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중앙아시아에서 의 시련과 극복
강제 이주 이후 한인의 거주 이전은 제한되었다. 한인들은 일정한 거주 구역이 명시된 신분증을 소지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적어도 1953년까지 약 16년 간 집단적으로 수용소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민족 교육이 금지되었음은 물론 국가 기관 취업과 취학에도 제한이 있었다. 사회 정치적 진출도 사실상 봉쇄되어 있었다.
이 모든 제한은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비로소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한인은 벼농사를 시작하여 우즈베키스탄은 주요 쌀농사 지역으로 변화하였다. 한인은 목화 등 다른 작물에서도 뛰어난 실적을 올리면서 빠르게 정착해 갔다. 전후 한인은 중앙아시아 개발에 앞장서 특유의 개척 정신과 영농법으로 수많은 모범 콜호즈를 탄생시켰다. 소연방이 자랑하던 콜호즈는 모두 한인 콜호즈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노력 영웅을 낳았음은 물론이다. 인구 대비 노력 영웅 비율은 모든 민족 가운데 최고를 자랑하였다.

 
 

 

 

중앙아시아에서의 집단 농장생활 자세히 알아보기

소련의 정부책은 서서히 실행에 옮겨졌다. 이른바 콜호즈를 만들어 양식을 수탈해내는 정책이 그것이었다. 우즈베크 공화국 안에 있는 ‘스베르드보프 콜호즈’는 연해주 남쪽 ‘신영동’이라는 마을에서 실려 간 사람들만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지금도 이곳에 사는 사람의 절반 이상은 1937년도에 끌려온 사람들이거나 그들의 후예이다. 그곳의 고 한운석 씨의 증언을 담아보았다.

“소련 전역에 걸쳐서 노력영웅은 모두 1천 2백 명 가량인데 그 가운데서 고려 사람으로서 노력영웅이 된 사람만 약 7백 50명쯤 된다. 그 중에서 우리 ‘스베르드보프 콜호즈’에서만 21명의 영웅이 나왔다. 단연 최고였다. 11명은 이미 죽었고 6명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으며 현재 4명만 여기 살았다…….지금 생각해보면 미련했다 싶기도 하다.

최초로 여기로 들어온 사람은 1천5백 명 가량이었다. 왔을 때 이 일대는 모두 갈대밭이었다. 갈대밭을 농토로 만들었기 때문에 고생은 말할 수 없었다. 농기구라고는 하나 없이 맨손으로 갈대를 뽑아내고 지금의 이 옥토로 만들었다. 꼭 7~8년이 걸렸다. 우리는 고향 신영동에서 한 덩이가 되어 불라디보스톡으로 와가지고 기차를 탔다. 1937년 12월에 타쉬켄트로 왔다. 한겨울에 여기 갈대밭에 버려졌다. 움막을 짓고 한 집에 30여 명씩 들어가서 첫 겨울을 났다. 2년간을 그렇게 살면서 집주위로부터 농토를 일구어냈다. 양배추, 수박, 참외를 심어서 국가에다 바쳤다. 1940년부터 아주 조금씩 벼농사도 지었다. 몇 해를 더 하다가 1947년부터 목화를 재배하라는 모스크바의 지시에 따랐다. 지금이야 집집마다 가스관이 들어와서 가스로 음식을 하지만 옛날에는 목화대를 땔감으로 썼다. 황량한 사막에다 인간의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오아시스를 만들었다고 우리는 자부한다. 하지만 오늘이 있기까지 우리가 이 모래펄에다 파묻은 땀과 피눈물을 기억한다면 전혀 오늘이 자랑스럽지만은 않다. 갈대밭에다 움막을 둘러치고 살던 2년 동안에 같이 온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학질에 걸리고 이질에 걸렸지만 약 한번 못 써보고 무려 2백 명 넘게 죽었다. 소련은 우리를 여기다 갖다버렸을 뿐 인간 대접해 준 것은 없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들에게 목화를 재배하라고 했다. 개간을 해놓고 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다 바치라고 강요했다. 목화 농사는 사람의 등뼈를 녹여내는 것이다.
그때부터 ‘영웅’제도가 생겼다. 본래 소련에는 세 가지 영웅이 있었다. ‘전투영웅’, ‘노력영웅’, ‘모성영웅’이다. ‘전투영웅’은 글자 그대로 전쟁에서 적을 많이 사살한 사람이 된다. 모성영웅은 여자가 아이를 10명 이상 낳아 기른 사람에게 붙여준다. 노력영웅은 한마디로 일벌레를 뜻한다. 우리는 서로 노력영웅 되는 것을 더 없는 영광으로 알고 죽자 살자 일만 했다. 해마다 영웅 심사를 할 때 자기 이름이 뽑혀지는 감동을 위해서 일 년 내내 들판에서 흙 속에 파묻혀 지냈다. 정해진 면적에서 누가 더 많은 수확량을 내느냐가 영웅을 결정하는 주된 기준이다. 나도 영웅이다. 하루에 잠은 4시간 정도만 자고 나머지는 일을 했다. 가족들도 따라해야 하기 때문에 힘들다. 지금 생각해보면 허망하다. 물론 영웅이 되면 훈장을 받고 영웅 칭호를 들으며 무슨 행사 때마다 맨 위쪽에 앉게 되고 약간의 혜택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콜호즈가 퇴락해 가고 소련이 붕괴된 뒤 독립 국가로 흩어지고 보니 내가 저 들판에 바쳤던 땀의 의미는 한마디로 소련의 권력층을 살찌게 해주기 위한 짓 밖에 못되었다는 결론이다. 내 몸에 남은 것은 모진 질병이고 내 가족에게 지워진 것도 그다지 넉넉하지 못한 썰렁한 살림과 마누라의 저 병신된 모습뿐이다. 내 땅 한 뼘 못 가진 채 이렇게 늙었을 뿐이다. 그리고 콜호즈가 변모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도 머잖아 또 여기를 떠나 어디론가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그저 슬플 뿐이다. 이것이 영웅 대접이란 말인가”~ 이하 생략
- 까레이스끼 또 하나의 민족사 중에서-

 

 

 

다시 한번 부연 설명하자면 소련 시기 고려인들은 1937년 이주 초기에서 스탈린 통치시대와 1950년대 후반 흐루시쵸프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거주이전의 자유제한과 고등교육의 기회박탈 등 여러 면에서 권리를 제한 받았었지만 탈냉전의 흐루시쵸프 시대의 바람을 타고 고본질을 통한 경제력 향상과 자녀들에 대한 높은 교육열에 힘입어 러시아인과 현지인 사이에서 중간관리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거주이전이 자유롭게 되자 일부 고려인들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그 같은 러시아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연해주 이외의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고려인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소련 내에서 고려인 사회는 지역별로 분화되었으며 많은 고려인들은 특유의 근면성을 바탕으로 고본질과 집단 농장에서의 성공으로 경제적으로 거주지역의 평범한 러시아인들보다 나은 생활을 누리기까지 했다. 특히 우즈베키스탄의 경우 이주해 온 고려인들에 의해 논농사(특히 벼농사)가 활성화되었고 목화 수확에 있어서는 우즈베키스탄이 세계적인 목화 산지로 발돋움하는 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으며, 농업부문에서 많은 농업영웅들을 배출하여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들은 구소련 127개 민족 중 농업부문에서 탁월한 민족이며 다방면에서 우수한 민족이라고 정평이 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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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사
 
▣ 명령번호 1428-326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 인민위원회 및 중앙위원회는 아래와 같이 명한다. 일본의 간첩행위가 극동지방에 침투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한다.

* 연해주 극동국경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한인들을 카자흐스탄과 아랄해, 발하쉬 호수 및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으로 이주 시킨다.
* 지체 없이 추방을 시작하여 1938년 1월1일까지 추방작업을 종결한다.
* 한인들이 재산, 농기구 및 가축을 갖고 이주하는 것을 허락한다 * 이주자들이 남기고 가는 동산 부동산 및 파종된 종자에대해서 보상이 이루어질 것이다.
* 추방시 발생하는 무질서를 방지하기 위하여 조치를 취해야 한다.
* 카자흐스탄 공화국,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인민위원회는 한인들의 거주 지역과 주거지를 결정하고 이주자들이 경제적 적응을 할 수 있도록 협조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한다.
* 국가철도는 한인들을 극동지역에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옮기는데 있어 적시에 기차 편을 제공한다.
* 이주경로, 출발하는 이주자 수, 도착하는 이주자 수, 그리고 해외로 이주하는 이주자 수를 10일마다 전보로 보고해야 한다.
* 한인들이 이주해가는 지역 경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국경수비대를 3000명으로 증원한다.
* 인민위원회는 한인들이 비운 곳에 국경 수비대가 주둔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스탈린 /1937.9.11
·1937년 9월 21일 -11월 15일.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한인들 전원 중앙아시아(6천㎞) 강제 이주당함.

우즈베키스탄 16,272가구 76,525명 이주, 카자흐스탄 20,170가구 총 95,256명 이주.(총 36,422가구. 총 171,781명 이주) 이주 전 한인 지식인 2,500명 총살형. 강제 이주는 지식인의 사전 처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소리 소문 없이 끌려간 수천 명에 달하는 한인 지도자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곧이어 진행된 강제 이주에 대한 통보 역시 출발 며칠 전에야 이루어졌다.
이주 통보 이후 여행이 중지된 상황에서 거의 맨몸으로 이들은 정든 땅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도 곡식의 씨앗은 잊지 않았다고 하니 한인들의 농사에 대한 집념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화물차와 가축 운반 차를 개조한 차량에 짐짝처럼 실린 이들은 매서운 시베리아의 삭풍 속을 한 달여 간 달려 중앙아시아에 도착했다. '먹을 것을 전혀 공급하지 않아' 기차가 석탄이나 물을 보충하기 위해 역에 서면 간이 상점에 뛰어가 '빵 등 사람 먹는 것은 무엇이나 닥치는 대로 사다 먹으면서' 여행을 했다. 열차에 화장실이 없었으며 역 구내에 열차를 세우면 모두가 내려 대소변을 본다고 '역도 아닌 허허벌판'에 차를 세웠다.

마른 음식을 계속 먹으며 고통을 겪다가 열차가 섰을 때 나뭇가지를 주워 불을 지피고 국물이라도 끓이려고 하면 열차가 떠나곤 하여 제대로 끓여 먹지도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자연히 여린 노인과 어린이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여행 중에 아이들 사이에 홍역이 발생하여 유아 사망률이 60%를 상회하였다. 여행 중에 가족이 여러 열차로 흩어져 이산 가족도 다수 발생하였고 사고도 발생하였다. 한인들이 새로운 정착지에 도착한 후 수용 시설이라곤 전혀 없는 허허벌판에 내려 놓았다. 그 무서운 겨울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다. 1938년도의 인구 표본 조사를 보면 1천 명 당 42명이 사망했으며 유아 사망률은 20%나 되었다. 특히 고통스러웠던 기간은 이주 첫해 겨울부터 이듬해 농사를 짓기까지의 기간이었는데 토굴이나 창고, 마구간 등을 개조하여 겨울을 났으며 방바닥은 맨 땅이었다고 한다.
강제 이주 이후 한인의 거주 이전은 제한되었다. 한인들은 일정한 거주 구역이 명시된 신분증을 소지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적어도 1953년까지 약 16년 간 집단적으로 수용소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민족 교육이 금지되었음은 물론 국가 기관 취업과 취학에도 제한이 있었다. 사회 정치적 진출도 사실상 봉쇄되어 있었다.


이주자들은 당시 짐을 챙기는데 24시간이 주어졌다고 한다. 일주일 전에 사실을 안 사람들도 묘안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식탁, 의자 등 가구를 팔려 해도 이미 아무도 사려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꾸르-우르민스끄이ㅡ
출처 : 사랑과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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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연해주에서 의 독립운동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 (자료출처 : 독립기념관)
우리민족의 항일독립운동은 1900년을 전후하여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만주, 러시아의 연해주 등지에 근거를 두고 일제와 여러차례의 독립전쟁을 수행한 독립군단들은 1920년 10월 만주 봉오동과 청산리 지역에서 독립운동사상 전무후무한 대첩을 거두었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과 수많은 의열사들도 조국 광복을 쟁취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독립전쟁
1910년 전후 민족운동가들은 만주·노령 및 미주 등지에서 많은 독립운동 단체와 독립군단을 조직해 활동하였다. 특히 3·1운동 후에는 만주·노령지역의 독립군들은 강력한 독립군단을 조직해 국내진공 작전을 감행하였는가 하면, 만주까지 침입한 일본군을 맞아 대규모의 전투를 전개하였다. 하지만 독립군은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가운데 모진 수난을 감수해야만 하였다. 수많은 한인과 독립군이 목숨을 잃은 경신참변(1920, 庚申慘變)과 자유시참변(1921, 自由市慘變)은 나라 잃은 민족의 비애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국의 수난도 독립군의 의지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었다. 독립군은 1922년부터 흩어진 전열을 재편하면서 남북 만주에서 통합 군단(軍團)인 통의부(統義府) 및 대한독립군을 성립시켰고, 이후 참의(參議)· 정의(正義)·신민부(新民府)등 3부(府)로 재정비하여 독립전쟁을 늦추지 않았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고 괴뢰정부를 세우게 되자 독립군은 큰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3부 통일운동의 결과 성립된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과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은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한 시기까지 계속 항전을 이어가다가 일부는 중국 본토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 계통의 인사들은 계속 만주에 남아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또는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등에 가담해 무장투쟁을 이끌어 갔다. 그런가 하면 중국 본토로 이동한 인사들은 그곳의 민족운동 세력과 힘을 합쳐 1940년 9월 중경(重慶)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을 조직해 광복의 그 날까지 대일항전을 펼쳤다.

재만(在滿) 민족운동계 대표들은 1910년대 후반에 '대한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여 독립전쟁 실천의 시기가 왔음을 각성시켰다. 그리고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노령·미주 등에 이주한 동포들도 이에 호응 대규모 만세시위를 전개해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과시하였다. 이어 지금까지 준비한 독립군기지의 무력(武力)을 전투체제로 정비해 본격적인 독립전쟁에 돌입하였다.
1919년 3·1운동을 전후한 시기 만주와 노령지역 독립군기지에는 망명 민족운동가들의 노력에 의해 무장투쟁력이 결집된 50여 개의 독립군단이 조직되었다. 이들 독립군단의 독립군들은 압록·두만강을 넘어 국내로 진입해 침략자 일제를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독립군들의 주공격 대상은 일제의 주재소·헌병대·도청과 같은 침략기관과 한국인들을 괴롭히는 침략의 원흉들이었다. 독립군들의 이 같은 국내진입 항일전은 한국을 영구히 식민지화하려는 일제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이에 일제는 독립군들을 소멸시키기 위해 다각적인 작전계획을 세워 독립군기지인 서북간도까지 침입하여 공격을 펼쳤다. 하지만 독립군들은 굴하지 않고 줄기찬 항전을 펼쳤다.
1920년 6월에는 간도의 봉오동(鳳梧洞)에서,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는 청산리(靑山里)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물리쳐 독립전쟁 사상 빛나는 양대 승첩을 기록하였다. 이 같은 신명을 바친 독립군의 무장투쟁은 1920년대 중반에는 참의부·정의부·신민부 등 3부의 활동으로 이어졌고, 20년 후반과 30년대 전반기에 북만주에서는 한국독립군, 안만주에서는 조선혁명군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계속하여 중국 관내와 만주지역에서 조선의용대·한국광복군·동북항일연군 등의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어 조국 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다.
1. 독립국가연합(CIS) 동포현황

연해주의 도립운동기지인
오늘날의 블라디 보스톡

 

 

 

 

▣ 만주
출처 : 사랑과 용서
글쓴이 : 망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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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지역 한국어 교육의 현황                최미옥(알마아타 한국교육원)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역사     한국어 교육사     동포문화 단체의 한국어 보급 역할
독립 이후의 한국어 교육 현황     한국어교육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

 

 

 

▒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역사

 

 

 

 

 

 

 

1. 연해주 한인 사회의 형성

 

   두만강 하류를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접경해 있는 연해주 지역은 한국 근대사의 전개과정에서 한국 독립운동, 민족운동의 중요 무대로 확대된 지역이다. 연해주 지역의 면적은 한반도보다 약간 적은 20만 7천km이고, 특히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의 유역은 비교적 넓은 평원을 이루고 한카호 같은 수원이 좋은 호수가 있어 농업개척에 필요한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연해주 일대가 러시아 영토로 편입될 때까지는 인구가 거의 1만 2천여 명에 불과한 거의 무인지경의 미개척지였다. 이같은 지역적 특성으로 인하여 조선 후기에 한인들이 산발적으로 연해주 지역에 이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조선 후기의 사회적 모순이 가중되는 시대적 상황하에서 한인의 이주현상은 더욱 표면화되었다. 즉 봉건적인 지배하에 있던 영세 농민을 주축으로 하는 민중은 자율적으로 민족사의 새 진로를 찾으려는 강한 움직임을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황무지를 '신천지'로 삼아 생활 토대를 마련하고 나아가 조국독립운동의 전진기지로 삼으려 하였다. 이 지역은 본래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면 上古 이래 고구려와 발해로 내려오면서 민족의 활동무대였고, 고대문화를 형성하던 우리 민족의 故地였다.

   한인이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그 연원이 오래다. 1863년에 13가구가 두만강을 건너 地新城에 처음으로 정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지만 자연발생적인 한인의 연해주 이주의 역사를 고려한다면 그 시기는 훨씬 앞선다고 볼 수 있다. 현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I811년경 두만강 건너에 박석골. 감자골이라는 한인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연해주 이주 한인의 수를 정확히 계산하기란 여러 가지 일로 해서 매우 곤란하다. 아무튼 초기 이주가 시작된 이래 매년 증가 추세를 보여 1882년경까지 연해주 인구구성의 수위를 차지할 만큼 급증하였다. 한인의 연해주 이민은 1904-1905년의 러일전쟁 이후부터 큰 변화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더욱 급증하였다. 이러한 추세 하에 1900년을 넘으면서 10만에 가까웠고, 1910년경에는 10만을 훨씬 넘었으며 1919년 3·1 운동 때에는 30만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처럼 한인 이주가 급증하면서 두만강 대안의 접경지 일대는 한인의 왕래가 끊이질 않아 국경의 의미가 사실상 없어졌고, 나아가 지역에 따라서는 한인 숫자가 그 지역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으며 한국식 촌락 이름이 많이 등장하였다.

 

2. 연해주 한인사회의 세력화 과정

 

   연해주 한인사회의 존재형태와 관련하여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측면이 있다. 첫째는 이주한인들이 연해주 개척에 큰 기여를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인들이 삶의 공간을 확보하고, 나아가 민족적 공간을 확보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주 초기부터 1937년 스탈린 정권에 의해서 강제이주 될 때까지 연속성을 가지는 문제이기도 하다. 둘째, 연해주 한인 사회는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의 을사조약 및 1910년 국치 전후로부더 조국독립운동의 해외 중요기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부터는 국내에서 수많은 의병과 민족운동자가 망명하여 한인사회가 더욱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1860년대에 한인사회가 성립된 이래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연해주에서 일어난 항일 민족운동은 l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한국독립운동의 주류를 이를 만큼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10년의 13도 의군이나 성명회의 활동,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의 결성이 말하듯이 1910년을 전후한 시기에 해외 독립운동의 총본산으로의 역할을 충분히 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하여 한인사회도 변동을 겪지 않울 수 없었다. 러시아에서 짜르정권은 타도되고 각지에서 노동자·농민·병사의 대표기구인 소비에트가 수립되었다. 한인의 대부분이 거주하고 있던 연해주에도 짜르체제는 급속히 붕괴되었다. 2월 혁명직후 러시아 연해주 극동지역 전체 한인의 수는 약 22만5천 명이었으며 그 중에서 19만 명은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였고 나머지는 아무르강 유역의 다른 지역에 살고 있었다.

   이 당시 연해주 한인사회는 각기 그들이 처해 있는 사회·경제적 위치에 따라서 서로간의 갈등이 표출되기도 하였지만, 짜르체제가 붕괴되어 구심력이 약해지고 있는 상황을 틈타 한인들도 점차 세력화하기 시작하였다. 지방차원의 조직이 활성화되는 가운데 전로한족중앙총회, 한인사회당 등의 단체가 결성되었다. 이런 가운데 1918년 4월에 일본군이 불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하였고 연해주 한인사회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볼세비키쪽에 가담하고 있던 한인들은 일찍부터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여 일본군과 대항하였다. 한인 무장부대의 항일투쟁은 하바로브스크와 그 이서 지역, 추풍·포시에트 지역, 수찬·을긴 지역 등에서 활발하게 펼쳐 나갔다. 나아가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은 임시정부 결성에도 참여하여 독립을 도모하거나 무장부대를 결성하여 일본군과 맞섰을 뿐만 아니라 직접 국내에 들어가 일제 요인이나 기관을 암살·파괴하는 의열투쟁도 전개하였다. 한편 그 투쟁 과정에서 독립군이 분열되거나 고려 공산단이 두 개로 분일되는 등의 불변화음 및 자유시 참변과 같은 사태가 생겨나기도 하였지만 한인 무장부대의 역량은 당시에 크게 인정받고 있었다. 특히 한인 무장부대는 연해주의 內戰(192111- 192210)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일본군이 1922년 10윌에 모두 철수할 때까지 그 맹위를 떨쳤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소비에트 정권의 대내적인 문제와 철병해가던 일본측의 책동으로 인하여 한인 부대는 무장해제 당하고 만다. 빨치산 부대만이 아니라 정규군의 경우에도 같은 운명에 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在露 한인 부대의 항일투쟁은 4년만에 막을 내린 셈이다.

   일본군이 모두 철수하고 연해주가 볼세비키에 의해 평정됨으로써 한인사회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내전기간 한인의 인구 추이를 보면 I917-1923년 사이에 연해주 지역 한인인구는 25%나 증가하였다. 내전 종결후 볼세비키 체제하에서도 한인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당시 러시아 당국의 대한인 정책이 관대했던 데에도 그 원인이 있다. 극동 러시아의 산업은 농업·임업·광업·어업 등이 중요하나 한인들이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였다 만주와 마찬가지로 논농사는 한인들이 개척하였다. 노동자 중에는 자유노동자의 비율이 높았다. 자유노동자로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부두 노동자가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다음으로는 흑룡주 금광 노동자가 많았다. 연해주 한인 노동자들은 제각기 자기의 직업에 따라서 직업조합에 참여하였다.

   종전 직후 볼세비키 체제가 안정되어 감에 따라 한인사회도 자율적으로 또는 타율적으로 러시아화 해갈 수밖에 없었다. 특히 볼세비키 체제를 공고히 하고 국가적 이익을 극대화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히 표출되던 시대적 상황하에서 우리의 독자적인 문화와 가치관을 강화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한인들이 가장 손쉽고 그러나 꼭 필요한 자제는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사업이었다. 한인 민족지도자들은 자라나는 세대에게 한글과 민족역사와 일제의 침략상을 가르치고 조국해방의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일에 큰 힘을 쏟았던 것이다. 그 결과 각 지역에 많은 한인 학교가 설립되었다. 교육의 장은 반드시 학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각종 출판물도 그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였다. 한글신문인 『선봉』은 소련 내 한인들의 사정과 그들이 부닥친 어려움을 보도하여 한인사회 단결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일제의 압제에 시달리는 조국동포들의 근황과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선열들의 소식을 알려줌으로 해서 연해주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물론 교육의 내용은 소비에트 체제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었으므로 사회주의 사상과 사회주의적 방법이 동윈되었지만 조국의 역사와 문화유산, 언어를 가르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같은 노력의 결실은 한인 자치주 건설운동으로 표면화되었다. 연해주 한인사회의 최대 과제는 삶의 터전을 확보해 가는 것은 물론, 독자적인 민족적 공간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곧 민족자결을 천명하고 있던 볼세비키와 연대하여 러시아 내에서 자치권을 획득하고 교육과 산업의 부흥 및 군대의 양성에 주력하여 민족독립운동을 수행할 수 있다는 방침이었다. 신민회는 일찍이 해외에서 농토 확보와 군대양성을 꾀해 왔었다. 그 이후 한인사회당은 하바로브스크 서쪽 비로비잔 초원에 한인 자치주건설 시도한 바 있다. 그러나 1918년 볼세비키 극동정부의 붕괴와 사회당원들의 분산으로 무산되었다. 이와 같은 한인 자치주건설 문제를 볼세비키가 인정하려 했는지는 상당히 의문스럽다. 이런 가운데 1928년 유태인 거주지가 비로비잔지역에 확정되었다. 여기에 자극받은 한인들은 I928년 고려공화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재러시아 고려공산당, 만주의 신민부·정의부·참의부 및 국내의 각 사상단체 대표 70-80명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모여 이 문제를 심의하였다. 이것을 토대로 전로중앙집행위원회에 극동조선공화국의 수립을 위한 탄원서를 제출하였으나 기각당하고 말았다.

 

3. 고려인 중앙아시아 이주의 역사적 실상

 

1) 이주의 역사적 배경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이주의 역사적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정치적 배경과 사회·경제적 배경으로 그 실상을 파악해 볼 수 있다.

   첫째, 그 정치적 배경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구소련의 통치이념과 소수민족 정책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제정러시아는 역사적 배경을 달리하는 I20여 개의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나라였다. 그러나 국가 운영에 있어서 다민족직 성격을 반영할 만큼 민주적인 국가는 아니었다. 러시아 내의 많은 민족을 어떻게 통치해 나가는가 하는 것은 큰 문제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다양한 민족의 통치를 위하여 제국적 통일이 무엇보다도 우선시되었고, 폭력과 회유를 동반한 러시아화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민족문제는 10윌 혁명 직후의 볼세비키 정권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볼세비키 정권의 당면 과제는 우선 강력한 소비에트 국가롤 건설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권력 기반을 굳히기 위한 일련의 정책과 조처(전체주의적 독재로의 출발)들이 단행되었다. 그들은 현실적인 사안들을 부르주아적인 것과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으로 구분하고, 기타의 요소들은 모두가 이 두 가지 요소로 환원된다고 생각하는 한편, 인종과 민족을 초월한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 표방하며 그들의 국가적 이익을 관철시켜가고 있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술책이 레닌에 의해 표방된 민족자결권 문제였다. 민족자결권은 1903년 이래 볼세비키당의 당강령으로 규정되었고, 레닌에 의해 줄곧 옹호되어 오던 개념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구체적 현실에서 많은 문제 야기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레닌사상의 시발점은 반봉건, 반제국주의의 미숙한 산업발전의 상태인 러시아의 낙후성을 극복하고 어떻게 하면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선진국가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와 결부된 레닌사상의 특징은 大러시아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 사회주의 방도를 선택하였고, 자본주의 발전 단계를 거치지 않고 그것을 뛰어 넘어 선진국가 수준에 도달한다는 近代化의 전략사상으로 집약되었다. 그런 까닭에 레닌의 혁명사상은 도전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고, 자본주의적인 민주정부는 당연히 타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민족적인 제 요소는 부르조아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의 레닌의 통치이념은 기본적으로 중앙집권적 大국가주의를 건설하는 데에 있었다. 즉 근본적으로 민족별 小國化를 반대하고 중앙집권적 대국주의를 견지하였다. 민족으로의 형식은 유지하되 내용은 사회주의적으로 동질화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소수민족들의 민족자결권을 인정하고 소비에트가 다민족국가로 조화롭게 발전할 것을 강조하는 레닌의 정책은 일면 합리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라는 이념만으로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민중들을 혁명대열에 동참하게 한다는 것은 많은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혁명을 위해서 당시의 민족적 현실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즉 소수민족의 '민족자결권'이라는 사실을 순용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레닌은 러시아의 소수민족들을 혁명대열로 유인하였다. 아무튼 이 과정을 통해 결집된 각 소수민족의 역량은 2월 혁명 이후 새로운 민족문제로 분출되었던 것이다. 소수민족들은 모두 민족자결권에 입각한 민족들의 독립, 혹은 자립 등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레닌은 어떤 다른 경우에는 제국주의에 대한 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해서 소수민족들의 자결권 요구가 제약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등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것이 사실이고, 그 대표적인 예는 우크라이나의 경우에서 살필 수 있다. 1917년 11윌 20일 우크라이나는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과 동등하고 자유로운 원칙하에서 연방을 지향한다고 선언하였다. 1918년 1월 22일에는 자신들의 완전한 독립을 선언한 바 있다. 그러나 레닌 정권은 1919년 2윌 13일, 이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1919년 3윌 10일에는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예속되었다. 볼세비키 정권은 그 초기부터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철저하게 유린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민족정책의 眞儀는 러시아의 각 민속국가 내에서 계파투쟁을 일으켜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으로 변혁시키는데에 있을 따름이었다. 이렇게 하여 형성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대러시아 민족주의의 결정체라고 하겠다. 이같은 기본적 틀 위에서 전개된 스탈린의 민족정책은 더욱 강압적이고 급진적인 민족정책의 단행으로 나타났다. 스탈린은 소련의 통치이념을 '마르크스 레닌주의'로 정의하였지만, 그의 관심은 레닌주의적 장치의 실질적인 이용에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혁명과정에서 잔존한 민족주의적 요소를 일거에 제거하였는데 소비에트 중앙정권의 회일적인 통제, 민족분산정책의 강행(소수민족의 강제적 대량이주) 등이 그것이다.

   둘째, 사회·경제적 배경은 한인들의 토지문제와 농업집단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제문제를 통해 살필 수 있다. 볼세비키 정권은 1918년 7윌 제56차 전소비에트 대회에서 "피착취 노동자의 제종의 권리"를 발표하여 사유재산제도 등을 폐지하고, 구소유자의 토지를 국유(무보수)로 하여 이를 농민에게 분배할 것 등의 원칙을 밝힌 바 있으나 그 원칙이 잘 지켜지지는 않았었다. 한편 1921년 내전 승리 이후 새로운 경제정책의 필요성의 의해 신경제정책(NEP)이 도입되어 일부 자본주의 경제원칙이 허용되었다. 어느 정도의 사유재산이 허용되고, 개인기업이나 상거래도 허용되었다. 그리하여 전시공산주의 경제정책하의 곡물의 몰수는 폐지되고 대신 일정한 조세를 징수하였다. 한편 1923년부터 토지이용 합리화는 변방의 당 및 소비에트 기관들의 1차적 과제로 대두되었다. 여기에 한인의 토지문제 또한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한인의 80% 이상이 일용 농부와 소작인이었고, 무토지 한인 농가는 대부분 단순 재생산도 확보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래서 상당수의 농가는 고리대금업자의 신용대부에 의존하는 편이었다. 이같은 토지문제의 긴박성은 한인의 대규모 이주로 더욱 심각하게 되었다. 1919년에서 1923년까지 연해주 지역으로 약 10,000명의 몰락 농민이 이주하였다. 이에 I923년 8월에 극동혁명위원회는 한인에 대한 토지 분배 규정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극동의 모든 한인에게 러시아인과 카작인이 소유한 과대한 분할지를 분배한다. 토지를 분배받은 한인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지 못한다. 오래 전에 변방으로 이주했던 한인에게 하바로브스크와 아무르관구의 토지를 나누어준다. 차후 이주자는 북부 변방지방의 토지 마련에 따른다."고 하였다. 이 때 한인에게 분배된 토지는 대체로 부농의 몰수 토지이거나, 미개척지로서 농지로 개간할 땅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홍수 등으로 경작 면적이 점차 줄어들었고 한인 중에서도 비귀화민들은 고율의 소작료에 힘든 생활을 영위해야만 했다.

   한인들의 절대적인 토지 부족 현상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인들은 각종 집회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토지 소유의 확대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곧 러시아 당국이 토지개혁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지 않았던 데에 기인한다. 이와 더불어 더욱 문제시되었던 것은 토지를 둘러 싼 한인 사회 내부의 갈등이었다. 볼세비키 통치하에서도 비귀화인은 토지 할당에서 제외되었으니 토지를 받은 원호농민과 소작 누호농민, 원호인들과 고용노동자들 간의 모순과 갈등은 계속 깊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단행된 정책이 전면적인 농업집단화의 시행이었다. 1927년 12월 공산당대회에서 신경제정책OlEP)은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사회주의 공세'가 1928년에 개시될 것을 선언하였다. 이에 가장 큰 변화른 가져온 지역은 역시 농촌이었다. 농업집단화는 1929년 말부터 급속히 전개되었고, 1934년 말경에는 극동지방 한인들의 집단농장화 조치도 일단락을 맺게 된다. 이와 같은 급속하고 무계획적인 농업집단화의 추진에는 많은 문제점이 뒤따랐다. 농업 집단경영에 대한 토지 및 생산 시설의 미비, 생산도구 등의 부족 현상이 초래되었다. 특히 전면적 농업집단화 운동은 농민 내부의 광범위한 계급투쟁이 수반되었다. 이 운동은 부농과의 격렬한 계급투쟁 속에서 진행(반부농화운동에 대한 도망·처형·추방 및 在定住)되었고, 이것은 곧 초기의 방대한 징역노동군을 공급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런 문제는 연해주 한인 사회에서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한인사회 내부의 갈등은 그 동안의 뿌리 깊온 파벌 투쟁과 동시에 전개되었다. 1929년 쿨락(부농) 청산 당시 한인 부농들의 토지와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다. 이와 동시에 많은 한인 콜호즈가 조직되었고, 여기에는 비귀화 한인도 물론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에게는 토지와 시민권을 얻을 지름길이 될 수 있있던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한인들 가운데에도 전면적인 농업집단화 운동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연해주 지역에 이주해 있던 한인 농민들의 전통적인 땅에 대한 애착심과 소련 당국의 정책에 동의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사상적 이해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추진되었기 때문에 한인 농민들의 저항은 더욱 컸던 것이고, 이 지역에서의 농업 집단화 실제 효과는 원래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치게 되었다. 이런 문제와 1937년의 고려인 중앙아시아 집단이주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깊이 연구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된다. 사실상 구소련의 농촌사회의 중심을 이루던 '집단농장'은 사회주의 체제의 축도였다. 그러나 당시 농업집단화가 가져온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농업산출량의 저하로 이어진다. 이것은 또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그것이 갖는 관료제적이고 비효율적인 모순을 심도 있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2) 집단이주의 일반적 상황

 

   1937년 8윌 후반기부터 연해주지방 전역에는 놀랄만한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이 지역의 모든 한인들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주 당한다는 강제명령이 모스크바로부터 하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같은 조치는 후일 사실로 판명되었듯이 소련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 의장 몰로도프와 볼세비키 전소련공산당위원회 서기 스탈린에 의해서 내려졌던 것이다. 그리고 소련 내무인민위원회(1934-1943 소련비밀경찰의 공식명칭)가 관여했고, 그 부장이었던 류슈코프가 스탈린의 비밀지령을 받고 지휘하였다는 사실 또한 밝혀진 사실이다.

   이러한 조치에 따라 어느 날 갑자기(그 기간에 대해서는 약간의 지역적 편차가 있음이 이주 1세대의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인들의 거주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한인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상호간 연락이나 이농이 일체 금지되었다. 갑작스런 이주 명령으로 인하여 필요한 생활 필수품이나 양식을 층분히 준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각 지역에 산거하고 있던 한인들의 중앙아시아로의 이주 시기는 달랐다. 대개 1937년 9월부터 1938년 봄까지 약 113만 명에 해당하는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이주 당했다 이주에 필요했던 수송차량은 대략 130개 열차,1,800량의 철도차량이 필요했으며, 중앙아시아 각 지역에 도착하는데는 1개윌에서 1개월 반이 걸렸다고 한다. 보통 2층의 층대로 나누어진 1와곤(화물수송차량)에는 3가구 정도가 탑승하였다고 한다. 그 환경의 열악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이주 1세대의 생생한 종언을 통해서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4. 중앙아시아 지역 고려인들의 생활상

 

   중앙아시아 지역은 고대로부터 동서문학의 교차점이 되어 왔으나 지난 70여년 동안 구소련의 공산체제하에서 우리에게는 사실 낯선 이름이 된 지역이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 등장 이후 개혁과 개방이 추진되면서 그 동안 소연방 내에 누적되어 왔던 민족·사회·경제·종교적 문제들이 폭발함에 따라 소연방 체재는 급속도로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1991년 12윌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실제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성취하는 동시에 동등한 독립국가의 자역으로 새로운 형태의 연합체에 가담하게 되었다. 중앙아시아 지역은 구소련내의 한인들이 약 68-70%가 집중되어 있는 곳으로, 특히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 전 한인들의 90%가 몰려있다.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은 거의 1937년 스탈린 정권에 의해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당한 사람들이거나 그 자손들이다. 물론 현 중앙아시아 지역의 답사 결과, 1937년 이전에 연해주 지역에서 이주한 고려인들이 소수나마 있었고, 해방 이후 사할린 지역에서 이주한 고려인들이 다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20만의 한인 동포들은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기반을 잡고 살다가 강제이주 계획에 따라 주로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에 정착하였으며 타지크와 키르키즈에도 일부가 이주하여 살아왔다.

   사실 1930년대 말의 중앙아시아는 자윈과 기술적인 기반이 없었기에 약 18만 명에 달하는 고려인 이주민들을 수용할 조건이 구비되어 있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7년 소비에트 정부는 카자흐 공화국과 우즈베크 공화국 인민회의에게 고려인 이주민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였다. 건축 자재의 부족과 일손의 부족, 재정적 뒷받침의 부족 등으로 말미암아 각 공화국의 공산당과 소비에트 국가기구는 고려인 이주민의 거주를 위한 요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였으며 이것은 소연방정부의 정책과 각 공화국과의 마찰을 일으킨 경우도 있었다.

   이주 정책의 특징은 분산성에 있었다 소연방인민위원회 내무부 검사국이 헹한 조사에 따르면 I937년 12월 1일 현재 카자흐 공화국에 1만8천85가구가 이주되었음이 확인되었으며, 그 중 7천2백5가구가 61곳의 새로 조직된 집단농장에 통합되었고, 1천3백31가구가 13곳의 어업집단농장에 통합되었으며, 4천18가구가 1백61곳의 당해지역 집단농장에 흡수되었고, 1천39가구는 가내공업협동조합에 통합되었다.

   이주 고려인들의 촌락들은 장래 훌륭한 관계시설이 가능한 시르다리야강, 아무다리야강, 일리강, 카다말가와강 그 의의 다른 강의 주류와 지류 지역에 건설되었고, 1937년에서 I938년 새로이 경작되는 지역에 조직된 고려인 꼴호즈들에 정부의 지원이 주어졌으며 이주 후 3년까지 조세가 면제되었다. 하지만 소련 정부의 지원이라는 것은 최소한도의 것이었고, 그 많은 이주자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환경변화에도 불구하고 중앙아시아의 사막과 반사막 그리고 초원지대에서 고려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새로운 농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고려인이 주축이 된 소포오즈와 꼴호즈들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주 고려인들의 피나는 노력은 이들 지역의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어 놓았고, 쌀 등 그 동안 재배되지 않았던 작물들이 산출되게 되었다.

   해외 한인 가운데서도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은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집단이고 또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살아오다가 현재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그 학문적 관심이 매우 높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는 한국의 기업 진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이어서 현실적 관심도 상당히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관심 외에도 실제 학문적인 관심에서 볼 때에도 이 지역의 고려인 사회는 매우 소중한 연구 대상이 된다. 이 지역이 구소련 체제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국가를 형성한 지 몇 년 안됐고 다양한 소수민족 집단이 공존하는 다민족 국가이며, 종교적인 구성도 매우 이질적인 면면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탈냉전시대 정체성의 변화와 그 의미롤 밝혀 내려는 노력이 좋은 사례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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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교육사

 

 

 

 

1. 1937년 이전 원동에서의 한국어 교육

   원동 한인 교육기관은 크게 러시아 정부 설립의 공립학교, 한인 민간 설립의 민족학교, 그리고 종교기관이 세운 미션계학교로 구분할 수 있는데, 당시 러시아 측의 교육을 통한 러시아화 정책은 한인 계몽운동가들의 민족교육 운동으로 크게 실패하였음을 다음 도표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17년 혁명 이전>

 

학교수

교사수

학생수

러시아 학교

44

88

2,599

민족 학교

182

2,517

5,750

 

   1917년 10월 혁명으로 사회주의적 교육 혁명이 진행되었는데 교육과 종교의 분리원칙, 교육과 정치의 결합원칙에 따라 청치 이념 교육이 진행되면서 소비에트 국민 교육체계가 초급 4년제, 중급 5년제의 9년제 학교로 개편되었다.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함에 있어 정치, 문화 사업이 국가경영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고 그 수단이 교육이 되면서 대부분의 한인학교가 국·공립화하였다. 볼세비키 정권에 의한 민족학교 정책은 소수 민족의 고유문화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목적의 '민족주의'가 아니라 소수민족의 전통적인 언어와 문화를 억제시키고, 그들의 전통적 교육 내용과 방법을 말살하여 러시아식 획일학교로 통합 전환하여 러시아 동화정책과 공산주의 교양교육 정책을 함께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연히 민족교육이 큰 타격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교육의 혜택을 입지 못한 소수민족 중 교육열이 강한 한인들은 처음부터 이 정책을 환영하여 학교 교육과 문맹퇴치에 적극 호응하게 된다. 이때에는 한인 지주계급과 부유층이 사라지고 한인 민족 교육 계몽층이 목소리를 죽인 후였기 때문에 교육내용에 이의를 제기할 세력이 없었다. 이 결과 민립 민족학교의 말살과 이데올로기 교육을 위한 국립화, 대형화 교육정책이 실시되고 있음을 아래 도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년도별

1922-23년

1924년

1925년

국립 학교수

44

86

154개교


즉 마을마다 있있던 한인의 민간학교는 전폐되었다. 이후 국가에서는 소비에트 정치교육을 위하여 한인 초·중등학교와 기술사범학교, 한인교원대학 등을 개설했는데, 이들 학교에서 모국어 사용이 허용되었지만 러시아어를 소련 전체의 공통어로 삼도록 강력히 권고되었고 한인 학생들은 러시아어의 우윌성을 인식하도록 순화되었다. 이와 같은 러시아와 교육정책의 결과는 r러시아어에 능숙하고 공산주의에 철저한 한인을 대량생산함과 동시에 r모국어와 모국문화를 잇는 한인을 양산시켜 나갔다.

   이에 대응하여 노령 한인들은 민족적 자각을 하게 되고 문화 민족의 명맥을 잇는 기운을 만들었다. 일례로,1919년 레닌의 문맹 퇴치령이 나온 후 한인들은 러시아어 문맹퇴치 교과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최초의 한글 문맹 퇴치 교과서를 사용하게 되었다.

   문맹퇴치 사업은 러시아어나 한글 중 택일하게 하였는데, 그 추진결과 문자해독률이 1930년 아시아로의 강제이동, 분산이주 조치로 인해 꽃이 피기도 전에 꺽이고 말았으며 한인전용학교도 1939년을 끝으로 폐쇄됨으로써 동족적 정체성도 망각한 불행한 혼성 소수종족으로서 역사의 주체에서 소멸되어갔다. 주) 정태수, 신세호 편저(1991) 전환기의 한국교육 p1915-1217

 

2. I937년 이후 중앙아시아 지역에서의 한국어 교육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말미암아 원동 조선 사범대학이 끄질오르다 市로 이주했으나 1년후 폐쇄되었고, 카자흐스탄 각지의 초·중·고교에서의 한국어 교육도 폐지되는 수난을 당하였다. 1940년대 후반 또는 스탈린 사망 이후인 1950년대 후반부터 지역에 따라 한인 밀집지역을 중심으로 한국어 교육이 특별활동의 형태나 또는 교육과정에 편입되는 경우가 있었다는 증언이 있으나 아직 확인된 바 없으며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는 생존의 긴박한 문제 앞에서 60여년간 모국어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2차 대전 이후 스탈린은 소수민족 언어를 대학에서 전공하는 과정을 개설하였지만, 조선어과에는 조선인의 입학이 금지되었고 타민족 학생만을 입학시켰다. 오늘날 [소련 한족]에서 모국어를 잘하고 쓰는 사람은 70세 이상의 고령자에 한정되고, 2·3세들은 모국어를 거의 잊어버린 상태다. 카자흐스탄과 기르기즈스탄의 경우, 전체 교사 중에서 한국어를 바르게 지도할 수 있는 능력있는 교사가 극소수뿐이며 대부분은 자모음, 기초단어 및 간단한 기초회화를 가르치는 정도의 보조교사 수준임을 다음 표에서 알 수 있다.

 

<현지 교사 현황>

 

동부권

북부권

서부권

남부권

비쉬켁권

교사수

106

20

0

39

29

194

지도가능 교사수

7

1

0

1

3

12

 

      원인으로 교사 양성 대책미흡, 교육원 양성자원 이탈, 모국수학기회 부족, 지역별 한국어 교육 소홀 등이 지적되고 있으나, 무엇보다도 이들이 반세기 이상 동안 모국어를 습득할 기회를 정치적으로 제한 받았고 가정에서조차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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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포 문화 단체의 한국어 보급 역할

 

 

 

 

1. 조선 극장

   카자흐스탄 국립 조선극장은 1932년 9월 노령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창립되었다. 1935년 연극 '춘향전'을, 1936년에는 '심청전'을 상연하는 등 구소련 땅 모든 동포들의 사랑과 믿음을 받았으며, 이국 타향에서 동포들의 가슴속에 조국의 한 구석으로 남게 되었다. 1937년 끄질오르다 市에 동포와 함께 강제 이주 당한 후에도 우리의 민족 고전들과 교포 생활상을 그린 현대극을 주로 상연하는 한편, 러시아 및 세계 고전 작품도 상연하였고 구 소련 전역을 대상으로 한 해에 5-6개월을 순회 공연함으로써 우리의 언어를 꾸준히 지켜온 세계 유일의 극단이다. 이들의 공연일지를 연대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30년대 

    1932. 9.9. 블라지워쓰토크 신한촌에서 창립
    1932 문세중 "불타는집"
    1933 연성용 "장경동의 횃불"
    1934 채영 "동해의기적", 태장춘 "밭지경"
    1935 이종림 "춘향전", 채영 "장한궁"
    1936 채영 "심청전", 연성용 "올림픽"
    1937 태장춘 "종들"
             카자흐스탄 크슬오르다로 강제 이주
    1938 태장춘 "헹복한사람들"
    1939 고리끼 "원수들"
     

1940년대 

    1940 고리끼 "예고르부뢰쵸브"
    1941 씨모노브 "로씨야사람들"
    1942 태장춘 "홍범도"
             우스또베로 이사
    1943 김기철 "홍길동"
    1944 씨모노브 "밤낮없이"
             채영 "옛 친구들"
    1945 태장춘 "생활은흐른다"
    1946 채영 "친선", 태장춘 "흥부전"
    1947 까따예브 "휴식일"
    1948 오쓰뜨롭쓰끼 "죄없는죄인들" 태장춘 "해방된 땅에서"
    1949 무스레뽀브 "코직고르뻬스와 바얀 스루"
     

1950년대 

    1950 태장춘 "삼팔선 이남에서", 오쓰뜨롭쓰끼 "뇌우"
    1951 연성용 "불타는 조선"
    1952 고골리 "검찰관", 헤찐 "씩모녀"
    1953 세익스피어 "오텔로"
    1954 쉴러 "간계와사랑"
    1955 채영 "돌이와순탄"
    1958 크즐오르다로 되돌아옴
             곽말약 "괄원", 짜오 유이 "태풍"
    1959 골도니 "두주인의 하인", 채영 "아리랑"
     

1960년대 

    1961 송영 "애국자"
    1962 맹동욱 "애랑", 김두칠 "논개"
    1963 쟈끼예브 "아버지의 운명"
    1964 채영 ''무지개''
    1965 한진 "의붓어머니"
    1966 맹동욱 "북쪽길", 채영 "금강산 팔선녀"
    1968 "아리랑"가무단 창단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아따로 이주
              국립극장으로 승격
    1969 채영 "천리길"
     

1970년대 

    1970 아우에조브 "카라고쯔"
    1971 김 이오씨프 "가정희극"
    1972 전동혁 "온달전"
    1973 김지마, 연성용 "아무르강의 새벽", 한진 "양반전"
    1974 연성용"자식들"
    1975 한진 "봉이 김선달"
    1976 맹동욱 "돌아오라, 내 사랑"
    1977 한진 "어머니의 머리는 왜 세였나"
    1979 한진 "산 두처"
     

1980년대 

    1981 김 쎄르게이 "앙심"
    1982 국립극장 50주년 기념 모스크바 공연
             마의극장에서 "명예" 훈장 수여
    1983 한진 "너 먹고, 나 먹고"
    1984 김아나똘리 "뻑꾹새의울음소리"
    1987 연성용 "지옥의 종소리"
    1988 전블라지미르 "강제이주열차-37"
    1989 "아리랑"가무단 한국 공연

   상기 공연일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극장은 지난 65년 동안 주립극장, 국립극장으로 발전해 오면서 약 200여 편의 회곡을 무대에 올렸다. 생활고나 과도기의 혼란을 극복해 오며 민족의 위대한 고전을 우리말로 상연함으로써, 동포들에게 정체성을 환기시키고 모국어 경칭의 기회를 제공한 국립 조선극장의 업적은 과소평가 될 수 없다.

 

2. 고려일보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1923년 3월 1일, 3·1항일 독립 운동 제 4주년에 제하여 선봉 신문사가 창설되었다.

   1934-1937년 시기, 즉 원동 한인 강제 이주 직전시기에 최호림 주필을 비롯한 편집 위원 전원이 체포되는 수난을 당하였고 농업부장 황동훈 씨 한 사람의 인솔로 1937년 끄즐오르다市로 이주하는 바람에 부득이 폐간될 수밖에 없었다. 1938련 봄 황동훈의 노력으로 재간행되는 듯 했으나 역시 채포되었고, 1938년 5월 당시 신문사 세포 위원장 염사일 씨에 의해 《례닌기치》란 새 이름으로 복간되었다.

   《레닌기치》 시대가 아마 재소한인신문 즉 고려일보지의 융성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재소한인 인텔리들이 모두 이 《레닌기치》 신문사에 뭉쳐 민족언어와 문화를 존속시켜왔기 때문이다. 따로 《레닌기치》 시기에 이론있는 고러인 작가들이 많이 나타났으며 그들은 모두 《레닌기치》지 문예페이지를 이용해 글쓰는 재주를 기를 수 있었고 독자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레닌기치》시기에는 당생활부, 보도부, 농업부, 공업부, 문화부, 문학예술부,편집부 등 신문사가 갖추고 있어야 할 부서들이 다 있었고 인재도 충분히 있었으며 1주일에 다섯 번, 약 2만부의 신문을 매번 찍어 구소련 전역에 배달했다.

    1973년도에 《레닌기치》신문사는 크즐오르다에서 알마타로 옮겨오게 된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과의 길이 열리게 되자 한국에서는 많은 기업체와 종교단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외국회사, 종교단체들은 신문사 윌급보다 몇 배 더 많은 윌급을 주게 되니 신문사 사원들이 모두 외국기관들로 나가버렸다. 결과 극심한 재정난에다가 인재난까지 겹치게 되어 주간 다섯번 발간회수룰 줄여 1주일에 3번 한글판을 보내고, 1부는 부록으로 노어판신문을 펴내게 되었다. 그러다 이런 힘도 모자라게 되자 1992년 후반기부터는 한글판 1부, 로어판 1부를 1주일에 한번씩 신문을 찍어내게 되었다.

   현재 《고려일보》사 정원수는 23명(4년전에는 65-70명)이며 발행부수는 약 4,500부이다. 따쉬껜트에만 지부를 두고 있다. 재소한인 사회에서의 모국어 소멸현상은 한국어의 수요처가 개발되어 있지 않음에도 기인한다. 그들 사이에서 언어의 동화 상태가 급속히 이루어져서 한국어만으로는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안정된 직장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고려일보}는 모국어, 모국문화를 유지, 보급해 나가는 역할을 담당해 내고 있다. 조악한 활자, 북한식 어휘와 표기법, 허술한 문체 둥이 보완되어야 할 사항으로 지적되고 있으나 한민족의 동질감을 형성하는 매체가 되기도 한다.

 

3. 고려말 방송

 

   1930년대 조선극장, 선봉신문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개국하여 1937년 강제이주 이후 거의 방송을 중단하였다가 1984년 5윌 16일 수도 알마아타에서 다시 개국을 하였다.
고려말 방송국에서의 우리말 방송은 라디오에서 주 4회에 걸쳐 각각 20분간 송신하며, TV에서는 한 주에 한번씩 30분간 방영한다 동포가 속한 사회의 소식과 고국소식을 주 내용으로 하며, 기관 단위의 행사나 공연, 그리고 한국전통 가요나 고국의 유헹가도 시청할 수 있다. 고려말 방송은 조선극장, 고려일보와 더불어 이곳 고려인들의 문화유산의 일부이며 민족의 문화계몽의 사명과 역할을 다하고 있다. 모국어롤 완전히 상실하고 민족의 고유음악이나 모국어를 배우는 시간 및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던 이곳 동포들에게 우리말 방송은 이러한 정보를 제공하였고, 민족문화를 접할 수 있는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중앙아시아에서의 한국어 교육은 크게 두 가지 자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민간차원의 것으로 주로 종교인들이 선교를 위한 방편으로 한글학교를 열어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카자흐스탄과 끼르끼즈스탄에서도 여러 교단 선교사들이 한국어 보급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한국 정부 차원의 것으로 알마따 한국교육원이 한국어 교육 분야를 지원, 관리한다. 교사의 수요는 증가되고 있으나 일정한 자격과 자질을 갖춘 교사확보가 어려운 실정이다. 그렇다고 현지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한 졸업생 중 곧바로 교육현장에 투입될 만한 재원도 드물다. 선교사들도 한국어 교육에 있어서 나름대로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 조선극장, 고려일보, 고려말 방송 등의 동포 문화단체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한국어 보급자원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들 단체에 대해서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해 나가는 것도 한국어의 효용가치를 높이는 방법이다. 자질있는 교사확보와 아울러 다방면의 한국어 화자 수요처가 개발된다면 한국학 연구 수준까지 한국어 교육이 발전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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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이후의 한국어교육현황

 

 

 

 

 

 

 

1. 알마아타 한국 교육원의 설립과 한국어 교육

 

   1991년 8월 22일 한국정부는 CIS지역 최초로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아타에 한국교육원을 설립하였는데 그 운영목표는, 1) 반세기 이상 주국을 등지고 살아온 현지 동포들에게 잊어버린 우리의 말과 글을 가르쳐 줌으로써 민족 상호간의 불편한 의사소통을 원할하게 한다.
2)우리의 말과 글을 통하여 조국의 역사와 문화를 바르게 인식하게 함으로써 민족 공통체 의식을 배양하고,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기른다. 3) 모국어를 잘 구사하게 함으로써 동포들이 한국, 카자흐스탄 양국간의 유대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하고 재외국민으로서 보람된 삶을 영위하도록 해주는데 있다. 한국의 39배에 가까운 광대한 중앙아시아 지역에 걸쳐 널리 분산되어 있는 동포들에게 한국어교육을 실시하는 데에는 시간적·공간적 어려움이 따르지만 알마아타 한국교육원 설립이후 알마아타는 물론 동포 밀집지역에 한글학교를 계속적으로 설치 운영해오고 있으며 그 증가 추세는 다음 도표와 같다.

 

 <연도별 한글학교 및 학생수 증가 추세>

 

'91-'92

'93-'94

'95

'96

'97

한글 학교수

17

20

57

110

138

교원수

32

38

91

182

199

학생수

1,256

1,444

3,210

4,760

5,535


    그러나 학생수의 양적 팽창에 대응할 수 있는 지도교사의 부족현상이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다. 또한 한글학교 교원 수준 역시 겨우 한글을 해독하고 기초단어를 지도할 정도여서 그들에 대한 연수 기회가 절실하다. 매년 1주일의 교사연수와 2주의 모국 연수 기회가 주어지지만 이 정도의 연수로서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불가능하다. 최소한 6개월-1년 정도의 장기 연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특히 카자흐스탄, 끼리끼즈스탄의 경우 사할린, 블라디보스톡, 우즈베키스탄과 또 경우가 다르다. 사할린과 블라디보스톸의 경우 40-50대 이상은 대부분 한국어 구사능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교사확보의 어려움이 따르지 않는다.

    우즈베끼스탄 역시 타쉬켄트지역 주변에 대부분의 동포들이 밀집해 사는데다가 최근까지 꼴호즈 중심으로 한국어가 보존되어 왔기 때문에 카자흐스탄에 비해 상대적 이익을 받고 있는 셈이다. 즉 카자흐스탄과 끼르끼즈스탄의 경우가 가장 교사확보에 애로를 느낀다. 따라서 이 문제 해결의 열쇠는 교사 양성제도와 교원 연수제도의 개선에 달려있다.

 

2. 교사 양성 기관인 각 대학 한국어과 현황

 

   아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4개의 4년제 대학 한국어과, 10여개의 부전공 한국어학과가 이 지역에 개설되어 있다. 학생수도 학년당 10명 내외로 한국어를 전공·부전공으로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현지 학생이 약 400명에 이른다. 이미 졸업생을 배출하는 대학도 있어서 상당수 학생이 한국계 회사나 양국 협력 관련단체나 기관에 취업하고 있고 일부는 한국 유학의 혜택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정작 한글을 가르치는 한글학교에 배치되는 경우가 드물어 역시 교사 확보에 애로를 느낀다. 한국어과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대학 한국어과 교육과정의 정비, 교수 요원의 파견, 교재개발 또는 한국어 학당 교재 보급, 시청각 기자재의 확보 및 장학 혜택 등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

 <각 대학 한국어과 현황>

지역

대학

지도교수

학생수

총장, 학장

1년

2년

3년

4년

5년

알마아타

까즈구대
(470597) 

백태현
장원창
김필영
김올가 

10

9

10

 

 

29

나리바예브
(422517)
꾸미스바예브
(472992) 

알마아타대
(618173) 

정추
김영락
김준법
김상욱 

12

12

23

23

 

70

싸뜨꼬브똑
(616359)
오브쓰바예바
(618382) 

아바이대
국제학과 

김병학
이나타샤
김올렉 

20

15

12

 

 

47

 

외국어대
(670385) 

김유식
김계원
문희권 

 

 

10

23

12

45

 

경제대

명 드미뜨리

 

 

5

 

 

5

 

끄즐오르다
(32422) 

사범대
(77795) 

전종환
서가이
김 엘리아나 

15

15

 

 

 

30

도스만베또브
(77795)
까리예베까
(74775) 

우스찌까메
노고르스크
(3232) 

동카자흐스탄대
(436561) 

천강우
관석욱 

 

 

24

15

8

47

 

꾸스따니이

꾸스따니이대

박종천
김상철 

11

7

 

 

 

18

 

키르키스
공화국
비수케크
(3312) 

인문과학대
(484154) 

최여옥
조 나타샤
박미진
허마가리따 

28

15

12

6

3

64

뷸쥬로바이스
(484035)
마쉬라뽀프
(464685) 

슐라비안스키대

최여옥

7

4

1

 

 

12

 

키르기스 국립대

위 네라

5

 

 

 

 

5

 

키르키크젤대

허 리타
박미진 

 

 

 

6

 

6

 

임마누엘대

김상민

24

16

17

 

 

57

 

 

 

132

93

114

73

23

435

 


3,. 교원 연수 현황

 

   교사의 자질 향상을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교원연수가 활성화되어야 하나 교육원 주관 교원 연수 프로그램도 예산상 년1회-2회, 기간도 1주일-10일 정도로 운영된다. 최소한 2-3개월의 집중 연수가 필요하다. 더구나 이 지역 교원의 한국어 수준이 타지역에 비해 훨씬 낮기 때문에 더더욱 장기 연수의 필요성이 요구된다. 모국 수학의 경우도 대부분 2주 과정으로 비싼 항공료 부담에 비해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대부분의 한글학교 교사가 35세 이상으로 3개월 단기 과정의 모국 연수에도 참여할 수 없는 불이익을 당한다. 물론 젊고 참신한 교사 후보생이 장기 모국 수학 과정을 수료하고 한글학교에서 근무할 수 있다면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개인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모국 연수 기회를 제공했다고 해서 교육원이 제재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앞으로 고령자를 제외한 연령 차별화 제도의 지양, 연수기회 확대 및 연수 기간의 연장 등 교윈 연수제도의 획기적인 변화와 개선을 기대한다.

 

4. 종교단체의 한국어 교육 현황

 

   각 종교 단체는 자체적으로 한글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통역요원의 양성, 경전교육 및 선교활동 등 모든 종교활동에 한국어가 매개 수단이 되어 있어서 대부분 양질의 한국어 교육 및 연수의 장으로 널리 활용된다.

결국 종교단체는 직·간접적으로 한국어 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다

 

<종교 단체 현황>

 

개신교

불교

원불교

천주교

알마아타

21

 

1

2

비쉬케크

10

1

 

 

기타

20

 

 

 


   앞으로도 각 종교단체가 한국어 교육 분야에 보다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운영 방안을 모색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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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교육의 문제점과 개선방안

 

 

 

 

   양질의 교사 양성이 이 지역 한국어 교육의 핵심 문제로서 대학교 한국어과 교육의 정상화·활성화가 이 문제의 해결방안이다. 아울러 대학교육과는 별도로 초·중·고교 병설 한글학교 과정도 정상화·활성화되어야 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 지역 한국어 교육의 문제점으로,
1) 대학·한국어과 교육의 비정상적 운영 상황
2) 각 지역 한글학교 교육의 부실한 실태를 제기하고 그 개선안을 '97. 2.10 알마아타 한국교육원 주관으로 실시한 제1회 한국어 교육문제 세미나의 종합 의견서로 제시하고자 한다.

 교육 문제 세미나 종합 의견서 (1997. 2. 10)

한국어교육의 문제점

개        선        안

 

대학 한국어과
교육의
비대정상적
운영상황 

1. 교육과정의 정비 또는 개정
대부분의 대학교 한국어과 교육과정이 러시아어과 교육과정에 준해서 제정되었기 때문에 한국어과에 합당한 교육과정으로의 정비 또는 개정이 필요함(한국어 교육 문제 쎄미나에서 보고된 교육과정안 참조-별첨)
2. 교수요원의 확보
현재 각 대학 한국어과 교수요원 중 한국어 전공자가 극소수에 불과하며 교수방법이나 한국어에 관한 전문적 지식이 부족하므로 KOlCA요원 한국어 교사파견시 한국어 전공자 우선 선발 방안 건의 중.
또한 우수 한국어과 졸업생의 한국 유학 추천
3. 교수 자체 연수
해외에서 자칫 나태해지기 쉬운 교수 활동에 새로운 이론이나 지식을 접할 수 있는 기회 제공(년 1-2회)
4. 교과서 확보
현지에서 개발된 교과서나 교재가 전부하고 한국에서 구입할 수도 없는 형편이어서 교육원 차원에서 한국어과 교재 전량을 공급할 예정임
5. 취업기회 확대
우수한 졸업생의 한국계 기업체에 우선 추천 방법으로 인재 양성 추천 일원화로 교육원 기능 다양화 - 교육 효과 제고
6. 모국 수학 기회 확대 및 기간 연장
우수 자원 모국 수학 기회 제공 및 최소한 3개윌 이상 연수과정 추천
7.학생 자신의 연구자세 확립
대학교 뿐 아나라 교육원 등 한국어 관련 연구 기관에서의 추가 교육 수용

 

각 지역
한글학교
교육 부실 

1. 교과서 개발 제작 보급
현지 실정에 맞는 교재 개발 보급 (기초과정)
2. 교사 요원 확보
대학 한국어과 재학생 및 졸업생 확보.
현지교사 장기간 연수 후 활용.
3. 교사 격려
수당 지원 등 유인 체제 및 한국어 교사로서의 자긍심 고취.
기타 모국 수학
4. 시청각 기자재 공급
다양하고 다각적인 교육 운영 체제 구상
한국의 경제 사회 문화 관련 시청각 자재 보급
시청각 기재 공급으로 수업의 질 향상, 학습 홍미 유도
5. 각종 예능 기능 교실의 한국어 병행 교육
한국과 관런된 예능교실, 컴퓨터 등 기능 교실 참가 학생에 대한 기초 회화과정 지도 - 한국어에 대한 관심 제고
6. 특별교육, 한자교육
조선극장, 고려일보, 방송국, 대학교수 등 교육 문화 단체 요원 교육(전문성 제고)
7. 각 기관별 자체 교육 및 교사 개인별 자체 연수
각 기관별 자체교육 프로그램 개발 협조
기관 내 직원 상호간의 의사소통을 위한 지속적 자체 교육 실시 및 개인별 자체 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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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두만강을 사랑하는 사람들
글쓴이 : unidu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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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 동아일보 & donga.com

"두만강 하구의 러시아령 녹둔도는 한국땅" 구한말 한국영토로 한국사람이 살고있던 두만강 하구 녹둔도를 소련이 빼앗아 자기 영토화했음이 3일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구한말 한국과「러시아」중국 3국간의 국경관계를 표시한 아국여지도가 이날 창경원에 장서각에서 일본 동경대에서 국제관계를 전공하는 박태근씨에 의해 발견됨으로써 밝혀졌다. 이 지도는 가로30cm 세로42cm이며 열한첩의 양지에 청적흑황 4색으로 채색됐는데 한국인이 연해주관계를 그린 최초의 고지도이다.

이미지 : 동아일보 & donga.com

지도내용은 녹둔도에서 사말리 등 연해주 29개 지역의 국경 및 국방관계상황 과 교포거주 상황을 상세히 기록했다. 제작자는 김원훈 신선도씨로 1887년(1883년)고종15-20년으로 추정되고있다. 제작자는 16년동안 연해주에 잠입하여 교민상황 및 병참기지상황을 돌아보고 고종에게 현지답사기와 더불어 지도를 그려 바쳤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녹둔도는 1860년 천진조약으로 억울하게 빼앗긴 땅인데 너비는 남북으로 28km 동서로 12km이며 한국인 1백13가구(8백22명)가 살고있었다. 서지학자 백린씨(서울도서관열람과장)는 「가장 획기적인 지도의 발견이다. 흥분할만한 가치가있다」고 말하고 서울대강사 유영박씨는 「한말국경분쟁 관계의 지도와 지지에 관한 연구로 획기적 자료가 될 수 있다」고 했다.
72. 2. 4. 경향
독 도 본 부
www.dokdocenter.org
출처 : 독도 문지기
글쓴이 : 독도를 찾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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