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의사' 꿈 이룬 탈북의사 1남2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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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임주영 기자 = "이제 진짜 탈북에 성공했다는 생각이 듭니다."북한에서 의사, 한의사였던 탈북자 3명이 각고의 노력 끝에 남한에서 의사, 한의사 국가고시에 나란히 합격했다.

함흥의학대학을 졸업하고 함경남도 지역에서 1999년부터 2004년까지 의사로 활동하다 탈북한 정성일(39)씨는 지난해 낙방했으나 올해 제73회 의사 국가고시에서 뜻을 이뤘다.

2007년 시험 도전을 마음먹은 뒤 "하루에 4시간 자며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는 정씨는 처음 남한에 들어와선 갈 길을 찾지 못해 방황했다. 북한 의사 경력을 인정받지 못해 곧바로 의사 시험을 칠 수 없었기 때문.

다행히 탈북자 출신 의사나 한의사들도 심사를 통해 학력이 인정되면 시험을 볼 수 있도록 북한이탈주민보호정착지원법의 시행령이 2007년 개정돼 지난해 응시가 가능해졌다.

정씨는 그 사이 공사판에서 노동하거나 예식장에서 결혼식 촬영기사로 잠시 일하기도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뭔가 허전함"을 지울 수 없어 적성검사까지 받아본 끝에 "내 길은 오직 이것밖에 없다"는 결심을 굳히고 "뒤 돌아보지 않고 공부만 했다"고 말했다.

막상 결심은 했지만 의사 되기는 쉽지 않았다. 전문직 탈북자들에게 공통된 일이지만 남북한의 용어가 워낙 달라 어려움이 컸다. 외래어가 많은 의학용어는 처음 접하는 말이 많았다.

그는 "아직 남한 실정을 잘 몰라 조심스럽지만 외래어보다는 쉬운 우리말을 더 많이 쓰면 환자들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군의관 A씨의 도움이 컸다.

정씨는 "공부하다 모르는 걸 물어보면 언제나 친절히 대답해 줬고 내 수준에 맞는 책을 추천해줬다"며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부산의 한 종합병원 외과 과장 B씨, 산부인과 병원장 C씨도 빼놓을 수 없는 은인이다.

"책만 읽어선 알기 힘든 임상 경험을 들려줘 공부에 큰 도움이 됐고 슬럼프에 빠질 때마다 식사를 함께 하면서 격려해줬습니다."합격 통보를 받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는 정씨는 "이제 진짜 탈북에 성공했다는 느낌"이라며 "열심히 하면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북한에서 한의사였던 여성 2명도 제64회 한의사 국가고시에 합격, 탈북자 사회의 '여풍(女風)'을 보여줬다.

청진의학대학 동의(東醫)학부를 졸업하고 8년간 한의사로 활동하다 탈북, 2002년 입국한 김지은(43)씨는 세명대 한의대(본과 1학년)에 편입해 4년간 정규과정을 밟았다.

김씨는 "한의학은 '민족 의학'인 만큼 남북 사이에 같은 점이 많지만 다른 점도 있다"고 말했다.

"남한은 동의보감과 같은 고전에 수록된 내용을 한문 원전을 보며 배우지만 북한에선 원전 내용을 한 데 묶어 교과서로 만들어 본다는 게 우선 다릅니다."또 "남한은 이론 중심이라면 상대적으로 북한은 실기 위주인 점에서 교육방법도 약간 차이가 있다"고 김씨는 말했다.

북한은 주관식 시험을 치는 반면 남한은 객관식 시험이 많은 것도 적응이 쉽지 않았다.

특히 북한에선 한문을 사용하지 않아 공부할 때 한문 해독에 어려움을 겪었고, 외국어로 러시아어를 배웠던 터라 영어도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15~20살 아래 동급생들이 누나, 언니라고 부르면서 도와준 덕분에 즐겁게 학교를 다녔다"고 김씨는 고마워했다.

"환자들과 마음을 나누는 한의사가 되고 싶다"는 그는 "남한과 북한에서 모두 한의대를 졸업한 사람은 아마 제가 처음일 것"이라며 "이 경험을 잘 살려 현장에서 활용하는 방안을 찾고 싶다"고 밝혔다.

함흥의학대학에서 한의사를 양성하는 고려학부를 졸업하고 3년간 근무하다 탈북, 2004년 남한에 온 이은지(가명.33)씨는 올해 처음 도전해 당당히 합격했다.

이씨는 "남과 북의 한의학은 비슷한 면이 많아 공부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도리어 시험 정보나 자료를 구하기가 힘들어 "여러 한의대를 찾아다니며 문의하는 과정에서 속도 많이 상했다"고 '독학'의 고충을 토로했다.

"중국에서 한의학을 공부한 뒤 국내 시험을 보려는 학생들이 많아서인지 한의대가 '외부인'에 폐쇄적인 것 같다"는 것.

그는 '양방과 한방의 교류.통합'의 정도를 남북 한의학의 가장 큰 차이로 꼽았다. 북한에선 3년간 서양의학을 배운 뒤 나머지 3년간 한의학을 배우지만 "남한에선 양방과 한방이 철저히 분리돼 있다"고 이씨는 지적하고 "북한에선 병원에서도 양방과 한방을 통합해 진료한다"고 소개했다.

"북한의 한의학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점, 북한은 민간요법을 상대적으로 많이 사용한다는 것도 다른 점"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이씨는 "아직 남한 한의학의 실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병원에 근무하면서 유능한 선생님들 밑에서 많이 배웠으면 좋겠다"며 "남과 북의 한의학을 잘 접목해 좋은 진료를 펼치고 싶다"고 말했다.

z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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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안에서 나 행복하네]

 

북한 요덕수용소 수감자  사랑의 교회 김영순 집사간증

어느 탈북자 부부의 삶


북한에서 탈북한 뒤 2년 동안 산 속에서 굴을 파고 살았던 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30대 후반의 성경일, 주명희 부부는 1999년 북한을 떠나 중국에 들어왔습니다.
안전한 곳을 찾다가 이들이 도착한 곳은 중국 지린성 안투(安圖)현 밍위애(명월)진이었습니다. 참고로 명월진은 북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곳입니다.
김일성 주석이 항일투쟁을 할 때 명월진에서 유명한 회의를 했다고 하여 교과서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곳입니다.

북한에 있었다면 혁명사적지가 돼 명소로 꾸려질 곳이지만 중국 땅에 있다보니 이 마을은 외지고 후진 평범한 농촌마을에 불과합니다. 그 많은 탈북자들도 당시는 이곳까지 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성 씨 부부는 이 마을에 나타난 첫 탈북자였습니다.
이들은 마을에서 괜찮게 사는 듯한 집을 찾아가 북한에서 왔는데 도와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 집은 마을 공산당 서기의 집이었는데 그는 조선족이어서 이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했습니다. 마침 서기의 장인이 풍을 맞아 대소변을 받아줄 사람이 필요했던 지라 그는 이들을 흔쾌히 자기 집에 머무르게 하면서 일을 시켰습니다. 공산당 서기가 탈북자를 자기 집에 쓸 정도로 외진 곳이니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요.

환자는 오래 동안 누워있어 잔등에 고기비늘처럼 두꺼운 비늘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환자를 주 씨는 3년 간 간병했습니다. 성 씨는 나가서 서기네 집 밭일을 해주었죠. 이들이 성실한 모습에 감동 받아선지 아니면 공짜로 인력을 쓰는 서기를 따라 배워서 그랬는지 이후 마을사람들도 경쟁적으로 탈북자들을 받아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탈북자들이 많다는 소문은 어느새 공안으로 흘러가 공안원들이 단속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면 공산당 서기가 정보를 흘려주었습니다. 탈북자들은 불도 못 켠 방에서 열쇠를 밖으로 채운 채 단속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공안원들도 바보는 아닌지라 이 마을에서도 체포되는 탈북자들이 생겨났습니다.
게다가 공산당 서기도 어떤 언질을 받았는지 이들 부부에 대해 상당히 부담을 갖는 눈치였습니다. 결국 이들 부부는 산으로 향했습니다.

골짜기를 따라 깊이 들어가 나무를 베어 토굴을 지었습니다. 주변 나무를 찍으면 쉽게 드러날 우려가 있어 멀리서 직경 20㎝ 정도 되는 나무를 찍어왔습니다.
갱도처럼 지은 집 밖으로는 잔디와 풀을 방치해 위장을 했습니다. 여름은 물론이고 겨울에도 눈치 채이지 않게 말입니다. 일어나고 자는 시간은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었습니다.

토굴 안은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겨우 옷을 입을 정도의 높이였습니다. 햇볕이 들지 않아 벽 곳곳으로 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된장에 감자를 썰어 만든 찌개가 매일 오르는 메뉴였습니다. 주변에 농사를 지을 수 없는지라 성씨는 주변에 내려가 삯일을 해주고 쌀을 얻어왔습니다. 성씨는 자신은 잡혀도 아내는 안전하다고 생각하니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참, 삯일을 해주려 다니는 길에 반드시 가지고 다니는 필수품이 있었으니 그것은 이불이었습니다. 탈북자라고 어디서든 재워주는 사람이 없어 산 속에서 이불을 덮고 잔적도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이 과정에 성 씨는 치질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아파도 어쩔 도리가 없는데 괜히 아내만 걱정하게 만들까 성 씨는 아픈 내색을 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들은 이곳에서 2년을 살았습니다. 김일성 주석이 영웅적 게릴라 활동을 했다고 북에서 떠드는 유명한 그 곳. 70년 뒤 김 주석의 백성들이 다시 그 산에서 야인의 삶을 살게 된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라를 찾기 위해 싸웠다는 그 곳에서 찾았다는 그 나라를 등진 사람들이 다시금 그 땅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처절한 삶을 살았단 사실이 말입니다.

다행히 성 씨 부부는 우연히 한국으로 온 한 탈북자를 알게 됐습니다. 그의 소개로 성 씨의 사연이 알려진 뒤 도움의 손길이 왔습니다. 이들은 끝을 알 수 없을 것 같던 산중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걸음을 내디뎠고 얼마 전에는 경북 대구에 새 보금자리를 틀었습니다.
토굴에서 온수난방이 되는 아파트까지 3달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한국 의사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머리를 설레설레 흔드는 치질도 수술 받았습니다.

아직도 중국에는 성씨처럼 살고 있는 탈북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지나간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입니다. 26일 10일간 북한을 방문하고 베이징으로 돌아온 제럴드 버크 세계식량계획 대변인은 올해 북한의 식량사정이 97년 이후 최악이라면서 중국이 탈북자 증가에 대비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도 났던 탈북자들을 신고하라는 내용의 중국 공안 포스터도 이러한 대비책의 일환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성 씨 부부의 말이 귀전에 맴돕니다.
“눈가루는 날리는 데...북한 사람이 내일을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운명이 어떻게 되던지 사는 순간이나마 편안하게 있자. 하늘을 쳐다보니 눈물만 서럽게 났어요.”-남편 성경일씨.
“지금은 여기 앉아서 말하니까 그렇지...그때는 머리 속에 오직 살던지 죽는다. 이 두 길을 놓고 악을 품고 오직 살아야 한다는 맘만 가지고 살았어요.”- 아내 주명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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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국무부에서 피아노 독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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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북자 피아니스트 김철웅씨 연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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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북자 피아니스트 김철웅씨

탈북자 피아니스트인 김철웅씨 연주회가 지난 5일(주일) 오후 7시 와싱톤한인교회(담임 김영봉 목사)에서 열렸다.

김철웅씨는 연주에 앞서 탈북하게 된 동기와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경위를 간증했다.

한 때 마음이 끌린 여성에게 감동적인 연주를 들려주기 위해 리차드 클라이더만의 곡을 연습한 것이 화근이 됐다.

북한에서는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는 곡이 클래식 같은 장르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 곡을 연습했던 것이 상부에 보고가 돼서 심할서를 10장이나 썼다고 한다.

평양음악대학에 8살에 입학해서 러시아 차이코프스키 국립음악원을 졸업하기 까지 18년 동안 피아노를 배웠던

그가 탈북하게 된 것은 순전히 “음악이 고파서”였다. 피아노밖에 몰랐던 그에게 피아노를 자유롭게 연주할 수 없는 나라는

더 이상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3일만에 탈북을 했다.

북한이란 사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할 정도였으니 그도 로얄패밀리 중의 하나였다.

그는 탈북 후 중국에서 떠돌면서 처음으로 배고픔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조선족을 통해 교회를 알게 됐고

 교회 안에 있는 피아노를 보고 처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게 됐단다.

또한, 김철웅씨는 “하나님께서 북한을 미워해서 남북 분단을 시켜놓았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분명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탈북자는 먼저 온 미래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탈북 청소년 사역이 중요하다. 그들이 통일 이후 북한을 이끌어 나갈 통일 꿈나무이기 때문이다.”라며

탈북 청소년 사역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다.

짧은 간증을 마친 김철웅씨는 쇼팽의 녹턴, 리차드 클라이더만의 가을의 속삭임,

 어메이징 그레이스, 북한 민요, 자신이 편곡한 <아리랑 소나타> 등을 연주했다.

이번 연주회를 통한 수익금은 매년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때 학업에 어려움을 겪는 탈북청소년들을

도와주는 한겨레 계절학교 지원금으로 사용된다.

6일에는 음악을 통해 미국인들에게 북한 인권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크리스 앤더슨 재단과 국립 민주주의 기금(NED)이 기획한

연주회가 국무부 청사에서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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