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중앙아시아에서 의 시련과 극복 |
강제 이주 이후 한인의 거주 이전은 제한되었다. 한인들은 일정한 거주 구역이 명시된 신분증을 소지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적어도 1953년까지 약 16년 간 집단적으로 수용소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민족 교육이 금지되었음은 물론 국가 기관 취업과 취학에도 제한이 있었다. 사회 정치적 진출도 사실상 봉쇄되어 있었다. 이 모든 제한은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비로소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한인은 벼농사를 시작하여 우즈베키스탄은 주요 쌀농사 지역으로 변화하였다. 한인은 목화 등 다른 작물에서도 뛰어난 실적을 올리면서 빠르게 정착해 갔다. 전후 한인은 중앙아시아 개발에 앞장서 특유의 개척 정신과 영농법으로 수많은 모범 콜호즈를 탄생시켰다. 소연방이 자랑하던 콜호즈는 모두 한인 콜호즈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노력 영웅을 낳았음은 물론이다. 인구 대비 노력 영웅 비율은 모든 민족 가운데 최고를 자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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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에서의 집단 농장생활 자세히 알아보기
소련의 정부책은 서서히 실행에 옮겨졌다. 이른바 콜호즈를 만들어 양식을 수탈해내는 정책이 그것이었다. 우즈베크 공화국 안에 있는 ‘스베르드보프 콜호즈’는 연해주 남쪽 ‘신영동’이라는 마을에서 실려 간 사람들만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지금도 이곳에 사는 사람의 절반 이상은 1937년도에 끌려온 사람들이거나 그들의 후예이다. 그곳의 고 한운석 씨의 증언을 담아보았다.
“소련 전역에 걸쳐서 노력영웅은 모두 1천 2백 명 가량인데 그 가운데서 고려 사람으로서 노력영웅이 된 사람만 약 7백 50명쯤 된다. 그 중에서 우리 ‘스베르드보프 콜호즈’에서만 21명의 영웅이 나왔다. 단연 최고였다. 11명은 이미 죽었고 6명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으며 현재 4명만 여기 살았다…….지금 생각해보면 미련했다 싶기도 하다. | |
최초로 여기로 들어온 사람은 1천5백 명 가량이었다. 왔을 때 이 일대는 모두 갈대밭이었다. 갈대밭을 농토로 만들었기 때문에 고생은 말할 수 없었다. 농기구라고는 하나 없이 맨손으로 갈대를 뽑아내고 지금의 이 옥토로 만들었다. 꼭 7~8년이 걸렸다. 우리는 고향 신영동에서 한 덩이가 되어 불라디보스톡으로 와가지고 기차를 탔다. 1937년 12월에 타쉬켄트로 왔다. 한겨울에 여기 갈대밭에 버려졌다. 움막을 짓고 한 집에 30여 명씩 들어가서 첫 겨울을 났다. 2년간을 그렇게 살면서 집주위로부터 농토를 일구어냈다. 양배추, 수박, 참외를 심어서 국가에다 바쳤다. 1940년부터 아주 조금씩 벼농사도 지었다. 몇 해를 더 하다가 1947년부터 목화를 재배하라는 모스크바의 지시에 따랐다. 지금이야 집집마다 가스관이 들어와서 가스로 음식을 하지만 옛날에는 목화대를 땔감으로 썼다. 황량한 사막에다 인간의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오아시스를 만들었다고 우리는 자부한다. 하지만 오늘이 있기까지 우리가 이 모래펄에다 파묻은 땀과 피눈물을 기억한다면 전혀 오늘이 자랑스럽지만은 않다. 갈대밭에다 움막을 둘러치고 살던 2년 동안에 같이 온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학질에 걸리고 이질에 걸렸지만 약 한번 못 써보고 무려 2백 명 넘게 죽었다. 소련은 우리를 여기다 갖다버렸을 뿐 인간 대접해 준 것은 없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들에게 목화를 재배하라고 했다. 개간을 해놓고 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다 바치라고 강요했다. 목화 농사는 사람의 등뼈를 녹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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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영웅’제도가 생겼다. 본래 소련에는 세 가지 영웅이 있었다. ‘전투영웅’, ‘노력영웅’, ‘모성영웅’이다. ‘전투영웅’은 글자 그대로 전쟁에서 적을 많이 사살한 사람이 된다. 모성영웅은 여자가 아이를 10명 이상 낳아 기른 사람에게 붙여준다. 노력영웅은 한마디로 일벌레를 뜻한다. 우리는 서로 노력영웅 되는 것을 더 없는 영광으로 알고 죽자 살자 일만 했다. 해마다 영웅 심사를 할 때 자기 이름이 뽑혀지는 감동을 위해서 일 년 내내 들판에서 흙 속에 파묻혀 지냈다. 정해진 면적에서 누가 더 많은 수확량을 내느냐가 영웅을 결정하는 주된 기준이다. 나도 영웅이다. 하루에 잠은 4시간 정도만 자고 나머지는 일을 했다. 가족들도 따라해야 하기 때문에 힘들다. 지금 생각해보면 허망하다. 물론 영웅이 되면 훈장을 받고 영웅 칭호를 들으며 무슨 행사 때마다 맨 위쪽에 앉게 되고 약간의 혜택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콜호즈가 퇴락해 가고 소련이 붕괴된 뒤 독립 국가로 흩어지고 보니 내가 저 들판에 바쳤던 땀의 의미는 한마디로 소련의 권력층을 살찌게 해주기 위한 짓 밖에 못되었다는 결론이다. 내 몸에 남은 것은 모진 질병이고 내 가족에게 지워진 것도 그다지 넉넉하지 못한 썰렁한 살림과 마누라의 저 병신된 모습뿐이다. 내 땅 한 뼘 못 가진 채 이렇게 늙었을 뿐이다. 그리고 콜호즈가 변모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도 머잖아 또 여기를 떠나 어디론가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그저 슬플 뿐이다. 이것이 영웅 대접이란 말인가”~ 이하 생략 - 까레이스끼 또 하나의 민족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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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부연 설명하자면 소련 시기 고려인들은 1937년 이주 초기에서 스탈린 통치시대와 1950년대 후반 흐루시쵸프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거주이전의 자유제한과 고등교육의 기회박탈 등 여러 면에서 권리를 제한 받았었지만 탈냉전의 흐루시쵸프 시대의 바람을 타고 고본질을 통한 경제력 향상과 자녀들에 대한 높은 교육열에 힘입어 러시아인과 현지인 사이에서 중간관리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거주이전이 자유롭게 되자 일부 고려인들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그 같은 러시아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연해주 이외의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고려인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소련 내에서 고려인 사회는 지역별로 분화되었으며 많은 고려인들은 특유의 근면성을 바탕으로 고본질과 집단 농장에서의 성공으로 경제적으로 거주지역의 평범한 러시아인들보다 나은 생활을 누리기까지 했다. 특히 우즈베키스탄의 경우 이주해 온 고려인들에 의해 논농사(특히 벼농사)가 활성화되었고 목화 수확에 있어서는 우즈베키스탄이 세계적인 목화 산지로 발돋움하는 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으며, 농업부문에서 많은 농업영웅들을 배출하여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들은 구소련 127개 민족 중 농업부문에서 탁월한 민족이며 다방면에서 우수한 민족이라고 정평이 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