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한인 발자취를 찾아서 ②]

연해주 초기 한인사회의 중심지 연추(延秋) 마을
깊고 기름진 검은 땅, 새로운 희망을 심은 터전이었건만

구한말 의병운동의 중심지였던 연추(延秋) 마을.
안중근 의사가 조직한 연해주 의병의 본부가 자리했던 그곳.
하지만 지금은 무성한 잡초더미와 이름 모를 이의 무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사라진 한인마을.
그곳엔 어떤 역사와 사연이 묻혀 있는 것일까.

연추 마을은 러시아 최초의 한인마을인 지신허와 함께 지금은 사라진 가장 대표적인 한인마을로 꼽힌다. 이 마을은 북한과 러시아의 국경인 두만강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일대 한인마을 중 가장 많은 한인들이 거주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연추 마을에는 또 다른 역사가 있다. 즉 이곳은 구한말 연해주 한인 의병운동의 중심지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북한과 중국의 훈춘, 북간도 등을 오갈 때면 반드시 거쳐가던 곳이었다.

 

특히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1908년 봄 최재형(崔在亨), 이범윤(李範允), 이위종(李瑋鍾) 등 한인 지도자들과 동의회(同議會)를 조직하고, 그 해 여름 국내로 진격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연해주 의병의 본부가 있었던 마을이 바로 이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도시가 된 이웃마을 ‘크라스키노’

 

연추 마을은 러시아 연해주 남부 우수리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쪽 러시아, 북한, 중국 등 3개국의 접경지대 방향으로 기찻길로 280km 가량 떨어져 있는 곳이다. 지금의 크라스키노(Kraskino)와 가깝다.

 

크라스키노는 1867년 탐험대만 북쪽 해안에 군 요새로 건설됐을 당시 노보키예프스키(Novokievskii)로 불리다가 1936년 이후부터 지금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1938년 3월25일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4명의 병사들과 함께 영웅적으로 전사한 크라스킨(M.V. Kraskin) 중위를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지명이다.

 

과거 노보키예프스키로 불리던 시절, 이 마을은 군대 외에도 경찰서, 전신국, 세무서 등 행정기관들이 들어서 있었다. 탐험대만 주변, 훈춘과의 접경지대, 두만강 하구 지역 등을 포괄한 연해주 남부지역의 군사적, 행정적 중심지였던 것이다.

 

주목할 대목은 이 마을을 가로지르는 강 남쪽과 북쪽 양편에 각각 러시아군영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당시 한인들은 이 군영을 ‘연추영(延秋營)’이라 불렀다는 점이다. 또 여러 기록들에서 ‘연추’와 ‘노보키예프스키’가 혼용된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는 연추 마을이 노보키예프스키, 그러니까 지금의 크라스키노와 얼마나 가까운 곳에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필자는 2002년 7월9일 5명의 조사단을 이끌고 연추 마을을 찾기 위해 크라스키노로 향했다. 독립기념관의 후원을 받아 시작한 러시아 극동지역과 중앙아시아지역 한인독립운동유적지에 대한 조사의 일환이었다.

 

조사단 일행이 두만강 하구 러시아·북한 국경지대인 핫산 일대를 조사하고 지금은 중소 군사도시로 발전한 크라스키노로 들어선 것은 오후 3시경. 러시아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도시여서 그런지 군용차들이 빈번하게 왕래하고 있었다.

 

일행은 시내 중심가에서 제2차 세계대전기념비를 둘러본 후 시 뒤편에 위치한 산 위로 올라갔다. 나무한 그루 없어 산이라기보다는 구릉에 가까웠다. 하지만 사방으로 탁 트인 정상은 시 주변지역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에 더없이 좋은 위치였다.

 

정상에는 조선 주둔 일본군과 벌인 핫산전투(1938년 7월29일~8월11일) 참전용사들에게 바치는 ‘핫산영웅탑’이 세워져 있었다.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구릉 아래 좌우로는 크라스키노 시내의 도로와 집들이 늘어서 있고, 멀리 탐험대(Ekspiditsii)만(灣)이 시원스레 펼쳐졌다. 탐험대만의 왼쪽, 즉 동쪽 내륙의 산맥에 연결된 산줄기가 뻗어나와 탐험대만의 남쪽 경계를 만들고 있었다.

 

그 뒤로 노브고로드(Novgorod)만의 짙푸른 바닷물이 출렁였다. 이 노브고로드만의 아늑한 품에는 포세트(Pos’et)군항, 즉 목허우(木許隅)가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은 1914년 한인들이 ‘한인아령이주5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우려 했던 곳이기도 하다.

 

탐험대만은 노브고로드만을 왼쪽에 두고 포세트만에 닿게 되고, 포세트만은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두만강 연안에 이르는 광활한 피터대제만으로 연결된다. 시 중심을 가로지르는 추카노브카강(Rechka Tsukanovka)은 탐험대만으로 이어졌다.

 

추카노브카강 오른쪽 해안지대는 옛 발해성터 유적인 크라스키노 성터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탐험대만의 오른쪽 끝에는 바다로 삐쳐나온 ‘곶’이 있는데 과거 한시(漢峙) 또는 뢰기(牢岐)라 불렸던 지역으로 19세기 후반까지 중국인들이 이곳에서 자염(煮鹽)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마야취노예(Maiachnoe)로 이름이 바뀌었고 사람도 살고 있지 않다.

   

연추는 ‘상·중·하’ 세 마을

 

일행은 구릉을 서둘러 내려와 추카노보 마을, 아니 과거의 ‘니즈네예 얀치헤’, 즉 하(下)연추로 향했다. 필자가 추카노보 마을을 처음으로 답사했던 것은 1년 전인 2001년 7월로 국가보훈처가 주관한 독립운동사 조사활동의 일환이었다.

 

추카노보는 크라스키노 서쪽 외곽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다. 크라스키노로부터 10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자동차로는 약 10분 정도가 걸린다. 2001년 첫 번째 답사에서 필자는 마을 노인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연추 마을이 세 개로 나뉘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추 마을은 ‘베르흐네 얀치헤’(상〔上〕연추), ‘니즈네예 얀치헤’(하〔下〕연추), ‘스레드네예 얀치헤’(중〔中〕연추)로 나눠져 있었고, 현재의 추카노보 마을이 그 중 ‘니즈네예 얀치헤’라는 것이다. 이번 답사의 가장 큰 목적은 이들 3개 연추 마을의 위치를 직접 답사하는 것이고, 아울러 ‘니즈네예 얀치헤’의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일행은 먼저 추카노보 마을의 중심에 있는 촌소비에트(Selsoviet) 사무실을 찾았다. 촌장은 40대 후반의 여성으로 이름은 갈리나 표도로브나(Galina Pyodorvna)였다. 그녀로부터도 추카노보가 과거 ‘니즈네예 얀치헤’였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추카노보로 들어오는 입구의 수하야 강가에 교회와 학교가 있었는데, 이곳을 ‘얀치헤’라고 불렀다고 전했다. 또 북쪽으로 약 6km 떨어진 위치에 ‘스레드네예 얀치헤’가 있었으나 현재는 폐허 상태라고 말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녀가 ‘스레드네예 얀치헤’를 말하면서 여러 차례 ‘카레이스키 사드(Koreiskii cad)’, 즉 ‘한인들의 정원’이라는 표현을 쓴 점이다. 한인들이 이 곳에 살구나무 등 과수나무들을 많이 심고 살았기 때문으로 추정됐다. ‘스레드네예 얀치헤’로부터 다시 6km 정도 북쪽으로 올라가면 ‘베르흐네 얀치헤’가 있으나, 그곳 또한 현재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촌장은 필자가 이들 세 연추 마을이 있었던 곳을 노트에 그려달라고 부탁하자 크라스키노에서 추카노보에 이르는 길, 추카노브카강과 세 연추 마을의 위치를 자세하게 그려주었다.

 

촌장은 장마로 인해 길이 허물어졌기 때문에 ‘스레드네예 얀치헤’와 ‘베르흐네 얀치헤’에 가려면 우리가 타고 온 미니버스로는 갈 수 없고 힘이 좋은 군용트럭을 타고 가야 한다면서 트럭 주인을 수소문해주었다.

 

트럭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일행은 마을 한가운데 있는 어느 집의 텃밭에서 우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덮어놓은 나무판자를 들어내고 보니 과거 한인들이 사용하던 우물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집집마다 수돗물이 설치되기 이전까지 러시아 주민들은 한인들이 사용하던 우물에서 물을 떠다 사용했다고 한다.

 

촌소비에트 사무실로 다시 갔을 때, 촌장은 마을의 도서관 관장으로 있다가 은퇴한 그리첸코 나제즈다 야고로브나(Grichenko Nadezhda Iagorovna) 할머니를 소개했다. 그녀는 자기 할머니로부터 전해들었다며 과거 하연추 마을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하연추 마을에는 러시아정교회 건물과 학교, 상점 등이 있었고, 교회에선 바라바쉬를 비롯하여 주변 지역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모여 예배를 봤다고 한다.

 

흔적도 희미한 공동묘지 터

 

대화 도중 촌장인 갈리나가 매우 귀중한 자료를 들고 나왔다. 1952년에 화가가 그린 두 장의 그림이었다. 세 개의 둥근 첨탑이 있는러시아정교회 전경을 그린 것이었는데 그림 아랫부분에 ‘니즈네예 얀치헤 마을’을 뜻하는 ‘s. “N” Ianchikhe’라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오른쪽 위에는 ‘1870년에 세워졌다’고 쓰여져 있었다.

 

잠시 후 군용트럭이 도착했다. 일행은 연추 마을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다는 나이 많은 노인 한 명과 함께 중연추 마을과 상연추 마을을 찾아 나섰다. 장마 직후라서 길이 매우 험했다. 촌장의 말대로 한 6km를 달린 후 차가 멈춰섰다.

 

길 한편으로 트럭 주인을 뒤따라 잡초덤불을 헤치며 들어가니 연자방아 아래맷돌 한 개가 나타났다. 맷돌 주변에는 붉은 벽돌과 기와조각들이 온전하거나 부서진 상태로 흩어져 있었고 가옥에 쓰인 것이 분명한, 불에 탄 목조 골조들도 눈에 띄었다. 중연추 한인마을의 유적임이 분명했다.

   

과거 한인들 사이에서 ‘연추영’이라 불렸던 러시아 군영 건물

우리는 상연추 마을에 가면 집터, 돌절구, 대나무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트럭 주인의 말을 들으며 서둘러 상연추 마을로 향했다.

 

그러나 5km 정도를 더 달리자 장마로 길이 끊겨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아쉽지만 일행은 중국과의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던 상연추 마을의 옛터를 1km 앞두고 돌아서야 했다.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우리를 위로하고자 함인지 두 명의 러시아인들은 중연추 마을에서 하연추 마을로 약 1km 내려온 길 옆, 연자방아 윗굴림돌이 있는 곳으로 우리 일행을 안내했다. 아래맷돌은 많이 보았으나 이처럼 연자방아의 윗굴림돌을 보게 된 것은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또 마을 노인의 안내를 받아 추카노보 뒤 동산에 있다는 한인들의 공동묘지터를 찾았다. 노인은 봉분들이 망가지고, 잡초만이 무성해 온전한 형태는 남아 있지 않지만 묘터가 분명하다고 설명했다. 과연 어떤 이들의 묘일까.

 

연추 마을의 ‘연추’는 한자로는 ‘延秋’나 ‘煙秋’ 또는 ‘烟秋’로, 러시아어로는 ‘얀치헤(Ianchikhe)’로 표기해왔다. 그 어원은 이 지역을 북에서 남으로 가로질러 탐험대만으로 흘러들어가는 강 이름, 즉 연추하(延秋河)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러시아인들은 중국식 발음을 그대로 따서 이 강을 ‘얀치헤’라고 했다. 극동지역 중국식 지명에 관한 권위자인 러시아 학자 솔로비예프(F.V, Solov’ev)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얀치헤’는 매우 오래 전부터 알려진 이름이나 그 어원이 분명하지는 않다고 한다. 18세기 초 중국 지도에 ‘얀추헤(Ian’chukhe)’로 표기하다가 그 후 ‘얀치헤(Ian’chikhe)’로 바꿔 표기하게 되었다고 정리해놓았다.

 

최초 마을 이름은 ‘시모노보’

 

발해사 연구의 권위자인 송기호 교수는 ‘얀치헤’의 어원을 자신의 저서 ‘발해를 찾아서’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크라스키노 지역이 발해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 속했던 염주(鹽州)였으며, 이후 중국 청나라 때 옌추(顔楚), 옌춘(眼春)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얀치헤’는 염주하(鹽州河)의 중국어 발음으로 추정된다.”

 

강의 이름에서 비롯된 ‘얀치헤’는 크라스키노 주변지역의 다양한 지리적 명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얀치허 강(Rechka Ianchikhe)을 비롯하여, 곶 이름(Mys Ianchinkhe-크라스키노 남쪽 해안에 위치), 골짜기 이름(Pad’ Ianchikhe) 등이 그것이다.

 

이 지명들은 1972년 소련정부가 종래 중국식 지명을 러시아식으로 전면 개칭하는 과정에서 바뀌었다. 즉, ‘얀치헤’강은 ‘추카노브카(Chukanovka)’강으로, ‘하(下)연추 마을’을 뜻하는 ‘셀로 니즈네예 얀치헤(selo Nizhnee Ianchikhe)’는 ‘추카노보(Tsukanovo)’마을로, ‘얀치헤 곶(mys Ianchikhe)’은 ‘델타곶(mys Del’ta)’으로, ‘얀치허 골짜기(pad’ Ianchikhe)’는 ‘말라야 골짜기(‘pad’ Malaia)’로 각각 바뀌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사정으로 ‘연추’라 하면 마을이나 강처럼 특정한 지명을 일컫기도 하지만, ‘연추지방’ ‘연추 연해안’ 등 이 지역 일반을 지칭하기도 했다.

 

연추 마을의 역사는 과거 기록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연추에 한인마을이 들어서기 전 탐험대만 일대 해안지역에는 중국인 10여 가구가 살면서 자염(煮鹽)을 하거나 혹은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했고, 멀리 핫산 부근의 흑정자(黑頂子-한인들은 여기에도 마을을 건설하고 ‘新羅’와 ‘朝鮮’에서 한 글자씩 따 羅鮮洞이라고 했다)에 소수의 러시아 수비병들이 주둔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후 최초의 한인마을 지신허가 생기면서 국경지방 농민들이 대거 이주하기 시작했는데, 연추 마을의 형성은 지신허의 인구수가 급속히 증가하게 된 사정과 관련이 깊다.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지신허 마을에 정착한 직후인 1864년, 당시 러시아 남부 연해주에는 3개의 한인마을이 더 있었다. 아지미(Adimi)에 1가구 4명, 노바야 데레브냐(Novaia Derevnia)에 9가구 53명, 화타시(Fatashi)에 1가구 3명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 무단월경 농민의 ‘성공적인’ 정착소식이 국경 부근의 육진지방에 널리 알려지면서 국경을 넘어오는 농민들의 수가 급증하였는데, 특히 지신허 마을로의 이주민이 많았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지신허로부터 약 14km 떨어진 연추강가로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던 것이다. 지신허에 이어 연추 마을이 새로운 정착지로 알려지면서 1867년 조선으로부터 150가구가 대거 이주해왔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이곳에 남고, 나머지는 1868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해갔는데, 이들은 다시 영구적인 정착을 위해 수이푼강(현재의 라즈돌리노예강)으로 보내졌다. 연추 마을의 첫 공식명칭은 시모노보(Simonovo)였는데, 연해주 군무지사였던 시모노프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1867년에서 1869년 사이에 동시베리아총독의 파견을 받아 남부 연해주지역을 답사한 바 있는 프르제발스키(N. M. Przheval’skii, 1839~88)는 1869년에 간행한 자신의 저서 ‘우수리스크 크라이 여행(Puteshestvie v Ussuriskom krae), 1867-1869’에서 ‘한인마을 얀치헤’를 처음 언급했다.

 

“노브고로드만은 탐험대만보다는 작으나 탐험대만보다 더 폐쇄된 형세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선박의 정박에 한결 편리하다. 탐험대만의 초입에는 노보고로드 초소가 배치되어 있는데 장교와 병사들이 살고 있는 8개의 관사와 미역을 구입할 수 있는 외국상인 소유의 집 2채, 그리고 몇 채의 중국인 농가가 더 있다.

 

이 외에 얼마 전 탐험대만 북쪽 해안에는 노보키예프스키마을이 생겨났는데 여기에는 1개 보병부대가 일직선으로 배치돼 있고, 이로부터 몇 베르스타 떨어진 곳에 한인마을 얀치헤가 자리잡고 있다.”

 

프르제발스키는 이어 얀치헤보다 지신허가 더 크다고 적고 있어, 연추 마을이 형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점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동서 5,6리, 남북 7,8리

 

이밖에 연추 마을에 관한 기록으로는 1880년대에 연해주 일대를 조사한 바 있는 조선 관리들의 것이 남아 있다.

 

김광훈(金光薰)과 신선욱(申先郁)은 1882년경 노보키예프스키, 즉 연추영(延秋營)을 답사하고 돌아갔는데, 귀국 후인 1882년 말 또는 1883년 초에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강좌여지기(江左輿地記)’에서 연추영에 대한 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연추영(延秋營)으로 곧장 향했다. 양인(洋人)에게 경치를 감상하고 싶다는 뜻을 표하고 몰래 주위를 둘러보니, 높은 산이 하나 솟아 있는데, 북쪽으로부터 남쪽을 향해 널리 퍼져 있는 형국을 이루고 있다.

 

‘연추영’은 서(西)에서 동(東)으로 향하는 큰 길이 있는데 길의 남쪽과 북쪽에 두 개의 군영을 창설해놓았다. 주위는 동서가 5~6리이고 남북이 7~8리였는데, 주변에 관공서들의 누각이 들어서 있다.”

 

당시 노보키예프스키에 주둔하고 있는 러시아 군영의 군인은 1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김광훈과 신선욱은 이들 러시아 장병들의 훈련 광경을 관람했는데, 장교와 병졸들이 일사불란한 명령체계에 따라 “일호(一毫)의 틀림도 없이 만인(萬人)이 한마음인 것처럼” 규율 있게 훈련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이들은 한 달여 동안 수이푼(秋豊) 일대를 둘러본 후 귀국하는 길에 연추에 다시 들렀는데, 이때 러시아 군영에서 통사(通辭-통역관)로 일하고 있던 약관의 최재형(崔在亨)을 만나게 된다. 후일 러시아 한인사회의 최고원로로 존경받게 되는 최재형은 18세인 1878년 이후 러시아 군영의 통역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기록에는 최재형의 이름이 최자형(崔子衡)으로 기록돼 있다.

 

김광훈과 신선욱은 1885년경 연해주지역을 두 번째 방문하고 난 직후에 작성한 ‘아국여지도(俄國輿地圖)’에 연추 마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연추아민촌도(延秋我民村圖)-동서 6~7리 남북 27리 남쪽으로 ‘러시아’ 군영이 10리 거리에 있고, 북쪽으로 30리 거리에 고개를 넘어 중국의 훈춘(琿春)과 경계를 이룬다.

 

동쪽으로는 한인마을 서계동(西溪洞)이 30리, 지신허(芝新墟) 마을이 35리 떨어져 있고, 서쪽으로는 한인마을 소도소(所道 所)가 20리, 주하(珠河) 마을이 50리 떨어져 있다.

 

연추에 거주하는 주민은 237호 1623명이다. 연추는 기사년(1869)과 경오년(1870)의 흉년에 경원의 농민들이 들어와 개척한 곳으로 계속해서 농민들이 도망 나와 살게 됐다. 마을 가까운 군영 요새에서 큰 토목공사가 벌어져 재물을 모으는 방법이 여러 가지로 많았기 때문에 이 마을 사람들은 재산이 넉넉하고 윤택하여 물화를 풍부하게 갖추고 있다.

 

관혼상장(冠婚喪葬)은 본국(조선)의 예를 따르고 있어 러시아 사람들이 러시아의 관습을 따르지 않음을 책망하고는 있으나 본국의 법도를 잊지 않고 사람이 본래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아름답게 실행하려고 하는 것을 칭찬한다. 각 마을(社)에는 노야(老爺)가 있어 주민들의 일을 총괄하고 있다.

 

만약 곤란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경우에는 관청에 품(稟)한다. 마을 내의 설비로는 서당을 세워 생도들을 가르치고 또 서학(西學)을 세워 우리 사람으로 하여금 글과 말에 익숙하고 통하게 함으로써 학문을 가르치고 전하고 있다.”

 

400가구 2000명, 한인 최대마을로 부상

 

당시 이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연해주 지역에는 이미 총 29개의 한인마을이 형성돼 2640가구 2만313명의 한인들이 이주해 살고 있었다. 연추 마을은 237가구 1623명이 정착해 당시 추풍지역의 대촌인 추풍3사의 푸칠로브카(274가구 2827명), 시넬리코보(237가구 2673명), 지신허(236가구 1665명)에 이어 4번째로 큰 마을로 성장해 있었다.

 

또 연추 마을의 237가구는 한곳에 모여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서 6~7리 남북 27리’의 넓은 지역에 분산돼 있었다.

   

1897년에 작성된 러시아측 기록을 보면, “연추 마을은 ‘베르흐네 얀치헤(Verkhne Ianchikhe)’와 ‘니즈네예 얀치헤(Nizhnee Ianchikhe)’ 즉, 상(上)연추와 하(下)연추의 두 마을로 나뉘어 거주하고 있었다”고 적혀 있다.

 

연흑룡주총독 운체르베르게르(P.F. Unterberger)의 저서에 첨부된 1906∼07년 당시의 한인마을 분포도에도 ‘베르흐네 얀치헤’와 ‘니즈네예 얀치헤’, 두 마을이 남북으로 넓게 분포돼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와 함께 당시 연추 마을의 인구는 286가구 1701명으로, 상연추에 96가구 584명, 하연추에 200가구 1298명이 거주하고 있어, 이미 최대규모의 한인마을로 부상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7, 8년 후인 1914년에 일제 당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연추 마을의 인구는 더욱 늘어 400가구 2000명을 넘어섰다.

 

추풍4사의 하나인 푸칠로브카 마을과 시넬리코보 마을이 각각 1200명, 코르사코프카마을이 1000명이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마을 규모는 두 배 이상 컸던 셈이다.

 

영국의 저명한 여행가였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은 1894년 가을 연추지역을 방문하고,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이란 자신의 저서에서 연해주 남부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 농민들의 생활을 매우 인상적인 필치로 기록했다.

 

그녀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증기선을 타고 포세트항에 도착한 후, 한인들이 끄는 마차를 타고 노보키예프스키로 갔다. 이후 노보키예프스키 경찰서장의 안내를 받으며 연추 마을을 찾아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매우 부유했던 마을

 

“노보키예프스키 경찰서장 소유의 4륜 마차 타란타스(tarantas)를 타고 가면서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았다. 우리는 얀치헤 마을에서 한인통역을 수소문하기로 돼 있었다.

 

평평한 평지의 농촌지역은 아름다운 산들로 경계가 그어진 골짜기로 들어가면서 점차 좁아졌는데, 깊고 기름진 검은 땅 위에 곡류와 근채(根菜) 채소들이 거의 다 자란 상태였다. 이미 곡식의 수확이 끝난 뒤라 땅은 깔끔하게 갈아엎어져 있었다.

 

조선의 농촌마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집들이 들어서 있는 작은 한인마을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큰 마을 축에 드는 한 마을은 140가구가 750에이커의 기름진 땅 위에 정착해 있었다. 우리들은 여러 집을 방문했는데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여인네들까지도 진심으로 즐거운 모습으로 경찰서장을 환영하러 나왔다(중략).

 

조금 더 가니 얀치헤(Yantchihe)라 불리는 큰 마을이 나타났는데, 이곳에는 러시아 학생들과 한인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고 있는 깔끔한 학교가 있었으며, 내부장식이 두드러지게 화려하고 사제의 사택이 붙어 있는 러시아정교 교회가 있었다. 얀치헤는 매우 부유한 마을이었다. 파출소도 무척 깨끗했다.

 

한 한인 경사가 내가 필요한 사항을 받아 적더니, 통역을 찾아오라며 똑똑하게 생긴 한인경찰을 밖으로 내보냈다. 이 마을과 부근 지역에서 모두 400명의 한인들이 러시아정교에 입교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정교회 사제는 교양이 있어 보였는데 어린 가족들이 많아 사택이 좁아 보였다. 나는 사제에게 한인들의 삶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는 배울 것이 많고 다음 세대에게 보다 많은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현재로서는 비숍 여사가 연추 마을에 앞서 방문했던 140가구가 살고 있었다는 마을의 명칭과 위치를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비숍 여사의 기록으로부터 연추 마을에 관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비숍이 방문한 ‘얀치헤’ 마을이 ‘니즈네예 얀치헤’, 즉 하연추 마을이었다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조선정부에서 파견했던 김광훈과 신선욱이 1885년경 연해주지역을 두 번째 방문하고 난 후 작성한 ‘아국여지도’를 보면, ‘연추아민촌’ 입구에 러시아정교사원을 나타내는 불당(佛堂)과 사제관을 나타내는 ‘승옥(僧屋)’이 그려져 있다.

 

러시아측 기록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1860년대 후반 노보키예프스키에 교회가 세워진 데 이어 1872년에는 ‘니즈네예 얀치헤’ 즉 하연추(下延秋)에 교회가 세워졌던 것이다. 같은 시기에 남부 연해주지역인 지신허 마을(1872년), 크라베의 하드지다(Khadzhida) 마을(1873년)에도 러시아정교 교회가 세워졌다.

   

하연추 마을(지금의 추카노보)에서 한인들이 거주하면서 사용했던 우물

학교에 한인과 러시아인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었다는 비숍의 여행기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이 마을에 한인뿐만 아니라 러시아인들도 함께 살았다는 점이다.

 

이는 연추 마을에 이미 서학(西學)이 설립되어 러시아어로 교육을 하고 있다고 한 ‘아국여지도’ 기록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연추의 러시아어학교는 적어도 1884년 이전에 설립되었는데,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신(新)한인촌에서 간행되던 신문 ‘한인신보’에 “연추에 아문학교를 설(設)하고 한인자제를 교육하며”라는 기사가 실려 있어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유일하게 남은 下연추

 

하연추 마을은 마을 어귀에 위치한 추카노브카강의 지류인 수하야강(Rechka Sujkhaia)을 경계로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비숍 여사가 찾아갔던 러시아정교회와 학교는 수하야강을 건너기 전의 바로 남쪽지역에 있었다.

 

사실상 이곳이 하연추 마을은 물론 전체 연추 마을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좁은 의미에서의 ‘얀치헤’는 이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최소한 1906년에서 1907년 무렵까지 연추 마을은 ‘베르흐네 얀치헤’, 즉 상연추와 ‘니즈네예 얀치헤’, 즉 하연추의 두 개 마을로 구분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두 연추 마을 중간에 농촌가구들이 늘어나면서 ‘스레드네예 얀치헤’, 즉 중연추 마을이 생겨난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함께 한인들이 상별리(上別里), 중별리(中別里), 하별리(下別里)라 하여 상연추 마을, 중연추 마을, 하연추 마을의 별칭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1923년 이후 소비에트화 과정에서 이들 연추 마을은 집단농장으로 개조됐지만, 역사의 격랑에 휩쓸리면서 각기 다른 운명에 처하게 된다. 세 연추 마을 가운데 중연추 마을이 가장 먼저 폐쇄됐다.

 

중연추 마을은 1929년 만주군벌 장작림(張作霖)의 동중철도 점령으로 빚어진 중국과 소련간의 무력충돌 당시 폐쇄돼 연해주 남부 하산스키 구역의 161개 한인마을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어 1937년 한인들은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 일대로 강제이주 당했는데, 이때 상연추 지역 집단농장의 한인 농민들도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 지역으로 옮겨졌다.

한인 농민들이 떠난 상연추 마을에는 이후 러시아 농민들이 들어와 살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폐쇄되고 말았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이 함께 살았던 ‘니즈네예 얀치헤’ 즉 하연추는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한인들이 떠난 후 러시아마을로 남게 됐다.

 

그러다 1972년 극동지역의 중국식 지명을 러시아식 지명으로 바꾸면서 현재의 추카노보(Tsukanovo) 마을로 개칭됐다. 이에 앞서 1970년부터 하연추 마을 가운데 러시아정교 교회와 학교가 위치해 있던 연추 마을 최대의 중심지도 서서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끝)


출처 : 한류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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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한인 발자취를 찾아서 ①]

남북 수십 리, 동서 사오 리… 비옥한 토지에 병풍처럼 산이 둘러싸고
50만 고려인 역사의 첫 장 연 지신허(地新墟) 마을

조선후기 굶주림과 일제의 폭압을 피해 러시아로 떠났던 한인들.
그 후손들은 140년이 흐른 지금 유라시아 대륙 곳곳에 흩어져 조선족 또는 고려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러시아 정부의 강제이주 정책의 결과다.
한때 600여 개에 달했던 연해주 일대의 한인마을들은 이제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러시아 한인마을을 찾아 불행했던 초기 러시아 한인이민사를 되짚어본다.(편집자)

‘지신허(Tizinkhe)’. 1863년경 생겨나 1937년을 전후해 사라진 러시아 연해주 남쪽지역에 위치해 있던 러시아 최초의 한인마을 이름이다. 지신허는 구(舊)소련에 머물던 50만 고려인의 연원지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마을을 기억하는 이들은 극히 드물다. 반세기에 걸친 냉전시대에 러시아 지역과 접촉하지 않고 살아온 우리들은 물론이고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로부터 사할린,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타슈켄트, 알마아타로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에 흩어져 살고 있는 고려인 중에서도 지신허라는 마을을 알고 있는 이들을 찾기는 어렵다.

 

그만큼 지신허는 역사문헌이나 고지도(古地圖)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뿐, 현대의 지도에서는 사라진 지명이다.

 

필자는 이 마을과 남다른 인연이 있다. 고려인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10여 년 전부터 ‘지신허’는 역사학자인 필자의 오랜 화두였다. 그러다 마침내 2년 전인 2001년 7월 국가보훈처 학술조사단을 이끌고 ‘지신허’ 마을의 옛터를 발굴·조사해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조사단은 관련 문헌자료들은 물론, 러시아의 고지도와 현대지도, 9세기말 간행된 조선지도 등 각종 자료들을 참조해 ‘지신허 발굴’이라는 개가를 올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TV와 주요 일간지에 크게 보도됐다.

 

그로부터 1년19개월이 지난 2003년 2월, 필자는 5명으로 구성된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학술조사단을 이끌고 지신허 마을을 다시 찾았다.

 

2월4일부터 18일까지 약 2주에 걸친 조사단의 연구과제는 블라디보스토크, 파르티잔스크, 우수리스크, 하바로프스크 일대의 연구소, 대학, 기록보존소 등을 방문해 한국학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고려인과 러시아 노인들을 인터뷰하는 것이었다.

 

사과와 보드카로 조상의 넋 위로

 

2월9일 아침 8시10분경 우리 일행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호텔을 나섰다. 이번 답사에는 블라디보스토크 한국교육원의 박희수 원장과 교포신문인 ‘연해주소식’의 김광섭 사장이 동행했다. 필자가 이들 현지 교포인사들에게 동행을 권유했던 것은 지신허 마을을 단순히 학술적인 조사 대상에 머무르게 할 게 아니라, 현재의 고려인 사회에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일행을 실은 미니버스는 온통 흰 눈으로 뒤덮인 산과 들을 양옆으로 내치며 눈길을 미끄러지듯 달렸다. 알촘, 라즈돌리노예, 바라바쉬를 거쳐 오후 1시20분경 마침내 지신허 마을로 들어가는 길 입구인 비노그라드나야강(Rechka Vinogradnaia)에 도착했다. 이 강의 이전 명칭은 지신허강(Rechka Tizinkhe)이었다.

 

비노그라드나야강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꺾어진 입구에서 약 15분쯤(2km) 들어가니, 2년 전에 찾았던 농가가 나타났다. 닭, 젖소, 거위들이 낯선 이방인들의 출현에 놀라 푸드덕거리며 한꺼번에 울어대자 한 농민이 집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2년 전 필자에게 역사 속에 묻힌 지신허의 존재를 확인해줬던 시디코프 보리스 알렉산드로비치(Sidikov Boris Aleksandrovich)씨였다. 그와 나는 끌어안으며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그에게 일행을 일일이 소개했다. 군복무 시절 이 지역에 마음이 끌려 제대 후 이곳에 정착했다는 시디코프씨는 젖소를 기르며 우유공장에 우유를 공급하고 있다.

 

2년 전 시디코프씨는 필자에게 한인들의 집터와 연자매 맷돌, 항아리 파편을 보여주면서 지신허 마을에 관해 중요한 증언을 해줬었다. 그는 한인 유적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다.

 

이날 시디코프씨는 그동안 새롭게 발견된 또 다른 집터와 연자매 맷돌 한 짝, 아래받침돌 등을 보여주었다. 일행은 연자매 맷돌 위에 가져간 사과와 보드카를 올려놓고 김광섭 사장의 주재로 제사를 올렸다. 오래 전 이곳에서 살았던 고려인 조상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강제이주로 마을은 사라지고

 

필자는 2년 전 장마와 우거진 잡초 때문에 확인해보지 못했던 비노그라드나야강 상류지역까지 올라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중국과의 국경지역이라 러시아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어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시디코프씨의 기억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이곳에는 집 두 채가 남아 있었다. 종전 후 러시아 농가 40채가 들어서면서 소프호스(국영농장)가 만들어졌고, 현재 자기 집 위치에 국영농장의 책임자가 살았다고 한다.

 

소 200마리를 기르는 목장이 있던 이 마을의 명칭은 ‘우로치쉐 비노그라드노예(Urochishche Vinogradnoe)’. 목장 이외에 포도나무, 살구나무 등 과실나무를 많이 재배한 데서 비롯된 명칭일 것이라는 게 시디코프씨의 짐작이다.

   

필자가 가져간 현대 러시아 지도에는 비노그라드나야강 옆 지점에 ‘비노그라드노예(Vinogradnoe)’라 표시돼 있는데, ‘비거주지역’으로 돼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시디코프씨 집에서 서쪽으로 중국과의 국경 부근까지 한인마을이 분포해 있었고, 시디코프씨가 소장하고 있던 옛 지도에는 지신허(Tizinkhe)로 표시돼 있었다고 한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1937년 강제이주로 폐허가 됐던 지신허 일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 농민들의 국영농장 마을이 들어섰다가 이제는 시디코프씨의 목축업을 위한 목초지로 변한 것이다.

 

시디코프씨는 “과거 한인들이 러시아와 조선 국경지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와서 정착한 것은 자기나라 정부(조선 정부)의 추적을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나름대로 매우 흥미로운 시각이었다.

 

시디코프씨는 자신도 한인관련 서적들을 읽어봤지만, 한인들이 홍후즈(紅? 賊 : 붉은 수염을 한 마적이라는 뜻)나 강도였다는 내용을 보지 못했다며 홍후즈는 대부분 중국인들이었음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는 또한 한인들이 이 지역에서 열심히 농사를 지으며 러시아 군대에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강조했다. 시디코프씨는 집 주변의 연자매 맷돌과 집터를 보여주면서 한인들이 쓰던 가위, 질그릇 파편, 쟁기의 쇠날을 선물로 주었다.

 

최초의 한인이주에 관한 기록들

 

현재 한국과 러시아 학계에서는 무산(茂山)의 최운보(崔運寶)와 경흥(慶興)의 양응범(梁應範), 두 사람이 이끄는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1863년 월경(越境)을 엄금했던 국법을 어기고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 지신허에 정착한 것을 최초의 한인이주로 간주하고 있다.

 

이보다 앞서 연해주지역이 청나라 영토에 속해 있었을 때는 물론, 1860년 베이징조약(北京條約)으로 연해주가 러시아 영토가 된 이후에도 조선농민들이 두만강을 건너간 일이 있었다.

 

그러나 사냥이나 채취 또는 여름에 파종하고 가을에 추수해 돌아오는 이른바 계절형 이주에 불과했을 뿐, 영구거주와 정착을 위한 이민은 아니었다. 이 점에서 1863년의 지신허 마을 개척은 현재 구소련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50만 고려인들의 첫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지신허는 원래 중국식 명칭으로 계심하(鷄心河, 발음은 ‘지신허’)라고 표기했던 강의 이름이다. 한자 뜻 그대로 해석하면 ‘닭의 심장부분에 해당하는 강’인데 어원이 분명치 않은 이 강 이름을 따 최초의 한인마을 이름을 지신허라 했고, 이후 한인들이 우리식 한자발음을 빌려서 ‘地信墟’ ‘地新墟’ ‘池新河’로 표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신허강은 현재 비노그라드나야강(Rechka Vinogradnaia)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 강은 탐험대만(Bykhata Ekspiditsii:과거 노보고로드만)으로 들어가는 그라드코이강(Rechka Gladkoi)의 지류로 북쪽 중국 국경지대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흘러 그라드코이강으로 이어진다.

 

지신허 마을은 러시아수비대 초소가 위치해 있던 탐험대만으로부터 19km 정도 떨어져 있고, 북쪽으로 중국령인 훈춘과는 14km 정도 거리에 있었다.

 

최초의 한인이주에 관한 기록들은 이주시기는 물론, 이주한 가구와 인원수에서도 다양한 편차를 보이고 있다. 먼저 러시아 쪽의 기록들을 살펴보자.

 

1867~69년에 동시베리아 총독의 파견으로 남부 연해주지역을 답사한 프르제발스키(N. M. Przheval’skii, 1839~88)는 1869년에 쓴 글에서 “1864~65년 겨울에 한인 10가구가 조선정부의 금지를 무릅쓰고 우리에게 이주해왔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다른 자료들을 참조해 보강한 것으로 여겨지는 자신의 저서 ‘우수리스크 크라이 여행(Puteshestvie v Ussuriskom krae), 1867~69’에서는 한인들이 “이미 1863년 12가구가 이주해왔다”고 수정했다. 시기가 1년여 앞당겨졌을 뿐만 아니라 가구수도 10가구에서 12가구로 늘어난 것이다.

   

최초의 한인 이주는 1863년

 

지신허 마을의 존재를 확인해준 러시아인 시디코프씨와 그의 농장

한편 1910년 연흑룡주지역 일대를 조사한 아무르탐험대의 종합보고서로서 1912년에 간행된 ‘연흑룡지역의 중국인, 조선인, 일본인(Kitaitsy, Koreitsy, Iaponitsy v Primore)’에서는 최초의 한인이주에 관한 서술이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돼 있다.

 

당시 탐험대의 단장 곤닷치(N. L. Gondatti)는 1911~17년 연흑룡주 총독을 지낸 인물로 한인들에게 매우 우호적인 정책을 취했던 것 같다.

 

탐험대에 참여했던 그라베(V.V Glave)가 작성한 이 보고서에는 “1863년 이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와 남부 우수리군(郡)에 소수의 독신 조선인들이 나타났으나, 이들은 여름에 일하고 가을에 되돌아갔다.

 

1863년에 들어서면서 가족들의 (영구정착을 위한) 이주가 시작됐다.

 

최초의 13가구가 노보고로드만에 새로이 조성된 포세트구역의 국유지를 점유하였던 것이다”고 기록돼 있다. 지신허라는 마을 명칭이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현재 학계에서 받아들이는 학설의 근거가 바로 이 보고서다.

 

최초의 한인마을인 지신허의 초기 형성과정은 러시아측 자료를 광범위하게 분석한 고려인 한국사학자 박보리스 교수에 의해 자세하게 밝혀져 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남부 우수리 지역에 최초로 이주한 한인들에 대한 첫 번째 공식보고는 노보고로드 초소 대장인 레자노프(Rezanov)가 연해주 군무지사인 카자케비치(P.V.Kazakevich)에게 보낸 1863년 11월30일자(현재 서력으로 12월13일자) 보고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레자노프 중위는 “한인 몇 사람이 와서 20가구가 노보고로드 초소로부터 15베르스타(약 16km) 떨어진 지신허강 분지에 정착할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하였는데, 이미 이들은 이곳에 대여섯 채의 집을 지어놓은 상태였다”고 보고했다.

 

이들 한인들은 또한 자신들을 홍후즈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도록 러시아군인 5명을 파견·배치해줄 것을 요청했다. 레자노프 중위의 보고를 받은 연해주 군무지사 카자케비치는 한인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1864년 5월 레자노프 중위에게 홍후즈의 공격으로부터 한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초소를 지신허 마을 주변에 배치하고, 한인들의 정착을 지원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레자노프 중위가 이 명령서를 접수한 것은 1864년 가을의 일이었는데, 이 무렵 지신허강 분지에는 60명 정도의 한인들이 새로 지은 집과 채소밭, 농토를 갖고 가축을 키우며 살고 있었다.

 

카자케비치 군무지사에게 보낸 레자노프 중위의 두 번째 보고서는 1864년 9월21일(서력 10월4일) 작성된 것인데, 지신허 마을의 한인들에 대해 한층 자세하고 공식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 레자노프는 지신허에 정착한 한인들이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으며 이들이 생산한 메밀을 우선적으로 국고로 구입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또 연자매 맷돌을 설치해주고, 중국인 ‘라(La)’로부터 빌린 종자와 양식비용을 갚기 위한 보조금 200루블을 대여해줄 것도 요청했다. 이주 2년 후인 1865년 연해주 군무지사는 지신허강 분지에 형성된 최초의 한인마을의 공식명칭을 노보고로드 초소 대장인 레자노프의 이름을 따서 레자노보(Rezanovo)라 했다.

 

그렇다면 한인들의 기록은 어떨까. 필자가 확인한 바 현재 남아 있는 최초의 기록은 초기 한인사회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자 부호였던 최봉준(崔鳳俊, 1862∼1918)이 ‘해조신문(海朝新聞)’을 창간하면서 쓴 발간사이다.

 

이 ‘발간하는 말’에서 최봉준은 “서력 일천팔백육십삼년은 곧 음력 갑자지년(甲子之年)이라. 우리 동포 십여 가구가 처음으로 이 아국(俄國)지방 지신허에 건너와서 황무지지(荒蕪之地)를 개척하고 연(連)하야 살음(살게 됨)에 해마다 몇십 호씩 늘어가니…”라고 썼다.

 

최봉준은 함경북도 경흥 출신으로 1869년 8세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지신허로 이주한 후 자수성가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 점에서 이 글은 지신허 이주민이 쓴 지신허에 관한 최초이자 유일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한 가지 오류가 발견된다. 최봉준은 지신허 이주의 시기를 ‘1863년’으로 정확히 기록하고는 있으나 ‘갑자년(甲子年)’, 즉 1864년으로 잘못 계산했던 것이다.

 

문제는 당시 한인들이 음력에 익숙해 있었고, 또 지신허 출신이자 한인사회의 유력인사였던 최봉준이 ‘갑자년’으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 정확성 여부에 관계없이 당시 한인들이 최초의 이주시기를 ‘갑자년’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두 번째로 소개할 기록은 러시아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였던 계봉우(桂奉瑀, 1880∼1959)가 1920년 ‘독립신문’에 12회에 걸쳐 ‘뒤바보’라는 필명으로 연재한 ‘아령실기(俄領實記)’다.

 

계봉우는 1914년 러시아 한인들이 추진했던 한인노령이민 50주년기념행사의 일환으로 계획한 러시아 한인이주민사, 즉 ‘강동쉰해’ 간행을 위한 자료수집과 편집을 책임졌던 인물이다.

 

그는 1919년말 북간도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대표로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상해에 파견됐는데, 이광수(李光洙)의 부탁으로 기고한 ‘아령실기’에 러시아 한인들의 역사를 이주사, 풍속, 노동, 사회, 교육, 독립운동으로 나누어 소개했다.

 

계봉우는 “사천백구십칠년 갑자춘(甲子春)에 무산(茂山) 최운보(崔運寶), 경흥(慶興) 양응범(梁應範) 2인이 가만히 두만강을 건너 훈춘(琿春)을 경유하야 지신허(地新墟)(차(此)는 연추(煙秋) 등지)에 래주(來住)하야 신개간(新開墾)에 착수하니”라고 기술하고 있다.

 

다른 기록들과 달리 최초의 이주한인으로 최운보, 양응범 2인을 거론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나, 가구수에 대한 언급이 없다. 계봉우 역시 이주시기를 ‘갑자춘(甲子春)’, 즉 1864년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최봉준의 예와 같이 당시 노령의 한인들이 한인의 최초 이주시기를 ‘1864년’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중국인 집과 비슷

 

초기 지신허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앞에서 언급한 프르제발스키는 1868년 지신허 마을을 방문하고 귀중한 기록을 남겼다. 다소 길지만, 인용해보기로 한다.

 

“가장 광활하고 오래된 한인마을 지신허에 대해 서술하는 것이 쓸모없는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 마을은 노보고로드 항구로부터 18베르스타(약 19km) 떨어져 있는, 비옥하고 경치가 좋은 분지에 위치하고 있다.

 

만(灣)으로부터 시작해 내륙으로 뻗어 있는 산들이 이곳 분지에 이르러서는 마치 두 개의 병풍을 두른 듯한 지형을 이룬다. 분지의 길이는 15베르스타(약 16km)며, 폭은 1~1.5베르스타(1km~1.6km)다. 활모양으로 구불구불하게 굽이치며 빠르게 흘러가는 지신허강은 분지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는데, 양쪽을 거의 같은 크기로 갈라놓아 농사에 편리하고 비옥한 농토를 만들어놓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산들은 비탈이 꽤 가파르고 견고한 덤불, 울창한 잡초들과 여러 개의 좁은 길들이 있어 결코 평탄치 않은 형세를 갖추고 있다. 그 뒤로 높은 산봉우리들이 무리를 지어 에워싼 형세가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10베르스타(약 11km)에 걸쳐 길게 늘어져 있는 지신허 마을의 집들은 100보 내지 300보씩 떨어져 있다. 한인들의 집은 흙벽과 문종이를 발라 막은 창문, 난로(아궁이)와 판자침상, 초가지붕 등 외형으로나 내부구조로나 중국인의 집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중략…)

 

집과 집 사이에는 한인들이 공들여 가꾼 마당이 있다. 들판에서의 농사는 암소와 황소를 부려서 하지만 조잡한 형태의 쟁기를 사용한다. 농작물로는 수수를 가장 많이 파종한다. 그리고 자가식량으로서만이 아니라 중국인들에게 팔기 위해서다. 주식으로 콩, 강낭콩, 보리를 파종하고, 양은 적지만 옥수수 감자 메밀 대마 담배를 심으며 야채밭에는 오이 호박 무 상치 고추 등을 심는다.”

 

이외에도 프르제발스키는 지신허에 머물면서 참석했던 장례식에서 자신의 통역으로 많은 대화를 나눈 지신허 마을 노야(老爺, 촌장) 최운국에 대한 얘기 등 매우 귀중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후 지신허 마을의 모습은 조선정부에서 파견한 관리들이 기록한 문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82년경 지신허 마을을 찾았던 김광훈(金光薰)과 신선욱(申先郁)은 마을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큰산이 솟아 있는 아래에 한 마을이 있는데 마을 이름은 지신허(地信墟)이다. 남북으로 수십 리이고 동서로 사오 리인데 집들이 즐비하다. 그 가운데 양인초소가 있고 서학서숙(西學書塾)이 있는데, 가르치는 사람이 서양인이고 우리 아이들이 수업을 받고 있다. 이들은 서양말과 서양글을 할 줄 알았다.”

   

새로운 정착지 연추마을

 

최근 지도(위)에는 ‘지신허’라는 지명이 없지만, 옛 지도(아래)에는 ‘지신허’라고 분명하게 표시돼 있다.

지신허 마을의 주민 수는 국경지대인 육진지방 농민들이 대거 월경해 넘어오면서 빠르게 늘어났다.

 

1863년 최초의 이주민 13가구에서 1864년 가을에는 30가구 140명으로, 1865년에는 65가구 343명으로, 그리고 1866년에는 100여 가구로 크게 증가했다.

 

1867년에는 500명이 지신허로 이주해왔고, 1868년에는 900명이 국경을 넘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지신허로부터 서쪽으로 14km 가량 떨어져 있는 연추강(煙秋河, 현재의 Tsukanovka 강)가의 연추마을(煙秋, Yanchikhe)로 이주했다.

 

지신허에 이어 연추마을이 새로운 정착지로 알려지면서 1867년 조선으로부터 150가구가 이주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연추마을에 남고 나머지는 1868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는데, 이들은 다시 수이푼강(현재의 라즈돌리노예강)으로 보내졌다.

 

그 결과 1869년에 수이푼 강가에 푸칠로브카마을이 형성됐다. 이곳은 그 후 추풍지방 한인마을들의 연원이 되는데, 이 마을의 명칭은 정착계획의 책임자였던 러시아 관리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1869년 육진지방에 몰아친 대흉년은 이전까지의 간헐적인 이주와는 달리 폭발적인 규모의 대이동을 가져왔다.

 

러시아 자료에 기록된 1869년 가을과 겨울의 대이주를 살펴보면, 1869년 9월말∼10월초 1850명의 농민(남자 1300명, 여자 550명)이 다양한 루트를 통해 지신허로 이주해왔는데, 이들은 의복이나 비축한 식량이 없었다. 이어 같은해 11월말∼12월초에는 훨씬 더 많은 4500명이 지신허로 몰려들었다.

 

이른바 기사흉년(己巳凶年)으로 불리는 1869년의 대흉년과 그로 인한 대이주는 후일 두고두고 러시아 한인사회에 이야깃거리가 됐던 것 같다.

 

이때 여덟 살의 나이로 부모를 따라 지신허로 이주했던 최봉준은 “1868년(1869년의 잘못) 기사(己巳)에 이르러는 본국 함경도 지방에 흉년이 크게 들거늘 그 해 겨울에 기황(饑荒) 들었던 백성 수천 호가 일시에 지신허로 내도하니 기왕에 우거(寓居)하던 몇십 호의 농작한 힘으로는 수천 인구를 구제할 방책이 없는지라, 그런고로 기황을 이기지 못하여 생명을 구제하매 극근득생(極僅得生)한 반분(半分)에 지나지 못하였다”고 회상하고 있다.

 

옛 지도에는 ‘지신허’라고 분명하게 표시돼 있다.

대이동의 전주곡 ‘기사흉년’

 

계봉우 역시 ‘아령실기’에서 기사흉년과 그로 인한 대이주를 매우 드라마틱하게 묘사했다.

 

“1869년의 흉년은 음력 7월에 내린 장매(長?, 강풍에 따른 흑비)로 인한 것이었는데, 이때 육진지방은 한줌의 벼도 거둘 것이 없는 공전(空前)의 대흉년이었다. 이에 더해 얼마 전 웅기만에 미국 상선이 표착(漂着)했는데 적재돼 있던 물화를 마음대로 나누어 가진 사건을 조사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에 영문(營門)장교가 사실 조사하러 온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두려워한 경흥 읍민 96가구가 음력 11월 일시에 두만강을 건너 지신허로 몰려들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들이닥친 이들을 맞은 지신허 마을에는 거처할 집도 식량도 없어 이주민들은 굶주림과 추위의 아비규환 상태에 빠지게 됐다.”

 

지신허 마을은 이렇게 물밀듯이 몰려드는 이주민을 소화할 수 없었다. 러시아당국 역시 예기치 못한 사태였다.

 

결국 이주민들을 다른 지방으로 이주시켜 정착케 하는 것이 최선의 대책이었다. 1869년에는 지신허를 개척했던 최운보가 지신허 빈민 35가구를 이끌고 추풍(秋豊, 수이푼)으로 이주했고, 1870년에도 역시 지신허 마을 빈민 60가구가 러시아 관리의 지도를 받아 추풍으로 옮겼다.

 

러시아정부는 1871년 여름 지신허 마을 70여 가구 315명을 포함한 연추 등지의 빈민 500명 가량을 아무르주(흑룡주)의 아무르강 지류 사마르카강가의 블라고슬로벤노예(Blagoslovennoe) 마을로 이주시켰다. 블라고슬로벤노예는 러시아당국이 한인들의 러시아화를 목표로 정책적으로 조성한 최초이자 유일한 모범마을이었다.

 

이처럼 지신허로 이주했던 한인들이 남부 우수리지역 각지를 개척하면서 수많은 한인마을들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1871년 1월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남부 우수리 일대에는 총 3750명의 한인들이 정착해 있었는데, 지신허 1200명, 연추 300명, 시지미 80명, 노보고로드만(灣) 120명, 포세트만 주변 150명, 수이푼 분지(추풍) 1200명, 나홋카·스챤(수청) 500명, 그리고 러시아 마을에 200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인이 최초로 지신허로 이주한 것은 1863년의 일이다. 그러나 1914년 당시 러시아의 한인들은 이주 5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행사를 준비한 이들은 1864년을 최초의 한인이주가 일어난 해로 인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주50주년기념행사에 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13년 6월부터의 일이다. 이후 1913년말 4명의 원호인(이른바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사람) 지도자 최재형(崔在衡), 최봉준, 채두성, 박영휘에 의해 ‘한인아령이주 50주년기념 발기회’가 조직됐다.

   

좌절된 ‘한인이주 50주년 기념행사’

 

2003년 2월 지신허 마을을 찾은 한국외국어대 역사문화연구소 학술조사단 일행. 가운데(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시디코프씨다.

4명의 발기인 가운데 단연 주목되는 인물은 최재형이다. 그는 당시 연해주지역 한인의 자치기관인 권업회 회장이었으며, 그 자신이 기사흉년 당시인 1869년 9월, 9세의 나이로 부모를 따라 지신허로 이주했던 인물로, 노령한인사회에서는 명실상부한 최고원로였다.

 

최봉준 역시 최재형과 같은 시기에 지신허로 이주했던 인물로 최봉준과 최재형은 의형제 관계였다. 1908년 무렵 최봉준 최재형 김학만, 이들 세 사람은 한인사회의 ‘영웅 삼걸(三傑)’로 존경받던 인물이었다.

 

발기인들의 제안에 따라, 지방대표원회의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2월3일부터 7일에 걸쳐 개최됐는데, 수이푼(추풍), 노보키예브스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스챤(수청), 도비허, 리포, 신한촌, 권업회 등 8개 지역 및 단체 대표 25명이 참석했다. 러시아인으로는 포스타빈, 쥬코프, 블라노프스키 등 3명이 참석했다.

 

대회는 1914년 9월21일(현재 서력으로는 10월4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식으로 기념식을 개최하기로 했다. 이들은 처음 이주한 곳이 지신허이나 ‘모임의 편의’를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를 기념식 장소로 잡았다. 또한 기념식을 9월21일로 잡은 것은 ‘러시아의 극동역사기록’에 한인이 처음 이주한 날로 기록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의는 또한 한국식 기념비를 포세트(목허우)에 세우기로 하고, 한인이주역사를 한글과 러시아어로 발간하기로 했다. 여기에서 특기할 것은 기념행사를 철저히 한국식으로 거행하기로 결정한 사실이다.

 

즉, 기념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복을 입으며 될 수 있는 대로 한국 갓을 쓰고 한국 고대의 예복을 입기로 결정한 것이다.

 

기념행사발기회는 곤닷치 연흑룡주 총독의 허가를 얻었다. 그리하여 3월25일, 30여 명의 대표가 참가한 가운데 니콜스크-우수리스크(현재의 우수리스크) 권업회 회관에서 개최된 지방대표원회의에서는 기념행사에 관한 구체적인 결정이 이루어졌다.

 

명예회장으로 포스타빈 박사를 선임하고, 기념행사 경비로 3만8700여 루블을 확정했다. 9월21일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고, 일주일 후인 9월28일 포세트에서 기념비 제막식을 거행하기로 결정했다.

 

회의는 대부분이 원호인인 22명을 위원으로 한 ‘한인아령(俄領)이주 50주년기념회’를 조직하고 집행부 간부로 회장 최재형, 서기 김기룡, 재무 함세인을 선출했다. 회의의 주요한 결정사항은 ‘권업신문’ 지면을 통해 전체 한인사회에 알려졌다.

 

이처럼 착실하게 진행중이던 50주년기념행사는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러시아정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한인의 민족운동을 탄압함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곤닷치 총독은 8월초 기념행사발기회측에 1915년으로 연기할 것을 명령했던 것이다.

 

사라진 마을은 모두 606개

 

필자는 2001년 이후 연해주(프리모리에)와 하바로프스크주, 유태인자치구 등 러시아극동지역의 한인마을들을 찾아 나섰다. 소련시절 간행된 러시아측 자료에 근거해볼 때, 1937년 강제이주로 폐쇄돼 영원히 사라져버린 한인마을의 수는 약 444개에 달한다.

 

여기에 1929년 중국 만주군벌 장작림(張作霖)의 동중철도 점령으로 야기된 중·소간 무력충돌로 폐쇄됐던 연해주 남부의 하산스키 구역 한인마을 162개까지 합치면 무려 606개의 한인마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지신허 마을 역시 이들과 같은 운명을 겪었다. 지신허 집단농장의 주민들은 1937년 가을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지역으로 강제 이주됐다.

 

사라진 한인마을 606개에는 강제 이주 이후 한인마을터에 러시아인들이 들어와 러시아마을로 변한 곳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들까지 포함할 경우, 1937년 당시까지 러시아극동지역에 존재했던 한인마을 수는 훨씬 많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들 한인마을 대부분은 그 위치를 찾아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들 마을에 대해 증언해줄 고려인 노인들은 거의 세상을 떠났으며, 살아 있는 이들도 너무나 오래된 일이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사 이들에게 희미한 기억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주변환경이 많이 변해 원래의 위치를 찾아내기는 힘들다.

 

강제이주 이후 70년 가까운 세월 속에 한인마을 대부분이 완전한 폐허가 돼버렸다. 또 형편이 어려운 고려인들이 자신들의 옛 고향을 찾는 일도 없다. 러시아마을로 변한 지역에서 러시아인들의 증언을 통해 겨우 그 흔적을 찾아낼 수 있을 뿐이다.

필자는 각종 문헌자료와 이들 러시아인들의 증언에 힘입어 2001년 이후 20개에 가까운 한인마을들의 위치를 찾아냈다. 그 과정에서 필자는 발해 유적들과 만나고, 70여 년 전 땀과 피눈물을 흘리며 소련 땅을 개척한 억센 고려인 선조들의 삶의 흔적을 보았다. 초기 한인이주민들이 남긴 이 유물과 유적들이 더 훼손되기 전에 모아서 보존해야 한다.

 

그러나 한·러 친선의 역사적 근거지였던 연해주를 비롯한 러시아극동지역에 관한 우리들의 관심은 턱없이 부족하다. 올해는 러시아 한인 이민 140주년의 뜻깊은 해다. 지신허 마을의 시작과 종말은 탄압과 차별의 어두운 면과 친선과 협력의 밝은 면을 동시에 가졌던 한·러 관계의 양면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끝)

 

 

반병률
●1956년 생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한양대 사학과 대학원, 미국 하와이주립대 박사
●한양대·미국 하와이주립대 강사, 미 동서문화센타(East-West Center) 객원연구원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한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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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강제이주 70년] 中. 멀고 먼 중앙아시아로
[경향신문   2007-02-28 18:06:20] 

1937년 강제이주 당시 한인들을 실은 시베리아 열차가 출발했던 블라디보스토크역. 광장은 번화한 모습이지만, 역사는 옛모습 그대로이다.
1937년 당시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은 20여 만명에 이르렀다. 1860년대 첫 이주 이래 연해주 곳곳에서 한인 마을을 이루며 민족의 전통문화를 간직한 채 살고 있었다. 그중에는 구 소련에 귀화한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비귀화인들이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말은 당연히 한국말이었다. 그만큼 민족성이 강한 한인들이었다.

그런 한인들을 스탈린은 곱게 보지 않았다. 때문에 한인들은 소련의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먼저 강제이주라는 철퇴를 맞아야 했다. 1937년 9월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가 그것이었다. 스탈린 정권이 왜 한인들을 강제이주시켰는가는 지금까지도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구소련 정부는 ‘일본 첩자’로 이용될 우려가 있어 강제 이주시켰다고 하나 확인된 바는 없다.

사실 스탈린 정권은 훨씬 전부터 한인들의 강제이주를 계획한 일이 있었다. 1927년 8월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한인 이주에 관한 지령’을 통해 대대적 이주정책을 수립한 바 있었고, 1930년 2월에는 스탈린이 직접 주재하면서 한인 이주에 관한 문제를 재차 다루었다. 1932년 7월에는 연해주 일대 한인들의 대량 이주에 관한 지령을 확정한 바 있었다. 이때 스탈린 정권은 이들 한인을 하바로프스크 변방의 외지로 분산시키고자 했다. 되도록 한인들을 한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주시키고, 또 집단 생활을 영위하는 한인들을 분산하려는 정치적 목적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1937년 8월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극동지역에서 일본 첩자의 침투를 차단’한다는 명목 아래 한인의 강제이주를 최종 확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강제이주는 거대 강국의 야망을 가지고 전체주의 체제를 강화하려는 스탈린 정권의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소련은 겉으로는 가장 평등하고 민주적인 국가를 표방했지만, 모든 정책은 오직 스탈린 독재를 위한 전체주의적 우상화가 지상 과제였다. 그리고 이를 공산당이 뒷받침하고 있었다.

한인들은 소련내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통합수준이 높던 민족이었고, 밀집한 지역에서 한인사회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 한인사회의 모습은 분할통치를 원하던 스탈린 정권의 방침에 위배되는 것이기도 했다. 더욱이 1930년대 들어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에서는 기근과 전염병 등의 재앙으로 수백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극심한 인력난을 겪고 있었다. 거기에 끈질길 생명력을 가진 한인들의 전통적 농업활동인 벼농사와 채소 재배를 그곳에 도입시키려는 의도도 가미되고 있었다. 한인들은 그런 스탈린 정권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강제이주한 한인들이 첫 겨울을 지낸 카자흐스탄 마을에 세워진 기념비.
스탈린 정권은 한인의 강제이주를 그야말로 비밀스럽고도 신속하게, 또 철저하게 처리해 갔다. 우선 숙청 대상자들을 강제노동수용소에 감금하거나 총살시키는 대신, 그들로 하여금 한인 강제이주의 집행을 담당케 했다. 또한 강제이주를 감행하기 직전, 한인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한인사회의 대표와 지도자들을 제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이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사건을 날조했다. 즉 한인들이 연해주 일대의 변방을 소련으로부터 탈취하려는 목적으로 무장 봉기를 준비하고, 그 근거지를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날조된 모함에 의해 당시 포시에트 구청위원회의 제1서기관 김아파나시와 민족 시인 조명희 같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하바로프스크의 카를 마르크스 거리 입구에 산골짜기만한 깊은 웅덩이를 파고 강제이주를 반대하는 한인들 수백명을 집단 학살해 매장하기도 했다. 훗날 그 자리에 시립공동묘지가 만들어졌는데, 시립공동묘지 밑에는 그때 학살당한 한인들의 유골이 지금도 묻혀져 있다고 한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강제이주당하는 것에 항변하다가 희생 당한 한인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강제이주는 준비 과정을 포함해 엄격하고, 지속적이며, 전면적 통제 아래 진행되었다. 스탈린 정권은 한인의 신상을 철저하게 파악해 놓고 있었으며, 철통 같은 감시를 통해 강제이주를 감행했다. 그렇게 해서 1937년 9월과 10월 두달 사이에 20여만명의 한인을 한 명도 빠짐없이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다. 캄차카와 인근 벽지에 거주하던 한인들까지 이주시킴으로써, 하바로프스크 동쪽에 사는 한인은 한 사람도 남겨 두지 않았다.

강제이주의 수송 수단은 시베리아 철도였다. 50량 정도의 수송 열차에는 여객칸 1량, 위생보건칸 1량, 식당칸 1량, 유개화차 5~6량 외에 40여 량의 화물칸이나 가축운송용 차량이 달려 있었다. 한인들은 화물칸이나 가축운송용 차량에 2층 판자 침상과 조그만 난로를 설치해 개조한 차량에 짐짝같이 실려 중앙아시아로 옮겨졌다. 보통 한 칸에 5~6가구, 25~30명가량의 한인들을 실었으며, 한달 넘게 달려서야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카자흐스탄에 7만여명, 우즈베키스탄에 10여만명이 운송되었다.

수송 과정에서 한인들이 겪어야 했던 참상은 차마 형용키 어려운 것이었다. 어린이와 노인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한 채 달리는 열차에서 죽어갔다. 하는 수 없이 가족들은 자식과 어버이의 시신을 달리는 열차에서 던질 수밖에 없었다. 강제이주 1세대자들에게는 누구나 그런 경험을 겪었고, 그들에게는 지금도 가슴에 깊은 상처로 남겨져 있다. 1937년 당시 연해주 일대 한인은 20여 만명에 이르렀으나, 1938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이주한 한인의 수는 18만여 명이었다. 2만여 명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들 중 상당부분은 강제이주를 반대하다가, 또 수송과정에서, 그리고 현지 정착과정에서 희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중앙아시아의 한인들은 소비에트정권 기간 내내 그 피맺히고 억울한 사연을 어디에도 호소하지 못한채 가슴속 깊게 묻고 살아야 했다.

강제이주 후 60여 년이 돼서야 러시아 정부는 1993년 4월 강제이주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그동안 정치적 탄압, 민족차별을 받아야 했던 한인들의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발표했다. 20여 만명의 한인 가운데 지금까지 생존한 사람들은 대략 3000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그들의 입을 통해 강제이주 당시의 참상이 이야기되고 있지만, 스탈린 정권의 폭압적인 강제이주로 빚어진 통한의 역사는 어떻게 갈무리를 지어야 할까. 이들 한인의 강제이주는 해외 한인이 겪어야 했던 희생 가운데도 가장 비극적인 상처로 남아 있다. 그것은 그들만의 상처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픔이다. 강제이주 70주년을 맞이해 그 역사의 상처와 아픔을 승화시킬 수 있는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장석흥|국민대 국사학과 교수〉

출처 : 위대한 유산 74434 공식 카페
글쓴이 : 조용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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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강제이주 70년] 上. 연해주지역의 개척자들
[경향신문   2007-02-27 18:03:51] 

러시아 연해주 오브치니코보의 한인촌 상 멍고가이마을. 의병장 유인석 장군이 1909년부터 이듬해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올해는 러시아 연해주에 거주하던 고려인 20만명이 스탈린의 탄압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다. 1937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역만리 중앙아시아로 쫓겨난 러시아 한인들은 사막 벌판을 옥토로 만들며 ‘카레이츠’(고려인)로 우뚝 섰다. 현재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약 55만명. 경향신문은 전문가 기고를 통해 연해주·시베리아에서 중앙아시아로 내몰려야 했던 고려인의 역사성을 되짚어 보는 ‘고려인 강제이주 70주년, 그 자취를 좇아’를 연재한다.

한인의 러시아 이주는 1863년 겨울 함경도 농민 13호가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 남부 지신허강 계곡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뒤 1869년 대흉년이 들면서 함경도 육진의 농민 6500여명이 6월부터 12월까지 대거 이주하니, 이를 ‘경오도강(庚午渡江)’이라 부른다. 이들의 이주는 기아에서 벗어나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이었다.

중국과 달리 러시아 당국은 그런 한인의 이주를 환영했다. 연해주 지역은 인구밀도가 낮고 식민개발이 절실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무렵 러시아는 ‘러시아인을 위한 러시아’라는 슬로건 아래 극동개발에 박차를 가하며 러시아인의 이주를 적극 장려하고 있었다. 연해주 지역에서 러시아인의 정착이 크게 늘어가는 가운데 한인들의 이주도 꾸준히 증가해 1908년께에는 이 지역 인구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한인사회를 키워나갔다.

당시 연해주 한인들은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했으나, 품삯을 벌기 위해 온 ‘외품자리’라는 떠돌이 임금노동자, 납품업자들도 있었다. 그 중 ‘뽀드라치크’라 불린 납품업자들은 러시아군대와 관청에 쇠고기, 벽돌 등의 납품과 군부대 시설공사를 통해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러내각이 들어설 때, 이들 가운데는 공사관 직원이나 군사교관의 통역으로 조선에 들어오거나 조선 정부의 요직에 임명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연해주의 한인들은 러시아 당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난을 겪어야 했다. 한인의 이주를 받아들인 러시아였지만, 러시아가 일본이나 중국과 전쟁을 벌일 경우 한인 이주자들이 ‘적국(敵國)의 광범한 첩보조직’으로 기능할 것을 우려, 경계하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물론 연흑룡주 총독 곤닷치 같이 연해주 지역에서 한인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고, 후원하던 이도 있었다. 그는 1912년 신한촌을 직접 방문해 “한국을 사랑하지 않는 한인들은 러시아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겨 한인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한인사회의 형성과 함께 연해주 지역은 1910년 망국을 전후해 해외독립운동기지로 발전해 갔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인접한 지리적 이점과 북간도 지역에 비해 일제의 간섭과 탄압이 덜 미치던 연해주 지역은 독립운동기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러일전쟁 직후 간도관리사 이범윤은 이곳에서 의병을 이끌었다. 1908년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하던 안중근 의병부대의 근거지도 바로 연해주 지역이었다. 한인사회의 지도자 최재형은 이들 의병을 적극 지원하면서 구국의 뜻을 펼쳐 나갔다. 한인사회의 중심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한인학교가 세워지고 한글신문인 ‘해조신문’ ‘대동공보’ ‘대양보’ ‘권업신문’ 등이 발간되면서 계몽운동을 꽃피워 나갔다. 1910년 여름 망국이 임박해진 가운데 의병과 계몽인사들이 힘을 합해 13도의군(十三道義軍)과 성명회를 조직하며 일제의 강제병탄에 맞서 최후까지 항쟁을 벌여 나갔다. 이후에도 이 지역 한인의 독립운동은 꺼질 줄 모르는 불꽃처럼 타올랐다.

러시아 하바로브스크에 있는 빨치산 희생자 추모기념탑. 한인사회당 창건자 김알렉산드라가 처형된 곳이다.
1911년 12월에 조직된 권업회는 한인사회의 자치적 대표기관으로서 권업신문 발간, 학교 설립, 러시아 국적 취득 알선, 한인 이주 50주년 기념행사 등을 추진하며 독립운동의 장도적 방도를 모색해 갔다. 그런 가운데 1913년 말 이동휘, 이종호, 이상설, 이동녕 등이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면서 독립운동의 기치를 크게 올렸다. 이는 러일전쟁 10주년을 맞이해 제2의 러일전쟁이 발발할 것을 기대하고, 그때를 광복의 기회로 삼으려는 전략에서 시도된 것이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러시아와 일제가 동맹관계로 돌변하고, 러시아 당국이 한국 독립운동을 탄압하면서 대한광복군정부의 구상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17년 러시아의 2월 혁명은 한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 2월 혁명을 열렬히 환영하던 한인들은 동년 6월 전로한족대표자회를 개최하며 활동을 재개했고, 대회 결의에 따라 신한촌에서는 ‘한인신보’,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는 ‘청구신문’이 창간되었다.

10월혁명 후 한인사회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졌다.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족중앙총회,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 등이 만들어지며, 독립운동을 전개해 갔다. 전로한족중앙총회는 연해주 지역 3·1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러시아 지역, 서북간도, 그리고 국내의 대표들까지 아우른 가운데 대한국민의회로 확대·개편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와 더불어 해외 임시정부의 쌍두마차를 형성하던 대한국민의회는 1919년 가을 상하이 임시정부와 통합하기에 이른다.

그런가 하면 친볼셰비키적인 이동휘, 김립, 박애, 이한영, 장기영 등이 1918년 5월11일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립하기도 했다. 그렇듯 연해주 지역은 해외 한인사회 가운데 어느 곳보다 사회주의 혁명의 영향이 크게 미치던 곳이었다. 볼셰비키 혁명 전선에서 크게 활약하던 한인들은 혁명을 반대하는 일본군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 4월에는 시베리아에 침투한 일본군에 의해 대규모의 방화, 파괴, 학살 등의 만행이 저질러졌다. ‘4월참변’이라 불리는 이 일로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등 한인지도자들이 학살되는 등 한인사회가 커다란 피해를 입고 말았다.

1922년 말 시베리아 내전이 종결되고 소비에트체제를 확립해 가는 과정에서 한인사회 역시 급격히 변질되어 갔다. 스탈린 정권은 민족적 가치를 철저히 배제하는 가운데 한인의 전통 마을을 집단농장으로 재편해갔다. 민족적 한인들에 대한 체포, 감금, 처형 등 대탄압도 거세졌다. 1931년 일제의 만주침공, 1937년 중일전쟁 등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자 연해주 지역의 안보를 우려한 스탈린 정권은 80여년 가까이 이 지역을 개척하며 혁명 전선에 앞장서왔던 한인들을 배신한 채 1937년 가을 무자비하게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를 감행했다.

〈반병률|한국외대 사학과 교수〉

출처 : 위대한 유산 74434 공식 카페
글쓴이 : 조용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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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의 땅에 버려진 식민지 조선인들

700만 동포 아리랑-러시아편①] 그들이 영주 귀국을 못하는 사연

 

제3회 재외동포NGO대회가 오는 24일부터 27일까지 서울 장충동 성베네딕도회 피정의 집 등에서 열립니다. 지구촌동포연대(KIN)가 주최하고 <오마이뉴스>가 후원하는 이번 행사에서는 역사와 인권의 관점에서 각국 재외동포의 삶과 역사, 그리고 미래상을 한국정부와 시민사회가 올바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고, 각국 재외동포 사회의 현안에 대한 문제해결의 청사진을 제시할 예정입니다. 이번 기사는 손동주 '지구촌동포연대' 집행위원이 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 소송을 위한 자료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불모의 땅이었던 사할린은 19세기 들어서면서 지리적 중요성과 자원 개발의 보고로 인식되면서 러시아와 일본의 중요 관심지역으로 부상했다.

양국은 각자의 자료를 근거로 사할린 지역에 대한 영유권 다툼을 벌였으며 한때 러시아와 일본의 양국민 공동 거주 형태로 유지되기도 했다. 지속적인 분쟁과 협상을 거듭하다가 1875년 사할린을 러시아 영토로 하는 대신 쿠릴열도를 일본 땅으로 하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북위 50도 이남의 남부 사할린을 양도받게 된 일본은 본격적인 식민지 개발에 착수했다.

해방 후에도 버림받은 조선인들

사할린을 이야기할 때 흔히 떠오르는 이야기는 유형(流刑)과 기민(棄民)이다. 이같은 배경은 제정 러시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할린은 기후적인 어려움과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척박한 땅인 탓에 사람이 살기 힘들었다. 러시아는 극동 지역의 사할린을 개발하려고 죄수들과 그 가족을 유배하고 정착시켰다. 이 유형자들의 생활과 옛 사할린의 모습은 안톤 체홉의 여행기와 그의 작품 '사할린 섬'에서 볼 수 있다.

이렇듯 죄수들의 강제 노역 유형지였던 사할린에 강제 동원된 식민지 조선인이 유입됐다. 그리고 해방된 후에 이 땅은 계속 버림받았다.

사할린에 조선인이 처음으로 유입된 것은 1870~80년대로 추정된다. 1897년 제1차 전체 러시아 인구조사 기록에 의하면 조선인은 67명이다.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를 거쳐 사할린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1920년대 초반에는 러시아령인 북부사할린에 1400여 명, 일본령인 남부사할린에 1000여 명이었다.

이 때만 해도 사할린의 조선인들은 식민지 조선에서보다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일자리를 찾아 온 자발적 이주민이었다. 이후에도 조선인 이주자는 조금씩 늘어났는데, 북부사할린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소련 정부에 의해 1937년에 1150여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기도 했다.

사할린의 석탄과 목재 확보를 위한 일제의 조선인 강제 징용이 본격화된 시점은 1938년 국가 총동원령이 발표된 이후이다. 1939년부터 45년 종전까지 조선인들의 사할린 강제 이주와 관련한 정확한 자료는 없다. 다만 해방 당시 소련 정부의 출국금지 조치에 따라 사할린에 남은 조선인 숫자를 4만500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납치당한 자식'을 모른 척해서야

▲ 위령제.
이들은 연합국총사령부와 소련 사이의 '소련지구 귀환 미·소 협정'의 체결로 1946년 12월부터 47년 7월까지 30여만 명의 일본인이 귀환할 때도 사할린에 남겨졌다.

'소련지구 귀환 미·소 협정'은 일본군 포로와 일본국적을 가진 자를 소련 점령지에서의 귀환자로 규정했다. 협정을 감안하고 당시 상황을 보면 이들은 일본국적자 자격으로 귀환 조치되어야 했다.

그러나 1905년의 을사늑약과 1910년의 한일병합으로 조선인은 일본국적자였음에도 일본정부는 귀환 대상 명단에서 4만5천여 명의 조선인을 제외한 채 귀환 조치를 실시했다. 2차 대전 후, 사할린한인이 귀환에서 빠진 상태로 6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은 일본정부의 책임이 가장 크다.

한국정부의 책임도 무시할 수 없다. 해방 후 국내정세의 불안을 겪었다고는 하지만 해외의 자국민 귀환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정부의 행태는 납치당한 자식을 버려둔 것과 같다.

또한 구소련 정부가 다분히 의도적으로 귀환을 방해했다는 정황도 나타난다. 사할린은 천연자원의 보고로 개발의 여지가 많았다. 소련 정부로서는 사할린의 노동력을 최대한 유지하고 싶었을테고, 조선인 귀환에 협조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구소련 정부는 자국 국적법을 들어 잔류 조선인들을 무국적자로 규정하고 귀환을 막았다.

이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었던 한인들이 다시 사할린으로 이주했고, 북한 지역의 노동자가 새로 유입되면서 오늘날 사할린한인사회가 형성됐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살아남기 위하여 러시아 국적을 취득할 수밖에 없었던 강제동원 피해자와 그 자손들의 고통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현재 사할린 한인들의 현실적인 요구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희망자에 대한 한국으로의 영주귀국조치 ▲둘째, 사할린 현지 정착 지원 ▲셋째, 강제동원 피해 보상 및 노역 당시의 저축금·연금 등의 지급을 위한 일본정부의 배상이 그것이다. 이같은 요구들은 사할린으로 강제동원한 일본정부의 책임 인정과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긴 세월 방치해 왔던 한국정부가 사할린한인들의 역사성을 인식하고 성의 있는 태도를 보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같은 요구는 역사적으로나 인도적으로나, 또한 국제법적으로도 지극히 당연한 권리이다.

자식 버리고 재혼해야 영구귀국?

아직도 영주귀국을 희망하는 1세 분들이 3천여 명 남아있다. 현재 일본 적십자사는 한국 적십자사를 통해서 사할린 한인에 대한 영주귀국사업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 영주귀국사업은 사할린 한인들의 가슴에 또다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있다.

현재의 사업은 영주귀국 대상자를 1945년 이전 출생의 1세 동포로 한정하고 있다. 자식·손자들과 생이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새로운 이산가족을 양산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이 사업은 "혼자서 귀국한 고령의 노인들을 돌볼 수 없다"는 이유로 배우자가 돌아가신 분들에게는 새롭게 부부로 결합하여 귀국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낯모르는 사람과 한 집에서, 그것도 가까운 친척 하나 없는 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결코 인도적일 수 없다.

게다가 시설과 재원이 부족해 영구귀국 희망자들은 이미 한국에 영주귀국하신 분들이 돌아가셔야만 그 빈 공간으로 들어올 수가 있다. 아직 남아있는 영주귀국 희망자들은 먼저 한국에 영주귀국한 사람들이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 통한의 비.
귀국 차례를 기다리다 돌아가시는 분도 부지기수이다. 또 오직 고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일념으로 자식들을 두고 영주귀국했지만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향수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시는 분, 가족이 그리워 영주귀국을 포기하고 사할린으로 다시 돌아가는 분도 적지 않다.

그나마 영주귀국사업은 사할린한인들의 소망을 일정부분 반영하고 있지만 현지 정착이나 미지급 임금 환수와 강제동원 피해 보상은 여전히 요원한 일로 남아있다.

또한 이들에겐 '이중징용' 피해라는 아픔이 있다. 1944년 이후 일본을 둘러싼 바다와 하늘을 미군이 장악하자, 사할린 해안가의 탄광을 폐쇄하고 노동자들을 일본 본토로 재징용해 간 것이다. 1944년 8~9월에 걸쳐 이중징용된 3200여 명의 조선인들의 생사는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재 사할린에서는 피해자 가족들이 생사 확인을 포함한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활동하고 있다.

60년 사할린 한인의 아픔 치유될까

2005년 10월과 12월에 각각 '사할린동포지원을 위한 특별법안'(장경수 의원 대표발의) '사할린동포 영주귀국 및 정착지원에 관한 특별법안'(한명숙 의원 대표발의)이 국회에 제출됐다. 사할린한인을 위한 지원 법률 외에도 현재 국회에는 10여 개의 재외동포 관련 법률안이 계류 중이다.

그나마 17대 국회 들어서서 관심의 폭이 넓어지면서 일어난 이같은 관련 법률의 제정 움직임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시민사회의 관심과 노력이다. 현실적인 논리에 쫓겨 물질적 보상에 급급하면 자칫 재외동포가 갖고 있는 역사성을 소홀히 하게 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사할린한인들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제대로 인식하면서 전국민적인 관심과 애정을 가질 때 비로소 60년 사할린 한인의 한과 눈물의 아픔이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한반도의 비밀■
글쓴이 : ■한반도의비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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