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 : 이세진 2007년 1월

딸이 그렇게 먹고 싶어하던 백원짜리 빵 먹이고 싶어 딸을 팔아---.
초췌한 꼴의 여인이 서 있었는데 그의 목엔 다음과 같은 종이장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
출처 : http://www.nkd.or.kr 김은주 
지금 내 주머니엔 돈 백원이 있다. 월급 2천원(한국 천원이 좀 못된다.)을 손에 쥘 때마다 천구백원은 장롱속에 넣어두고 백원은 반드시 시장에 들고 나온다. 돈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다. 단돈 백원도 없어 몇 달 전에 굶겨 죽인 아내와 딸에 대한 추억이 이 시장만큼 간절해지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 때 이런 돈이 있었다면 나는 절대로 그 귀한 생명들을 언 땅에 묻지 않았을 것이다. 아내에게는 이쁜 빗을, 딸애에게는 그렇게 졸라대던 밀가루 빵도 반드시 사주었을 것이다.

목숨이 질긴 탓에 홀로 살아남은 게 원수 같아서 언젠가는 양잿물을 사려고 나왔던 적도 있는 시장, 나는 특히 아이들 옷이나 장난감 파는 매점에 오래 서있는 버릇이 있군 한다. 그때마다 장사꾼들은 나를 보면 쌀이 있는가? 혹은 식용기름이 있으면 물건과 바꾸어주겠다고 서로 싸워가며 매달리군 한다.

한 것은 나의 시누런 군복을 보아서이다. 먹을 것이 없어 하루에도 수백명씩 굶어죽는 난리판이지만 당 간부들과 군대에만은 식량배급이 정상적으로 공급되었다. 그래서 군복 입은 사람들이 시장에 나오면 쌀을 팔려고 나오는 것으로 아는 것이다.

군복을 벗고 여기로 왔을 걸 하는 후회 때문인지 나는 그들의 팔을 신경질적으로 뿌리쳤다. 왜서나면 나야말로 가난한 군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군복 입은 지 석 달도 채 안되는 신입이다. 가족을 다 잃고 난 후 중앙에서 간부로 일하는 먼 친척 되는 사람이 총참모부에 줄을 대어 배급이라도 타먹고 살라고 입혀준 군복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해양학 전공의 대학 졸업증을 가지고 있어서 빽만 있으면 바보도 출세하는 나라인지라 국방연구소에 중위로 입대할 수 있었다.

그런 나에게 쌀을 달라고 하다니, 나도 바로 몇 달 전에 처와 자식까지 굶겨 죽인 짐승 같은 놈이라고 그들에게 버럭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래선지 가족 생각이 더 간절해져서 오늘은 과거를 돌이켜 볼만한 것을 하나라도 사야지 견디기 어려웠다. 뭘 살까.

나는 갑자기 허둥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던 나에게 한 장사꾼이 들고 있는 빵이 보였다. 딸애가 그처럼 먹고 싶어 하던 밀가루 빵, 그 앞으로 다가간 나는 품속에서 돈을 꺼내며 얼마인가 성급하게 물어보았다.

장사꾼은 마침 백 원이라고 대답했다. 빵이 든 봉지를 만져보니 아직도 따뜻했다. 순간 그 온기가 심장으로까지 스며들며 나의 두 눈도 더워졌다. 이 백 원이 없어! 이 백 원이 없어! 하는 부르짖음이 온 몸을 북처럼 때렸다. 아니, 아이도 못 만져 보았던 따끈한 빵을 네가 지금 사서 어쩐단 말인가 하고 매질하는 것 같아 손에 쥔 백원이 금방 떨렸다.

나는 미안하단 말을 던지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했다. 피하면서 빵을 만졌던 손을 불이 나게 불끈 쥐였다. 그 힘이 그대로 어깨에도 미쳤는지 사람들이 내 몸에 부딪치며 곱지 않게 흘겨 보았다.

나는 겹겹이 막아서는 인파를 뚫으며 시장출구로 향했다. 그런데 얼마 못가 도저히 전진할 수 없는 사람장벽에 막혀버렸다. 키 돋움을 해서 앞을 보니 가운데는 텅 비워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또 어떤 장사꾼이 기발한 아이디어로 구경거리를 만든 모양이었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조선에는 시장에 별의별 것이 다 있었다. 누구는 빈깡통으로 기름등잔을 만들어 팔았고 누구는 담배꽁초를 주어 힐터로 이불도 만든다. 풀죽도 먹기 힘든 나라여서 일명 송기떡이라고 하는 각종 나무껍질도 식용으로 많이 나온다.

세수물도 판다. 전기가 없어 도시에 물 공급이 제대로 안되기 때문에 맹물도 세수물이라는 상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장 어디가나 맹물세수는 5원, 비누세수는 십원, 이런식으로 세수하고 가세요. 소리치는 여인들이 허다하다.

나는 길이 열릴 때까지 참아 보려고 했지만 사람들의 땀 냄새와 비위생적인 시장 환경의 오물냄새 때문에 더 참을 수 없었다. 하여 군인스러운 거친 말투와 우직스런 몸동작으로 무작정 헤집고 앞으로 나갔다. 어찌나 빼곡히 몰려있었던지 내가 한번 움직일 때마다 그 모든 사람들이 다 흔들거리는 것 같았다. 마침내 땅이 보이는 곳에 다달은 나는 이마의 땀을 씻을 새도 없이 눈앞의 광경에 굳어지고 말았다.

시장안의 사는 사람, 파는 사람 모두 몰려서게 하는 그 가운 곳에 초췌한 꼴의 여인이 서 있었는데 그의 목엔 다음과 같은 종이장이 걸려있었던 것이다.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

그 여인 옆에는 정말 6살쯤 돼 보이는 처녀애가 죄진 것처럼 머리 숙이고 앉아 있었다. 순간 나는 등골이 오싹했다. 자식을 버리거나 남에게 주는 실례들은 많이 듣고 보아 왔어도 이런 거짓말 같은 상황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자식을, 그것도 빵 한 봉지 값에 팔다니, 모여선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으로 너나없이 저주를 퍼부어댔다.

“저 년 완전히 미쳤구먼”
“아무리 먹고 살기 힘들어도 자식을 어떻게 팔어?”
“생긴 건 바람둥이처럼 매끈한데 속은 흉물스럽기 짝이 없군”
“요즘 별의별 놈들을 다 보겠구만”

어떤 사람이 애 엄마가 맞긴 맞아? 하자 한 노인이 처녀애에게 묻기까지 했다.

“애야, 저 여자 정말 네 엄마냐?”

그 목소리에 모두가 입을 다물고 아이의 얼굴을 주시했다. 아이가 선뜻 대답을 않자 엄마가 아니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던지 여러 사람들이 꼬집듯 다시 물었다.

“야, 네 엄마 맞어?”
“네 엄마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
“우리가 있으니깐 일없어, 어서 말해”

쭈그리고 앉아있던 아이가 마침내 비실비실 일어섰다. 삽시에 주위는 조용해졌다. 내 옆에서 자꾸 온 몸을 굵던 사람도 그 때만은 손을 까딱 안했다. 처녀애는 어른들의 시선보다 갑작스런 정숙이 더 옹색했던지 엄마 옆에 꼭 붙어서며 중얼거렸다.

“맞아요. 울 엄마예요”

울 엄마, 그렇게 말하는 딸애를 돈 백 원에 파는 에미라니. 사람들의 분노는 한 충 더해졌다.

“저런저런, 애가 불쌍하구나”
“야 쌍년아 아이를 팔겠으면 제대로 팔아라. 백 원이 뭐냐”
“개도 삼천 원인데 딸이 개 값도 안 되냐!”
“제 입도 풀칠하기 힘든 세상에 누가 돈 주고 아이를 갖다 기를 사람이 있겠다고 저 지랄이야”
“그러게나 말이지. 차라리 아이를 키워달라고 사정하면 동정이라도 받겠다”
“백 원으로 부자 되겠냐 미친년아!”

그 소리들은 고함에 가까웠지만 여인은 두 눈을 내리 깔고 미동도 없었다. 그게 더 미웠는지 사람들의 욕은 더 거세져 돌덩이처럼 날아들었다.

누군가 “야 할 말 있으면 어디 변명이라도 해봐. 저거 벙어리 아니야”라고 하자 이번엔 욕질보다도 벙어리라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내 보기에도 그 여인은 정말 듣지도 말도 못하는 벙어리 같았다.

그때부터 다른 사람들도 저 여자, 저 여자라는 말 대신 저 벙어리라고 손가락질 하면서 서로 수군들 거렸다. 벙어리에게 아무리 욕을 해봤자 소용없겠다 싶었는지 누군가 이번엔 큰 소리로 아이에게 아버지가 없냐고 물었다.

또다시 시장 안은 조용해졌다. 아버지라도 있었으면 하는 하나같은 기대감에 어찌 보면 모두들 긴장한 듯싶었다. 아이는 좀 전보다 더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아부진 없어요. 먹지 못해서....”

여기까지 맥없이 중얼거리던 아이가 갑자기 머리 들며 또릿또릿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우리 엄마 욕하지 마세요. 울 엄마 지금 암에 걸려서 죽으려고 해요.”

비명처럼 들리는 아이의 그 소리는 사람들의 심장을 찌르는 창 같았다. 그 창 앞에선 어느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죽음보다 이제 곧 죽어야 할 삶을 볼 때가 더 침통한 법이다.

그 여인을 보니 이 세상 마지막 시간을 보는 것 같았다. 목소리라도 가지고 있다면 모든 사연을 쏟아 놓으며 통곡이라도 해보겠는데 그렇지도 못하는 것이 오죽하랴싶어 사람들은 더더욱 처량하게 벙어리 여인을 지켜보았다. 왜 이때껏 그를 한번도 동정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내 딸을 돈 백 원에 팝니다.” 그 글만 보고 왜 사람은 보려고 하지 않았던가. 어찌 보면 그 글로서 남들에게 더 동정과 배려를 받아보려는 모성의 최후 몸부림일 수도 있다.

나는 이런 생각으로 비로소 여인과 처녀애를 유심히 뜯어보았다. 엄마가 죽는다고 야단치는 딸애의 목소리에도 덤덤히 서있기만 하는 벙어리 30대 여인, 누렇게 떠 있는 얼굴은 이미 삶을 포기한듯 아무런 표정이 없었고 뼈가 마디마디 들여다 보이는 손에는 피도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옷은 그동안의 고단한 생활을 설명해주듯 여기저기 기운 흔적이 보였는데 바느질 솜씨가 깔끔했다.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손재간이 좋다는 말이 생각났다. 아이도 엄마를 닮아 미운 구석이 없었다. 갸름한 얼굴, 쌍까풀진 두 눈, 오똑한 코, 작은 입술, 이렇게 흩어보던 나는 아이의 입술 밑에 난 작은 김을 보고 흠칫했다. 내 딸애에게도 그 자리에 그런 작은 김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김이 있어야 복이 되고 보이는 곳에 있으면 화가 된다는 동네 어르신의 말 때문에 늘 가슴에 걸렸던 딸애의 흔적이었다. 그래서 처녀애의 불행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나는 딸애를 먼저 보냈는데 저 애는 아빠를 먼저 잃었구나 하는 처지의 공통심리가 작용하면서 언젠가 만났던 인연 같기도 했다. 어쩌자고 혹시 내가 저 애를 키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욕구까지 솟구쳤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머리까지 흔들며 그 모든 생각을 말끔히 털어 버리고 싶었다. 남을 동정하기엔 내 자신이 너무도 큰 불행이고 슬픔이고 죄인이었던 것이다. 남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들을 해보는 것인지 한마디씩 동정하기 시작했다.

“저 여자 죽으면 애는 정말 어찌 사노”
“엄마도 살고 애도 살면 얼마나 좋을까”
“친척 중에 애 기를 사람이 없을까?”
“에구 저거 불쌍해서 어쩌노”

그들 중 장사꾼으로 보이는 사람 하나가 모녀 앞으로 다가갔다. 장사꾼은 5백원을 꺼내 여인의 손에 쥐여주고 대신 목에 걸린 종이장을 벗겨내며 말했다.

“아주머니, 요즘 누구나 먹고 살기 힘든데 남의 아이를 돈 주고 데려다 키우겠다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 이 돈 가지고 가시우”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공감하는 소리들이 연발했다.

“맞아요. 그 사람 말 들어요.”
“어서 그렇게 해요. 여기 나와 있어야 병이나 더 심해져요. 엄마가 살아야 아이도 살지요”
“날도 찬데 아이 데리고 어서 가요.”

나는 그 말들이 고마웠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여인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 소리들을 못 들어서인지 아니면 듣고 하는 행동인지 벙어리 여인은 장사꾼의 손에 돈을 돌려주고 글을 다시 목에 걸었다.

5백원보다 애를 부양해주는 게 더 고맙겠다는 마지막 사정 같기도 하고 자기는 그 돈에 살아날 목숨이 아니라는 의미 같기도 했다.

이때 갑자기 비켜! 비켜!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사람들을 마구 헤치며 나타나는 사람이 있었다. 안전원이었다. 누구의 신고를 받고 왔는지 목적하고 온 듯 여인에게로 곧장 다가와 다짜고짜로 어깨를 툭 툭 쳤다.

“이 년이 미치지 않았어! 여기가 사람을 노예처럼 사고파는 썩어빠진 자본주인줄 알어? 당장 없어지지 못해!”

그러면서 여인의 목에서 종이장까지 획 잡아채어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 한 조각 한 조각이 땅 바닥에 뿌려질 때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동정이 증오로 바뀌는 순간들이 쌓여지다 못해 누군가 폭발했다.

“여 이 사람아. 그 여인 중병 걸린 사람인데 사정이나 좀 들어보고 그 야단을 치지”

그러자 여기저기서도 비난하는 소리들이 터졌다. 그들을 모조리 잡아갈 듯한 기세로 안전원이 사방을 일일이 둘러보자 그 면상을 쥐여 박기라도 하듯 이번엔 누군가 야유조로 웨쳐댔다.

“ 저 새끼 생고기는 냄새나서 아마 돈 백원에 시장 내놔도 사가는 사람이 없을거다”

순간 시장안은 와! 하는 웃음판으로 변했다. 분노로 얼굴이 험하게 이그러진 안전원은 그 자리에 더는 서있을 수 없었던지 벙어리 여인에게 달려들어 분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가자. 인간중심의 우리식 사회주의에서 이런 짓은 분명히 체제증상 모독죄야. 어디 네 새끼까지 정치범 수용소에 가 봐라.”

팔소매까지 걷어 올리고 안전원이 여인을 무섭게 잡아끌자 아이가 울음 절반 애걸 절반으로 사정하기 시작했다.

“아저씨. 우리 엄마 아파서 그래요. 제발 놔주세요. 엄마 가자. 엄마 죽을 때 나도 같이 죽으면 되잖어. 나 혼자 안살거야”

엄마랑 같이 죽겠다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아내와 딸의 죽음을 보는 착각과 함께 온 몸이 뜨겁게 달아 올랐다. 나만의 불행이 아니라 이 나라 인민이라면 누구에게나 다 있는 불행, 이런 불행의 나라를 금방 저 놈은 인간중심의 사회라고 했다.

노예제도 때도 사람은 사람 값으로 당당히 팔렸다. 그러나 백원에도 팔릴 수 없는 노예보다 못한 목숨들이여서 저 놈은 저렇게 지금 마구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모녀에 대한 동정도 동정이지만 그 놈의 행위가 얄밉기도 하여 벙어리 여인에게 다가가며 큰 소리쳤다

“이보시오. 내가 아이를 데리고 가겠소. 나에게 돈 백원이 있소”

내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뭐야!?” 하면서 나에게 머리를 돌리던 안전원은 나의 군복을 보고 뚝 굳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인의 손에 돈을 쥐어주며 나는 간절히 말했다.

“이 백원으로 당신 딸을 산다기보다 당신 모성애를 사는 것이니 그렇게 아십시오”

그리고 그 말을 시각적으로 확인시키기 위해 딸애의 여린 손목을 확신있게 잡았다. 내가 당장 데려 가려는 줄 알았는지 여인이 반사적으로 내 팔을 성큼 잡고 안절부절 못하다가 갑자기 사람들을 밀어내며 어디론가 급히 갈려고 하였다. 처음 그의 행동을 이해 못하던 사람들이 이내 그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나도 벙어리 여인의 돌발적인 행동이 몹시 의문스러웠다. 내가 마음을 다시 고쳐 먹을까봐 아이를 버리고 서둘러 달아나는 것인가. 정말 그렇다면 그 여인은 너무 어리석다.

혹시 어리석어서 제 아이를 정말로 백원에 팔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하다면 그 돈으로 양잿물이라도 사서 자살할려는가. 나는 같은 혈육의 생각을 읽어보기 위해서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아이도 당황한 듯 싶었다. 그러자 내가 너무도 큰 결심을 쉽게 한게 아닌가 싶어 조금 긴장이 되었다.

이때 사람들이 갑자기 술렁거리며 혀 차는 소리까지 들렸다. 머리를 들던 나도 아연해졌다. 펑 펑 울면서 다시 나타난 여인, 숨차게 달려 오기 바쁘게 아이앞에 무너져 앉으며 뻗치는 저 손의 것이 과연 무엇인가.

나는 흐려지는 눈을 껌뻑이며 다시 보고 또 보았다. 그것은 바로 아이를 판 백원으로 사 온 밀가루 빵 한봉지였다. 나와 모든 사람들을 더 울리게 한 것은 벙어리라고 생각했던 그 여인이 빵을 아이의 입으로 가져가며 왕왕 통곡할 때였다.

“아이고, 내 팔자야. 백원도 없어 딸을 팔아 빵을 사는 내 신세야! 아이고, 아이고”

2006년 7월 17일 김은주

자료제공 : 자유북한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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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파람(북한가요)
◆ 북한말
◆ 남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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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가급금
상여금
가녁
가,변,가장자리
가담가담
가끔,때때로
가닿다
도착하다,가서 닿다
가두녀성
가정주부
가두배추
양배추
가드라들다
오그라 들다
가라앉힘약
진정제
가락장갑
손가락은 제대로 다낸 장갑,손가락장갑
가락지빵
도넛
가려보다
판단하여 알아내다
가렴돋이
두두러기
가마치
누룽지
가무이야기
뮤지컬(musical)
가박지
항구의 외항
가사쌈
집안일로 집안사람들끼리 하는 싸움
가상훈련
리허설,시연
가슴띠
브레지어
가슴쓰리기
위통
가슴헤염
평영,개구리헤엄
가시물
개숫물,설거지 할 때 음식 그릇을 씻는물
가시아버지
장인
가시집
처가
가위주먹
가위바위보
가을뻐꾸기소리
믿을 수 없는 헛소리
가정약
가정상비약
가족금
가족 수당
가죽이공장
피혁공장
가지
갓(금방)
가지친말
파생어
각전
거스름돈,잔돈
간간하다
기쁘고 즐겁다,자지러게 우습다
간나
처녀,계집아이
간단없이
끊임없이,쉴새없이
간번
지난번
간이치료
응급치료
간참
간섭,참견
갈겨보다
아니꼽고 미운마음으로 쏘아 보다
갈구리달
초생달이나 그믐달 같이 이지러진 달
갈기다
혀를 세게 차다
갈람하다
갸름하고 호리호리하다
갈음옷
외출복
감탕
아주 곤죽같은 흙,갯벌 도는 더러운 물구덩이
감투
억울하게 뒤집어 쓰는 책임이나 누명
갑작죽음
돌연사
강구다
귀를 기울이다
강반
강기슭
강보리밥
꽁보리밥
강타기
얼음치기
개나발
허튼소리
개체머리없다
주책없다
개체위생
개인위생,몸거두기
개탕치다
개판치다
거느즉하다
긴장이 풀린 상태에 있다
거님길
산책로
거세차다
몹시 세차다
거의없이
틀림없이
거저일
단순이 여길 일
거접하다
가까이 접근하다
거푸시시하다
부스스하다
건건이
변변치 않은 반찬
건늠길
횡단보도
건발기
헤어드라이
건병
꾀병
건숭맞다
덜렁거리다
건으로
건성으로,공연히,터무니없이
걷묻다
뒤따르다
걸린문제
현안문제
걸상끈
안전밸트
걸써
건성으로
게바라다니다
나돌아 다니다
게바라오르다
기어오르다
게사니
거위
게츨레하다
게을러 빠져 너저분하다
겨울나이
겨우살이,월동
격검
펜싱,검도
결찌
이러저러한 연분이 닿는 먼 친척
경석
일반석
경우맞춤
임기응변
계호원
교도관
고기떡
고기를 끓인 국물
고모사촌
고종사촌
고삿고삿
구석구석
고속도선
쾌속정,쾌속선
고슬고슬하다
곱슬곱슬하다
고아대다
떠들어대다,고함치다
고즈근하다
고즈넉하다,아무 말없이 조용하다
고층살림집
아파트
곤기
피곤한 기색이나 느낌
곧은박이
고집불통,외고집
골살
이맛살
골서방
꽁생원
골집
심술,성이나서 골을 내는 요소 또는 바탕
곱새기다
되새기다,곱씹다
공걸음
헛걸음
공동욕탕
대중목욕탕
공민증
주민등록증
공중대고
일정한 근거나 목표도 없이 무턱대고
과따대다
몹시 떠들어대다
과일단물
쥬스(juice)
곽밥
도시락
관관강사
관광안내원
관문주의
폐쇄주의
교양원
유치원보모
교예
서커스,곡예
교화소
교도소,구치소
구경
마지막에는,결국
구경표
관람권
구레
웅덩이
구름다리
육교
구마니즘
휴머니즘(humananism),인도주의
구석차기
코너킥(corner kick)
구팡
토방
군가닥
쓸데없이 가닥이 져서 벌어진 군더더기
군관
장교,소위부터 대좌까지의 계급을 가진 군인
군숨스럽다
궁상맞다
굳잠,속잠
숙면
굴착선
준설선
굽인돌이
모퉁이,굽이길,커브
궁겁다
궁금하다
궁전(예:소녀궁전,문화궁전)
사회적 사명을 띤 훌륭한 건물
균 깡그리 죽이기
멸균(滅菌)
그루빠(러시아어)
그룹(Group)
그마마하다
그만그만하다
그시그시
그때그때
그악하다
모질고 사납다
그어당기다
끌어당기다
그쯤하다
그만하다
근로인테리
사무직근로자
글바보
책상물림,세상물정에 어두운 사람
금비
돈을 주고사는 비료,화학비료
급양사업
급식,식당,밥공장등을 통해서 음식을 공급하는 일
기계삽
굴착기
기공구
기구와 공구
기둥도표
막대그래프
기름과자
튀김과자
기름밥
기름에 볶은 밥
기름배
유조선
기사 날린다
기사를 송고한다
기상수문국
기상대
기슭바다
연안해
기요
중요한 기밀
긴장하다
모자라다
길깔이돌
포석,도로포장에 쓰이는 돌
길량식
먼길을 갈 때에 마련하여 가지고 다니는 양식
길섶
갓길,노견
까끈까끈
아리까리,알쏭달쏭
까벨
케이블(cable)
까비네트
케비닛(cabinet)
깜빠니야(러시아어)
캠페인,운동
꺼들이다
끌어들이다
꼬뼈
카피(copy)
꼭자무식
아주 무식한 것
꼴(을) 먹다
남에게서 반박이나 무안을 당하다
꼼무나(러시아어)
공동집단
꼼뮨
자치적인 공동사회
꼼바인
콤바인(combine),농작물 수확을 위한 자동종합기계
꼼비나트
콤비나트(kombinat)종합공장
끌바
끌 밧줄,배나 큰 물건에 걸고 끄는 밧줄
끌배
끄는 배,예인선
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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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힘
인력(引力)
남한말,북한말(ㄷ~)
◆ 북한말
◆ 남한말
다가쓰다
미리 앞당겨서 쓰다
다그다
1.물건을 가깝게 옮기다
2.기한을 예정보다 앞당기다
다님표
운행표
다락밭
층이 지게 만든�,계단밭
다리돌
징검다리
다리매
각선미
다문
하다 못해
다이야
타이어(tire)
단고기
개고기
단꺼번에
한꺼번에,단번에 몽땅
단묵
젤리,영양갱
단물약
(藥學)시럽(syrup)
단벌가다
유일무이하다
단설기
카스텔라(castella)
단수수
사탕수수
단얼음
빙수
단추전화기
전자식 버튼 전화기
달개동이
찬합
담배질군
애연가
담보하다
보증하다
당반
시렁,선반
닻머물기
묘박,배가 닻을 내리고 머무는 것
닻올림기
양묘기,닻을 감아 올리거나 풀어내리는 기계
대거리
교대
대미쳐
곧바로,즉시
대발파
단번에 많은 양의 암석이나 광석을 깨뜨리는 발파
대방
상대방이나 상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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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봉수교회는 종교자유 선전용 사기극"

[서경석 목사] "북한 종교자유 허용 기대 포기"
[2005-07-30 13:54 ]
▲ 평양 봉수교회와 교류 단절을 주장한 서경석 목사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종교 교류에 앞장서왔던 서경석 목사(한기총 인권위원장)가 평양 봉수교회는 종교 사기극에 불과하다며 더 이상 남한 기독교인들이 북한의 가짜들을 만나기 위해서 줄을 서는 한심한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 목사는 28일 개인 홈페이지에 '평양 봉수교회를 고발한다'는 글을 올리고 “이제 나는 더 이상 북한을 가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여섯 번이나 갔었던 봉수교회를 고발한다”면서 “우리가 계속 좋은 관계를 맺으면 어느 때고 북한이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겠지 하는 기대는 이제 포기하자”고 말했다.

이번 서 목사의 고발은 개신교 남북 종교교류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평양 봉수교회와 사실상 단절을 주장하는 것이어서 종교계와 남북민간협력사업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그는 1998년 봉수교회를 첫 방문한 이후 여러 차례 이곳을 찾아 예배를 드리면서 목사와 성도 상당수가 가짜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러한 형태로도 기독교가 확산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기 때문에 교류와 지원에 앞장섰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서 목사는 탈북자들의 증언과 자신의 경험을 통해 봉수교회의 진실과 그 교인들이 누리는 특권에 대해 알게 됐다며 더 이상 속지 말 것을 주문했다.

그는 “한번은 어떤 사람이 예배를 보다가 (실제로)눈물과 기도가 터져 나와 지방으로 쫓겨 갔다”면서 “단지 한국인 등 외국인으로부터 외화를 많이 벌어들이기 위해, 그리고 북한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는 점을 과시하게 위해 세워졌을 뿐”이라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소개했다.

서 목사는 “봉수교회가 세워진 1988년 이후 지금까지 17년간 우리가 속고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한심한 바보들인가?”라고 자문하고 “한국교회지도자들은 북한의 '그리스도교인'을 만날 때마다 북한에 납치된 것으로 확인된 김동식 목사님의 생사확인을 요구하고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남북기독교인의 만남이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정면으로 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조선그리스도연맹)강영섭 위원장에게 달러를 쥐어주는 일도 그만해야 한다”며 “그리고 그 대신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기독교인들을 위해 기도해야 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 고발로 자신이 창설했던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공동대표직을 사임해야 될 지 모르지만 인도적 지원과 인권 문제는 병행해야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대표직을 유지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한편, 남북 기독교 교류에 앞장서왔던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나핵집 평화통일 위원장은 “폐쇄된 사회에서 십자가가 걸리고 찬송이 울리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일단은 북한에 교회 수가 늘어나고 기독교인들이 세력을 넓히는 데 힘을 모아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주현 기자 shin@dailynk.com


다음은 서경석 목사가 홈페이지에 게시한 전문

평양 봉수교회를 고발한다. (서경석 sksgo@netian.com)

내가 처음 봉수교회에 갔던 때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집행위원장으로 처음 북한을 방문했던 1998년 3월이었다. 우리 일정에 일요일이 끼어있지 않아 봉수교회에 못가는 줄 알았는데 마침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이 우리를 초청했기 때문에 평일에 봉수교회를 갈 수 있었다. 약 40명의 교인들이 나와 함께 찬송과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그때 나는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나는 40여명의 교인들은 진짜 기독교인일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그날 나온 한 교인에게 살짝 물어보았다. 아주머니는 어떻게 교인이 되셨나요? 그 분은 어렸을 때 어머니 무릎에서 예수님을 믿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교회에 나오지 못하다가 봉수교회가 세워지면서 나오게 되었다고 답변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다시 감격했다. 그럴 것이다. 북한이 제아무리 동토의 땅이라 하더라도 성령의 역사가 왜 없겠는가?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여기서 살아 움직이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봉수교회 교인들이 가짜라고 하지만 그래도 일부는 진짜일 것으로 굳게 믿었다. 어머니의 무릎에서 예수 믿었다는 말은 봉수교회 교인들이 항상 하는 거짓말임을 그때는 까맣게 몰랐다.

봉수교회 교인 중 일부는 진짜라는 나의 믿음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바로 내 옆에 서 있었던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서기장 목사가 찬송가를 하나도 부를 줄 몰라도 나는 의심하지 않았다. 북한을 수없이 왕래하고 자유여행증까지 소지한 분에게 봉수교회의 한 교인이 “우리는 매주 일요일 여기에 출근합네다.”하고 말했다고 그분이 내게 귀띰해 주었을 때도 나는 나의 확신을 바꾸지 않았다. 매번 북한을 갈 때마다 봉수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았는데 우리는 항상 예배가 끝난 후 먼저 나와야 했고 우리가 교회를 떠난 후에만 봉수교회 교인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한 번도 교인들과 접촉할 수 없어도 나는 좋았다. 평양에서 예배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감격했고 봉수교회에 갈 때마다 나는 거액의 헌금을 했고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내가 봉수교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탈북동포들과 만나면서부터다. 그들의 이야기는 내게 충격적이었다. 봉수교회에는 보통사람들은 근처에도 갈 수 없다. 그곳은 선택받은 사람들만 가는 곳이다. 그리고 자기가 아는 한 사람이 그 교회 교인이었는데 한번은 그 사람이 예배를 보다가 눈물과 기도가 터져 나왔단다. 그리고 그는 곧 지방으로 쫓겨 갔단다. 가짜 기독교인으로 있어야지 진짜 기독교인이 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성경을 소지하거나 기독교인임이 발각되면 정치범수용소로 가야 한다. 봉수교회는 단지 한국인 등 외국인으로부터 외화를 많이 벌어들이기 위해, 그리고 북한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는 점을 과시하게 위해 세워졌을 뿐이라는 것이 탈북자들의 말이었다.

세 번째 북한에 갔을 때로 기억하는데 황해도 신천의 역사박물관에 간 적이 있다. 나는 처음에 신천 역사박물관의 게시물들을 보고 매우 흥분했었다. 양키들이 저렇게 인민들을 죽이다니! 그래서 안내원에게 내가 한국에 돌아가면 미군의 만행을 고발하겠다고 했다. (물론 나는 귀국한 후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귀국하자마자 인민을 살육한 사람들은 미군이 아니고 바로 남한과 북한의 사람들이 신천을 점령할 때마다 상대방들을 죽인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너무도 무지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양키의 만행을 고발하는 역사박물관에 “양키의 앞잡이 기독교인들”이라는 설명과 함께 6명의 목사님이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그중의 한분이 바로 나의 중조부되시는 서경조목사님이었다는 점이다. 중조부와 다른 목사님들이 갓을 쓴 원한경 박사(언더우드 목사의 아들)와 함께 찍은 사진인데 원한경 박사는 양키가 조선인으로 위장했다고 했다. 나는 이 사진을 보고 또 흥분했다. 기독교인이 북한동포를 가장 열심히 돕는데 이렇게 기독교를 비난하는 법이 어디 있는가? 당장 저 사진을 떼라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안내원은 죄송하다며 즉시 시정하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물론 내 항의를 받고 고칠 리가 없다. 그 후에도 신천 역사박물관을 갔다 온 한국인들에게 계속 물어보았는데 지금도 그 사진은 그곳에 버젓이 걸려있다. 신천 역사박물관은 북한사람들에게 양키와 기독교에 대한 적개심을 심어주는 의식화 장소다. 그래서 학생들은 한 주일씩 행군하여 이 박물관에 왔다가 다시 한 주일을 행군해서 자기 동네로 되돌아간다.

이러한 북한의 반(反) 기독교캠페인에도 불구하고 내가 봉수교회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래도 북한에 교회가 세워진 것이 어디냐? 우선 그런 식으로라도 기독교가 발을 붙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우리는 믿는다. 가짜 같긴 하지만 그래도 기다리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우선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이 북한 내에서 발언권을 높일 수 있도록 북한동포를 도울 때 <조그련>을 통해 돕자. 그래야 북한당국이 기독교에 대해 좋은 생각을 하지 않겠나? 말하자면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봉수교회에 대해 이제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사건이 생겼다. 지난 7월 19일 워싱턴에서 프리덤하우스 주최로 북한인권을 위한 국제회의가 있었는데 그때 탈북한 김형식 교수의 증언 때문이었다. 그분은 35년간 김형직사범학교의 교수로 계셨던 분인데 모스크바대학에 조선어교수로 가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부인은 북한에 '인질'로 남아야 한다. 그래서 중앙당에 부인이 봉수교회 교인이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단다. 봉수교회 교인은 대남공작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주로 구성되는데 교인이 되면 외국인과 접촉이 잦기 때문에 식량과 의복의 배급이 훨씬 좋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앙당은 말하기를 지금 봉수교회 교인이 300명인데 이미 교인이 되려고 신청한 사람의 숫자가 60명이어서 부인을 61번째 대기자명단에 올려놓겠다고 했다고 한다. 김교수는 부인이 봉수교회 교인이 되려면 십년은 족히 기다려야 할 것 같아 할 수 없이 포기했다고 했다.

이 말까지 듣고 나서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의 침묵은 죄악이다. 더 이상 한국 기독교인들이 북의 사기극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 봉수교회가 세워진 후 몇 년 동안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봉수교회가 세워진 1988년 이후 지금까지 17년간 우리가 속고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한심한 바보들인가? 그러고도 한국 기독교인들이 북한의 가짜들을 만나기 위해 열심히 줄을 서고 공동기도문을 채택하려고 애를 쓴다면 이것은 무슨 망신인가? 오히려 한국교회지도자들은 북한의 '그리스도교인'을 만날 때마다 북한에 납치된 것으로 확인된 김동식 목사님의 생사확인을 요구하고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남북기독교인의 만남이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정면으로 말해야 하지 않는가? <조그련> 강영섭위원장에게 몰래 딸라를 주는 일도 이제는 그만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 대신 정치범수용소로 잡혀간 기독교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지 않는가?

나는 그동안 봉수교회에 대해 공개적인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다. 봉수교회의 문제점도 정확히 잘 몰랐지만 그보다 북한동포돕기운동을 위해 북한을 왕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북한을 가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내가 여섯 번이나 갔었던 봉수교회를 고발하고자 한다. 이 고발로 나는 내가 창립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공동대표직을 사임해야 할지도 모른다. 북한은 우리가 인도적 지원과 인권개선노력을 동시에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틀림없이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에 압박을 가할 것이다. 그래도 할 수 없다. 나는 견딜 수 있을 때까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공동대표직을 유지하려고 애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북 인도적 지원활동과 북한인권 개선활동을 함께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의 이러한 행동으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에 부담을 주게 되어 참으로 미안하다.

이제 이글의 결론을 맺고자 한자. 더 이상 부끄러운 거짓놀음을 하지 말자. 북한을 가더라도 일요일에 절대로 이 가짜교회를 가지 말자. 고려호텔이나 양각도 호텔에서 우리들끼리 조용히 예배를 보자.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북한이 사기극을 계속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게 해 주자. 우리가 계속 좋은 관계를 맺으면 어느 때고 북한이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겠지 하는 기대는 이제 포기하자. 17년간이나 기다렸으면 됐지, 언제까지 더 기다릴 것인가?

이제는 진실을 말하자. 이제는 소리 지르자. 더 이상의 침묵과 속아 넘어가기는 우리를 바보로 만들 뿐이다. 그동안 저들은 계속 속아 넘어가는 우리를 보면서 얼마나 속으로 희희낙락했을까?

서경석 한기총 인권위원장


2007년 1월14 주일 평양 칠골교회 예배중 여성중창, 변화? 회중이 큰 소리 아멘 도하고 통성기도도 하는데

연기인지,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인지는 비판이나 판단은 유보. "신의 영역" 을 알지 못하는 우리가 조심성없이 가짜 진짜 논하기에는 성령님의 하는 일에 어리석은 테클 걸기는 아닐지

출처 : 미션문화 찬양
글쓴이 : 미 션 원글보기
메모 :
북한선교와 평양


  
1. 평양과 기독교

평양은 1892년 감리교 의료선교사 홀(W. J. Hall, 賀樂), 1893년 장로교 선교사 그라함․리(Graham Lee, 李吉咸) 그리고 스왈렌(W. L. Swallen, 蘇安論) 등이 파송됨으로써 본격적인 선교가 시작 되었다. 평양은 당시 상업이 성행했고 교통의 요지인, 평안도의 중심지로 선교 기지로서는 안성맞춤이었다.

이에 대하여 홀 선교사는 선교사 마펫(Samuel A. Moffett, 馬布三悅)의 말을 인용하여 평양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 가장 더럽고 문란한 도시이며 사람들이 거칠어 돌로 때리는 폭력이 난무하는 곳이기 때문에 최적의 선교 도전지이다. 초기 선교사들은 평양을 '한국의 소돔', '죄를 많이 지은 고을'이라고까지 불렀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악조건을 오히려 선교가 필요한 이유로 본 것이다.


1890년대 초부터 시작된 평양 선교는 청일전쟁과 교인박해라는 시련을 겪으면서 큰 진전을 보였고, 마펫을 비롯한 선교사, 그리고 한국 교인들의 열심과 헌신으로 기독교가 점차 뿌리를 내려갔다. 그 결과 평양은 한국에서 첫 번째로 기독교가 강성한 도시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성경으로 도배한 집, 말씀의 집이었던 장대현 교회에서 1907년 1월 14 ~ 15일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1866년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로부터 한문 성경책 3권을 건네받은 12세의 소년 최 치량이 성경이 금서 라는 사실을 알고 평양의 영문주사(營門主事) 박 영식에게 건네주었다. 토마스선교사를 죽인 병졸 박 춘권은 훗날 토마스로부터 받기를 거절 했던 그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어 영주교회 영수가 되었다.      

성경책을 건네받은 영문주사(營門主事) 박 영식은 질 좋은 종이로 만들어진 성경책으로 자기 집 도배를 하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당시 중국 성경책은 종이의 질이 좋았고 한쪽 단면만 인쇄되어 있어 도배가 가능 했던 것이다.

이 성경책으로 도배한 집이 평양 최초의 교회, 널다리골 교회가 되었고, 이 널다리골 교회가 바로 장대현 교회의 전신인 것이다. 현재 장대현 교회가 있던 곳은 평양 지하철 승리역과 학생소년궁전 사이인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평양은 6․25 이후 초토화 된 시가지의 전후복구사업 운동으로부터 본격적인 개발을 시작하여, 1970년대에 이른바 혁명의 수도 건설 이라는 구호 아래 평양을 시범․선전 도시로 만드는 데 주력하면서 김일성 우상화 시설 등을 짓기 시작 하였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 할 것인가를 설명해주고 있다. 이와 같이 북한도 성경의 일종인 주체사상의 경전, 즉 김일성 교시와 김정일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주체사상이 단순한 국가의 통치 이념이나 사상을 넘어서 김일성과 김정일을 절대화, 신격화한 수령교로 자리 잡고 있는데, 수령교의 중심이 바로 평양이다.


2. 우리의 기도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 도다.(시 23:3)

첫째,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없고, 영적 삶을 부패시키는 수령교와 북한 전역에 만연한 우상숭배,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사랑하는 죄악이 평양과 북한에서 사라지게 하시고 죄에 대한 애통함과 충만한 은혜가 그곳에서 넘쳐나게 하옵소서.

둘째,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긍휼인 부흥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쇠퇴하고 도덕적으로 나태한 상태에 빠져 있는 평양과 북한이 살아나게 하시고, 죄인들을 회심케 하는 영적 각성을 주시옵소서.

셋째, 하나님이 교회를 에워싼 악한 원수들을 친히 물리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 백성들에게 보이심으로써 교회를 새롭게 하시는 능력이 북한, 특히 평양에서 나타나게 하옵소서.

넷째,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의 소돔’, 이나 ‘죄를 많이 지은 고을’ 이라고 불렀던 평양을 최적의 선교 도전지로 삼게 하시고 그곳에서 하나님 홀로 영광을 받으시는 날이 속히 오게 하시기 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참조 : 평양과 기독교, 이 광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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