 겨울을 난다. 이렇게 늘 눈을 볼 수 있다 해도 이곳의 겨울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 3년간 이어진 극심한 혹한과 폭설은 몽골을 얼릴 기세로 으르렁거렸고, 기온이 영하 52도까지 떨어지는 사상초유의 한파에 뼈만 앙상한 가축들의 사체가 곳곳에 쌓여갔다. 하얀 눈이 몰고 온 재앙이라고 해서 ‘차강조드(하얀 재앙)’라 불리는 자연재해가 3년간 지속되는 사이, 몽골 전체 유목민의 20%가 가축 600만두를 잃었다. 전 인구의 15%인 45만명이 이재민이 됐다.


몽골 울란바토르시 손깅하이르항구 자르갈란트 마을에서 가축은행의 지원을 받아 소를 키우고 있는 주민들. <사진 제공|조현주 소장>

유목민에게 가축을 잃었다는 것은 생계수단을 잃었다는 뜻이다. 먹고 살 길이 막힌 유목민들은 이동식 주택인 ‘게르’(몽골의 전통식 천막)만 들고 무작정 수도 울란바토르 시내로 몰려들었다. 남한의 15배, 한반도의 7배에 해당하는 국가에서 인구의 절반 이상이 그 넓은 땅을 다 팽개치고 작은 수도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시내에는 가축을 잃은 유목민들을 수용할 만한 일자리가 없다. 부푼 꿈을 안고 시내로 모여든 유목민들의 일부는 마땅한 대안이 없어서 시내 주변부로 모여들었고 ‘게르촌’이라 불리는 이주민 집단 빈민촌을 형성해 갔다. 또 다른 유목민 일부는 차가운 현실에 다시 시골지역으로 돌아갔다. 지금도 많은 유목민들이 어디에 정착해야 할지 몰라 시내로 몰려가다 시골로 돌아가기를 반복하고 있다. 

가축 잃은 유목민들, 도시서 빈민생활 

울란바토르 시내 중심에서 60㎞ 떨어진 울란바토르시 손깅하이르항구 자르갈란트 마을은 가축을 잃고 시내로 이주해오던 유목민들이 근교에서 시내 분위기를 살피기 위해 잠시 머물려다가 정착하기도 하고, 시내에서 살아본 유목민들이 적응하지 못 해 다시 시골로 이주해오는 곳이기도 하다. ‘행복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자르갈란트 마을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울란바토르 시에 해당하지만, 지역민의 87% 이상이 목축업에 종사하는 유목민 마을이다. 실제로 시내 중심을 벗어나 한 시간쯤 차를 타고 달려 나온 것뿐인데 도심의 아파트와 자동차 행렬은 온데간데 없고 드넓은 초원에 듬성듬성 보이는 게르와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도로가 완전히 다른 풍경을 연출해 낸다. 방금 전 달려온 도로가 타임머신의 활주로였나 싶을 정도로 어느새 21세기에서 13세기로 이동해 온 느낌마저 든다. 

2002년 몽골에서의 지역사회개발을 결심하고 지구촌나눔운동(세계 빈곤문제 해결과 시민사회 발전을 위해 설립된 개발NGO) 몽골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처음 방문한 몽골은 얼음이 다 녹지 않은 듯 여전히 차가웠다. 무서운 ‘차강조드’의 터널을 지나 녹록지 않은 삶을 향해 발버둥치고 있는 자르갈란트의 주민들은 망연자실했다. “평생 가축을 돌보며 가축과 또 자연과 더불어 살아왔는데…”라며 말을 잊지 못하는 사람, “자연재해로 가축이 다 죽었다”며 자연을 향해 분노하는 사람, “이제 살 길이 없어요. 가축 돌보는 일 외에는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가축을 새로 구입할 돈도 없어요”라는 사람. 저마다 울분이 쌓인 사람들은 허공에 외치고, 낯선 외국인 무리를 향해 한탄했다. 타는 가슴에 하소연을 하긴 해도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는 않았다. ‘차강조드’ 이후 몽골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국제사회를 향해 공식적으로 SOS를 친 덕분에 많은 외국인들이 ‘몽골을 돕겠다’며 다녀간 모양이었지만,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를 지켜본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의심이 가득했고 기대도 없다. 마을대표인 동장은 대놓고 “한 1~2년 뭐 좀 해보겠다고 생색만 내다가 돌아갈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지구촌나눔운동을 향한 자르갈란트의 첫 표정은 ‘불신’이었다. 

가축 살 돈 빌려주기 사업

몽골 자르갈란트 지역의 지역개발사업의 모토는 ‘소득 높고, 살기 좋은 자르갈란트 만들기’로 정했다. 유목민들을 위한, 그것도 갑작스럽게 가축을 잃어서 삶이 수렁으로 빠지기 시작한 사람들을 위한 소득증대사업으로는 ‘가축은행’이 결정됐다. 가축을 키워본 경험이 있어 기술은 있되 가축을 구입할 돈이 없는 가난한 유목민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가축을 빌려주고 가축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소액융자사업으로 가축을 구입할 ‘돈’을 빌려주고 가축을 키우며 생기는 우유 판매수입 등의 소득을 모아 매달 조금씩 돈으로 상환하도록 하는 것이다. 일정 기간 상환이 모두 끝나면 자연스럽게 가축은 수혜자의 소유가 된다. ‘가축은행’ 대출 희망자 접수를 받는다는 광고문이 온 마을에 내걸리자, 땅이 꺼져라 한숨만 내쉬던 유목민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첫 해인 2003년 4월에 24명의 유목민이 가축은행을 통해 젖소 두 마리씩을 구입했다. 

그런데 가축은행의 첫 번째 대출금 전달식을 하고 나니 여기저기서 불편한 말들이 들려왔다. 유목민 1명당 60만투그릭(당시 60달러)씩 총 1만4000달러의 사업비를 이미 지출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고서는 잠시 왔다가는 외국인에게 돈을 갚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로 의견을 바꾸기 시작했다. 모두가 ‘아무도 상환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동의하는 듯했고, 나만 홀로 외롭고 또 조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초조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며 ‘분명 상환을 할 것이다’라는 자기 최면으로 희망을 놓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시 나에게 무의식중에 생긴 버릇은 틈 날 때마다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서있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 멀리서 희미하게 먼지를 내며 점점 커지며 다가오는 점 하나가 보였다. 가까워오는 점을 자세히 보니 한 필의 말위에 유목민 전통복장인 ‘델’을 입은 초원 위의 사람 모습이었다. 말이 가까워질수록 알 수 없는 기대로 내 심장도 거칠게 뛰었고, 그날 우리는 첫 번째 상환금을 받을 수 있었다. 한 달치 상환금인 3만투그릭가량의 적은 돈이었는데, 그날 말을 타고 달려오던 사람의 모습과 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꺼내어 건네준 돈을 받아든 감격은 6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미쳤다”고 말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말을 타고 달려온 첫 번째 타자 뒤로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우유를 팔아 모은 수입을 조금씩 사무실로 들고 왔다. 1년, 2년이 지나자 상환을 마친 사람들이 속출했다. 2007년까지 상환율은 93%로 집계됐고, 6년간 진행된 가축은행 사업으로 335가구가 총 620마리의 젖소를 구입했으며, 그 가축을 통해 다시 일어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1~2년 뭐 좀 해보겠다고 설치다가 돌아가겠지”라고 생각하던 마을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지구촌나눔운동 몽골사업소는 2002년부터 7년째 몽골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2004년부터는 SK텔레콤의 후원도 받아 더욱 안정적으로 사업을 꾸려가고 있다. 

희망의 땅 ‘자르갈란트’

울란바토르시 손깅하이르항구 자르갈란트 마을에 있는 GCS-SKT 축산시범농장에서의 조현주 지구촌나눔운동(GCS) 몽골사업소장.

가축을 지원하다보니 9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눈이 내리는 긴 겨울을 나기 위해 가축을 위한 사료와 건초가 유목민의 생계와 직결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겨울철 값이 부쩍 뛰어올라 사료, 건초를 구입하지 못하는 가난한 유목민들을 위해 사료은행도 시작했다. 

옛날 우리나라의 ‘추곡수매제도’처럼 여름철 저렴하게 건초와 사료를 구입해 두었다가 값이 몇 배로 뛰어오르는 겨울철에 여름철 구입가격으로 유목민들에게 다시 판매하는 것이다. 겨울철 건초와 사료의 양과 질은 젖의 양과 연결돼 유목민의 가계소득으로 직결된다. 

7년째 살고, 일하고 있는 자르갈란트는 이제 고향 같다. 겨울은 여전히 속눈썹에 고드름을 달아야 할 만큼 혹독하고, 주민들은 지금도 지나가는 나를 보며 “더 잘 살게 도와 달라”며 다양한 하소연을 하지만 표정은 예전과 다르다. 냉기가 가득하던 자르갈란트 마을은 조금씩 조금씩 온기를 더해가고 있다. 하나같이 ‘불신’의 표정이던 주민들은 ‘신뢰’와 ‘희망’의 카드를 내보이고 있다.

 경향신문 조현주 지구촌나눔운동 몽골사업소장 2009.1.5

징기스칸 군대 힘의 근원 아이락 [ Genghiskhan Military,s Power Source Iirak]

 



                                   몽골 겔 촌을 방문한 외부손님에게 아이락을 대접하는 몽골처녀

                                          



                                       
     
                                                               
                                                          말젖을 발효시켜 만드는 아이락(마유주)
  





  
                                                                 몽골인들의 말젖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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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인의 결혼식 풍경 - 아이락(마유주)은 몽골인의 실생활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먹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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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의 국기    몽고씨름



                      

             

                                        일본 스모계를 석권한 몽골출신 요코즈나   아사소류(朝靑龍)





                                                                    몽골의 초원풍경


                        
          
                                                         몽골인이 제작한 영화 징기스칸



                

                                                 몽고제국이 정복한 유라시아의 4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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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몽고제국의 수도였던 캐러코럼 의 유적지



                         

                                현재 중국에서 판매되고 있는 가죽 술부대에 담긴 마유주



몽골과 고려의 음식중에서  발효시킨 특성을 가진 비슷한 음식은 말젖을 발효시켜 만든 아이락(마유주)과  채소를 발효시켜 만든 김치가 있다.
고려시대부터 김치는 이미 김채라는 이름으로 한민족의  일반적인 전통음식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몽골의 아이락은 동물성의 음료로써 알콜도수가 낮은  5도 이내의 요구르트와 같은 술이다.
말젖을 발효시켜 만든 이 아이락은 몽골인의 실생활에 빼놓을수 없는 음료수와 같은 존재로 남녀노소가 같이 식사때는 물론 여느때에도 항상 음용하는 그들만의 귀중한 전통 음료이다.
이 아이락은  병든 환자에겐 대용식으로 제공하며 몽골 어린이들에겐 수시로 먹인다.
몽골에 정복되었던 러시아에서는 몽고풍의 먹거리 문화를 접하여 결핵환자를 치유하는 보조 음식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징기스칸도 한때 적장 쥬베의 독화살을 목에 맞고 혼수상태로 빠져  이 마유주 만으로도 쉽게 치유된 역사가 있다.
마유주에는 단백질,지방과 비타민 C , 비타민 A, B1등과 칼슘, 미네랄이 다량 함유되어있는 고단백 영양음료인것이다.
또한 음용시 모든 성인병에 탁월한 효과가 있어서 현재 몽골은 이 마유주를 전세계에 수출할 계획을 갖고있다 한다. 
동물성 단백질 공급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고려사회에서는 이렇다할 단백질 공급원이 별로 없었다.
고려는  몽골의 계속되는 침략에 수십차례의 항전을 벌였으나 결국 몽고에 굴복하여  강화를 맺을수 밖에 없었다.


또한  고려사회는  몽고풍이라는 여러가지 유목 문화적풍습을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다.
그중에서 아이락을 항아리에 넣고 열을가하여 증류시켜 항아리 윗부분에서 응집되어 떨어지는 맑은 독주를 모아서 만든 술을 네르멜또는 아르히라고한다.
경상도 방언에 소주를 빚고난 술지꺼기를 아래기라고 하는데 이는 몽골의 소주 아르히에서 전해져 왔음을 알수있다.
그러한 어원의 유래는 그리 어렵지않게 유추해 볼수있다.
 경상남도 마산에서 고려시대 일본정벌을 위하여 고려군과 몽골군이 집결했었던 것이다.
마산의 옛이름 합포에서 여몽 연합군은 2차례에 걸쳐 일본정벌을 시도했었지만 태풍으로 번번히 실패한 역사를 가지고있다.
이 소주의 제조법은 고려시대에 몽골에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 제조법은  말젖이 아니라 누룩으로 재료가 바뀌어 막걸리에서 소주를 채취하는 한국의 재래 소주제조법으로서 민간에서 꾸준히 이용되어 왔다.
이때 만약 막걸리가 아닌 마유주가 고려시대에도 몽고풍습으로 전해졌다면 아이러니한 역설이지만 이는 백성들을 위한 단백질공급원의 한방법으로써 국민의 식량대용으로 크나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몽골의 광활한 초원지대의 질좋은 초지와 기르는 대량의 말떼가 없이는 마유주생산이 불가능한 일이었고 또한 막걸리와같은 농주에 입맛이 길들여져있는 고려인에겐 마유주는 입맛에 맞지않는 그림의 떡이 였을지도 모른다.


고려시대에는 몽골군과 거란군 그리고 남쪽 왜구들의 빈번한 침략으로 백성들의 삶이 궁핍해질대로 궁핍해져 그야말로 초근목피의 생활로 목숨을 연명하다시피 했었다.
일설에 의하면  압록강변의  무자리들은 고려말기 무신정권때 굶어죽어 매장한 사람의 시체를  다시파서 인육을 먹을 정도로 식량이 귀했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백성들의 가난은 나랏님도 해결 못한다는 옛말이 있듯이 우선적으로 백성들의 배고픔을 먼저 해결할수 있어야 나라의 근본이 바로서는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이자 시대가 따로없는 우선적인 조건인것이다.
몽골과 고려의 다른점이 있었다면 몽골에는 어릴적부터 인간의 생장을 증진시키고 항상 먹을수있는 아이락 (마유주) 이라는 고단백 식품이 존재했다는점이다.
이 아이락은 징기스칸시대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지금까지 내려오는 몽골의 전통음식이자 몽골인의 생명공급원 인것이다.

 

원본: Sturmgechutz 슈트름게슈쯔 의 밀리터리와 병기( Military & Weapon )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를 1.85㎞ 상공에서 본 위성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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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를 1.85㎞ 상공에서 본 위성사진입니다.

바로 아래 사진은 더 크게 보실 수 있도록 이미지슬라이드를 했습니다. 이미지슬라이드에 마우스를 대고 클릭하시면 더 자세한 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울란바토르 시내 전경 동영상입니다.


아래는 울란바토르 시내약도입니다. 몽골 정부청사와 수흐바타르광장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 있는 울란바토르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몽골 수도 울란바타르 전체 모습입니다. 남북으로 뻗어 있는 산들로 인해 울란바토르는 세로길이는 짧고 가로길이가 긴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몽골정부청사를 기준으로 서쪽으로 다섯 블록 가면 간단사원이 보이고 서남쪽엔 징기스칸공항이 보입니다. 

울란바타르 시내 전체모습입니다. 정중앙의 몽골종합청사(Govement House)를 중심으로 상하좌우 양쪽으로 뻗어 있는 울란바토르 중심부 모습입니다.

몽골정부청사와 수흐바타르광장 주변모습입니다. 정부청사 뒤쪽으로는 몽골국립대가 있고 오른쪽 옆에는 Cultural Palace, 왼쪽은 우체국(Central Post), 몽골역사박물관(Mongolian Historical Museum ) 등등, 수흐바타르광장 앞쪽은 몽골외교부와 주몽골한국대사관 바양골호텔 등등이 자리잡고 있어요.

몽골정부청사 왼편길 하단 하늘색 ㄴ자 건물이 몽골 국영 백화점(State Department Store)

국영백화점 왼편으로 한블록 더 가면 컴퓨터랜드(Computer land)가 있어요.

컴퓨터랜드 왼편으로 한 블록 더 가면 칸은행(Khan Bank)이 있고 그 위는 간단사원(UB Gandan monastery) 가는 길이다. 아래는 징기스칸공항 가는 길이예요.

몽골정부청사앞의 모습이다. 바양골호텔(Bayangol Hotel)도 보이고 그 옆엔 라마사원(Choijin Lama Temple) 구역이 보입니다. 바양골호텔 앞 블록의 요철모양 건물은 드라마극장(National Academic Drama Theatre)이구요. 

중앙의 세로로 넓은 도로는 서울거리(On the Seoul street)이예요. 오른편으로 한 블록 건너가면 러시아대사관도 보입니다. 서울거리의 오른편에는 밀리패션샵(MILI fashion shop)이 있구요. 하단의 On the Seoul street라고 써있는 곳엔 서울정이라는 팔각정이 있습니다. 그 아래 넓은 광장은 몽골서커스(Mongolian Circus)가 있어요. 

이곳엔 BBQ(BBQ Restaurant)가 보이는군요.위쪽 사거리 방향은 간단사원 가는 길이예요.

간단사원(UB Gandan monastery) 모습입니다.

몽골국립대학교(Mongolian National University in Ulaanbaatar) 모습입니다. 한 블록 전체를 차지하고 있네요. 마치 건물로 담 쌓은 듯한 모습이예요.

주몽골한국대사관몽골외교부(Ministry of Foreign Affairs) 옆에 있어요. 옆에는 칸플라자(Khan plaza)도 보이고 몽골건강과학대학(Health Sciences University of Mongolia)도 보이네요. 칸플라자 건너편 한 블록 옆엔 희생자기념관(Memorial Museum of Victims of Political Persecution)이 있구요.

바양골호텔(Bayangol Hotel)이 보이구요. 건너편 한블록의 허허벌판처럼 보이는 곳은 서울레스토랑이 있어요.

러시아대사관(Russian Embassy in Ulaanbaatar)

장거리버스터미널입니다. 북쪽 방향은 간단사원 가는 길, 남쪽은 UB기차역 가는 길입니다.

UB기차역이예요. 수흐바타르광장을 기준으로 서쪽에 있는 간단사원의 서남쪽 방향에 UB기차역이 있어요. 

징기스칸공항입니다. 울란바타르 시내에서 서남쪽 끝에 자리하고 있어요. 공항에서 내려 울란바타르대학교까지 택시비는 주간 6000Tg 야간은 8000Tg라고 UB대학이 안내하고 있습니다.

울란바타르대학교와 몽골한인들께서 운영하시는 건물은 하나도 못찾겠군요. 아시는 분께선 댓글이나 메일(azdada@paran.com)로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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