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소수 민족의 풍습 (1)


⊙ 투자족의 혼인

☞ 호남성 일대에 사는 투자족(土家族)에게는 색든 혼인풍습이 있다.

혼담이 오고가기 사작하면 청년은 결혼할 규수집을 찾아가서 장래의 장인 장모에게 안부인사를 한다.

대문에 들어서면 먼저 한쪽 무릎을 꿇고, "아버님, 어머님 안녕하십니까!"하고 말한다.

규수의 부모는 장래의 사윗감을 일으켜 세우고 그가 짊어지고 온 대나무 바구니를 내려서 안방으로 들여보낸다.

규수는 가슴을 졸이고 있다가 살짝 안방으로 들어가서 바구니를 열어본다.

그리고는 바구니 안에 들어있는 돼지발을 손에 들고 자세히 살펴본다.

만일 돼지발에 아무런 표시가 없을 경우, 청년쪽에서 아직 결혼날짜를 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반면에 발굽 근처에 구멍이 뚫려 있으면 택일을 재촉하는 의미이므로 이때 규수는 서둘러 결혼 준비를 하게 된다.

또한 돼지발에 꼬리가 달려 있으면 혼례는 추수 후에나 가능하다는 표시이다.

반대로 규수 쪽에 사정이 있어서 그해 결혼을 할 수가 없거나 한동안 부모 곁을 떠나기 어려운 사정이 있을 때도

그 자리에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청년이 돌아갈 때 돼지발과 꼬리를 답례품과 함께 바구니에 넣어 보내면 된다.

청년이 집에 돌아가서 풀어보면 곧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청년은 다음해까지 기다려야 한다.


⊙ 투자족의 개수

☞ 호남성 서부에 사는 투자족은 손님을 대접할 때에는 반드시 '開水'를 내놓는다.

만약 이 개수를 한자(이를테면, 중국어 의미로)의 '끓인 맹물'이라고 생각했다간 큰 오산이다.

투자족 사이에 개수는 투자족 특유의 각종 경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먼 곳에서 손님이 오면 주인은 즉시 접시에 김이나는 하포단(荷包蛋; 계란의 껍질을 까서 연꽃 잎에 말은 것)을 내놓는다.

삶을 때는 계란 흰자위가 노른자를 감싸듯이, 또 노른자는 단단하게 익지 않고 좀 흐르는 듯 반숙을 한다.

다 삶고 나서는 설탕을 뿌려내어 손님이 직접 휘저어 들도록 한다.

손님을 접대하는 개수에는 '포미미', '음미희반', '경단', '국수' 등이 있다.

'포미미'는 찹쌀을 삶아 색을 입히고 볕에 쬐어 부풀리게 하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손님이 자리에 앉으면 주인은 '포미미'를 찻잔 속에 넣고 설탕을 뿌린 다음 끓는 물을 붓는다.

'음미희반'은 쌀과 폼비미를 같이 끓인 것이다.

또한 가끔 주인은 '하포단'과 '음미희반'에 '경단'을 서꺼어 만든. 특제 '복합개수'를 만들어 손님 접대에 내 놓기도 하는데 이 복합개수는 향기는 물론 맛도 아주 뛰어나다.

투자족 사람들은 단 음식을 매우 좋아해서 개수와 국수 이외에는 모두 단 음식 뿐이다.

게다가 설탕을 많이 넣으면 넣을 수록 손님을 정중히 모신다는 의미가 된다.

만일 손님이 직접 개수에 설탕을 넣게 되면 주인은 손님이 밝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손님을 한층 더 극진히 모신다.



⊙ 야오족의 매반



☞ 廣西 지방 치완족의 자치구에 사는 야오족(瑤族)에게는 독특한 연해, 결혼 풍습이 있다.

보통 젊은 남녀가 결혼을 약속하게 되면 청년은 규수의 초대에 응해 노래를 잘 하는 친구 한 사람을 데리고 규수의 집을 방문에 2,3일간 머문다. 이것을 괄막용(刮莫龍; 즐거운 나들이라는 의미)'이라고 한다.

청년이 규수의 집에 머무는 동안 규수와 청년은 낮에는 밭에서 가벼운 일을 하며 서로 사랑을 속삭인다. 어두워지면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은 후 일문 일답 형식으로 노래를 불러 상대방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표현한다.

청년이 집으로 돌아가는 날 아침이 되면 규수는 어머니나 여동생에게 부탁해서 닭 두 마리를 가져오게 하여 갖가지 양념을 넣고 삶는다. 그리고 새로 지은 찹쌀밥에 감주를 뿌려 잘 섞어 놓는다.

'埋飯', 죽 삶은 닭 한마리를 통째로 밥속에 넣은 것을 다시 파초 잎으로 얌전하게 싸는데 이것을 일컬어 '매반포'라고 한다. 규수는 이 매반포를 청년에게 점심밥으로 가져가라고 준다.

청년은 절대로 도중에 꾸러미를 풀어보지 않고 그대로 집에 가져가 어머니에게 드린다. 또 한 마리의 닭은 다른 용도로 쓰인다. 규수는 닭을 반으로 갈라 청년을 떠나보내는 잔치에서 각기 그릇에 담아 밥으로 덮는다.

그 중 가장 커다란 가슴부위가 든 그릇을 특별히 청년에게 가져간다. 청년은 그것을 받아 밥 속에서 가슴살을 꺼내어 덕망 높은 연장자에게 술과 함께 권한다. 이것은 두 사람의 결혼식을 맡아 진행해달라는 부탁의 의미이다. 연장자는 일어나서 흔쾌히 접시에 놓인 닭날개 두 쪽을 두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부부로서 영원히 행복하기를 빌어준다.


⊙ 야오족의 교육

☞ 雲南省 哀牢山에 사는 야오족은 지식을 교육하는데 있어서 독특한 방법을 갖고 있다. 사내 아이의 경우, 14세가 되면 부모는 명망 높은 선생을 쵱해서 善惡과 美醜, 부모에 대한 효행, 尊老愛幼, 선행등,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자식에게 깨우쳐 주기를 당부한다.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는 동안 아이는 스승과 같이 기거하고 모든 것을 스승으로 가르침에 따른다. 아이가 스승의 가르침을 줄줄 외울 정도가 되면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되었다고 판단한다. 또 용감하고 대담한 정신을 지닐 수 있도록 키우는데 그 예로, 사내아이는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후 사람들 앞에서 跳椿을 하게 되어있다.

도춘이란 평지에다 높이 5-6미터 정도가 되는 말뚝 네 개를 박고 그 위에 사각 탁자를 올려 놓는다. 아이는 탁자위에서 두 발을 모아 쪼그리고 앉아서는 양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허리를 구부려 꿇어앉는다. 스승이 인간으로서의 마음가짐을 한 수 읊고 나면 공중 뒤집기를 해서 바닥에 깔아놓은 멍석으로 굴러 떨어진다.

도춘을 보러 온 사람들은 반드시 아이를 격려해준다. 그리고 잘 했을 때는 열렬한 박수로 그 아이가 장래에 용감하고 사내다운 사내가 되기를 빌어주며 아이의 부모와 선생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도촌을 할 때 만일 우물쭈물하고 동작이 서툴면 구경꾼도 서슴치 않고 비평을 가한다. 이렇게 되면 연인과의 관계까지도 지장을 초래하는 일이 생긴다고 한다.


⊙ 야오족의 곡가

☞ 호남성 남붕에 위치한 江華 야오족 가치현에는,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哭嫁라는 좀 색다른 결혼 풍습이 남아 있다. 혼인하기 이틀 전에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약혼 에물을 보낸다.

돼지머리, 쌀, 계란 아홉 개, 말린 국수 아홉꾸러미, 동백꽃 아홉송이를 묶은 꽃다발 두 묶음으로, 여기에서 말하는 아홉 九는 오랠 久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영원히 서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의미다.

결혼을 할 규수는 식구들이 보는 가운데 약혼 예물을 풀어본다. 예물을 앞에 놓고 규수는 소리 높여 욺으로서 부모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마음을 전한다. 결혼식 당일이 되면 규수는 예쁘게 몸단장을 하고 점심을 먹는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부모에게 작별을 고하고 조상의 위패에 절을 올리면서 자신의 행복을 빈다.

나팔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면 신부는 지기가 수놓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에 둘러쌓여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가마로 향한다.

계속 울다가 손수건 세 장이 눈물로 흠뻑 젖게되면 시중 드는 동네 아낙의 권유로 가마에 오르게 된다. 야오족 사람들은 손수건 세 장을 눈물로 적셨을 때 비로소 남의 집 며느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야오족의 구혼

☞ 귀주성에 사는 야오족에게는 벽에 구멍을 뚫어 구혼을 하는 특이한 풍습이 있다. 딸을 가진 집의 부모는 探婚房이라는 방을 준비해 두고, 딸리 14, 25세가 되면 이곳에서 기거하도록 한다. 탐혼방의 문 가장자리 벽은 판자로 되어 있으며 이 판자로 된 벽 중앙에 구멍을 뚫어 놓는데, 이 위치가 바로 침대의 머리맡이 된다.

또한 구멍의 크기는 손가락 굵기 정도로 한다. 천년은 사람들이 잠들어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마음에 두고 있는 규수의 집으로 슬그머니 가서 가느다란 대나무 막대리를 이 구멍에 집어놓고 빙글빙글 돌린다.

그 소리에 잡에서 깨어난 규수는 구혼자가 찾아왔다는 것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 구멍을 통해 소근소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눈다. 이때 마음이 통하면 불을 켜고 방문을 열러 젊은이를 방으로 맞아들인다. 그리고 둘이서 마주보고 앉아 스스럼없이 이야기도 하고 함께 노래도 하며 밤을 지샌다.

물론 젊은이가 맘에 들지 않으면 규수는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 젊은이 쪽에서 자연스럽게 물러나기 때문이다. 이 탐혼으로 야오인의 젊은이들은 자유롭게 배우자를 선택하기도 하고 동시에 여러명과 교재하다가 그중 제일 맘에 드는 사람을 골라 결혼하기도 한다. 따라서 딸이 기거하는 방 벽에 난 구멍은 찾아오는 ?년이 많으면 많을수록 커질 수 밖에 없다.


⊙ 야오족의 정애절

☞ 야오족은 노래와 춤솜씨가 각별히 뛰어나며 三月節, 삽앙절(揷殃節; 모내기 행사) 등 축제도 많이 한다. 그 중에 음력 1월 2일에 행해지는 情愛節이라는축제가 있다. 축제가 시작되기 보름 전부터 정년들은 흥이 나서 준비에 들어간다.

산으로 사냥과 약초를 캐러 가고 그것을 시장으로 가져가 팔찌, 머리 장식, 스카프 등 규수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으로 바꿔온다. 규수들은 집에서 지갑, 향주머니, 공 등에 수를 놓아 애인에게 줄 선물을 준비한다.

축제가 있는 날 점심 때가 되면 옷을 차려입고 선물을 가지고 풀밭이나 숲으로 모인다. 남녀가 각기 줄을 나란히 서고 규수들이 먼저 북을 치고 청년들은 그에 따라 합주한다. 그리고 나서 모두가 함께 북장단에 맞추어 손을 잡고 춤을 춘다.

또 춤을 추고 있는 동안에 노래가 시작되는데 대부분이 사랑의 감정을 담은 노래들이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쯤이면 의기투합한 연인들은 각자의 집에 있는 柴房으로 가면서 사랑을 속삭이고 애정을 돈독히 한다. 시방이란 원래 땔감을 쌓아 두는 방으로 축제 전날 미리 깨끗이 청소해 둔다.

정애절 날 밤이 되면 아이들도 축제에 한몫을 한다. 슬며시 시방을 열어보기도 하고 진흙 뭉치를 집어던지기도 하고 고양이 울음 소리를 내기도 하는 등. 시방으로 들어가서 새의 날개짓과 고양이 몸놀림으로 연인들에게 짖궂은 장난을 하는 아이들도 있다.

소수 민족의 풍습 (2)

⊙ 시보족의 활과 화살

☞ 소수민족의 하나인 시보족(錫伯族)은 遼寧省 藩陽市 주면과 新彊 위굴 자치구의 이리강 유역에 살고 있다. 이 민족은 옛부터 기마와 활쏘기에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풍습도 활, 화살과 관계된 것들이 많다.

시보족 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대문에 조그만 활 화살을 걸어놓는다. 그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서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할 수 있도록 그리고 산모가 무사하게 귀신의 저주를 받지 않고 건강해지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아이가 열 번쩨 맞는 생일에 부모는 선물 속에 느릅나무와 소의 힘줄로 만든 활을 넣는데 이것은 빈부에 관계없이 모두가 따르고 있다. 축제의 주요한 행가는 활쏘기 시합으로 수확 후에 여는 축제에도 역시 행해진다.

시합은 개인과 단체 두 종류로 행해지며 패가는 승자에게 소와 양을 증정한다. 승자는 받은 선물, 소와 양의 머리에 자신의 화살을 꽂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그걸 다시 분질러 커다란 솥에 넣고 삶는다. 그리고 나서 모두에게 대접한다. 청년이 구혼을 할때도 활과 화살이 없어서는 안 된다.

마음에 드는 규수가 생기면 청년은 우선 활쏘기 소밋를 보여주며 상대방의 관심을 사려한다. 규수도 마음에 드는 청년을 정하면 같이 활쏘기를 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나타낸다. 또 약혼이 성립되었다는 표시로 활과 화살을 교환하기도 한다.


⊙ 구자족의 포반람

☞ 귀주성 淸水강 주?에 사는 구자족( 家族) 규수들은 모두가 사랑을 전하는 표시인 작은 대나무 바구니를 갖고 있는데 이것을 일컬어 包飯藍이라 한다.

매년, 春節을 전후로 산길이나 마을의 좁은 길에서 이 대나무 바구니를 짊어진 규수의 모습을 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갓 지어낸 찹쌀밥을 바구니에 넣고 밀랍으로 물들인 천으로 씌워 놓는다. 젊은 남져가 서로 좋아하게 되면 규수는 이 포반람을 청년에게 건네준다.

청년은 규수에게 바구니를 받을 때 그걸 되돌려 줄 시간과 장소를 약속한다. 청년은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염식되지 않은 흰 목면천이나 간소한 선물을 바구니에 넣어 규수에게 보낸다. 춘절 이외에 2월 2일, 3월 3일 등의 축제에도 포반함을 이용해서 사랑을 전한다.

다만 이때는 바구니 안에 밥 대신 찹쌀로 빚은 경단이나 다른 음식을 넣는다. 이때 경단의 갯수는 정해져 있지 않지만 한 두 개를 넣었을 때는 한 두 달 동안 변하지 않는 사랑을 나타내는 표시이다. 이 경단은 청년이 점심으로 먹는다. 그러나 만일 이때 청년이 혼자서 먹지 않을 경우에는 다른 친구들까지 불러 모아 같이 먹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규수 쪽에서 남녀 고제가 서툴다던가, 냉정한 사람이라고 생까해 버리기 때문이다.


⊙ 사랑을 노래하는 아찬족의 삼월소

.................................☞ 三月簫는 운남 지방에 사는 아찬족(阿昌族)이 다루는 피리이다.

아찬족 청년들은 어디를 가든지 반드시 피리를 옷깃에 꽂거나 허리춤에 차고 외출하는데 마음에 드는 규수를 만나면 피리로 감미로운 곡을 붙여서 가슴에서 싹튼 사랑을 전한다. 상대방에서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다고 생각되면 청년은 규수를 집까지 바래다주는데 이때 걸어가면서 피리를 불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삼월소란 봄의 퉁소라는 의미로 가락이 부드럽고 경쾌하며 리듬이 자유로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감을 불러 일으키는데다가 구애와 결혼을 하는데도 한 몫을 하기 때문에 아찬족 청년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 미아족의 사파절

☞ 음력 4월 8일은 미아오족(苗族)의 전통적인 축제일인 '社巴節'이다. 사파절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한때 미아오족은 홍수에 휩쓸려 멸종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때 살아남은 복희(伏羲; 중국 고대의 전설속의 왕.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수렵과 목축을 가르쳤으며 문자를 만들어냈다고 한다)는 후세에 자손을 남기기 위해 사촌 누이와 부부로 인연을 맺었는데 이 날이 바로 4월 8일이다.

이렇게 해서 이 날을 미아오족이 새롭게 태어난 날로 삼고 이 후 자자 손손이 오래가도록 이 경사스러운 날을 축복해 왔다. 사파절에 여러가지 행사가 있지만 그 중 규모가 제일 큰 '왜지 잡기'라는 행사가 제일로 꼽힌다.

축제장은 형형색색의 문으로 장식되고 미아족의 민속의상을 입은 영친대(迎親隊;결혼식 때 신랑 측이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 보내는 가마와 악단) 30명이 그 양 옆으로 늘어선다. 주인(덕망있는 연장자)이 양 손에 술병을 들고 문 한가운데 서고 남녀로 구성된 가수 네 사람이 그의 좌우에 따른다. 가수는 신부의 친정의 노인들(사실은 마을 사람들이 지정한 사람들)에게 노래를 청하고 술을 권한다.

손님과 주인이 문을 들어서서 장내를 한 바퀴 돌면 징, 악기, 폭죽이 일제히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한참 지난 후에야 노인들은 돼지를 잡는다. 그리고 주인은 돼지발을 노인들에게 존경의 뜻으로 드린다. 노인들은 정중히 인사를 하고 흔쾌히 받는다. 이 외에도 조상을 기리는 행사로서 여러가지 민속색이 짙은 풍류를 선보인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면 화톳불을 기피고 빔 늦게까지 춤추고 노래를 부르다가 어느 정도 흥이 사그라진 후에야 비로소 집으로 향한다.

미아오족의 대다수는 중국 서부지역에 살고 있다. 달 밝은 밤,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는 저음과 고음을 섞어가며 부르는 노래소리와 거문고 타는 소리가 흘러 들어온다. 이것은 다름 아닌 미아오족의 젊은 남녀가 데이트를 하는 소리인데 서로가 맘에 들면 청년은 규수의 스카프를 갖고 도망가버린다.

이때 규수는 난처해하며 천년을 뒤쫓아간다. 두 사람은 조용한 나무 그늘에 다다르면 멈추어 다정히 앉아 사랑을 속삭이고 결혼을 약속하기에 이르는데 이것을 가리켜 串月亮이라 한다. 결혼을 약속한 두 사람은 '피의 물'을 마시는 의식을 거행한다.

두 사람은 부모와 친구들에게는 비밀로 하기로 하고 시간에 장소를 정하고 손을 잡고 냇가로 향한다. 우선 청년이 양손느오 맑은 물을 뜨면 규수는 머리에 꽂은 은으로 된 바늘을 빼서 청년의 왼손 중지를 살짝 찔러 피를 내서 물에 섞는다.

이 피가 섞인 물을 청년이 다 마셔버린다. 이번에는 규수가 맑은 물을 뜨고 청년이 규수의 오른손가락 중지를 찔러 피를 낸다. 마찬가지로 규수가 그걸 말끔히 마셔버린다. 이 의식을 행하면서 두 사람은 영원히 사랑할 것을 맹세한다.


⊙ 미아오족의 약화산축제

☞ 운남성 文山 일대에 사는 이야오족 마을에서는 매년 봄 꽃의 계절이 되면 躍花山이라는 축제가 열린다. 이날, 규수들은 자기가 집적 수놓은 아름답고 화려안 옷으로 단장을 하고 정교한 은장신구를 몸에 단다. 청년들은 옷매우새를 단정히 하고 花山場으로 간다.

화산장의 한 가운데는 수십 미터나 되는 삼나무로 된 기둥이 세워져있다. 기둥 앞에는 삼나무로 된 기둥이 세워져 있다. 기둥 앞에는 사각의 깃발과 빨간색 천으로 만든 보따리가 걸려있다ㅣ. 보따리 속에는 대나무 피리, 돼지머리, 白酒 며?이 들어있다.

혈기 왕성한 청년들은 나무타기로 서로 힘을 겨룬다. 제일 먼저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 빨간 보따리를 잡는 사람이 승리를 하게 된다. 이때 규수들은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데 느닷없이 기름으로 더럽혀진 밧줄이 규수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온다.

규수들은 곱게 차려입은 옷이 더러워질까봐 달아나지도 못하고 밧줄에 감긴 채 어쩔 수 없이 청년들이 오기를 기다린다. 청년은 마음에 드는 규수에게 꽃으로 엮은 우산을 씌워주고 청년 둘이 짝을 지어 노래경연을 벌인다.

노래경연에서 이긴 청년에게는 규수들이 앞을 다투어 반지를 보낸다. 양쪽 손가락에 전부 반지를 낄 때까지 계속할 수 있는데 만일 자기 분수도 모르고 어려운 문제를 내서 규수들의 미움이라도 사게되면 그 중 현명한 규수가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 여러 사람앞에서 창피를 준다.

약화산 축제에서는 대나무 피리를 불면서 춤을 추기도 하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투우와 경마도 열린다. 이렇게 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람들은 흠씬 즐기고 대나무 피리소리를 뒤로하고는 아쉬움을 남긴 채 뿔뿔히 흩어진다.


⊙ 미아오 족의 復姓과 데릴사위

☞ 중국인의 대부분은 한 글자로 된 姓을 쓰는데 호남성 城步山區에 사는 미아오족은 두 자 이상의 성을 쓰는 경우가 흔하다.

예를 들면 陽劉라는 두 자의 성이 있는가 하면 楊陳周, 蘭楊陳李 등 세, 네자로 된 성도 있는데 이것은 이 지역의 데릴사위를 들이는 풍습과 관계가 있다. 일단 데릴사위가 되면 처가의 성과 輩分(代에 따라 붙여지는 이름 한 자)에 희해 새롭게 이름을 짓도록 되어 있으며 부부 사이에 생긴 자식은 양쪽의 성을 따른다.

예를 들면 모친의 성이 양, 부친의 성이 류라면 아이의 성은 양류가 된다. 란양진이는 4대째 내려오는 이씨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남편과 자식의 대다수는 부인 쪽 성을 따름으로써 3대를 통틀어 같은 성을 갖는 경우도 흔하다.

이 지방의 게릴사위 제도는 수백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데릴사위를 들이는 데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긴 하지만 데릴사위라고 해서 차별받는 일은 없으며 처가쪽 식구의 한 사람으로서 동일한 재산 상속권을 갖게 된다. 지금은 남편이 부인의 성을 따르는 것과 상관없이 자식은 부모 중 어느쪽의 성을 따라도 무방하기 때문에 이 복성제도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소수 민족의 풍습 (3)

⊙ 고로족의 타친

☞ 귀주성 동북부 일대에 사는 고로族에게는 좀 재미난 풍습니 있다. 혼인식 날 새 신랑은 비단으로 어깨를 감싸고 머리에 쇠방울을 단 갈색말에 올라앉아 힘센 네 명의 장정을 따르게 한다.

장정 중에서 두 사람은 어깨에 대나무 빗자루를 짊어지고 나머지 두 사람은 술과 고기를 싸들고 당당하게 신부의 집으로 향한다. 가는 도중에 허리에 붉은 비단을 두른 장정 수십명이 갑자기 나타나 눈 깜짝할 사이에 술과 고리를 빼앗아 달아난다.

네 명의 장정들은 저항도 하지 않고 뒤쫓아가지도 않는다. 새신항은 호를 내기는 커녕 내심 흐뭇해 하는데 왜냐하면 다름 아닌 신부집에서 보낸 장정들이기 때문이다. 신부의 생가에는 술과 고기가 잔뜩 있으니 가져올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해서 부락의 입구에 도착하면 손에 몽둥이를 든 남녀가 함성을 지르며 말을 향해 뛰어와서 몽둥이로 새신항을 두들겨주는데 이것을 打親이라 한다. 이 매 한대로 언쟁을 삼가하고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금실 좋은 부부로 지내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한편 장정 두 사람은 빗자루를 휘두르며 방어에 힘쓰지만 앙갚음은 금물.

이 소동은 새신랑이 신부집으로 들어가면서 비로소 조용해진다. 새신랑은 장인, 장모에게 敬親酒를 올리고 감사의 뜻을 전한다. 그 다음 부모는 신부를 불러 서로 맹세의 잔을 교환하게 하고 친척과 친구들에게 술을 돌린다.

이 행사가 끝나면 새신랑은 말을 몰라 신부를 데리고 자기집으로 떠난다.



⊙ 고로족의 연애와 혼례

☞ 귀주성 광서 치와족 자치구에 사는 고로족 젊은들의 사랑은 마을에 있는 커다란 보리수 나무아래에서 시작된다.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통한다고 생각되면 청년은 손수건에 보리수 잎 한 장을 싸서 규수에게 던진다. 그리고 나서 청년은 규수집으로 가서 들고 온 붉은 종이에 싼 젖가락을 내밀고 구혼을 한다. 부모의 마음에 들게되면 이듬해에는 술을 들고 들어가는데 이때 청년은 규수측의 대환영을 받는다. 그리고 다시 그 다음해 처음 만난 날로부터 만 2년이 되는 길일에 혼례를 하게 되는데 그 고장에서 '천을 던짐'이란 말로 통한다.

이날, 새신랑은 3미터나 되는 감색 목면을 들고 친구들과 함께 신부집으로 간다. 신부집에 도착해서 새신랑은 친구들에게서 건에받은 목면 한쪽을 움켜쥐고 다른 한쪽 끝을 대문 앞에서 건네받아 신부의 허리에 감아준다.

새신랑은 움켜쥐고 있던 천을 잡아당겨 신부를 데리고 간다. 이날 신부는 흰신을 세 번 갈아 신는데 이것은 신부의 마음은 항상 정숙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비아족의 용조제

☞ 운남성 서북부의 鶴慶縣 동부로 이주한 바이족 (白族) 사람들은 용을 민족의 무속 신앙으로 삼아 일년 열두 달, 즉 한달에 한번씩 축제를 벌인다. 그 중에서도 음력 2월 2일에 열리는 龍祖際가 가장 화려하소 성대하다.

해가 뜨면 남자는 이발을 하고 여자는 머리를 감는다. 이것을 洗龍頭라고 하며 이 의식을 행함으로써 무병장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점심때가 가까워지면 각 마을 사람들은 옷을 잘 차려입고 '용조'아래 있는 '용샘' 옆으로 모여 성대한 축제를 시작한다.

이때 각 마을에서 색을 입혀 만든 용이 속속 등장한다. 용춤을 추는 젊은이는 용의 해에 태어난 젊은이들 가운데 선발되며 각기 십이간지의 동물로 분장을 해서 가죽털 옷을 걸치고 머리에는 새의 깃털을 꽂음으로써 고풍스러운 아취를 자아낸다.

그 다음은 쇄라용(鎖懶龍)이다. 쇄라용이란 지난 일 년간 마을에서 게으름뱅이로 낙인찍힌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람들은 쇄라를 둘러싸고는 "너는 어째서 일을 하지 않느냐, 왜 집안일을 돌보지 않느냐." 등 노래 형식으로 질문을 퍼붓는다. 그리고 대나무가지와 오이덩굴로 짠 바퀴에 쇄라를 매달아 놓으려고 한다.

쇄라는 이리저리로 피해다니며 뉘우침과 사죄의 뜻을 노래로 전하면 비로소 사람들은 용서를 해주고 준비해 온 곡물의 종자와 생활용품 등을 쇄라에게 준다. 쇄라는 이 선물을 받으면 흥이 나서 밭농사와 사냥을 의미하는 춤을 추며 사람들의 성원에 감사해 하면서 이제부터는 착실히 일할 것을 다짐한다.



⊙ 티벳족의 합달

☞ 哈達이란 본래 티벳불교 겔파의 의식에 쓰이는 용품이지만 지금은 티벳족 사이에서 고귀한 선물로 사용되고 있다. 면직물과 비단이 있으며 길이는 보통 1미터 정도이지만 3미터가 넘는 것도 있다.

색은 흰색이 주를 이루며 황색, 청색도 있지만 이것은 首長에게 바치는 것으로 보통 사람들에게는 사용하지 않는다. 합달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여러가지 의미를 타나낸다. 신년에는 행복한 생활이 되기를 서로 기원하는 의미로 결혼식에서는 부부의 변치않는 사랑을 기원하는 의미로 쓰인다.

멀리서 온 손님에게는 환영과 경의를 표하는 뜻을, 장례식에서는 죽은 자에 대한 애석함과 유족에게 조의를 표하는 듯으로 쓴다. 합달을 올릴 때는 형식을 중시한다. 먼저 합달을 두번 접어 반득이 펴서 정중히 절을 하면서 두 손으로 손님에게 드린다. 이때 받는 사람도 정중히 절을 하면서 두 손으로 받아든다.

생불과 웃어른에게 합달을 올릴 때는 경례를 하고 두 손으로 합달을 머리위로 들어 올린다. 아랫 사람에게는 합달을 상대의 어깨에 올리던가 두 손으로 건네주면 된다.



⊙ 나시족의 요화회

☞ 운남성 서북부에 사는 나시족(내西族)은 불의 신에 제사를 지내는 要火會라는 행사를 벌인다. 農曆 6월 24일이 되면 남녀 노소가 잘 차려입고 산꼭대기에 모인다.

마을 사람들은 붉은 색의 갖가지 꽃을 산에 오르면서 나뭇가지에 매다는데 이 광경은 마치 산에 불이 휩싸인 것처럼 보인다. 산 꼭대기에 올라가면 백 년된 노송을 골라 붉은 꽃, ?은 비단, 붉은 깃발로 장식을 한다.

이것을 가리켜 火樹라고 한다. 그 다음으로 화수 앞의 아홉군데에 소나무 장작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소나무 가지로 만든 탑을 올려 놓는다. 노을이 지면 마을 사람들은 화수와 소나무 탑에 둘러 앉는다.

하늘에 별이 뜨기 시작하면 일제히 폭죽을 터뜨리고 나팔을 분다. 그걸 신호로 축제 주최자는 횃불을 손에 들고 차례차례로 장작에 불을 붙인다. 먼저 주최자가 노래의 첫 소절을 부르면서 불타오르는 장작 주변을 춤추며 돈다.

마을 사람들도 각기 장작에 불을 붙이고 노래를 부르며 장작더미 주변을 세 번 돌고 환호성을 지르며 들판으로 달려나간다. 장작이 불바다를 이루어 사방으로 흘러들어가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다음으로 모두가 춤추고 노래를 부르면서 각기 자기네 논으로 가서 횃불로 벼이삭을 밝힌다. 불로 해충을 퇘치하고 농작물을 보호함으로써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이다. 그리고 나서 마을을 빠져나와 횃불을 자기집 주변과 정원 한 가운데에 세우고 가족들이 모여 횃불을 둘러싸고 동이 틀때까지 춤추고 노래를 부른다.

소수 민족의 풍습 (4)

⊙ 뚱족의 조상숭배

☞ 귀주성 뚱족이 사는 마을에서는 立夏부터 첫토끼날(卯日)에 걸쳐 대규모의 화려한 행사가 열린다.

아침 일찍 집집마다 가장은 소쿠리를 짊어지고 논으로 나선다.

논의 동쪽 방향에서 잘 익은 옥수수 세 개를 골라 따서 왼손에 들고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 간다.

도중에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어, "이번 작황은 어떻겠는가?" 하는 질문을 받으면, "오곡 풍년이 들 것 같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자기 집에 도착해서도 집에 들어가지 않5고 아내가 밭에서 가지, 오이, 고추 등 신선한 야채를 따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두 사람은 나란히 문지방을 건너 안방으로 들어가 햇 곡식과 신선한 야채를 불단에 올린다.

식구들은 새 옷으로 갈아입고 무릎을 꿇고 앉아 기다린다.

햇곡식과 야채가 불단에 올려지면 연장자가 향과 초에 불을 붙이고 지폐를 태운다음 무릎을 꿇고 염불을 외운다.

"조상님의 음덕으로 금년에 풍년이 들었습니다. 내년에도 아무쪼록 보살펴 주시기를 빕니다."

그런다음 햅쌀로 밥을 지어서 가족 한 사람 앞에 한 그릇씩 그 밖에 반천을 곁들여 미리 준비해 놓은 한 그릇을 식탁의 上座에 올려놓고 조상께 바친다.

가족들은 잠시 묵묵하게 있다가 조상이 먼저 드신 다음에 서열에 따라 나누어 먹는다.

이 풍습은 오래전부터 전해져 왔으며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 뚱족의 두춘우

☞ 호남성 서부의 뚱족이 사는 산골 마을에는 逗春牛라는 풍습이 전해져 오는데 이것이 일종의 마을 축제이다.

매년 입춘이 되면 마을 사람들 모두가 풀밭이나 탈곡장에 모여 일년에 한번 밖에 없는 두춘우로 떠들썩하다.

먼더 '춘우'로 분장한 청년 두 사람, 즉 한 사람이 머리에는 종이로 소머리 모양을 만들어서 쓰고 검은 천으로 된 몸통을 두르고 손에는 종려나무로 만든 꼬리를 들고 등장한다.

그 뒤로 도롱이를 쓰고 왼손에는 채찍을 쥐고 오른 손으로 쟁기를 끄는 청년이 뒤따른다.

타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춘우'는 자연스럽게 밭농사를 하는 동작과 소 특유의 다양한 몸짓을 춤으로 보여준다.

'춘우'의 양 옆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거지 등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분장한 사람들이 소를 조롱하며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무도회장에서는 젊은 남녀가 큰 원을 만들어 리듬에 맞추어 손뼉을 치며 춤추어 흥을 돋군다.

이렇게 마을사람 모두가 아침부터 함께 즐긴다.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 말엽에 미이 이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춘우'로 분장하고 춤을 추는 것은 '農神''으로 여기는 소를 받들어 모셔 풍년을 기리기 위해서이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두춘우'는 점차적으로 뚱족 사람들의 봄을 맞이하는 의례적인 행사로 바뀌었으며 또한 뚱족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사교적인 모임이 되었다.


⊙ 고로족의 연애와 혼례

☞ 귀주성 광서 치와족 자치구에 사는 고로족 젊은들의 사랑은 마을에 있는 커다란 보리수 나무아래에서 시작된다.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통한다고 생각되면 청년은 손수건에 보리수 잎 한 장을 싸서 규수에게 던진다.

그리고 나서 청년은 규수집으로 가서 들고 온 붉은 종이에 싼 젖가락을 내밀고 구혼을 한다.

부모의 마음에 들게되면 이듬해에는 술을 들고 들어가는데 이때 청년은 규수측의 대환영을 받는다.

그리고 다시 그 다음해 처음 만난 날로부터 만 2년이 되는 길일에 혼례를 하게 되는데 그 고장에서 '천을 던짐'이란 말로 통한다.

이날, 새신랑은 3미터나 되는 감색 목면을 들고 친구들과 함께 신부집으로 간다.

신부집에 도착해서 새신랑은 친구들에게서 건에받은 목면 한쪽을 움켜쥐고 다른 한쪽 끝을 대문 앞에서 건네받아 신부의 허리에 감아준다.

새신랑은 움켜쥐고 있던 천을 잡아당겨 신부를 데리고 간다.

이날 신부는 흰신을 세 번 갈아 신는데 이것은 신부의 마음은 항상 정숙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북풍표국에서>

중국 소수민족 종교문화의 몇 가지 표현형태에 대하여


-겸하여 종교문화형태학을 논함

施正一(중국 중앙민족대학 교수)

  사물은 시점이 있고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 중ㄱ구소수민족종교문화의 생장점은 중국으로서 중화민족의 전일제적문화에서 하나의 중요한 조성부분이다. 국내외학자들이 중국소수민족종교문화에 대하여 중시하고 연구한다는 것은 그 의의와 중요성을 말해줄 뿐 아니라 과학연구에서의 공성과 인동을 말해준다. 본 논문은 삼개 부분으로 서술하였는데 약 12,000자가 된다. 내용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1. 민족과 종교: 중국소수민족의 종교신앙정황
  중국은 다민족국가이며 다종교국가이기도 하다. 중국에는 역사적으로 수십종의 민족이 산생하였고 여러 가지 종교들이 나타났다. 지금 중국은 국가법률적으로 인정받는 민족이 56개인데 한족을 제외한 소수민족인구는 9,000여만명으로서 전국 총인구수의 8%를 넘는다. 소수민족 대부분은 서부의 각성, 구에 분포되어 있는데 실제상에서는 전국 각 현, 시에 정도가 다르게 잡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大雜居. 小雜居>를 중국국정에서의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라 한다. 종교신앙정황도 대체적으로 비슷하다. 여러 소수민족 가운데는 단일신앙현상도 있고 서로 뒤엉킨 현상도 있다.

첫째, 중국의 여러 소수민족이 신앙하는 종교로는 불교, 티베트(라마)불교, 샤만교, 본교 등이 있는가 하면 자연숭배, 토템숭배, 조상숭배 등 다양한 원시종교가 있다.

둘째, 서로 다른 민족과 종교 사이에는 상호교차관계가 존재한다. 예를 들면 몇 개 민족이 하나의 같은 종교를 신앙하기도 하고 한 민족 내에도 여러 가지 종교를 신앙하기도 한다. 또한 주요한 종교를 신앙하는 민족도 있고 비주요 종교를 신앙하는 민족도 있다. 종교를 믿는 민족도 믿지 않는 민족도 있으며 영혼불멸을 믿는 민족도 있고 무신론 민족도 있다. 민족성과 종교성은 서로 연관되면서도 구별되는 동일시 할 수도 분리할 수도 없다.

셋째, 56개 소수민족 가운데서 티베트 불교(라마교)를 믿는 민족으로는 주요하게 장족(티베트족), 몽골족, 루족, 창족, 위구족, 먼바족, 러바족 등 심여개 민족이고, 소승불교를 믿는 민족으로는 따이족, 라후족, 와족, 부랑족, 아창족 등 50여개 민족이며 이슬람교를 믿는 민족으로는 회족, 위구르족, 동샹족, 쌀라족, 보안족, 카자흐족, 따지크족, 키르키스족, 우즈베크족, 타타르족 등 십여개 민족이다. 소수민족 가운데는 도교를 신앙하는 사람도 일부 있고, 천주교, 기독교를 신앙하는 사람도 있다. 샤만교를 믿는 민족으로는 주요하게 만족, 오른츈족, 어원커족 등 북방의 일부 소수민족이다. 거의 모든 민족에게는 자연숭배, 신령숭배, 조상숭배 등 원시종교 신앙을 보편적으로 보존하고 있다.


2. 종교와 문화 : 소수민족 가운데서의 종교문화의 분류
  모든 문제에 대한 연구는 과학적인 분류가 필요하다. <<종교학통론>>은 종교의 분류에 대하여 역사적인 논술을 하였다. 분류법도 다종다양한 지리학적인 종교분류, 인류학, 언어학적 종교분류, 진화론 학파적인 종교분류 등이 그러하다. 가장 보편적인 분류법은 “자연종교”와 “인위(人爲)종교”로 나누는 것이다. 다종교(多宗敎)와 일신교(一神敎), 씨족(氏族)종교와 부락(部落)종교, 민족종교, 나라종교와 세계종교, 원시종교, 고대종교와 현대종교 등으로 나누는 것이다. 각도가 다르고 표준이 다르고 방법이 다르고 목적이 다름에 따라 그 분류도 물론 서로 다르게 된다.
  종교와 문화는 서로 다른 영역이지만 종교문화는 하나의 특정된 영역이다. 만약 종교를 객관적인 존재의 실체라고 한다면 그 문화는 곧 이 객체의 하나의 표현형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의 분류법은 종교문화의 분류법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현실에서의 모든 문화형태는 모두 하나의 발생, 발전, 변화의 역사적 과정이 있다. 중국 소수민족 종교문화는 각종 부동한 형태마다 자체의 역사를 가지고 있을뿐 아니라 그 부동한 형태를 논리적으로 배열해 놓으면 인류사회 발전에서 종교문화가 저급적인데로부터 고급적인데로 진화한 전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1) 문화형태에서 표현된 소수민족의 여러 가지 원시종교신앙은 고고학에서 발굴한 원시인들의 동굴유적 외에 주요하게는 각지에서 발굴한 원시 암화(岩畵)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암화는 거의 전국각지에서 발굴된다. 예를 들면 운남 장원의 무당과 소의 암화, 신쟝 하바허현의 동굴 암화, 광서 화산암벽화(花山岩壁畵), 서장 장복지구의 암화, 내몽골 동구현의 무당과 인면상의 암화(人面像岩壁畵)등이 그러하다.
  인류의 문화는 하나의 누적과 축적의 과정이다. 원시문화와 원시신앙이 하나로 결합되는 것- 이것은 인류진화에서 하나의 필연적인 과정이다. 과학적인 분석을 거쳐 과학적인 인식에 도달해야 한다.

2) 티베트 불교(라마교)
  전하는데 의하면 漢나라때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파되어 들어와 唐나라때 전에 없는 발전을 가져왔다. 7세기에 밀종과 한족지구 대승불교와 장족지구 본교가 결합되어 점차 오늘의 라마교를 형성하였다.
  문화형태의 하나로서 티베트 불교는 그 표현형식이 가장 온전하고 체계적이라 할 수 있다. <<大藏經>>은 장전 불교에서 정신문화의 으뜸가는 대표이며, 뿌다라궁은 그 웅장하고 아름다움으로 티베트 불교의 물질문화의 존재형식으로 되고 있다.
  종교문화형태는 특수한 문화표현형식으로서 종교의 의식내용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필연적으로 종교의식내용을 가져왔다. 티베트 불교는 장족의 노예제 사회단계에 형성되어 농노제 사회단계에 큰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라마교 문화에도 필연적으로 그 역사시대 계급의 낙인이 찍히게 된다. 우리는 응당 양자의 연관성과 차이점을 잘 가려 보아야 한다.

3) 타이족 불교(또는 소승불교)
  타이족 불교는 고대인도 부파 불교(古印度剖派佛敎)중의 상좌부(上座部)가 중국에 전파되어 들어온 그 일파의 불교를 가리킨다. 타이족 불교는 여러 세기를 거쳐 운남의 다이족을 비롯하여 기타 일부 소수민족들 속에 비교적 광범위하게 전파되어 발전되었다. 다이족 불교는 종교문화형태의 일종으로서 자체의 뚜렷한 특징을 이루고 있다. 에를 들면 물질문화형태 면에서 탑을 위주로 하여 절과 탑이 잘 조화되는 가운데 운탑들이 우뚝우뚝 솟아 문화적 특색을 나타내고 있으며 민족풍격도 아주 짙다. 또한 퍼수아절, 공작무(孔雀舞), 샹죠무(象脚舞), 또수툰 이야기 그림 등은 모두 민족문화의 특수표현형태에 반영해 준다. 여기의 불교문화는 과거 수백년의 영주제도와 투스(土司)통치하에서 형성된 것이기에 자연히 그 시대의 낙인이 찍히게 된다.

4) 이슬람 문화는 중국 소수민족 문화의 다른 하나의 보물고이다. 전하는데 의하면 이슬람교의 발원지는 아랍반도이며 기원 7세기 중엽에 중국에 전파되어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슬람교는 우선 중국 민족성을 띠고 있는바 오랜 발전과정에 민족의 형성발전과 하나로 결합되어 꽤 오래전부터 중국의 민족종교문화로 되었다. 종교문화 형태의 일종으로서 이슬람교는 민족적 특색을 강하게 띠고 있다. 또한 이슬람교는 “대문화”적인 속성도 띠고 있는바 한족의 유가 문화적 성분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돌궐어 문화중의 샤만교를 내용으로 하는 일부 민족습관 문화성분도 받아들였다.
  이슬람교는 풍부하고 다채롭고, 학문이 넓고 깊어 철학, 윤리학, 교육학, 법학으로부터 천문학, 지리학, 문학예술에 이르기까지 중국 이슬람교 종교문화의 큰 흐름을 이루었다. 이슬람교의 시대적 특성은 교파의식의 낙인이 아주 뚜렷하다.
  이외에도 천주교, 기독교, 중국 고유의 도교 등 일부 종교는 소수민족 가운데도 믿는 사람이 있지만 그 수가 적고 예배당(堂点)등이 많지 않기에 민족적 특색을 띤 하나의 종교문화체계를 이루지 못하였다. 중국에서 사람들은 흔히 천주교, 기독교를 외국에서 들어온 서양교(洋敎)로 보고 도교는 한족의 문화권속에 넣는다.


3. 종교문화와 문화형태-종교문화 형태학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사람들은 종교를 의식형태의 하나로 여겨 연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색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연구로부터 종교학을 비롯하여 종교철학, 종교심리학, 종교윤리학등 기타 학파들이 나오고 있다. 종교는 문화형태의 일종으로 연구되고 있으며 “종교문화”란 개념도 사람들에 의해 자주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종교문화학”은 아직 잘 언급되지 않고 있으며 “종교문화형태학”은 아예 제기도 되지 않고 있다. 본인은 여기에서 자신의 몇가지 미숙한 견해를 내놓음으로써 여러분의 고귀한 의견을 듣고자 한다.

1) 이 문제에 대한 연구의의
  내가 생각하건대 철학적인 각도에서 종교를 연구하고 그 본질과 기능, 역사의 현상태 및 사회적 가치를 분석하는데 대하여 사람들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문화학의 각도에서 종교를 연구하고 종교의 여러 가지 분화표현 형태, 기능, 특성 및 역사적 발전 변화과정에 대하여 이러한 연구는 사람들을 도와 중국 소수민족 종교문화의 각종 형태의 발생, 발전, 변화, 교체의 자연 역사과정을 알게하고 종교기능과 사회기능을 발견하게 하여 원시 종교문화 형태의 특성과 본질을 이해하게 하며 각종 “인위(人爲)종교”, 즉 몇 개의 큰 종교의 각종 문화현대형태 및 방사기능적 의의 등을 이해하게 할 수 있다.

2) 종교문화 형태학의 연구대상
  종교문화 형태학에 대하여 가장 간단한 정의를 내린다면 각종 부동한 문화표현 형태를 그 연구 대상으로 하는 특수성이 아주 강한 문화 현상학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종교문화와 민족문화는 하나로 결합되어 있기에 “민족종교 문화형태학”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란 무엇인가, 문화란 무엇인가, 민족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고금중의 여러 가지 부동한 견해도 있고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정의도 내렸엇다. 그러나 “일치되는 의견은 취하고 다른 의견은 잠시 보류하는” 방법을 취한다면 공통된 의식, 즉 가장 일반적인 의의에서의 공통에 도달할 수 있다. “형태”란 개념은 중국 사전에 여러 가지 부동한 해석이 있는데 그것을 문화와 연관시키기 때문에 그 뜻은 더욱 정확한 정의가 있어야 한다. 내가 여기서 이해한 “형태(形態와 神態)는 사물이 일정한 구조와 기능을 가지고 있는 형(태)와 신-神態)이 통일된 완전한 표상을 말한다. 그러므로 종교문화 형태학은 종교문화 형신(形神)통일의 완전한 표상을 연구함을 의미한다. 종교문화형태학은 세속문화 형태와는 달리 신학의 외피를 쓴 문화형상학이다.

3) 종교문화 형태학의 연구방법
  종교문화 형태학은 많은 학파들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종합성이 강한 학파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그 연구방법도 다양하다. 예를 들면 현지조사, 감별고증, 기록서술, 비교분석, 설명논증 등.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연구자의 지도사상 방법문제, � 과학적인 이론과 방법문제이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문제를 사고하고 분석하고 인식하 fEo 반드시 객관성, 전면성, 역사성, 체계성, 충차성이 있어야 한다. 한 마디로 과학성이 있어야 한다.

4) 의의있는 약간의 설명
  종교문화 형태학을 연구함에 있어서는 종교이론과 종교정책을 떠날 수 없으며 민족이론도 민족정책도 떠날 수 없다는 점이다. 더욱이는 “종교신앙자유”와 “민족 평등단결” 이 두 가지를 떠날 수 없다. 여기에서 이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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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처럼 망할 수도"... 극심한 '해체 공포증'

 

[특별기획-중화패권주의 ④] 소수민족 문제에 민감한 이유는?   김태경(gauzari) 기자   

편집자 주

중국은 고구려사 강탈을 목적으로 한 '동북공정' 이외에도 전국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의 '공정(프로젝트)'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역사빼앗기를 넘어서 최근 중국의 패권주의적 경향과도 무관치 않다.

<오마이뉴스>는 중국이 왜 이같은 작업을 벌이고 있는지, 또 그들이 노리는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지, 그리고 이에 대해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등을 다각적으로 분석하는 기획기사를 10회에 걸쳐 내보낸다. <오마이뉴스>는 이를 위해 지난 9월 3일부터 18일까지 2주일간 중국현지를 답사했다. 이 기사는 그 네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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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중화패권주의 ①] '중화문명 탐원공정' 현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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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00만명 이상의 소수민족(2000년)

   민족

 인구(만명)

               주요 거주 지역
장족(壯族) 1617.9 광시, 윈난, 광둥
만주족 1068.2 랴오닝,지린, 헤이룽장, 베이징 등
회족(回族) 981.7 닝샤,깐수,신쟝,칭하이,윈난 등
묘족(苗族) 894.0 구이저우,후난, 윈난, 광시 등
위구르족 839.9 신쟝
토가족(土家族) 802.8 후난, 후베이, 충칭, 구이저우
이족(彛族) 776.2 윈난, 쓰촨, 구이저우
몽골족 581.4 네이멍구,랴오닝,지린, 헤이룽장 등
티벳족 541.6 티벳,쓰촨, 칭하이,깐수,윈난
동족(人+同족) 296.0 구이저우, 후난,광시
요족(瑤族) 263.7 광시,후난,윈난,광둥
조선족 192.4 지린,헤이룽장,랴오닝
백족(白族) 185.8 윈난,구이저우,후난
하니족 144.0 윈난
하사크족 125.0 신쟝
려족(黎足) 124.8 하이난
태족(人+泰族) 115.9 윈난

ⓒ 김태경
중국은 소수민족 문제에 유독 민감하다. 일부에서는 한족(漢族) 외에 55개 소수민족이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소수민족이 많기로는 러시아가 더 하다. 1707만5200㎢의 영토에 1억4378만명의 인구를 가진 러시아의 소수민족은 공식적으로 131개다. 극소수 민족까지 포함하면 175개 정도다. 러시아인이 전체 인구의 82%를 차지한다.

면적 32만5360㎢, 인구 8269만명으로 중국과 비교할 수 없는 베트남도 54개 소수민족이 있다. 베트남족이 전 인구의 87%를 차지한다. 인구 2억9303만명인 미국은 거의 모든 인종과 민족이 산다. 전체 인구의 83.4%가 백인이고 흑인은 12.4%, 아·태계 3.3%, 아메리칸 인디언 0.8% 정도다.

지난 2000년 11월 실시된 제5차 인구조사에 의하면 중국의 총 인구는 12억6583만명이다. 홍콩특별행정구의 678만명, 마카오 특별행정구의 44만명은 뺀 숫자다. 이 가운데 소수민족은 1억643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8.41%, 한족은 11억5940만명으로 91.59%였다. 소수민족 비율이 20%에 육박하는 나라들에 비하면 중국은 오히려 양호하다.

9600만명의 당원을 가진 중국 공산당이 독재를 하고있기 때문에 소수민족에 대한 통제력도 대단히 강하다. 그러나 중국은 소수민족 문제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소수민족 분리독립하면 중국 전체가 분열"

"중국이 소수민족 문제를 민감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칫하면 중화인민공화국이 해체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중국 지도부나 학자들 가운데는 '옛 소련이 망한 것은 소수민족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한 중국 학자의 분석이다.

그는 "중국은 지금 지역간 소득격차가 극심하다. 광둥·저장성 등 동부연안의 잘사는 성들은 '왜 우리한테 세금 뜯어가 못사는 지역에 퍼붓느냐'고 불만이 크다"며 "소수민족이 독립하면 이들 지역도 떨어져나갈 것"이라고 지적했다.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소 김우준 교수는 "옛 소련의 경우 연방을 구성한 소수민족 공화국에서 러시아인들이 다수를 점하지 못했고 이것이 결국 분리 독립의 기폭제가 됐다"며 "중국 정부는 이를 보고 비록 한족이 소수민족 자치지역에서도 다수를 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의 총 국토면적은 959만6960㎢로 27개성(5개 자치구 포함), 4개 직할시로 이뤄져있다. 한반도 면적의 43.45배, 남한 면적의 96.66배다. 그러나 전체 인구의 8% 선에 불과한 소수민족의 집중 거주지역은 611만7300㎢로 전 국토의 63.72%나 된다. 중국에는 현재 소수민족 행정구로는 5개 자치구, 30개 자치주, 자치현(기(旗)포함) 120개, 1256개의 민족자치향이 있다.

소수민족이 분리하면 '강대국 중국'이라는 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소수민족이 각 성 인구의 10%를 넘는 곳은 모두 11곳이다. 네이멍구 자치구가 총 인구 2376만명 가운데 20.76%인 493만명이 소수민족인 것을 비롯해 랴오닝성(4238만명의 16.02%), 후난성(6440만명의 10.21%), 광시장족자치구(4489만명의 17.29%), 구이저우성(3525만명의 37.85%), 윈난성(4288만명의 33.41%), 티벳(262만명의 94.07%), 칭하이성(518만명의 45.51%), 닝샤회족자치구(562만명의 34.53%), 신쟝위구르 자치구(1925만명의 59.39%) 등이다. 후난성과 구이저우 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국경지역이다.

중국의 내륙 국경선은 2만2117㎞. 국경을 직접 맞대고 있는 나라는 1416 km를 접하고 있는 북한을 비롯해 러시아(북동쪽 3605 km, 서북쪽 40 km), 베트남, 몽골 등 14개국이다. 김우준 교수는 "중국 전체 국경선 가운데 1만9000㎞정도는 소수민족 집중거주지역"이라며 "국경선에 거주하고 있는 2200여만 명 가운데 반수 이상이 소수민족"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은 1949년 건국 이후 1959년과 62년 인도와 국경분쟁을 빚은 것을 비롯해 69년 옛 소련과 영토문제를 둘러싸고 무력충돌을 벌였다. 79년에는 베트남과 전쟁을 벌였고, 난사군도를 둘러싸고 여전히 분쟁 중이다. 만약 소수민족들이 다른 나라로 기울면 중국 국경안정은 그대로 무너진다.

또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은 석유, 가스, 석탄 등 지하자원의 보고다. 중국 국가통계국의 집계에 의하면, 소수민족 지역은 중국 전체 초원면적의 75%, 삼림면적의 42.2%, 삼림자원의 51.8%, 수력자원의 66%가 집중되어있다.

▲ 청나라가 중원을 점령하기 전에 랴오닝성 선양에 만들었던 궁전. 불과 300만명의 만주족이 인구 1억5000만명의 한족을 260여년 통치했다. 중국 역사의 절반정도는 소수민족이 다수 한족을 지배한 역사였다.
ⓒ 오마이뉴스 김태경

"중국은 수천년전부터 통일적 다민족 국가"

중국은 자신들의 소수민족 정책을 자랑한다.

헌법에 "중화인민공화국안의 각 민족은 모두 평등하다. 국가는 소수민족의 합법적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며, 각 민족의 평등, 단결, 상화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킨다. 그리고 그 어떤 민족에 대한 멸시와 압박도 금지한다"고 규정하고있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래 중국은 공고한 통일적 다민족 국가였다"며 "분열한 경우가 있었지만 이는 잠시였고 통일이 중국 역사발전의 주류였다"고 사상학습도 시켰다.

지난 2000년 중국 정부가 내놓은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과 그 실천>이라는 제목의 백서는 "지난 1952년 5억4000만 위안에 불과했던 소수민족지역의 공업생산액이 1998년에는 5313억 위안으로 약 100배가 성장하는 등 정치, 경제, 문화 각 방면에서 눈부신 발전을 했다"고 자찬했다.

이 백서는 "이전에 소수민족들은 봉건농노제 또는 노예제 사회의 속박에 시달렸다"며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후 소수민족들은 모두 평등한 지위에서 국가와 각 지방의 일에 참여함으로써 새 사회의 주인이 됐다"고 강조했다.

중국은 소수민족에게 자치지역을 허용하고, 한족과는 달리 두 자녀 출산도 허용했다.

그러나 현실은 엄혹하다. 티벳 망명정부는 인도 다름살라에서 독립운동을 수십 년째 하고있다. 신쟝위구르 자치구의 경우 '동 투르키스탄'으로 독립을 추구하는 운동이 격렬하다. 이들은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및 카자흐스탄 남부지역을 포함하는 서투르키스탄과의 연대도 염두에 두고있다.

취재 중 만난 여러 명의 중국인들은 "보도통제로 언론에 소개되지 않을 뿐 신쟝 지역에서 관공서 등을 공격하는 일이 아주 많다는 것은 누구가 아는 사실"이라며 "많은 혜택을 제공하지만 공무원들이 무서워서 부임하지 않으려한다"이라고 말했다. "신쟝 지역에서 군 복무를 하던 친구가 위구르 족들의 시위를 진압하다 거의 죽을 뻔했다"는 경험담을 전하는 사람도 있었다.

위구르인들은 동 투르키스탄 망명정부, UNRF(연합민족혁명전선), 동 투르키스탄 이슬람 당의 조직도 만들었다. 미국에는 '위구르 어메리칸 협회'(www.uyghuramerican.org)라는 조직도 활동하고있다.

몽골족 통일운동도 거세

몽골족들은 네이멍구 자치구, 몽골공화국, 현재 러시아 지역인 부리야트 공화국을 합쳐 몽골족의 통일국가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강하다.

몽골사 전문가인 박원길 박사는 "네이멍구 자치구의 몽골족들은 한족들 앞에서는 절대 민족통일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며 "그러나 사석에서는 중국으로부터 분리독립과 다른 지역 몽골족과의 통합을 얘기한다"고 말했다.

중국인들이 조선족이라고 부르는 재중동포들도 마찬가지다. 조선족들의 집중거주지역은 과거 고구려의 영토이자 간도 땅이다. 1909년 간도협약은 무효인 만큼 언제라도 한중 사이에 영유권 분쟁이 벌어질 수 있다. 중국 정부는 간도 영유권 분쟁이 본격화되면 재중동포들이 우리 민족 편에 붙을 것으로 생각하고있다.

따라서 지난해부터 조선족들에게 '삼관(三觀)교육'을 시켰다. 삼관이란 조국관·민족관·역사관을 말한다. '조선족은 중국민족이다, 조선족 역사는 중국역사의 일부분이다'라는 내용을 주입하는 것이다. 이런 교육을 받은 소수민족은 재중동포들이 유일했다.

대만 독립문제도 걸려있다. 대만 독립세력들은 "1683년 청나라가 정성공 세력을 진압할 때까지 중국 대륙의 그 어느 정권도 대만을 통치한 적이 없다"며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정권이고, 대만을 점령할 당시 중국은 탄생하기도 전이었다. 따라서 대만은 중국의 영토일 수 없다"고 말하고있다.

중국은 사방팔방으로 언제든지 분리독립을 추구할 세력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셈이다.

▲ 지난 9월8일 베이징에 있는 티벳 불교 사원인 용허궁(雍和宮)에서 중국인들이 예불을 올리고있다.
ⓒ 오마이뉴스 김태경
연방제 약속 중국 공산당이 뒤집어

중국의 다양한 소수민족 정책에도 오늘날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여러가지 이유 때문이다. 일단 중국 대륙의 소수민족들은 스스로 현재 영토안에 들어온 게 아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망하면서 그냥 남겨진 것에 불과하다. 박원길 박사는 "소수민족들은 중국의 영토 안에 갇혀있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중국 공산당이 1931년 중화소비에트 전국 대표대회에서 만든 '중화소비에트공화국헌법대강'에서는 "몽골족, 회족, 장족, 묘족, 려(黎)족, 고려인 등 중국 전역에 거주하는 모든 민족은 중국소비에트연방에 가입하든 이탈하든 또는 자기의 자치구역을 건립하든 완전한 자결권을 갖고 있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1947년부터 중국 공산당은 소수민족의 이탈권과 민족자결권은 전혀 거론하지 않고 자치구와 자치만을 언급했다. 1954년 헌법에서는 "중국은 단일한 다민족 국가로 민족자치구는 양도할 수 없는 중국의 영토"라고 규정했다. 입장이 바뀐 것이다.

소수민족 자치지역의 행정 책임자는 그 지역 소수민족이지만 인사·재정 등 실권은 한족이 쥔다. 연변조선족 자치주만 해도 행정책임자인 주장(州長)은 조선족이지만 실권은 한족 출신 공산당 서기가 쥐고있다. 한족들은 인민해방군이나 공안 등의 무장기관을 장악하고 있다.

따라서 형식은 소수민족의 자치이지만 내용은 한족이 자치구의 행정조직을 이용해 소수민족을 사실상 직접통치하는 것이다. 사실상 미국의 '인디언 보호구역'수준이 된 것이다.

끊임없는 한족 이주 정책

중국 정부는 소수민족지역 개발을 명목으로 한족들을 꾸준히 유입시켰다. 소수민족 자치지역에서도 그들의 인구비율을 계속 낮추기위해서였다. 서부 지역 소수민족들은 유목민이 많았다. 그러나 이주한 한족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초원을 갈아엎었고 소수민족들의 생활 근거지는 갈수록 축소됐다.

지난 2000년 인구센서스를 보면 신쟝위구르 자치구 총 인구 1925만명 가운데 위구르족의 인구는 1143만명 수준으로 전체의 59.39%였다. 1949년 당시 전체 인구의 76%가 위구르족이었다. 네이멍구 자치구의 경우 총 인구 가운데 한족 인구가 1882만3900명으로 79.24%다. 몽골족은 402만9200명으로 16.96%에 불과하다. 1949년 이전에는 몽골족 인구가 70%였다.

광시장족자치구는 4489만3700명 가운데 한족이 2768만2700명으로 점유율이 61.66%에 이른다. 소수민족들이 많기로 유명했던 윈난성도 전체 인구 4235만9000명 가운데 한족이 2820만6000명으로 66.59%나 된다. 닝샤회족자치구는 전체 인구 562만명 가운데 소수민족 인구는 194만명에 불과하다.

티벳만이 전체 인구 261만6300명 가운데 티벳인이 241만1100명으로 92.2%를 점하고 있으며 한족은 5.9%다.

연변조선족자치주만 해도 1952년 9월3일 성립당시 재중동포의 인구는 전체의 74%였다. 그러나 57년 재중동포 숫자가 2%에 불과한 돈화를 자치주에 포함시켰다. 한족 40만명도 이주시켰다. 현재 전체 인구 220만명 가운데 재중동포 비율은 39.7%인 85만4000명에 불과하다. 연변의 최대 민족은 57.4%를 차지하는 한족이다.

연길에서 만난 한 재중동포는 "소수민족 숫자가 전체의 25% 미만이면 자치구가 철폐된다는 소문도 있다"며 "잘못하면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없어질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 사진 앞쪽의 섬이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나섰다가 군대를 돌렸던 위화도다. 북한 신의주 건너편인 중국 단둥에서 바라 본 모습으로 손으로 잡을 듯 가깝다.
ⓒ 오마이뉴스 김태경

"자치구 설치 때 영역 축소"

신쟝위구르 자치구의 경우 1949년 중국군이 들어왔을 때 현지인들은 신쟝의 명칭을 동투르키스탄 또는 위구르스탄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신쟝(新疆)이라는 이름 자체가 '새로운 영토'라는 뜻이다. 지난 1755년 청나라 건륭제가 점령하면서 얻은 땅으로 제국주의적 냄새가 짙다. 그러나 이런 요구는 거부당했다.

티벳인들은 현재 시짱자치구는 원래 영토의 절반도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티벳의 영역은 시짱자치구를 포함해 깐수성 남부, 칭하이성 서부, 신쟝위구르자치구의 남부 일부, 쓰촨성의 서부, 윈난성 서북부까지를 포함해 전 중국의 4분1인 250만㎢가 되는데 중국이 1965년 자치구를 설치하면서 잘라냈다는 것이다. 위구르인들도 자신의 원래 영역은 깐수성과 칭하이성까지 걸쳐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몽골족들은 현재 네이멍구 자치구가 원래 자신들의 영역 가운데 4분1을 잘라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소수민족들에게 자신들의 언어 및 문화를 배우는 것은 허용한다. 그러나 역사와 지리 학습은 금지한다. 재중동포들의 경우 1957년 민족정풍운동 이후 조선 역사와 지리에 대한 학습이 금지됐다. 연변에서는 8월15일이 광복절이 아니다. 엉뚱하게 '노인절'이다. 조선족들이 모여 광복절을 축하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자 편법으로 노인절을 만든 것이다.

한 30대 재중동포는 "따라서 젊은 조선족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이름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역사시간에는 홍범도 장군의 활동 등 독립운동부터만 가르친다"고 밝혔다.

중국 정부는 소수 민족의 언어로 된 지명도 계속 중국어로 바꿔왔다. 홍산문화로 유명한 네이멍구의 츠펑(赤峰)의 원래 명칭은 몽골어인 소오달맹(昭烏達盟)이었다. 그러나 마치 원래부터 한족들의 땅인 것처럼 '츠펑'으로 바꿨다. 네이멍구 자치구의 철리목맹(哲里木盟)은 90년대 말 통랴오시(通遼市)로 개명됐다.

신쟝위구르 자치지역에서도 쿠물(kumul)을 하미(哈密)로, 카쉬가르를 카섬(喀什)으로, 굴자(gulja)또는 이리(ili)를 이닝(伊寧)으로 바꿨다. 고구려의 백암성을 연주성으로, 오골성을 봉황성으로 바꿔 원래 고구려 산성이었음을 전혀 알 수 없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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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자료출처:OhmyNew s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214725

영혼의 사랑

http://blog.daum.net/smmission/2634850

 

 

   

  -중국 소수민족 민속공연(동영상)-

 

TITLE AREA VOD
중국소수민족 이(Yi)족 공연 아시아(남중국)
중국소수민족 와(Wa)족 공연 아시아(남중국)
중국소수민족 위구르족 공연 아시아(신쟝 위구르)
중국소수민족 쟝(티벳)족 공연 아시아(티벳)
중국소수민족 먀오(Miao)족 악기연주 아시아(남중국)
중국소수민족 리(Li)족 공연 아시아(남중국)
중국소수민족 타이족 공연 아시아(남중국)

 

자료출처:http://www.e-musictour.com/gallery/FestivalList.html?start=20&mode=&field=&s_que=&code=emt_gallery&flag=fe

       

미전도 종족 단기선교여행에 있어서의 전략적 사고

이우윤 (CUM 중국선교연구소장, 선린대학 교수)
 
 
- 이 글은 중국선교의 전략적인 면을 가상적인 인물인 김 요한 선교사를 투입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Storytelling 방식의 글이다. 김 요한 선교사가 단기선교여행을 인도하며 그의 사고 속에 어떤 전략적인 면을 고려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것을 위해 각 다른 시간대에 있었던 몇 가지 상황을 연속된 사건으로 처리한 점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이 글에서의 단기선교여행팀은 한어 가능자와 불능자가 1:2 혹은 1:3 정도의 비율로 구성이 되었으며, 대학과 도시와 농촌에서의 직접적인 전도와 핵심선교정보를 현지조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성이 되었다.
 
 
1. 광서장족자치구의 일반적 개요
 
중국의 미전도 종족선교를 위한 김 요한 선교사의 이번 단기선교여행팀은 광서자치구 북부지역의 미전도 종족을 대상으로 그 종족의 원거주지인 농촌지역과 도시화에 따라 그들이 진출한 도시와 대학을 연계하여 선교의 종합적 전략을 모색해 보려고 한다.
선교팀이 미리 준비해 간 조사 자료에서 광서장족자치구는 중국 남부에 위치한 자치구이며, 동으로는 광동성(廣東省), 동북은 호남성(湖南省), 북은 귀주성(貴州省), 서는 운남성(云南省), 서남은 베트남과 접하고 있다. 인구는 4,822만 명(2002년)이며 소수민족이 1,742만 명이고 그 가운데 장족(壯族)이,600여만 명으로, 장족은 자치구 총인구의 34.5%, 소수민족의 9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광서장족 자치구에는 장족을 비롯하여 묘족, 요족, 동족 등 36개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고, 도시를 중심으로 한족이 자치구 전체인구의 62%를 점유하고 있다.
 
 
2. 어떻게 접근 할 것인가?
 
이번 단기선교여행에 있어서 김 요한 선교사는 광서장족자치구 북부 지역의 장족을 대상으로 정하였는데 그는 장족 원주민이 살고 있는 농촌지역과 도시화로 인하여 장족이 진출하고 있는 주요 도시 혹은 젊은이들이 진학하고 있는 대학을 연계하여 그 종족에 대한 선교 전략을 수립하려고 하고 있다.
 장족이 살고 있는 광서장족자치구 북부의 농촌 지역은 장족 교유의 문화와 생활을 이해할 수 있으며, 도시화로 인하여 그들이 진출하고 있는 계림 및 유주는 도시화된 장족의 생활을 이해할 수 있으며, 아울러 장족의 젊은이들이 진출하고 있는 대학은 장족 대학생들의 삶과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김 요한 선교사의 생각이었다.
실제적으로 중국의 대다수 미전도 종족은 원거주지에 남아 있는 사람들, 생활을 위해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과 교육을 위해 대학으로 진학한 엘리트 층 젊은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서자치구의 한 호텔에서 김 요한 선교사는 노트에 앞으로의 사역에 대한 대략적인 방향을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요약했다.
즉 광서장족 자치구 북부지역의 중요한 종족, 한족과 장족과 묘족에 대한 선교를 위해 계림과 유주를 관문도시로 하고, 계림의 광서사범대학과 광서민족사범학교와 유주의 광서공대를 거점대학으로 하여 도시와 대학과 종족을 연계하여 선교 전략을 수립하고 핵심적인 선교정보를 수집하겠다는 것이다.  본 글에서는 분량의 제한으로 도시에서의 사역은 제외하고 대학과 농촌에서의 사역만 기술한다.
 
 
3. 대학에서의 사역
 
우선 김 요한 선교사는 거점대학을 중심으로 장족 대학생의 삶들을 이해하기로 하였다. 그는 대학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정보를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 이 대학의 학생 수, 교직원수, 주요 학과
。 이 대학 학생들의 출신 지역 분포
。 취업률, 졸업 후 진출 도시, 직업분포
。 이 대학 학생들의 주요 관심사
。 이 대학 학생들의 삶에 대한 만족도
。 중국 대학생들의 복음에 대한 접근성과 수용성의 정도
。 중국 한족 대학생과 소수민족 대학생들 간의 친밀감의 정도
 
김 요한 선교사는 계림 내의 여러 대학을 방문하여 교수 혹은 학생들과의 만남을 통해 다음과 같은 각 대학의 대략적인 정보를 수집하였다. 즉 계림의대의 경우 소수민족 가운데 회족, 요족, 토가족, 동족, 하니족, 장족 등이 있는데, 그 중 장족이 가장 많았다. 광서민족사범학교의 경우 졸업 후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 교사를 하고 있었고, 광서사범대학은 거의 대부분 학생들이 광서장족자치구에서 지원하고 졸업 후에도 광서장족자치구 내에서 취업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또한 학생들은 서로간의 친밀도로써 한족과 소수민족간의 차이가 거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소수민족의 문화를 지켜가야겠다는 생각도 거의 없었다. 한족과 소수민족간의 친밀도를 어떻게 생각하는냐는 질문에 대해 177명의 학생들 중 보통이다 8%(15/172), 친밀하다  19%(33/172), 매우 친밀하다 72%(122/172)로 한족과 소수민족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관심사는 취업 60%(85/143), 공부 30%(42/143), 취미생활 1%(2/143), 이성 0%(0/143)로 조사됐으며, 삶에 대한 만족도는 보통이다 60%(65/107) 만족 한다 25%(27/107) 매우 만족 한다 7%(8/107) 로 나타났다. 
 
                                                                    계 림                                         광서
                 광서사범대                   전자공대                  계림의대                       민족사범학교
학생 수       20,000명                       20,000명                   5,000명                        1,800명
교직원 수     2,000명                           300명                    1,400명                        1,000명
중점학과    외국어계열(중문학과)      전자                       임상병리학,                    영어과
                                                                                 약학, 방사선과
출신지역    광서성,광동,                  광서,베이징,            광서성,                           광서
                계림,호남성                    상해                      계림의 학생은 매우 적음
취업률       85-90%                         96%                        20-40%                          95%이상
진출도시    계림, 광서자치주            북경, 상해,              계림                              광서
                                                   선양(80%),
                                                   광서(20%)
 
한편, 이 대학 학생들의 복음에 대한 접근성은 42%(64/152), 수용성은 28%(18/64)로 나타났다. 접근성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접근했을 때, 복음을 들어 준 사람의 비율을 말하며, 수용성은 복음을 들은 사람의 수에 대해 영접한 사람의 비율을 말한다.
4영리를 이용한 전도의 과정을 통하여 김 요한 선교사는 대략 다음과 같은 점을 파악하게 되었다.
 - 예수님이나 성경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 그러나 가르침을 받지 않음으로 인한 이해의 부족과 오해는 있다.
 - 복음에 대한 체감적 수용성 50% 정도이다. 체감적 수용성은 김 요한 선교사가 개인적으로 전도하면서 느낀 주관적 비율이다. 앞에서의 접근성과 수용성은 단기선교여행팀에서 접촉한 실제적 비율이다.
 - 복음을 들어 본 사람이 거의 없다.
 - 이야기를 호의를 가지고 들어 주는 편이다.
 - 접근성은 매우 높으나 수용성은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 학년이 낮을수록 수용도가 높다.
 - 기독교에 대해 약간의 지식이 있는 사람이 수용하기가 더 어려운 경우가 있었다.
 - 자신을 믿거나 친구를 의지한다.
 - 확신 있고 담대한 복음 선포와 아울러 성경에 대한 자세한 가르침이 요구된다.
 - 기독교에 대해 많은 궁금증을 가지고 있으므로 지속적인 대화가 필요하다.
 
이러한 대학에서의 전도 및 조사를 통하여 김 요한 선교사는 광서사범대학을 이 지역의 가장 주요한 거점대학으로 파악했다. 그것은 조사에 의하면 광서사범대학 졸업생들이 졸업 후 다른 도시로 진출하지 않고 대부분 광서자치구 내의 도시에 교사로 취업하게 되는 경향이 많아 재학 중 교제하게 된 형제들을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학 내에서는 종족간 차별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장족만을 위한 사역보다는 여러 종족을 어우르는 사역이 필요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는 또한 이 대학에서 만난 학생들을 수시로 자기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여 자기 종족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할 계획도 가지게 되었다.
이들 사범대학의 학생들이나 민족대학의 학생들이 졸업 후 시내 혹은 자신들의 고향에서 교사로 헌신하여 복음이 대학에서 도시로 그리고 농촌으로 급속하게 퍼져 가는 기대를 가지며 김 요한 선교사는 캠퍼스를 빠져 나왔다.
 
 
4. 농촌에서의 사역
 
1) 농촌선교의 이해
대학을 떠나 팀과 함께 장족 농촌지역으로 향하는 김 요한 선교사는 세 가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나는 광서 장족 자치구의 지도였는데, 그는 이 지도를 통해 광서장족자치구 북부 지역 중 소수민족 특히 장족이 많이 살고 있는 현과 향을 찾아 가고자 하였다. 특히   Operation China(Paul Hattaway,2001)의 장족 세부 종족을 이 지도에 따라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김 요한 선교사가 두 번째로 준비한 것은 Operation China(Paul Hattaway)의 장족 세부 종족에 대한 프로파일을 번역한 내용이었다. 이 프로파일에 나와 있는 종족이 그 지역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하는 것과 그 종족에 대한 내용을 수정하여 유용한 선교 정보로 보완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Operation China(Paul Hattaway, 2001) 중 장족 세부종족 내용을 참조할 것.
세 번째의 것은 중국 당국이 출간한 장족에 대한 종족연구 자료였다. 김 요한 선교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종족연구는 중국 당국에서 연구한 자료를 충실하게 번역하는 것이 더욱 정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중국어 혹은 소수민족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연구 팀이 짧은 기간에 연구한 것보다는 중국 자체의 자료를 활용하는 것이 더욱 유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2) 농촌의 선교적 상황
김 요한 선교사는 중국이 도시화로 인하여 도시와 대학으로 많은 인구가 이주하여, 인구의 구조상 큰 변화를 초래하고 있음을 주목하였다.
원거주지인 농촌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의 대부분은 나이 드신 분들, 아주머니, 그리고 어린아이들이고 그들의 생활은 대부분 우리나라 1960년대 혹은 1970년대 초의 시골의 환경과 유사하다.
이러한 농촌지역은 종족과 지역마다의 사정이 있겠지만, 보편적으로 외국인이 2주이상 머무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파악했다.
이러한 특성상 농촌에서의 사역은 주기적으로 방문하여 교제하고 섬기는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 주기적으로 방문하여, 의료봉사, 어린이 교육, 음악, 건축보조 등의 일을 도우며, 실제 사역을 병행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한 달에 한 번, 혹은 분기에 한번이나, 6개월에 한번이라도 꾸준히 감당해 나감으로써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3) 농촌에서의 선교 전략
김 요한 선교사는 이번 단기선교여행 기간 동안 농촌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팀원들에게 강조했다.
 。 원주민에 대한 선교정보
 。 의료선교
 。 어린이 전도
 。 집단회심(의사결정구조, 구속적 유사)
 
김 요한 선교사는 우선 장족 원주민에 대한 정보를 위해 미리 준비해 간 Operation China의 장족 세부 종족 자료 외에 市 도서관에서 중국정부에 의해 출간된 자료를 구했다. 2002년 발간된 그  자료는 그 지역의 소수민족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
비교적 한어에 익숙한 김 요한 선교사는 팀원들과 그 자료를 읽어 가면서 그 종족에 대한 이해를 더 깊이 하게 되었다. 현지에서 구한 그 종족에 대한 자료는 국내에 소개된 장족 정보에 비해 장족에 대한 상세하고도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 장족에 대한 중국 문헌 자료를 부록으로 실었다.
김 요한 선교사는 현지조사 혹은 지역연구에 대해 다른 접근을 취하고 있었다. 즉 중국정부에 의해 출간된 현지 중심적 종족 정보와 Operation China 의 종족 선교정보를 바탕으로 현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얻을 수 있는 선교적 감각에 의한 정보를 결합하는 것이었다.
한편, 농촌지역에 있는 사람들의 보건적 필요는 매우 긴요하여, 감기, 신경통, 관절염, 피부질환, 안과질환 등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 이를 위한 의료 보건적 봉사는 전도의 좋은 접촉점이 될 수 있었다. 한의학을 전공한 김 요한 선교사는 이들의 병을 직접 진료하며  그들과 매우 밀접한 신뢰관계를 쌓을 수 있었고, 그 관계는 복음을 전하는 데 직접적인 매체가 되었다. 진료한 환자들 45명 중에는 감기 1명, 신경통 22명, 피부병9명, 위장병 9명, 관절염 4명 등의 분포를 보였다. 상세한 지역과 종족 명은 보안상의 문제로 생략하였다.
이들에 대한 치료는 한국에서 가져간 약으로 처방했는데 그들은 김 요한 선교사의 진료와 처방을 매우 신뢰했다.
어린아이들의 건강 및 교육적 필요도 시급하다. 무공해적인 그들의 착한 심성은 복음에 대해 매우 강한 수용성을 보이고 있었다. 어린이들은 찾아간 김 요한 선교사 일행을 거부감이나 두려움 없이 대해 주었는데, 30명의 아이들 중 26명이 전하는 복음을 거부감 없이 잘 들어 주었다. 복음을 들은 26명 중 17명이 영접함으로써 65%정도의 수용성을 보였다. 아이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찬양을 통한 전도였다. 쉬운 찬양을 그들의 말로 함께 부르는 가운데 아이들의 마음은 준비되고 있었고 이어 전하는 복음을 그들은 매우 흡수력 있게 받아들였다.
김 요한 선교사가 농촌에서의 선교사역과 관련하여 중요하게 고려한 부분은 "집단회심"이었다. 그의 선교전략에 있어서 농촌에서의 "회심"은 개인적인 회심의 차원 이외에 "집단적 회심"이라는 요인을 반드시 고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개인적 회심"이 많은 도시와 대학과는 달리 농촌에서는 가족 혹은 부족 등의 "집단적 회심"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요한 선교사는 이러한 집단적 회심을 기대하기 위해서 우선 그 부족 혹은 씨족의 의사결정에 대한 메카니즘을 잘 이해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보편적으로 농촌의 종족 의사결정 매카니즘은 가정 내에서는 남자에게, 그리고 씨족의 경우에는 연장자에게, 그리고 부족의 경우에는 그 부족 중 가장 권위가 있는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농촌에서의 전도는 특히 의사결정권자의 회심과정에 유념하여 전도를 하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김 요한 선교사는 처음 방문한 가정에서 진료를 베풀었고 그 다음날 그 집의 모든 사람들과 친척을 모아 마지막 예후를 일러주며 복음을 전했다. 그 집의 가장되는 할아버지와 남편을 주목하며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은 좋은 반응가운데 말씀을 청취했고 그 두 분이 영접  하기를 원함에 따라 온 가족이 기쁨으로 영접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김 요한 선교사가 집단적 회심을 위해 고려한 또 하나의 개념은 "구속적 유사"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그 종족의 고유한 문화적 개념 가운데 복음의 주요한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포착하여 복음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위해 그는 그 종족의 가장 전통적인 민요에 복음의 내용을 가사로 붙여 함께 부르며 복음을 전달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집단회심을 위해 온 마을이 함께 하는 잔치 모임이 구상되었고 마을 유지들의 협력으로 어린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함께 하는 잔치가 베풀어 졌다. 그들과 함께 그들의 민요를 노래하고 찬양하는 가운데 분위기는 무르익어 갔고, 80여명의 부족민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그들의 민요에 복음의 가사를 덧붙인 찬양을 함께 부르며 마음을 준비시키고 김 요한 선교사는 그들에게 더욱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중국인 자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했다.
그러나 아직은 경험이 미숙한 그 자매는 회중의 반응에 민감하게 대응하여 영접하도록 하는데 경험의 미숙함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다른 멤버들도 모인 사람들이 말씀을 집중력 있게 듣도록 유도하는데 준비의 미숙함을 드러내었다. 이것은 집단회심이 인도자나 몇 몇 사람들의 생각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이가 사전에 기도와 철저한 준비로 이루어져야 함을 깨닫게 해 주었다.
 
 
5. 광서장족자치구 북부지역에 대한 김 요한 선교사의 전략적 선교 정보
 
이러한 여행을 바탕으로 하여 김 요한 선교사는 다음과 같은 전략적 선교 정보를 제시했다.
(1) 광서장족자치구 북부지역의 주요한 선교 대상 종족은 소수민족인 장족과 묘족, 그리고 한족이 그 선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2) 이러한 종족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선교사는 일단 광서사범대학 혹은 광서민족대학을 거점으로 하여 언어 연수를 하며 사역을 준비할 수 있다. 왜냐하면 광서사범대학은 졸업생들이 교사라는 이점이 있고, 다른 성으로 취업하지 않고 광서자치구 내에서 근무하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3) 광서사범대학에서 사역하려고 할 때는 소수민족이나 한족과의 구분 없이 전체적인 대학생들을 상대로 하여 사역하는 것이 좋을듯하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조사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종족간의 친밀감이 밀접하여 종족간의 정체성의 차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4) 계림이나 유주 등의 도시에서도 소수민족에 대한 차이는 거의 없고 종족의 집단 거주지도 없다. 도시에 진출한 소수민족에 대해 한족이 느끼는 상대적 차이는 거의 없으며 소수민족도 의지적으로 자기 종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도시에서도 하나의 종족을 대상으로 한 사역은 의미가 없어 보인다.
(5) 계림에서 도시 사역을 하려고 하는 선교사는 광서사범대학을 거점으로 졸업생들이 교사로 취업이 되었을 때, 교육적 계층을 목표로 하는 것을 권할 수 있다. 또는 관광업 혹은 음식업, 그리고 경공업자 등이 주요한 직업적 계층을 이루고 있어 이들을 대상으로 한 사역을  고려할 수 있다.
(6) 계림 시내에는 삼자교회인 계림기독교회가 있는데, 성도 수는 1,800-2,000명에 이르는데 교회 측 이야기로는 정부의 간섭은 없다고 한다. 이 교회는 매년 성도들 간의 전도를 통해 꾸준한 성도들의 수가 증가되고 있으며, 청년 예배 시에 주위 대학생들이 많이 참여하여 활발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 삼자교회와 어떤 관계 가운데 사역할 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가운데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7) 농촌에서의 종족 대상 선교는 단기적으로 대학과 도시에서 교제하고 있는 형제들의 고향을 순회하며 전도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주기적으로 현지인 형제들의 고향을 방문하여 꾸준히 돕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보여 진다. 한국의 단기선교여행팀과 연합한다면 더욱 좋은 프로그램이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8) 장기적으로는 대학과 도시에서 양육한 형제들을 현 혹은 향급 마을로 파송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교사 등의 직업을 가지거나 민족대학의 경우 졸업 후 자기 고향에 돌아가 일하도록 되어 있는 규정을 참고해야 한다. 정부에서 이들의 취업을 알선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출처. 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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