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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노스셀로 러시아 수비초소 앞에 서 있는 러시아 장교(위)와 훈춘 초소 앞 러시아 군인들의 모습(비숍의 여행기 중).
고종은 조선, 러시아, 청국의 3국간 공동조사를 제안하는 등 감계(勘計)문제를 제기하였으나 러시아와 청국의 무반응과 을사조약에 이은 일본의 한국강점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처럼 러시아영토가 된 녹둔도에 한인들이 들어와 개척한 것은 1875년이다.
경흥사람 홍석중(洪錫仲)이 그 개척자였다. 주민 대다수는 경흥 등 조선에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일부 지신허, 연추, 크라베섬 등에서 이주해오기도 했으나 극소수였다.
녹둔도는 노보키예프스크로부터 약 75베르스타(약76km) 떨어져 있다. 1895년에 작성된 러시아 기록에는 녹둔도 사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길이 거의 없어 노보키예프스크로부터는 말을 타고 가야 한다. 땅은 모래토양이고 심지어 들판까지도 모래가 많다.
마을 주민들은 빈곤하게 살고 있으며 강 근처에 살고 있는 일부 주민들이 평저선 6척과 큰 어망 하나를 갖고 있다. 이외에 제염소가 하나 있다. 강 근처의 주민들은 농사 외에도 자기 소유의 평저선으로 게, 생선, 굴 등을 싣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팔러간다.”
크라스노 셀로는 정확히 말해 녹둔도에 위치하고 있었던 11개의 작은 마을을 총칭하는 이름이었다. 문헌자료에 나타난 이들 마을의 명칭을 열거하면 바른패(Varynfei)로 불리기도 한 작포도, 학수평(鶴水坪), 와룡평(臥龍坪), 센기(Sengi), 튠코이(中所, Tiuncoi), 상소(上所, Shansoi), 원전역(遠田驛), 성장(城場), 달봄목(Tarbomogi), 카체기(Kachegi), 부디포(Budyfo), 앞세카리미, 솟카리미, 세카리미 등이다. 이 가운데 동사무소가 위치해 있던 상소가 크라스노 셀로였다.
1906~07년경 러시아당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크라스노 셀로에는 133가구 839명(입적자 116가구 771명, 비입적자 17가구 68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1914년의 기록에는 크라스노 셀로에 러시아문무성 인가를 받은 마을학교가 있었는데 2명의 교사가 85명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크라스노 셀로의 두만강 연안에 위치했던 상작포도(上雀浦島)에는 세관초소가 있었는데 경흥의 토리동(土里洞)으로부터 오는 사람과 짐을 점검했다.
서울대 사범대 이기석 교수가 이끄는 조사팀이 1996년, 2000년, 2002년 3차에 걸쳐 녹둔도를 답사한 바 있다. 이교수팀의 2000년도 답사보고서에 따르면 녹둔도로 추정되는 두만강 하구지역은 현재 사구와 저습지, 키높이의 끝없는 갈대숲으로 이루어진 황무지상태라고 한다.
군사용 비포장도로가 있으나 도로 곳곳에 물웅덩이가 있어 차량통과가 불가능한 상태이며, 녹둔도 사이를 흐르는 샛강지역에선 원주민들이 물오리 사냥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교수팀이 2차 답사에서 한인마을의 흔적이 분명한 논자리와 집터, 그리고 연자방아 맷돌 한 짝을 발견했고 제방의 흔적을 찾아낸 점이다.
북한의 선봉, 중국의 훈춘과 더불어 녹둔도는 몇 년 전까지 유엔개발프로그램의 주도로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남북한, 몽골 등이 참여하는 두만강델타개발프로젝트의 주요한 대상지역이었다.
이처럼 녹둔도는 영토분쟁의 소지가 잠재해 있는 지역인 한편, 동북아국가들간의 경제협력과 공존의 실험대로서 새로이 주목받는 지역이기도 하다.
엄격한 위생규정으로 청결한 마을
비숍은 녹둔도에서 돌아오면서 국경지대에 살고 있는 한인농민들의 생활상을 가까이서 관찰한 후 자치제도 등 한인마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이들 이방인들은 실제로 자치를 누리고 있다. 각 구역의 우두머리로 ‘노야’라는 것이 있는데 마을 규모에 따라 1~3명의 보조원을 두었다. 경찰들은 모두 한인이다. 모든 구역에는 서기가 딸린 2∼3명의 재판관이 있어 마을의 사소한 범죄들을 처리한다.
노야는 마을의 질서와 세금징수의 책임을 지는데 봉급과 함께 여러 가지 형태의 수당을 받는다. 공무를 맡은 이들은 모두 한인들이고 마을 주민 가운데서 선출한다.(중략) 크라스노 셀로와 노보키예프스크 간에 자리잡고 있는 한인마을들은 러시아 한인정착마을의 평균적 표본이다. 길은 잘 닦여져 있고, 늪들은 잘 관리되어 있다.
위생규정은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는데, 노야가 마을의 청결을 책임진다. 가난하고 망가지고 더러운 한반도의 마을과는 달리 이들 한인마을은 조선식으로 잘 지어졌고 흰 벽면에 이엉을 엮어 꾸몄다. 마당은 깔끔하게 엮은 갈대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는데, 매일 아침 비로 청소한다.
돼지우리도 구역경찰관의 아르고스(argus-눈이 100개 달린 신) 같은 눈초리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다. 모든 주택은 4, 5개 또는 6개의 방이 있는데, 각 방은 종이로 벽과 천장을 바르고 반투명의 종이로 창문을 발랐다. 바닥엔 단정한 매트를 깔았다.”
결론적으로 비숍은 조선에서 내렸던 조선인들에 대한 절망적 평가를 바꾸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조선에서 나는 조선인들은 찌꺼기 같은 종족이며 이들의 조건이 절망적이라고 여겼지만 프리모르스크(연해주)에서 이러한 나의 견해를 바꾸어야만 하는 이유들을 보았다.
러시아의 경찰관, 이주민, 군인들로부터 똑같이 좋은 행동방식과 뛰어난 근면성을 배워 윤택한 농민계급으로 길러진 이들은 결코 특별한 이들이 아니었다. 대다수가 기근으로부터 도망쳐온 굶주린 무리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번영과 우아함을 볼 때, 조선에 있는 이들의 동포들도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정직한 정부를 만난다면 ‘사람’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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