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청소년, 그리움을 글로 쓰다
“프랑스의 작가 프루스트는 자신에게 글쓰기는 자기만족이라고 말했지요. 여기서 글쓰기는 자기에게 부족한 것을 일종의 콤플렉스인 결핍으로 보는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결핍감을 글쓰기로 해소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콤플렉스는 무엇이에요?”

조성면 문학비평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손을 들었다. 맨 앞자리에 앉은 한 남학생이 번쩍 손을 들며 말했다.

“키가 작은 게 콤플렉스인데요.” 남학생의 말에 여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어 여기저기서 다른 학생들이 손을 번쩍 들었다.

안성에 위치한 탈북청소년들을 위한 대안학교 한겨레중고등학교 문학교실 수업의 한 장면이다.

‘글쓰기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수업이 진행된 한겨레중고교 책마루도서관에는 학생 21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땅거미가 막 지상으로 내려앉기 시작한 8월의 어느 저녁이었다.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한겨레중고교 문학교실

◇ 조성면 문학평론가씨가 한겨레중고교 책마루도서관에서 학생들에게 ‘글쓰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피클뉴스 김진경
경기문화재단이 후원하고 전문문학인 모임인 ‘이웃과 함께 하는 작가들의 모임(회장 조성면‧문학평론가)’이 함께하는 ‘한겨레학교 문학교실’은 탈북청소년들의 정서함양을 위해 마련된 문학교실이다.

올해 한겨레중고등학교 21명의 학생이 이 강의를 듣기 위해 신청을 했다. 지난해에 이어 강의에 참여한 학생은 모두 4명이었다.

이 강의에선 전문적인 글쓰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탈북청소년들의 정서를 돕기 위한 자리인 만큼 학생들이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이곳의 학생들은 남한의 학생들과 달리 다소 낮은 언어 실력을 갖고 있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에선 또래 남한의 학생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특히 외모에 관심이 많고 잘생긴 연예인을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들이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온 그들의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문학교실에 참여한 전문 문인들이 이들을 위해 남한 사회의 적응을 도와주기보다는 ‘문학’을 통해 희망의 언어를 제시해주고 있었다.

지난해 처음 시작된 한겨레학교 문학교실에선 창작수업을 비롯해 문학기행, 시낭송회 등 다양한 행사로 마련돼 학생들과 학교 관계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특히 지난해 참여한 학생들 가운데 4명의 작품이 청소년 문예지에 게재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리움을 글로 쓰고 싶었어요

올해에도 문학교실에 참여한 고교 1년생 한복희(가명)양은 시를 쓰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한 양은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은 아니다.

가끔 노트에 시를 쓰기도 하고 남한의 성장소설들을 즐겨 읽는 평범한 소녀이다. 남한의 여느 아이들과 차이가 없었다. 한 양은 열아홉이란 나이에 비해 얼굴이 동안이기에 가끔 버스를 탈 때 초등학생이냐는 말을 듣는다고 한다.

간간이 이북 억양이 섞인 말투가 남한 출신이 아님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고향이 저쪽(북)이다 보니 그곳에서 엄마랑 아빠랑 살 때가 그리웠어요. 그걸로 글을 쓰고 싶었죠. 북한에서 살던 생과 지금의 생에 대해 말예요. 일종의 전환점을 쓰고 싶었어요.”

함경남도 북청 출신인 한 양은 문학교실에 다시 들어온 이유에 대해 또랑또랑하게 대답했다. 또래 아이에 비해 조숙해보였다. 세상에 대해 조숙한 것은 한 양뿐만이 아니다.

이 학교의 학생들이 남한의 아이들과 달리 남다른 경험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이 학교의 학생들은 이십대 초반의 학생들까지 재학하고 있어 남한의 또래 아이들보다는 평균연령이 높은 점도 하나의 이유일 수도 있겠다.

문학교실 지도교사인 한겨레중고교 서지은 교사는 아이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곳의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경험이 남다르기 때문에 자기 이야기를 잘 써요. 우리나라(남한) 애들은 죽었다 깨도 못쓸 이야기이지요. 그런 이곳의 아이들에게 글쓰기가 치유되는 과정이 되길 바랄 뿐이죠.”

이들이 남들과 달리 특별한 경험을 통해 문학적 감성을 지녔기 때문인 듯했다. 이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경험이기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제한된 공간에서 꿈을 키우다

◇ 안성 죽산에 위치한 한겨레중고등학교의 전경.   ⓒ 피클뉴스 김진경


전교생 전원이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이 개인적인 시간을 갖기에는 충분하지 안았다.

한겨레학교의 하루시작은 오전 6시 10분이다. 또 하루가 끝나는 시간은 밤 11시. 오후 3시 20분이면 정규수업이 끝난다. 하지만 방과후 수업인 7~8교시가 이어진다.

특히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정규 과정 보충수업이, 화요일과 목요일엔 특기적성 시간으로 댄스와 피아노를 배운다. 또 매달 마지막주 수요일에는 미국대사관에서 나온 선생으로부터 영어를 배운다.

그러나 문학교실 학생들은 남들과 달리 바쁜 일상 속에서 책읽기를 좋아하고 있었다.

또한 학생들을 위해 오전 정규수업 전에 독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한편, 독서통장 제도를 통해 책읽기를 권장했던 이 학교 교사들의 힘도 보탬이 됐다.

지난해 이 학교에는 학생들이 읽을 책이 부족했다. 지난해 문학교실에 참여한 문인들의 도움으로 여러 곳에서 책을 지원받아 도서관을 채웠고, ‘독서통장’을 만들어 학생들이 맘껏 책을 읽고 있었다.

고교과정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은 통장에 칸이 채워지는 재미로 책을 본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도서관에는 지난해 급하게 책을 채우다보니 신간 위주의 책만이 꽂혀 있었다. 하지만 출간된 지 오래된 책들이나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온 스테디셀러의 책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 지난해 경기문화재단과 ‘이웃과 함께 하는 작가들의 모임’이 충남 예산 일대에서 한겨레중고교 문학기행에서 백일장을 가졌다.   ⓒ 이웃과함께하는작가들의모임


고교 3년생 이은주(가명)양의 꿈은 시인이다. 하지만 이 양은 직업으로 시를 쓰는 사람이 되고픈 생각이 없었다. 생계를 위한 직업으로 적절치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양은 작가가 되겠다는 꿈은 버리지 않겠다고 말한다. “사회에 나가면 글쓰기는 취미로 하고 싶다”는 이 양의 말은 무척이나 현실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남한의 학생들과 달리 학교로 벗어나면 대학보다는 생계를 위해 취직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교사들을 이들을 위해 가능하면 대학을 가더라도 4년제 정규대학보다는 직업과 연관된 전문대학을 지원하도록 지향하는 편이었다. 이들에게 우선시 되는 것은 바로 생계와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이런 가운데 학생들에게 문학교실은 활력이 되고 있는 듯했다. 잘된 글쓰기가 아닌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작업이 선행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14일 이들을 위한 아주 특별한 자리가 있었다. 안성문예회관에서 마련된 한겨레중고교 ‘작은 문학의 밤’이 그것이다.

이날 자리에선 여러 시인들과 한겨레학교 문학교실 학생들이 시를 통해 내면의 교류를 가질 수 있었다.

지난해 문학교실에 참여한 박설희 시인은 시낭송회 자리에서 “강의를 처음 시작하면서 보았던 아이들의 모습과 달라진 모습을 보면서 내가 가진 것을 아이들과 더 나누지 못했던 점이 아쉽다”며 “이 작은 행사가 아이들에게 소중한 추억이 되었으면 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에는 박 시인의 말처럼 이런 아쉬움이 결실로 모아질 듯하다. 바로 문학교실에 참여한 학생들의 글을 모아 전문 문학출판사에서 책으로 묶어낼 예정이다.

[Life in 경기] 우리에게 '출신의 벽'은 없다
새터민 청소년과 '평생 친구' 맺기
 

안성 한겨레중·고서 '어울림 축제' 열려
첫 눈에 느낌 통해 영원한 우정 약속도
박수찬 기자 sooch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우린 7시40분까지 학교 가. 너는?"

"우리는 8시10분에 조회하고 9시 50분부터 수업."

이유진(가명·17·한겨레고 1년)양과 장유희(17·안성여고 1년)양은 둘 다 경기도 안성에 있는 학교를 다니고, 인기가수와 등교시간에 민감한 고1 여학생이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유희는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고 유진이는 함경북도 청진이 고향이다. 북한을 탈출한 유진이는 올 3월 한국에 들어왔다. 그런 두 사람이 평생 친구가 되기로 약속했다.

10일 오후 경기도 안성 한겨레중·고등학교에서는 85쌍의 '평생 친구'가 탄생했다. 한겨레중·고등학교와 안성 삼죽초등학교에 다니는 탈북 청소년 85명과 안성 지역 청소년 85명이 평생 친구가 되기로 서약한 것. 이날 처음 만났지만 청소년들은 '이제 우리 함께 해요'라고 쓰인 하늘색 티셔츠까지 맞춰 입었다.

 

 

▲ 10일 경기도 안성시 한겨레중고등학교 체육관에서 열린‘2008 남북 어울림 통일축 제’행사에서 안성여고 1학년 장유희(오른쪽)양이 평생 친구가 된 한겨레고 1학년 이유진(가명)양과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유진양은 북한을 탈출해 올해 3월 한 국에 입국했다. 박수찬 기자

"우리는 평생 친구가 되어 일생을 살아가면서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 우정을 나누고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항상 아끼고 사랑하며 도와줄 것을 진심으로 서약합니다."

학생 대표가 서약서를 읽을 때 동갑내기 유진이와 유희는 이미 친구가 돼 있었다. "필(feel)이 통했어요." 단체장 인사말과 축사가 길게 이어지자 둘은 "진짜 오래 말씀 하시는 것 같다"며 키득거렸다.

이날 안성교육청 주최로 열린 '남북어울림 통일축제'에는 학생, 교사, 학부모 등 1000여 명이 참가했다. 행사가 열린 한겨레중학교와 고등학교는 2006년 개교한 탈북 청소년 학교다. 한겨레중·고등학교 윤도화 교감은 "일반 교육, 직업 교육과 함께 한국 적응교육을 실시하고 있다"며 "학생들은 한겨레학교를 다니다가 일반 학교로 전학가기도 하고 여기서 졸업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현재 중학교에 87명, 고등학교에 100명이 재학 중이다. 어린 탈북 청소년들은 안성 삼죽초등학교에서 한국 학생들과 함께 공부한다. 경기도교육청은 탈북자 교육기관인 '하나원'이 있는 안성을 '통일교육 지역'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손을 잡고 다니는 여학생들과 달리 얼굴에 여드름이 난 남학생들의 분위기는 처음엔 서먹했다. 앉아 있기가 어색했던지 올해 초 한국에 온 손태훈(가명·18·한겨레고 1년)군이 홍현기(18·안성고 2년)군을 데리고 북한 교과서와 우표가 전시된 전시장을 찾았다. 현기가 "북한돈 50원이면 뭘 살 수 있냐"고 묻자 태훈이는 "요즘은 사탕 같은 간식거리밖에 못 사먹는다"고 설명했다. 학생들은 함께 비보이 공연, 악기 연주를 보고 밥도 같이 먹었다. 한겨레고등학교 학생들은 북한 민요와 검도 시범을 선보이기도 했다.

남과 북이라는 특수 상황이 낳은 제한도 엿보였다. 교육청과 학교측은 "북한에 가족이 남아 있는 탈북 학생들은 인터뷰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고 사진기자들에게는 탈북 학생들의 얼굴 사진도 비공개를 요청했다. 최근 위장 탈북 간첩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꺼렸다. 행사가 치러진 체육관 단상 위에는 중국 주재 외국 대사관의 담을 넘는 탈북자들의 사진이 슬라이드로 지나갔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그런 긴장감은 찾을 수 없었다. "꺄악!" 젊은 남성 연주자들로 이뤄진 브라스 밴드 공연이 시작되자 유진이와 유희는 거의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에게 "어떻게 평생 친구로 지낼 거냐"고 묻자, 유희는 "유진이한테 자주 문자도 보낼 거예요"라고 했고, 유진이는 "유희가 학교 축제에 초대했는데 가서 함께 놀고 싶다"고 말했다.

안성교육청 김선일 교육장은 "청소년 시기 큰 어려움을 극복한 새터민(탈북자) 학생들은 잠재력이 많다"며 "한국 학생들과 함께 어울리고 다같이 통일을 염원하도록 하자는 뜻에서 이번 행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

북한인권시민연합은 1990년대 중반부터 중국, 버마, 라오스, 태국 등 제3국에 은신중인 재외탈북자를 대상으로 수시로 실시하는 현지조사와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들을 통해 피해사례와 목격내용 등 증언이나 수기를 받아 기록하고 이를 공개해오고 있습니다. 공개원칙 증언자가 아직 해외에 안전하지 않은 상태로 은신중인 경우, 본인의 증언으로 인해 체포 및 강제송환 등의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한국 등 제3국에 재정착하거나 안전이 확보된 이후에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본 자료실에는 본인의 허락을 얻어 실명으로 공개한 증언자료와 함께 북한내 가족의 피해나 신변위험 등의 우려로 가명으로 채록한 자료도 최대한 공개하고 있으며, 아직 영문으로 번역되지 않은 자료도 일부 있습니다. 자료이용 자료를 활용하여 도서를 출간하시거나 인용 또는 배포하고자 하실 경우 반드시 본 사이트의 주소를 밝혀 주시고, 자료가 수정 또는 왜곡 없이 사용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도서 또는 연구결과물 사본을 사무국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료이용문의 : 조사연구팀 이영환 팀장 / 02)723-1672 / friends@nkhumanrights.or.kr

'† NORTH KOREA > 탈북동포 소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체험한 북한정치범수용소의 현실 - 김용 (2007-11-24)
 
김 용
93 ~ 98년 정치범수용소 체험자


나는 1998년 9월 25일 정치범 관리소를 탈출하여 중국과 몽골을 거쳐 1999년 10월 22일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
나는 1993년 8월부터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운영하는 제14호 정 치범관리소에서 인간이하의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서 말 못하는 짐승과도 같은 끔찍한 일들을 체험했다. 내게 주어진 죄명은 얼굴도 모르는 부친의 경력 때문이었다.

나는 1993년 5월에 처음 체포되었다. 당시 나는 국가안전보위부 무역국 에서 일본 서해 아사히 주식 무역회사 대리인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내가 체포된 이유는 이력을 기만하고 국가안전보위부에 침투하였다는 것이었다. 체포직후 나는 평양시 룡성구역 마람에 있는 특수아지트에 끌려가 심문을 당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심문 내용은 "특수기관인 국가 안전보위부에 무슨 목적으로 침투했는가" "어떤 목적에서 간첩의 자식이 애국자의 탈을 썼는가" 하는 것이었다.

보위부 심문관들의 고문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직사각형(5㎝×5㎝) 각목을 무릎 안쪽으로 끼워 넣고 꿇어앉힌 뒤, 위에서 구둣발로 무지하게 밟아대고 손에 족쇄(수갑)를 채워 발끝만 겨우 땅에 닿을 정도로 매달아 놓고 밤이면 독감방에 배꼽까지 물을 채워놓고 한 순간의 쪽잠도 잘 수 없게 감시했다. 반복되는 고문으로 온몸이 물에 퉁퉁 부어 올라 몸을 가 누지 못해 쓰러지면 구둣 발로 차서 일으켜 세우고 다시 고문을 계속하곤 했다. 나는 고문을 받는 도중 평양시 대동강구역에 위치하고 있는 문수 특수아지트에도 가서 고문을 당하였다. 그렇게 3개월간을 죽음의 생지옥 을 오가고 있었다. 그러는 과정에 나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고문에 못 이 겨 그들의 요구에 실토를 하자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아는 것이 없었다. 나는 4살 때부터 부모의 슬하에서 재롱을 부릴 나이에 애육원(고아원)에 가서 초등학원을 다녔다. 때문에 어려서부터 내 부모들보다 김일성과 북한 당국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다. 그렇기에 나는 성장해서도 당과 수령 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양심껏 일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은 나에게 어머니의 진술서와 황해북도 서흥군 안전부 주민등록 지도 원 김철만(대위, 가명)의 진술서를 꺼내놓고 나와 공모한 사실을 고백하라고 위협했다. 나는 이런 과정을 3달간 갖은 악형을 다 받은 끝에 1993년 8월 다른 곳으로 이송했다. 죄인들을 호송하는 지프차에 실려 평양에서 5시간 가량 달려 어딘지 모를 곳으로 갔고 5개나 되는 감시 초소를 통 과하여 차가 멎자, 호송원이 나를 내리게 했다. 차에서 내린 내가 어리둥절하여 사방을 둘러보자 "야, 이 새끼야 꿇어앉아, 대가리 박아."하며 나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잠시후 서로 서류를 넘겨 주면서 몇 마디를 나누더니 외부차는 더 이상 통과할 수 없는 곳이라 나를 호송해온 차는 나를 인계해주고 곧장 돌아가 버렸다.

"야, 이 새끼야 타라."하는 소리에 마중 나온 지프차에 올라탔다. "야, 이 새끼. 개 대가리 같은 거자꾸 들갔어." 그들은 내 머리를 구둣발로 밟아 차 바닥에 닿게 짓눌렀다.
그 순간 나는 이젠 죽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억울한 마음으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이 '영치품 창고'라고 쓴 건물 앞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나에게 "야, 이 새끼야, 팬티까지 다 벗으라"면 서 나에게 고포(넝마)짝같은 옷을 던져 주었다. 나는 팬티도 없이 주는 옷을 입고 멍하니 서있는데 옆에서 갑자기 "야, 이 새끼 아직 속이 살았구나. 꿇어앉아."하며 나를 강제로 꿇어앉히고 머리를 땅에 닿게 하였다. 후일 안 일이지만 제14호 관리소의 규정에는 선생님들이(간수, 계호원) 있거나 지나갈 때에는 손을 뒤로 얹고 돌아서서 이마가 땅에 닿게 꿇어 앉아 있다가 선생님들이 다 지나간 다음 지나간 쪽을 보지 말고 반대쪽을 보고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잠시후 2명이 나를 지프차에 태우고 산굽이를 돌아 산중턱에 있는 '무진 2갱'이라는 현장에 끌고 올라왔다. 알고 보 니 나를 인계받아온 보위원이 나의 담당 선생님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14호 정치범 관리소' '무진 2갱'에서 악몽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나는 국가안전보위부에서 근무했었기 때문에 일단 관리소에 들어오면 다 시는 바깥 세상구경을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원래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운영하는 정치범 관리소는 1972년 전 국가정치 보위부장 김병하의 발기로 김일성의 교시를 받아 설립되었다. 그 전에는 1968년 김일성의 계급로선에 의해 황해남·북도의 개성, 금천, 룡연, 장연, 안악, 은률, 취야, 장풍, 개풍, 판문 등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월남자 가족과 6·25 전쟁당시 치안대 가담자, 지 주, 일제 친일파들의 살아남은 본인 및 가족들을 북쪽의 주민들과 교방(교환)한다는 구실로 기차의 화물차량에 실어 12개의 지역에 특수구역을 선정해 놓고 그 속에서 외부와의 접촉 및 서신거래 등 모든 것을 차단하 여 사회안전성 안전과(果)에서 관리하였다. 또한 이렇게 격리된 본인에 한하여 죄가 엄중하다고 판단된 자들은 개천 교화소와 청진에 있는 수성 교화소를 정치범 교화소로 만들고 별도로 정치범들을 수용시켰다. 이처럼 만들어진 북한의 정치범 관리소는 현재 전국에 10여 개가 운영되고 있으며 내가 수용된 14호 관리소 수용자 중 노력자만 15,000명에 달하며, 어린이들과 6·25당시 함남도 장진호반에서 포로가 된 영국인들과 미국인들의 일부가 수용되어 있다. 이들은 발전하는 북한의 현실을 똑똑히 보게 해주라는 김일성의 교시에 의하여 관리소에 갖은 악형을 다 받으며 수용되었다.

북한은 세계의 여론과 저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대는 바뀌어도 혁명의 과녁은 변하지 않았다는 조선로동당 제6차 당대회 노선을 관철한다는 신념에 기초하여 현재까지도 장본인도 아닌 2대, 3대까지도 고통을 당하고 있다. 내가 수용되어 있던 14호 관리소는 반동의 씨족이 퍼지면 안된다고 하면서 관리소에 입소되면 남, 여를 따로 갈라 수용시키고 있으며 가족들이 들어오는 경우에는 12살 미만의 어린이들이 있는 세대는 남자는 따로 갈라놓고 어린이는 인민반 4학년까지만 어머니가 데리고 있을 수 있다. 어린이들은 12살이 되면 남, 여를 서로 분산시켜 수용하게 되어 있다. 1990년 14호 관리소에서는 수용자들의 폭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관련자 1,500명을 사살하여 폐갱에 처넣고 매장시켰다. 그 후로는 살아 남은 수용자들의 수용시설의 출입문을 철문으로 교체하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들어가면 철문을 굳게 잠그고 아침에 열어 주곤 하였다.

내가 입소한 첫해인 1993년 10월경 강제노역을 하게된 곳은 밤나무골이 기 때문에 가을이면 산골짝에 밤알들이 수북히 쌓이곤 했다. 그러나 산에는 경비가 삼엄하고 안전원들의 눈을 피해 산에 한발자국이라도 올라갔다가 들키면 도주분자로 인정하고 즉석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어 수용자들은 눈앞에 놓인 밤알을 감히 주어먹지 못하였다. 하루는 석탄을 실어 나르는 전차(광차의 견인차) 운전공 김광수(53세, 가명)가 광차길에 밤알 몇 알이 굴러 내려와 있는 것을 보고 광차를 세우고 그 밤알을 주우려고 했다. 그런데 어디서 보았는지 "야, 이 새끼야" 하고 김광수를 불러 세웠습니다. 갱안에 동발목을 나르고 있었던 나는 고함소리에 그 쪽을 바라보았다. 당시 우리를 감독하는 선생은 너무도 악착같은 자여서 '오빠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김광수는 밤알에만 정신을 빼앗겨 선생이 다가가는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밤알을 줍고 있었다. 선생은 그의 허리를 발로 차 쓰러뜨리고 사정없이 때리더니 그것도 성에 차지 않는지 허리에서 권총 을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김광수의 머리를 구두발로 내려 밟은 채로 그의 이마에다 권총을 대고 서슴없이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총을 맞은 김광수의 입과 머리에서는 피가 솟구쳐 나왔다. 그러나 선생은 "이런 해독분자는 죽어야 한다"면서 감독에게 이 새끼를 끌고 가라고 명령하였다. 감독이 달려가 쓰러진 그를 안았다. "야, 이 새끼야 동정하는가. 끌고 가." 선생은 감독에게 소리를 질렀다. 할 수 없이 감독은 쓰러진 김광수의 다리를 잡고 질질 끌다시피 철로를 따라 내려갔다. 철로의 광차 침목에 털석거리며 끌려가는 김광수의 시체는 마치 산짐승을 잡아끌고 오는 모습을 방불케 했다. 그렇게 숨진 김광수의 손에는 밤색의 반짝이는 두 알의 밤이 으스러지게 잡혀있었다. 이 광경을 본 수감자들은 공포와 함께 분노에 휩싸였다. 이것이 바로 관리소의 현실이다.

내가 '지하 6편도'에서 굴진공으로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1편도는 지하 120m에 달하며 6편도는 720m의 땅속 깊이에 있다. 그날도 나는 돌을 광차에 실어 권양기장이 있는 200여m 되는 곳까지 끌어내야 하는데 처음 해보는 일이어서 힘에 겨웠다. 하루는 돌이 많아서 광차가 밀리게 되어 정신없이 돌을 광차에 싣고 있었다. 갑자기 "어느 새끼들이야" 하는 소리에 나는 관리소의 죄수가 행하게 되어 있는 규정대로 굴 벽쪽으로 꿇어앉아 손을 뒤에 얹고 머리를 이마가 땅에 닿게 하고 선생이 지나갈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딱'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정신을 잃고 진흙창같은 갱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한참 후에 정신을 차리니 나의 머리에는 구멍이 나고 목을 타고 피가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그 야수 같은 선생놈이 나의 머리를 권총 손잡이로 까서 쓰러뜨리고 일을 못하는 놈들은 죽어도 좋다고 떠벌리는 것이었다. 그때의 상처로 나의 머리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은 원한의 상처가 남아있다. 그때 나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든지 기어이 살아서 복수를 하리라는 분노가 치솟았다.

나와 함께 일하던 사람은 북한의 체육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농구선수였다. 그는 57세로서 아버지가 지주라는 신분 때문에 관리소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가 하루는 '오빠시'라는(산 속에 살고 있는 야생벌로서 맹독성의 침을 갖고 있으며 독종이라는 뜻의 표현) 선생이 가지고 다니는 소꼬리 채찍을 주웠는데 너무 배가 고파 물에 불려서 먹어버렸다. 다음날 소꼬리 채찍을 잃어버린 오빠시 는 그를 찾아내어 수용자들 앞에 세워놓고 사정없이 매질을 해댔다. 그리고는 감독을 시켜 변소칸에서 회충(蛔蟲)을 건져오게 했습니다. 오빠시는 "야, 이 새끼야, 이것도 고기니 처먹으라."며 나무꼬챙이에다 끼워 쓰러진 그의 입에 쑤셔 넣는 것이었다. 그는 그날 저녁 너무 매를 맞아서 고열이 나고 온 몸이 퉁퉁 부어 올랐다. 내가 간호를 하느라고 그의 머리를 내 무릎에 얹어 놓고 위로를 해주었다. 그는 내 무릎에 누워 "야, 내가 아버지의 재산을 넘겨받은 것이 무슨 죄가 되어 이렇게 고역을 치러야만 하는가"며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을 했다. 그리고 그는 후유증으로 인해 3일만에 처절한 운명을 맞고 말았다.

관리소에서 여성들은 한낮 파리 목숨과도 같은 운명에 처해 있다. 14호 관리소에서는 간부 초대소라는 것이 있는데 이곳은 평양에서 부부장(고위간부) 급이 내려오면 숙식하는 특각이다. 관리소에서는 평양에서 간부들이 내려오면 여성 수용자들 속에서 예쁘고 잘 생긴 21∼25살 사이의 처녀들을 선발하여 목욕을 시켜서 간부들에게 바치게 되고, 간부들은 이런 여성들을 온갖 노리개로 유린하고는 비밀이 새어나가는 것이 두려워 '도주분자'라는 역적의 딱지를 붙여 서류를 꾸며놓고는 비밀리에 죽여버린다. 그리고 상급에서 또 다른 자들이 내려오면 같은 방법으로 수많은 처녀들을 성노리개로 유린하여 가차없이 죽여버린다. 이것이 바로 북한의 '14호 관리소'에서 일어나고 있는 만행들이다. 여기서 더 중요한 사실은 정치범 관리소가 현재 화학무기의 실험대상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죽음의 순간순간을 위험하고 저주스러운 14호관리소에서 1995년 10월 나는 대동강을 경계로 한 18호 적대범 관리소로 이송되게 되었다. 나는 18호 관리소로 이송 되어 오면서 14호 관리소에서 보고들은 일체의 말을 한마디라도 발설하는 경우에는 개처럼 끌어다가 처형한다는 위협을 당하며 서약서를 썼다. 손도장을 찍은 나에게 14호 선생들은 "김정일 동지의 광폭정책에 의해 경한 18호 관리소에 이관한다"면서 "18호 관리소에서 가게 되면 생활을 잘하라"고 당부했다. 18호 관리소는 14호에 비하면천국과도 같았다. 우선 방송과 신문을 볼 수 있었다. 14호 때에는 일체의 방송 및 출판물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어 있으며 어쩌다 일을 잘하였다고 평가를 받으면 구내 방송차가 와서 '모란봉', '능수버들'과 같은 조선민요를 한 곡 불러주고 가면 그것의 최대의 배려였기 때문이다. 이것만해도 18호 수용소로 온 것이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김정일의 '광폭정치'의 은혜를 입은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는 18호 관리소에 와서 '영등갱'에서 굴진공으로 일하게 되었다. 나는 18호 관리소에 와서야 비로소 나의 어머니가 18호 관리소에서 수용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태어나서 40년만에 처음으로 한 집안에서 어머니와 생활하게 되었다(18호 관리소에서는 가정생활도 함께 할 수 있으며 한 달에 30원의 노임도 주고 위수구역 안에서는 산에도 올라가 산나물도 뜯어먹을 수 있었다). 나는 18호 관리소에 온지 15일만에 관리소 보위부에서 찾는다고 하여 가보니 평양에서국가보위부 X국 국장인 이장철(가명)이 내려와 있었다. 이장철 국장은 나에게 14호에서 18호 관리소로 이관하게 된 것은 국가보위부 XXX 부부장이 많이 힘썼다고 하며 일을 잘하라고 하였다. 그는 18호 보위부장에게 내가 국가보위부에서 근무하던 사람이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보위부 정문을 나서며 XXX 부부장이 고마운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XXX는 나의 직속상관으로 나의 사업총화를 그의 사무실에 가서 개별총화를 하였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친 혈육과 같이 지내던 사람인데 내가 체포당시 김정일의 방침으로 체포되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나서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후 나는 일도 경한 일인 광차수리를 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18호 관리소체계와 구성은 다음과 같다. 원래 사회안전부에서 운영하던 관리소들 중 적대법 대상으로 추려서 14호 관리소 지역을 대동강을 중심으로 절반 갈라 한쪽은 김정일의 방침에 의해 18호 관리소가 차지하고 있으며 구성 인원 중에 1대(8·15 세대)는 죽고 2대, 3대가 수용되어 있으며 수용자수는 3만명이 노력자이고어린이와 늙은이를 포함하여 2만명으로 총 5만 명이 수용되어 있다. 그리고 관리소 한쪽을 봉쇄하고 북한에서 고위급 간부들이 과오로 들어와 일하는 혁명 화 작업반이 있는데 이곳에는 30명 정도 수용되고 있으며 그들이 수용자 들과 말을 하게되면 반동의 물을 먹는다며 그들과의 접촉은 일체 차단되어 있다. 관리소 경비는 무장인원 2개 대대가 산 정점에 3미터 높이의 고압 철조망을 늘리고 그 밑에는 삼각형으로 깊이 3미터, 너비 1.5미터의 함정들을 파놓고 함정 속에는 60밀리 철근을 박아 떨어지면 찔리게끔 설치해 놓았다. 그리고 그 안쪽으로는 200미터 간격으로 높이 5미터의 경비 초소(망루)를 설치하고 중화기인 경기관총을 걸어 놓고 2시간 교대로 근무를 서며 그 밑으로는 일정한 간격으로 잠복 초소 가 있어 잠복근무로 감시를 하게 되어 있다. 항상 위병대가 순찰하면서 봉쇄하고 있어삼엄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

14호 관리소에 비하여 18호는 천국이라고 생각하던 나의 생각은 3개월도 못되어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관리소에서 작업을 하기 위해 갱에 들어가기 전에 아침마다 모여 대열점검 및 몸수색을 하게 되어 있다. 하루는 수색을 끝내고 현장인 갱속에 들어가기 위해 대기를 하고 있는데 굴진공인 허철호(45세)의 몸에서 담배종이가 나왔다. 관리소에서 수용자들이 사용하는 담배종이는 보통 신문지로 하게 되는데 허철호가 가진 종이에는 김일성의 이름이 크게 씌여져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발견한 갱장이란 놈은 큰 것이나 잡은 것처럼 그를 수감자들 앞에 내세워 놓고 자기 애비의 영향이 아직 남아있는 반동놈의 새끼라면서 그를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 다. 그리고 그를 수감자들이 많이 다니는 길옆에 있는 나무에 꽁꽁 묶어놓고 교대로 지키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1월달이었는데 산골짜기의 기온은 영하 15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날이어서 홑옷을 걸친 허철호는 삽시간에 몸이 얼어붙었다. 갱장은 이런 자는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하면서 다음날 아침까지 24시간을 꼬박 그곳에 묶어 놓았다. 그는 결국 손과 발에 동상을 입어 진물이 나오고 온몸이 퉁퉁 부어 쓰러지고 말았다. 이런 광경을 목격하며 지나치는 수용자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진저리를 쳤다. 그렇다고 그를 동정하면 공범자로 같이 취급을 받기 때문에 어쩌지도 못하고 거저 속으로 불쌍히 생각할 뿐이었다.

1996년 5월경의 일이다. 어머니는 먹을 것이 없어 날마다 야산에 올라가 산나물과 칡뿌리를 파다 나에게 풀죽이나마 한 공기씩 해주곤 하였다. 사회에도 식량이 부족한데 18호 관리소는 10일분 식량을 공급하면 그것으로 30일을 채워야 하기 때문에 식량은 턱없이 모자랐다. 풀죽에다 통강냉 이 한두 알을 넣어 먹는 사람들이 기운이 얼마나 있겠는가. 허기진 어머 니는 나물을 뜯으러 산에 올라갔다가 그 자리에 쓰러져 날이 어두울 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나는 아침 6시에 출근하면 밤 11시나 12시경에 집에 들어오기 때문에 어머니가 쓰러진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저녁에 산을 순찰하던 경비원에게 어머니가 발견되었다. 경비원은 어머니에게 " 밤에 왜 산에 있는가?" 고 다그치면서 어머니를 도주자라고 손에 족쇄를 채워가지고 질질 끌고 보안 소에 가두어 벼렸던 것이다. 나는 그 소식을 듣자 정신없이 담당 선생에게 달려가 보니 어머니의 뼈만 남은 손에 족쇄를 채우고 얼굴은 얼마나 맞았는지 온통 터지고 멍이 들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내가 보위원에게 늙은이가 몰라서그러니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사정을 하자 그 보위원은 "야, 이 새끼야 저녁 5시면 산에 올라가지 못하는 것을 모르는가?" 하며 구둣발로 사정없이 걷어찼다. 그날부터 어머니는 관리소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관리소에 특별히 규정을 위반하거나 사형수를 취급하는 특별 아지트에 갇히게 되었다. 70고령이 넘은 늙은 어머니는 대동강반에서 돌 쌓기하는 일을 강요당하며 잘 걷지 못하자 어머니의 다리 사타구니에몽둥이를 끼우고 젊은 놈 둘이서 메고 가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다리 사이에 몽둥이를 끼운 채 매달려가며 넘어가지 않으려고 나무를 꼭 쥐고 오들오들 떨며 끌려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아들인 나의 가슴은 어떠했겠는가. 이것이 바로 광폭정치, 은덕정치를 한다며 사람의 인권을 가장 귀중히 여긴다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들이 떠벌리는 북한의 현실이었다.

그 후 나의 어머니는 대소변도 가늠하지 못하는 폐인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러한 어머니를 볼 때마다 나를 낳아 책임지지 못한 부친에 대한 원망도 해보고 저주도 해보 았으나 나오는 것은 한숨과 절망뿐이었다. 그러는 나의 손을 꼭 잡으시고 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얘야, 나는 더 살 것 같지 않으니 너 하나라도 나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이렇게 말씀하시며 나를 빤히 쳐다보시는 어머니는 말씀을 잇지 못하셨다. 어머니의 눈길에서 나는 그 분이 바라시는 바를 읽을 수 있었다. 병들고 늙은 어머니를 이 사지판에 혼자 남겨두고 떠난다는 결심을 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고민 끝에 나는 며칠후 어머니에게 " 어머니 만약 내가 없으면 어머니 혼자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라고 묻자 어머니는 아들의 결심을 알아차린 듯 손을 꼭 잡아 주셨다. "사내가 사소한 일에 사로잡히면 큰 일을 못한다. 남쪽에 갈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니. 거기에는 6·25때 월남한 너의 외삼촌도 있고 너의 아버지 친지분들도 있을텐데……." 어머니는 긴 한숨을 내쉬며 도리어 저에게 힘을 주시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말씀을 들은 나는 굳게 결심을 했다. "언젠가는 떠나리라…."

그후 나는 사령부 침해 사건의 연루자로 18호 관리소 특수 아지트에서 또 한차례의 시련을 겪고 난 뒤 몸은 극도로 허약해졌다. 나의 몸은 '허약 3도'였다. '허약 3도'란 관리소에 쓰는 영양실조의 상태를 표현하는 말인데 인체가 극도로 허약해지면 엉덩이 골반뼈만 남아 두 주먹으로 항문의 골반뼈에 집어넣어도 들어갈 정도로서 뼈만 남은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각오를 하고 내가 없어지면 어머님이 받을 피해를 생각하여 나는 결백하다는 유서를 써서 내가 집에 못 들어오면 (관리소)담당 선생님에게 찾아가 주라고 어머니에게 전해주었다. 아들이 어머니의 손에 전해준 것은 '유서'였다. 나는 1998년 9월 18호 관리소를 탈출하는데 성공해 같은 해 겨울 두만강을 건넜다.
http://kor.nkhumanrights.or.kr/bbs/bbs/board.php?bo_table=evidence&wr_id=33&page=11

탈북청소년, 그리움을 글로 쓰다  (0) 2008.11.22
[Life in 경기] 우리에게 '출신의 벽'은 없다   (0) 2008.11.22
나의 북한 생활/임홍근 증언(북한탈북동포)  (0) 2008.11.22
옥중서신/탈북자유동포  (0) 2008.10.26
북남 북녀의 서울 이야기  (0) 2008.10.08

[탈북자 증언]

나의 북한 생활



 

다음 글은 서울 통일교육원에서 열린 본회 주최 제4회 탈북동포돕기
대학(원)생 자원봉사자 수련회에서 행한 강의 녹취록이다.



 

임 홍 근 (북한이탈주민)


제 나이는 마흔세살 1960년 생입니다. 제가 북한을 탈북한 때는 97년도 5월이고 한국에 귀순한 날짜는 2000년 1월 27일입니다. 제가 탈북한 동기는 먹거리를 찾아서 넘어오다보니까 중국으로 왔고 중국으로 와서는 다시 한국을 바라보게 되는게 일반적으로 우리의 심리입니다. 거기에 더불어서 나도 무조건 한국에 가야된다, 내가 중국땅에서 견디어 내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결국 한국땅까지 오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정치적 운동이나 목적 이런 것은 크게 안중에도 없고 하도 살아가기가 힘들어 오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습니다. 물론 오기까지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우선 북한을 탈북하게 된 배경과 저의 경력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1960년에 태어나 76년도에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17살에 군복무를 시작했습니다. 86년도까지 10년 동안 군복무를 하고 86년부터 87년도까지 평양영화연극대학 창작과를 1년 동안 수료하고 87년도 9월부터 함경도에 있는 은덕석탄대학이라는 곳에 다니고 거기서 5년 후에 졸업을 했습니다. 북한의 주원료는 현재까지 석탄입니다. 한국 쪽을 보면 원유나 에너지를 다른데서 많이 얻지만 북한은 화력발전소를 돌려서 전기를 생산한다고 봐야합니다. 수력발전이란 것은 하늘의 탓으로 믿기 때문에 크게 전기를 얻어낼 가망이 없는 것이라 생각해 북한에는 화력발전소가 상당히 많습니다. 큰 것만 해도 다섯 개정도 됩니다. 북한에는 탄광들이 각 곳에 널려 있는데 기본 탄광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은 함경도지역, 양강도, 자강도지역 이쪽에 탄광들이 많이 널려 있습니다. 그리고 평안도 지역하고. 여기에서 얻어낸 석탄으로 화력발전소들이 석탄을 대다 보니까 북한은 석탄대학교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여기서는 들어볼 수 없는 말인데 거기서 석탄대학교를 나왔다는 것은 일할 때는 월급도 많고 전망도 좋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석탄대학을 5년 동안 다니고 그 다음에는 3대혁명소조를 91년부터 시작해서 94년도까지 3년 동안 나갔습니다. 소조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여기서 말하면 특별검사제 도입이라고 할까 북한에서는 공식적으로 김정일이 암행어사라 하면서 군복무를 10년하고 제대된 대학생으로 3대혁명소조라는 것을 조직해서 각 큰 회사들이나 시군구청들에 내려보냅니다. 북한의 제일 윗기관이 노동당이라는 당기관인 것만큼 이것을 감시하고 비리 같은 것을 통보받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목적은 지역주의, 지방주의 같은 것을 막자는 목적으로 3대혁명소조를 도입했습니다. 3년 동안 동원됐는데 제가 맡은 곳은 안주탄광연합입니다. 북한에서 안주탄광연합이라고 하면 한국쪽으로 말하면 삼성이나 엘지 같은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큰 회사입니다.

북한의 정치라는 것은 감시를 하고 서로 자기네끼리 물고 뜯기를 하는 것인데 말하자면 형식적으로는 좋습니다. 생활총화요, 분기당생활총화요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많이 통제를 하지만, 소조라는 것을 통해서 밑의 부정비리를 들춰내서 자료를 잡습니다. 비리를 들춰낸다하면 북한체제에 맞게 우선 발언이나, 충성심이나, 김일성 동상을 정성으로 청소하는가, 여기의 교회만큼 상당히 많은 사상연구실을 잘 관리하느냐를 중점적으로 놓고 그 뒤에 물자취급이라던지 남녀관계라던지 사회적으로 해가 된다는 것을 들춰내서 위에 보고하면 위에서 때리는 형식으로 운영되는 것이 소조입니다. 소조를 제가 3년 동안 나갔다가 정식으로 일자리를 배치받은 것이 함경남도 금여군에 있는 금여탄광입니다. 제가 이 건설직장 부직장장으로 배치받았습니다. 제가 그 곳에 배치받아서 탈북하기 2년 전까지 부직장장으로 생활했는데 종업원이 한 500명 정도 됩니다. 그 사람들을 다 버리고 결국은 혼자 도망쳤습니다.

94년부터 식량난이 시작되어 95년도부터 물건을 팔아먹기 시작하고 집안에 제가 소조를 다녀오면서, 북한에서 양복이라고 생각하면 상당히 좋은 물건으로 생각합니다. 여기 TV라던가 이런 정도로 생각하는데 그거 7벌 정도 있었던 것, 받아온 것을 다 바꾸어 먹었습니다.

북한에 식량난이 들어서 횡재한 놈들이 누구냐 하면 기본군부대의 가족들과 권력층입니다. 국가정보원이라던가 경찰가족들이나 권력층 가족들이 이 통을 통해서 북한돈을 많이 거머쥐고 집을 큰 것을 차지하고 옛날 골동품, 유물 등을 많이 장식하고 북한의 일상 생활에서 좋다고 하는 것을 식량으로 휘둘렀습니다. TV 한대는 북한에서 금값입니다. 노동자가 4~5년 동안 월급을 쓰지 않고 모아야 TV를 한대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불과 강냉이 열사발 정도에 바꾸고 재봉기도 강냉이 세자루 정도에 바꾸고 첫날 이불 같은 것도 나중에 다 바꾸어 먹었습니다. 우리가 여섯 대식구인데 이것을 벌어 먹이는데 헐하지 않았습니다. 95년도부터 배급소에 배급준다는 것이 3개월에 한번씩이었습니다. 하루에 강냉이 가루 3킬로 정도를 배급소에서 나누어줬는데 그것을 가지고는 어림도 없으니 집안에 있는 모든 것을 팔아먹고, 바꾸어 먹고 나니 더이상 바꾸어 먹을 것도 없고 96년도 6월부터 정말 힘들었습니다.

97년도 1월달에 우리 장인이 사망하시고 3월달에 장모님이 사망하셨습니다. 상가를 치르고 나니 견딜힘이 없어 아내보고 이대로 우리가 살 수 없다 뛰어야겠다 하고 거듭 토로를 했습니다. 토로를 했지만 아내는 승인을 안하고 어떻게 중국땅으로 뛰려고 하느냐고 했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함경도 은덕군에 계시기 때문에 중국땅이란 곳은 그렇게 먼 곳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가족 내력을 보면 북한에서 보면 종파가족입니다. 우리 아버님이 평양시 평촌부 안전부장을 몇년 하셨습니다. 북한사회안전부 군관학교 1기 졸업생들이 그때 당시 사회안전부 부장이요, 부부장을 다 차지하고 있었는데, 김일성 비위에 거슬리는 그룹을 형성해서 가담했다는 이유로 함경도 은덕군으로 쫓겨가서 거기서 살았습니다. 중학교 시절을 거기에서 보냈고 또 대학기간이나 소조기간을 계속 집에서 왔다갔다했기 때문에 중국 정치가 어떤지 알게 되었고, 중국으로 가면 먹거리가 많다고 해서 미련을 많이 품었습니다.

북한사람들의 일반인식에서 중국에 대한 인식이 90%라면 한국에 대한 인식은 10%정도 됩니다. 왜냐하면 한국이란 곳은 군사분계선으로 가로막혀 있는 갈 수 없는 곳이고, 적대시하는국가여서 한국에 대한 미련은 별로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미련은 상당히 많습니다. 중국이라는 곳은 옆에 있는 나라고 중국주민들이 북한에 장사하러 많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북한주민들이 중국에 대해서 상당히 기대감을 많이 품고 있고 상당히 우상화하고 일반이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한국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습니다. 논의하는 것 자체가 여기 말로 국가보안법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97년 5월 5일 밤 12시에 내가 중국땅에 가서 먼저 자리를 잡을테니 기다려달라, 기다리면 내가 데리려오겠다는 편지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한 석달이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떠났습니다. 어찌나 먹거리가 없던지, 집에서 먹거리를 가지고 떠난다는 것은 생각해 볼 수도 없었습니다. 제가 처음 목표를 잡고 떠난 것이 양강도 혜산쪽입니다. 함경남도 금령군에서 양강도쪽으로 가자면 육로로 가야합니다. 북한에서 기차표는 아예 믿을 것이 못됩니다. 기차는 이삼일씩 멈춰섰다가 다시 가고 하니까요. 왜냐하면 북한의 전력은 화력발전인데 이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군수공장에 제일 먼저 대줘야하고 나머지는 평양쪽에 대야합니다. 일반 열차까지 전기를 대줄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육로를 선택하게 됐는데 처음에 집을 떠날 때 먹거리를 해결하면서 가야하기 때문에 입던 내의 몇 조각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고원, 함흥을 들러 내의를 가지고 두부 한모 바꿔먹고 북한에서 꼬장떡이라는 강냉이떡으로 바꿔 먹고 자동차를 갈아타면서 몰래 도둑질해 타기도 하고, 감자 삶은 것 등을 내의 조각이랑 바꾸면 운전사에게 주기도 하면서 양강도 혜산 쪽에 도착했습니다. 떠날 때는 기약할 수 없는 길이긴 하지만 신심을 가졌습니다. 북한 전역을 다녀봐도 아직은 젊었고 힘이 있으니까 중국이란 곳을 들어가서 내 가족들을 데리고 올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악을 써서 중국까지 도착할 수 있겠다 하고 신심을 가지고 떠났는데 도강할 때까지는 일이 순조롭게 풀렸습니다.

국경에 가면 50미터마다 보초병이 서 있습니다. 제가 군생활을 해봤기 때문에 타산을 하고 혜산쪽에 붙어서 밤 한시부터 두시경에 압록강을 넘었습니다. 헤엄쳐서 넘었는데 그때 상당히 물은 차가웠지만 워낙 긴장하니까 차가운 느낌은 없었습니다. 군생활을 했기 때문에 무기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듣고도 보초병이 자고 있는지 깨어 있는지 구분할 수가 있었습니다. 양쪽에서 아무 반응도 없어서 무사히 헤엄쳐서 넘어왔는데 양강도 혜산과 마주하고 있는 장백현이었습니다.

제가 장백현에 넘어서자마자 세시간만에 붙잡혔습니다. 중국땅에 넘어서자마자 배가 고팠습니다. 또한 이국땅에 대한 환상을 가졌던 것이 먹거리입니다. 우선 한끼라도 배불리 먹는 것이 최우선이었습니다. 제가 어느 집 대문을 두드렸는데 그 집주인이 나와서 중국말로 뭐라 하면서 묻다가 대문을 쾅 닫았습니다. 그런데 그 표정을 보니 중국 한족이 아니라 조선족이었습니다. 그집 대문을 떠나 50미터 즈음 걸어가니까 그 집주인이 전화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제가 중국말을 알아듣지를 못하니까 무슨 소리를 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100미터 즈음 벗어나니까 삼거리가 있었는데 거기서 사방으로 중국 경찰들이 몰려와서 붙잡혔습니다. 그래서 장백현의 중국변방대대라고 탈북자를 구류하는 곳에 이틀동안 있었습니다. 이때 제일 생각나는 것이 제발 한끼라도 제대로 먹여서 북한으로 송환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전기고문도 들이대고, 다시 넘어오겠는가 하는 다짐도 받고 서류도 쓰게 합니다. 하루밤 사이에 탈북자들이 50명 정도 붙잡혔습니다. 제가 이틀밤 있었는데 남자, 여자, 어린이, 노인 할 것 없이 다 붙잡혀왔는데 밥 한끼 주지도 않고 때렸습니다. 제가 여기에 와서 월간조선 등에 그때 상황을 많이 발표했습니다. 남자들 같은 경우는 팬티만 입히고 가죽채찍으로 때리고 여자의 경우도 똑같이 취급을 합니다. 인권이나 이런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틀 후 혜산시 도보위부로 송환되었는데, 도보위부까지 중국 경찰들이 직접 들어 갔습니다. 인민들이 다 구경을 하고 정말 제가 그때 생각을 한 것이 ‘정말 나라 망신이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도보위부라는 곳이 혜산시내를 빙빙 돌아가면 있는데 중국 경찰들이 수갑을 채운 채로 100여명을 한줄로 죽 세워서 끌고 가는데 온 혜산시민들이 다 구경했습니다. 그때 정말 눈물이 나고 나라가 망해가는 설움이랄까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도보위부에 이틀 정도 심문을 받고 다른 곳으로 호송될 때 도망쳤습니다. 북한에는 수갑도 없어서 손에다 밧줄을 꽁꽁 묶어서 100명 정도 질질 끌고 노동단련대라는 곳으로 호송되었습니다.

북한에도 부류가 있었습니다. 중국체류기간이 3개월 이상 된 것은 엄하게 보고 한 보름 이상 취조를 하고, 저처럼 중국에 넘어가자마자 며칠 안있어 붙잡힌 것은 6개월 정도 강제노동을 시킵니다. 북한에서 도보위부에서 취조할 때 제일 치중하는 것은 한국선교사들을 만났는가 하는 것을 중점적으로 알아봅니다. 이런 것은 도보위부에서도 성과를 올릴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실수로 어느 교회에 가서 한국선교사를 만나 도움을 받았다고 하면 끝장입니다. 밧줄 묶은 것을 손이 까져가면서 풀고 혜산 시장을 지나갈 때 탈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노동단련대에 들어가면 하루 급식량으로 강냉이나 콩을 섞어서 삶아서 몇 숟가락 주고, 노동강도가 너무 셉니다.

정 일할게 없으면 땅을 팠다가 메우게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천천히 하는 것이 아니라 벽돌 같은 것을 들것에다 들거나 등에 메고 뛰게 합니다. 잘못하면 각목으로 때리고, 내가 잘못하면 내가 속한 조가 같이 벌을 받기 때문에 서로 투쟁이 심합니다. 서로 질시하고 통제합니다. 제가 도망치지 않았다면 거기에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거기에서는 영양실조와 몸이 혹사하는 것을 못견뎌서 많이 죽습니다.남자들 10명 중에 3명 정도는 죽는다고 보면 됩니다. 북한에서는 또한 그것을 응당하다고 여깁니다. 거기에는 죽어도 가기 싫어서 도망쳤는데 요행히 성공해서 다시 두만강쪽으로 붙었습니다. 제가 두만강 쪽을 붙어서 압록강을 건넌 것과 똑같이 넘었는데 성공해서 용정현 계산툰으로 갔습니다. 여기로 넘어오니까 확실히 조선족들이 달랐습니다. 중국돈 300원의 포상금이 있기 때문에, 이 돈이면 중국 한달 월급입니다, 그것을 받겠다고 신고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집 주변의 조선족들이 달라붙어서 가게를 박살내고 밤마다 그 집에 돌을 던졌다고 합니다. 그후 다시는 신고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짜고짜로 대문을 두드렸더니 사람을 훑어보고는 팔소매를 잡아끌고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아무 말도 안하고 밥을 가득 해주는데 내가 넘어와서 처음 먹은 밥이 남한 밥그릇으로 10공기를 먹고도 배가 부르지 않았고 두부도 세모 정도 먹고 나니까 한숨이 놓이고 그 다음에는 식곤증이 나서 한 세시간 정도 자고 일어났습니다.

자고 일어나니까 집주인이 차비를 줄테니까 떠나라고 했습니다. 여기 연변은 탈북자들이 너무 많이 넘어와서 위험하다고, 우리가 보호해 줄 힘도 없으니까 안쪽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흑룡강성이 동북 3성중에는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연변 쪽은 인심이 박하고 흑룡강성 주민들이 인심들이 좋습니다. 흑룡강쪽 조선족들의 구성을 보면 조상들이 전라도나 경상도인 사람들이 80%됩니다. 이 사람들은 인심이 후합니다. 연변은 북한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 80%정도 되어서 생활의 질도 저조하고 박하고 악하지만 흑룡강성 주민들은 인심이 후하고 저를 목단강 쪽까지 갈 수 있는 차비를 주어서 목단강까지 들여보냈습니다. 거기에 들어가 정착해서 한두달 동안 열심히 일하면 가족과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들어와 본 중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중국 한달 월급으로는 애당초 아이들을 데리고 올 엄두도 내지 못하겠고 그렇다고 해서 넘어갈 처지도 못되고 일단 돈이 확보되어야 하는데 이천원 정도 중국 돈이 들어가야 합니다. 한화로 계산하면 한 25만원정도, 이 돈을 중국땅에서 벌려면 한 일년정도 벌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방도가 서지를 않아서 할 수 없이 제가 농사를 짓겠다고 했습니다. 말도 모르니까 어디서 월급제 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9개월 동안 농사를 지었습니다. 주인집이 처음에는 인심이 있었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인지 아침 6시 30분에 깨워서 밤 9시 30분까지 일을 시켰습니다. 농사라는 것 한번도 해보지도 못했고, 일이라는 것도 한번도 해보지도 못했는데 지게를 지고, 모든 일을 수공업으로 합니다. 제가 9개월 동안 남의 두 세배 정도 일하니까 주인집에서 먹은 것이랑 다 계산하고 나서 천원 정도 주었습니다. 천원 가지고는 아이들을 빼내올 수가 없었습니다. 9개월 동안 일하다 보니까 주위에 친한 분들이 있어서 그분들이 주인집에 압력을 넣었습니다. 이 사람이 남들보다 두 세배 더 일했고, 가족을 데리고 오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냐, 돈을 더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인집에서 할 수 없이 돈 2천 5백원을 주었습니다. 상당히 큰돈이었습니다. 그 돈으로 조선족 브로커들을 발동시켜서 우리 아이들을 좀 꺼내달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북한에 들어가서 우리 애들을 꺼내는데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북한에서 꽃제비를 날아다니는 제비로 많이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빌어먹으며 산다’라는 뜻인데 우리 애들이 그렇게 굴려다니는 것을 조선족들이 찾고, 우리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넘기기 위한 작전을 썼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우리 부모님도 못견딜 것 같고, 제 여동생도 못견딜 것 같으니까 오빠가 중국에 가 있다니까 그곳이 천당인줄 알고 무작정 넘어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데리고 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거기에서 친한 사람들에게 이천원 정도 더 꿨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부모님이랑 애들이랑 다 넘어왔습니다. 너무나 막막했습니다. 제가 중국에 있어보니까 온 가족이 다 다니기에는 너무 위험했습니다. 계속 쫓겨다녀야 하고. 어디 발붙일 곳도 없고 어디 하나 보호해 주려고 하는 것이 희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농사를 짓던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농사를 지어서 우리 부모님이나 아이들을 먹여 살릴 수 없었습니다. 먹거리는 한국보다 더 싸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먹거리만 해결할 수 있다면 한국보다 살기 편한 곳이 중국입니다.

저는 북한에서 19살부터 글을 많이 썼습니다. 제가 당원도 되고 대학에 가자면 제 아버지가 종파 딱지가 붙었기 때문에 요동을 치지 않으면 가망이 없었습니다. 생활하는 짬시간마다 글을 썼습니다 제가 속한 중대가 북한에서는 군무자축전이라는 것을 개최합니다. 80년도부터는 2년에 한번씩 개최됐는데 제가 나가서 상도 타고 그 다음에 공군선전대에 21살에 정식으로 작가로 올라가서 28살까지 작가로 활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농사로는 가망이 없기 때문에 글이라도 써보면 뭉칫돈 떨어지지 않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북조선작가로 변신해서 흑룡강신문이요 흑룡강 잡지, 연변에 있는 도라지요, 백두산이요 하는 많은 잡지들과 베이징에도 많은 잡지들이 있습니다. 제가 중국생활을 일년정도 했으니까 그것을 기반으로 글을 썼는데 성공이었습니다. 천 5백원정도 몇달 받으니까 너무나도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에 글 쓰는 것은 생각도 없었는데 한달에 천원, 이천원 받는 것이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KBS 해외동포문학상에 응모했는데 운 좋게도 일등으로 당선되어서 300만원을 받았습니다. 99년도에 태창흥국 시나리오공모전에서 500만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욕심이 자라서 내가 중국에서 중국조선족 작가로 글을 쓰는게 아니라 한국 서울을 겨냥해야겠구나하고 생각한 것이 월간조선이었습니다. 월간조선을 겨냥해서 98년도 시작해서 2000년 귀순할 때까지, 그리고 귀순해서도 현재까지도 드문드문 글을 써내고 있고 그래서 글 쓴 것 하나로 4,500만원정도 뽑았습니다. 뽑으니까 월간조선에서 한달에 130만원부터 150만원을 정상적으로 받았고 그 돈으로 중국땅에서 살아야하겠다 생각하고 아파트도 사고 이것저것 두루 샀습니다.

한국에 IMF 때도 해외동포들을 지원할까 하는 생각도 하고 여유가 있으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인간이고 아이들 앞날을 봐서도 내가 자란 모국이 있어야겠고, 내가 보호국이라 부를 수 있는 땅이 있어야겠고, 떳떳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계속 있었습니다. 그때 제 주머니에 돈이 있었고, 항상 이천원 정도는 용돈으로 넣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우리 부모님과 아이들도 내가 안배해 준 자리에서 크게 염려하지 않게 잘 따랐고, 크게 애로되는 것은 없으니까 그런 생각들이 많이 들었습니다. 갈등도 많았고 고민도 많았습니다. 중국땅에서 사는 동안 월간조선에서 면담을 와서 두번 이야기 나누었는데 한국땅이라는 곳이 상당히 힘이 든다, 중국땅에서 살아라, 한국은 오지 말라고 얘기했지만 내가 중국땅에서 살자니 언어소통이 안되고 내가 언제까지나 먹거리만 먹으면서 돼지처럼 살아야하겠는가 하는 생각에 한국행을 결심했습니다.

제가 남한으로 넘어올 때 한화로 천 삼백만원 정도 지불을 했습니다. 현재 우리 아버님은 한국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뇌출혈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무사히 한국에 넘어왔다니까 좋아하시다가 그날밤에 흥분하셔서 술 마시다가 뇌출혈로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내가 온 덕에 우리 아버님을 사망시켰습니다. 남한에 도착한 후 온 서울시내를 오후 5시까지 돌아다녔습니다.

돌아다니다가 조선일보에 가서 내가 넘어왔다고 하니까 놀라서 차를 권하고 사진을 찍고 국정원에 전화하니까 와서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현재 한국생활을 했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월간조선에서 계약기자 생활을 일년 했는데 한 일년동안 일하면서 원고료 타먹고 나니까 이제 더이상 나에게 관심이 덜해져서 무직업자가 되고 현재는 자유기고가로 글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한국의 기업문화를 배워보려고 다단계판매회사 청호정수기에서 한 석달동안 월급도 못받으며 일하면서 정수기도 나가서 팔라고 하는데 남에게 권하기도 싫고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만두고 현재는 이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북한에 대해 인식을 받은 것은 북한의 정치라는 것은 성경의 순리와 교리를 모방해서 정치를 한다는 것입니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어머니 외가쪽이 기독교와 상당히 연관되어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묘하게 도입했는지 북한에 있을 때는 느끼지도 못했는데 말씀침투요 뭐니 하는 것을 여기 와서 보니 하나님의 말씀이고 정식으로 하느님이라고 명명해놓고 있고 예수님이 강림한 것처럼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까지는 잘 먹혀있고 성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의 유훈통치를 실현한다고 하면서 대통령이나 그런 공식적인 지위에 오르지 않고 국방위원장이니 하며 김일성의 유훈통치를 마저 실현한다는 이런 식인데, 훗날에 김정일의 아들 김정남이가 대를 이어받지 않겠냐 하니, 이런 것은 어림도 없는 짓입니다. 김정일이 지금도 자기 이미지를 겨우 이어나가고 있는데 북한의 신문이나 방송을 살펴보면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아직도 60%이상 나오고 있습니다. 아직도 김정일이 김일성의 이름을 도용해서 우려먹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경제라는 것은 제1경제와 제2경제로 나눠볼 수 있는데 제1경제라는 것은 인민경제인데, 제1경제가 북한에서 가지고 있는 예산은 절반도 안됩니다. 북한에 정무원총리가 공식적으로 있지만 제2경제담당비서가 정무원총리보다 더 서열우위에 있습니다. 북한이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주민을 통제하는 방법을 보면 거짓말도 100번 하면 진실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북한이 계속 주입하니까 북한 군인의 경우는 거의 순순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형편이고 장교들은 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교들의 쿠데타 사건이 98년도에 일어났습니다. 그때 60명 가량이 처형당했습니다.

일반 문화적으로는 남한과 거의 비슷합니다. 제를 지내는 방식이나 심지어 술주정하는 방식도 비슷하고 가정생활을 유지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다른 것은 북한의 여성들은 상당히 가부장적 제도에 얽매어 살기 때문에 남자에게 복종하고, 여기는 대신 남자가 여자에게 꼼짝 못합니다. 여기 와서 보니까 여자들 목소리가 어찌나 높은지. 여자들 많으니까 저도 남한에 오면 장가 금방 갈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오산입니다. 북한은 인구비례를 보면 여자가 남자에 비해 1.5배정도 차지한다고 나와있습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총각들도 장가 못가고 이러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여자가 25살 정도만 되면 늙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한국에 오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 아파트만 해도 장가 못간 홀아비들이 많습니다.

문화적으로 보면 통일하면 이질적인 감이 들지 않겠는가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탈북자들도 문화적인 면에서는 적극 적응이 되고 숙련이 됩니다. 당하고 일하고 하는데 상당히 힘이 들고 여기 오면 보장해주겠지 하는 생각을 탈북자들은 많이 품게되고 조금이라도 그런 생각이 지배되는 것에서 자기 특기를 살리지 못하고 보장해주지 않느냐 혹은 내가 왜 힘든 일을 하느냐 하는 문제들이 대두되는 것이 있습니다. 중국 조선족들은 한국사회에 와서 힘든 일도 하는데 너희 북한 사람들은 왜 못그러느냐고 하는데 여러분들이 이해하셔야 될 점들이 있습니다. 바닥에 떨어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일정한 기간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도 정착기간을 삼년 정도는 걸려야 한다. 그리고 그 이상은 자기능력을 알고 자기가 일할 곳을 찾아야 한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순복음교회에 탈북자가 50명 정도 나가고 있는데 제가 거기서 회장을 맡아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살펴보면 삼년 정도 있다가 자기가 돈이 없으면 아무 일이라도 하게 되는데, 갓 나와 정착 못하고 헤매는 사람들 놓고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봅니다. 저도 현재 남한에 온지 2년 4개월이니까 6개월 정도 지나면 3년이 됩니다. 다른 것을 해보다가 안되면 버스에라도 앉아서 일해보려고 합니다.
 
http://www.durihana.com/main.htm
 
옥중서신 (사단법인 두리하나)

생각만 해도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그리운 두리하나...
유월에야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는
중국의 오지 내몽고 사막 땅에서
유월의 봄소식을 전해봅니다.


혹독한 추위와 열악한 환경,
이제는 쳐다보기 조차 두려운
하루 두 끼 누런 밀가루떡 덩이와
모래가 가득 섞인 물 한 컵의 식사...
지금도 적응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실내의 변기통...

자유... 그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게 해주는 작은 독방에 갇혀
사랑하는 가족과 두리하나
모든 분들이 너무나 그립고
만나고 싶어, 기억하고 있는
모든 분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하루도 잊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로 아룁니다...

어느덧 6개월의 수감생활에
세수대야의 물만으로도
목욕까지 마치고,

작은 철사를 끊어 바늘로
만들어 쓰며 제법 환경에도
적응했습니다. 이제는 오직 기도와
말씀, 묵상의 시간으로 일생 중
가장 소중하게 기억될 감사와
축복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 3:8-9)

이제 우리의 재판이 끝나면
만주리 감옥에서 압제를 당하고 있는
13명의 고아와 과부, 나그네들은

가혹한 형벌이 기다리는
죽음의 땅으로 넘겨질 것입니다.
만삭의 김씨 부인은
거처할 곳이 없어 두리하나로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두리하나 피난처에서 생활하던 중
출산할 곳이 없어...
결국은 체포 직 후 감옥에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피난처에서 밤이 늦도록..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던 남편 김씨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내는 북한에서,
남편은 남한에서 헤어져
살아가야 할 비극이란...

사랑하는 두리하나 모든 분들께
그들이 '학대받은 자로
부끄러이 돌아가게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로
주의 이름을 찬송케'(시 74:21)
하시도록 간절히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생명을 아끼지 않고
그들을 섬기는 두리하나의
일꾼 될 것을 다짐하며

하이라얼 감옥에서 천기원 선교사 드림

2002년 6월 19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