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찬송가 488장, 새찬송가 428장) | 이애라 목사 찬양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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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십자가

 

요한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분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알아야 기도로 대화할 수 있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그 분이 어떤 분이고 어떤 삶을 사셨는지 잘 모릅니다.
그럼 구원의 유일한 문이요 길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의 이름

요한 1/17 이는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것이기 때문이라.
(For the law was given by Moses, but grace and truth came by Jesus Christ.) kjv

신약 성경에 나오는 '예수스'(Jesus, 지저스)라는 이름은 히브리 이름 '여호수아'의 단축형 '예슈아'의 헬라어
형태입니다.
이 예수의 이름 '여호수아' 속에는 하나님의 성호 네 글자 야훼(YHWH)가 축소되어 담겨져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인 YHWH의 정확한 발음은 알 수 없으나 보통 '야훼' 또는 '여호와'로 발음합니다.

예수님의 이름 속에는 '여호와는 구원하신다' 또는 '여호와는 도우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류 구원의 주체요, 모든 도움과 은혜의 주체적 행위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主)로 고백하는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예수님의 영이 성령의 능력으로 함께 하는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요한  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것은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마가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들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으며 새 언어들을
말하며 뱀들을 집어 올리며 어떤 치명적인 것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들에게 안수한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이는 하늘 아래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니라, 하였더라.

로마서  10/13 이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임이라.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이 시행하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새 언어(방언)을 말하며, 해를 않고, 병든 자를 치료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 이외에 다른 구원자가 없으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구원할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나의 구원주로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 했습니다.





2.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신 구세주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시대 4000년은 아담의 범죄에 대한 형벌 기간으로 죄와 율법에 얽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메시야를 보내 주셔서 온전한 구원을 이룰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 11/1~2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의 뿌리들에서 한 가지가 자랄 것이라. 주의 영이 그의 위에
머물리니 지혜와 명철의 영이요, 계획과 능력의 영이며, 지식과 주를 두려워하는 영이라.

이사야 선지자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를 뿌리로 하여 메시야가 다윗의 혈통에서 나실 것을 예언했는데
마태복음 1장에서는 자세한 족보를 들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의 영'(성령)이 그에게 강림하심으로써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이상세계를 이루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름에 잠긴 자, 기름이 부어진 자, 기름이 넘쳐 흐른 자,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누가 23/3 빌라도가 그에게 물어 말하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하니, 주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렇도다.”라고 하시니라.

히브리서 4/14 우리에게는 위대한 대제사장, 곧 하늘들로 올라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계시므로, 우리는
우리의 고백을 굳게 붙들어야 하리라.

마태 21/11 그 무리가 말하기를 "이분은 갈릴리 나사렛의 선지자 예수시라"고 하더라.

하나님 영이 강림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명자 역할을 한다는 것인데, 기름이 하나님의 영을 상징함으로 그리스도
(Christ, 기름 부음 받은 자, 헬라어) 또는 메시야(Messias, 기름 부음 받은자, 히브리어, 마쉬아흐)라고 합니다.
구약 시대에서 기름 부음 받은 사람들 중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왕, 제사장, 선지자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자, 신약시대의 대제사장이자, 말씀을 전하는 선자자(대언자)의 역할을 모두 하셨습니다.


미가 5/2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프라타야, 네가 비록 유다의 수천 가운데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통치할 자가
너로부터 내게로 나오리라. 그의 나오심은 예로부터요, 영원부터였느니라.

누가 2/4~7 요셉도 갈리리 나사렛 성읍에서 유대 다윗의 성읍, 즉 베들레헴이라는 곳으로 가니 (이는 그가 다윗 가문의
계열이기 때문이더라.) 그가 자기와 정혼한 아내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갔는데, 그녀는 아이로 인하여 배가 불렀더라.
그들이 그곳에 있는 동안 날이 차서 그녀가 해산하게 되었더라. 그리하여 그녀가 자기의 첫아들을 낳아 그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누이니, 이는 여관에 그들이 들 방이 없었기 때문이라.

미가 선지자는 유다의 작은 마을인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통치자가 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요셉이 조세 등록을 위해 갈릴리 나사렛에서 고향 베들레헴으로 정혼한 아내 마리아와 함께 갔습니다.
그것에 있는 동안 날이 차서 마리아가 아들 예수님을 낳음으로써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누가 2/11 이는 다윗의 고을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분은 주이신 그리스도시니라.
(For unto you is born this day in the city of David a Saviour, which is Christ the Lord.) kjv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주위에 있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다윗의 고을인 베들레헴에서 구주가 나셨는데
그분은 주이신 그리스도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이끌어 주는 주인이라는 의미에서 구주(救主, Savior, 구세주, 구원주, 구원자) 또는
주님(the Lord)으로 불리었습니다.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한 표적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보라, 한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선지자는 한 처녀가 남자와 동침하지 않고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 예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사이였지만 동침하기 전에 임신을 했습니다.

마태 1/20~21 그가 이 일들을 생각하고 있을 때에, 보라, 주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 말하기를 “너 다윗의
아들 요셉아, 마리아를 네 아내로 삼는 일을 두려워 말라. 그녀에게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그녀가
한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주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니라.”고 하니라.

이에 요셉이 파혼하려고 하자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아기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의 이름을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해 줄 것이기 때문에 '예수'라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하느님(야훼)은 구원해 주신다'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4/15 이는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할 수 없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기 때문이라.

벧전 1/19 흠도 점도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기 때문이라.

예수님이 처녀 잉태로 세상에 오신 것은 원죄를 상속 받지 않고 하늘이 주신 깨끗한 몸으로 오시기 위함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 없이 태어나셨고, 죄를 짓지도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를 가져갈 흠 없는 어린 양이 되신 것입니다.


이사야 53/5 그러나 그는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고, 그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상하였도다.
우리의 화평을 위한 징계가 그에게 내려졌고, 그가 맞은 채찍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도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실 것을 암시하는 구절로 우리 죄를 대신해 고통을 받으실 것을 예언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해 벌을 받으실 어린 양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야 초림에 관한 구약의 예언 48가지를 성취하셨는데, 이는 확률적으로 우연히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성취하신 대표적인 예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로부터 오실 것이다(민 24:17-19).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 될 것이다(창 12:3 ;17:19, 민24:17).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다(미 5:2).
그리스도는 처녀에게서 태어나실 것이다(사 7:14).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때는 상세히 예언되어 있다(단 9:25).
그리스도의 오심은 그의 선두주자에 의해서 선포될 것이다(사 4:3-4).
메시야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다(사 9:6).
그는 어린 시절을 이집트에서 보내실 것이다(호 11:1).
그는 고난을 받고 속죄를 이루실 것이다(사 53장).
그는 나귀의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것이다(슼 9:9).
그가 고통 중에 있을 때 쓸개즙과 식초가 주어질 것이다(시 69:21).
그의 뼈는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시 43:20).
사람들은 그의 옷을 나눠 갖기 위하여 제비를 뽑을 것이다(시 22:18).
그는 죽음의 고통 가운데서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기록된 어떤 말들을 할 것이다(시 22:1).
그는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질 것이다(시 16:10).
그리스도는 친구에 의해 배반당한 것이다(시 41:9).
그는 은 삼십에 팔릴 것이다(슼 11:12).
그는 거짓 증인에 의해 모함받을 것이다(시 35:11).
그는 침 뱉음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맞을 것이다(사 50:6).
그는 이유없이 미움을 받을 것이다(시 35:19).
그는 멸시와 조롱을 당할 것이다(시 22:7,8).




3.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각 시대마다 새로운 계명을 주시며, 그 계명을 지키면 구원 받고, 지키지 못하면 심판을 받습니다.
아담 때는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고, 노아 때는 방주를 짓고 타라는 계명을 주셨으며,
모세 이후에는 율법과 제사법을 주어 지키게 하였습니다.
신약시대에 예수님이 오신 것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법, 즉 생명의 말씀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누가 5/37~38 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붓는 사람은 아무도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그 가죽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쏟아지고 가죽 부대도 망가지리라. 그러나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부어야만 하나니,
그리하면 둘 다 보존되느니라.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왜 금식하지 않는냐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지,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가죽 부대가 터져 못 쓰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낡은 가죽 부대는 구약시대, 새 가죽 부대는 신약 시대, 새 포도주는 생명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시대가 왔으니 이전 시대의 법인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 6/68 그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여,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 주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나이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 것은 영생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영생이란 영원한 생명(Eterner Life)으로 죽었던 우리 영이 살아나 영원한 천국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반해 구약 시대에는 영이 죽었기 때문에 육신의 계명에 관한 율법과 육신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법밖에
받을 수 없었으며 이로 인해 영의 온전한 구원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 그럼 구약 시대의 율법과 제사법이 신약 시대에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a) 형식에 얽매었던 육적인 제사가 하나님을 영적으로 섬기는 경배(예배)로 바뀌었습니다.


요한 4/24 하나님은 한 영이시니 그 분께 경배드리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경배드려야만 하리라.고 하시니라.
(God is a Spirit : and they that worship him must worship him in spirit and in truth.) kjv


사마리아 여인이 꼭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려야 하느냐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한 영이시니 영과 진리로
경배드리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영이 살아 났기 때문에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영적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영광 돌리면 되는 것입니다.
제사(offering)는 신께 헌물을 드리는 의미가 있지만 경배(worship, 예배)는 신을 공경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태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

신약시대에는 영이 살아 났기 때문에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도 당당히 하나님께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화하듯이 기도로써 우리의 소원을 말하면 아버지가 자녀의 소원을 들어 주듯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 줄
것이라 하셨습니다.
영이 죽었던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구하기는커녕,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에 급급했었습니다.



b) 육신에 관한 율법이 영에 관한 생명의 말씀으로 바뀌었습니다.


율법은 육체가 도덕적으로 타락하지 않기 위해 주신 법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인데 우상 섬기지 말고, 살인, 간음, 도적질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육신에 관한 법으로 영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영에 관한 진리 말씀이 바로 생명의 법이며,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Ⅰ) 주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습니다.

구약 시대 때는 모든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고, 그 중 하나라도 어기면 저주를 받았습니다.
사람이 죄 없이 깨끗하기도 어렵지만 모든 율법을 지켰다 하더라도 영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요한 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마태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주는 그리스도,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더라.

요한 14/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 가운데 보내신 이유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멸망치 않고
영생(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아들이자, 나의 유일한 구원주임을 믿어야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 5/24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정죄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느니라.


요한 1/14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므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 6/48~51 나는 그 생명의 빵이라. 너희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죽었으나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니
그것을 먹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또 내가 줄 이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줄 나의 살이라."고 하시니라.

마태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현명한 사람과 같아서


예수님을 나의 구원주로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주신 말씀을 들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고,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니 나를 먹으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실체가 말씀이니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믿어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신앙의 집을 반석 위에 지은 현명한 사람입니다.



Ⅱ)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마태 22/37~3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며, 큰 계명이니라.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예수님이 주신 계명 가운데 가장 핵심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섬기는 것이 아나라 네 마음과 혼(자아)과 생각(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십니다.
늘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두고 생각하고 사랑해야 죄와 사탄이 틈을 타지 못합니다.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가까운 사람 뿐만 아나라 불우한 이웃들까지 사랑해 도우란 것입니다.

출애굽기 21/23~25 만일 어떤 피해가 따르면 그때는 생명은 생명으로 갚아야 하며,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인 것은 데임으로, 상처는 상처로, 매질한 것은 매질한 것으로 갚을지니라.

마태 5/44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천대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구약시대에는 내게 해를 끼치는 사람은 그대로 갚아 주었지만, 신약시대에는 나의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를 잘해 주고, 나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내게 해를 끼치는 원수를 미워하지 않기도 힘든데 사랑한다는 건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원한은 나를 악하게 만든다는 걸 생각할 때 오히려 원수를 불쌍히 여기고, 더 이상
죄 짓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영의 사랑은 육신의 감정적 사랑과는 다릅니다.
육신의 사랑은 외모나 일시적 기분에 의해서 좋아지나 시간이 지나면 싫증나고 실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의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거룩하고 숭고하고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이며 무한하고 영원한 사랑입니다.

고전 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고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급히 성내지 아니하며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를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뎌 내느니라.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사랑은 인내하고, 친절하고, 온유하고, 시기 질투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이기적이지 않고,
예의 바르고, 화내지 않고, 선하고, 진리를 기뻐하며, 모든 것을 바라고 믿고 참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점점 미움과 시기와 타툼이 심해지고, 이혼율이 높아가는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악하지 않고, 선한 진리와 겸손과 인내와 믿음으로 다져진 하나님의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Ⅲ) 내게 죄 지은 자를 무조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마태 18/21~22 그때 베드로가 주께 나와 말씀드리기를 "주여, 내 형제가 내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하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에게 일곱 번까지라고
말하지 않고,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고 하노라.

누가 17/4 그가 하루에 일곱 번이나 너에게 죄를 짓고, 또 하루에 일곱 번이나 너에게 돌아와서 '내가 회개한다.'고
말하면 그를 용서하라."고 하시더라.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일곱 번 정도 용서해 주면 되겠습니까? 라고 물어 보니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 즉 490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했습니다.
또한 형제가 하루에 일곱 번이나 자신에게 죄를 짓고, 일곱 번 회개이나 회개한다면 그를 용서해 주라고 하십니다.
이는 형제의 잘못에 대해 복수하거나 원한을 품지 말고 무조건 용서하라고 것입니다.

마태 18/33 내가 너를 가엾게 여김 같이 너도 네 동료 종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당연하지 아니하냐?


그리고 그 이유를 마태 18/23~35 에서 빚 탕감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우리의 큰 죄를 은혜로 탕감해 주셨는데 우리가 형제의 작은 죄를 용서치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지만 구원 받은 자는 최소한의 도리를 지켜야 계속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마태 6/12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의 빚진 것도 용서해 주옵시며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도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의 빚진 것도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겨 다니면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맞았는데도 그를 미워하지 않고 용서했습니다.
사울왕을 죽일 기회도 있었지만 죽이지 않고, 그가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바랬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도 악행을 반복하던 사울왕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로마서 12/19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스스로 복수하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은 나의
일이니 내가 갚으리라. 주가 말하노라."고 하였느니라.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벧전 2/21~23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한 본을 남겨 놓으시어, 너희로 그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짓지도 아니 하셨고, 그 입에는 간사함도
없으셨으며, 모욕을 당하셨으나 다시 모욕으로 갚지 아니하셨고, 고통을 당하셨으나 다시 위협하지 아니하셨으며,
오직 의롭게 심판하는 분께 자신을 의탁하셨느니라.

이와 같이 악인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이 하는 것이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에 대해 악으로 대항하면 악에게 지는 것이고, 악에 대해 선으로 대응하면 악에게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다시 모욕으로 갚지 아니하시고, 고통을 당하셨으나 다시 위협하지 않음으로
원수를 사랑하고, 죄를 용서하며, 선으로 악을 이긴 본을 친히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Ⅳ)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겸손하라고 하십니다.


마태 7/1~3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라. 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받을
것이며, 너희가 재는 그 자로 너희도 다시 측정을 받으리라.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생각지 못하느냐?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형제의 허물을 비웃고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해 상처주는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다 똑같은 죄인인데도 자신의 잘못은 깨닫지 못하고 남의 탓만 합니다.
학교에서는 마음에 안 드는 급우를 집단 따돌림 시키고 괴롭힙니다.
집단 따돌림 당한 학생은 마음에 심한 상처를 입고 우울증에 걸리거나 자살하기까지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상대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오히려 덮어주고 감싸줘야 겠습니다.



Ⅴ) 마음으로 범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6/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한 보화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악한 보화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그 입이 말하기 때문이라.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선한 행동을 하고,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결국 악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미운 마음을 가지면, 결국 나도 모르게 그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죄의 발생지인 마음을 바르게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구약시대에는 행동으로 범죄한 것이 것이 죄이지만, 신약시대에는 마음으로 범죄한 것도 죄가 됩니다.

야고보서 1/15 그러므로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느니라.

사람이 마음에 욕심이 생기면 죄를 짓게 되고 점점 더 큰 죄를 지어 영육간의 파멸(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인간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자전거 타면 소형차라도 타고 싶고, 소형차 타면 중형차 타고 싶고, 중형차 타면 외제차 타고 싶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저급한 육신의 감정에 얽매이지 말고, '차원 높은'(영적인) 진리를 추구(사모)하며 살아야겠습니다.





4. 유대인은 왜 예수님을 배척했나?

유대인들은 자신을 구원할 왕이자 구원주인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핍박하며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믿게 하기 위해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죽은 사람까지 살리셨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세인 서기관 같은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며 시기하고 미워했습니다.
죄인, 세리, 창녀, 어부 등 순수한 하층민만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기고 따랐을 뿐입니다.

* 그럼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배척했는지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a) 위선과 탐욕에 빠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을 예수님이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는 예수님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을 신랄(辛辣)하게 지적하십니다.
대표적인 잘못은 형식주의와 위선에 빠져서 겉으로는 경건한 채 하고 높임을 받지만 속으로는 각종 죄악과 탐욕이
가득 찬 회칠한 무덤과 같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은 희생하기 싫어하면서 남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우고, 말과 행실이 다른 것 등을 지적하셨습니다.

마태 23/14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들이 과부들의 집을 삼키며
남들에게 보이고자 길게 기도하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너희는 더 큰 심판을 받으리라.

마태 23/25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나 속은 약탈과 방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

마태 23/27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회칠한 무덤들처럼 실로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도다.

누구든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면 싫은 법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지적을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드리지 않고 오히려 분개했습니다.
민중의 마음이 예수님에게로 쏠리자 이에 밥줄이 끊길 것을 염려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세우게 됩니다.



b)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이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한 10/33 유대인들이 주께 대답하여 말하기를 "선한 일로 인하여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모독하기
때문이라. 이는 네가 사람이면서 하나님으로 자처하기 때문이라."고 하니라.

요한 19/7 유대인들이 그에게 대답하기를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는데 우리의 율법에 따르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하나이다. 이는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이니이다."라고 하더라.

레위기 24/16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지니, 모든 회중이 분명히 그를 돌로 칠지니라. 타국인도
그가 주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 땅에서 난 자와 마찬가지로 죽을지니라.

예수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니라"고 하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사람이면서 하나님으로 자처한 것은 신성모독이라며
예수님을 돌로 치려 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율법에 따르면 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이 하나님 내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이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요한 14/10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에게 하는 말들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 일들을 하시는 것이라.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자 예수님은 나를 본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언행은 아버지께서 그안에 계셔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 병자를 고쳐 주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등 엄청난 능력을 행하셨고, 우리를 구원할
온전한 진리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마태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주는 그리스도,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더라.

시편 8/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깊이 생각하시오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찾아오시나이까?

마태 27/54 백부장과 그와 함께 예수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크게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하더라.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합니다.
인간은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부모(사람)로부터 태어난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 인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과 형상을 그대로 닮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지진과 기적이 일어나자 백부장과 지키던 사람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시인합니다.



c) 율법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을 율법 파괴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고 분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은 일하지 말라는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었고, 떡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일하지 말라는 안식일에 손마른 사람, 귀신들려 꼬부라진 여자,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유대인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고 그를 믿기 보다는 율법으로 그를 트집 잡았습니다.


마태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서를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기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루려고 왔노라.

예수님은 새 시대의 법을 선포하러 오셨기 때문에 법이 바뀌었으니 이전의 법은 효력을 잃었습니다.
예를 들어 박정희 군사정권에서는 밤 12시 이후에 다니는 것이 통행금지 죄에 해당했지만 지금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법을 선포하신 예수님은 구약시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 모두를 폐하신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6/6 우리가 이것을 아나니 곧 우리 옛 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처형된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더 이상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율법 중 제사의식이나 형식적인 규례는 지킬 필요가 없지만 도덕적인 계명은 여전히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지킬 수 없는 율법을 폐하시고, 더 높은 차원의 영의 법인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근원이 되는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난 새 생명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랑으로 가득찬 사람은 형제에게 거짓말 하거나 도적질 하거나 해를 끼치지 않으므로 율법이 저절로 지켜지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더 이상적으로 발전시켜 완성시킨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린 아이였을 때에는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서 종 노릇 하였으나

율법은 초등학문이고, 초등학문을 거쳐 고등학문인 생명의 법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도 초등학교를 나와야 중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육신에 관한 율법은 영의 법을 맞기 위한 과정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지키지 않는다고 지적한 것은 율법도 아닌 장로들이 만든 전통인 유전이었습니다.

마태 15/2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어기나이까?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라고 하니,



d)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교만에 빠져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요한 7/52 그들이 대답하여, 그에게 말하기를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갈릴리에서는 어떤 선지자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으니 찾아보라."고 하더라.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교만과 위선에 빠져 유대의 변방 지역이었던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경건하고 위엄있다고 생각한 이들은 시골 출신이자 누추한 차림의 예수님께 머리를 굽힌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가 2/17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병든
사람들에게는 필요하니라.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들을 회개에 이르게 하려고 왔노라."고 하시니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왜 예수님이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지 물으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건강한 자가
아닌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예수님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려고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암환자가 암세포가 온 몸에 퍼지고 있는데도 나는 건강하다고 버티면 의사가 치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잘나고 똑똑한 사람도 이런 상황에선 의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따라야 합니다.

야고보서 4/6 그러나 그가 더 많은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그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거절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느니라.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땐 나는 구제불능의 죄인이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으며,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오직 예수님만 믿고 의지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지극히 거룩하시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은 교만하고 마음이 부유하며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절하시고,
겸손하고 마음이 가난하며 애통해 하는 자를 찾아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5. 유대인의 배역은 은혜에 대한 거부인가?

예수님께서는 여러 비유를 통해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는 혼인잔치 비유가 나오는데 임금이 아들 혼인잔치를 위해 종들을 보내서 사람들을 초청하나
다 자기 일에 바뻐 무관심 할 뿐만이 아니라 보낸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동네를 불사르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천국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들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마태 21/33~41에서는 포도원 비유가 나오는데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나가서 열매가 익을 때 소출을 받으려고 종들을 보내니 심히 때리고 죽이니 '내 아들은 공경하겠지' 라고 생각하고
아들을 보내나 상속자 아들을 죽여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아들도 죽이니 포도원 주인이 돌아와 이 악한자들을
진멸하고 다른 농부들에게 농장을 줍니다.
이 역시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과 예수님을 죽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거부한 유대인들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살전 2/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계시록 2/9 내가 너의 행위와 궁핍을 아노라. 자칭 유대인이라고 말하는 그들의 모독을 아노니,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요, 오히려 사탄의 회당이니라.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사도들을 핍박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초대교회 성도들을 훼방하고 박해한 유대인들의 모독을 아신다고 하시면서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사탄의 회당이라고 합니다.

에스라 7/13 내가 칙령을 내리노니 내 영토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서 자원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마음먹은 자들은 다 너와 함께 갈지어다.
(I make a decree, that all they of the people of Israel, and of his priests and Levites, in my realm, which
are minded of their own freewill to go up to Jerusalem, go with thee.)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와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freewill) 때문입니다.
freewill은 '자유의지'로 내가 누구의 간섭 없이 내 마음대로 행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원격조종 로봇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이브도 자신이 가진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길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5/11 내가 사울을 세워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이는 그가 나를 따르는 것에서 돌이켜 내 계명들을
이행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슬퍼하여 밤새도록 주께 부르짖더라.

사무엘상 16/7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나 키의 크기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이는 주가 보는 것이 사람이 보는 것과 같지 아니하기 때문이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

하나님은 사울을 세워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자신의 마음대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도 후회를 하십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자식 잘 못 되는 것을 어쩔 수 없듯이 하나님도 인간이 자유의지에 관여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후에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outward appearance) 보다 마음(heart)을 보시고 다윗을 왕으로 삼으십니다.

출애굽기 19/5~6 그러므로 이제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 음성에 복종하고 나의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백성보다
나에게 독특한 보물이 되리니, 이는 온 땅이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에게 제사장들의 왕국이 되며 거룩한 민족이
되리라.' 이것이 내가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고할 말이니라." 하시니라.

이사야 49/6 그가 또 말씀하셨도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의 보존된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라. 내가 또한 너를 이방인들에게 빛으로 주리니 네가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되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에 복종하면 모든 백성보다 독특한 보물이 되고, 제사장 왕국이자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이방인의 빛으로 삼아 땅 끝까지 구원을 베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아 온갖 죄악과 우상숭배에 빠졌고, 결정적으로 구원주이자 왕인
예수님을 받아 들이지 않아 심판을 받게 되었으며, 이방인에게 그 모든 복락이 돌아갔습니다.

로마서 5/10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도 그의 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으니 더욱더 화해하게
된 우리는 그의 생명으로 인하여 구원받게 되리라.

2,000년전 유대인의 불신과 무지로 예수님이 돌아가셨지만 유대인은 죄 많은 우리 인간을 예표합니다.
즉 죄인된 인간이 의인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용서하셨고, 우리는 우리 죄를 대신해 흘리신 그의 피로써 죄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된 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님의 깊은 사랑에 감사해야 합니다.



* 유대인의 배역은 다음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합니다.


첫째는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마태 23/35~36 그리하여 의로운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모든 것이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마태 27/25 모든 백성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하더라.

누가 19/43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칠 것이니, 너의 원수들이 흙언덕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사면으로부터 너를 공격하여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죽인 선지자들의 의로운 피가 유대인에게 돌아갈 것을 예언하셨고, 유대인들은 스스로
예수님을 죽인 무죄한 피를 자신과 자손들에게 돌린다고 하였습니다.
AD 70년에 로마 군대가 반란을 일으킨 유대민족을 진압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는데 주위에 흙언덕을
쌓고 입성합니다.

마가 13/2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 거대한 건물들을 보느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고 하시니라.

로마군은 성전의 금을 약탈하기 위해 성전을 모두 무너뜨리고, 유대인들을 대량학살 했으며, 나라를 자체를 없애고,
남은 자들을 노예로 팔아 넘겼습니다.
또한 유대인은 2000년 가까이 전 세계를 유랑하며 온갖 핍박과 수모를 당했고,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600만명이라는
기록적인 학살을 당했으니 메시야를 죽인 죄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이방인(비 유대인)에 대한 선교입니다.

로마서 2/28~29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체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요,
할례는 마음의 할례이니 영에 있고 법문에 있지 않은 것이라. 그들의 찬사는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니라.

혼인잔치 비유와 포도원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본격적으로 이방인 선교가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 선교를 위해 지중해 인근 여러 나라를 순회하였고,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유대인은 구세주인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선택받은 민족으로서의 특권을 잃어버렸습니다.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는 혈통적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요한 4/19~20 이것이 정죄라. 즉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빛보다는 오히려 더 어두움을 사랑하니 이는 그들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라. 악을 행하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혹 자기의 행위가
책망받을까 함이라.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하게 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한 후에 어떻게 해서든지 내 자신이 버림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나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본능과 쾌락과 욕심에 빠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육신을 예표하는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였고, 참혹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어두움(죄, 거짓, 사탄)을 좋아하는 육신은 본능적으로 빛(의, 진리, 하나님)을 멀리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온전한 구원을 위해서는 반항적인 자기 육신을 억제해 복종시켜야 합니다.





6.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지는 의미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드리면 구원이고, 거부하면 심판인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온 인류를 심판하고 사탄에게 내어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믿는 조건까지 대신 세워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써
내 모든 죄가 씻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요한 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같이 인자도 그렇게 들려올려져야만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3/1 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가운데서 너희
눈 앞에 분명하게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어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를 설명한 구절로 출애굽 때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불신하고 불평 불만을 늘어 놓아
하나님으로부터 심팜을 받았지만 놋 뱀을 쳐다 보아야 불 뱀에 물리지 않았던 것처럼, 신약시대에 예수님을 불신했던
인류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 보아야지만 구원(멸망치 않고 영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눈 앞에 보이므로 거짓에 속지 말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너희를 교란시키는 어떤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개시키려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십자가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각 시대마다 구원 받을 수 있는 계명을 주시는데 이는 인간 스스로 바꿀 수 없습니다.
아담 때에는 선악과 따 먹지 말라는 계명이 있었고, 노아 때에는 방주에 타라는 계명이 있었으며, 모세 이후에는
십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계명입니다.

에베소서 1/7 그 사랑하시는 이 안에서 우리가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즉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느니라.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주이자 그리스도로 시인하고, 그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셨으며,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써 내 모든 죄가 씻어져 죄사함 받는다는 것을 믿는 것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계명입니다.
예수님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모진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고전 1/22~24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를 전파하노니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거치는 것이 되고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 되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유대인들에게나 헬라인들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또 하나님의 지혜니라.

계시록 7/14 내가 그에게 말씀드리기를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들은 대환난에서 나온
사람들이며 자기들의 옷을 씻어 어린 양의 피로 희게 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은 십자가 복음이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게는 거치는 것이고, 지혜를 찾는 헬라인에게는 어리석게 들리지만
누구든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합니다.
계시록에서는 말세 때 대환난을 피하는 사람은 어린 양(예수님)의 피로 자기 옷을 씻어 희게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즉 말세 때 구원 받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 받아 거룩하고 의롭게 된 사람입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가지는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a) 대속 (代贖, substitution)

대속은 죄를 대신 받는다는 말로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시대에 자신의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기 위해서는 성막에서 자신의 죄를 무죄한 염소나 양에게 안수해
전한 다음 제사장이 암염소나 어린 암컷양을 잡아 피를 번제단 뿔에 바르고 단 밑에 쏟은 다음 나머지를 번제단에
불살라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마태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골로새서 1/14 그 안에서 우리가 그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느니라.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신의 피로 한 번 성소에 들어가셔서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속을
이루셨느니라.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스스로 '흠 없는'(죄 없는) 어린 양이 되어서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내 모든 죄가 깨끗이 씻어져 용서
받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b) 구속 (球贖, redemption)

구속이란 죄인을 속전을 내고 건져낸다는 말로 예수님이 죄인된 우리를 마귀로부터 건져내기 위해 피로써 죄값을
치루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죄로 감금된 사람을 보석금을 내고 석방시켜 주는 것이나, 노예로 예속된 사람을 '몸 값'(ransom)을 주고
해방시켜 주는 것과 같습니다.


마태 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몸값으로
주려고 온 것이라."고 하시더라.

고전 6/20 너희는 값을 치루고 산 것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딤전 2/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몸 값으로 내어 주셨으니 때가 이르면 증거되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희생과 은혜로 사탄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았으니 우리 모두 예수님에게 빚진 자입니다.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구하기 위해 예수님은 엄청난 희생과 고초를 감수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우리를 용서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피로써 값을 치루고 산 존재이니 구원 받은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쉐키나찬양대 / 남가주사랑의교회

 

 

 

제 6 편 민족 복음화를 향한 교회의 협력



 


    제1장 하나의 교회를 찾는 문서운동 전개

    1.성경국역 출판사업

    1906년에 출간된 신약이나 1911년에 나온 구약의 구역성경은 1937년에 개역신약이
    나올 때까지 한국교회의 유일의 공인 성경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시대적인 변천에 따라 현대인에게 적합한 번역이 나와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게
    되었고,그리고 1947년의 사해 사본(Dead Sea Scrolls)발견으로 인한 전세계적인
    성경 번역의 붐의 영향도 있고 해서 1960년에는 우리 전 세계적인
    성경 번역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리하여 1967년 12월 드디어 새번역 신약성경이 출판되는 장거가 있었다.

    한편, 새로운 세계사의 동향은 1962년 10월 이래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갈라진 교회와의 재일치를 기본 방침으로 정하게 되면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도
    여기에 적응하여 모든 교회에서의 일치의 소망을 추세화 하기에 이르렀다.

    그 행동적 실천의 하나가 세계성서공회 연합회와 로마 교황청 성서위원회와
    사이에 성경 공동 간행위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에서는 1968년 2월에
    공동번역위원회가 조직되었고 9년간의 애씀 끝에 1977년 부활절을 기하여
    공동번역 성경의 완역 간행을 보았다.

    이는 로마 카톨릭교회나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연합하여 최초로 우리말로
    성경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한국교회 자체뿐 아니라 한국 민족 전체를 위하여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뜻깊은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도 반발과 거부가
    없은 것은 아니었다.

    공동번역 성경이 오리지날 텍스트로부터 조심성 있게 번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보수적 신앙의 학자들은
    교리사적 해설학적 관점에서 비난의 소리를
    높이고 있다. 로마
    카톨릭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괜찮다는 긍정적 태도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구약과 신약사이에 편삽한 제2경전이 정경으로
    취급되지 않고 외경으로 되어 잇음이 싫다는 논난을 펴고 있다.

    현실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이 성경 번역 사업의 완수는 한국 성경번역 사상
    하나의 새로운 기원을 획하였다고 하는 점에서 얼마든지 높은 평가를 가할 수 있으며
    한국민족 기독교 역사 상에 있어서 영원 불멸의 공적을 쌓았다는 점에서
    상당한 칭찬을 받을만 하다.

    2. 찬송가 출간과 보급

    해방을 맞이하면서 하나의 찬송을 부르면서 한 마음 한뜻으로 전도하자는
    좋은 생각으로 장로회와 감리교와 성결교가 합동하여 1949년에 합동찬송가를
    출간하여 약 20년간 사용하여 왔다. 그동안에 한국교회가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였으니 보다 나은 그리고 보다 올바르게 새 시대에 맞는 찬송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뜻에서 1967년에는 개편찬송가를 출간하였다.

    그러나 이 찬송가는 개편위원회의 구성원으로 된 대한예수교장로회와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등에서만 호응을 얻었고
    나머지 여러 교단에서는 따로 '새찬송가'를 만들어 사용하거나
    또는 여전히 합동찬송가를 계속하여 사용하는 사정이었다.

    한분 하나님을 섬기면서 한 입으로 하나의 찬송을 부름이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인은 세가지의 찬송을 불러 혼잡을 일으키고 있으니
    그 불편이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고 교회 분열의 아픔을
    씻기 위한 위안을 얻기 위해서도 통일된 찬송가의 출현은 바람직하기만 하였다.

    이러한 교계 여론이 크게 일어나자 국내 20개 교단으로 총망라된
    한국찬송가통일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상당한 노심 끝에 1978년 가을에는
    하나의 통일찬송가가 나온다고 하니 이는 한국기독교의 또 하나의 역사적 의의를
    지닌 쾌거로서 다 같이 기뻐하고 싶으며, 이 찬송가 통일작업은 먼 훗날에
    그 누구를 통해서도 소중히 기림을 받는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원본자료 출처; 한국 컴퓨터 선교회 http://kcm.co.kr.에서 복사본 입니다.)

 

 

 

 

교회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할 용어


기도시 사용하지 말아야 할 용어


1.  "썩을 육신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일하라"로"
2.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봉사하는"이란 표현은"
     예수 이름으로 봉사하고 있기 때문에 적절치  못하다.
3.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 드렸습니다"는"
    "예수님(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로"
4.  "예배를 돕는 성가대"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가대(성가대도 예배를 드림)"로"
5.  "축복하여 주시옵소서"는"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로"
6.  "이제 시작하는 시간이오니 마치는 시간까지  "
    도와 주시옵소서"는"
    이미 종을 "땡" 하고 친 그 때부터 예배가 시작되었으므로  "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7.  "이 죄인" 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못하다."
     이미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보혈로 죄 용서 받은 의인이므로
8.  "주옥 같은 말씀으로"는"
     발음의 강세에 따라 다른 말로 전달 될 수 있음(예: 지옥)
9.  "당신"은"
    "하나님"또는"주님"으로"
10."컬컬한 마음으로 왔으나"는 기도 용어로 부적절함"
11. 우리~저희, 나~저, 주의종~주님의 사자, 제단~교회"
     안식일~주일, 주일학교~교회학교"
12. 목사님의 신원을 강건케 하옵소서.
     목사님 건강에 대해 직접적인 표현삼가 (병중으로 오해가능)

 

교회에서 일상적으로 쓰지 말아야 할 용어

1.  "주일 대예배"는"
    "주일 낮(1,2,3부)예배, 주일 예배"로"
2.  "삼일 기도회"는"
    "수요일 저녁 예배 또는 주중예배"로"
    "3. "예배 보다"는"
    "예배하다(예배 드리다)"로(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4.  "주기도문"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로"

 

사회시 쓰지 말아야 할 용어

1.  "받들어 봉독해 올리겠습니다"는"
    "읽겠습니다""봉독하겠습니다"로"
2.  "목사님의 설교에 은혜 많이 받으십시오" "
     (사회자는 사용금지)는
    "목사님께서 말씀을 증거해 주시겠습니다"(은혜는 하나님이 주심)로"

 

대표기도시  주의사항


"오중복음과  삼박자  축복이란  기도는  하지 마십시요
"지금은 첫  시간이오니  마치는  시간까지는  하지 마십시요
"주의 종이란  말을  하지마십시요.
"목사님의  주옥같은  말씀은  하지 마십시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 하지 마십시요.
"영혼이 죽을수 밖에 없는말씀은 하지 마십시요.
"교역자와 구역장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마십시요.
"성경말씀을 많이 넣지 마십시요.
"계절,날씨에  관한사항은  하지마십시요."
"기도시  마이크에서  20cm 이상  떨어지십시요.
"마이크에  손대지  마십시요.
"기도자는 주보를 보고 사회자를 확인후 예배15분전에는 사회자와 같이 단상에

올라 가십시요.
"예배시  바른 자세로 앉으시고  다리를 꼬지 마십시요.
"기도 소요시간은은 2분~3분내로 하십시요.
"기도문을 사전에 꼭작성하여 보면서 기도 하십시요.

 

 

 

 

(별첨)

기독교 용어 연구위원회 연구자료


기도와 관련된 용어


1. 당신→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은총으로…”

  “하나님 아버지, 당신께서 세우신 이 교회를…”

와 같이 하나님을 ‘당신’이라 부르는 것을 종종 보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만일 어느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 당신이 주신 돈으로 이것을 샀습니다.”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말은 의당 다음과 같이 고쳐서 말해야 한다.

  “아버지, 아버지가 주신 돈으로 이것을 샀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직접 들으시는 분으로서 2인칭이다. 우리말 2인칭 ‘당신’은 결코 존대어가 될 수 없다. ‘당신’은 다만 3인칭에서는 극존대어로 쓰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3인칭이 될 수 없고 우리 간구를 들으시는 분으로서 2인칭에 해당되므로 ‘당신’이란 호칭은 안 된다.


2. 기도 드렸습니다(기도하였습니다)→기도 드립니다(기도합니다)

  기도를 끝낼 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와 같이 동사 ‘기도하다’의 시제를 현재형으로 써야 하는데 요즈음 이를 ‘기도하였습니다.’, ‘기도 드렸습니다.’와 같이 과거형을 쓰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는 것을 본다. 이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5분이나 10분전에 기도를 시작했으므로 간구한 모든 말들은 문법적으로는 이미 과거 또는 현재완료가 되므로 동사 ‘기도하다’의 과거형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각도에서 볼 때 바람직하지 않다. 기도(祈禱)는 글자 그대로 그 핵심이 하나님께 아뢰는 우리의 간구다. 간구의 내용은 소원이며 소원은 미래 지향적이다. 이러한 미래 지향적인 소원을, 즉 우리의 바람을 ‘기도하였습니다’로 끝낼 수는 없다. 기도의 핵심인 간구의 내용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영원한 현재성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기도의 마무리는 과거가 아닌, 현재로 끝내는 것이 옳다. 


3. 주여. 하나님 아버지시여→주님. 하나님 아버지


  기도할 때 하나님을 향해 ‘주여’, ‘주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하나님 아버지시여’ 라 부르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어법상의 문제가 있다. 즉 2인칭 존칭 명사에 호격 조사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 국어에서는 2인칭 존칭 명사에 호격 조사가 붙지 못한다. 2인칭에는 존칭이 아닌 경우에 한하여 호격 조사 ‘-아’나 ‘-야’가 붙을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친구 사이나 아랫사람에게는

  “복동아.”

  “철수야.”

와 같이 부를 수 있지만 손윗사람에게는 호격 조사를 붙일 수 없기 때문에

  “아버님이시여.”

  “할아버님이시여.”

라 부르는 것은 불가하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존칭의 2인칭이 되기 때문에 이미 사어가 된 ‘-이여’, ‘-이시여’를 붙여서는 안되고 그저 ‘주님’,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로 해야 옳다.


4. 우리 성도님들이→ 저희들이, 교회의 권속들이… 등등


  국어 존대법에서는 청자(聽者)가 최상위자일 경우 다른 어떤 인물에게도 존대를 쓸 수 없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말은 바른 표현이 못된다.

  “할아버지. 형님이 가셨어요.”

  “아버지. 누님이 오셨어요.”

  첫째 문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청자인 ‘할아버지‘와 주어인 ‘형님’ 및 화자(話者)인 손자 ‘나’다. 여기서 청자인 ‘할아버지’가 최상위자이므로 ‘형님’과 ‘나’는 존대를 받을 수 없다.

  둘째 문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청자인 ‘아버지’와 주어인 ‘누님’과 화자인 ‘나’다. 여기서도 청자인 ‘아버지’가 최상위자이기 때문에 ‘누님’과 ‘나’는 존대를 받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위의 문장들은 다음과 같이 고쳐야 한다.

  “할아버지. 형이 갔어요.”

  “아버지. 누나가 왔어요.”

  공중기도에서 기도 인도자는 회중과 동일한 입장, 동일한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즉 기도 인도자는 회중과 동격이다. 그러므로 지존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회중을 가리켜 ‘우리 성도님들’이라 존대를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단순히 ‘저희들’, ‘교회의 권속들’ 등으로 바꾸어야 한다.


5. 대표기도→기도 인도


  예배 순서 가운데 기도 시간이 되면 예배 인도자가

  “우리를 대표해서 ooo님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ooo님이 기도하시겠습니다.”

  “ooo님이 대표 기도를 하시겠습니다.”

와 같은 안내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적절한 표현이 못된다. 온 회중이 머리를 숙여 무언의 기도를 할 때 한 사람이 소리를 내어 기도를 할 경우 우리는 이를 ‘기도 인도’라 부르는 것이 좋다. 기도 인도자는 기도의 대표자가 아니다. 이 기도 인도자는 그와 함께 머리를 숙인 다른 사람들과 분리될 수 없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또는 생각까지도 그들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기도 인도자는 대표로 뽑힌 어느 운동선수와는 다르다. 그는 대표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며 그와 함께 머리를 숙인 온 회중의 생각을, 즉 그들의 소원을 보다 깊게, 보다 하나님 뜻에 맞게 아울러 그 절차를 정리해 주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다. 기도 인도자가 기도할 때 회중은 결코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에게는 대표성이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에게는 대표성이 인정될 수 없다.  만인제사장의 사상은 하나님 앞에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는 신학사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도 기도에 있어서 ‘대표’, ‘대신’은 불가하다. 그러므로 ‘대표기도’, ‘대신하여 기도…’는 ‘기도 인도’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


6. 사랑의 예수님→ 사랑의 하나님


  기도 서두에 ‘…하나님’ 대신에 ‘사랑의 예수님’, ‘고마우신 예수님’ 등으로 하나님 아버지가 아닌 예수님을 호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를 끝낼 때 반드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에게 우리의 소원을 아뢴 후 다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기도는 일차적으로 성부 되신 하나님 아버지께 성자 되신 예수님 이름으로 아뢰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고 하신 말씀에 근거를 둔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도 그 서두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되어 있다. 역시 이 속에도 성부 하나님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 기도의 본임을 알아야 한다.


7. 참 좋으신 하나님→거룩하신, 은혜로우신, 전능하신, 진실하신, 자비로우신…하나님


  기도 서두에 하나님을 부르면서 그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로 요즈음 ‘참 좋으신’과 같은 말이 사용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이것은 재고를 요하는 말이라 하겠다. 즉 성경에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로 쓰인 말들을 보면 ‘거룩하신’, ‘만유의’, ‘생명의’, ‘신실하신’, ‘의로우신’, ‘자비하신’, ‘영원하신’, ‘위에 계신’, ‘능력이신’, ‘진실하신’, ‘구원하시는’, ‘하늘에 계신’, ‘사유하시는’, ‘은혜로우신’, ‘보수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홀로 하나이신’, ‘천지를 지으신’… 등과 같이 대부분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들이 수식어로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참 좋으신’은 이 범주에 들지 않는 수식어가 된다. 즉 ‘참 좋으신’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의 주관적인 감정, 정서로 느끼는 바대로 표현한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얄팍한 주관적인 감정으로 그 속성을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를 과장하여 발전시킨다면 ‘사랑스러운 하나님’(‘사랑의 하나님’과는 판이한 뜻이 된다.), ‘미운 하나님’, ‘야속한 하나님’, ‘귀찮은 하나님’… 등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예배. 예식 분야


8. 사회자 ---> 인도자(예배시)    


  예배를 주관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

  사회(司會)라는 말은 회의나 의식을 진행하는 일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우리의 문화권에서는 사회자라고 하면 마땅히 일반 회의의 진행자를 의미한다. 교회에서도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예배가 아닌 결혼예식이나 임직식 같은 인간 중심의 의식에서는 진행을 맡은 사람을 사회자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현장에서 사회자라는 명칭은 경건성의 결여를 느끼게 하므로 단순한 사회자(presider)의 개념을 넘어 예배 인도자(Worship Leader)로 부름이 타당하다. 인도(引導)의 사전적 의미는 “알려주며 이끄는 일”이므로 예배 인도라는 말을 회의에서의 사회와 구분지음이 타당하다고 본다.

   본 교단 1998년 총회에서 통과된 표준 예식서에는 모든 예배의 진행자는 인도자(引導者)로, 성례전과 같은 예전의 경우는 집례자로 표기하였음을 밝힌다.

9. 성가대 ---> 찬양대


  우리 한국 교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전담한 찬양대를 최근에 ‘성가대’로 많이 부르고 있다. 이 말은 출판사들이 흑인영가와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르는데서 보편화되었다. 실제로 1960년대까지 우리 한국 교회는 찬양대라는 이름이 통용되었고 성가대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러나 일본의 ‘세이카다이--성가대(聖歌隊)’가 그대로 직수입되면서 성경에도 없는 '성가대’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성가라는 말은 불교를 비롯하여 모든 종교에서 부르는 노래이며, 우리의 ‘찬양’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행위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성가대’라는 용어는 성경의 정신과 우리의 고유한 이름인 ‘찬양대’로 바꾸어 부름이 타당하다.


10.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용불가(설교시)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는 한 인간이 특정한 개인이나 단체를 위하여 어떤 사실이나 바람을 주님의 이름으로 빌고 원하는 뜻을 표현한 말이다. 이러한 표현이 설교 가운데서 진행되는 것이 타당한가를 연구 검토시킨 바 있는 본 교단 총회는 1981년 65회 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연구보고서를 채택한 바 있다.

  먼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기에 설교에 인간의 기도식 기원이나 기도 등의 형식을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둘째, 설교는 설교대로, 기도는 기도대로, 축도는 축도대로 하는 것이 좋다.

  셋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의 사용은 회중에게 자극을 주고 흥분시켜 “아멘”으로 응답하지 않고는 안 되게 만들어 설교의 질서를 문란케 하고 미신적 기복 사상을 키워 줄 우려가 있다.

  넷째, 설교의 근본 목적이 흐려지고 회중들에게는 설교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아멘”을 하게 하는 식으로 유혹되기 쉽다.

  연구위원회는 이상과 같은 내용을 보고하면서 설교시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를 하지 않도록 건의하였고 총회는 이를 아무 이의 없이 통과시킨 바 있다. 이러한 결정은 매우 적절한 것으로서 한국교회의 설교 사역을 바로잡는 일이라 보아 설교시에 이 말의 사용을 억제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11. 대예배-->주일 예배


  예배는 하나님께서 창세 이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속의 크신 사랑을 깨달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감사함으로 응답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는데 있어서 큰 예배가 있고 작은 예배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응답의 행위가 예배일진대, 거기에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언제부터인지 주일 낮에 드리는 예배를 지칭하여 대예배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많은 교회들이 주일 낮에 드리는 예배 때에 가장 많은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온 말인 것 같다. 그러나 분명히 대예배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논리적으로 대예배가 있다면 소예배도 있다는 말인데, 어떠한 예배도 하나님 앞에서 소예배일 수가 없다. 그 예배가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한에 있어서, 어떤 예배도 소예배일 수가 없다. 다만 예배일뿐이다.

  물론 시간별로 예배를 구분할 수는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일 예배라든지, 주일 저녁(오후) 찬양 예배라든지, 혹은 시간에 따라 1부 예배, 2부 예배라고 부르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대예배”라는 용어는 합당한 말이 아니다.


12. 열린 예배-->열린 집회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1990년대 이후에 한국 교회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원래 이 예배는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로 알려진 집회의 형태로, 서울의 한 대형교회를 통하여 소개되면서 한국 교회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본래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구도자”라는 부자연스러운 번역 대신에 1990년대 초에 유행하던 “열린”이라는 단어로 의역한 것으로 “구도자의 집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열린 예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수 있도록 배려하는 형식과 접근 방법을 택한 구도자의 집회를 말한다. 그러므로 열린 예배가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엄밀하게 따져서 예배라기보다는 “전도집회”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불신자들, 혹은 구도자들은 아직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은 사람들이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직 예배드릴 자격도 없고, 예배드릴 마음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은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사랑에 응답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또 한 가지 예배의 기본 정신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에 대해 감사로 응답하는 드림에 있지, 예배를 통해서 무엇을 받거나 추구하는 데 있지 않다. 그런데 이런 면에서 볼 때 열린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응답의 행위여야 하지, 인간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에 예배가 회중지향적이 되고, 예배의 근본적인 목적이 드림에 있지 아니하고, 무엇인가 그 예배를 통해서 얻어내는데 목적이 있다면 --비록 그것이 영혼구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을 위한 집회이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아니다. 그러므로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차라리 “열린 집회”로 부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 이후에 많은 교회에서는 불신자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한 “구도자의 집회”와는 별도로 신자 중심의 “열린 예배”를 드리고 있다. 즉 구도자를 중심으로 하는 전도 집회로서의 열린 예배의 개념보다는 기존 신자들에게 새로운 생동감을 주는 예배로서의 열린 예배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예배는 주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형식적이고 딱딱한 전통적인 예배를 벗어나서 잔치적이고 시각적이며 회중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많이 격려하는 생동감 넘치는 예배인데, 이를 가리켜서 “열린 예배”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대로 “열린 예배”라는 용어 자체가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가능하면 “열린 예배”라는 용어의 사용은 삼가는 좋겠다. 의미상으로도 “열린 예배”가 있다면 “닫힌 예배”도 있다는 말인데, 무엇이 열린 예배이고, 무엇이 닫힌 예배인가? 또 무엇에 대해서 열려있고, 무엇에 대해서 닫혀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굳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활기 있는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열린” 이라는 용어보다는 “젊은이 예배” 혹은 “찬양 예배” 등으로 사용하고,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13. 예배봐준다-->사용불가


  흔히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개업예배를 봐준다.” “구역예배를 봐준다.”는 표현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응답 행위이다. 즉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깨달은 사람이 참된 감사와 찬양과 헌신과 고백의 응답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예배를 봐준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예배는 구원의 은총을 깨달은 내가,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와 감격으로 드리는 행위요, 응답하는 행위이지,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드리거나 봐주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치 “점을 봐준다.”는 미신적인 용어를 상기케 하는 “예배봐준다.”는 표현은 예배 신학적으로 볼 때에 받아들일 수 없는 잘못된 용어이다.


14. 준비찬송-->사용불가


  찬송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곡조가 있는 시이다. 찬송은 하나님 앞에 곡을 붙인 성도들의 경배의 표현이며, 기도이며, 때로는 성도들의 신앙고백과 결단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을 생각하고 감사의 응답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모이면 열심히 찬송 부르는 것을 성도의 바른 자세로 알고 찬송을 열심히 부른다. 그러나 이렇게 찬송의 생활이 습관화 되다보니 때때로 찬송의 목적이 변질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준비찬송”이라는 말에서 찾아보게 된다. 교회에서 “다같이 준비 찬송을 부르면서 앞자리부터 채우도록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하나님께 영광과 경배를 드려야 할 찬송을 자리를 정돈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이런 말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찬송을 시간을 메우기 위한 수단이나 자리를 정돈하는 데 필요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준비찬송”이라는 용어는 마땅히 사용해서는 안 된다.


15. 예배/예식/기도회-->구별사용


  한국교회는 어느 나라의 교회보다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이다. 그래서 예배와 각종 기도회로 한 주일에 여러 차례 모인다. 주일 낮을 비롯하여 주일 저녁, 수요일 저녁, 금요일 밤, 그리고 매일 새벽 등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열심은 세계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혼란스럽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모든 모임에 예배라는 명칭을 붙여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심지어는 돌, 회갑, 추모 등의 모임에도 예배라는 명칭을 붙임으로써 진정한 예배의 의미를 희석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배와 예식과 기도회를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신 창조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구속의 은총을 깨닫고 감격하여 드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응답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결코 인간을 위한 모임이거나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예배와 예식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돌, 회갑, 추도, 입학, 졸업, 결혼, 입당, 임직, 교회 창립 등의 행사를 할 경우에는 예식으로 표현하고, 예배와 혼동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도를 목적으로 모이는 수요 저녁 모임과 금요 철야 혹은 심야 모임 그리고 매일 새벽 모임 등은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그리고 새벽기도회 등으로 명시해야 한다. 

  이러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하여 본 교단 총회를 통과한 ꡔ표준예식서ꡕ의 정신을 따라 다음과 같이 정리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주일예배,  주일 저녁 찬양예배, 주일학교 예배, 수요기도회, 철야기도회, 경건회(각종 회의 시작 전)


16. 헌금-->봉헌  

  한국 교회의 예배 순서 가운데 “헌금”이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가 있다. 이 순서는 원래 봉헌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 예배 속에서 봉헌의 순서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봉헌의 의미는 단순히 돈이나 예물을 드리는 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봉헌은 하나님의 은총 앞에 성도들이 드리는 응답적 행위를 총칭하는 말이다. 즉 봉헌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정성을 다하여 경청한 무리들이 스스로 우러나는 감사의 응답으로 내어놓는 모든 마음과 정성의 표현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순서를 “헌금”이라는 용어로, 즉 단순히 돈을 바치는 행위로 지칭하는 것은 봉헌의 의미를 아주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헌금”이라는 용어보다는 “봉헌”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이 마땅하다.


17. 축제--> 잔치 (때에 따라 절기행사, 축하행사...)


  우리말 큰 사전에서는 '축제'를 “축하하고 제사지냄”이라고 단순하게 풀이하여 실어 놓았으나 이가원과 임창순의 ꡔ東亞漢韓中辭典ꡕ에서는 "축제란 제사 이름이니, 묘문(廟門) 안과 밖에서 이틀에 걸쳐서 드리는 묘문제로서 조상을 사당 안에서 제사지내고, 그 다음날 사당 밖에서 지내는 제사이다“라고 정의해 놓았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마을 제사를 영어의 Celebration 과 Festival 같은 축하행사를 보면서 자신들이 제사에서 마음놓고 떠들고 소리지르면서 춤추는 고유한 행사와 모양새가 비슷함을 알고, 1928년에 '축제'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그들의 사전에 도입한 바 있다. 이상과 같은 축제의 문제점을 보면서 이제는 성경대로 잔치, 또는 때에 따라 절기행사, 축하행사 등으로 사용할 것을 권장한다. 예를 들어 성령 축제-->성령 잔치, 부활절 축제-->부활절 절기 행사, 성탄 축제-->성탄 축하 행사 등이다. 참고로 공동번역에서는 57회, 표준 새번역에서는 13회에 걸쳐 무분별하게 축제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으나 개역 성경과 개역 개정판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음을 밝힌다.


18. 하나님의 축복 --> 하나님이 주신 복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 하나님! 복 주시옵소서

  한국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복에 관한 표현들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축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저 사람은 축복 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축복된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상과 같은 표현들을 볼 때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복을 비는 존재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라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점이다. 다음의 성구에서는 하나님이 복을 비는[祝福] 분이 아니라 복을 주시는[降福] 분임을 잘 밝히고 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 지라"(개역 한글판 창 12:3)

  "그가(멜기세덱)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개역 한글판 창 14:19)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는 “하나님! 복 주시옵소서” 또는 “복 내려(베풀어) 주시옵소서"로 바로잡음이 타당하다.


장례 분야


19. 소천(召天)하셨다 -->별세(別世)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숨을 거두었다.


  최근에 한국 교회 어느 지도자의 죽음을 알리는 광고에서 “고 000 목사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소천하셨다”는 문장을 보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역사와 전통에서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교회에서 발표한 이러한 광고는 매우 부끄러운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소천(召天)이라는 어휘는 우리말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로서 교회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의미의 표현이라면 이 어휘는 능동형으로 사용할 수 없고 수동형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소명(召命)이나 소집(召集)이란 단어의 경우 능동형일 때 그 주체는 부르는 존재를 말한다. 예를 들면 목사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를 찾은 학생이 “나는 소명했다”고 말하지 않고 “나는 소명을 받았다”고 표현한다. 비록 사전에도 없는 어휘이지만 굳이 이 단어를 사용하고자 하는 경우 “소천을 받았다”로 해야 한다.

  그러나 이토록 실수가 많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불러온 대로 죽음을 알리고자 하는 경우는 “별세(別世)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로 사용함이 적절하다고 본다.


20.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고인의 명복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장례문화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용어이다. 그런 까닭에 누구나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의 교회에서도 흔히 사용하고 있는 현장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어느 장례예식에서 목사가 “이제 침묵으로 고인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드립시다” 하는 경우도 있었고, 조문객이 문상을 하면서 유족들에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고 인사를 한다.

   그러나 '명복(冥福)'이라는 용어는 우리 기독교에서 사용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이 말은 불교의 전용어로서 불교 신자가 죽은 후에 가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곳을 명부(冥府)라 하는데 거기서 받게 되는 복을 가리킨 말이다. 곧, 죽은 자들이 복된 심판을 받아 극락에 가게 되기를 바란다는 불교의 내세관에서 통용되는 용어이다.

  이러한 용어가 지금껏 교회에서 종종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의 교회에서는 그러한 용어 대신 순수하게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든지, 또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와 같은 말로 유족을 위로함이 타당하다.


21. 미망인 --> 고인의 부인, 고인의 유족


  미망인(未亡人)이라는 용어는 순장(殉葬)제도에서 유래된 말이다. 순장이란 어떤 특정한 사람의 죽음을 뒤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강제로 죽여서 먼저 죽은 시신과 함께 묻는 장례 풍속을 말한다. 이러한 풍속은 고대 중국의 은나라와 이집트를 비롯하여 아프리카 지역에서 성행하였다. 특히 인도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따라 분신 자살하여 순장되는 ‘사티ꡑ라는 풍습이 1829년 법으로써 금지되기까지 존속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의 22대 지증왕 3년(주후 502년)에 왕명에 의하여 순장 금지되기까지 이러한 제도가 존속되었다.

  이런 순장제도가 성행할 때나 쓰일 수 있었던 ‘미망인’ 이라는 용어의 뜻을 풀어 보면 “남편이 죽었기에 마땅히 죽어야 할 몸인데 아직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여인”이라는 뜻이 된다. 이러한 용어의 뜻을 알았을 때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말임을 깨닫게 된다.


22. 칠성판(七星板)--> 고정판 또는 시정판


  우리의 장례문화에 변화가 일고 있으나 아직껏 가정에서 죽음을 맞은 경우가 많으며 그 때마다 목회자가 직접 시신을 다루는 일이 많다. 이때 시신이 반듯하게 굳어지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널빤지를 시신 밑에 깔고 손발의 위치를 반듯이 잡아 준다. 여기에 사용되는 널빤지 사용의 전통적인 관례가 이 널빤지에 북두칠성을 본 따서 일곱 개의 구멍을 뚫었다 하여 ‘칠성판’이라 부른다. 흔히 우리 교회에서도 적당한 이름을 못 찾아 ‘칠성판’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 유래는 별이 인간의 길흉화복과 수명을 지배한다는 도교의 믿음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교회가 이러한 토속 신앙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시신을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기에 순수하게 ‘고정판(固定板)’ 또는 ‘시정판(屍定板)’으로 부름이 타당하다.


23. 영결식, 고별식 -->장례예식

  인간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진행하는 예식을 칭하는 용어로서 ‘영결식’. ‘고별식’. ‘발인식’ 등 다양한 명칭이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이 담고 있는 뜻이 우리의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영결식은 ‘영원히 이별한다’는 뜻이며 고별식은 ‘작별을 고한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는 교리와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기에 이러한 표현은 적당하지 못하다. 그리고 발인식은 시신을 담은 상여가 집에서 떠남을 뜻하기에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한다.

  이러한 용어의 문제점을 바로잡기 위하여 본 교단 총회에서는 표준 예식서를 통하여 이미 장례예식으로 정리하였기에 이제는 모두가 ‘장례예식’이라는 용어로 통일하여 사용해야 한다.


24. 삼우제(三虞祭)--> 첫 성묘(省墓)


  우제(虞祭)란 장례를 마친 뒤에 지내는 제사로서 우리의 장례문화에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다. 이 때의 제사는 세 번 갖게 되는데 그것을 초우(初虞) 재우(再虞) 삼우(三虞)라 한다. 이 중에 아직도 삼우제라는 이름은 교회 안팎에서 사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최근의 삼우제는 장사 지낸 뒤 3일 만에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관례로 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성묘란 시체를 묻고 뫼를 만드는 일, 즉 산역(山役)이 잘 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주목적이다. 아직도 매장 문화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한국 교회에서는 가족들이 3일만에 성묘를 하는 일이 보편적이다. 이러한 실정을 감안하여 본 교단의 표준 예식서에는 삼우제라는 이름을 ‘첫 성묘’로 부르도록 하였는데, 매우 적절한 용어라고 본다.


회의 용어


25. 고퇴-->고퇴 또는 의사봉


  한국의 장로교회는 정규 회의에 사용하는 의사봉(議事棒)을 ‘고퇴’라는 독특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이 용어는 국가나 사회 기관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는 명칭이며, 한국 교회 가운데서도 장로교회에서만 제한적으로 쓰고 있는데 그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재 교회에서 대한 예수교 장로회 노회를 창설하는 회의가 열렸던 때의 일이다. 절차위원장이 은으로 십자를 면에 새기고 청홍으로 태극을 머리에 그리고 광채 있는 은으로 띠를 띤 견고한 ‘마치’를 마삼열 회장에게 전달했다. 회장은 이 물건이 영원토록 대한 장로교 노회의 마치가 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이 ‘마치’란 이름이 속되다는 의견이 있어 회장은 기일, 한석진 두 사람에게 이름을 개정하도록 임무를 맡겼다. 두 위원은 이틀 후 회의에서 ‘나무마치 퇴(槌)’자와 ‘고두’라 할 때 쓰는 ‘두드릴 고(叩)’자를 합하여 ‘고퇴’라 정했음을 보고하였고, 이것을 길선주 회원의 동의로 받아들였다.

  이처럼 ‘고퇴’라는 명칭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 노회에서 작명되어 결의 과정을 거친 것이므로 공식적 효력을 가진 용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용어가 노회 창설 때 제작된 의사봉에 대한 개별 명칭으로 지어졌고, 기독교적 의미를 포함하지 않은 이름이며, 장로교회 밖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특수용어임을 고려하여, 장로회 총회의 상징적 의사봉 만을 ‘고퇴’라 부르고 그 외에는 ‘의사봉’이나 ‘사회봉(司會棒)’이라는 현대적 용어로 바꾸어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


26. 자벽-->지명, 임명


  교회 회의록에 종종 ‘회장 자벽’이라는 기록이 보이고, 심지어 ‘자백’이라고 잘못 써 놓은 사례까지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고어에 유래를 두고 있어 현대에 와서 거의 세력을 잃어버린 말을 교회가 고수하다보니 이처럼 생소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자벽(自辟)이란, 장관이 자기 뜻대로 관원을 추천하여 벼슬을 시키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이는 <수교집록(受敎輯錄)> <조선철종실록(朝鮮哲宗實錄)>에서 용례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벽 행위는 각 관아의 우두머리가 아무런 기준도 없이 자기 사람들을 특정한 자리에 대거 기용함으로써 심각한 폐단을 가져오게 되었다. 따라서 이 용어가 지니고 있는 사회적 의미나 정서가 결코 긍정적일 수 없었다.

  이 말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의장이 임의로 어떤 임원을 임명하는 일’로 바뀌었으나 어감은 여전히 부정적으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각종 회의에서 굳이 이 용어를 고집하고 있다. 대체로 회의 벽두에 특별위원을 선정하는 경우에 국한하여 사용되고 있는데, 회장의 자의임명이 불가피한 형편이라면 ‘회장 자벽’이라는 용어 대신에 ‘회장 임명’또는 ‘회장 지명’으로 고쳐 쓰는 것이 좋겠다.


27. 증경-->전(前)


  ‘증경(曾經)’이란 용어는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하지 않았고, 중국의 고대시가에 기원을 둔 특수한 말이다. 증(曾)은 ‘일찍이’라는 뜻이고, 경(經)은 ‘지내다’라는 훈을 가지고 있으므로 ‘일찍이 지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고대 중국 당나라의 시인이었던 노조린(盧照隣)이라는 사람의 작품 <장안고의(長安古意)>에서 ‘증경’이라는 시어가 나오는데, ‘증경학무도방년(曾經學舞度芳年)’ -일찍이 춤 배우느라고 젊은 시절을 보내었다네- 정도이므로 그다지 심오한 뜻을 갖고 있지 않다.

  한자어를 전통적으로 존중하며 차용하기 좋아했던 선비들이 이런 희귀한 용어를 우리나라에 들여왔고, 한국 교회도 교단을 위하여 일한 경력이 있는 분들에게 경의를 표시하고자 이 단어를 부각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교회 바깥에서는 이 용어를 전혀 쓰지 않고 있어 ‘증경대통령’ ‘증경총장’ ‘증경사장’이라는 호칭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교회에서만 ‘증경총회장’ ‘증경노회장’으로 부르며 심지어 ‘증경청년회장’이라고까지 하여 이 단어를 남용하는 실정이다. 신분을 존중하기 위해 중국의 고대어를 써야 할 이유는 없다. ‘전총회장’이라고 하여 존대의 정도가 손상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28. 휘장 분배-->꽃 증정


  총회나 노회에서 개회를 선포한 직후 ‘휘장 분배’라는 순서를 갖는 경우가 있다. 최근에는 점차 이를 생략하는 추세이지만, 역대 회장들과 주요 임원들이 일제히 단상으로 올라가 도열하면 이어서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들이 등장하여 임원들의 가슴에 꽃을 꽂아 드리는 모습은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휘장(徽章)’이란 신분이나 지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모자나 의복에 붙이는 표를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표지(標識)’라고도 할 수 있고, 이미 익숙해진 영어 단어로 ‘배지(badge)’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회의 초반에 원로회원에게 상징적인 지위를 부여하고자 배지 대신 가슴에 꽂아 드리는 꽃은 결코 휘장이라 할 수 없으며, 이 순서 또한 매우 형식적이라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분배(分配)’라는 용어 역시 재고되어야 한다. 분배는 고르게 나누어준다는 뜻이므로, 원로들에게 표지를 고루 나누어주는 순서라는 의미는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굳이 이 순서를 사용하려 한다면 ‘꽃 증정’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가장 타당하리라 본다.      


교회생활


29. 당회장  -> 담임목사. 당회장(당회 회의 때)


  많은 교회에서 담임 목사를 당회장으로 부르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예배순서를 실은 주보나 교회 게시판에 당회장 000 목사라고 기록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의 어느 교회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다.

  원래 당회장이란 영어의 Moderator로서 토론이나 회의의 사회자 또는 중재자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그래서 당회 회의를 주관하는 목사를 비롯하여 노회와 총회의 회의를 주관하는 사람을 모두 ‘모더레이터’라고 부른다. 그러기 때문에 당회를 주관하는 순간에는 목사를 ‘당회장’이라고 부를 수 있으나 그 외의 시간이나 장소에서는 ‘목사’ 또는 ‘담임목사’로 부름이 타당하다. 이 호칭이 바로잡아지지 않으면 장로를 언제 어디서나 ‘당회원’으로 불러야하는 모순을 낳게 된다. 


30. 예수 -> 예수님   성령 -> 성령님


  우리의 언어문화는 윗분들을 호칭할 때 ‘님’자의 사용을 엄격하게 가르친다. 특히 자신이 섬기는 신의 존재를 호칭할 때는 ’님‘자 또는 그 이상의 존칭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불교의 신도들은 ’부처님‘ ’부처님 오신 날‘과 같이 철저히 ’님‘자를 사용하여 높임의 뜻을 나타낸다.

  우리의 기독교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되 그 위(位)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분하게 되어있다. 성삼위가 동격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가지고 한동안 논쟁이 활발히 전개된 바 있다. 그러나 325년 니케야 공회의에서는 제2 위격 예수님의 신성문제가 확정되었고,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제3 위이신 성령님의 신성문제를 확정하였다. 이로써 삼위일체의 교리는 기독교에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성삼위는 동격이신데 어느 위에는 ‘님’자를 붙여 호칭을 하고, 어느 위에는 그렇지 아니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나 ‘예수님’ 뿐만 아니라 ‘성령님’을 호칭할 때도 ‘님’자를 사용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희생’ ‘성령님의 역사’로 언어의 순화를 가져 올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31. 전야제 -> 전야 축하행사


  이 용어는 ‘축제’라는 말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미 ‘부활절 축제’ ‘성탄 축제’라는 용어를 ‘부활절 절기행사’ ‘성탄 축하행사’ 등으로 바꾸어 써야 할 필요성을 밝혔으므로, 부활절 전날 밤에 갖는 행사도 당연히 ‘부활절 전야제’ 대신 ‘부활절 전야 축하행사’라고 불러야 한다.

  전야제는 전날 밤에 여는 축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각종 제사가 새벽에 열리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앞날의 밤은 이것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대보름이나 중추절 같은 명절의 전날은 밝은 달을 바라보며 축하의 행사를 펼치기에 적절했었다.

  성경에는 어떤 행사에서 전야에 모여 축하 자리를 마련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현대의 교회에서는 부활이나 성탄처럼 새벽에 이루어진 일을 축하하기 위한 전야 행사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이런 행사를 가리키는 용어는 ‘전야제’ 대신 ‘전야 축하행사’라고 하여 제사의 성격을 배제하고, 밤 깊은 시간까지 축하한다는 순수한 의미를 담는 것이 좋겠다.  


32. 사모 →사모님


   예로부터 스승을 높여 사부님이라 했으며 이에 걸맞게 스승의 부인을 높이어서 사모님이라 불렀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 안에서는 목사 부인도 사모님이라  부르고 있다. 선생이 자신을 사부라 부를 수 없듯이 선생이나 목사도 자기 부인을 사모라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어느 목사가 자기 부인을 가리켜 사모라고 한 다음과 같은 표현은 잘못 된 것이다.

“우리 집 사모는 다녀왔지요” 

  또한 선생 부인이나 목사 부인들도 자신을 사모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그런데 최근 목사 부인들이 모여서 “사모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는데 이 “사모회”는 바람직한 용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목사 부인들이 자신을 사모라 지칭했기 때문이다.

  이 “사모”는 주로 제자나 평신도들이 선생 부인이나 목사 부인을 높여 불러 주는 말이기 때문에 실제 사용 될 때는 “사모님”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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