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지켜주옵소서...!

주여! 도와주옵소서...!

아멘! 아멘! 아멘! .....!

중국 쓰찬성 원촨대지진으로 희생당하신 모든 영혼과

재난의 고통속에 피해를 입으신  모든 형제,자매님들에게

중국 쓰찬성의 모든 교회에

주님의 크나크신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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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北方宣敎地消息



토문을 지나면서는 두만강을 오른 쪽으로 끼고 계속달리면 오른 쪽의 강건너

민둥산이 바로 북한 땅이었다. 

그쪽으로도 가끔 집과 경작지가 보였으며 아침밥을 짓는 연기가 정겹게

올라가고 있었다.

토문과 두만의 해묵은 이야기들은 다른 기회에 이야기할 말미를 잡기로 한다.

 

훈춘시의 모습은 연길과는 또 달랐다.

인구 20만의 이 도시도 물론 연변 조선족 자치구에 속하였으며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도로의 간판에는 한글이 들어있었으나

연길 보다는 덜 철저한듯 하였고 가끔, 아니 자주 한글이 빠진 모양을 볼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이 곳이 국경 도시임을 나타내는 듯 러시아 어가 간판 속에

심심치 않게 들어가 있었다.

 

 

특히 장령자 쪽으로 가는 합작구에 그런 러시아 글이 많이 있었고 러시아 인들의 모습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세 나라의 상품이 통관되는 해관(海關)에 도착하였다.

세관을 중국에서는 바다나 육지나 하늘이나 모두 해관이라고 불러서 역사성에 무게를

두는건지, 세관이라는 표현이 돈내는 곳이라는 너무 낯이 보이는 표현이라 둘러댄건지,

하여간 해관으로 들어가 보았다.

러시아 인 컨테이너 운전기사들이 많이 보였고 비닐 봉지에 음식과 음료를 사서

트럭으로 들락거리는 모습도 이채로웠다.

 


이 곳까지가 모두 훈춘의 시계였다. 여기에서 배가 러시아를 왕래하고 우리나라의

속초에도 많이 다닌다고 한다.

과연 Dongchun Ferry라는 글이 붙은 컨테이너가 많이 보였고 꽁무니에는

"한국 특장차"라는 한글로된 한 핏줄 증명서도 달고 있었다.

 

훈춘은 원래 크지 않던 마을이 계획 도시로 발전하기 때문에 새 건물들의

임대광고와 아파트 분양을 알리는 조감도들이 도시 외곽에서 많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탄 큰 버스는 오토바이와의 작은 접촉 사고로 시간을 빼앗겨서,

훈춘 시내에 있는 조선족 경영의 경신 식당에서 조금 늦은 점심을 먹고 우리는

방천으로 달렸다.

식당에는 마침 별 두개를 단 군관이 나타났는데 이 식당 주인의 아들로서 잠시

집안일을 도우러 나왔다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이 행사를 총괄하는 우리 조선족 직원의 친구이기도 하여서 특별히 나왔다고

하였다.

 

(훈춘의 젊은 남녀 미발 복무원들이 길건너 내 디카를 의식하고 포즈를 취하더군요.)

 

이제 방천 쪽으로 달리는 길에서 북한 쪽은 너무나 똑똑히 잘 보였다.

철교가 두어군데 걸려있어서 마음은 벌써 북녘을 달려가고 있었으나 가슴은 아팠다.

더욱이 산업도로 형태로 닦은 이 길은 작년인가에 완공이 된 새 길이었고 통행하는

차도 별로 없었는데 왼쪽으로 낮게 계속되는 철조망 너머는 바로 러시아 땅이었고

오른쪽 강 건너는 북녘 땅인 것이다.

 

 

중국 땅은 지도에서도 보이듯이 그 새로 난 길의 좁은 회랑뿐이었다.

파란 눈을 가진 사람들이 저 시베리아 툰드라 동토를 지나서 여기에 나타날 때까지

청조의 사람들은 무얼 했는지, 아니 남의 집 걱정할 일이 아니라 일제가 간도 협약을

맺을 때 우리는 뒷짐 지고 또 무엇을 했었던지---.

 

(망해각 밑의 팔각정에 다시 모여 섰습니다. 영화 감독은 아니지만 저는 또 카메오

게임을---. 렌즈를 남에게 맡겼더니 구도를 잘 못맞추었군요.)

 

 

(계속)

출처 : 허구 속에 갇힌 현실/팩션 소설
글쓴이 : 청담 원글보기
메모 :

 

달리는 길 양쪽은 모두 사구(沙丘)를 이루고 있었다.

한족 자원 안내원이 "사추"를 어떻게 발음해야 할까라고 하여서 내가 아마도

"사구(沙丘)"이리라고 했더니 웃으며 맞다고 반가워했다.

토문, 도문, 두만, 투먼 부분에서도 그의 발음과 지형 설명에는 다소 혼란이 있어서

길 눈이 어두운 첫 방문객에게는 곤혹감을 주었으나 그게 의도적 오독은 아니었으리라

짐작을 한다.

 

그러나 위의 설명판에서도 보듯이 도문과 두만이 오락가락하고 설명하는 사람의

발음이 또 애매했는데---, 그래 이 또한 요즈음 인문학에서 유행하는 말처럼

경계의 모호성이 아니겠는가.

내 친구 한사람은 내가 이 곳으로 떠나기 전에 송별의 자리를 마련해 주면서

굳이 그가 쓴 "아, 백두산"이라는 글을 보여주고,

도문과 두만, 이도백하에서 오도백하까지 피끓는 설명을 나에게 해 주었지만 짧은 

여행기에 재론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의도적 오독"이니, "경계의 모호성"이라---,

말을 하고 나니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문학 쟁론이 생각난다.

하지만 눈 앞에 전개되고 있는 이 엄혹한 구조주의적 판세를 목도하고 보니

그런 담론들이 모두 다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하지 않은가---.

"아니야, 그래도 인문쟁이들이 우선 나서야하는 것이야."

내 친구가 팔을 걷어부치며 나를 힐난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하여간 네 땅, 내 땅 구별과는 관계없이 넓고 긴 지역에 선사 이래로 펼쳐져

있는 저 신비의 모래 언덕들은 내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장관이었는데

중국 쪽 땅에는 공원도 만들어져 있었으나 아직 인적은 보이지 않았다.

 

 

방천에서 러시아 쪽을 보니 꽤 큰 국경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고 기관차가 긴 꼬리를

달고 정차해 있었다.

그 지역이 아마 "하싼"이라는 이름을 지난 세기부터 달기 시작했지만 그 보다도

훨씬 오래전에는 "불멸의 영웅 이순신"이 녹둔도에서 야인들과 겨루며 내다 본 땅이

아니련가.

사실은 아까 점심을 먹었던 "경신 식당" 인근도 역사의 자취를 찾자면 "안드레아

김대건 성인"께서 지나다니시고 머물기도 했던 역사적 흔적이 있었고 그곳에는

가톨릭 교회가 서 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예전에는 "경신 포구"라고 하여서 큰 배가 드나들던 곳이었다고 한다.

 

나진, 선봉 공단은 계획만 요란했고 공장 굴뚝에서 연기는 상기 아니 일었는데,

이 곳 흑룡강 신문을 보니 거기 개설된 카지노에 중국 사람들이 많이 가서 가산을

탕진한 경우도 있고 하여 요즈음은 해관을 통과 하는데에도 검사가 까다로워졌고

종내에는 외국과 합작으로 문을 연 그 카지노가 문을 닫았다던가---.

 

(왼 쪽은 러시아, 오른 쪽은 북한, 사진을 찍은 곳은 중국 땅이었다. 이 곳을 준설하면

예전처럼 큰 선박이 드나들어서 북한이 큰 이득을 볼 수있는 기회의 땅이라는데 아직

그 기회는 도래치 않고 있었다. 하늘이 주신 기회도 사람이 완성하는 것이어늘---.)

 

(금 삼각지, 그러니까 골든 트라이앵글을 표방하면서도 한중러 이외에 일본의 상업적

존재를 부각코자 하는 인상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일본해라니---.자원 봉사자는

그러니까 "동해이지요"라고 하며 깊은 이해를 보여주었다.)

 

방천에서 나진까지 얼마나 걸리더냐고 그 곳을 갔다온 사람에게 내가 물어보았더니

4시간 반이 걸리더라는 대답이 나왔다.

거리보다도 도로 사정이 그렇단다.

 

(강을 건너면 북녘 땅---, 이 곳 望海閣은 입장료 수입부터---.)

 

돌아오는 길은 웬일인지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다보니 쓸데없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UN 사무처 직원을 뽑는 비율은 보통 800:1의 경쟁인데 UNDP가 제대로 가동하면

한국 출신의 프리미엄 가능성도 있다.

 

뉴욕의 살인적인 물가와 세금에 비해서 연봉은 6-7만 불에 불과하지만 세금이

모두 면제되고 정년 보장에 여러 가지로 유틸리티의 사용에 특전이 있다.

아이들이 돈만 생각하지 말고 세계의 공복(公僕)인 이런 보람있는 일에 종사하면

얼마나 좋았으랴.

교회의 장로인 내 친구의 총명한 여식은 유엔 인권위원회의 “하이 커미셔너”,

그러니까 "고등 판무관"을 하고 있어서 스위스의 제네바에 살고 있다.

하는 일도 참으로 보람이 있거니와 세계의 공무원이니 우리 식으로 말하면 진짜로

크게 출세를 한 셈이다.

가문의 영광이 따로 있겠는가---.

 

(끝)

출처 : 허구 속에 갇힌 현실/팩션 소설
글쓴이 : 청담 원글보기
메모 :

다시 서시장에서 동시장으로 진출 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특히 동시장에서 꽤 지적인 모습의 난전 주인을 만나면서 책 값은

서시의 반이면 된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정말 그 곳에서는 어지간한 것은 5원이면 통했다.

이 정도가 아마도 내 대학 시절의 헌책방 순례역정 때의 비용에 맞먹는

수준이 아닐까---.

 

그러던 어느날 나는 마침내 헌 책들의 멕카에 도달하였다.

연변대학의 제8 기숙사 지하실에 있는 두 곳 헌책방이 그 곳이었다. 

조선 문학하는 교수의 조교가 못내 미심해 하면서도 안내한 곳이었다.

빙고!

 

그 학생은 소중한 전적이 지하실에서 딩굴다가 나와같은 사람을

만나서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되어서 정말 기쁘다고,

기뻐하는 내 얼굴을 보며 나 보다 더 기뻐하였다.

 

알고보니 이 곳에서는 아주 주요 가치가 있는 전적,

예컨데 외형적으로는 하드 카바(조금 부실 장정이지만)이고

부피도 300페이지 정도 나가는 것은 4원,

그 이하는 2원이나 심지어 1원이면 족하였다.

아라비아 반도의 사막을 건너 마침내 멕카에 도달하였다고

그 누가 소리지르지 않겠는가.

유레카!

 

혹시  이 곳에서 곰보 아저씨나 그의 육감적인 아내 비슷한 사람은

상기 만나지 못하였느냐고?

글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이미 산업화의 레일이 깔린

이 도시에도 질주하지 않을리 없겠지만

조셉 콘래드가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을 회색으로 본 것과는 또다른

의미에서 회색 빛 가득한 이 도시의 낡은 책 취급 장소에

그런 욕망의 걸물들이 나앉아 있을는지---.

미미한 수요나마 공급을 창조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 원리를

겨우 직관한 가난하고 선한 사람들의 이 먹물 시장 바닥에---.

 

희안하게도 이런 물건을 다루는 조선족 동포는 아직 만나지 못하여서

책 값을 흥정할 때마다 나는 한족들과 힘들게 씨름하였다.

(말하고 보니 이건 과장법이고 여기에서 무슨 값을 흥정하였으랴,

부르는게 제 값일 따름인데---.)

 

서울에서는 벌써부터 종이로된 서적 자체에 큰 무게를 두지핞는

시대에 돌입하였다.

이사 때마다 끌고다니던 저 무거운 "대영 백과 사전(Encyclopedia

Britanica)"도 이제는 CD 한두판 속에서 숨을 죽이고 엎디어 있으니

종이 책이 무슨 소용에 닿으랴.

 

나와는 다른 대학에서 선생하는 내 친구 하나는 평생 모은 책을 모두

봉직하는 학교에  기증하고 특별 컬렉션 코너의 명패도 붙이게

되었다고 몇해전에 자랑하였다.

정말 부러운 일이었다.

지금은 대학 도서관에서 그런 기증을 거의 받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게 혹시라도 새책 구입에 따른 리베이트같은 

일과 무관치 않으리라 지레 짐작이라도 해볼는지 모르겠지만

100만 장서를 가진 도서관의 관장을 해본 나는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옥션 체제에서 서적 시장은 벌써부터 투명하거니와

대체로 서적을 기증하려는 분들은 알짜 희귀본은 자기 서재로 모시고

그 나머지, 말하자면 학문적 가치나 물리적 건강상태가 유효일자의

백척간두에 있는 책들에 대한 청소 역할을 기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평가 팀이 먼저 출장을 가서 현장을 살피는데

피차간에 성공하는 확율은 매우 낮다.

 

그런거라도 받아두면 좋지 않으냐고 할지 모르지만 이 또한 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발상이다.

낱권의 책이 장서가 되려면 엄격한 분류에 따른 태그를 옆구리에

차야하는데 그 비용과 작업이 수월치 않을뿐더러,

더우기 마그네틱 띠를 두르는 시대도 지나서 이제는 스마트 카드의

칩에 반응하는 값 비싼 장치를 둘러야 책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니 허접 쓰레기 일보 직전인 퇴물들을 감당하기란

불가능이다.

또한 공간 문제와 건물의 하중 문제도 뒤따른다.

결국 도서관 운영의 메가 트렌드는 디지털 라이브러리, 전자 도서관

체제로 급속히 이전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이곳 연길은 종이 책이 대접을 받는 곳이다.

그래서 나도 의미있는 기증의 기회를 꿈꾸어보기도 하지만

세상이 하도 빨리 변하니 사정이 어떻게 될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이 곳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IT산업이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는

경제 사회이다.

 

 

예전 우리나라의 "청계천 고본점"과 아직도 성업중인 일본 도쿄의 "간다 서점가"에서는

오래된 잡지나 전적들의 값이 많이 나갔으나

여기에서는 오래된 책 보다 나온지 얼마되지 않은 책들이 더 값이 나가니

내 가치 체계에는 가끔 혼란이  온다.

(물론 희귀본은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지만---).

 

내가 오래전 미시간 주립대학이나 코넬 대학의 used book store를 누빌 때도

그런 신구 가치의 혼란과 곤혹을 느꼈었다.

반세기 전의 "새터데이 리뷰"를 오래되었다는 죄목을 걸어 파지 값에 구입한

기억이 난다. 

미시간의 이스트 랜싱에 있는 "Gibson's"라는 바보 같은 책방에서였다.

 

헌 책방 이야기를 이제는 덮고싶은데 옆에서 누가 옛 기억을 더 짜내보라고

강요한다면,

글쎄, 내가 다니던 헌 책방 골목에도 미모의 중년 여성 두사람이

어느 해이던가 가게를 열었던 기억이 난다.

"현대 문학"이 창간호 이래로 정갈하게 서가에 꽂혀있었고 일본과

미국에서 나오는 에로스 황색 잡지도 입구 바닥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미8군에서 나오는 책들에 루트가 있다고 인근에서 쑥덕거렸다.

나도 부지런히 다니면서 짜장면 값을 갖다바쳤고 "훈몽자회"나

"동국정운"같은 보물을 그곳에서 찾지는 않았지만,

플레이 보이니 펜트 하우스, 그리고 스웜프 같은 잡지의 표지에

내리 꽂던 청년의 시선으로 언뜻 그녀들을 바라보기도 했겠으나,

"싸게 사들이기" 책략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끝)

출처 : 허구 속에 갇힌 현실/팩션 소설
글쓴이 : 청담 원글보기
메모 :

오랜만에 도문으로 갔다.

십여 년 전 백두산 천지로 갈 때에 연길에서 하루 밤을 자고 새벽에 들렸던 도문은

아직도 몽매의 지경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현대도시로 탈바꿈을 하였다.

 


 

역사적으로 이 곳은 훈춘 해관(세관)의 지부였으나 지금은 거꾸로 하전자

분소였던 이 곳이 정식 세관이 되고 훈춘은 분소가 되었다 한다.

 

나다니엘 호돈이 쓴 "주홍글씨"의 배경인 세일럼(Salem) 항구가 시세에 따라

인근 보스톤에, 그리고 넓게는 뉴욕에 밀려 인구 겨우 25000 소도시로 전락한

모습을 보았던 사실이 문득 떠오른다.

 



            (건너편 북한의 남양시가 선입견인가 초라하게 보인다)

 

함께 간 역사학자의 경험과 지혜로 우리는 두만강 물이 흐르는 곳까지 나아가서 손을 물에

넣어 보았다.

며칠 전에 배를 탔던 푸른 압록강과는 달리 누런 뻘 물이 내 마음과 같았다. 

 


 


 

강의가운데에 있는 섬에는 북한군이 진지를 구축해 놓고 있었다.

 


 

중조 협약에 의해서 강 가운데의 섬은 모두 북한 쪽 영토가 되었다고 한다.

백두산 천지를 쪼갤 수밖에 없었던 처지에서 그나마 다행인가.

 

 

 

 

 

 


 


 

두만강 푸른물에--, 김정구의 구성진 노래는 원래 1930년대 중반에 극단 예원이

중국 동북지방을 돌다가 마침 도문에 왔을 때 조선족이 경영하는 작은 여관에

들렀다가 왜경에게 희생된 어떤 여인의 울음 소리를 밤중에 듣고 작곡가 이시우가

즉흥가사에 곡을 붙였던 것으로,

나중에 김정구가 그를 박시춘에게 소개하고 트롬본 주자인 김용호가 또 1절을

다듬고 하여 우리의 가슴을 치게 되었다고 한다.

발로 뛰는 연변 작가 유연산의 고증이었다.

작가와 나의 교유록은 나중으로 미룬다.

 


 

우리는 도문 시의 발전에 달리 기여하지는 않고 사진 몇 장을 수확한 다음

일로 “사이 섬”(間島)으로 향하였다

출처 : 허구 속에 갇힌 현실/팩션 소설
글쓴이 : 청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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