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들, 우리의 민요를 부르고 있었다.
[오마이뉴스 김영조 기자]
 
▲ <소비에트 시대 고려인 소예술단의 음악활동> 박사논문 표지
ⓒ2006 김보희
"이 넓은 농장에 씨를 뿌려 가을이 풍년이 돌아오면

누렇게 누렇게 변해서 우거져 우거져 파도치리.

에헤- 뿌려라 씨를 활활 뿌려라.

땅의 젖을 짜먹고 와싹와싹 자란다."


위 노래는 고려인들이 즐겨 부르는 창작민요 <씨를 활활 뿌려라>이다. 이 노래만 보면 고려인들이 남의 나라에서 고통받으며 살았다는 것보다는 정말 활기차게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씨를 활활 뿌려라'라든지, '땅의 젖을 짜먹고', '와싹와싹 자란다'라는 말들은 정말 정감있고, 활동적인 느낌이 든다. 이 노래를 한양대학교 김보희 교수의 생음악으로 들은 뒤 나는 작은 흥분에 휩싸인다.

'고려인'은 누구인가? 고려인은 러시아말로는 '까레이스키'라고 하며, 고려족 또는 고려사람이라고도 하는데 러시아를 비롯한 독립국가연합에 거주하는 한인교포를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이들이 사는 곳을 보면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몰도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즈스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등이다.

한국인들이 러시아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63년(철종 14)으로, 농민 13세대가 한겨울 밤에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서 우수리강 유역으로 갔다고 한다. 이어 점차 늘어나 1869년에는 45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주하였다. 이후로도 이민은 계속되었는데, 대부분이 농업 이민이었으나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망명도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대숙청 당시 연해주 지방의 한인들은 소수민족의 분리, 차별정책에 휘말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다. 이들은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내팽개쳐졌는데, 무려 17만5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중앙아시아의 허허벌판을 개척하고 집단농장을 경영하는 등 소련 내 소수민족 가운데서도 가장 잘사는 민족으로 뿌리를 내렸다.

그러다 1992년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와 11개 독립국가로 나뉘면서 고려인들이 사는 나라에서는 배타적인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고려인들은 일터에서 쫓겨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1996년 현재 독립국가연합 내 고려인 수는 46만 명이라고 한다.

▲ 고려인 노래의 하나인 <동철씨> 악보(가사가 참 순수하다는 느낌을 준다)
ⓒ2006 김보희
이 고려인들은 조선을 기억하고 있을까? 고려인 2~3세대들은 한국말을 할 줄 모르는 상태이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까지 우리의 민요를 기억하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 물론 민요는 새롭게 창작한 노래들과 함께 그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한양대학교 작곡과 김보희 교수는 전한다.

3년여 강의도 포기하고, 역시 대학교수인 남편의 외조를 받아가며, 오로지 고려인들의 노래에 매달려 해마다 2번씩 7번의 고려인 현지조사를 마치고, 이번에 <소비에트 시대 고려인 소예술단의 음악활동>이란 박사학위 논문을 내기에 이르렀다. 또 박사논문 쓰기 이전 정추 선생의 자료를 정리하여 3권의 <소비에트 시대 고려인의 노래>를 한양대학교 출판부에서 펴내기도 했다. 어쩌면 아무도 해내지 못했던 것을 그의 집념이 이루어낸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이 박사학위 논문에는 '고려인 소예술단의 역사', '꼴호즈(집단농장) 소예술단의 음악활동', '소예술단의 노래 레퍼터리 연구', '<레닌기치>에 실린 창작가요의 음악적 분석' 등이 실려 있고, 고려인들이 많이 부르는 58곡의 악보가 수록되어 있으며, 각종 참고문헌도 같이 들어 있다.

▲ 고려인 가수들(왼쪽부터 박쎄냐/80, 리안드레/85)과 김보희 교수
ⓒ2006 김보희
그는 이 연구를 통해서 고려인들의 소인예술단이 갖는 의의를 다음과 같이 짚어냈다.

첫째, 이들의 음악활동은 수평적으로는 한국 민요의 지평을 소련으로 확대했고, 수직적으로는 한국 민요를 고려인과 소련 사회의 맥락에 맞게 전승하여 한국 민족음악의 전통을 새로운 차원으로 계승했다.

둘째, 고려인의 노래는 한국적인 것과 러시아적인 것을 중심으로 서양과 일본음악이 섞인 양상을 보이며, 이주의 아픔이 드러나는 이별의 노래가 많다.

셋째,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한국민요 창작의 지평을 새롭게 열었다.

넷째, 고려인 작곡가들은 고려인의 정서를 잘 표현하기 위해 자신들의 음악에서 전래민요와 잡가, 판소리 음악을 폭넓게 활용했다.

▲ "소비에트 시대 고려인의 노래" 책 표지(정추 채보, 한양대학교 출판부)
ⓒ2006 김보희
그리고 그는 이 연구의 성과로 소인예술단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고, 문화적 매개체로서 고려인 소인예술단이 차지했던 사회문화적 기능과 구실을 연구했으며, 소인예술단은 고려인 민족문화의 전수자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음을 확인하는 것을 꼽았다.

또 고려인 노래 묶음책의 연주목록을 분석하여 장르적 특성을 밝혀내고, 음악의 시대적 변천을 고찰하고, 고려인 창작가요의 작곡가와 그들의 작품을 음악적으로 연구, 분석하여 고려인 창작가요에 나타난 한민족의 음악적 전승과 변천에 나타난 음악의 정체성 연구를 했음을 말한다.

먼 남의 나라 땅에서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는 고려인들이 노래로 그들의 정체성을 지켜가고 있음을 밝혀낸 연구는 우리 모두 크게 손뼉을 쳐서 기려야만 한다. 그리고 그가 연구를 통해 고려인들의 손을 잡은 채 그들에게 민족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해주기를 빌어본다.

고려인 가수 초청해서 녹음해볼 터
[인터뷰] "고려인 소예술단의 음악활동" 박사학위 논문 낸 김보희 교수

 
▲ 김보희 교수
ⓒ2006 김영조
- 어떻게 서양음악 작곡가가 고려인 노래를 연구하게 되었나?

"누구나 궁금해 하는 것이다. 서양음악을 전공한 나는 어렸을 때 한글학자였던 아버지(김선기 선생)를 따라 학글학회에 가곤 했는데 그것이 뿌리일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를 한 뒤 1998년에 귀국했는데 한국 사람이 서양음악을 아무리 잘한다 해도 서양인만큼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정서는 서양음악으로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국악작곡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 것에 대한 공부도 다시 하게 되었고, 음악과 언어와의 연관성에 눈길이 가 음악인류학을 공부했는데 가까운 곳부터 시작하기로 하여 고려인들부터 하게 된 것이다."

- 고려인들이 부르는 노래에 대해 이야기를 해달라

"고려인들은 북한의 소조활동과 비슷한 '소인예술단'이란 것이 있었다. '소인예술단'이란 광범한 고려인 대중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활동했던 비직업적 예술집단이다. 그들은 고려인 음악예술 활동에 중심적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반 인민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사회주의 이념과 정부 정책을 홍보하는 역할을 통하여 각 생산 집단들의 생산력 향상을 도모하였다.

그들은 자기 언어로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자기의 정체성을 드러냈다고 보아야 한다. 고려인들은 아리랑, 도라지, 늴리리야 등의 민요를 주로 부른다. 또 창작가요가 많이 발전되었다. 신문에 발표된 것만 140여 곡이 있을 정도이다. 고려인들의 노래를 분석해보면 민요 30%, 창가 40%, 창작가요 30% 정도로 볼 수 있다."

- 국악을 작곡하고, 고려인 노래를 연구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요즘 창작국악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우리의 리듬과 박자가 없이 서양 냄새만 난다면 이는 국악이 아니다. 국악을 전위예술로 만들면 안 된다. 선율의 아름다움에만 매몰되지 말고,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 서양음악에 배타적이지 않는 자세로 서양음악을 접목하여 국악이 한층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

- 앞으로 해야 할 다른 계획이 있다면.

"언젠가 새까만 우물이 막혀있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 우물을 막대기로 뚫으니 뻥 뚫리고 하얀 물이 솟았다. 그리고 그 꿈을 꾼 다음날 나는 또 다른 꿈속에 한글학자인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는 향가를 연구하셨는데 내게 선몽을 해주시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향가 25곡을 작곡하기도 했지만, 이는 옛 향가의 복원은 아니다.

그래서 향가를 단순한 작곡이 아닌 복원해볼 계획이 있다. 향가는 노래인데 아버지의 연구는 어학적 관점에서 머물렀다는 생각으로 음악으로 향가를 풀어낸다는 것이다. 물론 자료도 없고,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기원하며 공부하고 그렇게 해나가겠다.

또 내가 고려인들의 노래를 연구해서 논문을 썼지만 어디까지나 노래이기 때문에 노래로써 알릴 필요가 있다. 그래서 고려인 가수들을 데려다 녹음을 해서 음반도 내고 공연도 할 수 있도록 하겠다. 만일 그것이 어렵다면 현지에 기술진들과 같이 가서 녹음하는 것도 고려할 것이다."


/김영조 기자
출처 : 허산이
글쓴이 : 허산이 원글보기
메모 :
 


최초의 한인이주 가정
조선의 정치불안과 빈곤으로 인한 한인들의 연해주 이주가 시작되었던 1863년, 양치해, 지신허 등 하산지역 남쪽을 중심으로 최초의 한인촌이 생겨났다.  1870년대에 8,400명으로 집계된 연해주 한인 이주민의 수가 1923년에는 12,000명까지 이르게 되었다.
1929년 하산지역 북부의 포세에트구 한인마을은 한인극장과 문화회관은 물론 한인자치기관을 두고 있었으며, 행정기관에서는 한글을 사용하는 등 한인정착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1937년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 강제이주 명령에 의해 2차례에 걸친 연해주 한인 강제이주가 집행되면서 현재 러시아․CIS국가에 산재해 있는 고려인 동포들의 한과 설움의 역사가 시작된다.
구소련 와해 후에는 중앙아시아로부터 연해주로 고려인 동포들이 재이주해오고 있어 새롭게 고려인 사회를 형성해 나가고 있다.

 

 

 < 고려인 약사>


o 1830-40년대 한인, 계절 영농이민으로 연해주 체류
o 1860년대초 경제적 목적 연해주 정착이민 시작
    -1860년 연해주 포세트 지역 한인 13가구가 이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음
o 1867년 185가구 999명
o 1869년 한반도 북녘 대기근으로 이주 급증. 1만 명 급증
o 1902년 한인 이민자 수 32,380명
o 1905년 을사보호조약 전후 정치적 목적 연해주 이민 급증, 이후 의병 기지화
o 1908년 의병 건수 1,451건. 참가 인원 6만 9천 8백여 명.
    -일본의 항의와 이에따른 연해주 총독의 박해로 의병 활동 만주로 대거이동.
o 1910년 경술국치 후 한인 이민 급증
o 1910년 약 4만명 거주, 블라디보스톡 시내 신한촌 형성
o 1914년 교민 수 6만 3천 명으로 신한촌 건설 (블라디보스토크)
o 1918년 4월 일본군 연해주 점령
o 1919년 삼일운동이후, 항일 이민 배증
o 1922년 10월 일본군 연해주 철수, 친일 거류 민단 5천 명과 함께 귀국
o 1923년 재소 한인 공식 10여만 명 거주. 실제 25만 명 이상 거주
o 1932년 연해주 한인 학교 380개. 잡지 등 6종, 신문 7종,
o 1937년 극동거주 한인 약 19만명을 중앙아시아(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로 강제이주
o 1953년 스탈린 사망 이 후 중앙아시아 등지로부터 한인들의 개별적 연해주 이주 시작
    - 블라디보스톡과 두만강 접경지역 등 군사지역으로 이주는 실제로 불가
o 1989년 소련 인구통계상 연해주거주 한인 8,455명
o 1991년 소련 와해 전후, 중앙아 지역으로부터 연해주로 귀환 증가
o 1993년 기준 연해주거주 한인 11,552명
o 2001년 말 기준 약 30,000명 거주 추정
o 2004년 약 40,000명 거주 추정


(1937년 9월 21일 -11월 15일)

스탈린의 소수민족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37년 9월 21일에서 11월 15일까지 두 달간에 걸쳐 연해주 한인들 전원을 중앙아시아(6천㎞)로 강제 이주 시켰다.
한인들의 조직적인 반발을 예상해 사전에 한인 지도자 약 3000여명을 일제의 간첩, 혹은 트로츠키주의자란 누명을 씌워 알 수 없는 곳으로 끌고가 소리없이 처형하고 일반인들에게는 불씨에 집에 들이닥쳐 명령서를 전달하고 역으로 끌고나갔다.

한인들은 행선지도 모른 채 화물차 짐칸에 짐승처럼 실려 시베리아 대륙을 횡단하고 있었다. 결국 도착한 곳은 물설고 낮선 중앙아시아 한 겨울 들판이었다.
우즈베키스탄 (16,272가구 76,525명), 카자흐스탄 (20,170가구 총 95,256명)으로 대부분 이주되었으면 (총 36,422가구. 총 171,781명 이주)이주 전 한인 지식인들은 대부분 약식 재판을 통해 총살형에 처해졌다.
한인들은 새로운 정착지에 도착한 후 수용 시설이라곤 전혀 없는 허허벌판에 내 몰려 대부분 토굴을 파고 살았으며 그 무서운 겨울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1938년도의 러시아 인구 표본 조사를 보면 그당시 한인들은 1천 명 당 42명이 사망했으며 유아 사망률은 20%나 되었다.
강제 이주 이후에도 한인들은 적성민족이란 낙인이 찍혀 거주 이전은 제한되었다. 한인들은 일정한 거주 구역이 명시된 신분증을 소지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적어도 1953년까지 약 16년 간 집단적으로 수용소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 교육이 금지되었음은 물론 국가 기관 취업과 취학에도 제한. 사회․정치적 진출도 사실상 봉쇄되어 있었다.
이 모든 제한은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비로소 완화되기 시작하였고, 한인은 온갖 역경을 극복하며 벼농사를 시작 중앙아시아를 주요 쌀 농사 지역으로 변화시켰다. 한인은 목화 등 다른 작물에서도 뛰어난 실적을 올리면서 빠르게 정착해 나갔다. “ 고려인들은 바위에 올려놓아도 풀이난다”는 속담이 이런 한인의 끈질긴 생명력과 근면성 농업기술에 기인한 것이다. 전후 한인은 중앙아시아 개발에 앞장서 특유의 개척 정신과 영농법으로 수많은 모범 콜호즈를 탄생시키며 노동 영웅이 되어갔고 소연방이 자랑하던 콜호즈는 모두 한인들의 콜호즈였다.




                 강제이주임을 알수 있는 비석
구소련 정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89년 당시 소련 내 한인은 43만 9천명으로서, 전체 120여 민족 가운데 29번째에 해당하였다. 이들 한인 대부분은 중앙아시아 각국에 집중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 각국에서 한인은 1% 미만의 적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며, 회교계가 다수를 차지하는 중앙아시아 각국에서 소수 민족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중앙아시아 지역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현재 약 35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 극동 지역에 고려인의 분포는 연해주에 1993년에 약 8,500명 정도로 추정하며 현재는 약 40,000명 정도로 추정한다. 그리고 사할린 주에 약 36,000명, 캄차카에 약5,000명, 하바로프스크 주에 약 9,60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전역에 거주하는 고려인의 총 수는 약 45만 명에서 50만 명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려인 마을의 풍경
1991년 12월 소련 연방이 해체되면서 중앙아시아 C.I.S 국가들이 독립하였다 독립 후 각 국가들은 그동안 공용어로 쓰던 러시아어 대신 국가 고유의 자민족 언어를 공식어로 채택하고 자민족 우선 정책을 펼쳐나간다. 소수 민족에 대한 회교 민족주의, 민족 분쟁, 언어, 교육, 경제 환경 등의 문제로 상당수의 고려인이 C.I.S를 떠나고 있으며 대부분 원거주지였던 극동 러시아, 그 중에서도 연해주로 돌아오고 있는 실정이다.
연해주의 인구는 약 220만 명으로 순수 슬라브 계통이 약 50%, 나머지 50%는 120여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 소련 와해 전에는 슬라브 민족 비율이 90%에 다다랐으나 와해 후 서쪽으로 이주하는 경향을 보였고 그 자리를 기타 소수민족들이 들어와 채움으로써 현재의 50대 50 구성 비율이 되었다.

언어의 경우 중앙아시아의 각 민족 공화국이 독립 이후 자기 민족의 언어를 러시아어 대신 공화국내 공식 언어로 채택함에 따라 여타 소수 민족들은 러시아어와 공화국 민족어, 그리고 자기 민족어를 습득해야 하는 3중 언어의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언어의 차원을 넘어 사회, 경제적인 불평등을 야기하고 있다. 한인과 같은 소수 민족은 거주국의 민족어를 배우지 않을 경우 모든 면에서 차별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또한 회교도의 확산으로 인해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인은 여타 소수 민족과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수가 이 지역을 떠났으며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이주자 다수가 러시아로 향하고 있으며, 그중 일부가 연해주로 재이주하고 있다. 나라별로는 타지키스탄 한인의 경우 거의 대부분이 이 지역을 떠난 것으로 추정되며,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한인이 많이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연해주 재이주자 중에도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출신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연해주 정부는 1990년 이후 약 3만 명 정도의 한인 동포가 중앙아시아로부터 연해주로 재이주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공식적인 주민 등록을 하지 않은 숫자를 포함한다면 그보다 더 많은 수의 고려인이 연해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중앙아시아의 민족주의와 경제적 위기. 언어의 문제, 정치 사회적 불평등 문제 등이 계속 존재하는 한 고려인의 러시아 이주는 계속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전망이다.
<위 자료는 동북아평화연대 홈페이지에서 발취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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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해 주 !!!
지평선 끝까지 콩이 심긴 콩밭.
아무 풀이나 마구 자라는 야생 초원처럼 보이지만 사실 콩밭이다
.


          고려인 시인 김준의 시 '난 조선사람이다'.

          읽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 했다.

 

 

                   "高麗人 고려인"

 

 

러시아를 비롯한 독립국가연합에 거주하는 한인교포를 ‘고려인’이라고 부른다.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시·몰도바·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즈스탄·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그루지야 등

독립국가연합 내에 거주하는 한인 교포들을 ‘고려인’이라 부르는데,

러시아어(語)로는 '까레이스키'라고 하며, 고려족 또는 고려사람이라고도 한다.

 

한국인들이 러시아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63년(철종 14)으로,

농민 13세대가 한겨울 밤에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서 우수리강(江) 유역에 정착하였다. 이어 1865년(고종 2)에 60가구, 그 다음해에 100여 가구 등 점차 늘어나,

1869년에는 4,500여 명에 달하는 한인이 이주하였다.

 

이후로도 이민은 계속되었는데, 거의가 농업 이민이었으나 항일 독립 운동가들의 망명 이민도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이른바 대숙청 당시 연해지방의 한인들은 유대인·체첸인 등 소수민족들과 함께 가혹한 분리·차별정책에 휘말려

1937년 9월 9일부터 10월 말까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들은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내팽개쳐졌는데, 당시 고려인 수는 17만 5000여 명으로, 이 가운데 1만 1000여 명이 도중에 숨졌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강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를 개척하고 한인집단농장을 경영하는 등 소련 내 소수민족 가운데서도 가장 잘사는 민족으로 뿌리를 내렸다.그러다 1992년 1월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 외에 11개 독립국가로 분리되면서 고려인들이 거주하는 국가에서는 배타적인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고려인들은 직장에서 추방당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자, 다시 연해지방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현재 연해지방 거주 한인들을 중심으로 자치회가 형성되어 자치지역의 실현, 모국과의 교류 확대 등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활발하지 않다.

 

1996년 기준 독립국가연합 내 고려인 수는 임시 체류자 2,100여 명을 포함해 총 46만 1145명이다. 국가별로는 러시아에 10만 6852명, 우즈베키스탄에 22만 명, 키르키즈스탄에 2만 명, 카자흐스탄에 1만 7460명, 우크라이나에 8,669명, 벨로루시에 2,000명, 몰도바에 350명, 그루지야에 250명, 아제르바이잔에 100명, 아르메니아에 30명이 거주하고 있다.

 

 

                  ◇ 광활한 땅 연해주 - 자연의 보고

 

연해주 '콩밭'은 더 장관이었다.눈앞에 펼쳐진 게 땅이 아니라 초록 바다 같다는 생각을 들게 했을 정도였다. 그 끝없는 콩밭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콩 종자를 가져와 심어놓기만 하면비료도 농약도 필요 없이 잘 자란다고 했다. 그래서 '야생 콩밭'이라고도불리는 그 초록색 바다는 광활하였다.

 

한반도와 거의 같은 크기의 연해주, 그 넓은 땅에 사는 인구는 겨우 200만을 조금 넘는다고 한다. 서울시에만 천 만 명인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땅을 사용할 수 있는 '방식'도 놀랍다.우리가 돌아본 농장 하나의 크기가 12,600hr 자그마치 3,800만평,아직은 사회주의 체제의 연장선에 있어서 그 땅을 개인이 소유할 수는 없지만, 1hr(3,000평)를 빌리는데 우리 돈으로 연간 1천원만 지불하면 되고, 러시아 정부로부터 49년간 '임대'해 경작할 수 있다고 한다.

고려인들의 '희망'이 여기에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집을 구입하면(주택 등 건물은 자기 소유 등기가 가능하다) 텃밭 500여평 정도가 '무상'으로 함께 주어진다.

 

러시아인들은 이곳에 자신들이 먹을 감자 정도를 심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데 반해, 고려인들은 그 곳에 비닐하우스 등을 만들어 최대한의 농업 성과를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연해주의 농가들 중에서 비닐하우스가보이는 집은 거의 100% '고려인의 집'이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그렇게 열심히 텃밭 농사를 잘 짓다 보면러시아인보다 몇 배의 수익이 생겨나고 당연히 많은 일손이 필요한데, 이 때 고용되는 일손은 대부분 러시아인이라고 한다.

 

고려인들이 농업에서 '슬라브인'을 리드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이 땅이 과연 진정한 주인을 맞이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러면서 연해주 답사 기간 동안 고도원님께서 매일 밤 아침지기들과의 '정리 시간'마다 던지신 말씀들을 메모해 놓았던 것을 한국에 돌아와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누구보다 깊이 연해주의 현실을 둘러보며 여느 답사 여행때보다 유독 말보다 생각이 많으셨던 고도원님의 말씀을정리해 놓은 것을 다시 보니, 그 뜻이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이 메모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고도원님께 허락을 구하고 간략하게 정리해 아래에 올려본다.)

 

[6월22일 (답사 이틀째 밤)]

정말 잘 왔다. 어떤 면에서는 조금 늦었다.

연해주는 우리가 앞으로 가는 길에 길목이 될 것이다

- 역사의 문제, 민족의 문제, 식량의 문제, 네트워크의 길목.

연해주의 광대한 땅덩어리, 고려인의 문제는 국가도,NGO단체도 풀 수 없는 미묘함이 있다.

- 아침편지같은 곳에서 조용히 스며들어 가면서마음의 영토를 넓혀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 본격적인 변화의 시작점 같다.

역사가 돌고돌아 고려인 재정착이 시작되면서 우리의 먹거리,

좋고 믿을 만한 음식의 농장과 같은 것을 얻을 수 있다.

- 그런 가능성을 발견하고 현장을 볼 수 있는 중요한 답사다.

우리의 관심이 안으로만 돌아앉아 있어서는 안된다.

- 눈을 밖으로 돌려야 한다, 그리고 살펴봐야 한다.

- 그게 비전이고 꿈너머꿈이다.

 

[6월23일 (답사 셋째날 밤)]

이곳은 거의 자연의 땅이다.

- 먼저 관심을 갖는 사람이 주인이 될 수 있다!

가능성의 땅, 깨끗한 땅, 비옥한 땅, 매우 싼땅, 자연그대로의 땅,

무한대의 땅 - 그 무한대의 가능성이 이곳에 있다.

농장 하나가 김해평야같은 넓이다. 새로운 관심을 갖게 할 수 있다.

몽골 등 다른 곳은 이미 일본, 중국, 독일이 광업권 등 모든 큰 인프라를 선점하고 있지만, 이 곳 연해주는 오로지 한국 사람만이 역사적인 아픔과 더불어 이 연해주 땅을 품고 있다.

- 우리에게 절대절호의 기회의 땅이다.

러시아 정부로부터 49년 임대가 가능하고 그 안에 짓는 건물은

자기 소유가 가능하다. 이 곳만 하더라도 농가와 건물 가격이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있다.

- 당연하다. 부동산의 부가가치가 매우 높다.

관심은 빠를수록 좋다.

- 아침편지 가족 중에 "나라도 가서 투자해보고 싶네.

고려인과 함께 큰 농장하고 싶네" 문의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여기에 동북아 평화연대와 함께 하며 교육하고 농산물을 좋은 상품으로

만들어내면, 고려인에게, 또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 그 중에 하나가 '콩'이다.

 

[6일24일 (답사 넷째날 밤)]

미래의 음식 재료는 무공해여야 한다.

- 최고의 경쟁력도 무공해다.

러시아의 비옥한 땅에서 비료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 이곳은 순 자연의 무공해 그 자체다.

제대로 된 우리콩이 심겨지고, 연변 최고의 전문가가 자연농법으로 실험하며, 이미 성공을 거두고 있다.

식량이 무기이다. 미래에 대한 대안을 갖고 있어야 한다.

- 민족적 차원으로 접근해야 한다.

오늘 콩밭을 직접 보니, 잘 왔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다.

- 보지 않았는가. 지평선을 이루는 콩밭을...

100% 무농약 무공해 '반 야생콩밭'

- '콩'이 연해주를 살리는 길이고, 대한민국을 살리는 길이다.

나의 개인적인 관심과 건강을 위해 콩을 찾아 많이 다녔다.

- 한국인의 기본 식품인 두부, 된장, 청국장 등 항상 문제는 늘 '콩' 이었다.

- 좀 팔린다 싶으면 중국콩으로 대체한다.

- 국산콩은 상품은 좋지만, 단가가 너무 높다.

이곳 러시아 연해주에서 대안을 찾았다.

- 연해주가 최고의 콩의 보고이다.

- 이 좋은 콩을 어떻게 고스란히 한국으로 옮겨와서 아침편지 가족,

꽃마주민,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싼 값에 먹을 수 있게 하느냐가 숙제이다.

고려인들이 차가버섯과 결합해 만든 좋은 청국장을, 제한된 수량으로나마 우선 꽃마주민에게 선보일 날이 있을 것이다.

 

[6월25일 (답사 다섯째날 밤)]

청국장 찾아 천리만리를 왔다.

무엇보다 제대로 만든 청국장을 발견한 것이 기쁘다.

오래전부터 아내와 더불어 '청국장'에 대한 관심이 컸다.

10여년전부터 국내 안 돌아다닌 곳이 없다.

- 청국장 박사 홍영재 박사와의 만남과 함께 다닌 얘기

문제는 늘 콩이었다.

- 한국에서 국산콩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는 좋은 콩 고르기가 너무 힘들었다.

▷ 집에서 청국장을 직접 만드는 고려인 '또냐의 집' 방문 후

우리 고유의 정통방식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 여기에 차가버섯 결합해서 만들고 있다.

여느 공장에서 만드는 것과 다른 맛과 경쟁력이 있다.

- 자기 자신과 가족이 먹는다는 생각으로 만든 것들이다.

 

[6월26일 (답사 마지막 날 밤)]

러시아가 무서운 잠재력을 갖고 있는 나라임은 틀림없다.

- 러시아와의 관계가 민족적 관심사의 중심에 있다.

- 어떻게 우리나라와 연계해서 서로 역사적 상처를 내지 않고 시너지를 낼 것인가.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을 잘 지켜봐야 한다.

경제 현실의 불균형은 아직 주목거리다.

- 러시아인 하루 인건비가 150루블인데, 김치찌개 250루블, 냉면이 400루블...

- 우리로서 상상할 수 없는 불균형이 지금의 현실이다.

무섭게 발전하고 있지만 노동의 질에서는 요원하다.

- 우리 같으면 한 달이면 될 공사를 3개월이 되어도 절반 수준이다.

지금은 그럭저럭 굴러가지만, 대전환점이 반드시 다시 온다.

오늘 류재관대표가 우연하게 외화벌이 나온 '북조선' 사람들을 만났다.

- 하루 일당을 150루블 받는 러시아인들과 달리 그 북한 동포들은

1,000루블을 받고 일하고 있다고 들었다.

- 게으른 러시아인들의 빈 자리를 빠르고, 열심히 하고, 손끝이 야무진

북한 동포들이 채우고 있다.

- 여기에 또 하나의 길이 있다.

장차 통일 후 북한 동포들이 나와도 먹을 것을 제공할 수 있는 땅이

바로 이 연해주이다. 협력의 자리, 매끄럽게, 부드럽게 갈 수 있도록

누군가 눈길을 보내고 준비하고 대비해야 할 것이다.

연해주는 '기회의 땅'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직접 봐야 보이고,

보아야 길을 찾을 수 있다.

 

' 고도원님의 연해주 답사기에서'

 

 

출처; 산사람블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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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을 아시나요?  

 (오평호박사/연세대학교교수 바르게살기운동중앙협의회 사무총장)

  고려인이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몰도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키즈스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등 독립국가연합 내에 거주하는 한인 교포들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용어입니다. 러시아어(語)로는 '까레이스키'라고 하며, 고려족 또는 고려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한국인들이 러시아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63년(철종 14)으로, 농민 13세대가 한겨울 밤에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서 우수리강(江) 유역에 정착하였습니다. 이어 1865년(고종 2)에 60가구, 그 다음해에 100여 가구 등 점차 늘어나 1869년에는 4,500여 명에 달하는 한인이 이주하였습니다.

   이후로도 이민은 계속되었는데, 거의가 농업 이민이었으나 항일 독립 운동가들의 망명 이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의 이른바 대숙청 당시 연해지방의 한인들은 유대인·체첸인 등 소수민족들과 함께 가혹한 분리·차별정책에 휘말려 1937년 9월 9일부터 10월 말까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이들은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내팽개쳐졌는데, 당시 고려인 수는 17만 5000여 명으로, 이 가운데 1만 1000여 명이 도중에 숨졌습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강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를 개척하고 한인 집단농장을 경영하는 등 소련 내 소수민족 가운데서도 가장 잘사는 민족으로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러다 1992년 1월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 외에 11개 독립국가로 분리되면서 고려인들이 거주하는 국가에서는 배타적인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고려인들은 직장에서 추방당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자 다시 연해지방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현재 연해지방 거주 한인들을 중심으로 자치회가 형성되어 자치지역의 실현, 모국과의 교류 확대 등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활발하지 않습니다.

   2005년 8월 기준(외교통상부 자료) 독립국가연합 내 고려인 수는 임시 체류자 2,100여 명을 포함해 총 534,779명이 됩니다. 국가별로는 러시아에 190,671명, 우즈베키스탄에 200,917 명, 키르키즈스탄에 20,394 명, 카자흐스탄에 36,760명, 투르크메니스탄 420명, 타지키스탄 1,783명, 우크라이나에 13,111명, 벨로루시에 1,327명, 몰도바에 286명, 그루지야에 20명, 아제르바이잔에 63명, 아르메니아에 30명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고려인, 그들은 분명 우리 민족이며, 동포들입니다. 이들이 겪었던 한 맺힌 설움의 세월은 이들만의 고통과 아픔이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의 아픔입니다. 2007년은 러시아에서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된지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동안 소외되었던 이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표현함으로서 동포의 정을 서로 나누게 됩니다.

   그 동안 정부나 여러 단체에서 많은 관심을 갖고 활동을 하여 왔지만 이제는 범국민적 차원에서 고려인 동포 돕기에 심혈을 기울어야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부는 고려인들에게 방문 취업비자를 금년 3월부터 시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 단체에서 고려인들이 사는 중앙아시아 지역을 방문해서 그들을 위로하고 함께 정을 나누는 모습이나 그들을 우리나라로 초청해서 문화와 교육을 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도 아름답게 보이고 있습니다. 때로는 질병에 고통을 당하는 그들을 초청해서 환한 웃음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사랑을 베푸는 것도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국민 여러분! 고려인들은 지난날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하였던 후손들입니다. 이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서로가 손에 손을 잡고 희망찬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사랑과 희망을 안고 살아가도록 마음의 문을 열고 고려인들을 안아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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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


   바르게살기운동중앙협의회(회장 박강수)는 1837년 스탈린 정책에 의해 강제 이주를 당한 우리 동포들과 그 후손들을 위해서 “고려인 동포 돕기”를 2007년도 중점사업으로 정하였다. 그래서 강제 이주 70주년을 맞는 2007년 삼일절 행사를 독립기념관에서 12,000여명이 모여 “고려인 동포 돕기 걷기” 행사를 가졌다. 뿐만 아니라 고려인들의 실상을 보고, 그들의 고충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기 위해 박강수 중앙회장을 비롯한 30여명이 3박 5일간(3월 16일- 20일) 일정으로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하였다.

   방문 기간을 통해서 우즈베키스탄에 살고 있는 고려인 1세대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아픔과 소원을 들어보았으며, 그들의 후손들과 대화를 통해서 모국어를 잃어버린 현신을 극복하기 위해 한국어 보급을 위한 방안과 대책을 수립하기도 했었다.

   방문단은 고려인 집단농장과 노인 회관, 세종 한글학교 및 교육원을 방문하고 한글 교재와 의류를포함한 각종 위문품(시가 2000만원 상당)을 전달하고 돌아 왔었다.

   또한 바르게살기운동 중앙협의회는 지난 10월 23일 3박5일간의 일정으로 우즈베키스탄 2차 방문을 하였다. 이번 방문에는 김정길 전 법무부 장관을 비롯한 20여명은 타쉬켄트와 옛 수도인 사마르칸트 지역을 돌아보면서 우즈베키스탄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의 지위 향상과 고국 방문 등을 논의하고 돌아 왔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니자미 국립 사범대학과 바르게살기운동 중앙협의회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한국어문학과의 발전과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데에 기여하도록 매년 일만 달러이상 지속적인 지원과 관심을 갖도록 하였다.

   바르게살기운동 중앙협의회 사무총장 오평호박사는 “앞으로 우즈베키스탄 바르게살기운동 지부(허선행 교장-세종한글학교)를 통해서 한국어를 사랑하고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도록 “한글사랑 장학회”를 바쁜 시일 내에 설립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또한  ”이 장학회는 매년 500여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한국을 방문하거나 유학을 오는 학생들에게 체류 기간 동안 각종 편의를 제공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바르게살기운동 중앙협의회는 전 국민들이 해외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 관심을 갖도록 각종 캠페인과 세미나를 준비하고 있다. 또한 국내에 살고 있는 외국인이나 귀화한 외국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갖는데 주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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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yuram/120032441381
인터넷을 서핑하다 찾은 동영상입니다.
로스토프의 고려인이라는 제목인데 보시면 로스토프가 어떤 곳인가 조금은 참고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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