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연합선교회의 중국과 북방선교지 소식입니다.

2013.12.13 | SBS | 미디어다음

강조했습니다. 미국의 북한 전문가들도 이번 사건이 전에 없이 충격적이라는 반응들을 쏟아냈습니다. 미국 언론들은 긴급 뉴스로 장성택 처형 소식을 전...

지도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본보기'를 보이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분석했습니다. 신화통신 등 북한 소식에 신중한 입장인 중국 관영매체도 오늘은 조선중앙통신의 발표 내용을 중심으로 장성...

 

[특징주]방산주, 북한 장성택 사형 소식에 강세 2013.12.13 | 한국경제 | 미디어다음

[ 김다운 기자 ] 북한의 장성택 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사형 집행 소식에 방위산업 관련주들이 강세다. 13일 오전 9시7분 현재 스페코는 전날보다 180원(4.56%) 오른 4130원을 기록중이다...

 

북한 장성택 실각..김정은 체제 어디로? 2013.12.04 | 연합뉴스 | 미디어다음

 

 

2013.12.03 | MBN | 미디어다음

내 권력 판도가 요동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고 있습니다. 갑작스런 북한 소식에 네티즌들은 "정성택 실각이라니 이게 무슨 일이야? 북한의 급변사...

  • 2014.01.09 | 이투데이

    촬영했다는 이유로 북한에 억류, 최고재판소에서 '반 공화국 적대 범죄'로 15년의 노동 교화형을 선고받았다. 케네스 배 아버지 배성서 감독 소식을 접한...

  • 2013.12.03 | YTN | 미디어다음

    부위원장은 건재한 모습이었다며 다소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북한 소식에 정통한 일본의 전문가는 북한 민중의 마음이 장성택에게서 멀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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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북자 이순옥씨의 간증]

    김정일은 악마 그 자체: 영하 35도에 발가벗겨 고문
    (탈북자 이순옥씨 프랑스 라디오 증언에서 발췌)

     


     


    저는 북한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근 50여년을 북한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은총으로 96년 아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태어나 북한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제가 영문도 모른 채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졌을 때 수용소안에서 겪은 북한 신자들의 모습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김일성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기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유일하게 6,000여명의 수용된 그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을 시킬 수 있는 생산 지휘와 모든 재정업무를 맡아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작업장들을 이곳저곳 마음대로 갈 수 있었습니다.

    어느날 저를 담당하는 재정부장 교도관이 저를 불러놓고 단단히 교육시켰습니다. "너는 오늘부터 매일 어떤 공장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 공장에는 미친 정신병자놈들만 모여 있다. 그 미친 정신병자놈들은 당과 수령님을 믿지 않고 하늘을 믿는 미친 자들이니 너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곳에 가야한다. 그리고 그 미친자들하고는 절대 눈길 한번 마주치지 말아라. 그렇지 않고 네가 그 자들이 믿는 하늘을 믿게 되면 네 목숨은 여기서 끝나게 되는 줄 알아라."

    그런데 거기 가서 그 사람들을 보는 순간 나는 너무 놀랐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무리같지 않았습니다. 1.500도 이상 시뻘겋게 타오르는 용광로의 고열 노동 작업장이었는데 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을때, 무슨 짐승의 무리 같기도 하고 외계인 같기도 하고 도무지 사람의 모습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머리에 머리카락이 붙어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얼굴은 해골같고 이빨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키가 다 줄어들어서 120센티,130센티 요렇게 땅에 딱 붙은 난쟁이들만 움직였습니다.

    나는 가까이에 가서 그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전 너무나 놀랐습니다. 잡혀 올 때는 정상인이었는데 거기 와서 하루 열 여섯시간, 열 여덟시간씩 먹지도 못하고 그 고열 속에서 노동하며 고문받다보니 그 사람들은 척추가 녹아 내려서 뒷잔등에 혹이 되어 버렸고 몸이 다 휘어져서 앞가슴하고 배가 마주 붙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한결같이 모두 그렇게 육체가 망가져 기형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프레스 기계로 찍어도 한 판에 그렇게 똑같은 모습으로 찍기는 힘들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이 일하는 작업장에는 교도관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교도관들은 말로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소가죽 채찍을 윙윙 휘두르고 다니면서 묵묵히 일을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예수를 믿는 그 사람들의 몸에는 옷이 입혀져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처음에 그 사람들을 멀리서 보았을 때 모두가 꺼먼 옷을 입고 있는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찬찬히 보니 그 사람들은 맨 살가죽에다 앞에 시커먼 고무 앞치마 하나만 걸치고 있었습니다. 용광로의 뜨거운 불꽃이 앙상하게 말라붙은 살가죽에 튀고 또 튀고 딱지가 앉고 그 자리에 쇳물이 떨어지고 또 떨어져서 타버리고 해서 그 사람들의 피부는 한 곳도 성한 곳이 없었고 마치 들짐승의 가죽과 같았습니다.


    어느날 저는 그 곳에서 정말 말로 전하기 힘든, 너무나 끔찍하고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오후, 제가 공장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공장안이 쥐 죽은 듯 고요했습니다. 작업장 한 가운데 수백명의 죄수아닌 죄수를 모아놓고 담당 교도관들 두 명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미친듯이 고함을 치며 날뛰고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무서워서 문 옆 한쪽에 비켜 서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수령님을 믿지 않고 하늘을 믿는 미친 정신병자놈들이라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그 사람들을 차고, 때리고 하면서 인간이하의 취급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너희들 가운데서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대열 앞에 나서라. 하늘을 믿지 않고 수령님을 믿겠다고 하면 자유세상으로 보내서 잘 살 수있게 해 주겠다"고 하면서 그 사람들을 윽박지르며 하늘을 거부하라고 채찍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이상했습니다. 수 백명의 그 사람들은 왜 그런지 아무 대답도 없이 그렇게 매를 맞으면서도 침묵으로 맞섰습니다.

    저는 너무나 무서워서 빨리 한 사람이라도 나서야 되는데, 그래야 오늘 누가 맞아죽지 않을텐데 왜 계속 저렇게 입을 다물고 있나.. 저러고 있으면 또 누구를 끌어내다가 밟아 죽일지 모르는데, 빨리 한 사람이라도 나서야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급하게 생각하며 문 옆에 서서 무서움과 공포 속에서 떨고 있는데 예수를 믿는 그 사람들은 계속해서 침묵으로 대응했습니다.

    그때 독이 오른 교도관이 그사람들에게 달려가서 닥치는 대로 아무나 여덟명을 끌어 내다가 땅바닥에 엎어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구둣발로 내리밟고 짓이겼습니다.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고 허리며 팔 다리뼈가 부러졌습니다. 그 사람들은 고통 중에서도 몸을 뒤틀면서, 짓밟힐 때마다 신음소리를 냈는데 그 신음소리가 너무나도 이상하게 들렸습니다.

    저는 그 때, 주님이 누군지, 하나님이 누군지 전혀 몰랐습니다. 뒤에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이 고통 중에서도 몸을 뒤틀면서, 짓밟힐 때마다, 뼈가 부러지고 머리통이 부서지면서 신음소리처럼 애타게 불렀던 것은 바로 "주님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당했던 고통의 천 만분의 일도 제대로 여러분에게 전해주지 못합니다.

    미쳐 날뛰던 교도관들은 "수령님과 당을 믿는 우리가 사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너희가 사는가 보자" 하면서 달려가더니 펄펄끓는 쇳물통을 끌어왔습니다. 그리고는 피투성이가 된 그 신자들 위에 부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순식간에 살이 녹고 뼈가 타면서 숯덩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난생 처음으로 내 눈앞에서 사람이 숯덩이로 변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그 충격이 컸던지, 그 곳을 어떻게 튀어나왔는지 기억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동안 도무지 눈을 감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정신적 충격으로 눈만 감으면 눈 앞에 숯덩이가 된 사람들이 어른거려서 도무지 눈을 감을 수도 없고, 잠을 잘 수도 없었고, 일을 제대로 할 수도 없었으며,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정신이 들어갔다 나갔다 했습니다.


    저는 그 일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마음속 한구석에 실오라기 만큼이라도 수령님과 당에 대해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말입니다. 인간은 주님을 꽉 붙잡어야 된다는 것을 저는 그때 뼈져리게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다시, 우리 어머니가 평생을 하늘에 기도했다는 그 하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간절하게 하늘을 찾았습니다. '저 사람들이 저렇게 불에 타 죽으면서도 거부하지 않고, 목숨걸고 믿는 하늘이, 진짜로 그 하늘이 어디에 계시다면 나를 좀 살려달라고..... 그리고 저렇게 무서운 짓을 하는 저 자들에게 하늘에서 정말 벌을 내려 줘야되지 않겠냐고'

    그렇게 마음속으로 부르짖으며 자나깨나 꿈속에서도 하늘을 찾고 또 찾고 기원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주님께서 그 간절한 저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한달이 멀다하고 공개처형이 있었는데 어느날 누구를 또 공개처형 시키려는지 6천명이나 되는 수용소 사람들을 한 자리에 다 모이게 했습니다. 공개처형 때는 반드시 하늘을 믿는 사람들을 맨 앞줄에 앉힙니다. 그런데 하늘을 믿는 자들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하늘을 보지 못하게 하라는 김일성의 특별지시와 규정이 있어서 하늘을 믿는 그 사람들을 앉힐 때에는 무릎사이에 목을 끼우고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리게 했습니다. 심지어 죽어서도 하늘을 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면서 죽은 시체도 목을 꺽어 거적에 말아서 어두컴컴한 산골짜기 나무 밑에 파묻게 규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날도 신자들은 하늘을 조금도 보지 못하도록 목을 무릎사이에 끼우고 맨 앞줄에 앉아 있었고, 그 뒤쪽으로 다른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습니다. 누구를 또 공개처형하려는가?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 쇠몽둥이로 머리를 한 대 맞은것처럼 정신이 아찔하여 대답을 할 수 없었고, 일어설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간수들이 나를 끌어내다가 앞에 세웠습니다. 내가 군중들 앞에 섰을 때, 수용소 소장이 나에게 "고마운 수령님과 당의 은덕으로 너는 이 시각에 석방이다"라고 통보를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목을 무릎에다 끼우고 맨 앞줄에 엎드려 있던 신자들이 내가 석방된다는 소리에 약속이나 한듯이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 분들의 눈빛을 보았습니다. 그 분들은 눈빛으로 간절히 간절히 말했습니다. '밖에 나가거든 자기들의 실상을 세상에 알려 달라'고...

    지금도 제 가슴에는 그 분들의 간절한 눈빛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가 평생 빌고 또 빌은 그 하늘이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올 수 없는 그 악명높은 정치범 수용소에서 저를 살려 주셨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희 모자를 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북한의 수용소에 갇혀 있는 그 신자들의 눈빛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 분들이 이 시대의 순.교.자.라고 봅니다.

    저의 증언으로 인해 북한 신자들의 인권문제가 150여개 나라에 나갔고 세계가 떠들었습니다. 유럽의 지식인 100여명이 프랑스에 모여 북한 신자들의 인권을 위한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철. 저. 하. 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북한을 위해 "꼭"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2014년도 탈북청소년 전문대학 입시설명회 안내문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 )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에서는 탈북청소년에게 보탬이 되는 진로·진학 정보 제공을 위하여, ‘2014학년도 탈북청소년 전문대학 입시설명회를 개최하오니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행사 개요

     

    o 일 시 : 201397(), 14:00 ~ 17:00

    o 장 소 : 페럼타워 2·3(2호선 을지로입구역 3·4번 출구)

    o 대 상 : 대학 진학 예정 탈북청소년 및 학부모

     

    탈북청소년 이외 대입정보가 필요한 성인, 진로·진학 상담교사 등 다양한 계층의 참여도 환영합니다.

     

    o 내 용 : 대학 입시정보 및 맞춤형 진로·진학 상담

    o 주 최 :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

    o 협 력 :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참가 신청방법 : 첨부파일의 신청서 작성 후 이메일 또는 팩스로 송부

    o 이메일 : nkrfedu@gmail.com

    o 팩 스 : 02-3215-5859

     

    개별 신청자는 개인용 양식에 작성하여 신청

    단체 신청은 단체용 양식에 따라 개인정보보호 수집·이용·제공 동의서와 함께 인솔교사가 제출

     

    참가 신청기간 : 2013. 8. 20() ~ 2013. 9. 3()

     

    참가자 특전 : 2014학년도 탈북청소년 특별전형 전문대학 입시자료집및 기념품 제공

     

    문의처 :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 교육연구센터 이재연(02-3215-5755)

     

     

    [북한의 상위 1%를 위한 국영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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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말경에 북한의 김정은이 부인 리설주와 함께 백화점 판매대를 지나는 모습이 공개되었다. 김정은 부부가 방문한 곳은 대동강변에 지어진 해당화관으로 의류와 화장품 등 판매장은 물론 수영장과 당구장, 목욕탕 등 주민 편의시설과 연회장과 식당 등 현대적 시설을 두루 갖추었다.
    김정은은 이곳을 방문하며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졸라메지 않게 하며 새집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하겠다”고 강조했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제1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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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백화점이나 최근 개장한 해당화관 등 대형 상점은 평양 특권층이나 간부들이 주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평양 소재 대성 백화점 등 대형 백화점과 고급식당 등에는 진열장뿐 아니라 창고에도 식료품이 가득 채워져 있다고 한다.

    사실 북한에서 그 규모만 봤을 때 가장 큰 백화점은 '평양 제 1 백화점' 이다. 평양 제 1 백화점은 평양시 중구역 승리거리와 서문 거리 사이에 위치해 있는 10층 건물의 백화점으로 약 300명의 종업원이 근무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 부유층의 사치심을 채워 주기에 가장 알맞은 곳은 바로 평양시 중구역 창광동에 위치해 있는 '락원 백화점' 이다. 락원 백화점은 주로 세계 명품을 진열해 놓고 결제도 북한 돈이 아닌 달러나 유로화로 받는다고 한다. 입장에도 제한이 있어 공식적으로는 외국인만이 출입할 수 있는 자격이 있으며, 북한의 일부 상류층은 비공식적으로 이곳을 이용한다. 일부 주민들은 눈길만 이 곳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다.

     

     [락원 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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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락원 백화점이 북한 부유층들에게 관심을 받는 이유는 이 백화점이 노동당 제 39호실 관할의 대성 경제 연합체에 직속으로 속해 있기 때문이다. 외화 수입과 외국 선전용으로 관리되는 백화점은 북한에서 가장 현대적이고 세련된 건물로서 부유층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또한 그 위치가 고위층 간부들이 주로 거주하는 아파트가 위치한 곳과 가깝고 북한 주민들이 이용하는 수영장인 '창광원'과 가까워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평양 대성 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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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대성 백화점'도 북한의 3대 쇼핑 메카 중 하나 인데, 평양시 대동강구역 청류동에 위치한 대성 백화점은 보통 북한 백화점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8시간 영업하는 것에 비해, 늦은 시간에 백화점을 찾는 사람들을 위하여 오후 10시까지 운영한다. 이 외에도 외교단 사업 총국 상점, 외화 상점, 련봉 상점 등이 외국인과 북한 부유층들을 대상으로 수입 명품 등의 외국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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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북한의 백화점은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선전용이거나 북한 일부 부유층을 위해 존재합니다. 북한의 상류층들이 백화점에 출입하고 열광하는 이유는 누구의 말대로 '철저히 차별과 불평등을 추구하는 상위 1%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자본주의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북한의 백화점 모습은 결국 사회주의로써의 북한 사회가 결국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하나의 창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 백화점은 일부 부유층, 특권층만을 위한 장소가 아닌 누구나 그 시설들을 마음 놓고 이용할 수 있는 장소로 인식되고 있는데(물론 일부 명품관들은 들어가기에 겁이 나는 것도 있지만... ㅠㅠ). 영화관과 식당 가 등 문화의 메카로 변모하고 있는 한국의 백화점과 같이 북한의 백화점도 주민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공간이 되는 날이 하루 빨리 찾아왔으면 한다.

    [농민시장과 장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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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민시장은 식량 및 상품의 공급이 충분하지 못했던 1970년대부터 인민의 생계를 상당 부분 책임지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국가의 식량 및 생필품 공급이 자주 중단되면서 트랙터 부품까지도 거래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농산품 외에도 여러 상품을 거래하게 되면서 다양한 상품을 취급하는 ‘장마당’으로 변하였다. 한편 유휴자재를 사용한 ‘.3인민소비품’*북한의 김정일이 지난 84년 8월 3일에 부산물과 폐기물을 이용해 생활필수품을 많이 만들라는 지시에 따라 만든 재활용품을 ‘.3인민소비품’이라 부른다)의 생산이 활성화 되었다.

    북한주민에게 농민시장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국영상품의 부족으로 사업소가 운영되지 않으면서 주민들은 필요한 물품들을 조금씩이나마 장마당에서 구입하게 되었으며 개인들의 사적 생산물이나 탈취품도 농민시장에서 거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 상품이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농민시장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한국 및 국제사회의 지원품들도 장마당에서 판매되기 시작하였다.

    [종합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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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은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2002년 7월 1일 ‘경제관리 개선조치’를 실시하여 물가와 임금의 대폭적인 인상을 단행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2003년 농민시장을 ‘종합적인 소비품’시장으로 확대하여 농산품 이외 상품들의 판매를 공식적으로 허용하였다. 일반 주민들도 시 상업국으로부터 매대를 임대해 각종 공산품을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전부터 농민시장은 ‘종합시장’의 역할을 하고 있었으나, 북한 정부가 뒤늦게 이를 ‘현실’로 받아들인 것이다.

    북한에서 시장이 확산되면서, 정부의 간섭과 감시도 강화되고 있다. 그러나 시장의 확산을 막아야 할 간부들조차 시장이 없이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있다. 종합시장을 운영하는 주체는 각 행정단위들이기 때문에 폐쇄가 상대적으로 쉬울 수 있다. 그러나 시장을 통해 세금이 징수되고 있는데다가, 지역 당 간부들의 불법적 수입원이기도 하므로 폐쇄가 쉽지 않다. 현재 북한의 시장은 당 간부를 포함한 권력자들의 주 수입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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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적인 종합시장인 신의주 채하시장의 경우 매대에 진열한 중국산 제품은 플라스틱 접시, 사기그릇, 유리컵, 물병, 슬리퍼, 샴프, 화장품, 세제, 칫솔, 등이며 특히 북한 대도시의 신축주택은 샤워시설을 갖추고 있어 고위층, 부자집 아줌마가 선호하는 샤와기와 여름옷이 매대에 가득 차 있었다. 또한 수입되는 수박, 바나나, 복숭아, 자두 등도 목격되었으며 시장에서 가장 붐비는 곳은 현미쌀, 옥수수, 수수, 감자, 콩기름(페트병), 고춧가루, 생선 등을 판매하는 식품매대였으며, 상인들은 추가달린 저울을 이용하여 곡물의 무게를 재어 판매하고 전자저울은 틀린 경우가 많아 사용하지 않는다.

    시장 한곳은 국밥, 냉면, 음료수 등을 판매하거나 배달 판매하는 곳도 있으며 상인들 간에는 당장 현금을 받지 않고 외상장부 거래를 하는 등 우리의 시골장터와 다를 바 없다.
    한편 남자가 장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원래 50세 미만 여성은 장사행위를 금지하도록 되어 있으나 보안원이 단속하려고 하면 온 몸을 던져 저항하는 경우가 허다하여 예전처럼 단속하지 못한다고 한다.

    북한의 종합시장은 통일거리사장을 본보기로 중구시장이 문을 열고 해주시장을 비롯해 지방도시에서도 현대식으로 새로 지은 시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평양에는 송신시장, 칠골시장, 서성시장 등 18개 구역(남쪽의 구에 해당)별로 1∼3개의 시장이 있고, 전국적으로 300여개의 시장이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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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열차는 전력사정으로 시골마을에서 오랫동안 정차하는 경우(심지어는 2∼3일간)가 많은데 그 때 마을 주민들이 열차 탑승객을 대상으로 야시장을 열어 음식을 판매하면서부터 생겼다고 한다.
    2010년 7월초 평안북도 국경지역에서는 최근 밤에도 시장수요가 급증하고 당국의 시장통제가 약해지면서 새벽까지 장사하는 야시장이 암암리에 운영되고 있었다.
    상인 20∼30명의 노점규모로 마을 입구에 좌판을 깔아 놓고 기차를 타고 밤에 도착한 여행자나 늦게 귀가하는 노동자들을 상대로 꽈배기, 순대, 건어물 등 식사용의 먹을거리를 손전등으로 손님과 흥정하며 새벽녘까지 장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야밤에 소규모 상인들의 장사행위를 단속하는 보안원은 없으나 개인의 상행위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시’식량배급이 중단되자 식생활에 도움이 되고자 야시장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으며 장사꾼들은 손전등이나 카바이트 램프를 켜고 음식, 잡화, 의류를 판매하는데 통상 야시장은 아파트로 둘러막힌 공터나 골목길 등에서 새벽 6시까지 열린다고 한다.

     

    [메뚜기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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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4월 북한에서 장마당이 합법화되면서 북한 당국은 시장 건물을 지어 상인들에게 장사할 공간을 배분했다. 판매대 폭은 좌우 70cm 내외다. 양강도 혜산에서 약장사를 했던 김정화(가명․40)씨는 “짐을 풀면 가득 찰 정도로 비좁은 자리”라며 “한줄에 80~100명의 장사꾼들이 앉아 같은 종류의 물품을 판다”고 설명했다. 그녀에 따르면 상설시장 매대는 쌀, 공산품, 옷, 고기 등 품목별로 구분돼 있고, 상인들도 품목별로 같은 색의 옷을 입는다.
    하지만 상설시장에서 장사하기 위해서는 장세(자릿세)를 내야 한다. 김씨는 “장세는 매일 내야하며 판매하는 물품에 따라 액수가 다르다”고 말한다. 장세를 받는 사람은 시장관리원들이다. 이들은 돌아다며 장세를 받고 영수증으로 매일 다른 표시가 된 딱지를 나눠준다. 또 금지 품목을 파는지 단속한다. 김씨는 “물건을 뺏기지 않기 위해 관리원들과 다투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담배나 돈을 조금 쥐어주면 봐준다”고 설명한다.

    장세를 낼 형편이 안되는 사람들은 상설시장 밖에서 장사를 한다. 함경북도 청진에서 군부대 외화벌이를 했던 강철(가명․54)씨는 “허가된)장마당 이외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단속대상”이라며 “이들은 항상 도망갈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한다. 일명 ‘메뚜기장사꾼’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단속원이 나타나면 잽싸게 물건을 챙겨 달아났다, 단속원이 사라지면 다시 판을 벌려 장사한다. 우리나라의 노점상에 해당된다고 보면 된다. 북한관련 소식통에 의하면 "화폐개혁으로 인해 크게 손해 본 중간층 사람들이 하층민으로 전락한 탓"이라고 한다.

     

    [출처 : 남북만남의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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