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때묻지 않은 몽골의 시골사람들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보상이라도 하듯 코담배를 권하며

 

부담스러우리 만치 환대하는 그들에게

 

강한 민족애를 느꼈다면 과장일까?

 

그들에게는 첨단기술의 이기에 고단한 삶을 사는 우리와

 

또 다른 차원의 행복이 깃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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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뺨이 아리고

 

손가락에 감각이 없어질 만큼 추웠던

 

2005년 차강사르(‘하얀달’이라는 뜻을 지닌 몽골의 설날)아침

 

수은주는 영하37도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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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살 남짓한 수십 명의 아이들이 성인식을 대신해

 

수 킬로미터를 질주하는 말 경주를 했다.

 

마지막까지 전력으로 달려 들어와 스스로가 대견해 활짝 웃는

 

그 아이들의 모습이 진정 칭기스칸의 후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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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한 말과 소년의 얼굴은 입김으로 하얗게 얼어붙었지만

 

전혀 힘든 기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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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30도에 꽁꽁 얼어붙은 강에서 얼음을 지치다

 

낮선 우리일행을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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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들이대는 카메라에 수줍어 집으로 달음질치는

 

몽골아이의 꾸밈없는 표정이 미소를 머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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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마을길로 아저씨가 소달구지 몰고가시면

 

우리들이 졸졸 딸라가며 매달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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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 물건들을 다 팔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양지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몽골의 단란한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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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밈없는 미소가 어른이라도 천진난만해 보인다.

 

재밌는 아저씨다.

 

잔돈좀 바꿔달래서 받은돈에 500투그릭(원)이 모자란다고하니

 

500투그릭은 모델료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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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교만점의 귀여운 딸아이. 생글생글 웃는 모습에 귀여움은 독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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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나를 보고는 부끄러워

 

잠깐 울타리사이로 내다 보다

 

집안으로 냅다 달아났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는지는

 

이 사진으로도 표현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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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 할아버지의 귀여운 손녀딸

 

살살 녹이는 애교에 할아버지의 웃음이 끊일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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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을 맞은 개구장이들이 마냥 즐겁고 신나는 모습으로 손을 흔들며 반긴다.

 

이렇게 순수하고 해맑은 얼굴을 보면 나는 정말 세상 살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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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거미지는 저녁 강에서 얼음을 지치고 놀던 아이들이

 

우리 일행을 보고 우루루 달려와 손을 흔들며 반긴다.

 

 

                                 (강종진의 디카로 본 몽골기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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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선교개요 ♠,몽골 정보

2006/01/23 09:24

http://blog.naver.com/alpha0191/60021281672

아래의 자료는 '몽골 한인 선교사회'에서 1998년에 발행한 『 '98 몽골 선교 현황 자료집 』
을 요약 정리한 내용입니다.

1. 기독교 선교 역사

1) 근대 이전의 기독교 선교 역사
확실한 근거는 없으나 이미 7세기경에 몽골에 기독교인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경교 (NESTORIAN)에 의한 선교일 것이다. 송나라가 기독교를 그들이 싫어하는 몽골의 종교라고 간주해서 박해했던 사실이 있는데 이것과 관련된다고 여겨 진다.
보다 확실한 선교는 12세기경 고비 사막 북쪽에 살던 몽골족 케라이트 ( KEREITS 몽골에서는 '케레이드'라고 부름) 부족에 대한 선교다. 칭기스칸이 세력 확대 과정 에서 이부족과 결탁했다가 나중에 그 부족의 수도였던 하라호름을 자신의 수도로 빼앗았는데 당시 그곳에 기독교인이 있었다고 하는 역사 기록이 남아있다. 실제로 당시의 수도였던 하라호름에는 교회의 터로 보이는 돌로 된 십자가가 남아있다.
또 원나라 왕실의 왕비중에는 상당수가   그리스도인들 이었다고 한다. 칭기스칸 의 며느리 중 하나가 기독교인이었고  쿠빌라이 칸이 태어났다. 쿠빌라이칸이 기독교인이라는 증거는 없으나 기독교 에 대해 우호적이었고 그의 두 형제는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원나라를 통치함에 있어서 정신적인 통일세력을 필요로 했다. 그는 학자들로 하여금 기독교, 불교, 회교, 유교, 도교 등 5대 종교를 면밀히 연구하도록 지시하였고 그 중 기독교를 선호하였다. 그래서 당시 로마 교황에게 잘 준비된 유능한 선교사 100명을 보내주면 기독교를 국가종교로 삼겠다는 편지를 1276년부터 1291년까지 원나라에 체류한 마르코폴로를 통하여 보냈으나 교황은 당시 100년 전쟁등 유럽의 복잡한 사정을 핑계로 이 제안을 거절하였고 20년이 경과한 1289 년에야 교황 니콜라스 4세가 사절을 겨우 2명 보냈는데 한명은 도중에 죽고 말았다. 결국 원제국은 불교가 그 자리를 차지하여 중국과 아시아 선교의 결정적인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1305년까지 로마 카톨릭(도미니크 및 프란시스코 수도사)이 한때 6,000명의 개종자를 얻었다고 몬테코르의 존은 보고하였다. 이 보고를 들은 교황은 1308년 극동 라틴 교회의 감독으로 취임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1335년에 32명의 선교사가 북경에 도착하여 활동을 벌였고 이 무렵 프란체스코회의 소규모 선교회에서는 몽골의 복식과 유목민들의 마차위에 휴대용 제단과 제기를 싣고 몽골족의 이동에 따라 함께 이동하면서 '움직이는 수도회'를 결성하여 활동했다는 보고가 있다.
1326년 마지막 감독이었던 플로렌스의 제임스가 몽골족이 북경에서 축출당할 때 순교하였으며 1369년 라틴 교회는 북경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원나라 몰락 후 약 500년간 기독교 전파의 기회가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몽골에 대해 적대적인 중국 은 기독교를 몽골의 종교로 간주하여 기독교 선교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로써 원나라의 몰락으로 인해 몽골 자체의 선교는 물론 나아가 아시아 전체의 기독교 선교가 사실상 차단되었다.
1600년대에 와서 우랄 산맥의 동남쪽 고원 지대에 사는 몽골족의 일파인 칼묵크 (KALMUCKS) 족에게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들이 전도를 시도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2) 근대 이후의 기독교 선교 역사
근대 선교는 1817년 스웨덴 선교사 코르넬리우스람과 영국선교사 부부 스타리브라스가 효시를 이루었다. 초기의 가장 대표적인 선교사는 런던 선교회 소속인 제임스 길모어 (JAMES GILMOUR)로 그는 1870년 몽골에 도착하여 12년간 몽골 유목민을 대상으로 선교하였다. 그는 자신의 활동 결과를 평가하면서 서구선교사보다 중국인 선교사가 실제적인 선교 사역을 감당하면 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결론 을 얻었다. 그래서 수 명의 중국인 선교사를 훈련시켰고 이들은 효과적인 선교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1900년경 위화단 사건때문에 선교사들에 대한 참혹한 박해가 일어나 선교 활동은 일시 중단되었다.
1851년 슈미트 박사가 칼무크 방언으로 성경의 일부를 번역한 것을 시작으로 성경 번역이 시작되었다. 그 후 브리야트 방언으로 성경 전체가 번역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성경 번역 사업이 진행되었다.

3) 현대의 선교 역사
1919년경 다시 선교 활동이 시작되었으나 곧이어 1924년 사회주의 국가 설립으로 인해 모든 선교 활동이 중단되었다. 사회주의 정책 아래서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가 박해를 받았는데 기독교의 경우에는 제국주의의 앞잡이라는 명목으로 더욱 극심한 탄압이 이루어졌다. 1989년까지 단 한명의 기독교인도 없었고 선교 활동도 전혀 없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몽골 정부가 1989년 개방 정책을 실시하면서 자본주의 국가의 외국인이 공식적으로 입국하게 되었고 선교 활동이 재개되었다. 오랜 선교의 공백기를 지나 1980년대 말 몽골 정부의 개방화 정책 이후 가장 현저한 선교 활동을 펼친 사람은 잔 기븐스이다. 그는 1978년에 복학하여 몽골인 아내 얄타를 만났다. 1980년에 불법 종교활동 혐의로 체포되었고 1987년에 영국에서 얄타와 결혼하였다. 그 후 개방 조치가 이뤄지자 몽골에 다시 들어와 1990년 약 50명의 도움을 받아 신약 성경(신게레)을 그의 아내 얄타와 번역, 출판하였다. 이후 몽골 성서 공회(MBS)를 설립 운영하고 있으며 최초의 교회인 그리스도교회를 개척하였고 지방 전도에도 열심을 가지고 일하였다.
(현재 성경 번역 작업은 신구약 모두 완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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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독교에 대한 몽골 국민의 인지도

하나님의 은혜와 선교사들의 수고와 헌신 몽골 교회 성도들의 전도와 EAGLE TV 의 개국, 예수 영화 상영, 지방 전도 등의 영향으로 현재 많은 국민들이 기독교에 대해서도 알고 있거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들어 보았다. 그러나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 최근 연합성경 훈련원 1학년 학생 40여명 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현재 몽골 전체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어 본 사람들이 약 50 ~ 60%가 되는 것으로 응답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를 외국의 종교라고   알고있는 사람도 있고 과거 공산주의의 선전을 통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것 또한 사실이다.  일부에서는 물질을 앞세워 젊은이들을 호도하고 있다는 신문 기사가 여러차례 발표된 적이 있기도 하다.
최근 도시를 중심으로 젊은 사람들과 개방적인 지도자들 가운데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고 외국어를 배우려는 청소년들 사이에서 외국인들을 접하게 되면서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인 인상을 받은 학생들이 늘어가고 있으며 좀 더 객관적으로 종교 현상을 이해하려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다.
그렇지만 카톨릭, 그리스 정교회, 몰몬교, 위트니스 지방교회, 통일교, 바하이교 등 다양한 종파와 이단과 기독교를 거의 구분하고 있지 못하며 단지 외래 종교라는 인상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직도 호기심으로 나오는 사람이 많으며 각 교회들마다 매주 새로 오는 신자가 많으며 교회에 남아 계속해서 신앙 생활하는 경우는 적은 편이다.
한 예로 어느 교회의 경우는 연간 1,500명 이상의 새 신자가 교회를 찾아 오지만 실제로 교회에 남는 경우는 100명 미만이며 기존의 신자가 교회를 그만두는 인원도 적지 않아 교회의 추 수에서는 큰 성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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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현재  몽골의 기독교 선교 현황

1) 몽골 전체의 기독교 현황
현재 울란바타르에 39개, 지방에 39개의 교회가 있으며 그 중 3곳은 외국인 교회 (인터내셔널 교회, 한인 교회, 중국인 교회)이다. 기독교 신자는 어린이를 포함하 여 7,440명으로 조사되었는데 이 중 16세 미만의 어린이 비율이 36%이다. 전반적으로 도시 지역의 복음화가 높은 편이며 상대적으로 지방에는 복음화율이 극히 낮은 편이다. 가장 복음화율이 높은 지역은 에르트네트를 중심으로 한 오르홍 지역 이며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지역은 몽골의 가장 서부 지역인 바양얼기 아이막 과 중부 지역의 고비숨베르 아이막, 동부 지역의 수하바타르 아이막 등 3개 아이막이다.
아르항가이와 셀링게, 토브 아이막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이막은 복음화율이 0.1% 미만의 지역이다.

2) 각 지역별 기독교 현황
(1)울란바토르의 기독교 현황
현재 울란바토르에는 39개 교회에 장년과 어린이를 포함하여 모두4,632명의 기독교인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 중 3개의 교회는 한국인, 중국인 외국인들이 모이는 교회이다.
현재 울란바토르의 인구는 97년 말 상황으로 649,900명이며 기독교인의 숫자 는 4,632명이다. 그러므로 전체 울란바토르 인구 중 기독교 인의 비율은 0.68% 에 이른다. 몽골 전체의 기독교인 비율이 0.305%인 것을 감안하면 수도 울란바토르는 몽골 전체 평균 기독교인의 비율 보다 2배 가량 높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선교사 들이 수도인 울란바토르를 중심으로 하여 사역하고 있고 외국에 대한 인식 이나 개방도 가 다른 지방 지역보다 높기 때문 이라고 할 수 있다.
울란바토르에 있는 교회 중 한국 선교사가 개척하였거나 개척하여 이양하였거나, 개척, 분립한 교회는 한인 교회를 포함하여 모두 24개 교회이며 지방의 18개 교회를 포함하여 모두 42개 교회에 이른다. 그리고 한국 선교사들이 사역 중이거나, 이양, 분리, 개척한 교회의 성도 수는 지방의 18개 교회를 제외하고도 약 2,755명에 이른다. 이것으로 보아서 몽골 선교, 특별히 교회 개척 분야에서 한국 선교사가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2)다르항, 에르드네트 도시 지역
다르항, 에르드네트를 중심으로 한 다르항올 아이막, 오르홍 아이막은 몽골의 산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며 울란바토르와 함께 특별 행정 지역 이며 도시 지역이다. 다르항에는 92년 그리스도의 교회를 시작으로 하여 최근에 많은 교회와 소그룹 모임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모임의 규모가 작고 통계 수치에 넣기 어려운 상황이다. 에르트네트에는 1개의 교회가 있는 것으로 조사 되었다. 기독교인 숫자에 있어서 몽골의 교회 중 가장 많은 성도를 보유하고 있는 교회로 어린이를 포함하여 750명의 성도가 있다.
그리고 오르홍의 97년 말 전체 인구 73,500명 중 기독교인의 비율은 1% 정도 가 되며 이것은 몽골의 도시와 아이막 가운데 가장 높은 기독교인의 비율로 몽골의 전체기독교 인 비율의 약 3.3배가 되는 비율이다. 에르드네트가 이와 같이 몽골의 다른 지역보다 높은 기독교인의 비 율을 보이는 이유가 여러가지 이나 그 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다르항 지역과 달리 교회가 한 교회이기 때문 일 것으로 보인다.

3)선교사 활동 현황
(1)몽골 선교 사역에 참여하는 전체 선교사의 규모
몽골에는 89년 3명의 선교사를 시작으로 급속한 속도로 입국하는 선교사의 숫자 가 늘고 있는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가장 큰 이유는 몽골이 가장 최근에 개방된 처녀 선교지라는 점에서 세계 선교계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92년을 기점으로 선교사의 수가 급증한 것은 JCS등 서구선교사를 중심으로 한 연합 기관이 설립되면서 또는 각 단체가 정부에 등록되면서 이를 기반으로 많은 선교사들이 입국했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2)출신 지역별 선교사 사역 현황
현재 기독교 선교 활동에 있어서 복음 전파와 교회 개척은 법적인 제한은 없다. 그러나 선교사 비자 발급의 제약, 교회 건물 임대의 거부, 전도 활동의 외적인 제약 등이 광범위하게 이루워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 몽골 선고 사역의 제한이 많이 완화되었지만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서구 선교사들의 사역 현황
현재 서양 선교사들은 주로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 중심이며 영어교육, 사회 복지 및 개발 업무, 정부 정책 자문, 구호, 방송, 출판, 보건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교회 개척을 시도하는 서양 선교사가 늘어나고 있다.서구 선교사의 사역의 특징은 학생 비자로 입국하는 경우는 별로 없고 대개 비영리 법인이나 국제 기구 등과 같은 공식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사역의 방식과 기간 등을 미리 정하여 일정한 계약을 맺고 그 계약에 따라 활동을 시작한다. 따라서 이미 사역의 내용과 방식이 정해져 있고 사역 내용에 적합하고 본인이 이미 결단을 내린 상태에서 입국 하기 때문에 탐색의 기간이 짧고 진로 결정을 위한 갈등도 적은 편이다. 대략 30여 개의 단체가 몽골 정부에 등록하여 일하고 있는데 대부분 사회 개발 또는 구호 단체로 되어 있다. 따라서 서구 선교사들은 자연 초청 단체의 방향성에 부합하는 활동을 하게 됨으로써 교회 개척보다는 사회 개발이나 교육, 보건 활동 등 프로젝트 중심의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아시아 선교사
한국 선교사를 제외한 동양 선교사는 일본 선교사의 활동이 중요한데 성경 번역 (몽골 성서 번역 위원회, MONGOL BIBLE TRANSLATION COMMITTEE) 활동과 교회 개척 분야에서 7단위(가정)12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외에도 홍콩에서 파송된 중국인 선교사 가정이 교회 지도자 사역과 교회 개척 분야에서 일하고 있으며 싱가폴과 타이완, 필리핀에서 온 선교사 가정이 있다. 몽골 사람들 자신들이 스스로 동양 사람이라고 부르며 몽골 정부에서도 같은 동양 국가들에 대해 더욱 우호적인 정책을 펼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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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국 선교사

1) 한국 선교사의 몽골 사역 참여 현황
몽골 사역에 참가하는 한국인 선교사의 추세를 살펴보면 개방 후 2년 후에 8명을 시작으로 '93년에는 18명으로 정점으로 이루었으며 연평균 15명 가량 (부인 선교사 포함) 입국하였다. '91년에 몽골에 입국했던 전체 선교사의 수가 30명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한국 선교사가 차지했던 비율이 26.7%로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같이 몽골에 갑자기 한국 선교사가 많이 입국하게 된 주요한 원인으로는 몽골 이 세계적으로 닫혀진 대표적인 미전도 종족일 뿐만 아니라 몽골어가 한국어와 같은 우랄 알타이어족이므로 언어를 배우기가 유리하기 때문이다.
'96년 한국 선교계에 몽골이 많이 소개되었고 몽골이 한국 선교사들이 사역하기에 가장 적합한 비교 우위 지역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다른 어는 해보다도 많은 선교사들이 97년에 입국하였다.
몽골에서 사역에 참여하고 있는 한국 선교사와 전체 선교사의 수적 변동 추이를 관찰해보면 우선 한국 선교사의 수적 증가가 거의 일정한 비율로 성장하고 있는 반면 전체 선교사의 증가는 92년, 93년에는 급격한 증가를 보인 이후 계속 같은 증가율을 유지하고 있다. 이 같은 주요 이유는 개방 정책 이후 탐색기간을 거친 서구 선교사들이 몽골의 민주화 개방 정책에 대하여 어느 정도 신뢰를 갖기 시작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추세로 본다면 3년 후인 2000년에는 몽골에서 사역하는 한인 선교사의 수가 약 18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현재까지 몽골에서 선교사로 사역하다가 돌아간 경우의 선교사 (안식년 제외)수도 현재 '97년 5월 현재 모두 16명으로 지금까지 몽골 선교에 참여한 숫자의 16%에 해당 하는 규모이다. 한편 사역에 지장을 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선교사가 여럿 있으며 입국한지 4년 이상 경과한 선교사의 상당수가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최근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장기적인 사역을 위해 건강 관리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2) 한국 선교사의 선교적인 역량
한국 선교사들의 몽골에서의 사역 경험 측면으로 볼 때 현재 활동하고 있는 선교 사 중에서 3년 이상된 선교사가 35명으로 전체 선교사의 43%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현지 적응과 언어 습득이 어느 정도 준비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점은 대부분의 서구 선교사들이 2 ~ 3년간 단기 위주로 사역을 하고 돌아 간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 선교사들이 사역의 질적인 효율성 면에서는 앞선다고 볼 수 있다. 즉 대부분의 한국 선교사들은 장기적 관점에서 사역에 임하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언어 준비에 힘쓸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이점은 단지 몽골어와 한국어가 어순과 문법이 유사하다는 것 뿐만 아니라 한국 선교사들 이 현지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현지인들의 삶 속에 파고들어 인간 관계를 형성하고 제자 양육에 힘쓸 수 있는 가장 큰 무기가 되고 있다. 앞으로도 한국 선교사들은 계속해서 장기 사역을 지망하는 추세로 입국하기 때문에 선교적 MAN POWER 가 규모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한국 선교사 전체적으로 볼 때 몇 단체는 선교사 입국의 기반 ( MISSION BASE )을 구축하여 계속적으로 동원(MOBILIZATION)하고 있고 또 단독 사역을 하고 있는 사역자들도 사역이 확대되면서 동역할 사역자들을 필요로 하는 점에서 한인 선교사들은 계속 증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3) 분야별 사역 현황
한국인 선교사들은 교회 개척과 제자 양육 부분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인 선교사들은 '97년 5월 5일 현재 51단위(가정) 에 81명이 일하고 있으며 이중 목사 선교사가 15 단위(가정)에 29명이며 (36%), 전문인 선교사가 36단위(가정) 52명 ( 64% )이다. 몽골에서는 현재 전문인 선교사가 목회자 선교사나 영역의 구분이 없이 개인의 능력과 관심의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 선교사는 현재 각 사역 분야에서 폭 넓게 사역하고 있으며 그중에서 교회 개척 분야에 가장 집중되어 있다. 즉 교회개척을 주사역으로 일하고 있는 선교사가 전체의 28%이며 다른 분야의 사역자들도 대부분 교회 개척에 관련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 교육분야에서 19%, 의료사업 분야에 인력이 분포되어 있고 전체적으로 비교적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몽골 선교가 시작된 초기 3 ~ 4년 동안에는 주로 교회개척 사역에 집중되어 있었으나 점차 사역 범위가 확대 되고 있다. 이로 볼 때 몽골에서 한인 선교사의 사역은 비교적 총체적인 사역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선교사들이 아직 참여 하지 않고 있는 분야는 방송, 청소년 등의 분야이다.

4) 몽골 선교에 있어서 한국 선교사의 장점
한국인 선교사들은 몽골 사역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국가적, 민족적인 독특한 장점이 있다.
(1) 한국과 몽골 사이에 정치적, 경제적 관계에서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몽골 정부는 한국의 경제 발전을 모델로 하여 아시아의 제 5의 용이 되고자 하여 한국을 배우려는 자세에 있고 몽골 외교에 있어서 원조해주는 6대 우방국가 즉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한국 중의 하나로 여기고 있다.
(2) 몽골과 한국은 문화, 인종, 역사, 풍습 등에서 많은 공통점이 있다.
정서적인 면에서 형제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등 기본적인 친화력을 지니고 있다. 택시를 타도 처음엔 중국사람으로 오해하고 퉁명하게 대하다가도 한국 사람이라고 국적을 밝히면 반가워하는 편이다.
(3) 언어가 같은 어족에 속하기 때문에 문법과 어순이 유사하며 쉽게 익힐 수 있다. 따라서 열심히 1년만하면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간단한 강의는 준 비를 하면 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서구 선교사는 약3년 이상 걸리며 그 경우에도 원활한 의사 소통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토로한다.
(4) 몽골인은 자존심이 강해 외국인이 접근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한국인은 외모나 생활 습관등의 유사성으로 인해 거부감 없이 접촉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5) 역사적으로 한국은 몽골에 의해 침략을 당한 과거가 있고 몽골에 대해 피해를 입히거나 나쁜 관계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한국인으로서 몽골인들에게 접근할 때에 정치적, 역사적 장애가 별로 없다. 그러나 한국선교사들에게 이러한 유리한 면 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경사회와 유목사회의 배경이 다르며 더구나 몽골은 70년 간 러시아의 지배적인 영향아래 있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유럽식의 사고와 문화가 배어 있어서 이러한 면을 면밀히 감안하여 관계를 형성하는 것 이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오랜만의 가족 나들이다. 8시간 넘게 구불구불 거친 길을 달려온 이들은 간당 사원으로 향했다. 서로 다른 시대, 모습으로 살아온 삼대지만 카메라 앞에서만큼은 너무나 닮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대불이 있는 몽골 간당 사원

테를지에서 만난 다섯 살배기 아이에겐 파워레인저 장난감도 닌텐도 게임도 없다. 파란 하늘과 푸르른 초원, 할아버지가 선물한 조랑말 친구만 있다면 이곳이 바로 천국이다.

나이람달의 게르 캠프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보기엔 다정한 연인 같지만, 사실 게르 캠프 직원들이다. 각 게르 캠프에는 몽골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연이나 프로그램이 있는데 이곳의 ‘전통 의상 체험’은 매우 근사했다. 그래서 우리는 사진 촬영을 제안했고, 두 사람은 칭기즈칸의 후예로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몽골의 전통 의상은 화려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신경 쓰는 것은 모자다. 모자는 패션의 완성이며 과거에는 모자가 그 사람의 신분을 상징했다. 즉, 모자는 그들의 자존심이나 다름없다.

사진으로 만나는 몽골 리얼 다큐멘터리 ②

editor 서다희 photographer 장성용

 

"간통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가 헌법 제1조인 나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어린아이들까지 노래를 부를 정도로 유명해진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과 2항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 국가이다."    이건 북한 헌법 제1조이다.


  美연방 수정헌법 제1조는 훨씬 장문이다.
  "연방의회는 국교를 정하거나 또는 자유로운 신앙행위를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 또한 언론 출판의 자유나 국민이 평화로이 집회할 수 있는 권리 및 불만사항의 구제를 위하여 정부에게 청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

그럼 이런 헌법은 어떨까?
  "간통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한 국가의 헌법, 그것도 제1조에 이런 조항을 못밖은 나라는 어디일까. 우선 그런 나라가 있으리라고 믿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몽골 세계제국 헌법, 즉 예케-자사크(Yeke Jasag)가 그렇게 돼 있다. 예케 자사크는 13세기에 칭기스칸이 유목민을 통일하면서 선포한 대법령이다. 당시 칭기스칸과 그 후계자들의 통치권이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뻗쳐 있었으니, 이 조항은 전 세계인의 헌법이었을 것이다.

간통 정도를 사형에까지 처한다?  인류사상 가장 큰 제국을 일군 몽골유목민들이 헌법 제1조에 이렇게 과중한 형량을 경고하며 간통을 금지시킨 까닭을 정착사회는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유목민의 시각으로 봐야 납득이 가는 부분이다. 

  네트워크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유목민들은 고립되면 죽는다. 어떤 경우에도 집단이란 울타리를 이루지 않으면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 이처럼 절대적으로 열악한 상황을 이기기 위해서 그 어떤 내적 이완도 용납되지 않는 신의의 공동체, 믿음의 사회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공동체의 핵심은 무엇일까. 가정이다. 가정이 흔들리면 공동체는 곧장 무너진다. 가정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 이루는 것이다. 가정이 굳건하려면 무엇보다도 남편과 아내 간에 신의와 믿음이 지켜져야 한다.
  무엇이 남편과 아내간의 신의를 깨트릴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행동일까. 간통이다. 간통이야말로 가정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해체하는 암(癌)적인 행동이다. 이런 시각에서  몽골유목민들은 헌법 제1조를 만들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이 법의 선포자인 칭기스칸은  적장에게 강간당해 적장의 자식을 잉태한 아내 버르테를 아무런 조건없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버르테는 메르키트 족장의 동생인 칠게르에게 납치된 후 그의 첩으로 2년을 함께 살다가 칭기스칸에 의해 구출된다. 그때 버르테는 만삭의 몸이었다.

칭기스칸은 왜 아내를 사형에 처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아내의 잉태가 간통이 아니라 강간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몽골제국 헌법 제1조의 핵심이 담겨있다. 강간은 남녀 간의 약속 파기가 아니다. 운명일 뿐이다. 그래서 간단히 용서되는 것이다. 간통을 처벌하는 것보다 강간을 그냥 넘기는 그들의 이런 실사구시의 철학을 남녀 간에 차별의 만리장성을 쌓고 살아온 정착민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정착민들은 아마도 간통한 아내보다 강간당한 아내를 더 용서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런 정착민들의 눈에는 형사취수(兄死取嫂, 형이 죽었을 때 형수를 아내로 삼는 것)도 짐승만도 못한 짓으로 생각될 것이다. 당시의 유목사회에서는 남자를 잃은 여인네들을 그렇게 살리는 것 외에는 도울 방법이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도무지 미치지 않을 것이다. 몽골제국 헌법에 담긴 유목민들의 사고방식은 앞으로도 거론할 계획이다.

 

 

칭기스칸 헌법 제2조 "짐승을 강간한 자는 사형"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 근교 투브아이막에 말(馬)의 동상 하나가 기세 좋게 서 있다.(아이막이란 우리나라로 치면 광역자치단체, 도(道)에 해당한다. 기초자치단체는 솜이라고 한다.)

동상의 모델은 베트남에서 되돌아온 말이다. 1961년쯤 일이다. 프랑스 군대가 월맹의 게릴라전의 천재 보구 엔 지압 장군에게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완패한 뒤 떠나버리자 공산주의의 팽창을 우려한 미국이 군사고문단을 파견, 월남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또 소련을 중심으로한 공산주의 진영은 그들대로 월맹을 지원했다. 사실상 베트남전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 당시 공산주의 진영에 속했던 몽골은 가난해서 도울 게 마땅치 않았다. 몽골지도자들은 궁리 끝에 베트콩들의 수송작전에 쓰도록 말 1천마리를 원조해주기로 하고 철도를 이용, 중국을 종단해 월맹의 수도 하노이로 보냈다.


그런데 그중 한마리가 낯선 땅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이 타고 갔던 길고도 긴 철길을 따라 몽골로 되돌아왔다. 고향의 주인이 그리워 중국 대륙 하나를 종단해 버린 것이다. 그 거리가 직선거리로도 무려 3,200킬로미터에 달한다. 한때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대전서 돌아온 진돗개의 여정에 비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거리이다.

말이 돌아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몽골 여론이 들끓었다. 인간이 고생해야지 왜 죄없는 말, 동지 같은 말을 괴롭히느냐는 것이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몽골 정부는 주인으로부터 말을 사들여 걸프렌드(암말) 10마리와 함께 현 몽골 대통령궁이 있는 성산(聖山) 보그드산에 방면했다. 매우 미안하다, 이제부터 편안한 삶을 살아라는 사죄였다. 그 말은 암말들과 함께 제 수명을 자유롭게 누리다 죽었다. 말이 죽자 몽골 사람들은 다시 그 말을 기리기위해 동상을 세웠다. 동상이 있는 투브아이막은 그 말의 고향이다.  

이 사건은  정착민들에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하나는 동물에 대한 인간의 뜨거운 사랑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칭기스칸 제국 헌법 제 2조이다. “수간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제 1조, 즉 “간통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앞서 거론한 적이 있다. 


유목의 고향 몽골에는 지금 남한의 여덟 배에 이르는 대지 위에 그 20분의 1이라 할 만한 인구가 살고 있다. 1인당 경유 면적이 남한인의 160배에 달하는 것이다. 그 고립무원의 대지 위에서 친하게 지낼 것이라고는 동물밖에 없다. 따라서 그곳에서 약자에 대한 강자의 횡포가 가장 적나라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인간과 동물간의 관계에서일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서 상영한 바 있는 일본 영화 [나라야마 부시꼬]에는 육체적 힘은 넘치지만 정신적 사유는 박약한 사내가 여성의 부족으로 결혼할 방도가 없어지자 수시로 이웃집 개를 겁탈하는 장면이 나온다. 과거 유목민 사회에서 이같은 일은 아마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요즘 우리 사회에서 거론되는 미성년자에 대한 성 보호법 같은 것을 동물계에 적용할 필요가 없으리라는 법은 없다. 

 

 

헌법까지 동원해 동물학대를 막고 인간과 똑같이 한 가족으로 보려했던 유목민들의 심성은 그들의 시에서도 수없이 반복해서 나온다.

        나의 가을에 태어난 어린 양아!

        이마엔 하얀 줄무늬가 있는 너를

        수천 마리의 양떼들 가운데에 있어도

        나는 항상 알아 볼 수 있구나!

        메에!메에! 우는 소리

        오라면 항상 나에게 뛰어오네


        (생략)


        우리에서 태어난 후로

        우리 둘이서 늘 놀았다네

        무릎을 꿇고

        엄마 젖을 빠는 너

        나의 가슴에서

        얼마나 반갑게, 얼마나 반갑게, 나를 핥는다

이것은 몽골의 대표적인 현대 시인 나착도르즈(D. Nacagdori)가 쓴 [가을에 태어난 어린 양]의 일부인데, 인간과 동물의 애틋한 관계가 마치 가족간의 우애처럼 그려져 있다. 이런 유목민들에게 동물 학대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초원에 가면 타르박이라는 야생 쥐가 사는 구멍이 있다. 이 구멍에 오줌을 누었다가 몽골인들에게 두고두고 원성을 들었다는 어느 한국인의 경험담은 그냥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유목민들은 호랑이와 사자를 교배해 라이거를 만든 일을 자랑스러운 기술 발전이 아니라 생태계를 뒤흔드는 인간의 오만이라 생각할 정도이다. 자. 그러면 정착민들은 스스로에게 따져 물어볼 일이다. 도대체 야만이란 무엇이고 문명이란 무엇인가.

자료; http://bbs.chosun.com/file/upimages/2018112/1/0624[2005062411492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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