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선교에 하나님께서 준비된 영혼들을 보게하시고 러시아를 향한 주님의 뜻을 깨닫게 하신것에 감사합니다. 순박하면서도 무엇인가 갈망하는 어린이들의 눈망울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선교팀에 합류했던 현지교회청년들의 찬양에 '러시아여, 예수님께 돌아오라'라는 내용의 가사를 듣고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어린이들 손을 꼭잡고 이들을 구원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으로 러시아를 개혁할 제 2의 마틴 루터가 이들 가운데 나올 수 있다는 소망을 품어보았습니다.


▲한 고려인 가정이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농사를 짓고 있다. 이제 고려인들은 연해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립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러시아 연해주 사역과 선교사들

1. 연해주- 가까운, 그러나 광대한 러시아의 관문

러시아는 일반적으로 먼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아주 가까운 나라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모스크바까지 비행기로 9시간, 러시아 내의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9시간이나 걸리지만 러시아 극동에 위치한 연해주의 수도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1시간 40분이면 바로 닿는다.
한반도의 2/3에 해당하는 면적을 가진 연해주는 러시아어로 ‘쁘리모르스끼 크라이’ 라고 하여 바다의 끝, 즉 ‘땅 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연해주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한 말씀이 우리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구나!’ 라는 자부심을 갖게 해주는 곳이다.  
연해주는 서쪽으로 중국의 연변 자치주와 흑룡강 성, 남쪽으로 두만강, 북쪽으로는 하바로브스크주와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동쪽으로 태평양을 건너서 사할린 주를 바라보고 있다.
연해주 내의 주요 도시로는 블라디보스토크시(등록인구75만, 상주인구 약 100만), 나호드까시(20만), 우수리스크시(15만) 가 있다. 한국의 동춘호가  저녁 무렵 속초항을 출발해서 이튿날 아침이면 도착하게 되는 자루비노 항도 기억할 만하다.

연해주의 수도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바이칼 호수를 끼고 대륙을 횡단하여 모스크바에 도달하는 시베리아 철도의 시발역인 블라디보스토크역이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의 황금만에는 영하 20-30도에도 뱃길을 열어주고 있는 부동항이 있어서 인천, 속초, 일본, 영국, 미국 등지에서 오는 상선들과 군함들이 지루하지 않게 번갈아 드나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황금만에는 2차 대전 당시의 위용을 스러져가는 빛으로 자랑하고 있는 극동함대도 볼 수 있다.

블라디보스토크가 미국의 뉴욕, 중국의 상해에 이어 세계적인 무역항이 될 것을 기대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우리는 경제, 군사, 선교의 요충지가 될 것을 기도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를 향한 복음의 관문(Gateway)으로서 그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그 기능을 잘 수행한 예도 있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의 대다수의 고려인 18만여 명이 시베리아 철도와 중앙아시아의 철도를 따라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즈스탄 등의 중앙아시아에 뿌려졌다. 강제로 흩어진 고려인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지만 이 고려인들을 통해 중앙아시아에 복음이 빨리 확산될 수 있었다. 그 때 강제로 흩어졌던 고려인들이 이제는 이곳에 많이 돌아와서 살고 있는데 이제는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국의 선교사들과 함께 자발적으로 복음을 들고 이 관문을 통과해서 나아가는 날을 기도하고 있다.

2. 선교사 및 사역 소개

러시아 연해주에 별도 GMP 팀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별로 다른 선교사들과 팀을 이루며 사역하고 있다. 지금은 크게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두 지역으로 나누어서 사역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사역 - 블라디보스토크에는 고위경/이희선 선교사와 조상국/윤옥자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으며 이들의 사역은 다음과 같다.  

고위경/이희선 선교사는 NGO '블라디보스토크 문화교류 센터'를 설립하여 2003년부터 음악을 통한 문화교류 사역을 해 오고 있다. 이 문화 교류 사역을 통해서 수많은 한국의 유명한 성악가들과 연주가들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다녀가면서 전반적으로 한국 문화에 대한 인식을 높여 주었다. 러시아인들은 예술성이 뛰어나 수준 높은 한국 음악을 금방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특별히 이희선 선교사는 한국에서 가져온 전자오르간으로 이곳에서 3일간 연주했는데, 청중들의 열화 같은 성원에 힘입어 일주일 연속 앙코르 공연을 하는 기록을 보였다.
선교지로 오면서 평생을 사랑했던 오르간을 하나님 앞에 포기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더 영광스럽게 쓰일 수 있도록 달란트를 높이 들어 올려 주신 귀한  간증이 되었다. 그 외에도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이 많은 음악인들이 와서 크리스천 음악으로 현지인들의 마음을 열고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블라디보스토크 북쪽 외곽의 경관이 좋은 곳에는 청소년 캠프, 선원들 요양소, 건강 휴양소 등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지역에 2005년 9월 17일 블라디보스토크 국제학교(Vladivostok International School)가 개교하여 선교사 자녀들 및 한국과 러시아 학생들 교육을 하고 있다. 이 학교는 미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School of Tomorrow의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러시아와 미국 정규과정을 병행해서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성경에 기초한 School of Tomorrow 교육과정을 통해 학생에게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치고 교사들을 통해 복음을 전하며 신앙인으로 양육하고 있다. 영어 교육과정은 성경에 기초한 것이고 교사들은 모두 신앙인이며 기도로서 학업을 시작하는 학교이다.
조상국 선교사는 이 학교의 교장으로, 윤옥자 선교사는 학생식당의 책임자로 섬기고 있다. 현재 미국인 교사 2명, 한국 MK 출신 교사 1명, 현지 교사 5명으로 3개 반을 운영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개교한 이 학교는 러시아 사회에서 좋은 평판을 얻고 있다.  

우수리스크 사역 -우수리스크지역에는 현재 3가정 6명의 선교사(윤영곤/송석녀 선교사 , 김기남/ 박정진 선교사, 송병주/ 김현숙 선교사)들이 사역하고 있다. 이들의 사역은 다음과 같다.  

피부과 의사인 윤영곤 선교사는 부인 송석녀 선교사와 함께 의료 선교의 꿈을 가지고 5년째 사역하고 있는 실버 선교사이다. 우수리스크에 병원을 설립하려고 몇 년 째 시도하고 있으나, 현지 의사 자격증을 요구하는 법규상의 문제와 개인 병원을 운영할 시스템을 갖추는 문제로 인해 현재는 NGO를 설립하여 현지의 병원, 고아원, 양로원 등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우수리스크 시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미하일로브까 은혜교회에서 새가족 성경공부, 야체이까(목장), 전도폭발 리더 훈련 사역을 담당하고 있다. 의사로서의 통찰력으로 유한한 이 땅의 생명을 통감하고, 과감하게 삶을 변화시켜 러시아에서 하나님께 충성하면서 살기로 작정하여 소망 가운데 기쁨으로 어려움들을 이겨 나가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생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한다.
송병주/김현숙 선교사는 목사 선교사로 교회개척과 농업 기술사역 전담을 위해 파송 받아 현재 적응기간을 갖고 있다. 미하일로브까 은혜교회를 담임하고 있고, 고려인들의 정착촌에 있는 가정교회와 농업사역을 돕고 있다. 농업기술센터를 통해 비닐하우스 농업 보급과 고려인들이 정착하도록 지원하고 있고, 문화센터를 통해서 이 지역 문화의 선도를 통한 영적인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김기남/ 박정진 선교사는 건축전문인 선교사로 초창기에 건축 관련일로 지역교회들을 돕는 사역을 했다. 현재는 현지인 교회의 영적 필요가 요구되고 있어 다차(주말 농장)교회 지원, 마약 및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홈리스들을 위한 목공소 프로젝트 지원, 노동자를 위한 쉼터 지원을 하고 있고, 민들레 영토 프로젝트를 통한 보다 심도 있는 사역을 준비 중에 있다.

3. 전략과 비전

연해주 GMP 선교사들은 다른 선교사들과 연합하여 독특한 방식으로 총체적인 선교 활동을 펼치고 있다. 크게는 남서울 은혜 교회가 중심이 되어 지원하는 원동 선교사 모임이 있어서 다양하게 은사에 따라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교회개척 사역(우수리스크 미르 교회, 우수리스크 사랑의 빛 교회, 미하일로브까 은혜 교회), 고려인 정착 지원 및 북한 동포 돕기 감자 보내기 사역, 문화 교류 사역, 교육 사역으로 나누어져 상호 보완하며 사역별로는 각각 팀으로 협력 사역하고 있다.
교육 사역은 장기적인 계획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일단계로 블라디보스토크 국제학교(VIS) 개교이후 다음 단계로 블라디보스토크 국제대학(VIU)을 개교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다. 이미 블라디보스토크 국제대학의 법인은 등록되어 있고 캠퍼스를 위한 장소도 마련되어 있다. 국가의 교육 라이센스를 받는 일이 기도제목이다. 교육 사역을 위해 필요한 인력으로는 태권도 사역자와 어린이 음악 사역자들, 영어로 School of Tomorrow 교과 과정을 가르칠 선생님들이 필요하다. 이 교육 사역의 장들은 또한 한국의 젊은이들을 수련하고 동원하는 중요한 기지로 이미 사용 되어가고 있다. VIU 가 개교되면 현지 사회의 리더 뿐 아니라 바로 이웃의 중국의 영적 지도자들을 양육하게 될 것이라는 비전을 품고 노력하고 있다.
우수리스크는 북한 노동자들이 달러벌이를 위해 러시아로 진출하기 위해 거쳐 가는 곳으로 이들이 장기간 체류하는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들을 위한 필요와 도움이 요청되고 있다. 또 이곳은 중국인들이 진출하여 다방면으로 활동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상당수의 조선족들이 합류하여 있고 이들이 모이는 교회도 몇 군데 있다. 이들을 위한 선교 프로젝트를 마련하는 것도 우리의 과제이기도 하다.

4. 그간의 열매들

그 동안 문화교류 사역을 통해 많은 음악회가 열려서 한-러 간의 문화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복음을 위한 접촉점과 공감대가 많이 준비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교육 사역은 개교를 위한 준비 기간으로 4년여를 보냈는데 이제 개교하여 날마다 살아 있는 영혼들을 두고 기도할 수 있어서 큰 보람을 느낀다. 어린 영혼들을 통해 이 사회의 상류층인 학부형들이 미적지근하고 명목적인 그리스도인에서 회심하여 변혁을 이루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것을 기도하며 기대하고 있다.
무엇보다 큰 열매라고 하면 그 동안 함께 기도하고 수고한 우리 팀 구성원 간에 이해와 사랑의 깊이가 더해 진 점이다. 궁극적으로 선교는 선교하는 사람이 선교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많이 체험하는 복을 누리는 게 아닐까 싶다.

연해주 면적은 1659 평방 킬로미터(러시아 총면적의 1%이하)이고 이곳에는 240만명 (러시아 인구의 1.5%)의 인구가 살고 있다. 연해주의 겨울은 길지 않지만 춥다. 1월달의 평균기온은 해안지역 쪽이 영하 13도이고 대륙내부쪽은 영하27도이다.여름에는 장마가 찾아오고 7월의 평균기온은 14-21도이며 가장 더운 계절은 8월이다. 10월 중순에는 아름다운 단풍의 계절이 찾아온다. 다양한 아름다움이 고요함과 맞물려 연해주에 보기 드문 아름다움을 준다.

 

  블라디보스토크의 해안도로로 부터 서쪽 바다 건너에는 아무르스키만 언덕이 보인다. 또한 바다와 중국 국경 사이에는 좁고 긴 하산지대가 위치한다. 이곳의 풍부한 자연은 신이 연해주에 주신 선물이다. 해안가는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 지역에 북한으로 가는 철도길이 통과한다. 해안가 지역에는 거의 나무가 없으나 하산 지대 중심에는 러시아에서 오래 된 "삼나무숲"이라는 자연보호구역이 있다. 여기에는 동만주지역의 특징을 나타내주는 동물계와 식물계가 잘 보존되어 있다. 심지어 표범까지도 서식하고 있다. 가모프 반도의 남쪽 바위 해안가에는 러시아의 유일한 해양 자연 보호구역이 위치하고 있다. 해양 자연 보호구역에는 278 종류의 다양한 동물이 살고 있다

 산속의 평평한 분지 지역에는 발해, 요나라, 여진족 등의 유적들이 남아 있다.1937년까지 이곳에 한인촌들이 밀집했었다.포시에트만이 끝나는 두만강 하구쪽에 북한, 러시아, 중국 국경이 접한다.

 

 삼국을 연결하는 시베리아 철도가 우수리스크를 통과한다. 오늘날 두만강 하구에 큰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 지역에 대규모의 국제항을 개발할 계획이 있다. 현재 한국의 속초항에서 자루비누항으로 여객선이 들어오고 있다.  이 길을 통해 중국 훈춘을 거쳐 연길, 백두산으로 이어지는 관광항로가 열려있다. 하산  지역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만나는 경계이다.

 

브라디보스토크 동쪽의 넓은 우수리스키만을 지나 티하야 내만쪽에서 "나호드카" 자유무역경제 지대가 잘 보인다.  이 지역 발전에 한국의 사업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국제공항이 건설예정인 파르타잔스카야 강 분지를 "황금평야"라 한다. 이곳은 살구 농장과 양봉 농장으로 유명하다.  1937년까지 이 지역에는 몇개의 한인 마을들이 있었다.  강 하구에는 누나와 동생이라는 두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 고대 연해주 문명의 파멸을 몰고온 사랑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연해주의 주요 사업은 어업, 기계제작, 설비제작, 석탄, 목재 등 이며 석탄 산지 중 가장 오래 된 도시인 빨찌산스크시가 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접하고 있는 또 다른 장소에는 광부와 전기 기술자들의 도시인 아르춈시가 있다.그리고 이 횡단철도는 우수리스크시를 거쳐간다. 우수리스크시는 고려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했던 곳이며 이곳에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초,중,고등학교 및 사범학교가 있었다. 

  만약에 브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로브스크로 기차를 타고 여행한다면 연해주의 광할함을 볼 수 있다.    곡식들이 잘 자라고 있는 밭과 평야는 예전부터 한인들이 농사를 지어 온 곳이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고려인 이주민들에게 고향을 회상시키게 한다.  이곳에는 중국으로 가는 철도가 부설되어 있다.

  우수리스크시부터 루체고르스크까지 시베리아 철도를 따라 가면 연해주의 제3공업지대를 볼 수 있다. 

이 지대에 스파스크 라는 도시와 레소자보스크 시, 달린네레첸스크 시가 위치하고 있다. 이들도시에서는  식품, 임업, 목재가공 산업이 발전되어 있고 비킹과 파블롭스크라고 불리는 연해주에서 제일 큰 석탄 산지가 있다.

 

스파스크의 높은 언덕으로부터 밝은 석양빛 아래 멀리 반짝이는 한카 호수를 볼수 있다. 거의 원형의 모습이고 수심이 낮고 연해주에서 제일 큰 호수다. 국경 곁에 위치한 순가치 강의 물은 우수리 강으로 흘러들어가고 우수리 강물은 또한 아무르 강으로 흘러들어간다.

또 다시 기차를 타고 가다 보면 우수리 강 서쪽의 중국 땅을 바라 볼 수 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저녁에 열차를 타면 우수리스크 시를 거쳐 다음날 아침에 하바로브스크 시에 도착한다. 그런데 하바로브스크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철도 뿐만 아니라 자동차 도로로도 연결되어 있다. 연해주의 다른 자동차도로를 예를 들면 우수리스크->아르센에프->카바렐로보->달린네고르스크->테른에이 도로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한카호 저지대와 우수리 계곡부터 동쪽으로 시호테-알린 산맥이 위치하고 있다. 우수리스크 타이가에 야생목들과 원시림이 잘 보존되어 있다.

나호트카에서 졸로토이 갑(岬)까지 굴곡진 내만(內灣)들이 있다. 이 지역에는 대략 50여종의 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능금나무, 까치박달, 주목,보리수,소나무,낙엽송 등이다. 나무들과 얽혀 머루와 오미자들이 자라고 있고 이곳에 오갈피,인삼 등 거의 1000여종에 이르는 약용 식물이 번식하고 있다. 동물계도 또한 그만큼 다양하다. 북방계 사슴, 멧돼지, 시베리아 흑담비, 호랑이, 우수리스크 사슴, 티베트 곰, 아무르스키 영양 등이 서식하고 있다. 이 지역의 임업, 목재 가공, 관광, 사냥등 여러 산업이 자연의  풍부함으로 발달되고 있다. 비킹 강과 사마라 강의 타이가 지대에서는 연해주 지역 원주민 후손들인 우데게, 나나이, 오로치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1860년에 이 지역이 러시아로 편입되기 전까지 그들은 포시에트 만에서부터 아무르 강 하류, 우수리 강변을 따라 살아왔다.

 

  한국인과 연해주

 

기원후 5-6세기 무렵에 고구려는 연해주의 모해족과 국경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고구려는 모해족과 전쟁을 하였고 그들을 정복하였다. 그러나 668년에 당나라는 고구려를 격퇴시켰다. 전쟁시 고구려의 동맹자였던 모해족의 많은 수가 당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30년후에 모해족의 일부분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모해족 일원과 예전부터 살아온 모해족 일원과 고구려사람들이 새로운 모해족 연합체의 집권 계층이 되었다. 새로운 모해족 연합체는 당나라군을 공격하는데 성공하였고 698년에 이 연합체의 지도자인 대종중이 채쟁국을 세웠고 이 나라는 713년에 발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발해국은 만주지역 대부분과 연해주, 북한의 영토를 차지하였다.  발해국의 영토는 5개의 수도와 15개 주로 이루어졌다.  연해주 남쪽에 발해의 15개 주 중의 하나인 수아이빈이 있었는데 이 주의 행정중심은 현재의 우수리스크시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산지역 크라스키노에서 발굴된 유적은 크라스키노 마을이 옛 발해의 동쪽 수도인 양경의 중심임을 말해주고 있다.

  발해인은 터키 룬 문자를 사용하였고 고구려인들은 한자, 불교, 고전문학 등을 발전시켰다. 유적에서는 네스트리우스교(5세기에 비잔틴에 나타난 크리스트교의 한 분파, 8세기경에 중국의 위구르 한국(汗國)에 전파 )의 흔적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생활에서는 샤머니즘이 우세하였다.

  10세기 중반 발해족의 서남쪽 이웃인 거란족이 요나라를 세웠다. 이 왕국은 전국적인 군사통치를 하였다. 20년 이상 거란족은 발해와 전쟁을 하였고 926년에 발해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발해인들은 그대로 굴복하지 않고 그해에 거란족에 대항하여그해에 거란족에 대항하여 봉기하였다. 대립은 계속되었다. 그 결과 거란족의 왕은 거란국에서 복종하지 않는 발해인들을 강제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결과로 전체 발해족의 70%가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고 20% 가량이 어쩔 수 없이 고려로 돌아갔다.

  발해국의 멸망부터 1215년까지 연해주는 먼저 거란국의 영토이었고 그 다음에는 여진족(후에 금나라)의 영토였다.  그러나 역사의 장에서 징기스칸의 출현은 이 지역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215년 금나라의 왕은 몽고의 위협으로 인해 수도를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요동의 군대 지위관인 푸산 반누는 금나라로부터 독립해 나라를 세우고 자신을 대정국의 통치자로 자청했다. 그후 얼마 안지나서 푸산 반누의 군대는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푸산 반누는 이곳 개원이라고 불리는 도시에 동요 나라를 세웠다. 이 도시는 연해주의 우수리스크시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여진족은 만주의 동쪽 지역, 한반도 북부, 연해주의 중앙과 남쪽 지역을 차지하였다. 1216년 요나라의 부흥을 내세운 거란국은 고려국으로 침입하였다. 고려의 지도자 최충현은 몽고에 도움을 오청하였고 려-몽 연합군과 동요의 군대가 연합하여 연해주 일대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1233년 몽고군은 고려 침공 이후 동요의 남쪽 수도를 공격하였고 동요의 통치자인 푸산 반누를 포로했다. 그 다음에 몽고군들은 개원시를 침공하였다. 뒤늦게 몽고군들은 루시국(옛 러시아)과 전쟁을 시작하였고 1270년 대부터 루시국에 몽고의 압제가 시작되었다.

  13세기 몽고인들의 출현은 연해주에 큰 위협이었고 이는 곧 연해주의 황폐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 황페로 해서 루시국과 연해주는 고려와 역사상 처음으로 연관을 맺게 되었다. 몽고 제국은 흑해로부터 태평양에 이르기까지 많은 민족을 복종시켰고 동-서양문명의 연결자가 되었다. 16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이 역할을 러시아가 했다.

  러시아인들이 최초로 연해주에 나타난 때는 1655년이다. 이때 러시아아인들은 처음으로 조선인들과 아무르 강과 순가리 강 유역에서 만났다. 스테파노프의 지휘아래 카자크 군인들은 청나라의 평곱(1654년), 신류의 군대 (1658년)와 충돌하였다. 청나라 전란시기에 카자크 군인들이 연해주에 농경 지역을 찾던 중 우수리 강 근처에 있는 신비의 니칸 왕국에 황금산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 지역의 원주민들은 카자크 부대에 복종을 하였는데 모스크바의 짜르 정권은 이 하안 지방을 보호하지 않았다. 1658년 스테파노프부대는 괴멸되었다.1689년 청-러 사이의 네르친스크 조약 이후 러시아인들은 아무르 지역 인근으로부터 철수하였다.

  카자크 군인들이 조선의 영토에 도달하는데 실패하였지만 조선에 대한 소식은 중국을 거쳐 러시아와 서유럽에 도달하였다. 19세기 후반까지 러시아와 한국이 서로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양국의 직접적인 접촉은 러시아 탐험대가 연해주 남쪽 해안을 탐사하는 첫해에 시작되었다.

  1854년 한국에 푸따틴 탐험대가 도착하였다. 탐험은 두만강 하구와 포시에트만에서 진행되었다. 이 사건은 영국, 미국, 프랑스가 극동 지역에서 영토 확장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고 있었던 "태평양시대" 초반에 있었다. 그들의 영토 확정 정책의 길에는 항상 러시아 제국이 서 있었다. 그해 푸따틴 탐험대는 이미 영국이 먼저 점유하고 있는 아무르강 하류(전체 극동과 중국을 북쪽에서 콘트롤 할 수 있는 양보할 수 없는 최후의 전략적 장소)로 돌아왔다. 6년이 지난후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세웠고 1890년대에 블라디보스토크는 이-태 지역에서 러시아 제국의 전초 기지가 되었다. 1860년 베이징 조약에 의거 러시아로 병합된 연해주는 조선과 국경을 이루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한인들의 이주가 연해주로 시작되었다. 1863년에 까미쇼바야(파타지) 계곡, 쑤까노프까(양치해), 도조른아야(띠진해) 강, 하산지역 남쪽에 최초의 한인촌들이 생겨났다. 1870년 대에 이르러 한인 이주민들은 8400명에 이르렀다.

  연해주로 이주하는 중요 이유는 배고픔과 한국 정치의 불안정이었다. 역사적으로 한인들은 중국인들과 만주인들을 믿지 않았지만 러시아와는 큰 흥미를 가지고 관계를 시작하였다. 한인 마을들은 연해주 발전에 촉진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남쪽 지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과 러시아 간의 통상 우호조약은 1884년 서울에서 체결되었다. 또 그와 동시에 한인 이주민들을 정리하려는 계획이 착수되었다.

  그러나 연해주로의 한인 대량 이주는 월경할 경우 목을 벤다는 조선왕의 칙령과 러시아내의 카자크인들의 위협도 막을 수가 없었다. 한인 이주민들은 강가를 따라서 정착하였다. 그러나 전체 숫자의 20-30%만이 러시아 제국의 공민증을 발급 받을 수 있었다.

  19세기말 러시아 자본이 조선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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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선교 정교회 견제등 ‘위기’… 현지 선교사가 말하는 사역 현황과 문제점


“한국 교회의 선교는 유행을 너무 타는 것 같고 선교사를 무조건 많이 파송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나 봐요.”

6월 한달간 전국 15개 도시에서 진행중인 세계선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처럼 고국을 찾은 러시아 선교사들의 말이다. 이들은 1990년대 한국 교회 북방선교의 중심축이었던 러시아를 강조하는 목회자들을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면서 서글픈 마음까지 든다고 말했다.

공산당 통치 70여년간 목회자 35만명을 비롯,2000여만명의 기독교 순교자가 나왔던 러시아권에서 한인선교사들이 활동해온 것은 올해로 16년째이다. 소련선교회가 1991년 4월 김봉석 선교사 등 8가정,같은 해 9월 허충강 선교사 등 6가정을 파송한 이래 러시아는 한국 교회의 5번째 선교대상국이기도 했다.

한때 각 교단 및 선교단체들이 파송한 한인선교사들이 500가정(1000여명)을 넘어섰지만 현재 300여 가정으로 줄어들었다.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고물가에 허덕이던 선교사들이 자발적으로 철수한 것도 이유였지만 더 이상 주요 선교지로 간주하지 않는 한국 교회의 선교정책 변화와 무관심이 더 큰 원인이었다. 박형서 선교사는 “현지 상황을 잘 알지 못한 채 한국식으로 사역을 펼치다가 부작용을 낳기도 했지만 테러 등 많은 핍박 속에서도 열심히 사역한 선교사들이 더 많았다”면서 러시아선교에 대한 한국 교회의 관심을 촉구했다.

현재 러시아선교는 장기적인 사역 장소 확보의 어려움,일부 잘못된 선교사들이 주도했던 물량공세식 선교에 따른 부작용,러시아정교회의 견제 등으로 위기에 직면해 있다. 1991년 12월25일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제도를 추구하는 러시아연방이 탄생하면서 정교회가 민족종교로 재부상했다. 러시아인들은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서도 종교를 물으면 정교회 신도라고 한다. 그만큼 명목상 신자가 많다는 것. 정교회는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기독교를 이단으로 몰아붙이면서 방송 등 언론매체를 통해 공격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선교전문가들은 “정교회 신자들이 개신교 신자가 되는 경우가 늘고 있어 정교회가 협력하지 않고 있다”면서 “그러나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있는 정교회 신부들이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하며 이제는 서로의 실체를 인정하면서 다양한 사역을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선교사는 “가능한 한 현지 종교를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면서 “만약 정교회가 선교사들을 박해한다면 고난을 받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선교는 핍박과 눈물을 통해 이뤄지고 도덕성이나 영적 우위가 나타나면 현지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 선교의 미래는 정교회와의 건강한 관계 설정 외에도 현지 기독교 교단과 협력 네트워크 구축 및 확대,현지인 리더십 양성의 다극화 등에 달려 있다고 선교사들은 지적했다. 조동석 선교사는 “러시아내 기독교 교단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거의 무시해온 선교사들의 활동에 불만이 많다”면서 “현지 기독교단을 활용하면 법적 보호를 통해 사역을 한층 용이하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통적인 교회 개척과 신학교 사역으로 미래의 교회 지도자들을 더 많이 육성하고 스포츠 선교,장애인 및 미전도종족 선교,가정회복 운동 등 사역 내용과 대상을 확대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러시아 선교사는 “러시아의 사회·경제적 상황이 점차 복음 전도에 유리하게 변화될 것”이라고 낙관하고 “영어·컴퓨터교실 운영,유치원 사립학교 설립 등을 통해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사역 장소를 빌려서 해결하고 있다. 주로 영화관 문화회관 강당 체육관 등을 사용하는데 임차료가 폭등할 경우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것. 따라서 한국 교회가 선교사들이 마음껏 사역할 수 있도록 인프라 구축에 인색해서는 안된다고 선교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

가난한 젊음의 초상  –  아르바트의 아이들(1)

가난한 젊음의 초상 – 아르바트의 아이들

모스크바의 가난한 젊은 영혼들이 모이는 유일한 곳,
화려한 사치들이 흘러 다니는 길 한 모퉁이에 그들만의 언어로 존재 하는 곳,
빅토르 초이( Виктор Цой )가 노래를 불렀다던 벽 한켠에서 술에 노래에 때론 마약에 취해 몽롱해진 눈빛으로 지나 다니는 사람들을 무심하게 바라다 보는 어린 히피들의 안식처인 곳,

음울과 화려함이 함께 어우러진 곳,
부와 가난함이 공존 하는 곳,
자본주의의 왜곡과 편리함이 뒤 섞인 곳,


모스크바 중심부에 위치한 아주 유명하고 오래된 거리의 하나인
‘아르바트( Арбат )'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한다.
우리 서울의 대학로와 흡사한 거리인 아르바트엔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거리 화가들을 비롯해 – 초상화 가격은 10~20$ 정도 인데 술에 얼큰해진 화가와 얘기만 잘 맞으면 좀더 싼 가격으로 그릴수 있다. – 청소년 댄스팀 (힙합,브레이크 댄스등을 츄리닝 바지에 골판 박스를 펼친 무대위에서 열심히들 춰댄다.), 연로한 듯한 나이의, 재즈를 멋들어지게 연주 하는 멋장이 젊은 오빠 악단, 손금을 봐주는 짚시 여자들,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최고급 유명 상표의 상점들을 비롯해 허름한 아랍 식당들과 게이들이 주로 찾는다는 바에 이르기 까지 정말 없는게 없는 곳이 바로 아르바트
거리 이다.

물론 개방과 동시에 자본이 거리로 흘러 들어 오면서 예전의 낭만이 많이 사라 지긴 했지만 여전히 자신만의 독특함을 잃지 않고 있는 곳으로 여름엔 거리 곳곳에서 열리는 공연들을 보기 위해 또 겨울엔 거리 양쪽에 나란히 늘어선 고풍스런 가로등 불빛에 흩날리는 눈꽃의 아스라한 멋을 즐기기 위해 때론 삶에 답답해진 속을 풀려 즐겨 찾는 곳 이기도 하다.


아르바트 거리는 '아르밧스까야 (Арбатская)' 란 지하철 역 에서 시작해 '스말렌스까야 (Смоленская)' 역이 끝나는 곳에 위치한 직선의 긴 거리 이다.

아르바트가 생긴때가 XV세기 경이니 아주 오래된 거리임에 틀림이 없고 걸 반증이 라도 하듯 거리 양편엔 오래된 건물들이 즐비 하게 늘어서 있어서 거리를 걷고 있다보면 현실과 과거가 공존 하는 듯한 묘한 감상에 빠져 들기도 한다.

'아르바트'란 말의 어원은 아랍 말의 '도시 외곽' 이란 뜻의 'Arbad'에서 파생된 말로 15세기 당시엔 크레믈 안쪽에 위치한 곳만을 도시라 여겼기 때문에 크레믈을 벗어난 지역은 도시 외곽이라 불렀다 하는 설이 있는가 하면 당시 이곳에서 장사를 하던 크림 반도의 타타르 인들이 그렇게 거리 이름을 붙였단 설도 있는데 고사하고, XVII세기 엔 거리이름을 '스말렌스까야'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는데 – 이 길이
'스몰렌스크(Смоленск)'로 향하는 길목 이기 때문 이었다고 한다. - 바뀐 거리 이름은 오랫동안 익숙해진 아르바트 란 명칭을 쉽게 고치기 힘들어서 인지 오래동안 불려지지 못했다.


아르바트 거리는 1987년 모스크바 시의 결정으로 역사가 오래된 레스토랑인
'프라하 (Прага)' – 역사가 백년이 넘는 배의 모양을 띈 건물로 당대 유명했던 작가,음악가,화가들이 모이는 장소 이기도 했다. - 가 있는 ' 아르바트 광장(Арбатская площадь)' 에서 부터 차들의 통행을 막아 보행자들 만이 다닐수 있게 했는데 그때부터 아르바트를 모스크바의 '몽마르뜨'라 부르기도 한다.
아르바트의 아이들(2)

자, 그럼 지금부터 모스크바의 몽마르뜨 거리를 천천히 걸어 보도록 할까?

'스말렌스까야 '역에서 나와 아르바트 거리로 들어 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물이 맥도날드 햄버거집 이다. – 아르바트 거리에서 아주 편하게 화장실을 이용할수있는(것두 무료로)곳.
맥도날드가 러시아에 진출한게 작년으로 딱 십년이 되었고 간혹 살기힘든 모스크바를 강조할때 tv 에서 자주 보여주던 장면중 하나가 이 햄버거 거게에 늘어선 줄의 행렬이었던 걸 기억 하는데 지금은 모스크바 곳곳에 새로운 매장이 많이 생겨 그정도의 줄을 볼순 없지만 암튼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것은 사실이다.

햄버거의 가격은 달러 가격에 기준하여 변화가 생기는데 – 달러가 오르면 햄버거의 가격도 오른다. 물론 다른 물가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지금은 빅맥 하나가 33루블 (2001년 2월 5일 현재 1$=28.40 루블이다.),치킨 맥너겟 9개 조각이 54루블, 콜라 중간짜리가 17루블 정도의 가격이니 아마도 우리나라보단 조금 싼가격이 아닐까 하는데…
그리고 또 하나 이 곳 맥도날드의 특이한 점은 먹고난 후 먹은것을 그냥 자리에 놓고 나가면 거기 직원들이 알아서 치워준다는 점이다. 글쎄 인권비가 싸서 그런 서비스가 가능한 것 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셀프 서비스에 익숙해진 동방예의지국 사람의 눈으로 보면 재미있는 모습이 아닐수 없다. 나만그런가?!

햄버거로 요기도 했고 급한 용무도 해결 했으니 슬슬 움직여 볼까?
맥도날드를 지나 가로등이 죽 늘어선 거리로 들어 오다 보면 거리 왼쪽에 세워진 남녀 한쌍의 동상이 눈에 들어 온다.
러시아인들의 정신적 지주 이자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 받고 있는 사람인 바로 '뿌쉬낀(А.С.Пушкин)'과 그의 아내 '나딸리야 곤차로바(Наталья Гончарова)'의 동상이다. 뿌수낀 탄생 2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99년 세워진 동상으로 언제나 그 앞엔 꽃송이들과 기념 촬영을 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이 끊이지 않는곳 이고, 동상 바로 맞은편에 보이는 청록빛을 띈 건물이 바로 그가 모스크바에서 얼마간 살았던 집으로 지금은 그의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뿌쉬낀'의 동상을 지나 거리를 걷다보면 길 가운데 천막을 두른 간이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모습이 눈에 들어 오는데 파란 조끼를 입은 젊은 판매원들이 우리의 삐끼를 연상 시킬 정도로 «…한국 사람 좋아요!! 마�료쉬까 싸요!! 안 비싸요!! 하나에 십불!십불!…»
하는 서툰 한국말로 외쳐 대며 호객행위를 하는데 모스크바의 기념 상품들을 저렴하게 살수있는 곳이자 가격을 흥정 하는 재미 또한 만만찮은 곳 이기도 하다. – 난 주로 그네들이 외치는 가격의 반을 깎고 부터 흥정을 시작 하는데 어느정도 흥정을 하다 '여기 다른 곳도 많아.왜 이래?' 하는 식으로 돌아서서 한 1~2m 가면 어김 없이 다시 부르는 소리를 듣게 되는데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가격에 물건을 살수 있다는뜻이다.

기념품으론 보석 호박을 비롯해 인형속에 인형이 들어있는 목각 인형(마�료쉬까),
줄 달린 시계, 휴대용 술통, 울 스카프, 밍크 모자 등등 여러 가지가 있고 가격도 천차만별 이라 자세한 얘긴 않기로 한다.

아르바트의 아이들(3)

이렇게 재미있는 살거리를 경험하고 덤으로 사진도 그들과 한방찍고 나서 다시 거리 구경에 나서 보자.
거리를 중간정도 걸어 왔을때 쯤 눈에 띄이게 술에 취한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눈에 들어 오는데 가죽옷에 한 손엔 담배를 한 손엔 맥주병을 들고서선 서로 웃기도 하고 지나는 사람들에게 담배불도 빌리고 또 한쪽에선 통기타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데 거기에 바로 빅토르 최가 노래를 불렀다는 벽이 있다.
벽 하나 가득 빅토르 최를 기리는 문구들과 보드카 한잔,담배,꽃들이 끊이질 않고 그의 생전을 그리는데 물론 그네들에게 빅토르는 러시아인 이겠지만 그 곳을 지날때 마다 드는 뿌듯함은 나만의 오핸 아닐거란 생각이다.

그 곳에서 생전 그가 불렀던 노래를 듣고나서 위로 조금 올라가면 연극 극장이 하나 보이는데 '박탄꼬프' 극장으로 – 이 극장에 대해선 나의 또 다른 칼럼을 통해 소개를 할터이니 궁금하신 분들은 그 칼럼도 즐겨 읽어 주시길…- 지금은 한국에서 없어선 안될(?) 배우가 된 박 신양씨가 공불하던 '슈킨' 연극 학교의 전용극장이다.
그 극장 옆으론 분수대가 하나 있는데 잠시 아픈 다리를 쉬면서 사진도 한컷 찍을수 있는 곳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붐비는 장소 이기도 하다.

이렇듯 이 거리는 우리와도 많은 관계(?)가 있는 거리 이자 많은 매력을 안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보통 페키지 관광을 오면 시간에 쫓기고 스케쥴에 쫓겨 많은 것을 못보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은데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수 없다. 모스크바의 젊은 문화를 직접 피부로 느끼고싶은 분들은 이 거리를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거닐면서 모스크바의 또 다른 맛을 느껴 보길 바란다는 말로 아르바뜨의 짧은 여정을 마친다.   <작성자: 황소영>

모스크바 기행

푸쉬킨 박물관

바실리 성당

크레믈린 궁

성 당

박 물 관

쿰 백화점

백화점 내부

공산당 본부

지하철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지하철 역

꽃시계 광장

러시아 인형 노점상

자작나무 숲

  Ivan Rebroff - 내 조국  러시아 그대는 아름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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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조국  러시아 그대는 아름답구나

노래     Ivan Rebrof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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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an Rebroff (1931 ~)

1931년 생인 베이스 이반 레브로프는

아직도 현역이다.

핏줄은 러시아 카자끄인이지만 국적은 독일인

독일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다

나치시절 에는 가족과 함께 유럽 여러 국가로 전전했고

1953년 독일로 귀화한다

레브로프는 돈 코사크 합창단의 솔리스트로

서방무대에 처음 발을 디뎠고

그 후 지붕 위의 바이올린 등.. 뮤지컬과

러시아 교회 음악에 주로 활약했다

풍부한 성량으로 압도하는 그의 목소리는

듣는 이를 매료시킨다.

 

The Moscow river near the town of Zvenigorod

The Moscow river by the Kremlin

The Moscow river by the Kremlin at night

Hotel Ukraine in Moscow

The Novodevichy convent in Moscow

Sunset over the White sea

Founins of Peterhof

http://www.russianartgaller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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