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미래 아이들 속에 있습니다>

기아대책(회장 정정섭) 홍보대사 정태우(24·영화배우)씨가 지난달 18∼26일 기아대책 후원자,자원봉사자 등 14명과 함께 모잠비크에서 8박9일 동안 빈곤 아동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돌아왔다. 정태우씨는 고등학생 때 기아대책 홍보대사로 임명돼 현재까지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2000년에도 캄보디아 후원 아동을 방문했으며 매년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자선행사들을 마련해 후원금을 전달해왔다. 정씨가 모잠비크 봉사기를 본보에 보내왔다.

새빨간 모랫바람이 몰아치는 길을 9시간이나 달려 모잠비크의 작은 마을 마싱가에 도착했다. 우리를 처음 맞이한 것은 흥겨움이 넘치는 마을 주민들의 노랫소리와 춤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생각지도 못한 환영을 받고 이들이 우리를 얼마나 기다리고 반기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중학생과 고등학생에서부터 50대까지 다양하게 구성된 우리 자원봉사팀은 마을 사람들의 환대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 곧바로 화장실 건축과 페인트칠에 매달렸다. 그러나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작업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렸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도 마을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 분주히 저녁 식사를 준비해주었다. 저녁 만찬은 쌀밥과 처음 보는 반찬 세 가지. 기아대책 이상범 선교사님은 “선입견을 버리면 모든 것이 맛있어요”라며 먼저 익숙하게 손으로 먹는 시범을 보였다. 이 선교사는 아프리카 사람들과 똑같이 갈대로 지은 흙집에서 자고 그들과 함께 먹으며 노래하고 예배 드리는 삶을 살고 있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본격적으로 봉사 활동을 시작했다. 남자들은 화장실 건축,여자들은 페인트칠을 맡았다. 어느새 주위에 호기심이 가득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아이들은 마치 보디가드처럼 우리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물도 가져다주고 노래도 불러주었다.

마싱가 마을의 아이들은 학교가 부족해 3부로 나누어 수업을 받았다. 중학교는 도 단위에 하나뿐이기 때문에 대부분 초등학교에서 모든 교육이 끝난다. 작은 학교 하나를 짓기 위한 최소 비용은 우리 돈 1억원 정도. 그러나 1억원은 모잠비크 사람들에게 엄청난 액수다.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장단에 맞춰 현지 노래를 흥얼거리는 우리에게 이 선교사님은 “이 아이들은 여러분을 천사로 볼 거예요. 어느 날 갑자기 얼굴 하얀 사람들이 나타나서 같이 놀아주고,화장실도 지어주고,선물도 나눠주니 하나님이 자신들을 축복하기 위해 천사를 보냈다고 생각할 거예요”라고 말했다.

마싱가에서 마지막 날. 아이들에게 티셔츠와 간단한 약품을 나눠줬다. 한국에서는 흔한 티셔츠가 이곳 아이들에게는 가장 귀한 옷이 되었다. 한국의 약국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간단한 연고가 이들에게는 기적이 된다는 말을 듣고 좀더 가져올 걸 후회하기도 했다.

모잠비크 수도 마푸토에서 40분쯤 떨어진 콩골로티 보육원을 찾았다. 에이즈와 피부병,풍토병에 시달리는 아이들과 뒹굴며 놀아주었다. 생전 처음 보는 즉석 카메라에 깜짝 놀라는 아이들,풍선으로 만든 장난감을 받아들고 기뻐하던 아이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문득 내 모습을 떠올렸다. 스스로 강한 자라고 여겨온 이기적인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아프리카와 그곳에 있는 내 이웃을 돌아보며 다시 스스로의 부족함을 깨닫는다.

아이들 교육 외에는 모잠비크에는 희망이 없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그 꿈을 키워나갈 수 있는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것만이 모잠비크의 희망이 될 것이다. 서양 선교사들이 실패하고 떠난 모잠비크. 36년 동안 일제 식민지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우리가 그들의 친구가 돼야 한다. 우리의 작은 도움이 모잠비크에 희망의 씨앗을 심는 일이 될 것이다   (기아대책 02-544-9544·www.kfhi.or.kr).

역경의 열매/최광식선교사-열방에 복음전파 진정한 리~

최광식 (1) 이것도 저것도 아무것도 ‘못해신앙’


“하나님,오늘은 기뻐해야 할 날인데 왜 이렇게 가슴속이 텅 비어 있지요. 뭣이 잘못된 것인지요? 하나님도 아시잖아요. 제가 이 날을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우며 노력했는지….”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는 날이었다. 친구들은 저마다 가족과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기쁨을 만끽했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기쁨보다는 허무감이 밀려들었다. 성취감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내 가슴은 우주 공간처럼 공허했다. 나는 푸념 섞인 어조로 기도했다. 그러자 주님께서 잔잔하게 말씀하셨다.

“광식아,네가 지금까지 나를 믿는다고 하면서 너만을 위해서 살아왔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나를 위해 살아보렴. 절대 허무하지 않을 거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말씀이 계기가 되어 나는 전혀 다른 인생길을 가게 됐다. 나는 촉망 받는 공학도로서 세상적인 성공의 길을 외면하고 선교사의 길을 택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고 말 한 마디 통하지 않는 중국땅에 들어가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가고 있다. 나는 지금 중국에서 세계 선교의 선봉에 서게 될 인재들을 양육하고 있다. 나는 지금부터 그 과정을 알리려고 한다. 나를 도구로 쓰셔서 그 과정을 엮어가신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알리려고 한다.

나는 모태신앙이다. 그러나 그 말이 나에겐 ‘이것도 못해,저것도 못해,아무것도 못해’ 하는 ‘못해 신앙’이었다. 나는 중고등학생 때 기도를 시키는 주일이면 그날은 교회에 가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했다. 나이가 들면서 ‘평신도’가 아닌 ‘병신도’ 생활을 오랫동안 했다. 주일에 교회에 안 나가면 하나님께 벌을 받을 것 같아 할 수 없이 예배에만 참석하고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면서도 어릴 때부터 헌금하는 것은 습관화됐는지 헌금이나 십일조는 잘 지켰다. 그래서 목사님은 내가 무척 신앙이 좋은 줄로 여기신 것 같다. ‘병신도’인 내게 집사 직분을 주셨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를 ‘나집사’로 불렀다. ‘나이롱뽕’으로 얻은 집사라는 의미였다.

나는 늘 그랬다. 세상일은 어떻게 해서든지 멋지게 장식하려고 애를 썼으면서도 신앙생활에선 구렁이 담 넘어가 듯했다. 워낙 오랫동안 그런 생활을 하다보니 박사 학위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인’을 주셨음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나는 대덕연구단지내 대기업 연구소에 직장을 잡았다.

그러나 그곳은 내게 맞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 영혼은 햇볕에 말라 비틀어지는 풀과 같이 여겨졌다. 누군가가 목을 조여오듯 가슴이 답답해져갔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값비싼 오디오로 귀를 즐겁게 해보기도 했고 골프를 배워보기도 했다.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여행도 다녀봤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잠시 좋아지긴 했지만 금세 다시 본래대로 되돌아갔다.

◇ 최광식 선교사는 평범하게 성장해 KAIST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대덕연구단지에서 근무하다 하나님의 소명을 깨닫는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 유급연구 등 여러가지 좋은 조건을 뿌리치고 미국에서 비영리단체인 ‘DAWN’을 만든 그는 중국으로 들어가 연변과기대 교수를 지낸 후 열방중고등학교를 설립,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다윗 대통령’을 출간했다.
(2) 무서운 아버지의 사랑 한순간에 깨달아

대덕연구단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극심한 영적 허기를 느끼던 나는 습관적으로 성경을 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창세기의 한 구절에 내 눈이 멈추었다. “데라는 205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창 11:32) 그러면서 ‘데라’ ‘죽었더라’는 말이 마음속에서 계속 반복됐다. 나중에는 ‘데라’ ‘뒈졌더라’라는 속어로 변하다가 결국 언제가 죽어버리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말씀으로 깨닫게 됐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신 “너는 너의 본토 친척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는 말씀을 다음 구절에서 보게 된 것이다.

어릴 때부터 교회 설교 때 수십 번 들었던 구절이었다. 그러나 전달되는 느낌이 이전과 판이했다. ‘떠나’(get out)와 ‘가라’(go)는 두 단어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기쁨이 용솟음쳤다. 그러고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그때까지 나는 나만을 위해,내 가족만을 위해,내 출세만을 위해,내 안정만을 위해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비로소 하나님께서 나를 빚으시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잠깐 그 이전에 겪은 하나님의 역사를 소개해보자. 4형제중 둘째로 태어난 나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다. 사춘기가 지나면서 그 무서움이 미움으로 변했다. 대학을 마치고 직장만 가지면 영영 아버지를 보지 않으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그런 미움의 상태에 있게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대학교 4학년 여름,KAIST 입학시험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던 중 갑자기 가슴이 아파 병원으로 실려갔다. 자연기흉로 허파꽈리가 몇 개 터져 허파에 공기가 차는 병이었다. 잘못되면 죽을 수도 있는 병이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아버지의 행동이 뜻밖이었다. 논에서 일하시다가 어머니께 내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버지는 밀짚모자에 장화 차림으로 부랴부랴 달려와선 나를 데리고 곧장 병원으로 향하셨다.

나는 바로 수술실로 들어가 수술을 받았다. 얼마나 지났을까,눈을 떠보니 병상 옆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초라한 모습의 아버지가 보였다.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일하던 모습 그대로 달려와서 자식을 간호하고 계신 것이었다. 절대 녹지 않을 것 같았던 아버지에 대한 내 미움이 녹아내렸다.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시 147:3)

내 마음은 날아갈 듯한 자유로움으로 채워졌다. 하나님은 정말 치유의 하나님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내 안의 나를 발견해나가기 시작했다. 내 안에는 용서 받고 고침 받아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내가 고침 받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열등감이었다. 사람들 앞에 서면 다리부터 후들거리고 내 의견을 밝힐 줄 모르는 바보였다. 대학에 가서 이 고질병을 고쳐보기 위해서 나는 운동권 동아리에 들어 적극적으로 데모에 가담하기도 하는 등 갖은 애를 썼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는 하나님을 원망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리석은 나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3) 말씀으로 열등감 극복… 새로운 피조물 변신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나는 여전히 열등감 속에서 자신과 싸워야 했다. 나는 하나님께 내 마음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계속 간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린도후서를 읽게 되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도 없었지만 나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는 늘 과소평가하던 중에 신천지를 만난 듯했다.

“그런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를 영문으로 보니 새롭게 되었다는 것은 ‘the new has come’으로 단순 과거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워졌다는 뜻이었고 이전 것이 지나갔다는 말도 ‘the old has gone’으로 과거의 것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의 옛 것은 완전히 사라지게 하고 완전히 새롭게 빚었는데 왜 옛날의 자아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느냐”고 말씀하시는 듯했다. 그 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열등감의 울타리 속에서 고민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만드신 세계를 진심으로 찬양하기 시작했다.

내 안의 열등감이 사라지고 나니 심적으로 변화가 생겼다. 안에서부터 선한 소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불이었다. 내 안에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단 한 명만이라도 전도를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전도를 하려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야 했다. 다른 사람에게 말 거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이전의 나로선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고후 5:18)

전도자는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즉시 우리에게 주어진 직분임을 마음속에 확고히 굳혔다. 내 삶의 주제도 ‘이리 갈까,저리 갈까,차라리 돌아설까’라는 우유부단함에서 ‘내 생애 단 한 명만이라도’라는 확고한 사명으로 바뀌었다.

역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었다. 친하게 지내는,같은 연구팀의 KAIST 후배와 함께 출장을 가면서 난생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는 내 마음을 받아들여 같이 성경공부를 하기로 약속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맛보는 승리의 기쁨이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내 성공적 인생을 여는 전주곡이었다. 또한 ‘단 한 명만이라도’의 절체절명의 사명 완수는 다음의 목표를 세우는 데 반드시 필요한 첫걸음이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사람들이 내 변한 모습을 보면서 ‘할렐루야’를 빗대 “놀렐루야!”라며 탄성을 지르곤 했다. 어쨌든 나는 변화되기 시작했다. 아니,하나님께서 나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실제로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다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되지 않는다. 내 전도로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후배는 그 후 믿음 좋은 자매와 결혼해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이 되었다. 그는 요즘 “예수 믿는다는 것은 환희 그 자체”라고 말한다. 그는 “신앙을 가진 이후 기쁨이 넘치는 것을 주체하지 못할 때가 많다”고도 고백한다.

(4) 美명문대 유학 거절…‘죽의 장막’ 입국 결심

마음속의 열등감이 사라지자 생활이 변화됐다. 대덕연구단지의 직장생활에도 부쩍 재미를 느꼈다. 연구소에서는 나를 ‘박사후 연구과정’(post-doctor)으로 미국 서부의 명문인 스탠퍼드 대학에 보내기로 했다. 가족의 현지 생활비까지 대주는 좋은 조건이었다.

그런데 그때 내 인생에서 커다란 변화의 조짐이 일어났다. 우연히 지기로부터 중국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가슴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의 불길이 일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릴 때 품었던 선교사의 꿈도 되살아났다. 당시는 한·중수교 이전이고 중국은 공산주의의 벽으로 굳게 막혀 있었다. 그러나 가슴속의 불길은 도무지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크게 타올랐다.

내 생각을 슬쩍 아내에게 내비쳤다. 아니나 다를까,아내는 펄쩍 뛰었다. 무척 신앙심이 깊은 아내였지만 아내는 중국을 그야말로 사지로 여겼다. 한 마디로 ‘죽어도 안된다’였다. 그래도 네 마음속의 불길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나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난생 처음 내 미래를 놓고 하나님의 뜻을 여쭈었다.

나도 모르게 내 발길은 한국전문인선교훈련원(GPTI)으로 향했고 나는 거기서 선교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이다. 아내는 적극적으로 만류했다. 그러던 어느 날,참으로 놀라운 일이 생겼다.

“아무래도 당신 생각에 하나님 뜻이 있는 것 같아요. 어제 기도하는데 갑자기 어릴 때 교회학교 선생님이 보이면서 요나에 대한 설교를 하는 거예요. 나는 절대 어리석은 요나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한순간에 아내가 긍정적으로 돌아섰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곧바로 연구소에 사의를 표했다. 연구소장과의 면담 일정이 잡혔다. 그런데 이번엔 나의 약해빠진 믿음이 문제를 일으켰다. ‘지금부터 탄탄대로가 펼쳐지는데 내가 객기를 부리는 게 아닌가’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갈등에 휩싸였다. 주님이 내게 하실 말씀이 있을 것이라 여기고 성경을 펼쳤다. 마태복음 10장 39절에서 나는 기절을 하고 말았다. 완전히 주님께 항복하고야 말았다. “자기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내 목숨을 얻으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주님은 내려다보고 계셨다. 내가 진정으로 목숨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걸 확인했다. 가슴속에 평안과 자유로움이 들어찼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연구소장은 휴직 처리해놓을 테니 미국에 다녀와서 최종 결정을 하라고 했다. 환상적인 제안이었다. 안전장치를 만들고 가라는 말이었다. 귀가 솔깃했다. 그러나 이내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또 다시 마음이 약해지면 안될 것 같았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박박 우겨서 사직서를 처리했다. 연구소 정문을 나오면서 나는 하늘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하나님,이제 망해도 하나님 때문이고 흥해도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러니 알아서 하십시오.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이제 다 포기했습니다. 이제부터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하나님만을 의지하겠습니다.”

(5) 편안한 美생활 접고 선교의 땅 중국으로

나는 평생을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굳게 마음 먹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활동할지는 정하지 않았지만 열방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 일만이 하나님의 소명임을 마음 속에 각인시켰다.

그러나 미국 스탠퍼드 대학과의 약속은 지켜야 했다. 일단 중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1년 정도 미국에서 지내기로 하고 스탠퍼드 대학의 연구과정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나는 깜짝 놀랐다. 석사와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내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전에 내가 학술지에 발표한 연구논문들이 중요한 참고문헌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의 환대가 대단했다. 잘하면 세계적인 학자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이 나올 것도 같았다. 잠시 선교 소명이 흐려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사도 바울의 삶이 떠오르고,세상의 노벨상보다 하늘의 상이 더 중요하고 의미있다는 생각으로 고쳐 먹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우리 가족은 은혜로운 시간을 가졌다. 산호제일침례교회에 등록하여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면서 중국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열심히 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아내는 머리로만 중국 선교에 동의했지,마음으로는 확정하지 않았다. 불안과 초조감을 늘 품고 있으면서 가끔 중국에 안가면 안되냐고 말하곤 했다. 어떨 땐 꼭 중국으로 가지 않아도 선교하는 방법이 있다고 하는 등 변덕을 부렸다.

그러면서 3개월쯤 됐을까,하루는 아내가 교회 주일예배를 마치고 오더니 “하나님 일을 하겠다고 하면서 이것 저것 계산하는 내 자신이 부끄럽다. 이제 더 이상 나에게 계산이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내가 염려한들 별 수 있겠어요?”라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였다.

1993년,우리 가족은 중국으로 들어갔다. 유치원에 다니던 딸 율리를 데리고 중국으로 들어간 우리는 고강도 적응훈련을 해야 했다. 옌벤과기대 교수로 지내면서 조그마한 아파트를 하나 구입해 살았는데 천장과 벽면에서 빗물이 새고 온 집안이 습기로 찼다. 결국 어린 딸이 감기에 걸리고 폐렴으로 발전했다. 한번 기침을 시작하면 한 시간 정도씩 계속해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아내의 우울증까지 겹쳐 참으로 난감하고도 힘든 날을 보내야 했다.

미국에서 온 어떤 의사에 딸을 보였다. 물과 공기 등 나쁜 환경 때문이 생긴 병이니 중국을 떠나야 낫는다고 했다. 기가 막혔다. 죽기까지 선교하겠다고 건너온 중국에서,갖은 고생을 하며 이제 1년여를 지냈는데 돌아가야 한다니…. “하나님,절대로 이대로 물러설 수 없습니다. 차라리 우리 가족을 여기서 죽여 주십시오….”

서울 소망교회 부목사로 계시던 분의 도움으로 한국에서 무료검진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탈출하다시피 중국을 떠났다. 1년여 만이었다. 물론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굳게 다짐하고서….

(6) 조건없는 제자사랑… 청년들 잇달아 헌신

중국에서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당시 주님의교회를 담임하던 이재철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다. 옆자리에 앉게 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를 알게 됐다. 당시 제자들이 한 통씩 써준 편지를 읽으며 나와 아내,그리고 이 목사님까지 눈물을 쏟았다. 그들의 사랑 고백이었고 우리 때문에 예수님을 알게 된 것에 대한 고마움의 편지들이었다. 공항에서 이 목사님은 한국에서 꼭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한국 체류 2주일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감동으로 보내면서 중국 제자들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가슴에 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게 하고 벌써 작으나마 열매를 맺?하셨다고 생각하니 천하를 얻은 것보다 더 기뻤다. 그 때문에 아내의 우울증이 말끔히 나았다. 딸아이의 폐렴도 완치됐다. 그때 비행기에서 만난 이 목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와 한 칼국수집에서 부부 동반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이 목사님은 많은 격려를 해주시며 치료비에 보태라고 100만원을 주셨다. 그분의 깊은 사랑이 절실히 느껴졌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5) 어떠한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는 것을 배웠던 귀중한 시간이었다. 우리 가족은 2주일 후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중국으로 돌아갔다.

중국 생활 초창기인 옌볜과기대 교수 시절 나는 교수와 기획조정실장을 겸임하면서 내가 꿈꾸는 중국 선교 프로젝트의 정지작업을 했다. 물론 비공식적이었다. 먼저 예수님을 믿는 삶이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주기에 힘썼다. 학생들을 매일 집으로 초청해 저녁식사를 하며 친해졌다. 레크리에이션을 함께 하고 노래도 가르쳐주며 그들의 친구가 됐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처럼 깔깔거리며 금세 두세 시간씩을 보냈다. 예수 믿으라는 말은 아예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 찾도록 유도했다. 방학 때면 아예 15명 정도의 학생들과 집에서 공동체 생활을 했다. 틈틈이 영어도 가르쳐주고 벤허나 십계 등 기독교 명화들을 비디오로 보여주기도 했다. 그저 아무 조건 없이 그들을 사랑하기만 했다.

학생들과 함께 지내면서 갖가지 추억거리도 만들었다. 한 학생의 부친상 때 학생들과 함께 20시간이나 기차를 타고 문상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깡패들을 만나 곤경에 처했던 일 등은 지금도 우리의 재미있는 이야기 소재이다. 그때의 제자들은 모두 지금 동역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영접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물으면 그들은 모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라고 말한다.

나는 이데올로기로 망한 중국에 기독교의 모자를 쓴 또 다른 이데올로기를 전하고 싶지 않았다. 진정으로 그들에게 생명을 넣어주고 싶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만이 그들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이렇게 얻은 제자들이 지금 주님께 헌신하고 있다.

(7) 믿음 하나로 ‘열방중고등학교’ 설립 도전

본래 내 꿈인 중고교 설립을 위해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었다. 중국에서 필요한 것은 대학보다는 중고교였다. 중국 기독교의 미래인 청소년과 어린이에 대한 복음 전도가 가장 시급했던 것이다. 교회에는 청소년과 어린이들이 거의 없었다. 나는 이미 하나님께 중국 청소년들을 양육하라는 비전을 받았고 강한 영적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학교 설립은 참으로 복잡하고 난해했다.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었다. 일단 마스터 플랜을 짜고 학교 이름을 ‘열방중고등학교’로 하기로 했다. 그런 뒤 2001년 10월 미국 캘리포니아에 ‘DAWN’이라는 선교회를 조직하고 학교 건립 후원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우선 토지부터 구입해야 했다. 필요한 예산을 세워보니 땅을 사는 데만 6만달러 정도가 필요했다. 바로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모금을 시작했다. 그러나 관심을 갖는 이가 별로 없었다. 하나님께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12월이 다가왔다. 토지를 겨울에 구입하지 않으면 농작물까지 보상해야 하기 때문에 금액이 훨씬 불어난다. 그러나 한 푼도 모아진 게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기도 중 “네 믿음을 보여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아니,이 밤중에 어떻게 믿음을 보인단 말인가? 그러나 이내 그 의미를 깨달았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 믿음으로 발을 먼저 떼고 발이 물이 잠겼을 때 요단강의 위에서부터 흐르던 물이 멈추었던 장면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다음날 아침 사무실에 나가자마자 여행사에 전화를 걸었다. 다음달인 새해 1월10일 중국행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되든 안되든 중국에 가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더욱 열심히 기도에 매달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초조감으로 요동치던 내 마음이 그토록 평안할 수가 없었다. 며칠 뒤 성탄절을 앞두고 한 청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교수님,제가 컴퓨터를 하나 사려고 돈을 마련했는데 성탄절을 맞이해서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요. DAWN선교회에 헌금할게요.”

“아,정말 좋은 생각이구나. 그런데 김 형제는 어쩌고. 실직했다면서?”

“저의 믿음으로 드리고 싶어요.”

“정말 고마워. 그럼 그 돈을 학교 건립을 위한 종자 돈으로 삼지. 김 형제의 헌신이야말로 과부의 두 렙돈과 다를 바가 없구나.”

그가 보내온 돈은 1000달러였다. 김 형제가 자기의 옥합을 깬 것 같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며칠 뒤 DAWN선교회 이사로 봉사하시는 서동민 장로님이 전화를 해선 컴퓨터 가게를 운영하는 친구를 돕기 위해 새 컴퓨터를 하나 샀다고 하면서 혹시 컴퓨터가 필요하지 않느냐고 물으시는 것이었다. 퍼뜩 김 형제 생각이 났다.

서 장로님에게 컴퓨터 사양을 물었다. 그리고 김 형제에게도 지난 번에 사려고 했던 컴퓨터 사양을 물었다. 정확하게 일치했다. 서 장로님께 컴퓨터를 받아서 김 형제에게 건네주었다. 완전한 하나님의 조율이었다. 나는 하나님의 손길을 강하게 느끼면서 그분께서 이 일을 어떻게 만들어가실지 무척 궁금했다.
(8) 기도한 대로 6만달러를 채워주신 하나님

김 형제가 1000달러를 헌금한 이후부터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났다. 하나하나가 기적이면서 간증거리였다. 출국 전날인 2002년 1월9일까지 5만달러가 모아졌다. 6만달러가 필요하다고 기도했었지만 일단 중국에 가서 뭔가 시도는 해볼 수 있는 액수였다. 출국을 앞두고 평소 존경하던 목사님 부부와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식사 후 사모님께서 “조금이나마 힘이 됐으면 좋겠다”면서 하얀 봉투를 주시길래 나는 여비에 보태라는 뜻으로 고맙게 받았다.

집에 와서 봉투를 열어봤을 때 나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자그마치 1만달러짜리 수표였다. 그러나 액수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기도한 대로 6만달러를 채워주신 하나님의 섬세함이었다. 비汐綬?타기 몇 시간 전에 정확히 공급해주셨다.

1월10일 새벽 0시20분,중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는 태평양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마음속에서 얼마나 많은 찬양이 흘러나오는지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믿음으로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하나님,여호수아는 믿음으로 요단강을 건넜지만 21세기의 저는 믿음으로 하늘을 갈라 태평양을 건너는군요.”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땅을 보러 다녔다. 그러다가 한 지역을 보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곳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 벌판을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기도했다. 1월말에 계약을 하게 됐다. 계약 과정이 어려웠지만 그때마다 스가랴서 4장 6∼7절 말씀대로 기도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우리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기도의 능력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런 기도의 묘미는 난생 처음이었다. 학교에서 일할 교사들은 학교 건축 1년 전에 이미 12명이 모아졌다. 예수님의 12제자가 연상됐다. 그들 대부분 옌볜과기대 교수 시절 내가 양육해놓은 이들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각자 간증을 한 것이 있는데 모두 감동의 눈물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였다.

그 중 몇몇 형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김진 형제는 장래가 촉망되는 공산당원이었다가 신앙 때문에 출당됐고 결혼식을 교회에서 치러 퇴학 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워낙 능력이 뛰어나 대학원까지 마치고 교수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현재 우리 학교 교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리고 신열 형제는 내 제자 시절부터 성경공부를 열심히 했고 신학을 하면서 목회자의 길을 모색하다가 우리와 합류했다. 이훈 형제는 칭다오(靑島)에서 안정적으로 사업을 하다가 믿음 하나로 교사로 들어왔다. 첸닝만 형제의 경우도 선양(瀋陽)에서 원예사업을 하다 내가 학교를 세운다는 얘기를 듣고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다며 제발로 달려왔다. 이밖에도 한때 중국 조직폭력배 생활을 했다가 거듭난 권찬 형제 등 너무나 귀한 형제자매들이 믿음과 의리로 모였다.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후 8:23)
(9) 학교 건축비 막판가서야 조달 ‘기적의 연속’

부지가 마련되면서 바로 열방중학교 건축에 들어갔다. 2003년 7∼8월 완공키로 한 공사는 비교적 순조로웠다. 그러나 막판에 건축비 조달이 점점 어려워졌다. 마지막 서너달은 매월 10만달러씩이 필요했다. 그때는 학교 개교 준비로 미국에서 모금을 할 수도 없었다. ‘에라,모르겠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지’라고 생각하고 개교준비에 매달렸다. 나는 학교 건축을 하면서 중국과 미국을 한달에 한번씩 오가야 했다. 모금과 영어교사 모집을 위해서는 미국에 있어야 했고 건축과 개교 준비를 위해서는 중국에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8월6일 아침에 미국에서 DAWN선교회 이사로 수고하시는 이정희 집사님에게서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목소리가 잔뜩 들떠 있었다. 한국의 감리교회 조성환 감독님이라는 분이 선교헌금 문제로 나를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한국으로 가 조 목사님을 만나 내 소개를 하고는 학교 건축 현황,중국 신문기사,교직원 간증집 등을 보여드렸다. 조 목사님은 크게 기뻐하셨다. 그리고 몇 군데 선교지와 선교사를 물색하다가 언젠가 이 집사로부터 내 이야기를 들은 게 문득 떠올랐다고 하셨다.

당시 우리가 필요한 돈은 1억원 정도였다. 얼마나 채워질지 기대가 되었다. 조 목사님의 입을 주시했다. “1억원입니다.” 나도 모르게 “어억∼” 소리가 나오며 놀라 자빠지는 줄 알았다. 조 목사님께 지극한 감사의 뜻을 표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로부터 2주일이 넘도록 입금되었다는 소식이 없었다.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결국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순결치 못함,재물에 대한 조바심,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의심 등을 회개했다.

어느 날 평소처럼 컴퓨터를 켜고 이메일을 체크했다. 조 목사님 이름으로 이메일이 와 있었다. 헌금으로 기숙사를 봉헌하시겠다며 9월 중순 중국에 오시겠다는 내용이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우선적으로 내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학교 건축과 관련해선 이밖에도 많은 간증거리가 있다. 학교 건축 과정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직접 목격하면서 하나님 능력의 통로가 되게 하시고 은혜를 만끽하게 하심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중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한편으로는 고등학교를 건축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건축 때와 마찬가지로 2004년 6월을 완공 시기로 잡았다. 중학교보다 예산이 더 많이 필요했다. 교사와 기숙사 외에도 체육관 겸 강당과 본관 건물까지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한 점의 두려움도 존재하지 않도록 주님께 기도하며 내 자신을 내려놓으며 또 한번 주님의 신실하심과 광대하심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도록 애썼다.

고등학교 건축 역시 기적의 연속이었다. 매월말 한달간의 건축비를 지불하기로 건축회사와 계약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하나님께서는 매월 막바지가 돼서야 필요한 자금을 대주시는 것이다. 월말이 돼 가면서 긴장 속에서 집중적으로 기도할 때 기적 같이 부어주셨다. 믿음의 기도는 인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빌립보서 4장 6절 말씀의 의미를 확실하게 깨달았다.
(10·끝) 열방에 복음전파 진정한 리더 키우고 싶어

2005년 9월 7일,드디어 고등학교 준공식을 거행했다. 하나님의 권능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나 건축을 끝냈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텅 빈 교실마다 책걸상과 컴퓨터 실험기기 악기 등을 채워넣어야 했다. 학교 주변 조경도 해야 했다. 지금도 그 일은 계속 진행중이다.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에 뿌린 것을 움 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께서 공의와 찬송을 모든 나라 앞에 솟아나게 하시리라”(사 61:11)

주님께서 열방을 돌아오게 하시는데 열방중고등학교를 맘껏 사용하시길 기도한다. 나는 이곳 졸업생들이 열방으로 흩어져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자들이 될 것임을 믿는다. 이제 두번째 학교를 세우기 위한 준비작업?들어갔다. 신장성 우루무치에 위구르족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자 기도하고 있다. 주님께선 나에게 교회 개척(church planting)보다 학교 개척(school planting)을 하라고 하셨다. 중국의 성마다,북한의 도마다 학교를 세울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학교들을 통해 열방이 주님께 돌아오는 축복의 통로를 여실 것이다. 재정과 사람,모든 영적 필요까지도 하나님께서 채우실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열방중고등학교에서는 120명의 인재들이 양육되고 있다. 40여명의 교사들은 미국 중국 한국 등 국적이 고루 섞여 있다. 모두가 한 가족이다. 지난해 10월 중국 스승의 날에는 온 학교가 울음바다가 됐다. 학생들이 대야에 물을 떠다 선생님들의 발을 씻겨주고 어깨를 주물러주면서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축복송을 불렀다. 나중에는 서로 끌어안고 눈물로 감사와 사랑을 나누었다.

처음 학교를 시작할 때와 지금은 차이가 많다. 학생들의 변화가 가장 눈에 띈다. 그들은 참 생명이 무엇인지,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아간다.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고백하는 학생들도 있다. 중국에선 예수님을 믿는 것도 비밀리에 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의 참 인생을 느껴가고 있다. 학생을 통해 그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는 경우도 나오고 있다. 그럴 땐 참으로 사는 보람을 느끼며 주님께 무한한 영광을 돌리고 싶다.

나는 이 시대의 진정한 리더를 키우고 싶다.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면 딱 좋겠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리더십을 배워야 할 인물로 다윗을 꼽고 싶다. 다윗에 관한 전문적인 리더십 관련 자료가 없음을 알고 사무엘서를 읽고 또 읽었다. 거기서 너무나 귀한 리더십의 핵심을 뽑아냈다. 리더십의 뿌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것이고 그 다음 마음(Heart) 정직(Integrity) 목자(Shephard) 열정(Fire) 순수한 동기(Motive)가 다섯 가지 핵심 기둥임을 알아내 지난해 ‘다윗 대통령’이라는 책을 냈다.

열방중고등학교는 아브라함같이 하나님 말씀을 좇아 떠날 수 있는 지도자,다윗과 같은 지도자,허드슨 테일러처럼 복음을 위해 생을 다하는 지도자들을 키워낼 것이다. 벌써 또 다른 열방중고등학교를 짓겠다는 아이도 있고,북한에 학교를 짓겠다는 아이도 있다. 너도 나도 선교사로 헌신하겠다고 다짐한다. 제약상 세세한 부분까지 다 언급하지 못한 점에 양해를 구하며 모든 분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원한다(02-333-7316).

정리=정수익 기자 sagu@kmib.co.kr
국민일보
 

<영상출처; http://www.onnuritv.com  /   http://www.cgntv.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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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프로 보는 세계선교상황
매년 선교상황에 관한 자료를 발표하는 오퍼레이션 월드(Operation World) 부책임자인 제임슨 만드릭(Jason Mandryk)은 2006년 세계선교상황을 발표했다. 발표내용은 세계종교분포상황과 세계선교상황, 서구권과 비서구권의 선교변화상황 등 세계선교상황이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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