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문-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 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한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언더우드 선교사"
(1859-1916, Horace G. Undewood)


【언더우드의 생애】
언더우드는 1859년 7월 1일 영국 런던에서 출생하고 13세 되던 때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1881년 뉴욕 대학을 졸업하고 뉴저지 주에 있는 뉴 브른스위크 신학교에 입학하여 1884년 동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이 신학교는 미국 화란계 개혁교회에서 경영하는 학교로 일본 개척 선교사 페어벡 등 유명한 선교사들을 배출한 신학교다. 언더우드는 신학재학 시절부터 인도 선교를 지망하고 그것을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기에 여념이 없었던 자다. 그러나 한국의 소식을 접한 이후 언더우드는 "너 자신은 못 가느냐 ?" 라는 응답을 받고 한국 선교를 결정했다고 전해진다. 언더우드는 한국에 들어온 뒤에 제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였고, 이후에는 제중원 의학교에서 물리 화학을 강의하였다. 그는 1886년 2월 고아원을 설립하였고, 이 고아원은 후에 야소교 학당, 경신학교로 발전하였다. 1887년 9월 정동교회를 설립하였고, 이것이 후에 새문안 교회가 되었다.

언더우드는 정치적 권한을 가진 행정가라 보다는 선교사로서 활동하였고, 한국에서 여러 가지 공로를 남겼다. 1894년 찬송가를 간행하였고, 또 성서를 번역하는 사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는 1916년 미국으로 건너가 1916년 9월 12일 사망하기까지 한국의 교인들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


【언더우드의 사상】

언더우드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그가 가진 초교파 주의이다. 이것은 그가 장로교의 선교사이면서도 장로교파의 신학을 하지 않고, 화란계 개혁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한 것에서도 엿볼수 있다. 그의 초교파주의는 교파를 따지지 않은 그의 왕성한 활동에서 가장 확실하게 보인다. 그는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와도 여러차례 일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초교파주의는 그의 신학사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그가 선교활동을 하던 당시의 한국 국내 상황이 각 교파들을 구분하여서 진행할 정도로 여유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언더우드 이전에 알렌이 들어와 활동하였던 당시는 선교라는 것이 엄격히 금지된 상황이었고, 알렌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선교를 자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언더우드와 갈등을 일으킨 것을 볼 수 있다. 언더우드가 활동하던 그 시대에도 분명히 한국민들을 서양의 선교사들을 각기 다른 교파와 신학을 가진 존재들로 보지 않았을 것이고, 당연히 선교사들을 각 교파대로 구분해서 생각하기보다는 서양 종교를 믿는 외국인들로서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 각 교파를 구분해 따로 선교활동을 한다는 것은 그 효과도 거의 없을 것이고, 바람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초교파적인 분위기는 언더우드만의 생각이라기 보다는 전체 선교사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언더우드가 초교파주의라고 해서 그의 신앙이나 그의 선교가 개방적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의 선교의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그는 조금의 융통성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알렌과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알렌은 언더우드나 헤른이 내한하기 이전 이미 자신의 신분을 공사관 공의로 감추고 입국하였고, 갑신정변이라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부상한 민영익을 치료함으로서 제중원을 차렸다. 알렌을 한국 내에서의 선교가 드러내놓고 행해지기는 어렵다고 생각하고 먼저 정치적 실권을 잡은 자들과의 교류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그러한 정치적인 교류보다는 일반 민중들에게 직접적인 선교를 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자연히 이들은 서로 갈 등을 일으킬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세력과의 연개를 볼 때에 알렌은 보수 정권과 줄이 닿아 있고, 언더우드는 이미 일본에서 개화 혁신 세력과 가까웠다는 역학 관계를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더욱 흥미있는 것은 보다 자유로운 선교적 자세로 폭을 넓히려고 했던 알렌이 보수파와 관계되고 비교적 복음주의이며 열정적 선교의 의지를 보이던 언더우드 등이 정치적으로는 개혁파와 인연을 맺었다는 점이다. 이는 전적으로 선교사들의 성향적 몫이라고 하기 보다는 당시 한국 정부의 정치 환경에 좌우된 측면이 아닐 수 없다. (순간의 빛 흩어진 이야기, 서정민 124)

언더우드의 보수적인 측면은 헤른과의 갈등을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언더우드가 신혼여행차 의주에 갔을 때, 세례 지원자 33명에게 압록강에서 세례를 베푼 일이 있는데, 이는 '한국의 요단강 세례'라는 말로 널리 전하는 일화이다. 그러나 분명히 1889년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공개적인 기독교 세례는 국법이 금하는 일이었다. 이에 서울의 헤론은 정동에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한국인 신앙 공동체를 해산 시키는 조치를 취해 정부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을 피하려 하였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이 일에 대해서 유동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언더우드는 여러 교파의 선교사들과 같이 일하고는 있지만 선교사로서 자신이 감당하여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양보하는 입장을 전혀 취하지 않고 있다.

선교사들 간의 갈등은 우선 알렌과 헤른 사이에 일어났다. 우선 헤른은 테네시 주립대학을 졸업하여 한 때 이 의학부에서 교수를 하였다. 이 때문에 헤른은 알렌이 제중원에서 자신의 위에 있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알렌이 자신의 위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헤른보다 9개월 먼저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갈등 속에 언더우드가 끼어든 것이다. 언더우드는 자의식이 강한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지배욕이 강했으므로 명령이나 남의 충고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또한 서울에서 오직 하나뿐인 칼빈주의 목사라하여 다른 이들과 의견이 맞지 않을 때에는 자기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갖고 떠들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를 볼 때 언더우드의 복음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선교방식은 그의 성격과도 잘 들어맞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언더우드는 목사였지만 한국 정부에 대한 공식 입장은 교사였다. 때문에 그들의 선교는 영어를 배우러 찾아 온 사람들에게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학교를 건립하였다. 언더우드는 고아원 형태로 교육사엽을 시작했다. 제중원에서 역시 영어를 배우러 찾아오는 학생들을 가르치던 언더우드는 1886년 1월부터 고아원 설립에 대한 구사을 가졌는데, 고아나 극빈자 아동들을 수용해서 기술을 가르치는 일종의 기술학교 형태를 구상했다. 이것이 소위 '언더우드학당'이라고도 불리는 고아원 학교였다. 이 학교는 '예수교 학당', '민로아 학당', '구세학당'등으로 불리다가 1905년에 경신학당으로 정착하여 오늘의 경신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선교사입니다.
선교 초기 그의 흔적이 묻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그는 한국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양화진 언더우드가의 가족 묘역에는 4대에 걸쳐 모두 7명이 묻혀 있습니다.
언더우드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26세의 나이로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당시 기독교 전파가 불법인 상황에서도 언더우드는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는 북한지방으로 여러 차례 전도여행을 가서 그 곳에 있던 많은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당시 세례 신청자들이 많이 있었던 것은, 로스 선교사와 한국인들에 의해서 만주에서 번역된 신약성경이
북한지방에 두루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더우드는 8살 연상의 릴리아스 호튼과 서울에서 결혼하였는데, 이들은 신혼여행조차 전도여행으로 다녀올 정도로
선교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습니다.
언더우드는 의주에서 세례문답을 통과한 33명의 남자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서 만주 땅에 가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들 신혼부부는 1600Km 이상을 여행하였고 600여명 이상을 치료하였습니다.
 
 
 
언더우드는 미국으로 돌아가 안식년 기간을 보내는 중에도 강연과 신학교 방문 등을 통해서
직접 후배 선교사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에비슨, 무어, 레이놀즈, 테이트, 리 등이 언더우드의 영향으로 한국에 온 선교사들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국선교사로 올 수 있었던 것은 언더우드 타자기의 소유자이던
언더우드의 형 (존 토마스 언더우드, John T. Underwood)이 재정을 지원한 덕분이었습니다.
 
 
언더우드는 초대 성경번역위원장을 맡은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위원장으로서의 그 책임을 다 하였으며,
한국에 오게 될 선교사와 외국인들을 위해서 손수 영한사전, 한영사전, 한국어문법서들을 만들어 직접 출판하기도 하였습니다.
언더우드는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 교회의 설립자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조선기독교대학'(나중에 세브란스 의대와 합해져서 연세대학교가 됨)를 설립해서
초대학장을 맡는 등 한국 대학교육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언더우드 2세는 아버지를 이어서 조선기독교대학의 3대 교장으로 학교의 발전에 공헌하였고 한국전쟁 중에는
미군민간고문으로 일하였습니다. 그리고 언더우드 3세도 연세대학교의 교수와 이사로 봉직하였습니다.
 
 


찬양/ 작은 불꽃 하나가

1.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어
곧 주의 사람들 그 불에 몸 녹이듯이
주님의 사랑 이같이 한번 경험하면
그의 사랑 모두에게 전하고 싶으리

2. 새싹이 돋아나면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 화창한 봄날 이라네
주님의 사랑 이같이 한번 경험하면
봄과 같은 새 희망을 전하고 싶으리

3. 친구여 당신께 이 기쁨 전하고 싶소
또 주는 당신의 의지할 구세주라오
산 위에 올라가서 이 복음 외치며
내게 임한 주의 사랑 전하기 원하네

산위에 올라가서 이 복음 외치며
내게 임한 주의 사랑 전하기 원하네
 
<자료를 올려주신 세명선교교회 주영신집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양지 한국 순교자 100주년 기념관

 


박관준 장로 순교추모비

 


정원의 십자가

 


주기철 목사 순교 기념비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囚獄)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답하랴". 기념관 입구 시비에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시 '옥중명상'이 새겨져 있다

 


기념관 올라가는 길

 

기념관에 이르는 길의 양 옆에는 유족들이 세운 높이 50㎝의 자연석으로 된 '순교자기념비'들이 서있다. 여기에는 순교자들의 이름과 그 밑에 성구들이 적혀 있다.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디모데후서 1:8). 이들 중에는 한국 최초의 세례교인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 죄로 2년 간의 옥고 끝에 1893년 순교한 백홍준 장로, 천황 숭배를 거부하다 7년간 옥고를 치루고 1944년 순교한 주기철 목사, 6·25 당시 교회당을 비우라는 공산당에 맞서다 총살당한 박영근 목사 등, 조선조 말엽인 1884년 이 땅에 기독교 씨앗이 처음 뿌려진 이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전도하다 숨진 순교자수는 2천 6백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입구 토마스 목사 순교 대형 그림

 


순교자들의 사진

 


전시실

 


전시실

 


평양 산정현교회 사진 전시물


주기철 목사 성경 전시물


순교자명단

 

순교자 명단

 


예배실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박관준 장로

이기풍 목사


조만식 장로


배인숙 전도사

토마스 선교사

 최봉석(권능)목사


기념공원입구비

 부지 기증자

소래교회최초모습(김학수화백그림)

유관순 열사(김학수 화백 그림)

 

기독교순교자 100주년 기념관

 

개신교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린지 1백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으로 세워진 것이다. 1983년 당시 개신교 20개 교단들은 '한국기독교1백주년기념사업회'를 결성,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2천여 명의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기념관 건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처음 계획과는 달리 기념관 완공에는 여러 장애가 있었다. 부지도 그렇고 당시 12억 원대에 달하는 막대한 건설비용도 문제였다. 그러나 영락교회 정이숙 권사가 1986년 용인시 추계리에 10만여 평의 부지를 헌납했고, 1989년에는 이 사업을 위하여 재미실업가인 한규빈씨가 1백만 달러(당시 7억여 원)를 선뜻 내놓다. 이 자금이 기념관 건립의 초석이 되었고, 부족한 자금은 국내 많은 교회와 신도들의 헌금으로 충당되어, 순교자기념관은 1988년 8월 진입로 공사를 끝내고 기념관 기공식을 가진 뒤, 1989년 11월18일 준공기념 예배를 드리고 문을 열면서 기독교의 성지로 자리를 잡게 잡았다. 순교자기념관은 건축적인 면에서 아담하면서도 유려하여 91년 건축가협회로부터 `대한민국 건축가협회상'을 받기도 하였다.  기념관은 건평 3백66평의 3층 건물로.전체 직사각형에 가운데 원통형 모양을 넣어 유선을 강조했다. 양측에 원추기둥 두개가 받치고 있는 출입구를 들어서면 로비에 대형그림이 있다. 또 1866년 제너럴 셔어먼호를 타고 국내에 들어와 선교하다 순교한 토머스 목사가 성경 앞에 무릎을 꿇고 참수 직전에 있는 모습을 그린 대형그림도 있다. 혜초 김학수 화백이 기증한 40점의 역사화들 중 하나다. 그림 옆 나선형 계단을 오르면 관람이 시작된다. 2층은 우측 회의실과 좌측 예배실로 이루어져 있다. 예배실에는 30년대 이전 개화기 교회들과 우리 사회 모습을 담은 사진 1백20점이 걸려 있다. 초가 교회 앞에 색동저고리를 입은 아이들.댕기머리에 야구방망이를 들고 야구를 하는 교회 어린이들. 갖가지 사진 속에서 보는 개화기 성도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좌·우 전시실이 연결된 3층은 순교자의 선영들과 성경, 편지 등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일제와 6·25전쟁 등을 거치며 목숨을 바쳐 기독교 탄압에 항거했던 2백2명의 순교자들이 사용하던 것들이다.선영과 유리탁자 속에는 손때 묻은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당신도 순교자가 될 수 있다'고 적힌 거울은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게 한다. 기념관에는 이밖에도 회의실에 마련된 서가에 교계 관련 서적 8백60여권이 비치되어 있고, 성서의 변천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20년대부터 최근까지 발행된 성서 40여권이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다.

 

 

피살 종교인들


[목사(38)]

50여 명 무심천에서 피살

郭京漢(곽경한·60) 9월24일 청주형무소에서 피살. 일제시대에는 괴산, 보은, 청원 등지에서 목회하였고 광복 후 청주형무소의 목사로 재임했다. 6·25 전쟁 후 공산군에 체포되어 청주 내무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공산당은 郭목사를 비롯한 50여 명을 결박하여 청주 무심천으로 끌고 가 집단 살해.

金邦昊(김방호·56) 전남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염산교회 목사. 10월27일 염산면 옥실리 장병태의 집에서 부인 김화순과 자녀 등 7명이 피살. 이때 염산교회 신도의 과반수가 넘는 77명이 피살되었다.

金炳球(김병구·40) 전북 정읍군 신태인제일교회 목사. 「기독교대백과사전」은 공산군이 체포하여 살해한 뒤에 연못에 내던진 것으로 되어 있다. 정부의 「피살자명부」에는 金炳珠(김병주·49) 목사가 8월6일 신태인읍 연정리에서 피살, 「피납치자명부」에는 金炳九(김병구·49)라는 기독교인이 8월6일 전북 정읍군 신태인읍 연지리에서 납북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두 같은 사람인데 이름과 나이가 다르게 기재된 것이다.

金炳燁(김병엽·43) 전북 정읍군 신태인제일교회 목사. 「피살자명부」에는 金炳華(김병화) 목사가 8월6일 완주군 신태인읍 연정리에서 피살로, 「피납치자명부」에는 같은 사람이 납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김병엽과 같은 사람일 것이다. 한편 「기독교대백과사전」과 「한국기독교회사」(김수진, p.346)에는 6·25 전쟁 후 공산군이 물러간 뒤에 패잔병들로 조직된 빨치산들에게 1950년 10월10일 새벽에 피살된 것으로 되어 있다.

金相俊(김상준·27) 9월28일 강원도 횡성읍 北川里(북천리)에서 피살.

金洙鉉(김수현·56) 광복 후 부안읍교회와 진도읍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6·25 전쟁 후 진도읍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수문 밑 바다에 수장되었다.

金禮鎭(김예진·53) 서울 후암교회 목사. 8월2일 11시경 서울 신당동에서 여러 명의 북한군이 연행하여 군용차로 납북하였다. 김예진 목사는 정부가 6·25 직후에 조사한 피살자명부에 수록되어 있고, 「기독교대백과사전」에도 8월2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미아리 골짜기에서 피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956년에 적십자사에서 납북상황을 신고토록 했을 때에 가족들이 「납북」으로 신고했다. 가족들은 혹시라도 납북된 상태로 북한에 억류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운 희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金允實(김윤실·34) 서울 북창동 공동교회 목사. 8월11일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9월22일 피살.

金正福(김정복·61) 장로교 목사. 소록도교회에서 나환자를 대상으로 목회하던 중 6·25 전쟁 후 체포되어 고흥 내무서에 감금되었다가 공산군이 후퇴하던 9월28일 애국청년 30여 명과 함께 고흥읍 뒷산에서 피살.


공산군이 쇠창으로 찔러 죽여

金宗仁(김종인·51) 전남 법성포교회(장로교) 목사. 9월29일 공산군에 끌려가 어느 무밭에서 독살당하였고 부인과 두 딸, 한 아들을 포함한 교인 24명도 순교.

金鍾漢(김종한·45) 전북 만경교회(장로교) 목사. 김제군 백산면 신기리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다가 1950년 같은 군의 만경교회에 부임. 9·28 수복과 함께 후퇴하던 공산군은 김종한 등 교인 15명을 김제 내무서 뒤뜰 우물에 생매장하였다. 이때 금산교회 장로 조기남, 주교 교사 김윤철, 대송교회 장로 정기봉을 비롯하여 김형배, 하치오, 김성두, 권태술 등을 죽였고 대창교회 목사 안덕윤을 잔인하게 창칼로 찔러 살해.

金周鉉(김주현·41) 전북 완주군 삼례후정교회 목사. 9월27일 전주 내무서 뒤뜰에서 몽둥이에 맞아 피살. 「피살자명부」에는 7월27일 전주형무소에서 피살된 것으로 적혀 있다.

都福日(도복일·37) 충남 당진교회 삽교교회 목사. 9월21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삽교 근방에서 피살.

朴錫炫(박석현·52) 광주 양림교회(장로교) 목사. 9월27일경 장모인 전도사 羅玉梅(나옥매), 부인 金貴南(김귀남), 아들 박원택과 함께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에서 피살.

朴淵瑞(박연서·62) 대한기독교서회 목사. 대한기독교서회 편집부장을 지냈다. 정치보위부에 구금되었다가 8월1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피살. 9월19일 피살설도 있다.

裴永石(배영석·46) 전남 강진읍교회 목사. 8월6일 강진읍 장터에서 피살.

白南鏞(백남용·54) 복음교회 목사. 과도정부 입법위원을 지냈고 전북 김제에서 목회했는데 공산군 점령 치하에도 예배인도를 계속하다가 8월28일 연행되었다. 9월27일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피살.

孫良源(손양원·50) 전남 여수 나병원 애양원교회(장로교) 목사. 9월13일 애양원에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여수경찰서에 구치되었다 28일 미평공동묘지에서 조상학 목사와 함께 피살.

安德允(안덕윤 또는 德潤·53) 전북 김제군 죽산면 대창리교회 목사. 일제시대 2년 5개월 동안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 1950년 9월27일 대창리교회 앞 들판에서 공산군이 쇠창으로 찔러 죽였다.

元昌權(원창권·51) 전남 영광읍교회(장로교) 목사. 공산군이 진주한 후 피난 가다가 열한 살 난 아들과 임신 7개월의 부인이 함께 피살.

劉東熙(유동희·44) 「피살자명부」의 제주도 피살자에 등재되어 있다. 1950년 7월4일 평양 정치보위국에서 피살되었는데 어떤 경위로 평양에서 피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본적이 대동군 시족면 호남리이며 주소는 강동군 원탄면 송오리인 것으로 보아 북한 출신으로 월남하여 제주도에 거주하다가 국군을 따라 북한에 갔다가 피살된 것으로 추측된다.


심한 매를 맞고 피살

柳允洙(유윤수·51) 1950년 9월27일 전북 정읍군 신태인읍 인교동에서 피살.

李用善(이용선·45) 전남 구례읍 교회 목사. 공산군이 후퇴한 이후 1950년 12월9일 순천노회에 참석하고 귀가하던 중 지리산에 숨어 있던 공비들에게 피살.

李龍仁(이용인·38) 목사. 1950년 10월7일, 전남 영광군 춘남리 설도에서 피살.

李載珪(이재규·50) 전북 황등교회(장로교) 목사. 1950년 7월26일 오후 5시 전북 익산군 황등면 황등교회 사택에서 내무서원 2명에게 연행 납치된 후 변영수(장로), 안인호(집사), 이성권(청년회장)과 함께 피살.

李鐘德(이종덕·67) 충남 강경교회(침례교) 목사. 9월28일 공산군이 납치하여 금강 강변에서 총살.

林鍾憲(임종헌·44) 전북 고창읍교회 목사. 10월25일 고창읍내에서 피살. 「한국기독교회사」에는 9월28일 오후 2시 고창읍 뒷산에서 총살로 기록.

全仁善(전인선) 서울 남창동교회(장로교) 목사.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

鄭仁泰(정인태·34) 전남 무안군 몽탄교회(장로교) 목사. 공산군에게 교회당을 빼앗기고 고향인 함평으로 내려갔다가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10월24일 죽창에 찔려 피살. 그의 아버지 정재련(전도사)도 같은 해 12월6일 함평에서 공산군에게 피살.

趙興植(조흥식·37)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장로교 전도사이며 8월21일 빨치산에게 붙들려 간 후 팔치골에서 피살」. 한편 「피납치자명부」에는 목사로 기록되어 있고 「10월20일 전북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에서 납북」.

崔感恩(최감은·46) 위의 유동희 목사와 같은 경우이다. 「피살자명부」의 제주도 편에 등재되어 있는데 10월12일 평양 동창리 63번지 자택에서 피살되었다. 어떤 경위로 평양에서 피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崔明吉(최명길·44) 전남 목포 연동교회(장로교) 목사. 8월 초순 목포 건너편 둥근섬에서 예배를 보기 위해 교인 20여 명과 배를 기다리던 중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영암군 삼호분주소로 연행되어 그곳에서 심한 매를 맞고 피살.


黃德柱(황덕주 또는 德周·47) 공주형무소 형목. 감리교 목사. 8월20일 강원도 원주 내무서에서 피살.


[소속, 납북 일자 또는 장소가 확실치 않은 목사]

金仁善(김인선) 장로교 목사. 서울에서 목사로 재직하던 중 피살.

劉鍾鶴(유종학·63) 명동교회(감리교) 목사. 공산군이 납치 살해하였다.

이종도 제주도 제1대 목사.

임인재 전남 해제 중앙교회 목사.

전병무 경북과 울릉도에서 활동한 목사.


[전도사(24)]

高永昊(고영호·27) 전북 익산군 낭산면 호암리 낭산교회 전도사. 9월29일 낭산면 방공호에서 피살.

金奎興(김규흥·59) 전도사. 9월14일 인천경찰서에서 피살.

金鳳河(김봉하·33) 충남 문산교회 전도사. 「피살자명부」에 7월31일 대전형무소에서 피살로 되어 있는 金鳳洞(김봉동)과 같은 사람으로 추정된다. 「피납치자명부」에는 7월23일 충남 서천군 문산면 수암리에서 납북.

羅玉梅(나옥매·50) 전남 영암군 상월교회 전도사. 일제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4년 5개월간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9월27일경 광주 양림교회 목사인 사위 朴錫鉉(박석현)과 딸 김귀남, 외손자 박원택 그리고 다른 교역자와 함께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에서 피살.

文俊卿(문준경·59) 전남 신안군 임자성결교회 전도사. 10월7일 전남 신안군 후증도 중동리 백사장에서 피살.

朴惠源(박혜원·37) 전도사. 8월13일 춘천형무소에서 피살.

吳秉吉(오병길·54) 전북 부안군 백산면 평교교회 전도사. 9월9일 공음면 내무서 뒤뜰에서 피살. 이튿날 같은 장소에서 두 아들과 며느리도 처형당했다. 이때 집사 김영해 등 덕암교회 교인 22명이 집단 피살.

李光年(이광년·34) 전북 고창군 대산면 사거리교회(장로교) 전도사. 10월16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피살. 「한국기독교회사」에는 고창군 공음면 덕암교회 전도사로 기록.

李德奉(이덕봉·51) 충남 금산군 수영리교회(장로교) 전도사. 9월22일 금산 비름고개에서 피살.

李馬太(이마태·31) 전북 정읍군 영원면 영성교회(장로교) 전도사. 9월25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27일 피살.

鄭在鍊(정재련·64) 전남 함평 구봉교회(장로교) 전도사. 12월6일 함평에서 공비들에게 피살. 피살된 전남 무안군 몽탄교회 목사 鄭仁泰(정인태)의 아버지.

趙龍擇(조용택·48) 전남 곡성군 옥과교회(장로교) 전도사. 전남 화순군 화학산에 피신하다가 9월29일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피살.

朱三植(주삼식·54) 전남 무안군 삼향면 옥암리교회(장로교) 전도사. 7월30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혹심한 고문에 시달리다가 마을 뒷산에서 피살.

池漢永(지한영·41) 전남 여천군 율촌면 장천교회 전도사. 9월28일 미평공동묘지에서 조상학, 손양원 목사 등과 함께 피살.


[소속, 납북 일자 또는 장소가 확실치 않은 전도사]

김대업 전남 해제 중앙교회 전도사.

金仁奉(김인봉·37) 전남 영암군 순회 전도사. 공산군에게 붙잡혀 피살. 장인은 피살된 장로 박병근.

김인재 전남 광주 선교부 전도사.

魯洪均(노홍균) 전남 영암군 서호교회, 매월교회 전도사.

朴淳信(박순신) 서울 영등포 목동교회 전도사. 공산군 패잔병에게 발각되어 피살.

申德哲(신덕철·40)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전도사.

신복균 전남 강진군 해남읍교회 전도사.

오교남 전남 진도 벽파교회 전도사.

鄭連行(정연행·62) 전남 옥구군 혜성교회 전도사.

조상학 경남 하동군 하동읍교회 전도사.


[장로(33)]


전세 불리해지자 학살

姜聲振(강성진·59) 전북 만경교회 장로. 9·28 수복 때 후퇴하던 공산군에 의해 목사 김종한 등 교인 15명과 함께 피살.

金桂洙(김계수·51) 전남 목포 연동교회 장로. 8월 초순 최명길 목사와 함께 체포되어 피살.

金東欽(김동흠·33)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시무 장로. 10월6일 밤 공비에게 붙들려 월출산 기슭에서 피살.

金斗炳(김두병·45) 전주 중앙교회 장로. 전주 광장에서 열린 인민재판에서 심한 구타를 당했으며 9월27일 전매국 창고에서 피살. 한편 정부의 「피살자명부」에는 이름이 金斗煥(김두환)으로 되어 있다.

金相天(김상천·54) 전북 완주군 봉동면 제내리교회 장로. 전세가 불리하자 공산군이 소방서 창고에 우익청년을 포함하여 50여 명을 감금하였다가 9월27일 집단 살해.

金容善(김용선·45) 전남 담양읍교회 장로. 10월5일 담양읍 남산 기슭에서 공비들에게 피살.

金應洛(김응락·45) 서울 영락교회 장로. 9월 영락교회에서 피살.

金在俊(김재준·49) 충남 금성군 금성면 상가리교회 장로. 8월22일 금성면 화림리 구주바위 골짜기에서 장로 김희식과 함께 피살.

金正鉀(김정갑·42) 「피살자명부」에는 金匹鉀(김필갑)이라는 장로가 8월23일 피살로 되어 있고, 「납북자명부」에는 金正鉀(김정갑)이 8월5일 전북 부안군 상서면에서 납북으로 되어 있다.

金鍾五(김종오·33) 「피살자명부」에는 8월12일 대전형무소에서 피살. 「피납치자명부」에는 9월7일 납북.

金平國(김평국·71) 전남 영광군 묘량교회 장로. 9월18일 묘량교회 뜰에서 인민재판을 받고 가족 8명과 같은 교회 신도 김윤환의 가족 18명이 집단 피살. 「피살자명부」에는 金平局(김평국)이 9월10일 묘량면 신천리에서 피살로 기록.

金顯慶(김현경·44) 전북 완주군 봉동면 제내리교회 장로. 9월27일 같은 교회 장로 김상천과 함께 9월27일 소방서 창고에서 피살.

金揮男(김휘남·33) 전북 임실군 관촌면 관촌장로교회 장로. 8월25일 관촌면 광장에서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피살. 「피살자명부」에는 金體男(김체남)이 7월27일 관촌면 사선대에서 피살.

金熺植(김희식) 충남 금산군 군복면 외부리교회 장로. 8월22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금성면 화림리 구주바위 골짜기에서 장로 김재준과 함께 피살.

朴炳根(박병근·59) 전남 함평군 나산교회 장로. 8월5일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었는데 공산군이 후퇴할 때 함평읍내 향교리 뒷산 중턱에서 피살. 광주 숭일중학교 5학년이었던 둘째 아들 金圭(금규)도 공산당에게 총살당했고 전도사였던 사위 金仁奉(김인봉)도 9·28 수복 후 도피하던 공산군에게 붙잡혀 피살.

白南哲(백남철·53)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장로. 「피살자명부」에는 9월26일 부여군 홍산면 남촌리에서 피살. 「피납치자명부」에는 8월18일 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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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홍보관(좌)와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우)

 

양화진외국인묘지공원 선교사묘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양화진외국인묘지는 1890년 설치되고, 국제간의 조약에 따라 외국기관(The Municipal Council, 租界公司 / 紳董公司)이 .... 당시에 기독교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선교 기념관이 건립되면서, 헌금을 한 많은 기독교인들과 당시 재단법인한국기독교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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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145- 8에 위치한 양화진 외국인 묘지는 정식 명칭이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다. 1893년 10월 24일에 개설이 허가 되었으며 면적은 13,224 제곱미터이다. 무덤은 514 여기가 있으며, 최초의 피장 선교사는 존 헤론이다. 이곳에는 초대 선교사와 조국 근대화에 헌신한 구미 각국의 저명인사 500여명이 묻혀있는 양화진 외국인 공원 묘역에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성금으로 선교기념관을 건립하여 그들의 선교정신과 숭고한 희생 봉사의 업적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후세에 전승키 위하여 1985년 1월 14일 재단법인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 제 5차 총회에서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한국 기독교선교회관을 건축키로 결의하였다. 이 사업이 1985년 6월 28일  "한국기독교 선교100주년 기념관" 기공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며 1986년 8월 20일 건조물 및 토목공사가 완료되고 9월 10일 조경 공사가 완공되었다. 이곳에는 선교 기념실, 자료실, 대강당, 외국인 연합교회 예배처소, 종, 소회의실 교육실, 목회자실, 부속실, 친교실,식당, 기관실, 다목적실, 야외 행사공간, 주차장, 관리인 숙소, 휴게실이 구비되어 있다. 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복음을 전해야 할 때 한국은 미개한 상태에 놓여있었다.그리하여 선교사들은 복음과 또한 문명화와 근대화 사역을 함께 수행해야 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을 병행해야 했는데 알렌은 제중원을 설치하였다. 이곳에서 언더우드,헤론, 감리교 의료 선교사 겸 목사 스크랜톤이 일하였다. 처음에는 알렌이 와서 일하였으나 밀려오는 환자를 혼자서 치료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언더우드가 약국의 일을 도와주게 되었다. 1885년 5월에 내한한 스크랜톤과 함께 같은 해 6월 헤론이 가담하였다. 부족한 약품들, 의료 재료들로서는 감당하기 역부족이었다. 날씨가 더워지고 전염병은 창궐하였다. 한국인들은 위생관념이 희박하여서 물을 끓여먹지 않아서 온 가족과 동네가 몰사하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헤론은 내한한지 5년만에 이질에 걸렸다. 그는 그곳에서 그렇게 순직했다. 이러한 제중원은 후에 미국의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의 실업가 <세브란스>가 1만 5천 달러를 희사하여 지금의 서울역 앞 대지를 구입하여 세브란스 병원이라는 이름을 갖게되고 세브란스병원이 생겨났다. 헤론은 이렇게 한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의료 선교에 뛰어 들었고 그는 그렇게 이질에 걸려 질병으로 숨져갔다. 그는 5년간이라는 짧은 선교의 현장에서 사역을 감당하다가 이방 땅에서 그렇게 뼈를 묻었다. 그는 조국보다도 자신의 가족 보다도 더욱 한국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의 묘지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 JOHN W. HERON, MD/who came to Korea IN  1885/MISSIONARY PHYSICIAN/ TO/ CORT ANT LEGATIONS/DERBYSHIRE ENG,1856/ DIED/  SEOUL JULY,1890/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그는 1885년 한국에 의료선교사로 와서 1890년  7월 여름에 순교했다. 그리고 그 비문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라고 자신의 신앙을 묘비에  적어놓았다.  헤론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선교에 대한 일념으로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 다른 사람의 병을 고쳐주었지만 자신은  그렇게 죽어갔다.  한국의 복음은 이런 사명자들의 결과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같은 곳에 잠들어 있는 많은  선교사들의 묘비에는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자신들의 묘비에 적으면서  순교의 길에 들어갔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A. R. 아펜젤러-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J.D. 언더우드,  "주님 ! 길고 긴 여행을 끝내고 이제 나는 안식을 얻었습니다." -G.A. 테일러,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H.B. 헐버트,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A.K. 젠슨-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R. 켄드릭-이곳에는 선교사들을 따라 왔다가 부모와 함께 순직한 가족들이 함께 있으며, 채 꽃피우지 못하고 부모도 함께 한국에 묻힌 아이들도 많다 이곳에 한국 복음의 선교를 위하여 숨진 사람들의 묘는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다.

 

신분별, 국적별 순교자

구분

어른

어린이

선교사

75

36

111

선교사,

군인 아닌 사람

46

10

56

미군부대와

관련된 사람

26

38

64

소속 불명

44

31

75

한국인

15

11

23

 

국명

인원수

국명

인원수

미국

265

캐나다

7

백러시아

54

스페인

4

영국

30

벨기에

4

프랑스

25

덴마크

3

한국

20

일본

1

호주

12

총계

425명

숫자에는 표지없는 무덤 80여기와 어린이는 포함되지 않았음

 

양화진 홍보관(2008.3.27 개관)


2008.3.27. 개관한 양화진 홍보관은 재)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및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그리고 마포구청이 함께 건립하였다.  "양화진홍보관’과 1층 ‘양화진홀’은  “조선의 밀알이 됐던 선교사들을 본받아 앞으로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빛으로 거듭나도록 도와 명실공히 기독교 최대의 성지가 되도록 함”에 개관 목적이 있다. 이재철(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목사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과 양화진홍보관에 대해 “피선교국이 선교사들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100% 자비로 보존, 관리하는 세계유일의 선교사묘원이며 세계최초의 전시관”이라 소개하며 “앞으로도 100주년기념교회는 묘지기 사명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입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홍보관(좌)와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우)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홍보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 

기념관 내부 제단       (출처- http://www.kmc.or.kr/)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 후면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안내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안내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안내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안내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안내판


양화진 외국인 묘지, 한국기독교선교기념관(100주년 기념 교회)

 

외국인 묘지 배경

 

양화진 이야기

 

100주년 기념교회 봉헌석

 

최초 매장자 헤론 선교사

 

존 헤론 선교사 묘지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존 헤론이 고종으로부터 받은 병풍

 

존 헤론이 고종으로부터 받은 병풍

 


선교 120주년 기념비

 


한국 감리교 최초 선교사 아펜젤러 추모비

 


아펜젤러 선교사 아들 묘(배재학당 교장)

 


아펜젤러 추모비(배재동문)

 


아펜젤러 소개

 


아펜젤러 추모비 뒷면

 

아펜젤러 추모비 제막식, 서천앞바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순직 장소가 그동안 알려졌던 군산 앞바다가 아니라 서천 앞바다에 있는 오세이도라 불리던 어청도 부근이라는 최근 교회사가들의 주장에 근거해 2006.6 아펜젤러 순직 104주년을 추모하며 감리교 충청연회 주관하고 서천군기독교연합회와 서천군이 공동으로 진행 중인 한국최초 성경전래지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추모비 제막식이 있었다. 마량진에서 48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어청도는 1914년 이전에는 행정경계상 충청남도에 속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연세대 아펜젤라관, 사적 277호


스크랜튼 선교사(이화여대)

 


스크랜튼 소개

 


언더우드 선교사 일가의 묘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일가 묘역

 


언더우드 선교사 묘

 


언더우드 소개

 


헐버트 선교사 묘

 


헐버트 선교사 묘비

 


헐버트 선교사 소개비

 

대한제국 국권 회복을 위해 일제에 맞서 싸우다 강제추방까지 당했던 호머 헐 버트 박사(1863∼1949) 는 미국 버몬트주 태생으로 대한제국 초청으로 1886년 23세 나이로 왕립 영어학교인 육영공원 교사로 내한해 교육분야 총책임자와 외교 자문관으 로 고종황제를 보좌했다. 헐버트 박사는 1907년에는 이준 열사 등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참석 할 수 있도록 면밀히 지원하는 등 항일운동을 벌이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됐다. 그는 그 후 40여 년 만인 1949년 7월 29일 우리 정부 초청으로 8ㆍ15행사에 참 석하기 위해 내한했다 일주일 만인 같은 해 8월 5일 8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사울 선교사

 


셔우드 홀 선교사

 

베텔 선교사

 

루비 켄트릭 선교사  묘지

 

"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 Korea should have them all ."

- Ruby Kendric -

"내게 줄 수 있는 천번의 생명이 있다면 나는 그 천 번의 삶을 한국을 위해 바치겠다"

-루비 켄트릭

 

클라크(곽안련)선교사

 

클라크 묘지

 

캠벨 선교사(배화학당, 종교교회, 자교교회 설립자)

 

캠벨 선교사 묘지

 

테일러 선교사 묘지

 

감리교 하디 선교사 기념비 (윤춘병 감독, 신경하 감독 등)

 

하디 선교사는 캐나다 출신의 남감리교 의료선교사로 1898년부터 함경남도 원산을 거점으로 강원도 북부에서 의술을 베풀며 전도를 시작했다. 그는 5년 동안 선교에 매진했으나 뚜렷한 열매를 남기지 못하고 고민하던 중 1903년 8월 24일부터 일주일 동안 원산에서 열린 선교사 연합기도회를 인도하다가 ‘아무리 수고해도 성령의 임재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후 그는 8월 30일 원산감리교회에서 열린 주일예배에서 자신의 교만과 한국인들을 멸시했던 죄를 공개적으로 자복했고, 그의 회개는 곧 한국인들의 가슴에도 회개의 불을 붙여 원산 대부흥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그는 그 후에도 개성과 서울, 인천 등지를 순방하며 집회를 인도했고, 특히 1906년 8월 평양에서 그가 인도했던 감리교 장로교 선교사 연합기도회는 1907년 평양대부흥의 기폭제가 됐다. 그는 1935년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세상을 떠났으나, 그가 한국에서 선교할 당시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은 두 딸이 서울 양화진 묘역에 묻혀 있다

 

선교사 자녀들 묘역

 


선교사 묘지들

 


선교사 묘지들

 


선교사 묘지들

 

양화진 외국인 묘지 공원 (한국 기독교 선교기념관)

 

서울 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145- 8/ 명칭은 서울 외국인 묘지공원으로 되어있다. 1893년 10월 24일에 개설이 허가 되었으며 면적은 13,224 제곱미터이다. 무덤은 514 여기가 있으며, 최초의 피장 선교사는 존 헤론이다. 이곳에는 초대 선교사와 조국 근대화에 헌신한 구미 각국의 저명인사 500여명이 묻혀있는 양화진 외국인 공원 묘역에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성금으로 선교기념관을 건립하여 그들의 선교정신과 숭고한 희생 봉사의 업적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후세에 전승키 위하여 1985년 1월 14일 재단법인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 제 5차 총회에서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한국 기독교선교회관을 건축키로 결의하였다. 이 사업이 1985년 6월 28일 선교기념관 기공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며 86년 8월 20일 건조물 및 토목공사가 완료되고 9월 10일 조경 공사가 완공되었다. 이곳에는 선교 기념실, 자료실, 대강당, 외국인 연합교회 예배처소, 종, 소회의실 교육실, 목회자실, 부속실, 친교실,식당, 기관실, 다목적실, 야외 행사공간, 주차장, 관리인 숙소, 휴게실이 구비되어 있다. 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복음을 전해야 할 때 한국은 미개한 상태에 놓여있었다.그리하여 선교사들은 복음과 또한 문명화와 근대화 사역을 함께 수행해야 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을 병행해야 했는데 알렌은 제중원을 설치하였다. 이곳에서 언더우드,헤론, 감리교 의료 선교사 겸 목사 스크랜톤이 일하였다. 처음에는 알렌이 와서 일하였으나 밀려오는 환자를 혼자서 치료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언더우드가 약국의 일을 도와주게 되었다. 1885년 5월에 내한한 스크랜톤과 함께 같은 해 6월 헤론이 가담하였다. 부족한 약품들, 의료 재료들로서는 감당하기 역부족이었다. 날씨가 더워지고 전염병은 창궐하였다. 한국인들은 위생관념이 희박하여서 물을 끓여먹지 않아서 온 가족과 동네가 몰사하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헤론은 내한한지 5년만에 이질에 걸렸다. 그는 그곳에서 그렇게 순직했다. 이러한 제중원은 후에 미국의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의 실업가 <세브란스>가 1만 5천 달러를 희사하여 지금의 서울역 앞 대지를 구입하여 세브란스 병원이라는 이름을 갖게되고 세브란스병원이 생겨났다. 헤론은 이렇게 한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의료 선교에 뛰어 들었고 그는 그렇게 이질에 걸려 질병으로 숨져갔다. 그는 5년간이라는 짧은 선교의 현장에서 사역을 감당하다가 이방 땅에서 그렇게 뼈를 묻었다. 그는 조국보다도 자신의 가족 보다도 더욱 한국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의 묘지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 JOHN W. HERON, MD/who came to Korea IN  1885/MISSIONARY PHYSICIAN/ TO/ CORT ANT LEGATIONS/DERBYSHIRE ENG,1856/ DIED/  SEOUL JULY,1890/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그는 1885년 한국에 의료선교사로 와서 1890년  7월 여름에 순교했다. 그리고 그 비문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라고 자신의 신앙을 묘비에  적어놓았다.  헤론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선교에 대한 일념으로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 다른 사람의 병을 고쳐주었지만 자신은  그렇게 죽어갔다.  한국의 복음은 이런 사명자들의 결과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같은 곳에 잠들어 있는 많은  선교사들의 묘비에는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자신들의 묘비에 적으면서  순교의 길에 들어갔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A. R. 아펜젤러-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J.D. 언더우드

"주님 ! 길고 긴 여행을 끝내고 이제 나는 안식을 얻었습니다." -G.A. 테일러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H.B. 헐버트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A.K. 젠슨-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R. 켄드릭-

 

이곳에는 선교사들을 따라 왔다가 부모와 함께 순직한 가족들이 함께 있으며, 채 꽃피우지 못하고 부모도 함께 한국에 묻힌 아이들도 많다 이곳에 한국 복음의 선교를 위하여 숨진 사람들의 묘는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다. 봉의 높이도 높지 않다.  마치 예수님께 책망받던 바리새인들의 비유와 같이 평토장한 무덤같아보여 쓸쓸하다. 화려하지 않게 잠들어 있는 이들의 영혼은 아름답기만하다. 그러나, 이들의 휴식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이 땅에서의 안식이다. 그러나 이들의 안식이 평온하지 만은 않은 듯 싶다. 전쟁과 그 포화의 흔적들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 비석을 대신한 돌 십자가들이 모진 세월속에서 십자가 조차 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파손되어 있다. 주님의 사랑을 우리는 이렇게 받았으며 또한 우리보다 더욱 한국을, 한국영혼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오늘 우리에게 복음이 주어졌다. 이 사랑의 선교사들은 다음과 같은 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 도표들은 우리가 누구이기에 외국의 많은 선교사들이 우리를 위하여 죽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주며 복음의 빚진 자임을 느끼게 해 준다.


신분별, 국적별 순교자

구분

어른

어린이

선교사

75

36

111

선교사,

군인 아닌 사람

46

10

56

미군부대와

관련된 사람

26

38

64

소속 불명

44

31

75

한국인

15

11

23

 

국명

인원수

국명

인원수

미국

265

캐나다

7

백러시아

54

스페인

4

영국

30

벨기에

4

프랑스

25

덴마크

3

한국

20

일본

1

호주

12

총계

425명

숫자에는 표지없는 무덤 80여기와 어린이는 포함되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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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두산 성지

 


절두산 성당

 


절두산 내부

 


절두산 내부 강단

 


 순교 성인 28위의 성해를 모신 지하묘소 

 


부활의 집(납골당)

 


박해시대의 형구들

 


박해시대 형구틀

 


절두산

 


마리아 상

 

1858년 성모님이 프랑스 루르드 동굴(마사비엘)에서 발현하신 것을 기념하여 세계 각국에 마사비엘을 본딴 동굴이 만들어졌다. 절두산의 성모동굴은 1978년 만들어졌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 한국 방문 기념상

 


순교자 기념상

 

절두산에서 처형된 첫 순교자 가족, 이의송(프란치스코)과 그의 처 김예쁜(마리아), 아들 봉익을 형상화한 듯한 이 순교자상은 참수되어 떨어진 목을 몸통 위에 받쳐놓은 모습으로 처절한 순교광경을 연상시키고 있다. 1972년 최종태 교수가 제작하였다.

좌대 1.7m, 본상 2.2m

 


십자가의 길 묵상비(제 1처)

 

2001년 11월 1일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이 십자가의 길에는 교회에서 통용되는 기도문의 첫부분을 새겨넣었으며, 이곳에서 순교한 신앙의 선조들이 바쳤던 옛 기도문 '셩노션공'의 머리부분도 함께 제시되어 있다.

 

절두산 순교성지

 

오성바위

 

이 바위는 처음에는 복자바위라 불렸다. 병인박해(1866)때 순교한 다블뤼 안주교, 오매트리 오신부, 위앵 민신부, 황석두 루가, 장주기 요셉의 사연이 깃든 바위로 다섯 분의 성인을 기리는 뜻으로 오성바위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될 때와 충남 보령 갈매못 형장으로 끌려갈 때 쉬었다 간 바위로 이 다섯 성인들이 여기서 쉬는 동안 포졸들이 포승을 풀어 주어서 안주교는 교우들을 만나 격려하고 함께 기도한 후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고 한다. 그 앞의 돌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한 다블뤼 안주교가 21년간 숨어 살던 방을 드나들 때마다 밟고 다니던 문지방돌이다.

 

김대건 신부 정원

 

김대건 신부 동상

 

동상은 김대건 신부 탄생 150주년 맞아 기념 제작된 것으로, '애국선열조상 건립위원회‘가 건립한 것으로 홍익대 전뢰진 교수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1972년 김수환 추기경의 축성과 함께 제막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동상은 뒤에 가톨릭 대학교로 이전되었으며, 그 자리에 지금의 동상이 자리하게 되었다. 좌대 높이 5.8m, 본상 높이 4.35m

 

순교성지 안내판

 

순교자 기념탑

 

순교자 기념탑은 절두산에서 순교한 것으로 확인되는 이의송 가족을 비롯한 28위의 순교자와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2000년 9월 20일 세워졌다. 순교기념비 주탑에는 형틀을 상징하는 조형물 아래 16명의 순교자들 모습이 새겨져 있고, 우측탑에는 절두된 머리가 올려져 있어 절두산의 지명을 암시하며, 주탑과 함께 33명의 순교자 모습이 새겨져 있다. 좌측탑은 일종의 오벨리스크 형식으로 제작되어 절두산에서 순교한 무명 순교자들의 모습을 새겨놓았다

 

형구 돌

 

1976년 연풍 성지를 개발할 때 두 개가 발굴되어 하나는 그 자리에 두고 다른 하나는 절두산 순교성지에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그 후에 또 하나가 발굴되어 현재 연풍 성지에 형구돌이 두 개가 보존되어 있다. 이곳 절두산에 있는 형구돌의 크기는 둘레3m, 앞구멍 지름 30Cm, 뒷구멍 지름 6Cm, 구멍의 앞뒤 거리 30Cm로 원추형이다. 형구돌은 교수형을 집행했던 형구로 가운데 구멍으로 밧줄 올가미를 만들어 넣어 죄인의 머리에 올가미를 씌우고 반대편에서 밧줄을 잡아당겨 머리가 돌에 부딪쳐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다른 곳에서는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았는데, 이곳 연풍에서는 형구돌을 사용해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했다고 한다.

 

은언군 묘비


정조의 이복형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는 은언군이 강화도로 귀양가 있는 동안 강완숙과의 친분과 교류를 통해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송마리아와 신마리아는 ‘왕족이면서 사학에 빠졌으며 주신부를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순교하였다(1801년 3월). 이후 신자가 아닌 은언군도 죽음을 당하였는데, 송마리아의 손자가 철종으로 즉위하면서 사면되었고, 은언군의 묘비도 세워졌다.

 

박순집 성인 묘

 

박순집 일가 16위 순교현양비


박순집(베드로)은 순교자를 모시는 일에 일생을 바친 신앙의 증거자로 박순집의 아버지 박바오로는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치명한 범주교, 샤스탕, 모방 신부의 시신을 목숨을 걸고 노고산에 매장하였다가 4년 후에 자기 문중 산인 관악 삼성산에 안전하게 이장하기도 하였다. 박바오로는 10월 17일 이곳 절두산에서 순교하였다. 박순집은 아버지의 성업을 이어 부친 일가족 6명의 순교자는 물론 무명의 순교자 그리고 성인 베르뇌 장주교와 신부 4명의 시신을 새남터에서 찾아 왜고개에 안장, 순교자 모시는 일에 헌신하였다. 이후 박해가 잦아들자 선교에 앞장서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이후 1979년 9월 26일 박순집의 공적을 기리고 그의 부친 순교자 박바오로를 비롯한 “일가족 16위 순교자 현양비”를 제막하였다. 박순집에 의해 성인들과 순교자들이 묻혔던 왜고개에는 현재 군종교구 국군중앙성당이 세워져 있다. 부친, 형제, 삼촌, 고모, 형수, 조카, 장모, 이모에 이르기까지 한집안 열여섯 명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치명한 박순집(1830-1912년)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비석 앞에서 가슴 뭉클하다

 

성 남종삼 동상

 

남상교는 남종삼 성인의 부친으로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하였다. 진사에 급제하여, 현풍현감, 충청 목사를 역임하고 퇴관 후에는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남종삼은 남상교의 아들로 입양되어 양아버지의 영향아래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과거에 급제해 승지에까지 이르렀다. 지속되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프랑스인 성직자를 통해 막아보려 하였으나 대원군이 급선회함에 따라 병인박해의 회오리 속에서 참수형을 받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남종삼 순교사적비

 

해운당대사의 징지비(주어사)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 천진암 주어사를 순례하던 중 발견-1960년 남종삼 성인의 후손인 남상철(프란치스코)에 의해 발견됨-한 주어사 터 표지 비석으로, 海雲堂大師義澄之碑(해운당대사의징지비)라 새겨져 있다. 이 비가 새워진 연대는 1698년이며, 비신 높이는 91cm, 폭은 33cm이다.

 

 

척화비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이후 대원군은 1871년 4월 서울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하여 전국의 중요 도시에 척화비를 세우게 되었다. 척화비에는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고 쓰여있다. 현재 절두산에 있는 것은 모조품이다.

 

척화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박물관  전시실 내부

 

박물관 입구 모자익

 

제 1전시실


1구역 ..... 천주교 수용과 자생적 신앙공동체 (1602~1801년)

외국 선교사들은 16세기부터 중국과 일본에서 활동하였지만, 조선에는 아직 신앙이 전해지지 않았다. 17세기에 들어와 중국을 왕래했던 조선의 사신들이 서양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서양 종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조선에서는 남인계열의 유학자들이 서양 학문과 서양 종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과정에서 천주교 신앙이 싹터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자생적 교회로 출발하였다.

2구역 ..... 천주교 박해와 교회의 발전 (1801~1866년)

천주교가 학문적 호기심을 넘어 종교로 발전하자 조선의 정치.사회.사상적으로 마찰을 빚으며 교회는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박해 속에서 신자들은 교회 재건과 사제 영입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고, 김대건 신부가 조선인 최초로 사제로 서품되면서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

3구역 ..... 한국의 성인.순교자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되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100여 년 동안 끊임없는 박해 속에서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흘렀다. 순교자들이 흘린 피는 이 땅에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보이지 않는 씨앗이 되어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밑거름이 되었다.

 

천주실의

 

중국 명나라 때인 1593- 96년에 예수회 선교사 마태오 리치가 편찬한 한문으로 된 책으로 중국과 서양학자가 질문 대답하는 대화체 양식으로 기술된 천주교 교리서이다. 1603년 북경에서 간행된 후에 전 한문 문화권으로 전파되어 갔고 한국 초기 교회 창설 과정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천주실의

 

마태오 리치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 교회의 창설자이다. 그가 저술한 "천주실의"를 비롯한 서적들과 그의 보유론적(補儒論的) 선교방식은 천주교의 조선 전래에 큰 힘이 되었다

 

주교요지

[주교요지]의 목판본이 간행되기 이전 박해시대 신자들은 이를 필사하여 읽었다

 

주교요지 목판본 

[주교요지]는 정약종이 한글로 쓴 최초의 교리서이다. 필사본으로 전해져서 읽혀지던 이책은 병인박해 직전인 1864년에 목판본으로 간행되었으며, 그 목판본 판목들이 남아서 박해를 이긴 신앙을 증언해 주고 있다

 

강세황의 천주당 시문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은 당대의 예단(藝壇)의 총수로서 시서화(詩書畵)에도 뛰어났으며 감식에도 출중하여 정조의 아낌을 받았다. 그는 칠순을 맞이한 청국 건륭황제를 축하하기 위해 조선 왕조에서 파견한 천추사(千秋使)의 부사(副使)로 북경에 파견되었으며 북경에서 천주당을 견문하고 한편의 시를 지었다. 김상기(金庠基) 박사 기증품

 

황사영 백서 

황사영(黃嗣永, 1775-1801) 알렉시오는 1801년 신유박해 직전에 가장 활동적인 교회지도자였다. 그는 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도 제천 배론의 교우촌 토굴에 몸을 숨기고 조선 교회의 박해 현황과 그에 대한 대책을 비단에 써서 이를 북경교회로 보내려고 했다. 비단에 쓴 편지이므로 이를 <백서(帛書)>라고 한다. 황사영 백서는 북경교회로 보내기 전 사전에 압수되었다 이 문서의 크기는 가로62cm, 세로38cm 의 흰 명주에 작은 붓글씨로 씌여진 것인데 모두 13,384자에 달한다. 원본은 로마 교황청에 보관중이다

 

이승훈의 간찰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은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그해 9월 서울 수표교 부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벽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는 새로운 신앙공동체의 출발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수광의 간찰

이수광(1563-1628)은 3차에 걸쳐 사신으로 북경을 왕래하면서 서양 학술을 [지봉유설]에 소개하였으나 [天主實義(천주실의)]나 [交友論(교우론)]등 천주교 서적을 소개하였다

 

서적 및 유품들

천주교 수용과 자생적 신앙공동체 (1602~1801년)

 천주교 박해와 교회의 발전 (1801~1866년)

한국의 성인.순교자 , 김대건 신부 성광(머리털, 치아 등 신체의 일부

 

제 2전시실


4구역 ..... 한국 천주교회의 근.현대사 (1866~1984년)

조선은 19세기에 잇따른 문호개방의 격동기 속에서 1886년 한불조약으로 선교사들에게 선교의 자유가, 1905년에는 비로소 일반인들에게도 신앙의 자유가 공인되었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는 일제 침략과 남북 분단이라는 또다른 과제를 짊어지게 되었다.

5구역 ..... 역대 서울대교구장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된 이후 임명된 역대 서울대교구장을 통해 살펴보는 한국 천주교회사

6구역 ..... 전통 인형으로 빚은 한국 천주교회사

인형 장인, 임수현이 한국 천주교회사 12대 사건을 80여종의 인형으로 형상화하였다.

7구역 ..... 200주년 기념대회와 103위 성인 시성식

1984년 5월 6일 여의도광장에서는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대회와 103위 성인 시성식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집전으로 거행되었다. 103위 성인은 김대건 신부와 평신도 92명,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 10명(주교 3명, 신부 7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8구역 ..... 박해시대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제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년) 이전에는 사제와 신자가 벽면의 제대를 향하여 미사를 드렸기때문에 사제는 신자들에게 등을 보이고 미사를 집전했으며, 라틴어로 된 경문을 읽었다.

 

충남 해미 순교지 호야나무로 만든 구유, 제2 전시실 입구

교황 요한 바오로2세 방문시 사용하던 성구들, 200주년 기념대회와 103위 성인 시성식

전통 인형으로 빚은 한국 천주교회사 

 

 

절두산 성지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로서 현재 서울 양화대교의 북단쪽에 있다. 한강변에 우뚝 선 절두산 기념 성당은 한강변에 우뚝 솟은 봉우리의 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든 것 같기도 하고 용의 머리같기도 하다고 해서 잠두(蠶頭) 또는 용두(龍頭)로 불리던 서강(西江) 밖의 봉우리가 절두산(切頭山)이 되었다. 대원군이 자신의 쇄국 정책을 버티어 나가기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함으로써 당시 절두산에서만 무려 1만여 명의 교우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되지만 그 수가 맞는지 틀리는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선참 후계(先斬後啓), 즉 "먼저 자르고 본다."는 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이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광기 어린 칼 아래 머리를 떨구었고 그래서 30여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잠두봉 또는 용두봉은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룻손들이 그늘을 찾던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도성에서 김포에 이르는 나루터 양화진(楊花津)을 끼고 있어 더욱 명승을 이루었던 곳으로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유람선을 띄웠다고 전해져 온다.  하지만 병인년인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해 오자 대원군은 "양이(洋夷)로 더럽혀진 한강 물을 서학(西學)의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광기 어린 박해의 칼을 휘두른다. 당시 대원군은 일부러 천주교도들의 처형지를 이전의 서소문 밖 네거리와 새남터 등에서 프랑스 함대가 침입해 왔던 양화진 근처, 곧 절두산을 택함으로써 침입에 대한 보복이자 '서양 오랑캐'에 대한 배척을 표시했다. 1868년 남연군 무덤 도굴 사건,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 등의 사건은 대원군의 서슬 퍼런 박해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되어 살육은 6년간이나 계속됐고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회 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록된다. 절두산에서의 기록에 있는 맨 처음 순교자는 이의송 일가족을, 그 해 10월 22일 부인 김억분, 아들 이붕익과 함께 함수됐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하지만 그 일가를 비롯한 30명 남짓 외에는 전혀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무명 순교자들이다. 1996년 병인박해 1백주년을 기념해 그 옛날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을 떨구었던 바로 그 자리에 순교 기념관이 섰다. 우뚝 솟은 벼랑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준다.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전통적으로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는 갓을, 구멍을 갖고 지붕 위에서 내 있는 수직의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성당 지하에 마련되어 있는 성인들의 유해" 웅장하게 세워진 절두산 기념관은 순례성당과 순교 성인 28위의 성해를 모신 지하묘소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수많은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돼 있는 전시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특히 기념관에는 초대 교회 창설에 힘썼던 선구 실학자 이벽, 이가환, 정약용 등의 유물과 순교자들의 유품, 순교자들이 옥고를 치를 때 쓰였던 형구(刑具)를 비롯해 갖가지 진귀한 순교 자료들이 소장돼있다. 그중에서도 두 번째 신부였던 최양업 일대기 31점과 유중철 요한.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일대기 27점은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기념관 광장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 오타 줄리아의 묘, 박순집의 묘, 남종삼 성인의 흉상과사적비 등이 마련돼 있기도하다. 특히 부친, 형제, 삼촌, 고모, 형수, 조카, 장모, 이모에 이르기까지 한집안 열여섯 명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치명한 박순집(1830-1912년)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비석 앞에서 가슴 뭉클하다

절두산 홈페이지

http://www.jeoldusan.or.kr/

 
 
 
 
 
언더우드의 기도[찬양 선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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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과 북방선교지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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