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한 조선족 31만명,주로 서울·수도권에 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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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무,유학,사업 차 한국에 체류중인 조선족은 9월말 현재 37만 48명으로서 주로 서울 등 수도권에 집중되여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4일 한국 법무부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소장 원형규)는 방문취업 1년6개월을 맞아 분석한 '국내 체류 중국동포 현황'보고서에서 이같이 밝혔다.이는 전체 등록 외국인 85만4701명 가운데 43%를 차지하는 수준이다.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 체류 조선족은 최근 5년간 3배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4년 12만8287명, 2005년 14만6338명, 2006년 22만1525명으로 늘다가 2007년  '방문취업제' 시행 이후 31만485명으로 급증했으며 그 중 남자는 18만6000명, 녀자는 18만2048명이다.

지역별 거주 현황은 서울 17만3992명(47.0%)과 경기인천이 13만4346명(36.3%), 부산·경남과 대전·충남이 각각 1만956명(5.3%)과 1만6977명(4.6%)이었다. 또 대구·경북이 1만964명(3.0%), 광주·전라는 1만86명(2.7%), 강원 3549명(0.9%), 제주 587명(0.2%) 등이다.

서울지역 구별 거주현황은 영등포구와 구로구가 각각 3만2794명과 2만5957명으로 56%를 차지하며 가장 많았고, 금천구 1만5789명, 관악구 1만4550명, 광진구 8343명, 동대문구 6091명, 송파구 5452명, 강서구 4383명, 중구 4171명, 양천구 3908명 등의 순이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3만3226명으로 가장 많았고, 가사서비스업 2만901명으로 그 뒤를 이었다. 건설업 종사자도 3629명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3월부터 시행된 방문취업제가 도입된후  현재 25세 이상 조선족은 방문취업(H-2)과 복수사증(5년 유효, 1회 최장 3년 체류가능)을 발급받아 한국입국 후 취업교육 및 구직신청 절차를 거쳐 제조업 등 34개 업종에서 취업활동이 가능하다. 

그러나 방문취업제에 관한 찬반여론이 여전하며 특히 그 시행과정의 한국어시험과 추점제의 실시 및 인구비례에 반한 고시장의 불균형분포로 하여 중국내에서 브로커가 성행하고 시험을 치기위해 먼거리를 이동하는 등 과다한 비용이 지불되는 문제로 하여 조선족사회내부에서는 개선여론이 비등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사는 조선족 만나본다(1)

머리말: 2008년 10월 4일부터 19일까지 15일간 한국방문했다.15일간은 짧지만 많은것을 보고 듣고 느꼈다. 특히 한국에 나가 돈벌이 하는 친척이나 친구들을 통해 중국조선족들의 한국에서의 삶을 느껴보았다.

많은 중국조선족들이 다녀갔고 또 지금 살고있는 한국, 한국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환률이 자꾸 떨어져 한국로무도 돈벌이가 안된다고 아우성을 치는 오늘이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한국행 막차라도 타지 못해 안달이고 이미 한국에 간 근 40만명의 중국조선족들은 한국사회에서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위해 분주히 살아가고있다.

나의 한국방문인상기는 내가 짧은 시간동안 한국에 체류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것을 그대로 일기체 형식으로 기록한 부족한 글이다. 그러나 나의 한국방문인상기가 애독자들이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들의 생활실태와 현황을 료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수 있다면 좋겠다.

 

2008년 10월 4일 오전 9시발 심양―인천행 비행기를 탔다.

내 옆좌석에 앉은 료녕 안산에 산다는 조선족들은 한국에서 이미 3년간 일을 했고 재입국절차로 다시 한국에 돈벌이 나가는 사람들이였다.

한국에서 건설현지 등에서 일당을 뛰였다는 50대의 안산남자는 하루에 6~7만원가량의 일당을 벌었다고 했다. 그러나 요즘은 한국돈이 자꾸 환률이 급락하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환률이 떨어진다 해도 아직까지는 한국에서 돈버는것이 중국에서 돈버는것보다 낫다는 신심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돈이 100만원당 중국돈 5700원가량의 환률에서 5000원이하로 떨어지면 한국에서 고생스럽게 일하는 재미는 없을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이맘때처럼 한국돈 100만원당 7000원이상의 환률로 다시 돌아올가 하면서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오전 10시 30분, 한국시간으로는 11시 30분가량 됐을 때 비행기는 한국상공을 날아왔다. 심양에서 출발해서 꼭 1시간 30분가량 날아온것 같다. 인천 앞바다가 보이기 시작했고 바다우로 길게 늘어서있는 해상다리가 보였다.

이 곳이 바로 한국이구나, 중국내 그렇게 많은 조선족들이 오지 못해 안달아하고 코리아 꿈을 꾸게 했던 땅, 기실 한국은 너무나도 가까운 지척에 있었다. 비행기로 한시간 반, 그것도 령공을 에돌아와서  그렇지 직선거리로 날아오면 1시간 거리밖에 안된다.

출구로 빠져나오니 지난해 방취제로 한국에 나온 매형과 친구 광호가 기다리며 손짓한다.

서울로 올라오는 공항리무진을 탔다. 공항에서 누나가 살고있는 양재까지 뻐스를 타고 올라오는데 인당 9000원이란다. 인민페로 치면 50원이 넘는다.

양재동에 내려서 육교를 넘어오니 길옆에  남새들을 펴놓고 파는 행상들이 심심찮게 보여 연길의 서시장부근 행상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서울도심속에 이런 싸구려난전들이 펼쳐져있다는것이 신기, 지나가고 다가오는 사람들마다 억양과 톤이 다른 한국말을 하고있고 허다한 간판들이 한글로만 즐비한곳, 이게 바로 한국이였다. 그리고 한국은 중국에서 보는 금전의 천당이 아닌, 그 곳에서도 오이며 감자며 도마도 같은 작은 로천행상을 펼쳐놓고 어렵게 생을 유지해나가고있는 년로한 할머니도 있고 이제 막 앳된 모습을 벗는 사춘기소녀애들이 흘리고가는 까르르 웃음소리도 있고 정장에 넥타이를 맨 아저씨가 어데론가 급급히 걸어가는 삶의 냄새와 풍경이 있는 곳이였다.

누나와 녀동생이 들어있는 양재동세방에 들어가면서 길목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삶은 돼지고기와 순대 등 술안주들을 샀다. 2만3000원이 나왔다. 슈퍼에서 또 백세주며 맥주 등 술을 샀는데 2만원이 넘는다. 아마 어림잡아도 5만원은 넘는것 같다. 5만원이면 중국돈으로는 300원이 넘는다. 중국돈 300원이면 중국에서는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놓고 잘 먹을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보기에도 초라한 술상이 차려질수밖에 없다.

한국 사는 조선족들을 만나본다(2)

누나와 동생 춘옥이는 저녁10시가 넘어서야 돌아온다. 그들이 기거하고있는 집은 양재동에 있는 반지하 단칸방, 반지하라서 습했고 10월중순이 지나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도 지났건만 모기가 극성이고 밖에서는 풀벌레소리가 귀따갑게 들끓는다.

8, 9월 한여름에는 이보다 더 극심했다고 한다.

처음 누나와 녀동생이 살아가고있다는 반지하 단칸방에 들어섰을때는 연길에서 그나마 집이라도 쓰고 살고있는 자신이 부끄럽도록 가슴이 무거워났다.

한국에 와서 돈벌어 잘살아보려고 지하 단칸방에서 모기와 습기에 뜯기면서 한국사회의 하층생활을 하고있는 내 혈육이 안타깝고 안스러워서였다.

후에야 안 일이지만 맨처음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25만원짜리 이 세집을 맡았을 때까지만 해도 집안에는 아무런 가구도 가장집물도 없었단다.

그러다가 어느날 밤인가 운좋게도 문뜩 이웃집에서 쓸만한 침대와 가구를 버린것을 발견하고 녀자 둘이서 그걸 혼신의 힘을 다해 겨우 집에 들여놨다고 한다.

랭장고도 하나 들여놓았다. 그래서 그런지 세방은 비록 작지만 아담하고 따뜻해보였다. 누나 말로는 한국에 온지  9달이 되여 이제 겨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자리를 잡고 일에도 애착을 느껴가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한심하게도 한화가 밑도 끝도 없이 내리곤두박질하면서 환률이 한국돈 100만원당 인민페 5700원선에서 5400원, 10월6일이후에는 5000원선아래까지 내려갔다는 좋지 않은 소문이 들리기도 했다.

한국돈벌이의 좋은 시절은 이미 지나간걸가?

환률이 5000원선아래로 떨어지면 한국에서 돈벌이가 재미없다는게 많은 중국조선족로무자들의 생각이다. 많은 조선족들은 요즘 들어 환률이 급추락하는 바람에 돈을 중국에 부치지 않고 한화환률이 오르기만을 학수고대하고있었다. 더우기 한국에서 돈을 중국에 부쳐주어야 집식구들이 생계를 유지할수있는 조선족로무자들의 경우, 한없이 떨어진 한화약세에 울며 겨자먹기로 돈을 집으로 부쳐야 하니 참으로 안타깝고 안스러운 일이 아닐수가 없다. 이와 함께 한화약세에 따라 작년과 비해볼 때 월급이 40%가량 줄어든 셈으로 된다는 통계도 있다. 현재 한국에 머무르고있는 중국조선족은 약37만 8300여명으로 전체 외국인 체류자의 42%에 이른다.

 

한국 사는 조선족 만나본다 (3)

 

 

10월6일 아침이였다. 누나가 들어있는 반지하세방 창너머로 한 한국젊은이가 고개를 기웃거리면서 뭐라 하고있었다.

누나가 다가갔더니 《생선을 구우세요?》 한다.

《고등어를 구웠다》고 했다.

그랬더니 《창을 닫고 구우면 안돼요? 냄새가 진동하는데요》한다.

생선굽는 냄새가 싫은 이웃인 모양인데 그렇다고 생선을 냄새 안나게 구울수는 없지 않는가? 그런대로 창문을 닫아주었더니 얼마 안지나 이젠 출입문을 노크한다.

요즘 생선굽는 냄새가 자주 나서 그런다면서 생선을 굽지 말든지하면 안되냐고 항의해왔다. 생선을 먹지 말라는 무언의 강요처럼 느껴졌다.

《생선냄새가 싫으면 자기 집 창문을 잠간 닫아걸고 냄새를 맡지 않으면 될거 아니냐?》 하고 면박을 주려다가 누나와 동생 두 녀자가 세들어사는 동네에서 시끄러운 눈총과 불리익을 받을것 같아 치미는 분을 참는수밖에 없었다.

음식냄새가 난다는 리유때문에 이마빡에 피도 안말랐을것 같은 애숭이 젊은이한테까지 수모받는것 같아서 기분잡쳤다.

중국조선족들의 위상은 그만큼 한국사회에서는 없고 차하고 약한 존재로 많이들 인식되여지고있는것이 현실이다. 같은 언어를 구사하되 언어에서 이질감이 있고 사유나 생활습관에서 오는 차이나 격세지감 역시 홀시할수 없다.

한국에서 일한지 1년이 막 되여오는 친구녀석도 일하는 회사의 한국인들하고 자주 얼굴을 붉히군 한다는데 함께 일하는 한국사람들 말만 나오면 고개를 가로 젓는다.

중국조선족들을 업수이보고 마구 다루려하고 듣기에도 거북한 쌍욕을 퍼붓기를 잘한다는것이다. 물론 모든 한국사람들이 다 그런거는 아니지만 한국사회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중국조선족들의 노력을 가상히 받아주고 관심과 도움을 베풀어주는 한국사회의 선진국다운 분위기와 국민매너가 요청된다.

친구 광호가 지금 하고있는 포천 제분공장일을 마무리짓고 인차 의정부 양말공장에 일자리를 옮기겠다고 말했다. 제분공장일은 자유도 어느 정도 있고 일도 덜 힘들지만 로임이 잘 나오지 않아서 일은 힘들지만 로임이 잘 나오는 양말공장에 취직하기로 결정했다는것이다.

제분공장에서 여러 달 일했으나 아직 200만원을 못받았다고 하는데 그냥 죽치고 앉아서 돈도 못받는 일을 계속할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실제로 적잖은 조선족들이 로임이 깔리기 시작하면 차일피일 미루는 한국사장의 불투명한 꼬임에 넘어가 죽게 일하고도 나중에는 로임을 못받는 일들을 많이 보았다.

특히 과거에는 중국조선족들이 불법체류하고있는 약점을 틀어쥐고 신고하지 못할거란 계산을 앞세우고 선량한 중국조선족들을 사기쳐먹은 악덕 한국인기업체들과 얌치 사장님들도 적잖다.

요즘은 방취제의 정상적인 취업조건으로 한국에 들어왔지만 취업신고를 하지 않는 방취자들이 많은데 이런 조건하에서는 한국취업가운데서 생기는 여러 가지 분규에 대해 정상적인 법적 대응과 보상을 요구할수 없기 때문에 방취제관련 한국의 적법절차를 따르는것이 바람직하다는것이 보편적인 견해이다.

 

 

 

한국에서 나는 이렇게 성공적으로 취업했다

한국산업인력공단 주최로 9월 11일 오후 공단본부 10층 강당에서 열린 《외국국적 동포를 위한 2008 취업박람회》에서 박람회장을 찾은 조선족들이 업체를 찾아 상담을 하고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조상이 누워계시는 한국 땅을 밟아보는것이 소원이였는데 한국정부의 좋은 정책으로 하여 지난해 방문취업제로 한국에 오게 되였고 또 조상의 묘소를 참배하여 오매에도 그리던 소원을 풀게 되였으며 지금은 한 회사에 취직하여 출근하면서 돈도 벌고있다.

하지만 중국에 있을 때는 한국만 가면 당장 일자리를 찾아 많은 돈을 벌것처럼 생각하였는데 정작 와보니 처음에는 한국생활에 적응되지 않아 생각처럼 그렇게 순탄하게 되지 않았다.

취업교육을 받고 나는 처음 직업소개소의 소개로 상일동의 한 채소농장으로 갔다. 숙식을 해결해준다고 하기에 찾아갔는데 쌀만 대여 주고 그외의것은 모두 자체로 해결하며 기숙사는 바로 채소 하우스 안이였다. 너무나도 인격이 손상되는 일이였다.

중국에서 책상머리에 앉아서 사업하던 내가 어찌 이런 곳에서 먹고 자고 한단 말인가?

또 다시 직업소개소를 찾았다. 이번에는 건설현장에 가보라는것이였다. 나는 또 행장을 메고 건설현장으로 갔다.

건설현장은 중국에서 본 노가다 판과 조금도 다름없었다. 건설현장에 들어서는 순간, 어쩌면 나도 이런 노가다행렬에 들어섰는가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 교원과 노가다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신분과 직업이였다.

나같은것은 기술이 없는 잡부나 하는 일이라 폼, 세멘트포대, 철물 등 전부 무거운것을 나르는것이였다.

나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중국조선족들이였는데 대부분 농사일을 하다 온 사람들이여서 어지간히 무거운것은 대수로워 하지 않았는데 나에게는 정말 힘에 부치는 일이였다.

그리고 그들은 무슨 일을 하나 요령이 있게 하지만 나는 요령 없이 하다 보니 힘은 남보다 곱절 더 썼지만 로동효률은 남보다 많이 떨어졌다. 결국 10여일 하고 잘리고 말았다.

돈 벌러 왔다는것이 이렇게 하다가는 왔다가는 경비도 벌것 같지 못했다. 어떻게 할것인가?

이번에는 일자리 찾기에 급급해한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한국사회에 적응하여 한곳에서 장기적으로 일할수 있겠는가는것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한곳에서 몇년씩 일한다고 하는데 나는 왜 가는 곳마다 일자리나 고용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돌아오고 또 고용주의 마음에 들지 않아 해고당하여 돌아오게 되는가?

그 원인을 찾아보면 째로는 자기의 신분을 낮추는것이였다. 중국에서의 신분대로 자신을 자기 스스로 높이 보고 남더러 자기를 높이 봐줄것을 바라면 누가 나를 높이 봐주겠는가? 중국에 있을 때의 신분이 어떠하든 돈을 벌려고 일하러 온것만큼 일반 근로자의 신분으로 나서야 한다.

둘째로 로동적극성을 높이는것이다. 내가 남의 일을 해준다는 태도로 일할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자세로 회사가 바로 나의 집이고 회사의 일이 곧바로 나의 일이라는 관점을 수립하여 무슨 일에서나 진심으로 열심히 일하는 이미지를 보여준다면 고용주의 마음에 들수 있다.

셋째로는 요령을 장악하고 일하는것이다. 어떤 일을 하든지 요령을 장악해야지 마구잡이로 일하면 힘은 들어도 로동효률은 낮아지게 되여 당연히 회사의 마음에 들수가 없게 된다.

넷째로는 속도를 강조하는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든지 속도를 대단히 강조한다. 이것은 한국 사람들이 경쟁사회에서 장기간 내려온 습관이다. 한국에 와서 중국사람은 느릿느릿(國人慢慢地)식으로 하면 그 어떤 고용주도 요구하지 않을것이다.

이상의 몇가지로 찾아보니 나자신의 문제가 많았다는것이 확인되였다. 나 자신이 한국사회에 적응하여야지 한국사회를 내 뜻에 맞추라고 하면 그것은 닭알로 돌을 치는 격으로밖에 되지 않는다.

이상의 원인들을 찾은 다음 이번에는 꼭 한곳에서 장기적으로 일하기로 작심하고 다시 직업소개소를 찾아갔다. 직업소개소에서는 모 판촉물회사 생산직장을 소개해 주었다. 그래도 직업소개소가 좋았다.

한국 로동부 고용지원쎈터에서는 정규적회사만 알선해 주고 정규적회사는 고령구직자들을 요구하지 않기에 우리 같은 고령구직자들은 고용지원쎈터를 통해 일자리를 해결할수 없다.

직업소개소는 정규적회사 외에도 전국 각지의 어떠한 일자리도 다 소개해 주기에 고령구직자들에게는 원칙을  지키기보다 원칙을 어기고 조선족들의 일자리를 해결하여 주는 직업소개소가 그래도 좋았다.

이번에는 새로운 일터에서 이전의 일들을 교훈으로 삼아 처음부터 회사사원들과 어울리면서 잘하여 보리라 작심하고 출근 첫날부터 우에서 찾은 원인들을 명기하면서 일하였다.

일반 근로자의 신분으로, 회사가 나의 집이고 회사의 일이 곧바로 나의 일이라는 주인공의 자세로 일하니 회사의 사원들과 서로 어울릴수 있었다.

이 두가지는 나의 주관의사대로 할수 있었지만 요령을 봐가면서 일하는것과 속도를 다그친다는것은 나의 주관념원대로 되지 않았다. 회사사원들과 어울린다고는 하지만 일을 요령이 없이 하고 속도가 느리니 가끔 핀잔을 들을 때도 있었다.

이전 같았으면 이런 핀잔을 들을 때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반발심이 생겼으련만 이것은 나의 잘못이고 내가 꼭 이 회사의 일에 적응되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런 반발심도 나오지 않고 오히려 《제가 아직 회사의 일에 익숙하지 못하여 그러니 앞으로 잘 가르쳐 주세요》 라고 너스레까지 떠니 그들도 나를 리해하여 주었다.

이런 일이 거의 두달가량 반복되였으나 한번도 짜증을 내지 않고 허심하게 접수하고 그들을 따라 배워 눈치 빠르게 손을 맞추어 일을 잽싸게 해나가니 나와 동료들간의 거리도 더욱 가까워졌고 일도 점차 숙련되여갔다.

한국에 와서 처음 몇달은 한국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이곳저곳 다니면서 일하다나니 한곳에서 한달을 채워본적이 없었다. 이 회사에 온지 8개월이 되지만 나 본인도 다른 일자리로 옮길 생각이 없고 회사에서 해고당할 위기감도 없이 마음 편안히 일하고있다. 이러고 보면 이것은 성공적인 취업이라고 할수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앞으로 더욱더 한국사회에 적응하고 열심히 일을 잘하여 한국건설에 힘을 이바지하며 돈을 많이 벌어가지고 중국에 돌아가 행복한 생활을 하련다.

/ 주청룡 http://www.200man.com/?action-viewnews-itemid-6826

 

한국 노가다판의 조선족남자들

올린시간: 2007-11-08 09:33 | 작가: webmaster | 출처: 길림신문

 
 
기자는 협찬과 신문사의 파견을 받고 일전 한국에 가 《재한 조선족 삶의 현장》 취재를 하게 됐다. 한국 체류기간 기자는 재한 조선족 32명에 대한 전화통화와 직접 만나본 사람들을 통해 재한 조선족들의 밑바닥인생을 보았고 들의 간고한 돈벌이와 아끼는 생활을 보며 중국에 있는 우리들의 삶은 말 그대로 사치임을 절감하게 됐다.
한국에 입국한 조선족마다 정거장처럼 꼭 거쳐가는 곳이 있다. 노가다판이다.
이 노가다판을 통해 조선족들은 중국 국내에서 종래로 겪어보지 못했던 고된 로동관을 넘게 되고
의지를 굳히며 웬간한 고생은 고생이라 하지 않게 된다.
인력사무소
싸늘한 10월 1일 새벽 4시 반, 기자가 서울시 《신천지웨딩드레스》 뻐스정류소 부근에 이르렀을 때 캄캄한 밤하늘,
가로등이 조으는 사거리로부터 배낭을 둘러멘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들고있었다. 배낭속에는 작업복과 안전화, 장갑 등이 들어있다.
새벽 5시, 독산1동 사거리에 위치한 《(주)동서인력》에는 그날 일거리를 소개받으러 온 사람들로 꽉 찼다.
먼저 와서 등록을 해놓은 사람에게 먼저 일자리를 배치해 주니 서로 일찍 오는것이다.   사람들은 등록을 해놓고 걸상에 앉아 또는
여기 저기에 서서 사무소 인력배치일군이  자기의 이름을 부르기만을 고대하고있었다.
그러다가 자기의 이름이 불리면 노란색 싸인지를 받아가지고 하루 시름을 던 홀가분한 마음으로 건설현장을 향해 떠나갔다.
서울시에는 현대인력, 나나인력, 동서인력, 동양인력…
이같은 인력사무소가 몇백개 있다. 규모가 큰 사무소에는 매일 인력 200여명이 모여들고있다.
 
인력사무소는 보통 아침 5시부터 7시까지 근무한다. 7시가 되도록 일자리를 배치받지 못한 사람들은 한숨을 내쉬며 무거운 발걸음을
돌리는수밖에 없었다. 일군은 많은데 일거리가 제한되여 있는것이다. 기자가 찾아갔던 날도 일자리가 없어 돌아가는 사람들이 적잖았다.
그날 인력사무소에서 만난 한 조선족(연변)은 운 좋게 일자리를 배치받아 건설현장으로 떠나가더니 나흘후 기자가
다시 련계해 보니 기자를 만났던 그 이튿날부터 련속 나흘간 인력사무소에 나갔다가 일자리가 없어 되돌아오군 했단다.
회사에 근무하다가 반년전 회사에서 조선족들을 몽땅 내보내는 통에 회사를 그만두고 노가다판을 전전하는 다른 한 조선족은 일거리가 없어 거의 반년간 놀다싶이 했다. 그러다나니 그에게는 단돈 1만원도 없었다. 하루를 벌어 며칠을 살다나니 적금이란 있을수도 없었다.
그때 그와 함께 회사를 나왔던 조선족 6명중 1명만이 지금까지 회사에 취직을 하고 나머지 5명은 그날그날 벌이를 하고있다.
 
회사에로의 취직때까지 림시로 노가다판에서 일당을 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몇년간 줄곧 노가다판을 뛰는 사람도 있고
 매일매일 인력사무소에 와 일자리를 소개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력사무소로부터 건설회사에 한가지 일이 끝날 때까지
몇달간 고정일자리를 배치받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재간 있는 사람들의 일자리는 항상 있었고 일당 수입도 높았다. 장춘시 한 농촌에서 간 조선족은
6년째 건설현장에서 고정목수일을 일당으로 하는데 일이 있는 날에는 일당 10만원(이하 한국돈)씩 받고있었다.
돈을 위해 고된 일 기꺼이 노가다판의 일자리 대부분은 건설현장의 철근 등 힘든 자재청리와 먼지를
들쓰는 청소같은것들인데 일당은 보통 6만원, 거기에서 인력사무소의 소개비 10%와 인력사무소에서
 현장까지의 왕복 차비까지 떼고나면 그날 수입은 5만원이다.
 
대형건물을 짓는 현장에서는 기중기를 비롯한 여러 가지 기계를 쓰지만 중소형건물을 짓는 곳에서는 사람이 모래, 세멘트, 벽돌 등을 등짐으로 4충, 5층으로 메여나르고있었다. 비록 일은 힘들지만 일당 7만, 8~9만원씩 주어 조선족들은 그런 힘든 일을 기꺼이 하려고 했다.
노가다판에는 한가지 단순하게 통하는 법칙이 있다. 부지런하고 일 잘 하는 사람은 일자리가 잘 차례졌고 몸을 아끼고 꾀를 부리는
사람은 일자리가 잘 차례지지 않았다. 새벽에 건설현장측에서 인력사무소에 일자리를 위탁하면서 그 전날 일한 사람들중 누구는
요구하고 누구는 싫다는 요구가 들어오는것이다.
한 조선족은 힘든 일을 힘들게 하는것은 물론 쉬운 일도 직심으로 하다나니 항상 힘들게 일했고
그러는 그에게 인력사무소에서는 매일 우선적으로 일자리를 소개해주었다.
 
그날 그는 인력사무소로부터 지하철공사장에 배치받았다. 그날도 그는 당연 일당 순수입 5만원으로 예상했다.
철관, 콩크리트를 날라다가 철관을 박고 세멘트를 때려넣는, 알맥이 드는 일인가 하면 세멘트가 굳은 다음
받치고있던 것들을 쳐서 떼낼 때 자칫하면 사람목숨을 잃을 위험이 있는 일이였다.
 
하루 일이 끝났는데 일을 잘 했다며 건설회사측에서 노랑색 싸인지에 일당 수입 8만원이라고 적는다. 거기서 인력사무소 소개비 1/10을 떼고나면 그의 수입은 7만 2000원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현장책임자는 그에게만 따로 가만히 현금 2만원을 더 주며 이것은 인력사무소와 상관없이 네가 가지란다. 그러면서 한시간 더 일해주지 않겠냐고 제의했다. 당연 하겠다고 했다. 비록 지칠대로 지쳤지만 힘들고 위험하다기에 앞서 이틀 일할 수입을 하루에 얻는것인데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다.
《조선족》이여서 손해를
그렇게 힘들게 일해 버는 와중에 조선족은 손해보는 일도 종종 있었다.
한 조선족은 인력사무소로부터 그날 다른 한국인 2명과 함께 건설현장에 배치받았다.
현장에 도착하니 그들 셋을 보고 현장책임자가 모래를 메날라보란다. 모래를 쪽지게에 담아 날라보였더니
셋중 한 한국인을 불러 《당신들 셋이서 오늘 4, 5, 6층에 모래를 다 메나르면 인당 일당 12만원씩 주겠다》고 했다.
한국인일군은 일 잘 하는 조선족을 믿고 하겠다고 했다.
그 뙤약볕에 한국인 일군 둘은 오전에는 조선족과 같이 일을 잘 하더니 오후에는 지칠대로 지쳐 조선족이 모래를 두번 메여나를 때 한번 메여날랐다. 지치기는 매 한가지, 조선족은 밸이 우뚝 치밀었지만 돈을 바라고 꾹 참고 일하는수밖에 없었다.
원래 셋이서 조선족이 일하는 속도라면 오후 3시에 끝낼수 있는 일을 저녁 6시 반에야 끝냈다.
그럼에도 건설현장 책임자로부터 셋의 돈 36만원을 받아온 한국인일군은 조선족에게 단 6만원만 내주는것이였다.
왜 6만원뿐이냐고 따졌더니 이번엔 9만원을 주었고 《왜 또 9만원이요?》라고 따졌더니 《그럼 얼마요?》라고 되묻기에
《당신들 몰라서 나한테 묻소? 내가 다 아는데》라고 했더니 딱 1만원을 더 얹어준다.
 
주먹이 춤을 추는것을 겨우 참고 그것을 받고 현장을 떠나는 조선족의 마음은 말이 아니였다.
가장 두려운것은  힘든 일보다 실업회사 다니는 사람은 적잖게 회사숙소에 들어있어 주숙과 식사 걱정이 없지만
노가다판에 다니는 사람은 세집을 잡아야 한다. 여름에는 뙤약볕에 땀벌창이 되여 일하고 겨울에는 손을 얼구며 일하다나니
고되고 힘들지만 용역사무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런 고생보다 더 두려운것이 따로 있었다. 바로 실업이다.
용역사무소에 갔다가도 일자리가 없으면 그날은 실업이고 비가 와도 실업, 남들이 다 즐겁게 보내는 명절날도 그들에게는 실업의 날로
다가온다. 일이 없는 날에는 하루 세끼 자체로 해결해야 하고 교통비, 집세, 수도물세, 전기세 모든것이 공으로 지출된다.
 
이튿날의 일자리를 위해 조선족 대부분은 매일의 그 힘든 일에 몸을 아끼지 않고 일했고
그래서 인력사무소로부터 한국인 일군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있었다.
 
아침 4시 반에 일어나 차타고 인력사무소에 가서 일자리를 소개받고 또 차타고 현장에 찾아가 일하기 시작하면 보통 저녁
7시에야 일이 끝난다. 현장에서 노란종이에 싸인을 받아 다시 차타고 인력사무소에 가 일당수입을 받아갖고
또 차타고 녹초가 된 몸으로 세집에 들어설 땐 흔히 밤 8시다. 장장 15시간 반이 걸리는것이다.
어느 나라거나 노가다판은 최하층의 일자리건만 그런 일이나마 매일같이 보장받기 위해  일부 조선족들은
인력사무소 인력배치원에게 중국에서 갖고간 인삼정, 웅담 같은것을 슬그머니 찔러주기도 하고
지어 현금 10만원을 주면서 계속되는 일자리를 부탁하기도 했다.
건설현장에서는 사고가 빈발한다. 고층에서 떨어져 즉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현장에 널려있는 못을 밟아 발을 상하고
쇠파이프를 잘못 디뎌 미끌어 넘어져 머리, 허리 상하고 발목을 삐는 일들이 적잖았다.
한국에 간 우리의 남편, 우리의 아빠, 우리의 형제, 우리의 친척들은 이렇게 벌고 고있었다.
노가다판에도 게으른 자가 있어힘든 일을 하려고만 하면 건설현장에는 철근을 절단하거나
묶고 운반하는 철근일, 형틀목수 보조일 등 힘든 고정일자리가 일부 있다.
처음에는 일당 7만원, 석달후에는 8만원 9만원까지 오른다.
헌데 힘들다고 용역사무소에서 돌아올지언정 그런 일은 하려 하지 않는 조선족도 일부 있다.
또 노가다판에서 울지도 웃지도 못할 일들도 종종 연출되고있다.
 
어느날 한국인 28명과 조선족 2명이 대형 지하건물에서 자재정리 일을 하게 됐는데 전기를 켜놓았어도 현장은 어둑시그레하다.
그 속에서 30명이 왔다갔다하며 일하니 한두사람이 빠져도 누구도 모른다.
 
이날 왕청에서 간 한 조선족은 오전에 반시간가량 일한 후 밖에 나가 놀다가 점심시간을 맞춰 돌아와 점심을 얻어먹고는
오후에 또 나가 놀다가 일이 끝날 무렵에 들어와 일당을 챙겨갔다. 함께 간 다른 한 조선족이
《일할 때 왜 보이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힘들어서 밖에 나가있다가 왔다》며 제발 말하지 말아달라고 사정했다.
 너무 가련하고 또 같은 조선족이라서 그날 다른 한 조선족은 모르는체 눈을 감아주었다.
 
한국인 몇십명과 함께 일하는 현장에서 꾀를 부리는것은 그래도 괜찮은데 조선족 몇이 함께 일할 때 꾀부리는 사람이 있으면
참으로 힘들다. 언젠간 조선족 네명이 건설현장에 파견되여 함께 일하게 됐는데 한 조선족이 화장실에 간다고 간것이
두시간 뒤에야 돌아왔다. 그 사이 넷이서 할 일을 셋이서 하다나니 많이 힘들었다. 그 조선족은 돌아와서 미안해하며
《맥주 살게》 했고 사람당 맥주 한병씩 건네주는것으로 넘기였다.
 
노가다판의 《우점》
재한 조선족들에게 있어  노가다는 노가다대로 《우점》이 있었다. 우선 노가다판에서는 일당을 지불해 주지 않는 일이 없었다.
만일 건설회사측으로부터 미처 돈이 건너오지 못하면 용역사무소에서 선대를 해주는것이였다.
그리고 눈물나는 일이지만 조선족들에게 있어 건설현장에서 아침, 점심 밥을 제공해 준다는것이 참 좋은 일이였다.
수입에서 그만큼 식비지출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머슴을 부리려면 배불리 먹이라》는 말과 같이 건설현장에서는 좋은 음식은 몰라도 배불리는 먹이고있었다.
이렇게 우리들의 남편, 아들들은 거액의 빚더미를 걸머지고 한국 노가다판에서 그 힘들고 위험한 일을 감내하고
최대한의 지출을 줄이며 돈을 벌어서는 빚을 갚고 가족의 생계를 담보하며 자식들의 공부 뒤바라지를 해주고있는것이다.

김정애기자
서탑 코리아타운 21세기 조선족 전망대

 

[한국미디어] 2006-04-27

2006/04/25 동북아신문


 

조선족은 떠나고 있다. 한국이나 외국으로, 국내 대도시로, 떠나는 조선족을 말릴 수 없다. 조선족의 집 거구 연변농촌과 산재지구의 조선족 인구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경재, 문화 등 다양한 요소와 질의 변화는 조선족 삶의 구도를 이미 개변시켜 놓았다. 누구도 백 년의 역사를 가진 조선족이 한국이나 중국 자체 내에서 흔적 없이 사라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한민족과 중화민족 사이에서 조선족의 가교역할은 독특하다. 그리고 조선족은 자기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야 할 것이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근년 내 국내 대도시로 진출한 조선족은 점차 집 거구 양상을 띠면서 코리아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청도, 위해, 심양, 북경 등의 집중운거와 변화된 모습들이 그 점을 설명해주고 있다. 심양 서탑가 코리아타운은 중국조선족의, 어떤 중요한 전망대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심양, 동북아 지정학적 중심지



 

▲ 서탑

심양은 지정학적으로 서울과 북경의 중간 지점에 있으며 중국으로 가는 가장 가깝고 평탄한 길이다. 또한 위쪽으로 장춘, 하얼빈, 나아가 러시아, 몽고로 통하고 아래쪽으로는 항구도시 대련으로 통한다. 하기에 일본은 20세기 초에 이미 심양을 대륙 침탈의 관문 도시로 삼았던 적이 있다. 일제는1931년 봉천(현재 심양)에서 918사변을 사변을 일으켜 만주지역으로 일본 관동군을 진출시키고 전 만주를 점령하였다.

한중수교이후, 많은 한국기업들은 심양을 하나의 거점으로 삼고 중국진출에 성공했었다.

서탑가에 뿌리 내린 조선족의 역사

서탑가 유래는, 심양 시내에 동서남북에 탑이 있는데 서쪽에 있는 탑이 위치한 곳이라고 해서 서탑이라고 했다. 예부터 봉황이 깃든 살기 좋은 곳이라, 당지 사람들은 봉황이 떠나지 못하도록 탑을 세우고 네 귀를 든든히 못박아놓았다고 한다. 서탑은 1998년 11월에 재시공하였다.

조선족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기, “조선독립운동가의 과부들이 그곳에서 국밥장사를 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이국땅을 찾아온 독립 운동가들을 위해 국밥이라도 한 그릇 대접하겠다는 생각에서 당시 번화가였던 심양 역 부근에서 떨어졌던 곳에 국밥집을 차렸고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로 장사가 잘되었다고 한다. 이곳의 조선족 뿌리는 그렇게 형성된 것이었다.

서탑가, 조선족이 사는 빛과 냄새

서탑가는 심양 역에서 버스로 5분 거리에 위치하여 있다.



 

▲ 서탑가 코리아타운 길머리

코리아타운은 사방 1km의 거리로, 조선족 백화상점과 한성 구물광장의 빌딩을 중심으로, 활발한 경제활동의 지역이자 상업의 지역으로, 소비의 중심지역이다. 시부대로(市府大路), 연변가(延邊街), 신개도가(新開道街) 중심으로 한성 구물광장 빌딩의 뒤편에는 조선족 의원과 서탑 시장이 있다.

조선족 백화상점 앞에는 정창 호텔과 서울 호텔, 녕대 호텔의 빌딩이 있는 시부대로(市府大路)가 있고, 조선족 백화상점 옆 건물은 조선문 서점이 있고, 옆의 도로인 연변가는 노래방과 사우나, 식당, 술집 등이 밀집된 거리이다. 많은 한국 사람이 오가는 서탑가는 보따리 상인이나 자영업자나 기업이나 단체에서 꼭 들러 보는 명소이다.

신개도가(新開道街)에는 볼링장, 당구장, 식당, 카페, 한국음식 전문 식당가와 노래방이 있다.

서탑가, 도처에 조선 글이 보이고 조선말이 통하고 조선족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서탑가는 삼국인의 코리아타운


 

▲ 서탑가 상점안에서

서탑의 역사적변화의 전기는 한중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시작, 한중 수교 이후 한국인이 심양을 찾았고, 그 곳을 찾은 한국인들은 언어가 통하고 같은 민족이 모여 사는 서탑으로 모여들어 코리아타운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또 상업 등 경재교류가 활성화되면서 한족들이 모여들고 정부도 투자하면서 중국인, 조선족, 한국인, 북한인들이 모여 사는 삼국 공동체가 이뤄진 것이다.

이곳에는 한국, 중국, 북한 삼국의 경계가 없다. 서탑가 길목에는 북한의 평양관이 있고 한국인, 중국조선족, 북한사람 그리고 중국의 한족 등이 차린 민박, 식당, 노래방, 슈퍼 등을 중심으로 유흥업소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삼국의 일반주민이 한 데 어우러져 생활하고 사업하는 삼국 공동의 장이 된 것이다. 사람에게 “먹고 자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은 가장 기본적 생활양식이요, 그것이 바로 삼국의 가장 기본적 생활의 공통점을 찾아나가는 출발점일 것이다.

서탑은 마치 21세기 한국, 중국, 북한 삼국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동북아의 창”이요 전망대 같았다. 현재 이 같이 삼국의 주민들을 그 구성요소로 삼고 형성된 지역은 중국에 심양 서탑 밖에 없다고 한다. 때문에 서탑은 동북아의 화합과 공존의, 메커니즘의 모델로 떠오를 것이 분명하다.

서탑가, 북한의 창(窓)



 

▲ 서탑가에 있는 전주성

아침에 서탑가 길목에 반듯이 자리 잡은 평양관을 찾았을 때 식당은 좀 한산했지만 2층 커피숍에는 손님들이 꽤 많았었다. 커피숍 바에는 각가지 양주와 커피들, 특히 조선(북한)산 차들이 잘 진열되어 있었다. 커피숍 마담은 스무 서너 살의, 순수한 미모의 평양아가씨이었다.

자주 찾는 이들은 한국 사람들과 조선족, 마흔나마 된 한족 우유배달부가 와서 아가씨는 신기하게 중국말로 의사소통을 했었다. 서탑의 물류나 시장정보에 꽤 밝아 보이였다.


 

▲ 평양관 커피숍의 평양아가씨

가보지는 못했지만, 요즘 모란관에는 평양아가씨들의 공연을 볼 수 있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고 한다. 평양대학을 졸업한 17명의 아가씨들이 종업원으로 일하는 그곳에, 아가씨들이 손님들을 위해 하루에 2번 씩 무료공연을 해주고 서비스도 깍듯이 해주는데 3년 후에 평양에 돌아가 서비스업에 종사할 예정이라고 한다.

날마다 북한 노래로 흥겨운, 북한의 개혁개방을 엿볼 수 있는 창(窓)이였다.

밝아지고 커지는 한민족의 전망


 

▲ 서탑가에 부는 한류바람

서탑 재개발은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한다. 현재 지역면적보다 10배나 확장될 것이라 한다. 동쪽은 남경가, 서쪽은 서탑가, 북쪽은 영구로, 남쪽은 서부대로 개발하는데 보행가의 쇼핑몰이며 입구에 신축될 원주형 30층 높이의 원스톱 라이프 식 건물이며 5성급호텔들은 한국자본의 대량 투입으로 한민족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전말을 밝게 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건설주기는 3년, 주체공사는 약 2008년에 완공할 예정이라 한다.

서탑가, 한민족의 정체성을 이뤄갈 수 있을까?

심양에 살고 있는 조선족 인구는 약 8만 명, 서탑가에 사는 조선족 인구는 아직 정확한 통계가 나오지 않고 있다. 서탑조선족소학교(초등학교)가 있는데 어쩜 조선족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하나의 명물이라 하겠다.

기실 조선족을 조선족이라 할 수 있는 기본 요건은 조선 글을 읽을 수 있고 조선말을 할 수 있고, 한민족 간에 무리 없는 대화를 나누며 타민족보다 빠른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그래서 남다른 정으로 끈끈히 이어져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메커니즘들이 아닐까?

서탑은 이제 조선족이란 차원을 넘어 한국사람 북한사람까지 포함한, 우리 민족의 교육체계를 이루면서 민족문화와 민족경재를 발전시켜 나가야 우리 한민족의 정체성이 형성되지 않겠나 생각해 본다.

 이성주 기자

한중교류 증진 세미나
2006. 7. 13 인천차이나클럽 주최 세미나 주제발표 자료

발제자/ 김용필 중국동포타운신문 편집국장

<발표요약>

1. 중국동포들의 ‘코리안드림’ 20年

2. 중국동포는 ‘불법체류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시각

3. 중국동포의 불법입국 -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4. 한국속 중국동포타운 - 한국과 중국문화의 접합점

5. 한국인과 중국동포 - 반듯이 극복해야 할 갈등과 불신의 벽

6. 중국동포 ‘합법화 시대’를 맞이하며  


1. 중국동포들의 ‘코리안드림’ 20年

중국동포가 처음 한국 땅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것은 88서울올림픽을 앞둔 1987년부터이다. 이것은 1945년 남북분단 역사 이래 42년만의 만남이며 올해 들어 꼭 20년째 만남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987년 중국동포는 지금처럼 연변 연길공항에서 곧바로 인천공항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홍콩을 경유 홍콩주재한국영사관에서 발급해주는 한국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 한국으로 들어오는 절차를 밟았다. 한국여행증명서는 KBS이산가족찾기운동에 의해 방송이나 편지로 한국에 있는 친척과 연계가 되면 친척의 초청장을 근거로 중국동포들에게 제한적으로 발급해주었던 것이다.
이런 경로로 들어오는 중국동포들의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90년대에 들어서 한달에 100여명 정도 들어와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기 전 국내에 체류하는 중국동포 수는 2,000여명 수준이었다. 그러다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를 분수령으로 하여 중국동포들은 중국여권으로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입국자 수도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88서울올림픽을 전후로 중국조선족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은 아주 높았다. 공중파 방송을 통해 많이 듣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중국동포들은 북한보다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 훨씬 잘 사는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90년대초 중국동포는 보통 약장사로 통했다. 최초의 중국동포 입국자들은 불법취업 목적보다는 단기간 방문으로 한약재를 팔아 경비를 마련하는 보따리 장사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한국에 갔다가 돌아온 고향사람들로부터 한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차차 조선족사회에 ‘코리언드림’이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30년 근무를 한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 문화춘 심사과장은 “92년 한중수교 전만해도 조선족동포들이 한국에 와도 마땅히 일할 곳이 없었다. 당시 한국인 임금도 월 50만원 수준이었다. 조선족동포들이 불법체류하며 일을 해도 월 40만원을 벌면 많이 번 시대였다. 그런데 1992년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고나서 당시 정부는 200만호 주택건설 정책이 발표되고 일산, 분당 등 신도시 아파트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건설현장에서 건설노동자가 부족하자 언어 소통이 가능한 중국동포들이 단순노동자로 상당한 수입을 얻어가는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중국동포 불법체류 문제가 사회문제로 가시화 된 것은 1992년 6월 10일부터 7월 31일까지 실시한 ‘불법체류 자진신고’ 기간을 실시한 후부터였다. 국내에는 이미 외국인노동자가 10만명 이상이 들어와 있었고 이 기간에 신고한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는 6만여명이었다. 그 중 중국동포가 상당수 차지하였다. 이때부터 중국동포 불법체류문제가 한국사회에 대두되기 시작하였고, 20년째 된 올해 작년에 이어 제2차 동포귀국지원프로그램이 나와 중국동포사회가 새롭게 변모해 나가는 발판이 마련되고 있는 것이다.

2. 중국동포는 ‘불법체류 외국인노동자’라는 시각에 대해서

중국동포들은 왜 불법체류자가 많은가 묻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중국동포를 보면 모두 불법체류자인 것으로 인식하는 한국인들이 많다. 따라서 중국동포들의 불법체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은 중국동포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첫째, 중국동포들이 불법체류자로 한국에서 생활하는 것은 일부러 출입국법을 어기고 불법체류를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無知와 人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권 유효기간과 체류기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동포들도 많고, 또 체류기간이 언제까지 허용되는지도 모르고 친척집에서 생활을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불법체류자가 된 경우도 많다는 것을 동포들을 상대하면서 알게 되었다.  

둘째, 자녀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중국동포들이 한국에서 일을 해 돈을 벌기 위해 불법체류자로 남아있는 현상이 늘어났다.
조선족사회는 전형적인 농촌사회이다. 일년에 농번기라 할 수 있는 3개월동안 일하고나면 나머지 시간은 거의 일거리가 없다. 이런 과정에 중국이 80년대 이후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조선족사회의 자녀 교육에 대한 관심은 점점 커졌다.
주목할 사실은 조선족사회는 한 자녀를 둔 한족 가정과 달리 2 자녀 이상을 키웠기 때문에 생활비가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한족사회보다 조선족사회가 상대적으로 대학과 유학을 다니는 자녀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유엔 보고서에 의하면 2000년 말까지 전세계 유학생 수는 160만명에 달하며, 2003년 중국유학생 수는 46만명(중국인구 13억명)이며 조선족유학생은 한국(약 3500명 조선족유학생)과 일본을 중심으로 미국, 카나다, 오스트랄리아,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선진국에 널리 퍼져 있으며 그 규모도 최저 1만명이 넘는다고 밝혔다. 조선족 인구는 중국인구총수의 1/650(0.15%)밖에 안되는 데 반해 인구당 차지하는 조선족유학생비례는 중국평균유학생비례의 10배에 달하는 것이다.
미국, 중국 등 학자들의 합작연구결과에서도 중국 56개 민족 중 조선족의 교육수준은 제1위로 드러났으며, 2003년 9월 27일 민족통신에 의하면, 제5차 전국인구 조사결과 중국의 100명당 지식인구 비중이 조선족(96.96%), 백족(91.27%), 만주족(88.18%), 까자흐족(86.53%), 투쟈족(86.41%), 동족(85.22%), 한족(84.91%)였다.  
중국의 56개 소수민족중 조선족은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유난히 자녀 교육열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실 예로 연변에서 자녀를 좋은 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해 과외공부가 성행한다고 한다. 교원출신의 동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연변에서 학생과외를 통한 수입이 적지 않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연변의 동포들 중 고위공무원과 교원출신들도 자녀교육 뒷바라지를 위해서 부부 중 한명은 한국에 나와서 막일과 식당일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중국동포의 이런 이주노동 현상은 70~80년대 한국농촌의 젊은 부부가 자녀교육의 미래를 생각하고 농사짓는 땅을 팔고 서울 등 대도시로 이동한 현상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고 무자본의 한국인노동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중동으로 진출하고 ‘아메리카드림’을 갖고 미국에 가서 불법체류자로 생활하며 돈을 번 현상과 유사한 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실시한 법무부의 ‘불법체류자 자진신고기간(02.3.25~5.25)’에 접수된 불법체류외국인 수는 25만6천여명(93%가 신고함), 이 중 중국인의 자진신고가 15만명인데 중국동포만 본다면 10만명이 넘었다. 이 때 밀입국자도 상당수 자진신고를 하였다.
이렇게 다른 외국인과 달리 중국동포들의 불법체류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이유는 한국사회에 빨리 적응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중국동포들이 조상들이 개척해 가꾸어놓은 드넓은 농토를 팔아서 한국과 대도시로 진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결국 중국에서 재정착해 살아야 할 중국동포들이 근거지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족사회 내부에서도 해체위기에 놓인 조선족농촌을 되살리기 위해 한국농촌 사회와 함게 방안 모색에 열중하고 있어 희망을 찾을 수 있어 다행이다.

셋째, 브로커들에 의한 불법입국이 중국동포들의 불법체류를 부추기게 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동포들의 불법입국 경위를 면밀히 들여다보면 순박한 조선족동포들에게 한국에 대한 환상을 심어준 브로커들의 소행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에 오면 쉽게 돈을 벌게 해주고 또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기한이 3개월이면 끝나는 데도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고 5년을 체류할 수 있으며 영주권까지 얻게 된다고 속여 중국동포의 한국행을 부추기는 사례도 많다.
브로커의 말을 들어보면 1000만원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중국동포들은 쉽게 갖게 되며 ‘코리언드림’에 푹 빠지게 된다. 한국에 가지 못하는 사람은 바보로 여겨질 정도였다고 한다. 어찌보면 중국동포의 한국행은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결단을 내리고 한국에 왔지만 결국 브로커에 속아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돈도 아무 영수증 없이 현금으로 주었기 때문에 증거도 손에 쥔 것이 없는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서 오로지 살아남는 길은 한국에서 불법체류하며 사기당한 돈을 벌어 갚고 생활밑천을 마련하는 길뿐인 것이다.
그나마 한국에 온 사람들은 다행이다. 회사이름으로 초청해준다 해놓고 돈만 가로챈 브로커들에게 걸리면 한국땅도 밟아보지 못하고 영락없이 사기피해자로 중국땅에서 떠돌아다녀야 하는 신세로 전락한 중국동포들 또한 적지 않다.

넷째, 번 돈을 상업자본으로 돌리지 못하고 한국입국비용으로 대여해주는 악순환이 중국동포의 불법체류가 늘어나게 된 배경이 되었다.  
한국에 진출해 나름대로 성공한 동포들도 있다. 한국에 와서 1년만에 빚을 갚고 2년 더 일하면 중국에서 벌 수 없는 큰 돈을 벌게 된다. 문제는 중국동포들이 그 돈을 건전하게 상업자본으로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친척이나 고향사람들이 한국에 들어오는데 밑천으로 빌려준다. 그렇게 하다가 한국에 오는 것이 실패하거나 돈도 못벌고 단속에 걸려 강제추방을 당하면 당사자는 고향땅을 들어갈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또 여러 명이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부인이 먼저 와서 남편의 입국비용을 대는 경우, 또는 남편이 먼저 와서 부인의 입국비용을 대는 경우가 일반적인 사례인데, 그런 경우 브로커를 통해 여권을 위변조하거나 위장결혼 방식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법과 제도에 대해 無知한 상태에서 그저 한국에 오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만 갖고 들어온 중국동포들이 불법체류자로 고액의 빚을 지고 한국생활을 시작해야만 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지금까지 지속되어 왔다.
그런 사정에 놓여있는 중국동포들을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강제추방을 시킨 법무부 출입국공무원과 경찰관에 대한 두려움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국내에서 생활하는 조선족동포들은 항상 쫓기는 듯한 인상과 불안감과 초조함, 그리고 언제 붙잡혀 강제추방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고 거짓말을 하며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에 빠져있게 되는 것이다.
단속에 걸려 강제추방을 당한 중국동포들의 고통은 아주 큰 것이었다. 고국에 대한 원망도 컸을 뿐만 아니라 강제추방 당한 동포들은 또다시 빚을 내어 여권을 위변조하거나 밀입국으로 재입국을 시도한다. 이런 것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속에서 ‘불법체류외국인노동자’로 살아야 했던 중국동포들은 1999년 9월에 재외동포법이 발표되었을 때 명동성당에서 거꾸로 매달려 시위를 하며  ‘부자집으로 시집간 딸은 딸이고 가난한 집으로 시집간 딸은 딸이 아니냐’며 한국정부의 재외동포 차별정책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관련 2000년도에 들어서 두드러진 특징은 중국동포 관련 종교단체들의 활동이 활발해졌고, 그것을 배경으로 한국정부의 차별정책과 단속위주의 정책에 맞서 시위에 동참하는 중국동포들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기자와 인터뷰를 하거나 카메라에 얼굴이 찍히는 것을 두려워했던 동포들이 종교사회단체에 의지해 “이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할 말은 해야겠다”는 입장으로 나온 것이었고 그것이 곧 국내에서 중국동포를 바라보는 시각을 크게 바꿔놓는 전환점이 되었다고 본다.
이로 말미암아 한국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동포들의 국내에서 생활모습이 TV화면으로 비춰지기 시작했고 안산 원곡동과 서울 가리봉동과 같은 중국동포 밀집거주지역이 형성되어 이들만의 ‘독특한 문화지대’에 대한 언론방송의 관심도 커졌다.

3. 중국동포들의 불법입국,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한국에 친척이 없는 중국동포들 중 상당수가 밀입국, 여권위변조, 위장결혼 등 불법입국을 통해 들어와 인권사각지대에 놓여 있게 된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중국과 한국의 사회적 현실과 법․제도의 차이에서 비롯된 조선족사회의 비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중국에서는 돈만 주면 안되는 일이 없다 할 정도로 여권 호구부 등 공문서 위조가 쉽게 일어나고 큰 범죄처럼 인식되지 않는 반면 한국사회에서는 공문서위조는 무거운 형벌 대상자이다. 한국인과 중국동포 간의 국제결혼 수자도 급증하고 있는 시점에서 드러나는 문제점을 볼 때, 상대방이 누구인지 심사숙고해보지 않고 결혼하는 중국동포의 결혼관은 한국사회에서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서 문제해결이 어려운 점도 발생하고 있다.  
한 예로 결혼으로 들어온 중국동포 김정숙(가명)의 사례를 들어보고자 한다.
김정숙씨는 2003년 3월경 한국인과 혼인신고를 하고 같은 해 8월 한국에 들어왔다. 김복순씨는 8월 9일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가서 체류자격(F-2-1)을 부여받고 한국인 남편과 함께 2년 가까이 생활해오고 있으며 92세된 시어머니(2005년 5월 사망)를 1년간 모시고 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인천공항출입국 소속 직원이 2006년 6월 20일경 한국인 남편에게 확인 전화가 왔다. 결론은 인천공항출입국관리사무소 조사과에 출두하여 결혼해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달라는 주문이었다.
이때 인천공항출입국 직원이 지적한 것은 김정숙씨의 생년월일이 원래 56년생인데 왜 58년생으로 고쳐 들어왔는가 점이다. 여권위변조에 위장결혼으로 한국에 들어온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김정숙씨는 한국에 와서 잡혀간 것이 있어서 생년월일을 56년에서 58년생으로 고쳤다고 사실대로 실토하게 되었다.  
김정숙씨는 2000년 4월 14일 회사초청으로 들어온 적이 있다. 그 당시 체류기간을 연장하여 합법체류 기간 중 군포에 소재한 다방에서 종업원 식사를 제공해주는 주방 일을 하다가 체류목적외 활동으로 단속에 걸려 강제추방을 당하게 된 것이다. 당시 김정숙씨의 생년월일은 1956년 10월 7일생이었다.        
그런데 2003년 3월 김정숙씨는 한국인을 만나 결혼하여 제2의 인생을 살기로 하고 한국에 올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당시 김정숙씨는 생년월일을 58년 10월 7일생으로 고쳐 여권을 발급받게 되었다. 김정숙씨는 중국돈 150위안을 들여 합법적인 방법으로 호구부상 나이를 고쳤기 때문에 다시는 56년생으로 원상복귀가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출입국 직원은 김정숙씨의 말은 거짓말이고 어떻게 원적본의 나이를 그렇게 쉽게 고쳐서 나올 수 있느냐고 의심하고 있다. 이미 2년 가까이 결혼 생활을 했지만 결혼생활도 허위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와 김정숙씨는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출입국 직원을 어떻게 설득시켜야 될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왜 동포들은 밀입국, 여권위변조, 위장결혼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는가?  
그 이유는 한 마디로 한국에 정당하게 들어올 수 있는 문이 좁았기 때문이다.
중국동포들이 한국에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은 친척초청이 일반적 것이다. 그 상황을 보면,
2000년까지만 해도 친척방문 허용연령은 50세 이상이었으며, 2002.11.1 중국동포에 대한 입국문호 확대 차원에서 친척방문 허용연령을 종전의 45세에서 40세로 하향조정하여 시행한다. 대상은 국내의 배우자, 8촌이내의 혈족 또는 4촌 이내의 인척을 방문하고자 하는 자로 40세 이상인 자이다. 단, 한중수교(92.8.24)이후 국민과 결혼 등의 사유로 한국국적을 취득한 자가 중국거주 친척을 초청하는 경우 제외되었다.
2003.5.10 법무부는 취업관리제를 도입하여 중국동포들에 대한 고국방문 및 취업기회를 확대하기 위하여 친척방문 허용연령을 30세 이상으로 대폭 하향조정하고, 혼인․귀화 등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중국동포들에게도 일정한 범위내에서 친척을 초청할 수 있도록 현행 중국동포 입국절차를 개선했다. 가족당 연간 2명 이내에서 초청을 허용하고 입국후 불법체류하지 아니하고 귀국하는 경우 대체인원 초청도 허용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8촌 이내의 혈족 또는 4촌 이내의 인척으로부터 초청을 받는 30세 이상의 중국동포들은 주중공관에서 방문동거(F-1) 사증을 발급받아 입국하여 친척을 방문할 수 있게 되며, 또한 소정의 절차를 거쳐 음식점업, 청소업, 사회복지사업 등 6개의 서비스분야 등에서 합법적으로 2년간 취업할 수 있게 된다.
현행 친척초청 허용범위는 25세 이상으로 하향조정되었다. 그만큼 한국에 친척이 있는 동포들의 경우 한국입국이 수월해졌다. 문제는 200만 조선족동포 중 중 한국에 친척이 있는 인구는 30% 정도로 파악되며, 동포들이 가장 많이 밀집거주하고 있으며 교육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은 연변지역의 조선족동포들은 대개 북한출신들이 많은 지역이다. 따라서 연변 조선족동포들은 결혼으로 귀화한 자들에 의한 친척초청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게 중국동포의 한국 입국문이 좁다보니 결과적으로 불법입국을 알선하는 브로커들을 양상시켰고 이에 입국사기를 당한 동포들이 늘어난 원인이 되었다고 본다.

4. 한국속 조선족타운 - 한국과 중국문화의 접합점

한국에서 중국동포의 생활근거지를 찾아보면 초창기 서울역 뒷골목 판자촌에서 비롯되어 청량리, 난곡 등 한국의 빈민지역으로 퍼졌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중국동포들이 밀집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꼽으라면 대표적인 곳은 안산 원곡동과 서울 가리봉동이다. 안산원곡동과 시화․안산공업단지를 배후로 두고 있고 가리봉동은 구로디지털단지를 배후로 두고 있다.
가리봉동에 동포들이 밀집거주 하게 된 배경은 저렴한 방값을 지불하고 생활할 수 있는 쪽방이 많다는 것이다. 일종 벌집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70년대 구로공단에 전국각지에서 몰려든 젊은 한국인노동자들이 거주하던 방이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텅텅 비어있다가 90년대 후반부터 그곳을 중국동포들이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안산원곡동에는 동남아시아 외국인노동자들도 몰려있으면서 중국인과 중국동포들이 3만에서 5만명 가까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가리봉동은 5천에서 1만명이 거주하고 가리봉동을 끼고 있는 구로구와 금천구 가산․독산, 영등포구의 대림․신길, 관악구의 봉천․신림 지역에 3만에서 5만명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이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중국동포의 문화는 이색적이다. 향이 짙은 중국음식과 40도가 넘는 고량주, 대표적인 서민술은 코베이(컵술)이다.
즐겨먹는 음식은 개고기, 냉면, 만두, 양꼬치, 훠구어(샤브샤브) 등으로 한국풍보다는 중국풍에 더 가까운 음식문화를 엿볼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그동안 알려진 중국요리집, 차이나레스토랑의 음식과는 다른 정말 중국본토배기의 음식맛을 안산원곡동과 가리봉동 중국동포타운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음식문화를 놓고 볼 때 중국조선족은 분명 한국보다 중국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노래문화만큼은 영락없이 한국의 대중문화에 가깝다.
중국동포 밀집지역의 특징은 노래방이 많다는 것이다. 가리봉동의 경우 2002년이후 3배가 늘어 한 집 걸러 하나의 노래방이 있을 정도로 26개의 노래방이 생겼다. 중국노래도 있지만 역시 중국동포들이 많이 부르는 노래는 한국의 대중가요이다.    
필자는 중국동포타운이라 할 수 있는 가리봉동을 2000년부터 다니며 중국동포들의 생활면을 가까이에서 보아왔고 2003년 5월부터는 가리봉동에 거주하며 중국동포와 한국지역민이 함께 하는 동포타운을 만드는데 관심을 갖고 활동해 왔다.
활동을 하면서 필자는 ‘과연 중국동포와 한국인은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왔다.  
이것은 결코 쉬운 질문이 아니었다. 중국동포와 한국인은 서로 언어가 통하기 때문에 언어 장벽 없이 쉽게 친해 질 수 있지만 관계가 발전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속칭 끼리끼리 문화가 중국동포사회도 아주 강한 특색을 보이고 있다.
동북3성에 퍼져있는 중국동포들은 연변사람, 흑룡강사람, 심양사람 등 지역적으로 다양한 특징을 갖고 있으며 고향사람끼리 어울려 음식을 나누고 친목모임을 갖는다. 이것은 한국사람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한반도 4배에 해당하는 동북3성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200만 조선족사회는 지역색이 더욱 뚜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좋은 예로 중국동포들은 음식맛에 상관없이 고향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식품점 등을 단골집으로 정해놓고 이용하는 소비형태를 볼 수 있다.
또한 생활면에 있어서도 많은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가리봉 지역주민과 상인들이 갖는 중국동포에 대한 시각을 보면, 중국인(중국동포)는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술을 많이 마시고 놀음을 좋아하고 위아래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막말을 하고 교통질서를 지키지 않고 싸움이 일어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거친 기질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대체로 긍정적인 이미지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시각은 선진국 수준에 올라가 있는 한국사회와 생활문화에 20년에서 30년 가까이 뒤떨어진 사회에서 살다온 중국동포들이 사회질서에 대한 기본 인식이 부족하고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분석된다.    
분명 안산원곡동과 서울 가리봉동과 같이 중국동포들이 밀집거주하고 있는 지역은 한국과 중국문화가 공존하는 이색적인 지역임에 틀림없다. 이곳 지역에 살고 있는 한국인 지역민은 중국에 가보지 않고도 중국을 배울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5. 한국인과 중국동포 - 반듯이 극복해야 할 갈등과 불신의 벽

경제적으로는 10배 이상의 차이가 나고 사회체제가 서로 다른 환경속에서 50년 이상을 살아온 사람이 만났을 때 관계가 서먹서먹해지고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인과 중국동포의 만남은 상호 그리움에서 시작되었지만 결국 갈등과 불신이 점철된 20년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으면 안되는 안타까운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그런 가운데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이 30만을 넘어서고 앞으로 더욱 빠른 속도로 증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런 한국인을 ‘신선족(新蘚族)’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거주하는 중국동포는 현재 20만 가까이 되며, 앞으로 그 인원도 더 많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국적을 취득한 중국동포도 6만명 가까이 되고 있다.
중국동포와 한국인은 많은 차이점이 드러난다. 쉽게 말해 말은 통하지만 중국동포는 중국인이라는 것이다. 사고방식과 생활문화 등이 한국보다는 중국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중국동포들도 궁극적으로는 한국보다는 중국에서 살고자 하는 뜻을 갖고 있다. 중국에서 마땅히 할 일이 없고 생활이 어려워서 지금은 한국에 와서 국적도 따고 취업활동을 하지만 중국의 경제상황이 나아지면 중국에 가서 살겠다고 말하는 중국동포들이 더 많다. 실제로 한국에 몇 년씩 와서 돈을 번 중국동포들은 중국에 투자하여 정착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한 예로 한국인과 결혼한 중국동포들은 대개 여성들인데, 자녀교육을 대개 중국에서 시키고 있다. 한국에서의 교육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것도 한 원인이겠지만 자녀의 미래를 생각해볼 때 중국에서 교육받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의 교육을 선호한다는 것도 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인과 중국동포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이 유발되는 곳은 노동시장이다.
한국어를 구사하는 중국동포들은 다른 외국인노동자와 달리 건설현장, 식당, 가정부 등으로 취업이 가능하다. 그러다보니 노동시장에서 하루하루 일하며 살아가는 저소득층 한국인과 충돌이 일어나고 더욱 많은 갈등이 유발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중국동포 입장에서 보면 노동시장에서 같은 민족이고 또 한국인노동자보다 힘든 일을 더 많이 하고 노동시간도 긴데 임금차별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고, 한국인노동자 입장에서 보면 인력난에 고민하는 고용주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중국동포는 일자리를 잠식하는 중국인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노동시장에서의 한국인과 조선족동포의 충돌로 말미암아 한국인에 의한 신고로 강제추방을 당하는 중국동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악덕업주가 노동을 시키고 임금을 주지 않을 목적으로 불법체류 신분을 악용하는 사례까지 발생해 인권문제로까지 번져나간 것이다.
중국동포들은 한국사회에서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한다. 알려져봤자 도움이 안되고 오히려 불이익을 많이 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불법체류 상태에 있는 중국동포들은 임금체불 산업재해 등을 당하고도 강제추방이 두려워 말을 못하고 있는 경우도적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인 신분을 이용해 건설현장 등에 취업하는 경우가 늘어나 오히려 그것에 발목잡혀 어려움을 겪는 중국동포들도 많았다.
이것은 곧 중국동포들의 ‘반한감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중국동포의 반한감정이 최고조로 이르게 된 것은 2002년초 법무부 ‘불법체류 종합방지대책’이 나오기 전까지 인 것으로 판단된다.
분명 강조하고 싶은 말은 한국인과 중국동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국인 위주의 지나친 노동시장 보호정책 보다 열심히 일하고 생활하는 중국동포를 지원해주는 정책을 펼치는 것이 바람직하며 미래지향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과거에 빚어진 갈등과 불신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며 해체위기에 놓인 조선족사회를 바르고 건강하게 재조합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6. 중국동포 합법화 시대를 맞이하며

중국동포 불법체류외국인노동자 시대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합법화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것은 다소 때가 늦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이 되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국과 중국이라는 경제․사회․문화적 차이로 인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생각한다. 이젠 서로 이해하고 부끄러운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한국정부의 동포 포용정책 일환으로 실행한 2005년과 2006년도의 ‘동포 귀국지원프로그램실시’에 의거 불법체류 중국동포들이 합법적인 신분으로 한국에서 생활할 수 있게 해주는데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고 본다. 이로 말미암아 중국동포들이 한국정부에 대한 신뢰를 되찾고 모국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다시 갖기 시작했다.    
또한 한국정부는 중국동포를 위해 방문취업비자(H-2) 신설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중국동포는 한국에 5년동안 자유롭게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체류할 수 있고, 또 3년간 취업활동도 할 수 있게 된다.  
중국동포들이 절대 다수가 불법체류 상태에 있을 때와 합법상태로 전환되어 가는 현 시점에서 중국동포들의 생활방식 또한 달라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이젠 불법체류 중국동포의 인상을 지우고 새롭게 중국동포에 대한 시각을 가져야 할 때라 생각한다.
한국인이 중국동포에 대해 갖는 긍정적인 시각이라면 중국동포가 강한 독립심과 생활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동포는 13억 인구의 중국땅에서 수작농업인으로 우수한 민족성을 보여주었고 중국내 다방면에서 주요한 활동을 해왔고 지금도 우수한 인재들이 나오고 있다. 한국에서는 중국에서는 해보지도 않은 일도 돈을 벌기 위해 악착같이 일하는 중국동포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한국인이 하지 않는 3D업종에서 중국동포 대부분이 일하고 있다. 이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변화 발전하는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중국동포들의 한국사회와 한국인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
한국에서 3년 이상 생활해 본 중국동포들은 중국보다 한국에서 살기를 더 원한다. 그 이유는 한국의 발전된 문화양식과 한국인의 교양 있고 친절한 태도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고, 심지어 각 사업장에서의 서비스정신과 어려움을 겪는 이웃을 돕는 자원봉사와 나눔의 정신을 본 중국동포들은 한국사회에 와서 배워야 할 점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런 것을 볼 때 필자는 한국인과 중국동포는 상호보완적으로 서로 협력하면 충분히 함께 미래를 펼칠 수 있는 희망찬 시대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확신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된다는 것이 필자가 갖는 바램이자 동포활동가로서 갖는 사명이기도 하다.  <끝>
출처 : 인생은 차곡차곡
글쓴이 : 5월의 태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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