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길 양쪽은 모두 사구(沙丘)를 이루고 있었다.

한족 자원 안내원이 "사추"를 어떻게 발음해야 할까라고 하여서 내가 아마도

"사구(沙丘)"이리라고 했더니 웃으며 맞다고 반가워했다.

토문, 도문, 두만, 투먼 부분에서도 그의 발음과 지형 설명에는 다소 혼란이 있어서

길 눈이 어두운 첫 방문객에게는 곤혹감을 주었으나 그게 의도적 오독은 아니었으리라

짐작을 한다.

 

그러나 위의 설명판에서도 보듯이 도문과 두만이 오락가락하고 설명하는 사람의

발음이 또 애매했는데---, 그래 이 또한 요즈음 인문학에서 유행하는 말처럼

경계의 모호성이 아니겠는가.

내 친구 한사람은 내가 이 곳으로 떠나기 전에 송별의 자리를 마련해 주면서

굳이 그가 쓴 "아, 백두산"이라는 글을 보여주고,

도문과 두만, 이도백하에서 오도백하까지 피끓는 설명을 나에게 해 주었지만 짧은 

여행기에 재론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의도적 오독"이니, "경계의 모호성"이라---,

말을 하고 나니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문학 쟁론이 생각난다.

하지만 눈 앞에 전개되고 있는 이 엄혹한 구조주의적 판세를 목도하고 보니

그런 담론들이 모두 다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하지 않은가---.

"아니야, 그래도 인문쟁이들이 우선 나서야하는 것이야."

내 친구가 팔을 걷어부치며 나를 힐난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하여간 네 땅, 내 땅 구별과는 관계없이 넓고 긴 지역에 선사 이래로 펼쳐져

있는 저 신비의 모래 언덕들은 내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장관이었는데

중국 쪽 땅에는 공원도 만들어져 있었으나 아직 인적은 보이지 않았다.

 

 

방천에서 러시아 쪽을 보니 꽤 큰 국경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고 기관차가 긴 꼬리를

달고 정차해 있었다.

그 지역이 아마 "하싼"이라는 이름을 지난 세기부터 달기 시작했지만 그 보다도

훨씬 오래전에는 "불멸의 영웅 이순신"이 녹둔도에서 야인들과 겨루며 내다 본 땅이

아니련가.

사실은 아까 점심을 먹었던 "경신 식당" 인근도 역사의 자취를 찾자면 "안드레아

김대건 성인"께서 지나다니시고 머물기도 했던 역사적 흔적이 있었고 그곳에는

가톨릭 교회가 서 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예전에는 "경신 포구"라고 하여서 큰 배가 드나들던 곳이었다고 한다.

 

나진, 선봉 공단은 계획만 요란했고 공장 굴뚝에서 연기는 상기 아니 일었는데,

이 곳 흑룡강 신문을 보니 거기 개설된 카지노에 중국 사람들이 많이 가서 가산을

탕진한 경우도 있고 하여 요즈음은 해관을 통과 하는데에도 검사가 까다로워졌고

종내에는 외국과 합작으로 문을 연 그 카지노가 문을 닫았다던가---.

 

(왼 쪽은 러시아, 오른 쪽은 북한, 사진을 찍은 곳은 중국 땅이었다. 이 곳을 준설하면

예전처럼 큰 선박이 드나들어서 북한이 큰 이득을 볼 수있는 기회의 땅이라는데 아직

그 기회는 도래치 않고 있었다. 하늘이 주신 기회도 사람이 완성하는 것이어늘---.)

 

(금 삼각지, 그러니까 골든 트라이앵글을 표방하면서도 한중러 이외에 일본의 상업적

존재를 부각코자 하는 인상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일본해라니---.자원 봉사자는

그러니까 "동해이지요"라고 하며 깊은 이해를 보여주었다.)

 

방천에서 나진까지 얼마나 걸리더냐고 그 곳을 갔다온 사람에게 내가 물어보았더니

4시간 반이 걸리더라는 대답이 나왔다.

거리보다도 도로 사정이 그렇단다.

 

(강을 건너면 북녘 땅---, 이 곳 望海閣은 입장료 수입부터---.)

 

돌아오는 길은 웬일인지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다보니 쓸데없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UN 사무처 직원을 뽑는 비율은 보통 800:1의 경쟁인데 UNDP가 제대로 가동하면

한국 출신의 프리미엄 가능성도 있다.

 

뉴욕의 살인적인 물가와 세금에 비해서 연봉은 6-7만 불에 불과하지만 세금이

모두 면제되고 정년 보장에 여러 가지로 유틸리티의 사용에 특전이 있다.

아이들이 돈만 생각하지 말고 세계의 공복(公僕)인 이런 보람있는 일에 종사하면

얼마나 좋았으랴.

교회의 장로인 내 친구의 총명한 여식은 유엔 인권위원회의 “하이 커미셔너”,

그러니까 "고등 판무관"을 하고 있어서 스위스의 제네바에 살고 있다.

하는 일도 참으로 보람이 있거니와 세계의 공무원이니 우리 식으로 말하면 진짜로

크게 출세를 한 셈이다.

가문의 영광이 따로 있겠는가---.

 

(끝)

출처 : 허구 속에 갇힌 현실/팩션 소설
글쓴이 : 청담 원글보기
메모 :

(진학 소학교와 연변 대학 인근에 있는 이 곳에는 북한 서적들이 많았다)

 

연길에 와서 60년대 식이니 70년대 식이니 하는 이야기를 꺼내기는

매우 조심스럽다.

이 곳에서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격이나 개성이나 특징이나

언필칭 능력과는 하등 상관이 없이 발화자의 감상이나 내부 조응을

자기나름으로 소화시키는 것일지라도 표현은 조심스럽고 삼가해야할

영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게 전제하고나면 연길에서 또 할 말은 별로 남지 않는다.

비즈니스 맨들도 그런 표현의 성역을 지켜야한다면 사업 이야기를

꺼내기가 수월치 않을 것이다.

 

내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내용은 60년대식에 관한 것이다.

이야기는 서울의 60년대식으로 시작되지만 연길의 풍경에서

촉발된 서사이고 종내에는 연길 이야기와 섞이게 된다.

그러고 보니 그냥 가슴 풀어헤친 기분으로 내 젊은날의 초상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연길의 오늘을 한국의 60년대에 빗댔느냐고 말한다면

천부당 만부당이다.

 

내 60년대 이야기는 지금은 절필한지 오래된 작가 김승옥이

청춘시절에 끄적였던 위대한 단편집, "서울, 1964년 겨울"을

빙자코자 하는데, 출간된 년대야 당연히 60년대였다.

 

지금은 어눌해진 이 달변의 작가가 일본 땅에서 태어난 것은

1941년이었고 터질듯한 자의식을 누에 고치처럼  자신의 속에

품고 앉아서 글을 쓴 연대가 60년대였으니 그보다 조금 늦게

태어나서 다소 편안한 자세로 그의 자의식을 비단 실 뽑듯

되새김질하며 또 실을 뽑고난 번데기까지 만끽한 나는

그런 점에서는 행운아인 셈이었다.

 

내 기억은 안개처럼 몽롱하고 몽환적이지만 아마도 나는 당시

그 단편집 속의 "무진기행" 에 나오는,

시골 구석으로 쫓기듯 내려온 작품 속의 음악선생을 멋데로

상상하며 내 젊은날의 좌절 속에서 음습한 수음의 동작을

펼쳤을지도 모른다.

 

"싸게 사들이기"라는 단편은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책을 싸게

사모으는 대학생이 벌이는 도시 뒷골목의 20세기 모험담이다.

탐욕스럽게 생긴 곰보 영감이 주인인 헌책방에서 그 대학생은

눈에 들어오는 괜찮은 책이 있으면 얼른 침을 발라 한 페이지를

찢어낸 다음 책방 주인에게 다가간다.

 

거래가 성립될 즈음, 그는 찢어진 페이지를 들이대면서 값을

후려친다.

이 것이 단순한 헌 책방 이야기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대학생을

탓하고 곰보 주인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내리라.

그러나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치 않았던 걸로 기억이 된다.

 

탐욕스러운 인상의 곰보 영감에게는 나이 차이가 큰 육덕좋은

마누라가 있고 그녀의 눈빛도 항상 탐욕과 욕정으로 이글거리고

있다.

대학생 주인공은 이 욕정의 마누라를 "낮거리"로 또한 후려쳤던

것 같다.

내 기억이 틀릴 수도 있겠지만---.

결국 작가의 목소리는 물질적 욕망과 욕구에 가득한 산업사회의

60년대 식을 자의식에 가득한 젊은이를 통하여 능멸하고 능욕한

것이었다.

 

(연길의 신화서적은 서울의 교보와 같은 존재이다. 규모는 작지만 위상은 비슷하다.)

 

1964년도는 한국에서 한일 협정 비준 반대와 한미 행협 개정을

요구한 대학생들의 목소리가 계엄령에 짙밟히고,

사회적으로는 산업사회의 도래와 이에따른 농촌 사회의 붕괴가

급속도로 시작되던 시절이었다.

다이나믹한 사람들에게는 미증유의 새로운 방식으로 사는 재미에

눈뜰 무렵이었고 자의식 가득한 청년들에게는 좌절과 절망에

몸서리치며 마스터베이션이라도 해야될 사정이 있었다.

 

내가 순례한 헌책방들의 궤적도 이와같은 분위기 속의 독도법에

다름아니었다.

그 행동반경은 탈출구가 없던 내 청춘시절의 순례역정이기도 했고

또 어쩌면 엿장사의 가위 소리에 얼굴을 내밀고 거래 되곤했다던

시골 농가의 잠자던 국보급 전적들,

예컨데 "훈민정음 해례본" 같은 횡재가 헌책방까지 묻어들어오지나

않았을까---를 꿈 꾼 가난한 사행심까지 교활하게 포함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때는 로토 복권 같은게 없었으니 헌 책방에서 값비싼 고 서적이나

건지는 수 밖에 창백한 지성인이 팔자를 고칠 재간은 없었다.

과연 시골 전적이나 먼지를 뒤집어 쓴 옛 문집 가운데에서 횡재가

나왔다는 전설이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그 때 일반적인 헌 책들의 값은 어떤 수준이었을까?

그리고 "폐허" 동인지나 "장미촌"같은 수준은 언감생심이었으나

그래도 족보가 있는 해묵은 잡지, 예컨데 "현대문학""사상계""자유문학"

같은건 그 값이 지금으로 치면 어느정도였을까?

아마도 설렁탕이나 짜장연 곱배기 한그릇 값?

 

내가 여기 연길의 헌책방을 누비는 까닭은 이제와서 겉으로는

다소 어수룩하게 보이는 이 도시에서 철 지난 희귀본을 발견해보자는

어처구니 없는 욕심하고는 절대로 거리가 멀다.

그것은 마치 늦게 시작한 한 때의 내 수석 취미와 같아서 탐석을

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은 줄을 나는 알고 있다.

 

내 작은 소망은 이 곳에서 자생한 조선족 문학의 현상을 통시적,

공시적으로 한번 관심있게 들여다 보자는 개인적, 학문적 탐구심, 

그러기 위하여서 묵은 자료를 구하기 위함이다.

 

처음 서시장 난전에서 헌책을 뒤적일 때만해도 너무나 싼 값에

내 가슴은 울렁거렸고 꼭 무슨 도적질을 하는것 같았다.

권당 10원이 넘는 책이라고는 없었으니 아무리 물건 값이 싼

연길이라할지라고 꼭 사기를 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5원짜리 식사가 있고, 10원이면 어지간한

음식은 골라 먹을 수 있는 이 곳의 상대성 원리에 눈을 뜨게 되자

헌 책과 관련한 내 안복과 지평도 넓어졌다.

 

(계속)

출처 : 허구 속에 갇힌 현실/팩션 소설
글쓴이 : 청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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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서시장에서 동시장으로 진출 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특히 동시장에서 꽤 지적인 모습의 난전 주인을 만나면서 책 값은

서시의 반이면 된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정말 그 곳에서는 어지간한 것은 5원이면 통했다.

이 정도가 아마도 내 대학 시절의 헌책방 순례역정 때의 비용에 맞먹는

수준이 아닐까---.

 

그러던 어느날 나는 마침내 헌 책들의 멕카에 도달하였다.

연변대학의 제8 기숙사 지하실에 있는 두 곳 헌책방이 그 곳이었다. 

조선 문학하는 교수의 조교가 못내 미심해 하면서도 안내한 곳이었다.

빙고!

 

그 학생은 소중한 전적이 지하실에서 딩굴다가 나와같은 사람을

만나서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되어서 정말 기쁘다고,

기뻐하는 내 얼굴을 보며 나 보다 더 기뻐하였다.

 

알고보니 이 곳에서는 아주 주요 가치가 있는 전적,

예컨데 외형적으로는 하드 카바(조금 부실 장정이지만)이고

부피도 300페이지 정도 나가는 것은 4원,

그 이하는 2원이나 심지어 1원이면 족하였다.

아라비아 반도의 사막을 건너 마침내 멕카에 도달하였다고

그 누가 소리지르지 않겠는가.

유레카!

 

혹시  이 곳에서 곰보 아저씨나 그의 육감적인 아내 비슷한 사람은

상기 만나지 못하였느냐고?

글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이미 산업화의 레일이 깔린

이 도시에도 질주하지 않을리 없겠지만

조셉 콘래드가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을 회색으로 본 것과는 또다른

의미에서 회색 빛 가득한 이 도시의 낡은 책 취급 장소에

그런 욕망의 걸물들이 나앉아 있을는지---.

미미한 수요나마 공급을 창조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 원리를

겨우 직관한 가난하고 선한 사람들의 이 먹물 시장 바닥에---.

 

희안하게도 이런 물건을 다루는 조선족 동포는 아직 만나지 못하여서

책 값을 흥정할 때마다 나는 한족들과 힘들게 씨름하였다.

(말하고 보니 이건 과장법이고 여기에서 무슨 값을 흥정하였으랴,

부르는게 제 값일 따름인데---.)

 

서울에서는 벌써부터 종이로된 서적 자체에 큰 무게를 두지핞는

시대에 돌입하였다.

이사 때마다 끌고다니던 저 무거운 "대영 백과 사전(Encyclopedia

Britanica)"도 이제는 CD 한두판 속에서 숨을 죽이고 엎디어 있으니

종이 책이 무슨 소용에 닿으랴.

 

나와는 다른 대학에서 선생하는 내 친구 하나는 평생 모은 책을 모두

봉직하는 학교에  기증하고 특별 컬렉션 코너의 명패도 붙이게

되었다고 몇해전에 자랑하였다.

정말 부러운 일이었다.

지금은 대학 도서관에서 그런 기증을 거의 받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게 혹시라도 새책 구입에 따른 리베이트같은 

일과 무관치 않으리라 지레 짐작이라도 해볼는지 모르겠지만

100만 장서를 가진 도서관의 관장을 해본 나는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옥션 체제에서 서적 시장은 벌써부터 투명하거니와

대체로 서적을 기증하려는 분들은 알짜 희귀본은 자기 서재로 모시고

그 나머지, 말하자면 학문적 가치나 물리적 건강상태가 유효일자의

백척간두에 있는 책들에 대한 청소 역할을 기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평가 팀이 먼저 출장을 가서 현장을 살피는데

피차간에 성공하는 확율은 매우 낮다.

 

그런거라도 받아두면 좋지 않으냐고 할지 모르지만 이 또한 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발상이다.

낱권의 책이 장서가 되려면 엄격한 분류에 따른 태그를 옆구리에

차야하는데 그 비용과 작업이 수월치 않을뿐더러,

더우기 마그네틱 띠를 두르는 시대도 지나서 이제는 스마트 카드의

칩에 반응하는 값 비싼 장치를 둘러야 책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니 허접 쓰레기 일보 직전인 퇴물들을 감당하기란

불가능이다.

또한 공간 문제와 건물의 하중 문제도 뒤따른다.

결국 도서관 운영의 메가 트렌드는 디지털 라이브러리, 전자 도서관

체제로 급속히 이전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이곳 연길은 종이 책이 대접을 받는 곳이다.

그래서 나도 의미있는 기증의 기회를 꿈꾸어보기도 하지만

세상이 하도 빨리 변하니 사정이 어떻게 될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이 곳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IT산업이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는

경제 사회이다.

 

 

예전 우리나라의 "청계천 고본점"과 아직도 성업중인 일본 도쿄의 "간다 서점가"에서는

오래된 잡지나 전적들의 값이 많이 나갔으나

여기에서는 오래된 책 보다 나온지 얼마되지 않은 책들이 더 값이 나가니

내 가치 체계에는 가끔 혼란이  온다.

(물론 희귀본은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지만---).

 

내가 오래전 미시간 주립대학이나 코넬 대학의 used book store를 누빌 때도

그런 신구 가치의 혼란과 곤혹을 느꼈었다.

반세기 전의 "새터데이 리뷰"를 오래되었다는 죄목을 걸어 파지 값에 구입한

기억이 난다. 

미시간의 이스트 랜싱에 있는 "Gibson's"라는 바보 같은 책방에서였다.

 

헌 책방 이야기를 이제는 덮고싶은데 옆에서 누가 옛 기억을 더 짜내보라고

강요한다면,

글쎄, 내가 다니던 헌 책방 골목에도 미모의 중년 여성 두사람이

어느 해이던가 가게를 열었던 기억이 난다.

"현대 문학"이 창간호 이래로 정갈하게 서가에 꽂혀있었고 일본과

미국에서 나오는 에로스 황색 잡지도 입구 바닥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미8군에서 나오는 책들에 루트가 있다고 인근에서 쑥덕거렸다.

나도 부지런히 다니면서 짜장면 값을 갖다바쳤고 "훈몽자회"나

"동국정운"같은 보물을 그곳에서 찾지는 않았지만,

플레이 보이니 펜트 하우스, 그리고 스웜프 같은 잡지의 표지에

내리 꽂던 청년의 시선으로 언뜻 그녀들을 바라보기도 했겠으나,

"싸게 사들이기" 책략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끝)

출처 : 허구 속에 갇힌 현실/팩션 소설
글쓴이 : 청담 원글보기
메모 :

고구려 탐방은 묘지 순례라더니 장군총(그러니까 장수 왕 능) 관람을 마치고,

일행은 또 오호 묘(五號 墓)로 갔다.

그러나 정작 이 큰 묘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고 벽화들의 사진만 보여주었는데

역시 대단한 규모에 정교한 묘사, 아직도 생생한 색조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 곳 묘지는 오두회분(五頭회墳)이라고도 하는데 인근에서 가장 큰 다섯 기의

무덤이 마치 투구(頭器)와 같아서 그렇게도 부른다고 한다.

머리가 크면 장사라고 하였는데 마침내 이 곳에서 그 역사성을 엿보았다고나

할까---.




오호 묘를 나와 집안 박물관으로 갔다. 거대한 강역을 장악하면서 이 곳에서

장장 19대왕, 424년의 도읍으로 삼은 곳의 박물관으로는 건물 규모나

소장품의 내용이 볼 품 없었다.

 

입구의 설명문에는 2000년 전에 이 지역을 다스린 “지역 정권”이라고 풀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크게 노여워 할 자격도 못되는 후손들의 입장인지 모른다.

 

내가 잘 모르는 영역이지만 허다한  중국의 역사서에는 “고구려”라는 명칭의

기술은 겨우 여섯 번인가에 불과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일연의 “삼국유사”가 없었으면 “웅혼한 고구려”의 기상이

얼마나 전달되었을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구려, 고려. 구리, 고리” 등의 기술이나 민간 전설은 회자되고 있으나

이를 정리하고 그 의미를 확실하게 실증적으로 외연 발전시키는 작업은 우리

후대들의 몫이 아니겠는가.

물론 요즈음 국내외적으로 새로운 각성이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음은

다행이지만 이 것도 비분강개가 아니라 가슴과 머리와 발이 함께하는

작업이어야 될 줄로 안다.

 

(엊그제 토요 저녁에 "고구려로 가는길", "발해로 가는 길"의 저자이자

여기 "人大 상무위원"이고 연변 인민 출판사 출판 부장의 초대를

받았는데 이 "발"이라는 부분에 한 동안 대화의 중점이 실려있었다.)

집안 박물관 지도에 나와 있는 당나라 시대의 최대 강역에 신라는 제외되어

있었다.

 



424년을 여기에서 지내고 장수 왕 때에 평양성으로 옮겼으니 명당이 아닐 수

없으리라.

입구에는 역시 장군총에는 비길 수 없으나 거대한 적석총들이 총총히 들어차

있어서 문득 이집트의 “왕가의 골짜기”를 연상시켰다.

아마도 고구려왕들은 태평성대에는 집안의 국내성에 있다가 다소라도

전운이 감돌면 이리로 들어와서 국가의 안보를 도모했으리라.

 

국내성은 마치 서울 천호 동 쪽의 백제성곽처럼 이제는 아파트와 시장 통이

들어앉아서 강가의 방천으로 쓰이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흔적이 남지

않았는데, 다행히도 금년 내로 집들을 모두 헐어내고 옛 모습을 복원시킨다고

한다.

UNESCO 덕분이지만 구천의 선조들이 다소나마 해원 하시려나---.

 

유리왕은 한족 사람 치희와 이 지역 골천 사람의 딸 화희로 두 부인을 가졌다.

결론으로는 치희가 화희로부터 모욕을 당하여 자기 땅으로 돌아가는데 이를

따라갔다가 결국 데려오지 못하게 된 왕이 한탄하는 노래가 황조가여서,

혹 유리왕의 심약함을 탓하는 사가들도 있으나 당시 이 광대한 만주 벌판과

중원, 나아가 아시아 전체의 패권(헤게모니)을 다투며 살아가는 통치자의

사방 아우르기 전략이 아니었을까.

 

왕은 심지어(연변 표현으로는 그냥 “지어”) 자기의 장자를 이웃 왕을

모욕하였다고 하여서 자결시키기도 한다.

모두 정사인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이 쪽에서는 황조가를

이 지역의 설화라고 하였다.

오늘날 패권 국가들의 사이에서 안보를 도모해야하는 우리의 처지에서

타산지석이 된다.

우리 일행은 멀리 국내성이 보이는 장대에 올라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통시(通視)하며 분(忿)과 한(恨)의 대담을 나누었으나 태극기를 휘두르지는

않았다.


환도산성을 점지한 것은 돼지였다고 한다.

설화가 따르지만 여기에 옮길 여유는 없고 아무튼 고구려 조상들이 돼지를

중히 여긴 데에서 나온 이야기이리라.

삼겹살에 소주 한잔! 대단하지 않은가.

 

늦은 점심을 조선족이 하는 불고기 집에서 먹었다. 석쇠에다 얇게 베어서

양념하지 않은 쇠고기를 얹어 숯불로 굽는 정통 우리 요리였다.

 

아, 이 곳 “집안”의 말씨는 바로 강 건너 북한식이었다.

통화에서부터 따라온 우리 가이드도 바로 그 평양식 “문화 어” 발음을

간드러지게 하면서 우리를 안내하였다.

3년 전까지 북한과 무역을 하다가 중국 관광 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안내질”을 하는데, 이 질이 수입도 좋고 재미있다고 하였다.

 

북한 산(북한의 산)이 왜 민둥산인가, 뗄 감으로 다 베어나갔는가, 복무원에게

물어보았더니 통나무로 베어서 중국에 모두 팔고 식량을 사갔다고 한다.

그리고 새 묘목을 심는다고 했는데 아직 육안으로는 볼 수 없더라고 사실만

말하였다.

 

압록강까지는 버스로 옮아갔지만 한국식 식당이 즐비한 곳에서 양 백 걸음

남짓이었다.

 


 

유람선이 아니고 7-8명이 타는 보트를 타고 그 강을 한 20분 전속력으로 오르

내리는데,

건너편 산 중턱으로 낸 길에는 북쪽 사람들이 걸어서, 혹은 자전거를 타고

오가는 모습이 “가담 가담” 보였다.

 

보트타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는 큰 적석총들이 있는 고묘군의 한 군데를

들렀다.

거기 함께 있던 네 기는 사라지고, 하나 남아 있는 큰 묘는 “천추묘”라고도

하는데,

천추만세영고(千秋万歲永固)라는 명(銘)의 기와가 속에서 발견되어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유한한 인간들의 간절한 소망이 거기 담겨있겠지만 천추만세영고라---.


우리가 본 고묘에는 모두 클로버를 심어놓았는데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라고 하지, 아마.

이 날 우리 집을 포함하여 몇몇 부인들은 “네 잎” 클로버를 찾았다.

“행운”이 추가된 셈이라던 가---.

 

“저는 세 잎의 행복이면 충분해요.”라고 찾지 못한 어떤 부인이 담담하게 말을

하는데,

“다섯 잎이다!”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진들을 찍고 부산을 떠는데,

“여섯 잎이다!”라는 소리가 또 터져 나왔다.

정녕 여섯 잎이었다.

마침내 네 잎 까지는 봐주고 다섯 잎과 여섯 잎은 클로버가 아닌 변종으로

처리하였다.

다수의 위력이었다.

 

 


 

                          (북한으로 가는 철교인데 보이는 도시는 만포이다.)


돌아오는 길에 시간이 좀 있어서 북한의 만포가 보이는 곳 까지 가 보았다.

만포진에서 뱃길이 끊긴 탓인지 만포가 된 모양이다.

밭을 건너 방천 위에서 북한으로 가는 다리를 보고 사진도 찍었다.

20여분 동안에 북쪽에서 두 사람이 건너 왔고 트럭 한대가 건너갔다.

내 고국 북한산에는 진달래가 다 졌겠지만, 북한의 산에는 이제 진달래가

만개하여 있었다.

출처 : 허구 속에 갇힌 현실/팩션 소설
글쓴이 : 청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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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도문으로 갔다.

십여 년 전 백두산 천지로 갈 때에 연길에서 하루 밤을 자고 새벽에 들렸던 도문은

아직도 몽매의 지경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현대도시로 탈바꿈을 하였다.

 


 

역사적으로 이 곳은 훈춘 해관(세관)의 지부였으나 지금은 거꾸로 하전자

분소였던 이 곳이 정식 세관이 되고 훈춘은 분소가 되었다 한다.

 

나다니엘 호돈이 쓴 "주홍글씨"의 배경인 세일럼(Salem) 항구가 시세에 따라

인근 보스톤에, 그리고 넓게는 뉴욕에 밀려 인구 겨우 25000 소도시로 전락한

모습을 보았던 사실이 문득 떠오른다.

 



            (건너편 북한의 남양시가 선입견인가 초라하게 보인다)

 

함께 간 역사학자의 경험과 지혜로 우리는 두만강 물이 흐르는 곳까지 나아가서 손을 물에

넣어 보았다.

며칠 전에 배를 탔던 푸른 압록강과는 달리 누런 뻘 물이 내 마음과 같았다. 

 


 


 

강의가운데에 있는 섬에는 북한군이 진지를 구축해 놓고 있었다.

 


 

중조 협약에 의해서 강 가운데의 섬은 모두 북한 쪽 영토가 되었다고 한다.

백두산 천지를 쪼갤 수밖에 없었던 처지에서 그나마 다행인가.

 

 

 

 

 

 


 


 

두만강 푸른물에--, 김정구의 구성진 노래는 원래 1930년대 중반에 극단 예원이

중국 동북지방을 돌다가 마침 도문에 왔을 때 조선족이 경영하는 작은 여관에

들렀다가 왜경에게 희생된 어떤 여인의 울음 소리를 밤중에 듣고 작곡가 이시우가

즉흥가사에 곡을 붙였던 것으로,

나중에 김정구가 그를 박시춘에게 소개하고 트롬본 주자인 김용호가 또 1절을

다듬고 하여 우리의 가슴을 치게 되었다고 한다.

발로 뛰는 연변 작가 유연산의 고증이었다.

작가와 나의 교유록은 나중으로 미룬다.

 


 

우리는 도문 시의 발전에 달리 기여하지는 않고 사진 몇 장을 수확한 다음

일로 “사이 섬”(間島)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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