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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9일 개봉 이후 조용히 3만명 가까운 관객을 모은 영화가 있다. '
히말라야 슈바이처'. 같은 제목의 책(규장 출판사)도 출간 일주일 만에 벌써 5000권이 팔렸다. 영화 주인공은 78세 노인. 배경은 히말라야 오지다. 카메라 한 대로 소소히 찍은 영화와 담담한 회고록인 책을 본 사람들은 "오늘밤 더 많이 기도하겠다"고 다짐한다. 여든을 앞둔 노(老)선교사의 봉사가 나눔, 기도의 진짜 의미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 연세대 졸업 50주년 동문 상봉의 날'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일시 귀국한 강원희(78) 선교사와 부인 최화순(75) 권사를 만났다.
↑ [조선일보]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 네팔 에서 수술을 하다가 환자 피가 모자라자 "꽉꽉 채워 두 병 뽑아요!"라며 직접 헌혈을 했다고 책에 쓰셨는데.
"1985년 내가 52살이었을 때다. 네팔에서 3년째 봉사를 하던 때, 응급실로 배 전체에 염증이 퍼진 환자가 실려왔다. 수술에 들어가자 헌혈하겠다던 아들들이 도망쳐 버렸다. 그냥 두면 죽는 상황이었다. 응급실장인 내가 팔을 걷고 피를 뽑으라고 했다."(강씨는 그때 200cc 혈액 팩 두 개를 뽑았다. 병원장이 뛰어와서 '죽고 싶으냐'고 말리는 바람에 그 정도에서 그쳤다. 노인은 한 달여 만에 퇴원했다.)
―49세에 해외 의료 선교의 첫발을 디뎠다. 시작하기엔 적잖은 나이였는데.
"부친이 황해도 피란민이었다. 연세대 의대를 졸업했을 때 꿈이 무의촌 봉사였다. 강원도 간성 무의촌 진료소를 거쳐 1970년부터는 속초 금호동에 병원을 운영했고 잘 됐다. 하지만 나는 항상 은혜의 빚더미 위에 살고 있고, 조금이라도 갚으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구체적 계기는.
"1976년 존경하는
한경직 목사가 속초를 방문했을 때 찾아갔다. 선교사로 가고 싶다고 하니 네팔을 권해주셨다."
―반대는 없었나.
" 베트남 전 군의관과 무의촌 진료까지 하다가 그때쯤이 결혼 10여년 만에 겨우 생활이 안정됐을 때였다. 간호사 출신인 집사람이 '우리도 그냥 보통 사람들처럼 살 수 없느냐'고 하더라. '꼬리도 머리도 아닌 인생의 가운데 토막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다'고 아내를 설득했다."
1982년 부부는 우여곡절 끝에 네팔로 떠났다.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현지 청년들은 "남한에서 왔다"는 강 선교사에게 "죽여버리겠다"며 으르렁댔다. 네팔은 공산당이 득세했고, 서점에는 김일성 책 천지였다. 강 선교사는 매 주말 산동네를 찾아다니며 병자들을 고쳤다. 아이 출산부터
중환자 수술까지 거의 모든 환자를 돌봤다. 먼 곳에 갈 땐 하루 열대여섯 시간 걸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닥터 강이 치료하면 염증도 안 생기고 잘 낫는다"고들 했다. 강 선교사는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지 봉사에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언제였나.
"1998년 힌두교 성지인 네팔 돌카의 산골짜기 병원에서다. 병원 사역자 중 한 사람이 간호사 방의 힌두신(神) 포스터를 찢어버렸다. 성난 군중이 새까맣게 병원으로 밀어닥쳤다. 먼저 기도를 하고, 죽을 각오를 하고 그들을 맞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실수였다.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내가 책임지겠다'고 빌었다. 몇 시간 만에 씩씩대며 돌아갔다. 그 일이 있기 전부터 친구처럼 신뢰를 쌓은 덕에 살아남은 것 같다."
―이슬람교도가 많은 네팔이나 방글라데시 같은 나라에서 개종을 권하다가 적발되면 선교사는 징역형을 살거나 추방된다고 하는데, 그런 일은 없었나.
"무조건 선교를 하려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사는 모습 자체가 '선교'가 되도록 항상 노력했다. 추울 때 목 있는 데까지 담요를 올려 덮어줬고, 담요가 한 장 뿐이라 추위에 떨면 한 장 더 가져다 덮어줬을 뿐이다."
―카스트 신분제에 포함되지 않아 소나 돼지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있는 거지들도 거둬다 돌보는 모습이 감동적으로 그려지더라. 개인적으로 잊지 못할 순간이 있다면.
"하루는 장을 보러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데 내 뒤를 쫓아 뛰어오며 한 거지가 '다주! 다주!'하고 외치더라. 네팔어로 '큰 형님'이라는 뜻이다. 가슴이 뭉클해지고 코끝이 찡했다."
네팔에서 8년, 방글라데시와 스리랑카에서 4년씩, 다시 에티오피아에서 7년을 지낸 그는 작년 7월 세 번째 네팔로 갔다. 중간에 국내에서 기독교병원장을 맡은 적이 있었지만, 1982년에 처음 네팔로 갔으니 선교사 생활은 29년째다.
―왜 사서 고생을 하나. 평생 간호사로 함께하며 고생한 아내에게 미안하지 않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 속에서 내 힘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일을 해야 할 때, 더 간절히 기도한다. 그런 기도에는 하나님이 더 잘 응답해주신다. 축복은 사람마다 다 다른 것 아닌가. 집사람과 내겐 이런 삶이 축복이다."
내년 12월 12일, 두 사람은 결혼 50주년을 맞는다. "25주년은 방글라데시에서 보냈거든요. 50주년은 네팔에서 보내게 될 것 같네요." 아이처럼 천진하게 웃는 강 선교사를 바라보던 부인이 주름진 남편의 손을 꼭 잡았다.
30년간 네팔 등 세계 오지를 돌며 의료봉사를 해온 히말라야의 슈바이처 강원희 선교사가 안암동 자택에서 부인과 함께 웃고 있다./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