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정방문시 금기 사항


o 기둥에 기대고 서거나 앉기

o 두 기둥 사이로 지나다니기

o 문 정가운데에 서기

o 화로에 쓰레기 버리기

o 연장자의 면전으로 지나가기

o 물건을 받을 때 왼손으로 잡기

 (반드시 오른손으로 주고 받을 것)

o 타인의 모자 써보기

 (만약 써볼 경우 모자 안쪽에 침을 2-3번 뱉고 써 볼것)

o 손님들끼리 외국어로 오래 말하기

o 칼로 사물을 지칭하기

o 불을 향하여 발뻗고 앉기

 

□ 몽골 목민 가정 방문 때 주의 사항

 

o 왼손으로 문을 열고 오른발부터 들어간다.

o 들어갈 때 문지방을 밟으면 안 된다.

o 문짝이 둘일 때 들어가면서 오른손으로 문을 잡아서는 안 된다.

o 몽골전통집인 게르에 들어가고 나올 때 고개를 숙인다. 그렇지 않으면 머리를 부�쳐서 다칠 수 있다.

o 집에 들어가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다.

o 집주인이 좌석지정을 해 주지 않으면 들어가서 남성은 왼쪽으로, 여성은 오른쪽에 앉는다. 만약 오른쪽에 공간이 없으면 왼쪽에 앉는다.

o 연장자나 인솔자가 상석에 앉는다.

o 가정방문 때 차나 마유주를 대접받는데, 이를 거절해서는 안 되며, 맛을 본 뒤 내려놓아도 된다.

o 유제품 등의 먹거리를 접시에 담아서 내면 손을 대서 맛을 봐야 한다.

o 코담배로 인사를 청하면 조심스럽게 오른손으로 받아서 향을 맡은 후 뚜껑을 살짝 연 채로 돌려준다.

   만약 주인이 허락하지 않으면 옆사람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o 차나 마유주가 든 그릇을 바닥에 놓아서는 안 된다.

o 가정방문시 미처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아이들에게 사탕을 선물하거나 집주인과 담배로 인사를 주고 받아도 된다.

  ♣ 여행 시 주의사항

 ▷몽골은 여행자들에게 안전한 곳이다. 그러나 부주의로 간혹 어려움을 겪을 수 있으므로 아래의 주의사항을 알아두자.

  ◇ 외출 시 큰돈은 되도록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야외 시장이나 버스 안에서 가끔 소매치기를 당하는 경우가 있다.
◇ 길 건널 때 주위를 살피고 건너야 한다. 신호등도 없고 교통정리를 하는 경찰도 흔치 않다.
◇ 음식물을 살 때는 가급적 큰 슈퍼에서 사야 싱싱하고 깨끗한 물건을 살 수 있다.
-- 울란바토르 시내에서는 "미니델구르"라는 체인점을 이용하면 좋다.
◇ 울란바토르 전역의 수도관이 낡아 수돗물을 틀면 녹물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처음 3-4분 정도는 계속 틀어놓은 뒤 사용하고 절대 마시지 않는다. (마시는 물은 사서 먹을 것)
◇ 여권은 꼭 사본을 준비하여 여권과 따로 보관한다.
-- 호텔 체크인이나 은행에서 환전할 때 여권 사본을 제시해도 상관없다.
◇ 몽골 출국 시 공항에서 12$ 비용이 있다.
◇ 박물관이나 사원 안에서 사진 촬영을 할 경우 미리 돈(약 5.000투그릭)을 내고 허락을 받아야 한다.
--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몰래 사진을 찍으면 제재 뿐만 아니라 몇 배의 벌금을 물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 야간에 인적이 드문 길로 다닌다거나, 몽골인의 집을 방문할 경우 취객이나 사나운 개 등을 조심해야 한다.
◇ 겨울에 여행할 경우 내의, 방한모, 목도리, 두툼한 파커 등으로 매서운 몽골의 추위에 대비해야 한다.
-- 바람은 별로 불지 않는다.  

 

▷몽골은 전통적으로 샤머니즘이 강해서 도시, 지방을 막론하고 몽골인들 사이에는 사소한 금기가 많다. 여행자가 알아두어야 할 간단한 몇 가지만 살펴보자

  ◇ 실내에서 모자를 쓰고 있거나 문턱, 부뚜막을 밟는 일
◇ 담뱃대나 손가락으로 다른 사람의 머리를 가리키는 것
◇ 겔 안 난로 아국이 속으로 담배 꽁초, 피 묻은 휴지 등 쓰레기를 버리는 것
◇ 뜻하지 않게 상대방의 발을 밟으면 곧바로 악수를 해야 한다. 몽골인들은 상호 가정방문이 많다.
평소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물론이고 외국 사람일 지라도 자신의 가정을 방문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평소에 작은 것이라도 서로 선물을 주고 받는 것을 좋아한다.
가정을 방문할 경우에는 하찮은 것이라도 반드시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 예의다. 대개 보드카 1병과 초콜렛, 사탕 및
한국산 T 셔츠 등 한국제품이면 더욱 좋다.
상대방의 부인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을 때는 화장품 정도가 괜찮다.
집에 들어가서는 식구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사람부터 "셴베노"(안녕하세요)라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그리고 주인이 권하는 자리에 앉아 주인이 권하는 수태차를 받는다.
가끔 몽골인들은 외국인이 불편할까봐 신발을 신고 들어오라고 하는 경우가 있으나 벗고 들어가는 것이 예의이다.  

 

  ▷몽골의 겔(전통가옥) 방문 시 아래 사항을 숙지하도록 하자.

몽골인들은 우리나라를 "솔롱고스(무지개)의 나라"라 하여 상당히 우호적이며, 우리나라 사람이 방문하면 환대를 해준다. 거기에 맞춰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문을 열고 들어가서 정중히 인사를 한다.
주인이 권하는 자리에 앉아 절대 문지방을 밟아서는 안 된다.
보통 주인이 음식을 많이 접대해 준다.
특히 마유주((술)을 받게 되면 두 손으로 다 마시고 혀로 컵을 두 번 정도 핥아주면 좋아한다.
몽골인들은 끊임없이 술을 권한다. 주는 대로 다 받아 마실 필요는 없고 정중히 거절하면 된다.
그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독한 술을 잘 마셔서 똑같이 술잔을 받아 마시면 대취하기 쉽상이다.

 

▷일상생활 및 행동의 주의할 점

    몽골인들을 처음 만나게 되면 우선 그들의 모습이 우리와 많이 닮았기 때문에 별로 낯설지 않고 친근하며 부담이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들 역시 우리를 별로 낯설지 않게 생각하며 우리가 한국인임을 알면 더더욱 친절하게 대해준다. 그들의 한국에 대한 감정은 무척 좋다. 그들은 현재의 몽골이 가난하며 발전하지 못했고 또한 몽골인들의 국민성이 나태하고 게으르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아 행여 상대하는 외국인들이 어떤 불편을 겪지 않나 혹은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무척 염려하며 잘 챙겨주는 편이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대가를 별로 바라지도 않는다. 고위직에 있거나 많은 젊은 지식인들 중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러시아어를 잘 하는 반면 영어를 잘 하지 못하므로 러시아어를 모르는 우리들이 그들과 만나 사귀는데 몽골어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항상 친절한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의 그 친절함이 관공서나 기타 업무에 관련될 때에는 무척이나 불친절하다. 다시 말해, 서비스 정신이라고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권위주의적이고 비합리적이지만 그들은 자기의 일은 자기만의 특권이라는 인식이 강해 보잘것없는 곳에 보잘것없는 직책을 가지고 있더라도 자기의 일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업무관계를 떠나 개인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하다보면 금방 가까워지고 그 다음부터 업무관계로 다시 그를 찾아가면 어느 누구보다도 일이 빨리 끝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 정이 지나쳐 터무니없는 것을 부탁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적당한 변명으로 거절하면 된다. 여하튼, 처음에는 다가가기 서먹서먹한 사람일지라도 조금만 친해지면 금방 오랜 친구처럼 대하는 몽골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보다도 더 정에 약한 사람들인 것 같다. 그러나, 이처럼 정이 많은 몽골인을 만나는 데에는 최소한 지켜야 할 예절이 있는데, 몽골인과의 교류 시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적어본다. 

■ 존칭사용
몽골말에는 상대방을 부를 때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너와 당신을 의미하는 2가지 말이 있다. 우리말의 너는‘치’, 당신은‘타’로 발음이 되는데, 친해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치’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1, 2 살만 위인 사람에게도 대부분 ‘당신’이라고 표현을 하지만 몽골사람들은 6~7년 정도의 차이는 대개 서로가‘치’라고 반말을 한다. 이는 버릇이 없다기보다는 상대와 그 만큼 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하다. 자기보다 어린 사람이 자기에게 반말할 때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버릇없는 것에 화가 나거나 다시는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가 않은데 그러한 마음을 일찌감치 버리고 상대방이 나와 친해지고 싶어서 혹은 친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또 하나의 이유는 외모상 한국인들은 몽골인들 보다 훨씬 어려 보인다. 항상 건조한 곳에서 생활하여 피부가 꺼칠해지고 따가운 햇볕에 피부가 그을려 그들은 상대적으로 한국인들에 비해 5∼6살 혹은 열살 이상 나이가 많아 보인다. 또 하나의 이유는 일찍 결혼을 하므로 아무래도 남자들은 더 빨리 늙는 것 같다. 따라서, 그들은 나의 나이가 상대방 몽골인 보다 훨씬 많아도 겉으로 느끼질 못하므로 처음 만날 때 자기소개를 하면서 자연스레 내 나이를 얘기하는 것도 괜찮다.
 
많은 몽골인들은 친구들의 연령차가 정말로 다양하여 7, 8살씩 차이가 나도 내 친구 운운하며 서로가 잘 어울린다. 가끔 멋모르는 한국인들이 어린놈이 반말한다고 분을 삭이며 그들을 버릇없는 놈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지만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그들과 대화가 이루어질 수가 없다. 상황에 따라 xx 씨라고 불러야 할 때가 있는데 고아이(Mr.)라고 부르면 자연스럽다. 선생님에게는 바크샤라고 부르는 것이 예의이고 나보다 나이가 5∼15여살 많고, 내가 정말 친해지고 싶을 때는 상대방을 아하(형)라고 부르는 것도 꽤 친밀감이 있어서 좋다.
 
실례로 몇 년 전 삼성의 한 직원이 이곳의 한 거래선에 상담을 하러왔다가 하루종일 상담을 해도 결말이 나지 않고 지치자 통역에게 몽골어로 형이 무어냐고 묻고는 상대방에게 아하 한번만 도와주세요 라고 말했는데 한치의 양보도 없던 상대방이 그 얘기를 듣고는 호탕하게 큰 소리로 웃으며 우리가 원하는 가격에 상담을 마쳤다고 한다. 물론, 그들의 관계는 그 이후에도 항상 형과 동생처럼 이어진 것은 물론이다.
 
■ 식사시 예절
몽골사람들은 수태차라고 하는 차를 즐겨 마신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이 몽골인들은 수태차를 마시는 것이다. 수태차는 끓는 물에 우유가루와 짭짤한 맛을 내는 약초를 섞은 것으로 익숙해지면 보리차 마시듯이 마시게 된다. 유목생활을 하던 몽골인들은 물이 가깝고 건초가 많은 곳에 겔을 짓고는 가축을 방목하였다. 따라서, 항상 물을 길어다가 조금씩 아끼며 사용했으며 겨울에는 아예 얼음덩어리를 집에다 갖다 놓고 그것을 깨서 끓여먹었다. 그러다 보니, 물이 깨끗할 리가 없고 또 추운   날씨를 이기기 위해서는 항상 물을 끓여 먹어야 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몽골인들은 항상 육식을 하므로 그 기름기를 없애기 위해서는 중화시키는 무언가를 먹어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수태차인 것이다. 수태차는 육식을 하는 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이고 젖냄새에 익숙해 있는 그들에게는 아주 향기로운 차인 것이다. 몽골인 집을 방문하면 이들은 항상 테이블 위에 대개 겉이 빨간 길쭉한 보온병이 놓여있는데 이 안에는 항상 따뜻하게 보온이 되어있는 수태차가 들어있다. 손님이 오면 몽골인들은 먼저 상대방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한다음 수태차를 사기그릇에 따라주며 두손으로 건내준다. 이때 받는 사람 역시 두손으로 정중하게 받으며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한다(몽골어로 '바야르랄라'). 그리고는 바로 입에다 대고 조금이라도 마셔야 하는데 한번에 다 마실 필요는 없지만 남기면 실례가 된다.
 
처음 마실 때는 젖냄새도 나고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들며 가끔은 우유 찌꺼기가 다 풀어지지 않아 뭉쳐 있는 것이 보이기도 하지만 결코 몸에 나쁘지 않으니 꾹 참고 천천히 마신다. 몽골인들은 차나 술을 상대방에게 권할 때 항상 오른손가락을 모아 잔 밑부분을 받쳐들고 왼손으로는 오른 팔꿈치를 받들면서 권한다. 하지만, 권하는 사람이 왼손잡이 일 때는 반대로 해도 상관없지만 받을 때는 항상 왼손으로 오른 팔꿈치를 받들며 잔을 받아야 한다. 나름대로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싶다. 몽골의 전통옷인 델은 소매가 길어 가만히 팔을 내려놓으면 소매가 손을 덮는다 -이는 추운 겨울에 손을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따라서 가운데 고기들과 술잔이 놓여있는 상위에서 음식을 먹거나 술을 따르고 권할 때 소매가 유난히 크고 길어 중간부분을 끌어당기며 받쳐주지 않으면 음식을 먹는데 아주 불편할 뿐 아니라 옷이 음식물에 닿아 옷과 음식이 더러워진다.
 
음식을 먹을 때도 주인이 권하면 역시 두 손으로 받아 감사의 표시를 하는데 이때는 잔이 아니라 그릇이므로 두손을 내밀며 그릇을 정중하게 받으며 감사하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음식이란 상대방의 성의를 생각하여 많이 먹는 것이 좋으나 상황에 따라 이미 배가 부른 경우나, 혹은 느끼해서 도저히 먹지를 못하겠다면 음식을 하나 입에다 넣어 맛을 본 후 적당한 핑계를 대며 음식을 내려놓는 것이 좋다. 맛을 본 것 자체가 예의를 지킨 것이므로 구태여 들어가지도 않는 음식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예의를 지키기 위해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간신히 먹을 필요는 없다. 

■ 가정 방문시
몽골인 가정을 방문할 경우에는 하찮은 것이라도 반드시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 예의다. 대개 보드카 1병과 초콜렛이나 사탕 정도면 된다. 그러나, 상대방의 부인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을 때는 화장품 정도가 괜찮다. 설사, 시간이 없고 가게가 문을 닫아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돈을 주는 것도 일반화 되어있다 (깨끗한 돈으로 2,000 투그릭 정도면 알맞음).
 
집에 들어가서는 식구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사람부터 ‘사잉 밴오?’(안녕하세요) 라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면 된다.(명절날은 다름) 그리고, 주인이 권하는 자리에 앉아 주인이 권하는 수태차를 받는다. 가끔 몽골인들은 외국인이 불편할 까봐 신발을 신고 들어오라고 하는 경우가 있으나 벗고 들어가는 것이 예의이다.(아파트나 목조건물 등에서)

※ 몽골 게르(겔) 방문 시 다음 사항에 주의해야 한다.
① 문을 열고 들어가서 인사말을 한다.
② 중앙의 난로 옆에 좌우로 2개의 기둥이 나란히 놓여있는데 왼쪽 기둥의 바깥쪽에 서서 주인이 권하는 자
리에 앉는다. 두 기둥사이로는 오고 가고 할 수가 없다.
③ 자리에 앉아서는 그들이 주는 수태차를 정중하게 두 손으로 받아 마신다.
④ 용무가 끝나고 나올 때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뒤로 되돌아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앞쪽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
아 나와야 한다.
⑤ 절대 문지방을 밟아서는 안 된다.
⑥ 인사말을 한다.
* 명절날에는 인사할 때 서로가 팔을 벌리고 껴안으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젊은 사람의 뺨에 자기 코를 갖다
대고 냄새를 2번 정도 마신다. 

■ 시간관념
몽골인들은 시간에 대한 관념이 별로 없다. 보통 30분 정도 늦는 것에 별로 미안해하지 않는다. 이는 급할 것이 없는 민족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고 우리마저 그럴 수는 없는 일로써 그들에게 무언가를 느낄 수 있도록 약속시간을 정확히 지켜주는 것이 좋다.

■ 복장
① 정장은 양복과 흰색 긴팔 와이셔츠에 넥타이 이다.
② 명절 때는 몽골 전통옷인 델을 입는 것도 괜찮다.
③ 평상시 너무 어리게 입거나 추잡하게 입지 아니한다.
④ 명절 때(신찔, 차강사르) 방문시 항상 모자를 착용한다. 이들은 명절 때 손님이 올 경우 주인이나 손님이나
모자를 쓰고 상대방을 맞는 것이 예의이다.
⑤ 몽골인과 밖에서 만날 때는 절대로 반바지를 입지 말며 부득이한 경우에 운동복을 제외하고는 삼가는 것이
좋다.

■ 검지손가락으로 사람을 가리키지 마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언가를 가리킬 때 검지손가락을 사용하는데 이는 몽골에서는 대단히 실례되는 행동으로써, 상대방을 죽이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인 모르게 이러한 행동을 했다면 즉시 사과를 하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좋다. 무언가를 가리킬 때는 손바닥을 펴서 가리킨다. 

■ 음주예절
몽골인들은 손님이 오면 항상 준비해둔 보드카 및 여름철에 시골에서 가져온 마유주(말젖을 발효시켜 만든 술로서 막걸리와 비슷한 맛임) 등을 권하는데 보드카는 조그만 잔을 이용하지만 마유주는 커다란 대접에다 가득 담아 준다. 술을 주고받을 때는 보드카의 경우 차를 마실 때와 같이 왼손바닥으로 오른 팔꿈치를 받쳐 잡으며 오른 손가락을 모아 술잔을 받으면 되고 마유주는 대접에다 주므로 두손으로 대접을 받으면 된다.
마유주는 처음 마시면 대개 설사를 하게 되는데 위장을 깨끗이 해준다고 하며 설사 후에는 몸이 아주 가벼워짐을 느끼게 된다. 마유주를 마시면 별로 취하지는 않고 배가 불러오는데 화장실을 자주 가게 된다. 또한 보드카나 몽골 아르히 등을 마실 때에는 왼손으로 술잔을 잡고 오른손의 네번째 손가락을 술에 대어 술을 묻힌 다음 얼굴 앞으로 갖다대어 먼저 하늘을 향해 엄지손가락으로 튀기고 다음엔 앞을 향해 그리고는 땅을 향해 튀긴 다음 입에다 갖다대는 것이 예의인데 마유주를 마실 때는 그럴 필요가 없다. 이는 하늘과 땅에 감사하고 또 인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몽골인들은 술을 마실 때 끊임없이 술을 권한다. 그렇다고 다 받아 마실 수는 없으므로 보드카의 경우는 조금만 입에 대어 예의를 표하고 술을 못한다고 정중하게 얘기를 하면 괜찮은데 마유주는 약하므로 최소한 1 대접 정도는 마셔야 한다. 몽골인들 얘기로는 술을 받을 때 3잔까지는 기본적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 예의라고 하지만 적당한 핑계를 대고 정중히 거절하면 된다. 또한 한국은 술잔을 완전히 비우면 술을 따르지만 몽골에서는 술잔이 조금만 비워도 술을 따른다. 참고로, 몽골인들은 보드카나 마유주를 잘 받아 마시면 무척 대견스러운 듯 흡족해 하며 아주 좋아한다.

■ 흡연
몽골에서 흡연은 몇몇 장소를 제외하고는 가능하므로 주위를 살펴 금연표시가 없는 곳에서 피는 것이 좋다. 몽골 가정을 방문하다 보면 나이 드신 어른들이 있는 경우 인사를 할 때 그들은 소매춤에서 조그만 옥돌로 된 병을 꺼내어 정중히 건네준다. 이것은 하마링 타미흐(코담배)로서 두손으로 정중히 받아들어 뚜껑을 열고 뚜껑에 붙어있는 귀 청소기처럼 생긴 것을 구멍 속에 밀어 넣어 재(잎을 곱게 갈은 것)를 왼손가락 위(보통 둘째 및 넷째 손가락)에 조금 묻힌 다음 엄지손가락과 함께 비비면서 코로 들이마시면 되는데 진짜 들이 마시지 말고 시늉만 내는 것이 좋다. 처음 경험하는 사람들은 대개 들이마시는데 재채기가 끊이지를 않는다. 그리고는 다시 뚜껑을 닫아 정중히 두손으로 건네준다. 또한 공공기관에서 흡연 구역일지라도 옆 사람의 동의를 구한 후 피우는 것이 무난하며 손윗사람 앞에서는 담배를 되도록이면 삼간다. 이곳에서는 여성도 자유스럽게 담배를 피우며, 저항감을 표정에 담지 않도록 한다. 
■ 여자에게 나이를 묻는 것은 실례
몽골에서 처음 만났거나 친하지도 않은 여자에게 나이를 묻는 것은 실례이며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는다. 이때, 끈질기게 여자의 나이를 물어보거나 혹은 무슨 띠인지 물어보는 것은 무례한 짓이며 상대에게 여간 부담을 주는 행동이 아니다. 생일 등은 물어봐도 상관없으며 정 상대의 나이가 알고 싶으면 친숙해져서 부담이 없어지면 그때 가서 나이를 물어볼 수는 있다.

■ 거리에서
① 몽골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좌측통행이다.
②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반드시 신호를 지키며 보행신호 시에도 차가 오면 일단은 경계를 하는 것이 좋다.
(교통신호를 별로 지키지 않음)
③ 몽골은 우회전하자마자 횡단보호가 나오면 대개 차들이 서지 않고 바로 지나간다.
④ 야간에 택시를 이용하게 되면 콜택시를 이용하고 여자의 경우 야간에 혼자 택시를 타지 않는 것이 좋다.
⑤ 몽골인 대부분은 무단횡단을 하지만 가급적이면 무단횡단을 하지 말아야한다.
⑥ 큰소리로 사람을 부르거나 이야기하지 말고 현금을 많이 갖고 다니지 않는다.

■ 호텔에서
① 시내 고급 호텔의 경우 종업원의 서비스를 받으면 1$정도의 팁을 주나 지방에서는 팁을 줄 필요가 없다.
② 방에 비치된 호텔 안내책자를 먼저 읽어본다.
③ 노출이 심한 복장으로 복도나 로비에 나오지 않는다.
④ 방에 현금이나 귀중품을 놓지 않는다.
⑤ 방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 식당에서
① 음식값 계산은 후불이며 계산을 확인하는 것이 좋다.
② 몽골의 대부분의 식당 및 호텔 그리고 상점에서는 컴퓨터가 있다 할지라도 컴퓨터로 계산을 하는 것이 아니
라, 거의가 종업원이 계산기로 계산을 하므로 착오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③ 음식값을 계산할 때에는 반드시 현지화로 낼 수 있도록 하고 반드시 영수증을 받는 것을 습관화한다.
④ 식당에 들어가서는 종업원에게 동반자 수를 말하고 안내를 기다리는 것이 좋다. 종업원을 부를 때는 큰 소
리로 부르지 말고 손만 조용히 드는 것이 좋다.
⑤ 테이블 아래로 떨어진 수저, 포크, 젓가락 등은 다시 집어 사용하지 않는다. 

■ 선물
① 선물은 적당한 가격의 한국적인 상품이 좋다.
② 가정방문시 남자에게는 보드카 1병, 부인에게는 화장품류, 아이들에게는 사탕이나 초콜렛 등이 좋다.
③ 꽃을 주고 받는 것을 별로 보지 못했으며 꽃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가끔 꽃을 좋아하는 여자들도 있지만 그
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꽃만을 선물하는 것은 좀 어색하다. 가령, 특별한 날, 남녀의 선물에 있어서 보드카 혹
은 초콜렛이나 사탕 등을 비닐종이로 싸고 장미꽃 조화 1송이를 꽂은 선물들은 흔하게 볼 수 있다.
④ 선물을 주고 받을 때는 일어서서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는다.
⑤ 선물이 준비되지 않았으면 돈으로 줘도 무방하다.(2~3천 투그릭 정도)
⑥ 고가품, 고액의 선물은 피한다.

■ 파티
① 초청장을 필히 지참한다.
② 작은 선물을 준비하여 주최자에게 준비한다.
③ 자기 소개를 할 명함 등을 준비한다.
④ 초청자 이외에는 추가 동반하지 아니한다.
⑤사전통보 없이 무단 불참하지 아니한다.
⑥무리하게 술을 마시거나 권하지 않는다.
⑦담배는 지정된 곳이나 양해를 구하고 핀다.

■ 종교
① 몽골인들은 대부분 티벳 불교인 라마교를 믿으므로 타 종교와의 논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② 사원 같은 곳에 가서 내부 및 신자들이 절하는 모습 등 촬영은 가급적 삼가도록 한다.

■ 쇼핑
물건을 살 경우 돈을 지불하는 방법은 상점에 따라 크게 2가지로 나눌 수가 있는데 하나는 국영 백화점과 같이 여러 종류의 가게가 한 주인에게 속해있는 경우에는 물건을 고른 후 그 물건의 가격을 종업원으로부터 받아 직접 계산대에 가서 돈을 치르고 그 영수증을 다시 종업원에게 갖다주어야 한다. 이때, 종업원으로부터 영수증을 받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른 한가지는 슈퍼나 시장과 같이 개인이 자기 가게를 운영하는 경우에는 물건을 고르면서 돈을 지불하면 되는데 대형 슈퍼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경우 영수증이 없다.
 
몽골에서는 아무리 물건을 많이 산다해도 깎아주거나 덤으로 서비스를 주는 법이 없으므로 애석해 하지 말기를 바란다. 또한, 하르자흐나 텀자흐처럼 사람이 아주 많이 몰려드는 곳에 갈 때는 도둑을 맞기가 쉬우니 돈 간수를 잘해야 하며 그들과 부딪힌다 해도 화를 내거나 신경질을 낼 필요가 없다. 이곳에는 많은 몽골인들이 값싸고 좋은 물건을 사기 위해 항상 장사진을 이루는데 걸음을 옮기기가 힘들 정도로 사람이 많고 접촉이 심해 한번 갔다오면 옷이 더러워져 빨아야 한다. 그리고, 계산시는 항상 다시 검사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몽골인들은 계산할 때 거의 계산기에 의존하여 계산기가 없이는 정확한 계산이 나오지가 않는다.

Copyright � 2006 www.mongoltimes.com

몽골에 선교 가시려는 분 필독사항

선교사 비자를 너무 고집하지 말라

몽골에 오려는 사람들은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알고 있어야 한다.

1. 선교사 비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우선은 비공식적으로 들어오는 것이 좋다. 그러기 위해서 신문이나 잡지에 광고를 내는 것은 좋지 않다. 현재 한국에 있는 몽골 정부의 사람들이 선교를 목적으로 입국하려고 한다는 것을 안다면 비자는 나오지 않으며 입국해서도 문제가 된다.

2.선교사 비자를 너무 고집하지 말라 우선 이곳에서 언어훈련을 해야 하니 학생 신분으로 입국하라. 이곳 대학의 초청장을 받거나 관광으로 들어와서 학교에 등록하는 절차를 밟으면 된다. 입국 6개월 전부터 준비해야 한다. 초청장이 꼭 있어야 한다. 이곳으로 연락을 하면 초청장 발부가 가능하다. 영문 이름과 생년월일,그리고 입국하고자 하는 날짜를 연락하면 된다. 참고로 통신의 보안을 위해서 힘써 줄 것, 목사, 선교사 용어를 사용하지 말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된다. 참고로 외국인들은 1년에 한번씩 거주 비자를 받아야 한다.이것을 받지 않앗을 경우 하루에 1$씩 벌금이던지 추방이다.

3.외국어 대학이나,국회 도서관에 가면 [몽,영,일,사전]이 있다. 그 사전을 복사해 와야 된다. 현재 몽한 사전이 없기 때문에 영어 사전이나 일어사전이 필요하다. 언어를 준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몽골 대사관에 문의해서 대사관 식구들에게 약간의 수업을 받을 수 있다.물론 약간의 사례를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일본어나,소련어를 공부하면 된다. 그러나 언어는 현지에 와서 직접하는 것이 가장 좋다.

4. 학비는 학교마다 차이가 있다.
* 국립대학-250$ 매달(6개월차로 선불하라고 요구함)
* 사범대-100$(에스페란토-110$ 매달)
* 아카데미-150$(에스페란토-210$,매달)
* 도서비-매달 30-40$
* INTERNATIONAL SCHOOL-매달 300$(1년치나 6개월치를 먼저 내면 할인이 된다. 유치원 과정과 국민학교 1-3학년 수준)


경제현황

이곳의 경제 현황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참고로 몽골은 물가 상승이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가 없을
정도다. 한번에 300-600% 정도 오른다는 것을 감안하라.신문을 통해서 발표되는 것은 1$당
400TG(투구럭)이나,은행에서는 380원으로 계산해 준다(94년11월9일 기준).
* 버스요금-30투그럭
* 택시요금-1KM당 130투그럭
* 호텔투숙비/울란바트로,바이앙골호텔
- 1인2일 최저 40$-120$
* 식사료-보� 1인당 1끼에 5-10$
* TV-350-600$
* 자동차-10000-40000$
* 집세-1개월당 200-500$
* 전화-몽골에서 한국으로, 호텔에서 1분당 7$
그외에 $로 살 수 있는 식품류(별로 없지만)는 한국과 비슷한 가격이라고 생각하면 됨.
* 4인가족의 생활비/매월 500-600$정도(교육비와 주택비를 포함하지 않은 지수)
* 마늘 한쪽 60TG(가끔 마늘이 나오지만 이들은 음식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상당에 비싼 편이다).

몽골의 정치

1921년 소련 다음으로 공산화한 몽골은 현재 자유 시장경제 제도로 가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그러나 실제로 몽골 내에서는 공산권으로 다시 돌아가자,선교사들을 내보내자는 등의 말들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정당은 MARP의 집권당 외에 5개의 야당이 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 당이 야당이라고 보지 않는다. 다만 공산당의 집권 체제 속에서 싹튼 나눔의 관계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가? 바로 민족주의다. 정부는 민족주의로 인도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하루 속히 징기스칸의 무덤을 찾아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전세계에 내보이자고 주장한다.민주주의라고 선포는 했지만 아직도 멀고도 먼 나라가 몽골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외국인을 추방하고 선교사들을 추방할 것이라고 보지만 나 자신은 이 나라가 너무도 가난하기 때문에 그렇게 못하리라 본다. 현재 몽골 정부는 갈피를 못잡고 있다. 자주 바뀌는 헌법과 경제적인 상황들이 정치인들을 어렵게 만들고 있고 각 기업이나 학교의 선생님들,노인들이 계속하여 항의하고 데모하고 있다.

의료현황

이곳에는 몇 개의 병원이 있고 의과대학도 있지만 이들의 수준은 극히 낮다고 볼 수 있다. 교과서만 가지고 공부하고 의료장비들이 형편없기 때문이다. 지난 70년 동안 러시아가 이곳을 지배하면서 이들에게 가르쳐 주고 전해 준 것은 하나도 없다. 이곳에는 기본적인 약품 등이 부족하다. 특별히 포도당이나 항생재,피임약 등이 부족하다. 이곳은 인구정책으로 인하여 다산제를 도입하고 있고 겔(몽골인들의 집)에서 부모들의 성생활을 눈으로 보면서 성장하기 때문에 성에 대해서 상당히 개방적이다. 현재 AIDS가 몽골에 들어 왔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다. 특별히 이곳에는 특이한 성병이 있다. 몽골 정부의 발표는 15%라고 하지만 그 이상으로 보고 있다. 이곳에서 성병이 걸리면 2개월만에 죽는다고 하는 것이 UN 측의 말이다.그러나 성병전문가이신 한국의 교수님을 통해서 들은 바로는 그런 강력한 성병은 없다고 한다. 앞으로의 연구과제이다. 지난 2년동안 주몽골 미국 대사관의 직원 2명이
이곳에서 죽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성병이었다고 하는 관계자의 말이다.

현지인들과 만나는 가운데 이들이 가장 많이 앓는 부위는 신장이다. 특별히 약하다. 많은 젊은 여성들이 고통 중에 있고,울란바타르의 경우 인구의 1/3이 결핵 보균자라고 하는 발표도 있다.또한 몽골인들 가운데 치아가 정상적인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치과 시설 또한 열악하기 때문에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지난 한국의 의료선교단이 이곳에 와서 진료하는 가운데 치과병원은 끊임없이 줄을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곳의 식수 사정이 좋지 않다. 많은 사람들의 말로는 석회질이 많다고 한다. 어느 날은 욕조에 담아둔 물이 새파랗게 물들고 어느 날은 황토색 물로서 흙같이 나온다. 이곳은 건조한 지대라 그런지 하수도가 없다.또한 러시아 부대에서 많은 것을 실험하고 그대로 강물로 버린다. 지하수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것이 몽골인들의 치아와 속을 버리게 된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에는 어떤 부위의 의사들이 필요할까?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 치과의사,내과의사,소아과 의사,예방학이나 공중 위생분야등이 필요하다.
* 간혹 약품을 보내주는 경우가 있으나 통로를 정확하게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애써 공급한 약들이 다음날 시장에서 판매되고 만다.
* 이곳의 모든 외국인들은 주로 6개월에 한번씩, 북경이나 모스크바,홍콩을 다녀온다. 그것은 소위 말해서 풍토병과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이다. 지금의 전전 미국대사가 이곳에 근무하다가 본국에서 대사일을 하겠다고 본국으로 돌아가서 직위해제 됐다는 말이 이해가 된다. 한국의 선교사들은 후원회에서의 이해 부족으로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니지 못하고 있다. 외국 선교사들이,한국선교사들에 대하여 많은 우려를 하는 부분 중의 하나이다.
* 감사한 것은 이곳에 연세친성병원이 설립됐다는 것이다.

매스컴

이곳의 매스컴은 상당히 자유롭다. 지난 11월 1일 기준으로 280개의 신문사들이 있다. 그들은 신문윤리위원회라는 것도 없고 자신들이 기사를 써서 내놓는다. 때문에 신뢰성에 상당히 문제도 있지만 숨김없이 사실대로 나온다. 한국의 신문에 비교하지 말라. 큰 회사의 것은 주로 신문지 4-8페이지 정도의 규모이고, 작은 것은 백모지 1장의 규모도 있다. 1주일에 보통 1-3번 정도 출판된다. TV쪽은 몽골 방송국이 1개,러시아 방송국이 1개, 그리고 영어 방송을 받아서 하는 작은 방송국 하나가 있다. 주로 오후6시부터 시작해서 10-11시까지 방송되는데 주말의 개념은 없다.
라디오는 공산주의 특유의 방식대로 각 가정에 라디오 케이블이 들어 있다. 라디오의 잭을 꼽으면 몽골방송이 나온다. 단파 방식이며 1개의 채널밖에는 없다.

실제로 몽골에 오는 분들께

필수사항(장기적으로 정착하고자 하는 가정) -
겨울옷(한국에서의 겨울용은 이곳에서 가을에 입을 수 있다)
약품상자(특별히 콧물감기,설사,마이신,소독약,대일밴드 건조하기 때문에 상처가 잘나고 아물지가
않음,비타민 다량,알러지 약, 소화제,주사기 마늘 솜). 음식 - 캔 종류의 �잎,김(건조해서 누지지
않음),미역,다시다, 라면,인스탄트 채소국(농심의 배추국),밀가루,그 외에 한국인이 꼭 섭취해야 하는
음식 중에 캔과 썩지 않는 것.
전자제품 - 이곳에서는 기대하지 말것.특별히 자녀들 교육을 위하여 비디오 테이프를 준비하려면
한국에서 준비해오던지 이곳에서 비싸지만 멀티시스템을 준비할 것, 한국과 씨스템이 다름. 세탁기는
크지 않지만 국산이 있음. 청소기(훨타 많이),히터,도란ㅅ (220-110),가습기,전기장판(220V용).
문구용품 - 종이(이곳은 종이를 생산치 못한다),화첩,매직,공책, 어린이용,문구...등 자신의 사역에
맞게 준비할 것.
책 - 성경공부 교재, 신앙인을 위한 소책자 등등....

읽으면 도움이 되는 책

* [몽골어와 퉁구스어]/김방한,김주원,정제문,86,10,31 믿음사 6,000원
* [몽골민족]/권오성,김선농,김태곤,임동권,정병호,92,1.30.복조리4.000원
* [몽고문화사]/D.마이담,N.츄르뎀,김구산 역,91.3.10.동문선문예신서
* [몽골사회제도사]/주채혁 92.대한교과서 주식회사 9.500원
* [징기즈칸]/르네,그룻세,최호연 역 83,2.10 정음문화사
* [만두하이]/얀달자빈,나차구도루지 90.5.10설영환 역,문학출판공사
* [소설 징기스칸]/바실리 얀,최종수 역 푸른산
* 우편상태-이곳의 모든 통신은 도청당합니다. 또한 우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소포를 보낼 수
있습니다. 1KG당 5000원이며 2주일 걸립니다. 그 소포 안에 소식을 전하십시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편으로 ..소포는 1개단 10KG이 한계입니다. 포장을 상당히 신경 쓰셔야 합니다.
결론 : 몽골의 복음화는 한국교회가

몽골은 인구가 적고 땅이 넓다. 그러기에 선교에 소홀할 수가 있다. 그러나 중앙 아시아의 선교센타로 이용하고, 전세계를 정복했던 징기스칸의 후예들을 복음화시켜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힘쓰도록 기도하고 헌신한다면 이곳은 어마어마한 선교의 시장이다. 과거 역사 속에서 한국을 100년동안이나 지배했던 나라, 몽골, 그러기에 더욱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해야 한다. 왜 한국교회가 몽골의 복음화를 책임져야 하는가?

1. 한국인의 의식구조와 흡사하다.
2. 언어의 구조가 같은 알타이어에 속하여 유리하다.
3. 한국인과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4. 한국의 초대교회의 상황과 비슷하다.
5. 한국교회의 복음에 대한 빚이 있기 때문이다.

몽골에서 천강민 선교사

신임 전문인선교사의 짧은 몽골선교 경험, 그 기대와 현실

선교 사역지에서 볼 때, 몽골은 창의적 접근지역임이 틀림없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이사야 42:1~4)

전문인 선교사는 선교적인 소명을 가지고, 어떤 특정 분야에 전문가로서, 혹은 신분상 전문가 형태를 띠고 타문화권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다. 2003년 한국선교연구원(KRIM)에서 69개 단체를 대상으로 한 한국선교사 실태조사에 따르면, 2002년 말에 파송된 선교사는 10,422명이었다고 한다. 그 중 목회자는 31.9%(3,324명), 평신도는 68.1%(7,097명)인데, 평신도사역자 중에서 일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숫자는 1,525(21,5%)명이었다.

이 자료가 한국교회의 파송선교사를 다 포함하지는 않겠지만, 세계선교에서 목회자보다 평신도 참여비율이 크다는 것과 전문 직업으로 사역하는 이들의 수가 적지는 않지만, 그의 두 배 이상은 전문인 선교사이면서 전통적인 형태로 선교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즉 평신도 선교사들이 자신의 전문성이 있는 전문인 선교사임과 동시에 후원자들과 공동 사역을 하는 것이다. 이는 선교의 기회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었으되, 달란트를 가지고 있는 세 부류가 동시에 관계하여 연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여기에서 보낸 자나 보냄을 받는 자, 그리고 현지에서 동역을 이루는 자들이 함께 참 동역을 이루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음을 상기시켜 본다.

현대의 선교사는 소명과 함께 선교사로서의 외부적 환경-후원과 관리-를 확보하면서 사역에 임한다. 이는 이미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이 땅의 구원을 감당하실 때에 성부와 성령이 함께 동역하심으로 증명된 바 있다. 이처럼 선교적 수행은 하나님의 예정에서부터 비롯되되, 후원자들로부터 선교사로 파송 받아 선교 현지에서 사역자들과 함께 동역을 실천하며 원만히 이루어 나아갈 때에 달성된다. 이 가운데 특히 전문인 선교는 이 세 구조로서 이행되는 데에 선교를 보다 완전하게 하는 필요충분조건 요소로서 충족될 수 있을 것이다.
본인은 몽골의 울란바타르대학교에서 전문인 선교사로서 정착해 가는 과정에 있다. 이 3년의 경험에서 결론이라 내릴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잠정적이나마 그 무엇도 없지만, 적어도 경험한 사역의 그림자들을 돌아볼 때에 위의 세 가지가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음을 확인해 가고 있는 즈음이다. 이에 전문인선교사로서의 처지를 돌아보며, 후원과 동역으로 얻어질 협력 사역의 향방을 내다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늠해 본다.

많은 선교 인력이 전문인의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전문인선교사는 자신의 전문 달란트로서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요소를 인식하여 선교의 접촉점 기능을 한다. 현지의 실리적인 기능으로 그 사회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에 그 사회에서 환영을 받는다. 물론 이에는 질적인 성취를 이룰 수 있을 만큼의 전문성을 전제로 한다. 특히 몽골은 공산주의체제에서 자본주의체제로 이양되면서 이에 알맞은 지적 자산을 늘리려고 전문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전문적인 인력의 수급을 매우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개방 초기부터 전문인선교 형태로서 선교를 열어 놓은 셈이 되었다. 이는 마치 선교의 출구를 몽골 스스로 열어놓아 선교의 기회를 자발적으로 불러들인 듯한데, 선교의 질적 수행을 위해서 자본의 지식만 전달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기도하는 어린이


실제 선교 사역지에서 볼 때, 몽골은 창의적 접근지역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같은 범주에 속하는 다른 지역에 비하면 몽골은 선교가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지만, 외국인으로서는 교회이든 학교이든 종교적인 활동이 통제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몽골법으로 재어보면 선교사는 위법자에 해당된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국가이면서도 몽골정부로부터 기독교 증가의 억제 혹은 지역까지 조정 당하므로 여기에 선교적으로 접근하려면 조심스러움이 필요하다. 그래서 교회 사역을 하더라도 목회자 선교사도 전문인으로서 선교적인 접촉점을 확보하면서 선교적인 실마리를 찾고, 이것이 선교에 어떠한 영향력을 미칠 것인가를 놓고, 복음의 성품이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미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함으로 부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 반드시 선교적인 대상이 있고, 또 그곳에서 언제든지 예외적인 문제가 발생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이를 전문인 선교사로서 선교를 내다볼 때, 대학이 교육으로서 앞으로의 사회를 어느 정도 조정할 수 있는 관문임을 알고 진지한 접근과 대안이 필요하다 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에서 선교의 다양한 가능성이 개발되기도, 저하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도 그 지적 수준을 어느 정도 확보하되, 영적인 추진력 또한 동시에 있어야 할 필요충분조건임을 상기시켜 준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 2:10)

전문인 선교사들은 전문인이기에 성경적인 지식으로서 선교대상자에게 복음을 직접 들려주는 혹은 그 이상으로 사회의 욕구를 해소해 주는 데에 절대 시간을 보낸다. 이는 바울이 말한 바, 더 많은 이를 얻기 위한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것과 같이, 먼 장래를 바라보고 더 많은 이를 얻기 위한 선교의 문을 여는, 사회적인 필요와 선교적 소명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는 효율적인 기능성의 요구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문성과 영적 실행 능력이 동시에 필요하며, 그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실행방법에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충실함으로서 얻어야 할 열매는 다름 아닌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헌신을 넘어서서 외국인으로서 겪는 문화적인 이질감을 소화하고 현장에 맞는 방법을 찾는 데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여 지구력과 창의성을 요구한다. 이 원동력은 물론 그리스도의 사랑일 것이다. 그러면 이를 어떻게 현실화 할 것인가.
선교사는 상황 중심의 사고로서 주어진 환경에 충실했을 때 그 일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선교지란 예측불허의 상황이 늘 잠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일을 어느 정도는 실효성 있게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인의 경우에도 일의 성취는 학습자들의 실력 향상이나 적어도 학습에서 동기유발 기능이 이루어지면서 시작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쉽지 않다. 특히 지식에 대한 욕구가 비교적 낮은 편의 학습자들에게 학습의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교수자의 가장 큰 역할임에도 그러하다. 교육은 교실에서 뿐만 아니라 학습자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도록 그들의 견고한 습관, 그것을 장악하고 있는 만연된 정서의 이해를 전제로 하여 서로 소통되지 않은 부분까지 해소할 수 있도록 학습자들에게 접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육의 연장으로서의 그들의 학습 진도를 체크하는 일에도 많은 시간을 소모하여야 비로소 교육의 효율성을 완수할 수 있다. 여기에서 업무량과 시간은 서로 관련이 없다. 다만 주어진 환경에 따른 관리 능력이 작용할 뿐이다.

한편으로 많은 전문인선교사들이 그러하듯이 본인도 교육 행위 가운데에 복음적인 의미를 담거나,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덕목을 실천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그러므로 선교대상자인 학습자들과 평소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심겨지도록 돕는 데에 고심한다. 교육 사역의 결과가 무엇이라는 점은 이미 밝혀진 바며, 하나님께서도 이를 사용해 가고 있음을 익히 아는 바가 아닌가. 이는 궁극적으로 기독교적인 마인드로 가르치며 본을 이루고 있는가가 관건이다. 본인은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가 자문한다. 이는 학습자들에게서 발생하는 모든 경우를 의식하면서 그것에 수업 이상으로 충실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부담 때문에 오히려 세상 속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도덕적인 잣대를 가지고 자신은 물론 학습자들에게 경찰 같은 훈계자가 되어 버리고는 한다. 학습자들의 지적 환경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바로 사역의 근거지로서 오지임을 완전히 소화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곧 방법의 미숙함 때문에 세상의 유전을 전달할 위험한 가능성에 선교자 본인이 놓여 있는 것이다. 선교사로서 학습자들에게 진정으로 요구하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수업 속에 오래 할당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결국 오류로 남는다. 이는 선교사 자신이 소외의 한 자리에 놓여 있으므로 하여 책임감이나 주의를 집중하는 정도로는 역부족인 데서 오류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절대적인 시간 속에서 탈진된 교육자가 무슨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교육자에게 선교지는 바로 교육 현장이 아닌가. 교육전문직 선교사들의 타문화권 현장은 바로 교실인 것이다.

전문인 선교사는 사역의 한 요소자로서 소명에 충실하려면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어느 정도 끝내놓고서야 비로소 그 일에서 자유를 얻는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일의 속성상, 못해 내거나 남아 있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결국 그 일을 던져버리듯 일에서 손을 떼어 놓고는 한다. 그럴 때 당사자는 갑자기 일 속에 묻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본인의 정체성을 의식한다. 본인이 하는 일에서 선교적인 가치는 무엇인가 자문하는 것이다. 전체 속에서만 기능하는 작은 한 부분으로서의 자신을 볼 때, 선교적인 가치라는 일 속에 제대로 묻혀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며 자신의 소재지에 당황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어진 일에 얼마나 충실했느냐 혹은 선교적 가치는 물론 일의 대가가 충분한가 하는 문제와는 별도의 문제로서 공의와는 상관없이 영적 공백의 순간에 던져져 있는 본인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하루하루의 일상 과정 속에서 선교사임에도 불구하고 전문인으로서 제 기능을 제대로 다하고 있는지 묻는 정체성 물음에 당면할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교육 사역은 전인격적인 사람이라는 열매를 얻는 대의명분 대가가 있다. 교육적인 활동은 백년지대계의 가치를 갖고 있지 않은가. 선교사로서 행위에서 갖는 본질적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가 준 인간 사랑의 아주 작은 보답이 아니던가. 그 만큼 하루의 일상 시간 그대로 선교의 절대적 가치를 담아야 하기 때문에 갖게 되는 기대감과 충족감도 크고, 또한 때에 따라서 상실감 또한 작지 않다. 언제나 기대와 현실은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은, 관점에 따라서는 본인의 편견일 수도 있는 기대와 현실의 간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선교지란 모국의 문화와 비교하면 안되는 문화적 차이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 문화적인 차이를 안다고 할지라도 일에서 금방 빠져 나온 듯한 순간에는 주어진 현실을 정죄하는 오류를 범하고 만다. 그러므로 문제는 기대와 현실 양쪽에 다 있다. 전문가로서의 기대는 고국에 두고, 현실만 절실하게 안고 살아야 하는 선교인가 하는 혼란을 의식한 채 말이다.

선교사는 선교사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성격을 가져야 한다는 이 책임 의식은 본인의 위치를 경각시켜 주기도 함과 동시에 실제 예상 외로 때로는 복잡한 마음의 경로는 지나게 한다. 전문인 선교사로서 삶 혹은 그 일상 자체로 복음 전도의 기능을 다해야 한다는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여 떠맡게 되는 상실감으로 인하여 낙심되는 처지에 놓인다는 것이다. 이러할 때는 오히려 본인 스스로에게 좀 더 투명할 필요를 느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연약함까지 보게 하는 편이 낳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일들에서 멀어져 있는 자신이 아닌지 하고. 이는 한편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의식으로 다른 무엇으로 해소하려는 욕구를 만든다. 죄가 죄를 부르듯이. 이를 이기는 데에 영적인 회복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늘 탈진할 수밖에 없는 자가 전문인선교사가 아닌가 한다. 선교사 본인의 함량과 동역자, 선교 대상을 포함시키고 있는 선교 현장의 특성과도 관계되지 않을까. 이는 함께 현장에서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풀어가야 할 과제로서 늘 남아 있는 듯하다.

앞서 제기했듯이 표면적으로는 전문인 선교사가 복음의 선포자로서의 복음 제시의 기회를 적게 가진다는 점에서 자칫하면 스스로도 복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생활을 하기가 쉽다. 게다가 이러한 복음의 전파라는 시급한 측면을 고려할 때, 전문인 선교사는 반복음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비칠 수 있다. 복음을 나누는, 그것으로 인하여 힘을 얻는 시간이 불규칙하므로 선교사 자신이 간혹 정체성을 잃고 자존감마저 낮아지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타인에 의해서는 물론 자기 스스로 복음에 빚진 자임을 망각하고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함으로서 갖는 죄의식에 눌려 있기 쉽다. 선교사로서 정체성을 모호하게 가짐으로써 직업 기능에 따른 자신감까지 눌림을 당하여, 자신에 대한 기대-종이며 기술자-와 현실이 맞지 않는 경험을 쉽게 갖는다. 복음조차 낯설 만큼 업무로 제한된 환경 속에서 이미 여러 가지로 포기된 사람으로서 일상을 견디어 가고 있음을 발견한다는 것은 주께로부터도 소외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경험을 얻게 한다.
이렇듯 전문인 선교사는 선교적인 과제를 안고 있는 바에야 철저하게 소명감에 충실할 만큼 훈련되고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충족시킬 만한 여과 과정이 현장의 시간 속에서는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수업의 준비와 이를 여유 있게 전달할 만한 정서의 안정감은 물론 선교사로서의 그리스도의 심성이 결합되어 있어야 함이 교육의 최우선 조건이 아닌가. 이에서 전문인으로서 영적 순수성을 병행시킬 수 있는 준비된 능력, 이를 직업으로서도 선교의 기능을 다할 수 있는가 하는 점검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철저하게 선교적으로 자기검증을 통과한 훈련됨이 있었는가를 묻게 된다.

여기에서 복음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절대 시간을 확보하면 매일 매일의 패배를 감소시킬 수 있으리라. 복음의 공로는 역시 생명을 살리는 쪽에 있음을 그날의 성경말씀 속에서 실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학교 동역자들과 함께 하는 이른 아침의 성경묵상 시간은 전문인 선교사들에게 공헌한 바가 크다 할 수 있다. 성경에 비친 자신의 형편을 나누며 그날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상기하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에는 함께 참여하는 모든 선교사가 복음을 새로 듣는 듯이 자신의 영적 허실이라든가 복음에 반사된 선교지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서로 나누게 된다. 이렇게 성경을 통하여 독특한 환경에 놓인 자신을 비로소 돌아보고 또한 옛날과 다르게 선교적 도구로 자라고 있는 새로운 각 사람들을 대면하고는 한다. 일의 성과와는 별개로 복음에 빚진 자임도 잊을 만큼 일속에 파묻혀 있는 자신을 건강하게 감각한 듯이. 이에서 불균형적인 삶을 사는 자신을 교정하며 자신이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 당면해 있는 세계에 어떻게 진입해야 하는지를 다시 확인하며 본인의 의지로도 더 변화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성경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가는 별도로 전문인 선교사로서 하나님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는가라는 질문에 이를 때, 형식적으로는 ‘아니다’라는 대답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에 겪는 결핍감을 해소해 주기도 하다. 이것은 교회개혁 시기에 있었을 법한 영적 자유의 해방감 같은 것이 아닌가 싶다. 파송 안수를 받기는 했지만, 통상적으로는 전문인 선교사가 목회자 선교사와 구별되어 하나님과 친밀감이 없는 사람처럼 비쳐지고는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끝내 이러한 비교감정을 갖고 느끼는 것은 한편으로 본인이 선교적인 삶에 적합한 전도자로서 살고 있는가에 늘 의문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제기한 문제적 상황에 전문인 선교사가 놓여 있어서 선교사 자신도 나아갈 바의 방향이라든가 정체성에 긴장을 잃고 다소 장황한 혼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미혹의 영이 이미 선교사 자신의 일상생활에 잠복하고 있지 않은가. 재주나 실력, 혹은 지적 허영과 성공, 비교 등등까지. 이것이 기대이며 그것을 낙심케 하는 것이 현실 곧 선교지의 환경이라는 듯이 말이다.

이는 전문인 선교사로서 초기일수록 더 심하게 겪는다. 말씀을 전하는 사역이 일차 사역인 목회자 선교사들은 말씀 속에서 하나님과 대면하며 자신을 지속적으로 피드백 할 수 있는 데 반하여, 전문인 선교사는 현지적응의 과정 속에 언어 습득과 관계 조직 속의 일을 함께 하기 때문에 성경과 친밀하기에도 역부족이다. 중요한 일보다 급한 일 뒤에 놓여 있는 성경과 기도, 언어 소통이 제한된 상태에서도 일을 질적으로 성취해야 하는 교육현장. 이들이 현지 적응기에 동시에 주어져 있는 것이기에 경험상으로 아무리 미숙하다고 하여도 이들을 원만하게 소화해야 한다. 이는 전문인 선교사들이 정착 초기에 노동의 시간적인 한계까지 느끼며 연약한 자신을 발견하는 데에 이르고 있지 않은가를 생각하게 한다.

선교지에서는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하는 과정에서 신뢰를 받고, 이것이 선행된 후에야 1차 검증이 끝난다고 한다. 적응 정도는 개인의 실행능력으로서 평가되며, 표면적인 관계 형성을 어떻게 이루어 내었느냐가 중요한 관건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즉 일의 성취 여부가 적응 여부와 동일시되는 상황인 것이다. 또한 이는 자율적인 방법으로서의 개인 적응뿐만 아니라 관계로서의 평가 기반을 얻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영적관리에 무엇이 필요한지도, 자기만의 알맞은 생활 리듬을 갖추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관리하여야 함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그 관계 상황을 움직일 수 있을 만한 정신적 혹은 영적 역량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전문인 선교사는 자신을 꾸준히 캐어할 수 있는 환경을 어떠한 모양이든지 확보해야 한다. 꾸준한 자기 영성관리와 함께 폭넓은 시각을 유지할 수 있을 만한 안정된 정서를 누리는 법,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해 낼 수 있는 침착한 행동 등이 무엇인지 배우는 일 등 말이다. 철저히 일의 균형을 가질 만큼의 영성으로만 비로소 사역의 안정감을 얻기 때문이 아닐까. 이는 예수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만 느낄 수 있는, 부활의 생명을 경험한 심령만이 행할 수 있는 일일 듯하다. 이처럼 선교자로서 삶을 사는 이는 자신이 현지 사람들과 동역자들 앞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같은 어느 정도 온전한 성품으로 완성되어 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로마서 12:29)

위에서 제기한 본인의 문제적인 경향이 모든 사역의 열심을 제한하는 구실로서 작용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수습과정에 놓여 있는 신임선교사로서 현지에 적응하면서 여러 관계를 적절하게 수용하고 감당하여 제대로 방향을 찾았는지 스스로 묻고 있다. 소명이나 훈련됨의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는 사람과 관계 혹은 상황이 문제임을 일부분이나마 감지했을 뿐이다. 사역자들끼리 사역에서 나타나는 시행착오를 나누는 기회는 가끔이라도 있으나, 사역자로서 당하는 정서의 교감 혹은 공감을 객관적으로 나누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실적 위주를 중요시하는 선교지 특성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나눔을 장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안식년에서야 비로소 가질 것이 아니라 평소의 잦은 휴식처럼 누려야 할 것이다.

이를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경험에 의한 권위를 가진 선배들의 온유한 지혜가 후배 선교사들에게 온전히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런데 일면 선교의 자문을 구하기가 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한국인 선교사의 사역 경험이 서양권의 그것에 비해 짧은 것도 한 요인이 아닐까. 선교사들이 사례를 해석할 때에 자신의 지각력이나 경험만큼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 상황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 만한 다양한 시각에서 객관적인 분별력을 얻을 수 있고 이에서 오는 오류도 줄일 수 있으리라. 사역이 의외로 개별적인 경험과 그것으로 형성되는 관점에 따라 굴절되어 다르게 이해되고 평가되는 관계의 역학구조를 지녔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복합적인 관계 조직 속에 놓여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현지라는 이국의 광야, 그 얼음 벌판 위에 있는 선교사들이기 아닌가.

본인은 선교현장의 동역 관계에서 예수그리스도가 숨 쉬지 않으면, 하나님의 치리가 있지 않으면 그 안에서 선교사 본인이 넘어지는 것을 이따금 보았다. 이는 선교지에 더 많은 이들을 넘어뜨릴 수 있는 무서운 방해자로서 바로 선교사가 서 있다는 증거다. 더욱이 전문인 선교사 스스로가 소명감이 약하거나 훈련에 의한 안정된 정서를 확보하지 못했다면 선교지에서 불안한 존재로서 혹은 한 소외인으로서 선교 대상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물론 이는 관계를 이루는 모든 동역자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사례이다. 전문인 선교사 자신이 정체성의 불균형과 복음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안고 있기에 선교를 방해하는 사단의 공범자가 된다면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사역 과정에서 서로 힘을 실어주지 못할 때, 사역의 성공이라는 것도 인간의 그것으로 전락하지 않던가. 사단의 공략이 동역자들 상호관계 속에서 훼방자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깊은 주의가 요구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전문인 선교사는 선교지에서도 잘못 사용되면 하늘의 권세에 붙잡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권세에 붙잡힐 수도 있지 않은가.
이는 신임 전문인선교사로서 경험한 몽골 전문인선교현장의 한 단면이다. 현대선교가 선교사와 후원자, 현지의 동역자가 연합의 형태로서 원만하게 이루어져야 함을 주목한 결과이다. 다만 전문성이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이를 선교의 접촉점으로 사용되고, 몽골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크므로 환영을 받는다는 편리성이 있는 반면에, 전문성과 복음전도자의 입장을 동시에 유지하는 일이 쉽지 않고, 오히려 선교사 본인이 복음에 혜택을 입지 못한 사람처럼 소외를 겪을 수도 있다는 점을 지각해 본 것이다. 전문인 선교사는 적응초기부터 언어습득과 전문인 역할, 선교적 소명을 함께 이루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정은 건강한 선교 마인드를 확보하거나 선교 효과를 거두는 데에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선교사 자신이 먼저 불안, 초조, 두려움 등으로 인하여 비교됨과 포기, 미래 상실감, 자신감 저하 등을 겪기 때문이다. 그것이 오랜 시간을 함께 마주 대하는 선교 대상자들에게 선교의 표정으로 잘못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을까 하는 점에서 더욱 주의를 요한다.

그러므로 선교사가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복음의 왜곡된 이미지들을 선교대상자들에게 보일 수도 있게 된다. 이는 관계 속에서 극복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영적 싸움터이기도 한 현장에서는 그것마저도 이루기가 쉽지 않다. 모든 것이 전쟁을 방불케 하는 긴장감이 있기 때문이다. “소명에 충실하라”만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곳이 선교현실이 아닌가. 이 문제의 원인은 기대와 현실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전문인 선교사의 기대가 선교의 바쁜 현장, 관계 속에서는 가치를 못 가질 뿐만 아니라 필요 없는 가치이며, 개인의 사소한 기대로 전락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하여 선교사는 거절된 감정을 느끼면서 투명하지 못한 정서를 겪는다. 여기에는 기대의 수정이 있어야만 하는데,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가 유일한 회복의 방법이라고 귀결되고는 한다. 상황은 언제든지 현실의 충분한 데이터로써 성과를 지향하고, 영혼구원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일도 주어진 일을 충족시킨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에 전문인 선교사는 이 문제적인 상황을 건강하게 해소할 수 있도록 스스로 캐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풍토를 극복하도록 도움을 주는 동력자들이 있다면 매우 의로울 일이다. 그 누구보다도 선교 현장에서 전문인 선교사라는 존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에 이룬 구원을 날마다 경험하며,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입고 사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를 말씀으로 혹은 나눔으로, 상호이해가 전제된 관계로서 이룰 수 있음을 결국 되새겨 본다.

전문인 선교사는 현장의 요구에 따른 사역의 질적 전문성과 파송 이유를 충족시킬 수 있는 선교적 활동을 함께 이루어야 하는 이중 사명을 갖고 있기에 보다 여유 있는 계획과 유연한 관계 속에서 장애를 극복할 수 있도록 있어야 한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본인의 준비됨은 물론 후원자와 현지 동역자라는 동역의 관계에서 해소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각자 자기의 책임에 얼마나 충실할 것인가가 다음 시기의 과제로 남았다.
“내가 산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여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편 27:13~14)

몽골 울란바타르대학교 이소리선교사
 
.

몽골지도 전체보기: http://www.worldmapfinder.com/Kr/Asia/Mongolia/

 

 

 

 

 

몽골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

I. 몽골에 대한 일반적인 개요
1. 국호와 지리적 위치
(1) 국호
몽골의 공식적인 국호는 REPUBLIC OF MONGOLIA로서 몽골(Mongol)이란 본래 "용감한"이란 뜻을 지닌 부족어 였으나, 칭기스칸에 의해 통솔된 몽골부(部)의 발전에 따라 민족의 이름 "Mongol" 및 지역의 이름 "Mongolia"로 변화되었다.
몽고(蒙古)라는 이름은 지난 수천 년 동안 북방 민족으로부터 전쟁에 시달려 온 중국 사람들이 몽골을 비하(卑下)하기 위해 '우매할 몽(蒙)' 과 '옛 고(古)'를 사용한데서 비롯되었다.
1924년 11월 26일 사회주의 혁명으로 수립된 당시의 정부는 국호를 "몽골 인민공화국" (People's Republic of Mongolia)으로 정하였으나 1992년 1월 개방 정책의 상징으로 국호를 몽골 공화국으로 고쳤다.
몽골이라는 말은 영토적인 의미에서 사용할 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지금의 몽골공화국만 가리키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몽골족이 거주하고 있는 전 지역을 가리키는 경우이다. 넓은 의미에서 몽골의 영역을 말한다면 북쪽으로는 바이칼 호수까지, 동쪽으로는 만주까지, 남쪽으로는 만리장성까지, 서쪽으로는 천산산맥까지 몽골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우리가 "몽골" 하면 대개 외몽골(外蒙古, 몽골 공화국)을 말하는 것이며, 내몽골(內蒙古)이라고 부르는 내몽골 자치주(自治州)는 중국 국경 안에 있기 때문에 사실상 분단 국가다. 그러나 분단된 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민족적 친근감이나 통일에의 의지는 거의 없는 편이어서 한국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2) 지리적 위치
몽골은 아시아 대륙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러시아의 토바(Tuba), 브리야트 공화국과, 남쪽으로는 중국의 신강위그루 자치구, 내몽골 자치구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몽골은 소련과 중국 사이에 북위 41°35'∼52°09' 위치한 내륙국으로서, 면적이 남한의 16 배인 약 1,566,500㎢ 인데 남북 거리가 1,263㎞, 동서 거리가 2,405㎞, 전체 국경선의 길이는 8,114㎞에 달한다. 몽골의 가장 높은 곳은 서쪽에 위치한 알타이 산맥의 나이람달 봉우리, 해발 4,374m, 가장 낮은 곳은 동쪽의 허흐누르 분지, 해발 550m이며 평균 고도가 해발 1,580m의 고원 국가로 그중 40%가 산악 지대이며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형태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서쪽에는 알타이 산맥이 있고 동남쪽에는 고비사막이 있는데 국토의 21%에 이른다. 국토의 71%가 초원(스텝)이며, 8%가 산림이다. 몽골의 국토는 서부의 산악 지대, 남부의 사막 지대, 중부와 동부의 초원 지대 및 농업 가능지대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국토 중앙과 서쪽에 서울시 면적의 몇 배나 되는 아름다운 호수들이 몇 개가 있고, 그 가운데는 바닷물 성분과 같은 호수도 있다. 가끔 지진도 발생한다.

(3) 행정 구역 구성
몽골의 행정 구역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 1단계는 수도(니슬렐)와 각 도(아이막) 단위 행정 구역이며, 제 2 단계는 수도의 각 구(두럭)와 도의 군(솜)이다. 그리고 제 3 단계는 수도의 동(호로)과 군(솜)의 면(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현재 몽골은 수도인 울란바타르 외에 모두 21개의 도(아이막)로 구성되어 있으며, 울란바타르에는 9개 구(두럭)가 있으며, 21개 도(아이막)에는 모두 333개의 군(솜)이 있다. 그리고 몽골 전국의 동과 면의 숫자는 모두 1,681개에 이른다.
21개의 도(아이막) 가운데에는 한국의 국토 면적보다 넓은 도(아이막)가 모두 6개나 있으며, 가장 넓은 도는 어문고비 도(아이막)로 한국의 국토 면적의 1.66배에 이른다.


2. 몽골의 인구
(1) 인구 현황
몽골의 인구는 2000년 말 상황으로 2,420,500명이며, 이것은 전년보다 1.4% 증가한 것이다. 국토의 면적에 비하여서 인구가 적은 원인은 기후적인 악조건과 과거 라마교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몽골이 공산화되기 이전 전체 남자의 40% 이상이 독신 라마승이었다고 한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 영아 사망률이 많이 개선되었고, 인구 증가를 위하여 출산을 장려하고, 모자 보건시설을 개선하여 인구가 많이 늘어났으나 넓은 국토에 비하면 인구가 아주 적은 편이다.
1989년 몽골이 민주화 된 이후에는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인구가 매년 인구증가율이 점차 줄어들고 있으며, 년 평균 1.55%대의 증가를 보이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가 있는 가정에서는 아이들을 많이 낳기를 꺼리는 반면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들은 아이들을 많이 낳고 있어서 가난한 가정이 점점 가난하게 되고, 가출한 청소년들이 양산되는 등의 많은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몽골의 인구 증가 현황 (단위 : 만 명)

(2) 성별, 년령별 인구 분포
1998년 말 현재 몽골의 전체 인구를 성별로 구분하여 보면 전체 인구 2,420,500의 49.6%인 1,201.600명이 남성이며, 50.4%인 1,218,900명이 여성이다.
또 연령별로 구분하여 보면 35.6%가 15세 미만이며, 60.5%가 15세에서 64세 사이이며, 3.9% 이상은 65세 이상이다.
아래의 도표를 보면 몽골은 아주 젊은 나라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1998년 말 통계로 전 국민 중 20세 미만의 비율은 46.44 %이며, 30세 미만은 65.7%이며, 40세 미만은 81% 정도이다. 몽골의 전 국민 중 40세 이상은 겨우 19%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몽골의 전체 국회의원 76명 중 25세에서 35세 사이가 21명으로 전체의 27.6%를 차지하고 있으며, 36세에서 45세 사이가 39명으로 전체의 51.3%를 차지하고 있다. 몽골의 정치를 움직이는 이들의 78.7%가 45세 이하의 연령층이라는 것은 몽골이 얼마나 젊은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좋은 지표이다.

인구의 연령별 분포와 증감률(단위:천명)


(3) 지역별 인구 분포
1998년 말 통계로 전체 인구의 51.1%인 1,236,600명이 울란바타르를 비롯한 각 도청 소재지인 도시에 살고 있으며, 48.9%인 1,183,900명이 시골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구의 도시 집중 현상은 급격히 진행되기보다는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10년간 수도 울란바타르의 인구와 가구 수를 다음 표와 같다.

울란바타르의인구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타르는 1639년에 건립된 도시로 몽골의 수도가 된지 360년이 되는 도시로, 전체 인구의 27.6% 정도가 살고 있으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다.


3. 몽골의 민족 구성과 언어
(1) 민족 구성
몽골에 거주하는 민족은 크게 할카 몽골, 카자흐, 브리야트, 기타 민족으로 나뉘어진다. 기타 민족 중 러시아인 중국인들 등의 외국인들을 제외한 소규모의 종족( )은 할카 몽골 계통의 부족으로 볼 수 있다. 할카 몽골은 전 인구의 77.5%를 차지하고 있으며 바양얼기를 제외한 17개 아이막에 거주하고 있다. 브리야트 계는 몽골 중세 때 부각된 부족으로 바이칼 호수 부근에 거주하며 이들은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에 의해 러시아로 편입(브리야트 공화국)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편입에 반대한 일부 사람들은 외몽골의 북부지대로 이주하였다. 현재 몽골의 북부지대인 셀링게, 힌티, 도르노드 등의 아이막에 거주하고 있다. 몽골에 거주하고 있는 카자흐 족은 소수민족으로서는 가장 많은 전 인구의 6.1%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1920∼1930년대 신강에서 이주해온 돌궐 계 민족이다. 이들은 몽골의 서부 지대인 바양얼기 아이막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으며 언어나 종교, 풍속이 할하 몽골족과는 상이하나 거의 명목상의 회교로 볼 수 있다. 바양얼기 아이막은 몽골에서 유일하게 카자흐어와 몽골어가 함께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다.
몽골 전역에 거주하고 있는 카자흐 민족을 제외하고는 부족들간에 언어나 문화면에서 서로 구별이 없으며 단지 사투리로 그 지역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몽골은 다민족국가로 구성된 국가로서는 이례적으로 민족간의 구별이나 갈등이 없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우선 몽골 영토가 넓고 각 종족간의 인구수가 적으므로 주업인 유목을 하는데 큰 갈등이 없으며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면에서도 큰 갈등이 없는 편이다. 단지 카자흐 인들이 몰려 사는 바양얼기의 아이막(한국의 도에 해당)의 장은 카자흐 인으로 선임되어있다는 것이 특별한 사항이며 국회의원 중에 카자흐인과 브리야트 인이 몇 명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몽골 국민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민족간의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거의 부족간의 구분이 없는 다민족이라고 볼 수도 있다.
몽골의 부족 구성 내역

(2) 언어사용 현황
몽골은 언어사용 면에서 거의 통일이 되어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인구의 90%가 몽골 방언 중의 한 가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몽골이 과거 70년 동안 소련 연방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몽골인들은 러시아어를 할 수 있다.
몽골어는 터어키, 우즈벡, 투르크, 카자흐 그리고 한국, 일본 등과 유사한 알타이 언어 계통이다. 서부의 바양얼기에 거주하는 카자흐 종족과 바이칼 호수 근처에 사는 브리야트(Buryat) 종족을 제외하고 몽골의 여러 종족들은 몽골인들의 문자를 판독할 수 있다.
할하(Khalkha) 몽골은 몽골 전체 인구의 대다수인 77.5 %를 차지하고 있다. 방패(Shield)를 뜻하는 "할하"는 16세기 중반부터 고지대 스텝지역과 산악을 따라 이동하던 몽골 유목민을 지칭하던 말이다. 20세기에 중부 지역과 동부 지역에서 통용되던 할하 몽골이 표준어가 됐고 이것은 학교에서 교육됐고 공식 언어가 되었다. 문자는 울란바타르 지역의 할하어에 기초했고 이것을 1941∼1946년에 소련 식 알파벳을 사용해 키릴(Cyrillic) 문자로 변조했다.

고유어 사용분포


몽골의 소수 민족들은 서로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어 왔다. 다양한 환경에 즉각적으로 적응해야 했던 몽골의 광활한 지역은 각 민족간에 매우 유사한 문화를 형성하게 했고 방언이나 부족간의 차이는 심각한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몽골의 모든 언어(몽골 諸語)는 오늘날 중국 자치주(自治州) 내몽골, 만주일부 지역, 시베리아 동부 및 감숙성(甘肅省), 신강성(新疆省)과 청해성(靑海省), 몽골 공화국, 러시아의 바이칼호 주위와 볼가강 하류,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역에서 쓰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몽골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수는 600만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지역적으로 분류하면 몽골에 240만, 중국에 360만, 러시아에 50만, 아프가니스탄에 3만,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흩어져 있다.
이를 언어학적 특징에 따라 분류하면 9개­ 다구르(Dagur)어, 브리야트 어, 본래 몽골어, 칼무크어, 모골어, 동부유고(東部裕固, Shera Yogur)어, 토족(土族, 몽구오르)어, 동향(東鄕, Dunshian)어 보안(保安, Baonang)어- 로 나뉘며 이중 본래 몽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다시 Khalkha(할하어;몽골 공화국 표준어), Chakhar(챠하르 방언), Urat(우라트 방언, 울란 차브 방언이라고도 함), Ordos(오르도스 방언; 전형적인 내몽골어), Kharchin-Tumut(하르친­투머트), Khorchin(호르친 방언은 중국내에서 몽골 방언으로는 가장 많은 인구가 사용하고 있다고 함), Chipchin(칩친 방언), 7개의 방언으로 나뉜다.
표준어는 할하 몽골어인데 울란바타르를 중심으로 거의 전 국민이 이해하고 사용하고 있다. 과거 고유 문자(몽골 문자 또는 호칭 비치크)가 있었으나 1941년에 시작하여 46년에 전면 시행된 문자 개혁에 따라 소련의 키릴 문자(33개)에 2개를 합친 (θ[ ], Y[ ]) 35개의 변형 문자를 사용한다. 그런데 민족주의 강화 정책에 따라 고유 문화 회복을 위해 고유 문자(몽골비치크)를 복구하여 94년부터 전면 실시하고자 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배우기 어려워 최근 국회에서 보류하였다.
과거에는 문맹률이 매우 높았으나 사회주의 혁명 이후 대중 교육이 발달하여 현재 약 96 % 이상이 키릴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다. 그러나 구 문자는 현재 초등학교 3학년 학생부터 6학년 학생에게까지 체계적으로 교육되었고, 새로 1-2학년은 다시 키릴 문자를 배우고 있어서 문자 교육에 대한 혼동은 계속되고 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아직 구 문자를 읽지 못하는 실정이다.
몽골어는 한글과 매우 유사한 문법 구조를 가지고 있다. 어순(語順)도 같으며, 격조사의 사용이라든지, 표현 방식 등이 비슷하다. 전통적으로는 같은 알타이어족(語族)으로 분류되는데, 차용어나 같은 어휘에서 유래한 용어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사람들은 1년 가량 착실히 말을 배우면 의사 소통에는 큰 지장을 받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우리말에 없는 자·모음이 많기 때문에 발음이 비교적 어려운 편이다.


4. 역사와 기후
(1) 역사
몽골은 칭기스칸으로 인해 세계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고 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이 원(元) 나라를 세워 비로소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원나라(1279-1368년)는 순제를 마지막으로 1368년 한(漢)민족 계인 명(明)에 의해 멸망했고 그 후 몽골은 고비 사막 너머로 쫓겨가서 13세기의 모습을 갖춘 채 신비한 고립 국가로 남게 되었으며 이후 1616년에 성립한 만주 계(滿洲系)의 청(淸)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청나라는 비옥한 땅을 모두 빼앗아버리고 몽골인 들은 황폐한 초원지대로 밀려나 유목민으로서의 삶이 더욱 고착되었다. 1911년 한민족 계의 사람들이 청을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세웠을 때 외몽골은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중화민국이 외몽골은 원래 중국의 고유 영토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외몽골은 러시아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국내의 혁명으로 힘을 쓰지 못하자 중국이 침공을 시작하였고, 결국 외몽골은 독립을 취소하였다. 동시에 러시아의 반혁명 세력도 침입해와서 라마교의 활불(活佛;달라이 라마)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수립하였다.
나라를 다시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외몽골은 러시아 혁명 세력의 원조를 받아 중국군과 활불 정부군과 맞서 싸워 1921년 수도를 점령하였다. 활불 정부군으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은 날이 7월 11일로 현재의 독립 기념일(나담)이 되었다.
1924년 11월에는 몽골 인민공화국의 완전한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세계에서 2번째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1939년 이후에는 일본과의 제2차 대전에서 연합군 측에서 러시아와 함께 싸워 승리하였다. 1961년에 유엔에 가입하였고, 1964년 중·몽 국경이 확정되어 내·외 몽골의 분열이 고착되었다.
1956년 체덴발이 인민혁명당 서기장이 된 후 당내 친 중국 파를 숙청하고 친 소련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쳐왔고 구소련식 사회주의 경제 발전을 위하여 힘써왔다. 대부분 국민들의 중국에 대한 감정은 썩 좋은 편이 아니지만 정치, 경제, 문화적 측면에서 중국의 영향은 매우 깊다. 한편으로는 지난 70년 동안 구소련 연방(USSR)의 사회주의제도 아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현대 몽골인의 생활 양식이나 사고 방식은 러시아를 본받은 서구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10년 동안의 몽골의 정치를 시대별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1989년 12월부터 1990년 6월 / 민주 혁명의 절정기
이 기간은 민주와 자유를 위한 투쟁의 기간, 민주와 자유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새로운 운동을 일으킨 기간, 정치의 중심적인 정당들이 창당되고 활동적으로 일하기 시작한 기간이었다. 민주주의의 힘이 평화적인 투쟁으로 공산당의 정권을 물리쳤다. 1990년 6월에 많은 정당이 참여한 가운데 최초의 자유 선거가 실시되었다.

1990년 7월부터 1992년 5월 / 민주 혁명의 성과가 법으로 제정되고, 열린 사회가 시작
처음으로 국회가 조직되어 1991년 5월 국유 재산 사유화법이 통과되었고, 1992년 1월 13일 새 헌법이 통과되고, 한 달 뒤인 2월 12일부터 새 헌법이 효력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992년 6월부터 1996년 6월
1992년 6월 새 헌법에 따라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26개의 대선거구)
몽골 인민혁명당(MAXH)이 전체 유권자의 56% 지지를 받았고, 국회 전체 의석의 90% 정도가 되는 71석을 얻었으며, 새로운 정당인 민주 진영에서 5석을 차지하였다. 이 선거에서 민주 진영의 많은 당들은 힘을 모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고 "새 기본 헌법당"이라는 당을 만들기로 하였으나 몽골사회당(MCDH)만 남고, 3-4개의 작은 정당이 합쳐져 1992년 10월 몽골민족민주당(MYAH)이 창당되었다.

1996년 6월부터 2000년7월2일/ 몽골의 의원내각제(국회중심) 체제가 실현된 시대
1996년 6월 정기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연합이 50석, 인민혁명당이 25석, 몽골전통연합당이 1석을 차지하였다. 민주연합이 국정을 이끈 기간 동안 정치적으로는 총리가 자주 바뀌는 등의 혼란이 있었으나 경제적으로 많은 안정을 이루었다.
2000년7월2일부터 2001년 5월 현재
민주당의 집권으로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과도기적 혼란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정치적인 불안정으로 국민들에게 신뢰를 많이 잃어 인민혁명당이 선거에서 76석중 72석을 차지하여 재집권하게 되었다. 민주진영에서는 단 4석밖에 의석을 차지하지 못했다

(2) 기후
몽골의 기후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로서 날씨의 변화가 심하고 건조하다. 긴 겨울(10월∼이듬해 4월)을 가지고 있으며 나머지 봄, 여름, 가을이 합하여 겨우 5개월밖에 안 된다.
기온은 지방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연 중 가장 더운 7월에는 12℃∼20℃, 가장 추운 1월에는 -15℃ 안팎이며, 가끔씩 그 이하로 떨어질 때도 많이 있다. 하루 평균 기온이 0℃ 이상인 날이 연 평균 170∼190일 정도이다. 평균 바람의 속도는 초속 2∼3m이나 때로는 초속 15m가 넘는 강풍이 불기도 한다. 연 평균 강수량은 매우 적으며 그 중 65∼78%가 여름에 내린다. 연 평균 비가 내리는 날은 15일에서 20일 사이이며, 동부는 30일, 북부는 50일 정도로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수도 울란바타르의 월 평균 기온


비가 적기 때문에 늘 건조한데, 울란바타르 시의 연평균 강수량은 233 mm로 서울의 5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심한 온도 변화로 수도 울란바타르의 경우, 겨울에는 영하 35∼40℃, 여름에는 영상 30∼35℃로 연교차가 세계에서 가장 크다. 긴 겨울과 적은 강수량 때문에 감기가 몽골 사람들의 생활에서 떠나지 않고, 농작물 재배가 어려워 지방의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유목 생활을 하고 있다.
따라서 외부 활동 가능한 시기가 1년 중 5개월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자연 생산성이 떨어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후와 싸워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겨울이면 모든 땅이 얼어붙기 때문에 건설, 도로 건설, 탐광 등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여름이면 서늘한 날씨에 건조하기 때문에 모든 산하가 푸른 잔디밭으로 변하며, 살기에 가장 알맞은 날씨가 된다. 대부분의 몽골 인들은 1개월 이상의 여름 휴가를 즐기며, 어린이들도 고향의 시골집에 가서 여름 내내 집안 일을 돕는 것이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과가 되었다.


5. 정치와 경제
(1) 정치
몽골은 1924년부터 1988년 12월까지 공산 사회주의체제를 유지하였으나, 1989년 12월 10일에 있었던 민주 혁명이후 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였다.
몽골의 정치 형태는 의원 내각제에 대통령제를 가미한 형태로 대통령과 국회의원 모두 국민들이 직접 선거에 의하여 선출한다. 대통령과 국회가 상호 견제와 협조 속에서 국가를 통치하며 이끌어가도록 되어 있다.
대통령은 정부의 수반으로서 국가 안보와 외교와 관련한 부분 등에 많은 권한을 가지고 4년 동안 임기를 수행한다. 1993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족민주당의 오치르바트 후보가 57.8%의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임기를 마쳤으며, 지난 1996년 선거에서는 인민혁명당의 바가반디 후보가 60.8%의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현재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
국회의원의 임기는 4년이며, 금년 7월 2일 3대 국회의원 선거가 예정되어 있다.
1992년, 첫번째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과거의 공산당 출신으로 구성된 인민혁명당이 정권을 잡았으나, 1996년 선거에서는 민족민주당, 사회민주당이 민주연합을 구성하여 선거에서 승리하여 국회 다수당으로 전체 76석 중 50석을 차지하였고, 그 외에 인민혁명당이 25석, 기타 1석 등의 의석을 가지고 있다. 현재 국회의원들의 연령별로 구분하여 보면 다음 표와 같다.
2000년도에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인민혁명당이 76의석중 72석을 차지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민주연합이 4년동안 실정을 많이 한것에 대한 백성들의 등돌림이었다. 민주연합은 경제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등의 업적을 이루어졌지만 정치적인 분열과 효과적인 경제분배에 실패로 다시 인민혁명당에게 정권을 내주어야 했다. 새로 당선된 국회의원들의 출신을 보면 엔지니어가 20명, 선생님이 11명, 농업종사자가 3명, 저널리스트가 3명, 변호사가 10명, 경제학자가 10명, 학술회원이 5명, 의사가 9명, 과학자가 18명, 교수가 8명으로 나타났다. 이중에 여성은 7명이다.



위의 표를 보면 국회의원들의 나이가 점차 젊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과거 공산주의 시절의 나이가 많은 인물들이 물러나고, 외국에서 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를 공부하고 돌아온 젊은이들로 세대교체가 되고 있는 과정이다.
현재 몽골은 정치 불신 현상이 팽배하고 있다. 작년 뇌물수수 사건과 관련하여 3명의 국회의원이 구속되어 의원직을 상실하였으며, 국회의원들이나 정부 지도자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는 아주 낮은 편이다. 1996년 국민들이 인민혁명당을 버리고 민주 연합을 선택하였으나 현재 별로 나아진 것이 없기 때문에 국민들이 금년 선거에서 어떤 당을 선택할지 고민하고 있으며, 다시 인민혁명당이 국회 다수당이 될 것으로 예상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99년 4월에 집권당인 민족민주당에서 실시한 조사를 보면 이것을 잘 알 수 있다.
'당신은 정치의 중요 고위 3기관(직위)의 일(사업)에 대하고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에 응답한 사람들의 답변은 다음 표와 같다.

몽골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신뢰도


대통령, 국회, 정부가 하는 있는 일이 국민들에게 크게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 중에 대통령과 정부는 그런 대로 괜찮은 편이나, 국회에 대한 생각은 아주 좋지 않은 편이다. 그것은 지난 98년 가을 정기국회에서 통과한 법률은 얼마 되지 않고, 많은 기간을 내각을 조직하고 구성하는데 소비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몽골과 한국은 1990년 3월 25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금년 양국간 외교관계 수립한 뒤 10주년을 맞이하였다. 특히 99년 5월 말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몽골을 방문하였으며, 그 이후 국무총리, 국회의장 등이 한국을 방문하는 등 한·몽 양국간의 친선 우호, 협력 관계가 더욱 깊어지고 있다.
(2) 경제
국민 총생산과 경제 상황
몽골은 공산사회주의 체제 아래에서의 70여년 동안 정치, 경제적으로 구 소련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았다. 대부분의 기간 산업들이 구 소련의 기술과 자본과 핵심 인력 등에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지난 89년 구 소련이 무너지고 시장경제 체재로 전환하면서 원조나 협력이 중단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몽골의 경제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몽골 자체적으로도 사회주의체제에서 민주 시장경제체제로 전환되는 전환기에 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못하나,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그러나 빈부의 격차가 커지고, 실업률이 높아가고, 경제 전문가나 기술자의 부족, 바다가 없는 내륙 국가이기 때문에 부담해야 하는 높은 물류비용 등으로 몽골의 경제적인 미래는 그리 밝지 않은 실정이다.
1998년 말, 몽골의 통계청에서 발표한 국민 1인당 소득(GNP)은 347,041 투그릭으로 현재의 환율로 하면 340$ 정도가 된다. 그리고 1998년말 현재 국민 1인당 총생산(GDP) 365,505 투그릭으로 현재의 환율로 하면 360$ 정도이다. 근래 10년간 국민 1인당 소득과 총생산을 살펴보면 다음 표와 같다.

국민 1인당 소득과 총생산(단위:투그릭)


시장경제로 전환한 90년대 초기에는 년간 인플레가 최고 325,5% 치솟는 등 물가와 경제 불안, 극심한 생필품 부족 현상등을 겪었으나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최근 10년간 인플레를 보면 다음 표와 같다.

최근 10년간의 인플레(단위:투그릭)



물가나 인플레는 많이 안정되어가고 있지만 국가 경제는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왜냐하면 매년 국가 전체 예산의 적자폭이 해마다 커지고 있으며, 개방 후 외국으로부터 들여온 차관의 상환기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몽골의 2000년 국가 예산은 세입은 2,780억 투그릭, 세출은 3,915억 투그릭으로 부족분(적자)이 1,135억 투그릭이었다. 1998년의 국가 예산은 전체 수입이 2,274억 투그릭, 지출은 3,380억 투그릭이었으며, 적자는 1,100억 투그릭 정도였다. 정부는 2000년 예산안의 적자(부족)부분은 외국과 국내에서 보충하기로 하였다.

국제 무역
최근 몇 년간 몽골의 수출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수입은 점차 늘어나는 등 무역 수지 적자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최근 3년간의 수출과 수입, 그리고 무역 수지 적자를 살펴보면 다음 표와 같다.

몽골의 수출과 수입


1999년 말을 현재 몽골의 주요 2대 수출품은 금과 구리를 중심으로 한 광물질로 전체 수출품의 40.4%에 이르며, 다음으로는 양모와 캐시미어 등이 전체 수출품의 36.8%에 이른다. 그 다음으로는 피혁(가죽)제품과 육류 등이다. 위에서 보는 대로 몽골의 수출품은 2차 산업 생산품이 아니라 1차 산업 제품인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현재 몽골은 지하자원과 가축과 관련된 수출품 외에 다른 수출품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1999년 말 현재 몽골의 주요 수출국을 보면 다음 표와 같다.

몽골의 주요 수출국

한국은 1998년에는 몽골의 4번째 수출국으로 몽골 전체 수출액의 9.6%를 점유하였으나, 1999년에는 몽골에서 한국으로의 수출이 크게 줄었다. 2000년도에는 5번째로 큰 무역상대국으로 기록되고 있다.
2000년 1/4분기의 몽골이 외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수입품목 중 가장 큰 비율로 늘어난 것은
1위: 섬유 및 섬유 제품 2위: 자동차 및 전자제품
3위: 채소류 4위: 광물제품

1999년 말 현재 몽골의 주요 수입국을 보면 다음과 같다.

몽골의 주요 수입국


생활 수준과 환율
몽골의 많은 사람들이 월 최저 생계비 수준에도 못 미치는 돈으로 가난하게 살고 있다.
99년 봄 몽골 통계청에서 발표한 한 사람의 월 기준 최저 생계비는 도시 지역이 17,600 투그릭, 시골 지역이 13,800 투그릭이었다.
그러면 도시 지역인 경우 5인 가족을 기준으로 월 88,000 투그릭이 필요하며, 시골 지역은 5인 가족을 기준으로 월 69,000 투그릭이 필요하다. 그러나 1998년 말을 기준으로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가정이 몽골의 전체 가정의 절반을 넘는다.
울란바타르 지역의 일반적인 가정의 지출을 보면 식료품 비로 42.8%를 지출하고, 의복 및 기타 생필품 구입비로 30.6%를 지출하고, 세금, 의료비, 주택 관리비 등으로 25.8%를 지출하고, 저축은 겨우 0.7%에 지나지 않았다.

울란바타르 지역 한 가정 당 지출 비율


그리고 시골 지역의 경우는 저축을 전혀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몽골의 많은 가정들이 미래를 계획하며 준비하거나 저축할 만한 여유가 전혀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힘겨운 상황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몽골의 화폐 단위는 투그릭(Tg)으로 현재의 환율은 공식적인 US 1$=1,091투그릭(Tg) 이지만 실제 거래 가격은 조금씩 차이가 나기도 한다. 최근 2년간은 환율 변동폭이 큰 편이다. 하루 사이에 5% 정도 올랐다가 내리는 등 환율이 불안정하며, 현재 5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현재 환율이 연초보다 5% 정도 인하된 상황이나 선거 후 다시 환율이 제 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전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난 10년간 환율 변동을 살펴보면 다음 표와 같다.

환율 변동(Tg/1$)


6. 사회와 문화
(1) 유목과 가축
동북아시아의 만리장성 이북에 거주하는 민족들에게 있어서 유목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이다. 이것은 주요한 생산 수단이며 삶 자체이기도 하다. 몽골의 역사는 곧 유목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데 사회 구조나 문화, 정치, 경제, 군사 등이 모두 유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몽골인들이 전통적으로 유목을 해 온 주된 이유는 환경에 대한 적응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아시아 대륙의 만리장성 이북은 동쪽으로는 만주로부터 몽골 초원과 러시아 대평원을 거쳐 서쪽으로 유럽까지 연결되는 대초원 지대이다. 이 지역은 전반적으로 강수량이 적고 지대가 높으며 여름이 짧고 겨울이 길다. 따라서 농사를 짓기에는 부적당한 곳이지만 도처에 초원지대가 널려 있고, 군데군데 암염이 존재하므로 가축을 방목하기에는 최적의 지역이다. 그렇다고 모든 지역에서 아무 가축이나 다 방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고비 사막지대에는 풀이 듬성듬성 자라고 풀마다 가시가 조금씩 있어서 양을 키우기에는 부적당하다. 그러나 낙타를 키우기에는 최적지가 된다. 반면 몽골 서북부 지역은 강수량이 풍부한 산림지대로 덮여 있어서 소나 야크 같은 큰 가축을 키우기에 최적지이다. 또 몽골 동부 지역은 평탄한 대초원지대로 풀이 조밀하게 자라므로 양과 염소 및 말을 키우는데는 최적지가 된다.
농사와 마찬가지로 유목에서도 일정한 순서와 법칙이 있다. 초원에서 가축을 방목할 때 먼저 말을 방목하는데 이것은 말은 긴 혀로 풀을 말아서 뜯어먹는다. 따라서 말은 주로 목초 중에서 키가 좀 큰 것만 먹게 된다. 다음으로는 염소나 양을 방목한다. 양은 풀의 뿌리까지 뜯기 때문에 맨 나중에 방목을 한다. 또 전년도에 양을 방목한 곳에는 해를 걸러서 방목을 한다. 매년 방목을 하게 되면 초원이 고갈되어 황폐화하며 곧 바로 사막이 되기 때문이다.
몽골에서의 유목은 계절적으로도 순서를 지켜서 한다. 봄에는 눈이 많이 오는 계절이므로 물이 없어도 되는 산기슭에 방목을 하게 된다. 여름이 되면 유목민들에게는 최적의 조건이 된다. 간혹 비가 내리고 모든 풀이 자라는 계절이므로 아무 곳에서나 유목을 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이의 유목지에는 결코 들어가지 않는다. 한 여름의 뜨거운 계절이 되면 비교적 서늘한 곳을 찾아 유목을 하는데 주로 산등성이의 응달이 있는 곳이거나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여름을 지낸다. 가을이 되면 가축은 살이 찌고 풀은 열매를 맺게 된다. 이 시기에 유목민들은 겨울을 대비하여 풀을 베어서 겨울 준비를 한다. 겨울이 되면 산의 전면에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따뜻한 지역을 찾아 겨울 집을 짓고 한 겨울을 보내게 된다.
몽골인들의 유목 생활에 있어서 가축은 생활의 수단이며, 곧 삶 그 자체이다. 몽골 대초원에서 가축들과 함께 지내는 몽골인들 에게서 가축을 빼면 몽골 자체가 없어진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몽골의 가축은 일반적으로 오축(五畜)이라 하여 다섯 종류의 중요한 가축이 있다. 말, 소, 낙타, 양, 염소가 그것인데 1998년 말 통계로 전체 가축 수는 3천 2백 9십만 마리 정도가 된다.
최근 10년간의 주요 오축의 가축 숫자와 증가를 보면 다음 표와 같다.

연도별 가축의 수 (단위: 천 마리)

이 표를 보면 최근 10년간 다른 가축들의 증가보다 염소의 숫자가 3배 가까이 증가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염소 털(케시미어) 가격이 폭등하고 있어, 많은 유목민들이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염소의 숫자를 많이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말은 몽골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축으로 광활한 대초원에서 생활하는 몽골인들이 여행을 하거나 유목을 할 때, 수렵을 하거나 전쟁을 할 때도 말은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된다. 소는 말과 대조적으로 항상 집 주위에서 방목하며 몽골인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주된 공급원의 하나인 동시에 유목을 위하여 이동할 때 여러 가지 가재 도구를 운반하여 실어나르는 운송 수단으로 긴요하게 쓰인다.
몽골의 낙타는 외봉이 아닌 쌍봉(雙棒) 낙타이다. 낙타는 주로 몽골의 사막 지대에 살며, 소와 마찬가지로 주요한 운송 수단인 동시에 털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몽골인들은 낙타의 젖을 즐겨 마신다. 양과 염소는 몽골의 가축 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며, 고기와 털을 제공한다.

(2) 주거
몽골의 유목민들은 항상 광활한 초원에서 생활을 한다. 사방이 열려 있고 주위에는 가축을 방목하며 계절에 따라 혹은 목초지를 따라 항상 이동을 한다. 이러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항상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농경 민족 같이 고정된 집이 있는 것이 아닌 이동이 편리한 겔(ger)에서 살아간다. 이 몽골 겔을 만주인들은 '파오'라고 부르며, 돌궐계인들은 '유르트'라고 말한다.
몽골에서 겔이라 하면 집을 말한다. 이 겔보다 큰 것을 '오르동'이라 하며 왕들이 살던 집, 궁전을 말하기도 한다. 이 외에 '마이항' 같은 간단한 이동식 천막(Tent)이 있다.
몽골인들은 계절을 따라 이동하기 때문에 계절마다 거처하는 집을 각기 봄집, 여름집, 가을집, 겨울집이라 부른다.
겔은 중앙에는 화로를 설치하며 이 화로 안에 있는 불씨는 매우 신성시하여 항상 꺼지지 않도록 주의한다. 이것은 불이 가족의 연속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겔의 내부 벽에는 맹수의 가죽이나 비단 같은 것을 벽걸이로 건다. 겔의 안쪽에는 남쪽을 향하는 북면에 있는 침상에는 겔의 주인이 거처하고 밖에서 바라보아 왼쪽에 있는 침상으로 손님을 모신다. 몽골에서는 오른쪽이 왼쪽보다 상석이 되며, 겔의 중앙에 있는 주인의 침상 뒤에는 대개 불상이나 불경을 두며 문의 입구에 장작 같은 연료를 둔다. 간혹 주인보다 연장자가 오면 중앙의 자리를 손님에게 양보하고 왼쪽에 앉기도 한다.
그리고 몽골이 공산화된 이후 도시 중앙부에는 정부의 공공 건물을 비롯하여 현대식 아파트들이 많이 지어졌다.
현재 몽골의 주거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앞에서 설명한 겔과 나무로 담장을 친 울타리(하샤) 안에 나무와 진흙 또는 벽돌로 지은 작은 건물, 그리고 아파트이다.
몽골에는 전국적으로 33%는 겔에 살고 있고, 44%는 스스로 지은 하샤 안의 건물(하샤테 배싱)에 살고 있으며, 22%는 공동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1% 정도는 설계도를 그리고 지은 개인 주택에 살고 있다. 이는 전체 가구의 77%는 겔 지역(호로롤)에 살고 있는 것이 된다.
수도인 울란바타르 지역은 49.5%가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지방은 평균 15,2% 정도가 아파트에 살고 있다.
몽골인들의 주거 형태


(3) 의복
사람이 환경에 영향을 받아 살 듯 입는 옷도 환경에 의해 좌우된다. 몽골 고원은 기후가 건조하고 춥기 때문에 의복 역시 이에 맞추어 두껍게 입는다. 몽골인의 복장은 그 옷을 입은 사람의 신분을 나타낸다. 전통적으로 부족이 다르면 옷의 모양새나 색깔을 달리하여 입는다.
몽골인의 모자는 몽골어로 '말가이'라고 한다. 재료는 타르박(초원에 사는 쥐과의 토끼 크기 만한 동물)의 가죽이나 여우털, 담비털 등으로 만들며 간혹 천으로 만들기도 한다. 여름에 쓰는 모자와 겨울에 쓰는 모자가 구분되어 있고, 평상시에 쓰는 모자와 명절에 쓰는 모자가 구분되어있다. 모자의 장식은 여러 가지 비단으로 장식하기도 하고 모피 자체만으로 장식하기도 한다.
몽골의 의복은 일반적으로 '델'이라 하는데 말을 타기 편하고 추위에 견딜 수 있도록 긴 도포 같이 되어 있다. 또 허리에는 반드시 허리띠를 두른다. 이 허리띠를 몽골어로는 '부스'라고 한다. 과거에는 남자들만 이 허리띠를 하고 여자들은 허리띠를 하지 않아서 여자들을 '부스구이("허리띠를 하지 않은" 이라는 의미)라고 부르기도 한다. 의복의 재료는 천이나 비단이나 가죽이다. 초겨울에는 양이나 염소의 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한겨울 엄동설한에는 늙은 양의 가죽이나 낙타 또는 야생 양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거나, 이와 같은 짐승의 가죽이나 털을 델 안에 붙여서 입는다. 여름에는 천이나 비단으로 된 비교적 가벼운 델을 만들며 각양각색의 치장을 하기도 한다.
몽골인의 신발은 '고탈'이라고 하는데 장화처럼 기다랗고 검은 색깔이며 소가죽으로 만든다.
신발에도 의복과 마찬가지로 신발 좌우에 여러 가지 장식을 한다. 신발의 코 부분은 위로 치솟아 말을 타는데 편리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의 버선코와 비슷하다. 양말은 신발에 맞추어 신으며 그 속에 다시 천으로 발을 동여매어 보온을 한다. 신발의 밑바닥은 편평하여 보행에는 부적당하지만 눈이나 얼음 위에서도 발이 시리지 않도록 되어 있다.

(4) 음식
몽골 유목민들의 음식은 자급자족의 생활로 유목 생활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의 부산물을 통하여 음식을 해결하는 것이다. 그 외의 주변 농경 국가를 통하여 곡식과 과일을 수입하여 먹기도 한다. 그리고 공산화이후에는 밀농사가 가능한 중부와 동부 지역에 대규모 농장을 건설하여 밀농사를 짓고 있다. 몽골인들이 주로 먹는 음식은 육류와 유제품, 그리고 밀가루와 감자이다.
몽골인들은 집에서 기르는 가축의 고기를 주로 식용으로 이용하는데 양고기가 주식이고, 부차적으로 쇠고기를 먹는다. 가축의 내장도 즐겨 먹으나 연회 같은 곳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야생 동물을 잡아서 먹기도 하는데 사슴, 산돼지, 산양 등을 주로 잡아먹는다.
몽골인들은 야채류는 거의 먹지 않았으나 최근에 와서는 중국에서 수입된 것을 즐겨 먹는다. 몽골인들이 주로 먹는 야채는 감자와 양파, 당근 등이다.
몽골인들은 날씨가 추운 관계로 술을 즐겨 먹으며, 말의 젖을 발효시켜 만든 '마유주(아이락)'를 즐겨 먹는다. 그리고 몽골인들에게 있어 차는 매우 중요한 음식이다. 음식을 먹기 전후에 차를 꼭 마신다. 몽골인들은 물은 거의 마시지 않는 편이며, 차를 자주 그리고 즐겨 마신다.

(5) 전통 명절
몽골인들의 전통 명절은 크게 두 가지이다.
라마 불교 월력(한국의 음력과 비슷)에 따라 한국의 구정(설날)과 같은 "차강사르"가 있다.
차강사르에 대부분의 몽골 사람들은 가족, 친지들과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웃어른을 찾아다니며 세배를 한다. 그리고 간단사(라마불교 사원) 등 절을 찾아가서 참배하며 한 해 동안 모든 재앙이 없고, 복이 찾아오기를 기원한다.
다음으로는 매년 7월 10일부터 12일까지 열리는 "나담"축제이다.
나담 축제는 몽골의 유목민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친목과 우의와 단합을 도모하는 축제이다. 수도인 울란바타르에 각 지방에서 모여온 유목민들이 말타기, 전통 씨름, 활 쏘기 등의 대회를 통하여 각자의 실력을 겨루며, 자기 지방의 명예를 위하여 서로 싸운다. 울란바타르의 나담이 끝난 뒤에도 각 지역별로, 또는 전국적인 규모의 나담이 열리기도 한다. 나담은 흔히 "남자들의 세 가지 경기"라고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말타기, 전통 씨름, 활쏘기 세 가지 경기가 남자들이 하는 경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활쏘기는 여성들의 대회가 있으며, 말타기 경주에서도 여자 어린이들이 참석하기도 한다.

(6) 전환기 몽골의 사회
1989년 12월 10일 민주 혁명이후 공산 사회주의 체재를 포기하고 민주 시장경제체재로 전환한 이후 몽골은 전환기의 여러 가지 사회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표적인 사회 문제로는 가치관의 혼란과 서방으로부터 물밀듯 밀려들어오는 사상과 문화 등에 대한 무분별한 선택과 추종 등으로 인하여 가난(빈곤)의 확산, 실업률의 증가, 범죄의 증가, 빈부간의 격차, 가난과 이혼 등으로 인한 가정 불화 등이다.
1998년에 발표된 유엔개발위원회(UNDP)에서 발표한 '몽골인의 발전에 관한 보고서'에서 전환기의 몽골 상황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전환기의 몽골의 많은 숙제를 가지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으며, 몽골 국민 중 많은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으며, 보건과 교육 기관의 상황이 아주 나빠지고 있다. 그리고 여성들의 문제로 사회주의 시절에 얻었던 많은 성과들이 유명무실해지고 있으며, 국민들의 식료품의 질이 많이 나빠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환경 파괴를 줄이고, 지하자원을 잘 활용하여 국가 발전에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문제 등에 주의를 기울어야 할 필요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많은 정당들의 생겼지만 민주화가 평화스럽게 진행되고 있으므로 머지않아 경제, 사회의 발전의 미래가 그리 어둡지만 않다고 하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실업의 경우를 살펴보면 몽골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실업률과 실제 실업률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국제적인 관례와 통계조사법에 따르면 현재 몽골에는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는 연령의 인구는 809,500명이며, 정식으로 등록한 실업자 숫자는 49,800이며, 실업률이 5,8%가 된다.
이 실업률은 헝가리 11%, 러시아 9.3%, 프랑스 12.48%, 독일 9%, 영국 8% 등에 비교하면 아주 낮은 수치이다. 그러나 98년 통계청에서 실제로 "직업을 가지지 않은 사람의 숫자"를 조사하였는데 그 숫자는 실업자로 정식으로 등록한 사람은 사람을 제외하고 221,700명으로 조사되었다. 등록된 실업자 수와 앞에 말한 직업이 없는 사람 271,500명을 더하여 실업률을 계산하면 실제적인 몽골의 실업률은 31.4%에 이른다고 경제학자 알탕 게렐은 말하고 있다. 실업은 빈곤을 불러오고, 빈곤은 대부분의 경우 가정 불화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범죄 증가의 경우에도 심각한 수준이다. 특히 계획적인 살인이나, 강도, 절도 등의 범죄가 많이 늘어나고 있다. 2000년말 현재 8,200건의 범죄(4.8%증가) 의도적 살인 40.4% 강도 22.3% 강간 13.7% 증가하고
방화 26.3% 강탈 12.1% 경범죄 19.5% 감소하였다.


7. 교육과 의료
(1) 교육 현황
1998년 말 현재 몽골 국민의 문자 해독율은 97%로 아주 높은 편이다. 1924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근대 교육이 도입되어 주로 독일식 학제를 러시아를 통하여 받아들였다. 학제를 보면 4∼6세 전후에 유치원을 다니며, 7∼18세 전후에 초, 중, 고등 교육을 받는다. 몽골은 초등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통합되어 있으며, 12년제가 아니라 10년 학제이다. 그리고 지방에 있는 많은 학교들은 8년간 공부하면 졸업하게 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10년간의 돈드 소르골(초, 중, 고등학교가 합쳐진 10학년제 학교의 이름)을 졸업하면 대학에 들어가서 4년간 공부하게 된다. 그 이후 본인의 희망에 따라 대학원 과정과 석, 박사 코스를 공부한다.
10년제 돈드 소르골까지 교육은 무료 교육이나 최근 외국어나 수학 등을 중심으로 교육을 하는 학비를 받는 사립학교들도 많이 설립이 되고 있다.
1990년 이전 몽골의 교육은 사회주의 교육 제도와 이념에 따라 실시되었으나, 사회주의 계획 경제를 포기하고 시장 경제 체제와 민주주의 제도로 개혁하면서 교육 분야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교육제도나 방법이 과거 체제를 크게 벗어나고 있지 못하며, 특히 교사들이 과거 사회주의 교육체제 아래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아직은 대부분이기 때문에 큰 변화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현재 몽골의 교육은 건물, 교재, 교사 등의 문제에서 부족한 점이 많다.
거의 대부분의 학교가 학교 건물이 낡았고, 그나마 건물이 절대 부족하여 1학년부터 10학년까지 2부제 수업을 하고 있다. 정부의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학교 시설에 관한 재투자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어서 겨우 건물의 최저 보수만 간신히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최근 좋은 교재들이 많이 출판되고 있으나 부족한 실정이며, 특히 교사들의 급여 수준이 아주 낮을 뿐 아니라 그나마 적은 월급조차도 제 때 받을 수 없어서 교사들의 의욕이 많이 저하되어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작년 울란바타르와 지방에서 교사들이 수개월 월급을 받지 못하여 수업을 거부하고 시위를 벌이는 일들이 10여 차례 발생하였다.
1998년말 현재 몽골의 전체 교육기관의 숫자와 학생 수, 그리고 교사의 숫자는 다음과 같다.

몽골 교육 기관과 학생 및 교사 수


(2) 교육 수준
몽골의 교육 수준은 비교적 높게 나타났다. 고등학교 이상이 전체의 67.7%나 된다. 과거 70년 동안 몽골이 사회주의 국가였다는 것이 이렇게 높은 교육 수준의 원인이다.
다음은 1997년 몽골 보건복지부에서 발표한 몽골의 교육 수준 상황이다.

몽골의 교육 수준


※ 괄호 안의 숫자는 그 학교에 해당하는 학년을 나타낸 것이다.

(3) 의료
1998년말 현재 몽골에서는 전문 의사(이흐 엠치라고 부름)가 5,831명으로 의사 1인당 진료 인구는 411명이며, 병상수는 모두 17,986개인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나이든 의사들은 러시아에서 의학 공부를 하였으며, 의학 교재들도 거의 러시아 책들이고,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의사는 몽골 국립의과 대학에서 6년의 교육 과정을 통해 배출되는데, 재학생의 숫자는 2,500명이며 400명의 교직원이 있다. 의과 대학의 실험 실습실을 둘러 본 연세대 의대 교수 방문단은 한국의 일반 고등학교 실험실 수준도 안 된다고 평가하였다. 실습실도 수준도 낮지만 실험 실습을 위한 소모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실습이 제대로 안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의사의 질적인 수준은 매우 낮은 편이다. 간호사와 치과 의사도 형편은 마찬가지이다.
1990년 시장 경제로 전환 이 후, 러시아의 의약품 보급이 중단되면서 극심한 의약품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UN과 서방 국가, 국제 적십자사 등에서 긴급 구호 차원에서 약품들을 보내긴 하였지만, 아직도 거의 대부분의 병원이 처방은 주지만 약품은 공급하고 있지 못하며, 몇 몇 의료 장비들이 있어도 낙후된 것이거나 고장나 있는 상태이다. 최근 한국이나 서방 국가 등으로부터 약이나 의료 장비가 조금씩 들어와 의료, 보건 상황이 많이 개선되고 있으나 아직도 일반 국민들이 이용하기는 태부족이다. 최근에는 의사들에게 웃돈을 주지 않으면 좋은 진료 서비스를 받지 못할 정도로 몽골 국민들이 피부로 겪는 보건 상황은 좋지 못하다.
몽골 사람들 가운데 가장 흔한 병은 신장염과 고혈압이며, 피부병과 결핵이 널리 퍼져있다. 치아가 정상적인 사람들이 드물지만, 시설을 갖춘 치과 병원은 거의 없고, 세라믹으로 인공 치아를 만드는 기술이 없다. 아이들은 감기와 폐렴에 늘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몽골의 의료보험제도는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어서 의료 보험이 없으면 진료비도 높을 뿐 아니라 진료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의료보험비는 본인과 회사나 기업체에서 일정액을 매월 부담하면 전체 진료비의 10% 내외를 내면 진료를 받을 수 있다.


8. 종교
(1) 샤머니즘
몽골을 비롯한 동북 아시아계 민족은 전통적으로 하늘과 땅을 가장 큰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 다음은 하늘과 땅 사이에 펼쳐져 있는 삼라만상 즉 자연을 경배하는 습관이 있다. 학자들은 동북아시아계 민족의 원시 신앙을 여타 지역의 신앙과 구별하여 샤머니즘(Shamanism)이라 부르고 있다. 샤마니즘은 그 특성상 원시종교보다는 원시신앙으로 번역되고 있다.
샤머니즘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해주는 샤먼의 존재이다. 몽골인들은 남자 샤먼을 '버'로, 여자 샤먼을 '오드강'이라고 부른다. 몽골의 샤먼들은 하늘을 최고의 신으로 삼고 인격이나 신격화된 자연계의 모든 신령(神靈)들을 그 주위에 배치하여 숭배하며, 신을 부를 때 주술을 외우는데 이를 '버긴 도들라카'라고 부르는데 주술의 내용은 종교적인 교리나 민간 문학적인 색체를 띄고 있지 않다.
고대의 몽골인들이 하늘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는 것은 몽골의 기원이나 칭기스칸의 업적을 기록한 <몽골비사>가 "칭기스칸의 근원은 위 하늘에서 이미 정해 진 운명을 가지고"라는 구절로부터 시작되는 것에서도 잘 입증되고 있다. 칭기스칸은 일신상의 위험에서 벗어나거나 혹은 대원정을 개시할 때마다 반드시 하늘에 제사를 드림으로 하늘의 사호에 대한 감사와 자신이 하늘의 뜻을 전달하는 사자라는 것을 나타내었다.
고대 몽골인들은 신격화된 하늘을 '뭉흐 텡게르' 또는 '오트공 텡게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모두 '영원한 하늘'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뭉흐 텡게르'는 불교가 몽골에 들어오기 이전까지 몽골족의 최고의 신이었으나 이것은 하늘을 상징하는 추상적인 신이기 때문에 여타 신령들처럼 우상을 만들 수 없었다. 하늘 다음으로 땅을 숭배하며, 하늘 위에 떠있는 해와 달, 별들도 숭배하며, 산의 봉우리마다 있는 성황당인 '어버'는 고대 몽골 민족의 신앙이 산악 신앙과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몽골인들은 불을 부정의 제거와 가계(家系)의 번영을 상징하는 것으로 숭배하고 있다. 모든 몽골인들은 분가 시 가계나 씨족의 연속을 상징하는 화로를 전승 받는다. 따라서 "불씨를 꺼뜨리고 불은 없앤다"라는 말은 일가족을 모두 몰살시키겠다는 저주와도 같다. 칼을 불 속에 집어넣거나 칼로 불을 흐트리는 행위, 불 위에서 물건을 자르는 행위, 불을 뛰어 넘는 행위 등은 화신(火神)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화신의 목을 자르는 것이라 하여 금기 시 한다.
고대 몽골인들은 조상의 영혼도 자신이나 씨족을 지켜주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간주하여 경배하였으며, 자신들의 씨족이나 부족을 지켜주는 '술데'라는 수호신을 가지고 있었다.
몽골 역사 초기부터 13세기 혹은 16세기까지 몽골의 가장 중요한 대표적 종교로서 여러 가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몽골제국의 확장에 따라 제국 내에는 불교나 기독교, 이슬람교 등과 같은 고등종교들이 전파되기 시작하자 체계화된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샤먼 신앙은 이들과의 대결에서 열세에 빠져 겨우 민간 신앙으로서의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고, 1570년대 티벳의 불교가 들어온 이후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샤머니즘은 몽골인의 심성 깊숙이 자리잡고 있고, 생활 곳곳에서 그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지금도 어느 곳을 가든지 '어버'라고 하는 성황당 같은 것이 널려져 있다. 여전히 무당들이 있으며, 지방으로 갈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강하다.

(2) 라마 불교
① 라마 불교의 유입과 영향
불교는 1570년대 몽골로 진입한 이후 샤먼 신앙을 밀어내고 몽골의 국교로 자리잡았다. 일반적으로 몽골과 티베트의 불교를 '라마교'라는 고유 명사로 부르지만 정작 몽골과 티베트 사람은 불교라는 단어만 알지 라마교라는 단어는 알지 못한다. '라마'란 '윗 사람, 스승'이라는 의미로 티베트어로는 스님이라는 뜻이다. 라마교는 불교의 제종파 중 색체가 가장 현란한 종파로 적막한 대초원에서 생활하는 유목 민족들의 심리에 비교적 강하게 접근할 수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원래 몽골인들이 외래 종교를 접한 순서는 경교(네스토리안), 이슬람교, 도교, 불교, 천주교의 순이다. 징기스칸의 심복 중에는 도교 학자, 경건한 불교도, 경교 신자 등등 다양한 종교 신앙을 가진 실력자들이 존재했지만 모두가 징기스칸의 귀의(歸依)를 끌어내는데 실패하였다. 그러나 가장 뒤늦게 접촉한 티베트 불교가 원제국의 국교가 된 원인은 이 종파가 유목민들의 정서에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다. 티베트에서도 중국에서 전파된 불교와 티베트의 고유 신앙인 본( Bon)교와의 혼합하여 크게 번창하여 다른 불교의 제종파를 물리치고 유목 문화에 적합한 라마교의 우세로 막을 내리고, 이후 티베트를 통해 몽골에 전파되었다.
라마 불교가 처음 몽골에 유입된 것은 1230년대 오고타이(Ogotai) 때다. 그 후 세조 쿠빌라이가 1253년 티벳을 점령했을 때, 당시 라마 불교의 동자 승려인 파스파(八思巴)를 초청하였고, 그가 세조의 존경을 얻어 라마 불교는 왕실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파스파는 티벳어를 기준으로 하여 몽골 문자의 기원이 되는 파스파 문자(文字)를 제정하였다. 그러나 16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1578년 몽골의 군대 장관이었던 알탄 칸은 몽골을 통일하고 징기스(Chinggis)의 자리를 다투던 야망을 가진 자였다. 그는 한창 번창하는 티벳 불교의 황색종파(Yellow Sect)의 지도자에게 수뇌회의를 갖자고 초청했다. 그들은 알탄에게 제위의 자격에 대한 합법성과 종교적 승인을 허락하는 한편 불교 종파에게는 종교적 보호와 후원을 제공하겠다는 협상 안을 체결하게 되었다. 알탄은 티벳 불교의 지도자에게 달라이 라마(바다의 람)라는 호칭을 주게된다. 이 호칭은 그의 계승자들이 아직 갖고 있는 것이다. 알탄은 그 후 곧 죽었지만 그 다음 세기에 황색 종파는 몽골 귀족이 종교적 승인을 얻기 위한 노력과 전 몽골인들을 한 나라 국민으로 연합하려는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실패한- 대중들의 지지로 인해 몽골의 전지역에 걸쳐 퍼져갔다.
사원들은 몽골의 여러 지역에 세워졌는데 종종 많은 수의 목축업자들이 무속 의식과 제물을 위해 모일 수 있는 이민 경로의 경계지역이나 여름 목장 근처에 창건되었다. 불교 승들은 토착신앙인 무속과 오랜 투쟁을 벌여 치료자와 예언자로서의 기능과 헌금을 어느 정도 거두게 되었고 무속 인들을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변두리로 끌고 가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티벳 불교는 불교의 마하야나와 탄트릭 파의 요소들과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 쫓는 정통 티벳 의식과 결합한 것인데 개인을 고통과 환생의 싸이클에서 벗어나도록 한다는 불교와 같은 목적을 갖는다. 또한 이 종교는 환생의 싸이클에서 벗어나는 의미에서의 구원이 다른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열반의 단계로 들어가는 것을 미룬 동정적인 부다(깨달은 자)의 개입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부다들은 많이 있는데 전통적으로 깨달은 인간으로서라기 보다는 신으로서의 대우를 받는다. 그리고 종속된 신들, 반란의 신들, 개종되고 개혁된 신들, 방황하는 신들, 그리고 불교가 확장된 지역의 민간 종교를 반영하는 성화된 인간들의 풍부한 다신론 적 우주의 한 가운데를 차지한다.
이 종교는 묵상이나 매우 압축된 용어로 해석된 신성한 상징인 불교 교리에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의 이해와 인식을 방해하는 환상 아래 깔려있는 실재를 깨닫고 이해하는 발전적 단계를 가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보통 야크 목동에게 병마의 액막이로 보이는 의식이 고위 승려에게는 명상을 수행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갈등하는 양상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티벳 불교는 결국 화려하고 대중적인 의식과 대중을 위한 치유 제의를 엘리트 수도사를 위한 일반 교리 연구와 혼합한 종교가 되었다. 황색 종파는 다른 경쟁 종파와는 다르게 수도원의 훈련과 논리의 사용, 형식적인 논쟁 등을 깨달음의 도구로 사용하였다. 성육신에 대한 기본 불교 교의로서의 부다는 한 개인의 생애 속에서 지도자의 계층을 만들 수 있는데 이들은 전생의 지도자의 성 육신한 모습이고 부다를 이룬 사람이라고 여기는 탄트리즘의 생각과 결합하였다. 이들 지도자들은 살아있는 부다, 또는 성육화 된 부다라고 언급되는데 세속적 힘을 갖고 보통 승려 또는 라마(티벳어의 명칭인 bla-ma를 말하고 뜻은 "존경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들을 감독한다. 승려들은 신앙생활이나 수도원 시절 치유, 예언, 장례 등의 의식에서 그들의 가르침을 받고 덕을 쌓은 신도들에 의해 후원된다.
1586년 하라호름에 에르덴조 사원이 건축되어 활발한 포교 활동을 했으며, 1635년 자나바자(Zanzbazar)가 라마 불교 최고 지도자로 오르면서 전성기를 이루기 시작하였다. 이후 티벳의 문화와 교육 제도, 의술, 책, 불경, 고문서 등이 몽골에 본격적으로 유입되어 사용되었다.
라마 불교는 몽골이 제국으로서의 세력을 거의 상실하고, 중국(명, 청 등)의 지배적인 영향력 아래 있을 때부터 몽골 문화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사회에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실질적인 정치 세력화 하였다. 그러나 라마 불교는 여러 가지 폐해를 가져왔다. 라마승에 대한 지나친 존경으로 인해 한 때 남자 인구의 40%가 라마승이었고 이로 인해 인구 감소가 초래되었다. 정권과 밀착되어 정권을 지탱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였고 종교적 타락으로 인해 공산 혁명 당시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사회주의 문화 혁명이 지속되던 1930년대 이후 거의 모든 사찰이 폐쇄되었고, 승려들이 구속되거나, 사찰에서 나와 일반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몽골의 라마 불교는 티벳 형 불교와 샤머니즘이 혼합된 양상을 보인다. 대부분의 경전이 몽골어로 번역되지 못했고, 간단한 입문서 정도만이 소개될 뿐이다. 아직도 대부분의 라마 법회는 티벳어로 진행되며, 참석한 대중들은 거의 그 의미들을 모른 채 예식에 앉아 있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여전히 지방에서와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라마 승려에 대한 존경은 깊다.
티벳 불교는 수도원 식이다. 몽골이 공산화되기 전인 20세기 초 외몽골에는 그 나라 부(富)의 약 20%를 움직이는 583개의 수도원과 사원 건물을 갖고 있었다. 거의 모든 몽골의 도시들은 수도원이 있는 자리에서 발전했다. 당시 울란바타르로 알려졌었던 Yihe Huree(후레)는 몽골의 가장 뛰어난 살아있는 부다의 직위에 앉았다. 이는 성직 계급에서 달라이 라마와 펀첸 라마 다음에 오는 세번째 것이다.

② 라마 불교의 이용
적어도 1970년대 초, 100명의 승려들의 공동체인 간단 수도원(Gandan Monastery)이 울란바타르에서 열렸다. 이 사원은 몽골에서 유일하게 활동하는 수도원이었다. 소수의 지역 수도원은 박물관으로 남았고 간단 수도원은 박물관으로서 관광 명소였다. 그들 승려들 중에는 5년간의 훈련기간을 마친 많은 젊은이들이 포함되었는데 그들의 동기나 선택의 이유를 물어도 분명하게 대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이들은 불교의 우수성에 더 이상 도전이 없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마 불교는 이미 이 나라의 역사, 전통 예술, 그리고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뿐 아니라 정치에 이르기까지 간여하고 있는데 굳이 동기를 새삼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정부 대변인은 간단 수도원의 승려들이 유용한 일을 하고 있다고 발표했고, 종교법에서도 라마 불교의 우위성을 명시하였다. 종교나 의식에 관한 지식의 총체적 근절은 현대 몽골의 많은 부분을 그들의 과거에서 잘라내는 것이고 국가의 정체성에 손실을 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이 많은 승려들은 티벳 언어로 된 약초와 전통 의학에 관한 책를 번역하는데 고용되었다.
라마 불교는 몽골과 동부와 동남아시아에 있는 공산주의와 비 공산주의 국가들을 맺는 몽골의 외교 정책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울란바타르는 평화를 위한 아시아 불교 회의의 본부였고 일본, 베트남, 캄보디아, 스리랑카 그리고 부탄과 같은 나라들의 불교인들을 위한 회의들을 열었고 국제 회람을 위한 저서를 출판하고, 기독교 평화 회의, 아프리카-아시아 국민들의 연대 조직, 그리고 러시아 정교회와 같은 단체들과도 관계를 유지하였다.

③ 라마 불교의 생존
불교는 간단 수도원에서 기도하고 의식에 참석하는 노인 층 사이에, 고상한 불교적 표현이나 속담과 같은 사람들의 말속에, 그리고 친척들의 사진이나 다른 가족 기념 사진들을 놓는 가정의 특별한 선반 위에, 부다의 상이나 형상을 놓는 일상 관습 속에 살아남았음을 알 수 있다. 몽골의 불교는 승려들만 의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티벳 언어를 의식과 신성한 경전의 언어로 유지한 종교였는데 사람들 사이에 퍼진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박해를 받았다. 시베리아의 브리야트 지방의 소련 민속 학자들이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사원 건물의 제한과 티벳 불교의 개념적으로 정교한 문화가 유연한 민속 의식인 샤머니즘을 분산, 성장시켰다. 몽골에서의 비슷한 생존 종교나 민간 종교의 응용 등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몽골인들은 다른 필적할만한 종교 연구물을 출판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동남쪽에 살았을 약 4%의 몽골인들이 모슬렘들이였는데 이는 중국 국경에 걸쳐 살고 있는 몽골인들만큼 많은 수이다. 종교의 자유는 1960년도 헌법에 의해 보장된다.

④ 현재 라마 불교의 동향
일반 국민도 라마 불교에 대해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면서도 뿌리 깊은 생활 습관에 젖어 있으며, 개방 조치 이후 마땅한 대안이 없기 때문에 라마 불교로 다시 돌아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 전통의 복구, 민족주의 부흥, 고유 문화의 회복이라는 명분으로 전통 미술인 탱화, 토산품 제작, 관광 사업과 연결된 라마 불교의 상업적 활용도 늘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라마불교를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지원하고 있으며, 인도와 대만 등지에서 불교 선교 자금들이 들어오고 있다. 몽골 혁명 전 700개소에 이르던 라마 사찰이 혁명 후 1개소만 남기고 모두 폐쇄되었는데 최근 불과 4∼5년 만에 250개소가 복구되었고 불교 대학과 중학교가 있다.
불교와 불교 승려들은 항상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몽골에 있는 불교 사원도 예외가 아니다. 사원과 국가는 서로를 지원하고 성육신의 교리는 성육화 된 살아있는 부다들로 하여금 강력한 몽골의 귀족 가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했다.
어린아이들이 불교 학교에 다니고, 부모들이 어린아이를 라마 사원에 맡기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매주 일요일마다 가장 큰 사찰인 간등사에는 수 천명의 사람들이 모여 소원을 빌거나, 예불을 올리고 있지만 명목상의 신자들이 대부분이다.
96년 10월, 수도 울란바타르에는 약 26 미터 높이의 거대한 금동 불상이 완성되었다. 이 불상은 4억 투그릭의 비용이 들었는데, 몽골의 "독립 수호의 상징" 이라는 이름으로 몽골 정부의 지원금과 일반 국민들의 성금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불상의 건립은 사회주의 해체 이후에 빚어진 국가적 위기를 종교적으로 통합하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6년간에 걸쳐 만들었다.

(3) 회교
회교는 카자흐족이 주로 믿는데 주로 몽골의 서부 지역에 분포하며 수니파 회교도이다. 울란바타르 시에도 7,000명 가량의 몽골 국적의 카자흐 인들이 살고 있으며, 수도에서 30 Km 떨어진 날라흐 시에도 회교도들이 4∼5,000명 있으며, 회교 집회소가 있다. 현재 몽골 안에 모슬렘 교도를 위한 회교 집회소는 약 5개로 추산하고 있다. 카자흐 인들은 생활 속에서 체득된 습관적, 명목적 모슬렘이 대부분이고, 영적인 저항이나 신앙적 의식은 희박한 편이다. 따라서 모슬렘의 확산을 막고, 개방적인 모슬렘 선교를 희망하는 이들에게 몽골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지역으로 평가되고 있다.
최근 터키 모슬렘 협회에서 몽골 회교 선교를 위해 몽골에 학교를 모두 4개를 세우거나 합작 형태로 참여하고 있다. 울란바타르에 1993년 몽골-터키 합작 중학교를 설립하였고, 1995년 가을에 기존의 몽골 건축 기술 학교(제4호 건축기술학교)를 합작하였으며, 북쪽 다르항 시에도 중학교 과정을 인수하였고, 서쪽 바양울기 아이막에 학교를 역시 인수하여 본격적인 모슬렘 선교의 기반을 닦아가고 있다. 터키 모슬렘 협회에서는 중앙 아시아 선교를 중요한 목표로 설정하고, 몽골과 알마타와 울란우데, 이르크추크 등에 8개의 학교를 설립했는데 몽골 책임자는 후세인 카라쿠스(30세)이다.
울란바타르에는 "몽골 모슬렘 협회(Mongolian Moslem Society)"가 결성되어 있으며, 회교도들과 카자흐 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