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은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시·몰도바·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그루지야 등 독립국가연합 내에 거주하는 한인 교포들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용어이다. 러시아어(語)로 '까레이스키'라고도 부른다.

“까레이스키”는 korea(고려) + people(사람)의 합성어이다. 이 "고려인들"은 현재 연해주라고 부르는 "쁘리모리예변강" 즉, 블라지보스톡, 하바로브스크, 빠르찌란스크를 잇는 드넓은 극동 시베리아지역에 살거나, 또는 중앙아시아에서 살고 있는 한인, 조선인들의 후예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명칭이다. 조선왕조 말엽의 조선사람들이 여러 가지 복잡한(가난과 기근 어지러운 나라사정)문제로 국경을 탈출해 연해주로 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러시아 사람들에게 고려 시대 때 국가의 땅이었다는 뜻을 전하려고 "고려사람"이라고 명칭 하였던 것으로 본다.

1860년 연해주 포세트지역 한인 13가구 최초 기록
1863년 한인 연해주 이주 시작
1867년 185가구 999명
1869년 한반도 북녘 대기근으로 이주 급증. (1만 명 급증)
1902년 한인 이민자수 32380명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후 의병 기지화
1908년 의병건수 1451건 참가인원 69800여명
1910년 경술국치 후 한인 이민 급증
1914년 교민 수 63000명으로 신한촌 건설 (블라디보스톡)
1918년 일본군의 연해주 점령
1922년 10월 일본군 연해주 철수, 친일 거류민단 5000명과 함께 귀국
1923년 재소 한인 공식 10여만 명 거주. 살자 25만 명 이상 거주
1937년 9월 21일-11월 15일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한인들 전원 중앙아시아(6천키로) 강제이주당함


1931년 일본군이 연해주 침략을 위해 한인들을 첩자로 이용하여 정보를 수집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떠돌았는데 그것이 이후 스탈린에게 강제이주의 구실을 주었다. 1937년.. 스탈린은 고려인을 포함한 소수 민족에 대한 강제 이주정책을 실시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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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인 강제이주 70주년의 부끄러움

 

 

1860년대부터 러시아 연해주(沿海州·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한 시베리아 동해안 지방)로 진출한 한국인은 한때 그 수가 20만 명을 넘어서며 연해주에서 한민족 시대가 열리는 듯했다. 그러나 1937년 9월 스탈린의 ‘소수민족 강제이주 정책’으로 한인 전체가 6000km나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옮겨졌다. 한국 근대사의 비극으로 일컬어지는 러시아 한인 강제이주가 올해로 70주년을 맞는다.

고려인들(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살고 있는 한인 동포들은 스스로를 고려인이라 부른다)이 중앙아시아에서 고난을 극복하고 그곳에 뿌리를 내릴 즈음인 1990년대 초, 소련 해체와 신생 독립국가들의 탄생으로 이들은 다시 유랑민으로 내몰렸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독립 이후 러시아어 대신 자기 민족 언어를 공식 언어로 공표함에 따라 그동안 러시아어를 사용하며 현지 민족 언어를 배우지 않았던 고려인은 이방인 취급을 받게 됐다. 거기에다 회교 근본주의의 확산, 집단 농장의 와해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각 공화국의 민족주의 경향 등으로 지금 힘든 처지에 있다.고려인과 달리 소련 해체 이후 조국을 가진 다른 민족들은 자기 나라로 돌아갔거나, 본국이 재빨리 현지 정착촌을 만들어 자국민을 보호하였다. 이스라엘은 소련 시절부터 유대인의 입국과 정착을 지원하여 100만 명에 이르는 러시아계 유대인을 받아들였다. 독일은 동·서독 통일에 따른 경제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50만 명의 러시아 거주 독일인을 수용했다. 그리스, 폴란드, 터키 등 대부분의 국가들도 자국민 후손들이 귀국할 경우 국적을 부여하고 정착지원금을 보조하고 있다. 그러나 55만에 달하는 고려인들은 모국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고려인 귀국 프로그램 등 어떤 종합적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다.역사 속에 묻혔던 연해주 한인들의 항일독립운동 행적이 점차 밝혀지면서, 항일독립투쟁사에서 이들도 재평가받고 있다. 한국 정부가 과거사의 진실을 규명한다면 이들의 역사와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고려인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과거사를 정리하는 첫걸음이며 경제력이 커진 대한민국이 가장 먼저 해야 할 도리이다.먼저 4만~5만명에 이르는 러시아 및 주변국의 불법 체류 고려인과 무국적 고려인, 절박한 생활고와 질병 등으로 고통받는 고려인의 현황을 조속히 파악하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소련 붕괴 과정에서 수만 명의 고려인들이 신생 독립국가의 국적을 받지 못해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고려인 1세대는 대부분 세상을 떠났으며, 지금은 4~5세대까지 형성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남부 러시아와 연해주, 러시아 대도시로 재이주를 감행했거나 희망하고 있다. 이들에 대해서도 한국정부의 신속하고도 적절한 지원 대책이 절실하다. 고려인 가운데 상당수는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한 조상을 두고 있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또 일부 고려인은 옛 소련 시절 짧은 기간에 성공하여 정부로부터 인정받으며 살았다. 지금도 적지 않은 고려인들이 사업가로, 학자로, 예술가로 자기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고국에서 자신들이 연민의 대상으로 비치는 것을 싫어한다. 이들에 대해서는 조국과의 교류협력을 통해 한민족 정체성을 심어주고 한민족 네트워크의 구성원으로 이끌어내야 한다. 강제이주 70주년인 올해 고려인들에 대한 정부의 종합대책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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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러시아 고려인 의 역사
· 1860년 연해주 포세트 지역 한인 13가구 최초 기록
· 1863년 한인 연해주 이주 시작
· 1867년 185가구 999명
· 1869년 한반도 북녘 대기근으로 이주 급증. 1만 명 급증
· 1902년 한인 이민자 수 32,380명
· 1905년 을사 보호 조약 이후 의병 기지화
· 1908년 의병 건수 1,451건 참가 인원 6만 9천 8백여 명. 연해주 총독의 해로 의병 활동 만주 이동
· 1910년 경술국치 후 한인 이민 급증
· 1914년 교민 수 6만 3천 명으로 신한촌 건설 (블라디보스토크)
· 1918년 4월 일본군 연해주 점령
· 1922년 10월 일본군 연해주 철수, 친일 거류 민단 5천 명과 함께 귀국
· 1923년 재소 한인 공식 10여만 명 거주. 실지 25만 명 이상 거주
· 1932년 연해주 한인 학교 380개. 잡지 등 6종, 신문 7종,
· 1937년 9월 21일 -11월 15일.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한인들 전원 중앙아시아(6천㎞)
강제 이주당함.
나. 연해주로 이주하였던 역사적 배경
▣ 1860년 연해주 포세트 지역 한인 13가구 최초 기록에 대한 설명글
시베리아는 흑룡강과 우쑤리강을 경계로 중국과 러시아가 이웃해 있고, 우쑤리강 하구는 조선의 두만강과 합쳐진다. 시베리아에 대한 제정 러시아의 식민정책이 시작된 때는 러시아인들이 흑룡강 왼쪽 지역을 점유하게 된 1643년에서부터 1646년까지 사이였다. 1680년대에 러시아인 마을과 군사 거점이 이곳에 생겼다. 그러나 1689년 청나라가 러시아와 체결한 네르친스끄 조약에 의해 흑룡강 지방으로서의 러시아인 이민은 중단되었다.

러시아 팽창주의는 그 이후 쿠릴열도, 알류산열도, 알래스카로 되었다.
1849년 러시아 제국 해군 중령인 네베리스꼬이가 사할린섬과 대륙 사이의 따따르 해협 및 흑룡강구를 측량해 군함의 항행 가능성을 입증했다. 그 결과 1850년 니꼴라예프스끄에 둔영(屯營)을 설치하게 되면서부터 흑룡강 지방이 러시아령에 속한다는 일방적인 선언이 있었다.
 
 
뒤이어 동시베리아 총독인 무라비예프 백작은 흑룡강의 왼쪽과 강입구를 장악하는 자가 시베리아를 지배한다는 유명한 말을 만들면서 연해주 지방까지 장악하려 들었다. 청나라는 1858년의 아이훈 조약에서 흑룡 지방을 러시아 영토로 인정했다. 다시 1860년 북경 조약에서는 연해주 및 우쑤리 지방마저 러시아령으로 인정했다. 한인들과의 문제가 생긴 곳은 바로 연해주와 우쑤리 지방이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연해주에서 한인들이 최초로 살게 된
시접은 1860년 북경 조약이 있기 훨씬 앞에서부터였다. 다만 1860년 북경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러시아의 문서에 연해주의 한인들이 처음으로 기록된 것일 뿐이다. (-까레 이스끼, 또 하나의 민족사 중 36, 37 페이지-) 그러므로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의 시기는 훨씬 그 이전으 로 보아야 할 것이다.
국경에서 검문당하는 고려인들
 
다. 유민 의 원인
일단의 조선 사람들이 국경선인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직접 흘러들어간 때는 이 이민법이 시행되기 훨씬 이전부터였지만 이민법이 시행되기 시작할 무렵에도 두만강을 건너는 사람들의 행렬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조선내 봉건 지주들의 가혹한 수탈과 기아를 피해 만주 지방으로 국외 탈출을 했다가 그들 가운데서 일부는 다시 우쑤리강을 건너 러시아 변방인 연해주로 흘러들어갔다.

여기서 우리는 1860녀 이전의 조선 실정에 대해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작업은 중요하다. 과연 조선의 실상이 어땠길래 목숨을 걸고서 도망쳤겠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1860년 이전 시기의 초창기 유민들 대부분은 함경도의 농민과 어민들이었다. 함경도는 조선 정부의 차별 정책으로 인해 항상 푸대접을 받아 온지역이었다. 이곳 농,어민들의 사정은 학정 바로 그것이었다. 그나마 중앙 정부로부터 차별받는 함경도였지만 그곳에도 어김없이 타락한 벼슬아치와 양반은 있었고, 그들에게 수탈당했다.양반들만이 토지 소유권을 갖고있기도 했지만 토지의 대부분은 양반들이 장악했기 때문에 일반 농민들을 거의 노예 상태의 소작인들이었다. 농민들은 제도적으로 아무런 권리도 없었고 지배 계급을 위한 하나의 유용한 도구에 불과했다. 인격도 인정되지 않았으며 그들에겐 오직 의무와 복종만 있었다.

검문하고 있는 일제의 국경수비대

 

 

 

이주동포의 움막과 어린이들

 

그 소작인들에 대한 지배 계층의 착취는 다른 지방보다 훨씬 심했다.지배 계층들은 그들의 정치적 불우함을 농민들에게 분풀이하듯 했다.함경도는 산악 지대로 경지 적 자체가 협소한 데다 거듭되는 수탈과 기술 부족으로 늘 궁핍을 면치 못했다. 또한 가뭄과 폭풍우 등 자연 재해에대한 아무런 방비책도, 피해 복구책도 없었다. 농어민들은 지배 계층에대한 상대적 빈곤감의 증폭과 좌절감으로 흔들렸다. 특히 변경 지대 농민들에 대한 정책적 무배려는 그들로 하여금 더욱 극심한 소외감을 느끼게 했다. 정치는 늘 불안과 혼란이었다. 붕당과 척족들의 세도 정치와 부패, 계속되는 민란과 병란으로 변경 지대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그래서 농민들은 자구책을 찾지 않으면 안됐다.그들은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황폐해진 산천을 떠나 안주할 수 있다고여겨지는 타국을 동경하고 국경을 넘을 충동이 일어났다. 사실 오래 전부터 국경을 넘어 북만주의 우시리나 연해주의 바닷가 쪽으로 들어가서 농사를 짓거나 사냥을 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1. 독립국가연합(CIS) 동포현황
* 자료 : 외교통상부 (2005. 08)
2. 고려인단체 조직현황
* 자료 : 2004 동포단체조직현황, 외교통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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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소련 해체이후 독립국가연합 한인(고려인)들의 현실과 과제

 

 

 

 

 

1937년 가을 40여일 달하는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의 산물로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 살게 된 고려인들은 강제 이주 직후 적성민족으로 취급받아 소련에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의 소용돌이와 스탈린의 압제를 지내면서 차별과 핍박의 역사를 묵묵히 지키며 살아 남아야만했다. 1950년대 말 스탈린 사후 흐루시쵸프 시절 고려인에 대한 거주제한 조치의 해제, 복권 조치 등 일환으로 거주이전의 기회와 교육의 기회를 얻게 된 고려인 동포들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그 같은 러시아 지역과 키르기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크라이나, 북카프카즈 등 중앙아시아 전역으로 이주하였고 이에 따라 중앙아시아 전역과 연해주 이외의 러시아 지역에서 새로운 고려인 사회가 형성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소련 내에서 고려인 사회는 지역별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이 당시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지만 대부분 고려인들은 농업을 바탕으로 자립정착에 성공하여 이때부터 중간소수민족(middleman minority group)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타 소수민족들에 비교해서 높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누렸다. 그러다가 1989년 구소련이 해체되고 1991년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한 때 자신들의 방패막이 역할을 하였던 러시아의 힘이 약화되고 대신 자신들이 무시하거나 거리감을 두어왔던 토착민족들이 실권을 잡게 되었다. 중앙아시아 각국의 독립과 함께 찾아온 민족주의 대두와 타지키스탄 내전 및 아랄해 지역의 극심한 가뭄 등은 또다시 고려인의 신 이주를 불러오고 있으며 지역별 고려인 사회의 특성과 문제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타민족들에 대한 음성적 차별과 배척 심화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독립 후 잃었던 민족의 언어와 역사를 되찾고 민족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에서 타민족들에 대한 차별과 배척이 심화되어가고 있다. 아울러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이행되어 가는 과정에서 고실업, 부정부패,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 불평등 등의 사회문제들이 삶의 질과 기회를 낮추고 있다.

다른 민족들은 모국으로 이주하지만 고려인들은 어디로 가나?
경제적 문제의 심화는 사회의 희소한 자원을 둘러싼 민족들 간의 경쟁과 갈등을 증폭시켰고 러시아인, 독일인, 유태인, 폴란드인, 그리스인등 대부분은 공공연한 차별과 배척을 피해 자국민에게 정착지원금까지 주면서 반겨주는 모국으로 이주하는 수가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한인들은 모국이 둘이 있어도 남한과 북한 어느 곳으로도 돌아갈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어찌됐듯 현지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처지에 놓여있다.

현지정착이냐? 다른 대안으로서의 유랑이냐?
이렇듯 1991년 이후의 중앙아시아 국가의 정치사회적 변화는 민족계층체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이러한 변화는 한인과 타민족들과의 민족관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한인들이 종전의 중간계층 지위로부터 하위계층으로 신분하락을 경험할 것인지,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여 토착민족과의 연대를 꾀해 종전의 지위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현지사회를 이탈하여 러

 

 



 


극도로 피폐해진 고려인 농촌현실과 비참해지는 강제이주 노인세대

독립 이후의 생활여건에 대한 평가통계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구소련 시대보다 생활여건이 나빠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세대별로 살펴보면 특별히 1세 응답자들이 현재의 생활여건이 과거에 비교해서 나빠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는 고려인 강제이주 1세대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대언하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리고 최저 생계비도 안 되는 연금과 독립국가 연합 각 국가의 경제 저개발과 낙후된 현실은 실질적으로 이들의 생활에 큰 부담을 줄 수밖에 없고, 살아남기 위해서 여러 형태의 상업에 뛰어들며 이농현상과 돈벌이를 위해 국외 이주 및 유량으로 인한 가족해체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대도시 거주자들에 비교해서 농촌지역 거주자들이 현재의 생활여건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이러한 인식은 극도로 피폐해진 농촌경제의 실상을 잘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과거 고려인 콜호즈의 전설은 이미 사라지고 일부의 한인들만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활 책을 찾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고려인 동포 사회 자체 내의 끊임없는 노력과 한민족 공동체의 협력 절실

이러한 역경에도 굽히지 않고 성공한 고려인 동포들이 상당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구소련 당시 러시아로 이주하여 일찍 정착하였거나 새로운 환경에 능동적으로 잘 대처한 일부 소수의 중산층들이다. 그렇지만 각국과 지역에 흩어져 있는 고려인 사회의 특성상 이들이 중추적인 역할을 통해 한상네트워크형성이나 고려인 동포들을 이끌 자신들의 조직력으로 고려인 사회를 발전시켜 가는 것은 역부족이다. 우선 신세대 고려인들이 한민족 고유 언어와 전통문화를 대부분 잃어 가고 있는 것이 대세가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우리 한민족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시베리야의 광활한 대륙만큼이나 손에 잡히지 않는 고려인 동포와의 연합과 협력 사업은 대륙에의 첨병이요 민족의 자산으로서 고려인동포를 인식하는 시대적 사명 자각과 이들을 활용하고 교류협력할 거족적 차원에서의 참여가 사회 전반에 요구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려인동포들 자신들의 노력과 연합을 바탕으로 한 한민족간의 끊임없는 교류와 협력 그리고 현지 자립 정착지원 협력 사업이 절실히 요구된다.

 

 

 

 

한민족 정체성회복과 한인자치주가 가능한가? (인도적 차원의 정착지원과 민족문화 교류 지원의 당위성)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가 중요한 생활의 관심사가 되고 민족의식이 오히려 현지정착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에서 민족적 정체성 회복에 대한 비전은 많은 장애와 장벽을 만날 수밖에 없다. 많은 연구 자료에서도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40대 이상에서는 한국 언어 구사능력이나 결혼관 등에서 아직까지 민족적 명맥을 유지하면서 노력하는 성향이 강하지만 강제이주 3세에서 5세에 이르면 거의 현지사회에 동화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인도적인 차원에서의 지원을 뛰어넘어 고려인 동포들이 현지에서 자립하면서 민족의 정체성 회복을 이루어내고 한민족간의 교류 협력을 통한 국익의 증대를 이루기 위한 노력과 지원은 오히려 한국정부차원과 민간인 및 해외로 진출하는 기업의 입장에서 더욱 배가되어야 할 것이다. 700만 해외동포들 중 미국과 일본 다음으로 많은 50만 이상의 인적자원을 가지고 있는 고려인 한민족네트워크 형성은 우리 세대의 역사적 과업이며 대륙의 고려사람 고려인 동포들은 세계로 향하는 한민족의 세계화시대에 없어서는 안 될 첨병이요, 민족의 자산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한인들의 정치경제적 지위가 불안정해지고 신변의 위협이 커지게 됨에 따라 한인자치주와 같은 독립적인 기구를 통해 안전과 권익을 보장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한인들의 뜻과 의지를 결집하는 노력 없이 한인자치주를 건립하는 방안은 현실성도 떨어질 뿐만 아니라 실효성도 적다. 한인자치주와 같이 물리적 영토를 확보하는 것 보다는 보다 안전하고 현실성이 높은 민족 문화적 네트워크를 통한 문화적 영토 확보로서의 민족문화자치구를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방안이다. 초영토적인 개념인 민족문화자치구를 육성하여 한인들 간에 우선적으로 사회문화적, 정신적으로 교류하고 한인들의 뜻과 역량을 통일하고 결집하는 일이 대륙을 향하는 한민족과 독립국가연합 한인(고려인 동포)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이며 사명이다.

※ 고려인의 구소련 지역 (CIS)별 분포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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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연해주로의 재이주와 방황
고려인의 러시아 이주 140년은 한으로 점철되어 있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 황야로 내팽개쳐졌던 이들의 기구한 삶은 한 때 중앙아시아에서 안정을 되찾은 것도 잠시… 소련대륙이 변화하는 1990년대를 맞이하여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은 이제 내전과 민족주의로 다시 위태로워졌다.

1991년 12월 소련 연방이 해체되고 중앙아시아 C I S 국가들이 독립하고, 독립 국가 고유의 언어를 쓰는 정책과 소수 민족에 대한 회교 민족주의로 인하여 상당수의 고려인이 C I S(독립국가연합)를 떠나고 있으며 대부분 원거주지였던 극동 러시아, 그 중에서도 연해주로 돌아오고 있는 실정이다. (연해주의 인구는 230만 명이며 83% 이상이 러시아인이다.)

 
 

 

 

 

 

언어의 경우 중앙아시아의 각 민족 공화국이 독립 이후 자기 민족의 언어를 러시아어 대신 공화국내 공식 언어로 채택함에 따라 여타 소수 민족들은 러시아어와 공화국 민족어, 그리고 자기 민족어를 습득해야 하는 3중 언어의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언어의 차원을 넘어 사회, 경제적인 불평등을 야기하고 있다. 한인과 같은 소수 민족은 거주국의 민족어를 배우지 않을 경우 모든 면에서 차별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한인이 공식 언어를 구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잃고 있다. 특히 한인들은 대부분 공무원, 교사, 의사, 연구 종사자, 집단 농장장 등 사무직 또는 관리직에 종사하고 있어 사태는 더욱 심각한 지경이다. 이러한 실직자들이 단기간에 공식 언어를 습득하여 재취업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까닭에 상황은 비관적이다. 일자리를 잃은 이들은 자영업 또는 자영농에 종사하거나 단순 노동자 또는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고 있다. 일부 운 좋은 사람들만이 현지 진출 한국 기업에 취업할 기회를 얻고 있을 뿐이다. 민족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는 정책은 한 때 일보 후퇴했었으나 우즈베키스탄에서 다시 2007년부터 자국어만을 공식 언어로 채택하는 법을 시행하는 것을 필두로 구소련시절 말살된 자국민족어를 부활시키는 정책이 다시 시행되고 있으며 이것은 막을 수 없는 대세이다.

또 다른 요인은 회교도 자민족 중심주의의 확산인데, 이는 때때로 폭력의 형태를 띠고 있어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옛 고향, 자신의 아버지의 고향, 할아버지의 고향, 조상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그 갈망하는 마음의 반면에 60여 년 동안 피 땀 흘려 정착이 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뒤로하고 비록 그들의 고향이며 아버지와 조상들의 고향이라고 하지만 아무 것도 마련되지 않은 그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인의 경우 여타 소수 민족과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수가 이 지역을 떠났으며,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다. 이들은 농업을 통한 자립을 꿈꾸며 러시아 볼고그라드나 남부 러시아 여러 지역으로 떠나고 있으며 상업을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모스크바나 그 외 러시아 북부나 중부지역으로 향하고 있으며, 그 중 많은 수가 연해주로 재이주하는 것을 희망하며 실제로 많이 이주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라별로는 타지키스탄 한인의 경우 내전으로 인해 거의 대부분이 이 지역을 떠난 것으로 추정되며, 우즈베키스탄 한인이 많이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연해주 재이주자 중에도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출신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연해주 정부는 1990년 이후 약 3만 명 정도의 한인 동포가 중앙아시아로부터 연해주로 재이주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공식적인 주민 등록을 하지 않은 숫자를 포함한다면 그보다 더 많은 수의 고려인이 연해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2000년도 이후 연해주로의 고려인 이주는 또 다른 국면을 맞고 있다.

러시아의 국제사회질서 불안정과 함께 연해주지역경제의 불안정 그리고 연이은 정착촌 고려인 농사실패라는 외적요인이 지속되고 한국정부의 체계적이며 지속적인 정착지원의 부재는 물론이고 그나마도 민간단체의 정착지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체계적이면서도 유기적인 대표성을 띌 고려인 조직 부재와 오랜 문화적 단절로 인한 상호간의 의사소통 및 이해와 협력의 괴리감이라는 내적요인은 연해주에서의 재이주를 더욱 어렵게 만들어 왔다.
여기에 러시아 정부입장에서도 연해주 지역에 대한 한국의 지원과 투자에 대한 기대 무산 등으로 인해 오히려 고려인에 대한 권리 회복조치는 실효성을 잃어가고, 지원은 소극적이 되고, 국적취득법과 출입국 절차가 복잡해지면서 고려인들은 외국인 노동자로 취급받아 불법체류자 신세가 되거나 심지어 무국적자가 되는 경향도 늘어가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지 않거나 취득하지 못하고 중앙아시아로 돌아간 고려인 수도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도 중앙아시아의 민족주의와 경제적 위기, 언어의 문제, 정치 사회적 불평 등의 문제가 계속 존재하는 한 고려인의 러시아 이주에 대한 희망은 계속될 것이지만,
연해주를 포함한 러시아의 입장도 만만치 않아 재이주의 규모나 속도는 중앙아시아의 상황 변화와 러시아 각 지방의 고려인 정착 여건의 변화에 따라서 유동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 어느 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하는 빈곤과 유랑생활을 거듭해야하는 고려인의 수도 더욱 증가할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황의 연속이다.


출처 : 사랑과 용서
글쓴이 : 망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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