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v/XnftUM5lPeM?version 
 
 
 
  
 
 

"[뉴스A] 탈북자 2만 5천명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을 향한 오해와 편견의 벽이 여전히 높은 게

우리 현실입니다. 세계 최초로, 방송 최초로, 저희 채널A에서 제작한

남북 화합을 모색하는 소통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이제 만나러 갑니다'가

큰 관심과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요.

저희가 '이제 만나러 갑니다'의 (탈북)미녀 출연자 두 분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http://news.ichannela.com/tv/newsa/3/...

 

 

 

 

 

 

 

 
 
 https://www.youtube.com/v/QxOkH1Mj8DY?
 
 
 

게시일: 2014. 12. 2. *"탈북자들 앞에서 북한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기사 바로 가기 →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

탈북여성들이 최근 ‘종북 토크쇼’ 논란을 빚고 있는 신은미, 황선 씨에게 맞짱 토론을 하자고 제안했다.

3일 서울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이순실 씨를 비롯한 김정아, 송지영씨 등 탈북 여성 3인은 기자회견을

열며 이들의 발언을 반박했다. 북한군 간호장교 출신으로 8번 북송과 9번의 시도 끝에 탈북에 성공한

이순실씨가 준비한 원고를 읽어 내려가며, 인신매매로 딸을 팔아야 했던 피맺힌 엄마의 절규를 아는 지를

신은미, 황선씨에게 물었다.

/ 조인원 기자

https://www.youtube.com/watch?v=QxOkH1Mj8DY

 

 

 

 

 

 

 

태어나 처음 써본 글, 나의 탈북 이야기 (30)

by 주성하기자   2015-06-13 12:29 pm

나는 아직까지 글을 써본 경험은 없다. 북한에서 학교시절 글짓기를 할 때 펜만 쥐면 글줄이 꽉 막혀 버리곤 했었다.

 

그러나 지옥 같은 땅 북한을 탈출하여 천국과도 같은 대한민국에서의 생활과정은 내게 이글을 쓰게 만들었다. 밤새 도로를 누비던 차들의 불빛도 사라지고 우짖던 새들의 소리도 그친지 오랬고 소리 없이 내린 강한 서리로 하여 풀잎과 나뭇가지들은 허옇게 번들거린다.

 

두만강 연선 도로로 달리는 택시안에 우리식구가 타고 있었다. 꿈이냐?> 생시냐? 잘 믿어 지지 않아 줄곧 차창 밖을 내다보며 나는 내 자신에게 묻곤 했다. 아들과 딸과 함께 가슴 치는 물살에 휘말려 떠나갈 번했던 방금 전의 일, 아차 실수하면 죽는 것은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바짝 정신을 차리고 아이들과 어깨 겪고 사생결단으로 강을 넘어서는데 성공했다. 분명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했다. 무사히 강을 건넜다는 생각에 마음은 평온했지만 일은 이제부터였다. 10월도 다 가는 때라 강서리가 내려 젖은 옷이 달라붙은 몸은 추위로 덜덜 떨렸지만 단 한시라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이대로 있다 날이 새면 중국 변방대에 발각될 수 있다.

 

아이들은 내 얼굴만 쳐다본다. 나는 아무내색을 하지 않고 “어머니가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아이들을 진정 시켰다. 속으로는 걱정이 태산 같으면서도. 빨리 움직이는 것이 살길이라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약간의 몸 운동을 시키고 몇 가지 주의를 준 다음 도로에 나섰다. 재빨리 걸었다. 차들의 통행이 뜸할 땐 달리고 차가오면 도로 옆에 몸을 숨기고 그렇게 반복하며 숨 가삐 달렸다.

 

그런데 도로에 나타나는 차가 너무 많았다. 그만큼 숨바꼭질을 하는 우리는 너무 힘들었다. 갑자기 많이 달리니 다리가 뻣뻣해지고 아이들도 점점 힘을 잃는다. 신발 코가 터져 발가락이 나와 나뭇가지에 찔려도 그 아픔도 느낄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불 밝은 건물. 도로 옆에 몸을 숨기고 살펴보니 국경 경비대 건물 같았다. 오던 길을 되돌아 또 얼마간 달려 도로 옆에 몸을 숨겼다. 시간이 많이 흐르니 차들의 통행이 뜸해지기 시작하였다.

 

“에라, 살든지 죽던지 운명에 맡긴다.” 독한 마음을 먹은 나는 도로에 나서서 달리는 차마다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모두 찬바람만 일구며 그대로 지나쳤다. 야밤삼경에 웬 여자가 차를 세우니 불안감에 안 세우나 하는 생각에 딸은 숨겨놓고 아들 손을 잡고 달려오는 두 대의 택시 앞에 나서며 손을 흔들었다.

 

한대는 통과하고 두 번째 택시도 통과 하는가 싶었는데 다시 후진하여 오는 것이었다. 그 순간 기쁨보다도 심장이 멎는 듯 했다. “경찰이 내리는가? 아니면 북한에서 중국으로 온 간부가?” 정신을 가다듬고 차에 다가가니 택시기사와 손님 한명이 있었다.

 

운전기사는 한족인 듯 했다 “돈 내라”하고 발음 부족한 조선말을 겨우 한다. 미리 준비해 가지고 있던 중국 인민폐 100원을 주었더니 뭐라 말하는데 어디로 가겠는가고 묻는 것 같았다.

 

우선 가고 보자는 식으로 손짓을 홰홰 했다. 떠나면서 외웠던 전화번호에 전화해볼까 하여 핸드폰을 빌려 달라고 하려다가 조금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범의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 수 있다”는 말을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한참 달리던 차는 불빛이 대낮같은 거리에서 멈추었다. 창밖을 보니 “훈춘 조선족 여관”이라고 쓴 간판이 걸려 있었다. 택시기사는 내려서 전화도 하고 자고 가라고 손시늉했다. 우리와 그냥 함께 가면 자기는 죽는다는 시늉도 한다.

 

가만 보니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펜과 종이를 달라고 하여 전화번호를 적어주니 자기 핸드폰으로 얼른 연결해 주었다. 그리하여 다시 연길 쪽으로 방향을 돌려 우리가 목적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지금은 차창 밖을 내다보며 꿈인지 생시인지 잘 믿어지지 않는 현실을 감수하며 “하늘이 도왔구나 “하고 안도의 숨을 쉴 수 있게 된 것이다.

 

생사기로에서 헤매던 사람들을 품어내고도 아는지 모르는지 내색 없이 유유히 흘러만 가는 두만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깊은 한숨을 쏟아냈다. 새벽닭이 우는 조용한 농촌 마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신을 가다듬었다.

 

아이들과 함께 연길에 있는 자택 교회에 머물면서 하느님을 우리의 구주로 모시고 마음의 평온을 찾고 새 삶을 얻었다. 폐쇄된 북한 땅에서 깊은 밤이면 남편과 가만히 라디오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 본 나로서는 수많은 군중들이 공개적으로 십자가 앞에서 기도 행사하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무척 부럽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다시 태어나 처음으로 떳떳하게 영생의 삶을 주시는 우리의 주님을 알게 되었고 믿음도 얻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 인간만을 숭배하라고 내리 먹이며 이르는 곳마다 사적 관들과 연구실들을 지어놓고 우상화의 사상을 주입하는 강 건너 지옥의 땅, 내 조국 사람들의 불행에 대해서도 가슴 저리게 생각했다.

 

브로커의 안내를 받으며 중국-캄보디아 행을 하면서 줄곧 차창 밖을 내다보며 거리로 오가는 사람 모두를 북한 땅의 사람들과 자꾸만 대비해 보게 되는 것도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바람이 불면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금방 빨아 입고 나간 옷도 바로 꺼멓게 되는 저 북한 땅, 지금 이 시각도 거리에서 한 끼 끼니를 위해 무언가 들고 팔리기를 기원하는 사람들의 절망적인 얼굴, 그런 사람들을 마구 압박하여 불법매매라며 빼앗으려 하고 또 빼앗기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아우성 소리가 그칠 새 없는 거리, 자기 노력보다 남의 노동력을 강제로 수탈하는 자가 더 번성하고 장사길 떠나며 화물자동차라도 잡아볼까 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을 거리가 자꾸 대조되어 안겨들었다.

 

어쩌다 한대씩 오는 차에 서로 오르려고 다투며 돈 주고 타는 것도 운전기사의 박대를 받으며 타야 하는 너무나도 기막힌 현실이다. 마치도 저 북한 땅에 대한 표상은 거세찬 바람에 가로수가 휘청거리고 낙엽이 진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마른 사람들이 날려 갈까봐 겨우 자기를 지탱해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늘높이 날아오른 아시아나 항공기에서 내려다보이는 불야성의 도시들을 보며 어둠속에 묻힌 북한 땅, 주민들의 한숨이 하늘 끝에 닿는 북한을 또다시 생각한다.

 

돈 있는 사람들은 공장과 연구실로 들어가는 전기선을 따내어 불을 보고 그다음 힘 있는 사람들은 배터리를 공장에 들고 가서 충전하여 불을 보고 등잔기름마저 돈 주고 살 힘이 없는 사람들은 해가지고 뜨는 것에 맞추어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오늘날 북한 땅의 현실이다.

 

그처럼 바라고 바라던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어 매일 매일 다양한 메뉴의 음식상을 마주하면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이 삼삼 떠올라 저절로 목이 메었다.

 

고난의 2007년. 앞가슴에 훈장을 더는 자리가 없어 달지 못하셨던 외조부모님을 땅에 묻고 너무도 기가 막혀서 눈물도 나지 않았다. 술 한 잔도 제대로 부을 수 없던 너무도 째진 가난이 야속해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첫 공산당원이였던 외할아버지와 할머님은 죽는 순간까지 당에서 하라는 대로만 하셨다.

 

조선로동당에서 “비사회주의 현상” 이라고 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셨다. 그처럼 당만을 믿고 살아오셨건만 운명직전엔 수수 겨로 쓴 죽도 변변히 못 드시고 땅에 묻히셨다. 오늘도 행여나 국가에서 배급을 주려나 기대하며 이것이 운명인가보다 하고 순종했던 사람들은 무두 다 다시 오지 못할 그 길을 갔다.

 

그러한 참상을 목격하면서 나는 당에서 하지 말라는 것만 해야 산다는 것을 뼈 속 깊이 알게 되었다. 시아버님과 함께 온 하루 쑥을 뜯어 일곱 식구 밀가루 두 컵 섞어 떡을 하면 하루 먹기 어려웠다. 얼마나 그 쑥떡에 질렸던지 그 이 후로는 한 번도 쑥떡을 해먹지 않았다.

 

지금도 가끔 맛있게 한 쑥떡을 보면 그때의 생각이 나며 그토록 그리시던 이 좋은 세상에 오시지 못하시고 땅에 묻히신 시부모님생각에 마음이 아파온다. 우리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군대들을 보면 지금도 북한 땅에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 병사들을 생각한다.

 

청진-온성 행 열차에 아들을 태워 보내고 돌아서려는데 나에게로 다가오는 한 병사? “돈200원만 있으면 좀 주세요.” 너무도 여위여 군복은 남의 것을 빌려 입은 것 같고 몸은 뼈에 가죽을 씌운 것 같았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500원이 있었다. 그것을 주니 고맙다고 몇 번이고 인사하고는 빵을 사가지고 정신없이 먹는 것이었다.

 

만일 너의 부모가 네 그러는 모습을 본다면? 나는 그 병사를 불러 고향은 어딘가, 부모님은 계신가고 물었다. 부모님은 평북도 어느 농장원이고 자기는 장남이라 했다. “너를 군대에 내보내고 장남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부모님을 생각해 봐라 살겠으면 강심을 먹고 훔쳐 먹고서라도 살아라. 그런 악이 없으면 넌 결핵 결려 죽는다.”고 말하니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고 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살아 있는지 가늠할 수 없다. 아이들이 간식을 받아가지고 들어오면 눈물이 절로 솟아났다. 2008년 9월 청진시의 어느 과수원의 수확을 끝낸 배 밭에서 이삭을 줍다가 너무도 허기져 일어나지 못하던 한 할머니 생각이 났다.

 

며칠째 배를 삶아 끼니를 에우고 그것마저 떨어져 끝내 돌아가신 그 할머니, 그 역시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의 시어머니었다. 눈물로 얼룩진 많고 많은 사연들을 어찌 다 적을 수 있으랴.

 

즐비하게 늘어선 고층건물들과 거리의 모든 것은 함부로 밟을 수 없다. 무심히 스칠 수 없는 알뜰한 손길과 정성스런 마음이 그대로 스며있는 대한민국의 도시와 마을은 북한에서는 꿈속에서 그려볼 수 있는 이상의 도시다.

 

장애인들을 위하여 무료봉사에 나서고 탈북자들을 위하여 봉사의 길에 나서신 고마운 분들. 북한의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금식기도와 중보기도 하시는 분들, 자기만이 살기에 급급하여 남을 생각할 여유가 없이 살아온 나에게는 너무나도 상상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현실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의식주 걱정 없이 자기 능력껏 벌어 살 수 있는 이 땅이 천국이 아니고 어디가 천국이랴! 지금 내가 아이들과 함께 즐기며 지내는 하루하루의 귀중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오늘도 억울하게 수용소에 잡혀가고 있을 사람들, 다음날 식량을 마련하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뛰고 또 뛰는 북한 동포들에게도 이 같은 밝은 빛이 비치어 다 같이 천국에서 즐기며 살 그날은 가까워 오고 있다.

 

통일을 앞당기는 길은 우리 탈북민들이 이 땅에 제대로 뿌리박고 무성한 아치를 쳐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라 생각한다. 날은 밝기전이 가장 어두우며 어두운 밤이 지나가면 새날이 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일 것이다.

 

2015년 1월 고명화 : 출처 탈북자동지회

 

http://blog.donga.com/nambukstory/archives/107832

 

 

 

 

 

 

 
 
 
탈북다큐멘터리'천국의 국경을 넘다' (on the border) BBC 보도
 
 
 
두리하나선교회의 협조아래 조선일보사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천국의 국경을 넘다" 제1편 '국경에 서다'의 일부를 담은 동영상입니다.  


[weekly chosun] 탈북자 대북 송금 요지경… 은밀한 루트를 추적하다
중국·북한에 점조직 브로커 활개
보위부원들도 눈 감아주고 ‘뒷돈’


<이 기사는 weekly chosun 2042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강철환 조선일보 통한문제연구소 기자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 눈덮인 혜산시 풍경/조선일보 DB
한국·중국서 3만~4만명 정기 송금… 브로커 커미션은 15~20%
신흥부자 집단된 北 가족들 “1000달러만 받아도 상류 생활”

탈북자 A씨는 최근 북한에 있는 가족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중국에 있는 브로커에게 송금을 해주면, 북한에서 그 돈을 받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A씨는 아껴뒀던 1000달러를 주저 없이 보냈다. 북한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는 “여기(남한)서 내가 한 끼를 먹는 돈이면 북한에 있는 가족이 수개월간 생활할 수 있다”며 “굶는 한이 있더라도 돈을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A씨처럼 북한에 있는 가족에게 돈을 보내주는 탈북자들이 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국내에 정착한 탈북자가 약 1만5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 가운데 약 6000명 이상이 북한에 돈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송금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탈북단체 관계자는 “북한의 가족에게 송금하는 탈북자가 1만명 이상은 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정부 추계대로 약 6000명의 탈북자가 북한에 돈을 보내고 있으며, 한 사람당 1년에 1000달러를 송금한다고 가정하면, 매년 600만달러(약 78억원)가량이 북한으로 전달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여기에 10만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진 중국 탈북자 중 북한에 송금하는 것으로 보이는 2만~3만명을 더하면 매년 약 3만~4만명의 탈북자들이 북한에 돈을 보내고 있는 셈이 된다.
▲ 마약 판매한 대가로 미국 달러와 오토바이를 건네 받는 북한 해군 경비병들/조선일보DB
미국 달러나 중국 위안화로 송금
브로커들 매일 환율 변동까지 체크


송금 루트는 은밀하다. 중국에 있는 브로커 계좌로 국내의 탈북자가 돈을 보내면 이 브로커는 북한에 있는 다른 브로커에게 연락을 취한다. 연락을 받은 북한 브로커는 탈북자가 지명한 북한 사람에게 자신의 돈을 지불한 뒤, 중국의 브로커와 추후 정산하는 방식을 취한다. 따라서 서류상 ‘증거’가 남지 않게 된다.

송금할 때 사용하는 화폐 단위는 통상 미국 달러와 중국 위안화가 병용된다. 브로커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브로커마다 15~20%가량의 커미션을 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휴대전화를 이용해 수시로 연락을 주고 받으며 매일 환율 움직임을 체크하는 ‘전문가’들인 것으로 전해졌다.

한 탈북자는 “북한 내부에서 먼저 브로커를 찾아 송금하는 경우는 거의 신용이 확실하지만, 중국에서 알게 된 브로커들은 돈을 전달해주지 않고 가로채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전했다. 이들 브로커들은 수십만달러를 쥐고 움직이는 큰손들로 조직폭력배와 연계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전에도 송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막대한 뇌물이 필요했다. 수년 전만 해도 북한 내부로 돈을 보내려면 우선 사람을 보내 국경경비대에 막대한 뇌물을 줘야 했다. 수수료도 40%가 넘었다. 그나마 단속에 걸리면 다 뺏기고 남는 것이 없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는 얘기다. 하지만 송금 브로커가 등장하고, 조직적인 전달 체계를 갖추게 되면서 북한의 가족에게 보내는 송금액과 탈북자 수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화폐 단위도 ‘원’이다. 하지만 국제시장에서의 가치는 미미하다. 2008년 말 현재 북한근로자의 한 달 평균 임금은 2500~3000원 선이다. 시장에서 1달러가 북한 돈 3200원 안팎에서 거래되는 점을 감안하면, 1000달러는 북한 근로자 100년치 월급에 해당하는 거액으로, 함북 청진이나 함흥 같은 곳에선 아파트 두채를 살 수 있는 액수다.
1000달러면 北서 아파트 두채 살 돈
‘탈북자 경제’가 새로운 경제 기둥으로
평양의 고급아파트라 해도 4000~5000달러면 구입할 수 있는데다, 최근엔 돈만 있으면 평양시내에 거주하는 것도 가능해지고 있기 때문에 ‘송금’이 갖는 위력은 엄청나다. 한순간에 상류층으로 도약해 상대적으로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탈북자 경제’라고 불리는 제3의 경제 시스템이 북한 내부 밑바닥에 깊게 뿌리내리게 된 이유다.

1970년대 북한정권이 안정돼 있을 때엔 북한서 이른바 ‘백두산 줄기’란 말이 유행했었다. “김일성에 붙어 항일운동을 했다”며 얼굴만 들이밀 수 있어도 평생 혁명투사 가족으로 대접받으며 고위직을 맡아 귀족처럼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재일동포들의 북한 방문이 러시를 이뤘다. 북한으로 건너간 가족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재일동포들은 엔화를 들고 왔다. 이 덕분에 일본에 친척을 둔 사람들은 ‘후지산 줄기’라고 불리며 신흥세력으로 대접받게 됐다. 여기에 김정일 위원장이 북송동포 고영희와 결혼하면서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을 풀어주라”고 지시, 부유한 북송동포들은 권력집단과 어울리게 되면서 새로운 귀족으로 부상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재일동포 1세대 중 상당수가 세상을 떠났고, 그에 따라 대북 송금액이 줄어든 데다, 일본이 대북(對北) 압박 정책을 취하면서 재일동포 가족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송금이 끊기면서 일반 북한 주민보다도 더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최근 북한에선 ‘한라산 줄기’란 말이 새롭게 뜨고 있다고 한다. 남한으로부터 송금이 이뤄지면서 월남자나 탈북자를 둔 가족들이 급부상, 백두산 줄기와 후지산 줄기에 이어 신흥 경제세력으로 주목받게 된 것이다.

월남자 가족은 북한에서 가장 비참한 생활을 강요 당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남쪽의 가족들이 비공개 루트를 통해 북한의 친척들에게 많은 돈을 전달하면서 하루 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친척들’이 늘어나면서 주변의 부러움을 받게 된 것이다.

사실 이런 현상이 최근에 나타난 것은 아니다. 남북 공개 이산가족 상봉이 진행되면서 북한 사회에선 남쪽의 가족을 만나러 가는 것을 부러워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금보다도 귀한 달러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 지난해 1월 조선일보 취재팀이 중국 투먼 두만강변에서 발견한 30대 북한 여성의 시신/조선일보DB
탈북자 가족 보는 시선도 크게 달라져
반역자 취급하다 이젠 부러워하는 분위기
그런데 이젠 탈북자 가족들도 이와 유사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탈북자 가족들은 그동안 월남자 가족과 마찬가지로 반역자 취급을 받으며 멸시를 당해 왔다. 하루아침에 현직에서 쫓겨나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런데 탈북자의 송금으로 거액이 생기면서 처지가 달라지게 된 것이다.

한 고위 탈북자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탈북자는 ‘반역자’로 인식됐지만 지금은 부러운 사람으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도망갈 기회가 없어서 못 가는 것이지 탈북은 누구나 꿈꾸는 희망으로 변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는 “특히 함북도 지방엔 탈북자가 너무 많다”며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남한으로 가서 성공하는 것이 북한의 가족을 살릴 수 있는 길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덧붙였다.

북한 정권은 탈북 러시를 막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중국과 마주한 국경지역엔 중앙에서 파견된 검열원들의 감시가 번득인다. 검열의 타깃은 국경지역의 국가안전보위부와 국경경비대. 중앙에서 “탈북자들을 막으라”며 아무리 지시를 내려도 탈북이 근절되기는커녕 갈수록 더 늘어나기만 하기 때문이다.

국경경비대 출신의 한 탈북자는 “경비병들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다”며 “이들이 살길은 두만강과 압록강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일에 개입하면서 생기는 부수입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부수입이 없으면 모두 영실군(영양실조군대의 약자)으로 전락한다”고 했다.

국가안전보위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중앙의 보위부는 국가로부터 물자 공급이 제대로 이뤄지지만, 지방에는 식량 공급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뇌물을 받아야만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돈 나올 구멍은 국경 너머 중국과 한국밖에 없다”고 탄식한다.

이 같은 현실 때문에 지방의 보위부원들은 문제가 생겨도 보고하지 않고 깔아뭉개는 경우가 다반사다. 아무리 엄중한 사건도 ‘돈이 된다’는 사실만 확인되면 흥정거리로 삼기 위해 뒤로 숨겨놓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봐주고 있는 브로커들이 중앙 보위부의 추적을 당하게 되면 거꾸로 브로커를 감싸주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보위부원들 “돈 나올 구멍은 국경 너머뿐”
브로커 감싸주고 문제 생겨도 ‘쉬쉬’
최근 국경을 넘은 탈북자는 “요즘 북한에서는 돈이 애국자고 돈 없으면 반역자”라는 말이 유행한다고 말했다. “돈만 있으면 가족 중 누군가가 도망쳐도 살아날 수 있지만 돈이 없으면 남한 비디오만 봤어도 처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쯤 되면서 요즘 북한에선 보위부 요원 사이에 “탈북 가족 5가구만 관리하면 먹고사는 데 문제없다”는 말이 돌고 있다. 탈북자 가족을 집중 감시하다 보면 외부에서 전달되는 달러 냄새를 맡을 수 있고, 이것을 문제삼아 처벌하기보다는 지속적으로 돈을 전달받아 공생(共生)하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탈북자들이 가장 많은 곳은 중국과 접한 국경지역이다. 특히 함북 온성, 무산, 회령과 량강도 혜산시는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가장 살기 힘든 ‘추방지역’이었다. 하지만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인해 옛날의 추방지역이 거꾸로 살기 좋은 지역으로 바뀌면서, 함남도 내륙이나 황해도 지방이 오히려 추방지역으로 바뀌고 있다. 국경지역엔 “한 집 건너 한 사람은 남한에 와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탈출자가 많아 텅 빈 집들이 마을에 널려있다고 한다.

대남부서 출신의 한 탈북자는 “과거엔 탈북자 가족에 연좌제를 적용해 엄중 처벌하는 것이 탈북을 막는 효과가 있었지만, 이젠 가만 놔두는 것이 오히려 체제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웃 중 누군가가 탈북자 가족으로 낙인 찍혀 추방되면 오히려 그 소문이 더 퍼져 나가 사회가 불안해지기 때문”이란 것이다. 여기엔 “가족 중 누군가가 탈북했다는 이유로 다른 가족을 처벌하면 적대 계층을 양산해 사회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게다가 탈북은 출신 성분을 가리지 않고 벌어지는 일이라 자칫하면 핵심계층마저 적대계층으로 돌아설 수 있어 탈북 가족을 처벌하기가 곤혹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북한 정권 입장에선 더 이상 탈북 행렬이 확대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책이다. 하지만 북한 체제의 근본적 구조 변화가 없는 한 탈출 주민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고 북한 사회의 불안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탈북자들은 “보다 많은 탈북자를 받아 그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북한 주민을 지원하는 것이 진정한 대북지원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탈북자들을 통해 북한 밑바닥으로 흘러간 현금이 북한에서 적대계층으로 전락한 비참한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주면서 북한 사회의 문을 여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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