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도 대표적인 친환경 건축물에 속합니다.

 

                                            

   몽골 등 중앙아시아 지역 유목민들이 오랜 기간 이동하며 살아왔던 몽골의 전통주택 게르(ger)가 드넓은 초원의 한가운데 서있는 모습은 현지에 직접 가서 보지 않더라도 사진이나 매스컴 등을 통해 보는 순간 바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구조물입니다.

 

   이 게르(ger)는 영어권에서는 유르트(yurt)라고 부르고 중국에서는 파오(pao)라고도 부르는데 인류가 지금껏 고안한 건축물 중에 가장 효율적인 표면 대비 용적을 갖춘 구조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유목민들의 옛 선조들은 원형의 게르를 구성하는 'x'자 모양의 격자를 벽처럼 둥글게 세워 올린다음 가운데 턴이라 불리는 원형의 천장구조물을 격자로부터 출발한 서까래가 둥글게 돌아가며 밀어 올려 고정한 뒤 말총을 엮어 만든 줄로 벽을 단단히 당겨 지탱하면 훌륭한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가죽이나 동물의 힘줄 등으로 나무를 단단히 엮어 만든 이 격자의 구조물은 그 겉에 펠트(양털을 다져만든 일종의 보온재)를 덮어 혹한을 견디도록 했으며 그 위에 다시 가죽이나 모직물 등으로 덮은 뒤 문양 등을 넣어 치장을 하였으며 영하 4~50도를 오르내리는 혹독한 자연 환경 속에서도 오랜 기간 이동하며 살기에 아주 효과적인 놀라운 구조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목을 주된 생활수단으로 삼고 있는 지역과 민족 국가 등의 주된 건축물로서 오늘날 까지 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오고 있는 수천 년의 수명을 자랑하고 있는 장수 구조물이기도합니다

 

 

   어찌 보면 게르는 인류의 기원까지야 못 미치겠지만 가장 원시적이고 초보적인 형태의 건축구조물로 전 세계에서 인정을 받고 있으며 그러한 이유 등으로 세계 유명 건축 박물관에는 거의 예외 없이 한 두동의 게르가 전시되고 있음을 우리는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몽골의 전통 게르는 기후 및 생활습성과 지역적 특성에 따라 어느 지역 어느 분 들 이라도 사용할 수 있는 구조물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미흡한 점이 있었으며 바로 그러한 단점들로 인해 지역을 벗어난 다른 용도로의 활용이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져 오며 그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몽골의 전통가옥 그대로를 한국에 들여와 설치를 한 경기도 어느 지역입니다만 설치한지 불과 몇 개월 지나지 않은 사진으로서 한국이나 여타지역과 몽골의 기후 차이에 의한 심각한 훼손상테를 한눈에 보실 수 있습니다.

 

 

 

    최근 남다른 건축물을 짓고자 하는 건축주들이 늘어나면서 기존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형태의 건축물 시공이 시도되고 있으나 건축주가 원하는 대로 디자인을 하다보면 엄청난 건축비에 중도에 포기하고 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일 것입니다.


    게다가 조립식 건축물인 샌드위치판넬 조 건축물들은 단열과 방수 외풍과 통기 등 건축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요소에서 과연 만족할만한 수준에 이르렀고 또한 그것이 소비자들로부터 충분히 검증되어 인정을 받고 있는 수준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의문도 한편에서는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콘크리트 구조물이나 조립식 건축물 등 가존의 수평과 수직으로 이루어진 단조로운 건축에서 벗어난 푸근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건축 디자인이 여러분을 즐겁고 여유롭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하시는 건축주가 계신다면 몽골의 전통가옥 게르의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개선해 놀랍도록 변신한 현대적인 게르하우스 또는 유르트하우스를 검토해 보시길 권합니다.

 

 

사진/부산 해운대 신시가지 한복판에 세워진 현대적으로 개량된 한국형 게르의 모습


       여러분의 시간과 정열과 재산을 투자해 짓는 여러분의 건축물은 그것이 상가이든 주택이든 펜션이든 상관없이 여러분이 디자인적으로 만족하는 곳이어야 하며, 소유하고 살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곳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진/한국에서 수출되어 일본 홋카이도 힐튼호텔 경내에 세워진 현대적으로 개량된 한국형 게르의 모습

 

 

사진/서울 목동의 개인주택 마당에 별채로 세워진 현대적으로 개량된 한국형 게르의 모습

 

 

사진/용인에 연수원 경내에 세워져 VIP용 특실 역할을 하고 있는 현대적으로 개량된 한국형 게르의 모습

 

 

사진/가파른 경사면에도 불구하고 절토하지 않고 세워진 펜션 현대적으로 개량된 한국형 게르의 모습

 

 

사진/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세워져 전시장 역할을 하고 있는 현대적으로 개량된 한국형 게르의 모습

 

 

사진/리모델링중인 남산 타워호텔 홍보관 역할을 하고 있는 현대적으로 개량된 한국형 게르의 모습

 

 

사진/도심 한가운데 160평 규모로 세동을 연동해 지은 레스토랑 현대적으로 개량된 한국형 게르의 모습

 

 

사진/필로티를 이용해 1층을 휴게공간으로 쓰고 2층에 올린 현대적으로 개량된 한국형 게르의 모습

내용출처 :  http://k.daum.net/qna/view.html?category_id=QJC008&qid=3URMJ&q=%C4%A3%C8%AF%B0%E6%C1%FD&srchid=NKS3URMJ

[친환경 집 나도 지어봐?③] 값싸고 친환경적인 재활용·재사용 건축
  김성원 (windtalk)
  
재개발과 재건축으로 서민이 자기 집을 가질 가능성이 과연 높아질 수 있을까? 사진은 서울 동작구 상도동 재개발 후보지.
ⓒ 유성호
뉴타운
MB 정부는 재건축·재개발을 통해 일자리를 늘리고 경기를 부양하겠다고 발표했다. 재개발 재건축으로 서민이 자기 집을 가질 가능성이 과연 높아질 수 있을까? 재개발 재건축의 뒤끝은 항상 부동산 투기와 집값, 전세값 폭등이었다.

 

재개발 재건축 문제가 그뿐일까? 산업에너지의 40%가 건축자재 생산에 쓰인다. 이 과정에서 지구온난화를 일으키는 막대한 온실가스가 나온다. 전세계 무역물동량의 40%가 건축 자재다. 운송 에너지까지 더하면 현대 산업건축에 들어가는 총에너지는 더 높아진다. 고유가 시대에 걸맞지 않게 총에너지 투여가 너무 높다. 또한 지구 온난화대책과는 근본적으로 대치된다. 산업폐기물에서 건축폐기물이 차지하는 비중조차 약 40% 수준. 기존 건물들을 모두 건축폐기물로 만든 후 대규모 아파트를 짓는 재개발 재건축은 가장 환경파괴적이다.

 

주택 구매 아닌 집 짓기로 집 걱정 해결

 

  
▲ 어스십 건축 현장 폐타이어를 벽체로 사용한 후 흙미장을 한 벽체.
ⓒ Earthship Biotecture
재활용건축

한편에서는 주택을 사지 않고 직접 집을 지어 살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들은 자기 노동으로 집을 짓거나 스스로 건축감독이 되어 자기 집을 지으려는 사람들이다. 자기주도적 집 짓기와 관련된 수많은 온라인 동호회와 다양한 건축 학교들이 스스로 집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의 열망을 보여준다.

 

자기주도적으로 집을 짓더라도 30~40% 이상 치솟은 건축 자재값이 복병이다. 최소한의 건축지식과 기술을 갖추지 않는다면 아무리 집주인이 감독만 한다 해도 녹록치 않다. 되려 건축업자에게 맡기는 것보다 더 비용이 들 수도 있다. 자기주도적 집 짓기에서도 산업건축 자재의 환경 문제는 남는다.

 

  
▲ 해비타트 리스토어 해비타트가 운영하는 재활용건축자재 상가.
ⓒ Habitat
재활용

재활용(Recycle) 건축은 경제적인 집짓기와 친환경적인 집짓기가 가능하다. 재활용 자재를 쓰기 때문에 건축에 드는 총에너지와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스스로 집을 짓고자 하는 서민이라면 시도해 볼 만한 건축 방식이다.

 

DIY(Do It Yourself의 준말, 전문가 도움 없이 직접 하는 것)나 자가수선, 자가건축문화가 발달한 미국과 캐나다의 경우 재활용 건축은 전혀 낯설지 않다. 미국과 캐나다에는 홈디포(The Home Depot), 캐너디안타이어(Canadiatire), 해비타트 리스토어(Habitat Restore), 해피해리스(Happy Harris) 등 재활용자재 전문상가들이 많다. 북아메리카재사용건축자재협회와 같은 조직들이 있어 건축자재의 재활용을 돕는다.

 

온라인에는 리사이클넷(recycle.net), 글로벌리사이클링네트워크(grn.com), 빌딩리소스(buildingresources.org) 등이 재활용 건축자재의 거래를 돕는다. 디컨스트럭션연구소(deconstructioninstitute.org)나 빌딩그린(buildinggreen.com), 그린리덕스(Greenredux.com)는 재활용 건축방법과 사례에  대한 다양한 자료들을 공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재활용 건축자재를 구하기 위해선 여기저기 고물상이나 철거현장을 뒤져야 한다. 건축에서 가장 돈이 많이 든다는 창호나 지붕자재, 화장실 자재를 구하면 행운. 그밖에 재활용 건축자재들은 여기저기 주변을 돌며 발품을 팔아도 쉽게 구할 수 없는 형편이다.

 

재활용 건축은 경제적이고 친환경적인 집짓기 방식

 

  
▲ 어스십 주택 내부 폐타이어로 만든 집이라고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어스십 주택 내부.
ⓒ 김성원
재활용건축
재활용 건축을 좀더 세밀하게 구분하면 재활용(Recycle) 건축과 재사용(Reuse) 건축으로 나눌 수 있다. 재활용(Recycle) 건축은 이미 쓴 건축자재 또는 비건축자재를 건축자재로 활용한다. 재사용(Reuse) 건축은 사용한 건축자재를 해체 또는 탈착, 분해 등 재조립·재부착해서 재사용한다. 
 
목조골조로 조립과 분해가 쉬운 한옥은 기본적으로 재사용이 가능한 주택이다. 서양 목조주택 역시 대개의 경우 자재의 재사용이 쉽다. 일본과 독일에서는 건축자재의 재사용성을 높이기 위한 건축자재의 개발과 건축 설계에 대한 연구를 오래 전부터 해왔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현대 건축에서 콘크리트 이용이 증가하면서 건축자재의 재사용은 급격하게 축소되었다.
 
  
▲ 빈병으로 만든 집 네바다 사막에 5만개 유리병으로 만든 집.
ⓒ bainsk8.nl
재활용건축

재활용 건축은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재활용 건축 자재를 수집해서 재활용하는 데 상당한 노력과 시간, 창조력,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 너무 복잡하지 않은 재료로 가능하면 단순한 기술을 적용한 재활용건축 방법이 요구된다.

 

재활용 건축의 이러한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널리 보급되고 있는 재활용 건축 방법 중에는 폐타이어, 빈병, 폐종이를 건축자재로 재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어스십(Earthship)은 미카엘 레이놀드(Michael Reynolds)가 개발해서 전세계로 보급하고 있는 재활용 건축 방법이다.

 

어스십은 북서쪽의 단열을 위한 경사둔덕, 남동쪽의 햇볕을 잘 이용할 수 있는 온실과 같은 패시브 솔라(Passive Sola) 구조, 폐타이어에 흙을 채워 벽돌처럼 쌓고 흙이나 시멘트로 미장해서 만드는 벽체로 구성된 건축방법이다. 폐타이어 쓰레기 문제도 해결하고 건축비용도 줄일 수 있는 이점이 있다.

 

폐타이어를 재활용하는 어스십 건축

 

  
▲ 부분적으로 사용된 빈병 치장 흙벽 빈병을 넣은 흙벽을 쌓아 채광과 아름다움을 더했다.
ⓒ kitsandmortar.com
재활용건축
어스십 건축에서는 폐타이어뿐 아니라 쓰다 버린 알루미늄 캔이나 PET병도 자주 이용된다. 주로 벽체가 얇은 내벽이나 곡선벽면을 만들 때 캔이나 PET병을 흙반죽과 함께 쌓아올린다. 이렇게 캔이나 PET병을 이용하면 흙벽을 만드는 데 드는 노동력을 줄일 수 있다.

 

빈병 역시 재활용 건축에서 자주 사용되는 재료이다. 1906년 기차가 연결되지 않아 건축자재를 구할 수 없었던 호주의 오지 라이어라이트(Rhyolite) 마을의 톰 켈리(Tom Kelly)는 수천개의 병으로 유리병 집을 지었다. 이후로 건축에서 빈병 재활용은 보편화되었다.

 

빈병을 시멘트나 흙 모르타르를 사용해서 쌓아올려 건축물 벽체를 만들 수 있다. 빈병 안의 공기층은 벽체의 단열효과를 높여줄 뿐 아니라 벽체를 만드는 노동력을 줄여준다. 요즘은 건물 전체 벽체를 빈병으로 쌓기보다는 벽체 일부분의 채광과 인테리어에 주로 활용된다. 이밖에도 빈병이나 PET병은 자갈도랑배수로나 기초 하단부에서 자갈 대신 사용할 수 있다.

 

  
▲ 이브스가든(Evesgarden) 모텔 종이벽돌과 종이시멘트로 지은 모텔.
ⓒ Evesgarden
재활용주택
  
▲ 종이시멘트 벽돌 종이시멘트로 만든 벽돌을 건조하고 있다.
ⓒ Livinginpaper
재활용주택
  
▲ 신문지 단열재 폐신문지를 벽체의 단열재로 사용한다.
ⓒ Ecoble
재활용건축

폐종이나 폐휴지 역시 훌륭한 재활용 건축 자재이다. 폐종이는 그대로 사용되기보다는 흙, 모래, 석회 또는 시멘트 등과 혼합해서 만든 종이시멘트(Papercrete)나 종이시멘트 벽돌로 가공해서 쓴다. 종이시멘트는 페이퍼 어도브(Paper Adobe) 또는 하이브리드 어도브(Hybrid Adobe)로 불리기도 한다.

 

종이시멘트는 폐휴지를 잘게 썰어 물에 불린 후 흙, 모래, 석회(또는 시멘트) 등과 섞어서 만든다. 다양한 배합비율이 가능하다. 시멘트 벽돌에 비해 1/3~1/4 정도 가볍고 나사못을 박을 수 있다. 톱으로 썰 수도 있다. 1~2층 정도 소규모 주택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강도 또한 높다. 경량기포콘크리트인 ALC(Aero Light  Concrete)와 특성이 비슷하다. 종이시멘트 건축은 경제적이고 단열성능 역시 높다.

 

종이시멘트를 만들지 않더라도 보고 난 신문지나 두꺼운 전화번호부 역시 벽체의 단열재나 벽돌 대신 사용되기도 한다. 압축된 헌옷 역시 단열재로 많이 사용된다. 파쇄한 헌 옷에 석회나 흙을 섞어 뿜질을 해서 천장 단열재로 이용하기도 한다.

 

종이시멘트 건축 값싸고 단열성능 높아

 

  
▲ 고속도로 건축폐기물로 만든 집 보스턴 고속도로 건축폐기물로 만든 렉싱턴에 지은 집.
ⓒ Ecofriend
재활용건축
  
▲ 냉동 컨테이너를 개조해 만든 집 Leger Wanaselja Architecture가 버려진 냉동 컨테이너로 만든 집.
ⓒ Timberframeblog
재활용건축

고속도로의 대규모 토목공사 폐기물이나 버려진 컨테이너로도 멋지고 현대적인 집을 지을 수 있다. 

 

보스턴 고속도로 공사 후에 수많은 강철과 콘크리트 폐기물이 버려졌다. 51세의 페디니(Pedini)씨는 단 3일 만에 고속도로 현장에서 주어온 폐기물로 'Big Dig House'라 이름 붙인 재활용주택의 골조를 세웠다. 이 재활용 주택의 규모는 1310평방미터(약 390여 평)이다.

 

컨테이너 재활용 주택은 별도의 골조가 필요없을 뿐 아니라 건축비용과 공기를 단축할 수 있다. 외관은 전혀 컨테이너의 느낌 없이 현대적이고 모던한 느낌을 준다.

 

건축폐기물로도 현대적이고 멋진 집 지을 수 있어

 

재활용건축은 많은 시간과 창조적 노력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고유가와 지구온난화에 대응할 수 있는 대안 건축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 이상 쓰레기를 모아 짓는 볼품 사나운 헛간이 아니라 미적으로도 아름답고 기능적으로 우수한 건축물을 지을 수 있다.

 

집문제로 머리가 아픈가. 재건축 재개발? 자기주도적 재활용 건축으로 당신의 집짓기에 도전해 보라.

덧붙이는 글 | 김성원 기자는 전남 장흥에서 2008년 가을부터 폐타이어와 빈병, 흙부대를 이용해서 사랑채 공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종이시멘트 건축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papercreters.net, papercretenm.com, hybridadobe.com, livinginpaper.com 에서, 폐타이어를 이용한 어스쉽(Earthship) 건축에 대해서는 earthship.net에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재활용건축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은 재활용건축연구소 네이버 카페 http://cafe.naver.com/therecycledhouse 에서 찾아볼 수 있다.

출처 :근육맨 원문보기 글쓴이 : 조경준

강화 교산교회, 존스 기념예배당과 옛 교회 (박물관 예정)

 

강화 지역에 예수의 복음이 전래되고 교회가 선 것은 대한 감리교의 모교회 격인 인천 내리교회에 의해서였다. 1885년 아펜젤러 목사가 인천에 상륙하자 인천 내리교회를 세워 놓았고, 1892년에 그의 후임으로 존스(G.H.Jones 조원시 趙元時 1988.5.9 서울도착) 목사가 부임해 왔다. 존스 목사는 내리교회에 부임하자 인접 도서인 강화지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고, 그 즉시 실천에 옮겨 강화 선교를 시작했으나, 강화 관.민의 냉대로 무위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때를 같이해 내리 교회 안에서는 전도의 방편으로 장조계를 조직한 바 있었으나 얼마 안 가서 계도 실패하고 교인도 잃고 말았다고 한다. 50명의 계원중 유독 이승환이라는 성도 한 사람만이 남아 계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이 이승환 성도는 강화 서사(양사)출신으로 제물포에 가서 술집을 경영하면서 내리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었다. 그리하다 보니 강화 고향에 있는 이승환의 어머니도 이들을 따라 예수를 믿게 되고, 믿음이 생기자 존스 목사에게 세례받기를 원하게 되었다. 이것은 강화 선교의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존스 목사는 한복으로 변장하고 야음을 이용해 또 다시 강화에 올 수 있었다. 우선 서사 뒤쪽에 배를 정박하고 사람을 동리로 보내 정탐케 했다. 그러나 동리에 들어와 세례식을 행한다면 그 집을 불사르고 큰 봉변을 당하리라는 제보였다. 소요를 원치 않았던 존스 목사는 이승환 성도에게 노모를 배로 안내하도록 하였다. 이윽고 아들은 어머니를 업고 상당한 거리의 개펄을 건너 존스 목사의 배에 올랐다. 마침 달밤이라 달빛을 이용해 예문을 읽어가면서 무사히 세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이것이 유명한 선교초기의 선상 세례요,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강화도에 최초의 복음의 씨가 떨어진 것 이다. 그 후 이승환 성도는 제물포의 술집을 정리하고, 고향 양사로 돌아와 보다 건전한 직업인 농사일을 하면서 전도에 힘썼다. 존스 목사는 가오하 양사를 당시 제물포교회와 함께 2대 선교 거점으로 보고 1893년 가을 이명숙 전도사를 강화 담당자로 파송하였다. 초기에는 교인 4-5명이 모여 이승환 자택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가정교회로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자 교인은 즉시 배로 증가해 10여명에 이르렀다. 이제는 하나의 어엿한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1893년 말에는 존스와 스크랜톤(W.B.Screanton, 시란돈 施蘭敦) 두 선교사가 이미 강화교산교회에 와서 유숙한 바 있고, 내리교회 백헬란 전도사는 6차례에 걸쳐 10주간을 머물면서 강화 전도에 힘쓰기까지 했다. 이렇게 해서 강화교산교회는 1893년을 교회 창립원년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창립된 다음 해인 1894년에는 이미 교항리에 초가 12간을 구입해 교회를 이전하게 되었다. 이승환씨는 그후 매서인이 되어 전도에 힘쓰다가 1898년에는 아펜젤러 목사로부터 강화 교산교회 계삭회 소속으로 권사 직분을 받는다. 술집 주인 이승환이 변하여 어엿한 권사님으로 존경받게 된 것이다. 이승환 권사는 더욱 전도에 열중했다. 주로 강화, 인천, 옹진지역을 중심으로 전도하다가 1901년 이후부터는 주로 영종, 삼목, 용유등 인근 도서를 돌면서 몇 개의 교회를 세운다음 1908년경에 영국 성서공회를 통해 이민해 가고 만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하튼 강화 지역 교회들은 이승환 권사를 통해 복음이 최초로 전래되었다는 데서 그의 공로를 오래도록 기리고자 하는 것이다.

 

존스 기념예배당과 옛 교회 (박물관 예정)

 

창립 110주년 존스기념 예배당

 

창립 110주년 존스기념 예배당

 

창립 110주년 존스기념 예배당 봉헌예배

 

구 교회

 

구 교회

 

구 교회

 

옛 교회  종탑

 

구 교회 내부

 

김상임 전도사 공덕비      

 

강화의 양반 중 선상세례의 과정에 감명을 받은 이가 있었다. 벼슬을 하지 않고 초시 신분으로 교항(현 교산)에 서당을 차려 후학을 양성하며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던 김상임이 바로 그다. 김초시는 이승환 모자에 대한 존스 선교사의 사려 깊은 행동을 본 이후 한문성경을 전해받고 읽은 가운데, 자신이 찾던 ‘정감록’의 ‘십승지지’란 주요 비결이 바로 성경의 ‘십자가지도’ 임을 깨닫고 개종을 결심한다. 이후 김상임이 마을의 가신과 산당을 불사르고, 말씀 공부에 집중한 결과 교산교회 신앙공동체의 교인 수가 급증하게 된다. 서민층 일색이던 신앙공동체에 양반층이 합세하며 강화교산교회는 복음을 전 지역으로 확산시키게 된다. 김상임은 존스 선교사의 배려로 인천의 신학회와 평양의 신학회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02년 4월 김기범, 김창식 목사에 이어 감리회의 한국인 3대 목사후보가 됐으나, 목사안수를 몇 달 앞두고 전염병이 창궐한 마을의 심방을 갖다가 감염돼 55세를 일기로 소천한다. 이후 교산교회 성도들은 김상임을 강화의 바울로 부르며 그의 신앙의 길을 따르며, 연이어 홍의교회(1896)를 거쳐 고부교회(1897) 상도교회(1899) 등 강화 전 지역의 교회개척을 위해 헌신하며 강화 어머니교회의 역할을 감당하게 됐다.

 

김상임 전도사 공덕비  후면  

 

 

교회내부

 

교회내부 제단

 

교산교회 역사 전시실 (교회현관)

 

1917년

 

강화군 교산리교회 역사, 1917.5. 박봉래 목사 편찬  

 

 강화군 교산리교회 역사, 1917.5. 박봉래 목사 편찬

 

1925년 교적부 

 

1943년

 

1943년

 

1950년 교적부 

 

1950년 당회록

 

1952년 교회일지 

 

1962년

 

1967년

 

1967년

 

1968년 

 

리브가 권사

 

1939년 개역성경

 

역대 담임목사

 

역대 담임목사 

 

교회 100년사  

 

김상임 전도사         

 

깅화중앙교회 역사자료관에 가면 강화선교의 개척자인 김상임전도사 사진을  볼 수 있다. 이는 최초로 공개된 귀중한 자료이다.

이은용장로의 노고로 김상임전도사의 손자인 김예기목사께서 기증하신 사진이라고 한다

 

김상임 전도사 묘

 

김상임 전도사 생가, 현재는 직계자손이 살고있다.    (출처- http://cafe.daum.net/coreasan1)

 

교항교회 (현 교산교회)에 김상임 전도사가 자기 집과 토지를 바친 문서 (강화중앙교회 역사자료관)

 

교항교회 (현 교산교회)에 김상임 전도사가 자기 집과 토지를 바친 문서 (강화중앙교회 역사자료관) 

 

존스 선교사 (조원시 선교사)

 

조원시 목사의 노년기 모습

 

김찬희 박사가 입수, 지난 7월18일 인천내리교회에서 열린 '내리교회 창립 120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에서 처음으로 공개 했다.

 

조원시 (존스) 선교사 흉상, 인천 내리교회

 

조원시 (존스) 목사는 1888년 5월에 약관 20세의 나이로 선교사로 내한하여 약 5년간 배재학당에서 교편도 잡고 문서출판 사업도 하다가 1892년부터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아펜젤러가 선교의 터를 닦았다면 조원시 목사는 그 터 위에 전도와 교육 전반에 걸쳐 괄목할만한 업적을 쌓은 내리의 아버지라 할만한 분이다. 그는 1892년에 한국 최초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교를 개설했고 강화, 연안, 해주, 남양 지방에 전도를 시작했고 1894년에는 한국인 자력으로 교회당을 건축 봉헌했으며 한국 최초의 신학회를 조직하여 이동신학교를 개설했고 1901년 성탄절에는 내동 현 위치에 십자가형 벽돌 예배당을지었고 교인 다수가 하와이로 이민함에 따라 홍승하 전도사를 하와이에 파송하기도 했다. 한국 교회 찬송가 보급에도 공한한 그는 그 후 서울에서 신학월보를 창간하고 The Korea Review를 편집발간하였고 서울 YMCA 창립에 공헌했으며 1905년에는 초대 신학당 (현 감신대) 당장에 취임하였다. 조원시 목사는 1919년 5월 뉴욕에서 51세로 별세했다.

 

조원시 (존스) 선교사 흉상, 인천 내리교회

 

강화 지역에 예수의 복음이 전래되고 교회가 선 것은 대한 감리교의 모교회 격인 인천 내리교회에 의해서였다. 1885년 아펜젤러 목사가 인천에 상륙하자 인천 내리교회를 세워 놓았고, 1892년에 그의 후임으로 존스(G.H.Jones 조원시 趙元時 1988.5.9 서울도착) 목사가 부임해 왔다. 존스 목사는 내리교회에 부임하자 인접 도서인 강화지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고, 그 즉시 실천에 옮겨 강화 선교를 시작했으나, 강화 관.민의 냉대로 무위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때를 같이해 내리 교회 안에서는 전도의 방편으로 장조계를 조직한 바 있었으나 얼마 안 가서 계도 실패하고 교인도 잃고 말았다고 한다. 50명의 계원중 유독 이승환이라는 성도 한 사람만이 남아 계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이 이승환 성도는 강화 서사(양사)출신으로 제물포에 가서 술집을 경영하면서 내리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었다. 그리하다 보니 강화 고향에 있는 이승환의 어머니도 이들을 따라 예수를 믿게 되고, 믿음이 생기자 존스 목사에게 세례받기를 원하게 되었다. 이것은 강화 선교의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존스 목사는 한복으로 변장하고 야음을 이용해 또 다시 강화에 올 수 있었다. 우선 서사 뒤쪽에 배를 정박하고 사람을 동리로 보내 정탐케 했다. 그러나 동리에 들어와 세례식을 행한다면 그 집을 불사르고 큰 봉변을 당하리라는 제보였다. 소요를 원치 않았던 존스 목사는 이승환 성도에게 노모를 배로 안내하도록 하였다. 이윽고 아들은 어머니를 업고 상당한 거리의 개펄을 건너 존스 목사의 배에 올랐다. 마침 달밤이라 달빛을 이용해 예문을 읽어가면서 무사히 세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이것이 유명한 선교초기의 선상 세례요,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강화도에 최초의 복음의 씨가 떨어진 것 이다. 그 후 이승환 성도는 제물포의 술집을 정리하고, 고향 양사로 돌아와 보다 건전한 직업인 농사일을 하면서 전도에 힘썼다. 존스 목사는 가오하 양사를 당시 제물포교회와 함께 2대 선교 거점으로 보고 1893년 가을 이명숙 전도사를 강화 담당자로 파송하였다. 초기에는 교인 4-5명이 모여 이승환 자택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가정교회로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자 교인은 즉시 배로 증가해 10여명에 이르렀다. 이제는 하나의 어엿한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1893년 말에는 존스와 스크랜톤(W.B.Screanton, 시란돈 施蘭敦) 두 선교사가 이미 강화교산교회에 와서 유숙한 바 있고, 내리교회 백헬란 전도사는 6차례에 걸쳐 10주간을 머물면서 강화 전도에 힘쓰기까지 했다. 이렇게 해서 강화교산교회는 1893년을 교회 창립원년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조원시 (존스) 선교사 흉상, 인천 내리교회  

 

존스 선교사 (조원시 선교사) 가족, 1895년 출생한 장녀 캐서린과 부부   (출처- http://cafe.daum.net/coreasan1)

 

 1905년 하와이 이민을 방문한 존스 목사내외

 

존스 목사의 부인인 벵겔선교사로 인천 영화여학교 설립자이다.

 

존스 목사의 부인인 벵겔선교사 82세때 모습

 

선상세례가 있었던 장소     (출처- http://www.kyosan.zc.bz/)

 

미 감리회 소속으로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다음으로 한국을 찾은 존스 선교사는 제물포지방 감리사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에 능통하여 한국어사전 편찬, 한국 역사와 문학, 철학과 종교 분야에 관해서도 깊이 있는 저술을 남겼다. 강화지방 선교역사는 존스 선교사와 함께 그에게 복음을 전파 받은 강화 출신의 주막집 주인 이승환과 관련된다. 본인의 직업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세례를 받지 못하던 이승환이 존스에게 강화에 살고 있는 모친의 세례를 부탁했던 것. 지역 유림들의 반대로 존스 선교사가 강화에 들어오지 못하자, 갯벌에 정박 중인 배에서 한국 옷을 입고 기다리던 존스에게 한 밤 중에 모친을 등에 업고 찾아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승환과 모친이 함께 세례를 받게 된다. 이 장면을 헤스(M.Hess)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기독교를 미워하는 주민들의 난폭한 반대로 세례예식은 마을에서 거행되지 못했다. 아들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존스 박사가 배에서 기다리고 있는 해안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은빛 찬란한 달밤에 한 노파의 기쁨의 잔이 넘쳤으니, 이는 죄 씻음 받은 기쁨의 잔이었다. 그녀는 강화의 겨자씨로 불리었다.”

 

선상세례가 있었던 장소

 

강화 복음의 씨앗이 되는 이승환의 집터

 

제물포에서 믿기 시작하여 고향인 서사면 증산에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존스에게 선상세례를 받은 이승환은 과연 강화 선교의 '발판'이었다. 존스는 아직은 선교사에게 문을 열지 않는 강화에 제물포교인 이명숙을 전도인으로 삼아 파송하였으며, 이명숙은 증산동 이승환의 집을 거점으로 하여 강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서 강화의 첫 감리교 신앙 공동체가 탄생되었다. 바로 이것이 '서사교회'(西寺敎會), '교항교회'(橋項敎會),'교산교회'(橋山敎會),'양사중앙교회'(兩寺中央敎會),등으로 불리다가 현재 '강화교산교회'(江華橋山敎會)로 불리는 강화 첫 감리교회의 시작이다.  

 

 강화 복음의 씨앗이 되는 이승환의 집터

 

교산교회 두번째 예배당 터, 김상임 전도사 생가 인근이다.

 

교산교회 두번째 예배당 터 

 

강화 기독교 선교역사


보편적으로 한국 기독교의 역사가 그러했지만 특히 강화의 경우에는 복음의 수용과 전파과정에서 강화 토착인들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역할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외지의 선교사나 전도인들이 불모지 강화에 나타나 복음을 전해서 교회가 설립되기보다는, 강화 사람이 외지에 나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고향을 복음화시키려는 의지에서 복음 전도가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감리교회의 강화 선교 개척


한국 교회의 역사는 우리 민족과 기독교 복음이 만나서 이루어진 역사다. 민족의 역사 전통과 교회의 역사 전통이 한데 어우러져 새로운 역사 전통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이 기독교(개신교) 복음을 받아들인 19세기 말은 민족의 시련과 수난기였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다른 어느 지역보다 이러한 민족의 시련과 수난의 역사를 뼈저리게 체험했던 강화에서 기독교 복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강화 기독교(개신교) 복음 선교는 거의 같은 시기에 성공회와 감리교에 의해 개척되었다.성공회의 강화 선교는 1893년 7월에 워너 신부가 갑곶나루에 거처를 마련하고 고아들을 모아 가르친 것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강화에 있던 조선수사해방학당 교수로 영국인 교관들이 와서 활동하고 있어서 영국성공회 선교사들이 관청과 주민들로부터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과 20여년전, 신미양요를 통해 미국인들과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던 강화 사람들은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강화의 감리교 선교는 선교사들이 아닌, 토착 교인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것도 가오하의 정치. 문화.행정 중심이었던 강화읍에서 시작되지 않고 강화 변두리, 서북해안 작은 마을 시루미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강화 선교는 급속한 속도로 강화 전역에 확산되었으니, 강화 초기 교인들의 적극적인 복음 수용과 전도활동의 결과였다.


1. 미감리회의 강화 선교

<江都誌>는 강화 감리교회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西曆 一千百九十八年에 合衆國 宣敎師 趙元時君이 自甲串津으로 至南門하니 守門將이 抗拒不人하는지라 回程하야 本都 東北沿岸으로 船行하야 到西寺面 橋項洞하야 金氏家族의게 傳道하야 該地에 敎會堂을 創立하고 敎務를 梢梢壙張하니 東으로 月串, 南으로 砂器里, 東幕, 西으로 注文島까지 敎旗가 遍揚하니라"

연도나 구체적 사건 서술은 교정 되어야 하지만 이 진술은 강화 감리교회 시작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첫째, 미감리회의 존스 선교사가 처음에는 갑곶을 통해 강화읍으로 바로 들어가려 했으나 지방 행정당국의 저지를 받고 실패 했다는점, 둘째, 결국 강화 선교는 강화읍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북쪽에 위치한 서사면 교항동에서 시작되어 그곳으로부터 남쪽으로 확산되었다는 점, 셋째, 교항동의 '김씨 가족'으로 불리는 토착 교인의 개종과 입교로 강화 선교가 가능했다는 점 등이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강화 선교는 선교사들의 입성과 활동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강화 북부 토착 교인의 입교와 전도활동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기독교 선교의 시작이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복음 수용과 전도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그러한 대표적인 예를 강화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같은 사실은 선교사들의 강화 접근 실패 과정과 함께 강화 토착 교인 출현 과정을 살펴보면 확인된다. 강화를 한국성공회의 '이오나'로 삼고자 강화에 강력한 선교단을 파송했던 영국성공회는 이미 1893년 봄에 코프 주교가 강화를 방문하고 선교가능성을 파악한 후 그해 7월에 워너 신부를 갑곶나루에 정착시켰다. 같은 무렵 미감리회에서도 강화 선교 가능성을 모색하며 인천과 서울을 왕래하는 뱃길 중에 강화를 방문하였다. 특히 1892년 8월에 열린 미감리회 한국선교회 연회에서 인천(제물포)구역 담임으로 임명받고 인천으로 거처를 옮겨 본격적인 서해안 선교에 착수한 존스(G.H.Jones)는 이미 노병일, 김기범, 이명숙, 백헬렌 등 한국인 전도자들에 의해 마련된 선교 터전을 바탕으로 하여 그 영역을 넓혀갔다. 그 과정에서 강화는 그의 강력한 선교개척 희망지역이었다. 당시 한국 선교를 관리하고 있던 스크랜튼은 이미 1892년 말 이전에 존스가 강화 여행을 시도 하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스크랜튼이 본국에 보낸 1892년 12월 21일자 서한이다.  "존스 형제는 최근에 제물포로 여행하면서 강화에 들렀습니다. 강화는 [한]강어구에 있는 큰 섬입니다. 그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강화는 80평방마일 되는 곳에 인구 7만이 살고 있습니다. 이 섬은 선교사들에겐 처녀지(Virgin Soil)입니다." 그렇다면 존스의 1차 강화방문은 1892년 12월 21일 이전에 이루어 졌다는 말이다. 스크랜튼이 '최근에'(recently)라는 말을 쓴 것으로 미루어 1892년 11-12월 경에 이 여행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존스의 여행보고를 바탕으로 해서 스크래는은 미국 선교본부에 1893년 선교보고 상황을 써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전망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물포와] 이웃해 있는 섬인 강화에는 7만명 주민이 있는데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충동하고 있습니다. 강화를 얻게만 된다면 우리에겐 값진 보화가 될 것입니다. 사실 발판은 이미 얻어 놓았습니다."  여기서 스크랜튼이 말한 '발판'(a Foothold)이 정확하게 무었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선교기지 확보를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으나 나름대로 강화선교 가능성에 대한 확실한 담보를 얻었음을 암시한다. 후에 살펴보겠지만 이 '발판'이 바로 서사면의 '토착 교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아무튼 존스는 이미 1892년 12월 이전에 강화 여행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 여행이 곧바로 강화선교와 연결되었다는 흔적은 찻아볼 수 없다. 오히려 앞서 <江都誌>에서 언급했던 바, "趙元時君이 自甲串津으로 至南門하니 守門將이 抗拒不人하는지라"는 선교사 입성 거절을 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존스 자신이 1910년에 미감리회 한국선교15주년을 기념하여 펴낸 <한국 선교 상황>(The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에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내용이 나온다. 우리 [미감리회]선교사가 제물포 사업을 개척하기 위해 내려갔던 그해에, 그 [선교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기 위해 강화를 방문했는데, 강화는 인구 5만 명으로 한강 삼각지, 제물포와 서울 중간에 위치한 큰 섬입니다. 그는 어느 날 갑곶이라 불리는 곳에 상륙하여 3마일 정도 떨어진 도성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성문을 지키고 있던 수비병이 그를 정지시키고 최고 책임자(강화 유수)의 허락없이는 들여보낼 수 없다고 가로막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안으로 들어가 거리를 걷고 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청원서를 써 보냈습니다. 그러나 최고 책임자는 청원서를 손에 들고 나와서, '나는 당신네 서양 선교사들이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소. 우리 한국 사람들은 당신들이 가져 온 것을 원하지 않소. 당신이 이 섬을 빨리 떠나면 빨리 떠날수록 우리는 좋을 것이며, 당신이 이 섬을 빨리 떠나면 빨리 떠날수록 당신한테도 좋을 것이요.' 하며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이처럼 거부당한 선교사는 한강으로 다시 돌아와 이교도가 운영하는 여관에서 외롭게 이틀 낮 밤을 지낸 후 제물포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그 선교사'는 존스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존스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갑곶을 통해 강화에 상륙해서 남문을 거쳐 성안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강화 유수가 직접나와 거절하는 바람에 결국 갑곶나루 여관에서 이틀간 묵다가 제물포로 철수하였다. 그렇다면 존스의 첫 강화 접근 시도는 실패로 끝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스크랜튼이 존스의 강화 여행 보고를 하면서, "강화에 '발판'을 얻었다"라고 진술한 근거는 무었일까? 결국 이 '발판'은 앞서 <江都誌>에서 증언한 서사면 교향동에 있었다.


2. 강화의 첫 세례교인


 <江都誌>는 존스가 강화 남문에서 입성을 시도하다가 거절당한 후 다시 뱃길로 북쪽으로 올라가 강화도 서북부에 있는 '서사면 교항동'으로 가서 '김씨 집안'에 전도하여 선교 기반을 마련했다고 증언하였다. 이같은 사실을 증언하는 다른 자료가 있다. 1919년 7월, 존스가 별세했을 때 그의 생애를 기술한 기사가 <基督申報>에 실렸는데, 그 속에 강화 선교에 대한 증언이 있다.  "뎌간에 특별한 일은 죠목사가 강화셩에 드러가서 젼도하려고 셩 남문 밧게 안져셔 강화류수의계 통지한즉 류수가 완고하고 거만된 마음으로 드리지 아니한즉 조목사가 온유한 태도로 겸손히 물너가 셩밧길로 도라 강화군 셔사동리에 당도한즉 외인의 비방함과 핍박이 심함으로 그 동리에 쳐음 밋은 형제 몃 분을 다리고 배를 타고 바다 우에셔 세레를 베프럿스며"  이 기록은 존스가 강화성 남문에서 강화 유수에게 배척당한 일과 서사면 교항에 상륙하였다가 배척받고 그곳 '토착교인'을 배로 불러내 세례를 베푼 일을 시차없이 연결시키고 있으나 두 사건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우선 앞에서 1910년 존스 자신이 쓴 글에서, 존스는 남문에서 배척받은 후 갑곶 여관에서 이틀 머물다가 제물포로 철수하였다고 진술하고, 이어서 "토착 전도인을 한명 보내 복음 소식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고 기록한 것으로 미루어 존스가 곧바로 서사면으로 올라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서사면을 방문한 것도 존스가 무작위로 그 곳을 방문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곳에 세례받기를 원하는 교인이 있어 그의 요청을 받고 서사면을 방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존스의 서사면 방문을 이끌어 낸 '토착교인'이 내리교회 역사에서 나타난 '이승환'이다. 다시 신홍식의 증언을 들어보자.  "그러나 [계원] 五十人中에 信者 二人을 엇엇스니 一人은 리승환이라 조원시氏가 江華島에 傳道하랴고 數次 가 보앗스나 傳道할 기틀을 엇지 못한 것은 丙寅洋擾에 法國 美國 兵船이 드러와 接戰하든 곳이라 西洋人을 보면 원수로 녁이고 돌로 치려하며 迎接지 아니하니 傳道할 수 업게 되엿는대 이 때 맛참 리승환氏가 自己 故鄕 江華 西社로 도라가니 그로 인연하여 江華에 傳道門이 열니며 그러케 굿세든 人心이 漸漸 감화되여 全都에 敎가 傳派되엿더라"  인천 제물포 교회(현 내리교회)초기 전도인 김기범, 이명숙이 인천 사람들의 (교회에 대해)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 계를 조직했다가 깨지는 바람에 오히려 곤경에 처했는데, 다행히 계원 50명 가운데 교인 두 명을 건질 수 있었고 그 중 한 명이 강화도 서사 출신 이승환이었던 것이다. 이승환은 인천에서 처음 복음을 접하게 되었고 그를 통해 강화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으니, 스크랜튼이 언급한 강화 선교의 '발판'은 이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 것을 알 수 있다. 1910년대 초부터 인천을 거점으로 하여 서해안 지역 여성 선교를 주관했던 헤스(M.Hess)는 '강화의 첫 세례교인'에 대해 보다 자세한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제물포에서 술집을 경영하던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은 하였으나 자기 직업 때문에 세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몇 달 지난 후 존스 박사는 강화 북부에 있는 서사로 와서 죽을 날이 멀지 않은 한 노파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노파의 아들이 바로 술집 주인이었는데, 그는 은밀하게 술집을 정리하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보다 건전한 방법인 농사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었다. 아들은 늙은 어머니에게 성경 말씀을 들려 주었고 이번에 세례 요청을 한 것도 어머니를 위한 것이었지, 그 자신은 아직도 세례를 받을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여겼다. 기독교를 미워하는 주민들의 난폭한 반대로 tk 세례예식은 마을에서 거행되지 못했다. 아들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존스 박사가 배에서 기다리고 있는 해안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은빛 찬란한 달 밤에 한 노파의 기쁨의 잔이 넘쳤으니, 이는 죄 씻음 받은 기쁨의 잔이었다. 그녀는 강화의 겨자씨로 불리었다."  우리는 이 글에서 이승환의 직업이 술장수였다는 것과, 그가 제물포에서 믿음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으나 직업상 세례를 받지 못하였고, 직업을 정리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우선 늙은 어머니에게 전도하여 믿게 한 후, 어머니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존스에게 요청하여 존스의 서사 방문이 이루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그때에도 서사 주민들의 반대가 심해 존스가 마을에 상륙하여 세례를 베풀지 못하고 밤중에 이승환이 어머니를 업고 교항마을을 거쳐 뒤펄개를 지나 존스가 있는 배에 올라 세례예식이 베풀어졌다는 사실등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이 그 유명한 강화의 '선상세례'이고, 강화의 첫 세례교인은 이렇게 해서 배출되었다. 해스보다 앞서 인천 선교를 개척했던 밀러는 또 다른 글에서 강화의 처음 세례에 대해 보다 자세한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존스 박사는 강화 선교사업을 시작할 때 처음부터 성공하리라는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첫번째로 세례받은 인물은 나이 많은 여인이었는데 그녀의 아들은 제물포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녀도 아들에게서 복음을 듣고 세례받기를 열망했다. 섬 주민들 사이에등에 업고 긴 뻘을 건너 배에 올랐고 거기에서 달빛에 예문을 비춰 읽는 가운데 여인이 세례를 받았다. 이러한 존스 박사측 행위를 보고 한국인들이 감명받아 그들은 존스 박사에게 마을로 들어와 대화를 나누자는 요청을 하였다. 이 방문으로 김씨와 그의 가족 전체가 개종하게 되었다."  이 자료는 서사 주민들의 처음 반응을 보다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으며, 그 반대의 주역이었으나 후에 개종하여 가족 전체가 교인이 된 '김씨'라는 양반에 대한 흥미있는 증언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양반 '김씨'는 바로 <江都誌>에서 언급되었던 서사면 교항동의 '김씨가족'을 의미하며 이승환과 함께 서사면 복음선교의 씨앗이 된 김상임(金商壬)을 말한다. 김상임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3. 시루미 신앙 공동체


제물포에서 믿기 시작하여 고향인 서사면 증산에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존스에게 선상세례를 받은 이승환은 과연 강화 선교의 '발판'이었다. 존스는 아직은 선교사에게 문을 열지 않는 강화에 제물포교인 이명숙을 전도인으로 삼아 파송하였으며, 이명숙은 증산동 이승환의 집을 거점으로 하여 강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서 강화의 첫 감리교 신앙 공동체가 탄생되었다. 바로 이것이 '서사교회'(西寺敎會), '교항교회'(橋項敎會),'교산교회'(橋山敎會),'양사중앙교회'(兩寺中央敎會),등으로 불리다가 현재 '강화교산교회'(江華橋山敎會)로 불리는 강화 첫 감리교회의 시작이다. 1917년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橋山敎會沿革>은 교회 시작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一八九四年 兄弟 李城完氏와 그의 母親이 主의 福音을 듯고 믿어 兩寺面 橋項里 뒷바다에서 宣敎師 趙元時氏에게 洗禮를 받음으로 福音의 傳播되기 始作하니라...仝年 長老 趙元時氏의 派送으로 仁川敎會 勸師 李明淑氏가 本郡 증산里에 往來하여 李聖完氏 自宅에서 四五人 兄弟 姉妹가 禮拜하다. 仝年 六月에 至하여 男女敎友가 五十餘名이 되니라"   이 글에서 언급되고 있는 '李聖完'은 지금까지 살펴본 '이승환'을 의미하며, 강화의 첫 신앙공동체가 이승환의 자택이 있는 증산(시루뫼) 마을에서 시작되었음을 밝혀준다. 그러나 '1894년'으로 표기된 것은 수정을 요한다. 다른 자료는 이미 1893년에 증산에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음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우선 1893년-1894년 당시 한국 감리교 선교를 관장하고 있던 스크랜튼의 증언이다. 그는 1893년 12월 12일, 본국 선교본부에 보낸 서한에서 존스와 함께 강화에 다녀온 결과를 보고하였다.  "강화에서는 연회 이전에 한 가족 전체가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 [사업] 개척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하루 밤낮을 지냈으며 그 주변 이웃들과도 만났는데, 그들 중 몇 명은 [기독교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곳은 시루미 북쪽에 있습니다.  남쪽 항구에 있는 여관 주인은 이미 잘 알려진 인물인데, 그는 이번에 학습인으로 받아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우리는 아침 저녁으로 기도회를 가졌고 조사를 그 곳에 두어 그를 더 가르치도록 조처하였습니다. 이 섬을 여행하는데 모든 시간을 바칠 수 있는 조사가 필요한데, 현재 우리에겐 1894년도에 이러한 조사를 채용할 재정이 없습니다." 이 자료를 통해 1893년 8월 31일에 열린 한국 선교회 연회 이전에 이미 강화 '시루미'(증산)에서 개종하고 세례받은 한 가족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고, 강화읍 남문으로 통하는 갑곶나루의 여관집 주인이 학습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천과 강화 선교 책임자 존스도 1894년 선교 보고에서 전 해의 사업을 요약하는 중에, "제물포 사업은 아직은 두 거점에서 사업이 확장되어 가고 있는데 제물포항과 강화도에 있는 시리미가 그 거점입니다"라고 보고한 것도 '시루미' 개척이 1893년에 이루어졌음을 증언하는 자료다. 또한 존스 부인의 1894년 보고는 '시루미'사업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제물포에서 약 50마일 떨어진 강화라는 섬의 시루미에서 작은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봄에 그곳 마을을 세차례 여행하였으며 헬렌은 작년 한해동안 여섯차례 방문했습니다. 그곳 사업은 아주 고무적이며 인근 마을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세례받은 여인이 6명, 아동 세례 5명이 있는데 이들이 비록 무식한 부류 사람들이나 자신들에게 비추인 빛에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하여 시루미에 강력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과 함께 존스 부인과 백헬렌이 주도하는 여성 선교사가 큰 성과를 얻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답보상태에 빠진 인천 선교 상황에서 방물장수로 위장 침투해 들어가 인천 선교의 전기를 마련했던 전도부인 백헬렌은 강화에도 1년에 여섯 차례 여행하며 복음을 전해 1894년 이전에 여성 세례교인 여섯 명을 얻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존스 부인의 1895년 보고는 지속적인 '시루미' 사업의 내용을 증언한다. "사업을 개척한 두 선교 거점이 있으니, 제물포와 강화의 시루미입니다... 시루미에서는 한 여인이 교적부에서 제명되었으나 다른 한 여인이 추가되어 교인수는 처음과 변동없습니다. 지난 1년동안 저는 시루미를 방문할 수 없었지만 제 조사인 헬렌은 다섯 번 여행하여 모두 10주간 그곳에 머물면서 교인들을 가르치고 다른 마을들을 방문하여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헬렌의 보고로는 그곳 사업이 날로 번창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보고들을 종합해 볼 때 시루미 사업은 남성보다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첫 세례고인이 이승환의 어머니였다는 사실, 인천 전도부인 백헬렌의 열성적 전도활동 등에서 시루미 신앙공동체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즉 존스 부인의 표현대로 시루미 교인들은 사회적으로 '무식한' 부류의 사람들이었으나 신앙적 열정에 사로잡힌 토착인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강화 감리교는 당시 사회 상황 속에서 소외당하고 억눌려 살아온 '민중'들과 접촉하는 것으로 선교를 시작하였다. 강화선교의 '발판'이 된 이승환의 직업(술집 주인), 학습을 자청한 갑곶나루 여관집 주인의 신분과 존스 부인이 '무식한 부루'라고 표현한 처음 여성 세례교인들의 신분 배경에서 감리교 선교의 민중지향적 성격을 읽을 수 있다. 이는 강화의 지식인 계층, 양반과 지방 토호를 선교 대상으로 삼았던 성공회의 선교 방법과 대비를 이룬다. 그렇다고 감리교의 강화 선교가 민중 계층에만 제한되었다고 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은 무식자와 유식자, 가진 자와 가난한 자의 공존,공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교회는 모든 계층, 모든 부류의 참여와 나눔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를 구현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교회는 민중의 참여와 함께 지식인, 지도급 인사들의 참여를 요구한다. 강화 감리교회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균형있는 신앙 공동체로 발전하였다. 그러한 균형과 조화는 이미 서사면 최초 감리교 신앙공동체에서 나타났으니, 그 계기는 교항동의 유력한 양반 김상임과 그의 가족들의 개종을 통해 이루어졌다.


4. 교항교회 설립


 앞서 살펴본 <橋山敎會沿革>은 교회 시작을 진술하며 '이성완'(이승환) 모자의 개종과 이명숙의 전도활동을 진술하며 같은 해 사건으로 김상임의 개종과 전도활동을 언급하고 있다.  "李聖完氏가 趙元時 宣敎師의 指導를 받어 美國聖書公會 賣書人이 되어 福音을 傳할 時 兄弟 金商林氏가 서울에 往來中 主를 믿고 姉妹 許조스편氏가 主를 믿는지라"  이승환 모자의 세례와 김상임의 개종을 같은 시기로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밀러 부인의 증언에 따르면, 이승환의 고향 집에서 세례를 거행하지 못하게 한 일물이 '김씨'라는 유력한 양반이었으나 오히려 존스 목사의 사려깊은 행동에 감명받고 존스 목사를 초빙하여 대화를 나눈 후 개종한 것으로 되어 있어 이승환 어머니의 세례와 김상임의 개종을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다른 여러 자료에 의하면, 김상임의 개종 및 세례를 이승환 어머니 세례와 시차없이 연결시키기보다는, 김상임도 다른 통로로 기독교를 접하고 탐색하다가 이승환 어머니 세례와 그것을 계기로 선교사와 매서인들이 시루미에 자주 등장하게 되면서 직접 선교사를 만나 대화한 후 개종을 결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김상임은 서사면 교항에 근거를 둔 전통 양반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에 전념하여 과거 급제를 통해 입신출세를 도모하던 전형적 유학자였다. 나이 열 다섯되던 해부터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번번히 낙방하다가 사십(1887년)에 비로소 강화부 승부초시가 되었다. 이후 '김초시'는 벼슬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고향인 교항동에 서당을 차리고 후학을 양성하며 지역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차에 이승환을 통한 감리교 선교가 바로 이웃 마을인 '시루미'(증산)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1902년 김상임이 별세하였을 때 그의 별세 기사와 함께 약력을 기록한 <신학월보>는 김상임의 개종 과정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김 형뎨는 환족의 자손인대 죠션고적 풍쇽대로 글일기와 과거보기로 힘스고 셰월을 보내는거슨 아람답고 큰 사업으로 알앗더니 하로날 우연히 예수교 젼도하는 사람을 맛나니 비로소 진리드럿나니라 그러나 젼도하는 목사 하나 맛나여야 밋기를 쟉졍하겟노라 하여 이에 목사를 맛나니 그 권면하는 말을 깃부히 듯고 예수 밋기를 시쟉하엿난지라"  앞에서 살펴본 <橋山敎會沿革>이나 <신학월보> 기록은 김상임이 선교사(목사) 존스를 만나기 전에 이미 기독교에 대한 정보를 듣고 스스로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의 정체를 알아보려는 결심을 하고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을 왕래하며 알 게 되었든지, 아니면 이명숙, 이승환 등 매서인을 통해 알 게 되었든지, 선교사와 교회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던 그는 직접 선교사를 만나보고 개종을 결심하였다는 말이다. 따라서 존스 선교사를 만나기 전에 나름대로 기독교에 대한 긴 탐색과정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김상임이 존스를 처음 만난 때가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신학월보>기록이 1894년 8월 6일에 존스에게 학습받고, 그해 10월 8일에 세례를 받았으며, 그해 12월 12일에 만진례를 받은 것으로 정리하고 있고 <橋山敎會沿革> 역시 김상임의 개종, 세례를 '1894년' 사항으로 정리하고 있어 그가 존스를 만나 세례를 받은 것은 1894년 무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상임의 개종은 그가 살고 있던 '교항'마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역유지이자 학자로 영향력있던 '김초시'의 개종은 김씨 문종의 비판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지만, 교항 주민들의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을 씻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교항의 사대부들 가운데 교인들이 생겨났으며, 이는 '무식한' 부류의 여성과 아이들로 구성된 시루미(증산) 신앙공동체와 다른 성격의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다. 처음에 김상임을 비롯한 교항 마을 교인들은 증산에 있던 이승환의 집에가서 예배에 참석 했는데, 교인수가 늘어 장소가 비좁아 별도 예배처소를 마련하기로 하였다.  이에대한 <橋山敎會沿革>의 증언이다. "於是에 禮拜堂을 建立키로 捐補金 四十원을 거두니 橋項里에 草家 十二間을 賣出하여 敎會를 設置하다"  예배당 건축기금 40원을 마련하는 과정이나, 새 예배당의 위치가 '교항'으로 정해지는 과정에서 김상임을 비롯한 교항 교인들의 입장이 크게 반영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로서 서사면의 첫 감리교 신앙공동체는 시루미에서 '다리목'을 건너 김상임의 집 뒤쪽 교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예배당 마련 과정을 스크랜튼은 1896년 연회 보고를 통해 자세히 밝히고 있다. "강화에서는 아주 흥미있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올해 저는 로드와일러(Rothweiler) 양과 함께 그곳을 한번 방문하였습니다. 저는 방문하는 길에 성인 10명과 어린이 1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예배당으로 쓰려고 낡은 집을 한 채 구입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런 의견에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만 상황을 고려할 때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낡은집을] 사용에 적합하게 개축하는 데는 돈이 곱으로 들 것입니다. 그들은 이번 연회에서 이 문제를 논의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후로 계속 도움이 필요한 지방 교회들이 나올 것인데 이에 대한 우리 입장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에 관해서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들을 도와주어야 할까요?"  강화 교인들이 헌금 40원으로 구입한 교항리 초가집은 수리비가 곱으로 들어야 할 낡은 집이었던 것이다. 스크랜튼은 기다렸다가 보다 건실한 예배당을 마련하도록 권면했으나 당장 집회 장소가 필요했던 강화 교인들은 자체 헌금을 모아 낡았지만 12칸짜리 초가집을 마련했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그 수리비 지원 여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강화 교인들은 선교사들의 지원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애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1898년의 존스 선교 보고에 '교항교회'교인들이 '예배당당을 마련하는 데 이미 120달러를 사용했다'고 보고하고 있는 것이라든지, 1899년 보고에 교항 교인들이'자립헌금으로 44달러 10센트를 모아 그중 5달러는 전도인 봉급으로 지급하고 있다'고 한 것들이 강화 교인들의 주체성과 자립에 바탕을 둔 선교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강화 감리교회는 처음 출발부터 강한 자립의지를 보여 주었다. 그렇게 해서 설립된 교회는 선교사에 의존하는 교회가 아닌 자치교회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이러한 자립과 자치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강화 교인들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복음 수용과 전파라는 자전의 역사가 있었다. 강화는 이러한 3자선교의 구체적 실천장이 되었으며, 이후 강화 감리교회 역사를 규정하는 특징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하여 1893년 8월 이전에 서사면 증산(시루미) 마을의 이승환 모자가 세례받고, 그곳으로 이명숙 권사가 전도인으로 파송되어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된 강화 첫 교회는, 1894년 이웃 교항마을의 '김초시', 김상임과 그 일가의 개종으로 큰 힘을 얻었고, 교인들의 자체 헌금 40원으로 교항에 12칸 초가를 구입하여 예배당을 삼게 됨으로서 완전한 교회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하여 증산 마을의 '여성과 아이들'을 중심한 민중 계층과 교항 마을의 '양반 지식인' 계층이 함께 어울리는 아름다운 교회를 이룩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설립된 교항교회는 이명숙, 이승환, 김상임, 백헬렌등 한국인 전도인들의 헌신적인 전도활동과 존스 목사 부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짧은 시일 안에 강력한 교회로 자리잡게 되었으니, 1897년 2월 10일자 <조선크리스도인회보>는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강화 서사면 교항동에 사년전브터 서국 목사 쫀스씨와 죠션 교우 리명슉씨가 비로소 하니님 도를 힘써 젼파하야 작년에는 회당을 셜립하고 쥬일마다 례배하는 교우가 백여명인데 그중에 세례밧은 사람이 남녀로쇼 병하여 삼십륙명이요 학습인이 아해까지 합팔십여명이라 쫀스 목사는 재작년에 고국에 도라가셔 아즉 나오지 아니하엿는대 강화 교우들이 그 목사 나오시기를 형뎨가치 기다린다더라"


강화 교산교회


1. 교회설립과 시대적 배경


한반도 서해안 중심부에 위치한 우리 강화도는 그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반만년 역사 속에 민족적 수난이 있을 때마다 나라를 지켜온 최후의 보루역할을 해 왔다. 또 강화는 각 시대마다 역사적 산 증거로서 많은 유적과 유물을 간직하고 있다는 데서 이 나라 역사의 축소판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자연적 역사적 여건 속에서 이미 100여년전부터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여 이 지역이 새롭게 거듭날 수 있었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같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우리 양사지역 교산교회가 1893년부터 최초로 복음을 받아들여 교회를 세움으로서 수많은 전도의 사역자들을 배출해 냈다는 데서 강화 개신교의 '모교회'라고들 한다. 정치적 쇄국주의와 보수 유학자들의 무서운 핍박속에서도, 자진해서 복음을 들여와 교회를 세우고, 목숨을 건 전도를 한 초기 교산교회 창설자들은 강화지역 교회사 차원에서 뿐 아니라 오늘의 개신교인 모두가 신앙의 사표로 삼아 마땅하다고 본다. 복음의 불모지에서 가난과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를 전한다는 것은 분명 상상을 초월한 고난의 길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의 상황으로 감시의 눈이 많은 강화 읍내에는 성경을 들고 접근할 수 조차 없었기에, 이곳 외진 해변가 양사 지역에 먼저 복음의 씨가 뿌려졌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이 어려운 사역을 시작한지가 벌서 1세기가 되었다. 이 뜻깊은 시기를 맞이하여 현실속에 안주해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또다른 깨달음과 사명을 주실 것을 믿는다. 이러한 믿음에서 우리 강화 교산교회가 걸어온 지난 100년 간의 발자취를 뒤돌아보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해 보자는 의미에서 이 교회 연혁을 정리해 보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 이곳 강화도는 고려조 이후부터 계속 외세와의 갈등 속에 살아왔다. 특히나 조선조 말엽에는 프랑스 함대와 접전해 병인양요(1866)를 치렀고, 미국 함대와 접전해 신미양요(1871)를 치룸으로서 서양인과 그들 종교에 대해서는 무서운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많은 역사 기록들은 "당시 강화도민들은 서양 사람만 보면 돌로 치고 복수를 하려는 험악한 상황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시대양상에 불과할 뿐 하나님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역사하고 계시었다. 오히려 서양인과 기독교에 대한 깊은 오해를 풀어주시고 이곳을 복음의 전초기지로 삼으셨던 것이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섭리일 뿐 인간의 힘으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만약에 강화도민들이 13세기의 삼별초적 배타성을 발휘해 기독교를 박해했더라면 당시 인천, 강화지역에 작은 교두보를 마련하고 있던 초대 교회는 여지없이 붕괴되고 말았을 지도 모른다. 강화도민의 회심과 복음 수용, 이것은 분명 한국에서 빛어진 "바울의 다메섹 사건"으로 보아도 좋을 것 이다. 실로 강화 땅은 한국 개신교 선교의 한 관문으로서 성별된 땅이요, 축복받은 땅이라 여겨진다. 이번 강화선교 100주년을 기해 하나님의 더 크신 사랑과 은총이 모든 교회 위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2. 교산교회의 창립


가. 이승환 모자의 결신과 복음전래(1893년)

강화 지역에 예수의 복음이 전래되고 교회가 선 것은 대한 감리교의 모교회 격인 인천 내리교회에 의해서였다. 1885년 아펜젤러 목사가 인천에 상륙하자 인천 내리교회를 세워 놓았고, 1892년에 그의 후임으로 존스(G.H.Jones 조원시 趙元時 1988.5.9 서울도착) 목사가 부임해 왔다. 존스 목사는 내리교회에 부임하자 인접 도서인 강화지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고, 그 즉시 실천에 옮겨 강화 선교를 시작했으나, 강화 관.민의 냉대로 무위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때를 같이해 내리 교회 안에서는 전도의 방편으로 장조계를 조직한 바 있었으나 얼마 안 가서 계도 실패하고 교인도 잃고 말았다고 한다. 50명의 계원중 유독 이승환이라는 성도 한 사람만이 남아 계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이 이승환 성도는 강화 서사(양사)출신으로 제물포에 가서 술집을 경영하면서 내리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었다. 그리하다 보니 강화 고향에 있는 이승환의 어머니도 이들을 따라 예수를 믿게 되고, 믿음이 생기자 존스 목사에게 세례받기를 원하게 되었다. 이것은 강화 선교의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존스 목사는 한복으로 변장하고 야음을 이용해 또 다시 강화에 올 수 있었다. 우선 서사 뒤쪽에 배를 정박하고 사람을 동리로 보내 정탐케 했다. 그러나 동리에 들어와 세례식을 행한다면 그 집을 불사르고 큰 봉변을 당하리라는 제보였다. 소요를 원치 않았던 존스 목사는 이승환 성도에게 노모를 배로 안내하도록 하였다. 이윽고 아들은 어머니를 업고 상당한 거리의 개펄을 건너 존스 목사의 배에 올랐다. 마침 달밤이라 달빛을 이용해 예문을 읽어가면서 무사히 세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이것이 유명한 선교초기의 선상 세례요,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강화도에 최초의 복음의 씨가 떨어진 것 이다. 그 후 이승환 성도는 제물포의 술집을 정리하고, 고향 양사로 돌아와 보다 건전한 직업인 농사일을 하면서 전도에 힘썼다. 존스 목사는 가오하 양사를 당시 제물포교회와 함께 2대 선교 거점으로 보고 1893년 가을 이명숙 전도사를 강화 담당자로 파송하였다. 초기에는 교인 4-5명이 모여 이승환 자택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가정교회로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자 교인은 즉시 배로 증가해 10여명에 이르렀다. 이제는 하나의 어엿한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1893년 말에는 존스와 스크랜톤(W.B.Screanton, 시란돈 施蘭敦) 두 선교사가 이미 강화교산교회에 와서 유숙한 바 있고, 내리교회 백헬란 전도사는 6차례에 걸쳐 10주간을 머물면서 강화 전도에 힘쓰기까지 했다. 이렇게 해서 강화교산교회는 1893년을 교회 창립원년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창립된 다음 해인 1894년에는 이미 교항리에 초가 12간을 구입해 교회를 이전하게 되었다. 이승환씨는 그후 매서인이 되어 전도에 힘쓰다가 1898년에는 아펜젤러 목사로부터 강화 교산교회 계삭회 소속으로 권사 직분을 받는다. 술집 주인 이승환이 변하여 어엿한 권사님으로 존경받게 된 것이다. 이승환 권사는 더욱 전도에 열중했다. 주로 강화, 인천, 옹진지역을 중심으로 전도하다가 1901년 이후부터는 주로 영종, 삼목, 용유등 인근 도서를 돌면서 몇 개의 교회를 세운다음 1908년경에 영국 성서공회를 통해 이민해 가고 만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하튼 강화 지역 교회들은 이승환 권사를 통해 복음이 최초로 전래되었다는 데서 그의 공로를 오래도록 기리고자 하는 것이다.


나. 김상임 일가의 개종과 강화의 복음화(1893-1902)


서민층인 이승환 씨의 가족과 그의 동류인 부녀자들로만 구성된 초기 교산교회는 성장 부흥에 한꼐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 설립을 위해 이미 다른 측면에서도 역사하고 계시었다고 할 때, 교산리의 유력한 양반 김상임 씨가 바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인물이었다. 김상임씨는 1848년 강화 양사 출신으로 16세에 이미 동몽과의 과거를 보아 상을 받은 준재로 성균관에서도 수학한 바 있고, 40세(1887년)에 승부 초시에 합격한 이름있는 양반이었다. 그는 과거 공부를 위해 서울을 자주 왕래하면서 기독교인과 자주 접할 기회가 있었고, 또 적지 아니한 관심을 갖고 있는 터였다. 그러던 차 이승환 모친의 선상세례를 계기로 선교사의 사려깊은 행위와 헌신적인 열의를 보고 많은 감명을 받게 되었고, 선교사와 매서인들이 양사에 자주 드나들면서 직접 선교사를 만나 대화 할 기회를 갖게 되자 김상임씨는 혼연히 기독교로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김상임 씨의 개종은 그의 문중만이 아니라 강화지역 복음화를 위한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김상임 초시는 본래 성실하고 민첩한 분으로 기독교로 개종하자마자 주변의 비난도 개념치 아니하고 가신(家神)과 사당을 불사르고, 믿음과 말씀공부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이러한 김상임 성도의 적극적인 행보는 교산교회를 그 즉시 50명으로 부흥시켜 놓았고, 그와 친분있는 강화지역 지도급 인사들이 연이어 개종해와 강화 복음화는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져 갔다. 김상임 성도는 1894년 10월에 존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좀 더 믿음이 돈독해지자 1896년 5월부터는 교산교회의 담당자의 직분을 맡을 수 있었다.  1896년 홍우동에 교회가 설립되었을 때 교산 교회에서 수도한 박능일 씨가 담당자로 파송되었고, 이때 초신자로 종순일, 권신일 씨가 입교했다. 1898년에는 본토 전도사 직분을 맏아 무려 10여 곳의 교회(개교회와 가정교회를 포함한 숫자인 듯 함)를 다스리며 선교 사업에 열중했다. 1899년에 존스 목사가 인천 우각동에 한국 최초의 신학회를 개설하자 김상임 전도사는 김기범, 김창식, 최병헝, 이명숙 등과 함께 지방 전도사 8명중 한 사람으로 신학회에 적을 두고 강의를 들었다. 이때의 강사진은 노보을(魯普乙, W.A.Noble), 조원시(존스), 서원보, 아펜젤러 등 미국인 선교사들 이었다. 여기서 김상임 전도사는 한국 최초의 신학과정 이수자가 된 것이다. 또 1900년에 평양에 신학회가 개설되자 김상임 전도사는 김경일, 박능일, 권신일 등 강화인 5명을 데리고 2년급 전도사 과정을 이수했다. 김상임 전도사에 인도되어 결신 입교한 강화인들중 박능일, 김봉일을 중심한 지도급 인사들이 모여 "주안에서 하나되어 복음을 전파하자"는 뜻에서 이름 끝자를 모두 한 일(一)자를 넣어 개명하고 서로 의형제를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동참한 이들은 권신일, 종순일, 주선일, 허진일, 최족일, 박현일, 황도일, 제씨 등이며, 김봉일은 자기의 두 아들에게까지 은일, 환일로 개명시켜 놓았다. 이들 전도인들의 모임을 외지에서는 초대교회의 '강화 오 걸일:五 傑一'이라 칭하지만 실은 '오 걸일'이 아닌 '십 걸일:十 傑一'이 넘는 인원이 동참했고 그후 一자로 개명 결신한 분은 60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거의가 직접 간접으로 김상임 전도사를 통해 결신한 분들로 강화지역은 물론 서울, 경기 전 지역에 걸쳐 개척 전도인으로 크게 활약함으로서 초대 한국 개신교의 초석들이 되었다. 1900년 전후만 해도 한국 개신교가 복음의 거점을 확보한 곳이라고는 아직 10여곳에 불과했다. 또 이 무렵에는 예수교인에 대한 박해와 조소가 극심한 때였다. 이 같은 악조건 속에서 10여명의 십자가 군병들이 자진해서 대오를 짜고 나서는 기적같은 현상이 이곳 강화에서 이루어 졌다. 이들은 분명 하나님이 내세운 복음의 전초병들이었다면, 이곳 강화는 예수님이 당초에 제자들을 불러모았던 갈릴리 해변과 유사한 고장인양 싶기도 하다. 여하튼 그후 이들 <십 걸일>들은 주안에서 결의형제하고 나서 복음 전파를 행동으로 옮겼다. 1900년에 강화읍 잠두 교회가 설립 될 때에도 인도자는 역시 박능일씨이며, 초신자는 주선일, 허진일, 최족일, 김봉일 씨였다. 또 같은 해 교동교회가 섰을 때도 권신일 씨(1907년 목사 안수, 순위9)를 파송했다. 1905년 박현일 씨(1914년 목사 안수 순위 50)는 덕적도에 군인 신분으로 들어가 복무하면서 덕적 중앙교회를 세우고 초대 사역자가 된 후, 1909년에 도이명 선교사의 어학 선생으로 이임해 갔고, 그 후임으로 종순일(2대), 허진일(3대), 최족일(4대)목사 등이 연이어 덕적도에 들어가 교회를 개척한 사실이 있다. 종순일 목사는 1899년부터 강화 남부지역 선교를 시작해 1901년에 초지 부근에 기도처를 마련하고 피미교회를 세웠으며, 1903년 북도의 진축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 후 강화 길상면에서 전도를 해 선두교회(1904년)와 선두중앙교회(1907년)를 설립하고 초대 담임자로 시무한 바 있다(1916-1926년) 결국 교산교회의 박능일 목사에게서 전도 받은 종순일 목사는 일생을 강화, 옹진지역 복음화에 선도적 역할을 하면서 한 평생을 보낸 것이다. 이처럼 '一'자로 개명 결의한 위의 '십 걸일'들은 거의가 목사 장로 등 성직의 길을 걸었지마는 특히 권신일, 최족일(1915년 목사, 안수순위 60) 두 분은 3.1운동에 깊이 관련되어 수감 휴직되는 수난을 겪기까지 했다. 이처럼 강화교회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면서 많은 후배들을 양성해 온 김상임 전도사는 그 공로를 크게 인정받아 1902년 4월에 집사 목사 안수자로 내정되어 있었다. 한국 감리교에서 김기범, 김창식 목사에 이어 3번째로 목사 후보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영예의 안수식을 한달 앞두고 졸지에 세상을 뜨는 비운을 맞는다. 교회에 열병환자가 발생하자 그 환자를 심방한 후에 그 병에 감염되어 55세를 일기로 하나님께로 소천하고 만 것이다. "네 이웃을 위해 목숨을 버리면 그 보다 더 큰 것이 어디에 있겠느냐"하신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이행했다고나 할까. 사실 당시의 감리교단은 하나의 큰 일꾼을 잃은 것이 애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02년의 신학일보는 김상임 전도사의 사망소식과 아울러 생애 선교업적등을 무려 3페이지에 걸쳐 소상히 보도해 주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그분의 교계 활동이 어떠했던가를 가히 짐작케 하고도 남음이 있다.


3. 고난속에 성장해 온 교회(1903-1970)


1903년 본 교회는 김경일 씨가 서구역 전도사가 되어 1907까지 순행시무하게 되고, 김상임 전도사의 차남 김우제 씨는 읍구역 제 2대 전도사로 파송되어 갔다. 1906년부터는 김상임 전도사의 장자인 김홍제 권사가 전담하여 교회를 처리해 갔고 전도사로는 방족신, 조내덕 양씨가 차례로 순회하였다. 이 때에 손승용씨가 읍구역 제 4대 전도사로 파송되면서 본 교회는 읍구역으로 편입되어졌다. 이 때까지 부임해 온 감리사로는 시란돈(스크랜톤 1900년 한국 선교지방 감리사), 조원시(존스 1888년 5월 9일 서울도착, 1901년 한국 서지방 감리사), 기이부(奇怡富 케이블 able,Elmer M. 1899년 9월 29일 서울도착, 1905년 한국 서지방(인천, 부평, 강화, 교동, 남양, 황해 및 연안구역 등) 교역자는 모두 8명(목사 1)에 불과했다. 1914년 한국인 최벙헌 목사(1902년 5월 18일 서울에서 모인 미감리교 선교연회에서 무어감독에게 집사목사의 안수례를 받음)가 서지방에 부임해 왔으나, 이 때는 일제의 핍박 속에 교회가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침체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1915년에 김홍제 전도사와 그의 부인 하덕신 씨가 깊은 영적 체험을 함으로서 오히려 교인수가 증가할 수 있었고, 제 2차 초가 8간의 예배당을 증축하여 교회의 면모를 새롭게 해 놓았다. 1916년에 벙커목사(1886년 7월 4일 서울에 도착)와 김유순 목사가 본 지방순회 목사가 되고, 김봉일 전도사와 그 부인 허나오미 권사가 수시로 본 교회를 왕래하여 대 예배와 사경회를 인도하자 교회가 부흥해 교인수가 70여 명에 이르렀다. 1917년 에는 읍내교회의 박봉래 목사가 본 교회 언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자료를 수집해 '기독교 대한감리교 교산교회 연혁'을 편집해 놓았다. 그는 연혁 서두에서 "대개 기독교회가 서울에서 시작하여 인천에 설립되고 강화에 본 교회가 설립 된후 전도(全島)에 전파되니라"라고 전제하고, 그 당시까지의 교회 연혁을 개괄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다. 그 후 본 교회 담당자로 시무한 바 있는 신응균 목사가 1970년 2월에 이것을 재 편집해 놓고 다른 곳으로 이임해 감으로서 오늘날까지 귀한 교회사 자료로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1930년에는 남북 감리회가 통합됨에 따라 본 교회는 '기독교 대한 감리회 강화구역 교산교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1930년대 이후 교회가 소강상태에 있었으나, 1950년에 박승도 전도사가 연회로부터 파송되고, 구역이 또 다시 나뉘어 '중부연회 강화지방 양사구역 교산교회'로 개편되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었으나, 뜻밖에 6.25동란의 비극을 맞고 말았다.  수복이후 다시 부흥을 가져와 신도수가 증가해 90명에 이르렀다. 1956년 에는 안광남 전도사의 주선으로 교단 본부로부터 100만원의 건축보조금을 받아 건축 자재를 구입할 수 있었다. 1958년 최창묵 목사가 부임한 후 김용기 권사가 교산리 산 201번지의 대지를 기증(1,320평중 1,000평은 52만원에 매입하고 320평은 기증받음)하자, 1959년 4월 김봉기 장로를 기성회장으로 정초식을 거행하였다. 온 교회가 2년간에 걸쳐 예배당 건축에 전력하던 중 교회가 거의 완공될 무렵 담임목사와 김봉기 장로 그리고 김정기 권사가 동시에 교회를 떠나게 되어 교인들은 아쉬운 작별을 하게 되었다. 1961년 신응균 전도사가 부임하면서 예배당을 완성하고 봉헌식을 올렸다. 1963년 덕하리에 기도처를 설치하고, 교인 일부가 분리하여 교회를 개척해 나갔다. 1964년에 17평의 주택을 건립하고, 1968년에는 최윤영 권사를 기성회장으로해 37평 규모의 교육관을 1년에 걸쳐 완공해 놓았다. 1970년에는 교회 옆의 밭 234평을 매입해놓았고, 동년 3월에 신응균 목사가 서울로 전임해 가면서 후임으로 임종락 목사가 부임해 왔다. 1977년에 "또 다시 30평의 성전을 증축했고(기성회장:김용기 권사), 1979년에는 슬라브 양옥으로 목사관을 신축했다. 1981년 구역회의 결의로 교산교회의 명칭을 '양사중앙교회'로 변경했다. 1982년에는 '새마을 유아원'을 설립해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1991년까지 9회에 걸쳐 약 300명의 졸업생을 길러내고, 원아수의 격감으로 부득이 폐쇄시키고 말았다. 1985년에는 담임자 임종락 목사의 성역 30주년 및 회갑기념 예배를 드렸고, 그 다음해에는 '교회요람'을 창간 배포하고, 아울러 일부 낡은 건물을 철거하면서, 24평 정도의 슬라브 양옥식당도 건축하였다. 1994년 구역회에서 교회명칭을 '강화 교산교회'로 다시 변경하였다.  (출처- http://www.kyosan.zc.bz/)

출처 : 성화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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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

전주서문교회


1897년 호남 최초로 미국 남장로교에서 세운교회이다. 1997년 창립 100주년을 맞아 기념관을 건축하였다. 2007년 현재 창립 114주년을 맞아 기념예배와 행사를 가졌다. 전주서문교회는 1893년 정해원 씨가 은송리에 초가1동 예배당을 마련하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1897년 7월 처음으로 5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로써 ‘전주 교회(교회 명칭)’가 한국인 세례 교인이 있는 교회로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또한 8월 1일 주일에는 전주 교회에서 처음으로 성찬 예식을 레이널즈 목사의 집례로 거행했다. 2007년 현재 114주년을 맞는 서문교회는 2000여명이 출석하는 교회이며 해외 후원 선교사 22명, 후원 미자립교회 17개, 기관 후원단체 22개, 일반 후원단체 12개 등 전도와 구제에 온 힘을 다하는 교회가 되었다.

  

전주 서문교회

  

전주 서문교회

 

100주년기념관 

 

1993년 창립100주년기념비(1893- 19993) 

 

교회내부

 

주보

 

창립 114주년(2007년) 기념예배 팜프렛

 

종각모습

 

종각과 창립50주년기념비

 

창립50주년기념비

 

종각

 

종각연혁 

 

<전주서문교회 역사자료실>

 

전시실

 

전시실

 

서문교회 역대교역자

 

미국 남장로회 한국지회 초기 7인 선발대 

 

초기 장로 교회의 각파(미국 북장로회, 미국 남장로회,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들이 입국해 각 지역에서 교회를 설립하자 이들은 장로회의 공통된 방식으로 다스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각파의 선교사들이 모여서 선교사 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를 조직하였다. 이 공의회는 치리권 행사가 별로 없었고 토의와 권고와 보고·친목 등을 다루었으며 앞으로 정식으로 조직될 치리회의 예비적 공회일 뿐이었다.  1893년 2월 선교구역 분할 협정에 의해 미 남장로회 선교 구역으로 확정되면서 선교가 시작된 이 지역은 그 해 3월 선교사 레이놀즈(W.D.Reynolds)와 조사 정해원이 선교부의 파송을 받고 활동을 시작했으며, 1894년에는 데이트 남매(L.B.Tate와 M.S.Tate)가 파송되어 상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으로 선교활동은 중단되었으며, 1895년 이후부터 다시 선교에 전념하여 1907년에 이르러서는 전주 교회가 전주 시내 남문 교회를 분립시키는 한편 1911년 10월에는 전라노회가 전주 서문밖 교회당에서 조직되었다. 한편 전주지역 선교활동은 병원선교로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특히 1902년 잉골드(M.D.Ingold)선교사가 세운 여성을 위한 진료소는 현재 전주 예수병원 전신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진료의 혜택을 주었다. 1890년대의 호남 선교과정을 지나서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반 선교업무와 병원 설립, 의료선교, 학교교육을 통한 선교사업이 차츰 구체화되면서 전도를 받고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점점 증가하게 되었다. 당시 전주와 군산에 자리를 정하고 차분히 활동하던 선교사로는 테이트 남매(崔義德과 玖德) 선교사와 레이널즈(李訥瑞) 선교사 내외, 약방을 설치하고 의료선교사역을 겸했던 해리슨(河緯廉) 선교사, 잉골드 여의사 등의 활약이 현저했다. 목포를 거쳐서 이곳 전주로 파송되어 온 매큐첸(Luther Oliver McCutchen, 馬路德) 선교사와 나중에 그의 부인이 된 요세핀(Mrs L.O.Josephine Hounsell) 여선교사, 군산에 파송되어 온 불 선교사와 그의 부인이 된 앨비 선교사 등이 일반선교와 학원선교 또는 의료선교 등을 담당했다.

 

미국 남장로회 한국지회 초기 7인 선발대  

 


                마로덕 선교사,      마로독 선교사의 부인 요세핀 여사,           전킨 선교사

 

특히 선교 초기, 군산에 살면서 전도선으로 군산 연해 지역과 섬들을 순회하며 전도했던 드루 의사와 더불어 열정적으로 군산지역을 개척했던 전킨(全緯廉) 선교사는 드루 선교사가 1901년 귀국한 다음에도 군산·옥구·김제 등지를 배편을 통해 또는 말을 타고 다니면서 전도 활동에 열중했다. 전킨 선교사는 군산 시내에서 3㎞나 떨어져 있는 궁말(현 구암동)의 습지대에 살면서 잦은 풍토병으로 고생하다 어린 세 아들(Sidney, Francis, George)을 병으로 인해 잃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도 건강이 쇠약해졌다. 선교사회에서는 그의 사역지를 기후가 나은 전주로 옮기게 했고 활동 반경을 20리 이내로 제한했다. 1904년부터 전킨 선교사가 전주에 옮겨와서 전주교회를 담임했을 때 남장로회 파송 한국 선교사 중 리더격인 레이널즈 선교사는 그의 능력과 인격이 뛰어나 다른 선교회인 북장로회 선교회의 청빙을 받아 서울의 다른 곳에 가서 목회를 담당하기도 했다.

 

초기 선교사

 

초기 선교사

 

전킨 선교사 부부

 

전킨 선교사 가족 

 

<서문교회 변천사>

 

서문교회 최초의 건물로 추정

 

선교사들 중 가장 먼저 호남 땅을 밟은 선교사는 호주 장로회에서 파송을 받고 온 데이비스(J. Henry Davis) 목사였다. 그는 1889년 서울에서 선교지인 부산으로 향해 가던 도중에 충청도와 전라도를 경유하였다. 1892년 말에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인 레이널즈와 미국의 북장로회 선교사인 마펫이 선교 지역 책정 문제를 앞에 두고 호남의 초입인 충남 공주 지방까지 말을 타고 답사한 일이 있었다. 1893년 장로회 미션 공의회에서는 예양 협정(Commity Agreements)에 의해 선교 지역을 배정했는 데, 호남 지방인 충청도와 전라도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회의 선교 지역으로 지정(指定)되었다. 그 당시 호남에는 동학교도들의 움직임으로 민심이 흉흉했고 선교사들은 민심의 동향과 지역 사정에 밝지 못했다. 이에 미국 공사관의 만류로 선교사들이 나서기보다는 믿을 수 있는 한국인을 선임해 파송하기로 했다. 그래서 레이널즈 선교사의 어학 선생이면서 자신들의 일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던 정해원(鄭海元)을 선정했다. 전주에 도착한 정해원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준비 차 온 사람임을 밝히며 부근의 냇가에 있는 저잣거리에 돌아 다니며 민심을 살피는 일과 장터 전도를 하였다. 그는 주일이 되면 자기의 은송리 집에서 그간 사귀어 온 사람들에게 복음의 도리를 전하고 예배드리며 전주에 처음으로 온 신자답게 생활했다. 1897년에 예수를 구주로 확실히 믿기로 작정하고 세례 받기를 원하는 남자 3명과 여자 4명을 문답한 결과, 남자 2명과 여자 3명이 문답에 합격하였다. 그래서 그 해 7월 17일 주일에 레이널즈 목사의 집례로 남자 2명과 여자 3명(김내윤, 김창국과 여자 강씨, 임씨, 김씨)이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전주 교회(교회 명칭)’가 한국인 세례 교인이 있는 교회로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또한 8월 1일 주일에는 전주 교회에서 처음으로 성찬 예식을 레이널즈 목사의 집례로 거행했다. 세례 문답에는 합격했으나 시골에서 멀리 사는 관계로 7월 17일 세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전씨는 다음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세례를 받고 성찬식에도 참예했다. 그 날 세례식에서는 7월 17일 세례를 받은 바 있는 김씨가 두 살 되는 딸 보영(寶榮)을 안고 와서 자신의 신앙 고백에 따라 유아 세례를 받으므로 그 아이는 전주에서 처음으로 유아 세례를 받은 교인이 되었다.

 

호남 최초의 예배당인 전주서문교회와 전킨선교사

 

이 무렵(1897년 9월) 전주 선교부는 많이 발전하여, 9월 5일 주일에는 교회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왔다. 집회시 예배 인도자 레이널즈는 선교사들 중에 우리 나라 말을 가장 잘 했고 유식한 말로 설교하였다. 이 날 예배 후에는 감동을 받은 교인들이 자진해 예배당 개수(改修)를 위해 특별 연보(헌금) 할 것을 작정했으므로 9월 7일 화요일부터 해리슨이 살고 있으며 예배 처소로 겸하고 있는 집을 앞으로는 예배당으로 전용할 수 있게 방을 넓히고 인원을 많이 수용하도록 개수했다. 이에 소요되는 경비를 교인들이 힘써 연보하여 충당하였다. 수리를 마친 9월 19일 주일에는 개수된 예배당에 모여서 기쁨으로 감사 예배를 드렸다. 이때부터 이 건물은 전주 교회 예배당으로 불렸다. 교인은 여자들 외에 남자가 20명 가량이 출석했다. 

 

1890년대 서문교회의 종각을 짓는 모습

 

1905년의 서문교회, 기지 780평 건평 50평의 벽돌 기와지붕 예배당   

 

전주 선교부는 1894년 1월 테이트 목사와 그 누이동생 매티 선교사가 서울에서 전주에 정착할 생각으로 내려와 전주 은송리에 자리를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동학 혁명으로 인해 서울로 일시 철수했다. 1895년 3월 레이널즈와 테이트 선교사는 육로로 다시 전주에 와서 상당기간(3∼5월)을 체류하면서 민심을 파악하고 주택을 건축하며 선교 활동 재개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초기 세례 받기를 원했던 신자들과 교회를 찾아오던 초신자들은 거의 다 흩어져서 찾을 길이 없어졌고, 선교는 완전히 새롭게 시작이 되어야 했다. 두 선교사는 테이트 목사의 집 사랑방에서 다시금 집회를 시작했다. 5월에 레이널즈는 테이트와 3월에 함께 왔던 일행을 전주에서 계속 일하도록 남겨 두고 자기는 육로로 다시 서울에 올라갔다. 전주에서 집 짓는 일을 마무리하던 테이트도 서울에 올라가 6월 선교사 회의에 참석했다. 1895년 10월 서울에서 친일 세력과 일본의 간계에 의해 민비가 시해되자 지방에 있던 선교사들 중에는 시국에 불안을 느끼고 서둘러서 모여들기도 했다. 전킨과 드루도 선편으로 서울에 올라왔다가 정국이 수습되는 것을 보고 11월에 다시 군산으로 돌아가서 거주할 주택과 선교 기지를 물색하며 본격적인 군산 선교를 진행했다. 전주에서 꿋꿋하게 일하던 테이트는 12월 일단 서울에 올라가 일 주간 준비를 한 후 앞으로 누이동생 매티와 함께 전주에서 장기간 선교 사업을 하기 위해 제물포에서 선편으로 출항해서 군산에 거쳐 1896년 1월초에 전주에 도착했다. 그래서 1월 5일 주일에는 전주 은송리 처소에서 감격적인 새해 첫 예배를 드렸다. 테이트는 집회 때마다 성경 강설과 교육을 담당했다. 집회 때는 많은 질문자들도 있었지만, 모여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 살이에 어떠한 이득과 정치적인 안전 보장의 기대나 경제상의 도움 등을 바라고 있었다. 매티는 모여드는 여자들을 위해 복음의 기본 도리를 가르치는 사역을 담당하는 한편 몸이 아픈 사람들에게 간단한 의료 시술과 위생에 관한 기초 상식을 가르치기도 했다. 남자들은 테이트의 사랑방에서 모이고 여자들은 매티의 방에서 각각 따로 모였다. 뒤를 이어 군산, 목포, 광주, 순천에도 선교부가 설치되었다. 전주 선교부를 중심으로 하여 호남 지역 선교부들은 병원 설립, 의료 선교 사업 전개 및 학원을 통한 교육 선교 사업에 힘을 쏟아 군산 구암 병원, 전주 병원, 목포 병원, 광주 병원, 순천 병원, 광주 나병원 등을 설립하고, 신흥 학교, 기전 여학교, 정명(貞明) 여학교, 영흥(永興) 학교, 숭일(崇一) 학교, 수피아(須彼亞) 여학교, 영명(永明) 학교, 메리 볼딘 여학교 등의 학교 설립을 통하여 선교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04년의 선교 보고서에 의하면, 전주·군산·목포 등 세 선교부 내에 각기 남·여 중학교가 하나 씩 설립되었고 그 학생 수는 126명이었다. 그러나 3년이 경과한 1907년에는 인가받은 정식 학교가 44개교였고, 학생 수는 497명이며, 3년이 경과한 1910년에는 64개교에 1,740명의 학생 수를 보이고 있다.

1905년 예배당

 

 1909년 서문교회 종각에 매달을 종의 모습.(예수병원 제공)

 

1911년 ㄱ자 예배당으로 증축, 건평 89평으로 증축

 

1920년대 말 전주 북문의 모습 

 

1935년도 서문교회, 평면 115평, 연건평 230평의 2층 벽돌집 예배당  

 

신사참배와 서문교회

 

1937년 1월부터 신사참배의 위협이 본격화되자 서문밖교회는 신흥과 기전학교의 앞날을 위하여 특별기도를 하였다. 1월 13일(수요일밤 기도회)에는 신흥학교 교사 대표 김가전 목사의 인도로 간절한 기원이 있었고, 교회 제직 몇 사람의 대표기도가 있었다. 1937년 5월 5일(수요기도회)에는 신흥 기독청년회 주관으로 순회 특별기도회를 서문밖예배당에서 드렸는데 김재우 군의 사회, 회장 이강문 군의 기도로 이루어졌으며 신흥학교 학생인 김종신 군과 심상영 군의 신앙간증이 있었다. 이것이 신흥학교 기독청년회의 마지막 순회 예배였다.  신사참배 강요의 마수에 걸려 신흥과 기전 두 학교는 폐교가 확정되었다. 이에 1937년 9월 15일 수요기도회 날, 서문밖교회에 출석하던 신흥과 기전의 학생들은 어머니의 품과 같은, 모교회인 서문밖교회의 사랑의 정을 못잊어 폐교 송별 기념식을 교우들과 함께 가졌다. 일본은 이 날에도 발악적이고 의도적인 방공연습을 실시하여 등화관제시켰다. 그렇지만 행사는 계속되었고 먼저 기전학교 학생 대표가 폐교 송별사를 울면서 피력하였다. 다음 신흥학교 학생 대표도 통분함을 가까스로 억제하며 폐교 송별사를 울부짖으며 낭독했다. 서문밖 교우들 가운데 울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고 예배당 안은 너무나 침통하고 숙연하였다. 서문밖교회에 출석하던 기전과 신흥학교 학생들이 성금을 모아 청동제 화병 한 쌍과 화분대16) 두 대를 마련하여 교회에 바쳤다. 그 밤에 신흥의 린턴 교장 부인 인사례 여사가 기념품으로 화병을 교회에 바치는 순서도 함께 가졌다.

 

서문교회

 

1937년 9월 15일 밤 서문밖교회는 신흥과 기전학교 학생들의 송별예배를 드리고, 22일부터 4일간은 신흥학교 학생들을 고창으로 떠나보내고 전주 시내로 전학가는 기전학교 학생들은 개별적으로 흩어졌다. 9월 26일, 주일이 되었는데 교회에는 빈자리가 너무 많아서 처절할 정도였다. 교회 제직 중 김교문 안수집사의 가정을 위시하여 김태훈·최계남·박준영·김병수 선생과 그 가족의 자리가 비었고 신흥과 기전 학생들의 자리가 집단적으로 비어 있었다. 그날 주일 예배일지의 출석 상황 난에는 ‘신흥·기전학생 전무(全無)’라고 간명하게 기록되었다. 공석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주일학교 부서에서 신흥학교 학생 교사의 궐석이 확연하였다. 처량한 공백이었다. 모든 교인들은 침묵으로 처절함을 표현할 뿐이었다. 그 자리를 메워야 할 각오를 무언으로 다짐하는 눈빛들뿐이었다.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기에 새삼스럽게 설명이나 강조가 필요치 않았다. 오직 먼저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실 것을 믿고 다시 힘을 내어 일어설 것을 다짐할 뿐이었다.  군국주의 침략 야욕에 기초한 일본의 기독교 억압 정책이 점차 심화되어 가고 있었으나, 교인들은 어려움을 이겨갔다. 교인들은 예배당 신축으로 인한 부채를 힘써 갚아가며 교회 내 각 부서에서 새교인과 직원의 확보에 힘쓰고 주일학교 교육에도 열심을 내었다. 1937년 5월 4일부터 열렸던 제31회 전북노회의 전주지방 시찰위원회 보고 중 서문밖교회의 상황을 보면, 작년(1936년) 8월 15일 미증유의 수재를 당하여 교우 중 가옥을 유실당하고 말로 할 수 없는 참상을 겪는 중에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생명을 잃은 교인은 없었다. 교인 중에는 매일 새벽마다 예배당에 나와 기도하는 사람이 있으며, 성경연구를 열심으로 하여 신령상 많은 진보가 있었다.  종전에 예배당 안에서 경영하였던 숭덕학교는 차츰 발전되어 특지가를 얻어 시내 노송동으로 이전하여 교사를 새로 지었고 박성근 씨와 설립자 배은희 목사의 협의로 서문밖교회에서 분리, 독자적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전주유치원은 여전히 교회 직영 사업으로 경영중이었다. 1937년 정초에는 부인조력회에서 예년과 같이 여자사경회를 개최하였고, 주일학교와 면려청년회도 여전히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교회는 전년 수재로 인하여 무너진 전도실 건물을 다시 건축하기로 계획하였으며 성인 교육을 위하여 한글 보급운동을 교회 내적으로 실시하여 글 모르던 교인들이 성경을 스스로 읽을 수 있도록 힘썼다.  1937년 11월 3일(수요일)에는 그동안 배은희 목사의 사양으로 미루었던 전별식을 하기로 하였다. 이때는 헌당식(1937년 10월 31일)도 마친 뒤였으므로 기도회 후 이미 제직회에서 선출하여 맡겼던 위원들17)이 준비한 기념품을 드림으로써 전별의 예를 갖추었다. 이날밤 예배 때 설교는 조하퍼 선교사18)가 담당하였는데 그 당시 시국과 관련된 설교로 많은 감명을 주었다.  그 이듬해 6월 7일부터 열린 제32회 전북노회에 제출한 전주 시찰위원회의 보고를 보면, 서문밖교회는 신흥·기전 두 학교의 폐교로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염려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교회는 안전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하였다. 또 그 동안 마음에 걸려있던 예배당 신축 부채가 완전히 정리되고 1937년 10월 31일에 헌당식을 거행함으로써 교인들은 이제 가슴을 펼 수 있었다고 되어 있다. 교회는 다시 힘을 내어 400원의 예산으로 교회 관리원(사찰) 주택 10여 평을 신축하였고, 교인들이 마음을 모아 1937년 2월 28일부터 1938년 5월 24일 어간에 순차적으로 장로 1명(안백선)과 안수집사 5명(김교문·배보석·오공여·김진태·김형술)을 선출하였고 각기 날짜를 정하여 임직하여 교회의 일꾼을 더욱 보강하였다. 1938년을 맞아 서리집사를 증원 임명하였다.  신흥과 기전 두 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폐교된 지 9개월도 못되어, 1938년 6월 8일 시작된 제32회 전북노회는 각 교회의 목사 27명 중 24명, 선교사 7명 중 4명, 장로총대 103명 중 97명으로, 모두 125명이 회집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

 

1971-74년의 서문교회, 평면 100평, 연건평 320평에 지하실, 지상3층의 교육관을 건축하였다. 

 

1971-74년의 서문교회

 

1981- 현재의 서문교회, 평면 300평, 연건평 705평, 지하1층 지상2층을 3년간 건축하고 1983년 90주년 교회로 봉헌하였다.

 

현재 전주서문교회와 100주년 기념관, 1993년 창립 100주년에 맞추어 연건평 705평, 지하1층 지상5층의 기념관 건축하였다.  

 

전라도 선교 25주년 기념 책자

 

옛 종각 사진

 

제직회록

 

당회록 

 

전시물 

 

예수셩교젼서 복사본 

 

전시물

 

전시물

 

방애인 선생 (앞줄 좌측 1번째) 자료제공 배보석 장로

 

전주 YWCA 초창기 인물들(1929, 전주)인 방애인, 강정숙, 김갑수, 진숙희, 진송자, 김영신 등  

 

방애인 소전, 방애인 선생은 고아들을 위해 산 서문교회의 자랑스런 평신도이다. 

 

방애인 소전 책 표지, 2001 복간본 재판 

 

서문교회의 자랑스런 평신도 이거두리

 

본명은 이보한(1872-1931) 이나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라는 찬송을 불렀기에 이거두리라고 불렸다. 그는 양반가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서자이기에 천시를 받았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교회를 나가기 시작한 거두리는 교회를 통해 평등과 사랑을 배웠다. 서자와 애꾸눈으로 거지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렀으니 거지들에게 친구가 되어주고 거지들을 보살펴준 사랑의 일꾼이다.

 

거지왕 이 거두리

 

 

< 전주 선교사 묘역>

 

선교사 묘역, 예수병원 건너편 야산에 위치해있다. 

 

선교사 묘역

 

선교사 묘역

 

선교사 묘역

 

선교사 묘역

 

선교사 묘역

 

 

<전주예수병원>

 

1903년 경 선교사 사택과 예수병원

 

1897년에는 선교사들의 사택과 선교부 복합 건물이 들어설 기지를 은송리 옆 완산(完山) 지맥(支脈)자락의 언덕에 있었는 데, 완산이 전주의 주산(主山)일 뿐 아니라 이씨 왕조(李王家) 전주 이씨의 시조 신라 사공(新羅 司空) 한(翰)의 발상지요 중시조 목조 안사(穆祖 安社)의 본향으로서 유서 깊은 곳이라는 이유로 건축이 금지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선교부 기지의 위치를 완산에서 서북편인 화산(華山)으로 옮겨 선교사들의 집단 거주 지역으로 임의 사용하도록 하며 완산에 건축했던 건물 대신 세 채를 이전해 지을 수 있는 보상금을 조선 정부에서 지급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완산에 자리잡으려고 하던 선교부는 현재 엠마오 사랑 병원이 있는 곳(구, 예수 병원 자리)의 등성이에서부터 서북편 일대로 뻗은 야산을 지나 현재 신흥 학교와 기전 학교 등이 있는 곳까지 광범위한 지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선교부가 자리를 옮김에 따라 전주의 초기 교회 자리도 은송리의 선교부에서 바로 보이는 전주성 서문 옆에 터를 잡게 된 것이다. 이것이 전주 서문 예배당 터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10년대 초기 예수병원          

 

구 완산동 시외터미널 옆 골목길로 올라가거나 중화산동과 완산동을 잇는 강당재를 넘어 내려오면 그 중간 지점에 위치해있던 초창기 예수병원이다. 야트막한 언덕이 있는 곳으로 1910년대 사진이다. 이 건물들중 예수병원 본관건물과 앞 건물은 현재에도 다가공원내에 자리잡고 있다. 사진에서 바로 앞의 가로로 놓인 길이 화산동(사진 왼편)과 완산동(사진 오른편)을 잇는 강당재로 넘어가는 길이다. 예수병원은 1898년 미국에서 온 여의사 마티 잉골드(Dr. Mattie B. Ingold)에 의해 시작되었다. 잉골드 박사는 전주 성문 밖 은송리(현 완산초등학교 부근)에 조그만 집 한 채를 구입하여 어린이와 여자들을 진료하기 시작하였다. 사진 중앙의 한옥 건물이 전주 최초의 의료기관인 예수병원이고 그 주변에 선교사들의 사택이 보인다.(예수병원 제공)

 

1930년대 다가산에 위치해있던 예수병원이 화재로 소실된 사진. 바로 위사진과 변함이 없다.(예수병원 제공)

 

전주 예수병원

 

전주 예수병원  

 

2007년 현재 전주 예수병원

 

2007년 현재 전주 예수병원

 

<전주 신흥학교>

 

전주 신흥학교


1900년에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 ; 1867~1951) 선교사가 한 소년에게 신식 교육을 시키면서 시작되어 이후 1909년에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인 옛 희현당 자리에 벽돌 2층 양옥 건물을 지어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된다. 왼쪽 아래에 보이는 서양식 2층 건물이 신흥학교 건물이다.(전주 서문교회 제공). 100년이 넘은 개교역사를 가지고 있는 신흥중고등학교가 처음엔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서양식 건물 한동으로 시작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신흥학교 교가에도 희현당이 나오고 실제 건물이름도 희현당이라는 신흥건물도 있는데 이 희현당이란 곳은 숙종 26년(1700)에 당시 관찰사로 재임한 김시걸이 지방 유지인 진사 오명기(吳命模)와 더불어 황학대(黃鶴臺) 기슭인 옛 사마재(司馬齋 :生員과 進士가 모이는 곳)터에 창건한 학당으로 30명의 학생에게 교육을 가르친 곳이다. 조선말 사색당쟁으로 인해 퇴락했던 이곳에 신흥학교가 세워졌는데 신흥학교가 희현당의 본래 목적에 맞는 교육역사를 이어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한껏 발산하고 있는 의미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사진 왼편의 한옥 건물이 있는 산언덕자리는 현재 예수대학(옛 예수간호대)이 자리잡고 있고 뒤에 있는 산은 지금의 화산서원비가 있는 화산공원이다. 화산공원 기슭에는 기전여대가 자리하고 있다.

 

 

1920년대 신흥학교 학생들이 전주 서문교회로 예배하러 가는 모습.


기독교 교세가 확장되면서 신흥학교는 1920년에 60명에 불과하던 학생 수가 1921년에는 200여명으로 증가하였는데, 주일에는 학생과 교직원들이 단체로 교회 예배에 참석하였다. (전주 서문교회 제공).

사진 왼쪽은 다가산을 지나 중화산동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현 충경로 방향이다. 지금은 4차선도로가 된 다가교를 건너 서문교회로 예배하러 가시는 신흥학교 조상님들 모습이 보인다. 지금은 천변공사로 물이 메말라서 놓여져있는 돌다리를 통해서도 건널 수 있지만 80년 전 전주천은 사진에서처럼 한강같은 많은 물이 흐르고 있고 우거진 숲 사이로 신흥학교 모습이 보인다.

 

2007년 현재의 전주신흥학교

 

2007년 현재의 전주신흥학교

 

2007년 현재의 전주신흥학교 100주년기념관   

 

2007년 현재의 전주신흥학교

 

2007년 현재의 전주신흥학교

 

2007년 현재의 전주신흥학교 

출처 : 성화사랑
글쓴이 : 성화사랑 원글보기
메모 :


진해 웅천교회

 

주기철 목사의 고향인 경남 진해에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교회가 있다. 주 목사는 13세 때인 1910년 12월 25일 경남 진해시 성내동 소재 웅천교회로 나와 예수를 믿게 됐다. 웅천교회는 1900년 세워진 것 외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889년 호주장로회에서 데이비스 목사와 그의 누이 메리를 파송했다. 데이비스는 한국에 온 지 1년만에 도보 선교여행 후유증과 천연두로 부산 부근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호주장로회에서는 오히려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했다. 이를 근거로 호주장로교단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경남지방 특성상 그들의 영향으로 웅천교회가 세워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현재 웅천교회에서는 주기철 목사의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 수련관을 건립하기 위해 ‘주기철 목사 생가복원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글·이주희 기자)

 


주기철 목사 생가, 현재 공터인 생가는 복원 작업이 추진중이다.

 

진해 웅천 주기철 생가, 교회 기념관  (출처- 매일신문사 정우용 기자/200701)

 

 주기철 목사가 웅천교회 집사일 때 기록한 헌금록,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전시

 

경남 양산읍교회 전도사 시절(1922-25), 앞줄 중앙이 주기철 전도사 

 

웅천교회 마당에 있는 주기철목사 순교기념비 (사진·김용두 기자)  

 

< 마산 문창교회 >

 

마산 문창교회       (출처- http://cafe.naver.com/ma77)


1889년 호주장로회에서는 데이비스 목사와 그의 누이 메리를 파송했다. 데이비스는 한국에 온 지 1년만에 도보 선교여행 후유증과 천연두로 부산 부근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호주장로회에서는 오히려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했다. ‘경남 지방 어머니 교회’라는 별칭이 붙은 문창교회는 바로 이같은 배경으로 마산시에 처음으로 세워진 교회다. 1901년 창립시에는 마산포교회였다가 1919년 신축예배당을 추산동으로 옮기면서 문창교회로 교회명을 바꾸었다. 주기철 목사가 부임한 1931년 7월은 교회내부 사정으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주 목사는 1936년 평양 산정현 교회로 떠날 때까지 교회 안정에 힘을 쏟았다. 이를 기념해 문창교회 역사관에는 무학산에서 주 목사가 기도하던 십자가 모양의 금 간 바위를 축소 보관하고 있다.

(마산=글·이주희 기자/사진·김용두 기자)

 

마산 문창교회         (출처- http://cafe.daum.net/mcem)

 

마산 문창교회 역사 자료

 

마산 문창교회 역사 자료

 

마산 문창교회 역사 자료

 


마산 문창교회, 두번째 목회한 1950년대 교회모습

 

마산 문창교회 역사 자료

 

문창교회 선교지

 

문창교회 후원교회  

 

 

< 부산 초량교회 >

 

초량교회


초량교회(부산광역시 동구 초량1동 1005번지)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가 목사안수를 받은 뒤 처음으로 부임해 사역(1926∼1931)한 곳이다. 1892년 미국 선교사인 윌리엄 베어드 목사에 설립된 초량교회는 1920년 호주 선교부 소유의 초량동 땅에 교회를 지으면서 급성장했다. 일제시대 임시정부 소속 광복군을 지원하기 위해 비밀모임이 초량교회에서 자주 있었는데, 그중 윤현진 집사는 임시정부의 재무차장이 되어 왕성한 활동을 벌이다 상해에서 병사하기도 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항해 교인 중 많은 이들이 투옥되거나 교회에서 추방된 사람이 많아 고등계 형사들로부터 엄격한 감시를 받았다. 이때 교인명부와 헌금 등 교회성도들 사이에서만 은밀히 통용된 자료가 초량교회 역사관에 잘 보관돼 있다. (부산=글·이주희 기자/사진·김용두 기자)

 

초량교회

 

초량교회

 

초량교회 약사                (출처- http://www.choryang.org/)

 

1892.11.7   미 북장로교 선교사 배위량 부처께서 영선현에 거주지를 정하여 5월경에 주택          을 건축하고 옆에 지은 사랑방 예배처소를 개방하여 본격적인 선교활동으로 영선           현교회(초량교회 전신)를 설립하다. 

1902   예배당 아래의 영주동 사무소를 매입하여 주일학교로 사용중 영선현교회를 이곳으          로 옮겨 영주동교회로 명칭을 바꾸다 

1912   제1대한득룡목사 부임

1913   제1대 김주관장로 장립(당회조직:교세40명)

1915   제2대 정덕생 목사부임

1920   호주선교부의 소유인 초량동1005번지의 대지 689평을 매입하다

1921   매입한 대지위에70평 붉은 벽돌 건물공사를 착수하다.

1926   제3대 주기철 목사 부임(교세250명)  

 

교회 내 역사관 자료

 

교회 내 역사관 자료

 

교회 내 역사관 자료

 

교회 내 역사관 자료

 

교회 내 역사관 자료

 

초량교회 주기철 목사가 쓰던 강대상


1926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초량교회 담임목사가 된 주기철 목사를 기리는 유품이 초량교회 제일 꼭대기에 있는 역사 전시관에 있다. 바로 주기철 목사가 쓰던 강대상(사진). 1926년부터 1931년까지 시무한 주기철 목사의 순교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전시관에 보관된 노회록과 직원회록에 보면 주기철 목사의 활동내역이 자세히 나와있다. 부임 후 주기철 목사는 주일학교 활성화에 힘을 쏟았다. 또한 교회 형편이 어려운 마산교회(문창교회)로 가기 위해 초량교회에서의 6년 사역을 내려놓았을 때 성도수 200명이 채 안됐던 교회는 배가 넘는 400여 명의 성도가 있는 교회로 성장해 있었다. 선교사 베어드 목사에 의해 설립된 초량교회는 영선현, 영주동, 초량으로 옮기는 과정을 통해 한강 이남의 어머니 교회로서 부산지역 선교와 민족 복음화의 구심점으로 지난 112년간 말씀을 지켜오고 있다. (부산=글·이주희 기자/사진·김용두 기자)

 

<사진으로보는 초량교회,   출처- http://blog.daum.net/jjjmanjjj >

 

1892년대 초량마을

 

초량교회 전신 교회 

 

배위량 선교사 부부

 

1910년 부산 거주 호주 선교사들

 

1895년 선교사들의 무덤

 

1922년 붉은벽돌 초량교회

 

1930년대 교회 내부

 

1940년 초량교회가 최초로 개척한 산리교회 제직회록

 

산리교회

 

1930년 주기철 목사

 

1931년 경남 주일학교 대회

 

1931년 주기철 목사

 

1934년 주기철 목사 친필

 

1940년대 제직회원

 

안창호 선생 초량교회 방문

 

1940년대 제직회원

 

신사참배를 거부한 초량교회 조수옥(趙壽玉) 여전도사


“초량교회라면 경남의 신사참배 투쟁의 거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초량교회는 1892년에 세워진 경상남도에서 제일 큰 교회입니다. 그때 교회의 성도수가 약500명 이었습니다. 권찰이 50명정도, 집사가 10명 정도였습니다. 이약신 목사는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경찰의 압력에 못 이겨 사임하고 평양으로 옮겼죠...... 남겨진 교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양 장로를 중심으로 장로진이 건실한 신앙위에 서 있었습니다...... 조수옥 증언 53,54쪽...”  조수옥 여전도사는 1914년 12월1일 경남 하동군 하동읍 읍내동에서 출생하여 20세가 되던 해에 결홍 하였으나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1935년,22세때) 남편의 외도로 파혼하게 되었으며 그때부터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통영에서 간호사, 봉재교사로 일하다가 1937년 6월 25세의 젊은 나이로 사천군 삼천포 교회에서 전도부인으로 시무하게 되었다. 그 후 삼천포교회는 총회결의에 따라 신사참배 강요를 섰으며 한편 삼천포 시에서는 전교인을 신사참배 시키기 위하여 강제 소집하였으나 조전도사는 끝까지 반대하여 경찰서장으로부터 추방명령을 받았다. 1938년 11월 초량교회는 갈 곳 없는 조 전도사를 전도사로 받아 드려 시무케 하였다. 그 당시 초량교회에서는 강루식 집사를 위시한 많은 교인들이 산리기도처에 비밀리 모여 기도하는 등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교회 저변에 깔려 있었다. 조 전도사는 이에 동조하여 작은 모임이 있을 때 마다 음성적인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39년 8월에는 남의 눈에 띠지 않기 위하여 부산 수영 해수욕장에서 모임을 갖고 신사참배 반대 운동 모의를 하였다. 이때 참석한 인사로는 한상동 목사, 사모 김차숙, 한정교 목사, 사모 이정, 윤술룡 목사, 이인제 전도사, 백영옥 집사, 김현숙 전도사, 배학수, 조수옥 등 이었다. 1940년 1월 초량교회를 사면하고 부산 호주 선교부 소속 부산지방 순회 전도부인으로 위촉받아 전도 활동을 계속하였다. 계속되는 신사참배 반대 운동과 운동자금 지원 등으로 1940년 9월 20일 새벽 4시 초읍동 자택에서 검거되어 북부산 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그 후 1941년 8월25일 평양형무소로 이송되었으며 그때 같이 구속된 인사로는 여러사람이 있었으나 초량교회와 관련된 인사로는 제3대 주기철 목사, 방계성 장로(주기철 목사 시기 당회 서기). 제6대 한상동 목사, 손명복전도사(초량교회 설립 산리 기도처 전도하, 해방후 온천교회 초대 교역자) 등이 있었다. 조수옥 전도사는 1945년 8월 17일 해방과 동시 축옥하였다. 1945년 12월 이약신 목사의 권면으로 마산 인애원(仁愛院)을 설립하여 많은 불우 청소년을 양육 하였으며 현재의 경남종합사회복지관이 그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전국여전도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정부 및 가종 단체의 위원 또는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86년 5월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하였다. 경남지방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거점이 였던 초량교회, 그 시기 초량교회에서 시무하였던 교역자들, 주기철 목사 방계성 장로 손명복 전도사 한상동 목사 등과 함께 오랜 세월 환란 풍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온 조수옥 여전도사는 초량교회 115년 역사 속의 한떨기 아름답고 신선한 꽃으로 자리 잡고있다. 그는 2002년 10월 28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 평양 산정현교회 > 

 


주 목사가 목회하던 평양 산정현교회

 

1936-1944년까지 주기철 목사가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사용하던 강대용 성경

 

 산정현 교회 주기철 목사 장례식 장면   (출처- 매일신문사 정우용 기자/200701)

 

평양 산정현교회 교인들 

 


평양 산정현교회

 

1996년 현재 남한에는 평양 산정현교회를 모체로하여 뿌리를 두고 있는 산정현교회가 4개 교회이다. ① 서울 용산구 후암동 406-5에 소재한 산정현교회는 1907년의 장로교 처음 조직인 독노회의 정신적, 역사적 맥을 수진자들에 의하여 이어오는 교회로 위에 기술한 연혁의 역사성을 가지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② 서울 서초구 서초동 494-3에 소재하고 있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측에 속해있는 산정현교회는 1964년에 후암동 산정현교회에서 분립해나간 교회이다.

③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10-2에 소재하고 있는 산정현교회는 평양에서 수진자들과 혁신복구적 의견의 차이로 마찰을 빚다가 수진자들이 덕이 안되는 마찰을 피해 산정현교회를 떠나자 그곳에 남아 예배드리던 이들이 6.25가 일어나자 남하하여 세운 교회로 통합측에 속해있다.

④ 부산 사하구 괴정3동 284-3에 설립된 산정현교회는 6.25사변으로 피난온 평양산정현 교회 교인들이 서울로 올라와서 후암동 산정현교회를 설립하기위해 임시로 회현동에 적산가옥을 얻어 예배드릴때 부산에 잔류한 일부교인들에 의하여 설립된 교회로 현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에 속해있다.  

 


양지 총신대 100주년 기념 예배당, 주기철 목사 기념 기도실이 있다

 


총신대 기념 예배당 내 주기철 목사 기념 기도실

 


양지 한국 100주년 순교자 기념관 뜰 주기철 목사 추모비

 

경남지역의 기독 유적지 , 국민일보 2003-04-09


부산·경남지역은 짙은 향토색 때문에 기독교 유적을 찾기 힘들다. 그러나 꼭 기억해야 할 몇몇 교회가 있다. 부산진교회와 함께 부산 기독교의 한 축을 차지하는 초량교회. 1892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 베어드 선교사가 영선현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시작됐으며 교회에 역사전시관이 설치돼 있다. 특히 1926∼32년 교회를 담임했던 주기철 목사가 사용한 강대상도 잘 보존돼 있다. 군항 진해에서는 웅천교회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 주기철 목사의 신앙이 싹튼 곳이기 때문이다. 1897년 태어난 주기철 목사는 1910년 예수를 영접했다. 주 목사는 1916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연희전문으로 진학했다. 그러나 안질에 걸려 1년만에 낙향했으며 1919년 웅천교회에서 집사 직분을 받았다. 이 기간에 주 목사는 인생의 진로를 바꾸게 된다.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은혜를 받고 192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초량교회에서 위임목사로,1931년 문창교회에서 목회했다. 특히 초량교회 시절, 신사참배 거부안을 경남노회에 제출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마산 문창교회 역시 부산· 경남지역을 답사할 때 꼭 찾아봐야 할 곳. 영남지역의 모교회다. 독립운동가이며 부통령을 지낸 함태영 목사가 시무한 교회며 주 목사가 1931∼36년까지 이곳에서 사역했다.

 

주기철 목사 생가 복원 작업

 

경남 진해시 성내동 웅천교회(담임 오성한 목사)에 설치된 '생가복원운동본부'는 웅천1동 주 목사의 생가터 등을 매입, 생가를 복원하고 수련원을 설립하기로 하고 모금에 들어갔다. 주 목사가 태어난 집은 현재 공터로 있으며, 유년기 살았던 생가는 남의 손에넘어갔다. 생가복원운동본부는 생가복원, 기념관.수련원 설립 등을 통해 이곳을 신앙교육과 순교수련 등의 훈련장으로 삼을 계획이다. 본부측은 현재 주 목사의 사료를 찾고 있다. 현재 주 목사를 다룬 저작은 200여권이 발행돼 있으며 논문은 300여편에 달하나 각 지역 도서관이나 개인 소장 등으로흩어져 있는 실정이다.

 


한국 순교자 기념과의 주기철 목사 사진


                               주기철 목사

 

주기철 목사 

 

주기철 목사의 생애

 

1. 성장기

주기철(1897~1944) 목사는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 복부리(현재 진해시 웅천 1동)에서 주현성씨의 4남 3녀 중 네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웅천은1595년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 시(소서행장)가 웅천성에서 수많은 왜군을이끌고 조선병사들을 무참히 학살했던 비운의 역사현장이기도 하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일제가 웅천에 다시 침략해올 것을 우려했던 주목사 일가의 어른 주기효는 민족 수난을 극복하기 위해선 힘을 길러야 한다면서 이곳에 1906년 개통학교를 세웠는데 어린 기철은 이학교에 입학,투철한 민족정신과 남다른 민족애를 키웠다.  주씨 가문의 큰형 주기원이 1907년에 교회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여 한일 합방으로 전국이 우울했던 그 이듬해 1월 7일에 학습을 받고 10월 5일에 입교를 하기 시작하여 온 식구들이 믿음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웅천교회에 있는 당시의 생명부 기록에 의하면 주기복(주기철 목사 아명)은 1910년 12월 25일 성탄절에 형님의 권면으로 성탄절 행사를 즈음하여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그의 아버지 주현성은 1914년부터 출석하기 시작하여 조재선(주현성의 처), 주기원(주현성의 장남), 황덕황(주기원의 처), 주국영(주기원의 장남), 주영민(주기원의 2남), 주영숙(주기원의 3남), 주영옥(주기원의 장녀), 주수원(주기원의 2녀), 양호아(주국영의 처), 주기정(주현성의 3남), 주용선(주기찬의 장녀), 주재용(주기찬의 장남), 주영우(주기형의 장남), 주기용(주현관의 3남), 주영혁(주기채의 장남), 주영문(주기채의 2남), 주길선 (주기채의 장녀), 주말순(주현식의 2녀), 주상신(주기우의 장녀) 등의 기록을 볼 때 주씨 가문이 대거 웅천교회를 출석했던 것이다. 이즈음 그의 맏형인 주기원은 이곳에 웅천교회를 세워 목회활동을 시작했는데 어린 기철은 이교회에 열심히 다녀서 `소년 목사'라는 칭호를 듣기도 했다고 한다. 기복은 13세의 나이인 개통학교 5학년 때에 웅천교회에 나갔다. 그는 웅천교회에서 민족의식과 애국심, 신앙심을 키우며 큰 꿈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개통학교 7년과정을 마칠 무렵, 그는 당시 부산에서 우연히 춘원 이광수 애국강연을듣고 (강연내용-  "여러분, 나라는 망했습니다. 젊은이들은 비탄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닙니다. 부지런히 배우고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야만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분발을 하면 우리도 세계의 일등 국민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과 용기를 가지고 국운을 개척하는 선봉이 됩시다. 민족 운동가 남강 이승훈 선생께서 설립한 오산학교에서는 구국의 도량이 될 전국의 인재를 모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민족 교육의 전당, 오산학교에 와서 공부하십시오. 뜻이 있는 곳에 반드시 길이 있습니다." )  감동을 받아 춘원이 교장 대리로 있던 평북 정주의 오산 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한다. 오산학교에 진학한 그는 그곳에서 민족 지도자인 이승훈을 비롯, 조만식, 서춘선생등을 만나 철저한 민족교육과 함께신앙교육을 받았다. 주기철은 1916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그해 4월 선교사들이 세운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입학한지 몇달도 채 안돼 지병인 안질이심해져 학업을 중단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할수 없이 학업을 포기하고낙향한 그는 웅천교회에서 집사로 봉사하면서 동시에 교남학교에서 교편을잡으며 야학과 청년운동에도 정열을 쏟았다. 이즈음 그는 김해 교회 이기선 목사의 중매로 안갑수와 혼인을 한다.

2. 성령체험과 목회의 길

주기철은 1920년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해 뜨거운 성령체험을 한뒤 목사가 되기로 결심, 22년 3월 평양장로회신 학교에 입학했다.  어느날 스승 남강 이승훈 선생이 평양신학교를 방문하였다. 남강도 이 학교를 다녀었다. 그는 독립운동 33인 중 한 분으로 3년 가까운 옥고와 여러 차례의 옥고를 치렀고 오산학교도 불질러버려 새로 학교를 세우느라 모교를 오랜만에 찾았고 그의 나이가 60이 넘은 노인이 되어 버렸다. "기철 군, 자네는 여기 신학교를 마치고 나서 동경 고등사범학교를 계속하게나. 그런 다음에 우리 오산학교를 자네가 맡아 달라는 말일세."   기철은 스승의 부탁에 호응하지 못해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두 사람은 헤어졌다. 남강 선생이 교문을 떠나는 모습이 기철의 눈에 쓸쓸하기 그지없이 보였다. 기철은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그에게 주어진 기회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마포삼열 교장을 비롯, 배위량, 왕길지, 곽안련, 나부열 등 쟁쟁한 교수진으로부터 철저한 신학교육을 받게 된다. 당시그는 출신도 별로 나뉘어 있던 기숙사 제도의 맹점을 학교당국에 시정토록건의, 혼합방식을 채택토록 하는 선도적 역할을 해내기도 했다. 신학교 재학시절 양산읍 교회 전도사로 시무한 그는 1925년 12월 신학교 졸업과 함께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부산초량교회 위임 목사로 부임을 했다. 첫 부임지인 초량교회에서 그는 헌신적이고도 정열적으로 목회활동을 한다.

3. 신사참배 거부

 주기철은 1925년 12월 22일(화), 평양 신학교를 19회로 졸업하게 되었다. 졸업 대표로 답사를 했다. 주기철은 1926년 봄에 부산에 내려가 초량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곧이어 초량교회의 위임목사가 되었다. 만 28세의 어린 나이에 33년의 전통을 가진 부산에서 제일 큰 교회 목사가 된다는 것이 그에겐 부담이 되기도 하였지만 그는 잘 준비된 목사였음에 틀림이 없었다. 주기철 목사가 초량교회에 부임하기 전 1925년 10월에 서울에서는 조선신궁, 다시 말해 소위 일본 황실의 신을 모신 사당이 서울에 도착하였는데 이때부터 일본인 경기도 지사의 명령으로 서울 안에 있는 각급 학교의 학생들은 차례로 조선신궁에 가서 참배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신사참배를 하라는 것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이러한 일이 전국으로 확산될 것을 미리 예견하고 교회와 노회에서 이 일은 우리가 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기 시작하였다. 이유는 첫째가 하나님께 범죄행위요, 둘째, 우리 나라 국민이 일본의 천황을 숭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경남 총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의 기수가 되었던 것이다. 어떠한 시험과 핍박이 와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경성하여 싸워야 한다고 호소했다. 당시 그는 구덕산 기슭에 자기 기도처를 정해 놓고 수시로 밤샘 기도를 했는데 이튿날 내려 올 때 온몸이 비를 맞은 듯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고전해진다. 또 외출도 하지 않으면서 설교원고를 집필, 완성된 원고를 토요일 밤까지 수십번씩 낭독해 암송한 뒤에야 주일 설교에 나섰다고한다. 그는 또 이때 신사참배가 기독교 교리상 어긋난다며 `신사참배반대 결의안'을 경남노회에 제출, 정식 가결을 받아 내기도 했다. 그는 1936년 마산 문창교회에 이어 평양 산정현 교회에 부임해 갔는데 이즈음 일제는 신사참배라는 무기로 한국교회의 목을 죄어오기 시작했다. 일제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교인들을 모조리 구속하고 고문하는 잔악성을드러내기 시작했다. 탄압이 계속되자 당시 평양에서 열린 제 27회 장로회총회에서는 굴욕적인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무기력하게 신사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주목사와 그와 뜻을 같이하는 일부 목회자들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군의 총칼 앞에 당당히 맞섰다. 주기철 목사의 초량교회 사역 가운데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유치원을 개원했다는 것이다. 1931년 3월 20일 제1회 유치원생 10명을 배출시켰던 것이다. 어릴 때의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요즘도 교회가 하기 쉽지 않은 유치원을 당시에 시작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사람을 키울 줄 아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유치원을 개설한 일은 조국의 미래를 내다 볼 줄 아는 눈이 있었던 지도자적인 기질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어릴 때의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분이었다. 나이 30세에 이러한 안목을 가졌다는 것에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에 유치원은 오늘날은 유치원이 흔하여 유치원을 나오지 않은 아이들이 없지만 당시엔 유치원이라는 이름조차 몰랐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주기철 목사가 설립했던 유치원은 지금도 초량교회에서 삼일유치원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치원을 운영 중이다. 어느날 마산 문창교회에서 목사님을 초빙해 가려고 사람들이 왔다.당시 마산 문창교회는 여러 가지 갈등으로 당시에 교회가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목사님, 목사님이 아니시면 우리 교회가 다시 세워지기 힘든 위치에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 오셔서 교회를 안정시켜 주시고 저희들을 먹여 주십시요."라는 요청에 주기철 목사는 하나님의 부름받은 몸이 지금보다 어려운 교회에 가서 섬기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안정되고 인정받던 초량교회를 사임하고 마산 문창교회로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교인들은 대성통곡을 하며 목사님을 말렸다고 한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는 "이 교회는 안정이 되고 좋은 교회니 내가 없어도 되고, 힘들고 어려운 교회가 있으니 하나님의 부름인 줄 알고 떠난다"고 하면서 성도들을 안정시키고 마산 문창교회로 부임해 갔던 것이다.이러한 수고와 노력으로 마산 문창교회를 평안하게 이끌어 갈 수 있었다. 마산 문창교회에서의 주기철 목사의 사역 중에 꼭 기억할 만한 일은 그가 어디를 가든지 미래에 기둥이 되는 인재들을 양성하는 일에 부단한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음이다. 나라가 튼튼해지는 일이 인재를 양성하는 일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어느날 멀리 평양에서 그의 스승이었던 고당 조만식 장로와 김동원 장로가 산정현교회 대표로 주기철 목사를 찾아왔다. 오랜만의 만남은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얼마나 그리워하고 보고 싶었던 얼굴인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전한 후 조만식 장로가 오게 된 목적을 밝히며 평양 산정현 교회로 초빙하게 되어 주기철 목사는 평양으로 향하게 된다. 당시 평양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마산 문창교회를 두고 가는 섭섭함이 있었지만 순교의 땅인 평양의 부름을 받아 가게 된 것이다.

4. 투옥 생활

주목사는 1938년 부터 1944년 마지막 순교를 할 때까지 모두 5차례 총 5년 4개월 간의 투옥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옥중에서 몽둥이 찜질, 채찍질, 쇠못 밟기, 거꾸로 매달아 코에 고추가루 뿌리기, 발바닥 때리기 등 상상도 할 수 없는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신앙적 변심을하지않았다. 7년 동안 구속과 석방을 거듭하며 안질, 폐병, 심장병 등이악화돼 폐인이 되어갔지만 감옥에선 언제나 평화로운 얼굴로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감사찬양을 했다고 한다. 5번째로 구속돼 형무소에 갇히기직전 자택에서 늙은 노모와 처자, 20여명의 평양산정현 교회 교인들이 모인 가운데 그는 생애 마지막 설교를 남긴다. "우리 주님 날 위해 십자가 고초 당하시고 십자가 지고 돌아가셨는데 나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주님을 모른체 하리이까. 오직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5. 유언과 순교

그는 투옥된 이후 취조와 고문을 혹심하게 당했다. 그로 인하여 그의 몸은 약해지고 드디어 그는 옥중에서 순교를 하게까지 되었다. 때는 1944년 4월 13일이었는데 그날 사모님과 마지막 면회시에 남긴 말을 다음과 같다. "어머님 뵈옵구 싶구려...미음도 먹고 싶소...나는 가나 산정현 양떼들은 어찌하리이까?" 이때 사모님되시는 오정모 집사님은 "그는 염려하지 마십시오"하고 위로하였다. "그러면 안심하겠소. 어머님을 많이 위로해 드리시오." 이 말을 최후로 사모님과는 작별했다.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 숱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몸은 평양형무소의 한 귀퉁이에서 그날 밤 9시 30분에 주목사님은 49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내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붙잡으소서"하시고 웃으며 운명하셨다.

 

그는 첫 번째 부인을 사별하고, 두 번째 부인과 결혼하는 등 개인적으로 고난도 많았지만, 신앙적인 나라 사랑을 굳건하게 지킨 기독교 민족주의 목회자의 대표자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의 맏아들 주영전 전도사도 1950년 6.25 기간중 공산당에게 살해당하는 순교의 길을 걸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공로 국민장을 추서하였고,  1986년 국립묘지에 안장토록 했다.

출처 : 성화사랑
글쓴이 : 성화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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