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해주 한인 사회의 형성
두만강 하류를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접경해 있는 연해주 지역은 한국 근대사의 전개과정에서 한국 독립운동, 민족운동의 중요 무대로 확대된 지역이다. 연해주 지역의 면적은 한반도보다 약간 적은 20만 7천km이고, 특히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의 유역은 비교적 넓은 평원을 이루고 한카호 같은 수원이 좋은 호수가 있어 농업개척에 필요한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연해주 일대가 러시아 영토로 편입될 때까지는 인구가 거의 1만 2천여 명에 불과한 거의 무인지경의 미개척지였다. 이같은 지역적 특성으로 인하여 조선 후기에 한인들이 산발적으로 연해주 지역에 이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조선 후기의 사회적 모순이 가중되는 시대적 상황하에서 한인의 이주현상은 더욱 표면화되었다. 즉 봉건적인 지배하에 있던 영세 농민을 주축으로 하는 민중은 자율적으로 민족사의 새 진로를 찾으려는 강한 움직임을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황무지를 '신천지'로 삼아 생활 토대를 마련하고 나아가 조국독립운동의 전진기지로 삼으려 하였다. 이 지역은 본래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면 上古 이래 고구려와 발해로 내려오면서 민족의 활동무대였고, 고대문화를 형성하던 우리 민족의 故地였다.
한인이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그 연원이 오래다. 1863년에 13가구가 두만강을 건너 地新城에 처음으로 정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지만 자연발생적인 한인의 연해주 이주의 역사를 고려한다면 그 시기는 훨씬 앞선다고 볼 수 있다. 현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I811년경 두만강 건너에 박석골. 감자골이라는 한인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연해주 이주 한인의 수를 정확히 계산하기란 여러 가지 일로 해서 매우 곤란하다. 아무튼 초기 이주가 시작된 이래 매년 증가 추세를 보여 1882년경까지 연해주 인구구성의 수위를 차지할 만큼 급증하였다. 한인의 연해주 이민은 1904-1905년의 러일전쟁 이후부터 큰 변화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더욱 급증하였다. 이러한 추세 하에 1900년을 넘으면서 10만에 가까웠고, 1910년경에는 10만을 훨씬 넘었으며 1919년 3·1 운동 때에는 30만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처럼 한인 이주가 급증하면서 두만강 대안의 접경지 일대는 한인의 왕래가 끊이질 않아 국경의 의미가 사실상 없어졌고, 나아가 지역에 따라서는 한인 숫자가 그 지역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으며 한국식 촌락 이름이 많이 등장하였다.
2. 연해주 한인사회의 세력화 과정
연해주 한인사회의 존재형태와 관련하여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측면이 있다. 첫째는 이주한인들이 연해주 개척에 큰 기여를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인들이 삶의 공간을 확보하고, 나아가 민족적 공간을 확보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주 초기부터 1937년 스탈린 정권에 의해서 강제이주 될 때까지 연속성을 가지는 문제이기도 하다. 둘째, 연해주 한인 사회는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의 을사조약 및 1910년 국치 전후로부더 조국독립운동의 해외 중요기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부터는 국내에서 수많은 의병과 민족운동자가 망명하여 한인사회가 더욱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1860년대에 한인사회가 성립된 이래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연해주에서 일어난 항일 민족운동은 l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한국독립운동의 주류를 이를 만큼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10년의 13도 의군이나 성명회의 활동,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의 결성이 말하듯이 1910년을 전후한 시기에 해외 독립운동의 총본산으로의 역할을 충분히 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하여 한인사회도 변동을 겪지 않울 수 없었다. 러시아에서 짜르정권은 타도되고 각지에서 노동자·농민·병사의 대표기구인 소비에트가 수립되었다. 한인의 대부분이 거주하고 있던 연해주에도 짜르체제는 급속히 붕괴되었다. 2월 혁명직후 러시아 연해주 극동지역 전체 한인의 수는 약 22만5천 명이었으며 그 중에서 19만 명은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였고 나머지는 아무르강 유역의 다른 지역에 살고 있었다.
이 당시 연해주 한인사회는 각기 그들이 처해 있는 사회·경제적 위치에 따라서 서로간의 갈등이 표출되기도 하였지만, 짜르체제가 붕괴되어 구심력이 약해지고 있는 상황을 틈타 한인들도 점차 세력화하기 시작하였다. 지방차원의 조직이 활성화되는 가운데 전로한족중앙총회, 한인사회당 등의 단체가 결성되었다. 이런 가운데 1918년 4월에 일본군이 불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하였고 연해주 한인사회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볼세비키쪽에 가담하고 있던 한인들은 일찍부터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여 일본군과 대항하였다. 한인 무장부대의 항일투쟁은 하바로브스크와 그 이서 지역, 추풍·포시에트 지역, 수찬·을긴 지역 등에서 활발하게 펼쳐 나갔다. 나아가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은 임시정부 결성에도 참여하여 독립을 도모하거나 무장부대를 결성하여 일본군과 맞섰을 뿐만 아니라 직접 국내에 들어가 일제 요인이나 기관을 암살·파괴하는 의열투쟁도 전개하였다. 한편 그 투쟁 과정에서 독립군이 분열되거나 고려 공산단이 두 개로 분일되는 등의 불변화음 및 자유시 참변과 같은 사태가 생겨나기도 하였지만 한인 무장부대의 역량은 당시에 크게 인정받고 있었다. 특히 한인 무장부대는 연해주의 內戰(192111- 192210)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일본군이 1922년 10윌에 모두 철수할 때까지 그 맹위를 떨쳤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소비에트 정권의 대내적인 문제와 철병해가던 일본측의 책동으로 인하여 한인 부대는 무장해제 당하고 만다. 빨치산 부대만이 아니라 정규군의 경우에도 같은 운명에 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在露 한인 부대의 항일투쟁은 4년만에 막을 내린 셈이다.
일본군이 모두 철수하고 연해주가 볼세비키에 의해 평정됨으로써 한인사회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내전기간 한인의 인구 추이를 보면 I917-1923년 사이에 연해주 지역 한인인구는 25%나 증가하였다. 내전 종결후 볼세비키 체제하에서도 한인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당시 러시아 당국의 대한인 정책이 관대했던 데에도 그 원인이 있다. 극동 러시아의 산업은 농업·임업·광업·어업 등이 중요하나 한인들이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였다 만주와 마찬가지로 논농사는 한인들이 개척하였다. 노동자 중에는 자유노동자의 비율이 높았다. 자유노동자로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부두 노동자가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다음으로는 흑룡주 금광 노동자가 많았다. 연해주 한인 노동자들은 제각기 자기의 직업에 따라서 직업조합에 참여하였다.
종전 직후 볼세비키 체제가 안정되어 감에 따라 한인사회도 자율적으로 또는 타율적으로 러시아화 해갈 수밖에 없었다. 특히 볼세비키 체제를 공고히 하고 국가적 이익을 극대화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히 표출되던 시대적 상황하에서 우리의 독자적인 문화와 가치관을 강화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한인들이 가장 손쉽고 그러나 꼭 필요한 자제는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사업이었다. 한인 민족지도자들은 자라나는 세대에게 한글과 민족역사와 일제의 침략상을 가르치고 조국해방의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일에 큰 힘을 쏟았던 것이다. 그 결과 각 지역에 많은 한인 학교가 설립되었다. 교육의 장은 반드시 학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각종 출판물도 그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였다. 한글신문인 『선봉』은 소련 내 한인들의 사정과 그들이 부닥친 어려움을 보도하여 한인사회 단결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일제의 압제에 시달리는 조국동포들의 근황과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선열들의 소식을 알려줌으로 해서 연해주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물론 교육의 내용은 소비에트 체제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었으므로 사회주의 사상과 사회주의적 방법이 동윈되었지만 조국의 역사와 문화유산, 언어를 가르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같은 노력의 결실은 한인 자치주 건설운동으로 표면화되었다. 연해주 한인사회의 최대 과제는 삶의 터전을 확보해 가는 것은 물론, 독자적인 민족적 공간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곧 민족자결을 천명하고 있던 볼세비키와 연대하여 러시아 내에서 자치권을 획득하고 교육과 산업의 부흥 및 군대의 양성에 주력하여 민족독립운동을 수행할 수 있다는 방침이었다. 신민회는 일찍이 해외에서 농토 확보와 군대양성을 꾀해 왔었다. 그 이후 한인사회당은 하바로브스크 서쪽 비로비잔 초원에 한인 자치주건설 시도한 바 있다. 그러나 1918년 볼세비키 극동정부의 붕괴와 사회당원들의 분산으로 무산되었다. 이와 같은 한인 자치주건설 문제를 볼세비키가 인정하려 했는지는 상당히 의문스럽다. 이런 가운데 1928년 유태인 거주지가 비로비잔지역에 확정되었다. 여기에 자극받은 한인들은 I928년 고려공화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재러시아 고려공산당, 만주의 신민부·정의부·참의부 및 국내의 각 사상단체 대표 70-80명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모여 이 문제를 심의하였다. 이것을 토대로 전로중앙집행위원회에 극동조선공화국의 수립을 위한 탄원서를 제출하였으나 기각당하고 말았다.
3. 고려인 중앙아시아 이주의 역사적 실상
1) 이주의 역사적 배경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이주의 역사적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정치적 배경과 사회·경제적 배경으로 그 실상을 파악해 볼 수 있다.
첫째, 그 정치적 배경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구소련의 통치이념과 소수민족 정책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제정러시아는 역사적 배경을 달리하는 I20여 개의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나라였다. 그러나 국가 운영에 있어서 다민족직 성격을 반영할 만큼 민주적인 국가는 아니었다. 러시아 내의 많은 민족을 어떻게 통치해 나가는가 하는 것은 큰 문제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다양한 민족의 통치를 위하여 제국적 통일이 무엇보다도 우선시되었고, 폭력과 회유를 동반한 러시아화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민족문제는 10윌 혁명 직후의 볼세비키 정권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볼세비키 정권의 당면 과제는 우선 강력한 소비에트 국가롤 건설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권력 기반을 굳히기 위한 일련의 정책과 조처(전체주의적 독재로의 출발)들이 단행되었다. 그들은 현실적인 사안들을 부르주아적인 것과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으로 구분하고, 기타의 요소들은 모두가 이 두 가지 요소로 환원된다고 생각하는 한편, 인종과 민족을 초월한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 표방하며 그들의 국가적 이익을 관철시켜가고 있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술책이 레닌에 의해 표방된 민족자결권 문제였다. 민족자결권은 1903년 이래 볼세비키당의 당강령으로 규정되었고, 레닌에 의해 줄곧 옹호되어 오던 개념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구체적 현실에서 많은 문제 야기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레닌사상의 시발점은 반봉건, 반제국주의의 미숙한 산업발전의 상태인 러시아의 낙후성을 극복하고 어떻게 하면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선진국가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와 결부된 레닌사상의 특징은 大러시아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 사회주의 방도를 선택하였고, 자본주의 발전 단계를 거치지 않고 그것을 뛰어 넘어 선진국가 수준에 도달한다는 近代化의 전략사상으로 집약되었다. 그런 까닭에 레닌의 혁명사상은 도전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고, 자본주의적인 민주정부는 당연히 타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민족적인 제 요소는 부르조아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의 레닌의 통치이념은 기본적으로 중앙집권적 大국가주의를 건설하는 데에 있었다. 즉 근본적으로 민족별 小國化를 반대하고 중앙집권적 대국주의를 견지하였다. 민족으로의 형식은 유지하되 내용은 사회주의적으로 동질화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소수민족들의 민족자결권을 인정하고 소비에트가 다민족국가로 조화롭게 발전할 것을 강조하는 레닌의 정책은 일면 합리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라는 이념만으로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민중들을 혁명대열에 동참하게 한다는 것은 많은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혁명을 위해서 당시의 민족적 현실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즉 소수민족의 '민족자결권'이라는 사실을 순용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레닌은 러시아의 소수민족들을 혁명대열로 유인하였다. 아무튼 이 과정을 통해 결집된 각 소수민족의 역량은 2월 혁명 이후 새로운 민족문제로 분출되었던 것이다. 소수민족들은 모두 민족자결권에 입각한 민족들의 독립, 혹은 자립 등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레닌은 어떤 다른 경우에는 제국주의에 대한 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해서 소수민족들의 자결권 요구가 제약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등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것이 사실이고, 그 대표적인 예는 우크라이나의 경우에서 살필 수 있다. 1917년 11윌 20일 우크라이나는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과 동등하고 자유로운 원칙하에서 연방을 지향한다고 선언하였다. 1918년 1월 22일에는 자신들의 완전한 독립을 선언한 바 있다. 그러나 레닌 정권은 1919년 2윌 13일, 이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1919년 3윌 10일에는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예속되었다. 볼세비키 정권은 그 초기부터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철저하게 유린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민족정책의 眞儀는 러시아의 각 민속국가 내에서 계파투쟁을 일으켜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으로 변혁시키는데에 있을 따름이었다. 이렇게 하여 형성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대러시아 민족주의의 결정체라고 하겠다. 이같은 기본적 틀 위에서 전개된 스탈린의 민족정책은 더욱 강압적이고 급진적인 민족정책의 단행으로 나타났다. 스탈린은 소련의 통치이념을 '마르크스 레닌주의'로 정의하였지만, 그의 관심은 레닌주의적 장치의 실질적인 이용에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혁명과정에서 잔존한 민족주의적 요소를 일거에 제거하였는데 소비에트 중앙정권의 회일적인 통제, 민족분산정책의 강행(소수민족의 강제적 대량이주) 등이 그것이다.
둘째, 사회·경제적 배경은 한인들의 토지문제와 농업집단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제문제를 통해 살필 수 있다. 볼세비키 정권은 1918년 7윌 제56차 전소비에트 대회에서 "피착취 노동자의 제종의 권리"를 발표하여 사유재산제도 등을 폐지하고, 구소유자의 토지를 국유(무보수)로 하여 이를 농민에게 분배할 것 등의 원칙을 밝힌 바 있으나 그 원칙이 잘 지켜지지는 않았었다. 한편 1921년 내전 승리 이후 새로운 경제정책의 필요성의 의해 신경제정책(NEP)이 도입되어 일부 자본주의 경제원칙이 허용되었다. 어느 정도의 사유재산이 허용되고, 개인기업이나 상거래도 허용되었다. 그리하여 전시공산주의 경제정책하의 곡물의 몰수는 폐지되고 대신 일정한 조세를 징수하였다. 한편 1923년부터 토지이용 합리화는 변방의 당 및 소비에트 기관들의 1차적 과제로 대두되었다. 여기에 한인의 토지문제 또한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한인의 80% 이상이 일용 농부와 소작인이었고, 무토지 한인 농가는 대부분 단순 재생산도 확보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래서 상당수의 농가는 고리대금업자의 신용대부에 의존하는 편이었다. 이같은 토지문제의 긴박성은 한인의 대규모 이주로 더욱 심각하게 되었다. 1919년에서 1923년까지 연해주 지역으로 약 10,000명의 몰락 농민이 이주하였다. 이에 I923년 8월에 극동혁명위원회는 한인에 대한 토지 분배 규정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극동의 모든 한인에게 러시아인과 카작인이 소유한 과대한 분할지를 분배한다. 토지를 분배받은 한인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지 못한다. 오래 전에 변방으로 이주했던 한인에게 하바로브스크와 아무르관구의 토지를 나누어준다. 차후 이주자는 북부 변방지방의 토지 마련에 따른다."고 하였다. 이 때 한인에게 분배된 토지는 대체로 부농의 몰수 토지이거나, 미개척지로서 농지로 개간할 땅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홍수 등으로 경작 면적이 점차 줄어들었고 한인 중에서도 비귀화민들은 고율의 소작료에 힘든 생활을 영위해야만 했다.
한인들의 절대적인 토지 부족 현상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인들은 각종 집회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토지 소유의 확대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곧 러시아 당국이 토지개혁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지 않았던 데에 기인한다. 이와 더불어 더욱 문제시되었던 것은 토지를 둘러 싼 한인 사회 내부의 갈등이었다. 볼세비키 통치하에서도 비귀화인은 토지 할당에서 제외되었으니 토지를 받은 원호농민과 소작 누호농민, 원호인들과 고용노동자들 간의 모순과 갈등은 계속 깊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단행된 정책이 전면적인 농업집단화의 시행이었다. 1927년 12월 공산당대회에서 신경제정책OlEP)은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사회주의 공세'가 1928년에 개시될 것을 선언하였다. 이에 가장 큰 변화른 가져온 지역은 역시 농촌이었다. 농업집단화는 1929년 말부터 급속히 전개되었고, 1934년 말경에는 극동지방 한인들의 집단농장화 조치도 일단락을 맺게 된다. 이와 같은 급속하고 무계획적인 농업집단화의 추진에는 많은 문제점이 뒤따랐다. 농업 집단경영에 대한 토지 및 생산 시설의 미비, 생산도구 등의 부족 현상이 초래되었다. 특히 전면적 농업집단화 운동은 농민 내부의 광범위한 계급투쟁이 수반되었다. 이 운동은 부농과의 격렬한 계급투쟁 속에서 진행(반부농화운동에 대한 도망·처형·추방 및 在定住)되었고, 이것은 곧 초기의 방대한 징역노동군을 공급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런 문제는 연해주 한인 사회에서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한인사회 내부의 갈등은 그 동안의 뿌리 깊온 파벌 투쟁과 동시에 전개되었다. 1929년 쿨락(부농) 청산 당시 한인 부농들의 토지와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다. 이와 동시에 많은 한인 콜호즈가 조직되었고, 여기에는 비귀화 한인도 물론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에게는 토지와 시민권을 얻을 지름길이 될 수 있있던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한인들 가운데에도 전면적인 농업집단화 운동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연해주 지역에 이주해 있던 한인 농민들의 전통적인 땅에 대한 애착심과 소련 당국의 정책에 동의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사상적 이해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추진되었기 때문에 한인 농민들의 저항은 더욱 컸던 것이고, 이 지역에서의 농업 집단화 실제 효과는 원래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치게 되었다. 이런 문제와 1937년의 고려인 중앙아시아 집단이주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깊이 연구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된다. 사실상 구소련의 농촌사회의 중심을 이루던 '집단농장'은 사회주의 체제의 축도였다. 그러나 당시 농업집단화가 가져온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농업산출량의 저하로 이어진다. 이것은 또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그것이 갖는 관료제적이고 비효율적인 모순을 심도 있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2) 집단이주의 일반적 상황
1937년 8윌 후반기부터 연해주지방 전역에는 놀랄만한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이 지역의 모든 한인들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주 당한다는 강제명령이 모스크바로부터 하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같은 조치는 후일 사실로 판명되었듯이 소련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 의장 몰로도프와 볼세비키 전소련공산당위원회 서기 스탈린에 의해서 내려졌던 것이다. 그리고 소련 내무인민위원회(1934-1943 소련비밀경찰의 공식명칭)가 관여했고, 그 부장이었던 류슈코프가 스탈린의 비밀지령을 받고 지휘하였다는 사실 또한 밝혀진 사실이다.
이러한 조치에 따라 어느 날 갑자기(그 기간에 대해서는 약간의 지역적 편차가 있음이 이주 1세대의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인들의 거주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한인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상호간 연락이나 이농이 일체 금지되었다. 갑작스런 이주 명령으로 인하여 필요한 생활 필수품이나 양식을 층분히 준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각 지역에 산거하고 있던 한인들의 중앙아시아로의 이주 시기는 달랐다. 대개 1937년 9월부터 1938년 봄까지 약 113만 명에 해당하는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이주 당했다 이주에 필요했던 수송차량은 대략 130개 열차,1,800량의 철도차량이 필요했으며, 중앙아시아 각 지역에 도착하는데는 1개윌에서 1개월 반이 걸렸다고 한다. 보통 2층의 층대로 나누어진 1와곤(화물수송차량)에는 3가구 정도가 탑승하였다고 한다. 그 환경의 열악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이주 1세대의 생생한 종언을 통해서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4. 중앙아시아 지역 고려인들의 생활상
중앙아시아 지역은 고대로부터 동서문학의 교차점이 되어 왔으나 지난 70여년 동안 구소련의 공산체제하에서 우리에게는 사실 낯선 이름이 된 지역이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 등장 이후 개혁과 개방이 추진되면서 그 동안 소연방 내에 누적되어 왔던 민족·사회·경제·종교적 문제들이 폭발함에 따라 소연방 체재는 급속도로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1991년 12윌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실제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성취하는 동시에 동등한 독립국가의 자역으로 새로운 형태의 연합체에 가담하게 되었다. 중앙아시아 지역은 구소련내의 한인들이 약 68-70%가 집중되어 있는 곳으로, 특히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 전 한인들의 90%가 몰려있다.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은 거의 1937년 스탈린 정권에 의해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당한 사람들이거나 그 자손들이다. 물론 현 중앙아시아 지역의 답사 결과, 1937년 이전에 연해주 지역에서 이주한 고려인들이 소수나마 있었고, 해방 이후 사할린 지역에서 이주한 고려인들이 다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20만의 한인 동포들은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기반을 잡고 살다가 강제이주 계획에 따라 주로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에 정착하였으며 타지크와 키르키즈에도 일부가 이주하여 살아왔다.
사실 1930년대 말의 중앙아시아는 자윈과 기술적인 기반이 없었기에 약 18만 명에 달하는 고려인 이주민들을 수용할 조건이 구비되어 있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7년 소비에트 정부는 카자흐 공화국과 우즈베크 공화국 인민회의에게 고려인 이주민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였다. 건축 자재의 부족과 일손의 부족, 재정적 뒷받침의 부족 등으로 말미암아 각 공화국의 공산당과 소비에트 국가기구는 고려인 이주민의 거주를 위한 요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였으며 이것은 소연방정부의 정책과 각 공화국과의 마찰을 일으킨 경우도 있었다.
이주 정책의 특징은 분산성에 있었다 소연방인민위원회 내무부 검사국이 헹한 조사에 따르면 I937년 12월 1일 현재 카자흐 공화국에 1만8천85가구가 이주되었음이 확인되었으며, 그 중 7천2백5가구가 61곳의 새로 조직된 집단농장에 통합되었고, 1천3백31가구가 13곳의 어업집단농장에 통합되었으며, 4천18가구가 1백61곳의 당해지역 집단농장에 흡수되었고, 1천39가구는 가내공업협동조합에 통합되었다.
이주 고려인들의 촌락들은 장래 훌륭한 관계시설이 가능한 시르다리야강, 아무다리야강, 일리강, 카다말가와강 그 의의 다른 강의 주류와 지류 지역에 건설되었고, 1937년에서 I938년 새로이 경작되는 지역에 조직된 고려인 꼴호즈들에 정부의 지원이 주어졌으며 이주 후 3년까지 조세가 면제되었다. 하지만 소련 정부의 지원이라는 것은 최소한도의 것이었고, 그 많은 이주자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환경변화에도 불구하고 중앙아시아의 사막과 반사막 그리고 초원지대에서 고려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새로운 농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고려인이 주축이 된 소포오즈와 꼴호즈들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주 고려인들의 피나는 노력은 이들 지역의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어 놓았고, 쌀 등 그 동안 재배되지 않았던 작물들이 산출되게 되었다.
해외 한인 가운데서도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은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집단이고 또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살아오다가 현재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그 학문적 관심이 매우 높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는 한국의 기업 진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이어서 현실적 관심도 상당히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관심 외에도 실제 학문적인 관심에서 볼 때에도 이 지역의 고려인 사회는 매우 소중한 연구 대상이 된다. 이 지역이 구소련 체제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국가를 형성한 지 몇 년 안됐고 다양한 소수민족 집단이 공존하는 다민족 국가이며, 종교적인 구성도 매우 이질적인 면면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탈냉전시대 정체성의 변화와 그 의미롤 밝혀 내려는 노력이 좋은 사례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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