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이주 ‘재소 고려인 노래’ 채록 김병학씨
경향신문 입력: 2007년 07월 30일 18:12:36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로 이주당한 고려인들과 후손에게 모국의 노래는 위안이자 희망이었다. 어머니가 머리맡에서 들려준 고향 노래가 그리워 그들은 서툰 모국어로 노래를 불러왔다.


고려인 강제이주 70주년을 맞아 출간된 ‘재소고려인의 노래를 찾아서’(화남출판사, 전 2권)의 채록·편저자인 김병학씨(42).

 

지난 4년간의 지난한 작업을 끝낸 그는 “힘들었던 일은 말할 수 없이 많지만 큰 보람을 느낀다”고 밝혔다.

“고려인은 현실의 참혹함과 척박함 속에서도 가능한 한 낙천적인 노래로 스스로를 위무하며 희망을 찾으려 했습니다. 노래에 담긴 사연에 가슴 저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어요.”

‘재소고려인의…’는 고려인들 사이에서 구전되던 노래 568곡을 악보와 함께 가사의 출처, 생성 배경 등을 수록한 책.

 

 이 방대한 작업은 2002년 고려인 작곡가 한 야코브씨(64)에 의해 처음 시작됐다. 잊혀져 가는 모국 문화의 보존이 시급하다는 생각에 2004년 여름부터 이듬해 봄까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러시아의 고려인촌을 돌아다니면서 구전가요를 녹취했다.

 

2005년 9월 작업에 합류한 김씨가 편집과 교정을 맡았다. 러시아의 영향으로 모국어와 다르게 변화·왜곡된 가사을 채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녹음 테이프를 수백번 듣고 자료를 뒤지고 주위의 자문을 얻어가며 가사를 정리했다. 1차로 정리된 가사를 교정·보완하는 데만 1년 반이 걸렸다.

“우리말도, 러시아어도 아닌 말이 많아 작업이 어려웠습니다. 어떤 단어는 1년 동안 뜻을 몰라 헤맨 것도 있어요.”

1권에는 한씨의 녹취를 바탕으로 한 350곡을 실었고, 2권에는 김씨가 따로 재소고려인 한글 신문인 ‘선봉’ ‘레닌기치’ 등에 실렸던 창작가요를 정리해 모았다.

김씨는 앞으로 채록된 구전가요를 CD나 음반화하는 작업이 진행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구전가요를 표준한국어로 녹음해 고려인의 70년 애환이 담긴 우리 노래가 젊은층과 후세대들에게 전승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엄밀히 말해 김씨는 고려인이 아니다. 대학을 졸업한 1992년, 고려인 최초 강제이주지인 카자흐스탄 우슈토배의 광주한글학교 교사로 건너간 뒤 16년째 살고 있다. 소설가 윤후명씨의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하얀 배’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김진우기자 jwkim@kyunghyang.com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7301812361&code=100100

출처 : 력사를 찾아서
글쓴이 : 야발 원글보기
메모 :
“하루라도 우리말 외지 않으면 잠 안 잤다”
엠넬리 교장, 모스크바 민족학교 세워 ‘명문고’로 발돋움
한겨레 권혁철 기자
» 엠넬리 모스크바 협의회 회장
“1991년 러시아 교육자들과 함께 처음 서울에 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즐겁게 서울 구경을 했지만, 저는 모국 땅에서 우리 말과 글을 모르는 게 부끄럽고 슬퍼서 울기만 했어요.”
 

민주평통 상임위원회 참석차 온 엄넬리(67) 평통 모스크바 협의회 회장은 지난 1일 논리정연한 우리 말을 구사했다. 하지만 옛 소련 시절 사범대를 나온 그는 52살까진 우리 말과 글을 전혀 몰랐다. 옛 소련 시절엔 소수민족 교육이 불허됐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1086 민족학교 교장이기도 한 그는 동포 4세다. 77년 레닌상을 받을 정도로 엘리트였던 엄 교장은 91년 고국 땅에 와서 피눈물을 쏟고 나서 “모스크바에 돌아가면 꼭 민족학교를 세우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모스크바에 돌아가 하루 우리 말 단어 15개를 외우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았고, 틈만 나면 한국 노래를 부르거나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독하게 우리 말과 글을 익혔다.

 

92년 1086 민족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초등, 중등, 고등 과정 등 11년을 교육하는, 러시아 당국이 인정한 공식 교육기관이다. 러시아에서는 학교 이름을 숫자로 구분한다. 민족학교는 러시아 교육 과정을 기본으로 하고, 한국어, 한국 역사, 문화, 풍습, 예절을 가르친다.

 

민족학교 700여명 재학생 가운데 60%가 동포이고, 나머지는 러시아인, 한국인, 미국인 등이다. “옛 소련 시절 학교에서 소수 민족 차별이 있어서 동포 학생들이 주눅이 들곤 했습니다. 민족학교에 다니는 동포 학생들은 자신있고 활발합니다. 이전에는 학생들이 소수민족인 것을 부끄러워했으나 지금은 자랑스러워 합니다.”

 

이 학교 입학 경쟁률은 13 대 1이 넘는다. 한국 대기업들이 러시아에 활발하게 진출하면서 한국어를 배우려는 러시아 학생들이 많고, 대학진학률도 모스크바 학교 가운데 으뜸인데다 인성교육을 강조해 학부모들에게 인기가 높기 때문이다.

 

“고려인들은 옛 소련 시절 경험을 살려 남북 통일에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한 엄 교장은 우리 말과 글 교육에 필요한 동화책, 디비디(DVD) 등의 지원을 모국에 희망했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사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제공

한겨레신문 2007.11.5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47895.html

출처 : 력사를 찾아서
글쓴이 : 야발 원글보기
메모 :
김블라디미르 원장 “모국어 잊어가는 고려인 3, 4세 안타까워”


교육 분야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은 대교문화재단의 제16회 눈높이교육상 수상자들. 사진 제공 대교문화재단

“미국에나 최고급 건물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와 본 조국의 서울이 이렇게 발전한 줄은 몰랐습니다. 고려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대교문화재단(이사장 강영중)의 제16회 눈높이교육상 해외 부문 수상자로 선정돼 한국을 방문한 카자흐스탄 고려문화중앙회 김블라디미르(79·사진) 원장은 9일 시상식장에서 감격스러운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김 원장은 1937년 연해주에서 어머니와 5남매와 함께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돼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다. 농업전문학교와 차이콥스키음악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음악교사로 일하면서 동포들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데 앞장서 왔다.

 

그는 “고려문화중앙회와 ‘무궁화학교’를 설립한 뒤 고려인 대학생과 교사들에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치고 있다”며 “제자들이 여러 한글학교에서 고려인 3, 4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지만 모국어가 잊혀져 가는 것이 안타깝다”고 소개했다.

 

동아일보 2007.11.10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11100125

출처 : 력사를 찾아서
글쓴이 : 야발 원글보기
메모 :
[기고] 30만 고려인의 나라 중앙아시아와 한국 / 임영상
기고
한겨레
» 임영상/한국외대 사학과 교수
30만 고려인의 나라, 제2의 중동으로 떠오른 중앙아시아 다섯 나라 외교차관 일행들이 한꺼번에 한국을 찾아온다. 11월15일 외교통상부가 주최하는 ‘제1차 한-중앙아시아 협력포럼’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그동안 중앙아시아 지역은 중국과 러시아·인도·브라질 등 브릭스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최근 카자흐스탄의 높은 경제성장과 함께 유라시아 대륙의 한가운데 중앙아시아가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

 

 중앙아시아는 과거 비단길 문화의 중심지이고, 무엇보다도 70여년 전에 러시아 연해주에서 강제로 이주당한 17만 고려인이 지역민의 따뜻한 배려 속에 제2의 삶을 살아온 터전 아닌가.

 

1991년 옛소련 해체 이후 많은 고려인들이 러시아 연해주와 볼고그라드, 남부 우크라이나 등지로 떠났지만 지금도 중앙아시아는 30만 고려인의 조국이다.

 

‘88 서울올림픽’으로 한국의 존재를 알게 되고 ‘2002년 한·일월드컵’으로 대한민국의 역동적인 힘을 확인한 중앙아시아 사회는, 지금 <올인>과 <겨울연가>, <대장금>으로 이어지는 한류 콘텐츠의 영향으로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절정에 이르고 있다. 고려인뿐만 아니라 우즈베크인, 카자흐인 등 현지인들도 그러하며, 또 그 중심에 청소년들이 있다.

 

지난 4월 고려인 청소년을 연구하러 우즈베키스탄 타슈겐트의 세종한글학교(교장 허선행)를 방문했다. 91년에 세워진 사설학원에 무려 450여명의 고려인 청소년들이 한국어 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우즈베크 청소년도 상당수였다.

 

타슈겐트 니자미사범대 한국어문학과와 동방대 한국어과 학생들 중에도 우즈베크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과거 고려인 학생들 일색이던 우즈베크 대학의 한국어과에 이제는 20∼30% 정도가 현지인 학생이다.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한국어와 한국문화가 재외동포를 넘어 현지인 사회에 뿌리를 내려야 한국어의 세계화와 한국문화가 글로벌 문화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즈베크 대학의 한국어과에는 한국의 대학과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에서 파견한 교수들이 한국어 회화와 한국문화 강좌를 담당하고 있다. 또한 한국어과는 정부와 시민단체가 지원한 한국어 교과서와 사전 등 다양한 교재와 컴퓨터 기자재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 한국어과 교수들과 고려인, 현지인 학생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365일 스물네 시간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고 영상물을 제작할 수 있는 가칭 한국문화정보센터다.

 

경기문화재단의 효·가족문화 영상콘텐츠 공모전에 우즈베크 고려인 학생들의 작품이 2006년과 2007년 연속으로 입상했다. 참여 학생들은 100만원 상금 중에 극히 적은 일부만 몫으로 나누고 나머지는 모두 저축했다. 디지털 캠코더를 사기 위해서이다. 한국인 유학생의 낡은 소니(TRV-40) 카메라 한 대로 단편영화와 다큐를 제작했고, 또 사용자 손수제작물(UCC)도 제작중인데, 카메라가 더 없는 게 아쉽다고 한다.

 

 인터넷 전용선이 깔린 한국문화정보센터가 우선 우즈베크 등 중앙아시아 국가의 한국어과 개설 대학에 세워진다면, 그리고 정보기술(IT) 서포터스 운동을 펼치는 케이티, 복합문화 공간 상상마당을 펼치는 케이티앤지, 아시아 지역 청소년에게 특별장학금을 주는 포스코 등 한국의 유관 기업들과 엔지오가 후원하는 한-중앙아시아 청소년 영상캠프가 정기적으로 열릴 수 있다면, 30만 고려인의 나라 중앙아시아와 한국은 동반자 아시아의 정신으로 ‘한류’를 넘어 ‘아시아류’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임영상/한국외대 사학과 교수

한겨레 2007.11.14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249806.html

출처 : 력사를 찾아서
글쓴이 : 야발 원글보기
메모 :
가만히 불러보는 이름 ‘까레이스키’-그림으로 만난다

까레이스키. 가만히 그 이름을 되뇌어본다.

러시아를 비롯해 독립국가연합에 거주하는 한인교포를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 까레이스키. 고려족, 또는 고려사람이란 뜻이다.

 

‘까레이스키’라는 이름 아래 서울에서 뜻 깊은 전시가 열린다.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 벌판으로 강제이주됐던 고려인 화가의 그림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 유럽인들 사이에 ‘아시아의 피카소’라 불렸던 고 신순남(1928-2006ㆍ신니콜라이)화백을 비롯,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화가 7명의 작품 120점이 서울에 왔다.

 

한국사립미술관협회(공동대표 노준의,이명옥)는 문화관광부 지원 아래 7월3일부터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 분관에서 고려인 중앙아시아 정주 70주년을 기념하는 ‘까레이스키’전(展)을 연다.

 

연해주 일대에 살던 고려인들은 1937년 러시아 정부의 갑작스런 이주정책으로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으로 내쫓겨졌다. 낯선 불모의 땅에서 그들은 생존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그같은 노력은 예술에도 오롯이 스며들었다.

 

고려인의 애환을 소개하는 이번 전시에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화가로 이름을 날렸던 고 신순남 화백의 대작들이 나온다. 8살 때 강제이주를 겪은 그는 타계 직전까지 입체파와 초현실주의를 접목시키며 고려인의 유민사를 그렸다. 신화백의 대작 ‘진혼제, 소리없는 절규, 페스트’(가로 12m,1990년)는 장엄한 구도로 고려인 강제이주를 증언한 대표작.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다.

 

또 최초로 공개되는 ‘승리’는 가로 22m의 화면에 유민의 고통과 새로운 희망을 파노라마처럼 장대하게 펼쳐보인 역작이다. 신화백과 동시대 작가인 안일(78ㆍ안블라디미르)화백은 독립운동가와 성공한 고려인들의 모습을 초상화 속에 담아냈다.

 

한편 신순남 화백의 큰 며느리인 신이스크라와 손녀 신스베틀라나는 환상적인 꽃그림을, 동명이인 화가인 2명의 김블라디미르, 박니콜라이는 추상적이면서도 장식적인 회화를 선보인다.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방송PD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상물과 한인 이민의 역사를 담은 사진 50여점도 함께 전시된다. 7월5일에는 한국외국어대 임영상 교수 등의 주도 아래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어제와 오늘’을 주제로 세미나도 개최된다.

 

임영상 교수는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들은 우즈베키스탄이 구소련에서 독립한 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선조들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며 “작품을 통해서나마 그들의 애환이 널리 알려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7월19일까지. 무료관람. 02-735-4032

 

▶까레이스키는?=러시아어(語)로 고려족 또는 고려사람을 가리킨다. 러시아 외에 우크라이나ㆍ벨로루시ㆍ몰도바ㆍ카자흐스탄ㆍ우즈베키스탄ㆍ투르크메니스탄ㆍ 키르기즈스탄ㆍ아르메니아ㆍ아제르바이잔ㆍ그루지야 등 독립국가연합 내에 거주하는 한인 교포들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한국인들이 러시아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63년(철종 14년). 불과 13세대의 농민이 한겨울밤에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우수리강(江) 유역에 정착하며 이주사는 시작된다. 이어 1865년(고종 2년)에 60가구, 그 다음해에 100여 가구 등으로 늘어나 1869년에는 4500여명의 한인이 이주했다. 이후에도 이주는 계속됐고,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망명이민도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대숙청’ 당시 연해주지역 한인들은 유대인ㆍ체첸인 등 소수민족들과 함께 가혹한 분리ㆍ차별정책에 휘말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다.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 황무지에 내팽개졌는데, 당시 고려인 수는 17만5000여명이었다. 하지만 고려인들은 강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황무지를 개척하고 한인집단농장을 경영하는 등 소련 내 소수민족 중 가장 잘 사는 민족으로 뿌리내렸다.

 

그러다 1992년 1월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 외에 11개 독립국가로 분리되면서 또다시 배타적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돼 고려인들은 직장에서 추방당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처지에 놓이자 다시 연해지방으로 모여들었다. 현재 연해지방 거주 한인들을 중심으로 자치회가 형성돼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현재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에 사는 고려인은 총 46만여명. 국가별로는 러시아에 10만여명, 우즈베키스탄에 22만명, 키르키즈스탄에 2만명 등이다.

 

이영란 기자(yrlee@heraldm.com)

 

헤럴드경제 2007년6월 29일 http://www.heraldbiz.com/site/data/html_dir/2007/06/29/200706290021.asp


출처 : 력사를 찾아서
글쓴이 : 야발 원글보기
메모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