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러시아인의 가족과 결혼 생활

 

 

가족 생활


러시아에서 가족은 기본적인 사회단위이다. 집안에서 가장의 권위가 높고, 일상의 가사와 금전관리는 주부가 맡는다. 전통적으로 자녀는 부모나 연장자에게 경의를 표해야 하고 부모는 자녀나 가사에 대해 주요 결정을 한다. 전통적으로 러시아 가족에는 동양적 가부장적인 권위주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비에트 체제를 거치면서 이러한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특히 어머니가 가사나 자녀의 양육을 책임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전에는 가장만이 소득의 주체가 되었으나 사회주의 체제가 되면서 노동연령에 있는 여성(14∼55세)의 대부분이 학업이나 취업을 하고 있어 주부들도 직장에 나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는 토·일요일과 8일의 법정공휴일 및 평균 21일의 유급휴가가 있어 여가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편이다. 주말에는 스포츠와 놀이가 보편적으로 행해진다. 특히 대도시 가구의 상당수가 근교지역에 별장(다차)을 갖고 있어, 이곳에서 소규모 텃밭을 경작하면서 주말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휴가기간은 주로 여름에 집중되는데, 흑해·발트해·바이칼호 등지가 대표적인 휴양지이다. 도시에 살고 있는 가족들은 주말이나 휴가때 주말 농장 '다차'를 찾아간다. 가족들은 다차 건물을 보수하고 감자 토마토 등을 심을 텃밭을 손질한다. 가정주부는 식빵, 야채, 생선 절인 것, 음료수, 보드카 등을 준비하여 야외에서 바비큐 파티(샤실릭)를 벌인다. 가족들은 긴 겨울동안 먹을 농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텃밭에 이랑을 만들고 씨를 뿌리는 일에 나선다.

러시아인들은 보편적인 생활 양식으로서 가족문화를 소중히 여긴다. 이들은 자녀들이 축구, 스키 등 운동을 하고 싶어하면 언제나 직접 아이들과 함께 운동용구들을 챙겨 운동장이나 스키장으로 가서 같이 땀을 흘리곤 한다. 또 자녀들이 음악과 미술 같은 예술분야의 여가활동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아주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부모들이 직접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함께 간다.

결혼

결혼 연령은 평균 20대 전반으로 조혼경향이 있으나 1991년 소연방의 해체이후 서구식 가족 제도가 일반화됨에 따라 최근에는 늦어지는 추세이다. 약혼도 성행하고 있고 사실혼도 많이 늘고 있다. 그러나 출산율은 오히려 하락하기 시작하여 인구 감소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공업화·도시화에 따라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낙태가 보편화되었고 무엇보다도 주택의 양적, 질적 낙후로 인해 출산기피현상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일찍부터 정부는 낙태 및 피임 제한, 가족수당지급, 유급출산휴가, 출산에 대한 사회적 태도 개선, 주류판매제한, 보건서비스 개선 등 각종 인구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정부는 출산한 여성들에게 유급 출산 휴가를 70일까지 인정해준다.

98년 모라트리움이후 모스크바 지역에는 새로운 현상으로서 위장결혼도 성행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전체 결혼의 3분의 1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위장결혼이 성행하는 것은 러시아 국민이라 할지라도 모스크바 거주등록이 없는 사람은 모스크바에서 합법적으로 거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주 등록을 원하는 외지인과 모스크바 시민과의 위장결혼을 알선하는 업체의 주선 가격은 약 1000달러이다. 한편 모스크바는 국제결혼 세계 1위의 도시이기도 하다. 매년 4,500명의 모스크바 아가씨들이 외국남자와 결혼식을 올린다. 국제결혼으로 유명한 모스크바 제4결혼 등록소의 경우, 매년 3000쌍의 국제결혼식이 등록되고 있다.

이혼

러시아에는 현재 물질주의 경향으로 이혼율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이혼할 경우 아이가 없으면 구청에 신청하기만 하면 쉽게 성립되지만 아이가 있는 경우는 법정이혼만이 가능하다. 이 때의 절차는 법원에 이혼청구를 하고 3개월의 조정기간동안 아이의 양육이나 집의 분할 등을 고려하여 법원은 이혼을 허가하게 된다. 최근 러시아의 이혼은 남성의 불성실, 낭비벽, 주벽 등의 이유로 주로 여자 측에서 제의를 많이 하며 실제로 70% 선에 이르러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혼하고 나서 아이의 양육은 실제로 90% 어머니가 맡고 있으며 아버지의 법적인 의무는 수입의 25∼50%까지 자녀양육비를 어머니에게 매월 지불해야 한다.

심각해지는 청소년 문제

과거 러시아의 청소년들에게는 무상교육과 평생직장이 보장되었지만 냉혹한 경쟁사회에서 생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빠져 있다. 좌절한 젊은이들은 술과 마약으로 고통을 잊으려 하고 신흥 종교나 신나치 같은 극단적 주장에 빠지기도 한다. 15∼19세 사이 러시아 젊은이들의 자살율은 미국보다 2배나 높다고 한다. 빈부격차도 이러한 좌절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성공한 노브예 루스키들의 과소비와 사치는 젊은이들에게 한탕주의와 범죄로 유혹하는 계기가 된다.

러시아의 청소년들은 심각한 경제난과 구소련의 사회주의적 보건체계의 붕괴로 미취학아동 85%가 병들어 있는 실정이다. 또한 러시아 청소년들은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 바이러스(HIV) 감염도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현재 러시아의 공식적인 감염자는 20만 명에 달하는데, 18세 미만 청소년들 사이에 HIV  감염자가 급속도로 늘고 있다. 청소년들의 보건과 함께 정신 건강도 심각한 수준이다. 현재 청소년들이 선호하는 직업으로서 살인 청부업자와 강도가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물질 우선 풍조가 늘리 펴져 있다.

 

            

2.공휴일과 기념일


러시아인들은 일 할 때는 열심히 일하고 놀 때는 신나게 놀라고 하는 속담에 따라 공휴일이나 기념일, 그리고 명절에는 편히 쉬거나 오락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러시아정교회가 명절로 삼았던 종교 축일도 단순한 종교의식을 행하는 제사일의 차원이 아니라 연회로 이어진 것이 러시아의 전통이다. 러시아의 공휴일과 기념일, 명절은 다음과 같다.  
 

신정     크리스마스    마슬레니차    여성의 날  부활절    노동절

승전기념일    이반 쿠팔라   독립기념일   혁명기념일

 

 1월 1일- 2일 신정(공휴일)

 


러시아인들에게 새해 맞이는 섣달 그믐날 욜로츠카로 불리는 트리 곁에 둘러앉아 밤이 깊어가기를 기다리면서 시작된다. 이때 여성들을 중심으로 새해운수를 점치는 별점을 본다. 1월1일 자정 5분전, 대통령이 TV를 통해 신년사를 낭독하면서 새해맞이는 절정을 향해 달린다. 신년사가 끝나고 TV의 시계가 0시 정각을 가리키는 순간, 앞에 놓인 샴판스코예(샴페인)를 요란하게 터뜨리며 서로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술잔이 끝없이 돌아간다. 새해 첫 날에 쉬는 것을 비롯하여 1월 7일이 성탄절이라 동네가 성탄트리 장식으로 온통 축제분위기로 되어 있고, 이러한 분위기는 러시아 정교회가 중시하는 구력 신년인 1월 14일까지 지속된다. 이 기간에는 많은 업체와 회사가 문을 닫고 쉬는 경우가 많아 그야말로 '긴' 명절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18세기 이전에 정교회가 간주하고 있던 신년은 9월 1일이었다. 더운 여름철이 지나가고 시원한 계절이 도래하는 때를 교회는 한 해의 시작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스도교 수용 이전의 옛날 사회에서는 1월 1일에 돼지를 잡아 번제를 바치던 관습이 정교회의 축일에 의해 흡수되었다. 그러한 자취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데, 일부 지역에서는 신년이 되면 축제용으로 쓸 새끼돼지를 통채로 사고 팔기도 한다.

 

 

 1월 7일 크리스마스

 
러시아의 크리스마스는 12월 25일이 아닌, 그보다 13일 늦은 1월 7일이다. 여기에는 역사적 유래가 있다. 슬라브 정교의 전신이었던 동방정교회는 옛 동로마제국의 국교로 현 터키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발달한 기독교중 하나다. 1500년대 말까지는 동방정교회와 가톨릭 등 전 기독교계는 로마시절부터 내려오던 율리우스력을 따랐으나 가톨릭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의 제정에 의해 1582년 동방정교회를 제외한 서구세계가 개정된 그레고리력을 사용하게 됐다. 율리우스력은 그레고리력보다 매년 11분이 늦어 현재는 총 13일로 차이가 벌어졌다. 이 때문에 율리우스력을 쓰고 있는 동방정교회권은 크리스마스 등 전통행사들을 서구보다 13일 늦게 맞고 있다. 이곳 크리스마스 축제의 가장 큰 행사는 서구와 마찬가지로 크리스마스 이브에 해당하는 '사첼닉'이다. 러시아정교회의 대주교는 모스크바 보고야블렌스키 대주교 성당에서 신도들을 모아놓고 크리스마스 미사를 집전했다. 러시아의 크리스마스는 옛 소련시절엔 무신론 원칙 때문에 없어지다시피 했으나 91년부터 소연방의 해체이후 가장 큰 축제가 되었다.
 

 

 마슬레니차(러시아식 봄맞이 행사)

 
러시아는 유난히 길고도 추운 겨울을 지니고 있다. 러시아인들은 언제나 따뜻한 태양을 그리워하고 봄을 기다리는데, 봄이 오는 날을 기념하여 마슬레니차(Maslenitsa)라는 축제를 벌린다. 원래 마슬레니차는 고대 슬라브인들이 춘분기에 행했던 민간 신앙적인 농업 축제였다. 이 날에는 즐겁게 먹고 마시며 평소보다 훨씬 많은 파티가 열린다. 러시아인들은 마슬레니차에 실컷 놀지 않으면 평생 불행하게 살고 비참하게 생을 마친다고 생각하고 있다 마슬레니차를 지내기 위해 마지막 남은 치마까지 내다 판다라는 러시아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민간에서 마슬레니차를 흥겨운 포식이라고 부르고 마슬레니차를 풍요로운, 솔직한, 즐거운 등과 같은 수식어를 부여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실제로 마슬레니차는 가장 방탕한 명절들 중의 하나로 알려져 왔다.

마슬레니차가 시작되면 온 동네는 봄을 맞이하는 떠들썩한 잔치로 가득차게 된다. 마슬레니차 기간동안 교회에서는 육류의 섭취를 금하고 단지 유제품과 물고기, 달걀만을 허용한다. 이 축제에는 블린, 핫케익, 우리나라의 만두와 비슷한 피로그, 흰빵인 칼라치에 꿀술이 주요 메뉴이다. 축제 기간의 주된 음식인 블린(blin)에 마슬로(maslo, 버터)를 듬뿍 발라 먹는 것과 관련하여 마슬레니차라는 이름이 나오게 된 것이다. 또한 거리에서는 눈이 쌓인 언덕을 배경으로 썰매타는 아이들의 모습을 비롯한 각종 겨울을 보내는 행사로 분주하다. 특히 모닥불을 피움으로써 러시아인들은 겨울의 동반자인 초자연적이고 부정적인 악마를 물리치고 죄를 씻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마슬레니차의 첫날인 월요일은 전통적인 러시아 남성의 오락인 호전적인 주먹싸움으로 시작하며, 화요일은 유희의 날에 걸맞게 민속놀이가 시작되어 마슬레니차 주간 내내 행해진다. 젊은이들과 처녀들은 얼음산에서 미끄럼을 타거나 썰매를 탔으며, 러시아의 황제들은 흥겨운 가면무도회와 산보행사라 할 수 있는 굴랴네(guliane)를 베풀었다. 미식가의 날이라는 이름을 가진 수요일에는 장모들이 자신의 사위들을 블린 잔치에 초대한다. 마슬레니차의 흥청거림은 목요일에 절정에 달하는데, 광대놀음, 얼음산, 그네타기, 썰매타기 떠들썩한 잔치, 말타기 등이 있다. 장모의 날인 금요일에는 수요일과 반대로 사위가 장모에게 블린을 대접한다. 시누이들의 날로 알려진 토요일에는 젊은 며느리가 남편의 친척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 작별과 용서의 일요일이 되면 사람들은 마슬레니차에게 작별을 고하고 서로 서로에게 용서를 구한다. 마슬레니차 축제는 서방교회의 카니발(사육제)에 해당하며 황제도 참여했을 정도로 러시아 민중이 즐기던 대축제였다. 이러한 마슬레니차 축제는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단절되었다가 소비에트 붕괴 이후 최근 부활하고 있다.

 

 

 3월 8일 국제 여성의 날

 
3월 8일은 여자들과 아가씨 및 여학생들에까지 꽃을 선물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날이다. 러시아 여성들이 1년 중 가장 극진한 대접을 받는 '여성의 날'이기 때문이다. 이날이 되면 러시아와 구소련 전역에서 정장 차림으로 한껏 차려입은 여성들로 넘쳐난다. 여성들은 겨우내 입었던 두터운 모피와 외투를 벗어던지고 가장 아름다운 옷으로 치장한 뒤 거리를 누비는 것이다. 러시아 남성들은 자신과 관계있는 여인들, 어머니, 부인, 딸이나 집안의 여자 친척, 직장의 동료 등에게 선물과 꽃을 주며 사랑을 고백하고 화해의 기회를 잡기도 한다. 반대로 여성에게 꽃이나 선물 등을 선사하지 않는 남자는 야만인으로 낙인찍혀 사람취급도 못받는다. 이 때문에 향수, 속옷 등 여성용품과 샴페인 등 축제용품이 이 날을 전후해 가장 많이 팔린다. 세계 최고의 꽃 수출국인 네덜란드 등 유럽의 꽃시장 상인들은 러시아 바이어들의 요구에 맞추느라 전세기를 띄울 정도다. 심지어 샤넬, 이브 생 로랑 등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들도 이 무렵 러시아에서 얼마나 팔리는지로 신상품의 성공 여부를 가늠해볼 정도다. 러시아 상인도 이 날의 경기가 좋으면 1년 내내 경기가 좋을 것으로 기대한다. 러시아 여론조사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여성들이 가장 기다리는 기념일은 여성의 날이다.
 

 

 부활절

 
부활절을 러시아어로는 '파스하'라고 하는데 이 말은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말로 '불행과 고난의 극복'을 의미한다. 러시아 정교회의 경우 부활절은 축일 중의 축일이며 성탄절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부활절이 되면 교회에서는 가장 성대한 의식이 거행되는데, 자정이 되면 십자가 행렬에 이은 부활 자정미사가 수 시간 지속된다. 가정에서는 색칠을 한 부활달걀과 쿨리치(kulich)라는 빵을 미리 만들어 교회에서 축성을 받고 부활절을 축하한다. 계란을 물들이기 위해서 먼저 마른 쌀을 젖은 계란에 묻혀 가제수건으로 잘 감싼 뒤 양파를 넣고 끓인다. 이 부활달걀은 새로운 생명과 자연, 대지 및 태양의 소생을 상징한다.

보다 독실한 교인은 부활절이 들어 있는 주간의 처음 사흘, 교회에서는 성찬식과 함께 성경낭독이 진행되고 각 가정에서는 식탁에 육류와 생선과 주류를 올리지 않은 식사를 한다. 목요일은 각 가정이 모든 면에서 청결한 상태로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청결한 목요일'이라는 표현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대수난일인 금요일에는 그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아주 엄격한 정교회 신자는 세수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구원자의 장례의식이 행해진다.

부활절 예배는 보통 토요일 밤 11시에 시작돼 다음날 새벽 4시나 되어야 끝나는데, 정교회에서는 금욕주의를 요구하는 전통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앉는 것이 금지되며 서 있어야 한다. 물론 몸이 불편한 사람이나 노인들은 작은 깔개를 준비해도 된다. 교회 안에서는 항상 제단 쪽을 향해 서 있어야 한다. 만약 마음에 드는 성상 앞에 서고 싶으면 좀 더 일찍 교회에 가는 것이 좋다. 신도들은 교회에서 촛불을 사고 그것을 들고 성전 중앙에 있는 성화에 입을 맞춘다. 부활절은 이날 밤 예배의식이 끝나야만 즉 새벽 3시가 지나야만 육식이 허용된다. 이 때부터 주류를 포함해 모든 음식을 맘껏 먹어도 된다. 이날 다른 이들에게 선물을 많이 나눠주거나 좋은 일을 행하면 행복해진다고 러시아인들은 믿는다.

 

 

 5월 1일 노동절

 


5월 1일은 통상 '노동자의 날'로서 사회주의체제였던 소련 시기에는 '혁명기념일'과 함께 큰 기념일인 동시에 국가적 명절이었다. 60년대 중반부터는 노동절의 쉬는 날이 이틀로 확대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친척과 친구집을 방문하는 명절이 되었다. 구소련 시기에는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등 대도시에서 이날 시위행렬을 벌였으며, 밤에는 불꽃놀이와 함께 다양한 음악 및 춤 경연대회가 있었다. 1991년이후 소비에트 체제의 붕괴이후 노동절은 단순한 공휴일로 전락하는 추세이다.

 

 

 5월 9일 승전기념일

 
5월 9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전승기념일이다. 전쟁박물관과 전승기념탑이 있는 모스크바 쿠투조프 대로에 위치한  '승리 공원'에는 이날  몰려 나온 모스크바 시민들로 가득찬다. 젊은이들은 옛 군복을 입고 아코디언 반주에 맞춰 옛 군가를 부르며 춤을 추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조국을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키스 세례를 퍼붓는다. 저녁에는 불꽃놀이 축제가 진행되며 곳곳에서 야외 음악회가 열린다. 5월 9일 승전기념일은 모든 러시아인들이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국경일이다. 특히 과거 가장 큰 국경일이었던 10월 혁명기념일이나 5월1일 메이데이는 더 이상 러시아인들을 통합시키는 국경일로 기능하기 힘들졌으며, 새로 만들어진 독립기념일이나 헌법제정일 등은 아직 생소하기 때문이다. 푸틴 정부들어서는 구소련 붕괴와 함께 사라졌던 모스크바 붉은광장의 군사퍼레이드가 10년 만에 부활하기도 됐다.
 

 

 7월 7일(구력으로는 6월 24일) 이반 쿠팔라(Ivan Kupala)

 


7월 7일 하지에는 이반 쿠팔라라고 불리우는 전통적인 축제가 있다. 이반 쿠팔라의 밤에는 젊은이와 어른들이 숲과 강과 호수가 및 둔덕 공지에 앉아서 모닥불을 피우는데, 불은 고대 방식대로 비벼서 피워야만 했으며, 모닥불 한 가운데 태양을 상징하는 불타는 바퀴를 가진 막대기가 세워졌다. 불길이 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곧 활기를 띄기 시작했는데 모닥불을 뛰어넘는 놀이가 인기가 있었다. 손을 잡은 젊은 남녀들이 불을 뛰어 넘었는데, 만약 그들이 손을 놓치지 않으면 곧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 여겼다.

쿠팔라 전날부터 민간에서는 건강에 좋다고 생각되는 풀을 모으는 행사가 있다. 이반 쿠팔라 시기에서는 풀들이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자연으로부터 얻게 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쿠팔라 축제시에 행해진 매우 넓게 퍼져 있던 의식중의 하나는 만나는 사람들과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을 퍼붓는 일이었다. 심지어는 깨끗한 물이 아니라 더러운 물을 퍼붓기도 했다. 그런 다음 다시 미역을 감으러 달려갔다. 쿠팔라의 밤에는 비교적 친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는데, 어떤 이들에게는 첫사랑의 밤이었다. 그러나 쿠팔라 축제에 대하여 정교회는 일찍이 이교도적이고 저속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여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반 쿠팔라는 고대 루시의 대규모 민중 축제답게 불과 물에 대한 자연현상을 숭배했던 러시아인의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축제라고 할 수 있다.

 

 

 6월 12일 독립기념일

 
1991년 구소비에트 국가를 해체하고 새로운 러시아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공휴일. 그러나 독립이후 러시아 국력의 하락과 만성적 경제 침체로 러사아인들은 그냥 단순한 공휴일로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11월 7일 혁명기념일

 


소련 시기에 대대적인 날이었던 혁명기념일이 오늘날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된 채 남아 있다. '10월 사회주의 대혁명 기념일'은 '단결과 화해의 날'로 그 명칭이 바뀌어서 하루를 쉬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3.의료 기술

 

러시아는 수십 년간 수많은 전쟁에 참여하면서 수많은 임상학적 기록을 바탕으로 엄청난 외과적인 기술을 갖게 있다. 게다가 생물학, 화학 등 탄탄한 기초 학문을 바탕으로 다양한 의료기기의 장비를 개발하고 있으며, 현재 전 러시아에 약 1,500명 규모의 대단위 공장을 5개 설치하여 보건성 산하에서 운영을 하고 있다. 러시아 의학산업은 면역력을 키우면서 최소한의 약으로 암이나 심장병  등의 질환을 치료하는 생물학적 치료법에 큰 강점이 있으며, 유전인자와 인체의 단백질 정보를 연구하는 게놈분야 등 바이오테크날리지에도 앞서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용화된 러시아의 대표적인 의료 기술은 근시교정 수술이다. 러시아의 안과 전문의 스뱌토슬라프 표도로프 박사는 70년대 초 레이저나 칼로 각막을 깎아내 근시를 교정하는 수술기법을 최초로 선보여 70∼80년대에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표도로프는 페레스트로이카(개방) 정책으로 자영업이 허용되자 86년 개인병원인 ‘안과미세수술 연구기술단지’를 설립했다. 이 병원에서는 환자가 누운 수술대가 이동하면서 자동차 조립공정처럼 단계별로 수술이 진행됐다. 환자는 수술대에 누운 채 의사가 기다리고 있는 5단계의 수술실을 차례로 거치면서 눈 수술을 받았다. 표도로프 박사의 이같은 실험적인 연구이후 현재 라식으로 대표되는 안과 분야의 발전이 일어난 것이다.

러시아의 정당구도

 

러시아에서의 국가두마 선거는 1993년, 1995년 그리고 1999년 3차례에 걸쳐 실시되었다. 1993년 선거는 의회해산 이후 신헌법 채책과 더불어 실시되었으며, 초기에 한해 의원임기를 2년으로 규정해 1995년에 2차선거가 치러졌고, 이어 4년 뒤인 1999년에 3차선거가 실시되었다. 각 두마선거의 의의 및 선거 결과를 살펴보고, 정당정치의 특징 또한 파악해 본다.

  1. 1993년, 1995년 국가두마 선거와 정당

1993년에 실시된 국가두마 선거는 러시아연방 출범 이후 최초로 다수정당이 자유경쟁의 원칙하에 치러졌으며, 향후 경쟁적 다당체제 구도 형성의 모태가 된 선거였다. 총 투표율은 53%로 저조한 편이었으며, 모두 13개 정당이 참여한 가운데 8개 정당이 정당의석 배분 하한선인 5% 이상을 기록하였다. 이중 지리놉스끼의 자유민주당이 22.92%를 얻어 59석을 차지해 1위를 기록하였고, 가이다르의 러시아선택이 15.51%, 러시아공산당 12.40%, 야블로코가 7.86% 등을 얻었다.

이 선거를 계기로 시민동맹이 주도한 중도세력이 쇠퇴하고 러시아선택과 야블로코 등 개혁세력, 러시아연방공산당과 농업당 등 보수공산세력, 자유민주당으로 대별되는 극우민족세력이 주도하는 새로운 정당구도가 형성되었다. 구체적으로 전체의석 450석 가운데 개혁세력은 116석을 보수공산세력은 81석, 극우민족 세력은 64석, 중도세력은 42석을 그리고 무소속이 141석으로 무려 31.3%를 차지하였다.

아직까지 각 정당들은 정치지도자의 충원에 있어서 약간의 기능을 수행하였을 뿐, 정당지지 기반 미비, 선거전략 및 정강정책 제시면에 있어서 미숙함을 드러내었으며, 공산당을 제외하고는 조직 구조면에 있어서도 취약성을 나타냈다. 이러한 경향들은 각 정당들의 주요 정당지도자들에 대한 지나친 의존, 정당정치 경험 부족과 운영부족 등과 더불어 정당정치 발전의 제약요인으로 상존하고 있었다.

한편 1995년 선거는 1993년과는 달리 헌법적 테두리 내에서 특정 정치세력이 배제되지 않은채 헌법적 테두리 내에서 모두 43개의 정당과 선거블럭이 참여하였고, 정해진 시점에 치러지는 등 국가두마 선거에 있어서 일정한 법적, 제도적 절차를 공고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총 투표율은 1993년 보다 높은 64.4%를 기록하였으며, 선거결과는 공산당이 총 157석을 차지하는 등 공산세력의 득세와 민주세력 및 중도세력의 저조, 민족주의세력의 현상유지로 나타나 여소야대 구도를 띠었다. 또한 체르노미르딘의 우리집-러시아가 과거 러시아선택을 대체해 유사여당 내지 권력당으로 등장하였으며, 정당득표율 5% 하한선을 넘은 정당은 공산당, 자유민주당, 우리집-러시아, 야블로코 4개 정당 그쳤다.

이 선거를 통해 각 정당들은 이전에 비해 어느정도 선거전략을 갖춘 선거정당의 모습을 띠었으며, 정강정책면에서 더욱 세련되고 진전된 양상을 보였으며, 지지기반에 있어서도 사회적 기반을 토대로 한 대중정당으로의 전환 가능성도 보여주었다. 1995년 선거결과는 어느정도 러시아의 정당구도가 정립되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공산당 등은 보수세력들은 정당 조직과 구조, 인적구성 면에서 체계화를 이루고 있는 반면 권력당은 정치지도자의 권력유착관계 변화에 따라 부침하는 등 정당존재기반의 취약성과 러시아적 정당정치의 특성을 잘 나타내 주었다.

  2. 1999년 국가두마 선거와 정당

1999년 12월에 치러진 국가두마 선거는 대통령 선거를 앞둔 전초전의 성격을 띠었으며, 모두 28개의 선거연합 블록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크게 보아 親옐찐계 개혁세력, 反옐찐 중도세력, 공산세력, 非옐찐 개혁세력, 극우 민족세력 등 5개 진영으로 구분된다. 선거결과 '러시아연방공산당', '단결/곰', '조국-전러시아', '우익세력연합', '지리놉스끼 블록', '야블로코' 등 6개 정당만이 정당비례대표 하한선인 5% 이상의 지지를 획득하였으며, 비록 러시아연방공산당이 113석을 획득해 원내 제1당 위치를 차지하였지만 1995년의 159석에 비해 저조한 결과를 낳았다.

반면에 체첸전쟁의 전과에 따른 뿌찐 총리의 인기 급상승 여파로 유사여당 내지 권력당으로 급조된 '단결/곰'이 총 73석을 얻어 일거에 제2당으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끼리옌코, 츄바이스가 주도한 '우파세력연합'도 당초의 예상을 뛰어너머 선전하였다. 한편 쁘리마꼬프가 참여해 중도좌파 우파의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떠올랐던 릐즈꼬프의(현 모스크바 시장) '조국-전러시아'당은 정당지지 3위에 그치는 등 의외로 부진한 결과를 낳았다.

<1999년 12월 국가두마 선거결과> (2석 이상 정당 기준)

구분

 

정당 비례대표제

지역선거구

 

총계

 

%

인원

러시아연방공산당
단결/곰
조국-전러시아
야블로코
우파세력연합
지리놉스끼블록
우리집-러시아
전러시아정치운동-군지지
러시아전인민동맹
무소속

24.3
 23.3
 13.3
 8.5
 5.9
 6.0
 1.2
  0.6
  0.4
    -

67
64
37
24
16
17
-
-
-
-

47
9
 29
 5
  4
  -
  8
  2
  2
 105

114
73
 66
 29
  20
  17
  8
  8
   9
 105

    출처: 중앙선관위 발표문(1999.12.29) N.65/764-3.; www.rg.ru/oficial/doc/vybor_99/;             www. fci.ru/gd99/spiski/deputat_fz/
            * 8개 지역은 재투표 실시(2000.3.26), 체첸지역은 2000.8.20 실시

1999년도 국가두마 선거를 통해 러시아 정당정치는 1993년, 1995년에 이어 정해진 법적 절차에 의거 예정대로 제3기 의회를 구성하므로써 선거의 규칙성 확보 등 '절차적 민주주의'를 한 단계 높여 정치발전을 이끌어 낸 것으로 평가되며, 전체적으로 공산세력이 다소 쇠퇴됨과 동시에 상대적으로 친옐찐진영의 개혁세력이 약진하게 됨에 따라 그간 여소야대 구도속에서 전개되었던 '대통령 對 의회'간 첨예한 권력갈등을 벗어나 앞으로 범여권이 주도하는 구도속에서 새로운 의회정당정치를 전개시켜 나갈 수 있을지 주목되고 있다.

  3. 정당정치의 특징

지금까지 전개되어온 러시아 정당 및 정당정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당독재에서 다당체제로 전환되어 왔으나, 일천한 정당운영 경험속에 정당의 조직구조 등의 취약성을 나타내면서 수많은 정당들이 부침하고 있으며, 정당 본연의 기능과 역할 수행은 미흡한 단계에 놓여 있다.

둘째, 정당 형성에 있어서 유력한 정계 지도자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권력당의 경우 가이다르의 '러시아의 선택', 체르노미르딘의 '우리집-러시아' 나아가 쇼이구 비상대책부 장관이 이끄는 '단결/곰'에 나타나듯 권력의 유착관계에 따라 흥쇠가 결정되고 있다.

셋째, 1993, 95, 99년 선거과정을 통해 5% 이상의 비례대표 득표율을 얻은 정당, 즉 공산당공산당, 야블로코, 자유민주당 등은 지역별, 사회계층별로 지지기반이 보다 뚜렷해 지고  있으며, 나아가 정강정책이 보다 체계화되고 선거전략 면에 있어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하고 있다.

넷째, 1993년 이후 세 번에 걸쳐 이미 정해진 선거일정을 법적 테두리하에서 예정대로 소화해 냄으로써 선거의 규칙성 내지 정례성을 확보하였고, 정당과 선거관련 법적, 제도적 정비 또한 진전을 이루고 있다.

다섯째, 국가수반인 대통령이 특정정당에 소속되지 않고 정당을 초월한 입장속에서 정국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 향후 추이를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옐찐은 물론 뿌찐 역시 특정 정당에 속해 있지 않다.

여섯째, 향후 의회선거에 따라 다소 달라질 가능성 있지만, 대체적으로 공산당의 보수세력, 야블로코와 권력당의 개혁추진 세력, 지리놉스끼와 같은 민족 우익세력, 중도세력 등 정당에 기반한 정치세력이 공산, 개혁, 민족, 중도의 4각구도 틀로 정형화되어 가고 있는 점이다.

일곱째, 의회선거를 앞두고 기존 정당과 주요 정치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정당 분화, 연합 등 각 정치세력간 상호 전략적 제휴를 통한 정당구도의 재편과정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최근 뿌찐정부는 정당의 설립 요건을 당원수 최소 1만명 이상, 전국적으로 법정 지구당수 45개 등으로 강화시킴과(기존의 정당등록 요건 당원수는 500명 이상에 불과, 현재 새로운 요건에 충족되는 정당은 공산당과 단합/곰 2개에 불과) 동시에 대선과 총선 전국구에는 반드시 정당후보만 출마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정당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비록 뿌찐의 국가체제 강화 및 정치적 안정 도모 차원에서 정당제도 개혁을 시도하는 성격이 강하지만, 채택될 시 현재 난립하고 있는 군소정당들이 새롭게 정비됨은 물론 소수정당제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여, 향후 제정파들의 이합집산, 정당연합 등 러시아 정당구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치과정에서 정당의 위상과 역할이 강화되는 등 정당의 중요성이 보다 커지게 될 가능성도 높아, 앞으로 러시아의 정당정치 발전 향배와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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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국기, 문장, 국가


[국기]     [문장]     [국가]

 

러시아를 상징하는 국기(國旗)와 문장, 그리고 국가(國歌)는 1991년 독립이후 계속적인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었다. 옐친 대통령은 공산주의 체제와의 결별 선언을 상징하기 위하여 낫과 망치가 그려진 국기와 국가로서 인터내션얼가를 폐지하고 자유,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새로운 국기와 국가를 제정한 바 있다. 그러나 옐친 대통령의 후계자인 것처럼 보였던 푸틴 대통령은 오히려 구소련이 채택하였던 문장과 국가를 '과거와의 단절보다는 역사의 계승'이란 명분으로 부활시켰다.

2000년 12월 8일 러시아 의회(하원)는 푸틴 대통령이 제출한 국기, 문장, 국가를 공식적으로 통과시켰는데, 국기는 제정러시아의 깃발이던 삼색기(백, 청, 적)가 공인되었고, 문장은 제정러시아의 문장인 쌍두독수리와 성자 게오르기가, 국가는 소련 국가가 다시 채택된 것이다. 또한 소련시대의 국기는 사라지지 않고 군기(軍旗)로 사용하게 되었다. 국기, 나라 문장, 국가를 들러 싼 이같은 혼란과 논쟁은 러시아 국가 정체성과 향후 대외 정책의 방향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국    기

 



옐친정부가 제정하고 푸틴정부에서도 계속 사용하는 러시아 국기는 백색, 청색, 적색을 수평으로 3등분한 삼색기이다. 이같은 삼색기가 가장 최초로 나타난 것은 17세기 후반 알렉세이 황제 통치시절이었다. 알렉세이는 이미 오래 전부터 모스크바 문장에 사용되면서 러시아를 상징하던 이 깃발을 공식적으로 국기처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 삼색기는 표트르 1세 당시 처음에는 군함에, 나중에는 상선 머리에 꽂히는 깃발이었다. 이후 백-청-적 삼색기는 러시아의 도시와 시골의 축제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19세기 말, 짜르 정부는 백-청-적 삼색기를 러시아 국기로 승인하였고 1917년 혁명 전야까지 지속되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후 러시아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RSFSR: 러시아공화국)은 적색 깃발을 국기로 정하였고, 이어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USSR: 소련)의 탄생과 함께 낫과 망치가 새겨진 적색 깃발이 소련의 공식 국기로 등장하였다. 낫과 망치가 새겨진 붉은 깃발은 지난 1세기동안 미국과 자웅을 겨루는 강력한 러시아를 상징하였다. 그러나 1991년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소비에트의 해체를 선언하고 러시아의 부활을 선언함에 따라 다시 백-청-적 삼색기가 러시아 국기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옐친정부가 망치와 낫과 별의 문장이 붉은 깃발에 박혔던 국기를 폐지하였지만 푸틴정부는 부분적으로 이 국기를 부활시켰다. 여론조사에서도 전 국민의 거의 반수가 옛 국기인 붉은 깃발을 선호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또한 푸틴정부는 러시아 국민들의 뇌리에 강국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는 소련 시대의 국기를 군기(軍旗)로 부활시켰다.

 

 

   문    장

 



제정 러시아에서 사용되던 문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말탄 게오르기 승리자가 창을 들고 사악한 용을 찌르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쌍두독수리 모습이다. 전자는 모스크바의 문장이며 후자는 이반 3세 시절 즉 15세기 말에 비잔틴으로부터 계승받은 문장이다. 이렇게 두 가지 모습을 한 문장이 17세기부터 러시아를 상징하는 공식문장이 되었는데, 이때에는 왕관과 홀(笏), 황금구가 추가되었다. 쌍두 독수리의 머리 위에 각각 작은 왕관이 있고, 그 두 왕관 위에 하나의 큰 왕관이 설정되었다. 독수리의 오른 쪽 발에는 홀이 쥐어져 있고, 왼쪽 발에는 황금구가 쥐어져 있다. 홀은 세속 통치자의 권위를 상징하고, 황금구는 전 세계를 그리스도교화 하겠다는 상징으로 지구 위에 십자가가 놓여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세 개의 왕관은 통합된 러시아의 국가를 상징하였다. 18세기에는 문장에 색깔이 추가되었는데, 쌍두독수리는 검은 색으로, 바탕은 노란 색으로 처리되었고, 게오르기는 빨간 색 바탕에 청색으로 칠해 졌다.

1917년 공산주의 혁명이후 이러한 문장은 사라지고 러시아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이사용하는 붉은 바탕에 황토색의 낫과 망치가 밀을 배경으로 한 문장이 등장하였다. 1922년 소련이 공식적으로 출범하면서 문장은 다시 바뀌게 되는데, 지구 위에 낫과 망치가 놓여 있는 소비에트 문장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1991년 소연방이 해체되면서 제정러시아 시대에 사용되던 쌍두독수리 문장이 다시 부활하게 된 것이다. 현재 러시아 쌍두 독수리는 제정 러시아 문장을 약간 변형시킨 것으로 러시아 전통의 계승과 중앙권력의 권위를 상징한다. 3개의 왕관은 행정, 입법, 사법권을, 발톱의 홀과 구는 주권수호의 의지와 국가 통일성을, 모스크바 공국초기의 문장인 중앙기사 방패는 악과의 투쟁과 모스크바의 중요성을 의미한다.

 

 

   국    가

 


1991년 소연방의 해체이후 옐친정부는 "단련된 나라 우리 강자여! 적을 무찔러 나아가자"라고 하는 스탈린 시대의 호전적 국가를 폐지하고 볼셰비키 혁명 전 19세기에 불렀던 평화적인 애국가를 도입했다. 그러나 국기와 문장이 별 다른 저항없이 러시아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졌던 반면, 국가(國歌)는 조롱과 멸시의 대상으로 큰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러시아 국가(國歌)가 국가(國歌)로서 박진감이 없어서 인기가 없었던 데다 기존 세대는 이전 러시아 국가(國歌)를 거의 들어보지도 못하였기 때문이다.

푸틴 대통령은 옐친 전대통령과 일부 지식인, 인권단체들의 격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옛 소련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알렉산드로프 작곡의 국가를 21세기 러시아의 새로운 국가(國歌)로 채택하였다. 이 곡은 1943년 소련과 독일의 스탈린그라드 대전투에서 소련이 승리한 후 작곡되었는데, "결코 무너지지 않는 연방" 또는 "연방이여 영원하라!"로 제목을 갖고 있다. 미국과 견줄 수 있는 강력한 러시아 건설을 정치적 정당성으로 삼고 있는 푸틴 대통령에게 스탈린 시대의 강력한 국가 이미지를 갖고 있는 국가(國歌)가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극우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일부 정치인들은 향후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의 시작과 끝에 이 국가(國歌)를 반드시 방영케 하고, 나아가 국기 게양과 하강식에도 이 국가(國歌)를 연주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 러시아 국가 (러시아 원문)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гимн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УТВЕРЖДЕН
Указом Президента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от 30 декабря 2000 года
N0 2110

слова С.Михалкова
музыка А.Александровского

Россия - священная наша держава,
Россия - любимая наша страна.
Могучая воля, великая слава -
Твое достоянье на все времена!

ПРИПЕВ:
Славься, Отечество наше свободное,
Братских народов союз вековой,
Предками данная мудрость народная!
Славься, страна! Мы гордимся тобой!

От южных морей до полярного края
Раскинулись наши леса и поля.
Одна ты на свете! Одна ты такая -
Хранимая Богом родная земля!

ПРИПЕВ:

Широкий простор для мечты и для жизни
Грядущие нам открывают года.
Нам силу дает наша верность Отчизне.
Так было, так есть и так будет всегда!

 

자료출처:http://russia.co.kr/Doc/Thecountry.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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