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북한 탈북자들 단속 피해 산속 토굴서 살아
노임 안줘도 신고 겁나 "냉가슴"...달북여성 인신매매범 설쳐
중국 연길시 외곽의 어느 산. 오후1시쯤에도 영하 5도를 밑도는 산 속 눈길을 40분 가량 오르자 토굴이 나왔다. 1m 가량 땅을 파 나무로 벽과 천장을 만든 이 집은 천장에 가로 50㎝ 세로 30㎝ 정도 크기의 채광창 하나를 냈을 뿐, 밖에서는 그냥 땅처럼 보인다.
사진설명 : 중국 옌지시 외곽 산속에서 6개월째 토굴 생활을 하는 탈북자 홍 모씨가 물을 긷기 위해 아들과 함께 토굴 밖으로 나오고 있다. 다섯살 난 아들은 외부인이 접근하자 겁에 잔뜩 질린 표정을 지었다.
가로 6 , 세로 2.5 의 장방형 온돌방에는 97년 8월 탈북한 홍모(32)씨와 큰 아들 영칠(5·가명)이가 있었다. 남편 이모(34)씨는 산 아래 인가에 일하러 가 이틀째 집을 비웠다. 살림살이라곤 헌 옷을 찢어 만든 이불 3채와 냄비 3개, 밥그릇 몇개, 성서 한권, 라디오, 옷가지 몇점, 요강 등이 전부. 하지만 홍씨는 “이나마 밥을 거르지 않고 먹으니 좋다”고 말했다. 식량은 남편의 일삯이나 산에서 잡은 토끼를 팔아 받아오는 쌀로 충당하고, 간장-된장 등은 주위 조선족들에게 도움을 받는다.
이씨 부부가 이 토굴 생활을 한 것은 6개월째. 탈북 초기엔 인가 근처에 비닐 움막을 치고 두 딸과 영칠이 등 다섯식구가 함께 살았다. 그러나 가족이 많아 눈길을 끄는 데다 변경 군대의 단속을 피하기 어려워 이내 인가에서 지금 토굴까지의 중간쯤 되는 곳으로 움막을 옮겼다가, 그것도 불안해 4월에 더 깊은 산 속,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8월에는 8세, 6세인 두 딸과 생이별을 했다. 만일의 사태에 피하기 쉽고, 아이들이 좀 더 안전하게 생활하며 공부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탈북자 지원단체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맡긴 것.
그에 앞서 4월엔 낳은지 한달 남짓 되는 막내 아들을 애가 없는 조선족 집에 500위안(한국 돈 6만여원)을 받고 입양시켰다. 홍씨는 『자식을 기르지 못해 남에게 팔아야 하는 부모 마음이야 얼마나 찢어지겠느냐』며 흐느꼈다. 홍씨는 요즘 그 500위안 중 일부로 라디오를 사서 한국 방송을 듣고 있다.
단둥(단동)에서 무역을 해온 황모(41)씨는 “탈북주민들이 중국인이나 조선족들에게 농락당하는 경우가 최근 들어 늘고 있다”며 “이 때문에 요즘은 대도시보다 아예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농촌으로 잠입해 은신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시골도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북한 회령을 강 건너 마주보는 삼합에서 약 10㎞ 떨어진 한 마을에선 지난 10월 초 탈북자 단속에 5명이 붙잡혀갔다.
중국 연길시에서 ‘꽃제비’ 생활을 하는 광수(15)는 살고 있는 시장주변에서 도난 사건만 나면 용의자로 몰린다. “11월 초, 주변에서 자전거가 없어지자 ‘북조선 아이들이 그랬다’고 누명을 씌워 3명을 잡아갔어요. 억울하다고 항변할 수도 없는 처지가 안타깝습니다.” 연길 외곽 농촌에 사는 탈북자 홍정삼(62·가명)씨의 말이다. “옥수수만 없어지면 의심의 눈초리가 번득인다”고 했다.
중국 땅에서 탈북자들은 온갖 천대와 괄시를 받고 있다. 힘들여 일해도 노임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작년 4월 중국에 온 함북 무산 출신 정필(16·가명)이는 “월 200위안(한국돈 2만5000원 정도)을 받기로 하고 지난 1∼3월 석달 간 공사장에서 일했지만 한푼도 못 받았다”고 말했다. 98년 4월 탈북한 강홍원(56)씨는 “탈북 후 지금까지 8곳에서 농삿일을 해줬으나 한번도 노임을 받지 못했다”며 “돈 달라고 했다가 신고라도 할까 두려워 따지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탈북 여성들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탈북자 지원단체 관계자는 “요즘에는 아예 탈북여성만을 노려 두만강 주변 국경지역에서 기다리다가 여자들을 잡아 내몽골이고나 산둥성 등지의 다른 도시에 파는 전문 인신매매범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인신매매 조직은 국경 부근의 탈북여성 ‘체포조’, 이들을 타도시로 옮기는 ‘연결조’, 다시 수요자에게 전달하는 ‘마무리조’ 등 3단계로 분업화돼 있다고 한다. 최근 탈북 여성들의 '몸값'은 나이와 미모 등에 따라 200∼8000원까지 다양하다.
중국 내 탈북자 인터뷰 - 중국 내 탈북여성 성매매 실태 고발
몸 팔아서 남편 병 간호
사례1.
김희연(가명. 함북. 38세) 씨는 두 아이의 어머니로 아픈 남편의 병원비 마련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노래방에 나가고 있음.
가족 생계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노래방 선택
-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전에는 다방에 다니다가 같은 탈북여성의 소개로 노래방에 나가고 있다.”
- 얼마씩 받고 있나.
“한 달 가족 생활비는 600원 정도이다. 다방 같은 데서는 500원 이상 받기가 쉽지 않다. 노래방에 나가 같이 술 한 잔 먹었는데 30원을 팁으로 주었다. 남자들과 놀면 돈을 더 벌 수 있다. 한 달에 700~800원 정도 번다.”
- 가족들의 생계비 때문인가.
“가족들 먹여 살리려고 어쩔 수 없이 선택했다. 결국은 안마방에도 나가게 되었다. 무슨 일을 해서라도 애들을 먹여 살리려고 했다.”
- 남편의 반대는 없었나.
“남편이 아프니까 알고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반대는 하지 않았다. 10시 이전에만 들어오라고 했다. 남편도 가슴은 아프겠지만 결핵약 살 돈도 없고 현실이 따라오지 못하니 어쩔 수 없이 했다.”
노래방도 얼굴 보고 뽑는다
- 그 돈이면 생계유지가 되는가.
“아들 학교 보내는데 600원 정도 드는데 몸을 팔아서라도 자식을 위해 일했다. 지난해에는 그나마 괜찮게 살았다. 한 달에 보통 10일 정도 일했다. 그런데 나도 술을 많이 먹는데다 피임약 때문에 병이 생겼다. 올해 두 달 반 동안은 출혈로 병들어 거의 일을 못했다. □□ 한 곳에서만 쌍발(성매매)을 하다보니 그렇다. 그래서 지금은 ○○ 쪽으로 나가고 있다.”
- 탈북여성 대부분이 이런 일을 하고 있나.
“다른 일을 하려고 해도 안 받아주니까 탈북여성들의 대부분이 이렇게 살 것이다. 조선 부모들이나 가족들한테도 돈을 부쳐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부쳐주는 돈의 30%가 전달료로 떼이고 나머지만 가족에게 전달된다. 이 일도 얼굴이 안 예쁘면 받아주지 않는다. 주변에 있는 탈북 여성들은 대부분이 쌍발(성매매)해서 고향에 돈을 부친다. 나도 장사부터 안 해본 게 없다.”
- 아픈 곳의 치료는 받고 있나.
“두 달 반 동안 하혈로 힘들어도 남편 치료 때문에 약도 못쓴다. 별의 별 더러운 남자들이 다 있다. 출혈하고 피임약을 계속 쓰니까 일을 못해 집세를 못 내고 있다. 부인병이라는 것이 바로 죽는 병이 아니고 골병 들어 죽는 거다. 한 달에 700~800원 정도 버는데 당장 집세가 걱정이어서 병원 갈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자궁 밑에 알 두 개가 있다. 종양인 것으로 안다. 돈 100원이 아까워서 못 갔다.”
- 남편의 건강 상태는 어떠한가.
“남편에게 곰열이고 광고약이고 다 사먹였는데도 병은 더 깊어간다. 남편은 병원에 있다가 돈을 못내 쫓겨났다. 그게 계기가 돼서 몸이라도 팔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남편 살리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위해 일할 테니까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고 말했다. 1년만 하겠다고 마음먹었으나 달리 살아갈 방법이 없어 계속하게 되었다. 나는 남편을 위해서는 더러운 돈이라도 벌겠다고 생각했다. 한 번은 남편이 왜 자꾸 하혈을 하냐고 물었다. 무슨 일 하냐고 추궁하더라. 공장에 700원 받고 일한다고 했다.”
힘들게 번 돈, 절반은 중개인이 차지
- 찾는 사람들은 많은가.
“○○에 3일 있다가 오늘 들어왔다. 손님들은 많지 않다. 사람 머리수에 따라 돈 받는다. 중국돈으로 50원 정도 받는다. 젊은 애들은 300~400원 정도 받는다. 중개인이 가운데서 절반씩 먹는다.”
- 같이 일하는 여성은 몇 명이나 되나.
“6명 정도 같이 일하고 있다. 나와 한 사람은 왔다 갔다 하는 경우다. 조선 여자는 나 혼자고 나머지는 모두 한족이다. 나중을 걱정하여 조선 사람은 잘 쓰지 않는다. 조선으로 잡혀 갔을 경우 보위부에서 알면 큰일 난다.”
- 언제까지 할 것인가.
“남편만 아프지 않으면 안 할 거다. 할 이유가 없다. 나이도 있고, 애들 때문에 하기 힘들다. 애들한테 더러운 누명은 남기고 싶지 않다. 2,000~3,000원 정도만 있으면 소채장사나 잡화장사 같은 것을 해보고 싶다.”
- 다방에서는 어땠나.
“다방에서 일할 땐 다방 안에서 한 30분 정도 쌍발 했다. 팁으로 50원 정도 받기고 하고 그랬다. 노래방에서도 방안에서 다 한다. 그 돈은 모두 가족을 위해 다 썼다.”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몸도 팔 수 있었다
- 남편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아저씨는 묻지 않지만 대충 알고 있다. 묻지 말아 달라고 한다. 나는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몸 팔아서라도 약을 사준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남편을 버리라고 한다. 그러나 난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러니 남편도 날 사랑한다. 남편이 죽어도 다른 남자를 절대로 만날 수 없다.”
- 탈북 한 후 어떻게 생활했나.
“중국에 들어와 산둥에 팔려나갔다. 남편이 중국에 들어올 때까지 견뎠다. △△에서 15일 있었는데 한족과 사는 조선여성이 있었다. 그 집에서 청소 일을 하기도 하고 사발 닦이를 했는데 내 신분이 불안하니까 나만 일시키더라. 그 집에 남자를 해달라고 해서 시집가겠다고 했다. 그게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후 영감이 왔다. 도망 갈까봐 계속 감시했다. 동네에서 젊은 여자 데려왔다고 잔치를 하더라. 1년 반을 계속 울면서 지냈다. 처음에는 아깝다고 아무 일도 안 시키더라. 그런데 그게 나는 싫어서 계속 울기만 했다. 병이 들어도 남편이 잊혀지지 않았다. 여기서 새끼 놓으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후 도망쳐 왔다. 집 한 채를 줄 테니 남편이랑 같이 살고 죽으면 자기하고 살자고 이야기했는데도 싫다고 했다. 돈 1,000원 준다고 해도 난 못한다고 했다. 그 사람이 남편이 죽기를 바랬다. 죽으면 자기한테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애가 하나 있는데 나를 머슴으로 취급한다. 남자도 싫고 그 사람 애도 싫다.”
※ 이 여성의 남편은 영양실조 때문에 폐가 좋지 않았다. 탈북자라는 신분 때문에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약만 먹으며 오랜 투병 생활을 하다가 최근에 세상을 떠났다.(편집자註)북한민주화운동본부
'탈북자들은 보호돼야 한다' - 유엔 북한인권 보고관 |
12/01/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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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n refugees entered South Korean School in Beijing. Yonhap News photo. |
북한을 탈출해 해외 망명을 희망하는 탈북 주민들은 마땅히 보호 받아야 하며, 송환될 경우 위험에 처해 질 수 있는 북한으로 되돌려 보내져서는 안 된다고 유엔의 북한 인권 특별 보고관이 밝혔습니다. 비팃 문타폰 보고관은 1일, 서울에서 열린 북한 인권에 관한 국제 회의에서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즉각적인 조치를 축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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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의 비팃 문타폰 북한인권 특별 보고관은 한국 국가인권 위원회 주최로 서울의 경남대 극동문제 연구소에서 열린 ‘북한인권 국제 심포지엄’에서 난민 보호를 위한 핵심 국제 원칙은 난민들을 위험 지역으로 강제 송환하지 말아야 한다는 위험 재발 방지의 원칙이라고 말했습니다.
문타폰 보고관은 헨릭 스테먼 유엔 인권 고등 판무실 보고관이 대독한 연설문에서, 북한을 탈출해 망명을 희망하는 탈북자들이 체류하고 있는 일부 나라들에서 최근 위험 재발 방지 원칙을 준수하지 못하는 사례가 있어왔다고 지적하고, 모든 나라들이 이 원칙을 효과적으로 준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몬타폰 보고관은 서면 발제문에서 중국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인권 운동가들은 탈북 주민들이 북한으로 송환될 경우에 가혹한 형벌 또는 심지어 처형에 직면하게 된다며 중국 정부를 비난해 왔습니다.
외교 공관의 보호를 받거나 숨어 지내면서 망명처를 모색하고 있는 탈북자들이 가장 많이 체류하고 있는 나라는 바로 중국입니다.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탈출한 북한인들 수가 얼마나 되는지에 관해서 다양한 추정치가 제시되어 왔지만, 이날 회의에 참석한 중국 인권 연구 협회의 양 쳉밍 사무총장은 중국은 자국 내 탈북자 수가 3만에서 30만 정도인 것으로 자체 추정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중국 정부는 탈북 주민들을 정치적 난민이 아닌 불법 유민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북한과 이들을 송환하기 위한 협정을 체결하고 있습니다. 양 사무총장은 중국 내 북한 유민들을 난민으로 봐야 하는지 여부를 놓고 중국 정부와 외국의 일부 인권 단체들 사이에 여전히 견해차가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문타폰 보고관은 북한인들의 탈북과 망명에 관련된 나라들이 이들에 대한 지원이 제공되도록 확실히 하는 한편, 북한은 인권 침해에 관한 지속적인 보고 내용을 시정하려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철저하게 통제된 사회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 동안 여러 보고와 언론 보도를 통해서 북한 내 인권 탄압 사례가 외부세계에 알려졌습니다. 북한은 미국의 인권법이 인권 문제를 통해 북한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고 탈북 주민들을 재정 지원하기 위해 제정되었고 또한 북한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미국의 적대적인 정책의 일환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권 탄압 사례들을 부인해 왔습니다.
유엔 인권 위원회는 지난 4월에 2년에 걸쳐 북한의 인권 상황에 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는 결의를 채택했습니다. 문타폰 보고관은 탈북 주민들에 대한 비인도적인 처우와 불법적인 관행에 대한 시급한 개선을 촉구하는 보고들을 단순히 우연한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자료출처:newsv.acom
통일연대, 7천여 탈북자들의 말을 믿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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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연대, 7천여 탈북자들의 말을 믿어라
통일연대가 유럽연합(EU)이 ‘대북인권결의안’을 사상 처음으로 유엔 총회에 상정할 방침이라는 공식 발표에 비판 성명을 들고 나왔다. 으레 있어왔던 일이라 대응할 가치조차 없다고 판단했지만, 남한에 입국한 7,000여 탈북자들의 증언과 발언을 과장되었거나,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매도해 그냥 넘어갈 수 없어 성명을 발표한다.
통일연대는 10월 28일, ‘대북정치공세의 일환인 인권결의안 유엔 총회 상정을 즉각 중단하라!’는 성명에서 “‘영아살해’, ‘강제유산’, ‘고문’, '정치범 수용소‘ 등 대단히 자극적인 표현들로 이번 결의안이 점철되어있다.”면서 “결의안은 고작 그 근거라는 것이 소위 기획탈북자의 과장된 증언과 확인되지 않은 선정적 사실들을 과감 없이 적시한 반북인권단체들의 ’카더라‘식의 보고서”라고 말했다.
통일연대의 주장대로라면 남한에 입국한 7,000여 탈북자들 모두가 과장되거나, 있지도 않은 사실을 증언했다는 것이다. 이런 어리석은 발언이 또 있을까 싶다. 적어도 통일연대가 잠깐의 시간만 내어 탈북자 열 명만 만나 진솔한 대화를 했다면 이 같은 무지몽매한 발언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작은 노력도 하지 않은 채 북에서 흘려보내는 정보만 ‘눈팅’ 하고만 다니니 이와 같은 웃지 못 할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억압과 폭압의 사슬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온 7,000여 탈북자들의 목소리는 공허한 외침일 뿐이고, 독재자의 목소리만이 오직 진실의 소리였던 것이다.
통일연대는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들이 공개적인 토론회, 국제적인 행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증언한 내용이 사실과 다르고 과장되었다면 이들의 증언보다 더 정확하고 사실적인 자료가 있으면 당장 공개하라. 있지도 않은 자료를 가지고 이 같은 발언을 할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감탄스러울 뿐이다. 무식하면 용감해진다는 옛말이 하나 그른 것 없다.
통일연대여, ‘영아살해’, ‘강제유산’, ‘고문’, ‘정치범 수용소’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먹고 살기 위해, 자유를 찾기 위해 국경을 넘었던 탈북자들은 북으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과 군홧발에 차여 ‘강제유산’을 당하고 있으며, ‘정치범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북녘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통일연대는 7,000여 탈북자들의 말을 진실이 아닌 것처럼 여론을 호도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탈북자들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지금 당장 탈북자 10명만 만나더라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탈북자들을 만날 기회가 없다면 탈북자단체를 방문해봐라. 그곳에 가면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일연대는 지금이라도 북한 인민들을 두 번 죽이는 말도 안 되는 성명 철회하고 ‘대북인권결의안’지지 성명을 내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것만이 통일연대가 지난 날 북한 인민들에게 지었던 과오를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이다.
이제 북한인권 문제는 세계적인 화두이다. 그만큼 북한인권 문제는 분초를 다투는 시급한 문제이며, 국제사회가 나서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통일연대의 억지 주장과 논리에 설득당할 국민은 없다. 이제라도 통일연대는 북의 선전내용을 그대로 따라하는 ‘앵무새’의 탈을 벗고, 진정 북한 인민들을 위해 활동하는 운동가 본연의 모습을 찾기를 바란다.
2005년 11월 2일 (사)북한민주화운동본부 |
수면제 430알 먹고도 죽지 못했다 |
[2005-10-17 15:33:59] |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다고 하니 다시는 못 보겠다 싶은지 15년 동안 입었던 속옷으로 장갑하고 양말을 만들어 주었다. 내가 진짜 가슴 아픈 것은 어머니한테 따뜻한 밥 한 끼 못해 먹인 게 제일 가슴 아프다.
중국 내 탈북자 인터뷰
수면제 430알 먹고도 죽지 못했다
자강도 강계가 고향인 탈북여성 이혜주(가명. 34세)씨를 만났다. 그녀는 중국 한족에게 여러 번 팔려는 다니는 성매매를 당하기도 했고 급기야 힘든 중국 생활을 견디다 못해 수면제 430알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지만 기적같이 살아났다. 이 여성을 통해 중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탈북 여성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 편집자주
* 상념에 잠이 이혜주씨의 모습
죽고 싶어도 쉽게 죽지 않았다
- 언제 탈북 했나.
“1997년도에 넘어 왔다. 12월에 허리까지 차는 눈 속을 헤매며 산을 일곱 능선이나 넘어서 혼자 왔다.”
- 왜 탈북하게 되었나.
“어머니가 소경이고 아버지가 안 계신다. 국가에서 배려가 없어 땔나무와 쌀이 없어 죽만 먹고 자랐다. 밭갈이, 후치질(소에 쟁기를 달아 밭고랑을 엎어서 김을 메는 작업), 땔감농사, 공사장 등에서 언니와 나, 두 딸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
그래서 인정받으며 살만 했지만 집안 내력이 좋지 않으니 되는 일이 없었다. 집안환경이 좋지 않았으니 손가락질을 많이 받았다. 말 못할 서러움이 많았다. 결정적으로는 수해로 집마저 잃게 되어 방랑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힘들게 돌아다니다 중국소식을 듣게 되고 탈북까지 단행하게 되었다.”
- 북에 남아 있는 가족이 있나.
“언니가 장님인 어머니를 모시고 자강도 희천에서 살고 있다. 나는 유복녀다. 어머니 뱃속에서 6개월 되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아들 둘을 잃고 남편을 잃자 그 충격으로 소경이 됐다. 오빠 한 명에 언니 한 명이 있다. 오빠들은 7살과 10살 때 불치병으로 죽었다.”
- 북한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북한에서 생활할 때 정처 없이 방랑하다 길에 썩어 가는 밥알 찌꺼기, 국수, 김치 찌꺼기, 심지어는 화장실에 오줌똥이 묻어 있는 음식도 씻어 먹어야 했다. 겨울에는 썩어져 버린 누런 콧물 같은 것도 주워 먹었다. 동냥질, 협작, 도적질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봤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 살아야만 하는가 생각이 들어 자살시도도 여러 번 했다. 물에 뛰어 들었는데 구조 받아 살았다.”
- 당에서 아무것도 주지 않았나.
“수해가 나자 당에 가서 사정을 설명하자 귀찮다고 나를 무시했다. 그래서 당은 ‘어머니’라 하는데 자식이 배고파 먹을 것 좀 달라고 나가 죽으라고 하면 되냐고 말했다가, 말 반동으로 걸려 구류장에 15일 동안 수감 되었다. 그 이후 나에 대한 감시가 더욱 심해 아무런 자유가 없었다. 그 후 계속해서 사소한 일에 걸려들게 되어 정신분자 개조대상으로 21살 때부터 3년 동안 구류장에서 보냈다. 그리고 나서 24살 때 어머니를 두고 떠나왔다.
수면제 430알 먹고 자살 기도
- 중국에 넘어와서 어떻게 생활했나.
“국경 넘으니까 조선족들 중 북한 여성들을 팔아 넘기는 인신 매매범들이 많았다. 인신매매에 걸려 들어 산둥성의 50살이 넘은 아바이에게 3만7천 원에 팔려갔다. 지옥에 들어가는 심정이었다. 거기에 일곱 형제가 결혼도 않고 살았는데 돌아가며 오늘은 나, 내일은 너하며 나를 강간했다. 견디다 못해 도망을 결심했다.”
- 어떻게 나오게 되었나.
“그 집 대문 들어가는 토성이 집체보다 높은데 거기서 뛰어내리다 떨어져 두 다리를 다쳤다. 다친 다리를 끌고 기다시피 해서 우연히 차를 얻어 타고 청도라는 데에 갔다. 돈도 먹을 것도 없었다. 청도시 공안국에 잡히게 되어, 북한으로 보내려면 보내라고 했다. 속으로는 하나님께 간절히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공안국장이 오전 회의 후 연길로 보내줬다. 300원 주고 기차도 잡아주고 통역까지 해줘 연길로 왔다.”
- 연길에 와서는 어떻게 생활했나.
“연길에 와서도 방랑 생활을 하다가 만난 한 조선족 할머니가 손녀처럼 돌봐줘 살았다. 할머니에게 수면제 없으면 잠을 못 잔다고 해서 수면제를 좀 많이 사달라고 부탁했다. 할머니가 수면제 430알을 사왔다.
먼 훗날에 다시 태어나면 다시는 조선민족으로 안 태어나겠다고 결심하고 그걸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 한참 후에 소리가 나서 일어나 보니 병원이었다.
할머니가 아들에게 사실을 말하니까 자살하려 그러는 것이니 빨리 가보자 해서 뒤따라 왔는데 운 좋게도 다리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구했단다. 위세척을 열세 번을 해서 살아났다.”
죽음보다 못한 삶
- 이후에는 어떻게 살았나.
“그렇게 살았는데 희망이 없었다. 다리 밑에서 생활하다 보니 그 할머니가 밥도 주고 돈도 주면서 농촌으로 시집보내 주겠다고 했다. 할머니가 연길에서 가까운 □□에 사는 남자에게 3,000원 받고 소개해주었다.”
- 그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나.
“술과 여자를 좋아했다. 하루 24시간 놀고먹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싸움이 자주 일어났고 칼 들고 죽이려고까지 했는데 힘이 부족해 실패했다. 사람을 죽이느니 차라리 떠나자고 생각했다. 남편이 떠나려면 돈 다 내놓고 가라고 협박했다.”
- 아이는 없었나.
“2000년도에 애를 낳았는데 지금 6살이다. ”
- 아이는 보고 싶지 않나.
“2003년도에 도망 나왔다. 애를 벌어 먹일 방법도 없고 죽을 수도 없기에 놓고 왔다. 살리기 위해서는 몸을 파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아이가 아버지의 악행을 그대로 보고 배워 남편이 하는 욕설을 똑같이 나에게 해대했다. 그래서 별로 애정이 없다.”
- 그 집에서는 어떻게 나오게 되었나.
“콩팥을 수집한다는 얘기를 듣고 30~34만원 한다니까 남편에게 팔아 줄 테니까 돈 돈 하지 말고 날 자유롭게 해달라고 했다.
콩팥을 팔겠다고 결심했지만 피검사가 350원 드는데 수지가 맞지 않았고 거기다가 소개하는 사람이 350원을 떼먹었다. 골수 검사에 별의 별 검사를 다 요구했다. 듣기로는 6,000원 정도가 든다고 했다.
그러나 만난 건달 셋이 팔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그 순간 사기라는 것을 알게 되어 악착같이 반항했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했다. 그러다가 공안국에 붙들려 도문 변방부대로 잡혀갔다. 운 좋게도 변방부대 관계자의 도움으로 호송하는 도중에 달아났다.”
15년 입었던 속옷으로 장갑만들어 주신 어머니, 밥한끼도 대접 못 해 죄송해...
- 지금의 남편은 어떻게 만났나.
“청진 갔다 와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금식기도를 40일 하면서 신앙심을 키웠다. 그러나 응답이 오지 않았다. 2003년 4월 21일에 교회를 나왔다. 지금의 남편이 △△교회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었다. 도움을 부탁했더니 어머니를 돌보며 며칠 살라고 하여 허락을 받았고 같이 있으면서 신뢰를 줘 결혼도 하게 되었다.”
- 북에 있는 가족은 보고 싶지 않은가.
“보고 싶다. 언니는 핵무기 액을 만드는 공장에 출근한다. 어머니는 앞을 못 보시니 집에서만 생활 한다. 어머니하고 헤어질 때 가슴 아픈 일이 많았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다고 하니 다시는 못 보겠다 싶은지 15년 동안 입었던 속옷으로 장갑하고 양말을 만들어 주었다. 내가 진짜 가슴 아픈 것은 어머니한테 따뜻한 밥 한 끼 못해 먹인 게 제일 가슴 아프다.”
- 어려운 점이 있다면
“탈북자를 중국에서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남편은 몸이 불편하지 아이는 먹지 못하니 가슴 아프다. 다른 데 옮겨준다고 하는 사람이 많아도 남편만한 사람 없다고 생각한다.”
※ 이 여성분에게 도움을 주시고 싶은 분들께서는 북한민주화운동본부(02-508-3563)로 연락을 하시면 됩니다. |
탈북자들의 법적 지위와 현실
이금순(민족통일연구원)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은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어, 북한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은 물론 북한을 탈출하여 제3국에 체류하고 있는 탈북자도 국내법상 대한민국 국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국내법상으로 북한 주민은 우리의 국민이기 때문에 우리 정부는 탈북자들을 해외에 있는 대한민국 국민(재외국민)으로 대우하여야 하며, 당연히 이들에 대해 관할권을 주장하고 헌법 제2조 2항에 따라 재외국민 보호의 의무를 지게 된다. 관련법률은 북한에 주소 직계가족 배우자 직장 등을 두고 있는 북한이탈주민이 북한을 벗어난 후 외국의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한민국(재외공관포함)에 보호의사를 표명한 경우 이들에 대해 인도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특별한 보호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 탈북자가 대한민국 재외공관에 보호를 요청하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추정되나, 우리 정부는 서독의 동독주민처리와 같은 무조건적인 보호를 행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물론 북한도 남한과 같이 유엔에 가입되어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국가주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제관계 현실상 탈북자의 처리는 단순한 문제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와 같이 탈북자의 [국내법상 대한민국 국민, 국제법상 북한국민]이라는 이중적 신분은 분단국에서 발생하는 특유한 현상으로, 남북한간의 관할권 충돌이 불가피하다. 탈북자가 남한 단독수교국에 소재하고 있는 경우 우리 정부가 영사권을 주장할 수도 있으나, 남북한 동시수교국에 체류하고 있는 경우에는 탈북자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인 동시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공민이라는 점에서 현지국에게 정치적 부담을 줄 수 있는 사안으로 남북한이 동시에 관할권 행사를 주장하게 될 것이다. 전통적으로 북한과 오랫동안 사회주의 동맹관계를 유지한 국가들은 탈북자를 북한의 공민으로 간주하기 쉽다. 탈북자가 북한 단독수교국에 소재한 경우에는 북한주민으로 인정하여, 우리 정부의 보호권 행사를 합법적으로 부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탈북자에 대한 우리 정부의 영사보호권 행사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우리 정부는 관할권 주장을 자제하여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탈북자들이 처한 현실을 살펴보면, 탈북자들을 북한의 공민으로 인정하여 북한당국에게 보호권을 맡겨둘 수는 없다. 탈북자들이 실질적으로 반정부적 반체제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허가없이 국외탈출을 시도한 것이 체제에 대한 저항적(정치적 의견을 달리하는) 의사표시를 한 것과 동일한 결과를 낳게 된다면, 일차적인 탈출동기가 빈곤 내지는 기아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경제적인 요인일 경우에도 탈출자에 대한 정치적 박해 및 처벌이 명백하기 때문에 국제관례상 난민에 해당하게 되며, 강제송환이 금지된다.
탈북자들이 남북한 주민의 지위를 떠나 국제법상 별도의 지위를 부여받는 방안인 난민지위 획득은 현실적으로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난민지위를 부여하는 기준은 1951년 난민협약서와 1967년 난민의정서에 따라,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계층,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충분히 근거있는 공포로 인해 자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거나, 자국의 보호를 요청하지 못하고 국적국 밖에 거주하고 있는 자"이다. 즉 전쟁과 박해 등 정치적 이유로 외국으로 탈출한 경우 개인적인 심사과정을 거쳐 난민으로 보호나 원조를 받게 되는 것이 기본 절차이다. 물론 전쟁 등 긴급한 상황으로 대량난민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집단적으로 보호를 결정하기도 한다.
냉전종식이후 다민족국가내 인종분규와 그에 따른 대량학살 등으로 인해 외국으로 탈출하는 난민과, 국내에 거주하면서도 고향을 떠나 자국내에서 떠도는 국내 실향유민들의 규모가 급증하고 있다. 최근 가난과 환경파괴, 정부의 자연재해 방지 및 대처능력 결여가 맞물려 상황이 어려워진 경우 빈궁에 처한 사람들이 '떠나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한계상황에서 고향을 떠나는 경우를 환경난민으로 규정하여야 한다는 입장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학술적인 개념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이제까지는 탈북자들이 북한으로 송환될 경우 북한형법 제47조에 의거 정치적 박해 또는 처벌을 받을 위험이 명백하기 때문에 국제법상 난민(refugee)의 지위를 부여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1996년말 이후 식량을 구하기 위해 탈북하는 경우에 대한 처벌을 완화하여 왔고, 탈북자 송환과정상 비인도적 처우도 상당부분 개선되었기 때문에 탈북자를 난민협약과 의정서에 규정된 엄격한 의미의 난민(mandate refugee)으로 규정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다. 난민판정은 현지국의 주권사항이며 다만 현지국이 요청하거나 난민판정이 보호를 위해 필수적일 경우 UNHCR이 개입할 수 있다. 현재 탈북자들을 난민으로 규정하여 자유의사에 따른 정착허용과 보호를 추진하기에는 현지국의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큰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탈북자의 지위를 일반화하기 어려우리만큼 탈북현상이 매우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강제송환이후 탈북자들의 처벌강도가 시기별, 개인의 북한내 사회성분, 출신지역, 현지국내 체류기간 등에 따라 차이가 매우 크다. 탈북자들의 상황을 일반화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으나, 강제송환될 경우 일부의 경우에는 여전히 정치범으로 규정되어 생명의 위협에 처하게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같이 탈북자의 경우 일반적으로 정치적 난민으로 규정하기에는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실질적 보호방안을 강구하기 위해서는 '일시피난민'의 개념을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탈냉전이후 지역분쟁의 증가로 난민과 난민과 유사한 상황에 처한 국내외실향유민(Internally & Externally Displaced Persons)이 급증함에 따라 UNHCR과 각 국들은 보호의 범위를 축소하고 있다. 내전을 피해 국경을 넘은 긴급피난민의 경우에도 난민지위를 부여하지 않고, 제한적인 보호만을 실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자국내 정착으로 인한 사회적 부담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심지어 인도주의가 정착된 서방국가들의 경우에도 난민판정절차를 엄격히 하고 있어 국제인권기구들의 비난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UNHCR은 현실적인 대안으로 1992년부터 일시보호(Temporary Protection)를 인정하여 개별국가의 신속하고 융통성있는 보호를 유도하고 있다. 일시보호제는 관련당사국의 합의하에 일반화된 갈등·분쟁 또는 인권남용지역을 탈출한 피난민에게 보호를 제공하는 한 방식으로, 난민보호상 의무인 난민인정 절차와 난민의 제반권리(교육, 복지, 노동권)에 대한 유보가 인정된다. 그러나 일시보호에 대한 명확한 법 규정이 없기때문에 실제상 일시보호에 대한 개별국의 해석 및 적용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일시보호의 대상은 일반적으로 엄격한 의미의 정치적 난민(1951협약과 1967의정서 규정)에만 한정되지 않고 포괄적인 의미의 난민에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인도주의에 부합되는 제도이나, 약 6개월정도의 보호를 허용하는 잠정적인 해결방식이기 때문에 사태가 장기화 될 경우 어려움이 있다. 일시보호체제는 입국허용, 강제추방금지, 인도적 대우, 위협소멸후 자발적 귀환을 원칙으로 하며, 대량 피난민의 유입에 대해 단기간에 사용하는 응급수단이다.
중국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탈북자들의 현실이 정치적 망명의 경우보다는 식량과 생필품을 구하기 위한 경우가 다수임을 인정하고, 중국내 체류 희망자들에 대한 '일시보호'를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시보호개념을 도입할 경우 북한내 식량난이 완화될 경우 자발적인 귀환을 추진하는 것을 기조로 한다. 이는 일시보호로 인해 탈북자들의 국내수용 요청이 둔화될 경우 북한의 입장에서도 바람직할 것이다. 일시보호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원이 실시될 경우 관련 지역당국에게도 간접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나, 다만 관련정부의 입장에서 이러한 지원이 조선족(고려인)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형식은 원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탈북자들에 대한 일시보호 추진시 북한과 중국간 체결된 1986년 국경지역업무협정 제4조 1항에 근거 탈북자를 재난 및 기타 불가피한 이유로 인한 월경으로 처리하고, 재난시 구호의무(제1조 1항)에 의거 공안당국이 아닌 중국 홍십자사 등이 구호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재외탈북자의 경우에도 실향유민에 대한 '일시보호'차원에서 강제송환을 금지하고 최소한의 보호를 실시하는 방식을 취한다면, 탈북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관련국의 부담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대안으로 평가된다.
독골산 토굴생활 2년은 살기위한 몸부림이었다
2005.06.28
중국 길림성 복흥향 연풍촌 독골산에서 2년동안 토굴 생활을 했던 30대 후반의 남한입국 탈북자 성경일, 주명희 부부는 현재 남한 땅 대구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중국 공안의 단속을 피해 토굴생활을 해야 했던 성씨 부부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순서로 산속 토굴에서의 생활 이야기입니다.
느릅나무 아래쪽으로는 어느 정도나 땅을 팠나요?
3월19일 갔는데, 그 때는 땅이 얼었으니까 많이 못 파고 온돌을 놨어요. 그런데 온돌도 한곳으로 밖에는 못 놨어요. 산에 돌이 귀해서 막돌로 했죠. 북한에서 살림집건설 전문 했으니까요.
구들 한곳으로 가마도 걸어 놓고.. 연기는 그곳으로 빠지고요?
네, 지금 말하니까 쉬운 것 같아도 처음에는 그 곳에 가서 중국돈 백원, 한국돈으로 만이천원 밖에는 없었어요. 처음에는 추운데 풀밭에서 2-3일을 밖에서 잤습니다.
산에서의 음식이란 것이 그저 된장에 감자 썰어 넣고 먹고 살았죠. 잡히지 않으면 행복이니까 그저 인생 가는데 끝까지 같이 가는 것이 우리 행복이었죠.
성경일 조명희 부부
눈가루도 날리는 데.. 북한 사람이 내일을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운명이 어떻게 되겠는지 사는 순간이 나마 편안하게 있자, 때로는 하늘을 올려다보니까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꼭 기억하고 계실 것이다, 기도 소릴 듣고 계실 것이다.
중국돈 백원으로 뭘 하셨습니까?
그 돈으로 쌀을 사고, 나머지로 돈으로 바닥 깔게를 사고, 소금사고 또 농장에서 자기네 씨앗을 심고 나머지 버리는 것으로 토굴 앞마당 밭에 뿌려 놓고... 집을 짓고 나니까 집 앞마당 잔디를 모두 떠서 담도 만들고, 지붕에도 덮고 해서 앞마당이 밭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에 농사를 했어요.
집 세간살이 중에 덥고 자는 것은 없었습니까?
우리는 항상 길을 다니면서 이불을 가지고 다닌단 말입니다. 남의 집에 가도 북한 사람이라고 더럽다고 이불을 안주니까... 토굴이라서 습기 때문에 온돌을 놨죠, 불을 안 뗄 때는 습기가 올라오거든요. 그래서 장판을 몇 겹으로 깔았죠.
또 겨울을 나자니까 부식물이 있어야 하니까 이때는 밖에 나가서 산나물 뜯어서 말려서 소나무에 걸어놓고, 버섯이 날때는 버섯을 뜯어서 건사하고 ...마을에 내려가 그것들을 좀 주면 그분들이 불쌍하다면서 김치도 좀 주고. 제일 먹고 싶은 것이 김치더라고요. 감자 심은 것은 먹을 것이 없어서 철이 아니지만 파내서 끓여 먹고... 고기 같은 것은 못 먹고요?
고기는 먹어보지 못하죠. 사냥도 불법이고... 마을에 내려가서 삭일을 해줘야 해요. 김 메고 농사일 해주고 그 돈으로 신도 사신고, 옷도 사고 된장, 간장, 소금도 사고 콩도 사서 장도 담가먹고.
완전한 산 생활을 한 것이 아니고, 민간에 가서 일도 하고 하지만 공안들의 단속을 피해서 보금자리를 산에다 마련한 것이군요?
네, 일하는 날 빼고는 산에서 살았죠. 일하는 것도 한 일주일이면 끝납니다. 그때만 왔다 갔다 하고, 일주일 일하고 나면 대충 쌀 100KG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한 4개월은 먹죠. 쌀만 먹으니까요.
남편 건강 때문에 음식도 신경을 많이 썼을 것 같은데 먹는 것은 어떻게 준비를 했나요?
산에서의 음식이란 것이 그저 된장에 감자 썰어 넣고 먹고 살았죠. 잡히지 않으면 행복이니까 그저 인생 가는데 끝까지 같이 가는 것이 우리 행복이었죠.
1시간 거리였지만 마을 사람들의 내왕이 전혀 없는 산골이잖아요.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병이 없이 살 수가 있었는지요?
이 사람이 치질하고 관절이 심했어요. 자본주의 사람은 그런 곳에서 죽었을 겁니다. 그런데 북한 사람들은 오직 살아야 된다는 신념으로... 사람이란 것이 회장이요, 국회의원이요, 대통령이요 해도 말로는 일단 누가 죽어라 하면 다 눈물 흘릴 겁니다. 그냥 우린 참고 버틴 거죠.
치질은 청결이 중요한데 산 어떻게 해결했나요?
가마를 걸었잖아요. 더운물 끓여서 목욕을 자주 하고요. 우린 겨울에도 매일 목욕을 했어요. 그때의 후유증으로 남한에 와서 홍문 수술도 하고 그랬죠. 이제 와서 보니까 대단히 심했더라고요. 아파도 솔직히 아프다고 말하면 가슴이 안 좋잖아요. 그리고 아픈 것은 다른 일들 때문에 뒷전 이예요.
이진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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