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판치는 수많은 기독교 카페와 블로그 중 이단 분별하기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라고 불린다. 그런데 우려스러운 것은 이 정보의 바다에서 잘못된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정보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성도들은 주의해야 한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는 수많은 기독교 카페와 블로그가 있다. 필자도 기독교 카페를 운영하는 사람 중 한 명이지만, 초신자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이단과 사이비 집단도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전혀 알지도 듣지도 못한 카페나 사람으로부터 카페를 방문해 달라는 메일이나 쪽지가 오면 주의에 주의를 거듭해야 한다. 심지어는 이단 단체들이 '이단 연구' 혹은 '정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단들의 카페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단 카페 혹은 불건전한 카페를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겉으로는 그 이단성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카페도 있고, 이단성을 가진 운영자가 카페를 드러내 놓고 운영하는 경우도 있으며, 신학적으로 분별력이 전혀 없는 운영자가 카페를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 정작 문제는 인터넷의 경우 이러한 카페를 통제하거나, 경고하거나, 심의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1) 운영자나 소속 단체에 대한 소개가 전혀 없다면 일단 경계하라.

운영자가 어느 교회나 교단에 소속되었다든지, 운영하는 단체가 어느 단체인지를 밝히지 않는 카페는 일단 경계하고 주의해야 한다. 필자는 운영자나 소속 단체에 대한 소개를 하지 않는 카페에 대해서는 일단 가입을 하지 말라고 권유하고 싶다. 또 어느 단체와 소속을 밝혔지만, 거짓으로 명칭을 속이는 위장 단체가 있다는 것을 조심하고, 가급적이면 이단을 연구하는 기관에 확인해 보라.

 

(2) 기존 기독교의 교리나 신학을 잘못되었다고 하거나, 부정하는 카페라면 조심하라.

정통 기독교와 다른 구원관 혹은 종말론을 주장한다든지, 삼위일체와 기독론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카페는 이단이다. 특히 자신들의 교리나 신학과 다른 곳의 교리와 신학은 모두 틀렸다고 부정하는 곳을 주의하라. 정통 신학은 오랜 시간 동안 검증받은 가장 성경적인 신학이다.

 

(3) 기존 성경 해석이나 성경 주석을 틀렸다고 하는 곳은 주의하라.

난해한 부분의 성경 해석은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기존 성경 주석과 해석을 모두 무시하거나 틀렸다고 부정하는 곳은 주의하라. 특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비유와 상징으로 해석하는 곳을 주의하라.

 

(4) 어느 곳에서 수련을 하다가 비밀을 깨우쳤다든지, 천사 혹은 성령의 방문을 받고 계시를 받았다고 하든지, 장시간 금식을 하다가 어떤 능력을 받았다고 하는 곳은 주의하라.

지도자나 교주가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능력과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신격화는 이단들의 가장 공통된 수법이다. 성경은 어떤 비밀스러운 능력과 계시를 받은 사람만이 해석할 수 있는 감추어진 책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5) 창세기, 다니엘서, 계시록 등 특정한 성경만을 강조한다든지, 예언·심판·재림·휴거 등 종말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한쪽으로 치우치는 곳을 조심하라.

그 카페가 무엇을 가장 강조하는지를 살펴보라. 성경은 66권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며, 전체적인 메시지를 균형 있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어느 성경만을 강조한다든지, 종말과 재림 등의 부분만을 강조한다든지, 예언이나 선지서 같은 신비적인 부분만을 강조하는 곳을 주의하라. 예를 들자면, '행위 구원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야고보서와 같은 성경만을 부분적으로 강조하거나 특정한 몇몇 성경 구절만을 강조한 경우다.

 

(6) 정통 교단에서 이단 혹은 불건전한 단체라고 발표한 곳을 이단이 아니라고 한다든지, 이단 옹호 언론의 기사를 주로 올려놓거나, 이단과 불건전한 단체의 문헌, 설교나 동영상을 올려놓은 곳을 조심하라.

정통 교단에서 발표한 이단들의 명단을 숙지하라. 억울하게 정치적으로 이단으로 발표되었다고 하거나, 어느 단체에서 이단이 아니라고 판명이 되었다는 주장에 속지 말라. 특히 이단 옹호 성향의 언론사와 이단들이 만든 언론의 기사를 올려놓는 곳은 동류의 이단이다.

 

(7) 가시적인 기적과 표적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그것을 성령의 역사 혹은 영성 운동이라고 강조하는 곳을 조심하라.

최근에 금가루, 금이빨, 쓰러짐과 같은 유치하고 현상적인 표적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곧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곳이 많다. 개인에게 임하여 구원으로 보증하고 인도하는 성령의 역사를 변질시켜서, 기껏 유치한 표적을 보여 주는 사역으로 제한하는 불건전한 곳이며, 신비한 현상을 통하여 교인들을 불러 모으는 곳으로 주의해야 한다. 특히 어느 장소나 어느 사람을 통하여 초능력적인 일이 다반사로 일어난다는 과장적인 광고에 주의하라.

다음의 말씀을 되새기며 불건전한 카페의 미혹을 주의하도록 하자.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고후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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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개혁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

“하나님의 힘만이 괴로움의 무거운 짐을 견디게 하고 우리를 굳건히 서게 할 것이다.”<존 칼빈Jean Calvin*1509~1564>

마틴 루터와 더불어 세계사를 움직인 위대한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인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노용(Noyon*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원래 노동자였으나, 부지런함과 조직력을 인정받아 노용관구의 여러 가지 업무를 보다가 최종적으로 교회의 재정을 관리하는

 일을 하였다. 칼빈의 어머니 즈앤(Jeanne)은 음식점을 경영하던 노용시의 온건파 유지급 인사의 딸로 경건한 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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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칼빈-


칼빈은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는 별명이 말해 주듯이 어린시절부터 안색이 좋지 않았으며 몸이 허약하고 수줍어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리 판단이 정확했으며 지적 능력이 아주 뛰어났기 때문에 아버지 제럴드 칼빈(Gerald Calvin)으로부터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칼빈을 파리에 있는 대학으로 보냈다.

14세 때 그는 파리로 가서 라 마르세(La Marche) 대학에 등록했다. 이후 그는 몽테규(Montaigu)대학으로 옮겨 금욕적이고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장시간 공부하는 습관을 익혔다. 그의 최종학위는 1531년 오를레앙(Orleans) 대학에서 받은 법학 박사이다. 칼빈은 5년간의 대학 생활 동안 수 많은

프로테스탄트 동역자들과 교제를 나누는 과정에서 종교 개혁의 새로운 사상을 접하게 된다.  

1533년경 20대 초반의 칼빈은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했다. 이 시기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완전히 압도당하여 갑작스러운 회심을 체험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성직자로서 종교 개혁에 헌신하기 시작했다. 1534년 5월 4일 공식적으로 로마 교회와 결별 했다. 1534년에 그는 제세례파의 영혼 수면설에 반대하여 ‘심령 수면설’이라는 소제목의 책자를 발간했다. 당시 프랑스의 통치자였던 프란시스 1세는 종교개혁에 대해 불분명한 태도를 취하고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을 박해했다. 그의 박해 이유는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의 로마교회 미사와 교리 그리고 부패한 성직자에 대한 비난 때문이었다. 따라서 로마교회와 이미 결별한 칼빈도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로 망명하여 신학을 연구하게 된다.

제1차 제네바 종교개혁

제네바에서 칼빈은 성 베드로 성당에서 바울 서신을 강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제네바는 외국인에 대한 텃세가 강한 도시였기 때문에 칼빈은 처음에 ‘저 프랑인’이라며 멸시를 받았다. 그러나 1536년 10월 로잔에서 벌어진 성찬에 대한 논쟁 이후로 사정은 달라졌다. 당시 그는 논쟁에 참석하여 로마 가톨릭의 오류인 성찬론에 관해 교부 신학을 인용하여 하나하나 반박했는데, 결과적으로  논쟁은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이듬해인 1537년 칼빈은 비로소 제네바에서 정식으로 설교할 수 있게 됐다.

칼빈은 제네바 시민의 종교교육과 교회조직을 관할하게 됐다. 그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 자에게도 성찬을 베풀었던 제네바 교회에 대한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사실 칼빈은 주의 성찬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그는 성찬과 관련하여 “주님의 성찬을 부끄럽게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기를 결정하겠다”는 고백을 자주하곤 했다. 따라서 칼빈은 제네바 시의회에 매주일 성만찬을 거행할 것과 제네바 각 행정구역에

 특정인을 임명하여 목사를 도와 함께 교회를 치리하자는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조항’을 작성하여 제출했다. 그러나 가톨릭의

성찬에 대해 호의적이던 당시 제네바 시 의회는 성찬 조항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으며 이로인해 1538년 칼빈은 스위스에서 추방당했다.

제네바에서 추방된 후 1541년까지 칼빈은 현재 프랑스 영토인 독일의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당시 스트라스부르크는 수 많은 프랑스 종교 망명자들의 피난처였다. 칼빈은 종교개혁가였던 마틴 부처(Martin Bucher)의 초청으로 스트라스부르크에서 400~500여명에 이르는 프랑스 종교 피난민들의 목회자가 되어 한달에 한차례 성만찬을 베풀며 기독교 교리를 가르쳤다. 스트라스부르크에서 그는 비로소 제네바에서 실행할 수 없었던 교회와 국가의 분리 문제를 실행할 수 있었다. 특히 칼빈은 이 시기 그의 필생의 역작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 강요’의 개정판을 저술하였으며 1540년 8월 마틴 부처의 소개로 만난 이델레트라는 두 아이를 가진 과부와 결혼했다. 그녀는 자신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순복의 성품으로 1548년 그녀가 죽을 때까지 칼빈을 도와 모범적인 가정을 이뤘다.

제2차 제네바 종교개혁

1539년 칼빈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정치적 혁명이 제네바에서 일어났다. 당시 프랑스와  베른(Bern)이 제네바의 독립을 위협하고 있었기에 제네바는 용기 있는 지도자를 필요로 했다. 바로 제네바 시민들이 칼빈을 다시 부른 것이다. 3년 전 그를 추방했던 시민들은 기마대까지

동원해 칼빈을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칼빈은 제네바를 하나님의 도성으로 만들고 싶었다. 성경의 원리로 국가의 기반을 세우고 교회와 국가가 서로 분리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서로 협력하는 세계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1541년 ‘제네바 교회의 법령’을 제정, 공포하고 1542년 방대한 양의 ‘제네바 교리문답’을 완성했다. 칼빈은 교인들을 철저히 교리적으로 훈련시켰다. 칼빈의 엄격한 노선에 반대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결국 제네바 시에는 도박이 사라지고 춤이 금지됐으며 사치와 방탕한 생활이 자취를 감추게 됐다. 특히 당시 많은 사람들을 영혼을 황폐화시켰던 미신과 교황주의도 사라졌다. 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 나왔고 칼빈의 설교를 듣기위해 성 베드로 교회는 사람들로 항상 가득 차게 됐다. 그는 1559년 현 제네바 대학의 전신인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운다. 처음 162명으로 개원했으나 5년 만에 13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칼빈의 신학 강의를 들으러

몰려왔다. 그는 아카데미를 통해 제네바를 종교개혁운동의 거점도시로 만들었다.

이후 제네바의 개혁과 정치는 안정되어 갔다. 그러나 칼빈의 건강은 그에 비해 더욱 악화되어 갔다. 칼빈은 평생 위궤양, 관절염, 천식, 폐병 등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열정적인 사역을 계속했다. 그는 연 200회의 설교와 200회의 강의를 하였으며 성경 각 권의 주석을 썼다. 그는 필생의 역작인 ‘기독교 강요’를 계속 재편집했으며 20편에 달하는 신학 논문을 썼다. 그의 저작전집은 모두 59권에 달한다. 그는 임종이 가까울 무렵 비명(碑銘)없는 무덤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1564년 5월 27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나이 55세였다.

서구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영향

칼빈의 개혁 운동은 그의 생존시 이미 세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위그노(Huguenot) 운동이 칼빈의 사상을 받아들여 1152년 파리대회에서 칼빈주의적 신조를 채택했고, 네덜란드에서는 칼빈주의자 브라이(Bray)에 의해 1561년 벨직 신앙고백이 채택됐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는 1560년 그의 제자에 의해 장로교 신조가 채택되어 장로교 국가가 됐다. 특히 영국교회는 칼빈주의의 영향 하에 ‘39개 신조’를 채택하여 청교도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독일 남부 지역은 칼빈주의의 영향력으로 인해 1563년에는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이 채택됐다.

스위스에서는 취리히, 바젤, 베른 등이 칼빈주의를 따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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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설교집


칼빈의 신학은 매우 실용적이며 시대적인 신학이었다. 그는 인간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우선하는 역할을 강조하면서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예정’을 강조했다. 칼빈의 신학은 성찬론과 예정론을 제외한 많은 부분에서 마틴 루터의 신학과 일치한다. 믿음과 은혜를 통한 구원, 그리스도 속죄의 절대성, 진정한 앎을 위한 계시의 필연성, 강력한 인격적 신앙을 강조하는 점은 루터를 계승했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루터는 당시 사람들을 교권으로부터 해방하려는 데에 관심을 가졌던 반면 칼빈의 사상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중심으로  했다.

 ‘오직 주께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명제가 이러한 칼빈의 하나님 중심적 신학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칼빈의 사상은 인류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칼빈신학의 영향을 받아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가 성립됐다. 160년 전 결성된 ‘세계개혁교회연맹’(WRAC)에는 현재 107개국 215교단 7500만의 신자가 소속돼 있다. 한편 서구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두 이념이 모두 칼빈의 사상에서 유래했다. 일례로 목사 외에 장로, 집사, 교사 등의 평신도들을 교회의 리더십으로 세운 대의적 교회정치 형태는 이후의 민주주의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그의 책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서구 자본주의가 칼빈주의의 금욕주의 정신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 또 서구 시민민주의의 정치체계의 사상적 기반인 로크와 루소 등의 자연권 사상, 근대의 시민혁명이 모두 칼빈의 신학과 내용적으로 연관성이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항상 개혁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를 주장한 칼빈은 오늘날에도 우리의 교회와 신학이 주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계속적으로 거듭나야 함을 일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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