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여전도

예수회 신부 베르비스트(F. Verbiest)가 제작(1674년)한지로도 1722년에 국내에 유입되어

 1860년 국내에서 중간(重刊)되었다. 8폭 병풍.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405*173.3cm

 


척화비
1871년 신미양요때 세웠다가 1882년에 철거된 척화비는 바로 교회의 박해 상징이기도 했다.



이수정의 개종
1882년 신사유림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간 이수정은 그곳에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으며성서번역과

선교사 초빙 및 유학생교회 설립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사진은 1883년 5월 개최된 일본 전국기독교대친목회에 참석한

이수정(가운데 한복입은 이)의 모습을 모여주고 있다.

 

 

한국교회사(25)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2)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3) 일본에서 복음을 받은 이수정

⑥ 이수정의 죽음

귀국 후 이수정의 신상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한국에 도착한 후 보수파에 붙잡혀 처참히 살해당했다는 설인데, 이것은 일본교회문서 기록에도 나타나 있다. 루미스 역시 이수정이 한국으로 돌아간 후 권력을 잡고 있는 보수파들에 의해 체포되어, 장차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반대할지도 모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사지
를 토막내 처형당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소문은 이수정과 함께 귀국한 유학생들이 처형된데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수정과 함께 귀국한 유학생 6명 중 유형준, 김한기, 박영우, 유송목 등과 뒤따라 귀국한 장은규, 박영빈 등 6명은 귀국 후 김옥균 잔당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이때 이수정은 처형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때 귀국한 8명이 모두 처형된 것으로 보도되었고, 박영빈과 함께 귀국한 이은종도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동경에서는 이수정의 추모회까지 열렸던 것이다. 이은종의 처형 소식을 접한 일치영화학교(명치학원의 전신) 학생이었던 미야치 겐기치(宮地謙吉)의 추도문은 다음과 같다.

“나도 이모라는 최연소의 조선 사람과 친하게 지냈는데 6월 말일 경에 그는 선배 이주필 군의 권계를 물리치고 당시 조선 정부에서 지금 돌아온다면 어떤 국사범의 큰 죄라도 용서한다는 통지를 굳게 믿고 근일 중으로 귀국한다 하면서 학교에서 퇴학하였다. 나는 그가 근일 중으로 자기 부모들과 만나게 된다고 하면서 매우 기뻐하던 모습이 환하게 떠오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 수십 명을 싣고 가는 배가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붙잡아 다 죽여 버렸다. 이 슬픈 소식이 그해 가을에 축지 일치 영화학교에 들려왔을 때 다 비분을 금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또 하나는 이수정이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처형은 사실이 아닌 풍설이라는 주장이다. 이수정과 같은 배를 타고 조선에왔던 정상각오랑(井上角五郞)은 1886년 7월 14일자 조선에서 동경으로 보낸 통신에“오랫동안 일본에 체재하고 있던 이수정 씨는 귀국 후 일본에 있을 때 얻었던 지병도 근일에는 점점 쾌차가 있어 건강이 회복되어 가며 국왕은 특별히 그를 사랑하고 우대하며 소중하게 여겨 근일에는 특별히 쌀과 돈을 하사하였다고 한다.”는 보고를 보냈다. 오윤태는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그가 갑자기 기록에서 사라진 것은 처형 때문이 아니라 일본에서 받은 상처로 인한 중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하나는 이수정의 배교설이다. 이것은 백낙준에 의하여 제기되었는데, 그는“이씨는 귀국을 앞두고 기독교 신앙에서 이탈하였다.”라고 하면서 파슨(Ellen C. Parson)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 이수정이 있다. 그는 일본에서 문필로 널리 공적을 세웠고 미국에서는 그의 사진이 지상에 실렸다. 그는 마게도니아인처럼 나타났으나, 가련한 이수정은 좋지 못한 영향에 빠져 한국에 대한 관심을 적잖게 불러일으켰지만 그 문을 박차버렸다. 자기 개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한국에 보내어질 첫번째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기회까지 던져버렸다.”

위의 견해에 대해 이만열은“과연 이수정은 배교함으로써 ‘잃어버린 지도자’가 되었으며, ‘일반 사회의 시각에서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의 시각에서도 사라졌고’그에게서는‘순교자적인 기독교 영웅의 삶’을 찾아볼 수 없으며, ‘초기 빛나는 선교 활동에 비해 그의 종말은 대조적으로 침울’했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우리는 일단 앞에서 이수정이 귀국하기 전에 루미스를 만나 자신의 과오를 회개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귀국하기 전에 기독교 신앙을 이탈하였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된다.”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박용규 역시도“만일 이수정이 기독교 신앙을 정말 버렸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겠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단지 귀국전 그 주변에 벌어진 정치적인 정황 때문에 잠시 그런 모습으로 비추어진 것으로 보인다. 루미스에 따르면 동생이 다녀가고 오래지 않아 이수정은 일본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에 개화파 정부를 세우려는 책략에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러면서 그의 주의력이 자연히 성경연구나 번역에서 점점 더 벗어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루미스는 이것이 곧 배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또한 박용규는“그가 수구파에 의해 처형을 당했든 아니면 일본에서 받은 상처로 세상을 떠났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한국개신교 선교에 바쳐진 그의 길지않은 생애 자체가 일종의 순교적 희생,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라고 그의 업적을 평가하고 있다.

이만열도“우리는 그를 불타지 않은 등잔 심지 혹은 잃어버린 지도자로 보기 전에 인간의 연약한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불러 사용하였는가를 살필 줄 아는 신앙적 역사 인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땅 한반도가 암흑에 잠겨있던 한 시대에 복음의 빛을 주시기 위해 택함을 받은 도구였던 이수정은, 한국 선교와 한글 성경 번역의 개척자 역할을 감당하고 조용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갔다. 그러나 그가 소원했던‘성경을 조선에게’는 한국 기독교 역사 속에서 점차 구현되어 갔다.”고 하였다.

(4)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의 활동에 대한 평가

① 한국 선교는 성경 번역에서부터 출발했다는 점이다.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의주 젊은이들과 더불어 성경 번역을 하고 있던 동안 일본에서는 이수정에 의해 성경 번역이 진행되고 있었다. 해서 정식으로 한국에 선교사가 입국하기 이전에 이미 국외에서 번역된 성경이 존재했으며, 선교사 입국 시 그 성경이 사용되었다는 점은 다른 나라의 선교 역사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현상이다.

② 한국 선교는 한국인에 의해서 스스로 복음이 전파됨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의주 젊은이들이 중심이 되어 신앙의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후에 자신의 고향에 복음이 전해졌고, 선교사가 입국하기전에 소래교회가 먼저 세워졌다. 또한 일본에서는 이수정이 예수를 믿은 후 한국 유학생들과 함께 신앙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한국선교를 준비했다는 점 역시 다른 나라의 선교 역사에서 찾아보기 드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③ 이러한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한국의 선교의 장을 여시기 위해 깊이 개입하시고 섭리하셨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불교신자인 김옥균이 한국을 살릴 수 있는 길이 기독교라고 외칠 수
있었으며, 지극히 세속적인 임오군란의 사건으로 그것도 농업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건너간 이수정이 세례를 받고 한국선교를 촉구하는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겠는가? 만주에서 만주인들을 위해 활동하겠다고 입국한 로스와 맥킨타이어 선교사가 한국선교를 위해 성경을 번역하며 한국선교를 위해 일생을 헌신할 수 있었겠는가?

이 모든 사건은 그 사건의 배후에서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 역사를 하나님의 구속사로 운행해 나가신다. 그리고 그 역사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운동을 전개하는 기관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자신에게 맡겨진 구속 운동을 전도(선교)를 통해 현실화시킨다. 그 전도 곧선교의 현장에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서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그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곳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임하여 그 말씀을 받은 자들을 변화시키시고, 변화를 받은 사람들을 통해 또 다시 교회 운동을 전개해 나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위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 섭리의 결과 한국교회는 성경 위에 든든히 서 있는 교회가 되었으며, 120여 년 전 복음의 불모지요 세계에 그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던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21세기 세계 선교의 대명을 받고 움직이는 선교 대국이 된 것이다.

한국교회사(26)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3) 미국 선교부의 한국 선교 결정

외국에서 한국선교를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국내에서도 선교를 받아들일 준비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나라의 문을 굳게 닫았던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高宗)이 집권하면서 한국의 정세는 바뀌기 시작하였다. 일본을 비롯한 외국의 통상 압력은 더욱 가중되었고,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후 정치·경제적인 일본의 침투를 막기 위해서라도 문호개방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한국은 원하든 원치 않든 서양열국에 문호를 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서양에의 문호개방은 곧 서양 문물과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정세가 이렇게 변하자 선교에 대한 형편도 변하게 되었다. 점차적으로 미국 교회 내에서는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찾게 되었으며, 선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 시작을 종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 선교사 유치 활동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을 계기로 1882년 5월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한미수호조약을 시작으로 1883년 11월 26일에는 영국 및 독일과도 조약을 체결하였고, 1884년 7월에는 러시아와 그리고 1886년 6월 4일에는 프랑스와도 조약을 체결해 한국은 이제 더 이상 감추어진 은둔의 나라가 아니게 되었다. 미국과의 조약은 우호 및 통상을 내용으로 하는 지극히 정치적인 사건이었지만, 이것은 미국과의 수교뿐만 아니라 선교관계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학자를 이 나라에 파송하여 언어와
문학과 예술을 연구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기 때문이다.

한미수호조약 체결 후 남미 칠레 공사와 캘리포니아 검찰총장을 역임한 푸트(General Lucius H. Foote, 福德, 1826-1913)가 미국 초대공사로 임명되었다. 한국에 온 푸트는 1883년 5월 20일 고종을 알현하고 비준을 받아 업무를 시작하였다. 미국에 공사를 파송할 움직임이 전혀 없는 것을 감지한 푸트가 조정에 건의해, 정부는 민영익을 특명전권대사로 한 11명의 견미사절단을 미국에 파송하게 되었다. 1883년 7월 15일 제물포를 떠나 일본의 요코하마 항에서 미국 아라비스(The S. S.Arabis)호를 타고 일본을 떠난 견미사절단 일행은 오랜 항해 끝에 1883년 9월 2일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했다. 비단이나 무명으로 만든 전통적인 한국 양식의 희고 느슨한 두루마기를 입은 민영익과 홍영식, 서광범 일행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항인 샌프란시스코의 아름다움,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항만시
설, 즐비하게 늘어선 기선들, 항구도시에 세워진 수십 층의 고층빌딩들, 그 속에서 반사되는 야밤의 휘황찬란한 전깃불, 6척의 미 서부 남성들, 정돈된 도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거대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울창한 숲, 끝없이 펼쳐진 서부의 비옥한 평원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동양의 문물, 기껏해야 청나라를 통해 앞선 문물을 전하고 쇄국정책을 견지해야 한다고 외쳤던 수구파의 거장들은 서양문명의 발전 앞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들 일행은 아더(Chester D. Arthur, 1830-1886) 대통령을 예방하고, 기차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카고로 이동하는 여정에서 한국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한 두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윌리엄 그리피스와 가우처 학장을 만난 것이다.

① 견미사절단과 윌리엄 그리피스와의 만남

1883년 11월 27일 저녁‘조선: 은둔의 나라’의 저자 그리피스는 빅토리아 호텔에서 귀국을 준비하고 있는 민영익과 서광범을 만났다. 당시 그리피스는 한국에 대한 두 번째 작품, ‘한국, 국내외’(Corea, Without and Within)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비록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직접적인 결실을 얻지는 못했지만 민영익과 서광범은 그리피스에게 한국에 대한 관심을 더욱 불러일으켰을 것으로 생각된다.

② 견미사절단과 가우처와의 만남

시카고에서 하루를 묵은 뒤 이들 일행을 태운 기차가 백악관이 위치한 워싱톤을 향해 달리고 있을 때, 그 기차 안에는 한국선교를 애타게 기다리던 미국 감리교 목사 가우처(John Franklin Goucher, 1845-1922)가 타고 있었다. 이미 출판된 하멜표류기, 몇 종의 조선 항해기, 그리고 1882년에 출판된 그리피스의‘조선: 은둔의 나라’등을 통해 조선에 대해 어느 정도 사전 지식을 습득한 것으로 보이는 가우처는 기차 안에서 견미사절단을 만나 3일 동안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국선교를 백방으로 모색하게 되었다.
1년 전 조선이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가우처 목사는 견미사절단의 일행으로부터 조선에 대한 선교 가능성을 확인하고, 1883년 11월 6일 감리교 해외 선교부의 파울러 감독(Bishop C. H. Fowler)에게“만일 은둔국인 한국에 선교사업의 정책을 세울 수 있다면 한국에서의 선교는 영구히 확립될 것이다.”라며 한국선교를 위해 2,000불을 동봉한 긴 편지를 보냈고, 후에 3,000불을 더 추가하여 한
국선교를 강하게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1885년 그리피스가‘한국, 국내외’에서 지적한 대로“1883년 가을에 뉴욕의 감리교 해외선교위원회는 한국에 선교를 착수하기 위해 5,000달러의 선교비를 전용할 수 있었다.”그러나 가우처 목사는 그 당시로서는 시기상조라는 말을 듣고 1884년 1월 31일 다시 자신의 지우 일본주재 미 북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Robert S. Maclay, 1824-1907)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토록 요청했다.

“당신은 한국을 여행해 그 나라를 답사하고 선교부를 설치할 만한 시간을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교도 땅에 최초의 개신교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일본이 그 영예스러운 일을 맡아야만 한다는 것은 아주 적절한 것이며, 당신이 그 사역을 개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당신이 교회에서 지금껏 해온 봉사에 걸맞는 보탬이 될 것입니다.”

부탁을 받은 맥클레이 선교사 부부는 이것을‘하나님의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한국선교를 타진하기 위해 1884년 6월 24일 제물포항에 입국했다.

맥클레이 목사는 중국 선교 초기(1847년)에 그가 거주하고 있던 푸쵸우(Foochow) 시의 거리에서, 중국인 선원들에게 구조되어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던 한국의 난파선 선원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들의 낯선 의상과 서 있는 모습, 민첩한 동작 등이 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으며, 언젠가 한국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외국인들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으며, 그도 자신에게 주어진 중국에서의 임무를 수행하느라 매우 바빴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생각을 접었었는데, 가우처가 한국선교를 타진해 달라는 부탁을 하자 그것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맥클레이 목사는 한국방문 목적인 선교 허락을 받기 위해 서울주재 해외 공관들의 협력을 구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을 아끼지 아니 하던 중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김옥균을 만나게 되었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맥클레이 내외와 좋은 친분을 맺은바 있었는데, 귀국하여 외무부 외위문 주사로 있었으며,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맥클레이는 김옥균을 통해 자신의 한국선교에 대한 청원의 글을 왕에게 올렸는데 즉시 면담이 허락되어 7월 3일, 청원 3일 만에 고종으로부터 병원 선교와 교육을 허용한다는 회답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한국선교의 장이 열리게 되었다. 맥클레이는 7월 8일 한국방문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외무부 외위문 주사 김옥균을 통해 고종으로부터 의료 선교와 교육 선교는 해도 된다는 답을 얻어 낸 맥클레이는 이 소식을 가우처에게 전달했고, 가우처는 다시 감리교 선교부에 알렸다. 이렇게해서 1884년 북감리교 보고서가 지적한 대로 이교의 나라 한국에서‘복음화라는 원대한 목표를 숨기지 않은 채 교육 및 의료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틀이 마련된 것이다. 맥클레이 자신의 고백처럼 “이 같은 윤허는 주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마치 강물처럼 왕의 마음이 주의 손”에 달려 있어“주님은 그가 원하시는 곳 어디로든지 왕의 마음을 돌리신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공식적으로 고종의 윤허까지 받은 한국선교는 처음부터 비교적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2) 선교사 파송 결정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엘린우드(F. F. Ellinwood)는 아직 한국의 선교는 시기상조라는 해외선교부 위원들의 의견을 일축하고, 한국선교는 지금 시작할 때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선교를 호소했다. 이런 엘린우드의 노력의 결과는“우리나라 혹은 그밖의 지역에 교육 사업 및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나 어떤 선한 사업을 고무하거나 지원하는 목적”으로 맥 윌리엄스가 기부한 6천 불의 헌금을 포함하여 한국선교 개시를 위해 모여진 1만 불의 헌금으로 나타났다(당시 두 사람의 선교사가 2년간 사역하는데 필요한 선교비는 5천불이었음).

당시 상당한 재력가였던 맥 윌리엄스는 한국선교를 촉구하는 글을 선교지에서 읽고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일간 신문은 한미조약이 체결된 후 1883년 9월 미국에 도착한 한국 공사를 대통령 아더(Arthur)가 뉴욕과 워싱톤에서 영접하는 기사를 게재해 한국선교의 중요성을 환기시켜 주었다. 또한 일본 주재 조지 낙스 선교사의 즉각적인 한국선교 개시 요청과 중국주재 길버트 리드 선교사의 한국선교에 대한 강력한 요청, 이수정이 보낸 선교 요청 등이 선교지에 실림으로써 미국 각 교단의 해외선교부와 선교를 지
망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한국 선교열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미국의 많은 성도들에게는 선교헌금에 동참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선교비의 지원을 받은 엘린우드는 구체적으로 한국선교 후보생을 물색하기 시작해 1884년 4월 목사의 아들로 테네시대학 의대를 졸업한 훌륭하고 헌신적인 의사 존 헤론(John W. Heron)을 북장로교 파송 한국선교 후보생으로 임명하고, 후에 언더우드 목사를 선교사로 임명하는 한편, 중국 남경에 있던 호레이스 알렌(Horaace N Allen) 박사를 한국으로 전임시켰다. 이 명령을 받은 알렌이 1884년 9월에 한국에 입국함으로써 알렌은 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의료선교사가 되었다.

미 감리교 선교부는 맥클레이의 편지를 받고 한국선교를 호소하는 글들을 감리교 선교지‘가스펠 인 올 랜드’(The Gospel in All Lands)에 실었다. 선교지에 실린 한국선교를 호소하는 서신을 보고 한국선교를 위해 선교헌금이 각지에서 답지했다. 상황이 이렇게 급진전되자 감리교 선교부에서는 더 이상 한국선교를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감리교 선교부에서는 의료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해 오하이오 클리블랜드 출신 스크랜톤(William Benton Scranton, 1856-1922)과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톤(Mary Fitch Scranton, 1832-1909), 그리고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를 선교 후보생으로 내정하고 한국선교를 가속화시키기 시작했다.

한국교회사(27)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Ⅰ. 선교사들의 입국

한국에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 외국에서 복음을 접한 이들의 적극적인 복음 전파와 선교 청원에 힘입어 1884년 들어서 한국선교를 위한 미국에서의 준비가 가속화되었다. 장로교는 언더우드를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알렌을 한국 선교사로 전임시켰으며, 감리교는 아펜젤러와
스크랜톤을 한국 선교사로 내정하였다. 그리하여 1884년 9월 20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 소속 호레이스 알렌이 가장 먼저 한국에 입국하였고, 이어 1885년 4월 5일 북장로교 선교회 언더우드와 미 감리교 선교회 아펜젤러가, 5월 1일에는 미 감리교 선교회 스크랜톤이, 그리고 6월 21일에는 북장로교 선교회 헤론(J. W. Heron)이 입국하여 미 북장로교 선교회와 미 감리교 선교회가 가장 먼저 한국선교를 개시하였다.

1. 한국의 첫 선교사 알렌

1) 알렌의 조선 입국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 )은 1858년 4월 23일 독립전쟁의 영웅 이탄 알렌(Etthan Allen)의 후손으로 태어나 1881년 중부의 명문 오하이오의 웨슬리안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신시내티의 마이애미 의대에 진학해 학업을 마치고, 1883년에 의사 자격을 취득했다. 세계 선교의 붐을 타고 1883년 봄 알렌은 북장로교 선교부에 중국 의료 선교사로 지원했고, 곧바로 그 청원이 받아들여져 그 해, 갓 결혼한 아내 패니와 함께 중국에 파송되었다. 1883년 10월 11일 중국에 도착한 그는 상해를 거점으로 하여 선교사역을 시작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실의에 빠지고 말았다. 알렌에게는 25살의
젊음, 2차 대부흥운동에서 체험한 뜨거운 성령의 역사, 미지에 대한 담대함이 있었으나, 선교 경험의 미숙, 어린 나이, 동료 선교사들과의 마찰, 아내의 건강 악화로 인해 첫 1년간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알렌은 아내의 건강이 좋지 않은 데다 중국에서의 선교가 여의치 않자 선교지를 옮길 생각을 했다.

헨더슨 박사(Dr. Henderson)와 몇몇 다른 상해 의료 선교사들이 알렌 선교사에게 한국행을 권면하자, 마침 한국에 관심이 있던 알렌은 함께 묵고 있는 윌리엄 홀트(William S.Holt) 선교사와 상의한 후, 1884년 6월 6일 한국세관(the Korean Customs Service)의 요셉 하스(Joseph Hass)에게 한국에 의사가 필요한지를 문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다시 3일 후인 9일에 뉴욕 북장로교 선교부 엘린우드에게“한국의 여러 외국 공관들과 세관에서 의사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허락하신다면 그곳으로 가고 싶습니다.…그곳에 가서 선교사로서 열심히 일해 보고 싶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자신을 한국의 선교사로 임명해 줄 수 있는지 전보로 알려 달라고 조심스럽게 문의했다. 7월 22일 알렌은 선교부로부터 한국 입국을 허락하는 전보를 받았다.

아내가 출산을 한 후 아내를 상해에 남겨 두고 그 해 9월 14일 남경호를 타고 상해를 출발한 알렌은 9월 20일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틀 후 상해에서 같이 온 중국인 어학 선생과 함께 매우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당나귀를 타고 서울에 입성했다. 처음 그의 공식적인 입국 신분은 미국공관의 공관의였고, 후에 영국, 중국 그리고 일본의 공관 의료를 담당했다.

고종은 알렌의 도착 후 푸트로부터 이 사실을 보고받은 자리에서 그가 이전에 선교사였는지, 또 선교사 자격으로 입국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를 원했다. 이때 푸트는“그는 미국 공관의이다.”라며 선교사와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피해 나갔다. 선교사로 입국한 것도 아니고 공개적으로 선교가 허용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는 조선 사람들에게 선교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일은 지양하고 가정에서 가족들과 조용히 예배를 드리며 자신을 이곳 조선으로 보내 주신 주님의 뜻과 섭리를 헤아리고 있었다.

2) 갑신정변(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

대원군의 실각 뒤에도 계속 개화정책 구현이 미흡하고 오히려 수구파가 정권을 주도하는 것을 본 개화파는 일본을 등에 업고 정권찬탈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민영익과 서광범 등 견미사절단으로 미국에 입국했던 상당수의 수구파 지도자들은 비록 3개월의 짧은 미국체류였지만, 이 기간 동안 동양보다 수세기를 앞선 미국의 문화와 문명을 목도한 후에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국내의 미묘하고 복잡한 정치 기류로 인해 민영익과 서광범의 동반관계는 얼마 가지 않아 금이 가고 말았다. 민영익은 서구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청과 지속적인 관계를 갖기 원했고,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급진적이라고 할 만큼 적극적이었던 서광범과의 사이에 갈
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구파와 개화파의 갈등이 팽팽하게 대립되고 있는 상황 가운데 불란서의 압력을 받고 있는 청국이 한국 주둔군의 반을 철수하면서 기회는 일본 쪽으로 기울어지는 듯했다. 일본은 일본을 등에 업고 개화를 꾀하는 한국 내의 친일 세력의 개화파들과 결탁해서 물리적으로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거사를 계획하고, 12월 4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이 날을 거사일로 잡은 것은 각국 공사들을 초청한 가운데 우정국 개국 축하 만찬회가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개화파 지도자들은 일본에 파견되었다 돌아온 사관학교 생도들을 쿠데타에 동원하고,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병으로 국왕을 호위케 한 후 혁신 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세웠다.

필요한 무기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하생으로 박문국에 고용된 이노우에 가쿠고로의 주선을 통해 일본에서 밀수입하여 조달했다. 거사에 필요한 자금은 일본 공사 타케조이가 배후에서 지원했으며, 직접 행동할 사람들도 김옥균이 골라 일본에 파견했던 유학생 출신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 거사에 참여한 개화파들은 저들이 원했든 원치 아니했든 간에 일제침략지반의 앞잡이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 된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 개화파 지도자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일본인 낭인 4인을 배치하고 일본군 30명을 창덕궁과 경우궁
사이에 배치해 두었다. 12월 4일 저녁에 개최하기로 계획된 만찬회는 예정대로 일본영사를 제외한 서울주재 각국 외교관들과 척족일파가 참석한 가운
데 진행되었다. 자객들을 연회장 가까운 곳에 숨겨 두었고, 안국동 별궁의 방화가 실패하자 연회장에 인접한 가옥을 방화함으로 거사가 시작되었다. 연회장에 있던 수구파 지도자들이 외국 공사들과 함께 급히 밖으로 도피하자 숨어 있던 개화파 자들은 그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개화파 일당은 거사 후 급히 창덕궁으로 들어가 고종에게 지금 청군이 변을 일으켰다고 속이고 고종을 통해 일본군의 호위를 요청케 하는 한편, 고종을 경우궁으로 옮겼다. 일본군의 호위 속에 경우궁 안은 일체 외부와의 연락이 끊어졌다.

12월 5일, 개화당은 각국의 공사, 영사들에게 신 정권의 성립을 통고하고 혁신정강(革新政綱)도 마련하여 발표하였다. 그들이 마련한 혁신정강은‘문벌의 폐지와 인민 평등권의 확립, 관제의 개혁과 용관(冗官)의 혁파, 전세제(田稅制)의 개혁과 재정의 일원화, 군제의 통합과 순사 제도의 신설, 고관회의에 의한 정책 심의 그리고 형정(刑政)의 시정’등이었다.

일본 군대가 12월 5일과 6일 왕궁을 지키는 동안 급진 개화파 지도자들은 거짓으로 왕의 조서를 만들어 6명의 대신들을 왕궁으로 소환시켜서 모두 살해했다.

그러나 12월 6일 아침 6시에 일본 타도를 외치는 군중의 외침이 들렸고, 그날 오후에 3,000명의 한국인의 지원을 받는 600명의 중국정예군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중국군과 일본군 사이에는 훗날 그리피스가 말한‘유혈의 거리 전투’(a bloody street battle)가 발생했다. 수적으로 열세인 일본 군대는 즉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갑신정변은 삼 일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새로 건립한 우정국과 일본 외교부 건물이 파괴되고 많은 일본 민간인이 살해되었으며, 권좌를 버리기를 거부한 홍영식은 중국 군대에 체포되어 중국군 캠프로 끌려가 거기서 처형되었으며, 갑신정변에 연루된 11명도 비참하게 처형당했다.

청국의 도움으로 간신히 갑신정변의 위기를 넘기기는 했지만, 12월 30일 청국 대사가 3,000명의 청군을 대동하고 한국에 도착했고, 같은 날 일본대사 이노우에가 2,500명의 일본군과 함께 제물포에 도착하면서 수개월 동안 조선 정국은 매우 긴장된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1885년 4월 18일 청국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져 양국 군대가 한국에서 철수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1885년 10월 5일 대원군이 청국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이것으로 긴장이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비록 갑신정변은 실패했지만 개화파들은 한국 선교의 장을 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1885년에는 박영효가, 1888년에는 김옥균이 그리고 1895년에는 유길준이 서구문명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그 뿌리가 되는 기독교의 수용을 상소와 보도 형식으로 주창한 것 등이 한국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지극히 세속적인 정치적 사건을 통해서 당신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

한국교회사(28)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Ⅰ. 선교사들의 입국

1. 한국의 첫 선교사 알렌

3) 알렌의 광혜원 설립

갑신정변 때 뜻하지 않은 화재로 왕궁으로 가기 위해 우정국 밖으로 먼저 뛰쳐나갔던 명성황후의 조카이자 수구파의 지도자인 민영익은 개화파의 자객의 칼에 일곱 군데나 찔려 혈관이 끊기는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다. 마침 한국 정부 세관 고문으로 와 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P. G. Van Mollendorf)가 그 현장을 목격하고 민영익을 식당으로 급히 옮겨 응급조치하고 한 시간 후 다시 세관본부로 사용하는 자신의 집으로 옮기고 알렌 의사를 황급히 불렀다.

알렌 선교사가 도착하자 14명이나 되는 한의들이 민영익을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었으나 칼에 맞아 찢어진 상처와 끊어진 혈관은 동양의학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한국 의사들은 알렌의 치료를 극구 반대하였다. 저들은 ‘고귀하신 민대감의 몸에 서양 오랑캐가 감히 손
을 대고 치료하는 것은 절대 용인될 수 없는 일’이라며 반대하였다. 그러나 민영익의 생명이 점점 위독하여지고 자신들의 의술로는 치료가 불가능해지자 끝까지 반대할 수 없어 알렌을 부르게 되었다. 알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신유의 은사를 내리시사 민대감을 살려냄으로 선교의 길이 열리게 하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치료에 임하였다. 알렌은 민영익의 깊은 상처를 명주실로 꿰매고 약을 발라 외상을 치료했다. 그리고 상당한 걱정과 불안 속에서 석 달이나 치료해 주었다. 비록 노련한 의사는 아니었지만 알렌은 정성을 다해 치료해 주었고, 민영익의 외상은 놀라운 속도로 치유되었다.

1885년 1월 27일 민영익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알렌에게 현금 10만냥을 제공하고, 고종의 재가를 얻어 정2품에 해당하는 참관 벼슬까지 하사했다. 후에 민영익이 알렌의 은혜에 감사해 우리 백성들은 당신을 위대한 의사라고 생각하며 “당신이 미국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위해 하늘
에서 내려왔다." 고 생각한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그와 함께 알렌이 고백한 대로 민영익의 회복은 이 은둔의 나라 한국의 지도자들에게 서양의학과 외과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절호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이것은 알렌이 민영익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고종과도 원만한 관계를 맺게 해준 계기가 되었고, 서양의학 기술을 소개하고 후에 직접선교의 길을 열어 준 최초의 서양병원 광혜원의 설립을 가능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전기가 되었다. 알렌은 1885년 1월 한국주재 미국 공관 폴크를 통해서 한국에 서양병원 설립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1885년 봄, 조선 정부는 병원설립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회답을 보냄으로써 그해 4월 10일 한국에 침대 40개를 갖춘 최초의 서양 근대 병원인 광혜원이 개설될 수 있었다. 광혜원은 ‘은혜를 널리 베푸는 집’이라는 뜻으로 고종이 직접 지어 준 이름이며, 갑신
정변 때 죽임을 당한 우정국 총판 홍영식의 집을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4월 26일 개설된 지 16일 만에 광혜원은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는 의미의 이름인 제중원으로 개명되고 왕실과의 유대도 더욱 강화되었다.

1885년 4월 10일 광혜원이 개원되기 5일 전 한국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광혜원에서 화학을 가르치면서 그곳을 선교거점으로 삼고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1885년 6월 21일에 입국한 장로교 의료 선교사 존 헤론(John Heron), 같은 해 5월1일에 입국한 학문과 경건과 복음의 열정을 균형 있게 겸비한 감리교 의료 선교사 스크랜톤, 1896년에 입국한 의료 선교사 앨러스도 처음 광혜원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제중원은 아직 선교의 자유가 없던 시절에 선교사들이 때를 기다리던 곳이었고, 합법적으로 체재할 수 있는 은신처이며, 활동의 장이기도 하였다. 이 제중원이 후에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고, 오늘의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과 의과대학이 되었다.

알렌은 1887년 선교본부와의 관계를 끊고 미국으로 돌아가 워싱턴 주재 한국 공사관 소속 서기관이 되었다. 1889년 선교본부로부터 재임명을 받았으나 1890년 선교본부와의 관계를 끊고 다시 서울주재 미국 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1897년에는 총영사, 1901년에는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일했다. 이런 변천 때문에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알렌의 소명과 그의 모난 성품을 들어 제발 다시는 선교사로 임명해 주지 말 것을 미국 선교부에 요청하기도 했다. 얼마 후 언더우드의 노력으로 에비슨 선교사가 도착해 공관으로 자리를 옮긴 알렌을 대신해 제중원의 책임을 맡았다.

알렌은 1884년에 한국에 입국한 첫 개신교 선교사였다는 점과 의료 활동을
통해서 선교의 장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한국교회사(29)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I. 선교사들의 입국

2. 언더우드의 입국

개신교를 대표할 수 있는 정식 선교사의 입국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입국한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감리교의 아펜젤러 선교사라고 평가할 수 있다.

1) 언더우드의 성장 및 교육 배경

(1) 출생 및 유년기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는 1859년 7월 19일 화학자이자 발명가인 아버지 존 언더우드(John Underwood)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그랜트 마리(Elizabeth Grant Marie) 사이에서 6남매 중 넷째로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목회자는 아니었지만 종교적인 관심이 많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일생을 마친 인물이었고, 그의 증조부인 토마스 언더우드 역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또한 토마스의 아내는 스코틀랜드 출신인 알렉산더 와우 박사(Dr. Alexander Waugh)의 딸인데, 박사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기독교계에 큰 영향을 끼친 분으로서 능력 있는 설교자였으며, 해외선교에도 깊은 관심을 지닌 분이었다. 언더우드와 알렉산더 와우 박사 사이에는 모종의 유사성이 있는데, 관대한 마음 씀씀이, 넓은 박애심, 연합에의 사랑, 자비, 지도 및 조직의 자질, 지적인 은사 등을 들 수 있다.

언더우드는 이런 신앙의 계보를 가진 가정에서 신앙적 유산을 받아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로부터는 주의 재림에 대한 갈망과 기다림을 완전히 물려받았다. 해서 주의 재림은 언더우드에게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되었으며, 자신의 시대에 영광된 재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것을 멈춘 적이
없었다. 이것은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선교사들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언더우드가 다섯 살 되던 해 다섯 명의 자녀를 남기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언더우드의 아버지는 몇년 후 재혼했다. 자녀들에 대한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는 자녀들의 장래를 생각해 10살 된 호레이스 언더우드를 12살 먹은 형 프레드 언더우드(Fred Underwood)와 함께 프랑스의 불로뉴 슈메르(Boulogne Sur Mer) 지방에 있는 가톨릭이 운영하는 기숙사 남학교에 보냈다. 가톨릭계 학교라 해서 소년들을 개종시키려 하는 일은 없었으므로, 소년들은 영국인 교회에 출석하면서 흔들림 없이 개신교 신앙을 지켜나갔다.

그곳에는 영국 학생들이 있기는 했으나 주로 프랑스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었다. 두 형제는 기숙사에 들어오자 언제나처럼 옷을 벗고 무릎을 꿇고 조용히 기도했다. 당시 세속화되어가던 가톨릭계 학교에서 볼 수 없었던 낯선 이 모습을 보던 프랑스 소년들은 베개, 장화, 빗 등을 던지며 조소했지만, 두 형제는 굴하지 않고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다. 이에 처음에는 방관하던 영국 소년들이 며칠이 지나지 않아 두 형제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고,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프랑스 소년들도 저들과 함께 기도하기 시작하여 취침하기 전 기도하는 습관이 기숙사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어릴 때 언더우드에게는 독특한 습관이 있었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다른 일은 모두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이런 집중력 때문에 언더우드는 한 번 하고자 결심한 일은 그 일이 어떤 성격의 일이든, 또 아무리 어려운 난관에 부딪힌다 해도 그것을 뚫고 나가 결국 거의 모든 일들을 성공적으로
끝내곤 했다.

(2) 미국에서의 청소년기

1872년 언더우드가 12살 되던 때에 부친은 그의 가족을 데리고 영국을 떠나 뉴저지주의 뉴더햄(New Durham)에 정착했다. 갑작스런 사업 실패로 가산이 기울자 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것이다. 언더우드가 화란개혁교회에 적을 두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후에 언더우드가 보여 준 타 교단에 대한 관용, 신학적인 유연성, 동료들과의 친화, 부흥운동에 대한 열정 이 모두는 화란개혁교회에서 물려받은 유산들이었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주일 오후의 대부분을 자녀들과 함께 보냈다. 아버지가 무슨 일이 있어 아이들과 함께 성경을 읽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없는 주일에는, 아이들은 교회 놀이를 하곤 했는데, 이런 경우에 호러스는 언제나 설교자 역을 맡았다. 그는 의
자 위에 올라서서 정식 예배와 똑같이 예배를 인도하였으며, 청중과 자신의 마음에 꼭 드는 설교를 하곤 하였다. 프레드는 가장 성자답다는 명성을 얻고 있었고, 존은 장남으로서 가장 큰 권위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이 둘 중 한 사람이 설교를 담당하는 것이 제격일 수도 있었는데, 설교자의 역할은 언제나 호러스가 맡곤 했다.

훗날 실제로 설교단에 서서 청중들을 사로잡아 감동시켰던 그 재능 그리고 한국의 이야기를 그렇게 힘차게 설파했던 그 재능의 상당 부분이 이 당시에
이미 발견되고 발전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역할이 호러스에게 맡겨졌던 것이 아닐까싶다.

미국에서의 소년 시절 동안, 소년들은 많은 복음사업에 관여하였다. 교회와 주일학교에서의 서너 번의 정규 예배 외에도 이들은 선교학교에 참여하였으며, 유니온 힐(Union Hill)의 암흑가에 종교서적을 배포하는 일에도 관여하였다. 한 번은 술집에서 전도하던 중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거기 있던 사람들이 그들에게 나가라고 거칠게 소리친 적이 있었다. 소년들은 예의바르게 절을 하고 물러났지만, 난폭한 행동과 하나님을 모욕하는 소리에도 흔들리지 않고 다음 주에 침착하게 다시 방문하였다. 소년들은 경찰을 부르겠다는 협박을 받았으나, 열 살 때에도 그 소란스러웠던 기숙사에서 기도할 수 있었던 이들인지라, 이제 열여섯, 열일곱이 된 나이에 한두 명의 문지기가 저지한다고 해서 단념할 리가 없었다. 결국 술집 사람들은 옛날의 프랑스 학생들처럼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에 굴복하였고, 이 상냥하면서도 동시에 불굴의 의지를 지닌 어린 복음전파자들과 친해지기까지 하였다.

이 시절에 호러스는 좋은 지도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그로브 교회에서 봉사하던 메이번 목사(Rev. Mabon)였다. 호러스는 그의 밑에서 자라면서 대학에 진학할 준비를 하게되었고, 학자처럼 탐구하는 자세로 책에 몰두하여, 여섯 달이 지나자 대학에 진학하는 데 필요한 헬라어를 모두 배우게 되었다. 메이번 목사는 호러스가 브룬스윅에 있는 화란 개혁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 신학교에서 조직신학과 학과장직을 맡고 있었다.

(3) 청년기

이민 후 자기의 본업인 문방구 제조에 착수하여 성공한 아버지는 언더우드를 장차 목회자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1877년 뉴욕대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다시 가세가 기울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 없었던 언더우드는 20여 리나 되는 거리를 매일 걸어서 통학하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한 번도 자신의 형편을 불평한 적이 없었다. 대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졸업 시 졸업반을 대표하여 고별연설을 할 정도로 우수한 성적으로 뉴욕대학교를 졸업한 언더우드는 부친이 세상을 떠나는 슬픔 속에서도 신학교로의 입학을 포기할 수 없었다. 1881년 자신이 속한 교단 신학교인 뉴 브룬스윅(New Brunswick)에 있는 화란 개혁 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했다. 1784년에 설립된 화란개혁교회(RCA) 교단 신학교 뉴 브룬스윅신학교는 비록 외형적으로는 프린스톤신학교와 견줄 수 없었지만 그리피스를 비롯한 수많은 목회자, 선교사, 학자를 배출한 훌륭한 신학교였다.

호러스는 이목구비가 단정한 외모에 성실, 헌신, 영성 그리고 지성이 하나로 어우러져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게다가 남다른 복음의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언더우드는 신학교 은사들의 인상에 깊게 남은 남다른 학생이 되었다. 호러스가 신학교에 입학할 때 그를 관찰했던 어떤 사람은 이렇게 썼다. “그를 처음 본 순간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하리라. 그는 수업이 시작되는 첫날 뉴 부룬스윅의 신학교로 가는 길을 걷고 있었는데, 나는 어떤 이에게 그가 누구인가를 물어보았다. 그를 처음 보았는데도 그의 얼굴에 나타난 어떤 목적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집념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하였다.

호러스는 말씀 연구와 신학공부, 그리고 학비를 벌기 위한 아르바이트로 하루 5시간만 자는 고된 일과를 감당했다. 한가지 일을 시작하면 끝장을 내고 마는 성격 탓에 그는 신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동안에도 건강은 염려하지 않고 학업과 복음 사역에 전념하는 열성을 보였다.

“호러스가 신학교에 다니던 3년 동안, 거의 매일 그가 무슨 종교적인 일로 뉴 브룬스윅의 어떤 거리를 외투자락을 휘날리며 뛰어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그의 급우 중 한 사람은 이야기 하곤 했다.

이러한 활동이 학업에 지장을 주리라고 믿는 교수들은 그것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러스의 활동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 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고, 또 그가 하는 행동들이 학급에서 그가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데 영향을 미치거나, 5시간의 수면과 19시간의 학업과 일을 강철과 같이 견뎌내는 그의 몸에도 무리를 가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에, 교수들은 실제로 그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할 수 없었다.

그 당시 뉴 브룬스윅의 가장 큰 화란 개혁교회의 담임 목사였던 이스튼 박사는 호러스와 마음이 통하는 인물이었다. 영혼에 대한 정열로 불타오르던 그 목사는 이전에는 변화가 없고 냉랭했던 교회에 불을 질렀다. 계속적인 부흥, 놀라운 회심들, 새벽기도와 저녁기도, 예배 후의 모임 등으로 넘쳐
나게 된 이 교회는 모든 이웃 교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이 과정 속에서 호러스는 부목사가 감당해야 할 만한 역할을 감당해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주일 하루 내내 일곱 여덟 번의 예배에 참석하면서 열정적인 활동을 감당했다.

 

배론하당

1855년 충북 제천군 배론에 솔립된 한국 최초의 신학교로 1866년 병안교난으로 폐쇄되기까지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공헌하였다.

 


평생전도회
만주 북간도 용정에서 교회 여성들이 조직한 평생전도회 회원들이다


12.동만노회
캐나다 장로회의 선교사업으로 이룩된 동만노회(간도노회) 의 임원들이 귀국하는 선교사 럽을 환송하기 위하여 모였다

 

 

한국교회사(20)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2)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2) 서상륜에 의해 세워진 소래교회

한국 땅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는 서상륜에 의해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세워진 소래교회이다. 소래교회가 세워진 송천리는 순 토박이말로‘솔샘’이었다. 솔샘은 솔내로 변했고, 그것이‘소래’가 되었는데, 이 마을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계곡을 흐르는 물은 황해로 흘러들어가는 곳이다.

소래교회의 설립은, 선교사들이 우리 땅에 들어오기 전에 성경이 먼저 우리말로 번역되었다는 것 못지않게, 1884년 4월 5일에 공식적으로 우리 땅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선교사가 도착하기 전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하겠다.

소래교회는「황해도지」와「은율군지」의 자료에 의하면, 1883년에 설립된 것으로 나타나며, 1·4후퇴 때 월남한 소래인들이 고향을 그리며 후세대에게 정확한 사실들을 알리고자 편집한「대구면지」(大救面誌)에 송천교회 회고편을 쓴 정용하의 증언에 의해서도 1883년에 설립된 것으로 나타난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경조 목사님의 가르침에 의하여 1883년 5월 16일에 교회가 설립된 것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고향에 있을 때 5월이 되면 어린이주일, 어머니주일, 그리고 이어서 교회생일이 있었고,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온 교회가 축제 분위기에 젖어들었으며, 설립일에는 야외예배, 토론회, 웅변대회 등등 여러 가지 특별 행사를 하면서 이 날을 지켰습니다.”라고 하였다.

만주에서 쪽 복음서를 갖고 밀입국(1882년)하려다 관헌에 적발되었던 서상륜은 고향에 와서 전도하게 되었는데, 이 사실이 관가에 알려져서 그를 체포하라는 체포령이 내려지므로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되자, 당숙이 살고 있는 소래로 피신하여 살면서 서울과 소래를 오가며 전도하였다. 의주에 살던 동생 서경조가 소래로 아주 이주하여 서상륜은 1883년 봄부터 자기 친척과 몇몇 동네 사람들과 함께 동생 서경조의 초가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후에 솔내는 58세대 중 50세대가 예수를 믿는 경이로운 전도의 업적이 나타난 동리가 되었다.

상경한 형에게서 신약과‘덕혜입문’을 받아 소래로 돌아온 서경조가 결단을 하고 믿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신약전서를 수차 읽어보니 예수교를 할 마음이 깊이 들어가는 동시, 그 교를 하면 피살하리란 마음이 또 생겨 시중전이 일어나”반년이나 갈등하다가 로마서를 보고는“사도 바울의 죽음을 무릅쓰고 두려움이 없는 마음을 보고 내 생각에 바울도 사람이라 어찌 죽기를 두려워 아니 하였으리오…죽는 것은 잠깐 동안이요 죽을까 두려운 마음이 실상 어려우니 성신을 받아 두려운 마음이 없으면 죽는 것이 두려울 것 없고 또한 생사가 천주의 뜻대로 되리라.”하며 기독교에 입문하였다고 술회하기도 하였다.

1895년에는 교회가 비좁아 신축을 하였다. 이때 교인 수는 2백여 명이라 했으며 교회를 짓기 위하여 밤새도록 기도하는 일, 금식하는 일, 십일조를 교회에 바쳐 3-4월이 되어 어려운 사람이 생기면 신·불신을 막론하고 구제해 주는 일, 근농으로 교회 설립 3-4년 만에 박토가 옥토 된 일, 주색잡기, 투전, 미신 등이 없어진 일, 열심히 전도하는 일이었다(국민일보“한국교회 뿌리를 찾아서”)고 기록되어 있다.

소래교회 건축에는 몇 가지 특색이 있는데, 첫째는 소래교인들이 자체적으로 건축비를 부담했다는 것이다. 또한 둘째는 미리 비축해 두었던 기금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서경조는 성경 공부 차 상경하였을 때 언더우드의 사랑채에서 서울의 신도들과 예배당 건축계를 조직한 일이 있었다. 이계금은 매년 10냥씩 불입하도록 하였고, 한국 어디서나 최초로 예배당을 건축할 때 이 기금을 사용하도록 약조하였다. 따라서 소래교회의 건축 준비가 무르익고 공사가 진행되자 계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계금을 수령하였는데, 소래교회의 건축에 도전을 받은 서울교회가 서둘러 예배당 건축을 추진하였으므로 계금을 반분하여 500냥을 받아 건축비로 사용하였다. 셋째 특징은 건축비에 대한 언더우드선교사의 선교비 보조를 사절하고 한국 최초의 민족 교회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건축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소래교회의 부흥으로 인근 장연읍을 비롯하여 송화·은율·풍천·문화·해주 등 일곱 지역에 수십 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이와 같이 한국교회의 창설은 분명 성경을 번역한 평신도들의 독자적 전도와 한글성경 반포라는 특징을 갖고 시작되었다. 또한 소래교회는 한국교회 스스로의 힘으로 건축을 감당함으로 자립, 자생하는 교회로서의 기초 돌을 놓았다.

한국교회사(21)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2)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3) 일본에서 복음을 받은 이수정

① 이수정의 일본 방문

만주 우장에 거점을 마련한 존 로스 선교사와 의주 출신 젊은이들에 의해 중국에서 복음이 준비되고 있는 동안 바다건너 일본에서는 이수정(李樹廷)에 의해서 복음이 준비되고 있었다. 대학자 이병규의 아들 이수정은 민영익과 교분이 두터운 친우 사이였고, 일찍부터 개화설을 주장하였으며, 여러
차례 국가에 공로가 많았던 인물로 1882년 9월 19일 임오군란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본래 개화사상을 가지고 있는 데다 오래 전부터 일본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수정은 일본에 건너가기 전부터 민영익과 가까운 친분을 가지고 있었고, 1881년 초 이전에 이미 부산주재 일본영사 콘도우(近藤)와 접촉하고 동경에 가기 위하여 일본 주우은행에 적금도 들어 놓고 있었다. 그만
큼 일본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가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면서 밝혀진 일이지만 그는 상당한 예술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 건너가기 전에는 한때 민영익과 함께 무역과 상업을 통한 부국의 길을 찾는 데도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81년 농학부문 담당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지우(知友) 안종수(安宗洙)를 통해 일본에 대해 어느 정도 식견을 갖고 있던 이수정은 일본의 선진 농업정책을 전수받고 한국에 그것을 계승하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일어났다. 안종수는 일본에 있는 동안 당대 일본을 대표하는 걸출한 농
학자 쯔다센(律田仙)을 만나 기독교에 대해 전해들은 후,“ 내가 배운 바를 왕과 나의 친구들에게 말할 것이고, 그들의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버리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했다. 쯔다센의 탁월한 선진 농법에 감명을 받은 안종수는 돌아와 농정신편(農政新編)을 저술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농업기술 서적으로 국민들에게 농업 선진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수정이 관심을 갖고 있던 분야는 일본의 문화, 특히 농업과 법률, 우편 및 조운(遭運) 시설 사찰(査察)이었으나 제일 큰 관심은 일본의 농업 정책이었다.

② 이수정의 회심

일본에 건너간 이수정은 쯔다센과 개신교 지도자들, 그리고 주일 미국 선교사들과도 교분을 갖기 시작했다. 쯔다센은 자신을 찾아온 이수정을 친절히 맞아 주었고, 교리에 대한 설명과 함께 한문 성경 한 권을 건네주었다. 쯔다센은 당시 일본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이수정에게 한문 성경을 건네주고, 한문을 인용해 성경의 진리를 가르쳐 주었다. 이수정은 숙소로 돌아와 한문 성경을 읽는 가운데 감동을 받고 쯔다센이 믿고있던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수정은 김옥균과 민영익이 귀국하고, 다시 얼마 후 박영효가 본국으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쯔다센 박사 밑에서 농업 기술을 전수받겠다는 이유로 계속 일본에 남았다. 그러나 그가 남은 진짜 이유는 기독교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이수정은 쯔다센 박사로부터 농업기술을 전수받는 중에 훌
륭한 그의 인격에 매료되기 시작했고, 그의 인격의 기원이 종교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쯔다센 박사가 다니는 감리교에 점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즈음 쯔다센 박사가 야스카와 토오루(安川亭) 목사를 이수정에게 소개해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때 처음으로 츠키지교회(築地敎會)에 나가 신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수정은 쯔다센에게 체계적으로 성경교육을 받으며 신앙이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이수정은 1883년 4월 29일 일본에 건너간 지 9개월 만에 로개쥬쵸교회(露月町敎會)에서 야스카와 토오루 목사로부터 세례문답을 받은 후 미국 선교사 조지 낙스(George W. Knox)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문답에 대한 그의 답변은 너무도 명확하고 또렷했다. 시취한 일본인 목사나 낙스 목사는 물론 방청했던 사람들 모두가 이수정의 분명한 신앙고백과 유창한 일본어 답변 실력에 놀랐다.

이때 그의 나이는 약 40세였다. 비록 일본에 9개월밖에 체류하지 않았지만 그는 유창하게 일본어를 구사했고, 심지어 두 번에 걸쳐 설교해 대단한 호평을 받았고, 정확한 언어로 모인 청중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그가 쓴 한문 시는 일본의 주요 신문에서 대단한 호평
을 받을 정도였고, 또한 그림도 상당한 수준으로 알려졌다. 루미스는 1883년 5월 30일 본부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그는 대단히 열렬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이미 여기에 있는 그의 모든 한국인 동포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그는 그들이 이미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그의 탁월한 학문적 자질과 능력과 더불어 그의 탁월성은 그의 한국인 동료들에게 대단한 영향을 주고 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도쿄국립대학의 한국어 선생은‘만약 이수정이 기독교 때문에 죽는다면 나 역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불과 18년 전 이수정의 친척가운데 한 사람과 그의 가까운 친구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기때문에 순교 당했다. 그의 팔과 다리가 먼저 절단되었고, 그
후 그의 머리가 절단되었다. 이수정은 몇 차례 밤에 나의 집에서‘만약 내가 나의 조국에 있었더라면 나는 어느 때든지 살해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인들은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미국 성서공회 일본주재 총무 헨리 루미스 선교사는 1883년 5월 11일 이수정의 세례 소식을 본부에 알리면서 이수정이 그의 조국 은둔의 나라에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부푼 기대감을 나타냈다. 이수정이 세례를 받던 1883년 당시 일본 사람들과 일본에 있던 외국 선교사들은 한국선교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국인 이수정이 복음을 접했다는 소식은 곧 일본에 널리 알려졌고 여러 선교단체나 교회가 그를 연사로 초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수정이 세례를 받던 해인 1883년 1월에 일본에서는 선교사, 목사, 교역자, 교회 성도들 모두가 일본교회의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 대 부흥
이 일어났고, 그와 같은 부흥의 열기는 가장 가까운 나라 조선에 대한 선교열을 한층 더해 주었다.

그런 때에 이수정이 로개쥬쵸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것이다. 1883년 5월 8일부터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우에무라(植村), 니이지마 죠(新島)를 비롯한 전 일본의 기독교인들과 각 교파 목사, 교사, 교회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3회 전국기독교도 대 친목회가 동경에서 열렸다. 이것은 일종의 대 부흥집회였다. 집회 4일째인 5월 11일 오전 8시에 신에이교회당(新榮敎會堂)에서 특별기도회가 열렸을 때, 그곳에 참석한 일본인 목사 오쿠노 마사즈나(奧野正綱)의 제청에 의하여 이수정이 등단하여 한국어로 공중기도를 드렸다. 비록 그곳에 모인 이들 중 이수정의 한국어 기도를 알아들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오순절의 영감을 더해 주었다고 우찌무라 간조는 술회했다.

“그는 자기 나라 말로 기도했는데 우리들은 그 마지막에 아멘 하는 소리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 기도는 무한한 힘을 가진 기도였다. 그가 참석하고 있다는 사실과 또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 장소와 광경을 더 한층 오순절과 같이 만들어 주었다.”고 하였다.

1883년 5월 12일, 도쿄쿠단자카(東京九段坂) 스즈끼(鈴木)씨의 사진관에서 찍은 전국기독교 신도 대 친목회 간부 사진에는 이수정이 정가운데에 쯔다센과 마주앉아 있어 그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얼마나 복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그의 신앙고백문에서 알 수 있다. 그는 요한복음에 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다는 말씀은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감응의 일치가 있음을 말씀하신 것으로서, 이것은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증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믿음이 없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며, 만약 세례를 받고도 그 사람 마음속에 참된 신앙이 없다고 한다면 성도라고 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수정은 인간의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자신의 분명한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었고, 만약 그것이 포기된다면 곧 기독교가 포기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예수를 믿고 나서 이수정의 성품과 관심은 바뀌어 갔다. 무엇보다도 진리를 사모함과 동포를 향한 구령의 열정이 매우 강하게 나타났다. 그는 세례를 받은 후 일본에 유학하고있던 유학생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해 주었고, 그들 중에 세례를 받은 이들이 늘어나면서 성경공부반도 생겼다. 1883
년 말 요한복음 15장에 기초한 그의 신앙고백과 교리에 대한 이해는 그가 이미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수정의 활달한 성격, 분명한 신앙고백과 민족에 대한 구령의 열정 그리고 그의 뛰어난 리더십은 일본인들은 물론 일본주재 미국 선교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
기에 충분했다.

이수정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중생의 깊은 체험을 통해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어느 것도 제공해 줄 수 없는 내면의 평안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친구가“나는 자네가 지금 그렇게 행복하게 보이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네. 자네는 최근 매우 크게 변화하였으며 어떤 새
롭고 특별한 기쁨을 찾은 것 같네.”라고 말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수정은 그 친구에게“나는 내가 이전에는 결코 생각해보지 못했던 마음의 큰 평안과 행복이 있다.”고 답했다. 그에게는 내면에서 우러나는 깊은 영혼의 평안이 그의 마음과 전 인격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구원의 확신과 민족을 향한 구령의 열정이 없이는 소유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신앙이었다.

한국교회사(22)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2)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3) 일본에서 복음을 받은 이수정

③ 이수정의 성경 번역

이수정은 자신의 백성에게 성경을 줄 수 있기를 대단히 갈망하고 있던 차에 일본주재 미국 성서공회 헨리 루미스 선교사가 한글 성경 번역을 의뢰하자 주저하지 않고 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미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있던 미국 성서공회가 한국을 위해서도 성서반포사업
을 추진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상황을 루미스는 다음과 같이 선교부에 보고하였다. “조선사절단 가운데 한 명이 최근 동경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전해지는 말로는 그가 한 꿈을 꾸었는데, 그 꿈 속에서 어떤 사람이 책 한 보따리를 가지고 그에게 오더니, 그 책속에는 번영과 행복의 능력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였답니다.
계속 물으니 그 책이 성경이라는 답을 듣게 되었고, 꿈에서 깨어난 그는 그 책을 찾아 그 가르침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현재 교인이 되었으며, 우리는 이것이 복음이 저‘은둔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게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라고 하였다.

루미스로부터 성경 번역을 의뢰받은 후 곧바로 작업에 착수해 성경 번역은 놀랍게 진행되었다. 이수정은 로개쥬초교회 야스카와 목사의 도움으로 시간적으로 방해를 받지 않은 조용한 그의 서재에서 성경 번역을 진행할 수 있었다. 성경번역 과정 중 이수정은 동경대학 한국어 교수로 있는 자신의 친구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루미스는 1883년 5월 29일 이수정에게 ‘마태복음 원고와 상당한 양의 마가복음 번역이 이미 완성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루미스가 야스카와 목사의 안내로 그곳을 방문했을 때 이수정은 이미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완역하였고, 로마서를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다. 이수정은 루미스에게“나는 사도의 서간들이 어려운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정확한 의미에 대하여 만족할 때까지 결코 글자 한 자도 쓰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번역에 임하는 그의 태도가 얼마나 신중했는가를 말해준다. 이처럼 성경번역에 대한 이수정의 애착은 남달랐다.

이수정이 성경을 번역하게 된 동기에 대해 이만열은 그의 저서 ‘한국 기독교 수용사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있다.

“첫째는 신앙적 동기로서, 한국 선교를 위한 그의 열망의 발로였으며, 둘째는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갈 미국 선교사들을 위해 성경의 한글 번역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며, 셋째는 신앙적 동기와 함께 개화 의지 때문이기도 했다.”고 하였다.

이수정의 회심과 그의 성경 번역의 착수는 일본에 유학 온 한국인들 사이에 복음이 전파되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의 전도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인 한국인들이 생겨났고, 자연스럽게 신앙의 공동체가 일본에서 형성되었다. 이수정은 그의 친구들과 일본에서 주일학교를 개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
었으며, 그의 동향 사람 가운데 두 명이 세례를 요청했는데 그 중의 한사람이 귀족의 아들이었다.

이수정은 무엇보다도 성경 번역이 그에게 맡겨진 일차적인 시대적 사명이라고 확신했다. 1883년에 마가복음 번역을 끝낸 이수정은 다른 성경 번역에 착수했고, 그에게 성경 번역을 부탁한 루미스는 1883년 7월 30일 인쇄되어 나온 요한복음 일부를 미국 성서공회본부에 보냈다. 그의 노력으로 한문 성경에 토를 단 현토성경 신약성서 마가전이 1884년 11월에 출판되었고, 현토한한신약전서가 1887년에 출판되었다. 토를 붙인 한문 성경은 유식자 층에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수정은 이와 함께 1883년 6월부터 순수 우리말로의 번역을 착수해 1884년 4월에 완성하여 이듬해 2월 요코하마에서 신약 마가복음 1천 부를 발행했다.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 가지고 온 성경이 바로 이 성경이었다. 비록 출판은 하지 않았지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번역도 완성했다. 이수정의 역본은 로스 역본과 함께 한글 성경 번역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번역 저본들이었다. 한글 성경 번역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레이놀즈(W.
D. Reynolds)의 증언대로 로스와 이수정의 초기 번역은 여러 모로 보아서‘대단히 값진’선물이었으며, 그것은 또한 피어선이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
의‘한국 선교사역에 대한 인치심의 증거’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사(23)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2)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3) 일본에서 복음을 받은 이수정

④ 이수정의 한국 선교 요청

이수정은 민족을 살릴 수 있는 길이 농업 기술이나 서양 기술문명의 전수가 아니라 동족을 복음화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자신이 만나는 일본 주재 미국 선교사들에게 한국선교를 호소했다. 세례를 받은 후 이수정은 곧바로 루미스와 다른 미국인 선교사들에게 미국 선교단체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해서 선교사역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나라에서 먼저 선교사를 파송해 선교사역을 시작할 것에 대해 매우 우려했다. 당시 일본 교회에서는 한국 선교에 대한 주장이 나오고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한국 선교사를 지원하는 분위기였다. 이수정은 일본 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한다는 데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한일 간의 오랜 역사적 감정 문제와 정치적 문제도 있었지만, 서구 문명을 직접 미국으로부터 수용하고자 하는 문화적 욕구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이수정은 통역과 지원만 이루어진다면 성공은 매우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이수정의 노력에 힘입어 이미 1883년 5월에 조지 낙스 선교사와 헨리 루미스는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한국을 여행할 계획까지 세우고, 이를 본부에 타진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미국 선교부에 한국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는 1883년 12월 13일자 이수정의 편지가 선교잡지인 미셔너리리뷰(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1884년 3월호에 실렸다.

그의 편지는‘1883년 12월 13일 요코하마에서’로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나 이수정은 미국의 형제, 자매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인사를 드립니다. 믿음과 진리의 능력으로 나는 주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으며, 나의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간구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확고히 지킬 수 있으며, 결코 사단에 의해서도 제거될 수없기 때문에 주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의 조국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아직 참 하나님의 길을 모르고 있으며, 이방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주님의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복음전래의 시대에 우리나라는 불행히도 눈에 띄지 않는 지구촌의 한 구석에 위치하고 있어 그 곳에서는 기독교의 축복을 누리지 못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복음이 확장될 수 있도록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성공할 수 있도록 나는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이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다섯명의 나의 동포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세례를 받았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자
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으며, 장차 기독교인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숫자가 매일 증가하고 있습니다.

과거 칠, 팔십 년 동안 불란서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비밀리에 복음을 전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엄격히 그 종교를 금했고, 회심자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굳게 지키고 승리의 죽음을 맞았던 것입니다. 사형에 처해진 사람들의 숫자가
십만 명이 넘습니다. 비록 이 사람들은 주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했지만, 그들의 신앙은 예찬할 만하며, 그것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부들 역시 종종 박해를 받았으나 그들은 결코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정부는 나라를 개방해 다른 나라와 교류를 하고 있으며 국민의 여건을 증진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과거보다는) 기독교에 대해 좀 더 완만한 정책을 쓰고 있으며, 그러므로 비록 기독교를 공개적으로 허용한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최근에 완선작이라는 한 중국 기독교인이 우리 왕에게 신약성경 한 권을 헌정했으나, 정부가 이를 방해해 왕이 그것을 하사받지 못했습니다. 왕은 매우 불쾌해 했고, 그 일이 현재 중요한 논제가 되었습니다. 먼저 우리는 어려움들이 있으리라고 기대합니다만 그것들은 곧 해결될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한국에 복음을 전하는 황금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귀국은 기독교 국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는 다른 민족들이 교사들을 보낼 것이라고 우려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되면) 그러한 가르침들이 주의 뜻과는 일치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이 나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 주기를 간구합니다. 만일 나의 요구가 허락된다면 나의 기쁨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그리스도의 종 이수정’이라고 자신을 밝히고 있다.

이수정의 편지는 그가 일본에 건너간 이유와 그 곳에서의 활동과 사역을 비교적 소상하게 밝혀 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깊다. 그가 일본에서 한국 선교를 준비하는 데 기여한 사실은 단순히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은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여러 명의 한국인들이 복음을 접함으로 말미암아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복음 전도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했고, 후에 성경과 많은 기독교 전도문서를 번역하여 한국복음화를 위한 중요한 토대를 구축해 주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보다도 한국 복음화를 위해 그가 이룩한 더 큰 공헌은 미국에 한국 선교를 촉구하여 한국 선
교의 장을 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다.

세례받은 지 만 1년도 채 안 된 사람의 편지치고는 복음의 열정이 짙게 배어 있고, 전체 구성은 물론 내용과 논제가 너무도 분명하다. 이수정에게 세례를 베푼 일본주재 미국 선교사 조지 낙스가 지적한 것처럼 이수정의 편지는 자기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 달라고 바울의 꿈 속에 찾아와서 간곡하게
부탁했던 그야말로‘한국의 마게도니아인의 부름’이었다. 이것은 한국 선교열을 고취시키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미북장로회 선교부가 이 편지에 고무되어 선교사를 파송케 되었음이 다음 글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 주목할 만한 일련의 사건에 자극된 우리(미북장로회) 선교사 몇 명은 여러 달 동안 선교본부에 한국 선교사를 임명해 줄 것을 간절히 요청하였는데, 이는 개종한 한국인 자신들의 청원과 일치한다. 다음 사실이 선교 본부가 취한 행동이다. 최근 모임에서 선교 본부는 목회 선교사로 언더우드(H. G. Underwood) 목사를 임명했다. 그는 뉴욕 대학과 뉴저지 뉴브른스윅의 개혁교회신학교를 졸업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12월 1일까지 미국에 머물다가 일본으로 떠날 것이다. 최초의 선교사들이 현재 동경에 머물고 있는 한국인 신자들로부터 일본에서 잠시 한국어 공부를 할 것이 확실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오윤태는‘이 편지를 읽고 한국 선교에 뜻을 정하고 자기 나라를 떠나서 멀리 태평양을 건너 한국까지 온 사람은 한국장로교회의 창시자 언더우드 목사(Rev. Horace Underwood)와 메쏘디스트(감리교)의 창시자 아펜젤러 목사(Rev. Gerhart Appenzeller)이다. 당시 신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두 청년이 뜻을 정하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이수정 씨의 편지를 잡지에서 읽은 후에“조선에는 누가 가는가?”하는 신령한 음성을 듣고, 전자는 북장로회의 선교사로서, 후자는 메쏘디스트교회(감리교회)의 선교사로서 한국에 오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수정의 한국 선교의 공헌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의 요청을 받고 감리교 요리문답도 번역하여 1천부가 출판돼 국내에 널리 유포되었다. 요코하마에서 그의 마가복음 성경 1천 권이 출판되던 바로 그 해 언더우드가 선교사로 한국을 향해 오던 중 요코하마에 들려 이수정에게 2개월간 한국어를 배우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오는 데 일조를 하기도 했다. 그 당시 세계 어느 나라도 선교사가 입국할 때 그 나라 말로 된 성경을 가지고 입국해 선교를 시작한 경우는 없었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가 인도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해 인도 선교의 토대를 마련한 것처럼, 이수정의 성경 번역은 언더우드를
비롯해 이후에 오는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를 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해 준 셈이다. 언더우드가 선교지에 실린 이수정의 선교 호소 편지를 읽고 감동을 받았고, 입국 전 그로부터 한국어를 배웠고, 그리고 그가 번역한 성경을 가슴에 지니고 입국해 선교를 시작했다면, 한국 선교에 끼친 이수정의 공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수정은“비록 나는 별로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지만”이라고 겸손하게 편지에서 밝혔지만, 확실히 그는 한국 선교를 가시화시킨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한국교회사(24)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2)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3) 일본에서 복음을 받은 이수정

⑤ 이수정의 귀국

이수정이 이같이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당시 조선 정부로서는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갑신정변 이후에 한국에서는 외국 유학생을 소환하기 위해 소환령을 내렸다. 이수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두 명의 고위 관리가 일본에 와 이수정을 설득했으나 이수정이 귀환을 거절했다. 1886년 1월경에는 이수정의 동생이 형이 일본에서 진 부채를 갚기 전에는 한국으로 귀국할 수 없다는 소문을 듣고, 7,8백 달러에 해당하는 1천 원을 건네주러 왔다. 일본에서 농업 기술을 배워 한국의 농업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형의 말을 그대로 믿고 일본에 건너온 동생은 형이 더 이상 상업과 농업을 연구하지 않고 기독교에 몰두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대단히 실망했다.

당시의 상황을 오윤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여기에 도착하자 그는 이수정이 농업, 상업의 연구에 종사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혹은 수많은 이상한 발명품에 접하여 보고 놀랐다. 그의 모든 시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바쳐졌으며, 그의 마음은 완전히 변화한 것 같았다. 동생은 이것을 보고 당황하여 그 형 이수정에게 말하기를“당신은 더
이상 나의 형님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떠한 이상한 감응이 형님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하였다.

기독교 신앙에 빠져 성경 번역에 자신의 전 시간을 몰두하며 신앙생활에만 매진해 있는 형의 모습을 불신자인 동생이 이해할 리 없었다. 그가 볼 때 그것은 결코 정상이 아니었을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그리고 일본에 도착해 한동안은 농업기술을 전수해 한국의 농업발전에
기여하겠다던 형이 이처럼 기독교에 빠져 완전히 달라진 것을 보고는 형에 대한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형을 돕기 위해 1천 원의 돈을 가지고 일본까지 찾아왔던 동생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분노하는 동생에게 이수정은“나는 돈이 필요 없다. 너는 그 돈을 도로 가지고
가라. 나는 내가 여기서 해야 할 매우 중요한 일이 있으니 네가 바라는 대로 돌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나와 우리 동포를 위하여 철도나 전신기나 증기선보다도 더 좋은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동생을 돌려보냈다. 이수정은 자신이 하고 있는 성경 번역 사업이 얼마나 중요한 사역인지를 깨닫고 있었고, 또 그 일을 속히 마쳐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동생의 귀국 권유를 거부한 것은 동생을 무시하거나 고국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민족을 향한 더 큰일, 더 시급한 일을 발견하였기 때문이었다.

한국 정부가 또다시 고위관리 박준우를 일본으로 파송해 설득하는 바람에 이수정은 고국의 부름을 거부하는 것도 신앙인으로서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귀국을 결심했다.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평소 이수정은 조선의 왕실은 물론 기왕의 민영익과의 친분과 우호를 소중히 여겼다. 정치적인 역학관
계도 그의 귀국을 부채질했다. 갑신정변 후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하자 주모자들을 색출하려는 움직임은 물론 자객을 보내 주모자들을 암살하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옥균이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선교를 호소하자 자신도 그들과 한 배를 탄 매국자라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일본에 올 수 있도록 자신을 지원해준 민영익과의 개인적 친분을 고려할 때 더욱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주재 선교사들과 교분을 나누면서 성경을 번역하고 그들에게 한국선교를 호소하는 행위 자체가 순수한 신앙에서 발로된 것이지만 본의 아니게 개화파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격이 될 수도있다고 그는 판단한 것이다.

본래부터 이수정이 김옥균과 관계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이수정은 김옥균과 마찬가지로 개화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에 문호를 열어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을 꾀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하고 있었다. 1880년 친구 김굉집이 일본에 건너가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지고 돌아왔을때 그 책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 후 일본에 갔을 때도 이수정은 김옥균과 친밀한 관계를 가질 만큼 둘의 사이는 좋았다. 이수정이 세례를 받기 1개월 전인 1883년 3월에 김옥균이 한국으로 돌아간 후 이수정은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정책적으로 조선과의 관계 증진을 위해 조선 학생들을 받아 1884년 3월 7일 당시 30여 명의 학생들이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가 1883년 8월에 저술한 조선일본선린호화(朝鮮日本善隣互話) 1권에 김옥균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한 것을 볼 때도 김옥균에 대한 이수정의 인상이 상당히 우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던 그들의 관계가 급속히 냉각된 것은 갑신정변 이후였다. 이수정은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주도하고 자신과 절친한 사이였던 민영익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것으로 인해 적지 않은 상처를 받았다. 그때부터 이수정이 1886년 고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일로에 있었다.

이때문에 김옥균은 기회가 있는 대로 이수정을 제거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1886년 1월에 방문한 동생이 고국으로 돌아간 후 불과 얼마 되지 않은 3월 21일, 이수정은 김옥균이 보낸 자객에 의해 습격을 받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당시 일본에서 간행되고 있던 1886년 5월 10일자 시사신
보는‘김정식이라는 사람이 이수정을 암살하려고 하다가 발각되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동경경죄재판소에 구속되어있다.’고 보도했으며, 그 해 8월 24일자 시사신보에 의하면 ‘조선국 양산부 원동에서 온 김의순은 지난 3월 21일 밤에 신전구 담로정 2목 4번지 도변유길(渡邊留吉) 댁에서 친하게
교제하던 이수정 씨와 말다툼 끝에 복부를 차고 준비해 가지고 있던 비단 손수건에 싼 탄환의 파편으로 머리와 얼굴을 때려 전치 20일 이상의 상처를 입혀 동경경죄재판소에서 심문을 받은 결과, 지난 21일 형법 제 삼백일 조에 의거 중금고 일년의 형을 받았다.’고 하였다.

1886년 들어 이수정은 두 번에 걸쳐 자객에 의해 습격을 당한 것이다. 이것은 이수정에게 적지 않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미 이 일이 있기 전 고국을 다녀올 계획을 세웠던 이수정으로서는 이와 같은 자객의 습격을 받자 아예 일시 귀국이 아닌 영구 귀국 쪽으로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위험한 상황에서 이수정이 일본에 계속 체류한다는 것은 신앙을 떠나 수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또한 조국의 부름을 계속하여 거부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클라라 루미스(Clara Denison Loomis)에 의하면 그는 한국으로 떠나기 전, 헨리 루미스를 찾아와 한국에 오면 자신을 방문해 달라고 헨리 루미스를 초청했다. 루미스에게 방문 요청을 한 것을 보면 이수정은 귀국해
도 특별한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것 같다. 이렇게 해서 그는 1886년 6월 2일, 4년 동안의 일본생활을 청산하고 조선정부가 보낸 박준우와 함께 귀국했다. 그가 탄 배에는 이수정 외에도 박준우, 본국으로 소환되는 유형준, 유송진, 박영우, 서광철, 김학기 등 다섯 명의 유학생 그리고 김옥균을 암살하겠다며 한국 정부로부터 2만 원을 가지고 와서 호화로운 생활만 하던 조복도 있었다.

조선으로 귀국할 당시 이수정과 선교사들과의 관계는 상당히 소원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유는 이수정이 정치 외교 문제에 깊이 관계하면서 친선교사적인 망명 개화파들(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의 정적으로 등장하는 한편, 반선교사적인 인물로 인식되어 오던 묄렌도르프와 가까워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1885년 3월 5일 매클레이의 집에서 제1회 한국 선교사회가 모였는데, 매클레이 부처 외에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은 스크랜튼 여사, 아펜젤러 부부, 언더우드 그리고 한국인으로 이수정과 박영효 등이 참석해서, 한국에 대한“상황 분석과 여행 문제, 사업 방법, 선교회 개설 계획 등을 토론하고 무엇보다 앞에 놓여 있는 중요한 사업을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것을 감사와 함께 간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수정과 선교사들과의 사이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민영익과의 관계로 김옥균과의 사이가 멀어지면서 망명 개화파들의 정적이 되어 김옥균 일파가 보낸 자객에 의해 두 차례의 암살 미수를 당하면서 이수정은 정치적인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신앙에만 전념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루미스는 1886년 5월 14일자의 편지에서“이수정은 5월 12일 한국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는 줄곧 기독교인으로만 산 것은 아니었으며, 우리는 대단히 실망하였습니다. 그는 여러 달 동안 매우 아팠으며, 최근에는 한 못된 동료에 의해 살해될 뻔 하였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우리는 위 편지에서 루미스가 이수정에 대해 실망한 것이 그의 비기독교적인(정치적인) 행동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귀국하기 전 이수정은 루미스를 찾아가 “그의 죄에 대해 깊이 뉘우친다고 고백”하였으며, 한국에 오면 자신을 찾아달라고 루미스를 초청하였다. 이러한 이수정의 행동은, 지난 1년여 동안 그가 행한 분주한 정치적 활동이 그에게 남겨준 것은 상처와 오해뿐이었음을 깨닫고, 루미스를 만나 우정을 회복하고, 한국선교 사업에 동참할 것을 약속한 것이라 해석된다.

 

 30.경산학당 교사와 학생들

 서울에 1886년 설립된 구세학당 학생들로 1893년 경의 교사와 학생들이다.

 

 

동아기독교
침례교의 전신인 동아기독교는 캐나다출신 선교사 펜윅(가운데 검은 옷입은 이)에 의해 1889년에 설립되었다.


매서인들의 전도
성경과 전도지를 파는 매서인(권서인)들의 활약으로 한국교회는 크게 발전하였다. 1890년경 서울 지방에서 활약하는 매서인

 

 

한국교회사(15)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1) 중국을 통한 한국 선교의 시도

(3) 알렉산더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

비록 토마스 선교사가 한국 선교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한국 선교에 대한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토마스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했던 알렉산더 윌리엄슨이었다. 윌리엄슨은 스코틀랜드인으로서 일찍이 런던선교회 소속선교사로서 1855년에 중국에 와서 그리피스 존(Griffis John) 등과 같이 상해에서 선교하던 중, 토마스 목사의 생사도 알아 볼 겸 한국 사정을 알려고 1867년 만주에 내왕하는 한인들과 두 차례 접촉하였다. 윌리엄슨은 4월에 요동 지방의 잉체코에서 한국인 상인들
과 여행자들에게 진리의 말씀과 서적들을 주면서, 더불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 달 19일에는 천장대에서 귀국 도상의 한국 동지사 일행을 만나, 이들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에 관한 지식에 놀랐다. 만다린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동지사는 북경에서 여러 선교사들을 만났으며 런던선교회도 방문했다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이 사람이 로버트 토마스를 만났었다고 하는 사실을 1866년 4월 4일 날짜의 토마스의 서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동지사 일행이 방금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북경에서 다른 외국인들보다 훨씬 이들과 친숙할 수 있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더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조선에 관한 지식 그리고 조선말을 할 수 있다는 조건 때문에 저들이 묵고 있는 공적인 숙소에 아주 쉽게, 환영을 받으면서 왕래할 수가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윌리엄슨은 상당한 정도의 한국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로버트 토마스를 통해서 얻은 지식과, 자신이 직접 만난 두 사람의 조선인 천주교인을 통해 얻은 지식, 그 외에도 고려문 전도시에 만났던 많은 조선인들을 통해 그는“분명히 조선은 위대한 가능성의 나라”라고 하는 사실을 간파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한국인의 지성과 성품과 윤리적 생활이 우수한 점, 그리고 명민한 판단과 담 큰 결단력을 지적하고는, 지력(地歷)과 지하자원에까지 언급하고 수운(水運)의 편리함도 서술한 후“이 나라에 없는 것은 다만 서양의 종교와 그 문명의 박차(迫車)와 지도(指導)”라고 갈파하였다.

1866년 토마스가 순교하기 1년 전부터 고려문에서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그는 1867년에도 그곳의 한국 상인들을 상대로 전도활동을 하며 한국선교를 준비했다. 토마스의 죽음이 한국 선교열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요인이 된 것이다. 복음은 이처럼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토마스가 세상을 떠난 지 꼭 1년이 되는 1867년 9월 9일, 윌리엄슨은 고려문을 포함한 만주 전도여행을 떠났다. 고려문은 한국인이 중국에 들어가는 관문이었고 해마다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장이 섰는데, 이때는 한국인들이 자유롭게 들어와 중국인과 물건을 매매할 수 있는 기회가 허용되었다. 따라서 한국인들과 접촉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윌리엄슨은 한국인들에게 중국어 성경을 팔면서 복음을 전했다.

윌리엄슨은 한국선교에 대한 열정이 뛰어났고 그 일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면서도, 선교의 방법에 있어서는 서구의 제국주의적 사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는 기독교 대국들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한국이 문호를 열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대영제국과 미국 같은 나라들이 선도하여 한국같이 그 나라들에 반대하여 어리석고도 무식하게 폐쇄하는 나라들을 개방하도록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은 의무이자 특권이라고 나는 믿는다.”고 하였다.

윌리엄슨은 누구 못지않은 불타는 복음의 열정이 있었지만, 선교방법론에 있어서는 제국주의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비록 한국의 개방을 위해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무력을 통해서라도 이 나라를 개방하도록 만드는 일이야말로 일종의 거룩한 소명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중국으로 박해를 피해갔던 리델 신부가 무력을 동원하면서까지 한국 선교의 문을 열려고 한 것이나, 토마스가 불란서 함대의 통역으로 국내에 입국하려고 한 이면에서 우리는 당시 영국과 불란서 등 유럽 강대국 출신 선
교사들의 내면에 복음의 열정이 제국주의 패권의식으로 채색되어 복음의 순수성이 희석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국가범위로 확대된 서구형의 기독교회는 국가와 교회의 철저한 분리를 전제한 교파형의 미국 기독교회에 비해서 이러한 과오에 빠질 가능성이 훨씬 많았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우리는 귀츨라프, 토마스, 윌리엄슨에게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불타는 선교의 열정, 복음의 열정을 발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의 의식세계가 역시 당시 강대국 백성이 갖고 있는 제국주의적 패권의식의 한계를 크게 넘어서지 못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는 당대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복음 본래의 순수성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이들은 후대 한국선교를 위해 중요한 토대를 구축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사(16)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1) 중국을 통한 한국 선교의 시도

(4)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

토마스나 윌리엄슨같이 중국에서 활동하는 스코틀랜드 출신 선교사들 가운데는 일찍부터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고 실제로 한국 선교를 타진하던 이들이 있었는데, 존 로스(John Ross, 1841-1915)와 존 맥킨타이어(John McIntyre, 1837-1905) 선교사였다. 이들은 처남매부지간이었다. 일찍이 1892년 조지 길모어(George W. Gilmore)는 자신의 서울에서 본 한국(Korea From Its Capital)에서“한국개신교 복음화의 시작은 중국 우장에서 활동하는 존 로스 목사의 노력에 기인한다.”고 지적할 만큼 존 로스는 한국개신교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존 로스(羅約翰)는 제임스 그레이슨이 "한국의 첫 선교사”라고 부를 만큼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입국 이전에 한국 선교의 초석을 놓았던 개신교 선교사였다.

① 존 로스의 한국 선교 준비

1872년 존 로스는 선교사로 부름을 받고 아내 스튜어트와 함께 그 해 8월 중국 지푸를 거쳐 그 다음달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회 선교부가 있는 영구(營口)에 도착하여 중국어와 만주어를 배우는 한편 만주 우장을 거점으로 선교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873년 사랑하는 아내가 첫 아이를 출산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큰 위기를 만났지만, 로스는 결코 선교를 포기할 수 없었다. 갓 태어난 자신의 아기를 돌봐 줄 사람이 필요했던 로스는 영국에 있는 누이동생 캐더린 로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녀는 선뜻 오빠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같은 선교지에 와 사역하던 총각 선교사 존 맥킨타이어가 그녀의 헌신적인 모습에 감동을 받고 청혼하여 둘이 결혼했다. 로스는 1881년 재혼할 때까지 7, 8년을 여동생 캐더린의 도움 속에 홀로 지내며 한국 선교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할 수 있었다.

로스는 아내와의 사별에도 불구하고 1873년 가을,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서 산동 지역 특히 서간 지역으로 1차 선교여행을 떠나며 한국 선교의 열정을 불태웠다. 만주 우장을 떠난 존 로스는 봉천 홍경을 거쳐서 압록강 상류 임강 부근까지 건너갔다 거기서 우연히 한 한인촌을 발견했다. 이미 윌리엄슨에게 토마스 선교사 순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조선이 어떤 나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그였지만,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 없었다. 사공을 찾았지만 나서는 뱃사공이 없어 배라도 빌려 비밀리에 도강하려고 했으나 배를 빌려 주는 사람조차 없었다. 당시 한국은 쇄국정책으로 외국인과 접촉만 하면 처형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존 로스 선교사를 태워다 줄 사공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존 로스는 한국에 입국하는 것을 포기하고‘개국(開國)의 날’이 속히 이르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귀로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마침 한 사람의 한인과 친하게 되어 자기가 갖고 있었던 한문 성서 몇 권을 그에게 전하고 돌아왔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니 배포한 성경을 읽고 수년 후에 여러 명의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계속해서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던 로스는 1873년 가을, 만주를 출발하여 고려문을 방문했다. 로스는 고려문에서 한국어 선생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곳에 가서 중국인 여사(旅舍)에 짐을 풀고 매일 시장에 나가 한국인을 만났으나 별 소득이 없이 영구로 돌아갔다.

1874년 4월 말에서 5월 초 로스는 자선 사업가 아딩톤(R. Arthington)의 재정 후원으로 서기를 동반하고 다시 고려문에 가서 자신의 어학 선생을 찾기 시작했다. 서기를 통해서 만난 사람이 바로 의주 출신 중인 이응찬(李應贊)이었다. 이응찬은 한약재를 잔뜩 싣고 고려문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다, 갑자기 남서풍을 만나 거센 파도가 이는 바람에 배가 전복되어 싣고 가던 모든 물건들이 물에 잠기고 말았다. 다행히 그는 물에서 나왔으나 물건은 찾을 길 없게 되었고, 갑자기 무일푼의 난처한 처지가 되었다. 1890년 로스는 이응찬을 만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술회한다.

“일을 하자니 힘이 들고 빌어먹자니 부끄러워서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궁지에 빠졌다. 이러한 비참한 환경에 놓여 있을 때에 그는 우연히 한국말 선생을 구하기 위하여 한국 사람들 사이에 파견된 나의 서기와 만나게 되었다. 하루 저녁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에게로 왔다. 나를 만나자 그의 친구들을 먼저 돌려보낸 다음에 곧 나의 선생이 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그는 누구 앞에서나 모르는 척 해달라고 신신부탁한 다음에 뛰어나가서 친구들이 여관에 채 들어가기 전에 그들을 따라갔다.”

이응찬은 진퇴양난의 위기의 순간에 로스 일행을 만나 그의 어학 선생을 하면서 로스의 사역을 지원한 것이다. 로스는 이때가 1874년이라고 밝히고 있다. 본래 한학에 뛰어난 이응찬의 지도를 받으면서 로스의 어학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이응찬의 어학 지도로 로스는 1877년 한국어 교본『한영문전입문』(韓英文典入門, A Corean-English Primer)을 저술하였으며, 1879년에는『한국, 그 역사, 생활 습관』(Corea, It''s History, Manners and Customs), 1875년에는『예수셩교문답』과『예수셩교요령』도 출판하였다. 로스 목사는 한글에 대하여 “그들이 사용하는 글자는 표음문자인데다 매우 단순하고 아름다워서 누구나 쉽게 또 빨리 배울 수 있다.”고 칭찬하였다.

한국교회사(17)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1) 중국을 통한 한국 선교의 시도

(4)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

②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 한글 성경 번역

이응찬은 존 로스를 도우면서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그를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이응찬은 1875년 고려문에 가서 백홍준(白鴻俊), 이성하(李成夏), 김진기(金鎭基) 등 의주 청년 세 사람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이응찬을 비롯하여 네 사람의 한국 젊은이들을 확보한 존 로스 선교사는 한국선교를 위해
서 먼저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 성경 번역이라고 보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성경 번역에 착수했다. 로스는 말씀이 기독교의 핵심이요 전도의 중심이라 보았다. 해서 성경 번역, 한글성서 간행에 전력하여야 한다고 믿었던 복음주의자였다. 선교사로서는 가장 적절하고도 고귀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들 네 명의 의주 청년들은 선교사, 세관관리, 병원장 등 그곳 외국인들의 어학 선생으로 일하면서 이응찬과 함께 로스의 성경 번역 사업을 지원했다. 이들이 한 일은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을 위해 한문 성경을 수차례 정독하는 일이었다. 이 과정을 되풀이하는 동안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예수를 믿기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4년 후 1879년에 네 사람 모두가 맥킨타이어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 이 사실에 대해 로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맥킨타이어는 네 명의 학식있는 한국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들은 앞으로 있을 놀라운 수확의 첫 열매들이라고 확신한다.…한국인들은 중국인들보다 천성적으로 꾸밈이 없는 민족이고, 보다 종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면 곧바로 급속하게 퍼져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고 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같은 의주의 청년인 서상륜(徐相崙)이 동생 경조(景祚)와 함께 홍삼 장사를 하기 위해서 영구까지 오게 되었다. 그런데 서상륜은 그곳에서 심한 열병에 걸려 생명을 잃을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로스가 이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는 즉시 서상륜을 그곳 선교부가 경영하는 병원에 입원시키고 정성을 다해 간호해 주었다. 이에 감동을 받은 서상륜은 퇴원을 한 후 같은 해인 1879년에 로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4년 후 1883
년에는 김청송(金靑松)이 그 뒤를 이어 세례를 받아 이제 세례를 받은 젊은이는 모두 여섯 명으로 늘어났다. 이미 이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인들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1880년 존 로스의 동료 선교사 맥킨타이어는 한국인의 신앙공동체 형성에 대해 이렇게 보고했다.

“최근에 한국인들을 위한 저녁 집회를 조직했다. 그 모임은 우리 번역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주관하는데 자기네들 방에서 최소한 8명이 모이고 있다. 나도 늘 참석하지만 듣기만 한다. 나는 한국어를 단지 번역 수단으로만 이용해서 문자로만 알았지 번역인들과 대화할 땐 중국어를 썼다. 그러나 이처럼 소외되고 있으니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어떤 어려움이 있든 적어도 한국어로 가르치고 설교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결심이다. <지금은> 이 일에 제외되어 있지만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이런 집회를 내 자신이 인도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지난 10월까지 열두 달 동안 교육받은 한국인들은 30명이 넘는다.”고 하였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한국인 신앙공동체를 이끌었던 지도자가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인에 의한 한국교회가 이미 복음 전래 초기부터 실행에 옮겨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크고 빼놓을 수 없는 공헌은 역시 성경 번역에 있다 하겠다.

초창기의 성경 번역 과정은 한국인 번역자들이 선교사들과 함께 한문 성경을 읽고 나서 그것을 한글로 번역하면 선교사는 그것을 다시 헬라 원문과 대조하여 될 수 있는 대로 헬라 원문에 가깝게 다듬는 방식이었다. 1879년 존 로스는 안식년으로 본국에 머무는 동안 서방세계에 한국선교의 중요성을 환기시켜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로부터 새로 번역될 한글 성경의 출판에 필요한 비용을 보조받을 약속을 받아내었다. 안식년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온 로스는 1881년에 봉천에 인쇄소를 설치하여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 한글로 된 첫 개신교 문서인‘예수셩교문답’과‘예수셩교요령’을 그해 10월에 인쇄했고, 이어 성경 인쇄에 들어가 1882년 3월에 누가복음을 처음 인쇄하고, 5월에는 요한복음을 발행했다.

한글을 전혀 모르는 중국인 식자공으로는 한글 성경전서를 완간할 수 없어 한국인 식자공을 구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서간도 한인촌 출신 김청송이었다. 비록“그는 너무 둔하고 느려서 무슨 일이나 네 번 이상 가르쳐 주어야 비로소 깨달아 알았고 손이 너무 떠서 두 인쇄공이 3,000장을 인쇄하는 동안에 겨우 4페이지밖에 조판을 하지 못할”만큼 천성적으로 느렸지만“매우 성실한 사람이었고 또한 치밀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그 치밀함 때문에 인쇄되어 나오는 복음서를 자세히 읽게 되었고, 그 결과 마침내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던 것이다. 말씀으로 성경 번역 과정에 참여한 이들의 마음을 여신 하나님께서 다시 성경을 인쇄하는 과정에서 전혀 예기치 않게 말씀을 통해 한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누가복음 최종 원고가 완성되어 인쇄에 들어가려고 할 즈음 동지사 일행 중의 한 사람이 돌아가는 길에 봉천교회에 들렸다. 이때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그 원고의 교정을 부탁해 그가 원고를 서울로 가지고 가서 교정을 완료한 후에 다른 동지사편에 그것을 돌려보냈다. 이 사실은 1890년 로스가 이때를 회고하면서 누가복음이 출판되기 전 이미 동지사 일행에 의해 “번역원고가 한국의 수도에서 교정되었다.”고 밝히면서 알려졌다.

“심지어 누가복음이 출판되기 전 번역 원고가 해외 서울의 수도에서 수정되었으며, 이는 너무 많은 흥미를 자아내 한국의 왕이 중국의 황제에게 바칠 조공을 나르는 동지사에 딸려 이따금씩 중국에 오는 한 수행원이 이곳의 성경 번역 사업을 보기위해 들렀다. 이들의 방문은 점차 더욱 잦아졌고,그 젊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은 느리기 한이 없었던 그 식자공(김청송)과는
정확히 정반대 모델이었다. 그는 손놀림이 민첩했고, 눈치가 빨랐으며, 말과 사고와 행동이 영특했다. 그는 식자공으로 종사했으며,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그가 배운 지식을 가지고 더 잘 적응하리라고 여겨지는 한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자유를 얻었다. 몇 백 권의 복음서와 훨씬 더 많은 전도지를 가지고 그는 봉천에서 정 동쪽으로 약 4백 마일 떨어진 자신의 마을로 갔다. 그는 그 여행에 2주일이 걸렸고, 반년 만에 돌아와 보고하기를 그 책들을 팔았으며,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들을 읽었고, 그 중에 몇 사람은 내가(로스) 그들에게 세례를 주러 오기를 원했다고 했다.”

처음에 로스는 와서 세례를 달라는 말을 반신반의해 주목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더 많은 책을 공급받고 다른 마을로 가 반년 후 돌아와서는 정확히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이처럼 전혀 예기치 않은 사건과 사람들을 통해 성경 번역 사업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출판 후에도 성경 보급은 놀랍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성경 저자들로 하여금 오류 없이 기록하게 하신 성령께서 한글 성경의 번역과 보급에도 개입하시고 인도하셨음을 발견한다.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번역에 사용한 성경은 중국어 성경 문리, 헬라어 성경, KJV, ERV(English Revised Version) 등 네 종류의 성경이었다. 당시 번역이 진행된 곳이 만주 우장이었고, 이미 오래 전에 한문 성경이 출판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에 한문 성경을 주된 저본으로 사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번역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중국어 성경 외에 헬라어 성경과 앞서 언급한 두 권의 영어 성경을 사용했다. 한국인 조력자들이 한문 성경을 가지고 한글로 번역하면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헬라어 성경 및 영어 성경과 대조하여 수정하고 헬라어 성경사전 및주석을 참고하여 어휘의 통일을 기한 후 수정된 원고를 헬라어 성경과 대조하여 읽어 가면서 마지막 수정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1882년 3월에 누가복음을 처음 인쇄하고, 5월에는 요한복음을 발행한 데 이어서 1883년에는 재 교정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합본이 3,000권, 재 교정된 요한복음이 5,000권 발행되었고, 1884년에는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이, 1885년에는 로마인서, 고린도전후서와 갈라디아서, 에베소서가 출판되었고,
1887년에는 신약 전권이 완간되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성경 번역을 위해서 공식적인 모임을 시작한 것이 1887년이었음을 생각할 때, 이미 존 로스의 신약성경이 완간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앞선 일이었다.

로스와 맥킨타이어 역 한글 성경은 첫 작업치고는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상당한 수작이었다. 비록 로스 역이 평안도 사투리가 많아 서울 지역에서 사용하는 데는 불편이 많았지만, 고유명사를 헬라어 원문대로 표기한 것이나 또한 당시 이응찬이나 백홍준이 모두 의주 출신으로 상업에 종사하던 몰락 양반 가문이어서 한학에 일가견을 갖고 있었고, 한학이 훨씬 더 쉽고 지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성경번역을 하는 데 한글과 한문을 혼용하지도 않고 아예 순 한글로 번역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성경 번역에 기여한 이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권서인(勸書人)이 되어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들이 만든 성서를 보급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에는 정식 선교사가 들어오기 이전에 한글로 성경이 번역되어 한국인에 의한 복음 전파가 놀랍게 진행되었다.

한국교회사(18)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2)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1) 권서인들의 활동

외국의 선교 과정을 보면 선교사가 피선교국에 들어가서 그 나라 글과 말을 배워가지고 성경을 번역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선교 개시 이후 여러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그 나라 성경을 갖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복음이 전래되기 이전에 이미 우리나라 청년들이 외국에
가서 복음을 받고 선교사와 합작하여 성경을 번역하였으며, 외국 선교사가 정식으로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이미 성경이 한국에 반입되었으며, 선교 이전에 한국인에 의해 교회가 먼저 세워지는, 기독교 역사상에 보기 드문 선례를 갖고 있다.

귀하게 만들어진 우리말 성경은 권서사업을 통해 한국에 반입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일반적으로 성서공회의 권서사업(성경 반포)의 목적은 사람에게 단순히 성경을 배달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올바로 사용하여 성경의 지식을 얻도록 하는데 있다. 이를 위해 이용한 부속기관은 성경 보급소, 권서인, 성경 교사 등이었다. 성경 보급소는 성경의 보관 창고, 판매 서점 및 설치된 지방의 전도 중심지 역할을 했다. 권서인(매서인)은 성경 반포의 주역이자, 전도인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던 전도의 선구자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성경 교사 제도는 채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

① 한문서적의 도입

1879년 말, 2명의 개종자와 십여 명의 구도자가 의주에 거하게 되자, 맥킨타이어는 기독교서적을 요구하는 그들의 굶주린 상태를 외면할 수 없어 서적 운반을 자청하는 한 한국상인을 통해 과학서적을 포함한 한문 성경과 전도책자 한 꾸러미를 보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짐은 국경에서 압수되었고, 편지가 개봉되어 의주의 백홍준은 3개월간 투옥되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닌 까닭에 풀려나기는 했으나 거의 모든 재산을 잃은 백홍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자신을 위해 돌아가신 주를 위해서 핍박받는 것을 즐거워한다.”는 신앙고백을 맥킨타이어에게 하였다.

이 최초의 박해 사건으로 인해 그 후 2년간 수세 청원자가 없었지만,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 초기 개종자들의 신앙은 더욱 견고해져 갔으며, 1880년에는 30여 명이, 이듬해에는 100여 명의 한국인들이 우장의 맥킨타이어를 찾아가서 성경공부반에 참석, 일주일까지 머물다가 돌아갔다.

② 김청송의 서간도 한인촌 전도

1882년 3월, 로스는 일단 한글성경의 반포가 가능한 만주 한인촌을 대상으로 전도하기로 하고, 김청송을‘최로로 완성된 복음서를 가진 전도자’겸 최초의 권서인으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즙안현 이양자를 중심으로 수천 권의 복음서와 소책자를 팔았다. 그의 전도로 많은 세례 지원자가 한인 계곡에 생기게 되었다. 많은 결신자를 얻게 된 김청송은 심양(瀋陽: 봉천)으로 돌아와 로스 목사에게 즙안 전도 결과를 보고하고, 즙안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주는 것이 좋겠다고 간청했다. 1884년 여름 어느 날, 김청송으로부터 성경을 받아 읽고 은혜를 받은 청년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더욱 더 잘 알기 위해 봉천까지 떼를 지어 왔다. 이들 중의 더러는
본국에서 임오군란 때 변경으로 좌천된 고급 군인들이 즙안현으로 망명해 온 이들이었다. 그해 가을에 로스 목사는 웹스터(Webster) 목사와 함께 즙안에 가서 75인에게 세례를 주었고, 다음해 다시 25인에게 세례를 주어 100여 명의 세례 교인이 생긴 큰 교회로 발전되었다.

③ 미 제본(未製本) 복음서의 밀반입

만주에서는 성경을 반포하는 것이 가능하였으나, 당시에 조선은 외국종교 서적의 유입을 엄금하는지라, 어떻게 이 신간된 복음을 조선에 수입할까 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당시 의주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성경 번역이 진행되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한글)성경에 대한 강렬한 요구가 있었고, 또한 백홍준 등의 전도 활동이 잘 수용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개종자들과 그의 친구들이 무보수로 성경을 전달하는 일을 자청하였고, 별 사고 없이 수백 권의 복음서가 의주로 흘러들어갔다.

그러나 로스로부터 몇 십 권의 복음서와 기독교 서적을 가져가던 한 개종자가 사고를 당해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성경 반입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한 가지 묘안을 찾아내게 되었는데, 그것이 미 제본 된 복음서 낱장을 밀반입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미 제본 된 복음서 낱장이 ‘편견과 두려움이 세워 놓은 장벽’을 넘어, 창문 창호지로 장식됨으로써 집을 드나드는 자들에게 읽히게 되었는데, 성경 종이가 한지였기에 구멍 난 곳의 문종이로 적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실 그 복음서 낱장은 공허한 조선인의 가슴에 풀칠되어 붙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국교회사(19)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2)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1) 권서인들의 활동

④ 백홍준, 이성하의 의주 전도

백홍준은 1879년 수세 후 의주에 거주하면서 최초의 전도인으로서 복음을 은밀히 전파하였으며, 이듬해의 투옥사건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믿음을 지켰다. 그는 자신과 친구들이 우장과 봉천에서 가져온 한문 및 한글 복음서, 소책자들을 의주는 물론 구성, 삭주, 강계 등지에 반포함으로써 예수 믿는 사람들이 곳곳에 생기게 하였다.

한편 이성하 역시 의주 전도인으로 활동하였다. 서상륜, 서경조의 글에 의하면 이성하는 초기 번역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그는 번역보다는 전도인으로 활약했다. 그는 다량의 한글 복음서를 책문을 거쳐 압록강 연안의 구련성까지는 가져왔으나 삼엄한 국경 경비 때문에 그곳 중국인 여관에 쌓아두었다. 그가 외출을 한 후에 의심을 품은 여관집 주인이 그의 짐을 풀어보고는 금서인 것을 알고 이를 압록강에 던져 떠내려 보냈고, 일부는 소각해 버리고 만 사건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로스는“성경이 던져진 물은 한국인들에게 생명의 물이 될 것이고, (성경이 탄)재는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할 밑거름이 될 것이다.”라고 술회한 바 있는데, 뒷날 그의 예언이 이루어져 압록강 일대에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이성하는 성경 유입에 실패한 후 병을 얻어 전도인 직을 사임한 듯하다.

이성하가 성경반입에 실패한 후에 백홍준이 재차 시도하였다. 그는 변경에 도착하여 정세를 살펴보니, 성경을 반입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한 가지 아이디어를 내었다. 그는 곧 시장에 나가 별 것 아닌 책들을 여러 권 샀다. 그리고 성경을 한 장씩 뜯어내어 돌돌 말아 긴 끝을 만들어 시장에서 사온 책을 묶었다. 그리고는 이 책을 짊어지고 강을 건넜다. 관리는 책만 조사하고 별 것 아니므로 통과시켜 주었다. 집에 돌아온 백홍준은 책은 버리고, 책을 묶었던 끈을 풀어 다시 성경을 만들어 전도를 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의주 청년들이 이곳에서 열심히 전도하여 신자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백홍준이 요리문답반을 운영하면서 더욱 신자들이 증가하여, 1885년에는 약 18명의 신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예배처가 생겨났다.

백홍준은 맥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로스 목사의 권서인으로 본국에 들어와 전도하다가 언더우드 목사에게 전도사로 임명을 받아 사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역을 하던 중 백홍준은 2년간 봉천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그 이유는 만주에 있는 선교사와 내통한다는 죄명이었다. 백홍준이 내통했다는 선교사는 로스 목사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는 1894년 봉천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백홍준의 옥사를 두고 차재명은 그가 편찬한「조선예수교 장로회사기」에서 자연사한 것이라 기술하고 있으며, 김해연은「한국기독교회사」에서 백홍준의 죽음을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가 된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⑤ 서상륜의 서울 권서 활동

서상륜은 1882년 4월에 로스로부터 세례를 받고 6개월간 봉천에서 성경 사업을 돕다가 10월 6일 권서인으로 의주를 향해 출발하였다.

서상륜의 성경 밀반입 행로에 대해 여러 책은 그가 국경에서 검거 투옥되었다가 친척 관리의 도움으로 밤에 탈출하여 의주에 도착, 전도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과 다른 듯하다. 서상륜은 국경 검문소에서 성경을 압수당했지만, 첫 밀반입이라 아무 일 없이 의주로 돌아왔는데, 며칠 후 검사관이 서상륜을 찾아와서 그 책들을 읽어본 결과 좋은 것들이므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하면서 여러 권의 책을 옷속에서 꺼내놓았던 것이다. 서상륜은 이 우호적인 검사관으로부터 전해받은 성경과 소책자로 의주에서 전도하다가 경성(京城)에 잠도(潛到)하여 복음전포(福音傳布)를 경영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이 없어 곤란을 겪게 되었고, 이에 로스는 1883년 봄에 김청송을 통하여 수백 권의 성경을 전달했다.

서상륜은 김청송으로부터 전해받은 복음서를 서울에서 장사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나눠주면서 은밀히 전도하였다. 그리고 김청송도 평양 권서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 봉천으로 돌아갔는데, 이는 뒷날 평양교회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로스는 이보다 앞선 1883년 봄에 봉천을 지나가는 조선 북경 사절단에게 성경을 전달하려고 복음서 200권을 따로 준비해 두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883년 8월에는 6천 권의 복음서가 거의 배포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에 고무된 로스는 이듬해 1884년 봄 묄렌도르프 부인의 주선으로 인천 해관(海關)을 통해 6천여 권의 성경을 서상륜에게 전달한 듯하다

 

 최초의 견미 사절단
1882년 한미수호조약의 체결로 비로소 기독교 선교의 길이 열리게 된 셈이다. 1883년 민영익(앞줄 가운데)을 단장으로

한 견미사절단장으로 한 견미사절단이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미감리회의 가우쳐와 만나게 되어 한국선교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북경 북천주당
중국 북경에 있는 북천주당은 조선사신들의 북경방문시 꼭 들려보는 구경거리의 하나였다.

바로 이곳을 통해 많은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


천진암터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로 초기 서학(천주교)의 신앙화의 주역이었던

이벽,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정악종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우촌리 소재.

 

 

 

한국교회사(10)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1) 중국을 통한 한국 선교의 시도

박연(벨트브레), 하멜, 영국 해군대령 맥스웰과 홀이 상업과 정치적인 목적으로 조선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었다면 네덜란드 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입국한 칼 귀츨라프(Karl August Friedrich Gutzlaff, 1803-1851) 선교사, 런던 선교회 소속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 그리고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은 선교를 목적으로 입국하거나 한국선교를 측면에서 지원한 이들이었다.

독일에서 발흥한 경건주의운동의 저변 확대, 요한 웨슬리 형제와 조지 휫필드를 통한 영국의 부흥운동 그리고 1740년대 조나단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국의 1, 2차 대각성 운동은 교회의 영적인 생명력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고, 이와 같은 영적인 생명력은 선교열을 가속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19세기 중엽이 되었을 때, 세계는 근대화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여전히 은둔의 나라로 세계와의 단절 속에서 변화와 개혁을 거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조선에 대한 관심은 청, 러시아, 일본 등 주변 국가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당시 제국주의 정책의 붐
을 타고 동양과의 통상확대를 통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면서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던 유럽과 북미의 강대국들도 조선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런 두 가지 이유, 즉 선교와 상업의 목적으로 동양에 대한 유럽과 북미인들의 관심은 더욱 고조되었다. 지극히 상반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치 불가분의 관계처럼 병행되어 진행되었던 것이다. 선교를 추진하고 타진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자국의 힘을 의지하여 선교사역을 극대화하려고 했다. 인도의 동인도회사를 거점으로 한 영국선교나 그 이전에 있었던 포르투갈의 남미 선교는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다행히 한국선교는 비교적 순수한 목적으로 복음이 전래된 몇 안 되는 국가 가운데 하나였다.

(1) 귀츨라프(Karl A. F. Gutzlaff)의 내한

① 귀츨라프의 선교준비

개신교의 동양선교는 18세기 말에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영국인 윌리엄 케리(William Carey)의 인도선교(1793년)를 비롯하여, 모리슨(Robert Morrison, 馬禮遜)의 중국선교(1807년), 미국인 저드슨(Adoniram Judson)의 버마선교(1812년)가 시작된 것은 이 무렵이다. 이어서 스코틀랜드 출
신의 밀른(William Milne, 米燐)이 1813년에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마카오에 도착하였고, 영국 회중교회의 중국선교사로서 매드허스트(Walter Henry Medhurst, 麥都思)가 같은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1817년에 말래카에 도착, 모리슨과 밀른을 도와 출판선교사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딘 선교사는 의사이며, 목사였던 칼 귀츨라프이다. 그는 1803년 7월 독일 포메라니아(Pomerania) 지방의 피리쯔(Pyriz)에서 유태계 독일인으로 태어났다. 그는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발상지였던 할레(Halle)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로 안수받았다. 꿈에 그리던 경건주의의 중심지인 할레대학에서 신학 교육을 받는 특권을 얻는 귀츨라프는 학업을 마친 후 베를린에 있는 선교사 양성소(the Missionary Institute)에서 국비로 선교사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여기서 그는 여섯 개 언어를 동시에 공부했다. 이와 같은 훈련 과정을 통해 그는 학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장차 선교사로서의 자격을 충실히 갖춘 뜨거운 신앙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일찍이 선교사가 될 꿈을 키우고 있었는데, 영국 여행 중에 영국 선교사로서 중국 선교의 선구자였던 모리슨(Robert Morrison)을 만나, 중국선교 보고를 듣게 된것이 계기가 되어 중국 선교사가 될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그는 1827년 1월 네덜란드선교회(the Netherlands Missionary Society)의 파송을 받고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인 동남아의 바타비아(Batavia)에 도착했다. 1828년 8월 23일 시암, 방콕으로 선교의 거점을 옮긴 후 그의 선교사역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귀츨라프와 그의 아내는 시암어로 많은 작품을 번역하고 Cochin-Chinese 사전을 편찬하고 신약성경을 다섯 개의 방언으로 번역하였고, 난파한 일본 선박의 한 선원과 친숙해져, 그와 협력해서 1838년에는 일본어로 요한복음을 번역 간행할 정도로 천부적인 어학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1827년부터 네덜란드선교회와의 관계를 끊은 귀츨라프는 영국 회중교회 선교사인 월터 매드허스트의 제안에 따라 태국선교를 두 차례나 시도해 어느 정도 열매를 거두고 4년 뒤인 1831년에 원래 자신이 바라던 선교지인 중국으로 옮겨 갔다.

1831년 그는 요동반도를 거쳐 마카오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선교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모리슨과 합류하였다. 귀츨라프는 그
가 마카오에 도착했던 1831년 6월에 중국 동해안과 만주를 거쳐 오는 약 6개월에 이르는 전도여행을 다녀왔다. 그는 이 여행에서 많은 성과를 올리고 선교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귀츨라프가 한국에 오게 된 것도 이 선교여행에서의 성과 때문이었다.

한국교회사(11)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1) 중국을 통한 한국 선교의 시도

(1) 귀츨라프(Karl A. F. Gutzlaff)

② 귀츨라프의 내한

1831년 선교여행 이후에 한국 선교를 모색하며 본격적인 한국 방문을 계획하고 있을 때, 마침 인도를 식민지화하고 중국까지 교역을 확대한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조선, 일본, 오키나와, 대만까지 교역을 확대하기 위해 1천 톤급의 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 무역선을 이끌고 항해할 때 그 배에‘통역관’으로 동승할 수 있었다. 다행히 로드 암허스트 호의 선장 휴 린세이(Hugh H. Lindsay)는 중국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실한 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귀츨라프에게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에도 귀츨라프에게 통역, 선의(船醫), 선목(船牧)을 제의해 이 역사적인 한국 선교여행이 상업적인 목적을 띤 상선을 타고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 이 여행을 통해 귀츨라프는“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서구에서 온 첫 개신교 선교사”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비록 그가 통역관으로 승선하긴 했으나 그의 입국 목적은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는 황해도 서해안 장산곶 근해와 백령군도의 어느 한 섬에 정박하였고, 지방 관헌을 통하여 정부 당국과 접촉을 시도하였다고 하나, 그가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에 대하여 역사는 별로 기록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다만 1832년 7월 17일, 충남 장항 앞 창선도에 도착한 이후 기록한 일기가 남아 있어 그의 활동을 잠시 엿볼 수 있을 뿐이며, 이 일에 비추어 황해도에서도 이와비슷한 상황이 전개되었으리라고 추측하는 것 외에는 별로 큰 진전이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7월 17일, 강한 바람에 밀려 한국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나님이 자비로운 섭리로 중국 해안을 항해하는 동안 많은 위험 속에서도 우리를 보호하셨으며, 오! 그로 인해 우리는 진실로 감사드린다.”

“7월 17일, 고깃배를 타고 있는 남루한 차림의 두 어부를
만났고, 그 중 한 노인에게 성경과 사자표 단추를 주었더니 매
우 좋아하였다.”

주민과 접촉하고 그들에게 복음서를 주려고 했으나 그 중 한 사람이 책을 받고는“불가”(不可, pulga)라고 소리치며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귀츨라프는 자신의 일기에서 그 말을“불질러라”(fire), “그것을 불태워버려라”(burn it)라고 잘못 해석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가 일기에서 밝힌 대로 그곳에서는 “직접 복음서를 주는 기회는 매우 드물었다.”하지만 귀츨라
프는 이들과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해 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한국에 대한 기록들이 하나같이 외국인들에 대해 무조건 폐쇄적이고 닫혀 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이것은 정확한 평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귀츨라프는 비록 한국인들이 외국인에 대해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해서 적대적인 것만도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가 그들에게 준 복음서 선물에 대해 보답할 수 없어서 그들은 대단히 감사하며 우리에게 잎담배 몇 잎을 주었는데, 우리는 겸손하게 그것들을 받았다. 그 후 어디서든지 조선인을 혼자서 만나면 이 어부들처럼 인정에 넘쳤으며 은혜를 베풀었다.”

장산을 떠나 남쪽으로 항해를 계속하여 7월 23일에 안면도 근해에 이르러 안개가 짙게 깔린 가운데 한 섬에 정박했다. 그날 어부 몇 사람이 와서 귀츨라프 일행을 초청, 소금에 절인 마른 물고기와 신 액체(막걸리)를 융숭하게 대접했다. 7월 24일 사람들이 갑판에 올라와 문안하며 현재 배가 정박한 곳은 위험한 곳이기 때문에 강경이라는 항만으로 가면 안전하고 또 고관을 만나 무역 상담을 하며, 식량을 구할 수 있다고 조언해주었다.

“7월 25일, 한국 관원의 요청으로 고대도 안항으로 옮겨 정박하였으며, 섬 사람들은 신기한 서양 배와 서양 사람들을 구경하려고 모여들었는데, 나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아니하고 성경과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다.”

고관과 만난 일행은 왕에게 헌상할 서신과 선물 준비를 서둘렀다. 성경도 선물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가능한 곧 왕에게 서신과 선물을 전달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들을 포장하는 데 한나절을 넘게 시간을 보냈다. 린세이 선장은 내가 갖고 있는 성경 한 질과 전도문서 전부를 함께 국왕에게 선물하라고 아주 정중하게 요청했다.…두 교섭위원인 텡노와 양치를 대동하고 우리는 선물을 갖고 출발했다. 그 선물은 유리그릇, 옥양목, 낙타모직물, 담요 등과 한문으로 쓴 서한인데 붉은 비단으로 싼 것이다.”

한양에서 회신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귀츨라프 일행은 정부 관리의 감시가 없는 해안의 해변에 상륙하여 주민들과 접촉하며 자신들이 가지고 온 서적, 의약품과 성경을 나누어주었다. “우리는 그리스도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를 그들에게 설명하면서 그들에게 인류의 구세주를 자주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다.”백낙준 박사가 지적했고 후에 제임스 그레이슨(James Huntly Grayson)이 한국의 초기 불교와 기독교(Early Buddhism and Christianity in Korea)에서 진술한대로, 이 첫 개신교 선교사는 한국의 천주교와 달리 처음부터 복음을 공유하는 일, 곧 성경을 반포하는 일에 일차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한국교회사(12)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1) 중국을 통한 한국 선교의 시도

(1) 귀츨라프(Karl A. F. Gutzlaff)

③ 귀츨라프의 성경 반포

그의 일기에는 이 나라에 복음을 전하려는 그의 염원이 군데군데 짙게 나타나 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서를 건네주기를 원했고, 선물과 함께 성경을 동봉하여 이 나라를 다스리는 왕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귀츨라프 일행은 7월 30일,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포도 재배법과 포도에서 미주(美酒)를 얻는 방법과 자신들이 가지고 온 감자 씨를 주민들에게 나눠주면서 파종법과 재배법까지 가르쳐 주었다. 처음에는 외국 작물을 재배하는 것이 국법에 금지되었다며 반대하던 주민들도 새로운 농산물로 재배 농업의 혁신을 이루어야 이윤을 얻을수 있다는 설명을 듣고 말없이 승낙했다.

귀츨라프 일행은 이들 중 몇이라도 복음을 받고 구원받은 백성이 되기를 희망하며 그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그 기회가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고대도에 암허스트 호가 도착하자 마량진에서 관리들이 입국 목적과 배를 시찰하기 위해 귀츨라프가 탄 배에 승선했다가 그만 일기불순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밤을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귀츨라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배에 올라온 홍주목사 이민회의 서생에게 주기도문을 한문으로 적어 주고 그 옆에 한글로 토를 달게 하여 주기도문을 번역한 것이다. 그가 번역한 주기도문 기록은 찾을 길이 없지만, 이것은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확인한 가장 훌륭한 시도 가운데 하나였다.

귀츨라프는 우리 민족에게 생명의 양식인 성경과 육신의 양식인 감자까지 주고 간 고마운 선교사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라고 김인수는 말한다.

1832년 8월 7일 서울에서 통역관을 대동하고 특사가 내려왔는데, 그는 조선은 중국 황제의 허락 없이는 어떤 외국이나 외국인과 통상이나 교역을 할 수 없으니, 즉시 물러가라고 엄하게 말하였다. 또한 선장이 국왕에게 보낸 선물도 성경과 함께 되돌려 보내었다.

그러나 실상은 지방 관리가 통상과 선교 사업을 요청하는 귀츨라프 일행의 청원서와 선물을 아예 중앙정부에 전달도 하지 않고 되돌려 준 것이었다. 린세이와 귀츨라프 일행은 그것들을 되돌려 받기를 거부했다.

왜 한국 지방 관리들이 선물과 서신을 한양의 국왕에게 전달하지 않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미 16년 전 첨사가 바실 홀과 맥스웰 대령과 접촉한 뒤 불이익을 당했던 사례를 잘 알고 있던 지방 관리들에게는 또다시 외국인들과 접촉하고 그들의 선물과 서신을 조정에 전달하는 것이 큰 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8월 11일 어렵게 조선으로부터 양식을 공급받은 이들은 영국 선박이 이곳에 오면 양식을 공급해 줄 것과 서해안에 배가 난파당하면 북경으로 되돌려 보내 달라고 청원했고, 관리는 두 가지 모두 동의했다.

귀츨라프는 더 이상 그곳에 체류하며 선교를 강행할 수 없어 훗날을 기약하며“아주 작은 한 알의 겨자씨와 같은 신앙”을 심어두고, 정들었던 주민들과 석별의 정도 나누지 못하고 섬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언젠가 자신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아름다운 결실이 되어 거둘 때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고대도를 떠날 수 있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안에 그들에게 은혜가 임할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이것을 고대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교리를 전파함으로 그 날을 앞당기려고 매우 간절히 열망했던 것이다.…고대도의 관리들과 많은 서민들이 성경을 받았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것들이 미약한 시작일지라도 하나님이 축복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더 좋은 때가 한국에 임할 것임을 희망하자.”라고 회고하였다.

귀츨라프 일행은 비록 자신들의 청원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이 백성들에게 성경과 근대 농업기술, 외국과의 교류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면서 한국선교에 대한 비전을 간직한 채 기수를 남으로 돌렸다. 며칠 후 제주도를 발견한 일행은 그곳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곳을 선교 기지로 만들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귀츨라프의 소원은 19세기가 지나기 전에 은둔의 나라 조선에서 세계 선교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놀랍게 응답되었다. 미개한 나라, 역사의 무대에 가려진 이 나라를 복음화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전혀 예기치 않은 때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동원하셔서 한국선교를 타진하시고, 복음의 씨앗을 이 나라의 작디작은 섬 고대도에 뿌리셨던 것이다. 그 결과 1882년 그리피스가 그의 저서‘조선: 은둔의 나라’(Korea: The Hermit Nation)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비록 지금은 미개한 민족이지만, 장차 동방의 복음의 빛이 되어 동방에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최초의 나라가 되기를 희망했던 그 소원은 머지않아 역사 속에서 현실로 구현될 수 있었다.

1834년 모리슨이 세상을 떠난 후 귀츨라프는 중국주재 영국 대사관의 통역 겸 서기로 임명받았고, 마지막에는 무역 감독으로 임명받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직책을 갖고 있었다. 중국인, 중국 역사, 언어, 그리고 그들의 관습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춘 귀츨라프는 영국과 중국 사이에 벌어진 아편 전쟁 동안 1842년 난징에서 평화협상이 진행될 때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844년 그는 본국 전도사 양성소를 창립해 48명의 사역자들을 훈련시켜 파송하기도 했고, 1849년에는 영국, 독일 그리고 다른 유럽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강연을 통해 중국선교의 비전을 심어 주었다. 그는 1834년 『중국사개관』, 『칼 귀츨라프 항해기』를 저술하고, 1838년에는 중국
개항을, 1833-1837년에는『이스턴 엔 웨스턴 이그재미너』(The Eastern and Western Examiner)지를 간행했으며, 그 외에도 정기 간행물『차이니스 리파지토리』(Chinese Repository), 중국어 월간지 등을 간행하고 수많은 책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1851년 중국으로 돌아와 같은 해 8월 9일, 홍콩 빅토리아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극동의 비그리스도인들에게 파송된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인 귀츨라프는 많은 저술과 발자취를 남겨 극동 선교 역사에 소중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고난과 개척의 25년간의 선교사역을 마감했다.

한국교회사(13)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1) 중국을 통한 한국 선교의 시도

(2)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①

귀츨라프가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한 지 34년 후인 1866년, 영국의 한 젊은이가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했다. 그 젊은이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 崔蘭軒) 선교사였다.

그는 1840년 9월 영국 웨일즈(Wales) 지방 라야다(Rhayada)에서 회중 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59년 런던대학교 뉴칼리지(New College, University of London)에서 대학과정과 신학과정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가 철저한 신앙과 선교의 사명감으로 고향인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은 1863년 6월 4일이었다. 그는 목회보다는 선교에 뜻을
두고 부인과 함께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목사 안수를 받던 해에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에 도착하여 상해를 거점으로 막 선교를 시작하려는 바로 그때, 불행하게도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이 낯선 타향에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864년 4월 5일자 런던선교회에 보낸 그의 첫 편지는 선교 보고서가 아닌 아내의 사망 보고서가 되고 말았다.

“내가 영국을 떠날 때에는 여기서 처음 쓰는 편지가 이런 것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내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이 지난 달(3월) 24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더 글을 써 내려가지 못 하겠습니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다가, 현지 런던선교회 책임자들과도 뜻이 맞지 않아 토마스는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산동성 지푸로 가서 세관에 취직하여 일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교사로 온 토마스를 방관하실 수는 없었다. 토마스는 지푸에서 세관 통역으로 일하고 있는 동안 그곳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의 충고와 격려로 다시 선교에 대한 비전을 재충전 할 수 있었다. 그가 한국 선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목선을 타고 산동성에 온 두 명의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이들과 먼저 접촉한 사람은 윌리엄슨이었다.

1865년 가을, 한국에서 온 목선 한 쌍이 지푸에 나타났는데 그 안에 사형될 위험을 무릅쓰고 산동에까지 온 두 명의 한국천주교인들이 숨어 있었다. 이들이 자신들의 몸에 염주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과 메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윌리엄슨은 이들이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으나 성경지식이 아주 없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놀랐다. 이들을 통해 조선의 종교적인 형편과 국내 실정에 대한 정보를 전해들은 토마스는 한국 선교를 추진할 것을 다짐하고 기회를 찾고 있었다.

마침 1865년 9월 4일 조선으로 향하는 배가 있어서 토마스는 두 명의 한국천주교인을 동반하고 윌리엄슨이 전해 준 상당량의 한문 성경들을 지니고 스코틀랜드 국립성서공회 소속 선교사로서 서해안으로 떠났다.

1865년 9월 13일 항해도 연안의 창린도에 도착한 토마스는 12월까지 약 두 달 반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한국어를 배우는 한편 가지고 온 성경을 섬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두 달 반의 시간은 단순한 체류가 아니라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기간이었고, 그는 그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후 서울을 향해 떠났지만, 태풍으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만주를 거쳐 1866년 1월 초에는 북경으로 되돌아갔다. 거기서 그는 런던선교회로부터 그의 새 임지로 북경이 정해졌음을 통고받았다.

그는 북경에 도착하는 즉시 런던선교회 총무 티드맨 박사에게 다음과 같은 한국 선교 보고서를 보냈다.

“우리는 한 작은 중국 목선을 타고 9월 4일 지푸를 떠났고 한국 해안에 도착한 날은 13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해안에서 2개월 반 동안 머물렀습니다. 나는 한국 천주교인의 도움으로 그 불쌍한 백성들에게 복음의 가장 귀중한 진리 중 얼마를 가르치기에 넉넉한 한국말을 배워 알고 있었습니다. 그 백성으로 말하면 대체로 외국인에게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으나, 나는 한국어로 이야기하며 그들에게 책 한 두 권씩을 받도록 권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런 책을 받을 때에는 사형을 당하든지 아니면 벌금형이나 투옥될 것을 각오하고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이런 책을 얼마나 읽기를 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토마스는 1866년 4월까지 북경에 체재하면서 조선의 동지사 일행을 만나 친숙한 교제를 나누었다. 이 접촉을 통해 그는 지난해 한국에서 전했던 성경이 평양에까지 흘러들어 갔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확인은 한국에 대한 그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다. 기회만 있으면 한국에 달려가려고 하였다. 프랑스 신부에 대한 학살을 구실로 프랑스 함대의 원정이 논의되었을 때 토마스는 통역으로 동행할 것을 제의받았다. 그러나 로즈 제독이 거느린 프랑스 함대가 인도지나 방면의 긴급사태에 투입되었으므로 그의 한국행은 무기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천진을 거쳐 지푸에 와서 이 사실을 알게 된 토마스는 실망이 컸다. 그러나 그는 우연히 제너럴 셔먼호가 한국을 향해 떠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 배를 타고 한국 선교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한국교회사(14)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1) 중국을 통한 한국 선교의 시도

(2)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②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는 미국 프레스톤 소유로서, 중무장한 일종의 상선이었다. 셔먼호에는 배 소유주 미국인 프레스톤이 영국의 메도우 상사와 함께 조선과의 통상의 길을트기 위해 선적한 면포, 유리그릇, 철판, 자명종 등 많은 상품과 선장 미국인 페이지(Page), 영국인 선원 호가쓰(George Hogarth), 항해사 미국인 윌슨(Wilson) 그리고 토마스 등 5명의 서양인과 청나라와 말레이시아인 19명의 동양인이 승선하고 있었다.

1866년 8월 19일 셔먼호가 송산리 앞바다를 떠나 황주 송림리 연봉포로 올라오자 정부는 급보를 전해 듣고“요새 이상한 배가 우리 바다에”많이 나타나니“행동이 수상한 무리를 살피고 국방을 엄히 하라”는 특명을 하달했다. 황주 목사의 입국 불가 전갈에도 불구하고 8월 21일 밤 토마스와 그의 일행을 태운 셔먼호는 드디어 대동강 입구, 용강군 다미면 상칠리 주영포를 거쳐, 25일 평양을 향해 강 상류로 계속하여 거슬러 올라와 평양부 초리방 일리 신장포(草里坊一里新場浦)에 닻을 내렸다.

외국 상선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평양 감사 박규수는 급히 중군 이현익, 군관 방익진, 평양부 서윤, 신태정을 파송해 상선의 입국경위와 정황을 알아보도록 보냈다. 토마스는 입국의 목적이 통상과 선교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자신들은 천주교가 아니라 야소교(耶蘇敎) 신자들이라고 전해 주었다. 왕조실록에 있는 대로 토마스는 문정관에게“백서에
덕이 되고 인성(人性)에 선이 되는 진도(眞道)가 야소교(耶蘇敎)에 있다”는 사실을 누누이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을 국책으로 삼고 있는 터였기 때문에 문정관은 그들에게 외국과의 무역은 금지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탐문을 통해 한국 측은 이 배가 산동 반도를 떠나 백령도를 거쳐 평양으로 가고 있다는 것과 통상 및 야소교 전파를 목적하고 있음도 알았다. 그러나 제너럴 셔먼호가 대포와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는 것은 한국 관민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처음에 양식과 땔감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친절을 보이던 한국 측도, 중군 이현익을 억류하고 강압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하자, 강변의 병졸들과 성민들은 소리를 지르며 돌을 던지고 활과 화승포를 쏘기 시작하였다. 이에 셔먼호에서도 위협을 느껴 병졸들과 성민들을 향해 소총과 대포를 쏘기 시작하였다. 이런 와중에 홍수로 불었던 대동강 물이 줄면서 셔먼호가 좌초되어 움직일 수가 없게 되자, 상류에서 병졸들은 작은 배들을 여러 척 연결하고 그 위에 나무를 쌓아 놓고 거기에 불을 붙여 떠내려 보내자 이 불타는 작은 배들이 떠내려가 셔먼호에 닿아 배가 불타기 시작하였다.

배가 불타기 시작하자, 선원들은 강으로 뛰어 내려 강변으로 헤엄쳐 올라오게 되었고, 이때 대기하고 있던 병졸들은 뭍에 오르는 선원들을 닥치는 대로 칼로 쳐 죽였다. 토마스 목사도 더이상 배에 있을 수 없어서 성경 몇 권을 품에 품고 강으로 뛰어내려 헤엄쳐 나왔다. 헤엄쳐 나온 토마스 목사를 병졸 박춘권(朴春權)이 칼로 쳐 죽임으로써 그는 한국에서 순교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개신교 성직자가 되었다. 토마스 목사는 자기를 죽이려는 박춘권에게 성경 한 권을 주었는데, 박춘권은 처음에는 받지 않았다가 되돌아갈 때 이것을 집으로 가지고 갔다. 그는 후에 예수를 믿고 신자가 되었으며, 안주(安州)교회의 영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성경을 뜯어 벽지로 썼던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朴永植)의 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되었다.

박춘권의 조카 이영태도 예수를 믿고 미국남장로교 선교사 레널즈(William Reynolds)의 조사가 되었고, 한국인 성서번역위원의 한 사람으로 큰 공헌을 하였다.

그 뿐 아니라 장사포에서 성서를 받은 소년 홍신길, 석정호에서 성서를 받은 김영섭과 김종권, 만경대에서 성서를 받은 최치량 등도 후에 강서와 평양 판동교회의 창설자들이 되었다.

토마스 선교사가 칼을 맞고 개신교 목사로서 이 땅에 최초의 순교의 피를 흘린 것이 1866년 9월 2일로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는 이렇게 숨져 갔지만 그가 전해 준 복음은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고, 그의 순교의 피가 뿌려진 대동강 물을 마시고 산 많은 평양 성민들이 예수를 믿어 평양은 한국교회의 중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을 듣게 되었다.

이는“순교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한 터툴리안의 말이 한국교회사에도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볼 수 있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1927년 5월 8일,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토마스가 순교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대동강의 쑥섬에 모여 기념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1933년 9월 14일에는 기념 예배당이 준공되었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는 한국교회의 보이지 않는 이정표가 되었다. 그의 순교적 신앙은 후대의 수많은 선교사들의 모델이 되었고, 그의 순교정신은 한국교회 속에 소중히 간직되어 내려와 주기철, 손양원 등 수많은 사람들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순교를 각오하면서까지 진리를 지킬 수 있게 만든 신앙적 지주가 되었다. 또한 그의 죽음을 통하여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과 선교회들은 한국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국교회사(6)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1. 서양종교 및 문화와의 접촉

5) 한국 땅을 밟았던 외국인 평신도들을 통한 개신교와의 접촉

(3) 바실 홀과 머리 맥스웰

하멜과 견줄 수 있을 만큼, 은둔의 나라 조선을 전 세계에 소개하는 데 공헌한 사람은 영국 해군 머리 맥스웰(Murray Maxwell) 대령과 리라(Lyra) 호의 바실 홀(Basil Hall) 대령이었다. 이들은 1816년 9월 서해안을 항해하고 돌아가 바실 홀의 조선 항해기와 맥레오드(John McLeod)의 조선 항해기를 저술하여 서양세계에 조선을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또한 이들은 처음으로 조선인들에게 성경을 건네주었고, 후에 귀츨라프 일행이 서해안을 탐사할 수 있도록 서해안 해도를 작성했으며, 조선 항해기를 저술하여 조선을 서양에 알리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영국은 동양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었다. 영국이 1793년 매카티(Macarthey) 경을 수석으로 한 사절단을 파송하고 이어 1816년 암허스트(Amherst) 경을 수반한 사절단을 중국에 파송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동양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중국과의 외교적인 관계를 정상화하고 중국과 그 주변에 대한 풍토와 역사와 지리를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순조 16년인 1816년에 맥스웰을 선장으로 한 순양함 알세스트(Alceste) 호와 바실 홀을 선장으로 한 리라(Lyla) 호 두 함선을 파송해 이들이 조선의 서해안에 와서 해도를 측량하고 조선에 대한 일련의 정세를 연구하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 서해안 해도 작성의 임무를 띤 맥스웰 함장의 프리게이트 함 알세스트 호와 바실 홀의 브리그 함 리라 호는 8월 29일 위해위(威海威)를 출발하여 9월 1일 동틀 무렵 조선의 육지가 동쪽에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일행은 황해도 대청군도에서 남하하면서 처음으로 해도 작성을 착수했다. 저들이 조선인을 처음 목격한 것은 소청도 남쪽 바다 입구에 있는 소청리에서였다. 제일 남쪽 섬을 바라보는‘아름다운 만’에 닻을 내리자 얼마 안 있어 5, 6명의 주민이 작은 배 하나를 타고 왔다. 50야드 가까이에 이르자 배를 멈추었고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였으나 섬 주민들은 오지는 않고 호기심과 경계의 빛으로 바실 홀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행은 보트를 타고 그들 가까이 갔으나 그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바실 홀과 맥스웰 일행이 해안으로 노를 저어 어느 마을에 상륙하자 그들이 뒤따라왔다. 촌락을 이룬 그곳에 일행이 상륙하자 부녀자들이 마을을 버리고 급히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

조선인은 상투를 틀고, 펄럭이는 넓은 바지를 입고, 무릎까지 닿는 상의와 짚신을 신었고, 중키에다 체격이 좋고 힘세게 보였다. 그들이 바실 홀 일행을 따라온 것은 단순히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조용한 마을에 외국인이 입국하자 경계의 태도를 취하기 위함이었다. 일행이 소청도 촌에 들어가 조선의 실정을 살펴보기를 원했으나 촌민들은 완강히 저들을 거절했다.

비록 조선 사람과의 접촉을 통해 어떤 교류를 할 수는 없었지만, 바실 홀 일행은 조선인들의 생활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바실 홀 일행의 눈에 처음 만난 조선 사람들은“무뚝뚝하고 쌀쌀한 표정”을 지닌, 그러면서도“놀랍게도 호기심이 없는 고만(高慢)한 태도를 지닌 족속”이었다. 처음 만난 조선 사람에게 “멸시와 오만”을 접한 바실 홀 일행이 조선 사람들을 그렇게 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중국 정부에는 대단한 예물을 동원하고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면서도 조선에 대해서는 서해안을 탐험하고 해도를 작성하면서도 조선에 전혀 통보조차 하지 않은 자신들의 잘못되고 오만한 행동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박용규는 한국기독교회사에 기록하고 있다.

1816년 맥스웰과 바실 홀이 서해안을 탐사하는 동안 마량진에서 마량진 첨사 조대복은 저들의 배에 올라 문정을 하였으나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아
무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에게 최초로 성경이 건네졌다는 것
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배가 마량진에 정박한 지 이틀째 되던 9월 5일 첨사 조대복이 비인현감 이승렬을 대동하고 리라 호를 재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그때의 상황을 바실 홀은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있다.

“그가 선실에 있는 서적들을 구경한 후 그는 성경(a Bible)의 장정에 상당한 마음이 끌렸으나 막상 그에게 성경을 권하자 비록 대단히 마지못해서이지만(주저하면서) 그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가 배를 막 떠나려 할 때 다시 건네주자 이제는 아주 감사한 표정을 지으며 그것(성경)을 받고 상당히 기분 좋게 돌아갔다.”고 하였다.

이후 조대복과 이승렬은, 외국과의 교류를 철저하게 금하고있던 조정이 외국 함대의 국내 입항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책임을 저들에게 물어 관직에서 해직되었으며, 조대복이 받았던 성경을 포함한 3권의 책은 충청수사에게 모두 보내졌다가 후에 서울로 보내져서 서울 관부나 규장각에 보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김양선 목사는 주장한다. 이후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비인현감 이승렬의 행적에 대해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아쉬운 것은 바실 홀과 맥스웰의 입국이 복음 전파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서해안 해도 작성에 있었기 때문에 저들이 전한 성경이 영어 성경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조선에 전해졌다는 상징적인 의미 외에 성경을 통한 직접적인 역사를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공식적인 선교 이전에 이 땅에 찾아왔던 평신도들의 방문의 의의는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실로 크다 할 수 있다.

첫째는, 이 땅에 복음을 가져다 주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둘째는, 우리나라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처음으로 전해졌다는 데 의의가 있다.

셋째는, 선교사가 이르기 전에 성경과 평신도가 먼저 왔다는 데 의의가 있다.

저들은 선교사가 아닌 상인 또는 군인이었으므로 적극적으로 선교하지는 못했지만, 저들의 언행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심을 나타내었고, 자신들이 예수를 믿는 크리스천임을 나타내었다.

넷째는,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리므로 극동에 있는 은둔의 땅 한국이 선교지로서 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사(7)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2. 천주교의 한국 전래

1) 천주교의 전래 및 정착

중국에 천주교 선교사를 파송하여 처음 상주토록 한 것은 예수회에 의해서다. 예수회 창설의 주역을 맡았던 프란시스 자비엘은 동방 선교에 나서서 1549년 일본 선교에 이어, 중국 선교에 나섰으나 1552년 광동 앞바다의 섬에서 돌아갔다. 그 뒤 카르네이로(1568년), 발리냐니(1573년)와 40명의 선교사들, 루기에리(Michael Ruggien, 羅明堅)가 파송되었고, 루기에리의 권유로 선교 길에 오른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에 의해 중국 선교가 본격화되었다. 마테오 리치는 자비엘이 돌아가던 해에 출생한 같은 예수회 신부로 이태리 태생이며, 1581년에 마카오에 도착한 후 남경(1595년)을 거쳐 1600년에는 북경에 들어갔고, 그 이듬해에는 북경에 교회당(南堂)을 세우고 동지 카타네오, 판토쟈와 함께 열심히 선교 활동을 벌였다. 그는 1603년「天主實義」등의 책을 저술하여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천주교를 소개하였다.

천주교는 17세기 초부터 조선의 지식층에게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은 주자학(朱子學)을 기반으로 하여 정치·사회·경제의 제반 체계가 굳어져 있었고 임진왜란(1592년)과 병자호란(1636년)을 통하여 그 사회적 모순이 여러 곳에서 노정되고 있었던 만큼, 조선의 지식층, 그 중에서도 특히 자기 사회의 모순을 뼈저리게 느끼며 이를 개혁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젊은이들에게 이 천주교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천주교가 당시 정치적으로 불우했던 남인계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환영받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현(昭顯)세자가 한국인으로서는 비교적 초기에 천주교와 접하게 되었는데 그 때는 볼모 생활을 할 때였다. 병자호란 후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는 1644년 북경으로 옮겨진 후 당시 예수회 신부로서 청(淸)나라 조정의 흠천감(欽天監) 감정(監正)에 오른 아담 샬(J. Adam Shall van Bell, 渴若望)과 사귀게 되었다. 서양 과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세자는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예수회 신부들은 세자를 개종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가 환국할 때 선교사들은 중국인 궁녀 감독관인 환관 5명을 교인으로 구성하기까지 하였지만, 귀국한 지 70여 일만에 세자가 돌아감으로 그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1777년 정조(正祖) 원년에 이벽(李蘗), 권일신(權日身),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 등 남인의 시파 유학자들이 서학(西學)에 관심을 가지고 한강가의 산사인 주어사(走魚寺)에 모여 토론을 하였다. 이벽은 서학에서 신앙을 얻고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을 쉬면서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에 힘썼으며, 다른 이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가르쳤다. 1783년 정조 7년에 동지사 겸 시은사 황인점의 서장관 이동욱의 아들이요 정약전의 매부인 이승훈(李承薰)이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되자, 이벽은 천주교의 진리를 잘 알아 오도록 부탁하였다. 이승훈은 일행을 따라 10월 14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12월 21일에 북경에 당도하여 남당(南堂)을 방문하고 신부에게서 필담으로 교리를 배웠다. 1784년 음력 정월 그믐께 귀국하기 직전에 예수회 신부 그라몽(Louis de Grammont)에게 세례를 받고‘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해 3월에 수십 종의 교리 서적과 십자가상과 성화, 묵주 등 진귀한 물품을 가지고 돌아와 신앙생활을 하고, 이벽에게 교리 서적들을 전해 주었다. 이벽은 기독교 진리 변증, 중국과 조선에 있는 미신에 대한 반박, 7개 성사(聖事)에 관한 설명, 공교요리(公敎要理), 복음 해설, 매일의 성인전, 기도서 등을 통하여 신앙에 더욱 확신을 하고 전도하였다.

이벽은 천주교 전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양반계층보다는 중인(中人) 계층에 먼저 전도를 시작했다. 역관인 최창현, 김범우, 최인길, 지황, 김종교 등이 그의 전도를 받아 입교했다. 이들 중인계층 역관 출신들은 전통 유학에 사로잡힌 양반계층보다는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받아들이는데 개방적이었다. 그들은 북경을 왕래하며 이미 서학의 정신과 문명세계의 진보성을 보아 알고 있던 터였기에 이벽의 권유에 찬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반계층에게 전도하려는 이벽의 시도도 계속되었다. 이가환, 이기양과 같은 학자들과 공개토론까지 벌이면서 입교를 꾀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대신 1784년 9월, 경기도 양근(양평)에 사는 권철신, 권일신에게 전도하여 그중 권일신을 입교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승훈이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주게 되면서 한국내에서 자생적인 신앙 공동체가 성립되었고, 이벽, 권일신, 유항검 등이 주축이 되었다. 이때 그들은 교황청의 허락도 없이 최연장자인 권일신을 주교로, 이승훈, 이존창, 유항검, 최창현 등을 신부로 선출하고 이들에 의해 성사를 집행하는 가성직시대(假聖職時代)를 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 제도의 모순을 곧 깨닫고 북경 교회에 알려 지시를 받게 되었지만,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한 가성직제의 출현은 한국 천주교회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 천주교회의 자생적 성격을 이해토록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한국의 천
주교회는, 초기의 학문적인‘서학’,‘ 천주학’의 단계에서 신앙적인 단계로, 초기의 기호(畿湖) 지방의 몇몇 학자들 중심의 단계에서 양반 계층을 포함한 사회 전 계층의 전국적인 규모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국교회사(8)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2. 천주교의 한국 전래

2) 천주교회의 제사 문제로 인한 수난

한국의 천주교회가 수난을 당하게 된 것은 제사문제 때문이었다. 천주교회의 지도자들은 1789, 1790년에 걸쳐 두 번이나 윤유일을 북경에 파견, 신부의 파송을 요구하는 한편 중국 교회에서 오랜 동안 논란을 겪었던 제사문제에 대한 지도를 요청하였다. 윤유일이 받아온 답은 조상 제사가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원래 예수회의 독점적인 전교 시기에는 제사 문제가 별로 논란거리가 되지 않았다. 예수회가 처음으로 현지 적응 정책을 써서 조상 제사와 공자 제사를 용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서서 프란시스코(방지거)회와 도미니쿠스(도밍고)회 및 파리외방전교회가 중국에 진출하여 예수회의 제사 용납 정책에 대해 교황청에 제소함으로‘典禮問題’가 시작
되어 거의 120년 간 계속되었다. 교황청은 처음에는 단안을 내리지 못하다가 결국‘제사 금지’로 결론짓게 되었는데, 이런 조치에 반발하여 중국 정부는 예수회 이외의 선교 단체들을 추방하였고, 교황청은 예수회의 해산을 명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윤유일이 받아온 조상 제사 금지 결론은 당시의 한국 사회를 규제하고 있던 지배 이데올로기라 할 주자학과의 갈등이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조선 사회가 조상과 부모에게 드리는 제사를 폐하고 신위를 없애는 천주교도들의 행위에 대하여 국가적인 차원의 반응을 보인 것은 이 문제가 단순히 가정적인 효의 질서를 무너뜨린다는 윤리적인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닌, 인간됨의 기본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물론 조선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이념적 기반이라 할 주자학적 충(忠)을 붕괴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전례 문제가 한 구실이 되고 정치 역학 관계가 상승하여 몇 차례에 걸친 박해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1784년에 창설된 조선 천주교회는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되어 사실상의 종교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100년 동안 박해와 수난으로 점철된 역사를 겪었다. 이 같은 박해는 조선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듬해인 1785년부터 시작된다.

1785년(정조 9년, 乙巳) 봄에 형조의 금리들이 우연히 명례방(明禮坊, 명동) 김범우의 집을 지나다가 이상한 집회가 열리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이벽이 중앙에 앉아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고 있었고,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 권이신, 권상학 부자 등이 모여 있었다. 금리들은 처음에 노름하는 것은 아닌가 하여 들어갔다가 천주교 서적과 화상들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압수하여 형조에 갖다 바쳤다. 당시 형조판서 김화진은 집주인인 중인(中人) 김범우만 체포하고 나머지 양반계층 교인들은 회유하여 내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이것이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이다. 천주교인의 실체가 정부 기관에 의해 최초로 발각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연루, 체포된 김범우는 단양에 유배당한 후 1년만에 유배지에서 죽음으로 조선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벽과 이승
훈은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하였으며, 이백은 배교로 인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번민하다가 1786년 봄에 열병에 걸려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핍박이 가라앉자 이승훈을 비롯하여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1787년 겨울에 이승훈, 정약용, 강이원 등이 반촌에 있는 김석태의 집에 모여 서학서를 공부한 사실이 폭로되는 사건이 터졌다. 이것을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이라 하는데 이 사건을 폭로한 인물은 이승훈, 정약용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고 처음엔 서학에 호의적 관심을 보였던 이기경이었다. 이기경은 반촌에서 있었던 서학 연구 모임의 실황을 홍낙안에게 알렸고, 홍낙
안은 이 사실을 세상에 폭로하여 왕으로 하여금 서학관계 서적을 불살라 없애라는 명을 내리게 하였다.

이 같은 위기 상황 속에서 소위 진산사건이 터졌다. 1791년(정조 15년) 전라도 진산에서 천주교인 윤지충, 권사연이 체포되어 처형당한 사건이 터졌으니 조선 천주교회로서는 처음으로 맞은 대규모 박해였다.

정약용의 외종이 되는 윤지충은 진사 시험(1783년)에 합격한 양반계층 신분으로 1784년 서울에 갔다가 김범우의 집에 들러 천주실의와 칠극(七克)을 얻어 보았으며 고향에 돌아와 그의 외종형 되는 권상연과 함께 서학을 연구하던 중 둘이 함께 입교하였다. 정미반회사건 이후 정부에서 서학을 금하는 명이 내리자 집에 있던 서학서를 태웠으나 은밀하게 신앙은 계속 지켰다. 그러던 중 1790년 말 윤유일을 통해 전달된 북경주교의 조상제사 금지령에 따라 조상제사를 폐지하고 그 신주들을 땅에 묻었다. 그러나 이 같은 은밀한 신앙행위가 1791년 여름 그의 어머니 권씨가 별세하게 됨으로 폭로될 수밖에 없었다. 상례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위마저 만들지 않은 윤지충이나 그의 행위를 지지하는 권상연의 행위는 전통 양반사회에 큰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 같은 공개적 제사폐지 행위는 소문을 통해 중앙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건을 정치 문제화시킨 장본인도 역시 홍낙안이었다.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은‘멸륜패상’(滅倫敗常),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난행을 범한 죄목으로 사형이 선고되어 1791년 12월 8일 전주 풍남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이 박해로 인해 조선 초대 천주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재정립하든지 아니면 천주 신앙을 포기하든지 기로에 처하게 되었다. 하나는 박해라는 외부로부터 오는 도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조선 천주교를 이끌어 온 지도자들의 배교로 인한 도전이었다.

실제로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뿌리가 깊지 못한 조선 최초의 세례교인 이승훈을 비롯해 이벽, 정약전, 권일신, 최필공, 최인철, 최인길, 최필제, 정인혁, 손경윤, 양덕윤 등이 배교하고 말았는데, 천주교의 이와 같은 현상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성경 번역으로 시작된 후대 개신교 선교와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선행되지 못한 가운데 천주교 선교가 진행되었으므로 믿음의 뿌리가 깊지 못한 까닭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사(9)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2. 천주교의 한국 전래

3) 신유박해와 조선천주교

천주교회가 형성되면서 신자들은 모두 교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성직자가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서로 상의한 끝에 권일신을 주교로, 이승훈, 이단원, 유항검, 최창현 등을 신부로 선정하였다. 1789년 10월, 교회의 지도자들은 윤유일에게 동지사 이성원 일행을 따라 북경으로 가서 천주교 주교를 만나 서울에서 교회가 조직되었음을 보고하고 재가를 받아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북경에 주재하는 주교 구베아(Gouvea)는 평신도가 행할 수 있는 세례성사만 인정할 뿐 성직제도는 인정하지 않았다.

1793년 구베아 주교는 서울의 신도들이 신부를 보내달라고 하는 요청을 받고 북경 천주교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중국인 주문모(周文謀) 신부를 선정하여 보내기로 하였다. 주문모는 1794년 12월 국경을 넘어 이듬해 1월에 서울에 숨어들어왔다. 그러나 약 6개월 후에 밀고로 인하여 관의 체포령이 내려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신도들의 도움으로 6년 동안 용케 피해
다니면서 교회를 돌보며 지방으로 순회하면서 전도 활동을 하였다. 그가 입국할 때 4천 명이던 교인수가 5년 후에는 만 명이 되었다.

박해가 완화되기를 기다렸으나 정부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더 이상 숨어 지낼 수 없었던 주문모 신부는 이와 같은 조선천주교회의 상황을 북경의 주교에게 알리기 위해 편지를 썼다. 발각되지 않도록 명주에 라틴어로 쓴 다음 옷 속에 꿰매 철저하게 보안장치를 한 편지는 1797년 1월 28일 동지사 일행 틈에 끼어 북경에 입국한 두 명의 조선의 천주교인을 통해 중국 주교에게 성공적으로 전달되었다. 주 신부의 편지는 포르투갈 왕이 조선 왕에게 조선의 천주교 신도들을 대변해 줄 것과 조선 왕과 수호조약을 맺을 것, 그리고 조선의 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해줄 것 등을 그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요청은 주 신부가 볼 때 조선에서의 천주교 선교 활동을 위해서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그러나 천주교가 전통적인 조상숭배를 거부하며 반국가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고 판단한 조선 정부로서는 이와 같은 천주교 전래의 자유를 허락할리 만무했다. 오히려 주문모 신부가 이와 같이 요청했다는 사실이 조선 정부에 알려지면서 주신부의 그와 같은 행동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사건은 1791년에 있었던 신해박해에 이어 1801년 신유박해로 이어져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3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로 이어졌다. 주문모 신부는 점점 더 절박하게 다가오는 위험을 피하여 국경을 넘어 귀국하려고 가다가 많은 교인들이 자기 때문에 희생당하는 것을 보고 되돌아와 자수하고, 1801년 음력 4월 19일에 참수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위와 같이 처음 천주교가 전래되고 100여 년 간 조선천주교는 제사 문제로 엄청난 박해를 받았고, 그로 인한 순교자만도 10,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부의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런 박해 속에서도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조상 제사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순교적 신앙으로 일관했다.

신유박해와 관련, 주목되는 점은‘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사건이다. 천주교도였던 황사영은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도 배론의 은거지에서 비단에 글을 써서 북경에 보내려 하다가 중간에서 발각되었다. 1만 3천여 자나 되는 이 글에는 박해의 경위와 주문모 신부 등 순교자들의 사적, 조선 천주교회의 부흥과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법이 나름대로 제시되어 있다. 문제는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청나라와 프랑스 함대를 동원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신앙의 자유와 민족적 주체성 사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어서 신앙 외적인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 일로 정부는 더욱 천주교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었고, 이어 천주교에 대해 더욱 무서운 박해를 가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했는지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이 박해 속에서도 천주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 기적이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일은 조상숭배 문제로 순교에 이르기까지 박해를 받았던 천주교가 토착화 선교 정책이라는 명목으로 조상제사를 비롯하여 공자숭배와 신사참배까지도 종교의식이 아닌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을 표현하는 국민적 예식이라는 이유로 허용했다는 것이다.

약 2세기 간이나 엄격히 금지되어 오던 동양제례가 20세기에 들어와서 다시 문제화 된 것은 1932년 일본의 팽창주의에 의해 세워진 만주국이 국민의 단결을 이루기 위하여 공자숭배를 국민에게 의무화 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일로 인해 천주교인들은 신앙의 위기를 맞게 되었고, 당황한 교회당국은 공자숭배의 성격을 정부에 질의했으며, 정부는 이 의식이 종교적이 아
니라 단순히 사회적, 국가적 예식일 뿐이라고 답변하였다. 이에 토착화 정책을 선교의 기본방향으로 지향하고 있던 교황 비오11세는 1935년 공자 공경의식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만주 주교단의 건의를 받아들여 제례시 사자(死者)에 대한 사회적 경의 표시로서의 절도 허용하였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신사참배 문제가 대두되었다. 군국주의의 일본정부는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국민적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의무화하였다. 이에 교회당국은 신사참배의 의의와 성격에 대해 정부에 질의를 하였고, 정부는 이 의식이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을 표현하는 국민적 예식이라고 답변을 하였다. 교황청은 정부의 해명을 근거로 하여 1936년 신사참배를 허용하면서 선교사들은 조국에 대한 국민의 충성과 사랑을 인정하고 높이 평가해야하며 신자들에게 일반 국민들에 못지않은 애국심을 갖도록 고취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천주교의 주장대로라면, 그 직무에 있어서 무흠한 교황과 절대 오류가 없는 교회가 어떻게 한 가지 사안에 대해서 이같이 번복된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또 그 일로 인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조상제사나 공자숭배와 신사참배가 하나님의 계명에 위배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 일로 인해 죽은 자들은 순교자가 아니라 교회의 잘못된 결정에 의
해 어이없이 희생되어진 자들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사건만 보아도 천주교가 때를 따라 본색을 달리하는 단체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