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관계자 "라오스 탈북 청소년 3명 곧 석방될 듯"
[노컷뉴스] 2007-04-13 10:00

라오스에 감금 중인 탈북 청소년 3명이 강제북송되지 않고 곧 석방될 것이라고 구출노력에 참여하고 있는 미 관계자가 밝혔다.

라오스에 감금 중인 탈북 청소년들의 구출 노력에 직접 관여하고 있는 워싱턴의 한 정통한 인사는 "현재 이들의 석방 문제가 라오스 당국과 외교적으로 잘 해결되고 있다"고 설명하고 "이들 탈북 청소년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강제로 북송되는 일은 없을 것 같다"고 자유아시아방송(RFA)에서 말했다.

이 인사는 "현재 미국 정부가 4개월째 수감생활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친 탈북 청소년들의 안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전하고 "라오스에 곧 설 명절이 다가 오기 때문에 탈북 청소년들의 문제는 며칠 내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결될 것 같다"고 밝혔다.

함경북도 출신인 이들 탈북 청소년들은 부모를 모두 잃은 고아들로 17살의 최향미 양과 14살 난 최향, 그리고 12살 난 막내 최혁군이며 최 씨 남매는 지난 2000년 초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서 숨어 지냈오다 지난해11월 라오스를 경유해 태국으로 가려고 난해 11라오스 국경경찰에 검거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3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만기 복역을 했지만 현재 4개월 째 라오스 감옥에 있으며 최 씨 남매는 미국으로 가길 원하고 있다고 자유아시아방송은 전했다.

노컷뉴스 안윤석 대기자 ysan@cbs.co.kr

http://media.paran.com/snews/newsview2.php?key=hit&dirnews=805987&year=2007&dir=17&rtlog=MV

아래 탈북청소년 3명의 글은 2005년 중국을 떠나 무사히 동남아 제3국에 도착했을 때 북한인권시민연합 직원과 대화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탈북청소년들의 이야기


- 첫 번째 이야기

원 철
탈북청소년

저는 함경북도 온성군 풍인에서 태어났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 그러니까 1990년 이전에는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쪽이 군에서 높은 위치에 있다나니 먹을 것을 자주 보내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서 식량난이 일면서 경제가 어려워지자 외가에서 먹을 것을 보내지 않아 살기가 곤란해졌습니다.

제가 학교를 다니기는 했지만 그다지 생각나는 것은 없고, 학교 안가면 선생님이 때렸는데 자주 가지 않고 그냥 동내 친구들과 놀다가 집에 가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특별한 일은 하지 않고 매일 술을 마시고 어머니를 자주 때렸습니다. 집안에 있는 거 다 팔고 그것도 모자라 집도 팔아서 술을 먹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2003년에 돌아가셨지만, 그래도 기억나는 것은 제가 5살 때 어머니를 때리는 아버지에게 물을 붓고 칼로 엉덩이를 찔렀던 일입니다. 그러다 어머니가 아버지 때문에 힘들다고 중국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먼저 98년도에 탈북하여 자리 잡은 곳이 중국 길림성 왕청입니다. 주소를 자세히 아는 이유는 어머니로부터 편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99년도 7월쯤에 이모와 함께 두만강을 건너려 했으나 물이 너무 많이 불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중국돈 200원에 사람을 사서 도움을 받아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두만강을 건너 이모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나그네가 나타나서 저는 그 사람을 따라가고 이모는 다시 두만강을 건너 돌아갔습니다. 그 나그네를 따라가니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나그네는 조선족인데 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나그네가 공안에 높은 사람을 알고 있어서 저는 조선족이 다니는 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학교 친구들은 내가 북조선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다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친구들과 싸우는 일도 있었지만 내가 친구들 보다 한살 많고 덩치도 좋아 그리 많이 싸우지는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공부가 어려웠는데 한 1년쯤 지나니 한족어 시간이 제일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한족어는 전교에게 2등정도 했고, 점수도 98점정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학교에서 축구를 했습니다. 저는 축구를 제일 좋아 했고, 저는 골을 넣는 사람이였습니다. 그리고 탁구도 조금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2000년 춘량진 양광촌으로 이사를 했지만, 학교는 옮기지 않고 계속 같은 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한족 학교에서 5학년에 다니고 있었는데, 2003년 11월 14일 공부하는 중 공안이 와서 경찰서에 엄마가 있으니 가자고 해 따라갔더니 엄마가 경찰서에 잡혀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점심먹이고, 왕청 감옥소로 보내졌습니다. 이곳에서 3,4일 있다 도문수용소로 보내졌고, 이곳에서 조사를 받을 때 누구와 같이 탈북했는지, 언제 왔는지, 도와준 사람 누구인지, 어디서 살았는지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그래 살던 곳은 왕청이고, 탈북할 때에는 먼저 이모가 같이 넘어오다 물이 깊어 다른 남자가 도와주어 넘어왔는데 그 남자가 누군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저에게는 더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의 식사는 한 끼에 선밥을 반 주먹 정도와 소금국을 주었는데, 소금국이 너무 짜서 먹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 곳에서 이미 허약에 걸렸습니다.

그곳에서 2,3일 후에 북조선 온성군 보위부로 끌려갔습니다. 이곳에서는 엄마와 따로 조사를 받았습니다.

온성 보위부에 도착하자 남자 여자를 나누어 조사를 합니다.
엄마는 여자 24살 정도의 여성이 조사를 했답니다. 여자들은 옷을 벗긴 후 손을 위로하고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적으로 시킨답니다.

남자는 팬티만 입게 하고 나머지 옷을 모두 벗게 합니다. 벗긴 옷은 옷 솔기 솔기를 샅샅이 뒤져봅니다. 그리고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팬티 속을 뒤집니다. 혹시 숨겨가지고 온 돈을 찾는 겁니다.
그리고는 감방으로 들어가 오전 5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책상다리하고 두 손을 앞에 놓은 채로 앉아 있게 합니다. 한사람씩 불러내어 조사를 하는데, 잡혀온 지 이틀 후 엄마와 저는 간수가 불러서 무엇을 물어보았는데 이미 허약에 걸려 정신이 없어 무슨 소리인지 몰라 대답을 못하자 간수가 손으로 얼굴 정면을 3번 때리자마자 저는 엎어져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랬더니 때린 사람이 이거 죽었는가하면서 앞으로 엎디라고 하여 엎뎌있었더니 조금 정신이 들면서 괜찮아졌습니다. 엄마는 저보다 많이 맞았습니다. 우리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후 저는 조사를 하지 않았고, 며칠 후부터 엄마만 조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간수가 안보고 있을 때 책상다리를 피거나, 눕는 경우 간수에게 들키면 앞쪽으로 불러내어 손을 창살 밖으로 내밀게 한 후 몽둥이나 손전등으로 때려 손톱이 새까맣게 멍든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는 14일 동안 책상다리 앉은 자세로 있었고, 식사는 국수죽을 밑바닥이 보이는 정도의 양을 줍니다. 후루룩 마시면 그만입니다.

변소 갈 때는 서서 “선생님 3호 3번 소변볼 수 있습니까.” 간수가 “응” 하면 “알았습니다.” 하고 소변을 볼 수 있지만, 간수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으면 소변을 못 봅니다. 우리가 갇혀있던 작은 방에 열 명 이상이 앉아있어 상당히 좁습니다. 소변을 보는 변소는 그 감옥 안에 있고, 누워 잘 때는 발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똑바로 눕지 못하고 모로 누워 잡니다. 바닥은 나무 바닥인데 덮을 담요도, 깔 요도 없이 입은 채로 그냥 웅크리고 자야합니다. 저도 그곳에서 발이 얼어 나중에 물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소변은 방에서 보지만, 대변은 밖으로 나가 여자들이 있는 방에서 봅니다. 그때도 “선생님 대변 다 봤습니다.”하면 간수가 “응” 또는 “알았다”고 합니다.
그곳에선 목욕도 못해 이가 너무 많아 앉아서 이를 잡기도 했고, 저는 치약, 비누, 휴지를 가지고 가서 나올 때까지 그것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도 잡혀온 사람끼리 때리기도 합니다.

11월 29일 저의 번호를 불러 나갔더니 엄마와 함께 고모네 동네인 동포구에서 온 차를 타고 동포 안전부에 도착했습니다. 안전부에서도 조사를 했는데 보위부와는 다르게 동복만 벗기고 손으로 옴 몸을 만지며 조사했습니다. 저는 나이가 어려 안전부에서 하루만 자고 고모네 집으로 보내졌고, 엄마는 안전부에 남아있었습니다.

제가 고모네 집에 도착 후 엄마가 안전부에 있다고 알리자 고모가 안전부에 가서 엄마를 만난 다음 엄마는 고모네 집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3,4일 후 안전부에서 엄마와 나를 다시 불러 엄마는 6개월 동안 노동단련대로 보내졌고, 저는 나이가 어려 고모네 집에 있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노동단련대에서 허약에 걸려 3달 만에 병보로 나왔습니다. 이때가 2004년 3월 입니다. 엄마 말씀이 보위부로부터 허약에 걸려 노동단련대에 들어오자마자 죽은 사람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엄마와 저는 고모네 집에서 몸을 추수린 후 엄마가 2004년 5월에 먼저 탈북해 돈을 벌어 가지고 와 저를 데리고 탈북했습니다. 탈북해 먼저 탈북한 이모집에서 생활하다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 다시 이동했고, 또 다시 왕청으로 이동해 다시 잡혀갈 것이 두려워 지금까지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방에서만 지냈습니다. 그러다 이렇게 시민연합의 도움으로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유 화
탈북청소년

저는 1986년 5월 함경북도 은덕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족으로는 엄마 아빠 오빠 동생 그리고 저 5식구입니다. 저는 늘 마음속에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엄마가 저를 데리고 집을 나와 엄마와 단살 둘이서 살았습니다. 제가 5살 되던 해 어머니는 병으로 돌아가시고 저는 아버지와 오빠가 살고 있는 집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집에는 계모와 엄마가 다른 동생이 한 명 더 살고 있었습니다.

7살에 학교 다니기 시작(1992년) 했고, 인민학교 2학년부터 산에 가서 나물을 뜯어 세수대야(소래)에 담아 산나물 장사하고, 장사하다 너무 배고파 밥을 도둑질해 먹다 엄마, 아버지에게 매 맞고 달아나기도 했습니다. 집에서 여러 번 뛰쳐나왔습니다.

집에서 엄마가 저희들을 기르기가 너무 힘들어서 오빠와 저를 계모학원(고아원)에 보내자고하였는데 아빠가 저는 남겨두고 오빠만 보내라고 해서 오빠만 가게 되였습니다. 난 집에서 장사도 하고 산나물도 캐서 팔고, 또 배고프면 옷도 내다가 팔아서 그것을 판돈으로 국수를 사 먹다가 잡혀서 집에 들어가 매도 많이 맞곤 했었습니다. 어느날 계모학원에서 오빠가 아프다고 해 집으로 옮겼지만 이미 오빠는 계모학원에서 허약에 걸려 집으로 돌아온 지 3일 있다가 죽었습니다. 그것이 제 잘못 같아 늘 가슴이 아픕니다. 제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겁니다. 그 후에 엄마와 같이 장사도 다니고 산나물도 캐다가 반찬과 나물죽을 써먹었습니다.

6월 어느날 제가 11살 때였습니다. 엄마가 저보고 혼자서 성냥가지고 장평에 가서 감자하고 바꿔오라고 했습니다. 장평에 가서 감자를 바꾸려고 했는데 바꿔주지 않아 헤매고 있다 배가 너무 고파 삶은 감자를 성냥하고 바꿔 먹었습니다. 집에 가서 욕먹을 까 봐도 그랬지만, 형제간이 부모가 달라 정도 그다지 많지 않았고, 부모가 매일 싸우고 매 맞고 하는 것이 너무 싫어 집에 들어가기 싫었습니다. 특히 엄마가 계모라서 그런지 야단치는 것이 더욱 싫었습니다. 그래 다른 때라면 집에 들어갔겠지만 이번에는 들어가지 않고 혼자 살기 시작했습니다. 집이 너무 싫었기 때문에 16살 때까지 아는 언니네 집에서 살았습니다.

들리는 말에 나진 선봉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해 혼자서 나진에 쳐 있는 전기 철조망을 피해 나진 선봉으로 무사히 들어가 중국 사람들과 함께 장사도 하고 쌀과 배추를 팔기도 했고, 철조망을 주워 팔아 밑천을 잡았습니다. 혼자서 떠도는 아이들끼리 산속에 비닐 집을 짓고 살기도 했습니다. 제가 16살 되면서 아버지도 보고 싶고, 그동안의 잘못도 뉘우치게 되어 증국으로 가서 돈을 벌어 아버지에게 갈 생각을 했습니다. 중국 사람들 2001년도 1월에 중국으로 돈을 벌러 가기 위해 나진을 떠났습니다. 중국에서 살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나진에서 1월 24일 무산쪽 기차를 타고 가서 26일 강을 건넜습니다. 같이 장사를 했던 주와 함께 강을 건너는데 무서웠습니다. 날짜를 정했지만 팔려가지 않기 위해 정해진 날짜 전날에 건넜습니다. 중국에 가서 보이는 집으로 들어갔는데 돈을 50원씩 주었습니다. 북한에서 왔다고 하니 호의적이었고 같이 간 언니는 중국에 왔다가 송환된 경험이 있어 중국을 잘 알았습니다. 차를 타고 가다보니 근사해보였습니다. 먹을 것도 희한하고 옷차림도 근사했습니다. 어디쯤인가 도착해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기도할 줄을 몰라 서로 웃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한 집에 있었습니다. 답답해서 나가고 싶을 때도 많았습니다. 그 교회에서 우리를 소개했는데 우리 3명 말고 한명이 더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자유가 없고 숨어서 살고 떨며 살아서 힘들었습니다. 그냥 집으로 갈 수 도 있었지만 집에 가려면 더 힘들 것 같았고 못 살 것 같았습니다. 집에 들어가기가 부끄러웠습니다. 집에서도 나를 반겨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집에서 텔레비전을 많이 보고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자유가 없이 숨어 살다보니 정말 뛰쳐나오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2004년 7월 그리고 올해 2월, 4월에 한국으로 갈 수 있다고 하여 기대를 했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말하면 세상적으로는 노래가수가 되고 싶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많이 받아 한국에 가서 신학교에 가서 영어와 일어로 하나님 말씀을 배워서 복음을 전하고 돈을 벌어 중국이나 미국으로 가서 저희 부모님과 저를 돌봐주신 마담께 도 은혜를 베풀고 싶습니다.

마담은 사람이 너무 좋습니다. 저희를 5년이나 돈도 없으면서도 돌봐주시고 또 밖에 나가면 잘못된다고 하면서 돌봐주었습니다. 한번은 공안이 나온다고 하여 하루 종일 김치굴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겨울이라 이불을 가지고 들어가 있었습니다. 뒤져보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였고 그들은 그냥 돌아갔습니다. 이번에 나올 때에도 검열을 심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였고 무사히 여기까지 왔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
민주, 민희
탈북청소년


저희 자매는 언니인 민주 1986년 6월 25일에, 동생 민희는 1988년 4월 23일 함북 은덕에서 태어났습니다.
유화와는 같은 동네에 살았고 인민학교를 같이 다녔습니다. 인민학교 2학년 까지는 잘 다녔는데 3학년부터는 잘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먹을 것이 없어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닌다거나, 장사를 해야되었기 때문입니다. 유화와는 같은 학교에 다니긴 했지만, 학교에서는 친구는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엄마와 나진선봉에서 장사를 했는데 그곳에서 유화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서로 의지하며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저희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저희 두명 모두 네 식구이고 아버지는 은덕 탄광에서 일했습니다. 어머니는 집에서만 계시다 나중에 집이 바빠지자(힘들어지자)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아버지가 다니시는 탄광에서 주는 하루 밥그릇을 끓여서 나눠먹고 굶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8살 때 집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어 일주일 동안 굶은 적도 있습니다. 하루 종일 물만 먹다보니 일어설 기운조차 없었고, 일어나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골이 빙빙 돌았습니다. 정말 죽을 것 같았습니다. 동생 민희는 울다가 자고, 또 울고 이러면서 일주일을 견뎠습니다. 이대로 놔두면 일가족이 죽을 것 같아 아버지가 친척집을 찾아다니며 식량을 빌려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기운을 차린 후 더 이상 은덕에서 먹고 살 수 없어 제 나이 12살 때 엄마와 동생은 나진선봉으로 옮겨가 배추장사를 했습니다. 돈을 조금 벌어 2000년 10월에 다시 은덕으로 갔었는데 아버지는 월급도 주지 않는 그곳 탄광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나진에서 만난 유화와 그때부터 중국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무산으로 나와 그길로 중국으로 탈북했습니다.

어머니가 병이 많으셔서 앓으신 후에는 많이 힘들어 하셨습니다. 잘된 후에 엄마, 아버지를 만나보고 싶습니다. 한국에 간 후에 중국으로 가서 중국 사람과 결혼 해 살면 엄마, 아버지를 뵐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세상적으로는 모델을 하고 싶습니다. 아나운서도 하고 싶습니다. 뜨개질 같은 것을 하고 싶기도 합니다.

북한인권시민연합

http://www.nkhumanrights.or.kr/newsletter/talbuk_view.html?table=talbuk&page=1&no=127&keyfield=&key=

예수님께 나아오는 아이들
‘예수냐, 학교냐?’로 갈등을 겪는 중국의 어린이 크리스챤들

兒童

  사역의 불모지 어린이 전도
  중국은 세계 인구의 5분의 l 이상 차지하는 나라이다. 그 중에 4억6천5백만의 어린이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대상이다. 그러나 중국은 18세 이하의 청소년 및 아동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다고 법으로 정하고 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이 아름다운 중화의 땅에 복음의 문이 닫힌 지 40여 년이 지난 오늘도, 1천백여만㎢의 대지위에서 어린이 전도사역은 여전히 황무지로 남아있다.
  어린이는 아직 깎이지 않은 보석이며 복음이 뿌려질 욱토이다. 레닌 역시 “세 살 이하의 어린이를 내게 준다면 내가 그 아이의 평생을 손에 쥔 것과 같다"고 말한바 있다. 유아{幼兒)의 가능성과 아동교육이 미치는 깊은 영향과 중요성을 충분히 나타내는 말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사역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횡금 보석을 황무지에 던져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보배로운 영혼을 악한 자들이 마음대로 약탈하도록 방치 한 것과 다름없다.
  1990년에 이르러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복음의 황무지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어린이 사역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교사, 교재, 가르치는 목표 및 방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공백 상태였다. 어린이들에게 효과적인 전도도 할 수 없었고, 양육하고 훈련체계를 세우는 것은 더군다나 말할 것도 없었다.
  최근 해외의 각 교단과 선교단체들이 계속적으로 어린이 전도사역을 감당할 교사들을 훈련, 양성하고 있다. 그러나 훈련을 시키는 교사들의 대다수는 자기가 몸담고 있는 주일학교에서 가르쳤던 경험을 가지고 나눌 뿐이다. 어린이에 대한 순수한 비전과 부담감도 많이 부족하고, 게다가 중국 처한 전반적인 환경을 이해하는데도 그들간에 큰 차이를 나타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도 가르치는 내용의 실용성이 약화되고, 어린이 복음화를 담당 할 사역자들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필자는 우선 현재 막 발돋움하고 있는 어린이 전도사역에 대해 본인이 이해하고 있는 부분을 간략하게 서술하고자 한다. 그리고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결코 잊어버리지 않으신 백성들 가운데서 이루신 큰 일들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어린이 전도사역자 훈련
  세포 분열식의 훈련조직이 현재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계획적인 훈련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제시하였던 가르침의 원칙을 따른다,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라라”(딤후2:2)
  자기가 훈련을 받고 지금은 다른 사람을 훈련시키는 사역자가 현재 약 천여명이 넘고,  이미 훈련을 받은 이린이 전도사역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이런 류의 훈련체계는 다음과 같은 4단계를 포함하고 있다.
  1. 각 지역의 전도인(傳道人)이 대표로 훈련을 받는다.
  2. 대표로 훈련받은 이들이 자신의 사역지(아마도 여러 곳일 것임)로 돌아가서 그곳에 있는 전도인들을 훈련시킨다.
  3. 훈련받은 전도인들이 다시 자신의 동역자를 훈련시킨다.
  4. 동역자는 훈련을 받은 후에, 반드시 성도들을 주일학교 교사로 교육시킨다.
  이 때 매 단계마다 훈련받은 자는 반드시 직접 주일학교 봉사에 참여해야 한다.
  이와같은 훈련과정에 따르는 요구는 무척 엄격하다. 
    훈련내용에는 어린이 전도사역자의 초급 및 2급과정 그리고 이들 사역자를 양성하는 훈련자의 초급 및 2급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어떤 훈련은 매회 2주일이 소요되며, 완성되려면 약 100시간 이상이 필요하다. 매번 훈련받은 훈련생들은 적어도 반년에서 1년 동안 각자의  사역지에서 실습을 해야한다. 완전하게 훈련된 한 명의 어린이 사역자가 양성되려면, 최소한 두 번의 공동훈련을 받아야하며 1년에서 2년의 기간이 소요된다. 어린이 사역자를 훈련하는 사역자는 최소한 4번의 공동훈련을 거쳐야 하며 여기에는 2년에서 4년의 기간이 소요된다.
  아동복음사역에 종사하는 사역자들은 기독교교육과 일반교육의 차이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일반 교육이 가르치는 지식은 혼과 육체의 지식인 반면, 기독교교육은 진리를 찾고 진리를 가르치며 진리를 배우는. 곧 생명을 변화시키 교육이다. 즉 어린이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한 후 그 아이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발전하게 하는데 그 목표가 있다.
  훈련생들로 하여금 이런 견실한 훈련을 통해 어린이 복음사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교사의 역할과 사명을 깨달을수 있도록 한다. 그뿐아니라 이후에 이루어질 어린이 사역의 실제적인 연습을 할수도 었다. 이 외에도 하나님께서는 곳곳에서 직접 어린이 복음화사역을 추진하면서 이 사역을 감당할 교사를 훈련시키고 책임자를 세울 수 있는, 어린이 사역에 전시간을 바쳐 헌신할 사역자를 부르고 계신다.
  어떤 지역에서는, 최초의 훈련을 받은 120명의 훈련생들이 92년부터 현재까지 3년 동안 500개의 어린이 주일학교를 세웠다. 또 다른 곳에서는 어련이 사역을 시작한지 5개월만에 신도수가 6천 명에서(아동은 포함하지 않음) 1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지금은 2천5백 명의 어린이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해 2백여개의 주일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곳곳에 있는 교사들이 매년 약 10만 명의 어린이들을 예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고 있으며, 이런 수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어린이를 위해 훈련받은 교사가 필요하다.
  첫째, 농촌의 교육 수준은 매우 낮다.
  어린이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문맹(文盲)인 지역도 있다. 그러므로 훈련시간도 연장해야 하고, 훈련시키는 교사 역시 몇 배의 힘과 정신을 쏟아서 가르쳐야만 한다.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자는 최소한 글을 읽고 쓸줄 알아야 하기 때문에 글을 가르치는 과정을 편성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둘째, 매 차례 이루어지는 사역자 훈련은 시시각각 위험을 무릅써야만 하므로 주님의 보호하심이 필요하다.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복음을 하는 것이 금지된 상황에서, 악한 자들은 서로 아이를 빼앗고자 분투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곳에서 이렇게 선포했다. 어린이 전도사역자가 체포되면 먼저 때리고 그 다음에 심문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훈련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늘 바짝 긴장이 되며 도저히 고정된 장소에서 진행될 수 없다. 어떤 경우는 한 기(期) 훈련을 하기 위해 세 차례나 장소를 옮겨가며 진행한 적도 있다. 잡혀서 투옥될 위험을 무릅 쓰고 훈련에 참가하는 사람들과 집을 제공하는 주인, 사역자 모두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셋째, 해외에서 들어오는 훈현사역자들은 중국을 수시로 왕래해야 한다.
  이리저리 돌아와야 하는 불편한 교통, 낯설고 물선 땅에서 경험하는 부족한 호웅, 짐 통관의 어려움, 기후변화 및 음식, 숙소의 블편함, 신중한 말과 행동에서 오는 긴장감 등이 이들이 겪는 어려움이다.
  어떤 사역자들은 매년 약6개월의 시간을 중국에서 훈련사역으로 보내고 있다. 집 떠난지 오래된 훈련교사들은 시간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자신의 가족에 대해 생활면으로 특별한 배려가 요구되며, 가족들의 특별한 지지도 펼요하다.
  만약 해외에서 온 훈련 사역자들을 후원해주는 단체가 없다면 그들은 혼자 고군분투하며 이 사역을 해야만 할 것이다. 극도의 비밀보장을 요구하는 사역이어서 공개적인 보고가 어렵기 때문에 인석, 물적 후원 및 중보기도의 후원도 유난히 약한 상황이다.
  지금은 생명을 아끼지 않고 기꺼이 자신과 사욕을 버리고. 목자의 마유을 가지고 일 할 사역자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근래, 해외의 인사들이 중국 어린이 복음사역의 펼요성을 깨닫고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입하고 있다 그러나 ‘대륙열기’라는 뜨거운 열차에 올라타서, 순수하지 못한 동기로 여행이나 휴가등 개인 및 단체의 허영심과 성취김을 만족시키는데 급급한 많은 훈띤 사역자들이 있다. 그들은 바깥 세계의 불펼요한 것들까지 끌어들여 훈련사역의 발전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구원받은 어린이의 간증
  「중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어린이 복음사역은 원자탄의 폭발이라고 비유할 수 있을 정도로 왕성하게 전개되고 있다. 어린이 사역의 발전은 마치 불붙은 건초더미가 들 전체로 번져나가는 양상을 띠고 있다」
  우리에게 격려를 주는 이런 소식들은 모두 큰 대가를 지불하고 걷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엄격한 훈련을 거친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구원의 은혜에 대해 정확하게 가르치지 않거나, 그들에게 구원의 참다운 맛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어린이들은 결코 주일학교에 나오는 모험을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대가는 바로 피와 눈물과 목숨이기 때문이다.
  어느 학교의 교사가 수업시간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예수는 이미 2천년 전에 죽었 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믿을 펼요가 없다"
  주일학교 교사는 이 이야기를 듣고 교회에 다니는 어린이들이 영향을 받지 않을까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구원을 얻은 한 어린이의 예기치 못한 말을 듣게 되었다. “학교 선생님은 예수님이 죽은 사실만 알고 계세요 예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나 살아나신 것은 모르고 있는걸요 전 선생님의 말을 믿지 않아요. 단지 진리를 믿을 뿐이죠”
  3살 난 한 아이가구원을 얻은 후에 아이의 할아버지도 주님을 믿게 되었다. 그 아이는 할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할아버지! 어떻게 할아버지가 구원을 얻었는지 그 경험을 저에게 들려주세요” 아이는 할아버지의 간증을 들은 후 “할아버지의 구원 간증은 저만큼 확실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이때 성령께서 이 아이에게 진리를 명백히 깨닫게 해주었고 그들을 굳건히 잡아주었음을 알 수 있다. 
  한 공산당 서기(공산청년단 따위 조직의 주요책임자, 기독교인의 활동을 감시하는 직책을 갖고 있음)의 자녀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서기 부부는 그를 때리면서 교회에 나가지 못 하게 했지만 아이는 여전히 굳세게 주일학교를 나오고 있다 .어떤 부모들은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이곳의 예수를 믿는 어른들은 아이들 만큼 많은 핍박을 받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이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연 어른들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어떤 여자아이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 교사에게 머리채를 잡힌채 2층에서 1층까지 발에 채이면서 내려와야 했다. 한 남자아이는 교사에게 의자로 맞아 머리가 찢어졌고, 3일 동안 서 있는 벌과 2주간의 정학, 또 영예로운 홍령건(紅領巾: 중국의 학생들이 목에 매는 붉은 스카프로 소년 선봉대를 의미함)을 박탈당하기까지 했다. 어린이들에게는 단 하냐의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학교를 다닐 것인가? 아니면 예수를 믿을 것인가?
  주님을 믿고 난 어린이들이 학업이나 품행에 큰 변화가 나타나 올바른 행동을 하게 되므로, 믿지 갚는 아이들이 믿는 아이들을 보고 배웠으떤 하고 생각하는 교사들도 있다. 한 잡 화점 주인은 예수를 믿는 어린이가 와서 물건을 살 때 다른 아이들과 확실히 틀린 점이 있음을 발견하고는 자기 자녀도 이 어린이를 따라 주넘을 영점하도록 했다.
  어린이들은 주님을 믿고 난 뒤에 믿지 않는 부모나 조부모, 외조부모의 영혼을 생각하고는 안타까워 한다. 이들은 조급해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이때 많은 어른들이 곧 주님을 영접하곤 한다.
  이떤 집에 예수믿는 어린이 3명이 있었는데, 이 아이들이 스스로 회의를 열어 장래에 어떻게 주님께 헌신할 것인가에 대해 토론했다고 한다. 마치 장래를 결정짓는 중대한 회의 같았다. 열한살된 언니와 여섯살난 여동생은 어른이 되면 전 시간을 밖에서 복응을 전하는데 바치기로 결심했으며, 아홉 살난 남동생은 자기집을 대접하고 섬기는 가정으로 개방하고자 결심했다. 이 말을 들은 아이들의 믿는 부모는 크게 감동했고 오히려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 그렇다. 우리는 결코 이 아이들을 어리다고 업신여길 수 없다. 최근 들은 바 소식에 의하떤 일찍이 훈련을 받고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어린이들이 있다고 한다. 6세에서 12세 가량되는 이 아이들이 현재 전도인(복음사역자)이 되어 일하고 있는 것이다.
  높고 존귀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주의 행하시는 기사를 누가 능히 예측할 수 있겠는가? 만약 주님의 손길이 아니었다면 누가 능히 이런 큰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훈련이 진행될 초기에 하나님은 어린이 복음사역에 대해 아무런 인식도 하지 않는 한 교회의 지도자를 감동시켜, 70세의 고령과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과 함께 훈련에 참여하도록 붙잡아주셨다. 열흘동안 이루어진 과정은, 그가 어린이 사역에 대해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모든 훈련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위해, 그는 전도인들로 하여 전 시간을 어린이 사역에 헌신하도록 격려하였다.
  성인 사역에도 일꾼이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아동사역은 정말 하지 않으면 안될 가치있고 귀한 사역이다. 이렇게 하여 맹렬한 불길은 마침내 점화될 것이다.



守望中華 第 125期 「要上學, 要耶蘇」
번역 신호정.

중국선교연구원/http://kids.yonginlib.or.kr/board/user/recbook/board_05.asp?menuid=3&id=122

 

"링거병이 없어 맥주병 소독해 사용"
[진단] 북 어린이 절반이 '영양 결핍'... 유아사망률 남한 11배

▲ 북한 어린이들. 대기근과 의료체계가 붕괴되면서 어린이들이 가장 큰 희생자가 되고 있다.
ⓒ2004 삼육국제개발구호기구(ADRA) 제공

"사람의 뼈를 먹이면 살릴 수 있다는 말이 나돌아 묘까지 팠는데 간이 나빠 3년 넘도록 앓던 남편은 끝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만약 제 때 치료를 햇다면 충분히 살릴 수 있었는데…. 남한에 와서 폐렴을 앓은 뒤 후유증으로 결핵까지 왔는데 보건소에서 6개월 동안 약을 타먹고 영양섭취를 충분히 했더니 말끔히 다 나았습니다. 만약 북한에서 이 병을 앓았다면 꼼짝없이 죽었을 겁니다"


지난 2002년 남한에 정착한 정미현(여·53·가명)씨는 29일 북한의 참혹한 실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치료만 하면 충분히 살 수 있는 수많은 생명들이 의료체계의 붕괴로 눈뜨고 죽어가고 있는 비참한 실정이다.

북한의 보건의료 체계는 90년 초반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이 연쇄적으로 붕괴되고 의약품과 각종 의료장비 도입이 중단되면서 마비되기 시작됐고 95·96년 대홍수가 닥치면서 거의 붕괴된 상태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당시 대홍수로 298개의 병원과 진료소 등이 심하게 파손됐으며 각종 의료장비도 함께 유실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 인한 최대 피해자는 바로 어린이들이다. 유엔아동기금(UNICEF·유니세프)이 지난 2002년 북한당국과 함께 북한지역 6천 가구를 대상으로 어린이 영양상태를 조사한 결과 5세 미만 어린이 250만명 중 120만명이 영양결핍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7세 미만 어린이 80여만명은 만성 영양실조이며 급성 중증 영양상태인 7만명의 어린이는 병원에서 치료받지 못하면 사망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정미현씨는 "의사들이 진찰은 해주지만 의약품이나 의료기구가 거의 없어 치료받을 수가 없다. 결국 병나면 죽는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며 "여기(남한) 사람들에게 북한의 심각한 상황을 이야기해주면 믿지 않는다. 병든 아이들이 파리와 구더기에 휩싸여 죽어가는 모습을 남한 사람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라고 안타까워 했다.

정씨는 또한 "링거병이 없어 맥주병을 소독해 거꾸로 달아서 쓰는 실정이며 치료를 받으려면 장마당(중국에서 들어온 물건을 파는 시장)에서 약을 사와야 한다"며 "우리 애가 아파 사탕가루(설탕)를 장마당에서 구해와 의사에게 줬더니 이를 정제해 링거를 놔주기도 했다. 하지만 먹고사는 사정 때문에 사탕가루를 쉽게 살 수 없는 형편"이라고 북한주민들의 고통스런 실정을 들려주었다.

"에티오피아의 대기근보다 더 혹독한 재앙이 북녘에서..."

▲ 북한 어린이가 링거를 맞고 있다. 링거가 없어 대용병이 대신 링거 역할을 하고 있다.
ⓒ2004 ADRA 제공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북한 여성과 아동은 11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2월 유니세프의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 임산부의 사망률은 10만 명당 70명으로 남한의 20명보다 3·5배 높으며, 유아의 사망률은 1천 명당 55명으로 남한의 5명 보다 무려 11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어린이와 여성뿐 아니라 성인들의 수명도 급속도로 단축되고 잇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93년 북한 남성 평균수명이 63·6세에서 97년에는 59·8세로, 여성은 69·3세에서 64·7세로 4년만에 3·8세∼4·6세 줄었다고 통계청이 밝혔다. 지난 1980년 중반 에티오피아에 닥친 대기근보다 더 혹독한 상황이 한반도의 북녘을 휩쓸고 있지만 이 재앙이 멈출 기미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존 파월 세계식량계획(WFP) 아시아지역 담당국장은 지난 2002년 5월 '재미한국청년연합'과의 전화인터뷰에서 "북한의 극심한 식량난을 계속 방치하면 한 세대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WFP가 2001년에는 북한주민 640만명에게 식량지원을 했으나 국제사회의 지원이 대폭 감소하면서 2002년에는 340만명에게 지원하는 것에 그친 상황을 우려한 말이다.

정미현씨는 "애들의 다리가 휘고, 머리는 큰데 몸은 작은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하고 있으며, 항문이 밖으로 튀어나와 죽는 아이들도 많다"며 "북한 주민 사이에서는 전봇대 개수만큼 사람이 남을 것이라고 탄식한다. 오십이 넘으면 살만큼 살았다고 하고 아이들이 죽으면 내 자식이 안 되려고 죽었다며 체념한다"고 전하며 한숨을 토했다.

정씨는 "어떤 엄마들은 굶어 죽지 않으려고 장마당에서 아랫도리를 팔고(매춘) 먹을 것을 훔치다 잡힌 꽃제비 아이들은 피가 나도록 맞아도 빵을 삼킬 때까지는 참는다"며 "인간 세상에서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일들이 지금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증언했다.

지난 2001년 남한에 정착한 최형진(38)씨는 29일 "94년 군대생활 당시에도 부대원 260명 중 30명이 영양실조일 정도로 군인들도 배를 곯고 있다"며 "북한정권이 군대를 유지하는 이유는 실업자 문제가 사회문제로 비화되면 위험해지기 때문에 체제유지 차원에서 남녀 청춘을 군대로 뽑아가는 것이지 전쟁을 하려는 게 아니다"라고 진단했다.

"왕진가방 캠페인 소식을 듣고 마음속으로 감사하며 눈물을 흘렸다"

▲ 링거 역할을 하는 맥주병을 소독하고 있다.
ⓒ2004 ADRA 제공
탈북자들은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북한을 떠나왔지만 북한에 두고 온 부모형제를 생각하면 다리 뻗고 지낼 수가 없다. 체제가 다른 남한에 정착하는 일도 힘겹지만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기아와 병고에 시달리는 부모형제에 대한 걱정이다. 그래서 대다수 탈북자들은 정착금과 수입의 상당 부분을 북녘의 부모형제와 자식을 돕는데 쓴다.

최형진씨는 "나 혼자 먹고살자고 집을 떠난 게 아니다. 부모형제를 먹여 살리기 위해 지난 3년 동안 7400달러를 보냈다"며 "노동을 하며 사느라 가정생활이 어렵지만 긴박한 북한 상황을 생각하면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북한 부모형제에 돕는 게 우선이다. 목숨을 걸고라도 부모형제를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

2002년 월남한 주성일(23·연세대 정치외교학과 2학년)씨는 "북한에 왕진가방 보내기 캠페인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탈북자들은 마음속으로 감사하며 눈물을 흘렸다"며 "하지만 아프리카에 대한 식량원조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정작 같은 민족인 북한을 돕는데는 반대하는 모습을 목격할 때 마음이 너무 아팠다"며 학생들의 냉담한 태도에 실망감을 표시했다.

정미현씨는 "이북에 두고 온 자식들을 생각하면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며 "당장 통일이 되지 않더라도 내가 가진 것을 이북에 있는 부모형제와 자식들에게 보낼 수 있다면 사는 게 힘이 날텐데…. 배부른 게 더 죄스럽고 가슴 아프다"며 북한을 도울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호소했다.

지난 2002년 남한에 온 강희정(여·33·가명)씨는 "남한에 와서 좋은 남편을 만나 결혼도 하고 시부모님들에게 사랑을 받고 행복하다"며 "남한 남자들 가운데 나쁜 사람도 있지만 좋은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같은 민족이라는 게 너무 감사한 마음이다. 남한 경제가 어려워 마음의 여유가 없겠지만 그래도 북한동포를 살리는 일에 정성이 모아졌으면 좋겠다"고 간곡히 부탁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북한에 대한 지원이 민족화해에 밑거름이 될 것이라며 민족의 미래를 위해 국민들이 관심을 가져줄 것을 호소했다. 북한 체제에 대한 반감보다는 우선 기근과 병으로 어린이들이 죽어 가는 민족의 비극을 막는 일에 나서줄 것을 부탁했다. 특히 국제사회가 지원한 식량이 평양에 집중되는 폐단이 있다며 지방의 주민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이 미쳐야 한다고 호소했다.

왕진가방 시급...캠페인 기간 10월 30일까지 연장

▲ 북한에 지원할 것과 똑같은 왕진가방.
ⓒ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

북한 주민들은 몸이 아프면 가장 먼저 동네 진료소의 호(戶) 담당의사를 찾아가 치료를 받고 상태가 심하면 구역병원→ 도중앙병원→ 평양의 중앙급 병원을 찾아가 치료를 받는다.

주민들의 주치의 역할을 하는 호담당의사들은 오전에 동진료소와 구역병원에서 진료활동을 하고 오후에는 자신이 담당하는 가구(호담당의사 1인당 130∼150가구)를 방문해 1차 진료와 각종 예방 활동을 한다.

북한의 보건의료체계가 붕괴됐지만 그래도 다행스러운 점은 북한 의사들의 의술 수준과 열의가 높다는 것이다. 북한을 방문했던 남한의 의료진들은 의약품과 의료 기구만 지원되면 꺼져가는 북한 어린이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남북한 의료진들은 왕진가방 지원을 가장 시급한 의료대책으로 꼽고 있다. 호담당의사들에게 왕진가방은 필수적인 의료장비로, 왕진가방에는 혈압기, 청진기, 펜라이트, 체온계, 설압자, 부항, 가위, 핀셋, 응급약 셋트 등이 구비되어 있다.

왕진가방 보내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사)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에 따르면, 지난해 5월 호담당의사를 면담한 결과 왕진가방 지원이 매우 절실한 상태이며 북한 어린이와 주민들을 치료하는데 효율적이라고 강조했다.

<오마이뉴스>는 남북함께살기운동(이사장 양병희), 사회복지공동모금회(회장 김용준)와 함께 9월 6일부터 10월 6일까지 한 달간 '북한에 왕진가방 보내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하지만 추석 연휴가 포함돼 예상 모금액에 미치지 못해 캠페인 기간을 10월 30일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북한 어린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통일의 꿈나무로 자랄 수 있도록 국민들의 관심과 사랑을 기대한다.
 조호진(mindle21) 기자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212309

<캠페인 참여 계좌번호>

- 외환은행 : 068-22-01072-3
- 조흥은행 : 306-01-236880
- 국민은행 : 815601-04-027521
- 농협 : 1082-01-002585

( 예금주 : 사회복지공동모금회)


* 이 캠페인과 관련한 문의는 010-7737-6824(남북함께살기운동 캠페인본부)으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왼쪽 사진은 작년에 중국 북경의 한국대사관 정문에서 벌어진 장면입니다. 한국대사관에 진입하려는 탈북자 가족을 중국 경찰인 공안이 강제로 저지하며 끌어내는 상황입니다. 중국인 경찰의 허리춤을 잡고 끌려가며 아우성을 치는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저 남루한 옷차림의 북한 어린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혹시 당신과 나의 조카일지도 모를 저 어린이의 머리를 저렇게 묶어주며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리고 저 아이는 지금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가슴이 아픕니다.

오른쪽 사진은 이라크전쟁에서 미군이 포로로 잡은 이라크 시민과 그 아들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잡힌 것인지 모르지만, 머리에 검은 비닐을 씌워서 그냥 따가운 모래밭에 앉혀놨습니다. 철조망이 살벌합니다. 왜 어린이까지 잡혀와 있는 것일까요. 왜 아이는 남루한 운동화를 벗어놨을까요. 아이는 울다 지친 것인지 열병이라도 난 것인지 힘없이 아빠에게 안겨 있습니다. 볼 수도 없는 아이의 머리를 앙상한 손으로 어루만지며 저 아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고개를 숙인 아빠의 머리가 만드는 각도와 두 사람의 신발, 아이의 힘없는 표정에서 한없는 절망이 느껴집니다. 아무런 현실적 힘이 없는 아빠에게 기대어 있는 아이의 기대, 그 기대를 알면서 머리나 쓰다듬어줄 수밖에 없는 포로 아빠의 절망이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어떤 복잡한 정치적 논리나 수사가 저 어린 아이들의 고통 앞에서 힘이 될 수 있을까요.

출처:http://deulpul.egloos.com/12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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