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순천시 매곡동 매산학교 바로 아래에 자리 잡은 순천기독진료소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을 위해 살다 한국에서 생을 마친 휴 린턴(한국명 인돈) 선교사 부부가 결핵환자들을 위해 세웠다. 선교를 위해 물심양면 애쓴 조지왓스라는 성도를 기념하기 위해 1925년 세워진 이 건물은 성경학교, 선교사 숙소, 순천노회 교육관, 결핵진료소 등으로 용도를 달리하면서 명맥을 이어왔다. 순천기독진료소 2,3층에 자리잡고 있는 이 박물관에는 구한말부터의 기독교 선교현장을 담은 사진과 외국 선교사들이 서방세계에 한국을 소개하기 위해 제작한 달력 등 선교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또한 휴 린튼(한국명 인휴)선교사 등 외국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생활도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선교를 위해 물심양면 애쓴 조지왓스를 기념하기 위해 1925년 건립된 이 건물 1층에는한국에서 생을 마친 휴 린튼 선교사 부부가 결핵 환자들을 위해 세운 작고 아담한 병원이 지금까지 사랑의 손길을 전하고 있다. 또한 진료소의 2층과 3층은 한국기독교선교역사박물관으로 꾸며졌다. 전남선교의 선구자인 유진벨선교사의 외손이요, 대전 한남대학을 설립한 린턴박사의 3남인 인휴목사가 1970년에 세운 등대선교회가 그 뜻을 이어받아 2004년에 새롭게 개관했다. 이들은 진료소 3층에 린턴선교사와 그의 가족들이 사용하던 침대, 쇼파, 부엌도구 등 오랜 노력과 검증 끝에 당시 살던 생활 모습 그대로를 재현했다. 또한 2층에는 전남지역의 당시 선교사역을 상세하게 기록해뒀으며, 환자를 돌보고 돌아오던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해 사망한 린턴 선교사가 당시 입고 있던 옷과 고무신 등도 전시돼있다. 건물 2층 전시실에 전시돼 있는 타자기는 1920년 광주지역 선교사들이 사용한 것이다. 마당에는 유진벨 선교사의 부인인 로티벨의 묘비를 비롯, 이곳에서 젊음을 바친 선교사들의 기념비와 순교, 순직한 성도들의 추모비가 세워져있다.
지리산 노고단에 오르면 노고단 정상 바로 밑 매점.대피소옆에 일제강점기시대 외국인 선교사들이 지어놓은 50여채의수양관들이 들어서 있던 장소가 있다. 이곳 수양관지대는 한말과 일제강점기 시대 선교사들이 심신의 피로을 풀고 치료하는 안식처로 혹은 영적 재충전하는 장소로 또한 풍토병에 시달리던 선교사에게는 쉬면서 치료를 받던 주요한 곳으로 사용되어 졌던 곳이다. 1920년대 당시 한국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있었는데 이질이나 말라리아 같은 풍토병이 심하여 선교사 자녀 중 9명이 사망했다. 이 수인성 질병을 막는 방법이 6.7.8월 기온이 서늘한 고온지대를 생각한 것이, 적격지로 노고단을 택했던 것이다. 또한 이곳에서 특히 한글 성경번역과 주요 성경공부 교재의 번역이 이루어졌고 선교전략 계획을 수립하는 장소의 역할로 크게 기여한 장소이기도 하였다. 1948년 10월에 일어난 14연대 사건(일명여순반란사건) 당시 반란군의 거점으로 활용하던 것을 국군토벌대가 점령하였고 6.25 전쟁 시에는 빨치산의 거점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곳 노고단 밑의 수양관들을 모두 태워 버렸고 건너편 왕시루봉에 있는 몇 채의 집만 그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그 후 노고단에 조금 남았던 수양관의 흔적들도 사라호 태풍에 모두 훼손되었고 지금은 교회건물의 흔적만 남아있다. 1925년에 지어진 옛 건물인데도 서양벽난로 등이 설치되 있어 현대적인 건물 구조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여기 흔적만 남은 이 유적지는 신앙교육, 선교사들간에 단합, 그리고 교회지도자의 수련활동을 하던 곳으로 변요한(DR.Preston)선교사의 책임 하에 세워졌다.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삼면의 벽을 중심으로 복원을 기다리고 있다. 최근 한국기독교 총연합회는 페허된채 남아있는 지리산 노고단과 왕시루봉의 외국인 휴양소를 유적지로 복원해 미국 장로교회 한국 선교역사 현장으로 보유하고 교육의 장으로 삼으려고 계획중이다.
<겨울 설경>
노고단 선교유적지, 중간에 보이는 건물이다.
노고단 선교유적지
노고단 선교유적지
노고단 선교유적지
노고단 선교유적지
노고단 선교유적지
지리산 노고단 정상
<왕시루봉 선교유적지>
지리산 왕시루봉 전망대에서 본 광경
지리산 왕시루봉 선교유적지
외국인 별장으로 불리는 한국 주재 선교사 수양관 촌이다. 1948년 10월에 일어난 14연대 사건(일명 여순반란사건) 당시 반란군의 거점으로 활용하던 것을 국군토벌대가 점령하였고 6.25 전쟁 시에는 빨치산의 거점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곳 노고단 밑의 수양관들을 모두 태워 버렸고 건너편 왕시루봉에 있는 몇 채의 집만 그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지리산 왕시루봉 선교유적지
지리산 왕시루봉 선교유적지
지리산 왕시루봉 선교유적지
노고단 유적지 복원에 대한 이견 (월간 산 [생활/문화, 매거진] 2004.10.18(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문화재와 문화재보호구역으로 10만 평 지정 신청
폐허로 남아 있는 노고단(해발 1,507m) 건물폐허터가 문화재 가치가 높다는 주장과, 외국 선교사의 피서용 별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지난 3월 폐허된 채 일부 남아 있는 지리산 노고단 외국인 휴양소 유적지를 복원해 미국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 역사 현장으로 보전하고, 교육의 장으로 삼겠다며 남은 건축물의 전남도 문화재 지정과 문화재보호구역으로 10만 평을 지정해줄 것을 요청하는 신청서를 전남도청에 접수시켰다. 이에 따라 전남도는 훼손을 우려해 노고단과 왕시루봉의 건축물을 3월10일부터 9월10일까지 6개월간 가지정문화재로 지정했다. 가지정기간이 만료되어오자 기독교계는 ‘지리산 기독교 유적지 보전본부’(대표회장 이남식 전주대학교 총장, 사무소 서울 여의도동 소재)를 발족시키고 문화재 지정 신청서를 다시 전남도에 제출했다. 문화재 지정신청 대상은 3면의 일부 벽만 남아 있는 노고단의 석조 건축물과 왕시리봉에 남아 있는 목조건물 12동이다. 그리고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노고단 일대 10만900평(33.63ha)을 지정해 달라는 것이다. 신청서에 기재한 노고단 선교유적지 건설 내력을 보자. 일제시대인 1920년대에 우리나라 남부지역에서 활동 중이던 선교사들이 교육, 단합, 수양, 풍토병 극복을 위해 1925~1926년 노고단에 건립했다고 한다. 수양관 규모를 보면, 1922년 움막에서 시작, 925년 도쿄제국대학과 정식 조약을 체결, 1928년 한 해에 강당(예배당)을 포함한 18채의 석조건물을 건립했으며, 그 후 58동으로 늘었다. 사용 내역을 보자. 초기에는 선교사들이 수양과 수련회, 기도회가 주로 열렸으나 차츰 지리산 수양관의 명성이 알려져 한국교회 지도자 및 동남아의 많은 선교사들이 찾아와 선교 전략장소로 활용했다. 또한 1936년까지 여름에는 성경번역 장소로도 활용했다. 그러다 1940년대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총독부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2차대전 말기 미일 관계가 악화되어, 1940년 11월 대부분의 선교사가 귀국하자 일본 경찰당국은 선교사를 비롯한 외부인들의 노고단 출입을 금지시켜 폐쇄했다. 해방 후 1948년 여순반란사건의 좌익 빨치산 저항 근거지가 되었다가 6·25 이후 국군의 패잔병 토벌작전 시 노고단에 폭격을 가해 크게 훼손됐다. 그래서 1962년 왕시리봉에 교회와 거주용 목조건물 12동을 지어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풍토병 피하려 노고단휴양지 조성
문화재 지정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미국의 장로교회는 1892년에 한국에 첫발을 디뎠고, 전주에 온 것은 1893년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라도의 기독교 역사는 한국의 기독교 역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유적을 문화재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해 우리나라와 세계 기독인의 성지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고, 유적지를 복원해 교육의 장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측의 주장을 좀 더 들어보자. ‘지리산기독교유적지보전본부’는 5월21일 한국교회 100주년기념관 연수실에서 ‘지리산 기독교유적지 보전을 위한 제1회 심포지움’을 열었는데, 풍토병에 대한 대책으로 휴양지가 필요했으며, 성경을 번역한 장소로서 보존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감신대 이덕주 교수(한국교회사)는 주제발표 ‘지리산 기독교유적지의 역사적 의미’에서 수양관이 생기게 된 연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구한말이나 일제시대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장애물은 수구 정치세력이나 완고한 토착종교가 아니라 위생과 질병이었다. 풍토병인 설사와 열병은 면역이 약한 선교사들에게 치명적이었다. 그래서 기후와 풍토, 문화와 환경이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에게는 휴식과 회복을 위한 ‘특별한’ 공간이 필요했다”며, “소래나 명사십리 수양관은 일반 주민들의 통제가 어려우나 노고단은 주민들이 거의 찾지 않는 고산지대라는 점도 노고단 선택 이유의 하나였다. 3대 수양관 위치가 한국에서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라고 설명했다. 한세대 강명희 교수(동양사)는 주제발표 ‘문화재 지정의 당위성’에서 “성경의 한국어 번역작업은 1887년 성서번역위원회를 구성했고, 1910년 신약과 구약이 완역되어 1911년 구약 전체가 인쇄되어 시판됐다. 시판 이후 구약의 개역(개정)작업은 1920~30년대에 이루어졌으며, 평양에서 가장 활발하게 진행됐는데, 서울과 지리산도 중요 지역이다”라며, “여름철에 개역작업을 한 노고단수양관을 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노고단휴양지, 비서양인 사용불허
반면 보존가치가 없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종교시설이라기보다 주민들의 인권을 무시한 호화 별장단지 성격이 농후하다는 주장이다. 구례군지 편찬위원장인 문승이씨(82)는 “내가 구례국립보통학교 4학년(10살), 6학년(12살) 때 전교생이 노고단에 소풍갔었다. 호텔도 있고, 전깃불도 켜져 있고, 풀장과 테니스장도 있었다. 전부가 네모반 듯한 돌로 만든 돌집이었다”고 증언했다. 당시의 시설물은 영빈관(호텔), 강당(2층 높이, 33평), 발전실, 상점, 진료실, 목공소, 주택 등 58동인데, 33.5평, 33평, 31.6평 등의 규모가 큰 건물도 있었다. 흰색 석영이 박힌 난로도 있었다. 남장로회 선교사 27명의 소유 건물은 41동인데, 당시 시가로 53,477엔(16,043달러)라고 한다. 노고단 수양관 건설비가 적지 않은 액수라는 걸 짐작케 한다. 김모씨(55·구례군 황전리)는 “당시 마을 주민들이 일당을 받고 1인이 40kg의 모래를 저울로 재고 져 날랐으며 시멘트와 함석도 옮겼다”고 말했다. 돌과 목재는 현장에서 조달했다. 체육시설로는 풀장, 테니스장, 골프장, 농구장, 배구장 등이 있었고, 테니스대회, 음악연주회 등도 열었으며 사냥, 스키, 등산도 했다. 이러한 시설을 이용하는 외국인들은 노고단까지 어떻게 오르내렸을까? 화엄사 일주문 앞의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가마나 지게를 타고 오르기도 했다. 화엄사에서 노고단으로 직접 오르는 코스는 하나 있었는데, 한 사람이 지날 정도의 희미한 급경사 오솔길이었다. 문승이씨는 “대나무로 만든 가마에 선교사를 올려 앉히고 4명이 들고 올랐다. 선교사는 거의 드러누운 자세에서 책을 보고 있더라”고 당시 목격담을 말했다. 해방 후 등산객이 이용하는 노고단대피소를 관리했던 함태식씨(80)는 “가마나 지게를 부녀자와 어린이 등이 노임을 주고 이용했으며 젊은이들은 걸어서 올랐다. 지게는 반대방향으로 걸터앉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말했다. 당시 한국인은 이곳을 이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어지간한 지역 유지도 숙박을 거절당했다고 한다. 서춘(徐椿·19??-19??)은 1936년 8월6일자 조선일보에 ‘남조선 편력기행(三) 노고단의 피서지’에서 “發電所까지 설치햇고, 游泳場(풀장), 庭球場도 만드러 노코, 멀리서 오는 손님을 위하야 호텔까지 잇다. 이 호텔은 西佯人만 드린다”며 “노고단 경내에는 서양인이 아닌 타민족은 별장 짓기를 불허한다”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구역경계에 ‘非西佯人 出入不許’라고 써부치고 일체로 타인을 드리지 안엇는데 이에 인근 주민들은 분개하야 주민 거주구역 경계에 ‘西洋人 出入嚴禁’이라 써부처 상호간 교통을 단절해 버렷었다”라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해 구례문화원장 박하운씨(68)는 “저들만의 휴양을 위해서 고산 정상에 대단위 마을을 인위적으로 만들고 가마 타고 오르내리는 게 선교정신에 적절할까?”라며 “여름 한 철 성경번역작업 했다고 문화재 지정까지 한다면, 구례군의 3·1운동 때 태극기를 만든 장소인 박경현씨의 사랑방부터 문화재로 지정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분개했다.
고려 조정이 남악산신제를 지내던 곳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통계연보는 노고단 수양관을 종교시설이라 표현하지 않고 ‘노고단 외인 피서지’라고 적고 있다. 문승이씨는 “지리산은 우리나라 오악(五岳)의 하나로 고려 조정 등은 노고단에서 남악산신제를 지냈다. 이곳에 피서지를 만들더니 이제는 피서지 복원을 기독교 유적지 복원이라 하는 것은 한민족을 모욕하는 일이다”라고 주장한다. 1699년 숙종 25년에 작성한 용성지에 의하면 ‘지리산신사(智異山神祠)는 소의방(노고단에 속함)에 있다. 매년 봄과 가을, 그리고 정조에 임금께서 향을 내리시어 치제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승이씨는 또한 “화엄사, 천은사, 연곡사의 주산이 노고단이다. 불교의 성지 주산 머리에 타 종교가 폐허가 된 피서지를 복원하겠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박한다. 이러한 수양시설로 인한 자연훼손은 없는가 보자. ‘지리산기독교유적지보전본부’는 왕시리봉 건물 12동도 문화재로 지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해방 후 노고단 휴양시설이 파괴되자 선교사들은 1961년에 왕시리봉에 주택 5동과 수영장, 테니스장을 허가 없이 불법으로 만들었다. 그 후 토지 소유주인 서울대학교의 양해로 금년 2월29일까지 임대계약했으며, 계약기간이 끝나자 서울대는 철거를 요청한 상태다. 왕시리봉 일대는 자연휴식년제 구역으로 등산객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선교사와 선교사 2세 가족 등은 특히 피서철이면 수시로 드나들고 있다. 이들의 휴양을 위해 10개 난로와 온돌용 장작을 주변 숲에서 조달하면서 천연림을 훼손시켰다. 노고단 수양관도 조성 시에 돌을 캐고 나무를 베어냈고, 해마다 100여 명이 수십 개의 난로용 땔감으로 주변 산림을 훼손하고 계류를 오염시켰을 것이다. 자연공원협회 지리산남부지부장 김종복씨는 “공원 관리사무소는 왕시리봉 입구 2개소에 초소를 세워놓고 등산객의 입산을 막고 있다. 그러면서 선교사 가족들의 피서를 위해 왕시리봉의 자연을 훼손할 수는 없다. 또한 노고단이 기독교 유적 문화재로 지정되면 복원할 건축물을 이용하려는 종교순례 행렬이 줄을 이을 것이다. 그러므로 왕시루봉이나 노고단의 건물 잔해를 철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남 영광은 6.25전쟁당시 라디오 방송에서는 남한이 더 우세하다는 오보로 전쟁에 대해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전국에서 가장 큰 전쟁피해를 보았던 지역이다. 그러던 중 7월 23일 갑자기 공산군이 몰려들었다.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군수도 피난을 못가고 피살되었다. 공산군들은 우선 교회를 폐쇄했다. 1939년에 세워진 염산교회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자 피난을 거부한 김방호 목사가 성도들 집을 오가면서 비밀리에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다.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고 국군과 유엔군이 영광읍내로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마을에 퍼지면서 기독청년들이 우익청년들과 함께 만세 환영대회를 준비하고 주도하게 되었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공산당들이 이를 분히 여기고 복수하게 되어 염산교회의 순교가 시작되었다. 첫번째 순교자는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염산교회 23세의 청년 기삼도로 죽창으로 여러번 찔려 순교당했다. 그는 당시 목포성경학교 3학년으로 목사 지망생이었다. 두번째 순교자는 노병재 집사였다. 그들은 노집사를 수문 뚝방까지 끌고가 수장시키려 했으나 노집사는 스스로 물로 뛰어들어 찬송을 부르면서 순교했고 그의 일가족 까지 9명이 순교했다. 세번째 순교자로 10월 13일 염산교회의 1대 교역자였던 허상 장로와 부인이 순교했다. 봉덕산 골짜기로 끌려가 매를 맞고 죽창에 찔러 죽였지만 장로님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고 한다. 이후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염산교회 교인들은 수문통 앞에서 무참히 살해되어 순교하게 되었다. 사람을 1m씩 거리를 두고 묶어서 엄지손가락을 십자가 모양으로 해서 가슴에 꽉 조여 매고, 돌도 사람 머리만한 것으로 가슴에 묶어서 그 여러 사람되는 인원을 뒤에서 20명이 동원되어서 한꺼번에 빠뜨려 죽였다. 마지막으로, 장병태 성도 집에 거했던 김방호목사를 가족들이 보는 눈앞에서 창과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말았다. 이어서 김목사 사모를 그리고 또 다섯 아들과 8세와 5세 손자를 차례로 죽였다. 1951년 2월 24일 교인의 3분2가 순교를 당한 염산교회의 살아남은 성도들은 다시 모여서 땅 속에 항아리에 숨겨 놓은 성경책과 마루광 항아리에 숨겨둔 찬송가를 꺼내어 새롭게 교회를 세워나갔다. 1997년부터 순교기념 사업을 추진하여 2,000여평의 종교 용지를 마련하고 순교 공원을 조성, 순교자료 전시관과 순교 교육관을 개관하여 200여점의 자료 및 유물을 전시해 놓고 있으며, 77인의 순교비를 완공하여 교회 앞에 세워 두었다. 또한 ‘77인의 순교사’ 책자와 DVD를 제작해 이들의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해 두고 있다.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1리 338-6에 위치해 있습니다. 옛 이름은 '지령리'라고하며 지금은 '용두리'라 부르고 있습니다.지령리는 산이 서쪽으로 병풍같이 에워싸고 있으므로 산서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옛부터 산이 에워싸고 물이 돌아 흘러서 인물이 많이 날 땅이라 하여 지령리라고 불러왔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병천이란 말도 순우리말로 하면 '아우내','아오내','아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이름이 생기게 된데는 병천을 멀리 또는 가까이에서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이나 봉우리들에게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들이 모두 병천에 와서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천이 이곳에 와서 서로 아우르고 있는 자연 때문에 아우내라 일컫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계속 이어지는 아우내 장은 병천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이 장의 개설은 1720년대 조선조 영조 때의 암행어사인 박문수가 조상의 묘 앞에서 시장을 연 것으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지령리에 복음이 처음 들어온 것은 1899년 스웨러 선교사에 의해서입니다. 그리고 그후 1901년에는 박해숙 전도사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점점 부흥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매봉교회
그러나 얼마후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도처에서 국권을 회복하자는 이름 아래 소위 을사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목적아래 시작된 의병운동은 먼저 지식인들에 의해서 항일 언론운동이 일어났고, 그리고 아울러서 애국적 유생들과 종교계 또는 전직 관료들에 의해서 상소운동이 일어났습니다서울에서 시작한 이러한 운동은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되자 이러한 의병들을 소탕할 목적으로 일본군이 도처에 파견되어 진정시킨다는 이름아래 갖은 횡포가 극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의병을 도왔다는 이유로 불태워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매일학교를 세워 ①농촌계몽 ②미신타파 ③문맹퇴치 ④독립운동 등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07년에는 전국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가하여 의연금을 모아 대한매일신문사에 보내기도 하였는데 여기에 참가한 숫자는 82명에 달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은 교회가 그들의 침략에 방해가 되자 다시한번 매봉교회를 불사르고 말았습니다.
매봉교회
그러나 교회는 꾸준히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기도하다가 드디어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것입니다. 이 운동에는 전교인이 참여하였고, 결국 교회는 집회금지령이 내려졌고, 있던 교회마져 불살라지고 말아 해방이 될때까지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처음엔 공주에서 선교사와 사부인이 왕래하여 복음을 전했으며 그 후 케블 감리사와 대목사, 안명도 전도사 등이 다녀가며 교회가 세워져 갔습니다. 선교사들의 교통수단은 주로 당나귀를 타고 다녔으며 이 소식을 들은 동네 어른, 아이들이 20리까지 고개를 넘어 마중을 갔습니다. 선교사들은 반갑다고 선물을 주기도 했습니다. 새 예배를 시작하던 날은 부근 동일에서 미국사람 구경도 할 겸 수백 명이 모여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복음이 이곳에 들어오자 복음이 불길이 번지듯 급속도로 전도가 되어 그 일대를 복음화 시켰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도 있으려니와 교회를 의지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대대로 유교를 숭상할 뿐 아니라 토질적으로 고집이 세고 강직한 곳이지만 그러한 아성이 무너지기 시작하니 쉽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유씨 집안은 물론 그 이웃인 조씨 집안까지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매봉교회가 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된 것은 1908년이래 지령리에 기독교가 들어오고 이 기독교를 통해서 얻어진 기독교의 정신이 민족독립운동에 열렬하게 참가하도록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러니까 병천 3.1운동은 물론 이 지역 6군에서 참가한 민족적인 운동이었지만 매봉교회의 운동이요 기독교 운동이었습니다. 유관순은 철저한 기독교인이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믿음의 사람이요, 유중무씨도 또한 그러하고, 조인원씨는 당시에 속회장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 분의 아들은 조병옥 박사로 물론 임시정부에서 공헌을 세우기도 했고, 서울에 유학을 가서는 정동교회의 교회학교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모두 매봉교회가 길러낸 훌륭한 애국지사들입니다. 또한 김구응씨도 철저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매봉교회는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는 민족교회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3.1운동후 모든 교인들이 투옥되거나 순교하게 되었고, 교회마저 일본인의 손에 불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교회는 계속적인 박해로 인하여 차츰 교인이 줄어 마침내 자연적으로 없어지게 되었으니 그때가 1923년경입니다. 해방 후 이화학교는 지령리 마을과 자매결연을 맺고 여러모로 원조를 하여 또 다시 복음의씨를 뿌렸습니다. 전 교회는 1967년 유관순 열사의 동기동창이며 당시 이화학교의 교장이시던 서명학 교장님께서 힘을 써 건립된 것입니다. 현 교회는 1998년 9월 기독교대한감리회 남부연회, 충청연회에서 6억을 들여 다시 건축한 것입니다.
매봉교회 예배실 (2005.5.5)
매봉교회 예배실 (2007.10.25)
매봉교회 예배실
구 교회당 머릿돌
매봉교회 입구 추모비
매봉교회 지하 전시실
유관순 이화학당 졸업사진 (스크랜튼 선교사와 함께)
유관순 이화학당 졸업사진, 뒷줄 오른쪽 끝
매봉교회 전시실
매봉교회 전시실, 옥중생활
전시실
류관순 열사
류열사의 본관은 고흥(高興) 류(柳)씨이며, 중시조 류태우의 10대손으로 1902년 3월 15일 충남 천안 군 동면 용두리 (현재 병천면 용두리 지령부락)에서 아버지 류중권씨와 어머니 이소제 여사의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습니다. 열사의 부친은 일찍이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한 개화인사로서 가산을 털어 향리에 흥호 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운동을 전개한 계몽 운동자입니다. 류 열사는 어릴 때부터 매봉교회 주일학교에 다닌 기독교신자로서 본래부터 총명하여 외국인 선교사가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시켰습니다. 1919년 3월 1일 만 17세의 소녀의 몸으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 하셨습니다. 일제의 휴교령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동년 3월 13일 독립선언서를 휴대하고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아우내장날인 4월 1일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천안, 연기, 청주, 지넌 등을 누비며 계획하였습니다. 3월 31일 매봉산의 봉화불을 신호로 4/1 장터에서 수천명이 모였고 열사께서 선봉이 되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이 시위로 류 열사의 부모를 비롯해 19명이 순국하였고, 류열사도 부상을 입은채 체포되어 공주감옥으로 송치되었습니다. "한국인으로 일본인에게 재판을 받을 수 없다." 고 항거하여 3년형을 받았으나 복심 법원에서 법정 모독죄로 처벌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8월 1일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었습니다. 옥중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계속 부르시다 헤아릴 수 없는 폭해와 악독한 고문에 못 이겨 1920년 10월 12일 오전 8시 만 18세의 나이로 순국하셨습니다. "나는 죽일 수 있어도 우리나라 독립은 막을 수 없다. 너희들은 반드시 망하고야 말 것이다." 라는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목숨을 거두셨습니다. 정부에서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 하였고 1972년 10월 14일에 봉화지와 생가지를 사적 230호로 지정,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유관순 수형기록표, 독립기념관
유관순 수형기록표, 독립기념관
유관순 재판기록부, 독립기념관
유관순 재판기록부, 독립기념관,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징역3년을 언도한 경성복심법원 재판기록
유관순 재판기록부
유관순 옥중 시위, 독립기념관
생가 안내문
유관순 생가 (2006.5.)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 위치한 유관순열사 생가는 1972년 10월 14일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만세운동 당시 일본관헌들이 가옥과 헛간을 불태워 유품 한 점 없이 모두 전소되어 빈터만 남아 있는 것을 1991년 12월 30일 복원하였다
전북 김제시 금산리 290-1, 모악산(母岳山) 기슭에 한국교회 초기형태인 'ㄱ자 교회' 형태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금산교회는 문화재로 지정된 교회이다. 그 이유는 단순히 이 교회가 유일하게 'ㄱ'자 교회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금산교회는 보존상태가 양호할 뿐만 아니라 한국식과 서양식 교회의 특징을 결합시켜 초기 교회건축의 한국적 토착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구조를 지니고 있는 건물로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편 지난 1989년 결성된 금산교회문화재보존위원회는 금산교회와 유광학교의 옛 모습을 복원하는 사업과 이자익 목사, 조덕삼 장로의 기념관을 세우는 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다. 금산교회는 지난 1997년 7월 18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36호로 지정됐다. 사진 위쪽으로가 금산사쪽이다.
전북 문화재 제 136호 교회
금산교회, ㄱ자교회(좌)와 현재교회(우)의 모습
금산교회, ㄱ자교회(좌)와 현재교회(우)의 모습
금산 ㄱ자교회 종탑
금산교회, ㄱ자교회(좌)와 현재교회(우)의 모습
현재의 금산교회
현재 금산교회 내부
ㄱ자 교회, 남자석(좌)와 여자석(우)
1908년 교인이 200명 이상으로 늘어나자 금산교회는 지금의 ㄱ자 교회를 짓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보수적인 시기라 남녀석을 구분하기 위해 ㄱ자로 지은 것이다. 동서양 건축양식을 절충해서 지은 교회당은 지금 한국 유일의 문화재 ㄱ자 교당이다.
금산교회 현판과 남자석 입구
금산 ㄱ자교회
내부 구조와 전시실
ㄱ자 교회 내부
금산교회의 내부는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북서쪽 모서리에 있는 5평정도의 강단은 2단으로 꾸며져, 결과적으로 3층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 전래의 제단구조이면서 동시에 '뜰, 성소, 지성소'로 이루어지는 성막의 3중 구조를 상징하고 있다. 이렇듯 금산교회는 복음의 토착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결과를 가져 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강단과 쪽문
또 금산교회는 강단 뒤쪽으로 목사들이 드나들던 조그마한 쪽문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몸을 숙여야 하는데, 목회자들은 이 문을 드나들면서 '겸손'을 배웠다고 한다.
강대상
강단 위에서 내려다본 구조
교회 내부는 강단의 좌측으로 여신도들이 앉는 자리이며, 정면은 남자들이 앉는 자리로 구별되어 강당과 여신도 좌석은 커튼을 치게 되어 있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 철저하게 지켜지던 시대의 자연스러운 모습인 것이다. 남녀가 서로 바라보지 못하던 차단막(커튼)은 시대의 변천에 다라 1940년대에 걷혔다고 한다.
여자석쪽에서 바라본 강단
남자석 내부
여자석
창문
남자석 천장의 상량문
이자익 목사
이러한 건물적인 특징 외에도 금산교회는 신앙적으로 매우 독특한 교회이다. 불교의 고찰 금산사와 증산교의 본부가 있는 김제에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1905년. 전주에 와 있던 미국 남장로교 테이트선교사(한국명 최의덕)가 이 지방 마방의 주인이며 지방의 부호였던 조덕삼과 그의 집안의 마부였던 이자익을 전도하면서 부터이다. 경남 남해 출신인 이자익은 당시 집안이 어려워 전라도 지역으로 와서 조덕삼을 만나 그 집안 하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주인과 하인이 나란히 입교하였으며, 교세가 커지자 교회에 장로를 세우게 되었는데 교인들의 투표 결과 주인 조덕삼은 떨어지고 그 집의 머슴으로 일하는 이자익이 장로로 추천되었다고 한다. 반상(班常)을 철저히 따지던 봉건 시대에 이것은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조덕삼 옹은 의연하게 교회 앞에 나가 말했다고 한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나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그리하여 집에 돌아와서는 주인과 머슴의 관계가 되고, 교회에 가서는 반대로 장로와 평신도의 관계가 되어 두 사람 모두 열심히 자기 직분을 다하였다는 것이다. 그 뒤 조덕삼 옹도 장로가 되었지만, 주인 조덕삼 옹은 후에 이자익을 평양신학교에 유학을 시켜 훗날 유명한 목사가 되게 하였고, 그 후 이자익 목사는 조선야소교장로회 총회 총회장을 3번이나 역임하는 큰 인물이 되었다.
테이트 선교사
금산교회는 1904년 봄 전주에 와 있던 미국 남장로교 테이트선교사(한국명 최의덕)가 이 지방 마방의 주인이며 지방의 부호였던 조덕삼과 그의 집안의 마부였던 이자익을 전도하면서 부터이다. 테이트 선교사는 금산교회 외에도 전주 서문교회 등 호남 일대에 50개가 넘는 교회를 지었다. 미국 미조라주 출신인 그는 시카고 매코익 신학교를 졸업하자 곧바로 조선에 와서 일생을 바쳐 하나님의 사업을 하였다.
조덕삼 장로
교회 초기 금산교회는 엄격한 교회였다. 당회록을 보면 '불신자와 결혼하 자 000 출교, 도박을 한 자 000 출교 등' 1908년 사재를 털어 교회를 건축한 조덕삼은 유광학교를 설립, 지역 청소년들을 교육했다. 유광학교에서는 한글을 비롯 우리나라 역사, 성경 등을 가르쳤으며, 매일 아침 예배를 드렸다. 양반의 신분으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신학문 교육에 힘쓴 조덕삼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조영호 장로에 의해 금산교회는 지탱돼 왔다. 그 뒤 조부와 선친의 뒤를 이어 국회의원을 지낸 조세형 의원이 이 교회의 장로로 피택되기도 했다. 1919.3.1 운동에 참여하였던 조덕삼 장로는 종당에는 찬송을 부르며 소천하였다.
ㄱ자 교회 내부 전시물
ㄱ자 교회 내부 전시물, 액자 사진은 전주 서문교회 초창기 사진(좌)과 테이트 선교사 사진(우)이다.
교회 공사중 발굴한 동전
2007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교회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1917년 7월 29일 당회록
조선 예수교장로회 역사
1941년 사진
풍금
100년 된 풍금으로 지금도 소리가 난다.
풍금 설명
<교회위치>
호남고속도로 금산사 IC 에서 1번국도 정읍방면으로 가다가 금산사(모악산국립공원)쪽으로 좌회전 금산사 바로 아래쪽(약 100m) 도로변에 있다. 주소-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290-1, 전화 (063)548-4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