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소래교회는 1883년 5월 16일 서상륜, 서경조 형제에 의해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솔래(松川理)에 세워진 초가집 예배당으로서 순수한 우리 조상들에 의하여 세워진 최초의 교회요, 한국의 뿌리가 되는 교회이다. 이후 1895년에 8칸 기와집 예배당으로 건축 되었으며, 1896년에는 다시 8칸을 증축하여 총6칸 32평이 되었다. 이 교회가 세워진 송천리의 명칭은 순 토박이말로 '솔샘'이었다. ‘솔샘’은 ‘솔내’로 변했고, 다시 그것이 '소래'가 되었는데, 마을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계곡을 흐르는 물은 황해로 들어간다.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의 작은 마을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1883년 5월.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기록되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1885년 4월 이 땅에 들어오기 2년 전의 일이었다. 소래교회를 만든 주역은 평안도 의주 출신의 서상륜·서경조 형제였다. 의주 사람으로 인삼 장사를 위해 만주를 오가던 서상륜(1848∼1926)은 장사에 실패하고 형 상윤이 장티푸스에 걸려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었을 때,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로스 목사와 매킨타이어가 구조의 손길을 폈고, 정성을 다한 간호를 받아 병석에서 일어나자 아우 경조와 함께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1879년 형제가 로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로스 목사의 성경 조선어 번역을 도와서 일을 했고 출판이 끝나기까지 로스 목사와 함께 지냈다. 1882년 10월 한글 성경 등 개신교 책자를 가지고 국내로 들어오던 그는 불심검문에 걸려 투옥됐고, 간신히 탈옥한 뒤 가족과 함께 친척이 살던 장연으로 이주하여 1883년 개신교회를 그의 고향 황해도 장연군 솔내에 설립했다. 그리고 서경조는 한국에서 최초로 안수를 받은 장로교 7인 목사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초가집으로 시작한 소래교회는 서씨 형제의 열성적인 전도로 활기를 더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전체 58세대 중 50세대가 교회에 나올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형이 서울로 활동무대를 옮긴 후 소래교회를 이끈 이는 동생 서경조(1852∼1938)였다. 그는 1901년 문을 연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편입해서 1907년 한국인 최초의 목사 7인 중 한 명이 됐다. 소래교회는 한국 개신교의 초기 역사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언더우드가 1887년 초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시작했을 때 처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소래교회 신자들이었다. 또 그해 9월 장로교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세워졌을 때 그 주축이 된 것은 서상륜을 비롯한 소래교회 출신들이었다. 언더우드 등 서양선교사들이 잇달아 이곳을 방문했고 한국에 새로 오는 선교사들은 으레 소래교회에서 한국의 전통과 선교 방법을 익혔다. 일제시대 소래교회는 개신교의 영향력이 강한 서북지방에서 규모는 작지만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교회였다. 해방 후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후 교회 신자들이 대거 남한으로 내려오면서 문을 닫은 것을 지난 1988년 총신대 구내에 복원했다. 북한 땅에 있던 약 3200개의 교회 중에서 유독 소래교회만 남한에 복원된 것은 이것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우리나라의 첫 번째 개신교 공동체이기 때문이다.지금의 총신대 양지캠퍼스의 소래교회는 1895년 처음 세워지고 이듬해 증축된 두 번째 예배당의 모습이다. 한국기독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 초대교회 믿음의 선배들의 자주적 신앙 전통의 계승과 한국 기독교의 문화유산으로서 역사의 산교육 현장이 되며, 북한 교회의 수복과 남북통일을 위한 기도 처소가 되게 하기 위하여 1988년 9월 30일 다시 증축되어 보존하고 있다.
기념관에 이르는 길의 양 옆에는 유족들이 세운 높이 50㎝의 자연석으로 된 '순교자기념비'들이 서있다. 여기에는순교자들의 이름과 그 밑에 성구들이 적혀 있다.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디모데후서 1:8). 이들 중에는 한국 최초의 세례교인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 죄로 2년 간의 옥고 끝에 1893년 순교한 백홍준 장로, 천황 숭배를 거부하다 7년간 옥고를 치루고 1944년 순교한 주기철 목사, 6·25 당시 교회당을 비우라는 공산당에 맞서다 총살당한 박영근 목사 등, 조선조 말엽인 1884년 이 땅에 기독교 씨앗이 처음 뿌려진 이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전도하다 숨진 순교자수는 2천 6백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순교기념비
서기훈 목사 순교기념비
도복일 목사 순교기념비
최인규 권사 순교기념비
주기철 목사 순교 기념비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囚獄)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답하랴". 기념관 입구 시비에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시 '옥중명상'이 새겨져 있다
2007년 한국교회대부흥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는 8. 31일 용인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에서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을 기념하는 타임캡슐 봉헌식 및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이날 세워진 기념비와 타임캡슐은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을 기념하고, 한국교회의 연합이 만들어 낸 역사적인 행사와 집회, 그리고 그 결과물들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졌다. 기념돌비에는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인 2007년을 상징하는 2007mm 높이의 화강암에 ‘부흥’이라는 글씨가 세로로 새겨졌다. 또한 가로 120cm, 세로 90cm의 좌대는 100cm 높이로 만들어져 100주년을 상징하고 있다.
타임캡슐 (2007-2107)
가로, 세로, 높이 각각 50cm의 정방형의 캡슐을 가로 세로 높이 80cm의 석실에 매설됐으며, 상암대회 프로그램북, 한국교회대부흥 100주년기념대회 동판, 성찬기, 상암대회 관련 DVD 등 19가지 품목이 매설됐다. 타임캡슐은 1백년 후인 2107년 8월 31일에 개봉될 예정이다.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 (기독교순교자 100주년 기념관)
개신교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린지 1백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으로 세워진 것이다. 1983년 당시 개신교 20개 교단들은 '한국기독교1백주년기념사업회'를 결성,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2천여 명의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기념관 건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처음 계획과는 달리 기념관 완공에는 여러 장애가 있었다. 부지도 그렇고 당시 12억 원대에 달하는 막대한 건설비용도 문제였다. 그러나 영락교회 정이숙 권사가 1986년 용인시 추계리에 10만여 평의 부지를 헌납했고, 1989년에는 이 사업을 위하여 재미실업가인 한규빈씨가 1백만 달러(당시 7억여 원)를 선뜻 내놓다. 이 자금이 기념관 건립의 초석이 되었고, 부족한 자금은 국내 많은 교회와 신도들의 헌금으로 충당되어, 순교자기념관은 1988년 8월 진입로 공사를 끝내고 기념관 기공식을 가진 뒤, 1989년 11월18일 준공기념 예배를 드리고 문을 열면서 기독교의 성지로 자리를 잡게 잡았다. 순교자기념관은 건축적인 면에서 아담하면서도 유려하여 91년 건축가협회로부터 `대한민국 건축가협회상'을 받기도 하였다. 기념관은 건평 3백66평의 3층 건물로.전체 직사각형에 가운데 원통형 모양을 넣어 유선을 강조했다. 양측에 원추기둥 두개가 받치고 있는 출입구를 들어서면 로비에 대형그림이 있다. 또 1866년 제너럴 셔어먼호를 타고 국내에 들어와 선교하다 순교한 토머스 목사가 성경 앞에 무릎을 꿇고 참수 직전에 있는 모습을 그린 대형그림도 있다. 혜초 김학수 화백이 기증한 40점의 역사화들 중 하나다.그림 옆 나선형 계단을 오르면 관람이 시작된다. 2층은 우측 회의실과 좌측 예배실로 이루어져 있다. 예배실에는 30년대 이전 개화기 교회들과 우리 사회 모습을 담은 사진 1백20점이 걸려 있다. 초가 교회 앞에 색동저고리를 입은 아이들.댕기머리에 야구방망이를 들고 야구를 하는 교회 어린이들. 갖가지 사진 속에서 보는 개화기 성도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좌·우 전시실이 연결된 3층은 순교자의 선영들과 성경, 편지 등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일제와 6·25전쟁 등을 거치며 목숨을 바쳐 기독교 탄압에 항거했던 2백2명의 순교자들이 사용하던 것들이다.선영과 유리탁자 속에는 손때 묻은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당신도 순교자가 될 수 있다'고 적힌 거울은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게 한다. 기념관에는 이밖에도 회의실에 마련된 서가에 교계 관련 서적 8백60여권이 비치되어 있고, 성서의 변천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20년대부터 최근까지 발행된 성서 40여권이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다.
부지 기증자
정원의 십자가
1층 전시관 입구 토마스 목사 순교 대형 그림
구림교회 18인 순교비
구림교회 18인 순절비
상월교회 25인 순교기념비
영암읍교회 24인 순교비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통로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십자가 작품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통로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십자가 작품
2층 예배실
2층 예배실에 전시되어 있는 초기교회 자료들
2층 예배실에 전시되어 있는 초기교회 자료들
꾸츠라프 목사 선교사역 그림, 혜촌 김성수 화백
최초의 여성 의료기관 보구여관 그림,
초기 배재학당 그림
초기 이화학당 그림
최용신 선생의 천곡학원 그림
소래교회최초모습(김학수화백그림)
유관순 열사(김학수 화백 그림)
한국 최초의 예배단 소래교회 사진
3층 전시실 순교자들의 사진
3층 전시실 순교자들의 사진
순교자 사진
토마스 목사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박관준 장로
이기풍 목사
조만식 장로
백인숙 전도사
최봉석(권능)목사
김유순 목사
남궁혁 목사
박봉진 목사
서기훈 목사
양주삼 목사
전덕기 목사
최인규 권사
3층 전시실 상동감리교회 코너
초기 상동교회 사진
상동교회 창설자 스크랜튼 선교사 편지
3층 전시실 평양 산정현교회 사진 전시물
웅천교회 헌금록
주기철 목사 성경
주기철 목사 경남 양산읍교회 전도사 시절 사진 (앞줄 중앙)
3층 한국교회 순교자 명단
순교자 명단
3층 한글성경 번역의 변천 전시물
성경번역 역사 전시
피살 종교인들
[목사(38)]
50여 명 무심천에서 피살
郭京漢(곽경한·60) 9월24일 청주형무소에서 피살. 일제시대에는 괴산, 보은, 청원 등지에서 목회하였고 광복 후 청주형무소의 목사로 재임했다. 6·25 전쟁 후 공산군에 체포되어 청주 내무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공산당은 郭목사를 비롯한 50여 명을 결박하여 청주 무심천으로 끌고 가 집단 살해.
金邦昊(김방호·56) 전남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염산교회 목사. 10월27일 염산면 옥실리 장병태의 집에서 부인 김화순과 자녀 등 7명이 피살. 이때 염산교회 신도의 과반수가 넘는 77명이 피살되었다.
金炳球(김병구·40) 전북 정읍군 신태인제일교회 목사. 「기독교대백과사전」은 공산군이 체포하여 살해한 뒤에 연못에 내던진 것으로 되어 있다. 정부의 「피살자명부」에는 金炳珠(김병주·49) 목사가 8월6일 신태인읍 연정리에서 피살, 「피납치자명부」에는 金炳九(김병구·49)라는 기독교인이 8월6일 전북 정읍군 신태인읍 연지리에서 납북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두 같은 사람인데 이름과 나이가 다르게 기재된 것이다.
金炳燁(김병엽·43) 전북 정읍군 신태인제일교회 목사. 「피살자명부」에는 金炳華(김병화) 목사가 8월6일 완주군 신태인읍 연정리에서 피살로, 「피납치자명부」에는 같은 사람이 납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김병엽과 같은 사람일 것이다. 한편 「기독교대백과사전」과 「한국기독교회사」(김수진, p.346)에는 6·25 전쟁 후 공산군이 물러간 뒤에 패잔병들로 조직된 빨치산들에게 1950년 10월10일 새벽에 피살된 것으로 되어 있다.
金相俊(김상준·27) 9월28일 강원도 횡성읍 北川里(북천리)에서 피살.
金洙鉉(김수현·56) 광복 후 부안읍교회와 진도읍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6·25 전쟁 후 진도읍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수문 밑 바다에 수장되었다.
金禮鎭(김예진·53) 서울 후암교회 목사. 8월2일 11시경 서울 신당동에서 여러 명의 북한군이 연행하여 군용차로 납북하였다. 김예진 목사는 정부가 6·25 직후에 조사한 피살자명부에 수록되어 있고, 「기독교대백과사전」에도 8월2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미아리 골짜기에서 피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956년에 적십자사에서 납북상황을 신고토록 했을 때에 가족들이 「납북」으로 신고했다. 가족들은 혹시라도 납북된 상태로 북한에 억류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운 희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金允實(김윤실·34) 서울 북창동 공동교회 목사. 8월11일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9월22일 피살.
金正福(김정복·61) 장로교 목사. 소록도교회에서 나환자를 대상으로 목회하던 중 6·25 전쟁 후 체포되어 고흥 내무서에 감금되었다가 공산군이 후퇴하던 9월28일 애국청년 30여 명과 함께 고흥읍 뒷산에서 피살.
공산군이 쇠창으로 찔러 죽여
金宗仁(김종인·51) 전남 법성포교회(장로교) 목사. 9월29일 공산군에 끌려가 어느 무밭에서 독살당하였고 부인과 두 딸, 한 아들을 포함한 교인 24명도 순교.
金鍾漢(김종한·45) 전북 만경교회(장로교) 목사. 김제군 백산면 신기리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다가 1950년 같은 군의 만경교회에 부임. 9·28 수복과 함께 후퇴하던 공산군은 김종한 등 교인 15명을 김제 내무서 뒤뜰 우물에 생매장하였다. 이때 금산교회 장로 조기남, 주교 교사 김윤철, 대송교회 장로 정기봉을 비롯하여 김형배, 하치오, 김성두, 권태술 등을 죽였고 대창교회 목사 안덕윤을 잔인하게 창칼로 찔러 살해.
金周鉉(김주현·41) 전북 완주군 삼례후정교회 목사. 9월27일 전주 내무서 뒤뜰에서 몽둥이에 맞아 피살. 「피살자명부」에는 7월27일 전주형무소에서 피살된 것으로 적혀 있다.
都福日(도복일·37) 충남 당진교회 삽교교회 목사. 9월21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삽교 근방에서 피살.
朴錫炫(박석현·52) 광주 양림교회(장로교) 목사. 9월27일경 장모인 전도사 羅玉梅(나옥매), 부인 金貴南(김귀남), 아들 박원택과 함께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에서 피살.
朴淵瑞(박연서·62) 대한기독교서회 목사. 대한기독교서회 편집부장을 지냈다. 정치보위부에 구금되었다가 8월1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피살. 9월19일 피살설도 있다.
裴永石(배영석·46) 전남 강진읍교회 목사. 8월6일 강진읍 장터에서 피살.
白南鏞(백남용·54) 복음교회 목사. 과도정부 입법위원을 지냈고 전북 김제에서 목회했는데 공산군 점령 치하에도 예배인도를 계속하다가 8월28일 연행되었다. 9월27일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피살.
孫良源(손양원·50) 전남 여수 나병원 애양원교회(장로교) 목사. 9월13일 애양원에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여수경찰서에 구치되었다 28일 미평공동묘지에서 조상학 목사와 함께 피살.
安德允(안덕윤 또는 德潤·53) 전북 김제군 죽산면 대창리교회 목사. 일제시대 2년 5개월 동안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 1950년 9월27일 대창리교회 앞 들판에서 공산군이 쇠창으로 찔러 죽였다.
元昌權(원창권·51) 전남 영광읍교회(장로교) 목사. 공산군이 진주한 후 피난 가다가 열한 살 난 아들과 임신 7개월의 부인이 함께 피살.
劉東熙(유동희·44) 「피살자명부」의 제주도 피살자에 등재되어 있다. 1950년 7월4일 평양 정치보위국에서 피살되었는데 어떤 경위로 평양에서 피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본적이 대동군 시족면 호남리이며 주소는 강동군 원탄면 송오리인 것으로 보아 북한 출신으로 월남하여 제주도에 거주하다가 국군을 따라 북한에 갔다가 피살된 것으로 추측된다.
심한 매를 맞고 피살
柳允洙(유윤수·51) 1950년 9월27일 전북 정읍군 신태인읍 인교동에서 피살.
李用善(이용선·45) 전남 구례읍 교회 목사. 공산군이 후퇴한 이후 1950년 12월9일 순천노회에 참석하고 귀가하던 중 지리산에 숨어 있던 공비들에게 피살.
李龍仁(이용인·38) 목사. 1950년 10월7일, 전남 영광군 춘남리 설도에서 피살.
李載珪(이재규·50) 전북 황등교회(장로교) 목사. 1950년 7월26일 오후 5시 전북 익산군 황등면 황등교회 사택에서 내무서원 2명에게 연행 납치된 후 변영수(장로), 안인호(집사), 이성권(청년회장)과 함께 피살.
李鐘德(이종덕·67) 충남 강경교회(침례교) 목사. 9월28일 공산군이 납치하여 금강 강변에서 총살.
林鍾憲(임종헌·44) 전북 고창읍교회 목사. 10월25일 고창읍내에서 피살. 「한국기독교회사」에는 9월28일 오후 2시 고창읍 뒷산에서 총살로 기록.
全仁善(전인선) 서울 남창동교회(장로교) 목사.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
鄭仁泰(정인태·34) 전남 무안군 몽탄교회(장로교) 목사. 공산군에게 교회당을 빼앗기고 고향인 함평으로 내려갔다가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10월24일 죽창에 찔려 피살. 그의 아버지 정재련(전도사)도 같은 해 12월6일 함평에서 공산군에게 피살.
趙興植(조흥식·37)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장로교 전도사이며 8월21일 빨치산에게 붙들려 간 후 팔치골에서 피살」. 한편 「피납치자명부」에는 목사로 기록되어 있고 「10월20일 전북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에서 납북」.
崔感恩(최감은·46) 위의 유동희 목사와 같은 경우이다. 「피살자명부」의 제주도 편에 등재되어 있는데 10월12일 평양 동창리 63번지 자택에서 피살되었다. 어떤 경위로 평양에서 피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崔明吉(최명길·44) 전남 목포 연동교회(장로교) 목사. 8월 초순 목포 건너편 둥근섬에서 예배를 보기 위해 교인 20여 명과 배를 기다리던 중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영암군 삼호분주소로 연행되어 그곳에서 심한 매를 맞고 피살.
黃德柱(황덕주 또는 德周·47) 공주형무소 형목. 감리교 목사. 8월20일 강원도 원주 내무서에서 피살.
金鳳河(김봉하·33) 충남 문산교회 전도사. 「피살자명부」에 7월31일 대전형무소에서 피살로 되어 있는 金鳳洞(김봉동)과 같은 사람으로 추정된다. 「피납치자명부」에는 7월23일 충남 서천군 문산면 수암리에서 납북.
羅玉梅(나옥매·50) 전남 영암군 상월교회 전도사. 일제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4년 5개월간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9월27일경 광주 양림교회 목사인 사위 朴錫鉉(박석현)과 딸 김귀남, 외손자 박원택 그리고 다른 교역자와 함께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에서 피살.
文俊卿(문준경·59) 전남 신안군 임자성결교회 전도사. 10월7일 전남 신안군 후증도 중동리 백사장에서 피살.
朴惠源(박혜원·37) 전도사. 8월13일 춘천형무소에서 피살.
吳秉吉(오병길·54) 전북 부안군 백산면 평교교회 전도사. 9월9일 공음면 내무서 뒤뜰에서 피살. 이튿날 같은 장소에서 두 아들과 며느리도 처형당했다. 이때 집사 김영해 등 덕암교회 교인 22명이 집단 피살.
李光年(이광년·34) 전북 고창군 대산면 사거리교회(장로교) 전도사. 10월16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피살. 「한국기독교회사」에는 고창군 공음면 덕암교회 전도사로 기록.
李德奉(이덕봉·51) 충남 금산군 수영리교회(장로교) 전도사. 9월22일 금산 비름고개에서 피살.
李馬太(이마태·31) 전북 정읍군 영원면 영성교회(장로교) 전도사. 9월25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27일 피살.
鄭在鍊(정재련·64) 전남 함평 구봉교회(장로교) 전도사. 12월6일 함평에서 공비들에게 피살. 피살된 전남 무안군 몽탄교회 목사 鄭仁泰(정인태)의 아버지.
趙龍擇(조용택·48) 전남 곡성군 옥과교회(장로교) 전도사. 전남 화순군 화학산에 피신하다가 9월29일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피살.
朱三植(주삼식·54) 전남 무안군 삼향면 옥암리교회(장로교) 전도사. 7월30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혹심한 고문에 시달리다가 마을 뒷산에서 피살.
池漢永(지한영·41) 전남 여천군 율촌면 장천교회 전도사. 9월28일 미평공동묘지에서 조상학, 손양원 목사 등과 함께 피살.
[소속, 납북 일자 또는 장소가 확실치 않은 전도사]
김대업 전남 해제 중앙교회 전도사.
金仁奉(김인봉·37) 전남 영암군 순회 전도사. 공산군에게 붙잡혀 피살. 장인은 피살된 장로 박병근.
김인재 전남 광주 선교부 전도사.
魯洪均(노홍균) 전남 영암군 서호교회, 매월교회 전도사.
朴淳信(박순신) 서울 영등포 목동교회 전도사. 공산군 패잔병에게 발각되어 피살.
申德哲(신덕철·40)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전도사.
신복균 전남 강진군 해남읍교회 전도사.
오교남 전남 진도 벽파교회 전도사.
鄭連行(정연행·62) 전남 옥구군 혜성교회 전도사.
조상학 경남 하동군 하동읍교회 전도사.
[장로(33)]
전세 불리해지자 학살
姜聲振(강성진·59) 전북 만경교회 장로. 9·28 수복 때 후퇴하던 공산군에 의해 목사 김종한 등 교인 15명과 함께 피살.
金桂洙(김계수·51) 전남 목포 연동교회 장로. 8월 초순 최명길 목사와 함께 체포되어 피살.
金東欽(김동흠·33)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시무 장로. 10월6일 밤 공비에게 붙들려 월출산 기슭에서 피살.
金斗炳(김두병·45) 전주 중앙교회 장로. 전주 광장에서 열린 인민재판에서 심한 구타를 당했으며 9월27일 전매국 창고에서 피살. 한편 정부의 「피살자명부」에는 이름이 金斗煥(김두환)으로 되어 있다.
金相天(김상천·54) 전북 완주군 봉동면 제내리교회 장로. 전세가 불리하자 공산군이 소방서 창고에 우익청년을 포함하여 50여 명을 감금하였다가 9월27일 집단 살해.
金容善(김용선·45) 전남 담양읍교회 장로. 10월5일 담양읍 남산 기슭에서 공비들에게 피살.
金應洛(김응락·45) 서울 영락교회 장로. 9월 영락교회에서 피살.
金在俊(김재준·49) 충남 금성군 금성면 상가리교회 장로. 8월22일 금성면 화림리 구주바위 골짜기에서 장로 김희식과 함께 피살.
金正鉀(김정갑·42) 「피살자명부」에는 金匹鉀(김필갑)이라는 장로가 8월23일 피살로 되어 있고, 「납북자명부」에는 金正鉀(김정갑)이 8월5일 전북 부안군 상서면에서 납북으로 되어 있다.
金熺植(김희식) 충남 금산군 군복면 외부리교회 장로. 8월22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금성면 화림리 구주바위 골짜기에서 장로 김재준과 함께 피살.
朴炳根(박병근·59) 전남 함평군 나산교회 장로. 8월5일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었는데 공산군이 후퇴할 때 함평읍내 향교리 뒷산 중턱에서 피살. 광주 숭일중학교 5학년이었던 둘째 아들 金圭(금규)도 공산당에게 총살당했고 전도사였던 사위 金仁奉(김인봉)도 9·28 수복 후 도피하던 공산군에게 붙잡혀 피살.
崔泳旭(최영욱·60) 기독교인. 광주 제중병원장. 美 군정 시기에 한국인 초대 전라남도 지사를 역임하였고 1947년 「호남신문」 사장으로 언론계에도 종사하였다.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광주교도소에 투옥되었다가 총살당하였다.
池漢永(지한영·41) 전남 여천군 돌산면 군내교회 집사. 9월28일 미평공동묘지에서 조상학, 손양원 목사 등과 함께 피살.
피살 일자 및 장소가 확실치 않은 집사]
고웅두 충남 오량교회 집사.
金東信(김동신)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집사.
김두환 경북 기계제일교회 집사.
김춘동(61)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문봉순(43) 전남 영암군 천해교회 집사.
박상문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집사.
朴仁在(박인재)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안수집사.
박일규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집사.
방후용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집사.
서상철 충북 청산교회 영수.
서석근(52)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申相翊(신상익·44) 전북 이리 제일교회 집사. 광주형무소에서 피살.
심만길 경북 육통교회 집사.
안인호 충남 부여군 황등교회 집사.
오죽현(77) 전남 영암군 천해교회 집사.
윤성전(70)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윤임례 전북 정읍 두암교회 집사.
李一(이일·45)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이민우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집사.
임유삼(60)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任子壬(임자임·45) 전남 영암군 학산면 매월리교회 집사.
鄭壽一(정수일) 충남 논산 병촌교회 집사. 같은 교회 교인 65명과 함께 피살.
조인심(60)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蔡水原(채수원)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집사.
한창교 경남 거창군 덕산교회 집사.
납북 종교인들
납북된 교직자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수는 개신교 목사 74명, 가톨릭 신부가 26명이었고, 장로 5명을 비롯하여 많은 교인들이 납북되었다. 납북된 주요 교직자 가운데는 종교계의 중요 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목사(77)]
새문안교회 金英珠 목사의 운명
具滋玉(구자옥) YMCA 총무 역임. 광복 후 조선기독교청년회 연합회 총무로 당선되었다가 정부 수립 후 경기도 지사 역임. 서울 종로구 누하동 187번지 자택에서 납북되어 백암산 줄기를 타고 끌려가다가 龍淵(용연)에서 약 20리 떨어진 산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權泰羲(권태희·45) 경북 출신으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문교사회위원장 피선. 납북된 후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발기인 겸 중앙위원으로 동원되었고 같은 해 8월에는 인민경제대학에 재학 중이었는데 10월까지는 평양에 거주.
奇世福(기세복) 6·25 전쟁 중에 납북되어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金庚鍾(김경종·56) 서울 후암동교회(장로교) 목사.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한 직후인 6월28일 오전 7시 서울 용산과 삼각지 사이 노상에서 인민군에 납치되어 아오지 탄광에서 강제노역 중이라는 사실을 원산에 살던 이 아무개 장로가 가족들에게 알려주었다.
金東哲(김동철·52) 서울 서소문교회(감리교) 목사. 7월23일 서울 서대문구 서소문동 75번지 자택에서 공산당원에게 연행 납북되어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金斗錫(김두석·61) 파주 봉일천교회(장로교) 목사. 9월18일 오후 9시경 서울 용산구 동자동 153번지 자택에서 민청원 3명에게 연행되어 동자동 내무서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납북.
金峠(김상·61) 종군목사. 9월12일 서울 서대문구 의주동 자택에서 납북.
金尙七(김상칠·53) 제7안식일교회 총무(목사). 7월27일 오후 5시경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590-9번지 자택 앞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어 동대문 내무서에 4일 동안 억류된 후 국립도서관에 있던 정치보위부로 옮겨졌다가 납북.
金聖元(김성원·68) 장로교 목사. 9월25일 전남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金誠源(김성원·78)이 완주군 일대에서 교역하던 중 납북.
金英珠(김영주·57) 서울 새문안교회(장로교) 목사. 함북 명천 출신으로 한때 총회의 정죄를 받았던 자유주의 신학의 목사. 광복 후에는 새문안교회를 개방하여 교파 통일을 위한 장로·감리교의 협의회와 초교파 기독청년운동의 진행을 위한 광장으로도 제공했다. 8월23일 오전 9시경 서울 종로구 신문로 1가 43 자택에서 연행되어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납북.
金元圭(김원규·49) 개성 감화원(소년원) 원장. 감리교 목사. 1946년부터 개성지방 감리사로 시무. 경기 개성시 관훈동 604-2. 7월6일 11시경 개성에 있는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이 납북. 1951년 5월 熙川(희천)까지 끌려갔을 때에는 다리를 삐어 굴신을 못 하는 상태였다.
金裕淳(김유순·69) 기독교 대한감리회 제9대 총리원 전도국 감독. 서울 북아현교회(감리교) 목사. 8월23일 오전 8시50분경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의 140 자택에 기독교민주동맹 이사장 金旭(김욱) 명의의 회의 소집장을 가지고 온 사람이 자동차로 연행 납북.
내무서원에 연행된 후 납북
金有淵(김유연·50) 서울신학대학 교수. 서울 신공덕동 성결교회 목사. 성결교단 잡지 「活天(활천)」 주무. 한국기독교연합회 기관지 「기독공보」 주필. 1923년 6월부터 1930년까지는 동아일보 京西(경서)지국을 경영한 일도 있었다. 1945년 9월부터 신공덕동 교회(現 신덕교회)의 담임목사로 재임 중이었다. 8월10일경 서울 마포구 공덕동 111-10호 자택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이건, 최석모, 박현명, 박유연 목사 등과 함께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에서 납북.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김성호 목사의 아버지.
金熙雲(김희운·38) 서울 중앙교회(감리교) 목사. 8월23일 오후 3시경 시내 노상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연행되어 정치보위부 지하실에 서울 지방의 목사 여러 명과 함께 감금되었다가 납북.
南宮爀(남궁혁·69) 한국인 최초의 신학박사·교수. 대한기독교연합회 총무. 8월24일 오후 11시경 경기도 독도 중곡리에서 정치보위부 고급간부 朴允模(박윤모), 崔鐸(최탁)에게 연행 납북된 후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朴萬春(박만춘·42) 대한 감리회총리원 전도국 총무. 감리교 목사. 6·25 전쟁 후 총리원을 지키기 위해 서울에 남아 있던 총리원 감독 김유순 목사 등과 함께 납북.
朴相建(박상건·54) 서대문형무소(장로교) 목사. 정부가 6·25 전쟁 직후에 조사한 피살자 명부에는 서대문형무소에서 피살로 기록되어 있으나 북한으로 끌려갔던 것이 확실하다. 7월13일 오전 11시경 서울 한강로 1가 183번지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6월28일 새벽 공산군에 의해 납북 기록.
朴璇齊(박선제·67) 경동교회(감리교) 목사. 태평양 무역(주), 국제 손해보험(주) 사장 역임. 공산군이 납북.
朴炫明(박현명·48) 성결교회 목사, 서울신학교 교수. 광복 후 교회와 신학교 재건에 앞장 서 1946년 재건총회 초대 총회장에 선출되어 3년간 시무. 8월23일 오후 3시경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5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에서 김유순, 이건, 최석모, 박형규 목사 등 성결교회 지도급 목사들과 함께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 납북되어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 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8월10일 납북 기록.
朴亨圭(박형규·51) 성결교회 목사, 서울신학대학교 사감. 8월23일 오후 3시경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5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김유연, 박현명, 이건 목사 등과 함께 8월10일 납북 기록.
方薰(방훈·58) 자교교회 목사. 감리교 총리원 이사. 8월23일 창성동에서 납북되어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白學信(백학신·52) 강화읍교회(감리교) 목사. 9월26일 밤 12시경 강화읍 신문리 549번지 자택에서 민청원 12명에게 연행 납북.
徐斗成(서두성·30) 경기도 용인군 외사면 백암교회(성결교) 목사. 백암중학교 교장. 7월28일 10시경 경기도 용인군 백암교회에서 보안서원 2명에게 연행되어 용인 보안서를 거쳐 수원 내무서에 감금되었다가 납북.
徐太源(서태원·46) 서울 정동교회(감리교) 목사. 협성감리교 신학교 교수. 8월23일 오후 3시경 기독교민주당원에게 연행 납북.
宋昌根(송창근·53) 한국신학대학장. 8월23일 오전 7시경 서울 중구 도동 자택에 보안대원이 와서 지프차로 연행.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북한으로 이송되었다는 사실을 함께 납북되었다가 탈출한 사람이 가족에게 알려주었다.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다. 한편 조철의 「죽음의 세월, 납북인사들의 생활실태」에는 1951년 7월 하순경 다른 종교인들과 함께 평양 근처의 대동군 문성리에 있는 산 아래 농가에 수용되었다가 사망으로 되어 있다.
宋台用(송태용·43) 서울 초동교회 목사. 1934년 성결교회 기관지 「활천」의 편집을 맡았으며 1935년 1월 창간된 「성화」의 편집 주임으로 창간에 참여. 8월27일 서울 중구 주교동 자택에서 납북.
沈明燮(심명섭·50) 감리교 목사. 대한기독교교육협회 협동총무. 8월23일 오후 9시경 서울 종로구 삼청동 35-100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3명이 와병 중인 상태에서 연행 납북.
安吉善(안길선·60) 서울 신당동 중앙교회 목사. 8월24일 오전 10시경 서울 성동구 신당동 333-80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에게 연행된 후 납북.
梁柱三(양주삼·73) 적십자사 총재, 감리교 목사. 8월23일 기독교연맹 이사장 金旭(김욱) 명의의 소집통지서를 가지고 와서 서울 서소문교회 목사 김동철과 함께 납북.
吳澤寬(오택관·63) 장로교 목사. 제헌국회의원으로 한국독립당 옹진군당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로 독립운동가, 정치인. 9월2일 저녁, 서울 종로구 혜화동 22-76 자택에서 민청원에게 연행되어 정치보위부에 감금되었다가 납북. 문공부 장관, 동아일보 사장, 기독교방송 이사장을 지낸 오재경이 장남이다.
兪世根(유세근·41) 대한성결교회 서울시 독립문교회 목사. 8월23일 오후 4시경 서울 독립문 성결교회에서 수요예배를 인도하고 교회당을 나오다가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8월10일 경성신학교 교수들과 함께 납북.
劉在獻(유재헌·46) 장로교 목사. 임마누엘수도원 부흥사. 8월15일 서울 서대문구 구기동 223 기독교 사업체인 修禱園(수도원)에서 정치보위부원이 연행 납북.
柳禎喆(유정철·46) 기독교 장로회 신남포교회(장로교) 목사. 8월21일 오후 10시경 중구 장충동 2가 162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이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시무 중이던 신남포교회에서 6월23일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어 평양감옥에 감금되었다가 공산군에 피살.
尹聖浩(윤성호·32) 장사동교회(감리교) 목사. 9월19일 오후 3시경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서 내무서원 수명에게 트럭에 실려 연행된 후 소식 두절.
특별회의 소집 후 납치
李鍵(이건·53) 서울신학교 교수. 성서학원장. 8월23일 오전 9시경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5번지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에서 기독교민주동맹원 3명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김유연, 박현명 목사와 함께 8월10일 납북.
全用燮(전용섭·33) 충북 청안교회(장로교) 목사. 9월17일 12시경 청주시 문화동 수도국 밑에서 후퇴하던 북한군이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9월26일 공산군 패잔병에게 체포되어 우암산에서 피살.
全珍珪(전진규·56) 서울 성동교회(現 보문교회) 목사. 대한감리회 전도국장. 서울 동지방 감리사. 연희대학교 재단이사, 전국주일학교연합회 회장, 기독교연합회 간사. 8월23일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318-16 자택에서 납북.
田斅培(전효배·65) 서울 금호동교회(감리교) 목사. 서울 동지방 감리사. 8월23일 밤 12시경 신원을 알 수 없는 2명이 마포구 아현동 산 11 자택에서 연행하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하였다가 납북.
鄭達雄(정달웅·35) 서울 청파동 감리교회 목사. 8월3일 새벽 5시경 서울 용산구 청파동 감리교회 사택에 내무서원 3명이 와서 특별회의가 있다면서 연행 납북.
鄭致鎬(정치호·33) 서울 미암교회 목사. 8월13일 새벽 2시경 서울 돈암동 산 11번지 미암교회 사택에서 정치보위부원에게 2명에게 연행되어 돈암동의 안재홍(국회의원, 한성일보 사장, 납북) 집에 있는 방공호에 감금된 후 면회, 의복 및 식사 차입 등이 일절 거절당한 채 심야에 납북.
曺相文(조상문·53) 서울 북아현교회 목사. 8월23일 오전 8시경 서울 마포구 북아현동 9-1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3명에게 연행되어 국립도서관에 있던 정치보위부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연행 납북.
曺喜哲(조희철·50) 서울 신암교회 목사. 7월23일 오전 노상에서 인민위원이 연행 납북.
강계에서 발진티푸스로 사망
朱在明(주재명·32) 장로교회 목사, 8월3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175 자택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어 마포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납북되어 12월에 강계까지 끌려가던 중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
朱埰元(주채원·46) 마포형무소 형목. 서울 향화동교회(장로교) 목사. 7월27일 오후 10시경 서울 마포구 아현동 468-2 자택에서 마포 내무서원 2명이 연행하여 정치보위부에 감금한 후 납북.
陳學哲(진학철·54) 장로교 목사. 7월5일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황해도지역에서 목회활동을 하다 공산군에게 피랍으로 기록.
車敬昌(차경창·51) 서울 수표교회(감리교) 목사. 6월 하순경 남하 도중에 경기 수원(또는 오산) 부근에서 내무서원이 연행 납북. 몇 년 후 월남한 어떤 여자 교인이 북한 어느 곳에 수용되어 있다는 소문을 들려주었다.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6월28일 외출하였다가 공산군에게 납북.
崔相殷(최상은·45) 서울 응암동교회(장로교) 목사. 함남도청 사무국장. 8월11일 오후 7시경 서울 종로구 원남동 147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이 연행 납북.
崔相鉉(최상현·61) 기독교회신학교 교수·목사. 美군정청 군정장관 고문. 8월25일 오후 9시경 서울 성북구 돈암동 482-58 자택에서 인민군 2명이 연행.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된 사실을 들었으나 그 후 소식 두절.
崔錫模(최석모·61)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1949년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총회장 피선. 8월23일 오후 3시경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1-379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이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이건, 김유연, 박현명 등 성결교회 지도급 목사들과 함께 8월10일 납북.
崔元初(최원초·45) 장로회 목사. 8월23일 새벽 1시경 서울 중구 장충동 2가 162번지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3명에게 연행 납북. 신안주 방면으로 끌려간 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었다.
崔宗默(최종묵·54) 서울 궁정동교회(감리교) 목사. 7월 공산군 정치보위부원에 의해 납북
崔泰龍(최태용·53) 대한복음교회 목사. 국민훈련원 원장. 정부의 농민회(現 농협) 부회장. 종로구 명륜동에 있는 친구 柳錫東(유석동)의 집에 은신 중이었는데 9월6일 오후 10시30분경 정치보위부원 3명이 가택을 수사하여 최태용과 유석동 등 3명을 연행하였다가 이튿날 두 사람은 석방하였으나 최태용은 목사라 하여 국립도서관 정치보위부에 다른 종교인들과 함께 감금하였다가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9월11일 공산군에게 체포된 후 피살.
許殷(허은·37) 서울 해방동교회 목사. 7월25일 12시경 서울 중구 회현동 일출아파트 자택에서 내무서원이 연행해 중부 내무서에 감금하였다가 납북.
玄碩鎭(현석진·44) 경기도 광주군 둔전리교회(장로교) 목사. 7월14일 새벽 4시경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둔전리교회 사택에 같은 마을 내무서원 4명이 친미파이며 미국의 연락자, 국군에게 식사를 대접했다는 등의 이유로 같은 교회의 장로 金德男(김덕남)과 함께 연행 납북.
[소속 및 납북 일자와 장소가 확실치 않은 목사]
金鳳圭(김봉규) 강원도 철원교회(성결교) 목사.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행방불명.
金相俊(김상준·25) 청풍감리교회 목사. 충북 단양군 홍성읍에서 납북.
金晟植(김성식·43) 경기 화성군 마도면 (같은 이름의 김성식 목사가 2명 더 있는데 나이와 주소가 달라 동일인인지 알 수 없다. 金晟植(58) 주소 경기 시흥군 중정 안양리. 피랍 장소 개성시: 金晟植(67) 주소 서울, 수원교회 목사).
金裕海(김유해) 강원도 지석교회(감리교) 목사.
金長輝(김장휘·60) 7월20일경 서울 을지로 노상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된 후 정치보위부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납북.
金鍾萬(김종만·59) 감리교 신학교 교수. 체부동교회 목사.
金珍珪(김진규·54) 목사. 서울.
金哲星(김철성) 서울 성동구 신당동에서 납북.
金泰周(김태주·63) 8월13일 10시경 서울 성북구 성북동 168-4 자택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어 성북 내무서에 1주일간 감금되었다가 정치보위부로 이송된 후 납북.
都柄日(도병일·37) 9월2일 충남 예산군 삽교면 석리에서 납북.
朴成萬(박성만·31) 7월18일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에서 납북.
申基俊(신기준·47) 서울 서대문구 행촌동 자택에서 납북.
劉載報(유재보·53) 서울 서대문구 자택에서 납북.
李成萬(이성만·31)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에서 납북.
張基衡(장기형·50) 7월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 자택에서 납북.
張德檀(장덕단·68) 서울 중구 회현동. 효자동교회 목사 .
全有淵(전유연·48) 8월23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자택에서 납북.
陳令鐘(진령종·49) 7월5일 서울 뚝섬 자택에서 납북 .
崔明殷(최명은·45) 서울 종로구 원남동. 8월11일 납북.
崔榮鎔(최영용·50) 8월15일 서울 시내에서 납북.
韓致明(한치명) 납북된 후 반동종교인으로 낙인 찍혀 다른 종교인들과 함께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洪吉龍(홍길용·31) 전북 김제군. 7월25일 납북.
[전도사(4)]
金陽淳(김양순·40) 전도사. 9월27일 오후 4시경 같은 마을 교인의 집에 심방 나갔다가 귀가 중에 납북. 주소는 서울시 중구 쌍림동 119.
金麟熙(김인희·43) 장로교 전도사(助師). 북한의 종교탄압을 피해 월남하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태평로 재건교회를 설립했던 재건교회 지도자. 7월20일 10시경 자하문 밖에서 납북. 정부의 「피납치자명부」에는 7월25일 납북.
朴寶(박보렴·여·54) 전도사, 독립운동가. 6·25 전쟁 후 서울대 약학대학장이었던 남편 김기우와 함께 납북.
朴文熺(박문희·50) 성결교 초기 전도사, 독립운동가.
[장로(19)]
張德櫓(장덕로·68) 서울 옥인동교회 장로. 3·1 운동 후 上海에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다가 광복 후 귀국하여 1949년 옥인동교회 창설.
高明宇(고명우·68) 서울 남대문교회 장로. 세브란스 의과대학 교수 겸 외과과장. 7월26일 오후 2시경 서울 용산구 원효로 3가 184 자택에서 사복청년이 납북.
金奎植(김규식·74) 서울 새문안교회 장로. YMCA 학교 교사 및 경신학교 학감, 重慶(중경) 임정 부수석. 6·25 전쟁 후 피랍되어 1950년 12월10일 만포진 부근에서 사망.
金德男(김덕남·41) 둔전리교회 장로. 7월14일 새벽 4시경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둔전리교회 사택에서 현석진 목사와 함께 같은 마을 내무서원 4명이 연행 납북.
金東元(김동원·67) 장로교 장로. 소설가 김동인의 형. 광복 후 군정청 고문을 거쳐 한민당 총무, 제헌국회 부의장 역임.
金允童(김윤동·48) 장로. 7월25일 오후 8시경 서울 마포구 만리동 세관 앞에서 보위부원 3명에게 연행되어 서대문구 당 정치보위부에 수감되었다가 열흘 뒤 구로구 서울시 정치보위부였던 국립도서관에 감금된 후 납북.
金益俊(김익준·46) 서울 마포구 신수동 신수교회 장로. 직업은 신수동회 사무소 회계사였는데 7월13일 마포구 신수동 300번지 자택에서 같은 동네 사람 2명과 함께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어 내무서에 감금되어 있다가 동네 사람 2명은 석방되었으나 김익준은 교회 장로이며 洞(동)청년단 부단장이라는 이유로 서대문형무소 수감된 후 납북.
金在恩(김재은·27)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 목실리성결교회 전도사. 8월7일 오후 2시경 교회에서 내무서원 3명에게 연행 납북.
林壽烈(임수열·31) 강릉 성결교회 전도사. 납북 당시의 정황은 확실히 알 수 없다. 가족들은 부산으로 피난했었고 본인만 교회를 사수하겠다며 강릉성결교회에 있다가 납북당했다.
黃國祿(황국록·40) 창신장로교회 장로. 육군본부 지정 대동장유공장 대표자로 있으면서 육군 부식 및 각종 물품을 조달했다.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 김창일외과병원에서 치질을 가장하여 입원 중이었는데 8월15일 오후 5시경 성동내무서원 2명과 인민군 수명이 찾아와 연행. 성동내무서와 정치보위부를 거쳐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9월17일경 미아리를 거쳐 의정부까지 끌려간 사실을 같이 끌려가다 탈출한 사람으로부터 들었다.
[소속및 납북 일자와 장소가 확실치 않은 장로]
강준표 서울 서강교회 장로.
權相和(권상화·68) 7월5일 오전 10시경 서울 서대문구 만리 2가 294-22 자택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
金東元(김동원·44) 감리교 장로. 9월20일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에서 납북
金斗枚(김두매·43) 8월14일 전북 전주시 고사동에서 납북.
申相厚(신상후·39) 장로교 領袖(영수). 7월4일 경기도 고양군 지도면 행주외리에서 납북.
이정진 서울 수송교회 장로.
李鍾聲(이종성·62) 8월25일 경기도 파주군 위동면 금촌리에서 납북.
李弼斌(이필빈) 서울 신암교회(장로교) 장로.
정호석 서울 서강교회 장로.
[신학생(2)]
金龍瑞(김용서·22) 장로회 신학생. 8월27일 납북. 주소는 서울 성동구 신당동 175-8.
金相振(김상진·25) 세례명 토마스. 함흥 교구 소속 신학생으로 7월 중 행방불명. 정부의 「피납치자명부」에는 9월4일 서울 중구에서 납치. 주소는 중구 충무로 2가 12.
기타 납북·피살 종교인들
[집사·기타(45)]
金炳德(김병덕·30) 서울 영락교회 집사. 8월10일 납북. 서울중앙전신국 총무과 근무.
金奉在(김봉재·29 ) 9월25일 전북 이리에서 납북. 주소는 경남 거제도
金姓女(김성녀·42 ) 9월25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金成德(김성덕·41) 8월16일 중구 남산동 자택에서 납북.
金輪林(김수림·61) 8월27일 서울 중구 산림동 90에서 납북.
金榮淳(김영순·40) 9월25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金株完(김주완·30) 7월4일 경기도 고양군 지도면 행주외리에서 납북.
金振秀(김진수·45) YMCA 근무. 8월11일 서울 종로 근처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어 국립도서관에 있던 정치보위부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납북.
金泰煥(김태환·39) 9월25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金翰洙(김한수·36) 7월10일 서울 중구 명동 2가 1에서 납북.
김현자 서울 신암교회 집사.
南邊植(남변식·38) 9월28일 전남 완도군 완도면 양리도에서 납북.
獨孤堂(독고당·26) 7월25일 서울 용산구 자택에서 납북.
朴寬姬(박관희·25) 7월7일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심곡리에서 납북.
朴琮奉(박종봉·42) 9월25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朴卓根(박탁근·31) 7월25일 서울 자하문 밖에서 납북.
裵春根(배춘근·35) 7월7일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심곡리에서 납북.
白桂淳(백계순·32) 9월25일 금산군에서 납북.
宋京燮(송경섭·38) 7월10일 서울 중구 명동 2가 1에서 납북.
安仁祐(안인우·40) 7월29일 전북 익산군 황등면에서 납북.
梁斗泳(양두영·36) 9월25일 전남 옥구군 계림면 유사리에서 납북.
吳吉弘(오길홍·28) 7월25일 서울 자하문 밖에서 납북.
尹得淳(윤득순·31) 7월25일 서울 자하문 밖에서 납북.
李京天(이경천·63) 9월25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李基泰(이기태·34) 7월25일 서울 자하문 밖에서 납북.
李成擇(이성택·34) 7월29일 전북 익산군 황등면에서 납북.
李壽哲(이수철·22) 8월18일 강원도 홍천면 진리에서 피살.
李周光(이주광·45) 9월25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任連用(임연용·33) 7월10일 서울 중구 명동 2가 1에서 납북.
張基衡(장기형·50) 감리교 총리원 회계. 20년대 조선예수교서회에서 문서사업 종사. 7월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 자택에서 납북.
제주시 아라1동에 자리한 제주성안교회는 1908년 3월 제주도에 도착한 이기풍 목사가 온갖 어려움을 물리치고 9월 조선 독노회에 '원입교인 9명, 회집교인 20명, 제주 토박이 김홍련이 전도인으로 자청하였다'라고 보고로 시작되었다. 제주도 최초의 교회로 세워진 서부교회(후에 성내교회와 성안교회로 나뉘었다)가 계속 발전하여 성안교회는 1984년 선교 100주년 기념과 교회창립 76주년을 기념하여 이기풍 목사 선교 기념비를 세웠고 2007년 새 성전을 건축하였다. 새 성전은 건축면척 1788.35㎡에 지상4층, 지하1층 규모로 1700석 규모의 본당과 500석 규모의 중예배실 그리고 10개실 정도의 소그룹실등으로 갖추어져 있다.
ㅁ1908년 이기풍목사가 세명의 신자들과 함께 향교골에서 기도회 시작
(제주 최초의 교회시작)
ㅁ일도리 중인문 안에 초가 여섯간을 매입하여 교회당을 사용.
ㅁ구 출신청을 매입하여 성내교회당으로 사용.
ㅁ교회 설립계를 제출(제주성내교회)
ㅁ구 출신청 앞에 목조 52평의 예배당 기공.
ㅁ영흥 야학교 69년제 보통과 설립.
ㅁ관인 중앙유치원 개원(제주 최초의 유치원)
ㅁ교회 구내에 노회경영 성경학교 교사의 기숙사를 신축
ㅁ교회 부흥으로 제주동부교회를 설립하고 성내교회는 제주서부교회로 개칭.
ㅁ용담동 지역 교인을 분리하여 한라교회를 설립
ㅁ삼도 1동 905에 새예배당을 신축하고 입당(현 YMCA)
ㅁ광양지역 교인을 분리하여 광양교회(현 제광교회)를 설립
ㅁ교육관 57평 신축
ㅁ제주중부교회와 합동하기로 공동의회에서 결의
ㅁ교회명칭을 제주 최초교회의 명칭인 제주성내교회를 이어받아 제주성안교회라 칭하고 양 교회 교인 238명이 모여 합동예배를 드림
2008년 부터 2월 마지막주일을 교회창립 기념주일로 지키기로 하여 1,2,3부 예배를 교회창립 100주년 기념주일예배로 드리며 예배시긴에 비젼선언문 선포식이 있었다. 설교는 본교회16대 담임목사님이셨던 정영택 목사님(경주제일교회)이 말씀해주셨고, 홀리보이스의 특송이 있었다.
100주년 기념 연합예배
100년전 이기풍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제주최초의 교회인 동부,성내, 성안교회가 교단을 초월해 감격의 연합감사예배(2/24)가 제주성안교회 영광예배당에서 드려졌다.설교는 임명규 목사님(기장총회장) 하셨으며, 예장총회장의 축사와 제주도지사의 축사, 성찬식을 통해 한몸임을 선포하고, 매년 연합예배를 드릴것과 제주복음화에 앞장설것을 다짐했다.
구 성안교회
성안교회 이기풍 목사 선교 기념비
이기풍 목사의 선교 초기 중심교회이자 제주 최초의 교회인 제주성안교회 뜰에는 이기풍 목사 선교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이 목사의 일대기가 자세히 기록된 선교기념비는 1984년 교회창립 76주년을 맞아 성도들이 직접 세운 것으로 제주선교역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최초 일곱 목사 중 한 명인 이기풍 목사는 13년 동안 제주선교에 헌신하며 제주성안교회를 비롯해 삼양 내도 금성 등 10여 개의 교회를 설립, 제주복음화의 초석을 닦았다. 하지만 일제가 강요한 신사 참배를 앞장서서 거부하다가 투옥되어 고문 끝에 77세의 일기로 순교했다.
안산시가 소설 「상록수」의 배경이자 일제 강점기 농촌계몽가였던 최용신 선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중인 「최용신기념관」이 착공 1년여만에 드디어 완공됐다. 안산시는 지난해 6월 상록구 본오동 상록수 공원(1만2천328㎡)내에 최용신기념관 건립공사에 들어가 지난 7일 기념관 설치공사를 마쳤다고 4일 밝혔다. 총 7억1천만원이 투입된 기념관은 지하 1층, 지상 1층, 연면적 462.8㎡(140평)규모로, 지상1층에 최 선생 활동 당시의 강습소인 「샘골강습소」를 원형 복원했으며 지하에 교육과 전시 등을 할 수 있도록 지어졌다. 시는 8월까지 향토유적 제1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최용신묘역, 기념비, 표석 등 12점과 안내표지판 4개소에 대하여도 일제히 정비하고, 9월까지 상록수 공원을 산뜻하게 단장해 앞으로 안산시 문화관광 유적지로서 널리 활용할 계획이다. 한편 기념관 건립에 앞서 지난 2004년 9월 최 선생의 제자 홍석필(84.안산시 본오동)씨가 『최용신 선생의 뜻과 얼을 기리고 청소년과 노인들이 공부하며 쉴 수 있는 강습소를 다시 만들어 달라』며 자신의 집을 팔아 마련한 1억5천만원을 안산시에 기탁한 바 있다. 홍씨는 1932년 최 선생이 안산시 본오동 샘골마을로 내려와 만든 강습소 에서 4년여 동안 학업을 한 강습소 2회 졸업생이다.
추모비
최용신이 죽은지(1935년 1월 23일) 72년이 지난 오늘 2007년도의 샘골동산에는 지난 1998년에 새로 지으진 샘골(천곡)교회가 있다. 그 앞에는 두 개의 기념비가 조용히 서있는데, 하나는 루씨 동창회와 천곡교회가 합동으로 1974년 11월에 세웠다. 이 기념비에는 유달영 작사, 이홍열 작곡의 “최용신을 기리는 노래”를 적고 있다. “일제 하 처절하던 민족 수난기에 나라의 광복 위해 모든 것 버리고 농촌 계몽의 선구로 불사조되어 이 고장 이 마을에 생명을 바쳤네 영원히 역사에 푸르른 얼이여 꽃다운 처녀 싱그러운 처녀 민중의 가슴속에 뿌리깊이 잡아 지금도 쉬지 않고 사랑으로 자라네.”
추모비 최용신 선생
최용신의 묘
최용신의 묘
최용신(좌)과 약혼자 김학준 장로의 묘(우)
(지금은 없어진) 강습소가 잘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강습소 바로 옆에 마련된 최용신 선생의 묘소, 소박한 최용신 선생 묘소 오른쪽에는 1926년 최용신 선생과 약혼자 였던 故 김학준 교수(장로)의 묘가 있다.(최용신 선생 곁에 묻히기를 ...김학준 교수의 유언에 따른것이다) 1935년 6월 최용신선생을 모델로 한 沈薰의 소설. 常綠樹(여주인공 채영신으로)발표, 1936년 YWCA는 비석을 세워 Y정신의 실천자, 농촌사업가의 산 표본으로서의 최용신선생을 기리고 선생의 사업과 정신을 계속하기로 총회에서 결정. 1936년 9월 16일 오전 8시 상록수 저자 심훈 서울대병원에서 36세의 일기로 운명(병명 장티프스) 1964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용신봉사상(容信奉仕賞) 제정, 1974년 11월 최용신 기념비 제막, 1975년 3월 11일 약혼자 김학준교수 타계
최용신(좌)과 약혼자 김학준 장로의 묘(우)
최용신(좌)과 약혼자 김학준 장로의 묘(우)
최용신의 묘
1934년 해가 저물어 가면서 그녀의 병은 극도로 악화되어 수원도립병원에 입원하였는데 그녀의 병은 “장중첩증”이었다고 한다. 창자가 창자 속으로 꼬여 들어간 것이었다. 2차에 걸친 수술이 시도되었으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농성 복막염까지 겹치게 되었다. 이는 극도의 과로와 영양부족 탓인데다 치료를 미워왔기 때문이었다. 1935년 1월 22일 아침, 학원 이사 중에 한 사람인 안홍팔 씨의 손을 잡고 힘겨운 말문을 열었다. “...만일 제가 떠난 후에라도 학원만은 잘 살려서 여러분의 손으로 훌륭한 학원을 만들어 주세요... 제가 약혼한 지 올해가 10년이어요. 올 4월부터는 두 사람이 힘을 모아서 농촌을 위해 일하고자 곧게 약속했지요. 그런데 이대로 떠나니 그 사람에게 대단히 미안합니다... 제가 늙으신 어머니보다 먼저 떠난다면야 그것도 죄송한 일이고... 내가 죽은 후에는 학원이 잘 보이는 곳에 묻어주세요... 교회와 여러 이웃 친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은혜를 갚지 못하고 먼저 가서 죄송합니다... 아무에게도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세요...” 이렇게 띄엄띄엄 한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말을 끝낸 뒤 그녀는 가끔씩 헛소리를 하기도 하였다.가끔씩 “주여! 주여!”라고 조용히 외피기도 하였다. 1935년 1월 23일 오전 0시 20분 그녀의 얼굴에 만면의 희색이 돌더니 긴 한숨을 몰아 쉬고는 고요히 영원의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말았다. 그녀는 그렇게 25년 6개월을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었다. 장례식은 천곡 마을장으로 학원 마당에서 온 교우와 학원의 학생, 학부형 그리고 친지들이 운집한 가운데 당시 천곡교회 전재풍 목사의 주례로 장명덕 전도사의 기도, 어린 학생들의 조가 및 조사, YWCA의 대표 황에스더 여사의 조사 순으로 이어졌다. 장례식이 마칠 무렵 현해탄을 건너 급히 달려온 약혼자 김학준 씨가 도착, 시신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다 못 다한 사랑을 나누기라도 하려는 듯 입고 온 외투를 그녀의 관 위에 고이 덮어 주위를 더욱 숙연케 하였다. 막무가내로 관에 매달려 울부짖는 어린 제자들을 겨우 뜯어말리고서야 그녀의 시신은 그녀의 사랑과 봉사와 희생이 아로새겨진 천곡학원이 마주 보이는 산, 언덕 공동묘지에 묻혀진 것이다.
(글 출처- 1.홍석창 목사님의 저서 <상록수 농촌 사랑>, <수원지방의 발자취- 수원지방 70년 약사>와 목사님의 미공개 논문 등 2. 2001년 YWCA주관 전국대학생 여성포럼에서 양 미강 목사 발표한 내용을 편집한 것, 샘골교회 홈페이지)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을 맞이하여 장편소설 공모하였다. 상금 500원을 걸고(당시 소 한 마리 값 60원) '조선농어촌문화'에 기여 할 수 있는 소설을 모집한 것이다. 당시 심훈은 부모님이 낙향하여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에 살고 있었으며 그곳에서 장질 심재영이 청년 십 여명 과 농촌계몽에 앞장서서 인근 마을까지 활동하고 있었고, 이때 샘골의 최용신의 부음 기사가 신문에 보도된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사회 장으로 치루어 졌으며 그녀의 업적이 소개되고 ,영원불멸의 명주, 무산아동의 자모, 선각자중의 선각자라는 글로 신문 첫줄을 장식하였다. 심훈은 샘골을 세 차례 정도 방문하여 자세히 기록 한 후 '상록수'를 썼다. 1935년 5월 4일 쓰기 시작하여 6월 26일에 탈고하고 그 해 9월 10일 석간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 15일 까지 127회에 걸쳐 연재 되었다. 1936년 영화화하려 했으나 일제 당국의 불허로 실패. 같은 해 8월 28일 한성도서 주식회사에 의해 책으로 발간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책의 표지 그림은 청전 이상범(동아일보 전속 화가) 이 그렸고 서문은 벽초 홍명희가 맡았다. 1936년 소설을 영화화하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9월 쟝티프스에 걸려 고열로 사망(36세)하였다. 소설'상록수' 채영신의 모델 최용신, 박동혁의 모델 장질 심재영과 약혼자 김학준, 청석골의 모델 샘골
(출처- 민족저항 시인 '상록수'의 작가 沈熏의 문학과 생애-申庚林 編著에서 발췌)
최용신 기념관 정원
최용신 유훈비와 심훈(상록수 저자) 문학기념비
심훈(상록수 저자) 문학기념비
심훈 청동상
샘골강습소 주춧돌과 향나무
샘골강습소 주춧돌과 향나무
최용신 추모 돌
최용신 추모 돌 뒷면
<최용신 기념관>
최용신 기념관 2층, 현재 학당으로 사용되고있다. 1층은 전시실이다.
최용신 기념관 2층
최용신 기념관 1층 전시실, 정원에서 계단을 내려와야한다.
전시실 입구 최용신 상
전시실 내부
샘골강습소 모형품
최용신 연보
샘골강습소 교가
기념관 기증자 명단
샘골강습소를 도운사람들
전시실 내 영화관
최용신의 학력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 연극발표회
협성여자신학교 (현 감리교신학대학)
최용신 협성신학교 시절 (앞줄 오른쪽)
1928년 봄 협성신학교에 입학하면서 최용신은 매우 중요한 만남을 경험하게 된다. 그 만남은 바로 아닌 황애덕(에스더) 교수와의 만남이다. 황에스더는 여성비밀결사체의 모체인 ‘송죽회’와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이 당시 협성신학교의 농촌사업 지도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황에스더는 농촌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YMCA, YWCA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학생들에게 농촌운동에 대한 사명감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최용신은 협성신학교를 다니면서 황에스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입학한 첫 해, 황해도 수안 용현리로 황에스더와 김노득과 함께 농촌실습을 떠났다. 각종 식용품과 일용품을 가지고 긴 여행 끝에 용현리에 도착해보니 문맹과 극빈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과 함께 3개월 동안 최용신을 비롯한 세 처녀들은 글을 가르치고 학예회를 열면서 동고동락했다. 이곳에서 최용신은 관념적으로 생각만했던 농촌운동을 실제적으로 실습하고 농촌운동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체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다음해 포항 옥마동에서의 농촌실습은 자신의 전 생애를 농촌운동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게 하였다. 졸업을 앞둔 1931년 10월, 최용신은 당시 수원지방의 밀러 여선교사의 요청과 YWCA의 지원으로 경기도 반월군 천곡(샘골)에 파송을 받아가게 된다. 이미 천곡은 교회가 세워져 부흥일로에 있었으며 선임자인 장명덕 전도사에 의해 학원도 설립되어 있었다.
최용신기념관 소개 비디오
최용신 선생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崔昌熙씨 2남 3녀 중 차녀로 출생(1909년 8월 12일)한 최 용신은 일찍부터 가족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어려서부터 신앙 생활을 하였다. 1928년 3월, 감리교단이 설립한 원산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19세)를 졸업하고 서울여자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를 입학한 최 용신은 일찍부터? 농촌계몽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최용신은 루씨여자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에서 “저의 희망은 농촌에 들어가 농촌계몽에 일생을 바치는 것”이라고 당당히 밝혔다고 한다. 이러한 그녀의 사상은 그녀가 졸업시에 쓴 “교문에서 농촌으로”라는 글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 오늘 교육받은 여성들이 복더기 쌓인 농촌을 위하여 몸을 바치는 이가 드문 것은 사실인 동시에 크게 유감된 바이다. 여성도 농촌의 발전을 위해 분투해야 한다. 농촌으로 하여금 어두움 속에서 걸어 나오게 못한다면, 이 사회는 어느 때까지든지 완전한 발전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농촌 여성의 향상은 우리들의 책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생활만 동경하고 안일의 생활만 꿈꾸어야 옳을 것인가? 거듭 말하노니 우리는 손을 서로 잡고 농촌으로 달려가자.” (유달영, “최용신 전기-눈 속에 피는 나무”, 중앙출판공사, 1978년, 255-257쪽)?
여러 가지로 일하는 여건이 좋은 천곡에서 최용신은 마을을 순회하면서 농민들의 생활상태와 교육에 대한 열의를 타진하면서 그가 하고자 하는 교육사업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막상 마을을 다니면서 학원의 신입생을 모집해보니 그것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마을사람들이 일찍 기독교를 믿어 생각은 많이 깨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파란 처녀의 교육사업에 전적으로 밀어주는 것이 아니었다. 최용신은 만나는 사람마다 “자녀들을 가르쳐야 합니다”하고 권면하면, 마을사람들은 “돈이 없어요, 월사금이 없습니다”하고 대답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실망치 않고 최용신은 “공부해서 잘살아 봅시다”하면서 학생들을 모집한 결과 40명이 되었다. 이들에게 한글, 산수, 재봉, 성서 등을 가르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교육하는 것에 전념하였다. 저녁에는 부녀자들을 모아놓고 가르쳤다. 그는 하루가 부족한 사람이었다. 오전반이 끝나면, 곧 오후반을 가르치고, 이것이 끝나면 가정순회지도, 개인전도로 다니며, 밤에는 다시 야학을 인도하였다. 야학이 끝나면 한밤중에 그 동안 미처 돌아보지 못한 동네를 지도하고 오면 첫 새벽이 되는 것이었다. 최용신의 이러한 열심과 헌신적 행동은 마을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헌신으로 인해, 최용신과 샘골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샘골의 모든 일은 최용신의 한마디로 주저없이 움직이게 되었고, 샘골의 어려운 모든 일은 최용신에게로 왔다. 닭을 잡아도, 냇가에서 고기를 잡아와도 마을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고 대접했다. 완전한 신뢰였다. 점차 천곡학원이 마을사람들의 신임을 얻었고 학생수는 증가하여 6칸의 예배당이 비좁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자 학원을 인가하여 강습소로 개축할 계획을 세워 추진하였다. 정식 학원 설립의 꿈을 키우던 최 용신은 교회를 중심으로 “천곡 학술학원 건축발기회”를 조직하였다. 최용신은 동네 유지들을 찾아 다니면서 “짐승을 키우는 것보다는 사람을 키우는 일이 더 소중하지 않느냐”며 설득 작업을 벌여 기금을 모아갔다. 그녀는 기금을 모음과 동시에 건축사업을 시작하였는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나서서 돌을 나르고 새끼를 꼬고 터를 닦았다. 온 마을 사람들이 일치 단결하여 학교를 세워 나간지 한달 남짓한 1932년 10월 27일 정초식을 거행하였고, 추운 겨울에도 쉬지 않고 공사를 강행하여 드디어 1933년 1월 15일 낙성식을 거행하기에 이르러 천곡학원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1933년 봄이 되어 학생을 새로 모집하니, 예년보다 훨씬 많은 110명이나 몰려오게 되었다. 새로 지은 교사마저도 턱없이 모자랄 정도였다. 오전 9시부터 시작되는 수업은 반드시 예배로부터 시작하여 보통 6시간 또는 7시간 계속되었다. 보통학교 6년 과정을 단 2년 만에 마치는 것이라 조금은 벅찬 과정이었다. 그러나 보통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은 전부 다 가르쳤는데, 특히 그녀는 한글, 역사, 성경 등의 과목에 중점을 두고 가르쳤다. 그녀는 이러한 과목을 통해서 신앙과 애국심을 고취시켜주기 위해서 최선을 노력을 다하여 나간 것이다. 예를 들어, 동화시간에는 모세, 다윗, 에스더 등의 이야기를 해주었고, 자수시간에는 한국지도를 무궁화 꽃으로 꾸미게끔 하였고, “무궁화 이 동산에 역사 반만년”이라는 노래를 가르침으로써 민족교육과 아울러 민족신앙을 심어나갔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천곡학원은 점점 일제의 미움을 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최용신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서 민족신앙의 민족교육을 계속해나가자, 급기야 일제는 갖은 탄압을 가해오기 시작하였다. 학생수가 시설에 비해서 너무 많으므로 초과 학생을 돌려보내라느니, 조선의 국어와 역사는 가르치지 말라느니 하면서 갖은 트집을 잡기 시작하였다. 학원의 시설미비라는 명목으로 천곡학원의 학생들을 다른 곳으로 빼내는 등 분열정책을 일삼았다. 일제는 사사건건 천곡학원을 운영하는 최용신을 불러댔다. 최용신이 기독교인이며 신학교를 다닌 적이 있다는 점, 역사와 한글, 성경을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는 점 등은 일제가 긴장하는 점이었다.
최용신과 학생들
일제는 3.1운동 당시 기독교인들의 독립운동 열기를 이미 경험한 터였다. 결국 일제의 조치를 따르지 않으면 학원이 폐쇄 당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봉착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고통과 설움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떠나지 않겠다는 아이들을 눈물을 머금고 억지로 떠나 보내며 해가 지도록 아이들과 대성통곡을 하여야 했고, 일경이 오지 않을까 눈치를 봐가며 우리의 말과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 설움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녀는 이런 모진 탄압을 견뎌내기 위해 오히려 자신에게 더욱 채찍질을 해 나갔다.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쉴새 없이 가르치노라면 목이 부어오르고 팔다리가 쑤셔대지만, 밤이면 그녀는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부녀자들을 위한 야학에 서곤 하였다. 또 농번기 때마다 손수 마을 사람들의 논밭일을 돕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방학이라 해서 쉴 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천곡을 중심으로 해서 이웃에 흩어진 마을과 교회를 찾아다니며 단기 교육을 시키곤 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힘은 그녀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에서 오는 힘이었으며, 교육을 통해서 민족을 일으키고자 한 그녀의 민족신앙에서 온 것이 분명할 것이다. 1934년 3월 최용신은 좀더 신학적인 이론 수업을 쌓기 위해서 일본의 고베여자 신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그곳은 자신의 오빠와 동생이 공부하고 있었고 어린 시절 부모에 의해 정혼했던 약혼자, 김학준이 있는 곳이었다. 그녀가 수학했던 고베 여자신학교(현 세화대학교) 자치회 기록부(1934년 4월 27일)는 당시의 최용신의 심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저는 조선에서 신학교를 다니다가 사명감에 불타 농촌전도에 들어갔는데,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다시 학교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들어오고 보니 그 희망이 이루어져 현재 대단히 기쁩니다.”(“최용신 양의 신앙과 사업”의 저자 홍석창 목사가 84년 도일해서 확인)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3년간이나 중단했던 신학공부를 그것도 이국땅 이국인 사이에서 쫓아가고자 너무 무리해서 공부했던지 덜컥 병이 나고 만 것이다. 처음엔 다리가 붓고 몸이 조금 피곤한 정도였으나 차츰 그 부기가 더해갔고 나중엔 걷기도 힘들 정도였다. 아마 그것은 3년간의 힘들고 고된 농촌사업에 지치고 지친 후유증으로 온 것일 게다. 최용신은 애써 준비해 온 유학의 길을 도중 하차해야 하는 아픔을 간직한 채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타까운 일은 최용신이 공부를 도중에 하차하고 만 것이다. 최용신은 먼저 고향에 내려가 건강을 회복한 다음 다시 천곡으로 갈려고 생각하였으나 천곡 사람들이 “아파서 드러누워도 좋으니 제발 천곡으로 오라”고 애원하는 통에 그녀는 제 2의 고향인 천곡으로 발걸음을 돌린 것이다. 천곡 사람들의 기쁨은 대단하였으며 그들은 곧 바로 그녀의 완쾌를 위한 기도에 들어갔다. 그리고 누구라 할 것 없이 각자가 좋다는 약을 다 구해 드렸고, 전보다 더 알뜰히 보살펴 드렸다. 이런 정성의 손길로 인해서 그녀의 병세는 차츰 호전되어 갔다. 몸이 좀 회복되었다고 생각한 그녀는 일을 위해 다시 일어섰다. 워낙 책임감이 강하고 부지런한 성품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그녀는 천곡을 위해서 전보다 더욱 열심히 뛰어 다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3년 전부터 원조해 주던 YWCA의 보조가 1년 전에 절반으로 삭감되더니 1934년 10월에는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학원운영에 큰 타격을 주어 그 아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최용신의 천곡학원, 혜촌 김학수 화백 그림,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최용신과 개미저축회 회원
최용신은 이 절박한 상황에서 당시의 여론(女論)이라는 여성잡지에 글을 기고하여 호소하였다. “나는 내가 사는 동네의 현상을 여러분 앞에 내어놓고 싶습니다. 내가 사는 이 촌은 우리 조선에 있어서 두메라고 부를 만한 벽촌은 아니외다. 서울서 멀지 않은 서해안의 작은 두메 산골짝이랍니다. 이 촌을 가리켜 근방에서는 교촌(敎村)이라 부르니 이 까닭은 이곳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20여 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영향으로 인하여 학습강습소가 마을 가운데에 제일 높은 곳에 있는데 그래서 이 촌을 가리켜 문화촌이라고까지 부릅니다. 이 강습소에는 근방 십여 동네의 아동이 모여 오는데 그 수가 백여 명이나 됩니다. 이 많은 아동들이나 가정 정도를 말씀하여 보면, 호수가 1,400호 되니 그 중에 1년 수입 150원 이하의 호수가 910호나 됩니다. 특히 빈한한 지방이므로 이 강습소는 그 대중을 가르치는 데에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강습소는 이 지방의 중요한 기관이나 우리는 이것도 우리 농민들의 손으로 독립경영을 하지 못하고 사업가들의 후원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문화촌이라는 이름을 듣고 교촌이라는 칭호를 받는 이 촌중에 비통한 울음소리가 하늘에 사무치고 땅을 울리오니 목석이 아니고서야 어찌 볼 수 있사오리까? 이 비통한 울음은 다름이 아니오라 우리의 불쌍한 어린이들이 배우고 가르치는 강습소가 폐쇄된다는 원통한 울음이었습니다. 사업가의 열성은 경제적 제한이 있어 이제부터는 후원의 손을 끊는다는 소식이 들림에 우리들은 낙망의 눈물, 비통한 울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가르칠 줄 알고 배울 줄도 알건마는 우리에게는 여유가 없습니다. 배움에 굶주린 우리 농촌 어린이들은 장차 어디로 가며 가르쳐 주고 싶은 우리의 마음을 어이 하오리까? 우리 농민의 호소를 어찌 다 기필하오리까? 뜻있는 이여! 우리 농촌의 아들과 딸의 눈물을 씻어 주소서.”(1934년 10월 30일) 그러나 이러한 안타까운 호소를 했음에도 그들은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자 최용신은 막다른 길에서 발벗고 나섰다. 여러 친지들이며 먼 친척들을 찾아다니면서 호소하여 어려운 위기를 모면했던 것이다. 이런 그녀에게 또다시 시련이 닥쳐온 것이다. 다시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옛날의 증세에다 식욕까지 떨어져 음식조차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회복되리라 생각하고 약을 먹어가며 수업을 강행하였다. 그때의 사정을 천곡교회 홍찬의 장로는(88년 당시 76세) 이렇게 회상한다. “그 와중에서도 선생님은 학원의 떨어진 사기를 고취시키고자 운동회까지 개최하였고, 또 수업도 계속해 나가셨지요. 도저히 서서 가르칠 형편이 못되면 앉아서라도 수업을 강행하셨습니다. 보다 못해 우리들이 좀 쉬라고 권유하면, ‘배우러 온 학생들을 돌려보낼 수는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시곤 했죠.”
1930년대 샘골 마을지도
최용신이 거주하던 4칸 초가
밀러 선교사가 기증한 전재풍 목사의 사택 건너방(현 태영 아파트 205동 위치)에 임시 거주하다가
샘골교회 뒤 4칸 초가로 이사, 장명덕 전도사와 함께 거주하였다.
전재풍 목사와 최용신 선생
전재풍 목사는 샘골교회 최초 담임 목회자로 1934~37년까지 시무하였다. 이전에는 순회목회자들이 샘골교회를 돌보았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인천항에 첫 발을 내 디딘 후 만 7년째 되는 1892년 가을, 제물포구역 책임자로 있던 존스(G. H. Jones, 趙元時) 선교사가 강화선교를 위해 강화읍 갑곶나루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강화남문을 통하여 강화성(江華城)에 들어가 복음을 전파하려던 계획이 강화유수의 완강한 거절로 입성하지 못하고 갑곶나루에서 며칠간 선교활동을 하다가 인천으로 되돌아갔다.
다음해 1893년에 인천에서 술장사를 하면서 제물포교회(현 내리교회)를 다니던 강화 서사면 시루미 (현 양사면 교산리 송산마을)출신 이승환이 고향에 돌아와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면서 강화복음 전도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에 힘입어 존스는 제물포 교인 이명숙(李明淑)을 강화전도인으로 파송하여 이승환 댁을 거점으로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강화의 첫 감리교 신앙공동체가 탄생되었던 것이다. 이어서 교항마을의 초시 김상임(金商壬)과 그의 가족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교항교회가 설립되었고, 3년 후인 1896년에 이웃 면 송해면 상도리 홍의마을의 한학자 박능일(朴能一)이 자기 집에서 서당학생 20여명과 종순일, 권신일과 함께 홍의교회를 설립하여 강화의 두 번째 교회가 탄생되었다. 1900년 9월 1일, 홍의교회에 출석하던 주선일․박성일․허진일․김봉일 등에 의해 강화읍 천교하(川橋下, 강화읍 신문리)의 여섯 칸 반짜리 초가집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서 강화중앙교회가 설립되었다. 다음해 4월 존스 선교사의 협조로 기와집 25칸, 초가집 16칸을 구입하여 교회를 현 위치로 옮겼다. 이때 소요된 상당한 금액은 존스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오하이오주 매리에타(Marietta)에 살고 있던 교인, 찰스 오토(Charless Otto)가 보내 준 기금으로 충당되었다. 이로서 8년 전 존스가 강화성에 입성하려던 꿈을 강화토착인들에 의해 이루게 되었다. 이 교회는 설립 8개월 만에 강화에서 가장 넓고 큰 예배당을 마련하게 되었으며, 강화 선교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후 한옥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교인들이 늘어나자 1914년에 다시 교인들의 정성어린 헌금과 미국 선교회의 도움으로 서양식 모양의 새 교회를 건축하였다. 이 교회당은 여러 차례 개축하며 사용하여 오다가 2000년에 헐고 1,800명이 한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규모의 크고 아름다운 “선교100주년 기념성전”을 건축․봉헌하였다. 강화중앙교회는 1세기 동안 강화지역 복음화의 그루터기의 역할을 하여 왔다. 1904년 '월곶교회' 개척을 시작으로 26개 교회를 직접 개척하거나 설립되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에 힘입어서 강화지역에는 2005년 현재 119개의 감리교회와 감리교인 20,671명으로 전체 개신교회 177개의 67.2%와 개신교 교인 24,553명의 84.2%를 찾지 할 만큼 크게 성장하였다. 명실공이 강화의 예루살렘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강화중앙교회는 교육선교를 위해 1901년 4월에 신교육 기관인 교회부설로 “잠두의숙(蠶頭義塾)”을 설립하였으며, 1902년에 또 여학교인 “합일여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민중교육을 시작하였다. 이후 두 학교는 하나의 학교로 통합되었는데, 오늘의 합일초등학교로 발전되었다. 이 학교는 일제치하에 저항하는 민족운동과 한국 개화의 산실이 되어 왔다.강화중앙교회는 복음, 민족, 교회가 함께 어우러지며 발전하는 민족과 지역을 구원한 구심점이다. 강화진위대장 출신 이동휘(李東輝)권사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의 보창학교, 유경근 속장(독립운동가)의 교회지도자와 강화중앙교회가 함께 추진한 민족교육운동은 민중계몽과 독립사상으로 이어졌다. 1907년 한국군 해산과 관련되어 발생한 의병운동 때 일제 만행으로 빚어진 김동수 권사 삼형제의 순국사건, 1919년 3․1만세운동 때 김광국 목사, 김유의 전도부인을 비롯한 교인들이 앞장선 만세시위, 조구원, 조봉암(초대 농림부장관) 등 교회청년들이 목숨 걸고 투쟁한 독립운동 등 일제 치하에서 갖은 탄압과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 정신력을 발휘하였다. 이는 이 교회가 선교초기부터 교인들이 실천적 신앙을 바탕으로 지역복음화를 주도하였고, 민족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강화중앙교회는 한국전쟁 때에도 전화의 폐허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방주역할을 하였다. 바다건너 북한에서 피난민들의 안식처였으며, 전후 피폐한 농촌을 회복시키기 위해 복민의숙(福民儀宿, 후에 복음학원 강화실업고등기술학교로 발전됨)이란 기독교 농민교육기관을 설립 운영하였고, 기독병원을 설립하여 질병으로 고통 받는 교인들을 치료하며 불신자에게는 전도의 방편으로 삼기도하였다. 지난 1세기 동안 강화역사의 중심에서 지역의 복음화, 민족운동과 사회개혁을 주도해 온 강화중앙교회는 선교2세기를 맞으면서 선조들이 쌓은 믿음의 토대를 바탕으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새롭게 탈바꿈 하고 있다.1994년 이민구 목사님이 28대 담임자로 부임하면서 “성령충만 만민선교, 만사형통하는 교회”라는 표어를 걸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정신으로 21세기 선교비젼을 실현하기 위해 온힘을 쏟고 있으며, 2,000여 성도가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강화중앙교회는 20여개의 국내 미자립교회 및 단체에 선교비를 지원하고 있으며, 해외선교에도 관심을 두어 영국에 지교회 킹스턴중앙교회를 두고 있다. 필리핀, 몽골, 중국 등의 한인교회와 해외선교사를 돕고 있다. 학원선교를 위해 강화읍에 소재하고 있는 덕신고등학교를 감리교 소속학교로 지정하고 기독교신앙 담당교사를 파송하는 한편 학교운영비로 매년 4,000만원씩 지원하고 있다.이 밖에도 지역선교를 위해 결식자 점심급식사업, 경로위안잔치, 환경미화원 위로연, 연간 2,000만원 상당의 장학금 지급, 침술선교봉사활동, 웨슬리 사회봉사단 활동, 불우이웃돕기 행사 등 사회를 향한 다양한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민구 담임목사는 이 교회가 지난 1세기 동안 강화 선교의 중심역할을 하며 수많은 감리교회 지도자를 배출한 교회답게 선교 2세기를 맞는 현재에 있어서도 기독교인 수가 37.7%를 점유하고 있는 강화지역을 완전한 성시화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고 있다. 또한 100여 년 전 서양선교사들이 우리교회에 도움을 주었던 것과 같이 복음의 빚진 교회로서 해외선교와 북한선교 활동을 강화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글 이은용 전화 : 011-591-6305 , E-mail : silverd2@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