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양림교회 기장(우), 통합(중앙), 개혁(좌) 전경, 호남신학교에서 내려 본 교회와 양림동 모습

 

1904년 창립된 광주 장로교의 모교회 양림교회는 3교회(기장, 통합, 개혁)로 나누어졌다. 최초의 교회는 현 기장 양림교회이며 1953년 6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분열로 통합측 양림교회가 분열되었다. 그리고 양림교회(통합)에서 양림교회(개혁)이 분열 되었다. 흥미롭게도 3교회 모두 교회 창립일을 1904.12.25로 기록하고 있다. 은혜롭게도 창립 100주년 창립 기념행사로 "양림교회 100년사(1904-1953, 양림교회 역사편찬위원회, 2003.11.)" 를 합동으로 발행하였고 1953년 이후 역사는 각 교회별로 "양림교회 100년사"를 발간했다. 

 

광주 양림교회 통합(우), 개혁(좌) 전경 

 

<한국기독교장로회 광주 양림교회(기장)>

 

광주지역 장로교 모교회 한국기독교장로회 광주 양림교회(기장, 양림동 290) 전경

 

광주지역 장로교 모교회 광주 양림교회(기장) 전경

 

1904년 12월 21일 유진 벨(배유지 선교사)과 오웬 가족이 광주 선교부로 이사하다.

1904년 12월 25일 오전 11시 크리스마스 축하예배에 광주 시민 200여명이 참석하였고  방안에 40여명이 앉아서 예배를 드리다.

    이 날이 양림교회의 최초의 예배였다.  벨 목사는 양림교회의 설립자이며 동시에 제1대 당회장이다. 

1905년 03월 예배참석 인원이 20명에서 200명 사이였고 4명이 세례 신청(특별반에서 공부)하다.

1905년 10월 스트레퍼 여선교사는 주일 오전 여자 성경공부반 가르쳤다. 

1905년 10월 주일 아침 예배에 250명 참석하였다.(평균 50명 출석) 35명이 기독교인이 되겠다고 표명하다.

1905년 11월 20일 놀란도 역시 광주의 양림리 교회 근처로 와서 벨 목사의 임시주택을 진료소로 개조하여 첫 진료를 시작하였는데

    광주의 의료구원의 산실인 광주기독병원의 시작이 되었다.

1906년 가을 벨 목사 임시사택에서 드리던 예배에서 광주읍 북문안 사창터(억만고)에 북문안교회를 신축하다. 그러나 "북문안교

    회"로 불리우게 된 시점은 1912년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1928)"에는 "양림리교회"로 부르고있다.

1907년 01월 예배당을 확장하고 2월 신앙사경회 개최하였고(W. F. Swallen이 주 강사로 설교하다). 4월 성례식 개최하였다.

    (세례교인 5명. 이 가운데 여자가 2명이다) 놀란 의사가 선교사 직을 사임하고 평안도 운산 금광회사 부속 병원으로 옮기고

    10월 프레스톤 목사부부는 목포로 옮겨가고 11월 그라함(Ella I. Graham) 독신 여 선교사가  도착하였다(여성과 아동 선교가

    시작하다) 교인은 약 60명정도

1908년 01월 집사 김윤수, 최흥종의 집사 임직식을 거행하였을 것으로 본다. 그해 3월 광주 남학교 시작되는데 평균 20명  출석하

    였고 양림리교회에서 남학교 심상과를 지원한다 의사 선교사 윌슨(Dr. Robert M. Wilson)이 부임하여  의료선교를 재개하고

    주일학교를 재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는데 주중에 교사반을 운영하였다.

1908년 09월 교인의 숫자가 125명이다

1908년 04월 광주 여학교 시작하였는데 평균 17명 출석하였으며 이것이 수피아 여학교이다. 세례교인 4명, 학습교인 18명에 대해

    성례전을 실시하였으며 곽(우영) 전도사를 선출하여 인근에서 전도사역에 전념토록  지원하기로 하였고 양림리교회 교우가

    곽 전도사의 급여를 담당하였다.

1916년  이기풍 목사가 제2대 당회장으로 부임하였다.

1919년4월  3.1운동으로 교회 터를 몰수 당한 후 오웬기념각에서 임시 예배를 드리다.

1919년10월 녹스 목사가 오웬기념각에서 남문밖에 남문밖교회를 신축하고 입당예배를 드리다.

1921년6월  남궁혁 목사가 제4대 당회장으로 부임하다.

1924년9월  전남노회 결의로 남문밖교회를 양림교회(선교사와 대다수 교인이 양림리에 거주하였으므로 교회를 이전)와 금정교회

    (남문밖교회, 황상호 장로와 잔류를 원하는 교인 중심)로 분립시켰다.

1953년6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분열로 중립을 선언하다 김재준 목사 지지하는 사람들은 기존 교회에 남아 "한국기독교장로회

    양림교회(현 기장 양림교회)로, 반대하는 사람들은 오웬기념각에 모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양림교회(현 양림교회 통합측)가 분

    리 설립 되었다. 여기까지가 "양림 100년사"이고 이 후 각 교회별로 100년사를 이어 나가고 있다.

 

 "양림교회 100년사(1904-1953, 양림교회 역사편찬위원회, 2003.11.)" 를 합동으로 발행

 

기장 광주 양림교회 100년사  

 

 

광주 양림교회(기장) 전경 

 

기장 양림교회 연혁, 교회 내 전시실

 

기장 양림교회 연혁

 

기장 양림교회 연혁

 

양림교회 역대 담임목사들        (출처- http://www.yangrim.or.kr)

 

 

유진 벨(배유지) 선교사 

제1대 배유지(벨) 목사와 두 아들        (출처- http://www.yangrim.or.kr)

 

제1대 배유지 목사 아이들과 한국아이들

 

1905년 양림동 모습

 

1904년 12월25일 첫 예배

 

1905년 벨(배유지 목사) 목사 사택

 

1906년 가을에 북문안(현 충정파출소 부근)에 교회를 신축하고 북문안교회라 칭했다.

 

1910년 북문안 양림교회

 

1919년 남문밖 예배당

 

제1 성전

 

 1936년 양림교회

 

주일학교 

 

1936년 주일학교 

 

제2 성전

 

제3 성전  

 

선교사역

 

기장 양림교회 내부

 

기장 양림교회 내부 

 

제8대 당회장 박석현 목사는 1950.9.27. 영암군 상월리에서 가족과 함께 순교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광주 양림교회 통합측>

 

대한예수교장로회 광주양림교회(통합, 양림동 92-10) 전경

 

교육봉사관(좌), 본당(우)

 

본당 전면, 기독간호대학 옆에 위치해있다. 

 

통합 측 광주양림교회는 1953년6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분열로 인하여 설립되었다.

 

양림교회 

 

양림교회  

 

창립 100주년 기념비이다. 1904.12.25 로 되어있다. 1953년 예장 통합측 교회로 분리 설립되었다.

 

오웬기념각(좌)와 양림교회(우)

 

옛 종

 

양림교회(통합) 내부

 

교육봉사관(우)과 본당(좌)

 

교육봉사관 편에서 본 뒷 모습

 

교육봉사관  

 

 

교육봉사관 

 

교육봉사관 내부

 

교육봉사관 전시물

 

교육봉사관 전시물, 1954년 교회 부지 마련  

 

1958년 현 교회 신축

 

1963년 여름성경학교

 

<대한예수교장로회 광주양림교회(개혁)>

 

 

개혁측 양림교회(양림동 113-1)는 통합측 교회에서 약 70m 인근에 위치해있다.

 

개혁측 양림교회  

 

 개혁측 양림교회

 

역시 교회 창립이 1904년으로 되어있다. 1954.5.4. 예장(통합) 양림교회에서 예장(개혁)교회로 분리되었다.

 

개혁측 양림교회 내부 

출처 : 성화사랑
글쓴이 : 성화사랑 원글보기
메모 :

영광 야월교회

 

배유지(유진벨)선교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전주, 군산, 나주로 하여 목포에 선교센터를 만들고 전라지방에 복음을 전하던 중 당시 육상도로가 열악하여 선박을 이용하여 서해안으로 북상하며 복음을 전하다가 법성포 인줄 알고 들어온 것이 야월리 포구에 정박하게 되었다. 야월리 포구에 정박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1908년에 염산리 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후에 이 교회를 야월교회로 개칭하게 된다. 일제시대에는 야월리에 일본의 침략정책의 일환으로 일진회를 만들어 전국적으로 지방유지 들을 매수하여 친일 세력을 형성하는데 이를 저항하는 뜻있는 세력이 전국적으로 퍼져서 소위 상록 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이곳에 와서 정착하며 농촌 잘 살기 운동, 애국사상 고취운동, 생활개선운동, 한글 가르치기 운동 등을 펴기 시작하였으나 일본의 반대로 중앙과 연락하는 과정에서 장애가 극심하여 잘 연락이 되지 않으므로 YMCA에 몸을 담게 되고 여기에서 이들은 복음을 듣게 되어 이들이 주축이 되어 야월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1950년 6.25 동란이 지나가고 9.28 수복이 될 대 기독교인들이 태극기를 들고 국군과 UN군을 환영했다 하여 공산군 잔당인 공비들이 마지막 철수 직전 교인들을 잡아 처형했다.  김성종, 조양현 영수와 최판섭, 최판원 집사는 염산 설도 수문 앞에서 개별적으로 끌어다 물에 빠뜨려 처형하였고 그의 가족들과 수많은 교인들은 두우리 쪽 큰 북재 넘어 공동묘지에 직경 6m 넓이의 구덩이를 파서 밤에 손과 몸뚱이를 묶어서 구덩이에 수장시키어 죽이기도 했다. 후에 한 구덩이에서 80구의 사체를 발굴하기도 했다.  이어서 그 해 10월 어느 날 그들은 교회당 건물까지 소각해 버려서 그 곳은 몇 년 동안 교회 없는 마을이 되었었다. 야월 교회 성도들은 하나같이 값진 신앙을 지키다가 한 분도 남김없이 살해되어 순교제물이 되어진 것이다.  교회가 불타고 교인이 한 명도 남김없이 순교하였고 교인 대다수가 생매장 되어 순교를 한 점이 한국 교회사에서 유일한 교회이다.

 

영광 야월교회

 

영광 야월교회

 

영광 야월교회 측면

 

영광 야월교회 측면

 

영광 야월교회 뒷면

 

교회 내부

 

야월교회와 순교기념탑

 

순교기념탑, 1990.11.22 준공

 

순교기념탑

 

순교기념탑

 

순교기념탑

 

순교기념탑 준공석

 

순교기념탑 건립 의의  

 

순교기념탑 순교자명단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1904년부터 광주를 무대로 활동했던 배유지(유진 벨) 선교사가 배를 이용하여 야월도(당시는 섬이었다)에 교회를 세움으로 이 지역에 복음이 들어왔다. 야월교회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해 문을 닫고 각 교인들은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과 더불어 곧 재건된 야월교회는 조양현 허숙일 두 영수가 교회 강단을 지켜왔다. 그러나 곧이어 불어닥친 이념의 갈등은 수많은 사람들이 동족이면서 서로 미워하게 만드는 씨앗을 뿌렸고 결국은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불러왔다. 생각하기도 힘들만큼 엄청난 희생을 당해야하는 일은 이 조용한 마을에도 생겨났다. 인민군은 야월교회에도 들어왔다. 교인이래봐야 고작 65명 밖에 되지 않는 작은 교회였지만 야월교회는 초대 교회처럼 사랑이 넘치는 교회로 소문나 있었다. 인민군과 함께 들어온 내무서원(북한의 사회안전원을 일컫는 말:편집자 주)은 야월교회를 접수하고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했다. 이때도 교인들은 가정으로 뿔뿔이 헤어져서 각각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야월교회 교인들의 이러한 소식을 들었던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한 마을의 좌익 청년들은 밤에 몰래 모여서 예배하는 이들을 색출해 어른 아이를 가리지 않고 교회로 모이게 했다. 모든 교인을 불러모았다는 보고를 받은 내무서원의 명령에 따라 인민위원회 위원들은 교인들이 모인 교회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인민군이 물러가고 교회에는 3년만에 안창근 전도사가 부임하였지만 '예수믿고 망한 동네'라며 주민들의 냉대가 심했다. 하지만 교회는 자라나는 유년부 아이들을 모아 놓고 예배를 계속했고 광주선교부의 도움으로 교회는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기독교인 순교기념관은 2006.6월 전국 교회의 헌금과 영광군청의 지원으로 연건평 2백50평 규모로 건립되었다. 기념관은 야월교회 순교자 뿐아니라 영광군의 기독교인 순교자들을 기념하고 있다. 2층으로 된 기념관은 1층에 역사 전시실과 기도의 손이 있으며 2층에는 대예배실과 순교자들의 모습들이 그려져있다. 신앙선배들이 한국전쟁 당시 흘렸던 '순교의 피'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준 다. 기념관은 야월교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순교비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야외 조각물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야외 조각물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야외 조각물  

 

승리의 십자가

 

승리의 십자가

 

천성을 향해 

 

천성을 향해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야외 조각물

 

익투스 십자가, 익투스는 그리스어로 "물고기"를 뜻하며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약자이다. 

 

익투스 십자가  

 

생명의 그루터기

 

 

생명의 그루터기

 

기독교인순교기념관 입구

 

기독교인순교기념관 입구 

 

 기독교인순교기념관 입구

 

 

순교의 의미

 

순교자 명단 

 

야월교회 순교자 명단 

 

염산교회 순교자 명단

 

기타 교회 순교자 명단  

 

관람안내

 

입구 전시물  

 

귀출라프

 

초기 선교사들

 

초기 선교사들

 

초기 선교사들, 아펜젤러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 사역

 

1층 전시실 입구

 

1층 전시실 입구 

 

한국교회 연대표

 

한국교회 연대표 

 

순교기념관 

 

야월교회 순교자 

 

야월교회 순교자 

 

야월교회 순교자 

 

야월교회 순교자 

 

1층 전시실 

 

유진 벨 선교사 (배유지 선교사)

 

유진 벨 선교사 (배유지 선교사)

 

호남지방 기독교역사 

 

1층 전시실 

 

선교사들의 전도

 

여행중인 선교사 

 

전도중인 선교사 

 

1층 전시실  

 

6.25 한국전쟁

 

인민군

 

1층 전시실 십자가

  

1층 전시실 십자가

 

1층 전시실 십자가

 

1900년대 초기 성경

 

1950년대 성경 

 

전쟁 속 폐허된 교회 

 

전시실

  

 

1층 전시실 

 

순교자 

 

불에 탄 서적

 

불에 탄 서적 

 

1층 전시물

 

 1층 전시물 

 

<기독교 고서 자료실>

 

기독교 고서 자료실

 

1층 특별전시실, 기독교 고서 자료실(김수진 목사, 고 김나미 권사가 기증한것이다)  

 

도서 기증자 김수진 목사에 대하여

 

1894년 언더우드 찬송가

 

1894년 언더우드 찬송가

 

한국교회 최초의 찬송가는 1892년에 감리교 선교사 존스와 로드 와일러가 편집한 <찬미가>이다. 그 전에는 중국 찬송을 중국식으로 발음하여 부른 것으로 전해진다. 장로교에서는 1894년에 언더우드가 편집한 <찬양가>와 1985년에 리 부인과 기퍼드 부인이 편집한 <찬셩시>를 발행했다. 이처럼 장로교와 감리교가 찬송가를 별도로 발행하다가 1908년에 위에 언급한 세 찬송가를 합하여 <찬숑가>를 발행했다. 1931년에는 이 <찬숑가>를 개편한 <신정 찬송가>가 나왔으나 장로교에서 사용을 거부함으로써 감리교만 사용하였고, 장로교에서는 1935년에 별도로 <신편 찬송가>를 발행했다. 이외에도 개인 혹은 군소교단에서 발행한 많은 찬송가가 있었다. 해방 후에는 초교파 합동찬송가 편집이 추진되어 1949년에 장로교와 감리교와 성결교가 참여한 한국찬송가위원회에서 <합동 찬송가>를 발행했다.

 

1912년 신약주석

 

1912년 신약주석  

 

기독교 고서 자료실

 

기독교 고서 자료실

 

기독교 고서 자료실

 

기독교 고서 자료실

 

 

기독교 고서 자료실

 

<기념관- 사랑과 평화, 화합>

 

1층 전시실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맞잡은 손(기도하는 거룩한 손)

 

기도하는 손

 

기도하는 손

 

1층 기도하는 손 

 

맞잡은 손 

 

1층 전시실

 

1층 전시실  

 

1층 전시실, 토마스 선교사 순교 장면  

 

1층 전시실, 토마스 선교사

 

1층 전시실, 토마스 선교사 순교 장면

 

순교 전 야월교회와 순교자들 사진

 

순교 전 야월교회와 순교자들 사진

 

2층 입구

 

2층 대 예배실

 

2층 십자가 고난화 

 

<2층 추모관>

 

2층 전시실 

 

2층 전시실

 

2층 전시실

 

2층 전시실

 

2층 전시실

 

2층 전시실

 

2층 전시실

 

2층 전시실 , 문준경 전도사(우)

 

맞잡은 손  

 

2층 전시실 

 

2층 전시실, 순교자 명단  

 

2층 전시실 순교자

 

2층 전시실 순교자

 

2층 전시실 순교자

 

2층 전시실 순교자

 

2층 전시실 순교자

출처 : 성화사랑
글쓴이 : 성화사랑 원글보기
메모 :

수경원 터와 광혜원

 

연세대 역사의 뜰 입구 

 

광혜원과 세브란스병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 광혜원(廣惠院)


1885년에 설립된 광혜원은 한국 최초의 현대식 병원이다. 1884년 미국 북장로교의 알렌(H.N.Allen) 선교사가 광혜원을 세웠다. 지금 창덕여고 기숙사가 들어 있는 자리이다. 그 당시 친일파 이완용의 서형인 이윤용이 살고 있던 집이다. 그 이전에는 김옥균등에게 개화사상을 고취했던 정승박규수가 살기도 했던 집이다. 입국 당시 알렌은 선교사 신분을 감추고 미국공사관 부속의사로 행세했다. 그러나 조선정부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복음을 전하려던 그의 계획은 뜻하지 않게 변했다. 갑신정변 중 중상을 입은 민비의 조카 민영익을 알렌이 헌신적으로 치료하자 왕실은 서양의술에 대해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고종 주치의로 임명된 알렌은 왕실의 지원을 힘입어 광혜원을 세웠고, 개원 13일 후 광혜원은 당시 의약촌이었던 구리개, 지금 을지로2가로 옮겨 고종으로부터 받은 이름인 제중원으로 개원했다. 제중원으로 사용된 집은 공교롭게도 갑신정병의 주모자 가운데 한명인 홍영식의 몰수당한 집이었다. 감리교의 스크랜턴, 장로교의 헤론 의사가 동참하여 1년 동안 1만명이 넘는 환자를 무료로 치료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제중원은 미국인 실업가 L.H. 세브란스로부터 거액을 기부 받아 1904년 세브란스병원으로 개칭했다. 이후 왕실병원인 제중원과 스크랜턴이 세운 민간병원인 시병원 등의 의료선교사역을 통해 남대문교회, 상동교회 등이 설립되어 의료선교가 조선의 선교활동에 가장 앞장서는 역할을 감당하게 됐다. 대표적 의료기관인 세브란스병원을 태동시킨 광혜원은 한국의 복음화에 본격적인 첫 테이프를 끊은 가장 중요한 기독교유적의 한 곳임에 틀림없다.    

 

광혜원 복원 건물

 

광혜원 복원 건물

 

광혜원 복원 건물

 

광혜원 복원 건물 

 

광혜원 현판 

 

광혜원 전시실 내부

 

연세의 뿌리 광혜원  

현재 복원된 광혜원은 당시 일반병동과 안과병동으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현재 연세대학교 교정에는 당시 실물크기대로 복원된 광혜원이 있다. 연세대 100주년 기념관 뒤편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는 광혜원은 연세대학교 창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복원사업이 추진돼 1987년 봉헌하게 됐다. 당시 862평의 대규모의 건물이었던 광혜원은 외래진찰실, 예방접종실, 전염병동, 일반병동, 부인병동, 대기실, 하인처소 등을 갖춘 종합병원이었다. 또 1886년 의학교육이 시작되면서 병동 뒤편에 강의실과 실험실, 그리고 학생들의 숙소를 마련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복원된 광혜원은 당시 일반병동과 안과병동으로 쓰던 건물 한 채만을 복원했다. 복원된 광혜원은 현재 연세사료관으로 꾸며져 있다. 광혜원 전체 축소모형을 전시하고 있으며, 광혜원의 역사, 알렌과 언더우드 선교사를 비롯한 세브란스 병원을 꾸려간 에비슨 선교사의 활약상, 그리고 성 서 한글번역의 약사와 선교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알렌의 광혜원 설립  

 

알렌의 책

 

에비슨과 세브란스  

 

원두우

 

언더우드 타자기

 

언더우드 타자기

 

전시물 

 

한국 성경의 역사

 

예수셩교젼셔 (1887년)

 

이수정 역본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신약젼셔 (광무 4년)

 

신약전서(1906년)

 

성경전서 (1910년)

 

광혜원  정원  

 

광혜원  후문 

 

수경원 터


당쟁의 제물로 비명에 숨진 비운의 왕자 사도세자(장헌세자)와 효장세자(일찍 죽음)의 친모이자 영조대왕의 후궁인 영빈 이씨. 이곳에 자리하던 영빈 전의(全義) 이씨의 원묘 수경원이 1968년 6월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서오능으로 206년만에 이장하였으나 당시의 정자각과 비각은 지금도 그대로 보존 되어있다. 이조 21대 영조대왕 후궁 영빈 이씨는 1696년에 서울 근교에서 출생해서 6살이 되던 해 궁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숙의와 귀인을 거쳐 30세 되던 해인 1726년. 정성왕후 서씨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가 자식을 얻지 못하자,   영조는 귀인이던 이씨를 빈으로 모셨다. 1764년 영조 40년 7월 26일 향년 69세로 타계한 소유영빈은 생전에 2남 6녀를 두었다. 그중 사도세자가 28세의 젊은 나이에 당쟁의 소용돌이로 뒤주에서 굶어죽는 참변을 겪고, 게다가 어린 나이의 효장세자가 요절하는 비극을 몸소 겪는 등, 파란 많은 생애를 보냈다.

 

수경원 터

 

수경원 터

 

수경원 터

 

세브란스병원 입구에 있는 알렌 선교사 흉상

출처 : 성화사랑
글쓴이 : 성화사랑 원글보기
메모 :

촬스 A. 사워 부부와 아들 로버트 G. 사워 추모비


촬스 A. 사워(1891-1972)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1921년 부인과 함께 내한 평북 연변선교부에서 숭덕학교 교장을 하였다. 안식년 후 1929년 목사 안수을 받고 1932년 공주 영명학교로 전임 농공분야와 실수 교육에 전념 공주 지역 농가 소득에 기여하였다. 1936년부터 감리교 총리원에서 회계직을 맡아보다 일제에 의해 1941년 본국으로 강제 송환 되었다. 1949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계로 교회 복구 사업에 헌신 하였다. 1949-1958년까지 연세대 외국어학당장으로 봉직 하였다.  1962년 70세로 은퇴하여  본국으로 돌아가 1972.9.13.  오하이오 애실리에서 별세 하였다. 로버트 G. 사워(1925-1995)는 촬스 사워의 둘째 아들로 1925년 한국에서 태어났다.  미국 웨슬리언대학교, 오하이오 대학을 졸업하고 1956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 1957년 부터 연세대 교수로 활동하였다. 이밖에 그는 배화여중고, 광성학교, 배제학교, 영명학교, 외국인학교 이사로 활동하였다. 1995년 미국에서 별세하였다. 촬스 사워 가족은 2대에 걸쳐 한국에서 헌신한 선교사 가족이다.

 

촬스 A. 사워 부부와 아들 로버트 G. 사워 추모비

 

플로렌스 힐(Hill, Riley Florence, 許日夫人, 1891-1922)

 

플로렌스 힐(Hill, Riley Florence, 許日夫人, 1891-1922)


영국에서 출생하여  만국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구세군 최초 선교사 일행으로 1908. 10. 1 내한하였다. 호가드 사령관의 비서로 일하다가 1909. 3. 27부터 충청지방관으로 대천, 은진, 서산과 전북 군산 등지를 걸어서 전도했다. 1912. 2월에는 호가드 부인과 대흥 홍산 지방의 험로를 말을 타고 다니며 집회를 인도 하고, 같은 해 4월에는 전북지방(여산, 은진, 익산, 고산, 금구)을 순회 집회하였다. 1913. 2월에는 경북 지역을 걸어 다니며 전도와 부인사업을 헌신적으로 수행하였다. 1913. 6. 11 힐(Hill, Alfred William, 許日)과 결혼하고, 남편이 충청지방관에서 사관학교장으로 임명(1917. 5. 3)되므로 서울로 옮겨 부인회 집회 인도와 여자 사관학생의 교육을 담당하면서 순직 선교사에 관한 글도 썼다. 1922. 1. 5 사관학교 사택에서 31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여 신태빈(Stevens) 사령관 집례로 장례식이 거행되고,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오벨리스크 형식의 묘비에는 "東出十三年餘之生命 爲朝鮮民族獻身日日歡迎", “Jesus, Jesus, Precious Jesus(예수, 예수, 귀한 예수)”라 쓰여 있다. 옆 자리에는 아들(윌프레드 힐)도 묻혀있다  (글 출처- http://www.yanghwajin.co.kr/신호철장로)

 

제임스 A. 웨이드와 리 맥클린톡 웨이드 부부의 묘

 

제임스 A. 웨이드 (1930-1983)


제임스 A. 웨이드는 1930.1.5. 일리노이 그라니트에서 출생하였다.1952년 시카코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1954년 미육군으로 내한 하였다. 1960년 부인과 함께 내한한 그는 연세대 음대 교수 등으로 폭넓게 활동 하였는데 많은 작고 활동을 하였다. 그 중 오페라 "순교자"는 유명하다. 1983.8.1.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하였다.

 

부인  맥클린톡 웨이드의 묘


리 맥클린톡 웨이드 (1936-1973)는 1936년 미국 세인트루이에서 출생하였다.  제임스 웨이드와 결혼하여 1960년 남편과 함께 내한 하였다. 용산 미군 도서관 사서로 1973년까지 활동 하였다. 1973년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백인 혼혈 주디 홀트(1955-1955)


주디 홀트는 1955.1..30 출생 버려진 전쟁 고아로 1955.6.22.  혼혈아 입양 창시자 해리 홀트(1905-1964)에 의해 입양되었다. 주디 홀트는 입양된 후 한달 후 1955.7. 21. 사망하였다. 1955.6. 해리 홀트는 내한하여 8명의 혼혈아를 입양하였다. 주디 홀트는 가장 나이 어린 아이로 잠간 동안 이나마 해리 홀트의 사랑을 받았다. 주디의 장례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집례 하였다.

 

 

 

 

 

 

 

 

 

 

 

 

 

 

 

 

 

 

 

 

 

 

 

 

 

 

 

 

 

 

 

 

 

출처 : 성화사랑
글쓴이 : 성화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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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홍보관(좌)와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우)

 

서울 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145- 8에 위치한 양화진 외국인 묘지는 정식 명칭이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다. 1893년 10월 24일에 개설이 허가 되었으며 면적은 13,224 제곱미터이다. 무덤은 514 여기가 있으며, 최초의 피장 선교사는 존 헤론이다. 이곳에는 초대 선교사와 조국 근대화에 헌신한 구미 각국의 저명인사 500여명이 묻혀있는 양화진 외국인 공원 묘역에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성금으로 선교기념관을 건립하여 그들의 선교정신과 숭고한 희생 봉사의 업적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후세에 전승키 위하여 1985년 1월 14일 재단법인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 제 5차 총회에서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한국 기독교선교회관을 건축키로 결의하였다. 이 사업이 1985년 6월 28일  "한국기독교 선교100주년 기념관" 기공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며 1986년 8월 20일 건조물 및 토목공사가 완료되고 9월 10일 조경 공사가 완공되었다. 이곳에는 선교 기념실, 자료실, 대강당, 외국인 연합교회 예배처소, 종, 소회의실 교육실, 목회자실, 부속실, 친교실,식당, 기관실, 다목적실, 야외 행사공간, 주차장, 관리인 숙소, 휴게실이 구비되어 있다. 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복음을 전해야 할 때 한국은 미개한 상태에 놓여있었다.그리하여 선교사들은 복음과 또한 문명화와 근대화 사역을 함께 수행해야 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을 병행해야 했는데 알렌은 제중원을 설치하였다. 이곳에서 언더우드,헤론, 감리교 의료 선교사 겸 목사 스크랜톤이 일하였다. 처음에는 알렌이 와서 일하였으나 밀려오는 환자를 혼자서 치료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언더우드가 약국의 일을 도와주게 되었다. 1885년 5월에 내한한 스크랜톤과 함께 같은 해 6월 헤론이 가담하였다. 부족한 약품들, 의료 재료들로서는 감당하기 역부족이었다. 날씨가 더워지고 전염병은 창궐하였다. 한국인들은 위생관념이 희박하여서 물을 끓여먹지 않아서 온 가족과 동네가 몰사하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헤론은 내한한지 5년만에 이질에 걸렸다. 그는 그곳에서 그렇게 순직했다. 이러한 제중원은 후에 미국의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의 실업가 <세브란스>가 1만 5천 달러를 희사하여 지금의 서울역 앞 대지를 구입하여 세브란스 병원이라는 이름을 갖게되고 세브란스병원이 생겨났다. 헤론은 이렇게 한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의료 선교에 뛰어 들었고 그는 그렇게 이질에 걸려 질병으로 숨져갔다. 그는 5년간이라는 짧은 선교의 현장에서 사역을 감당하다가 이방 땅에서 그렇게 뼈를 묻었다. 그는 조국보다도 자신의 가족 보다도 더욱 한국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의 묘지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 JOHN W. HERON, MD/who came to Korea IN  1885/MISSIONARY PHYSICIAN/ TO/ CORT ANT LEGATIONS/DERBYSHIRE ENG,1856/ DIED/  SEOUL JULY,1890/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그는 1885년 한국에 의료선교사로 와서 1890년  7월 여름에 순교했다. 그리고 그 비문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라고 자신의 신앙을 묘비에  적어놓았다.  헤론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선교에 대한 일념으로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 다른 사람의 병을 고쳐주었지만 자신은  그렇게 죽어갔다.  한국의 복음은 이런 사명자들의 결과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같은 곳에 잠들어 있는 많은  선교사들의 묘비에는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자신들의 묘비에 적으면서  순교의 길에 들어갔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A. R. 아펜젤러-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J.D. 언더우드,  "주님 ! 길고 긴 여행을 끝내고 이제 나는 안식을 얻었습니다." -G.A. 테일러,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H.B. 헐버트,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A.K. 젠슨-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R. 켄드릭-이곳에는 선교사들을 따라 왔다가 부모와 함께 순직한 가족들이 함께 있으며, 채 꽃피우지 못하고 부모도 함께 한국에 묻힌 아이들도 많다 이곳에 한국 복음의 선교를 위하여 숨진 사람들의 묘는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다.

 

신분별, 국적별 순교자

구분

어른

어린이

선교사

75

36

111

선교사,

군인 아닌 사람

46

10

56

미군부대와

관련된 사람

26

38

64

소속 불명

44

31

75

한국인

15

11

23

 

국명

인원수

국명

인원수

미국

265

캐나다

7

백러시아

54

스페인

4

영국

30

벨기에

4

프랑스

25

덴마크

3

한국

20

일본

1

호주

12

총계

425명

숫자에는 표지없는 무덤 80여기와 어린이는 포함되지 않았음

 

양화진 홍보관(2008.3.27 개관)


2008.3.27. 개관한 양화진 홍보관은 재)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및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그리고 마포구청이 함께 건립하였다.  "양화진홍보관’과 1층 ‘양화진홀’은  “조선의 밀알이 됐던 선교사들을 본받아 앞으로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빛으로 거듭나도록 도와 명실공히 기독교 최대의 성지가 되도록 함”에 개관 목적이 있다. 이재철(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목사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과 양화진홍보관에 대해 “피선교국이 선교사들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100% 자비로 보존, 관리하는 세계유일의 선교사묘원이며 세계최초의 전시관”이라 소개하며 “앞으로도 100주년기념교회는 묘지기 사명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입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홍보관(좌)와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우)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홍보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 

기념관 내부 제단       (출처- http://www.kmc.or.kr/)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 후면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안내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안내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안내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안내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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