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에 관심을 돌리자

"정치 경제학적 측면의 돌파구로 새로운 접근해야"

 
 
지금으로부터 꼭 70년 전인 1937년 8월은 우리 민족의 해외 이주 역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비극의 달이다. 1937년 8월 구(舊)소련의 인민위원회와 공산당은 '극동지방 국경 부근의 한인(韓人)을 이주시키는 문제에 관하여'라는 결의문을 발표하였고 이를 시작으로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집거(集居)하고 있던 우리 교포들의 불행한 강제 이주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스탈린은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에 대한 위협과 함께 늘어가는 연해주 거주 한인 규모에 대해 경계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스탈린 정권은 스탈린이 서명한 '명령번호 1428-326' 문건을 통해 "일본의 간첩 행위가 극동지방에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 ... 지체 없이 추방을 시작하여 1938년 1월 1일까지 추방 작업을 종결한다"는 명령에 따라 연해주 거주 한인들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시킨 것이다. 이에 따라 총 3만 6,422가구의 17만 여명에 이르는 한인들이 6,000㎞ 거리 밖의 낯선 지역으로 이주했고 그 과정에서 '간첩 행위자'로 몰린 한인 지식인 2,500여명은 총살을 당하였다.

강제 이주 70년째를 맞는 지금도 15만 명 이상의 한인들은 또 다시 유랑의 역사를 거듭하고 있다. 1991년 구소련의 붕괴에 따라 구소련에 속해 있던 중앙아시아 소재 공화국들이 독립국가로 변신하면서 배타적인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었고 이로 인해 이 지역에 살던 한인 2, 3세들은 1세대가 갖은 고생 끝에 이룩해 놓은 삶의 터전을 물려받을 기회마저 상실한 채 생계를 위해 재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 중에서 일부는 사할린과 연해주로 일부는 러시아 서남부로 이주하였고 낯선 땅에서 떠돌이 품팔이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나라와 연해주는 역사적으로 매우 밀접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연해주에서는 옥저(BC 3세기∼AD 3세기)와 발해(AD 698∼926년)의 주거지 유적이 확인되었고 불과 70년 전까지 이곳에 살았던 한인 이주민의 흔적이 존재하고 있어 2300여 년 동안의 우리 민족과의 인연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근세사에서 공식적으로 우리 민족의 연해주 진출이 시작된 것은 1860년 이후의 일이지만 러시아의 극동 진출 이전인 17세기에도 조선인들의 연해주 진출이 있었으며 그 역사를 입증해줄 자료들도 속속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한인들의 본격적인 연해주 진출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르러 한반도의 정치, 경제가 극도로 피폐해져 나라를 잃게 되면서이다. 이에 한인들이 대거 이주해 한인촌(韓人村)을 형성했으며 안중근 의사와 홍범도 의병장이 활동하면서 1910년 무렵에는 해외 항일의병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를 입증해 줄 100만 평(330만㎡) 규모의 한인촌과 항일의병운동 훈련터가 연해주 하산의 추카노보 마을(연추하 마을, 燕雛河里)에서 발견되었다.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분쟁으로 인해 개방되지 않았던 하산은 2003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지시로 개방되었다.

이제 연해주가 완전히 개방된 지금 우리가 연해주에 관심을 돌려야 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연해주가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천연자원 매장이 풍부하지만 아직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이다. 러시아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는 아직 러시아의 영향력이 본격적으로 미치고 있지 않은 지역이다. 따라서 연해주에 우리의 경제적 진출을 확대하는 것은 구소련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한인들에게 새로운 경제 활동 기회를 주게 되어 이들로 하여금 우리나라와 연해주의 발전에 기여하는 기회의 땅으로 제공될 수 있는 것이다.

현재와 같은 초국가적 경제 시대에는 주권이 미치는 공간적 개념으로서의 국토와 국경은 존재하지만 경제 활동 영역으로서의 배타성은 현저하게 약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때문에 경제 활동을 통해 연해주에 보다 많은 사람을 이주시키고 경제적 주도권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는 연해주에 대한 한인의 강렬한 회귀 의식을 유발하게 되어 연해주가 이들의 중요한 생활 영역으로 자리잡게 만들 것이다. 이는 바로 현대적 의미의 영토 확장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둘째 북한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연해주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연해주 경제의 발전과 한인들의 집거도를 높이는데 기여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북한 경제의 변화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특히 대규모 산업기지 건설과 농업기지 개척은 북한의 노동력을 이용한 남북한 합작 진출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북한 경제의 변화뿐 아니라 나아가 통일의 교두보 역할도 충분히 할 수 있다. 게다가 농업기지의 경우 탈북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로서의 기능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북한에 대한 중국의 과도한 지원과 진출을 경계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우리나라와 러시아의 공통적인 입장에서 볼 때 연해주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두 나라의 협력을 통해 북한에 공동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다. 특히 중국이 전략적으로 북한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함경북도 해안 지역에 대한 공동 진출은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확대에 대응하는 전략적 측면뿐만 아니라 북한의 중요한 천연자원 매장 지역이자 중공업 지대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경제적 측면의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셋째 중국을 견제하는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를 러시아에게 넘겨주고 동해 바다로의 출해권을 상실한 이후 이 지역에 대한 전략적 구상은 출해 문제 해결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중국은 연해주에 대한 자국민 이주와 경제적 진출을 크게 장려하고 있는 중이다. 그 결과 중국은 이미 연해주 대외무역의 40% 이상을 점유하고 있으며 연해주 인구의 10%를 넘는 65만 명의 중국인이 거주하고 있어 러시아를 긴장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 푸틴 대통령은 2006년 12월 20일 크렘린궁에서 열린 국가안보회의에서 "극동지역에 외국인은 계속 유입되는데 러시아 인구는 줄고 있다. 갈수록 타지역과 고립되어 가는 이 지역이 러시아의 최대 위협이다"라고 피력한 것이 단적인 예이다. 따라서 연해주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한반도와 연해주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노리고 있는 중국을 러시아와 공동으로 견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넷째 교통 요충지로서 가치가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연해주는 향후 한반도 통일이 이루어질 경우 한반도를 관통하여 태평양에서 시베리아횡단철도(TSR)를 따라 유럽까지 연결될 대륙횡단철도의 중요한 연결 지역이 될 것이다. 이는 중국횡단철도(TCR)라는 또 다른 대륙횡단철도와 맞물려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교통 요충지로서 한반도의 가치를 더욱 크게 해주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한반도와 연해주,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한민족 집거 지역과 연계된 국토개발 전략과 해외투자 전략을 구상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동서해안의 주요 도시와 중국 및 일본의 해안 도시를 상호보완적으로 연결하는 국토개발 전략과 연해주와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산업기지와 농업기지의 건설을 통하여 통일된 한반도와 이들 지역을 기능적으로 연결하는 해외투자 전략을 구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해양으로는 아시아와 태평양과 연결되고 대륙으로는 TSR과 TCR을 경유하여 유럽과 연결되어 한반도 번영의 시야를 크게 넓힐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섯째 러시아 거주 교포의 위상을 크게 증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재외동포재단의 통계에 따르면 러시아를 비롯한 구소련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은 53만 명에 이르고 있다. 이들의 분포를 보면 러시아에 20만(연해주 18,300) 명, 중앙아시아 지역 국가들에 32만 명이 산재하고 있다. 연해주에 대한 관심과 투자를 통해 이들 중 일부라도 연해주에 집거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 일환으로 연해주에 '고려인자차주'의 설립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연해주 경제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나아가 러시아 거주 교포의 위상을 획기적으로 증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동북아에는 남북한에 거주하는 7,000만과 일본, 중국, 러시아에 거주하는 400만 명에 육박하는 한민족이 집중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질적인 북한 정권과 한반도에 대해 치열한 국가이익 확보 경쟁을 벌이고 있는 주변국들로 인해 향후에도 일정 기간 동안은 한반도의 분할을 고착화시키는 방향으로 흐르게 될 것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내적인 힘의 축적과 동시에 외적인 탈출구를 찾아야 할 필요성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우선 경제적 측면에서라도 동북아에 집거하고 있는 한민족을 연결하는 공동체를 구상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 경제의 구조 변화, 국토의 균형적 발전, 한반도 통일, 우리 민족의 미래상 정립을 실현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 더욱이 이들 지역은 장차 동북아의 발전을 주도하는 핵심 지역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공동체 구상은 매우 유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를 위한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로서 연해주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대단히 중요하다. 이제 8월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70년 전인 1937년 8월 고난의 비극을 겪었던 러시아 교포들의 불행했던 삶을 생각하면서 우리 민족의 미래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김익겸 논설위원/동북아전문가·정치학박사] 

출처 : 온라인위의 중국조선족
글쓴이 : 독고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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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이주’ 70년 고려인의 노래

 

<앵커 멘트>

70년 전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한과 눈물이 어린 노래들이 채록돼 책으로 출간됐습니다.

국어 변천사와 문화사 등의 연구에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나신하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1937년 스탈린 정권에 의해 연해주에서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20만 명의 동포들.

'카레이스키'라 불린 구소련내 한인들입니다.

민족이란 말도 금기시된 상황에서 망향의 한을 달래 준 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우리 노래였습니다.

70년 동안 5대에 걸쳐 구전돼온 노래들, 그리고 1,2세대만이 기억하는 노래들이 채록돼 책으로 집대성됐습니다.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김병학 시인이 고려인 음악가 한 야꼬브 씨의 도움으로 우리말 가요와 민요, 동요 568곡의 악보와 가사, 사진 자료 등을 모았습니다.

 

<인터뷰> 김병학(시인/채록·편저자) : "연해주에서 태어낸 세대들이 아직 생존해 있고 그분들이 과거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상태에서 저희들이 채록..."

 

천 쪽 가까운 두 권 분량 노래집엔 강제 이주민의 애환과 정서, 희망과 승리의 의지 등이 담겨 있습니다.

또, 당시 생활상과 음악 예술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희귀 사진들도 함께 수록됐습니다.

 

<인터뷰> 김준태(시인/기획·감수자) : "문화사, 역사, 이주민사, 타국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보여주는 큰 의미가 있다."

 

한국문학평화포럼은 오는 10월 27일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 가수와 중앙아시아 각 민족의 대표급 가수들을 초청해 노래집 출간 축하 공연을 열 예정입니다.

 

 

KBS 뉴스 나신하입니다.


 

 

 

[문화] 나신하 기자
입력시간 : 2007.07.31 (08:10)

 

[동영상보기 클릭]

http://news.kbs.co.kr/article/culture/200707/20070731/1399908.html

 

출처 : 시향의 숲 채운재
글쓴이 : 無影박희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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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러시아지역에서의 항일민족운동

 

  러시아 극동 지역은 한반도와 두만강을 접하고 있는 지역으로서 한국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두만강 건너 연해주 곳곳에서는 발해의 유적지들이 널리 퍼져 있으며, 1860년대 이후 이곳에 거주하였던 한인들의 숨결이 남아 있다. 또한 구한말 이후 지속적으로 전개된 항일투쟁의 열기와 유적지들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던 동포들이 다시 돌아와 재정착하고 있으며, 구소련의 몰락 이후에는 많은 한국업체들이 진출하고 있다.

 

  러시아 극동지역은 1910년대 국내외를 걸쳐 민족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으로 이 지역의 민족운동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연해주에서는 1905년부터 1908년까지 두만강 대안인 연추 (현재 : 크라스키노)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의병장으로서는 이범윤, 최재형, 홍범도, 안중근, 이범진 등을 들 수 있다. 재러 동포들은 이들 의병장들을 중심으로 활발한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여 일본군에게 큰 위협을 가하였다. 특히, 의병장의 1인인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이등박문을 포살함으로써 한국독립운동의 활성화 및 국내외 동포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하였다.

   둘째,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지역을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한민학교 등 민족학교를 설치하여 동포 자제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신문 등을 간행하여 국내외 소식전달과 항일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하였다. 대표적인 신문으로는 『해조신문』과 『대동공보』를 들 수 있다. 『해조신문』의 경우 국내에서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장지연을 주필로 초빙하였다. 

  셋째,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될 기미가 있자 연해주 한인들은 유인석을 중심으로 13도의군을 조직하고, 국내로 진공하여 일제를 몰아내고자 하였다. 아울러 성명회 선언서를 발표하여 일제의 조선강점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선포하여 한국의 독립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넷째, 1911년 연해주 한인들은 한인자치기구로서 권업회를 조직하여 한인들의 자치활동과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아울러 신채호, 이상설, 장도빈 등을 주필로 하는 권업신문도 간행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또한 이동휘 등을 중심으로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 일제에 대항하여 한국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함으로써 재러 한인들의 이러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다섯째, 러시아지역의 한인들은 1919년 2월 25일 국내외에서 최초로 대한국민의회라는 정부를 조직하였다. 대한국민의회에서는 문창범, 이동휘, 최재형, 김철훈 등이 중심인물로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만주와 국내 등지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고자 하는 한편 상해임시정부와도 통합을 이룩함으로써 발전적으로 해체하여 민족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여섯째, 대한국민의회는 1919년 3월 17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후, 우수리스크를 시작으로 블다디보스톡, 크라스키노 등 여러 지역에서 3.1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특히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에 있는 한인들은 한민학교를 중심으로 활발히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일곱째, 3.1운동 이후 이 지역에 거주하는 동포들은 노인동맹단 등 다양한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여 대일투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 중 노인단 소속의 강우규 의사의 의거는 일제를 경악케 할 정도로 큰 영향을 키쳤다.

  여덟째, 3.1운동 이후 재러 동포들의 활발한 대일투쟁은 1920년 4월 일제의 한인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으로 일시 정체 상태를 보이게 되었다. 즉 일본군은 1920년 4월 4일과 5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과 우수리스크 등 한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습격하여 다수의 한인을 살상하는 한편 가옥 등을 파괴하였다. 신한촌의 경우 300여명을 사살했다고 하며, 우수시스크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인 최재형을 사살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러시아 극동지역에서는 1905년부터 1922년 러시아 내전이 종결되는 시기까지 동포들의 인적, 물적 지원 하에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19년 3.1운동이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크게 기여하여 민족운동 발전에 공헌하였다. 그런데 1922년 러시아 내전이 종결된 이후 연해주 지역에서는 소련의 대한인정책의 변화로 인하여 더 이상 독립운동이 전개될 수 없었으며, 1937년에는 일본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18만 동포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러시아 지역 항일유적지

 1. 핫산지구 크라스키노(연추) - 안중근 단지동맹비

 2. 우수리스크(발해의 고도) 우수리스크역, 우수리스크 고려사범대학, 4월참변 추도비

   수이푼 강 - 이상설선생 유허비

 3. 하바로브스크(단동) 아무르강, 한인사회당 창당 장소, 조명희 거주지

 4. 이르크츠크 고려공산당 제1차대회 장소

 5. 블라디보스톡 독립문터, 연해주 신한촌 기념탑, 이동휘 집터, 개척리, 블라디보스톡역, 고려사범대학

 

안중근선생 단지동맹비                  수이푼 강 유역 이상설선생 유허비

 

 

신한촌 기념탑                  블라디보스톡역

 

 

 2. 한국독립운동과 중국 동북부지역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쟁탈전이 가속화되던 19세기말, 한반도의 정치.경제 상황은 극도로 불안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함경도와 평안도 주민들의 만주로의 이주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대부분 경제적인 이유로 이주 물결에 몸을 맡겼던 한인들은 척박한 토지를 개간하고 수전 농법으로 새로운 경제상황을 연출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의 한인이주는 더욱 가속화되면서 지역적으로 서간도(남만), 북간도(동만)와 북만에 시차를 두면서 한인 이주화가 형성되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항일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1910년대부터 치열한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서간도, 북간도는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으며 많은 한인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어 독립운동의 인적 물적 토대를 이루게 되었다. 또한 일제의 탄압과 중국의 무관심 내지 일제와의 탄압공조를 통한 독립운동 와해 작업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의 독립운동은 만주라는 거대한 공간 속에서 치렬하게 전개되었다.

  북만주 하얼빈에서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대륙 침략과 한반도 침략의 거두인 이토오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척살하였으며, 1920년 10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청산리대첩 역시 북간도에서 이루어졌다. 조직적인 항일투쟁을 선도하고 그 인적자원을 끊임없이 배출해 낼 수 있었던 신흥무관학교의 기상이 서린 곳도 이곳이었다.

  이렇듯 만주지역은 무장투쟁론에 입각하여 서간도의 군로군정서, 북간도의 북로군정서를 필두로 격렬한 항일투쟁을 전개한 곳이다. 현재 중국 동북지역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만주지역은 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을 보고자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州都)인 옌지(延吉)를 통하여 오는데, 이 지역은 초기 이주 한인사회가 형성된 곳으로 룽징(龍井)을 중심으로 삶의 터전을 가꾸어 나가던 곳이다. 특히 명동촌을 비롯한 연변지역은 항일민족교육을 실시하여 식민지 조선의 멍에를 거두어 내기 위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도 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선열들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또한 무디어진 세월 속에 항일독립운동의 열기를 느끼기 위하여 이곳을 찾고 있다.

 

1) 훈춘 시내의 유적지

 

  훈춘은 연변조선자치주의 중심인 연길 동쪽에 있으며 러시아로 통하는 관문이다. 이곳에는 1919, 20년 당시 독립운동에 관련된 역사적 자취가 많이 남아 있지만 최근 중국의 개발 붐을 타고 도시 재개발이 활발하게 윤동주 시비 일어나면서 과거의 흔적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1919년 3월 20일 오전 8시 차대인구를 출발, 동문을 통하여 용원거리를 행진, 서문 밖 일본영사관 부근까지 행진한 시위대 3천여 명은 이 곳에서 독립축하회를 개최하였다. 집회 장소는 현재 훈춘시 병원에서 인민정부 방향으로 난 도로로 추정되고 있다.

  일제는 1920년 9월과 10월에 자신이 사주한 마적단이 훈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한 것을 빌미로 조선국 제 19사단 등 2만여 명의 병력을 만주로 출동시켜 독립군을 공격하고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이 참변과 관련된 훈춘 일본 영사관은 오늘날 훈춘시 인민정보와 연결된 신안거리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다. 최근 이 건물과 관사는 철거되었으며 그 자리에 훈춘시 공안국이 들어서 있다. 

 

훈춘시 전경

 

 2) 윤동주 기념관(옛 대성중학, 현 용정중학 역사전람관)

 

  1921년 강훈이 설립한 대성중학교(大成中學校)는 창립 초기 7명의 교사와 160명의 학생이 있었다. 1939년 만주국에 의하여 동흥중학교(東興中學校)에 합병될 때까지 수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대성중학교는 현재 용정중학(龍井中學) 내 옛 교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교정에는 윤동주 시비와 은진, 동흥, 영신, 대성, 광명여자중학, 명신여자중학 등 용정 내 6개 중학의 역사와 윤동주의 생애와 그 주변인물 등 역사적 사건 및 인물 중심으로 전시한 기념관이 있어 국내외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윤동주 기념관은 독립기념관과 연변대학 민족연구원 민족역사연구소가 공동으로 내부 전시 자료를 교체, 보완하여 2005년 12월 16일 재 개관 되었다.

 

윤동주 기념관                                              윤동주 시비

 

 3) 하이란강(海蘭江)과 이쑹팅(一松亭)

 

  연길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을 달리면 해란강이 흐르는 용정에 닿는다. 해란강은 두만강 지류로 가곡 ‘선구자’에 등장하는 바로 그 강이다. 이 강이 선구자에 언급된 이유는 우리 민족이 간도 지방에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 해란강 주변의 들판이었고, 그 중심 젖줄이 해란강이었기 때문이다.

 연길에서 용정 방향으로 화룡 가는 길목 해란강 축구장 위쪽 산등성이에 자그마한 정자가 하나 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일송정’이다. 광복 전에는 늠름한 자태의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작은 소나무 한그루와 정자가 있다. 1980년대 후반 중국정부 당국에서 이곳에 ‘일송정’이라는 이름의 정자를 건립하여 기념하고 있다.

 

 4) 대련의 여순 감옥

 

  여순 지역은 대련 시내에서 약 46km 떨어져 있고, 러.일 전쟁의 해상 전적지다. 여순 감옥은 러시아와 일본이 여순을 점령했을 때 두 번의 공사를 거쳐 지은 건물이며 많은 사람들이 잔혹하게 학살 된 장소이다. 감옥은 검정색 벽돌과 빨간색 벽돌로 구분되어 있는데 검정색은 러시아가 지은 것이고, 빨간색은 일본이 지은 것이다.

  여순 감옥은 러시아가 1902년부터 짓기 시작해서 1904년 2월에 러.일 전쟁이 시작되면서 85칸의 방만 짓고, 중단했으며 전쟁 시 잠시 야전병원과 군대병영 장소로도 쓰였다. 여순 감옥 일본군이 여순 점령 후 감옥이 작다고 생각해 러시아가 지은 기초 상에 253칸의 방을 증축했으며 동북지대에서 제일 큰 감옥으로 변하였다.

  감옥에는 높이 4m, 길이 725m의 붉은 벽돌로 싼 담이 있으며 점유 면적이 2,600㎡가 되어 2,000명의 죄수를 수용할 수 있었다. 수감된 죄수는 다수가 당시 정치범, 사상범, 경제범이었으며, 일본 사람과 한국 사람도 있었는데 안중근 의사도 그 중 한 분이시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 당시 조선민족 복장을 입고 있었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개를 보여주었다. 현재 많은 한국 사람이 여순 감옥을 방문하여 참배하고 있다. 감옥 동남쪽에 사형실이 있는데 독립된 2층 건물이며, 겉으로는 보통 건물과 차별이 없다. 1942년부터 1945년 8월까지 700여명 항일 투사를 처형했던 곳이다.

 

여순감옥 전경

출처 : zinniaspace
글쓴이 : namu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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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람은 바위올려놔도 살아난다"
러시아에서 고려인에 대한 대표적인 속담입니다.
초기정착, 독립운동지원, 강제이주, 구소련의 해체 후 다시 시작되는 방랑의 길, 험난했던 고려인 이주 140년사를 돌아보면 잡초처럼 다시 일어서는 고려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점점 더 긴밀해져가는 한러관계, 동북아에서 식량과 에너지의 열쇠를 쥐고 있는 러시아 극동의 위상속에서 이제 고려인은 ”한국이나 러시아정부가 도와주어야 할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21세기를 함께 열어갈 “대륙의 인도자”가 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숙신, 말갈, 여진의 땅이었다가 중국 청나라 영토가 되었다. 그 후 1858년 아이훈조약에 의해 청(淸)·러시아의 공동관리 하에 놓이게 되고 1860년 북경조약에 의해 러시아 령이 되어 군사기지로서 블라디보스톡이 건설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26년에는 원래 소비에트 극동 공화국이었던 지역이 극동지구로 바뀌었고, 1938년 극동지구의 일부가 분리되어 지금의 연해주가 되었다.
 연해지방은 한말 이래 한국 교포들의 망명지가 되어 상당수가 그곳에서 거주해 왔으며 우리민족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는 고구려, 발해, 부여의 땅이기도 했다. 
 
 
 
 
 면적은 16만 5900㎢, 인구는 약 206만 8000명(2003), 주도는 블라디보스톡이다. 연해주(沿海州) 또는 프리모르스키주(州)라고도 한다. 러시아어로 '프리'는 '연안', '모르스키'는 '바다의'라는 뜻으로 해안선이 1,350㎞나 뻗어 있다.
 북서쪽은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 남서쪽은 북한에 접하고, 남동쪽은 동해에 면해 있다. 동해안과 나란히 뻗어 있는 시호테알린 산맥의 남서부 절반이 연해지방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서쪽 국경을 따라 우수리 강(江)과 한카호[興凱湖] 연안에 평야가 있다.
 남쪽에 있는 표트르 대제만은 천연 입지조건이 잘 갖추어진 항구이다. 이 만의 후미인 졸로토이로크만(금각만) 연안의 반도에는 이 지방 행정·산업·중심지이며 시베리아 철도의 태평양 연안 종착지인 블라디보스톡 있다.
 대륙성기후로 겨울철에는 춥고, 여름철에는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비가 많이 온다.
3/4이 삼림지대이며, 산지는 침엽수림으로 덮여 있다.
 주민은 러시아인이 대부분이고, 우크라이나인· 아르메니야인, 아제르바이잔인,우데게이족·오로치족·나마이족·고려인·중국인 약 120여 소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해주의 주산업은 제재업·광산업·기계제조업·금속공업 등이며, 인구밀도가 높은 우수리 강 유역에서는 젖소와 육우가 사육되고, 곡물·해바라기 등이 재배된다. 레티호프카와 노보샤흐친스크에는 노천석탄 광산이 있으며, 주석·납·아연·형석도 채굴된다.
 1970년대에는 북부의 보스토크에 있는 텅스텐 광산이 개발되었다. 해안에는 어업기지와 포경기지가 있고, 시호테알린 산맥에서는 목재가 생산되며, 모피동물이 서식한다.
 주요 도시로는 블라디보스톡(인구 약 80만), 우수리스크(약18만), 나호드까(약20만), 파르티잔스크(약10만) 등이 있다.
 블라디보스톡은 연해주의 주도로서 연해주 정치, 경제의 중심지이며, 우수리스크는 교통의 요지로서 중국, 북한, 모스크바로 가는 길목에 있으며 고려인 동포사회의 중심지이기도
<위 자료는 동북아평화연대 홈페이지에서 발취하였습니다.>
출처 : 연해주 고려인 희망본부
글쓴이 : 프라이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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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 넘나들면서 기술 쌓고 교육열 지펴

구정은기자 koje@munhwa.com
지난 8일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고려인 마을 시온고를 찾았다. 여느 한국 시골마을을 그대로 옮겨다놓은 듯한 한적한 농촌 마을 가운데엔 한국-중앙아시아 교류진흥회 박강윤 회장 도움으로 지어진 노인회관과 문화센터 건물이 들어서 있고 제법 너른 길 한쪽으로 고려인 집들이 줄지어 있었다.

1937년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이어진 스탈린의 ‘극동 조선인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연해주를 떠나 부모 손에 이끌려 머나먼 우즈베키스탄에 내쳐졌던 고려인 소년들은 이제 고희를 훨씬 넘긴 나이가 되어 지나온 70년 험난했던 시간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지금은 물기를 찾기 힘든 메마른 땅으로 보이지만 70년 전만 해도 이 곳은 동식물조차 제대로 못사는 뻘밭이었다. 1937년부터 1941년 시온고 조합이 만들어질 때까지 고려인들의 고생을 말해 무엇하랴. 1940년대 초반은 최악의 시기였다. 2차 세계대전에 말려든 소련이 1942년 독일과 ‘조국전쟁’을 벌이면서 궁핍은 기근으로 이어졌다. 비타민이 모자라 아이들은 이가 빠졌고 병에 걸려 죽어나갔다. 낯선 땅에 이식된 고려인들은 채소와 독초를 구분 못해 아무거나 뽑아먹다 중독돼 죽고, 학질·천연두에 시달렸다고 한다.

“뭘 먹어야 할지 몰라 못 먹어 죽고, 아무거나 먹다가 독 올라 죽고, 참 힘든 시기였댔어.” 연해주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열네살 때 끌려왔다는 한 니콜라이(84)씨는 “9월9일에 기차를 탔다”며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고생담을 털어놓는 노인들의 눈가는 어느새 축축해졌다. 말할 수 없이 열악한 조건에서 뻘밭을 일궈 논을 만든 것은 고려인이 아니면 못할 일이었다. 고려인들은 당시 진흙을 이겨 만든 집을 고치고 손봐가며 아직까지 살고 있다.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 시절부터 고려인들은 불모지를 개간한 공로와 기술을 인정받기 시작했고, 강제이주 과정에서 억울한 죄를 쓰고 죽은 이들의 복권도 일부 이뤄졌다. 1960년대엔 이 마을에 650호가 살았는데 교육열이 높고 근면해 지역에서 가장 부유하고 활기찬 마을이었다고 한다. 고려인들의 자랑은 특히 높은 교육열과 배우려는 마음. 어린 자식을 이끌고 온 고려인 1세대들은 배 굶어가며 자식들을 가르쳤다. 한 니콜라이씨는 대학을 나오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아이들 다 키워 보낸 뒤인 1966년 늦게나마 인근 치르치크 지역의 전기전문학교에 진학해 공부를 했다.

생후 일곱달 만에 우즈베키스탄으로 옮겨왔다는 안 로베르트(한국명 안용선·70)씨는 과거 시온고 조합 트랙터 공장에서 일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아이을 키운 뒤 50세에 공업대학에서 늦깎이 공부를 했다. 이 마을 노인 중에는 엘리트여서 지금도 상(喪)이 있거나 마을 잔치가 있으면 준비를 맡아한다. 그는 “고려인들은 자식들을 되도록이면 꼭 대학에 보내고 자신들도 늦게라도 반드시 공부를 했다”면서 옛소련 시절 낯선 땅에서도 인정받는 공동체를 만들었던 것이 그런 열정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눈에 보기에 시온고 마을에서도 젊은이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노인들과 어린아이들만 거주하는 조용한 마을이 돼버린 것이다. 소련 시절 조합 중심의 지역별 생산단위에서 일했던 고려인들은 현재 월 3만~5만 숨(약 2만~4만원)의 연금을 받는다. 시온고의 노인들은 텃밭에서 나는 곡식과 외지로 일 나간 자녀들이 보내주는 돈, 그리고 얼마 안 되는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 신생독립국 우즈베키스탄은 실업률이 높았으며, 경제발전도 인접한 카자흐스탄 등보다 뒤처졌다. 일할 수 있는 청장년층은 농촌마을을 떠나 러시아, 카자흐스탄, 한국 등지에 일하러 떠났다.

다행히 한국과의 경제교류가 많아지고 한국에서 온 교민들도 늘면서, 시온고 마을에는 한국 교민의 도움으로 마을회관이 지어지고 노인회 등 새로운 모임들이 조직됐다. 마을회관에서는 젊은이들이 우즈베키스탄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우즈베크어를 가르치며, 한국 등지에서 교사를 초빙해 영어와 컴퓨터, 한글도 교육시키고 있다. 2005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하는 등 한국에서 찾아오는 손님도 많아졌다. 교민들은 한국 붐과 함께 상대적으로 한국어 습득이 용이한 고려인들도 활기를 찾기 시작하면서 이민 4세대들 사이에 조금씩 희망이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시온고 = 구정은기자 koje@munhwa.com

<문화일보 2007-08-14  화요일 16쪽>
출처 : 력사를 찾아서
글쓴이 : 야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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