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드디어 집으로 인터넷이 연결되었다.

학교에서도 인터넷 망은 잘 깔려있으나 아무래도 사용자들이 많아서

속도가 좀 느릴 뿐만 아니라 내 연구실에 있는 컴퓨터의 성능이

또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퇴근 후의 컴퓨터 작업도 생각해야겠기에 전화와 ADSL를

연길에  주소가 있는 학생의 이름으로 신청하여서 모든 것이 잘

진행되었는데(물론 전화가 나오는데에 좀 시간이 걸렸지만), 

이 전화 선으로 인터넷을 개통시키는 데에는 기술자들이

거의 열손가락을 꼽을 만큼 아파트로 찾아온 후에야 오늘 오후

겨우 개통이 되엇다.

 

(앞이 신 검찰원 청사이고 그 옆 쪽이 아파트 단지입니다.)

 

나야 수요자에 다름아니어서 피해자의 입장이긴 하였지만

그동안 말도 통하지 않는 중국인 청년 기술자의 노고가 많았고

전자공학과의 교수와 학생 몇명도 이 난제와 씨름을 하느라고

고생이 많았다.

 

(태권도 동아리들이 아침 마다 열심히 훈련 중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실제로 소비가 된 차비를 내가 주어도 결코 받지

않았다.

학생들은 예의가 그게 아니라고, 또 담당자는 공무원의

신분이기에---.

이 나라 구성원들의 저력이 그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극복해야할 비 효율성도 도처에 보였지만.

 

전화가 개통되기를 기다리던 날은 예전에 내가 신촌 살 때에

청색 전화를 신청해 놓고 하도 목이 빠질 것 같아서  백색 전화를

비싼 돈을 주고 산 다음 그 개통의 순간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그 며칠간의 기대와 초조와 긴장의 순간이 불현듯 떠올랐다.

내가 정말 시간 여행, 타임 머신을 제대로 타긴 탄 모양이다.

학교의 숙소로 그냥 들어갔으면 어림도 없을 경험들이었다.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니 내가 있는 현 주소의 좋은 면만을

사진으로 올리고 자랑도 좀 늘어놓아야겠다.

 

내가 지내는 거처는 "신 검찰원" 건물이 들어선 바로 옆에

지은지 얼마되지않는 약 40평짜리 아파트이다.

이 사람들 식으로 하면 120평방 미터인가 하는 규모인데

방이 모두 세개, 넓은 응접실, 샤워 시설이 포함된 화장실,

주방 기구가 딸린 부억, 이렇게 되어있다.

 

월세는 1000원(130000원)인데, 학교에서 900원을 보조해 주고

나는 매달 100원(13000원)만 낸다.

가스와 전기, 물값등은 물론 내가 낸다.

 

전화와 인터넷 신청비와 거기 따르는 6개월 사용료를 합쳐서

720원을 미리 냈고 전화기 값은 10원이었다.

 

우리나라 TV를 보기 위하여 접시 안테나를 500원, 600원,

700원짜리가 있어서 거하게 700원짜리로 설치했고

시청료는 없이 21개의 우리 국내 방송을 보고 듣는데

서울에서 아파트 공청으로 보던 케이블 TV 방송보다 종류가

많고 무슨 섹스 방송까지 들어있어서,

채널을 돌리다보면 성직자의 거룩하신 설교가 있으신 처소의

바로 옆에서 느닷없이 신음 소리가 튀어나오는데

그것도 한두번 듣고 보았더니 맨날 그게 그거라는 것을

터득하였다.

 

(시내에 있는 유명한 "서시"라고 하는 재래시장입니다)

 

여기 아파트는 껍데기만 지어놓고 내장은 입주자가 취미데로

돈을 들여서 하는데 껍데기 값은 우리 돈으로 한 2000-3000만원

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여기 연변 인근에다가 특별히 투자를 겸해서 거처를

마련해 놓은 사람도 있는듯 하지만,

사실 눈치 빠르고 약삭바른 사람들은 북경, 상해는 물론

대련이나 청도 등에 이미 집을 장만하여서 그간 집값이 올라

재미도 많이 보았고 아이들 교육 차원에서도 일단은 앞서가는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왜 멀리 미국이나 카나다에 마누라와 아이들을 보내서

가족들을 시험에 빠지게 하느냐,

 

대련(따렌)이나 청도(칭따오)에 진을 치면 학비와 숙식비도 싸고

주말이면 어른들이 유람선 타고 가서 감시와 유람으로 일석이조,

아이들은 우리말과 중국어와 영어를 함께 익히고---.

이 곳에서 나오는 흑룡강 신문 등에는 매일 이런 광고가 나온다.

나 이런 참---.

 

그러니 우리 경제 특구에 외국학교 절대 들어오지 못하게하는

사람들이 하나만 알고 이걸 모르고 있는건가---.

 

물론 내가 있는 이 곳 대학에도 부설 외국인 학교가 있어서 유치원

부터 중고등학교가 있고,

수업은 우리말, 영어, 중국어로 국제화되어 있어서 교직원 외에도

우리 기업체에 파견나온 분들이 자녀들을 여기에 입학시키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가만히 보니 서울에 있는 아메리칸 스큘 보다 시설이나 교육 내용이

더 좋은것 같다.

교장 선생님은 옥스포드를 나오신 아주 리버럴한 영국 교육자이다.

 

오늘은 시내에 있는 "신화 서점"에 가서 책을 많이 샀다.

서점을 중국어로 무어라고 하던데 지금 잊었다.

두꺼운 책들은 25원씩이나(?) 하였다.

서울 교보에 가보면 왠만한 양서는 모두 30달러가 넘는다.

공간 여행으로 열배가 넘는 가치체계를 오락가락하고 있다.

 

(역시 서시의 일부, 신화 서점도 가까이 있습니다. 인민 방공 시장이라는 거대한 지하

재래 시장도 있습니다. 이불이 150원, 배게는 25원입니다.)

 

올때에는 택시 기사에게 "신 검찰원 옆 아파트"라는 발음을

한번도 제대로 못해서 버스를 타고 왔다.

우리 마을 버스에 비한다면 크기는 70퍼센트, 내부 구조는

아직 비교 이전이다.

그러나 곧 우리를 추월하겠지---.

값은 1원이다.

우리 돈으로는 130원, 아무리 멀어도---.

 

저녁에는 인근 초시(超市-수퍼마켓)에서 사과를 한 상자

전화로 배달시켰다.

맛이 참 좋았다.

20개 들이가 배달료 포함 10원이었다.

서울로 치면 사과 반쪽 값이다.

 

점심에는 소위 서울식 짜장면 곱배기를 12원 주고 시켜서

둘이서 나누어 먹었다.

물론 단체 여행한 분들이면 모두 아시다시피 나도 북경의

황제 메뉴나 상해나 홍콩의 수상 만찬도 맛보았고

이곳에서도 며칠 전에는 강소성에서 온 교환교수와 학교의

초대로 12가지 요리를 대접 받은 적도 있지만

하여간 짜장면 값으로 또한번 놀라운 시공을 타고 넘나들었다.

 

다음 기회에는 여기 "유경 호텔"에서 평양 랭면 먹고

아름다운 복무원들의 노래와 춤을 관람한 이야기도 써야겠다.

(유경은 버드나무 많은 수도, 평양을 말합니다).

출처 : 허구 속에 갇힌 현실/팩션 소설
글쓴이 : 청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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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도시에나 뒷골목과 치부(恥部)에 해당하는 지역은 있다.

연길에도 아직은 그런 곳이 많이 눈에 뜨이지만 금년을 고비로 이 도시의 근대화는

더욱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옛 모습이 있을 때에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나그네의 행운인지도 모른다.

내가 잠시 묵었던 "세기 호텔"에서 내려다본 다운타운의 모습과 함께 뒷골목의

남아있는 흔적들을 여기 올려본다.

우리의 옛 모습이 불현듯 생각난다.

 

 

 

어제 오후에는 걸어서 30분쯤 되는 거리에 있는 "북대 시장"을 누비기로 하였다.

남새(채소)도 좀 사고 저녁도 사먹기로 작정이 되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타임 머신을 타고 초공간, 초시간을 섭렵하고 즐길 목적이었다.

 

 

너무 늦게 다니지도 말고 너무 있는체, 한국인인체 하지는 말아야 된다는

주의를 주위에서 들었으나 내 큰 거구와 완력을 밑천 삼아 "디카"를

덜렁덜렁 손에들고 내키는 데로 사진을 찍었다.

 

아직 초상권이니 파파라치니 하는 후기 산업사회의 컨셉이 들어오지 않은 순진한

동네에서 내 시각적 욕망이 유영했달까,

피사체가 된 수 많은 사람들 자체도 카메라 맨을 탓하거나 만류하는 몸짓이기 보다는

함께 즐기는 분위기였다.

 

 

통하는 정서도 좋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나와 그들, 그러니까 우리의 외양이 같다는

데에 있었을 것이다.

 

 

중국의 여러 곳이 아직도 그러하지만 연변, 연길의 스모그 현상은 그중에서도 유명하다.

물론 내년이면 난방의 대부분을 도시 가스로 바꾼다고 지금 도로 곳곳이 굴착되고

공사가 한창이다.

 

아무튼 지금 이 곳의 땔감은 석탄, 갈탄, 장작 등인데 특히 장작 비슷하게 나무를 패어서

땔감으로 쓰는 모습은 과거 어느 때의 우리 모습이다.

불 쏘시게까지 묶어서 파는데 아무래도 시선이 느껴져서 그건 담지 못했다.

 

 

 

현대는 석유화학 문명의 시대이다.

중국에도 다이칭(대경) 유전이 있는데 지금은 채유 규모가 많이 줄었다.

지금은 신장 위구르 타림 분지 쪽의 서부 대유전 개발이 한창이라고 한다.

중국 석유의 주유소 규모가 점점 거대화하고 있다.

 

 

석유, 석탄 문명은 환경에 재앙이 되고 있는데 그래도 아직 잉어가 이렇게 많이 잡히고

있다.

 

 

재개잘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있다. 지금도 이미 연길 주택의

70퍼센트는 아파트라고 한다.

 

 

아직은 옛모습 그대로의 유치원과 이발관이 남아있기도 하다.

늦은 저녁을 먹고 들어오다가 거대한 과학루와 기술관이 있는 곳으로 잘못들어갔다.

학생 몇명이서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냐?"

"제10중학교입니다."

우리 말 대답이 씩씩하였다.

"10중이 정말 좋구나, 넘버원!"

내가 엄지 손가락을 올려세워보이자 그들이 입을 모아답했다.

"베리 구웃!"

그들의  환한 미래가 눈에 보이는듯하였다.

 

 

이제 아래에 보이는 "주상 복합 아파트"로 낡은 모든 것은 흡수되고 다시 내가 이 곳을

찾게 되었을 때에는 이 모든 것이 지나간 전설이거나 잠시 걸음을 멈추었던 나그네의

실증할 길 없는 환상으로만 자리하리라.

 

날이 어두워져서 위, 아래 끝 사진 두 컷이 좀 흐릿하게 나왔으나 뺄 수 없는

에필로그 역할인가 한다.

 

출처 : 허구 속에 갇힌 현실/팩션 소설
글쓴이 : 청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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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차 발전을 꾀하고 있는 중국에서 연변 조선족들의 순서는 어디쯤일까.

중앙 정부의 우선 순위에 못지 않게 주민들의 의지와 노력과 역량이 튼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하여간 현대와 근대가 공존하는 모습은 북경이나 상해나 서안이 모두

비슷하였습니다.

이곳에도 우리가 타임 머신을 타고가서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많은

광경들이 만화경이나 신기루처럼 눈을 의심케 하면서도 아직도

자리하고 있지요.

그 엄존하는 모습들을 여기에 올려봅니다.

 

가끔 퀴즈 풀이도 해보겠습니다.

 

 

"시라지 국밥"이 무엇일까요? 물론 다운타운에 있는 식당입니다.

그러나 규모가 큰 식당들이 훨씬 더 많지요.

큰식당은 음식값이 보통 10원에서 30원까지이지만 작은 식당은 5원 정도입니다.

이런 곳에서 식사를 해보아야 근대화와 현대와에 몸부림치는 중국의 애환을 읽을 수

있답니다.

 

 

다음 장면은 예전에 우리도 어디에선가 자주 본듯한---.

 

 

 

다음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요?

 

 

 

 

 

 

 

아래 음식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호텔에서 내려다 본 모습입니다. 건설과 공해의 모습입니다.

강 양안(동,서)으로 아파트가 들어오고 있는데 강남, 강북의 차이 같은 것도 있답니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해 둡시다---.

출처 : 허구 속에 갇힌 현실/팩션 소설
글쓴이 : 청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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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화장터 가는 길이 어디요?”

내가 마침내 그렇게 물어보았다.

학교 부속 교회가 캠퍼스의 뒤쪽으로 가깝긴 해도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했었는데 부활절 예배를 보러 오늘은 부랴부랴 아파트에서 출발했기에

찾기가 좀더 힘이 들었던 것이다.


연변에 와서 거의 한달이 되었으나 저 추웠던 첫째 주는 시내 호텔에

있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다음부터 도 매 주일마다 이사하는 날,

세탁기 오는 날, 식탁 오는 날, 책상과 소파 오는 날, 전화와 인터넷

설치 파동(!)으로 또 며칠간 집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 등으로 게으른

사람의 핑계잡기 꼭 좋은 일들이 있어서 이제껏 차일피일 하면서

오늘 아침은 부활성회의 날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

더욱이 그동안 행정 일을 보느라 학부 강의 없이 대학원 세미나만 하던

차에 이곳에 와서 객원 교수 발령을 받고 1주에 3시간을 신나게 강의하고

어제 오후에는 조선족 교사들의 모임에 가서,

“미국학교에서의 독서 지도”라는 제목으로 한 시간만 하라는 강연을

90분 이상 신나게 떠들었더니 아침에는 목이 잠기고 몸살, 감기 기운까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메일을 열어보니 위의 주제로 블로그에서 LA에 사시는 Joanne

님 에게 부탁했던 자료와 설명들이 좀 늦게 도착해 있었는데

그 전말은 이 양반이 부활성회를 준비하시느라 내 블로그의 협조 요청

내용을 늦게 열어보게 된 때문이었다.


“학교에는 교회가 있을 것이고 부활 예배가실 것이지요?”

이런 대목에서 아차하고 컴퓨터 모니터의 시간을 보니 벌써 10시 가량이

아닌가.

또 틀렸구나, 포기를 하는데 집사람이 “여기는 한 시간 늦잖아요.”한다.

아, 금쪽같은 한 시간이 예비 되어 있었던 것이다.

 


택시를 타고 달려서 학교 정문 앞에서 차를 버린 다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깥쪽으로 바삐 돌며 교회를 찾는데 그 동네 사람들이 하나같이 잘 모르겠다고

한다.

학교 교회를 동네 사람들이 잘 모를 수도 있겠고 혹시 외국인 교회를 안다고

나서기가 어려운 처지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중국에서도 이제는 종교의 자유가 있지만 외국인이 전교를 한다던지 함께

예배를 볼 수는 없다고 한다.

 

아편전쟁 이래, 서세동점의 뼈아픈 역사적 체험을 가진 나라의 고민이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아무튼 지척에 두고 교회 찾는 일에 바쁜 내 머리에 이 교회가 예전의 화장터를

개축하여 세워졌다는 유명한 일화가 떠올랐다.

더욱이 강대상은 바로 화장 로가 놓여있던 바로 그곳이라는 이야기도 생각이

났다.

당국에서는 외국인 교회의 인가에 난색을 표하다가 마침내 화장터를 내놓게

되었다고 한다.

아,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가.

이 세상 하직하고 천당 가는 길목의 화장터에 이 교회는 반석(베드로-Peter)을

깔고 마련된 것이었다.


내가 그 화장터를 물으니 그제야 모르는 사람이 없고 과연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화장장의 굴뚝도 눈에 들어온다.

이제 그리로 가는 길에는 예전에 내가 자란 시골마을의 가로수들이 두 갈래로

그대로 뻗어있고 그 길 양편의 과수 목에는 벌써 물이 조금 차오른 듯하다.

 


그래도 결국 지각을 하여 들어가 본 교회의 내부는 완전히 개조를 하여서

바닥은 돌을 깔았고 천정도 가운데가 올라온 삼각형 모양의 굵은 대들보

여럿이 하늘로 받치는 밝고 시원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목측으로 500좌석은 실히 되어 보이는 예배 석은 이미 꽉 차 있어서 우리는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기도와 설교와 예배 인도가 모두 영어와 우리말로 진행되었는데 신도들도

각양각색이어서 황색, 백색, 흑색의 인종 전시장이었다.

강대상 옆의 흰 벽은 오버 헤드 프로젝터의 훌륭한 영사막이 되어서 우리말,

영어, 러시아어, 한자 등등이 투영되고 있었지만 지배적 언어는 물론

우리말이었다.

(내일 계속)

출처 : 허구 속에 갇힌 현실/팩션 소설
글쓴이 : 청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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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문을 지나면서는 두만강을 오른 쪽으로 끼고 계속달리면 오른 쪽의 강건너

민둥산이 바로 북한 땅이었다. 

그쪽으로도 가끔 집과 경작지가 보였으며 아침밥을 짓는 연기가 정겹게

올라가고 있었다.

토문과 두만의 해묵은 이야기들은 다른 기회에 이야기할 말미를 잡기로 한다.

 

훈춘시의 모습은 연길과는 또 달랐다.

인구 20만의 이 도시도 물론 연변 조선족 자치구에 속하였으며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도로의 간판에는 한글이 들어있었으나

연길 보다는 덜 철저한듯 하였고 가끔, 아니 자주 한글이 빠진 모양을 볼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이 곳이 국경 도시임을 나타내는 듯 러시아 어가 간판 속에

심심치 않게 들어가 있었다.

 

 

특히 장령자 쪽으로 가는 합작구에 그런 러시아 글이 많이 있었고 러시아 인들의 모습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세 나라의 상품이 통관되는 해관(海關)에 도착하였다.

세관을 중국에서는 바다나 육지나 하늘이나 모두 해관이라고 불러서 역사성에 무게를

두는건지, 세관이라는 표현이 돈내는 곳이라는 너무 낯이 보이는 표현이라 둘러댄건지,

하여간 해관으로 들어가 보았다.

러시아 인 컨테이너 운전기사들이 많이 보였고 비닐 봉지에 음식과 음료를 사서

트럭으로 들락거리는 모습도 이채로웠다.

 


이 곳까지가 모두 훈춘의 시계였다. 여기에서 배가 러시아를 왕래하고 우리나라의

속초에도 많이 다닌다고 한다.

과연 Dongchun Ferry라는 글이 붙은 컨테이너가 많이 보였고 꽁무니에는

"한국 특장차"라는 한글로된 한 핏줄 증명서도 달고 있었다.

 

훈춘은 원래 크지 않던 마을이 계획 도시로 발전하기 때문에 새 건물들의

임대광고와 아파트 분양을 알리는 조감도들이 도시 외곽에서 많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탄 큰 버스는 오토바이와의 작은 접촉 사고로 시간을 빼앗겨서,

훈춘 시내에 있는 조선족 경영의 경신 식당에서 조금 늦은 점심을 먹고 우리는

방천으로 달렸다.

식당에는 마침 별 두개를 단 군관이 나타났는데 이 식당 주인의 아들로서 잠시

집안일을 도우러 나왔다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이 행사를 총괄하는 우리 조선족 직원의 친구이기도 하여서 특별히 나왔다고

하였다.

 

(훈춘의 젊은 남녀 미발 복무원들이 길건너 내 디카를 의식하고 포즈를 취하더군요.)

 

이제 방천 쪽으로 달리는 길에서 북한 쪽은 너무나 똑똑히 잘 보였다.

철교가 두어군데 걸려있어서 마음은 벌써 북녘을 달려가고 있었으나 가슴은 아팠다.

더욱이 산업도로 형태로 닦은 이 길은 작년인가에 완공이 된 새 길이었고 통행하는

차도 별로 없었는데 왼쪽으로 낮게 계속되는 철조망 너머는 바로 러시아 땅이었고

오른쪽 강 건너는 북녘 땅인 것이다.

 

 

중국 땅은 지도에서도 보이듯이 그 새로 난 길의 좁은 회랑뿐이었다.

파란 눈을 가진 사람들이 저 시베리아 툰드라 동토를 지나서 여기에 나타날 때까지

청조의 사람들은 무얼 했는지, 아니 남의 집 걱정할 일이 아니라 일제가 간도 협약을

맺을 때 우리는 뒷짐 지고 또 무엇을 했었던지---.

 

(망해각 밑의 팔각정에 다시 모여 섰습니다. 영화 감독은 아니지만 저는 또 카메오

게임을---. 렌즈를 남에게 맡겼더니 구도를 잘 못맞추었군요.)

 

 

(계속)

출처 : 허구 속에 갇힌 현실/팩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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