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사랑과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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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한인 발자취를 찾아서 ⑤]

황무지에서 곡창으로 탈바꿈한 秋風四社
빽빽한 잡림 베어내고, 홍후즈 약탈을 권총으로 지켜낸 피맺힌 땅

원시 잡림만 가득했던 연해주의 깊은 산중 분지 추풍(秋風).
한 접시의 식량을 얻기 위해 자식까지 팔 정도로 궁핍했던 한인들에게 이 땅은 생명줄 같은 것이었다.

 

한인 10여 가구가 시작한 개척 작업은 30년 만에 척박한 땅을 남부 우수리의 곡창지대로 탈바꿈시켰다. 오늘날 러시아인 마을로 변모한 추풍4사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했다.

코르사코프카 마을 입구

지금까지 필자는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추풍(秋風, 수이푼 Suifun)지역을 탐방했다. 필자가 이 지역에 관심을 두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이 지역의 중심지인 우수리스크시(과거의 니콜스크-우수리스크)를 지나 동남쪽으로 흐르며 부챗살처럼 뻗어 있는 수이푼강(綏芬河, 현재의 라즈돌리노예강 Rechka Razdol’noe)과 그 지류 유역에 과거 수많은 한인마을들이 분포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러시아 최대의 한인거주지였을 뿐만 아니라, 연해주의 곡창지대라 할 만큼 근면한 한인들에 의해 농산물이 풍부하게 생산되었던 곳이다.

 

또 한편으로 중국과의 국경지대 산골에 위치한 숱한 빈농마을들은 시베리아 내전기에 항일 무장독립군과 빨치산부대들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서울대 송기호 교수를 비롯한 발해사연구자들은 우수리스크를 발해 15부(府)의 하나인 솔빈부(率賓府)의 소재지로 추정하고 있다. 우수리스크와 추풍이라고 불리는 그 서쪽 일대에 핏줄처럼 흐르고 있는 수이푼강의 명칭이 바로 ‘솔빈(率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는 것.

 

여하튼 수이푼은 이 지역에 살았던 원주민들의 말에서 비롯된 지명으로, 이후 몇몇 러시아 지도에 ‘수이펜헤(Suifen’khe)로 기재되었는데, ‘수분하(隋分河)의 중국식 전사(轉寫)를 반영한 것이다.

 

또 발해인을 비롯해 만주지역 민족들의 오랜 역사적 연고지이기도 한 우수리스크에는 발해 때 축조된 남성(南城)과 금나라 때 축조된 서성(西城) 등 두 개 성터가 있다. 이 곳은 청나라 때는 쌍성자(雙城子)라고 불리기도 했고, 송나라에서는 황제가 구금됐던 곳이라는 의미로 ‘송황령(宋皇嶺)’ ‘송왕령(宋王嶺)’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이후 러시아 역사에서 현재의 우수리스크는 1866년 러시아 아스트라한주(州)로부터 이주한 농민들이 수이푼강의 지류인 라코브카(Rechka Rakovka)강 하구의 강변에 니콜스코예마을(Derevnaia Nikol’skoe)을 형성한 때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니콜스코예는 1898년 4월 시(市)로 승격됨과 동시에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개칭됐다. 그리고 1935년 스탈린의 측근인 국방인민위원 보로실로프(Kliment Efimovich Voroshilov)의 이름을 따서 보로실로프로 개칭됐다.

 

이같은 명칭변경은 1929년 ‘동중철도사건’의 영웅 원동특립군사령관 부류헤르(Vasily Konstatinovich Blucher) 등의 러시아 원동지역 지도자들을 견제하기 위한 스탈린의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일본군의 만행 4월참변

 

스탈린 사후인 1957년 보로실로프는 다시 현재의 우수리스크로 이름이 바뀌었다. 우수리스크는 서북쪽으로 북만주를 가로질러 통하는 동중철도(東中鐵道)와 북쪽으로 하바로프스크로 연결되는 우수리철도가 만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우수리스크 시내로 들어선 조사단은 우선 한인협회(칼리니나 거리 35번지)를 찾았다. 협회건물의 간판이 흥미를 끌었다. 맨 위에는 러시아어로 ‘카레이스키이 돔(Koreiskii Dom),’ 그 아래에 식당이라는 뜻의 ‘Kafe’, 그리고 맨 아래에 한자로 ‘韓國食堂’이라 써놓고 있었다.

 

이 건물은 우수리스크지방 고려인들의 민족교육, 언론, 문화의 센타로 활용되고 있는데 우수리고려민족문화자치회와 고려학교, 동북아평화연대 우수리스크 사무소, 원동신문사, 라디오방송국이 들어서 있다.

 

조사단 일행은 추풍4사(秋風四社)로 불렸던, 우수리스크시 서쪽 일대 강유역에 위치했던 대표적인 4개의 한인마을인 코르사코프카(Korsakovka), 크로우노브카(Krounovka), 푸칠로브카(Putsilovka), 시넬리니코보(Sinel’nikovo)를 찾아 나섰다.

 

우수리스크에서 노니콜스크로 향하는 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20분 정도 달리면 도로변에 4월참변 희생자 추모비가 나타난다. 이 추모비는 1920년 4월 일본군이 자행한 4월참변 당시 우수리스크 지역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인민군 병사 170명과 빨치산 70명 등 총240명의 희생자들을 위해 설립된 것으로 바로 그 전투현장에 세워져 있다.

 

4월참변이란 1920년 4월4일 밤부터 5일 새벽에 걸쳐 일본군이 연해주일대의 러시아 혁명세력과 한인들을 공격한 만행적 사건을 말한다.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라즈돌리노예, 스파스코에, 하바로프스크, 포세트, 스챤 등 연해주 각지에서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연합한 러시아 혁명정부의 공공기관과 러시아 혁명세력을 공격하는 한편, 한인들을 공격하고 대량체포, 방화, 파괴, 학살하는 등 만행을 자행했다.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습격해 한민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 50명을 무장해제하고 한인단체사무소와 가택을 수색해 60여 명을 검거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한민학교와 한인신보사 건물에 불을 질렀으며, 헌병분견대를 주둔시키고 자위대라는 헌병보조기구를 창설했다.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도 일본군은 한인 76명을 검거하고 4월7일 이들 가운데 한인사회 최고원로인 최재형을 비롯한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등 저명한 한인지도자 4명을 총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맨손으로 땅 일궈 밭 만들고

 

추풍4사 가운데 그 형성과정에 관해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는 곳은 푸칠로브카마을이다. 1895년에 추풍지대 한인마을을 조사한 러시아지리학회 아무르지부 학자들은 푸칠로브카마을의 사제와 오랜 주민들의 얘기를 바탕으로 푸칠로브카마을의 형성과정에 관한 귀중한 기록을 남겨놓고 있다.

 

1867년에 ‘최’라는 성을 가진 한 한인이 동네사람의 부탁으로 러시아지방을 다녀오기로 했다(러시아 학자가 말하는 최씨는 러시아 최초의 한인마을 지신허를 개척한 최운보(崔運寶)가 아닌가 한다). 최씨의 여행목적은 러시아지방 가운데 궁핍한 농민들이 살 수 있는 곳이 없는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포세트, 니콜스크예 등 남부 우수리지방의 거의 모든 지역을 둘러보았다. 최씨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사람들에게 남부 우수리지방의 생활과 농업상의 조건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경흥의 궁핍한 농민들 150가구가 당국의 허가 없이 포세트구역의 연추마을로 무단 이주를 감행했는데, 이곳에는 이미 30가구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이 연추마을에 도착하기까지는 2개월, 그 과정에서 이들이 겪었을 고통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러시아 학자는 이들이 겪었을 궁핍상에 대해 “잘 알려진 것처럼 자기 가족들에 대한 애착이 강한 한인들이 겨우 몇 접시의 식량을 얻기 위해 처와 자식들을 판 경우가 있었다”는 얘기를 함으로써 충분하다고 썼다.

 

3개월이 지난 후 이들 가운데 일부는 연추마을에 남았고, 나머지 한인들은 연추마을을 떠나 블라디스토크로 향했다. 이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것은 1868년 3월의 일. 1개월 후 몇 가구는 이곳에 남았고, 나머지는 행정당국의 허가를 받아 기선을 타고 라즈돌리노예역(하마탕역)으로 보내졌다.

 

이들은 정착지를 특별 할당해줄 것을 러시아당국에 청원했다. 이에 연해주당국은 수이푼강의 오른쪽 분지를 할당하기로 하고 관리 푸칠로(Putsillo)를 파견했다. 라즈돌리노예에 온 지 8개월 만이었다. 다시 일부는 라즈돌리노예에 정착하기 위해 남고, 나머지 가구들이 푸칠로를 따라 수이푼강의 지류인 류치헤자강(Rechka Liuchikheza, 현재의 카자취카강 Rechka Kazachka) 오른편 분지에 정착했다.

 

니콜스코예마을로부터 서쪽으로 25베르스타(약 26km)에 위치한 최초의 한인마을은 이 러시아 관리 푸칠로의 이름을 따서 ‘푸칠로브카’라고 하였다. 1869년 4월의 일이다. 한인들은 푸칠로브카마을을 육성촌(六城村)이라고 했는데, 마을 옆의 강 이름 즉, 바로 ‘6개의 지류를 가진 강’이란 뜻의 류치헤자(六?河子)에서 따온 것이다.

 

이곳에 처음 정착한 한인가구는 10가구였다. 이들은 배치되자마자, 중국식과 조선식을 모방해 거처할 집과 다른 용도의 건물들을 지었다. 그러나 원래 푸칠로브카마을이 들어선 분지는 사람이 근접할 수 없는 잡림이 빽빽하게 들어찬 황무지였다.

 

그러던 것을 이주한인들이 매년 분지를 뒤덮고 있는 삼림들을 베어낸 결과 몇 년 만에 오래된 참나무 몇 그루를 빼놓고 15∼16베르스타(16∼17km)에 달하는 분지를 덮고 있던 삼림이 사라졌다.

 

일단 거처할 집을 마련한 뒤 정착민들에게 절박했던 것은 일용할 식량이었다. 이들은 소, 말과 같은 가축이나 주요한 농기구조차 없어 몇 안 되는 목재나 철제의 호미와 도끼를 갖고 거의 맨손으로 땅을 일궈 채소와 곡식을 파종할 밭을 마련했다.

 

이들은 조, 감자, 옥수수를 심었는데 종자는 러시아당국으로부터 제공받았다. 다음해인 1870년 러시아당국은 땅의 경작을 위한 경작용 소 한 쌍을 푸칠로브카마을에 제공해 더 많은 땅을 개간할 수 있게 했다. 러시아당국은 이와 함께 파종용 종자를 구입할 수 있도록 은화 30달러를 지원하였는데, 이 돈으로 농민들은 국경지대의 중국마을인 산차거우(三?口)의 중국인들로부터 종자를 구입했다.

 

자국민처럼 보호해준 러시아정부

 

러시아당국은 또한 당시 수이푼강 일대를 횡행하고 있던 홍후즈(紅?賊, 붉은 수염을 한 중국인 마적)로부터 방어할 수 있도록 2개의 권총을 줬다. 가을이 되자 푸칠로브카마을 한인들은 수확한 농작물 중 일부를 자급용으로 남기고 나머지는 산차거우의 중국인들에게 팔았다.

 

푸칠로브카마을의 농민들은 곡식을 판 자금으로 소와 말을 사 기르고 이를 위한 축사를 마련했고, 고난의 3∼4년을 거친 후에는 제법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게 됐다.

 

이들 한인들은 두고 온 국내의 고향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성공적인 정착과 안정된 생활소식을 전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모든 면에서 매우 좋다. 식량이 풍부하고 러시아정부는 자국민처럼 도와주고 보호해주며 애정으로 받아들여 비옥한 토지를 주었다. 때문에 더 많은 한인들이 이주해와도 상관없을 정도이다”라고.

   

이로 인해 푸칠로브카마을의 주민수는 늘어났다. 1869년 정착 당시 10가구에 불과했던 것이 1년 만에 70가구로 늘어났고, 이후 새로운 이주자들이 계속 증가하면서 강의 양쪽에 4개의 촌락군이 형성됐다.

 

류치헤자강의 가장 서쪽, 즉 상류지역에 위치한 상소(上所)로 부터 동쪽으로 중소(中所), 관소(官所), 하소(下所)로 불려졌다. 1878년에는 측량기사가 파견되어 푸칠로브카마을과 다른 한인마을들 간의 경계가 지어졌다.

 

추풍4사의 형성과정이나 주민들의 생활조건은 시넬리니코보마을이 다른 3개 마을보다 3년 늦은 1872년에 형성된 점을 빼놓고는 하나의 조합으로 말해도 좋을 만큼 거의 같다. 푸칠로브카마을외의 다른 3개 마을의 위치를 니콜스코예마을, 즉 후일의 니콜스크-우수리스크시를 중심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코르사코프카마을은 한인들이 한자표기의 중국어 발음에 따라 ‘하거우(河口)’라 불렀던 마을이다. 코르사코프카마을은 우수리스크에서 수이푼강과 갈라지는 수이푼강의 가장 큰 지류인 쉬우판강(Rechka Shufan, 현재의 보리소브카강 Rechka Borisovka) 분지의 강상류변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니콜스코예마을로부터 15베르스타(약 16km) 떨어진 거리이다.

 

크로우노브카마을은 한인들이 한자표기의 중국어 발음에 따라 ‘황거우’라 불렀는데 본래의 중국식 표기인 ‘황구(黃溝)’ 또는 발음대로 표기해 ‘황거우(黃巨隅)’라 하기도 했다. 이 마을은 쉬우판강의 지류인 자피거우강(夾皮溝江, 현재의 크로우노브카강 Rechka Krounovka)가에 자리잡았는데, 코르사코프카마을로부터 서남쪽으로 6베르스타(약 6km) 떨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시넬리니코보마을은 니콜스코예마을로부터 40베르스타(약42km) 떨어진 수이푼강 상류의 강 양쪽에 두 개의 마을로 나누어져 있었다. 강이북에 위치했던 마을이 ‘첫번째 시넬리니코보마을’이라는 뜻의 ‘뻬르보예 시넬리니코보(Pervoe Sinel’nikovo), 강이남에 위치했던 마을이 ‘두번째 시넬리니코보마을’이란 뜻의 ‘후타로예 시넬리니코보(Vtoroe Sinel’nikovo)’이다.

 

한인들은 ‘후타로예 시넬리니코보마을’을 용산동이라고도 불렀다. 시넬리니코보마을 주변의 수이푼강 유역은 토지가 비옥하고 넓어 한인들은 영안평(永安坪), 대전자(大甸子) 또는 대지안현(大地安峴)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영안평 또는 대전자는 두 개의 시넬리니코보마을과 한인들이 ‘영안평 남숭전’이라고 불렀던 포크로브카(Pokrovka)마을을 총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조선정부의 관리 김광훈(金光薰)과 신선욱(申先郁)이 1880년대 중반 추풍일대를 방문하고 1885년경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아국여지도(俄國輿地圖)’에서 크로우노브카마을을 제외한 추풍3사의 형세와 규모가 기록돼 있다.

 

이들 추풍3사는 공통적으로 강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고 동서로는 들을 끼고 있는 형세였다. 추풍4사의 규모를 보면, 푸칠로브카마을 274호 2827명, 시넬리니코보마을 237호 2673명, 코르사코프카마을 229호 1569명 순이었다.

 

이들 조선관리들이 이보다 2, 3년 앞서 조사하고 작성한 ‘강좌여지기(江左輿地記)’에는 추풍3사와 함께 크로우노브카마을을 소개하고 있는데 추풍3사의 형세와는 달리 동서 7리, 남북 4∼5리이며 주민수는 90여 호였다고 한다.

 

이로써 1880년대 전반에 이르러 이미 추풍4사 가운데 푸칠로브카마을과 시넬리니코보마을이 연해주의 한인마을 가운데 1, 2위를 다투는 대규모 마을로 성장해 있었고, 코르사코프카마을 역시 앞서 형성된 지신허마을(236호 1665명), 연추마을(237호 1623명)에 이어 5번째로 큰 마을로 성장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부 우수리의 곡창

 

1895년에 보고서를 작성한 러시아 지리학자는 이들 추풍4사를 한마디로 “남부 우수리지방의 곡창”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이처럼 불과 30년도 되지 않은 세월에 함경도 국경지방의 빈농들에 의하여 개척된 추풍4사는 연해주지역에 주요 식량과 채소를 공급할 정도로 풍요롭고 윤택한 농촌으로 성장해 있었다.

 

추풍지역에는 러시아정교회가 들어섰는데 1895년경 추풍4사 가운데 푸칠로브카, 시넬리니코보, 코르사코프카의 3개 마을에 교회와 선교구가 있었고, 크로우노브카에는 큰 기도소가 있어서 가까운 코르사코프카의 정교회 사제가 2주에 한번씩 와서 예배를 주재했다.

 

1894년 당시 연해주 전체의 32개 한인마을에 총 4개의 교회와 선교구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3개가 추풍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나머지 한 개 교회는 남부 연해주의 연추마을에 있던 교회로 22개 한인마을을 관할했다.

 

더욱이 연해주 동남방에 위치한 스찬지역(3개의 한인마을)이나 내륙지방인 북부 우수리지역(2개 한인마을)에는 교회가 하나도 없었다.

 

이처럼 러시아정교회는 추풍지방에 편중돼 있었고, 교회마다 1명의 사제 겸 선교사가 있었던 관계로 추풍지역 한인들에 대한 러시아정교회의 선교사업은 성공적이었다. 러시아학자들은 추풍지역 노인들의 말을 빌려 불과 3년 만에 러시아정교회식 혼례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크로우노브카마을의 한 러시아인의 집 주춧돌로 쓰인 연자방아 맷돌.

러시아정교회의 분포에 비하면 정도가 약하지만 한인소학교의 경우도 추풍지방에 편중돼 있었다.

 

1895년 당시 연해주지방에 모두 10개의 한인학교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4개의 학교가 추풍4사의 각 마을에 있었고, 포셋트지역에 6개(연추, 지신허, 크라스노 셀로, 자레치예, 노바야 데레브냐, 아지미)가 있었다.

 

반면 북부 우수리지역이나 스찬지역에는 학교가 전혀 없었다. 1895년경 추풍4사의 한인학교 교사는 코르사코프카 학교 졸업생이 교사인 크로우노브카마을을 제외하고 교회의 사제가 교사를 겸했고 학생들은 모두 남자들이었다.

 

학생들의 연령은 8세부터 17세에 걸쳐 있었으며 간혹 결혼한 이들도 있었다. 추풍4사의 학생수와 학급수는 코르사코프카마을 4개반 39명, 크로우노브카마을 4개반 32명, 푸칠로브카마을 3개반 35명, 시넬리니코보마을 3개반 28명이었다.

 

추풍4사는 원호인촌

 

한인들이 추풍이라고 할 때는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서쪽의 광활한 농업지대를 지칭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이 일대 즉 수이푼강과 그 지류 유역에 산재해 있던 한인부락들을 총칭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따라서 추풍4사는 추풍 일대의 대표적인 4개 한인마을을 말하는 것으로 주로 러시아국적을 취득한 이른바 원호인(原戶人)들의 마을이었다.

 

이와 달리 러시아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이른바 여호인(餘戶人)들은 카자크부대나 러시아인 지주 소유의 토지를 소작해 경작하며 살기도 했다.

 

전자의 카자크부대 주둔지 마을로는 시넬리니코보마을에서 서북쪽으로 올라간 수이푼강의 최상류지역으로 중국과의 접경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던 콘스탄친노브스키이(Konstantinnovskii)나 폴타브스카야(Poltavskaia)를 들 수 있는데, 특히 콘스탄친노브스키이는 1906년 당시 한인 83가구 300명이 거주할 정도로 규모가 큰 마을이었다.

 

또 러시아인 지주의 토지에 정착해 살았던 마을로는 수이푼강과 류치헤자강 사이의 분지에 위치했던 보리소브카(Borisovka)마을과 크로우노브카마을 남쪽 쉬우판강 상류지역에 위치했던 야코노브카(Iakonovka)마을, 그리고 크로우노브카 서남쪽 상류지역에 위치했던 프로콥스브카(Prokop’svka) 등이 있었다. 크로우노브카마을에 인접한 자피거우강(Rechka Chapigou)마을은 전형적인 여호인촌이었다.

 

여호인촌들은 대부분 중국과의 접경지대 산골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자피거우마을외에도 시베창(西比廠 또는 西北倉,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서남쪽 10리), 다쟈골(니콜스크-우수리스크 서북방 4리), 솔밭관(니콜스크-우수리스크 서북방 10리), 타보오프(니콜스크-우수리스크 동북방 3리 반) 등이 형성돼 시베리아 내전시기에 주요한 항일무장세력이나 빨치산 활동의 근거지가 됐다.

 

한인들의 골칫거리 홍후즈

 

러시아 한인역사에서 초기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골치 아픈 존재가 바로 홍후즈이다. 만주지역의 마적에 해당하는 홍후즈는 훌륭한 학위논문의 주제로 손색이 없을 만큼 크게는 동북아시아 역사에, 그리고 작게는 우리 한인이민역사의 향방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존재였다.

 

홍후즈는 포세트, 수이푼, 스찬, 아누치노 등 한인들이 사는 연해주의 모든 지역에 출몰하여 한인들을 괴롭혔다. 적어도 1922년 시베리아 내전이 끝나 공산주의정권이 등장해 지방치안을 확립될 때까지는 그랬다. 추풍 일대에 초기 한인이주민들이 정착하는 과정에서도 홍후즈는 어김없이 등장해 한인들의 재산과 생명을 빼앗아간 약탈자였다.

 

초기 한인정착민들이 얼마간의 재산을 갖게 된 것을 알아차린 홍후즈는 무리를 지어 한인마을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손에 걸려드는 것이면 현금, 식량, 채소, 의류, 가축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약탈해갔다. 어느 때는 남녀와 아이들 8명이 한꺼번에 몰살당한 경우도 있었다.

 

전광석화처럼 출현하는 홍후즈들의 공격에 한인 농민들은 무방비상태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힘들여 모은 재산을 일시에 홍후즈에게 넘겨주고 구차한 생명만이라도 구하고자 관목숲으로 도피해야 했다.

   

이에 추풍4사의 한인들은 니콜스코예 수비대가 홍후즈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주도록 군초소를 설치해줄 것을 러시아관청에 청원했다. 그 결과 푸칠로브카마을에 20명이 주둔하는 군초소가 설치되고, 1878년에는 모든 한인마을들이 매달려 중대 규모의 부대가 체류할 수 있는 군막사를 짓기에 이르렀다.

 

그 덕분에 1882년경에는 절도 등 아주 사소한 범죄를 제외하고는 추풍 일대에서 홍후즈의 습격은 거의 멎어 푸칠로브카마을에만 7명의 군인들이 잠시 동안 머물곤 했다. 1884년에는 러시아관청의 명령으로 이전의 군막사에 ‘추풍 한인회 사무소’가 개설되어 추풍4사의 사무를 관장토록 했다.

 

2년 후인 1886년에는 한인들의 요청에 따라 ‘추풍 한인회사무소’는 코르사코프카마을로 이전했고, 이어 1892년에 ‘추풍 한인회 사무소’는 코르사코프카 읍청으로 바뀌어 러시아 지방행정체계에 부속됐다.

 

코르사코프카의 김원석옹

 

조사단은 4월참변 희생자 추모비를 떠난 지 10분 만에 코르사코프카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 표지판에는 마을 명칭과 함께 마을이 1869년에 형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1869년 한인이주민들이 개척했던 코르사코프카마을은 1937년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후 완연한 러시아마을로 변모했다. 우리 일행이 코르사코프카마을을 찾은 것은 추풍4사 가운데 하나라는 점 외에도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자피거우 마을터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였다.

 

자피거우마을은 부유한 원호인들이 집결해 살았던 추풍4사와는 달리 외진 산골에 위치한 빈곤한 여호촌으로 항일무장세력의 근거지였던 것이다.

 

특히 조사단의 일원인 의병연구가 박민영 박사를 비롯한 국내학자들은 이 자피거우를 13도의군의 결성지로 파악하고 있었다.

 

박박사 등은 의암 유인석 선생의 연보에 13도의군의 결성장소로 기록되어 있는 재구(梓溝)를 ‘자피거우(夾皮溝, Chapigou 또는 Tsziapigou)’의 음역(音譯)이라고 보고, 추풍지방의 한인마을 자피거우로 추정해왔던 것이다(필자는 신동아 9월호에 게재한 기고문에 13도의군 결성지에 관한 새로운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자피거우마을은 1920년 초 강국모 등이 조직한 항일무장단체 혈성단(血誠團)이 1920년 말까지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조사단은 나이 많은 러시아 여자의 안내로 자피거우 마을터를 알고 있을 것이라는 고려인 노인을 찾아갔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 노인의 이름은 김원석(金元石)으로 러시아 이름은 니콜라이 하리토노비치(Nikolai Haritonovich)이다.

 

김원석옹은 1921년 블라디보스토크의 동북쪽에 있었던 한인마을 진불(眞佛, Timpur) 출신이었다. 진불마을은 동북쪽 우수리만의 서쪽 해안에 위치해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불과 2∼3리 떨어진 자그마한 마을이었으나 점차 이주자들이 늘어나면서 1921년경에는 12개 마을 300가구가 35리에 걸쳐 형성됐다.

 

김옹은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다가 1953년 러시아의 로스토프로, 그리고 다시 1970년에 코르사코프카로 이주해왔다.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소재의 조선교육전문학교를 다녔고 1937년 강제이주 직전에 졸업한 인텔리였다.

 

한인사회주의 이론가 박진순

 

조사단은 김옹으로부터 강제이주 이전의 한인사회에 관한 풍부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직접 만났거나 알고 있었던 한인사회 지도자들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갖고 있었는데, 이동휘, 박진순, 홍범도, 계봉우, 김규면, 김하석, 이제, 한명세, 오창환, 박영, 최호림, 김준, 박세르게이 등에 관한 단편적이지만 가족관계를 비롯해 문헌에서 볼 수 없는 값진 증언들을 해주었다.

 

필자를 특히 감동시켰던 것은 김옹이 박진순(Ivan Petrovich)의 사위라는 사실이었다. 박진순은 ‘강동지방(江東, 연해주지방의 다른 칭호)의 신동’으로 유명했고 1920년 제2차 국제공산당대회서 원동집행위원으로 선출돼 1921년 11월 이동휘를 단장으로 하는 고려공산당대표단의 일원으로 레닌을 면담했던 초기 한인사회주의운동의 이론가였다.

 

김옹은 부인인 박진순의 딸 박엘레나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찌무르)와 세 딸(루바, 루다, 라리사)을 두었다. 박진순과 부인 김올가 사이에는 엘레나 외에 아들 하나(김알렉산드르)가 있었는데, 타지크스탄에서 사망했으며, 엘레나 역시 1950년에 사망했다.

 

며칠 후에 우리가 박진순의 출생지인 스찬지역(현재의 빨치산스크지역)의 신영동(니콜라예브카)을 답사하였을 때, 현지 고려인이 신영동을 개척한 김공심(니콜라이)의 외동딸이 박진순의 부인 김올가라는 증언을 했으나 동행했던 김옹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필자는 아직 이 증언의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김옹은 박진순이 사용하던 러시아역 한화자전(漢和字典)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1908년도 판인 이 자전에는 “冊主 朴鎭淳”이라고 써 있는데 박진순의 친필이라고 했다.

 

김옹이 이 자전을 물려받게 된 것은 그가 1948년에 모스크바에 가서 박진순의 두번째 부인을 만나러 갔을 때였다. 유태인이었던 박진순의 두 번째 부인은 “자네는 조선글을 아니 이 자전을 자네에게 준다”며 건네주었다는 것.

 

김옹은 스찬지역의 여러 한인마을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필자가 궁금해 마지않았던 스찬(水淸)지역의 한인마을들 가운데 다우지미(大烏吉密), 우지미(烏吉密, 두쉬키나), 청류애(淸流涯, 가이다막), 동개터(나홋트카) 등 한인마을들에 관한 귀중한 증언을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2박3일에 걸친 스찬지역 한인마을터 조사에 동행해달라는 요청에 ‘공부는 혁명적으로 해야 한다’며 흔쾌히 따라나섰다. 우리가 폐허화되거나 러시아마을로 변해버린 이들 한인마을들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김옹의 헌신적 노력 덕분이다.

   

한인간에도 계급갈등

 

코르사코프카마을로부터 불과 6km 거리에 있는 크로우노브카마을을 찾았다. 김옹은 이 마을에 다차(주말농장)를 갖고 있었다.

 

우리는 동네아이들의 안내로 마을 입구에서 대형 연자방아 아랫맷돌을 발견했으며, 김옹의 안내로 마을 중심부(소베트스카야 울리챠와 폴타프스카야 울리챠)에서 주택의 기둥을 고이는 받침으로 쓰여지고 있는 또 다른 맷돌을 찾을 수 있었다. 맷돌의 규모가 매우 커서 이 지역 농업생산력의 수준을 짐작케 했다.

 

우리는 서둘러 푸칠로브카마을로 향했다. 이곳 옛 학교 건물에서는 여전히 11학년제 학교가 운영되고 있었다. 이 학교는 길 양편으로 갈라져 있는데, 붉은 벽돌 건물에서는 1학년에서 4학년까지, 길 건너편의 시멘트 벽돌 건물에서는 5학년부터 11학년까지가 공부한다고 했다.

 

붉은벽돌건물이 있는 학교 뜰 구석에는 무늬가 아름답게 새겨진 아랫받침맷돌 3개와 위 굴림돌 1개가 전시되어 있는 것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크로우노브카마을에서 보았던 맷돌보다 크기가 작았다. 학교에서 여교사가 나와 우리들의 질문에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그녀는 이곳에 110년 전 화훼학교가 있었고 몇 년 전에는 북한사람들이 와서 유명했던 한인교사(카프 작가 조명희를 말하는 듯)를 주제로 한 영상물을 만들기 위해 촬영해 갔다고 했다. 또한 그는 이 마을의 한인들이 1920년도에 러시아 빨치산들을 많이 도와주었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이 교사의 말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일본군이 출병한 1918년 이후 푸칠로브카마을에는 일본군수비대가 주둔해 있었고, 이들은 부호 원호인들의 요청으로 주변의 여호인 빈농마을을 근거로 해 활약하던 한인들의 항일무장부대들에 대한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1919년에서 1922년에 이르는 시베리아 내전기라고 하는 일종의 계급전쟁과정에서 한인사회 역시 내부적으로는 원호인과 여호인 간의 계급적 갈등 양상이 중첩돼 나타나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는 시넬리니코보마을로 향했다. 이마을은 한국학계에서는 우리 조사단이 처음으로 답사하게 되는 것이다. 푸칠로브카로부터 서북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 가면 ‘후타로예 시넬리니코보(Sinel’nikovo II)마을’이 나타난다.

 

우리 일행은 후타로예 시넬리니코보마을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사를 짓고 있는 고려인 부자(父子)를 만났다. 이른바 고봉질을 하는 농민들이었다. 이들의 안내로 밭 귀퉁이에 놓여져 있는 큰 연자방아 맷돌 한 짝을 볼 수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 ‘뻬르보예 시넬리니코보마을’과 ‘후타로예 시넬리니코보마을’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다. 다리 하나로 연결돼 있다면, 우리는 ‘후타로예 시넬리니코보마을’로 곧바로 건너갈 수 있을 터인데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후타로예 시넬리니코보마을’을 나와 동남쪽으로 내려오다가 포크로브카(Pokrovka)를 거쳐 다시 서쪽으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가야 했다. 바로 건너편으로 보이는 이웃마을을 21킬로미터를 ‘ㄷ’자로 돌아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했다.

 

마치 남북이 갈린 듯한 우리민족의 형편과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먼저 형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뻬르보예 시넬리니코보마을’에서 우리는 아무런 한인유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인사회당 창당의 산파역할을 했던 최초의 한인 볼셰비키 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감회에 젖어보았다.

 

추풍4사는 원호인 출신의 한인부농들의 본거지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경제적인 힘을 배경으로 러시아 한인사회를 주도하고자 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러시아혁명 격동기에 반(反) 볼셰비키적인 정치적 입장을 취했고 일부는 백위파 그리고 이를 후원하는 일본출병군에 협력하기도 했던 것이다.

 

반대로 추풍 산간지방에는 한인무장부대들이 결성되어 반백위파=반일적 무장투쟁을 감행했다. 이에 따라 추풍지역의 한인사회는 다른 지역보다 한층 격렬한 계급투쟁의 양상을 보였던 것이다. 1928∼29년에 개시된 ‘위로부터의 사회주의화’ ‘토호척결’ ‘당청결’의 와중에서 이들 추풍4사의 원호인 부호들은 척결의 대상이 됐다.

 

소멸된 마을은 대부분 여호인촌

1937년의 한인강제이주로 추풍지역에서 소멸된 한인마을은 문헌상으로만도 적어도 80여 개에 달한다. 이들은 대부분 중국과의 산악국경지대 산골에 위치했던 이른바 여호인촌들이었다.

 

이에 비해 이민 초기에 추풍일대를 개척하였던 원호인들이 건설한 추풍4사는 수이푼강 유역의 광활한 들판에 자리잡고 있었다. 추풍4사는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로 한인들이 떠난 이후 러시아인들이 들어와 이제는 완연한 러시아마을로 변모했다.

 

주인은 바뀌었으나 한인들이 살았던 추풍4사는 그만큼 관개와 교통이 편리하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인데 이를 맨손으로 개척하고 가꿨던 이들은 고려인의 조상인 억척스런 함경도 농민들이었다.

   (끝)

출처 : 한류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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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한인 발자취를 찾아서 ④]

연해주 남부 교통요지 바라바쉬 일대의 한인마을들
수려한 산세와 맑은 물, “이제 다시 와서 살아도 좋을 텐데”

광활한 대지와 짙푸른 초목이 이어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라바쉬까지 162km. 그 사이로 흐르는 강줄기를 타고 구한말 한인들의 흔적이 살아 숨쉬고 있다.
때로는 강을 끼고, 때로는 강 주변의 비옥한 토지 위에.

한인마을이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던 연해주 남부 핫산지역. 그 북부 중심에 바라바쉬(Barbash)라는 마을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남쪽으로 162km 정도 거리에 있는 이곳은 과거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지리적 환경적 여건 덕분(?)이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중국이나 북한 국경지대로 가는 도중 바라바쉬를 그냥 지나쳤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이곳을 지나고 나면 국경 근처에 다다르기까지 마땅한 식당이나 가게가 없어 밤늦은 시간까지 굶어야 한다.

 

주유소도 없다. 중간에 가스나 기름이 떨어지면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다. 이런 사정으로 오늘날 바라바쉬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주유소와 식사를 할 수 있는 카페들이 많다.

 

바라바쉬는 중국과의 국경지대로부터 아무르만으로 흐르는 주요한 강 가운데 하나인 바라바쉐프카(Barab-ashevka)강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옛 명칭은 ‘몽구가이(Mongugai)’, 한자로는 몽고가(蒙古街)로 표기했다. 바라바쉐프카강 역시 과거에는 ‘몽구가이강’이라 불렸다. ‘몽구가이’는 18세기에는 ‘메이구헤(Meigukhe)’로 불렸던 지명인데,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러시아 지도에 ‘몽구(Mongu)’ ‘뭉구(Mungu)’ ‘망구(Mangu)’ 등으로 표기되기 시작했고, ‘맹구가이(Mangugai)’에 이어 몽구가이(Mongugai)로 불렸다.

 

한인들은 이 지역 일대를 ‘멍고개’라 부르기도 했는데, 원래 지명인 ‘몽구가이’의 발음에 우리말 해석을 담아 ‘맹고개(孟古介)’ ‘맹령(孟嶺)’ ‘맹현(孟峴)’ ‘맹산동(孟山洞)’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하기도 했다.

 

조선 왕조 관리 김광훈(金光薰)과 신선욱(申先郁)이 1882년 말 또는 1883년에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강좌여지기(江左輿地記)’에 보면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맹고개관(孟古介館)’에 수비병 30명이 있고, 러시아인 30여 가호가 있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

 

이 기록을 통해 당시 한인들은 바라바쉬를 ‘맹고개관’이라 불렀고, 또 이 지역에 러시아 군부대가 주둔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부 기록에는 ‘맹고개영(孟古介營)’으로 표기돼 있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의병운동의 중심지

 

1911년경 일본군 첩보당국의 조사에 따르면 바라바쉬에 주둔한 러시아부대의 병력은 약 1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러시아정부가 바라바쉬를 군사전략상 요충지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1890년대 초반 노보키예프스키 주둔 러시아 경관은 철도간선부설관리국의 통역인 최재형에게 지시해 노보키예프스키 러시아군영의 병졸 300여 명과 주변 한인들로 하여금 노보키예프스키로부터 몽구가이(멍고개)까지 도로를 건설하게 했다.

 

대거 동원된 한인들의 인건비는 러시아 당국에서 지불했다. 이후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한인들까지 러시아정부의 토지분배에 대한 보상명목으로 도로건설 공사에 동원돼 노보키예프스키에서 두만강 하구의 포드고르나야까지, 라즈돌리노예로부터 스찬강(현재의 파르티잔스크강)에 이르는 주요 간선도로가 건설됐다.

 

바라바쉬, 즉 과거의 몽구가이는 이처럼 교통의 중심지이자 군사전략상 중요한 마을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 시기 주변에 많은 한인마을과 러시아마을이 생겨난 것도 이런 연유다.

 

1906∼07년경 몽구가이강가에 위치했던 주요 마을들을 강 하구로부터 소개하면, 러시아마을 보고슬로브카(Bogoslovka), 한인마을 니즈네예 몽구가이(Nizhnee Mogugai), 러시아마을 포포바 고라(Popoba Gora), 러시아마을 우로치쉬체 바라바쉬(Urochitsshe Barabash), 러시아마을 오브치니코바(Ovchinnikova), 한인마을 베르흐네 몽구가이(Verkhne Mongugai) 등 6개 마을이다. 당시 한인마을과 러시아마을은 이처럼 서로 뒤섞여 있었다.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한인마을이 몽구가이강가에 처음 형성된 것은 1885년 무렵이었다. 강 하구 쪽에 위치해 있던 니즈네예 몽구가이, 즉 하(下)몽구가이가 가장 먼저 생겨난 마을이다. 통칭 몽구가이라고 하면 바로 이 마을을 일컫는다. 베르흐네 몽구가이, 즉 상(上)몽구가이가 생기면서 이와 구별하기 위해 ‘아랫마을’이라는 뜻의 ‘니즈네예’를 붙인 것이다.

 

이밖에도 문헌상에 나타난 몽구가이강 주변 분지에 위치해 있던 한인마을들로는 1919년 당시 몽구가이 주둔 헌병분견소 관할 내의 상사평(上砂坪, 몽구가이 서북방 약 8km), 남촌리(南村里, 몽구가이 북방 10km), 상개척(上開拓 또는 山開拓, 몽구가이 서방 16km) 등이 있다. 1914년경 몽구가이를 중심으로 몽구가이강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 총수는 2500명에 달했다.

 

몽구가이는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이후 의병운동의 새로운 중심지로 주목받는 지역이 됐다. 1911년 5월24일 홍범도, 전제익, 허근(허영장), 이진룡, 조장원, 이춘식, 김중화, 최병규, 엄인섭 등 의병파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회합을 갖고 의병운동 개시를 결의했다. 그 자리에서 집결장소를 몽구가이로 정했던 것이다.

   

‘트락토르’라 불렸던 한인상점

 

한편 몽구가이강 아래쪽으로 흐르는 케도르바야 파지(Kedorvaia Pad)강 주변에도 한인마을이 형성돼 있었다. 강의 이름과 같은 케도르바야 파지의 집들은 해안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이 마을은 몽구가이로부터 약 15km 거리에 있었는데, 다시 방천목(Panchaimoigi)과 치무허(Tsimukhe)라는 두 개의 작은 마을로 나누어졌다.

 

이 가운데 치우허가 본래의 케도르바야 파지마을이다. 러시아 지명으로 수호레치예(Sukhorech’e)라고 불리기도 한 방천목은 아무르만 건너편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운송되는 물산, 특히 만주로부터 실려오는 가축들이 집결됐던 곳이다.

 

1885년 당시 케도르바야 파지를 거쳐 운송되는 가축의 수는 연간 7000두에 달했다. 당시 이 마을에는 23가구가 거주하였는데, 20가구의 한인들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여호인(餘戶人)이었다.

 

방천목의 주민들은 극히 소수만이 농업에 종사했고 대다수는 만주로부터 가축을 실어오는 마부들과 각지로부터 와서 기항하는 거룻배 선원들에게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이에 비해 치무허 마을 주민들은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했다.

 

오늘날의 모습은 어떨까. 2002년 7월초 필자는 조사단을 이끌고 바라바쉬, 즉 옛 몽구가이를 찾았다. 바라바쉬에는 지금도 러시아 군영이 있다. 마을 곳곳에 군인들의 막사가 보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옛 한인마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조사단은 한 러시아 노인의 안내를 받아 몽구가이강 일대 6개 마을 가운데 아직까지 옛 이름을 유지하면서 남아 있는 오브치니코바로 향했다. 그곳에서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를 한인의 유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곳에 도착하자 한 러시아 할머니가 자신의 집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집 앞뜰에 있는 우물을 보여주었는데, 한인들의 우물을 보고 이를 모방해 만든 것이라고 했다. 깊은 우물을 돌로 둘러싼 완연한 한국형 우물이었다. 텃밭 한가운데 오래 전에 한인들이 사용했음직한 우물도 남아 있었다. 또 집안 여기저기에는 돌절구, 맷돌 등 한인의 유적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어 만난 일리야 포도르비치씨로부터 보다 생생한 증언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집 옆에 남아 있는 작고 낡은 집을 가리켰다. 한인 콜호스(옛 소련의 공동체마을)의 상점으로 ‘트락토르’라고 불렸던 곳이라고 했다. “그 상점의 주인은 콜호스 책임자인 김파벨이라는 고려인이었는데 ‘참으로 좋은 사람’이었다”고 포도르비치씨는 회고했다.

 

비옥한 농토, 풍부한 농업용수

 

1928년에 출생해 올해 75세가 된 이 노인은 아홉 살 때이던 1936년 한인 콜호스에 있는 학교를 다니며 한인들과 함께 한글을 배웠다. 학교 교장인 아버지는 한인이었고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인이었다.

 

아는 단어를 말해보라고 하니 기억을 더듬으며 ‘하나, 둘, 서이, 너이, 다섯…열’을 세더니 “한글을 좀더 오래 배웠으면 지금 써먹을 수 있을 텐데 아쉽다”고 말했다.

 

당시 자기보다 아홉 살 위였던 형은 한국어를 잘해 통역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포도르비치씨에 따르면 몽구가이에는 1000여 명의 한인이 살고 있었는데 비교적 잘살았다고 한다.

 

러시아정부의 강제이주 당시에 대해 그는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한인들은 이주하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하지만 당국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모든 한인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결국 집들만 남게 됐다. 한인들이 떠난 후, 러시아 사람들도 다 떠나가고 5가구만 남았다. 현재의 오브치니코바 주민들은 후에 러시아 중부지역으로부터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포도르비치씨는 과거를 회상하듯 “이제 한인들이 다시 와서 살아도 좋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오브치니코바에 사는 여러 노인들의 진술 등을 종합해보면, 1937년 강제이주 직전 몽구가이는 1000명 규모의 비교적 큰 마을이었고, 적은 수의 러시아인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1906년경 23가구 125명의 작은 마을에 불과했던 것이 30년 만에 빠른 속도로 성장했던 셈이다.

 

한편 블라디보스토크와 바라바쉬 사이 곳곳에도 한인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라즈돌리노예강 하구유역에 자리잡고 있는 라즈돌리노예도 그 중 하나다.

 

1895년경 형성된 이 마을은 초기에 여호인(餘戶人) 30가구가 살았으나 10년 후인 1906년경에는 62가구 300명으로 늘어났다. 지금은 라즈돌리노예강, 즉 옛 수이푼강 하구 일대에 광활한 습지의 삼각주가 형성돼 있는데 비옥한 농토에 농업용수가 풍부해 농사를 짓는 데 최적지라는 환경여건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라즈돌리노예를 지나 남쪽 아무르만의 서쪽 해안을 따라가다 보면 라즈돌리노예강 하구로 들어가는 4개의 지류가 나타난다.

 

중국과의 국경지대에서 발원해 동쪽의 아무르만으로 흘러드는 이들 강은 페르바야 레츠카(Pervaia Rechka, 첫 번째강), 후타라야 레츠카(Vtaraia Rechka, 두 번째강 또는 칭거우재 Chingouza), 산두거우(三道溝, San’daugou, Sadagou 또는 Sandagu, 현재의 네진카강 Rechka Nezhinka), 얼두거우(二道溝, Erdaogou 또는 El’dagou, 현재의 아나녜프카강Rechka Anaen’evka), 그라즈나야강(Rechka Griaznaia)이다. 이들 강 주변에는 강 이름과 같은 이름의 한인마을들이 있었다고 한다.

   

의병 마지막 결의장소 ‘13도의군’

 

바라바쉬에 남아 있는 옛 한인 콜호스의 상점 ‘트락토르’ 건물.

라즈돌리노예에서 차량으로 1시간 남짓 거리에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한인마을 하나가 있다. 1910년 여름 연해주 의병세력의 총집결체인 13도의군(十三道義軍)이 결성됐던 지역으로 추정되는 암밤비(Derevnaia Ambambi)마을이다.

 

러시아측 자료에는 일제에 의한 국권피탈이 임박한 1910년 7월21일, 이범윤 유인석 홍범도 이상설 등 연해주에 집결해 있던 의병지도자 150명이 ‘암밤비’에서 대회를 개최하고 13도의군을 결성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한말 의병운동 연구자인 박민영 박사를 비롯한 국내 학자들은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 선생의 연보(年譜)에 13도의군의 결성장소로 명시되어 있는 ‘재구(梓溝)’를 ‘자피거우’의 음역(音譯)이라고 보고, 우수리스크 서남방에 위치해 있던 한인마을 재피거우(협피구(夾皮溝), Chapigou 또는 Tsziapigou)로 추정해왔다.

 

지난 2001년 여름 러시아 원동지역의 독립운동유적 조사활동에서 필자와 함께 지신허의 위치를 찾아냈던 박민영 박사는 최초의 한인 마을 지신허로부터 6∼7km 동북방에 위치한 또 다른 제2의 ‘자피거우’ 지역에 주목했다.

 

박박사는 이 자피거우에도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종전 자신의 견해를 수정, 지신허 일대가 바로 13도의군의 결성장소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이처럼 13도의군의 결성장소와 관련해서는 러시아측 기록과 한국측 기록이 일치하고 있지 않은 데다가, 유인석 선생 연보에 기록돼 있는 ‘재구(梓溝)’를 어디로 파악할 것인가가 분명하지 않은 상태다. 필자는 답보상태에 있는 학계의 논의를 진전시킬 돌파구를 만든다는 차원에서 자료에 거론된 마을과 지역에 대한 답사·조사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필자는 러시아측 기록에 나타난 암밤비가 암바-비라(Amba-bira)강가에 있었던 한인마을 암바-비라(Derevnia Amba-bira)가 가장 유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암바(Amba)강, 즉 옛날의 암바-비라강은 그라즈나야강에 비하여 강폭이 훨씬 넓었다.

 

1895년도에 작성된 러시아 지도에도 암바-비라라는 마을이 그 이름처럼 암바-비라강가에 위치해 있었다. 퉁구스 계통의 지명인 암바-비라의 어원은 애매하나 일반적으로 ‘호랑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퉁구스계 원주민이 이름을 붙인 암바-비라강은 1860년에 러시아식 표기인 ‘암바-벨라(Amba-bella)’ 또는 ‘암바-벨라야(Amba-belaia)’로 표기되다가 뒷부분을 빼고 현재의 이름인 암바강으로 불리고 있다.

 

암바강은 중국과의 국경지역에서 발원해 동남쪽으로 흘러내려와 아무르만의 페스차누이(Peschanyi) 반도 북편의 페스차나야(Peschanaia)만으로 흘러들어간다.

 

문서상 ‘자피거우’는 최소 3개

 

앞서 언급했던 조선 왕조 관리 김광훈과 신선욱의 ‘강좌여지기’에는 암바-비라강 주변의 모습을 “지형은 평탄하고 농사를 크게 진다. 동서(東西)는 가히 50리에 이르고 남북 또한 20리가 된다. (부근에) 호인촌(胡人村) 50여 호가 있고…산세는 수려하고 물은 맑다”라고 기록돼 있다.

 

1895년 당시 암바-비라는 베르흐네 암바-비라(Verkhne Amba-bira, 상(上)암바-비라)와 니즈네예 암바-비라(Nizhnee Amba-bira, 하(下)암바-비라)로 나누어져 있었다.

 

상암바-비라는 연해주 남부를 남북으로 횡단하는 우편도로 왼편, 즉 서쪽으로 20베르스타(약21km) 떨어진 지역에 위치해 있었는데 17가구가 살고 있었다. 또 하암바-비라는 우편도로의 오른쪽으로 4베르스타(약 4km) 들어간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10가구가 거주하고 있었다.

 

이후 암바-비라의 주민은 꾸준히 늘어나게 되는데, 1906년경에 상암바-비라에는 24가구 90명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한인들이 사용했던 우물터. 러시아인들은 이 우물 물을 농수로 사용하고 있다.

필자는 13도의군 창설과 관련된 학계의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관련자료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새로운 자료들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 1920년에 작성된 일본 외무성 자료에서 수이푼 지역의 자피거우나 지신허마을 근처의 자피거우와는 별개인 제3의 ‘자피거우’라는 지역이 있었고 이곳에 한인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던 사실을 새롭게 확인하게 되었다.

 

이로써 자료상으로는 최소한 3개의 ‘자피거우’가 확인된 셈이다. 이 가운데 특히 새로 발견된 제3의 자피거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암바강가에 위치해 있던 한인마을 ‘암바-비라’와 거의 비슷한 지역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로써 13도의군 결성지와 관련, 러시아측 기록과 한국측 기록 간에 서로 다른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단서가 마련됐다.

 

즉, 유인석 선생 연보상의 ‘재구(梓溝)’를 박민영 박사의 해석에 따라 ‘자피거우’의 음역이라 보면, ‘재구(梓溝)’나 러시아측의 ‘암바-비라’ 마을은 아마도 같은 지역을 일컫는 것이라 하겠다. 이 점은 다른 자료에 의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가 입수한 1930년대 초반에 작성된 러시아 지도에는 자피거우가 암바-비라강 남쪽 멜코보드나야만으로 흘러드는 보로딘스키(Vorodinskii)강가에 표시돼 있었다. 자피거우는 바로 암바강 바로 옆 보로딘스키강과 마류틴카(Maliutinka)강이 합류하는 강 하구 분지에 형성돼 있었던 것이다.

 

13도의군의 결성장소가 ‘암바-비라’냐 자피거우의 한인마을이냐에 대한 논의는 이제 한 단계 진전된 상태에서 계속될 것이나, 러시아측과 한국측 자료간 상이한 기술내용에서 비롯한 현격한 해석의 차이는 상당히 좁혀진 셈이다.

 

바라바쉬 일대의 또 다른 한인마을은 서남쪽에 위치한 아지미(芽芝味)와 시지미(柴芝味)다.

 

아지미는 1872년 조선으로부터 온 이주민들에 의해 개척됐다. 이 마을 역시 베르흐네(上) 아지미, 니즈네예(下) 아지미 등 두 개의 마을로 구성돼 있었다.

 

18세기 중국의 역사지리서에는 하치미(Khatszimi)로 표기돼 있는데, 19세기 중반 이후 러시아 지도에는 아지미(Adimi)라 표기됐다. 한편 한인들은 이 지역을 상농평, 하농평으로 달리 부르기도 했다.

 

하아지미는 현재 포이마(Poima)강으로 불리는 아지미강 하구로부터 4km에 걸쳐 강을 따라 위치해 있었다. 1885년 당시 하아지미에는 예배소와 학교, 그리고 제10동부시베리아보병대대 소속 하사관과 12명의 병사가 배치된 러시아초소가 있었다. 이 마을에는 또 남부 연해주 한인사회의 행정, 경찰, 문화 중심기관들이 위치해 있기도 했다.

 

하아지미로부터 강을 따라 1.5km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상아지미가 나온다. 상·하 아지미가 자리잡고 있는 분지의 길이는 약 12km에 달했다. 그러나 폭은 2km에 불과했다. 1906∼07년경 아지미의 주민 수는 상아지미에 52가구 326명, 하아지미에 63가구 438명이었다. 1914년경에는 총 주민수가 800명으로 늘어났다.

 

이 마을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1893년부터 한인들의 국적취득이 허용되면서 한인자치행정조직인 도회소가 설치됐었다는 것. 아지미의 도회소는 북도소(北都所)라 했고, 비슷한 규모의 대표적인 한인마을인 연추마을(‘신동아’ 7월호 참조)의 도회소를 남도소(南都所)라 불렀다.

 

러시아혁명 직후인 1917년 당시 아지미는 22개 촌을 총괄하면서, 10개 촌을 총괄하던 연추마을과 함께 ‘오블라스트(Oblast)’로 불릴 정도의 대촌(大村)이었다. 또 한인들의 자치기관인 한인민회가 조직됐는데 1917년 6월 연추와 아지미에 각각 한인민회 본부가, 그 산하 각 마을에 지부가 설치돼 자치행정을 실시했다.

   

러시아 마을 된 아지미와 시지미

 

현재 아지미는 1937년 강제이주로 한인들이 떠나면서 러시아마을이 됐고, 마을명칭도 바뀐 상태이다. 상아지미는 1972년에 포이마(Poima)로, 하아지미는 로마쉬카(Romashka)로 각각 이름이 바뀌었다.

 

시지미(Sidimi 또는 Sedimi)는 바라바쉬에서 서남쪽 20km 거리에 있던 시지미(Sidimi)강가에 있던 마을이다. 이 강은 현재 나르바(Narva)강으로 불린다. 시지미라는 지명은 중국의 역사지리서에 ‘에치미(Ethsimi)’ 또는 ‘이치미(Itszimi)’로 표기되다가, 1860년대 러시아 지도와 출판물에 ‘니지미(Nidzimi)’ ‘시디미(sidimi)’ ‘세디미(Sedimi)’ ‘시데미(Sidemi)’ 등으로 쓰였다.

 

시지미는 1867년 조선으로부터 이주해온 농민들에 의해 개척된 마을이다. 마을이 위치한 시지미강 분지는 길이가 약 10km, 폭이 1∼2km에 이른다. 1885년 당시에는 베르흐네 시지미와 니즈네예 시지미가 있었는데, 1899년경 이 두 마을 중간에 스레드네예 시지미(중(中)시지미)가 형성됐다. 이 중 상시지미에는 제8동시베리아보병대대 소속 하사 1명과 12명의 병사가 배치된 러시아 초소가 설치돼 있었다.

 

상시지미 마을의 주민들은 재배한 귀리를 바라바쉬 일대에 내다 팔곤 했는데, 오랫동안 꾸준하게 경작에 힘쓴 결과 다른 마을에 비하여 꽤 부유한 생활을 했다. 하시지미 마을 역시 경작한 귀리를 평저선과 거룻배에 실어 블라디보스토크에 내다 팔았는데 이 지역 주민들은 잦은 홍수에 시달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1906년경 시지미에는 상시지미 55가구 358명, 하시지미 55가구 339명과 주변지역의 한인들을 합쳐 총 230가구 1197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1914년경에는 약 450가구 2000명으로 늘어나 이 지역 한인마을 가운데 손꼽힐 정도의 대규모 마을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90년 가까이 흐른 지금, 과거의 시지미강(현 나르바강) 주변에는 가옥이 전혀 없다. 러시아 군부대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끝)


출처 : 한류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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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한인 발자취를 찾아서 ③]

한·러·중 국경지역 한인마을들
집은 크고 튼튼하며 마당엔 잘 자란 가축이 놀고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목조가 살았던 금당촌, 이순신 장군이 둔전제를 실시했던 녹둔도, 러시아 군부대에 무참히 짓밟혀 역사속으로 사라진 나선동.
두만강 일대 국경지역에는 수백년 전의 역사와 수십년 전 근대사의 아픈 과거가 공존하고 있다.

핫산에 있는 핫산호수. 호수 건너 바라다보이는 철교가 ‘두만강 철교’다.

피터대제만 연안 두만강 일대는 과거 조선, 러시아, 중국 3개국 모두의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변방 중의 변방이다.

 

오래 전부터 여진족을 비롯한 북방민족의 활동무대였지만 땅이 척박하고 깊은 산골짜기와 늪지대가 많아 농사를 짓기에 무척 힘든 곳이었다.

 

이 지역은 또 3개국의 접경지대로 국제정세의 변화와 국가간의 관계변화에 따른 국경분쟁의 소지가 상존해왔던 만큼, 거주민들에게 지속적이며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되는 곳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한때 200여 개에 달하는 한인마을이 분포해 있었다.

 

이곳 한인마을은 크게 두 지역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탐험대만의 크라스키노로부터 남쪽 길을 따라 두만강 하구에 이르는 핫산(Khasan)지역이다. 이 길의 끝이 바로 북한, 러시아, 중국 국경이 만나는 핫산이다.

 

그곳에서 마주보이는 두만강 건너편이 북한의 경흥이다. 핫산의 남쪽은 늪지대다. 길이 없어 접근할 수 없는 지역으로 과거 크라스노예 셀로라 불렸던 녹둔도(鹿屯島 또는 鹿島)가 있다. 크라스키노에서 크라스노예 셀로에 이르는 중간 지역 곳곳에는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까지만해도 한인마을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 다른 지역은 크라스키노로부터 서쪽으로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도로를 따라 중국의 훈춘(琿春)에 이르는 곳이다. 과거 크라스키노와 훈춘 사이의 이 지역에도 한인마을들이 여러 군데 형성돼 있었다. 이 길은 현재도 훈춘으로 들어가거나 반대로 중국에서 러시아로 나오는 상인이나 관광객들의 주요통로다.

 

“길이 구릉 위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고…”

 

영국의 여행가였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은 1894년 가을 조·러·중 3국의 국경지역을 방문했다. 러시아와 조선의 국경지대를 거쳐 조선 경흥과 중국 훈춘을 직접 보고자 했던 그녀의 노정은 크라스키노를 떠나 크라스노예 셀로를 거쳐 다시 훈춘과의 국경지방으로 이어졌다.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은 그녀가 이 지역을 방문하면서 보고 느꼈던 바를 기록하고 있다.

 

비숍의 책을 보면 핫산으로 가는 중간에는 포시에트만 해안을 따라 여러 개의 한인마을들이 있었다. 주민들은 염전을 일궈 소금을 만들었는데 정제과정을 거친 소금은 중국의 훈춘으로 운송했다. 바닷가로부터 내륙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가 곳곳에 한인마을이 있었다. 그 광경을 비숍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 아름다운 시골마을 어디에서나 한인의 집을 쉽게 볼 수 있다. 중국인의 집은 다 허물어져 쓰러질 것 같고 얼마 되지도 않는다. 무단으로 점유했든 구입했든 한인들은 토지를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이들은 가축을 길러 땅을 아주 비옥하게 만든다. 깊게 갈고 작물을 돌려가며 재배해 상당한 수확물을 거둔다.”

 

오늘날 핫산에 이르는 도로는 비교적 상태가 좋다. 도로 양편으로 펼쳐져 있는 평원과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낮은 구릉 사이로 쭉 뻗어 있는 것. 하지만 19세기 후반에는 늪과 개천이 많아 다니기 쉬운 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비숍은 “달리는 마차 앞에 뻗은 길이 구릉 위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곤 했는데, 특히 처음 40베르스타(약 42km) 거리에 늪이 많았다”고 적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조선시대의 고지도에도 이 지역은 팔지(八池)라고 표시돼 있다. 여덟 개의 크고 작은 호수 또는 못들을 의미하는 것. 또한 홍양호(洪良浩)의 ‘북새기략(北塞記略)’에 의하면 팔지 주변지역은 알동(斡東, 音은 烏東)이라고 불렸다.

 

특히 여덟 개 호수 가운데 세 번째 호수 위에 있는 산의 이름이 흑각봉(黑角峯)인데, 그 산밑 금당촌(金堂村)이란 촌락이 조선왕조의 창건자인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5대조 목조(穆祖)가 경흥의 용당(龍堂)으로부터 옮겨와 살던 곳이다. 초기 한인농민 마을 가운데 하나다.

 

물 속에 담긴 듯한 자레치예

 

러시아의 고지도를 보면 이 지역의 강과 호숫가에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기 전까지 한인마을들이 산재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지도와 문헌자료에 나타난 이 지역의 대표적인 한인마을은 자레치예(Derevnia Zarech’e)다.

 

크라스키노로부터 25베르스타(약 27km) 떨어진 곳에 있던 자레치예에 1880년 지신허, 연추, 그리고 조선 국내로부터 이주해온 농민 14가구가 정착했다. 이후 조선으로부터의 이주가 금지된 1889년까지 주민의 수가 늘어갔고 주변지역에도 여러 개의 마을들이 형성되었다.

 

1895년경에는 포시에트만의 토본가이만[(Zaliv Tobongai, 현재의 레베디니이만(Zaliv Lebedinyi)]으로부터 두만강가의 박석골마을(Paksekori)에 이르는 자레치예 평원에 8개의 마을이 있었다. 넓은 의미에서 ‘자레치예’라는 이름은 이들 8개 마을의 총칭으로도 쓰였는데, 좁게는 삭파우호[(Ozer Sakpau, 현재 자레치예 호수 Ozer Zarechnoe)]가에 위치했던 마을 하나를 지칭했다.

   

비숍이 방문했을 당시 120가구 600명이 살았던 자레치예 마을은 ‘집들이 잘 지어졌고 풍부한 물화로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주민 600명 가운데 450명이 러시아정교로 개종했다.

 

자레치예 마을의 주민수는 1914년 일제당국의 조사에는 350명으로 되어 있지만, 1906~07년경 조사한 러시아측의 조사에는 102가구(입적 138가구, 비입적 22가구) 822명(입적 684명, 비입적 138명)으로 돼 있다.

 

자레치예 마을 외에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 마을들은 신천(Sincheni), 향산동(香山洞 또는 香山社), 박석골(Paksekori, 朴石洞), 금당촌(金堂村), 토본가이만가의 토본가이(Tobongai), 타게르치(Tagerty), 탈미 호수[(Ozer Tal’mi, 현재의 프치치예 호수(Ozer Ptich’e)]가의 베르흐네 탈미(Verkhne Tal’mi, 上月峰), 니즈네예 탈미(Nizhnee Tal’mi, 下月峰), 카체기(Kachegi), 칼레발라만[(Bukhta Kalevala, 현재의 시부치에야만(Bukhta Sibuch’ia)]가의 타우토이(Tautoi)와 침부다기(Chimbudagi), 니윤디프치호수(Ozer Niundypty)가의 니윤디프치 등이다.

 

이들 마을은 대개 호수와 늪, 그리고 작은 강가에 위치해 있었다. 이 지역을 답사했던 러시아 지리학자들은 크라베섬에서 포시에트항구로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왼쪽을 내려다보면 자레치예의 집들이 마치 물 속에 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자레치예 주변에 크고 작은 호수, 개천과 늪들이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마을 가운데 향산동은 후일 한인사회의 부호가 되는 최봉준(崔鳳俊)이 1875년에 개척한 마을이다. 이로부터 20년 후인 1895년, 최봉준의 의형제이기도 한 한인사회의 원로 최재형의 주선으로 러시아정교교당과 학교가 향산동에 세워졌다.

 

1895년에 작성된 러시아측 기록을 보면 당시 자레치예에는 블라고베첸스크의 2급 신학교를 졸업한 유진율(니콜라이 유가이)씨가 교사로 26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 자레치예는 11개 마을을 총칭한 것이고 실제 학교가 있던 곳은 바로 향산동이었다.

 

이후 러시아문무성의 인가를 받은 이 학교는 성장을 거듭해 1914년에는 교사 2명에 학생수가 75명으로 늘어났다.

 

비숍은 자레치예를 비롯한 국경지대 한인마을들은 생활조건이 윤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이 지역 한인이주자들의 생활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한인마을들은 3~4마일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데, 이들 마을들의 특징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풍요(prosperity)라고 말할 수 있다. 집들은 크고 튼튼하게 지어졌으며 농가의 마당에는 잘 자란 가축들이 있다. 주민들과 아이들은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며 농토는 제대로 경작되고 있다.”

 

비숍의 이런 관찰은 러시아 학자들의 기록과 비교하면 매우 대조적이다. 러시아 학자들은 비숍의 지적과 달리 자레치예 마을의 한인농민들이 그다지 부유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옅은 흑토층의 모래가 많은 토양이라서 수확량이 많지 않았다는 것.

 

학자들은 이 지역 한인농민들은 수이푼 지방의 한인농민들에 비해 소득이 형편없었다고 분석했다. 같은 한인마을에 대한 평가가 이처럼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비숍이 자레치예를 조선 국내의 농촌과 비교했던 데 비해, 러시아 학자들은 수이푼의 한층 부유했던 한인농민들과 비교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3국이 만나는 요충지 핫산지역

 

오늘날 북한과 러시아, 중국의 접경지대 핫산. 그 지명은 서북쪽 두만강에 가까이 위치한 핫산호수(Ozer Khasan)에서 비롯된 것이다. 핫산호수의 이전 이름은 우리말로 ‘긴 호수’라는 뜻의 장지(長池)였다.

 

핫산에 도착하자마자 필자는 러시아와 북한을 연결하는 두만강철교로 향했다. 북한과 소련간의 친선을 상징하여 ‘친선철교’라 불리는 두만강철교는 20~30m 정도의 길이인데, 북한과 소련 철로의 폭이 달라 북한에 들어가려면 이곳 핫산에서 열차의 바퀴를 갈아 끼워야 한다.

 

핫산 역사 구내 오른쪽에는 장고봉전투 또는 핫산전투를 기념하는 비가 서 있다. 비문에는 “여기 핫산호수지역에서 소비에트군대는 1938년 7~8월 우리의 조국을 배신적으로 공격한 일본 사무라이들을 분쇄하였다”며 65년 전에 벌어졌던 전투를 압축적으로 기록해놓았다. 핫산전투기념비 뒤편 작은 구릉 위에 남아 있는 소련군의 토치카(진지)에는 당시의 치열한 격전을 말해주기라도 하듯 여기저기에 총탄자국이 남아 있었다.

 

장고봉전투에 대해서는 부연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1938년 7∼8월, 신흥 소련군과 조선주둔 일본군이 핫산호수에 인접한 장고봉(長高峰) 일대에서 무력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일본과 소련 간에 벌어진 최초의 국경충돌이었는데 그 전투에서 일본군은 소련군에게 대패했다.

 

그 다음해인 1939년 노몬한(Nomonhan)전투에서 일본군은 한층 대규모의 병력으로 쥬코프가 지휘하는 소련군과 몽골 연합군을 상대로 다시 대결했으나 무참히 패하고 말았다.

   

연추지역에 있는 파타쉬 마을(현재명 카므이쇼브이 마을) 입구.

장고봉전투와 노몬한전투는 일본군이 소련군에 대해 공포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특히 일본 군벌 내에서 유럽식민지인 동남아시아로 진격하자는 해군중심의 이른바 남진파(南進派)가 득세하고 소련과 전쟁을 벌이자는 육군중심의 북진파(北進派)의 입김이 약화되는 중요한 원인이 됐다.

 

장고봉과 노몬한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대규모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좌우한 하나의 계기였던 셈이다.

 

한편 핫산지역에 있었던 한인마을의 한자식 이름은 와봉(臥峰)이었다. 와봉마을은 다시 상(上)와봉과 하(下)와봉의 두개 마을로 나누어졌다. 한인들은 이들 두 마을을 순수한 우리말로 부르기도 했던 것 같다.

 

 

러시아기록에는 상와봉은 파드고르니(Podgornyi) 또는 우니불미(Unnyburmy), 하와봉은 나고르나야(Nagornaia) 또는 니불미(Nyburmi)라고 표기돼 있다. 이를 좀더 설명하면 ‘니불미’는 ‘누울 뫼’ 즉 한자어 ‘와봉’이 되고 ‘우니불미’는 ‘상와봉’이 되는 것이다.

 

이 두 개의 한인마을 가운데 현재의 핫산은 과거 상와봉이 위치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비숍이 “강 위에 솟아 나온 경사진 언덕에 높다란 표지석이 러시아와 청국 간의 국경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묘사한 곳이 바로 이 핫산이다.

 

여기에서 표지석이란 러시아와 청국 간의 국경조약에 따라 세워진 정계비(定界碑)를 말한다. 핫산지역은 또한 1908년 여름 안중근을 비롯한 동의회(同義會) 의병부대가 국내 진격시 경흥으로 거쳐간 곳이기도 하다. 와봉의 북한 쪽 건너편은 용현(龍峴)이다.

 

어쨌든 이 두 마을(상와봉, 하와봉)을 구별하지 않고 총칭할 때는 나고르나야 데레브냐(Nagornaia Derevnia)라고 했다. 나고르나야 데레브냐는 1875년 남쪽에 한인마을 크라스노예 셀로가 형성되면서 여기에 부속돼 있다가 1889년에 독립됐다.

 

초기의 주민 대다수는 조선에서 직접 건너온 사람들이었지만, 일부는 포시에트만의 크라베(Krabbe)섬에서 이주해온 가구들도 있었다. 1895년 무렵에 나고르나야 데레브냐는 세 개의 작은 마을 단위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각각 18가구, 8가구, 4가구였다.

 

러시아당국이 1906~07년경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나고르나야 데레브냐의 인구는 38가구 260명(입적자 27가구 203명, 비입적자 11가구 57명)이었다. 그러던 것이 1914년경에는 70가구로 늘어났으며, 러시아문무성의 인가를 받은 마을학교에는 1명의 교사가 38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김광훈(金光薰)과 신선욱(申先郁)은 고종(高宗)에 의해 1880년대 초 남부우수리 지역에 파견돼 이 지역의 한인마을들을 조사했다.

 

이들이 귀국 후 1885∼86년경에 작성한 아국여지도(俄國輿地圖)에서 남북 10리 동서 20리, 남쪽으로 녹둔과 70리, 서쪽으로 경흥과 40리, 북쪽으로 나선동(羅禪洞)과 40리, 동쪽으로 연추영(延秋營)과 60리 떨어져 있다고 설명한 한인마을 서선택촌(西仙澤村)이 바로 이 나고르나야 데레브냐로 추정된다.

 

당시 주민은 76가구 478명에 달했다. 이 지도에는 서선택촌에 러시아수비대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 수비대의 막사가 비숍이 1894년 가을 하룻밤을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진다.

   

러시아에 강탈당한 한인촌 나선동

 

비숍이 방문했을 당시 러시아 초소에는 총 15명이 있었다. 1895년에 작성된 러시아 기록에는 1895년경 12명으로 구성된 장교수비대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비숍은 영국신문에 “러시아가 조선과의 국경에 5000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4000명을 훈춘에 주둔시키고 있다”고 보도한 사실을 인용하면서 사실과 다른 기사의 오류를 지적하기도 했다.

 

조선정부에서 파견된 김광훈과 신선욱은 나고르나야 데레브냐의 북쪽 40리에 위치했었으나 이미 소멸된 한인마을 나선동에 대해 매우 자세히 보고하고 있다. 러시아와 청국 간에 야기된 국경문제의 좋은 선례이자 참고자료로 제시하고자 함이었다.

 

나선동은 1875년 음력 8월 안형국(安炯國)과 김구삼(金求三) 등이 러시아의 인가를 얻어 지신허 주민 30여 가구가 이주해 개척한 마을이다. 청국의 영토였을 때는 흑정자(黑頂子)로 불렸는데, 마을을 개척하고 신라(新羅)와 조선(朝鮮)에서 각각 한 글자씩을 따서 나선동이라고 이름지었다. 나선동의 토질은 아주 비옥해 수년이 되지 않아 대부락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1885년경 나선동의 모습은 이러했다.

 

“남북 25리, 동서 30리에 남쪽은 경흥과 20리, 서북쪽은 경원과 100리, 북쪽은 중국령 훈춘과 80리, 동쪽은 연추영과 70리, 목허우영(포시에트)과는 90리, 주산관(珠山關)과 30리 떨어져 있다. 마을 전면 왼쪽으로는 수택(水澤)이고, 후면 오른쪽은 육지이다. 북쪽은 본국, 러시아, 청국 3국간의 요해지였다.

 

1881년 러시아와 청국 간에 국경이 재조정되어 나선동은 청국의 영토가 됐다. 이에 청국은 러시아 주민에게 청국에 귀환, 입적케 할 것을 설득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자체 내부 논의를 거친 후 크라스키노 군영으로부터 러시아 마병(馬兵) 500명을 이끌고 와서 나선동 주민들에게 이 땅은 청국땅이 됐으므로 청국과 함께 살든가 철수해 러시아 영토로 이주해야 한다고 협박했다.

 

이에 나선동 주민들은 청국에 귀화할 뜻을 밝혔고, 러시아 장교는 병졸들에 명하여 이들 주민들을 몰아내 사방으로 흩어지게 했다. 러시아는 나선동을 청국에 돌려주지는 않고 오히려 요새를 설치하고 주둔병 1000명을 배치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는 전선(電線)을 설치해 연추와 연결시켰고, 남쪽으로는 서선택과 녹둔도에 이르기까지 관방(關防)을 설치해 외부의 침입에 대비했다. 철거 당시 나선동 주민은 270여 가구 2600여 명으로 큰 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주민들은 가재들을 하나도 건지지 못했다.

 

주민 중 일부는 국내로 돌아갔으며 김몽렬, 김풍갑 같은 이들은 내륙지방인 도비허(都兵河, Daubikhe, 아누치노 지역. 현재의 아르센예프 지역)로 이주해 새로운 마을을 개척했으니 1884년의 일이다. 이때 나선동 주민들의 손해는 5만5000여 루블이었다고 한다.”

 

‘아국여지도’에서 김광훈과 신선욱은 나선동의 경험에 대한 논평에서 러시아의 정책을 득책(得策), 청국의 정책을 실책(失策)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나선동이 청국의 영토가 됐다면 녹둔도가 우리의 번(藩)이 되었을 것이라며, 청국의 ‘실책’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해(害)는 가장 절박한 것(最迫)이었다고 아쉬워했다.

 

이들은 결론적으로 “나라의 일을 맡고 있는 자(經國之務者)는 마땅히 땅의 지점과 지리를 잘 알아 살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라고 위정자들에게 경고했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한인마을이 바로 크라스노 셀로다. 우리말로 녹둔도, 녹도 또는 녹평(鹿坪)이라 불렸던 마을이다. 녹둔도라는 명칭은 고려말 조선초에는 지금과 같이 육지에 붙어 있지 않고 두만강 하구에 있었던 섬, 즉 해중도(海中島)를 칭했던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때 녹둔도는 우리 영토인 제안고진(濟安古鎭)에 속했는데 세종의 육진(六鎭) 개척시 북방 국경지방의 지명을 확정하면서 붙인 이름이었다.

 

녹둔도는 조선시대 초 두만강 건너편 조산(造山)지역의 군민(軍民)들이 배를 타고 섬을 드나들며 경작하고 농산물을 수확해왔던 곳이다. 1587년에는 여진족이 무리를 지어 녹둔도에 침입해 방비하던 조선병사와 농민들을 살해하고 말과 농산물을 약탈해간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여진을 토벌하고 조산만호(造山萬戶)로 와서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했는데, 이후에도 외적의 약탈과 위협이 계속되자 둔전을 파하고 농민들을 돌아오게 했다. 이후 녹둔도는 조선정부의 관심 밖에서 오랜 기간 방치돼왔다.

 

본디 섬이었던 녹둔도는 두만강 하류의 범람으로 인한 모래의 퇴적이 오랜 세월 이어지면서 동쪽부분이 육지와 연결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860년 청나라가 러시아와 맺은 북경조약에 따라 우수리강 동쪽 연해주가 러시아에 할양되었는데, 1861년 흥개호(興凱湖) 조약이 추가로 체결되면서 녹둔도는 완전히 러시아 영토가 되고 말았다.

   

크라노스셀로 러시아 수비초소 앞에 서 있는 러시아 장교(위)와 훈춘 초소 앞 러시아 군인들의 모습(비숍의 여행기 중).

고종은 조선, 러시아, 청국의 3국간 공동조사를 제안하는 등 감계(勘計)문제를 제기하였으나 러시아와 청국의 무반응과 을사조약에 이은 일본의 한국강점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처럼 러시아영토가 된 녹둔도에 한인들이 들어와 개척한 것은 1875년이다.

 

경흥사람 홍석중(洪錫仲)이 그 개척자였다. 주민 대다수는 경흥 등 조선에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일부 지신허, 연추, 크라베섬 등에서 이주해오기도 했으나 극소수였다.

 

녹둔도는 노보키예프스크로부터 약 75베르스타(약76km) 떨어져 있다. 1895년에 작성된 러시아 기록에는 녹둔도 사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길이 거의 없어 노보키예프스크로부터는 말을 타고 가야 한다. 땅은 모래토양이고 심지어 들판까지도 모래가 많다.

 

마을 주민들은 빈곤하게 살고 있으며 강 근처에 살고 있는 일부 주민들이 평저선 6척과 큰 어망 하나를 갖고 있다. 이외에 제염소가 하나 있다. 강 근처의 주민들은 농사 외에도 자기 소유의 평저선으로 게, 생선, 굴 등을 싣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팔러간다.”

 

크라스노 셀로는 정확히 말해 녹둔도에 위치하고 있었던 11개의 작은 마을을 총칭하는 이름이었다. 문헌자료에 나타난 이들 마을의 명칭을 열거하면 바른패(Varynfei)로 불리기도 한 작포도, 학수평(鶴水坪), 와룡평(臥龍坪), 센기(Sengi), 튠코이(中所, Tiuncoi), 상소(上所, Shansoi), 원전역(遠田驛), 성장(城場), 달봄목(Tarbomogi), 카체기(Kachegi), 부디포(Budyfo), 앞세카리미, 솟카리미, 세카리미 등이다. 이 가운데 동사무소가 위치해 있던 상소가 크라스노 셀로였다.

 

1906~07년경 러시아당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크라스노 셀로에는 133가구 839명(입적자 116가구 771명, 비입적자 17가구 68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1914년의 기록에는 크라스노 셀로에 러시아문무성 인가를 받은 마을학교가 있었는데 2명의 교사가 85명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크라스노 셀로의 두만강 연안에 위치했던 상작포도(上雀浦島)에는 세관초소가 있었는데 경흥의 토리동(土里洞)으로부터 오는 사람과 짐을 점검했다.

 

서울대 사범대 이기석 교수가 이끄는 조사팀이 1996년, 2000년, 2002년 3차에 걸쳐 녹둔도를 답사한 바 있다. 이교수팀의 2000년도 답사보고서에 따르면 녹둔도로 추정되는 두만강 하구지역은 현재 사구와 저습지, 키높이의 끝없는 갈대숲으로 이루어진 황무지상태라고 한다.

 

군사용 비포장도로가 있으나 도로 곳곳에 물웅덩이가 있어 차량통과가 불가능한 상태이며, 녹둔도 사이를 흐르는 샛강지역에선 원주민들이 물오리 사냥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교수팀이 2차 답사에서 한인마을의 흔적이 분명한 논자리와 집터, 그리고 연자방아 맷돌 한 짝을 발견했고 제방의 흔적을 찾아낸 점이다.

 

북한의 선봉, 중국의 훈춘과 더불어 녹둔도는 몇 년 전까지 유엔개발프로그램의 주도로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남북한, 몽골 등이 참여하는 두만강델타개발프로젝트의 주요한 대상지역이었다.

 

이처럼 녹둔도는 영토분쟁의 소지가 잠재해 있는 지역인 한편, 동북아국가들간의 경제협력과 공존의 실험대로서 새로이 주목받는 지역이기도 하다.

 

엄격한 위생규정으로 청결한 마을

 

비숍은 녹둔도에서 돌아오면서 국경지대에 살고 있는 한인농민들의 생활상을 가까이서 관찰한 후 자치제도 등 한인마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이들 이방인들은 실제로 자치를 누리고 있다. 각 구역의 우두머리로 ‘노야’라는 것이 있는데 마을 규모에 따라 1~3명의 보조원을 두었다. 경찰들은 모두 한인이다. 모든 구역에는 서기가 딸린 2∼3명의 재판관이 있어 마을의 사소한 범죄들을 처리한다.

 

노야는 마을의 질서와 세금징수의 책임을 지는데 봉급과 함께 여러 가지 형태의 수당을 받는다. 공무를 맡은 이들은 모두 한인들이고 마을 주민 가운데서 선출한다.(중략) 크라스노 셀로와 노보키예프스크 간에 자리잡고 있는 한인마을들은 러시아 한인정착마을의 평균적 표본이다. 길은 잘 닦여져 있고, 늪들은 잘 관리되어 있다.

 

위생규정은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는데, 노야가 마을의 청결을 책임진다. 가난하고 망가지고 더러운 한반도의 마을과는 달리 이들 한인마을은 조선식으로 잘 지어졌고 흰 벽면에 이엉을 엮어 꾸몄다. 마당은 깔끔하게 엮은 갈대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는데, 매일 아침 비로 청소한다.

 

돼지우리도 구역경찰관의 아르고스(argus-눈이 100개 달린 신) 같은 눈초리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다. 모든 주택은 4, 5개 또는 6개의 방이 있는데, 각 방은 종이로 벽과 천장을 바르고 반투명의 종이로 창문을 발랐다. 바닥엔 단정한 매트를 깔았다.”

 

결론적으로 비숍은 조선에서 내렸던 조선인들에 대한 절망적 평가를 바꾸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조선에서 나는 조선인들은 찌꺼기 같은 종족이며 이들의 조건이 절망적이라고 여겼지만 프리모르스크(연해주)에서 이러한 나의 견해를 바꾸어야만 하는 이유들을 보았다.

 

러시아의 경찰관, 이주민, 군인들로부터 똑같이 좋은 행동방식과 뛰어난 근면성을 배워 윤택한 농민계급으로 길러진 이들은 결코 특별한 이들이 아니었다. 대다수가 기근으로부터 도망쳐온 굶주린 무리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번영과 우아함을 볼 때, 조선에 있는 이들의 동포들도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정직한 정부를 만난다면 ‘사람’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절망스러운 한인마을 흔적 찾기

 

핫산에서 크라스키노로 돌아오면서 필자는 국경지역 한인마을들의 흔적을 찾는 일이 학자 개인으로서는 너무나 힘든 작업임을 절감했다.

 

국경지역이라 러시아당국의 출입허가를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도로사정이 나빠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 외에 한인들의 주거지였음을 말해줄 수 있는 맷돌이나 집터 등 흔적을 말해주는 사람들조차 만나기 어려웠다. 사전에 모든 행정적 절차와 장비들을 준비하지 않는 한, 이들 한인마을들의 흔적을 찾는 일은 거의 절망에 가깝다.

 

핫산 방향과는 달리 크라스키노에서 훈춘까지 이어지는 길가에도 과거 한인 마을의 흔적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 길을 따라가면 카미쇼바야강(Rechka Kamyshovaia)을 만나게 된다. 과거에는 파티예강(Rechka Fatie)으로 불렸다.

 

바로 이 강가에 위치했던 마을이 파타쉬(Fatashi)로 한인들은 ‘바도소’ ‘바도쇠’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 마을은 ‘베르흐네 파타쉬(상바도소)’ ‘스레드네예 파타쉬(중바도소)’ ‘니즈네예 파타쉬(하바도소)’의 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1895년에 작성된 러시아 기록에 따르면, 하바도소는 집과 텃밭이 딸린 농가 58가구가 있었던 마을로 이른바 러시아국적을 취득한 원호인 마을(原戶村)이었다. 탐험대만 연안에 자리잡은 이 마을에는 4개의 제염소가 있었다. 상바도소에는 8가구, 중바도소에는 50가구가 거주했다.

 

이 마을의 토지는 점토가 섞여 있는 흑토층이었는데 귀리와 감자 배추 등이 잘 자랐다. 덕분에 주민들은 이들 채소와 작물을 군부대에 1년에 3000루블어치어치씩 납품해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김광훈과 신선욱은 ‘강좌여지기’에서 “바도소의 호총(戶總)이 143가구에 달하는데 거민(居民)의 여러 가지 모습은 흑정자와 같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2년 후에 작성된 ‘아국여지도’에서는 97가구 639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하여, 앞서의 기술을 수정하였지만 러시아 기록과는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이 마을에는 1909년 당시 선흥의숙(鮮興義塾)이 설립되어 있었는데, 한기육 등이 청년자제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이 마을 인근에 또 다른 한인마을인 풍투이마을이 있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경치

 

바도소 마을에서 30리 정도 떨어진 곳에 노바야 데레브냐(Novaia Derevnaia)라는 한인마을이 있었다. 주류허강(Rechka Churikhe, 珠留浦 또는 珠河), 즉 현재의 노보고로도브카강(Rechka Novogorodovka)가다. 한인들은 강 이름을 따 주류포, 또는 주하촌이라고 불렀다.

 

노바야 데레브냐 역시 상, 중, 하의 3개 마을로 이루어졌는데, 각각 상소(上所), 중소(中所), 하소(下所)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마을은 1878년 지신허와 연추에서 온 이주민들이 개척했다. 이들은 주류허강의 거의 모든 계곡에 흩어져 정착했는데, 계곡의 길이는 20베르스타(21km), 폭은 2베르스타(2.1km)다. 마을들은 경사가 완만한 비탈과 크지 않은 참나무 숲이 있는 낮은 산에 둘러싸여 있다.

 

한인농민들은 늪지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계곡을 경작했다. 심지어는 산의 비탈까지도 일궜다. 이 마을에는 1907년 겨울 마을 유지들이 아이들 교육을 위해 모현의숙(帽峴義塾)을 창립하였지만 운영난을 겪다가 1909년 봄 장기준, 허익 등이 발기하여 교사를 새로 짓고 학교 이름을 창흥학교(昌興學校)라고 바꿨다. 이 학교는 1917년까지 러시아당국의 지원을 받아 유지되었지만, 러시아혁명 이후 다시 어려워졌다.

 

노바야 데레브냐에서 5베르스타(5.3km) 떨어진, 바로 중국과의 국경지대에 작은 한인촌락이 있었는데, 마을이름을 ‘밝은 계곡마을’이라는 뜻의 ‘명산사(明山社)라고 했다. 공식적으로는 노바야 데레브냐에 속해 있지만, 전혀 별개의 작은 마을이었다.

 

1890년대 초반 이 지역을 답사한 러시아 지리학자는 “여기에 이르는 길은 그다지 안전하지는 않지만 깊은 산 크지 않은 계곡 사이로 나 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산과 경치에 둘러싸여 불편한 길을 잊게 한다”고 주변의 경관을 예찬했다.

 

노바야 데레브냐에서 가도를 따라 국경방향으로 2베르스타(2km) 더 가면 러시아령 훈춘(Khunchun)이 나온다. 이 곳에는 주산관(珠山關)이라 불린 러시아수비대에 300명의 기병이 주둔하고 있었다. 주산관과 훈춘 사이에도 겐막골(Genmiakori), 샤벤지(Siabendi), 치차골(Tsiatiakori 또는 Tsyziakori) 등의 작은 한인마을들이 있었다.   (끝)


출처 : 한류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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