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의 노래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
30일 서울 인사동의 한 식당에서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재소 고려인의 노래를 찾아서’(전 2권·화남)의 출간을 알리는 자리였다. 이 책의 채록 및 편저를 맡은 김병학(42) 시인, 기획 및 감수를 담당한 김준태(59) 시인 등이 자리를 함께 했다.

재소 고려인 강제이주 70주년을 맞아 세상에 선을 보인 책은, 그간 멀고먼 동토(凍土)에서 온갖 고난을 겪은 동포들의 삶이 오롯이 담긴 기록물이었다. 책에 수록된 568곡의 노래 악보 및 가사, 고려인 강제이주의 역사를 담은 사진 70여 점 등은 세월을 뛰어넘어 생생한 증언으로 다가왔다. 그 증언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민족의 비애이자 고통이며, 나아가 고난의 극복과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고려인 강제 이주. 그 역사는 1937년 8월 2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비에트 중앙인민위원회와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이날 일본 간첩 침투를 차단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들어 연해주 거주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기로 비밀리에 결의했다. 인민위원장 몰로토프와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이 서명한 이 비밀결정서에 따라 같은해 9월 25일부터 두 차례에 걸쳐 참혹한 강제 이주가 실시됐다.

총 124대의 화물열차(사람이 탈 수 없는 마소 운반용)에 실려 블라디보스토크 등 연해주에서 쫓겨난 고려인은 모두 17만1781명. 이중 9만5256명은 카자흐스탄으로, 7만6525명은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송됐다. 이주 기간에 강제이주를 반대할 수 있다는 이유로 고려인 인텔리와 군 장교 등 2800여명이 비밀리에 체포돼 학살당했다.

척박한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내팽개쳐진 이들은 곧이어 몰아닥친 추위와 기아로 속절없이 생명을 접어야 했다. 1937∼38년 겨울을 나는 동안 무려 2만여명의 고려인들이 풍토병과 추위로 쓰러졌다. 고려인 최초 강제 이주지였던 카자흐스탄 우스토베시 바슈추베 언덕엔 당시의 참상을 기록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 곳은 원동에서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1937년 10월 9일부터 1938년 4월 10일까지 토굴을 짓고 살았던 초기 정착지다’고 쓰인 이 기념비는 황량한 들판을 배경으로, 평범한 돌판에 삐뚤삐뚤한 글씨로 당시의 비극을 전한다. 군더더기 없이 단문 하나로 사실만 기록한 기념비에서 오히려 눈물마저 말라버린 고려인들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다.

기념비가 마치 뼈만 남은 고려인처럼 참상을 증언한다면, 이번에 출간된 채록가요집은 그 살과 피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최남선이 작사한 것으로 전해져오는 ‘망향가’는 모두 5절로 이뤄졌다. 1절의 가사는 “고국산천을 떠나서 수천 리 타향에/산 설고 물 선 타향에 객을 정하니/섭섭한 생각은 고향뿐이요/다만 생각나노니 정든 친구라”며 이국생활의 애통함을 전하고 있다.

1933년 연성용 작사·작곡의 노래 ‘씨를 활활 뿌려라’는 고난의 와중에도 잃지 않은 희망을 보여준다. “즐겁은 마음에 새 봄이 와/파종시절을 재촉한다/뜨락또르 뜨르릉 밭 갈아라/큰드름 잔드름(큰 두둑 잔 두둑) 빨리 짓자/에헤헤 뿌려라/씨를 활활 뿌려라/땅의 젖을 짜 먹고/와싹와싹 자라나게.” 이 얼마나 희망찬 농부가인가. 이 가요는 재소 고려인들이 시대를 초월, 애창해온 노래이기도 하다.

채록자 김 시인은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라는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가능한 한 낙천적인 노래를 지어 부르고, 희망을 찾으려 했던 그 지혜에 가슴을 저렸다”면서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점점 잊어지는 고려인 구전가요들이 전승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그의 바람이 이뤄지길 간절히 바란다.

[[김영번 / 문화부 차장]] zerokim@munhwa.com

<문화일보 2007-07-31>
출처 : 력사를 찾아서
글쓴이 : 야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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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원 교수의 키예프 통신-16>


고려인 교육열 100여 소수민족중 최고

우크라이나에는 약 2만명 이상의 한인 교포들이 있는데 보통 고려인이라고 부른다. 1989년 통계에 의하면 8900명의 고려인 교포들이 있는데 그후 소련의 해체와 중앙아시아의 정정 불안으로 많은 고려인들이 우크라이나로 유입됐다. 정확한 통계는 아직 없지만 한국외국어대 임영상 교수와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약 1만5000명에서 3만명의 고려인이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구소련여권을 소지한 사람이나 중앙 아시아에서 1990년대 이후에 와서 주거지 등록을 하지 않은 사람이 많고 혼혈되어 한국피가 있으면서도 스스로 우크라이나인으로 생각하는 사람 등도 있지만 1989년 이후 인구 통계가 없어 정확한 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우크라이나의 웬만한 소도시에도 우리 고려인 교포들이 살고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초근목피의 조국을 등지고 두만강을 건넌 고려인들은 러시아 극동지방에 집단주거지를 이루며 살았다. 1910년대에 이미 그 수가 10만명을 넘어섰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으로 약 18만명이 죄인같이 기차 짐칸에 태워져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허허벌판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1953년 스탈린 사후 공민권이 회복되고 젊은층을 중심으로 한민족 특유의 교육열과 근면을 무기로 좋은 교육 환경과 직장을 찾아 모스크바, 페체르브르그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와 하리코프 등지로 소수의 젊은이들이 왔다. 그들이나 그들의 후손 중에는 아나톨리 김(작가), 율리 김 (음유 시인), 빅토르 쵸이(가수), 미하일 박(역사학자), 블라지미르 신(권투선수), 렐리 리(성악가)등 문화 예술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많다.

1950∼60년대에 우크라이나에 정착한 분들이 고려인 1세대로 이제는 60∼70세가 넘었다. 1970∼80년대에도 학업, 직장, 결혼 등의 이유로 주로 중앙아시아에서 여러 명의 고려인들이 우크라이나로 왔다. 당시만 해도 경제적인 면에서 발틱 3국을 제외하고는 우크라이나가 가장 살기 좋았다. 특히 농작물 재배에 남다른 소질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고려인들에게 드넓은 우크라이나 대평원의 농경지는 희망의 땅이었다.

러시아의 전설적인 가수 빅토르 쵸이(최)가 인기 절정이던 80년대 초에는 전소련의 고려인 교포 사이에 우크라이나로 가자는 붐이 일기도 했다. 현재는 불법체류자도 있지만 상업적인 기질을 발휘하여 신흥부자가 된 사람도 많으며 학자, 의사, 정치인, 사업가 등 우크라이나의 상류층으로 발돋움한 사람도 많다. 고려인들의 가장 큰 특징은 우크라이나의 100여 소수민족보다 교육 수준이 월등하게 높다는 것이다. 키예프에서 필자가 만나 60세 넘으신 분들은 거의 모두 초급대학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식들은 무조건 대학에 보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키예프한인회장 나탈리야 남 여사는 “고려인이 교육면에서 유대인보다 앞선다”고 얘기한다.

키예프대 교수 kievkim@hanmail.net

문화일보 2005-08-26
출처 : 력사를 찾아서
글쓴이 : 야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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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이스키 강제이주 70년]<1>고려인 첫 정착촌 우슈토베

 


중앙아시아로 끌려온 한인들의 첫 정착지인 우슈토베 마을 인근의 부슈토베 언덕.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숨진 사람을 하나둘 묻으면서 무덤이 늘기 시작해 지금은 아예 한인 공동묘지처럼 바뀌었다. 우슈토베=김기현 기자
《‘글로벌 코리안.’ 21세기 한국인의 현주소다. 세계 어디를 가나 한국인의 활약상은 눈부시다.
 
 하지만 한국인의 초기 이주 역사는 핍박과 절망, 죽음으로 얼룩졌다.
 
고국에서 6000km 떨어진, 아무 연고도 없는 중앙아시아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우리 핏줄도 그렇다.
 
스스로를 한국인도 조선인도 아닌 고려인이라 부르는 사람들…. 가난과 기근을 견디다 못해 고향을 버리고 두만강을 건넌 한인들이 러시아 연해주에 첫발을 디딘 것이 140여 년 전.
 
이들이 옛 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시로 다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지 올해로 70년을 맞는다. 낯선 땅에서 맨손으로 황무지를 일구고 민족혼을 지키며 유라시아 곳곳에서 살아가는 50만 고려인의 어제와 오늘을 5회에 걸쳐 살펴본다. 》
 

○ 묘비들은 말이 없고…

 

카자흐스탄 최대 도시 알마티에서 330km 떨어진 우슈토베 마을. 톈산() 산맥에서 몰아치는 거센 눈보라와 끝없이 이어지는 갈대밭 사이를 달려 부슈토베 언덕에 도착했다. 회색과 검은색의 지표석이 눈을 뒤집어쓴 채 나란히 서 있다. 회색 지표석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이곳은 원동(극동)에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이 1937년 10월 9일부터 1938년 4월 10일까지 토굴을 짓고 살았던 초기 정착지이다.”

 

이곳에 도착한 한인들을 맞은 것은 바람과 황무지뿐이었다. 소련 당국은 집과 살림살이, 논밭까지 버리고 온 이들에게 보상도, 지원도 하지 않았다. 땅굴을 파고 갈대로 지붕을 올려서 바람과 눈을 피했다. 짐승이 파놓은 것 같은 구덩이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견디지 못한 아이와 노인들이 죽어 나갔다. 언덕을 가득 메운 헐벗은 무덤들이 당시의 참상을 말없이 보여 준다. 칼바람을 이겨낸 이들이 뒤늦게 건축 자재를 얻어 ‘땅집’이나마 짓고 살기 시작한 것은 이듬해 봄.

 


한인들을 화물차에 싣고 온 기찻길과 처음 내린 우슈토베역.

이제는 마을에도 당시를 기억하는 ‘강제 이주 1세대’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이 마을 최고령인 김 타티아나(87) 할머니는 “그 얘기 어찌 다 하겠소. 죽은 사람들 궁리(생각)하면 잠이 안 오오. 우리 늙은이들 다 죽으면 아(젊은이)들은 다 모르갔지 뭐…”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비극은 1937년 8월 21일 스탈린이 한인 이주를 지시하는 비밀명령서에 서명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극동의 소련 영내에 거주하는 한인 17만여 명을 한 명도 남김없이 중앙아시아로 쫓아 보냈다.

 

일본과 전쟁이 벌어지면 이들이 일본을 지원할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전에 민족 지도자와 지식인, 이주에 반대할 가능성이 있는 인사 2800여 명을 체포해 총살했다. 러시아 볼쇼이극장의 유명 메조소프라노 남 류드밀라(59) 씨는 “할아버지(남효범)도 어느 날 비밀경찰에 끌려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어떤 마을은 이주열차에 오르기 하루 전에야 이주 사실을 통보받았다. 짐을 쌀 새도 없이 끌려가는 처지에 내몰렸던 것. 러시아인과 결혼한 한인은 가족과 생이별해야만 했다.

창문도 없어 문을 닫으면 깜깜한 컨테이너 같은 화물차에 수십 명씩 실렸다. 어디로 가는지 영문도 모르고 무작정 달리는 열차에 맨몸을 맡겼다.

 

기차가 잠시 서는 틈에 기차에서 뛰어내려 물을 긷거나 요깃거리를 구했다. 겨우 네 살이었던 박 블라디미르(74) 할아버지는 멈춰 있던 열차가 갑자기 출발하자 ‘볼일’을 보고 열차 밑에서 나오던 한 여인이 코가 잘려나가는 끔찍한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예고 없이 선 기차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며칠씩 서 있기도 했다. 열흘이면 올 수 있는 거리를 한 달이나 걸려서 온 것도 그 때문이다. 도중에 죽은 사람은 열차 밖으로 던져졌다. 그러다 보니 가족의 유해도 찾을 수 없는 형편이 됐다.

 

 

○ 그래도 다시 일어나

 


이주 초창기 고려인 마을 모습.

낯선 땅에서 긴 겨울을 견디고 살아남은 한인들은 이듬해 봄부터 황무지를 논밭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농기구도 제대로 없어 맨손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물길을 내고 농토를 만들었다.

 

 

 

하지만 농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중앙아시아로 끌려온 뒤 마음대로 이동할 자유도 없었고 한인 학교는 폐쇄됐다. 한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도 군 입대조차 하지 못했다. 박 릴리야 노보로시스크 고려인협회장은 “우리는 지은 죄가 없는 죄수였고 허락된 지역 이외의 경계 밖으로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하면서 무거운 죄를 덮어쓰고 살았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스탈린이 죽고 나서야 이런 탄압이 풀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곳곳에 카레이스키 콜호즈(한인 집단농장)가 들어섰다. 대표적인 것이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 근교의 황만금(1921∼1997) 농장. 소련 해체 후 농지 사유화로 이제는 아들 황 스타니슬랍(64) 씨의 개인농장으로 규모가 줄어들긴 했지만 1960년대까지 3900만 평 규모에 1만3000여 명의 농업노동자가 일하는 소련 최대의 농장이었다. 농장 안에 자체 실험실과 학교, 병원까지 있을 정도였다. 베트남 지도자 호찌민 등 국빈들이 소련을 방문할 때마다 단골로 들르는 곳이 됐고 북한에서도 해마다 견학단이 왔다.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며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으나 한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유난히 높은 교육열을 가진 한인들은 악착같이 자녀들을 공부시켰다. 타슈켄트에 사는 김 나탈리야(78) 할머니는 “신과 옷이 없어도 학교는 다들 보냈지”라고 회상했다. 고등교육을 받은 이주 2세대는 농업뿐 아니라 교사와 엔지니어 등 전문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소련 시절 집단농장 모습.

자식에게 더 나은 환경과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면 서슴없이 짐을 꾸렸다. 신 블라디미르(52) 우즈베키스탄 고려인문화협회장은 “우리 남매는 태어난 곳이 다 다르다”고 말했다.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된 부모가 캅카스의 체첸으로 다시 이주했기 때문이다. 신 회장은 체첸에서, 형은 카자흐스탄에서, 여동생은 북()오세티야에서 태어났다. 신 회장은 성인이 된 뒤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왔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고려인 사회는 다시 꿈틀거렸다. 러시아 등 상대적으로 더 발전된 곳으로 옮겨갔다. 외국행이 자유로워지면서 젊은 층은 한국이나 미국 캐나다 호주 유럽으로 유학하거나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고려인들은 소련에서 ‘농사 잘 짓는 민족’으로 유명했지만 정착하기보다는 유목민처럼 유라시아 대륙을 누벼 왔다. 고려인 출신으로 북한 정권에서 문화선전성 부상(차관)을 지냈던 정상진(88) 옹은 비극적인 과거사인 강제 이주에도 결과적으로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고 말했다.

 

한반도와 극동 연해주에 갇혀 있던 한인들이 비록 타의에 의해서지만 집단적으로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중앙아시아로 가면서 비로소 ‘더 큰 세계’를 보았다는 것.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 초대 회장을 지낸 한 구리(75) 박사도 “단일 민족으로 같은 문화에서만 살던 한인들이 처음으로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의 문화와 만나고 중앙아시아의 수많은 이질적인 민족과 어울려 사는 법을 배웠다”고 평가했다. 고려인들의 인내와 끈기,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적응력은 70년 동안의 온갖 시련을 통해 길러진 것이다. 한 박사는 말했다. “우리 고려 사람이야 어디 가서도 살 수 있지. 그렇지 않소?”

 

알마티·우슈토베=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아리랑, 그때 그 감격이란”▼

고려인들, 1990년 본보 순회공연 창극 벅찬 회상

 

“어렴풋이 알고 있기만 했던 아리랑을 난생처음 목청껏 따라 불러 봤지….”

옛 소련과 수교조차 하지 않았던 1990년 9월 3일 모스크바 중심가 국립 소브리멘니크(현대)극장. 한국에서 8000km 떨어진 이국의 밤하늘에 아리랑 합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아일보사가 재소 한인 동포를 위해 올린 창극 아리랑 순회공연의 첫 무대였다.

 

한국에서 온 대규모 공연단은 이때 처음으로 철의 장막 너머 소련 땅을 밟았다. 공연단은 모스크바와 타슈켄트, 알마티 등 6개 도시를 돌았다. 가는 곳마다 소문을 듣고 현지 한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딱히 공연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수십 년 동안 잊고 살았던, 아니 꿈에도 그리던 조국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창극의 주인공은 1915년 러시아로 이주했던 어느 가족. 알마티에 사는 정상진 옹은 “대부분 우리말이 서툴러 다 알아듣진 못했지만 가만 보니 바로 우리 이야기였지”라고 회상했다. 무대와 객석이 따로 없었다. 함께 울고 웃으며 머나먼 땅에 버려진 자신들을 잊은 조국에 대한 원망도, 이제야 동포를 찾아왔다는 미안한 마음도 아리랑 노래에 실어 보냈다.

 

많은 고려인이 16년 전 아리랑 공연 당시의 벅찬 감격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동포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민족임을 확인한 최초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소련 시절 강제 이주의 비극은 오랫동안 함부로 입에 올릴 수조차 없는 ‘금기’였다. 대를 이어 가며 고단한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 그날의 공연은 이산의 한을 푸는 한 마당이었다.

 

당시 러시아 고려인연합회장을 맡았던 신 알렉세이 모스크바대 교수는 “이 공연을 계기로 그동안 흩어진 채 숨어서 살던 고려인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모이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알마티·우슈토베=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아리랑 공연이 열렸던 모스크바 소브리멘니크 극장.


<동아일보 2007-1-1>

출처 : 력사를 찾아서
글쓴이 : 야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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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이스키 강제이주 70년]<2>카자흐 고려인 성공신화


 


카자흐스탄의 새 수도인 아스타나의 건설 현장. 신도시 건설이 본격화되면서 ‘건설 붐’이 일어나 쿠아트 같은 고려인 건설업체들이 급성장하는 발판이 됐다. 사진 제공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
《“한인 억만장자가 가장 많은 나라가 어딘지 아십니까?”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어느 한국 대기업 지사장이 만나자마자 불쑥 던진 질문이다.
 
 “글쎄요, 역시 미국 아닐까요?” 머뭇거리는 기자에게 그는 빙긋이 웃으며 “제 생각에는 바로 이곳 카자흐스탄입니다”라고 말했다. 옛 소련권에서 영업만 10년 가까이 한 그의 말이 과장은 아닐 텐데….》

 

공항에서 알마티 시내로 들어가면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3년 전과 다른 엄청난 변화가 한눈에 들어왔다. 낡은 소련제 승용차가 다니던 길을 벤츠와 BMW 같은 고급 외제 승용차가 가득 메웠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건설 현장이라고 할 정도로 새 건물이 계속 들어서고 있었다. 톈산() 산맥 쪽으로 올라가는 외곽 중산층 거주 지역에는 그림 같은 타운하우스들이 눈에 띄었다.

 

카스피 해 유전 개발로 벌어들인 ‘오일 머니’가 주체할 수 없이 밀려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제2의 중동’이라는 말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2005년 10월 런던증권거래소(LSE)에서 카작무스의 상장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한인들이 대주주로 있는 카작무스는 중앙아시아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LSE에 상장돼 ‘글로벌 기업’이 됐다. 사진 제공 카작무스

알마티 시내의 건설 현장에서 가장 익숙하게 볼 수 있는 로고는 쿠아트(사장 올레크 남). 카자흐스탄 최대 건설사로 대표적인 고려인 기업이다.

 

옛 소련 국가대표 복싱 선수 출신의 유리 채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장이 14년 전 세웠다. ‘오일 머니’와 수도를 알마티에서 아스타나로 옮기면서 신도시 건설로 일어난 ‘건설 붐’에 힘입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최근 4년간 회사 외형이 50배나 커졌다. ‘오일 머니’로 주머니가 두둑해진 중산층을 겨냥해 알마티와 아스타나에 고급 주상복합건물과 현대식 오피스

빌딩을 지은 것이 적중했기 때문이다. 알마티의 ‘랜드마크’인 알마티타워와 정부종합청사도 쿠아트가 지었다.

 

또 다른 대형 건설사인 베르텍스(사장 오가이 에두아르트)와 대형 토목회사인 알마틴(사장 브로니슬라프 신) 역시 고려인 회사다. 카자흐스탄 건설업계는 “카레예츠(고려인)들이 점령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이렇듯 급격한 경제 성장기에 기회를 거머쥐고 일약 거부가 된 30, 40대 젊은 고려인이 상당수였다.

 

알마티 최대의 쇼핑몰 메가.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전자유통업체인 ‘술팍’의 직영 매장이다. 술팍은 공동대표인 카자흐스탄인 술탄 사장과 고려인 안드레이 박 사장의 성()에서 따온 이름이다. 매출은 업계 2위 규모. 박 사장은 저명한 공학자인 이반 박 박사의 아들이다.

 

최대 전자제품유통업체인 플라넷 엘렉트로니키(사장 바체슬라프 김)와 3위 규모의 테흐노돔 플러스(사장 에두아르트 김) 역시 고려인 회사다.

 

고려인 기업들은 주로 건설과 전자제품 유통을 발판으로 성장했다. 한국 기업들이 강세를 보이는 분야다. LG와 삼성전자는 중앙아시아의 전자제품 시장을 석권하고 있으며 한국 중견 건설업체 18개가 현지에 진출해 있다.

 

고려인 기업인들은 사업 초기 한국 기업과 손을 잡고 사업 노하우를 배웠다. 이제는 고려인들이 한국 기업의 현지 진출을 도와주는 경우도 많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고려인도 여전히 있지만 대부분의 카자흐스탄 고려인에게서는 고달픈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농촌지역의 고려인들도 한결같이 “우리는 사는 것은 일(문제)없으니 걱정 말라”고 말했다.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의 위상을 잘 보여 주는 것이 쿠아트가 지은 고급 주상복합건물에 있는 카레이스키돔(고려인회관)이다. 출입구와 창문 디자인을 전통 한옥의 모양에서 딴 이 건물은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 소유로 1, 2층은 협회가 사용하고 나머지 층은 임대를 주고 있었다.

 

 고려일보사와 고려인청년회 등 한인 유관단체들도 모두 이곳에 모여 있어 명실상부한 한인센터다. 이 회관은 한국이나 카자흐스탄 정부의 지원 없이 고려인들이 힘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발렌티나 인 협회 사무국장은 “우리 힘으로 지을 수 있는데 왜 고국에 손을 벌립니까”라고 반문했다.

 

카자흐스탄중소기업연합회 로만 김 회장은 “카자흐스탄 경제의 역동적인 성장은 이제부터다. 함께 손잡고 기회를 만들어 보자”며 한국 기업의 적극적인 진출을 희망했다.

 



알마티=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 고려인 운영 구리채광-제련 카작무스

직원 6만8000명 세계 10위 기업

런던증시 상장으로 ‘대박’ 터뜨려

 

영국 선데이타임스가 지난해 4월 23일 발표한 ‘영국 최고 부자 명단’에는 낯선 성()을 가진 동양인 2명이 포함돼 있다.

 

바로 중앙아시아 최대 기업이며 세계 10위의 구리채광 및 제련업체인 카작무스의 이사회 의장 블라디미르 김(45) 회장과 대표이사 차용규(49) 사장이다.

 

카자흐스탄 출신 고려인인 김 회장은 모두 14억3700만 파운드(약 2조6287억 원)의 개인자산으로 34위, 삼성물산 상무 출신인 차 사장은 8억 파운드(약 1조4606억 원)로 68위에 각각 올랐다.

 

두 사람이 ‘영국 부자 순위’에 들어간 것은 2005년 10월 카작무스를 런던 증권거래소에 상장하고 본사를 런던에 둔 ‘글로벌 기업’으로 변신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현재 카작무스의 주가 총액은 26억 파운드(약 4조7471억 원). 김 회장이 40%, 차 사장이 15%의 지분을 각각 갖고 있다.

 

직원 6만8000명의 카작무스는 2004년 현재 매출액 13억 달러, 순이익 4억4130만 달러의 ‘알짜 회사’다. 카자흐스탄 제스카즈간에 대규모 구리광산이 있고 제련소도 갖고 있다.

 

독일 등에 자회사가 있다. 구리뿐 아니라 아연과 금, 은도 생산한다. 생산된 광물은 대부분 중국에 수출한다.

 

하지만 카작무스는 1991년 카자흐스탄이 독립할 때만 해도 적자투성이의 전형적인 옛 소련 국영기업에 지나지 않았다. 사회주의 계획경제 속에서 비효율적이고 방만한 경영이 계속돼 왔기 때문이다.

 

결국 카자흐스탄 정부는 1995년 이 회사의 경영을 삼성물산에 위탁했고 삼성은 대규모 투자와 수직 계열화로 카작무스를 초대형 일관 구리 생산업체로 만들었다.

 

2000년 위탁경영 기한이 만료되자 삼성은 아예 카자흐스탄 정부의 지분을 인수하고 당시 삼성물산 알마티 지점장이었던 차 사장을 공동 대표로 임명했다. 차 사장과 김 회장은 2004년 삼성에서 모든 지분을 인수해 회사의 새 ‘주인’이 됐다.

 

생산기지는 카자흐스탄에, 본사는 영국에 있지만 카작무스의 대주주는 대부분 한인이다. 블라디미르 니 부회장 등 임직원 상당수도 고려인이다.

 

고려인과 한국인이 힘을 합쳐 “원소기호에 있는 지하자원은 다 갖고 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자원이 풍부한 카자흐스탄에서 21세기 ‘엘도라도(황금의 땅)’ 신화를 이룬 것. 카작무스는 최근 한국의 주식시장에 상장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동아일보 2007-1-1 화요일 A19쪽>
출처 : 력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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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고국방문… “사진 속 홍범도 장군 제 할아버지예요”
  속초=연합뉴스  2007-10-26 07:49:40
 
 

 스탈린에 의한 고려인 강제 이주 70주년을 맞아 고려인 독립운동가 후손과 강제이주 1, 2세대 109명 등으로 이루어진 고려인 모국 방문단이 25일 강원 속초시 속초항을 통해 입국했다.

 

 입국 첫날 강릉 오죽헌을 방문한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외손녀 김알라(67) 씨는 홍 장군이 레닌의 초청으로 소련의 모스크바를 방문해 권총을 선물 받은 뒤 찍은 사진을 들어 보였다.

동아일보 2007년 10월 26일 http://photo.donga.com/usr/photopro/phnview.php?cgubun=200306130007&photo_idxno=78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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