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족(장족 藏族)
인구는 459만 3330명. 주로 티벳자치구 및 칭하이성(靑海省)의 하이뻬이(海北), 황난(黃南), 하이난(海南), 뤄루오(果洛), 위쑤(玉
樹) 등 몇개의 티벳족자치주와 하이시멍구족(海西蒙古族)티벳족자치주, 간쑤성(甘肅省)의 간난티벳족자치주(甘南藏族自治州)와 톈쭈티벳족(天祝藏族)자치현, 쓰촨성(四川省)의 아빠(阿坝) 간찌량저(甘孜兩個自治州) 및 무리티벳족(木里藏族)자치현, 윈난성(雲南省)의 디칭티벳족자치주(迪慶藏族自治州)에 모여 살고 있다.
티벳어는 한어(中國語)·티벳어계의 티벳·미얀마어족 티벳어에 속한다. 웨이창(有衛藏), 창(康), 안두오(安多)등 3종류의 주요 방언이 있다. 티벳 문자는 서기 7 세기무렵에 산스크리트를 참조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쓰기하는 표음문자이다. 티벳족은 대부분이 라마교를 신앙하고 있다.
티벳족의 조상은 먼 옛날부터 야루창뿌강(雅魯藏布江)중류 일대에서 생활하며 자손을 늘려 왔다. 고고학 조사에 의해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및 철기 시대의 고대 문화 유적이 발견되었다. 서기 6 세기, 티벳 산난(山南)지구의 야루(雅隆)부락의 수령(首領)이 부락 동맹의 지도자가 되어 이후부터 노예제 사회에 들어갔다. 서기 7 세기에 이르러 송짠·간뿌(松贊干布)가 티벳 전역을 통할해 이때부터 티벳이라고 불렸다. 송짠·간뿌와 당(唐)조의 웬쩡공주(文成公主)와의 성혼은 티벳족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청조(淸朝)에는 정식으로 달라이 라마(댐윳윙찍)와 판첸·올드니(겯淋띨랑德尼)가 티벳 지방 정부를 마련하고 티벳 주재 대신을 임명했다. 1950년대, 티벳 지구에서는 여전히 "정교합일(政敎合一)" 이라는 봉건적인 농노 제도가 실시되고 있었다. 1959년에 민주 개혁이 전면적으로 행해져 티벳족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티벳족의 노력으로 티벳 지구는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을 이룰 수 있었다
뿌랑족(布朗族)
인구는 8만 2280명. 주로 윈난성 쓰�앙빤(云南省西雙版) · 타이족(纳傣族)자치주의 멍하이(勐海), 징홍(景洪),린캉(臨滄)지구의 �앙강(雙江), 용더(永德), 운현(云縣)、겅마(耿馬),시마오(思茅)지구의 란캉(臨滄), 헤이강(墨江)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뿌랑족은 부랑어를 사용한다. 뿌랑는 남부아시아어계, 방글라데시 · 캄보디아어파, 브란어분지에 속하며 뿌랑(布朗), 아얼와(阿爾佤)라는 방언이 있다. 일부 뿌랑족들은 타이어와 와(佤)어를 사용하며 이들에게는 자민족 문자가 없다. 대다수의 뿌랑족은 소승불교 믿는다.
뿌랑족은 긴 역사를 가지는 민족이다. 당(唐)대에 「푸찌만(朴子蠻)」,원(元), 명(明), 청(清)대에 「푸만(蒲蠻)」으로 불렸으나 신중국 성립 이후부터 이들은 뿌랑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신중국 성립 이전 뿌랑산(布朗山)에서 생활하던 이들 뿌랑족은 어느 정도 원시 공동체의 잔존을 유지하고 있었다. 핑빠(平壩)지구에서 생활하던 뿌랑족은 경제, 문화의 발전 수준이 높은 한족, 타이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뿌랑족이 생활하고 있는 지구는 기후가 온난해서 이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 하고 차를 재배하는데, 대표적으로는 유명한 프알차가 있다. 뿌랑산에 사는 뿌랑족들은 모자연명제를 실시하기 때문에, 태어난 아이는 생후 3일 내에 아이의 이름 뒤에 어머니의 이름을 붙인다. 음력 5월 5일은 말 경주를 하는 축제일이다. 최고의 기수가 참가하게 된다.
뿌이족(布依族)
인구는 254만 5059명. 주로 꾸이저우성(貴州省) 남부, 남서부의 뿌이족, 먀오족자치주(苗族自治州)에 거주하고 꾸이저우성 이 외에 윈난성(雲南省)의 루오핑(羅平), 쓰촨성(四川省)의 닝난(寧南), 후이리(會理)에도 분포하고 있다. 뿌이족이 사용하고 있는 뿌이어는 한 ·티벳어계, �동(壯侗), 장 · 타이어(壯傣語)에 속하며 3개의 방언이 있다. 예전에 뿌이족은 한자를 사용했었으나 신중국 성립 후 로마자를 기초로한 뿌이족의 문자가 만들어졌다. 소수의 뿌이족은 카톨릭과 크리스트교를 신앙하고 있다.
뿌이족과 �족(壯族)은 조상이 같고, 바이위에(百越)-고대의 장수(江蘇), 쩌장(浙江), 푸첸(福建), 광둥(廣東)-일대에 일부가 분포하고 있다. 지금도 뿌이족은 고대 위에런(越人)의 풍속 습관을 가지고 있다. 뿌이족은 이전에 「뿌이(布依)」, 「뿌위에(布越)」, 「뿌만(布曼)」이라고 불렸는데 신중국 건국 후「뿌이(布依)」로 호칭이 통일되었다. 뿌이족의 거주 지구는 계곡과 평원 지대가 많고 산수 경치가 아름답다. 뿌이족은 수도(무논에 심는 벼)의 재배 역사를 가지는 농경 민족이다. 뿌이족이 만든 공예품과 수장품은 도안이 아름답고 국내외에 많이 알려져 있다.
부이족의 전통 수놓기, 염색제품은 전국에 유명하다. 부이족은 입쌀을 주식으로 하며 개고기와 매운 음식을 즐기고 청색, 흑색 또는 백색의 옷을 좋아한다. 여성은 언제나 은 장신구를 하고 수놓기와 매듭염색에 뛰어나다. 부이족은 섬세하고 다채로운 독특한 수공예품을 만드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 예술에 있어서 값진 유적으로 평가된다.
뿌이족은 기둥, 대들보, 서까래, 마루용 나무이외에는 모두 돌을 이용해 집을 짓는다. 가정에서 필요한 생활도구인 디딜방아, 사발, Cao(槽; 용기 또는 구유), Gang(缸항아리), Zhuo(탁자), Deng(의자)등 대부분 돌로 만들어 쓰고 있다. 간란(난간) 건축의 기원과 같이하는데 귀주성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신석기시대의 유적지에서 벌써“ 간란”이 나타난다. 상인하축(上人下畜)의 간란 양식 즉, 아래층은 맹수나 독충, 뱀등을 피해 가축을 키우고 위층은 사람이 사는 형태로 되어 있다.
주식은 쌀, 옥수수, 밀, 좁쌀이고 찹쌀을 특별히 좋아 해 명절에는 물론 특별한 행사에 찹쌀을 이용한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츠바(찹쌀로 만든 떡)와 찹쌀밥,특히 검은 찹쌀밥은 별미이다. 음력 6월 6일에는 살구과절(殺狗過節) 즉, 개를 잡아 명절을 지낼 정도로 개고기를 즐겨 먹는데 귀한 손님이 올 때 대접한다.
뿌이족의 의복은 특히 부녀자들의 의상의 변화가 커서 20여 가지에 이를 정도로 다양하고 화려하다. 옷 색깔은 靑藍色(청람색) 위주이고 短衣大領(단의대령; 짧은 단에 큰 옷깃)과 長裙大 (장군대고; 긴치마에 큰 바지)로 특징 된다. 전통 명절에 따라 복장을 달리 하는데 부녀자들은 결혼 전후의 복장이 명확히 구분된다. 지역 환경에 따라 옷의 형태가 차이가 많은데 깊이 폐쇄된 지역일수록 전통이 잘 보존되어 있다. 옛 부터 자수와 나염(臘染; 염색기법의 한 종류로 녹인 황랍을 천의 무늬에 붓고 염색 후 제거하여 그 부분만 백색으로 남김)이 발달해 꽃무늬 도안을 즐겨 나염해 화려한 의상을 자랑한다. 부이족의 나염은 중국 역사상 3대 인염공예(印染工藝)에 속한다. 염색 무늬는 원시 토템숭배 사상에서 유래해 용, 원앙, 물고기, 새 등 위주였으나 오늘날은 독특한 예술 경지까지 이르렀다. 몸, 도자기, 동고(銅鼓; 구리북)에도 토테미즘의 영향을 받은 무늬를 수놓았다.
전통명절(음력)
過年(정월 초하루); 츠바, 양주(釀酒; 술만듬), 두부, 돼지잡기 등으로 지낸다. 초하루 새벽 해뜨기 전에 아가씨들은 앞 다투어 지혜와 근로를 뜻하는 물을 길어 올린다. 사자놀이, 용등놀이 등 민속놀이를 즐긴다
3월 3일; 토지신과 조상묘를 찾아 제사하고 개와 돼지를 잡아 손님을 대접하며 3색 찹쌀밥을 먹기도 한다.
4월 8일; 벼농사와 관계되는 명절로 라전(羅甸)에서는 우왕절(牛王節)로, 진영(鎭寧)에서는 목동절(牧童節)로, 치엔시(黔西)지방에서는 개앙절(開秧節; 모내기시작)로 지내며 4색 찹쌀밥을 먹는 지역도 있다. 우왕절은 농경문화 민족으로서 소에게 고마운 마음의 표시로 좋은 꼴을 먹여 주고 하루 쉬게 하는 풍습이다
6월6일; 3월3일과 비슷하나 가장 중요시하는 전통 명절이다.“ 布依年, 6월교(六月橋), 타보부(打保符), 도유월파(跳六月坡)”등 여러 호칭이 있다. 부이어로 “ 金索厄(Jin suo e) ”는 유월절의 뜻이 담겨 있을 만큼 중요시한다. 이 날에는 모든 집의 남자호주가 마을의 토속신묘에 모여 뱀신, 수신, 천신에게 소와 닭을 잡아 제사지낸다.
-가장 성대한 이유; 고대 하왕조(夏王朝)의 우왕(禹王)을 조상으로 여기고 그의 생일을 기념하기 때문이다.
-완용(玩龍; 용놀이)의 제전과 백마(白馬)의 제사; 용, 뱀, 말을 숭배하던 원시 토테미즘에서 유래된 제전으로 제주(祭主)는 초립을 쓰고 도롱이를 입는다.
-타수전(打水戰; 물싸움놀이); 소년 남녀들이 대나무 통을 이용해 물싸움을 하는데 벼농사에 대한 조상들의 지혜와 경험을 생각하며 우왕의 치수(治水)공덕을 기리기 위한 놀이이다.
7월 반절(半節); 일명 선과절(鮮果節)이라고도 하며 신선한 과일로 조상에게 제사한다.
결혼; 일부일처제로서 명절때에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소위 “ 낭소(朗紹), 낭모(朗冒) ”의 사교활동을 통해 자유로이 선택한다 .먼저 배우자를 선택한 후에 정혼을 하고 남녀의 생일을 따라 팔자의식(八字儀式)을 행하고 일반적으로 8세에서 15세 사이에 결혼했다
장례; 관을 사용하는 지역도, 때로는 뼈만을 분묘없이 묻어 조상의 묘소를 모르는 지역도 있다. 사람이 죽었을 때 선칸(神龕)앞에서 시체를 염하고 염하는 입에 은가루를 넣어 준다. 관속에는 며느리와 딸이 새 흰옷을 넣어 준다. 시체를 운구할 때 “ Lao Hui(老麾; 巫師)가 죽은 자를 위하여 길을 낼 때 소를 잡고 돈을 준다.
뿌이족은 노인에 대한 공경이 각별해 언어 행동에서 젊은이는 늘 조심하고 길에서 노인을 만나면 먼저 공손히 인사하며 짐을 대신 들어 주고, 차를 타고 가거나 말을 타고 가다가도 내려서 인사한다. 직접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는다. 공동으로 지켜야 할 향규민약(鄕規民約)인 이랑(議 )이 있어 엄격하다. 토테미즘의 자연 숭배 사상이 만연되어 있고 장석(長石), 큰 나무를 신의 거주 장소로 여기기도 하고 조상을 숭배한다. 집안 중심부에 선칸(神龕; 신위와 유사함)을 모셔두고 그 위에 기름이나 기타 물건을 놓치 못한다. 정월 초하루, 보름에 땅을 쓸지 않고, 옷을 방 앞뒤에서 말리지 않는다. 부뚜막 위에 발을 올려놓지 않고, 개고기를 삶지 않는다. 산모가 사망했을 때는 어깨를 들어 올리지 못한다. 외지인 부부가 왔을 때에는 주인과 함께 못 잔다. 밖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에는 집안으로 시체를 들이지 못한다는 등등 금기사항이 너무 많다. 지금은 많이 없어 졌다.
푸미족(普米族)
인구는 2만 9657명. 주로 윈난성(雲南省)의 란핑(蘭坪), 리강(麗江), 웨이시(維西), 용싱(永胜)등의 현과쭈랑(宁蒗) 이족(彝族)자치현에 거주하며 그 외에는 쓰촨성 무리(木理) 티벳족(藏族)자치현과 얀위엔현(鹽源縣)에 거주한다. 푸미어는 한·티벳어계, 티벳·미얀마어족, 치앙어파에 속한다. 남, 북 등 2종류의 방언이 있으며 차이가 매우크다. 이전에 푸미족은 티벳문자를 사용했었지만 그다지 널리 보급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에는 한문어(中國語) 문자가 통용되고 있다. 푸미족 대부분은 만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원시종교를 신앙하며 이외에 라마교와 도교를 신앙한다.
푸미족은 어느 지역에 거주하는냐에따라 호칭이 다르다. 윈난성의 란핑, 리강, 용싱에 사는 사람들은 푸잉미(普英米)라고 불리고 쭈랑에 사는 사람들은 푸리미(普日米) 혹은 페이미(培米)라고 불리며 그 명칭은 백인(白人)이라는 의미이다. 한문어로 기록된 사적에 푸미족은 시판(西番) 혹은 파주(巴苴)라고 기록되어있다. 신중국 성립후 1960년에 민족명칭은 푸미족으로 통일됐다. 푸미족은 원래 칭하이· 티벳고원에 사는 칭하이(靑海), 간쑤(甘肅) 및 쓰촨(西川)주변의 유목부락 이었으나 서기 7세기 이전에 현재 쓰촨남서부 지구로 이주해와 시창(西昌)지구의 주요 민족이 되어 한족·.티벳족 등과 긴밀히 왕래하고 있다. 원(元)대에 푸미족 중의 일부가 몽고군과 함께 윈난성의 디안시(滇西)지구로 이주해 성장·발전을 이루었다.
푸미족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푸미족 거주지의 90%이상이 산간지대이기 때문에 생산양식이 뒤떨어져 생산은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 신중국 성립후, 특히 1988년에 란핑 방이족·푸미족자치현이 설립된 후 푸미족은 각 방면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다.
�샨후이 : 윈난에는 수많은 산들이 있다. 푸미족은 매달 15일 산신에게 제물을 바치는데 음력으로 7월 15일 열리는 �샨후이가 가장 중요하다. 매년 �샨바라라고 불리우는 지역에 모든 신들이 모여 사냥대회를 연다는 것이다. 그 중 한 신이 사냥 경기에서 승리하게 되고 그 신이 달린 지역은 그 해에 풍년을 이루게 되고, 경기에 패한 신이 달린 지역은 큰 재앙을 만나게 된다. 마을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자신들의 신을 경기에 내보내고 향을 피워 행운을 빌며 절을 한다.
아창족(阿昌族)
인구는 2만 7708명. 주로 윈난성(雲南省) 더홍(德宏)타이족·징포(景頗)족 자치주의 롱촨현(隴川県), 량허현(梁河県)에 분포하고 소수가 양짱현(盈江県), 루시현(潞西県), 루이리현(瑞麗県)과 보샨지구(保山地區)의 롱링현(龍陵県), 통충현(騰沖県)에 분포하고 있다.
아창족은 중국운남 경내에서 최초로 살아온 민족으로 고대 한문사의 기재에 따르면 이 민족은 峨昌, 娥昌,莪昌,阿昌,棋昌(모두 아창으로 발음)등의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모두 각각 다른 시기에 불려진 이름들이다. 신중국 성립 후 아창족이라 명명했다. 아창족은 아창족만의 언어를 사용한다. 아창어는 한(漢) ·티벳어계, 티벳·미얀마어파, 미얀마어분지에 속하고 3개 지구의 방언이 있으며 문자는 없다. 이들은 보편적으로 소승불교를 신봉하고 있다.
아창족은 칼을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며,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阿昌刀는 날카롭고 아름다우며 견고하다. 은으로만든 칼집은 꽃무늬를 도안해 정교하며 아름다운 공예품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은장식, 은학, 쟁반 등의 조각도 매우 정교하다. 대부분의 주택마다 뜰이 있고, 집은 말(斗)에 구멍을 뚫은 모양의 목재 대에 양쪽으로 경사면의 꼭대기에 기와를 얹은 집이다. 아창족은 벼농사를 지으므로 쌀을 주식으로 하고, 부식으로는 옥수수와 감자를 먹는다. 신 음식을 좋아하며 빈랑 열매를 씹는 습관이 있다.
남자는 일반적으로 남색, 백색, 흑색의 맞섶저고리와 검은색의 긴 바지를 입는다. 결혼한 여자들은 치마와 소매가 좁은 맞섶저고리를 입으며 미혼 여성들은 긴 바지를 입는다. 명절이 되면 여자들은 모두 은장식을 하고, 미혼 여성들은 단 4개의 단추 위에 나란히 4가닥의 긴 은사슬을 걸고,허리까지 이어진 은사슬에 작은 은회색의 합을 달고, 은목걸이, 은귀걸이를 장식한다
누족(怒族)
인구는 2만 7123명. 주로 윈난성(雲南省)의 삐장(碧江), 푸공(福貢), 공산산현(貢山三縣)에 거주하고 있으며 가까이의 란핑(蘭坪), 웨이시(維西)에도 누족이 집중 거주하고 있다. 누어는 한·티벳어계, 티벳·미얀마어족에 속하며 어파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지방마다 방언이 크게 달라 서로 의사소통을 하기 힘들다. 자민족의 문자가 없고 대부분 한문어를 사용하고 있다. 누(怒)족에게 문자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옛날에 누족에게는 자신들만의 문자가 있었다. 단 그 문자는 양가죽에 씌여있었다. 후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개들이 양가죽을 먹어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그때부터 누족에게는 자신만의 문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설이고, 실제로는 누족에게는 자신만의 문자가 없다. 사람들이 중오한 일을 기록하거나 소송을 진행할 때는, 목각이나 매듭을 이용하는 원시적인 방법을 썼다.
또다른 방법으로는 돌이나 대나무를 사용하는 것이다. 대,중,소 세가지를 사용해서 숫자를 만들어낸다. 가령 10개면 작은돌 열개, 11개면 중간돌 하나와 작은돌 열개 등으로 말이다. 누족은 만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원시 종교를 신앙한다. 일부의 사람들은 라마교 혹은 카톨릭, 크리스트교를 신앙하기도 한다.
누족은 누강(怒江), 란창강(瀾滄江)의 양안 일대에서 생활하고 있다. 푸공, 공산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그 지역에 제일 먼저 거주한 토착민으로 아누(阿怒), 아룽(阿龍)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삐장, 루쑤이(瀘水)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리강(麗江), 장촨(劍川)의 동쪽으로부터 이주해와 누루(怒蘇)라고 불리고 량산(涼山)의 이족(彝族)과 깊은 관련이 있다.이 2종류의 사람들은 서로 융합하여 점차 누강 지구에서 하나의 민족이 되었다. 예전에는 누강을 건너야 하는 위험 때문에 외부와의 접촉이 없었다. 이 때문에 누족 사회는 경제 발전이 늦어져 20 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도 일부 지구의 누족은 여전히 원시 공동체의 잔존을 유지하고 있었다. 근 몇십 년간 누강에 대철교가 가설되고 현대식 도로가 건설되어 누족의 경제·사회는 빠른 발전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누(怒)족 사회에 전해내려오는 신화와 전설을 통해, 누족의 초기 사회를 엿볼 수 있다. 여타의 민족과 마찬가지로 '홍수시대', '근친결혼' 그리고 모계사회를 거쳐왔다. 그 가운데 근친결혼으로 번성을 꾀하는 방법은 중국 '칭장(靑藏)'일대의 씨족과 관련이 깊다. 관련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누(怒)강이라는 이름은 '[만슈(蠻書)]'라는 책에서 처음 발견된다. 이러한 이유로, 누족은 당나라때 이미 누강 유역에서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누(怒)족은 누강 양안과 '란창(瀾滄)'강 유역에서 살던 고대 주민이다. 이들의 본래 거주지는 리쟝(麗江)과 지엔촨(劍川) 일대였다. 후에 여러 이유로 쫓겨서, '란핑(蘭坪)'현에 있는 '란창'강 양안에서 살았고, 후에 누강 지역으로 들어왔다. 지금도 '리쟝'현에 있는 '지우허샹(九河鄕)', '지엔촨' 북부와 '란핑'일대에는 누족의 선민이 남긴 흔적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리쟝 지우허샹'의 '롱이(龍邑)', '따꺼라(大格拉)', '샤오꺼라(小格拉)', '지엔촨'현의 '탕량(堂郞)'촌, '란핑'현의 '미루어이(彌洛衣)', '언쟈오(恩照)'등이다. 이런 것들은 누족의 선민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촌락의 이름이다. 또한 '꽁샨(貢山)' 북부의 누족은 천년전부터 그곳에서 살아왔기에 인근에 있는 두롱(獨龍)족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1960년대 이후에 누강 지역에 대한 집중 연구결과 신석기 시대의 유물을 발견하였다. 이는 누족이 누강 양안에 제일 먼저 들어와 거주한 민족임을 말해준다. 16-17세기 때에 많은 리쑤(LiSu)족이 전쟁을 피해서 누강으로 이주하였다. 그 이후로 한족, 바이(白)족, 나시(納西)족등의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이 쉬지않고 누강지역으로 들어왔다. 누강에서 누족처럼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민족이 없다. 이들은 누족 언어 외어, 바이(白)족, 리쑤(LiSu)족, 장(藏)족 언어를 할 줄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러한 민족들과 같이 살며, 통혼하고, 생활의 여러부분을 함께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이 성격이 명랑 쾌활하고 문화가 다채롭다.
'푸꽁'누족과 리쑤족이 연관을 맺은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으나, 이들은 서로 통혼하며, 종교에 있어서도 리쑤족의 무당인 '니빠(尼Ba)'를 신봉한다. 이외에도 서로 짐승을 빌려주고, 품앗이를 하며, 건물을 짓는데 도와주는 등, 상부상조의 관계를 맺고 있다. '꽁산'의 누족은 장족과 함께 살기 때문에, 의식주의 여러면에서 장족 문화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다. '꽁산'의 누족이건 '푸꽁'의 누족이건 '여시조(女始祖)'를 신봉한다. 전자는 지혜의 여신인 '지아얼(卽阿Er)'여신을 믿고, 후자는 '마오잉츙(茂英充)'여신을 공양한다. 까오리꽁샨(高黎貢山)과 삐루(碧羅)설산의 험준한 줄기, 심심유곡의 누강 양안에 있는 약간의 충적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양안은 절벽의 대협곡으로 되어있다. 이곳에서의 건축방식은 '치엔쟈오루어띠(千脚落地)'라고 불리우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집을 지을때 비탈의 경사면에 먼저 몇십개의 기둥을 박는다. 기둥의 사이에는 횡목을 걸치고 그 위에 널판으로 덮는다. 네 벽을 만든 다음 지붕은 풀이나 판자로 덮는다. 문 앞에는 작은 복도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방은 2-3개를 꾸미는데 바깥쪽은 손님을 위한 방이다. 매 방에는 훠탕(火塘)이 있고, 훠탕 위에는 삼각 받침대나 돌 세개를 놓는다. 이러한 구조는 나무를 구하거나, 이사를 할 때 용이하
고, 배수에 대해 신경쓰지 않아서 누쟝(怒江)의 기후에 적합하다.
꽁산의 가옥구조는 동일하지 않다. 그 지역흔 풍화암으로 인한 돌조각들이 많아서 벽을 흙으로 만든다. 상부는 나무로 하부는 흙으로 만드는데, 모든 방에는 흙벽이 있다. 방바닥은 석판이나 목판을 깐다. 마루는 두꺼운 나무로 만들어서 위에는 사람이 살고, 아래는 일반적으로 가축을 키운다. 사람이 사는 층에는 두칸 이상의 방이 있는데, 매 방마다 훠탕이 있다. 하나는 객실로, 하나는 주인의 침실로 사용되는데, 주인의 방 안쪽에는 양식과 의복을 보관하고, 외부인이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누족의 초기 거주형태는 동굴 안에다 초가집을 짓는 것이었다. 생산력의 발전과 주변 타민족의 문화적 영향으로 이들의 주거 형태도 원래의 '치엔쟈오루어띠'형태 외에 몇가지를 갖게 되었다. 그 가운데 속칭 '슈팡(竪房)'이라고 하는 가옥구조가 있다. 6개의 기둥으로 방한칸을, 9개로 두칸을, 12개로 3칸을 만들거나, 8개의 기둥으로 방한칸을 12개의 기둥으로 두칸을 만드는 형이 있다. 모두 3층으로 되었는데, 제일 윗층은 곡식을 보관하고 아랫층은 농사 도구를 놓아두며, 중간층에는 사람이산다. 방 내부에는 훠탕이 있고, 아래로 내려가는 복도와 계단이 있다. 이러한 '지엔팡'구조는 평지, 비탈길 어디서든지 짓기에 용이하고, 통풍이 잘되며 빛도 잘 들어온다. 또다른 하나는 '스토우팡(石頭房)'인데, 강변 일대에 사는 사람들의 가옥형태다. 일반적으로 2-3개의 방을 만들고, 각 방에는 문이 있으며 실내에는 사람이 산다. 대들보 위에는 양식을 놓는다. 다른 곳에 가축을 위한 구조가 있다. 이러한 가옥구조는 1980년 이후 점점늘고 있다.
누족의 촌락 70%는 '누쟝' 양안 해발 1500-200미터 정도의 산허리에 분포되어있다. 소수의 산촌이 강변을 따라서, 혹은 산 깊숙히 있다. 누족의 촌락은 '카'로 불리운다. 이 '카'는 2개 이상의 씨족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다. 한 촌락에 보통 20-30호가 있으며, 많은 곳에는 50호, 작은 곳에는 10 정도가 있다. 이러한 촌락은 대부분 혈연 친족관계로 만들어진 것이다. 또 다른 촌락형태는 누족과 리쑤족, 장족등의 잡거형태로 푸꽁(福貢)의 쯔루어(子羅), 과커(果課), 구취엔(固泉), 무구쟈(木古甲)등에 있다.
1949년 이전의 누족은 나시(納西)족과 장(藏)족은 봉건영주경제와 바이(白)족과 한(漢)족의 지주경제등의 영향을 받아서, 원시공유제, 봉건영주제, 지주경제등 여러가지 경제제도 형태를 보여왔다. 특히 토지제도는 각 농민의 사유, 원시공유가 혼재하였다. 촌락의 공유, 씨족공유, 가정 공유제도가 성행할 때, 토지의 매매, 세금, 저당, 압류등 지주경제의 현저한 특징이 나타났다. 조성된 토지의 매매원인은 사망, 결혼, 도박, 소송, 식량부족, 빚등이었고, 그 중 초상이나 결혼시에 토지매매가 많이 이루어졌다. 한편 누족 사회에는 고용제도가 뚜렷하게 실시되었다.
누족 사회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결혼은 한대에 걸친 것이고, 토지는 백년에 걸친 것이다" 이는 누족사회발전중 토지가 차지하는 위치를 적절하게 나타낸 말이다. 중국정부가 들어선 이후로 토지개혁이 이루어졌다. 1953년 제1차 협동조합이 결성된 이래 총촌의 초기
농업생산협동이 이루어졌다. 1980년대 이후 지구내의 토지분산, 흩어진 거주지의 특징적 형태로 인해 생산책임제를 도입하였고, 사회생산력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누족의 거주지 및 누쟝(怒江) 양안의 협곡은 해발 4천여미터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로써, 한대 온대 열대등 다양한 기후를 보이는데, 강변 계곡은 덥고 겨울이 짧다. 산중턱의 기후는 온화하고 겨울에 그다지 춥지 않으며 여름에는 건조하고 덥다. 산 위는 춥고 일년에 6개월 이상 눈으로 덮힌다. 이러한 입체적 기후는 풍부한 동식물 및 약재를 제공한다. 험준한 산세 가운데서 10무정도의 밭을 발견
하기가 쉽지 않다. 많은 곳에 돌이 있으며, 풍화작용이 심해서 곳곳에 돌조각이 있다.
누족의 남자들은 마로 된 중국식 두루마기, 짧은 바지를 입으며 어떤 사람은 머리카락을 기르거나 묶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성년이 된 남자는 항상 왼쪽 허리에 도끼를 차고, 오른쪽 어깨엔 석궁과 전통을 차고 다녀 용맹스럽고 민첩함을 나타낸다. 부녀들은 긴 치마를 하의로 입고 무늬있는 테두리를 좋아한다. 각지의 누족 부녀들은 모두 가는 등나무 고리를 머리에 감거나 허리에 감기를 좋아한다.혹은 발의 복사뼈 부근에 칭칭 감아서 장식을 한다. 이들은 남녀 모두 장신구를 좋아하는데 산호(珊瑚), 마노(瑪瑙)로된 머리장식과 가슴 장식을 화려하게 달고 다닌다.
장례식을 중시 여김과 아울러 제사장소 부근의 나무들은 함부로 찍지 못하고 그 근처에서 사냥할 수도 없으며 신을 제사지낸 곳에서 대소변을 볼 수 없고 집안이나 밖에 있는 신주를 다치지 못한다.공산현의 무당 "나무사"는 해마다 있게되는 추수 이후의 마을 집단적 제사를 주최한다. 늙은 남자가 죽으면 참대 나팔을 부는데 그 나팔의 수효는 사망자의 신분과 나이에 따라 증가되었다.미혼자면 하나만 불고 자녀가 있으면 두 개를 불고 우두머리나 무당이면 6∼7개를 분다. 참대 나팔을 부는 것은 마을에 부고를 알리는 동시에 사망자의 혼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이다. 여자나 아이가 죽으면 나팔을 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죽은 그들의 부형들이 앞에서 길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나팔소리를 들으면 씨족 전체 또는 마을 전체가 사흘 동안 밭에 나가 일하는 것을 중지하며 이유는 귀신을 만나 병들거나 곡식에 피해가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사람마다 술 한병을 들고 조상을 가서 사망자와 함께 이별주를 마신다. 무당이 술 가지고 온 사람의 술을 한잔 부어 사망자 앞에 흘려 놓음으로써 이별을 표시한다. 사망하여 이틀이나 사흘 후에 공동묘지에 가져가 묻는다. 발인시에 세로인이 칼을 휘두르며 앞에서 길을 인도한다. 묻은 뒤 무덤앞에 사망자가 생전에 쓰던 물건 들을 놓아둔다. 남자면 활과 화살총을, 여자면 음식 만드는데 쓰는 도구와 베짜는데 쓰던 도구들을 놓아둔다. 이것은 저승에 간 뒤에도 살았을 때처럼 생활하기에 이 물건들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부 잘 사는 집들에서는 노인이 사망하면 공동묘지에 가져가지 않고 집 뒤 뜨락에 묻는다. 이것은 먼 옛날에 장례법으로서 사망자의 영혼이 집을 떠나가지 않게하고 집에 남아서 집 식구들을 보호하게 하는 것이다.
절기에는 "약권"과 "여위"등이 있다. 시기는 다른데 원단 전후와 구정 전후의 두가지이다. 어떤 지방에서는 "선녀절"을 지내지 않는다. 누족은 선녀를 신봉하는데 모계 씨족이 여성을 존중하는 풍습의 하나이다. 현재 선녀절을 지낼 때 함께 물자를 교류하는 큰 모임을 열고, 방직, 문예, 연출, 영화상영도 함께 한다. 또한 조정경기와 활쏘기 대회 등의 체육행사도 한다.
누족들은 오랫동안 부모가 자기 뜻대로 자녀의 혼인을 결정하였고 결혼하려면 소 몇마리를 여자집에 예물로 바쳐야 했다. 그래서 많은 남성들이 결혼을 포기하기도 했으나 기독교에 가입한 뒤부터는 달라졌고 현재는 청년 남녀가 결혼전에 비교적 교제하는데 비교적 자유가 있고 서로 팔지, 목걸이등을 정표로 교환하고 다시 남자쪽 집에서 매파를 통해 혼담을 꺼낸다.
누족의 작명법은 독특하다. 남자의 경우 일생동안 3가지 이름을 가지게 되는데 아들이 태어나면 아버지 또는 백부나 할아버 지가 아명을 지어주는데 이것이 최초의 이름이다. 아명은 부르기 좋은 글자를 골라 지어준다. 두 번째는 14∼15세가 되어 자유로이 공방(公房:젊은이들이 모여 노는곳)을 드나들면서 이성을 접촉하여도 좋을 시기가 되면 새 이름을 지어준다. 단 이 성인명은 어른들 앞에서 절대 말하면 안된다. 세 번째는 결혼기에 접어들어 짓는 이름으로 이 이름이 평생동안 지녀야할 공식 이름이다. 이 이름은 첫 번째의 아명에다 아버지 이름의 끝 글자를 전치시(前置)시키는 부자 연명제 형태이다. 이들에게는 일정한 성(姓)이 없고 부자연명제를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키는 이유는 부계 혈통을 보존한다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한편 여자는 아명과 성인명의 두가지이고 성인명은 남자보다 한 살 빠르게 아버지가 지어주는데 이유는 여자가 사춘기가 남자보다 빠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자의 이름은 꽃이름에서 따서 붙이기 일쑤다.
누족은 남자가 죽으면 손발을 펴서 위쪽으로 향하도록 눕히고 여자는 손발을 구부려 옆쪽으로 휜 자세로 매장하는데, 주로 합장이다. 이것은 생전에 부권(父權)이 상위에 있고 아내는 남편에 종속되어 있다는 남존여비 사상에서 비롯된 봉건적인 인습의 잔재이다.
축제, 오락, 예술양식
누족은 각종 동물의 생활 습관에 대해 매우 익숙하게 알고 있어서 동물의 행동을 본뜬 많은 춤을 만들었다. 그리고 수렵, 채집 생산활동과 생활습관을 표현하는 춤이 있는데 수렵무, 대잎 모으는 춤, 수확춤, 혼례춤, 세탁춤, 비파춤 등을 예로 들 수가 있다 . 누족인들은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 있을 때도 춤을 통해서 진솔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다. 춤의 동작은 활달하고 민첩하며 춤추는 자태는 웅건하고 호방하며 리듬이 경쾌하며 활력이 있다. 그리고 형상은 생동감이 있고 마치 진짜와 같으며, 향토적 냄새가 매우 풍부해서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악기로는 "다비야"(비파), 구현, 피리, 호호생이 있고 그 중에 다비야가 가장 널리 쓰이며, 많은 남자들이 거의 연주 할줄 안다. "다비야"는 비파같이 생겼고 타원형과 삼각형의 두 종류가 있으며 먼곳으로의 여행, 사냥, 생산활동, 혼사 , 절기 때는 물론이고 소녀에게 구애할 때 모두 "다비야"는 청년의 친숙한 동반자이다. 누족소녀가 직접만든 구현을 연주할 때, 입 모양과 손가락 튕기는 것을 통해 종종 말로하는 것보다 더 자신의 깊은 내면의 깊이를 표현하곤 한다.
더앙족(德昻族)
인구는 1만 5462명. 더앙족은 윈난성(雲南省) 더홍(德宏)타이족 징포족(景頗族)자치주 및 빠오산(保山), 린창(臨滄), 사이마오(思茅)지구에 분산해 거주하고 있다. 그 중 루시현(潞西縣) 산대산(三台山)과 쩐캉현(鎭康縣) 준농(軍弄) 등은 더앙족이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구역이다.
더앙어는 남아시아어계, 와 · 더앙어파에 속하며 나앙(納盎), 뿌레이(布雷),뤄마이(若買) 등 3개의 방언으로 나누어진다. 더앙족 대부분이 타이어, 한어, 징포어에 능통하고 이들은 자민족의 문자가 없기 �문에 많은 사람들이 중국어와 타이어를 사용한다.
더앙족의 종교는 소승불교와 원시 종교이다. 미얀마에 거주하는 뻥롱(崩龍)족의 전설에 의하면,그들과 와(Wa)족, 커무(克木)인은 모두 루이리(瑞麗)강 유역에서 기원하였으며, 참차 비옥한 토지를 향해 이동하였다고 한다. 중국 더앙족은 자신의 선조가 살았던 지역을 두 곳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그들의 발원지가 더홍(德宏)주의 망(芒)시 일대이고, 다른 하나는 미얀마의 따샨(大山)이다.
이러한 주장이 모순되지 않는 것은 두군데 모두 루이리(瑞麗)강 유역에 있어서 같이 이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역사상 이주로 인해 다른 지역에서 다른 족속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오늘날 더홍(德宏)주에 있는 따이(Dai)족, 징포(景頗)족은 더앙족이 이곳에 비교적 초기에 거주하였으며 넓은 지역에서 살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현재에도 따이(Dai)족, 징포(景頗)족에는 아직도 더앙어의 지역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더홍(德宏)주 내의 각 현에는 지금 더앙족의 거주지가 없다. 하지만 뻥롱샨(崩龍山), 뻥롱칭(崩龍Qing), 뻥롱싸이(崩龍塞)등의 지역이 있는 것을 보면, 이 지역에 분명 더앙족의 조상들이 거주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그 외에도 더홍(德宏)일대에는 더앙족 및 그 선조들이 남긴 유적과 유물들이 발견되는데, 촌의 흔적, 돌판으로 만든 길, 돌다리, 마을 입구에 세워놓은 돌문, 탑 기초, 차 마시는 곳 등이다.
더홍(德宏)주 롱촨(Long川)현에서 북쪽으로 약 5키로정도 가면 빵와빠따(邦瓦巴達)향이 있다. 그 동편에 "나샨꽁(納Shan供)"이라는 뻥롱(崩龍)왕성이 있다. 성벽은 돌로 쌓았으며, 성 안에는 주거지 유적이 있다. 부근에는 군대가 주둔한 흔적, 우물등이 있다. 징포(景頗)족 주민들은 "나샨꽁(納Shan供)은 전설가운데 있는 뻥롱(崩龍)족 왕자의 이름이다. 비록 이지역에서 더앙족이 주요 민족이 아니지만, 이 일대에서 최초에 거주했던 민족"이라고 소개한다. 상술한 유적지와 유물은 더앙족의 선조들이 돌을 잘 다음었으며, 차 재배에 능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화적 특징이 아직도 더앙족내에 남아있다.
더앙족은 중국 남서부의 긴 역사를 가지는 소수민족 중 하나이며 고대의 푸런(濮人) 에 기원하고 아이라오(哀牢)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들은 기원 전 2 세기무렵 , 누강(怒江) 양안 일대에 거주하며 일찍부터 빠오산(保山), 더홍(德宏) 일대의 개발(開發)에 종사한 민족이다. 사서에 기재되어 있는 망만부락(茫蠻部落)은 더앙족의 조상이다. 수·당나라 시대에는 「망만(茫蠻)」, 「푸찌만(扑子蠻)」, 「망주찌만(望苴子蠻)」이라고 불렸고 한(漢), 진(晉) 왕조 및 남소(南召), 따리국(大理國)을 따랐으며 원(元)대 이후에는 타이족 투시(土司)소속의 백성이 된 적도 있다. 더앙족 대다수는 징포족, 한족, 리쑤족, 타이족 등과 함께 생활하고 주로 농업 생산에 종사 하고 있다. 더앙족은 옛부터 차 마시는 것을 기호로 삼아왔기 �문에 더앙족 어느집에서든 차나무를 볼 수 있다. 예전에 소수민족은 거주 지구에서 차별 받거나 업신 여김을 당했었는데 해방 후 이러한 상황은 개선되어 더앙족도 다른 민족과 같이 평등한 지위를 유지하게 됐다. 해방 후 더앙족의 명칭은 뻥롱족(崩龍族)으로 총칭되었는데 1985년 9월, 국무원의 인가를 받아 더앙족이라고 개칭되었다.
더앙족의 경작지는 논과 밭으로 나뉜다. 토지개혁 이전에는 더앙족의 논은 모두 개인 소유였고, 매매나 저당이 가능했다. 소라든지 각종 농구도 모두 사유재산이었다.현 중국이 수립되기 전에, 더앙족은 정치적으로 권리가 없었고, 경제적으로 몹시 낙후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토지의 대부분은 한(漢)족이나 따이(Dai)족의 부유층에 의해 저당잡혀있는 상태였다. 이들이 토지를 저당잡히는 주요 원인은 집안의 관혼상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논의 경우, 토지가 저당잡히게 되면 수확량의 50-60%를 저당비용으로 채주에게 주어야하며, 기한이 만료되어 저당액을 상환해야만 토지에 대한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밭의 경우는 조금 상황이 다르다. 밭은 촌락의 소유로, 개인은 점유권과 사용권이 있을뿐 소유권은 없었다. 촌락 구성원은 촌락 거주 범위 내의 토지와 삼림에 대해 개간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이를 '쥐엔쟌(圈占)'이라고 하는데, 더앙족은 '빵만(邦曼)'이라고 한다. '쥐엔쟌(圈占)'의 방법은 토지의 주위에 표시를 해놓는 형식이다. 하나는 초지에다 표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무에다가 십자형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만약 토지를 개간하고 나면, 그것을 이용하든지 하지 않든지 개인이 점유권과 사용권을 누리게 된다. 그의 가족 구성원은 누구든지 경작할 수 있고, 임대도 가능하지만, 매매는 불가능하다.
토지권이 있는 자가 이사를 갈 경우, 토지는 부락의 소유로 귀속되며 지도자의 관리와 조정을 받게 된다. 그리고 새로 촌락으로 이주해오거나 새로이 가정을 만든 자에게 나누어준다. 더앙족이 밭을 경작하는 방법은 '고정지'와 '휴경지' 등 두가지 방법이 있다. 고정 경작지는 강가의 비교적 평탄한 지역에 있은 토지로, 주로 옥수수를 재배한다. 올해 옥수수를 심었으면 내년에는 콩류를 심는 방법으로 지력을 보존하고 생산량을 유지한다. 고정경작지는 전체 경작지의 20%좌우이며, 나머지는 계곡 부근에 있는 휴경지다. 더앙족의 전통 및 경험에 의하면, 한 곳에서 3년을 경작하면 15년을 휴경한다. 이러므로 한 토지는 한 세대에 3번 정도를 경작하게 된다. 이 지역은 덥고 비가 많이 내려 수목이 빨리 자란다. 10년 정도가 지나면 예전의 밭에 수목이 어느 정도 자라므로 이곳에 불을 놓아 지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장기간의 화경에 의존하는 민족은, 나무들이 생존을 이어주는 중요한 자연조건일 수밖에 없다. 더앙족의 전설 『천왕지모(天王地母)』에 의하면, "옛날 옛적, 세상에 인류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 오직 꽃, 풀, 나무 등만이 있었다. 갑자기 커다란 돌풍이 불더니, 102개의 나뭇잎들이 떨어져 사람으로 변해 부부가 되었고, 이들이 인간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더앙족은 수목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원시 농업시대의 깊은 흔적이 남아있다.
예전의 각 더앙족 부락에는 함께 짐승들을 기르는 공동목장이 있었고, 그 장소는 휴경하는 산지를 이용하였다. 더앙족은 이를 '꺼쟝마(格江瑪)'라고 부른다. 매년 한 군데의 산지를 목장으로 쓰며, 한 목장은 계속하여 2-3년을 사용한다. 어떤 촌락들은 집단방목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예를들어 루시(潞西)현 싼타이(三台)산 빵와이(邦外)촌의 경우,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2틀동안 책임지고 방목을 한다. 매일 아침 방목할 시간이 되면 책임자가 고함을 치는 형식으로 각 가정의 소를 일정 지점에 모이게 하고, 밤에는 바로 그 지점에서 각 자정이 소를 데리고 돌아가게 한다.
현 중국이 건국되기 전에는, 더앙족의 농업에는 엄격한 분업이 있었다. 남자들은 논밭을 갈고, 경지를 정리한다. 부녀자들은 씨를 뿌리고, 김을 매며, 재배에 종사한다. 그래서인지 더앙족 가운데에는 "남자는 밭을 매지 않고, 여자는 밭을 갈지 않네"라는 속담이 전해지고 있다. 대부분의 연로한 남자들은 일에 참여하지 않지만, 부녀자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농업에 종사한다. 때로 농사에 바쁘거나 기타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서로 품앗이를 하였다. 후에 이것이 발전하여 소로 사람의 힘을 바꾸고, 사람의 힘을 식량으로 바꾸게 되어, 더앙족 내에 고용관계가 생기게 되고 빈부의 분화가 일어나게 된다. 현 중국이 세워진 이후, 더앙족의 인구가 그다지 많지 않고, 거주지가 분산되어 있으므로 어떠한 더앙족 자체내의 경제조직이 세워져 있지 않으므로, 중국 정부는 토지 개혁 및 본토인 위주의 토지 제도를 시행하게 된다.
옛날, 더앙족의 거래활동은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고, 단지 한족, 따이족의 장날에 참여하는 정도였다. 내다 파는 물품은 마대, 배낭, 돼지, 닭, 오이, 파인애플, 차잎, 옥수수 등이고, 거래 대상물품은 곡괭이, 소금, 화약, 옷감 등이다. 한족과 따이족 및 미얀마 상인들과의 접촉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어떤 더앙족가운데 반농반상이 있는데, 농사일이 바쁠때는 농업을, 농한기 때는 상업에 종사한다. 미얀마로 들어가서 옷감이나 의복류를 가지고 와서 판다.
어로와 수렵도 더앙족의 경제 생활 가운데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어로는 부녀가, 수렵은 남자가 하는 것으로 역할이 구분되어 있다. 채집은 계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대부분은 우기에 진행된다. 채집의 종류는 박하 등의 수생식물, 밤, 백로화등의 야생식물등을 들 수 있다. 그 외에 야생버섯과 죽순도 채집하는데, 자체적으로 소비하기도 하지만 가공하여 시장에 내다팔기도 한다.
더앙족이 물고기를 잡는 방법은, 어항, 그물, 물빼기 등인데, 간혹 폭약을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더앙족은 소승불교를 믿고 있어서, 살생을 즐기지 않는다. 따라서 수렵의 목적 들짐승들이 농작물을 해치는 것을 막는 정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농한기때는 무리를 이루어서 산에 올라 노루와 사슴등의 동물을 잡는데 대부분 총과 활을 사용한다. 더앙족의 수공업은 그다지 발달하지 않은 편이다. 대부분의 품목은 집에서 자체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고, 소수만이 시장에서 팔거나 교환한다. 지금까지 더앙족의 가내수공업은 대부분 원시적 상태인데, 죽기, 방직, 제지, 도자기, 화약제조, 차 제조 등에 머물고 있다. 그 가운데 방직 및 차 제조는 유구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현 중국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더앙족의 우두머리인 '따깡(達崗)'은 대부분 세습되었으며, 투쓰(土司)로부터 직접 임명을 받았다. 젼캉(鎭康), 껑마(耿馬)의 더앙족 기본 사회조직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따깡(達崗)'은 각 마을의 우두머리인 '따지깡(達吉崗)' 가운데서 선출되었다. 임무는 투쓰(土司)와의 연락, 국민당정부의 법령집행 등이었다. '따지깡(達吉崗)'은 '따깡(達崗)'의 하급자로, 각 마을을 관리하고, 군인을 선발하며, 촌락토지의 분배, 세금등을 관할하였다.
'따푸롱(大朴隆)'은 '따깡(達崗)'을 도와서 재정을 관리하며, 촌락에서 거행되는 혼인등을 돌아보았다. '따지꺼(大基格)'는 구체적인 민사소송을 맡았는데, 절도, 토지 분규등이 이에 해당된다. 위에서 언급한 각종 지도자들 가운데 '따깡(達崗)'의 지위가 가장 높으며, '따지꺼(大基格)'가 가장 낮았다. 마을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따지꺼(大基格)'가 해결을 시도하며 계속하여 위로 보고되
어진다. 만약 '따깡(達崗)'조차 해결하지 못할 경우 각 촌의 지도자들이 모여 회의를 한 후 결정한다. 더홍지역이 젼캉(鎭康), 껑마(耿馬)와 다른 점은, 지도자들이 세습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군중이 선발한다는 것이다. 만약 지도자가 민심을 얻지 못할 경우, 군중은 그 직무를 해임할 수 있다. 오직 '따깡(達崗)'만은 각 촌의 지도자들이 선발하여 투쓰(土司)에게 보고한다. 현 중국정부가 세워진 이후로 이와같은 제도는 없어졌다.
더앙족은 고유의 성문법이 없고, 오직 관습법이 있다. 이는 촌락구성원간의 약속에 의해 보존된 좋은 전통이라 하겠다. 이들의 주요 관습법은 다음과 같다.
1. 촌락 공유지에서 주민들은 농사를 지울 수 있고, 벌목을 할 수 있다. 단 촌락지도자의 허가가 있어야한다. 만약 개인의 나무를 사용할 경우 사전에 주인의 동의를 얻거나 돈으로 구매해야한다.
2. 죽은 사람은 반드시 마을 공동묘지에 매장해야한다. 임의 매장은 불허한다.
3. 분가할 경우, 장자와 차자는 새로운 집을 짓도록 한다. 막내는 부모와 함께 살며 재산 승계권이 있다. 단 막내가 새로운 집을 지을 수도 있다. 재산 처리에 있어서 형과 동생이 따로 살 경우 각 가정의 형편에 따라 나누며 본가에도 일부를 남긴다.
4. 도둑질을 한 사람은 조사를 받고 손해를 배상해야한다. 만약 그러한 혐의가 있는 사람은 '신의 판단(神判)'을 받도록하는데, 끓는 물에서 동전을 건져내는 방법으로 판정을 한다. 만약 혐의가 있는 사람의 손이 끓는 물에 의해 상처를 입으면 도둑질한 혐의가 있는 것으로 알고 배상을 하게 한다. 후에 '神判'이 변해 군중이 함께 판단하는 것으로 바뀌었으며, 마을 주민이 혐의가 있는 자의 일상생활
및 품행에 의거하여 판결한다. 만약 절도행위를 한 것으로 판단되면 반드시 배상해야하며, 배상하지 않을 경우 처벌을 가중하고, 심지어 마을에서 쫓아내기도 한다.
5. 남편이 있는 여인이 간음을 하면, 간부와 함께 처리하며 대부분 벌금을 물게 한다. 만약 남편이 외도를 하면 아내는 다른 이에게 시집을 갈 수 있고, 전 남편은 재물로 배상해야한다.
6. 여인이 혼인 전에 임신을 할 경우, 남녀 쌍방의 동의하에 결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먼저 마을을 정결케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촌락 가운데 노인을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다.
여성복식
긴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짧고 몸에 꼭 맞는 상의와 긴 스커트를 착용.
紅德昻族 - 스커트는 붉은색 가로줄 무늬가 있고, 花德昻族은 적색과 흑 색 또는 적색과 청색의 줄무늬가 직조되어 있음
黑德昻族 - 주로 검정색 바탕에 적색, 혹은 백색의 가는 줄무늬가 직조되 어 있음.
남성복식
대개 靑 혹은 赤茶色의 상의와 짧고 헐렁한 바지 착용.
白布를 머리에 감고 한쪽으로 내려뜨려 비로드로 만든 여러가지 색상의 장식을 달았음.
銀장식은 黑德昻族 남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식이며, 남녀 모두 호랑이, 사슴, 새, 꽃, 풀등의 동식물을 도안한 액세서리를 좋아함.
만족 (满族)
인구는 982만 1180명. 만족은 전국 각지에 분포하는데 그 중에서도 랴오닝성(遼宁省)이 가장 많이 거주한다. 만어는 알타이어계, 만주·퉁구스 어파, 만주어에 속하며 남, 북 2 종류의 방언이 있다. 한민족과 함께 생활해왔기 때문에 지금의 만족은 중국어를 사용하고 있다. 소수의 만족이 모여 거주하는 마을에서는 만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만어는 16 세기말 몽고어를 기초로한 만어가 만들어졌다. 현재 만족은 모두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 만족은 일찌기 많은 신들을 제사 지내는 샤머니즘을 신봉했으나 현재 샤머니즘을 신앙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만족은 긴 역사를 가지는 민족으로 그 조상은 2000전의 수썬런(肅慎人)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만족은 창빠이산(長白山) 이북의 헤이룽강(黑龍江) 중·하류, 우쑤리강 유역 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만족의 조상은 여진(女真)을 이루어. 12 세기에 금(金) 왕조를 창건 했다. 1583년 누얼(努爾)이 여진족 각파를 통일하고 팔기제도(八旗制度)를 창설해 만어를 만들고 1635년에 민족의 호칭을 만으로 고쳤다. 팔기제도는 정치, 군사, 생산이라는 3개 면의 직능을 가진 만족 사회의 근본적인 제도가 되었다. 1636년 황타이지가 황제가 되어 국호를 청(淸)으로 고쳤다. 1644 청 왕조는 중국의 통일중앙집권의 마지막 봉건 왕조가 되었다. 1911년의 신하이혁명(辛亥革命) 이후 만족으로 개칭되었다. 만족은 중국의 통일, 영토 개척, 경제·문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사료에 의하면 만족의 조상은 2천여년전의 숙신(肅愼) 및 이후의 읍루(相婁) 물길(勿吉) 말갈(靺鞨)과 여진 등의 고대 민족으로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 남북조수당 시기에(4~7세기) 숙신읍루인의 후손들은 그들의 민족 명칭을 물길 말갈이라 했다. 물길은 경제적 발전으로 인구도 신속히 증가하여 수십개의 부락을 세웠는데, 그 중에는 속말(粟末) 흑수(黑水) 백산(白山) 등 7개의 큰 부락연맹이 있었다. 그 후 사서에서는 물길을 다시 말갈이라 고쳐 불렀다.
7세기 말에 대조영(大祚榮)은 속말 말갈을 중심으로 송화강(松花江) 상류, 백두산 북쪽 기슭 일대에 지방정권인 "진국(震國)"을 세웠다. 713년 당왕조는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하고 다시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에 제수하였다. 이로부터 "진국"은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 발해국의 정치 군사 제도는 당왕조를 그대로 모방하였으며 한자를 사용하였다. 국왕이 새로 즉위할 때마다 당왕조의 책봉을 받아야 했다. 당 고종(高宗) 때에 발해국은 당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거의 매년 사신을 파견하여 황제를 배알하고 조공을 바쳤으며, 이와 동시에 여러 차례 당의 수도 장안(長安) 태학(太學)에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중원지역의 정치 경제제도와 우수한 과학기술 문화의 영향으로 발해국의 농업과 수공업은 신속한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제철과 견직은 대단히 유명하였다.
개원(開元) 13년(725년), 즉 발해의 건국을 전후하여 당왕조는 흑수(黑水, 즉 흑룡강) 말갈 지역에 흑수군(黑水軍)을 조직하고 흑수부(黑水部)를 설치하여, 흑수 말갈 각 부의 수령에게 도독(都督) 자사(刺史) 등의 관직을 제수하였다. 그 집권자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당왕조는 728년에 다시 그 도독에게 황족의 성씨인 이(李)씨 성을 하사하고 운휘장군(雲麾將軍) 겸 흑수경략사(黑水經略使)에 제수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그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장사(長史)를 설치하여 그들을 감독 보좌하게 하였다. 유주도독(幽州都督)에 예속된 흑수부는 흑룡강 유역에 세워진 당왕조의 직속 지방기구가 되었다. 요(遼)가 발해국을 멸망시킨 후에 발해 주민들을 남쪽으로 이주시키자 나날이 흥성하던 흑수 말갈부는 그곳을 보강하기 위하여 세력을 남쪽으로 확장하였다. 발해국을 뒤이어 번성을 누린 흑수 말갈을 거란인들이 "여진"이라 부르기 시작한 후로 이 명칭은 점점 말갈의 대명사가 되었다.
12세기 초엽에 유명한 아골타(阿骨打)는 완안부(完顔部)를 중심으로 여진인들을 규합하여 요를 물리치고 금(金)을 세웠다. 그들은 세력을 계속 확장하여 요와 북송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남송과 대치하였다. 13세기 초에 몽고가 금을 멸망시키고 원(元)을 세우자 여진인들은 원왕조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원왕조는 흑룡강성 의란(依蘭)을 중심으로 송화강 유역과 흑룡강 중하류 및 우수리강(烏蘇里江) 유역에 분포하던 여진인들에 대하여 그들의 풍속을 따르며 다스리는 정책을 폈다. 처음에는 5만호부(五萬戶府)를 설치하여 관할하다가 뒤에는 흑룡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동정원수부(東征元帥府)를 설치하고 계속하여 두 개의 천호부(千戶府)와 한 개의 만호부(萬戶府)를 증설하였다. 당시에 이 여진인들은 대체로 원시사회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원대 말기에 이르러 원래의 여진 사회는 해체되고 노예제 사회가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15세기 초에는 명왕조가 동북지구를 관할하면서 여진의 각 부도 모두 명왕조에 귀속되었다. 명왕조는 여진인의 분포 지역 내에 384개의 위소(衛所)를 설립하였다. 여진 각 부의 수령들을 각각 도독 도지휘사(都指揮使) 지휘첨사(指揮僉使) 천호(千戶) 백호(百戶) 진무(鎭撫) 등의 관직에 임명하고 칙서(勅書) 인신(印信) 의관 금전을 하사하였으며, 조공과 마시장의 시간과 대우를 규정하였다. 그리고 노아간위(奴兒干衛)의 여진 수령 홀자동노(忽刺冬奴)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흑룡강과 항곤하(恒滾河)가 합류하는 특림(特林) 지방에 중앙 왕조 직속의 지방행정과 군사기구인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를 설치하였다. 이상의 조치들은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진과 한족 등의 교류를 촉진시켰다.
명대에 여진인들은 점점 남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러한 장소 이동의 과정 중에 그들은 건주(建州) 해서(海西) 동해(東海)의 3부로 나누어졌다. 건주여진은 무순(撫順) 동쪽으로 이주하여 혼하(渾河) 유역을 중심으로 생활하면서, 동으로는 백두산 동쪽과 북쪽 기슭, 남으로는 압록강변에 이르렀다. 해서여진은 이주한 후에 휘발하(輝發河) 유역에 분포되어 살면서 북으로 송화강 중하류 지역에 이르렀다. 동해여진(명나라에서는 그들을 野人女眞이라고도 불렀음)은 건주 해서 이동과 이북의 광대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는데, 대체로 송화강 중류에서 흑룡강과 우수리강 유역에 이르렀으며, 동으로는 해안까지 다달았다.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은 정착한 후에 농업을 위주로 하면서 신속한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동해여진은 그러지 못하고 발전 속도가 완만하였다.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경제 문화적으로 신속한 발전을 이룩하였던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은 그들 부락 사이의 빈번한 전쟁으로 서로를 침탈하고 살육하는 참혹한 국면에 처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평화와 통일을 갈망하였다. 건주여진 좌위(左衛)의 수령 노이합적(努爾哈赤)은 역사적 조류에 부응하여 군대를 일으켜 여진의 각 부를 점령하고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통일 과정 중에 노이합적은 군사 정치와 생산기능을 갖춘 팔기제도(八旗制度)를 창건하였는데, 이것은 청대(淸代)의 기본적인 사회제도가 되었다.
1616년에 노이합적은 "영명칸(英明汗)"이라 칭하고 금나라(즉 後金)를 세웠다. 여진 각 부의 완전한 통일을 따라서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을 바탕으로 일부의 동해여진과 다른 민족을 흡수한 사람들은 오랜 공동생활을 거치면서 하나의 새로운 민족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1635년에 황태극(皇太極)은 여진이라는 옛 명칭을 버리고 만주(滿洲)라고 명명하였으며, 그 후에는 일반적으로 그들을 만족(滿族)이라 칭하게 되었다.
1635년 황태극은 여진이라는 이름을 "만주"로 고쳤는데, 이것은 만족 민족공동체가 정식으로 형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듬해에 황태극을 황제라 칭하고 중국역사상 최초의 만족 정권인 대청(大淸)을 세웠다. 1644년 청나라는 군대를 거느리고 중원으로 들어와 단시간내에 전국을 통일하였다. 그 후 통치 계층은 명왕조 멸망의 교훈을 받아들여 일련의 행정 개혁 조치를 취하고, 이로써 계층간의 갈등과 민족간의 갈등을 완화하여 사회적 발전을 촉진시켰다. 예를 들면, 1667년 강희제(康熙帝)는 조서를 내려 권지(圈地)를 영원히 폐지하고 농업을 장려하며 부역을 정돈하고 수리사업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전보다 더 좋은 생산 조건을 마련하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국가는 다시 사회 경제적으로 새로운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전국의 인구 경지면적 농업과 수공업은 모두 현저하게 증가되거나 향상되어 자본주의의 기틀이 더욱 많이 잡혀갔다.
강희제의 집권 중반기에는 국내외적으로 적대 세력들의 활동이 창궐하였다. 만족 백성들은 조국의 이익을 자신들의 임무로 삼고 다른 소수민족들과 함께 통일을 유지하고 변방을 강화하기 위한 전쟁에 가담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강희제는 전국민의 지지를 받으면서 "삼번(三藩)"의 반란을 철저하게 진압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만족 중심의 팔기군(八旗軍)을 친히 거느리고 출정하여, 제정러시아와 연합하여 내외몽고를 침공한 갈단( 爾丹) 군대를 대파하였다. 이로부터 옹정제(雍正帝) 건륭제(乾隆帝)에 이르는 70여년간에 걸친 투쟁으로 마침내 �갈(准 爾) 귀족집단의 분열 책동을 분쇄하였다.
일찍이 17세기 중엽에 제정러시아는 중국의 흑룡강 유역을 끊임없이 침입하였다. 1685년 강희제는 만족 도통(都統) 팽춘(彭春)을 파견하여 팔기군과 수군을 거느리고 반격하게 하였으며, 그 후 1689년 중 러 쌍방은 평등의 원칙 위에서 네르친스크(尼布楚, Nerchinsk)조약을 체결하고 양국의 국경을 확정하였다.
18세기에 대영제국의 통치자는 그들의 영원한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네팔의 통치자로 하여금 티베트지역의 봉건 영주와 연합하여 티베트 중부지방을 침공하게 하였다. 건륭제는 만족 대학사(大學士) 복강안(福康安)에게 군대를 거느리고가서 그들을 진압하도록 명하였으며, 이에 복강안은 티베트지역의 백성들과 연합하여 네팔군을 격파하고 티베트지역을 안정시켰다. 19세기 초에 영국 식민주의자는 과거의 실패를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장격이(張格爾)를 시켜 여러 차례 중국 서북의 신강지역을 침공하게 하였다. 도광제(道光帝)는 만족 대학사 장령(張齡)으로 하여금 신강 경내의 만족 한족 군대와 동북 팔기군을 거느리고 달려가 그것을 진압하게 하였다. 이에 장령은 반란군을 대파하고 장격이을 생포함으로써 영국 식민주의자들의 중국 영토에 대한 야욕을 분쇄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반란 세력 토벌을 통하여 중국의 통일을 강화하고 광대한 영토를 공고히 하였다. 이것은 비록 각 민족이 일치단결하여 이룩한 결과이지만 18세기 후반에 만족이 발휘한 역량은 청사에 길이 남을 만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중국은 반식민 반봉건사회로 전락하였다. 청왕조의 통치자들은 부패하고 무능하여 자본주의 열강들은 무인지경에 들어온 것처럼 제멋대로 날뛰었으며, 이러한 참상을 목도한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뼈저리게 느꼈다. 이에 국가의 완전한 독립과 민족의 자유 해방을 쟁취하기 위하여 만족과 다른 소수민족 백성들은 함께 힘들고 어려운 투쟁을 전개하였다. 예를 들면, 제1차아편정중 중에 좌령융복(佐領隆福)은 만주 팔기군을 거느리고 절강 사포(乍浦) 관음산(觀音山) 기슭의 천존묘(天尊廟)를 사수하면서 영국 침략군의 공격을 다섯 차례나 격퇴하고 많은 적군을 살상하였으며, 276명의 만족 방위군도 대부분 전사하였다. 강소(江蘇) 진강(鎭江)을 방어하던 팔기군 1500여명은 10배나 많은 침략군과 성능이 우수한 총 포를 맞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혈전을 불사하여 한치의 땅도 내주지 않았다.
제2차아편전쟁 중에 제정러시아 식민주의자는 청왕조의 통치력이 북방에까지 미치지 않는 틈을 이용하여 100㎢에 달하는 동북 변경 지역을 강제 점령하였다. 이러한 침략 행위는 중국인들의 분개를 불러일으켜 당시 그 지역에 살고있던 만족과 한족 백성들은 몽둥이를 들고 일어나 제정러시아의 칠략과 식민통치에 대하여 장기간 용감하게 투쟁하였다.
1894년 중일갑오전쟁이 발발하여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과 중국을 침략하였다. 일본 침략군이 중국의 요동(遼東) 지역을 점령하여 그 세력을 신속히 확장시켜나가자 그 지역에 살고있던 만족, 한족,조선족 등의 백성들은 함께 들고일어나 민간자위단 의용군을 조직하여 일본군에 반격을 가하였다. 요양(遼陽) 방어전쟁 중에 만족 한족 백성들의 합동작전으로 한 달 동안 일본군의 침공을 네 번이나 물리치고 일본 침략군의 봉천성(奉天城) 진입 계획을 무산시켰다.
1900년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이 일어나 그 세력이 하북 산동과 동북 3성에서 신속히 확산되어 갔다. 각지에 흩어져 살고있던 만족과 한족 백성들은 모두 이 혁명의 대열에 몸을 던졌다. 그 중 북경 의화단의 기세가 가장 드높았는데, 그들은 유명한 서십고(西什庫)교회 전투에서 막강한 역량을 과시하였다. 만족 병사 은경(恩慶)은 총으로 시비를 걸어온 독일 공사 클링더(克林德)를 사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