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레모바(Кремово)에서는 7가구 4개의 돼지집에서 180마리의 석달 된 새끼돼지가 자라고 있다.

마을의 어떤 러시아 사람은 돼지우리를 짓는 과정을 보고, 집보다 돼지우리가 더 좋다고 말하기도 했으니, 돼지우리가 아니라 돼지집이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

물론 400여 호가 되는 마을 전체의 돼지 숫자는 더 많다.

140년 전의 이주, 그리고 70년 전의 어쩔 수 없는 떠남, 또 다시 70년이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돌아오는 재정착의 과정을 겪고 있는 끄레모바 고려인 들이 키우는 돼지가 180마리인 것이다.

 

끄레모바의 돼지는 사료만 먹지 않는다.

더 중요한 걸 먹는다.

사람도 밥만 잘 먹는다고 바르게 자라는 게 아니듯이....

더 소중한 것이 있으면 잘 자라고, 없으면 문제아(?)로 클 수도 있는 것 처럼....

첫째는 손주만큼이나 소중하게 아끼는 고려인들의 사랑과 정성, 그리고 세세한 마음 씀씀이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한국의 많은 분들의 따뜻한 지원과 후원, 그리고 관심으로 고려인들은 사료를 사서 먹이고 있는 것이다.

이미 10여년의 세월과 경험이 쌓여, 중국의 많은 농가에 양돈기술을 보급하고 있는 연변의 조선족이 주체인 북방자연농업연구소의 기술 지원 또한 소중한 몫을 담당한다.

연변에서 버스로 하루를 시달리며 와야 하는 이곳에 김철훈 소장과 몇 분이 벌써 3번이나 다녀갔다.   김철훈 소장은 연변 농업대학의 교수를 지냈던 분이다.   돼지가 잘 자라야 한다는 마음으로 9월중순에 또 한번의 먼 발길을 단숨에 달려 올 예정이다.

올 때 마다 빈 손을 오지를 않는다.   자연농업에서 발효를 위해 필수자재인 흑설탕 ? 이곳에는 흑설탕이 없음 ? 을 들고 오기도 하고, 돼지가 물을 마시는 물꼭지도 가져오고, 지난 봄에는 '돼지감자(뚱딴지)가 돼지사료로 참 좋다'며 마대자루로 한 자루 가득 캐 오기도 했다 ? 흙이 묻은 식물은 검역관계 상 국경통과가 거의 힘들 일 임에도 정성 하나로 무사히 들고 온 것이다.

사료와 고려인들의 사랑, 그리고 한국의 후원, 중국 조선족의 기술 지원 ? 4가지가 고려인 돼지의 훌륭한 식사가 되는 것이다.

 

끄레모바의 돼지는 국제적 감각을 지녔다.

돼지 집 앞에 모여서 한국사람은 한국말로, 조선족은 조선족 말로, 고려인은 고려인의 말과 러시아어로 서로 돼지 키우기에 대해 말하며 의사소통을 하다보니, 돼지들이 4가지 말을 들으며 자라기 때문이다.

 

당연히 끄레모바의 돼지는 그냥 돼지일수 없다.

한국인. 고려인. 조선족의 정성이 하나로 모여 자라는 국제감각을 지닌 동북아 평화돼지인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돼지값이 무척 비싸다.

당연히 새끼돼지도 비싸다.

지난 6월 새끼 1마리 값이 2,000루블 (8만원 정도) 정도 했다.

가장 비싼 시기였다.     비싼 이유는 연해주의 겨울 추위 때문...

추운 겨울에는 러시아 사람들은 돼지를 키우지 않고, 봄철에 새끼를 사서 따뜻할 때만 키워, 값이 좋은 12, 1월에 팔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싼 새끼돼지를 200마리 가까이 구입하자면 정말 큰 돈이 든다.  - 대략 1,500만원 정도.

한가구 300만원 정도의 농업지원대출로는 2집이 모여 돼지집 짓고 사료 좀 사고 하면 끝.

30마리 새끼 사자면, 240만원....

   돈으로는 해결될 수가 없었다.

우수리스크에서 성공적인 사업가로 자리잡은 고려인의 지원으로 가능했다.

커다란 시장도 운영하면서, 돼지도 키우는 고려인이 새끼를 빌려준 것이다.

잘 키워서 큰 돼지 팔아서 갚으라고....

먼저 와서 자리잡은 고려인이 나중에 귀환해 오는 고려인을 배려하는 따뜻함이 함께 하는 동북아 평화돼지 키우기 인 것이다.

연말에 돼지값이 좋아야 할텐데.....

중국에서 연말 특수에 맞춰 돼지고기가 싼값으로 많이 들어 올텐데 ......

동북아 평화돼지의 시장개척을 위한 브랜드화 전략도 시급하게 제기되고 있지요.

 

동북아 평화돼지!

무럭 무럭 자라거라.   

어쩔 수 없는 가축의 신세라 제 수명을 누리지는 못하지만, 남아 있는 몫은 고려인 뿐 아니라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이 보람과 풍요로움으로 채워주마.

 

동북아 평화돼지 키우기에 함께 할 수 있는 길은 다양하게 항상 열려 있습니다.

 

다음 이야기를 기약하며......


출처 : 우정마을과 끄레모바
글쓴이 : 다락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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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연해주, 2300년의 흔적

2007 10/16   뉴스메이커 745호


러시아 연해주의 구석진 변경 지역 체르냐치노. 땅을 파면 우리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 있다. 표층에는 70년 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의 주거 흔적이 있고, 더 파면 1300년 전 발해인의 주거지가 나온다. 또 그 아래 기원전 3~5세기의 옥저 유적이 있다. 탐사단이 체르냐치노 2유적 발굴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김문석 기자>

한민족의 과거, 현재, 미래가 맞닿은 땅

철로 뒤의 광활한 땅은 연해주의 고려인이 개척한 ‘한마당 농장’이다. 1937년 9월 이곳 고려인들은 땀흘려 일군 곡식을 추수하지도 못하고 중앙아시아로 가는 시베리아횡단철도에 강제로 태워졌다. 이 농장은 옛 소련이 몰락하면서 버려져 있다가 최근 우리나라 연해주 영농법인이 인수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고려인 강제 이주 집결지인 라즈돌노예 역이 있다. 고려인의 땀과 한이 서린 이 농장은 연해주로 재이주를 꿈꾸는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새로운 터전으로 부활할 것을 꿈꾸고 있다.

 

 

 

[커버스토리]발해의 혼이 우리를 부른다

2007 10/16   뉴스메이커 745호

‘코리안 루트 탐사’ 취재기, 고대 강국의 역사 현장엔 아직도 흔적이…
대순 호를농장의 제분소. 생산품을 공장 안에서 적재해 시베리아횡단철도로 운송할 수 있도록 시설이 갖춰져 있다. <김문석 기자>

한마당 농장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약 70㎞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버스로 한 시간여 달리면 왼편에 넓은 평원이 내려다보이는데, 언덕 바로 아래 차로와 나란히 달리는 철로를 만난다. 이것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 나아가 파리까지 연결되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다. 긴 여정을 준비하느라 잠을 설쳤지만 졸음을 떨치고 눈을 뜨지 않을 수 없다. ‘코리안 루트’의 수많은 지점 가운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가장 극적으로 맞닿아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선 기억하기 까다롭기만 한 러시아어 지명 속에서 ‘한마당’이라는 한국식 이름이 붙은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거기에는 기구한 역사가 숨어 있다. 이번 탐사가 수천, 수만 년까지 넘나드는 것이지만 그 첫 시간 여행은 70년 전의 아주 가까운 과거다.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동승한 연해주 영농법인 아그로상생(대표 김순옥)의 안치영 전무가 우리를 70년 전으로 안내했다.

연해주 고려인 이주역사는 진행형

“한마당 농장은 고려인들의 땀과 눈물과 한이 서린 곳이지요.”
1937년 9월, 이곳은 온통 황금빛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기근과 일제의 수탈을 피해 이주한 ‘고려인’들이 피땀 흘려 일군 1만ha(헥타르)가 넘는 광활한 황금 벌판이 풍성한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앞에 먼저 떨어진 것은 날벼락이었다. 옛 소련 스탈린 정부의 이주 명령이었다.

시베리아횡단열차는 한마당 농장의 가장자리를 달리다가 라즈돌노예라는 작은 마을의 역에 닿는다. 70년 전 고려인들은 거의 빈 몸으로 이 역에 집결해 중앙아시아로 가는 열차에 강제로 태워졌다.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자 위협을 느낀 소련 정부가 일본과 고려인이 내통하지 못하게 이런 강압책을 썼다. 이주 전 고려인 지식인 2500여 명이 총살형을 당했고, 이주인 17만여 명 가운데 5분의 1이 이주 및 정착 과정에서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고 한다.

라즈돌노예에서 바이칼 호수 입구인 이르쿠츠크까지 1만 리(약 4000㎞)에 이르는 시베리아횡단철도는 가장 최근에, 가장 대규모로 이루어진 한인들의 집단 이주로인 셈이다. 가장 선명하고, 가장 가슴 아픈 ‘코리안 루트’라고 할 수 있다. 거기서 중앙아시아까지는 약 2000㎞를 더 가야 한다.

이런 생각이 미치자 대장정의 첫 경유지를 연해주로 잡은 데는 보이지 않는 역사적 필연의 끈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느낌이 들었다. 연해주 고려인의 이주 역사는 과거형으로 끝난 게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현재형이자 앞으로도 계속될 미래형이기 때문이다. 시베리아횡단철도도 북한을 거쳐 서울, 부산까지 이어야 할 우리의 숙제이기도 하다.

1991년 소련 연방이 해체되자 중앙아시아에 이주한 고려인 후손들은 또 다른 설움을 겪어야 했다. 독립한 민족국가에서 소수민족으로 전락, 심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차별 대우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조상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연해주로 다시 이주하기를 원하지만 사정이 녹록치 않다. 까다로워진 국적법 통과는 물론 정착지 확보 문제에다 환율 격차 때문에 되돌아올 기차표를 마련하는 것조차 어려운 처지가 된 것이다.
“2005년 아그로상생이 한마당 농장의 일부를 인수했습니다.”

안치영 전무의 말에 70년 전에서 순식간에 현재로 돌아왔다. 버스는 이미 라즈돌노예 역을 지나 우수리크로 내달리고 있었다. 연해주 발해·옥저 유적을 발굴 중인 정석배 교수와 우수리스크 호텔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아그로상생, 고려인 재이주 지원

아그로상생의 한마당 농장 인수는 과거형이 아닌 현재진행형 코리안 루트의 개척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아그로상생은 민족종단 대순진리회(종무원장 이유종, 이하 대순)가 연해주에 설립한 영농법인이다. ‘아그로’는 러시아어로 농장을 뜻하고, ‘상생’은 대순의 종지(宗旨) 가운데 하나인 해원상생(解寃相生)에서 따온 말이다. 대순은 2000년부터 연해주 영농사업에 뛰어들어 2002년 젬추쥐느 농장 인수(49년 임대계약)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19개 농장을 확보한 상태다. 연해주에서는 농장 한 단위가 보통 7000ha(2100만 평)라고 한다.

대순의 연해주 농장 총면적은 현재 16만㏊(5억 평)에 육박하고 있다. 이번 탐사의 연해주 일정에 참여한 대순 김진원 총무부장에 따르면 러시아 측에서 농장 인수를 계속 권유하는 상황이다. 대순 측도 항카호 동편의 몇 개 농장을 추가로 인수할 계획이라고 한다. 김 부장은 “인수가 완료되면 모두 26만㏊(8억 평) 정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순이 연해주 영농사업에 뛰어든 이유 중에는 70년 전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고려인들의 재이주와 정착을 돕는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러시아 당국은 1990년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연해주로 재이주한 고려인을 3만여 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등록하지 않은 사람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난다. 아그로상생은 이들의 고용과 정착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대순이 수십 년 동안 버려진 땅이었던 한마당 농장을 인수한 데는 고려인 강제이주의 아픈 역사를 ‘해원’하고 고려인과 한국인 그리고 연해주 러시아인를 아울러 ‘상생’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겠다는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오후 4시 40분쯤 우수리스크 호텔에 도착하자 얼굴이 새까맣게 탄 정석배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탐사단을 두 팀으로 나눠야 했다. 2박3일로 짜인 빡빡한 연해주 일정상 함께 움직였다가는 계획한 취재를 다 마칠 수 없어서다.
이번 탐사단에는 정재승 봉우사상연구소장, 윤명철 동국대 교수, 양민종 부산대 교수, 주채혁 세종대 교수, 시미즈 키요시 순천향대 초빙교수 등 각 분야의 전문가가 참여했다(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나중에 심양에서 합류했다).

취재단은 필자(단장) 외에 이기환 선임기자, 김문석 기자(사진), 이다일·김기연씨(동영상) 등으로 구성됐고, 윤석원 뉴스메이커 편집장과 김진원 대순 총무부장 등은 연해주 일정에만 참여했다. 유전인류학 분야에서 많은 연구 성과를 올린 이홍규 서울의대 교수는 다른 일정 때문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으나 그 대신 측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광활한 연해주에서 영농사업은 기계농을 할 수밖에 없다. 대순 농장의 수확 장면. <대순 진리회>

연해주인 “일본은 만만찮고 중국은 싫다”

이번 탐사의 애초 목적은 우리 민족의 시원을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 차례의 사전 세미나와 한 차례의 예비답사 등을 거치면서 ‘민족’과 ‘시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문제 제기가 있어 좀 더 넓은 시야에서 우리 민족 문화와 역사를 바라보자는 뜻에서 ‘코리안 루트 탐사’로 개념을 재설정했다. 우리 역사와 문화를 좁은 한반도에서 단일민족이니 배달민족이니 하며 갇힌 눈으로만 볼 게 아니라 과거 우리의 활동무대였거나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 살았던 넓은 대륙에서 여러 분야의 폭넓고 열린 눈으로 바라보자는 쪽으로 취재단의 내부 합의가 이루어졌고, 자문한 관계자들의 조언이 있었다.

우리 민족의 기원을 찾는다는 식의 목적의식을 갖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보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반도사관, 식민사관도 버려야 하겠지만 지나친 민족주의적 사관도 경계해야 한다는 데도 모두 공감했다. 그래서 유전학·민속학적으로 우리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바이칼 지역과 역사 전개 과정에서 고조선·부여·옥저·고구려·발해 등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요하·대릉하 유역, 동몽골 대초원 지대, 대흥안령 산맥 지대, 북만주, 연해주 등을 탐사 지역으로 정했다.

이 모든 지역이 지금의 한반도에 하나의 민족 단위를 형성한 우리와 무관할 수 없다. 그곳에서 한반도로 내려오기도 했고, 한반도에서 그곳으로 올라가기도 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웃과 서로 싸우기도 하고 사이좋게 살기도 했을 것이다. 초원지대, 타이가 지대, 만주지역의 우리 또는 우리와 비슷한 많은 종족의 이동로를 취재단은 ‘코리안 루트’로 명명했다. ‘코리안루트탐사취재단’이라는 이름은 이런 과정을 거쳐 정해졌다.

우수리스크에서 팀을 나눈 뒤 우리는 곧바로 각자 목적지로 향했다. 이기환 기자가 디지털카메라를 챙겨 동영상을 담당한 이다일씨와 함께 정석배 교수를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옥저시대의 크로우노브카 유적을 탐사한 뒤 정 교수의 발굴 현장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나머지 취재단과 합류하기로 했다.

이들을 떨궈놓은 버스는 우수리스크 인근 ‘우정마을’ 입구에서 잠시 멈췄다가 지평선이 보이는 넓은 평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산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가끔씩 평지에 돌출된 것도 산이라기보다 낮고 완만한 구릉지였다. 이 넓은 땅의 대부분이 개간이나 개발이 안 된 채 방치된 상태였다. 연해주는 한반도의 3분의 2가 넘는 면적(16만5900㎢)이지만 인구는 200만 명을 조금 웃도는 규모다. 이마저 대부분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도시에 집중돼 있다.

소련 해체 후 연해주의 지역공동체는 러시아인의 이농과 이주로 공동화되다시피 했다고 한다. 이 자리를 메운 것이 대순과 같은 외국의 투자였다. 연해주 러시아인에게는 ‘일본은 만만하지 않고 중국은 싫다’는 정서가 깔려 있다고 한다. 특히 가까운 중국인들이 연해주에 유입하는 것을 꺼려해서 대순과 같은 한국의 투자를 반기고 있다고 김진원 부장이 귀띔했다.

러시아인은 중국을 ‘키타이(Китай)’라고 부른다. 거란의 러시아식 발음으로, 요나라 시기에 쓰던 이름이 그대로 굳어진 것이다. 캐세이퍼시픽항공의 ‘캐세이(Cathay)’도 거란의 영어식 발음에서 유래됐다. 1860년 북경조약을 통해 청나라로부터 연해주를 거저 먹다시피 한 러시아로서는 빈 땅이지만 ‘키타이’가 들어와서 사는 것만큼은 싫을 법하다.

버스는 우수리스크에서 북쪽으로 100㎞를 더 달려 아그로상생의 본부 격인 호롤 농장에 도착했다. 취재단은 농장에서 제공한 빵과 음료로 허기를 달랜 뒤 제분소를 방문했다. 연해주에서 농장을 인수하면 농지만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정미소, 제분소, 관개시설 등의 부대 설비도 자동적으로 딸려온다고 한다. 소연방 시절에 지어진 호롤 제분소에는 생산품을 그 자리에서 실어나를 화물열차가 공장 안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이 철로는 시베리아횡단철도와 연결된다.
연해주 영농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민족종단 대순진리회 이유종 종무원장이 콩 농장을 둘러보고 있다.

옛 소련의 연해주 농업인프라 우수

옛 소련 공산체제가 구축한 연해주 농업 인프라는 감탄이 나올 만했다. 취재단은 호롤 농장에서 북쪽으로 더 올라가 항카호 남단의 관개시설을 방문했다. 연방 수자원공사 소유의 ‘아스타라항카야 양수장’이다. 항카호는 우리나라 전라북도 정도 크기의 호수로서, 북쪽은 중국 땅이다. 중국에서는 싱카이호, 한자로 흥개호(興凱湖)라고 부른다.

호수의 물이 나가는 강이 중국 쪽에 있어 연해주에서는 항카호의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하려면 물을 끌어올려야 한다. 아스타라항카야 양수장은 1초에 5t의 물을 펌핑할 수 있는 양수 시스템을 7개 갖추고 있는데, 현재 6500ha의 관개수로에 물을 대고 있다. 그런데 보수를 하면 10만ha의 농지에 관개가 가능하다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 벼농사 면적의 약 10분의 1 규모다.

옛 소련이 이런 엄청난 농업 인프라를 구축한 것은 공산주의 종주국으로서 자존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안치영 전무는 “미국이 가난한 우방국에 밀가루 일색의 원조를 하자 소련은 위성국가에다 그들이 주식으로 하는 식량을 지원했다”며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쌀농사에 막대한 투자를 하게 된 이유”라고 설명했다. 지금은 연해주 전체의 벼농사 면적은 4만5000ha에 불과하다.

취재단은 항카호 서쪽에 있는 루비노브카 농장에서 여장을 풀었다. 이제 겨우 어스름이 깔릴 무렵인데 시계는 벌써 10시를 넘기고 있었다. 연해주 시간은 우리보다 1시간 빠르지만 서머타임을 실시하고 있어 2시간 차이가 났다. 우리는 농장 숙소에서 짧은 밤을 보내고 다음 일정에 들어가야 했다.

7월 10일, 발해 유적 발굴 현장으로 가는 길에 농장을 두어 군데 더 둘러보았다. 숙소에서 버스로 15분 거리의 야트막한 산악지대에 루비노브카 사슴농장이 있었다. 농장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넓은 초지에 군데군데 나무 군락이 있는 풍경이었지만 농장 울타리를 지나자 울창한 자작나무 숲이 전개됐다. 아프리카 언어를 연구했던 시미즈 키요시 교수는 “아프리카 스텝과 모습이 너무 비슷하다”며 “다른 점이라면 귀코리가 없다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우리말이 서툴러 코끼리가 ‘귀코리’로 둔갑한 것이다.

현재 사슴농장에는 약 450마리의 사슴이 방목되고 있다. 2002년 인수 당시 200마리였던 것이 4년 만에 2배 이상으로 불어났다고 한다. 과거 연해주에는 사슴농장이 발달(10만 마리가 있었다고 한다)했지만 소련 해체 후 그 수가 격감했다. 루비노브카 사슴농장만 해도 면적이 2만ha이고, 8000마리의 사슴을 방목할 수 있다.

녹용은 6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두 달 동안 채취한다. 취재단은 운 좋게도 녹용 채취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사슴을 채취장으로 몰아서 그 가운데 뿔이 있는 수컷만 채취 시설로 통과시키는 방식이었다. 채취한 녹용은 음지에서 1달 동안 자연 건조를 한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사슴농장에서 8월 말에서 9월 초까지 약 2주 동안 송이가 난다는 점이다. 눈을 씻고 봐도 주변에 소나무가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의아했다. 안치영 전무가 “50년 전에 이 일대에 소나무가 있었다”며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여러 농장을 둘러본 취재단은 연해주 영농사업이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농지를 임대하는 비용은 싸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농사를 지으려면 그 10배의 투자가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인프라는 잘 갖춰져 있지만 그것을 개·보수하고 많은 장비와 인력을 투여해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 연해주다. 취재단은 네스테로프카 농장에서 7억 원짜리 캐나다산 트랙터를 보았다. 하루 100㏊(30만 평)의 농지를 갈고 씨를 뿌리는 작업을 할 수 있는 장비다.

연해주 농장의 주요 생산품은 콩이다. 이곳이 콩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러시아인들이 즐겨 먹는 메밀, 우리의 주식인 쌀도 빼놓을 수 없는 품목이다. 대순은 멜구노브카 농장에서 3000ha의 벼농사를 짓고 있는데, 앞으로 논을 더욱 확대해나갈 것이라고 한다. 안치영 전무는 “내년부터는 최근 바이오디젤의 원료로 각광받는 유채를 재배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좁은 비포장 도로를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멈춰섰다. 버스가 더 들어갈 수 없는 곳에 이른 것이다. 벌써 정석배 교수와 이기환 기자가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인 과거 여행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옥저, 고구려, 발해로의 시간 여행이….

연해주는 고고학 분야에서도 유서 깊은 곳이다. 가장 유명한 것이 아무르강 하류 가샤 유적에서 출토된 1만3000년 전의 토기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어린 시절을 보낸 캄사몰스크와 가까운 곳이다. 이 토기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로 알려져 있다.

발굴현장의 숲과 초지 친숙한 느낌

체르냐치노 2유적의 발해 쪽구들 앞에서 정석배 교수가 취재단에게 설명을 하고 있다. <김문석 기자>
하바로브스크에서 아무르강 하류 쪽으로 200㎞ 떨어진 사카치얄란 유적에서 나온 ‘아무르의 비너스’는 국내에도 소개된 적이 있다. 4000년 전의 이 토우 여인상은 이마 부분이 뒤로 누운 편두(偏頭)를 하고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묘사된 진한(훗날 신라)의 편두 풍속과 가야 지역에서 출토되는 편두 유골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여 주목할 만한 유물이다.

발해 이전의 신석기·청동기시대 유적에서도 연해주는 한반도와 많은 관련성을 보이고 있다는 게 정석배 교수의 얘기다. 특히 융기문토기, 번개무늬토기, 도끼, 화살촉 등은 한반도의 것과 닮은 점이 많다. 정 교수는 “러시아 고고학계에서는 얀콥스키 문화는 읍루, 크로우노브카 문화는 옥저, 뽈제 문화는 숙신 혹은 읍루가 남긴 문화로 본다”고 설명했다.

낡은 군용 트럭을 개조한 발굴용 차량에 옮겨타고 발굴 현장인 ‘체르냐치노 2 유적’으로 향했다. 오래된 차이긴 하나 험한 산악지형을 다니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함께 탄 발굴단원은 나뭇가지가 환기창 안으로 들어와 얼굴을 찌를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발굴 현장 주변은 초지와 숲, 평지와 구릉, 바위, 산 등이 혼재한 지형이었다. 한반도와 다르면서도 왠지 친숙한 느낌이 드는 것은 우리 민족의 자취가 곳곳에 배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발굴지 입구에 있는 시넬니코보 마을은 일제시대에 한인 마을이었다고 한다. 시넬니코보라는 장군이 한인들을 받아들여 그 이름이 지명으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발굴 현장 가까운 곳에 가슴 높이만큼 자란 풀밭을 가리키며 “저기에 고려인 집터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시넬니코보, 체르냐치노 마을 일대에는 70년 전만 해도 고려인이 터를 잡고 살았던 곳이다.

체르냐치노 2유적에서 발굴한 토기편들. 발해·말갈계 토기가 혼재해 있다. <김문석 기자>
숲길을 빠져나오니 거짓말처럼 확 트인 초지가 펼쳐졌다. 한국전통문화학교와 러시아 극동국립기술대, 러시아과학원 극동지소 역사고고민족학연구소가 공동 발굴하고 있는 체르냐치노 2 유적이 초지 입구의 개울가에 있었다. 우리는 발굴단이 제공한 점심을 먹고 곧바로 발굴현장으로 갔다. 이번 발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발해의 주거유적에서 발견한 쪽구들이다. 정 교수는 아직 다 발굴하지 않은 쪽구들의 드러난 부분으로 취재단을 안내했다. 구들이 유적의 낭떠러지 부분에 걸려 있어 완전한 형태는 아니었지만 아궁이 일부와 ㄷ자 모양으로 돌아가는 연도가 대부분 남아 있다는 게 정 교수의 말이었다.

구들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난방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연해주, 그것도 깊숙한 변방 오지에서 1300여 년 전 발해인이 사용했던 구들을 직접 눈으로 보자 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 이 구들방에서 온기를 느끼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후손을 남겼다면 그들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혹시 취재단 중에 그들과 관련이 있는 사람은 없을까.

“이 일대의 표층에는 한인 이주민이 거주한 흔적이 있고, 그 아래 발해 문화층이 있습니다. 더 아래에는 옥저-크로우노브카 문화층이 있지요.”

정 교수의 설명에 흥분 상태에서 깨어났다. 70년 전, 1300년 전 그리고 2300년 전의 우리 민족의 흔적이 한 곳에서 겹겹이 쌓여 있다는 말이었다. 정 교수는 취재단이 떠난 뒤에 발해 쪽구들 아래층에서 옥저시대의 ㄱ자형 쪽구들도 발굴했다. 예전에 구들의 기원을 고구려로 보았는데 현재 연해주 고고학 발굴의 성과 등으로 그 연대가 옥저까지 올라가는 추세다. 정 교수는 “옥저시대의 크로우노브카 문화 연대가 적어도 기원전 3세기이고, 학자에 따라서는 기원전 5세기까지로 본다”고 말했다.

우리는 다시 체르냐치노 2 유적에서 1㎞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체르냐치노 5유적으로 향했다. 체로냐치노 유적은 솔빈강(라즈돌라야강) 주변에 16개가 산재해 있다. 5유적은 정 교수가 러시아 극동국립기술대 Yu. G. 니키친 교수와 공동으로 2003년부터 지난해까지 4차에 걸쳐 발굴한 유적이다. 주로 고분들이 나왔는데, 160기가 발굴됐고 모두 3500여 기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실묘, 부석묘(돌깐무덤), 위석묘(돌 돌림무덤), 토광묘 등 다양한 묘제가 한 곳에서 나와 발해시기의 주민 구성과 신분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가 되고 있다. 즉 돌을 사용한 무덤(주로 고구려계)과 흙을 사용한 무덤(주로 말갈계)이 같은 시기에 존재한다는 것은 여러 계통의 종족이 함께 어울려 살았고, 이들 사이에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시넬니코보 발해 산성에서 내려다 본 솔빈강. 오른쪽에 보이는 마을이 체르냐치노이고, 그 앞의 넓은 농지가 발해의 주거지였다. 체르냐치노 유적은 강 왼쪽에 있다. <김문석 기자>

1300여 년 전 발해인의 구들 발굴

지난해 발굴이 끝나 풀이 듬성듬성 나 있는 5유적을 둘러본 취재단은 초지를 벗어나 산길로 들어섰다. 시넬니코보 발해 산성을 보기 위해서다. 솔빈강변에 독수리 머리처럼 돌출된 산의 정상에 구축한 성이다. 땀을 흘리며 수풀을 헤쳐 산성에 오르면서 온통 눈에 띄는 것은 검은 자작나무와 도라지 그리고 야생 마늘이었다. 웅녀가 먹은 마늘이 바로 이 야생 마늘이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시넬리코보 성은 산꼭대기의 천연 암벽을 이용해 만든 석성이었다. 솔빈강 가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다 돌을 쌓아 이은 형태였다. 정 교수에 따르면 연해주에는 발해 성이 30여 개 확인되고 있는데, 논쟁지까지 포함하면 50여 개가 된다고 한다. 연해주는 발해 시대의 솔빈부였다. 이런 변방에까지 이렇게 튼튼한 요새를 촘촘히 건설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다.

절벽 위에 서니 솔빈강 건너 북쪽 멀리 체르냐치노 마을이 보였다. 마을 앞에는 농지로 이용하는 넓은 개활지가 있었는데, 정 교수는 “마을 앞 농지가 전부 발해의 주거지였다”고 말했다. 솔빈강이 빠져나가는 동쪽에도 시넬리코보 마을과의 사이에 광활한 농지가 펼쳐졌다.. 정 교수에 따르면 그곳 역시 발해 시기의 주거지다.

성 안쪽은 아래에서 보는 것과 달리 제법 넓은 평지가 형성돼 있었다. 성은 아직 발굴하지 않은 상태였고, 한쪽을 절개해 조사한 흔적이 보였다. 바깥은 돌을 쌓고 안쪽은 흙으로 메운 방식이었다. 정 교수는 “발해 성이지만 고구려 성과 흡사하다”고 말했다. 안쪽을 메운 흙 속에는 말갈계 토기가 출토되고 성 내부에서는 구석기시대 유물도 나온다고 한다.

우리는 오후 7시가 다 되어서야 버스가 대기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예정됐던 극동박물관 취재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우리 민족의 아득한 과거와 현재의 질기디 질긴 인연이 배어 있는 현장을 차마 일찍 떠날 수 없는 터였다. 대조영이 세운 동방의 강국 발해, 어느 날 갑자기 미스터리처럼 사라져 우리 역사에서마저 소외됐던 발해는 그 흔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웅변할 뿐이었다. 그들이 뼈를 묻은 연해주는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인터뷰 | 니키친 국립극동기술대 교수
“사방을 모두 파보고 싶다”

정석배 교수와 함께 체르냐치노 2유적을 발굴한 Yu. G. 니키친 극동국립기술대 문화인류학부 교수는 한·러 공동발굴단의 러시아 측 단장이다. 체르냐치노 유적은 그가 솔빈강을 따라 지표조사를 하다가 발견한 것이다. 발굴 현장에서 그와 즉석 인터뷰를 했다.

- 체르냐치노 발해 유적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1994년부터 국경지역 지표조사 프로그램이 있었다. 전체 지역을 걸어서 조사했다. 400개 이상 유적을 발견했다. 그중 100개 정도가 발해, 말갈의 것이었다. 그때 이 유적을 발견했다. 아주 중요한 유적이지만 정부의 지원을 받기 힘들었다. 그런 중에 한국전통문화학교의 공동 발굴 제안을 받고 기뻐했다.”

- 발굴한 소감은 어떤가.

“체르냐치노 5유적에서 160개 이상의 고분을 발굴했다. 유물과 새로운 유형의 무덤 형식을 발견해서 연구할 게 많이 생겼다. 이곳의 석실분은 연해주에서 가장 북쪽의 발해 석실분이다. 이 석실분과 함께 다른 유적들이 발해 영역을 보여줄 수 있다. 그 당시에는 분명한 국경선이 없었기 때문에 무덤, 사원, 기와 등을 보고 판단할 수 있다.”

- 러시아에서 발해는 지방사인가, 민족사인가.

“동아시아 역사의 일부다. 말갈이나 발해의 영역 일부가 연해주에 포함돼 있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 지금은 일반인도 발해, 말갈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옥타브리스키 군수를 만났는데 그도 이 부분에 관심이 있었고, 언젠가 현장을 방문할 것이라고 했다.”

- 앞으로의 발굴 계획은.

“사방을 다 파고 싶다. 매년 발굴할 때마다 새로운 유물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다 하고 싶다. 발굴한 자료를 연구 분석하는 것도 필요하고, 그것들을 비교하면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


신동호<코리안루트탐사취재단 단장> hudy@kyunghyang,com

 

 

 

출처 : mars의 진실 찾아 떠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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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는 우리땅’ 증거 찾았다

18세기 이후 조선과 청의 국경을 나타내는 인공울타리(흙무더기나 돌무더기)의 흔적이 위성영상을 통해 백두산 천지 동남쪽에서 처음으로 확인됐다. 경향신문 뉴스메이커 간도특별기획취재팀은 최근 1m급 위성영상(2004년 6월12일 촬영)을 입수, 고지도 등을 참고해 양국간 경계를 추적한 결과 이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위성영상을 제공한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인 위아(주)는 “19세기말 등의 고지도와 비교한 결과 압록강과 송화강의 상류를 연결하는 토퇴와 석퇴 등 인공물의 윤곽이 1.5㎞ 이상 연결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이로써 그동안 중국측이 주장해온 압록강~두만강 국경 주장은 허위임이 드러났으며 1712년 백두산 정계비 건립 이후 계속된 300년간의 국경논란도 우리 측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됐다.

특히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과 동쪽의 압록강 사이를 잇는 울타리가 양국간 국경선임이 밝혀짐에 따라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속하는 간도 지역이 한국땅임도 입증된 셈이다.

인공울타리 흔적은 백두산 장군봉에서 내려오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다 꺾어져, 토문강의 마른 하천을 끼면서 동쪽으로 800m가량 이어지고 있다. 이후 600m 정도 불분명해진 선은 다시 300m가량 나타난다.

위아(주) 위성사업부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중국 지안의 환도산성과 발해 상경 성곽을 위성영상을 통해 판독할 때에도 이런 띠가 나타났다”며 “영상 속에서는 작은 길처럼 보이지만 윤곽의 형태가 돌무더기 띠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울타리 흔적이 나타난 토문강은 위성영상에서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이 관계자는 “전체 지리를 살펴볼 수 있는 15m급 위성영상에서 토문강이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감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간도문제 전문가인 노계현 전 창원대 총장(외교사)은 “정계비 건립 당시 양쪽의 강 물줄기를 경계로 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는 만큼 조선과 청의 국경이 압록강과 송화강이었음을 보여주는 이번 위성영상 판독결과는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한다”고 밝혔다.

조선후기 국경사를 연구해온 경인교대 강석화 교수(사학)는 “위성영상을 직접 확인해보니 토문강과 정계비 사이를 돌무더기로 연결했다는 18세기 숙종실록의 내용이 사실임이 드러났다”면서 “이번 확인이 앞으로 학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 윤호우 기자 2005-1-31)

 

 

 

출처 : mars의 진실 찾아 떠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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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정계비서 나오는 江은 頭滿 아닌 土門"

최근 현지 답사를 통해 토문강을 찾아낸 조선일보 취재팀은 두만강(豆滿江)이 천지에서 발원하는 강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천지에서 발원하지 않는 두만강은 조선과 청의 국경선이 아니라는 우리의 그동안의 주장이 재확인된 것이다. 1909년 일제가 간도 영유권을 청나라에 넘긴 ‘간도협약’ 훨씬 이전부터 두만강 북쪽에는 많은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관리를 파견해 그곳을 직접 통치하기도 했다. 1962년 중국과 북한의 ‘조·중 변계조약’은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았다. 국제법 학자들은 “1909년과 1962년의 국경 합의를 인정할 수 없다면, 그 이전에 유효했던 국경선이 한·중 양국의 국경선이 돼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중국 길림성(吉林省) 도문(圖們)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길은 계속 두만강을 왼쪽에 끼고 이어진다. 적봉(赤峰)을 지나면서부터 더 이상 두만강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백두산 천지까지는 자연적 지형이 아니라 지도에 자를 대고 그은 일직선이 중국과 북한의 국경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난 샛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최근 중국측이 관광지로 개발하고 있다는 원지(圓池)가 나온다. 지름 180m의 이 작은 화산호는 청나라의 발상지이자 두만강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곳은 백두산 천지로부터 33㎞ 이상 떨어져 있다. 인근 ‘21호 국경비’ 근처의 실개천이 두만강 원류라는 말도 있지만 이곳 역시 천지로부터의 거리가 원지보다 가깝지 않다.

두만강은 ‘토문강’을 국경으로 삼았던 백두산 정계비에서 발원하는 강도 아니다. 1885년 조선과 청의 을유감계회담(乙酉勘界會談) 당시 중국은 어떻게든 두만강을 ‘백두산 정계비 근처의 강’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지류들을 다시 조사했다. 그러나 그들이 보기에도 두만강 지류 중 가장 북쪽인 홍토수(紅土水)조차 백두산 정계비로부터 120리나 떨어져 있었고, 정계비 동쪽의 물은 송화강으로 흐르는 것이 확실했다.

신형식(申瀅植) 간도학회 회장(상명대 초빙교수)은 “그동안 우리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백두산 천지에서 시작하는 강’이라 잘못 배웠다”며 “일제가 간도를 중국에 넘겨준 뒤 일부러 ‘두만강이 국경’이라는 왜곡된 지리적 사실을 가르쳤고, 이를 광복 이후에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1909년 당시 간도에 거주하는 한인이 8만2900명이었던 반면 청나라 사람은 한족(漢族)·만주족을 통틀어 2만7300명에 불과했다.

백두산 부근에서 발원한 토문강은 동북쪽으로 흘러 ‘17호 국경비’ 근처의 북한·중국 국경을 넘고 나면 정북쪽으로 꺾어진다. 그런 뒤 길림성 삼도(三道) 부근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이 부근엔 강을 사이에 두고 이웃한 조선족 마을인 ‘남도(南道)’와 ‘북도(北道)가 있다. 1930년대에 전라도 전주·남원·고창 등지에서 이주한 조선인들이 세운 이 마을에는 아직도 100호 가까운 조선족들이 살고 있다. 17세 때인 1939년 이곳으로 왔다는 1세대 주민은 “마을 앞에 흐르는 강을 뗏목을 타고 건너 다녀 ‘떼맷강’이라 불렀고, 멱도 감고 고기도 잡으면서 살았다”고 말했다. 이곳 토문강 곁에서 이들은 집을 짓고 땅을 개간하고 자식을 낳으며 지금까지 삶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남도와 북도 사이를 통과한 토문강은 송강(松江)을 지나 이도백하와 합류한 뒤 송화강(松花江)의 본류와 만난다. 송화강은 서북쪽으로 흘러 길림(吉林)과 송원(松原)을 지나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하얼빈(哈爾濱)을 관통한 송화강은 마침내 흑룡강(黑龍江)과 합쳐진다. 간도(間島) 영유권 관련 사실을 기록한 ‘북여요선’(北輿要選·1903)에 의하면, 1899년 정계비 일대를 조사했던 대한제국의 함경북도 관찰사 이종관(李鍾觀)은 “토문강은 송화강·흑룡강과 합류해 바다로 들어가는 강”이라고 보고했다.

노영돈 인천대 교수(국제법)는 “강박에 의한 을사조약이 무효이고, 보호국인 일본이 조약체결권까지 갖는 것은 아니므로 1909년의 간도협약은 당연히 무효”라고 말한다. 만약 1712년의 백두산 정계비가 국제법적 효력이 없다면, 압록강 서안의 서간도(西間島) 역시 우리의 영토가 돼야 하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생긴다고 노 교수는 지적한다. 박선영 포항공대 교수(중국사)는 “청나라측 사료인 ‘광서조동화록(光緖朝東華錄)’에도 조선의 행정권이 청나라보다 먼저 간도에 미치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며 “분쟁 지역의 주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제3자 중재기관이나 국제사법기관의 시각에서 사안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지난해 10월 외교부는 ‘간도협약은 무효’라는 내용을 담은 국정감사 자료집을 배포했다가 급하게 수거하고 “간도협약은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로 좀더 정확한 역사적 고증과 신중한 입장이 필요하다”는 뜻을 밝혔다. 최근 미 터프츠대 국제정치학과 앨런 워치맨 교수는 “한국이 중국과의 ‘역사전쟁’에서 우위를 확보하려면 고구려와 간도에 대한 영토 소유권을 동시에 주장해야 한다”며 “세계 11위의 경제대국 위상을 활용해 북방 경계선 재설정을 주장하는 ‘고단수 역사프로젝트’에 착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백두산=특별취재팀)

(조선일보 2005-2-11)

 

 

백두산 정계비에 적힌 그 강… 토문강 찾았다

조선·청의 국경… 두만강과 별개의 강으로 드러나
백두산 부근 북 영토서 시작, 중 송화강 본류로 흘러
"간도지역 영유권은 한반도에" 우리측 주장 확인

간도(間島)의 영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국경 분쟁을 일으켰던 토문강(土門江)의 실체를 본지 취재팀이 확인했다. 토문강은 현재도 백두산 천지 부근 북한 땅에서 발원해 동북쪽으로 흐르며, 천지로부터 동쪽으로 18㎞ 떨어진 ‘17호 국경비’에서 중국·북한 국경과 만난 뒤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송화강(松花江)과 합류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토문강이 중국측의 주장처럼 현재의 두만강이 아니라, 별도로 존재하는 강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토문강이 두만강과 별도로 실재하는 강이라면 한반도와 중국의 국경 설정에 대해 ‘동쪽으로 토문을 경계로 한다’는 1712년(숙종 38년) 백두산 정계비의 문구는 그 의미를 다시 따져봐야 한다. 현재 연변 조선족자치주에 해당하는 토문강 동쪽 동간도(東間島) 지역의 영유권은 한반도 쪽에 있다는 우리의 전통적 주장이 재확인 되기 때문이다. 1909년 일제가 조선을 대신해서 청나라와 체결해 간도 땅을 넘겨준 ‘간도협약’이 국제법상 무효라는 주장도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중국 길림성 도문시(圖們市)로부터 백두산 아래 이도백하진(二道白河鎭)까지 두만강변을 따라 이어진 도로는 2차선 비포장 길이다. 이 길로 접어들기 위해 화룡(和龍)에서 남평진(南坪鎭)으로 향하는 도중 무장한 중국군이 차를 세운다.

“탈북자를 찾아내려는 겁니다. 저 사람들 요즘 독이 바싹 올라 있단 말입니다.”

현지 안내인이 목소리를 낮춰 설명한다. 서쪽으로 차를 몰아 광평(廣坪)의 군부대를 지난 뒤부턴 마을조차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부턴 백두산 기슭이다. 이 길과 만나는 네 줄기의 하천은 모두 오도백하(五道百河)로 흐르는 물줄기다. 그 중 세 번째 강줄기는 북한 쪽에서 흘러나오는 강이다.

‘기점으로부터 301㎞’라고 씌어진 작은 표지석을 지나자 얼마 안 가 그 세 번째 ‘강’이 보인다. 폭 15~20m 정도의 이 강줄기는 물이 말라 바닥이 훤히 드러나 있다. 강바닥 돌들 위로는 얼어붙은 눈이 단단히 덮여 있다. 강줄기를 따라 약 3㎞를 걸어 올라갔다. 강줄기는 자작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 속에서 점점 경사가 급해진다. “더 들어가면 자칫 국경을 넘어갈 수가 있소! 그만 돌아가오.” 안내인의 목소리다. 앞쪽에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하나 보인다. 언덕으로 이어진 길을 200m 정도 걸어가니 정상에 초소가 하나 있다. 창문으로는 김이 뿜어 나온다. 중국군의 초소겠거니 생각하고 그 앞까지 걸어간 순간, 갑자기 초소에서 외투를 입은 군인 한 명이 문을 열고 나온다. 북한 군인이다.

이쪽을 본 북한 군인은 눈을 크게 뜨더니 순간적으로 어깨에 맨 총에 손을 댄다. 그도 무척 놀란 표정이다. ‘이미 국경을 넘어선 건 아닐까’란 생각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초소 왼쪽에 붉은 색으로 글씨가 씌어진 비석이 있다. ‘中國 17’. 백두산 천지 남쪽으로부터 두만강 상류까지 중국과 북한의 국경을 표시한 21개의 국경비 중 열일곱 번째 비석이다. 비석 앞에서 동서 방향으로 이어진 좁은 길은 중국군과 북한군이 공동으로 순찰하는 ‘순라길’이다. 국경까지 온 것이다.

여차하면 총을 겨눌 기세인 북한 군인을 뒤로 하고 오른쪽 강줄기로 향한다. 계속 가면 백두산 천지까지 이어진다는 순라길과 강이 만나는 곳에 작은 나무다리가 있다. 강 폭은 약 5~6m 정도. 물이 말라 있었고 숲에 가려 시야도 좁았지만, 상류는 바로 앞 북한 땅 깊숙한 곳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아마도 조금만 더 상류로 올라가면 백두산 정계비로부터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 토퇴(土堆)와 석퇴(石堆)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갈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이곳 주변에서 20년 동안 산림감시원으로 일하고 있는 중국인 A씨는 “북한쪽으로부터 물줄기가 나오는 하천은 이 근처에서 이곳 하나뿐”이라고 말했다. 겨울엔 건천이지만 봄부터 8~9월까지는 물이 흐른다고도 했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의하면,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진 천지 동남쪽의 분수령은 토문강의 강원(江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토문강의 흐름도 일정하지 않았다. 청나라측은 국경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토퇴·석퇴를 쌓을 것을 조선측에 주문했다. 바로 이 토퇴·석퇴가 이어져 있던 강이 바로 토문강이었다. 1885년과 1887년 조선과 청의 국경회담 결과 양측이 작성한 지도에서 토퇴·석퇴가 있었던 강은 현재의 중국 지도에는 ‘오도백하(五道白河)’로 표시돼 있다. 간도협약 직후인 1909년 일제 통감부가 작성한 지도 역시 오도백하를 ‘토문강’으로 명기하고 있다.

육락현(陸洛現) 간도되찾기운동본부 대표는 “많은 자료들을 검토한 결과 토퇴·석퇴가 있는 토문강 발원지는 현재 북한 영토임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토문강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어떤 지점에서 땅 밑으로 복류하고 다시 땅 위로 흘러 북쪽으로 방향을 바꾼다’는 기록과 들어맞는 것은 ‘17호 국경비’ 옆의 하천이다.

(백두산=특별취재팀)

(조선일보 2005-2-10)

 

 

 

 

 

中당국, ‘間島’ 지명 철저히 지워

관광책자·地圖서 삭제, 간도 분쟁 차단 전략

중국정부 당국은 지난해 여름, 길림성 연길(延吉)의 조선족 학자들에게 긴급 지령을 내렸다. “‘유서깊은 두만강반(江畔)’이란 책의 위법 여부를 조사하라!”

연변인민출판사가 ‘용정시(龍井市) 관광지 안내’ 시리즈의 한 권으로 지난 2001년 출간한 이 책은 용정과 그 일대의 역사적 내력을 적은 우리말 서적이다. 관광안내 책자에 대해 중국 당국이 왜 뒤늦게 제동을 걸고 나섰을까. 바로 이 책의 표지에 실린 사진 때문이었다. 한글과 한자로 ‘사이섬 間島’라고 새겨 놓은 비석 앞에 몇 사람이 앉아 있는 사진이었다. 현지의 한 전문가는 “중국은 ‘간도’라는 지명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말했다. 중국은 최근 들어 ‘토문강’이나 ‘간도’라는 지명을 철저히 지우고 있다.

흑룡강성의 한 조선족 지식인은 “30년 전만 해도 연길에서 나오는 지도에 ‘토문강’이 두만강과 다른 강으로 표시돼 있었다”고 말했지만 지금은 ‘간도’라는 지명조차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유서깊은 두만강반’ 표지에 실렸던 비석은 두만강가인 도문시 선구촌(船口村)에 있었던 것으로, 한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2003년 중국 당국은 이 비석을 철거해 버렸다.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의 목표는 간도를 둘러싼 영토 분쟁을 철저하게 차단하려는 전략이기도 하다. 동북공정의 33개 연구과제 중에서 12개 과제가 간도 문제를 직접 겨냥한 것이다. 지난해 방한한 우다웨이(武大偉) 중국 외교부 부부장은 한국이 간도 문제를 거론하지 말아달라고 우리 정부에 노골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조선일보 2005-2-11)

 

 

 

[책] 간도는 조선땅이다

간도는 조선 땅이다
시노다 지사쿠 지음·신영길 옮김/지선당 펴냄

간도는 중국 동북 3성의 하나인 길림성 동남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현재 길림성에 속하는 연변조선인자치주에 해당되는 지역. 간도는 읍루와 옥저의 땅이었으나 고구려에 의해 복속된 후 오랫동안 고구려 지배하에 있었다.

신라 통일 시대에는 발해 왕국이 200여년간 이 땅을 지배했다.

고려시대로부터 조선 전기에 걸쳐서는 여진족들이 각지에 흩어져 살았다.

우리 동포들의 간도 이주는 조선 초부터 시작되었다.

세조 14년(1468년)의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빈 땅에 백성들이 들어가 토지를 개간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여진족이 세를 결집해 후금을 세우기 전까지 조선 백성의 간도 개간은 공공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중국측이 간도에 대한 자신들의 역사적 연고를 주장하면서 우리나라와 귀속 문제를 둘러싸고 분쟁이 있어 왔다.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는 장백산(백두산) 일대를 성역으로 여기고 봉금(封禁)정책을 썼으며, 그후 청은 우리나라에 대해 국경선을 확정하기 위한 절충을 요구했다.

1712년 양국대표 일행이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이 비문에 “동은 토문강, 서는 압록강”으로 국경을 삼기로 새겨 놓았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가 1909년 청·일 간도협약을 통해 청나라에 넘겨준 뒤로 간도는 우리에게 잊혀진 영토가 되었다.

이 책은 평안남도 지사와 경성제국대학 총장을 지낸 국제법학자 시노다 지사쿠(條田治策·1872~1946)가 30여년간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간도가 우리 영토임을 입증한 일종의 역사서다.

저자는 "학자적 입장에서 볼때 간도는 마땅히 조선땅이어야 공평타당하며 일본이 만주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간도를 청국에 넘겨준 것은 잘못한 것으로 분통한 일"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1907년 일본 통감부 간도파출소 총무과장으로 간도에 발을 들여 놓은 이후 1938년 이 책을 출간할때까지 현지 조사는 물론 조선과 청국간에 오간 조회문(照會文)과 복조문(覆照文),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조선 및 청국의 많은 관련 기록과 문헌들을 뒤져 간도가 한국 영토이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저자는 이 책에 조선과 청간의 국경담판으로 유명한 을유 감계담판과 정해 감계담판에서 양국대표 사이에 논전을 벌인 대담실록을 자세히 싣고 있다.

이 담판에서 청국 대표는 대국의 유세를 부리며 협박과 공갈로 나왔으나 조선 대표 이중하는 이에 굴하지 않고 '내 목을 자를지언정 우리 국경을 축소할 수 없다'고 강하게 대처한 대목은 오늘날 우리 정부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다.

최근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 역사의 중국 역사 편입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남북 통일에 대비해 미리 만주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외교적 마찰 등을 운운하며 중국의 역사 왜곡에 소극적 대응만 하고 있다.

간도는 가까운 장래에 동북아 요충지로 부각될 기회의 땅이자 희망의 땅이다.

오는 2009년은 간도를 빼앗긴 지 100년. 간도를 정당한 권리 없이 점유하고 있는 중국에 대해 당당하게 영유권을 주장하고 고구려 역사를 되찾는 일을 국가적 차원에서 시도해야 할 시점이다.

(매일신문 / 이경달 기자 2005-2-11)

 

 

日학자 "淸에 간도 준 것은 부당"

1906년 어느 날 일본 도쿄(東京) 아오야마(靑山)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의 집 앞에 말 탄 군인 한 명이 멈춰 섰다.

한국주둔군사령부의 사이토(齋藤)중좌(중령). 러일전쟁 당시 중국 뤼순(旅順)을 점령한 일본군에 시노다는 국제법 문제를 다루는 군정관으로 참여, 당시 군 참모였던 사이토와는 잘 아는 사이였다.

사이토는 보안을 당부하며 시노다에게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뺏은 일본이 영토문제를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해 간도에 관헌을 파견하려는데 거기서 법적인 문제를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큰 소송을 맡아 분주하던 시노다는 처음 고사했으나 사이토가 ‘국가를 위해서’라는 대의명분을 들먹이자 흔쾌히 승락했다. 그리고 반년 여 뒤, 1907년 8월 19일 북간도 룽징(龍井)에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가 섰다.

도쿄제국대 박사로 후에 경성제대 총장까지 지낸 시노다는 짧게는 일본이 간도를 청에 넘겨주고 파출소를 폐쇄하는 1909년 11월 2일까지 2년여 동안, 길게는 그가 ‘백두산정계비’라는 책을 내는 1938년 무렵까지 간도문제에 관한 정통한 일본학자였다.

국내외 간도문제 연구자들이 늘 참고자료로 인용하는 그 ‘백두산정계비’가 ‘간도는 조선 땅이다-백두산정계비와 국경’(지선당 발행)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국내 번역 출간됐다.

시노다는 이 책에서 국제법으로 볼 때 백두산정계비는 국경조약으로 아무런 효력이 없으며, 일본이 만주장악을 위한 야욕을 채우기 위해 간도를 청에게 넘겨준 것은 부당할 뿐 아니라 후대에 큰 분쟁을 낳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머리말에서 그는 1931년 7월말 백두산정계비가 사라진 것을 통탄하며 ‘건립 당시의 사정 및 후년에 가서 중대한 국제적 쟁의를 야기케 할 역사적 사항을 생각한다면 이를 인멸토록 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해 간도문제가 한ㆍ중외교문제로 비화할 것을 일찌감치 예견했다.

책에는 조선과 청이 간도문제를 둘러싸고 주고 받은 각종 외교문서, 통지문이 빠짐없이 실려 있어 간도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역사적인 갈등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중립지대의 성격이 변질되어 국경을 정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 뒤, 양국이 본격으로 벌인 1885년 을유감계담판(乙酉勘界談判)과 1887년 정해(丁亥)감계담판 내용을 그대로 소개해 사료로도 가치가 높다.

여러 자료를 통해 그는 ‘두만강은 물론 압록강 건너 땅까지 간도 전체가 중립지대이며 그 영유권은 조선에도, 청에도 없다’고 결론 내렸다.

만주족이 명을 위협할 동안 근심거리를 없애려고 조선을 두차례 침략한 뒤 간도를 누구도 들어와 살지 않는 중립지대로 하자고 제안했고, 조선도 이를 받아들인 것이 이 땅의 성격이라는 것이다.

후대에 백두산정계비가 섰지만 ‘당시 목극등(穆克登)은 (비를 세운) 그 지점을 도문강, 즉 두만강의 발원지로 잘못 알았고’ 그래서 ‘법률행위의 요소에 착오가 있었던’ 무효이며, 을유년과 정해년의 국경회담은 모두 결렬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노다는 “학술상의 논거로 볼 때 이미 압록강 건너 땅을 청의 영토로 한 이상, 두만강 건너 땅은 한국영토로 하는 것이 공평하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그리고 일본정부의 정치논리에 따라 자신이 대변해오던 “간도는 한국 땅”이라는 주장이나, 학자적인 양심에 비추어서 만주협약으로 하루 아침에 간도 전체가 중국 땅이 된 것을 두고 “아! 만사가 끝이 났다. 지금 와서 비분강개하여도 무익한 일”이라고 한탄했다.

책을 번역한 신영길 한국장서가협회 명예회장은 “일제가 대륙진출의 발판을 구축하기 위한 흥정으로 간도협약을 체결해 석을수(石乙水)를 한ㆍ청 국경으로 삼음으로써 간도가 우리 강역에서 떨어져나가고 말았다는 것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며 “시노다의 책은 학자적 입장에서 공평하게 간도는 조선 땅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 김범수 기자 2005-2-6)

 

 

 

 

출처 : mars의 진실 찾아 떠나는 세상
글쓴이 : 화성인 mar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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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17세기 연해주는 조선땅이었다”

당시 러시아 외교관·지도 제작자 기록 발굴 “조선 국경 두만강 아닌 아무르강에서 시작”

17세기 러시아에서도 연해주를 조선땅으로 인식했다는 자료가 처음으로 소개됐다. 러시아가 극동으로 진출하기 전 이미 조선인들이 연해주에 진출해 있었다는 것이다. 간도 영유권과 함께 연해주 영유권을 구체적으로 밝혀줄 자료로 주목된다. 간도·연해주 영유권과 관련, 러시아 측의 자료가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산하 역사연구소 박명용 연구원이 밝힌 17세기 러시아의 자료를 보면 조선 영토가 아무르강(중국명으로는 흑룡강)에서 시작하여 해안가를 따라 한반도 끝까지로 나타나 있다. ‘뉴스메이커’ 간도특별기획취재팀은 4월말 북방사 논총(고구려연구재단 발간)을 통해 발표를 앞두고 있는 박연구원의 논문을 사전에 입수했다. 박연구원은 ‘연해주를 둘러싼 한국과 러시아 영토문제: 1650년에서 1900년까지’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 논문에서 주목할 만한 자료는 그리스 출신 러시아 외교관인 스빠파리가 1670년대 중국을 견문하며 쓴 책이다. 이 책은 ‘시베리아와 중국’이란 제목으로 1960년 러시아에서 출간한 것인데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도 서술돼 있다.

“조선은 레오아뚱(요동의 러시아 표기)과 아무르강 사이에 있는 나라다.(중략) 이 나라는 아무르강 하류에서 멀지 않은 바다의 커다란 ‘코’에 놓여 있는데, 이런 이유 때문에 아무르강 하류 지역에는 바다를 따라 멀리 돌아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아무르강은 러시아 연해주의 북부에 있는 강이다.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는 송화강이 북으로 흘러 아무르강과 만나 동해쪽으로 흘러나간다. 당시 러시아는 반도를 ‘코’라고 표기했다. 러시아가 동해를 낀 연해주 지역과 한반도 전체를 조선의 땅으로 인식했다는 것이 기록에서 드러난다. 스빠파리는 “러시아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아무르강 하구에서 오른쪽으로 가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 바닷길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며 이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를 갖고 있지 않음을 나타내기도 했다. 스빠파리의 기록은 중국에서 들은 얘기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예수회 선교사들이 전하는 조선 사정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러시아 역사연구소 연구원 논문 입수

시베리아 출신 지도제작자인 레메조프의 17세기 후반 지도와 기록도 흥미롭다. 박연구원은 고려인인 보리스 박의 ‘러시아와 한국’이라는 책(러시아 원문)에 나타난 레메조프 관련 부분을 인용했다. 여기에는 레메조프가 조선 영토는 아무르강에서 시작된다고 그렸다는 것. 레메조프는 조선이 아무르강 남쪽 그리고 만주 동쪽에 길게 놓인 지역으로 묘사했다. 레메조프의 기록은 오스트리아에서 번역돼 책으로 간행되기도 했다.

스빠파리와 레메조프의 기록에서 일치하는 대목은 조선의 영토가 아무르강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린 조선 국경은 두만강이 아닌 아무르강이었다. 박연구원은 “조선 영토가 바로 아무르강 남쪽에서 시작된 것은 당시 극동에 와 있거나 또는 극동 지역을 연구하던 외국인들(러시아인 포함) 사이에 흔히 거론되던 내용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기록이 일부 다른 점도 있지만 이들이 왜 한결같이 아무르강 남쪽에서 조선영토가 시작된다고 생각했는가를 박연구원은 17세기 만주지역 정세와 연결시켰다. 심양 북쪽에 거점을 둔 누르하치는 1590년대부터 동쪽으로 진출, 만주지역을 휩쓸고 정복에 나섰다. 1621년 심양에 들어가고 1644년 베이징을 점령한 다음 만주족은 중국으로 이주했다.

조선인 네르친스크 진출은 획기적 사실

소비에트 역사학자인 멜리호프의 기록에 의하면 만주족이란 심양 주변에 살던 여러 종족의 연합을 뜻했다. 심양 주위를 뺀 다른 만주 지역과 연해주, 아무르강 지역에는 퉁구스계와 몽골계인 다양한 소수 민족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았다고 서술한 것이다. 박연구원은 “압록강에서 아무르강에 이르는 지역이 주인 없는 땅으로 남아 있었고 이런 이유 때문에 17세기말 러시아 연구자들이 연해주를 중국땅이 아닌 조선땅으로 보았다”고 주장했다. 만주 지역에도 중국의 힘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으므로 소수민족에 비해 그래도 큰 국가인 조선의 힘이 연해주에 미쳤다고 당시 러시아인들이 보았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기록에서는 연해주의 동북쪽인 네르친스크까지 조선인이 실제로 진출했다는 기록도 이번에 소개됐다. 19세기말 저널리스트 스깔꼽스끼의 기록에는 “조선 상인들은 아르군 강을 따라 네르친스크와 나운(지금의 정확한 이름을 알 수 없음)에 비단·종이·대나무 발·부채·담배·금·비단재료·중국비단 등을 가지고 와서 러시아 모피와 바꿨다”고 나타나 있다.

박연구원은 논문에서 18세기초 중국으로 파견된 끄리스니쯔의 기록도 소개하고 있다. 끄리스니쯔는 “아무르강 하구 쪽에 있는 반도사람들은 아무르강으로 들어가는 나운까지 다닌다”며 “나운이라는 도시까지 배를 타고 온 다음 거기에서 물건을 가지고 40여일에 걸쳐 베이징으로 간다”고 기록했다.

조선 상인들이 아무르강(흑룡강) 인근에 위치한 네르친스크까지 진출해 러시아인과 무역을 하고 또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했다는 것도 국내 학계에는 처음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의 존재를 통해 17세기 말 러시아에서는 아무르강 남쪽에서 조선 영토가 시작된다고 봤을 것이라는 박연구원의 주장이다.

간도영유권 문제를 연구해온 포항공대 박선영교수(중국 근현대사)는 “러시아 자료가 처음 소개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면서 “특히 조선인이 네르친스크까지 진출했다는 것은 획기적인 사실”이라고 평가했다. 박교수는 “만주 지역이 17세기에는 청의 손길이 닿지 않는 무인지대였음이 러시아 자료에도 일부 드러나고 있다는 것도 큰 수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박연구원은 “17세기 러시아 자료가 밝힌 아무르강 밑의 조선땅은 연해주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간도 지역은 아니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그렇다 할지라도 박연구원은 “만주지역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일부 기록은 지금 국내에서 제기되고 있는 간도 문제에 대한 뿌리를 이해하는데 핵심이 되리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17세 중반부터 러시아는 미지의 지역을 찾아 동쪽으로,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때 청과 아무르강 중류에서 맞부딪치게 된다. 이후 러시아와 청은 결국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화해하게 된다. 이때 러시아는 아무르강 위쪽인 고르비짜강과 아르군강으로 국경선을 삼는 것으로 양보했다. 하지만 내륙이 아닌 연해주 지역은 여전히 미확정이었다.

연해주 역시 통일 후 영유권 주장 가능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동진이 좌절된 러시아가 다시 이곳으로 진출한 것은 19세기 중반이다. 러시아는 1859년 블라디보스토크에 닻을 내렸다. 그리고 이 지역을 러시아 땅이라고 선언했다. 이때부터 러시아 농민들이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와 청은 1860년 11월 2일 베이징 조약을 맺는다. 17세기에는 조선땅이던 연해주 지역이 이 조약으로 러시아 땅으로 인정받는다. 이미 이곳에서 살고 있던 조선인들이 졸지에 남의 땅에 사는 게 된 셈이다. 베이징 조약 이후 조선과 러시아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직접 국경을 접한다. 박연구원의 표현에 의하면 ‘러시아는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아무르강에서 연해주를 차지’했다. 1860년 제2차아편전쟁으로 청이 영불연합군에 밀려 베이징이 위태로워졌을 때 러시아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 베이징 조약을 맺은 것이다. 두만강 하구의 섬으로 조선땅으로 기록된 녹둔도도 이때 러시아령으로 들어가고 만다.

반면 이미 17세기에 조선인들이 연해주 지역까지 진출했지만 국력이 쇠약한 조선은 국제정세에 어두웠다. 러시아와 청의 베이징 조약 체결 사실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두만강에서 러시아와 접하게 된 사실을 안 것은 베이징 조약이 체결된 다음해인 1861년이다.

러시아군이 국경비를 세울 때에야 조선은 러시아와 이곳에서 국경을 접하게 됐다는 사실을 안다. 경흥부사 이석영은 조정에 이 사실을 알렸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조선인들은 흉년이 들면 간도뿐만 아니라 연해주로 대거 이주한다. 박연구원이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러시아 기록에서는 1860년 이후 조선인들이 이주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미 이전에 조선인들이 진출한 사실을 의도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조선인들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18만여명이 이 지역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다. 이곳 연해주의 면적은 16만 5900㎢. 남북한 면적(22만1000㎢)에 버금가는 땅이다.

한나라당 권오을의원은 지난 4월 14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이해찬 국무총리에게 “고구려, 발해와 동북지방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고 이를 한국사에 편입해 기술해야 통일 후 간도 및 연해주 일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고 밝혔다. 연해주 역시 간도처럼 통일 후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곳으로 지목한 셈이다.

지난해 결성된 간도되찾기운동본부에서도 간도에 이어 연해주의 영유권을 주장할 계획이다. 육낙현대표는 “당초 러시아와 외교 마찰을 빚을까 우려해서 삭제했으나 앞으로 운동본부의 대한민국 지도에 연해주도 포함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육대표는 “연해주는 러시아가 진출하기 이전부터 조선인들이 개간해 살던 곳”이라고 주장했다.

(뉴스메이커 / 윤호우 기자 2005-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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