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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중심으로 살펴본 선교역사
I. 로마제국의 기독교 (AD 30-500) | |
사도 바울 (St. Paul, 64)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였다. 다소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바리새파의 엄격한 율법 가운데 자라났으며 유대교에 위협을 가하는 소위 새로운 이단인 예수집단을 가혹하게 핍박하다 다메섹 도중에서 기적적인 회심을 하고 그 후 초대교회의 가장 열심있는 복음전도자가 되었다. 바울은 10년이 채 못되어 로마제국의 주요한 네 지방인 갈라디아, 마게도냐, 아가야, 아시아에 토착교회를 설립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64년 네로황제의 박해때 순교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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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니우스 (Irenaeus, 178-200) 리용의 감독. 켈트어와 라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런데 그 반응은 그리 크지 못했다. 250년이 흐르도록 5-6개 군데의 공동체에 있는 교회에는 소수의 회심자밖에 모이지 못하였다. | |
두르의 마틴 (Martin of Tours) 고올(Gaul)지역의 감독. 한때 군인이었던 마틴은 즉각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군대식 제도를 채택하였다. 그와 함께 여러 추종자들은 각 지방에 다니면 사원들을 허물고 우상들을 파괴시켰으며 복음을 전하고 회심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 |
조명자 그레고리 (Gregory the Illuminator, 280) 대략 3세기 말에 위대한 선교사 그레고리가 주도한 대규모 운동의 결과와 티라다테스(Tiridates)왕의 회심에 불이 붙은 아르메니아(Armenia)는 기독교 왕국이 되었다. 410년에는 이미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된 신약성경이 나타났다. 아르메니아교회는 오늘날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중의 하나가 되었다. | |
울필라스 (Ulfilas, 311-380) 고트족이 체계적으로 복음을 접하게 된 것은 울필라스의 사역 결과인데 그의 부친은 갑바도기아인이고 모친은 고트인이었다. 그는 자기가 기독교인이 된 콘스탄티노플에서 10년을 보낸 후 자기 백성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귀국하였다. 그의 업적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성경을 고트족 언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이 일을 위하여 그는 문체에 맞도록 언어를 재정리해야 하였다. 그는 성경보급 뿐 아니라 언어와 문학에까지 현저한 공헌을 한 선교사 가운데 제 일인자였던 것이다. | |
패트릭 (Patrick, 389-460) 아일랜드의 사도 패트릭은 영국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12세때 아일랜드에 노예로 끌려가 양치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그 포로시기의 영적경험은 그의 온 생애를 변화시켰으며 탈출 후 영국으로 왔다가 꿈에 환상을 보고 다시 아일랜드로 들어가 그곳의 복음화를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그의 영향은 사후에도 지속되었고 그 나라를 넘어 타지에까지 확장되었다. 켈트족 기독교의 중요한 부분이었던 수도원들은 기독교 문화의 중심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선교열을 불붙이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다음 세대의 북부유럽을 복음화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
당시 기독교인 가정 초상 |
II. 유럽의 기독교화 (AD 500-1200) |
알로펜 (Alopen, ?) 중국에 최초로 입국한 선교사는 네스토리안 기독교(소위 ‘경교’라고 함)의 알로펜으로서 AD 635년에 입국하여 당시 당조의 태종의 환영을 받았는데 그 당시 중국문화는 절정에 달한 시기였고 태종은 종교를 연구하고 인정하며 보급하였던 왕이었다. 알로펜은 자기가 지니고 간 성경을 동료와 함께 중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수도 장안에 그는 21명의 수도사를 위해 대진사를 설립하였다. 이 새로운 종교는 10개 도를 통해 확산되었으며 수백개 도시에 수도사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
콜럼바 (Columba, 521-597) 초기에 영국으로부터 복음이 전해졌던 아일랜드가 반대로 스코트랜드에 가장 위대한 선교사를 파송하였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콜롬바로서 왕족이며 재능이 많고 학식이 넓은 인물이었다. 42세때 12명의 동행자와 함께 아일랜드 수로를 건너 스코트랜드 서해안 밖에 있는 아이오나섬에 수도원을 설립하였는데 그것은 선교역사상 가장 유명한 선교센터가 되었다. |
어거스틴 (Augustine, ?-604) 콜롬바가 죽던 해(596년) 직전에 교황 그레고리 대제는 베네딕트 승려 40명과 함께 어거스틴을 영국에 파송하였다. 앵글로 색슨족의 야만성에 대한 무서운 이야기를 들은 어거스틴은 고올로 돌아왔지만 교황은 그가 가던 길을 계속 가도록 명령하였다. 켄트에 상륙한 어거스틴 일행 7명은 왕 에텔버트의 영접을 받았고 왕은 나중에 기독교로 개종하여 하룻만에 10,000명이 세례를 받고 캔터베리대성당이 건립되어 어거스틴은 그 유명한 대주교 가운데 첫 번째가 되었다. |
콜럼반(Columban, 550-615) 아일랜드 출신 콜럼반의 첫 일터는 동부 프랑스였으며 그곳에 룩사이유 수도원을 세웠다. 20년 후에 그는 부르군드 왕의 부도덕을 담대히 꾸짖은 까닭으로 왕실의 미움을 사 그의 켈트 수도승들과 함께 쫓겨나 라인강을 넘어 현대 스위스의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부르군드의 세력이 확대되어 이곳에서도 쫓겨나게 된 그는 북이탈리아의 보비오에 세운 수도원에서 사망하였다. |
아이단 (Aidan, ?-651) 콜럼바의 후계자인 아이단은 영국 동부 연안 도서인 린디스환에 수도원을 설립하였으며 거기서 아이단은 635년에 노덤브리아 중앙부까지 전도운동을 펼쳤다. 17년동안 여러 여러 동료들과 함께 앵글족과 색슨족에게 평화의 복음을 전하였으며 많은 성과를 얻었다. |
윌리브로드 (Willibroard, 658-739) 리폰의 윌프리드와 아일랜드의 에그버트 하에서 훈련받은 노덤브리아 수도사인 윌리브로드가 11명을 동반하고 북해를 건너 프리시아의 첫 선교사로 들어갔다. |
보니페이스 (Boniface, 680-754) 암흑시대에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알려진 영국의 베네딕트 수도사 보니페이스는 중년이 다 되어서야 독일로 선교를 떠나게 된다. 40년의 눈부신 선교사업을 통해 그는 “독일의 사도”라는 명칭을 받았다. 크리스토퍼 도우슨은 그를 일컬어 “아직까지 살았던 어떤 영국사람보다도 유럽역사에 깊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고 말했다. |
안스카 (Anskar, 801-865) “북극의 사도”라고 불리는 안스카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콜롬바에 의해 꼬르비에 세워졌던 수도원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스웨덴에 파송되어 교회를 세우고 후에 스웨덴, 덴마크, 북부유럽의 슬라브족에 대한 교황사절로 임명되었고 후에 함부르크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이 직책을 통해 안스카는 선교사업의 방대한 연결망의 본부의 역할을 하여 스칸디나비아 전역에 파송할 선교사 훈련을 지원하였다. |
콘스탄틴 (Constantine, 후에는 Cyril, 826-869)과 메소디우스(Methodius, 815-885) 데살로니가의 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한 사람은 철학자이고 한 사람은 화가인 이 형제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에 의해 모라비아(현재 체코와 슬로바키아 일부지역)의 황태자인 라티스라브의 요청으로 슬라브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
클레멘트 (Clement) 불가리아인들의 회심은 865년에 왕 보리스가 세례를 받음으로 크게 촉진되었고 후에 그는 유명한 선교사인 클레멘트를 마게도냐에 파송하였으며 거기서 클레멘트는 선교사훈련대학을 설립하였다. 그후 불가리아인들은 슬라브세계의 기독교 지도자가 되었고 기독교 신앙이 퍼져 나가 현재 유고슬라비아와 러시아까지 확대되게 된다. |
III. 로마 카톨릭 선교 (AD 1300-1700) | |
아시시의 프란시스 (Francis of Assisi, 1182-1226) 200년간 계속되었던 십자군 전쟁(1095-1291)등의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중세시대 로마 카톨릭의 회교권선교를 위한 노력은 너무나 미미하였다. 아직 십자군전쟁이 한창이었을 13세기 초에 앗시시의 프란시스는 미움이 아니라 사랑으로써만 회교도들을 얻을 수 있다고 호소하였다. 그의 처음 두 번의 선교사역은 실패로 끝났지만 1219년 세 번째에는 이집트의 술탄앞에 서게 되었다. 언어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란시스는 어렵게나마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다. 비록 이를 통하여 직접적인 회심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는 회교도들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으며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선교의 길을 닦아 놓을 수 있었다. | |
레이몬드 룰 (Raymond Rull, 1232-1315) 당시 가장 뛰어났던 회교권 선교사인 레이몬드 룰은 스페인 부유한 로마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판사생활을 했었다. 그의 선교전략은 변증법적으로 전할 것, 교육을 시킬 것, 복음적으로 사역할 것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논리적으로 불신자들에게 증거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였다. 북아프리카 회교권에서 여러 박해를 받으며 사역하던 그는 결국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룰의 인생과 사역은 교회사의 가장 암울한 시대에도 기독교 진리는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간증이다. 그는 회교도들에게 선교하기 위하여 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교회의 개혁을 주장했고 또한 교회 헌금 중 10분의 1은 선교에 써야한다고 강조했다. 로마 카톨릭은 대부분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였으나 룰은 그의 소명에 끝까지 소명을 다하였다. | |
몽테 콜비노의 죤 (John of Monte Corvino) 유럽 외 지역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선교는 프란시스 교단의 수도사인 몽테 콜비노의 죤이 1294년에 중국에 도착한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걸식수도사인 죤은 이미 페르시아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 사람이었다. 이상한 것은 중국인들이 반대한 것이 아니라 당나라 시대의 200년 동안 중국에서 번창했던 네스토리안교회의 일부 잔유자들이 카톨릭 선교를 반대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죤은 중국황제의 신임을 얻어 북경에 교회를 설립하였고 후에 교황 클레멘트 5세에 의하여 북경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 |
바돌로매 드 라스 카사스 (Father Bartholomew de Las Casas, 1474-1566) 15세기 말에 시작된 지리상의 발견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 새로운 선교의 비젼을 가져다주었고 교황이나 세속통치자들은 이 신대륙을 카톨릭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하였다. 신대륙 최대의 적은 식민주의 그 자체였고 토착민들을 향한 착취와 만행이 선교사들의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식민지 관리들에게 정의를 행하라며 비판의 소리를 높였다. 그 중의 한 사람인 라스 카사스는 인디안들의 위대한 지도자로서 스페인 식민지에서 식민주의와 맞싸웠다. 그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선교의 정신과 인간존중심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역설하였던 가장 위대한 인도주의적 선교사로 기억될 것이다. |
프란시스 자비에르 (Francis Xavier, 1506-1559) 가장 위대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선교사라고 간주되는 프란시스 자비에르는 1542년 남부인도에서 3년을 보내며 수천명의 개종자를 얻은 후 말레이반도와 그 부족 도서지방으로 가서 다시 3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1549년 다른 두명의 예수회원과 일본인 개종자를 통역으로 데리고 소위 “해뜨는 곳”, 일본에 가서 2년동안 교육하며 설교하며 또 각종 의식을 집전하면서 전국을 여행하였고 다른 예수회원들이 그를 따라 사역을 계속하였다. |
가장위대한 로마카톨릭 선교사로 여겨지는 프란시스 자비에르 |
마테오 릿치 (Matteo Ricci, 1552-1610) 1368년에 명나라는 선교사를 축출하였고 따라서 중국내 기독교는 소멸하였었다. 200년후 로마 카톨릭을 중국에 부식코자 하는 두 번째 시도로 예수회 소속의 마테오 릿치가 마카오의 폴투갈 식민지를 디딤돌로 삼아 20년 이상에 미치는 길고도 힘든 달구지 여행으로 북경에 도착하였다. 중국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그는 중국문화를 채택하였고 유교학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1601년 수도에까지 들어가 황제의 공식적인 시계 담당관으로 행세하면서 많은 지식인들을 만나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북경에서 마테오 릿치의 영향력을 통해 다른 예수회원들에게도 여행이 허락되어 광대한 중국 대륙 각처에 거주하며 1650년에는 거의 250,000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 |
로베르토 데 노빌리 (Robert de Nobili, 1577-1656) 명문가 출신의 젊은 이탈리아 예수회 수도사 로베르토 데 노빌리는 1605년 인도에 도착하였다. 피셔해안에서 몇 개월 체류하면서 타밀어를 공부한 다음 마두라이로 갔다. 그는 50년간을 남부인도에서 보내면서 인도세계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개척자로서의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의심할 나위 없이 노빌리는 마테오 릿치가 중국에서 사용한 방법에 대하여 알고있었으며 그와 같은 한도내에서 또는 그 이상으로 확대해서 그 방법들을 시도해볼 결심을 하였다. 그는 브라만의 관습과 선입견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 만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포기하였다. 인도인의 눈에 부정하게 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는 기존의 기독교회와의 거래도 끊었다. 노빌리의 대담한 시도는 당장에 성공을 거두었고 특별히 공개토론의 방법을 사용하여 상류계층에서 유례가 없었던 놀라운 사역을 이루었다. | |
앤드류 화이트 (Father Andrew White, 1579-1656) 앤드류 화이트는 두 명의 예수회 회원과 함께 종교적 자유를 찾아 1632년 체사피크만에 들어왔다. 화이트 신부는 인디언어를 배운 후에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하여 개종시키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목적으로 그는 교리문답집을 준비하였다. 2년 후에 버지니아에서 온 백인 약탈자들이 매릴랜드에 있는 예수회선교부를 침입하여 모든 것을 빼앗고 화이트 신부는 쇠사슬에 메인 채로 영국에 보내졌으며 거기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집행되지는 않았다. |
IV. 개신교선교의 시작 (AD 1600-1750) | |
죠지 폭스 (George Fox, 1624-1691) 1661년에 동지회(The Society of Friends) 창설자인 죠지 폭스가 3명의 동료를 중국에 선교사로 파송하였으나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 |
져스티니안 폰 벨츠 남작 (Baron Justinian von Weltz) 처음으로 선교를 시도한 루터교 선교사로 1664년 경 교회의 선교적 책임을 외친 인물이다. 세 종류의 소책자를 발간하여 교회의 선교적 책임이 어떠한 것인지를 주장하였고 그러한 사업수행을 위한 선교회나 기구를 조성할 것과, 선교사를 훈련하는 학교를 개설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순조롭지 못했고 교리적으로 정통을 주장하는 당시 교회들은 영적생명과 선교의 비젼이 많이 결여되어 있었고 반대와 조롱을 받았다. 그는 화란으로 가 남작의 지위도 버리고 “이방인의 사도”라는 명칭을 받고 화란 기아나(수리남)까지 항해하였으나 거기서 수확을 얻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 |
어거스트 프랑케 (August Francke, 1663-1727) 경건주의의 지도자이며 할레대학의 교수였던 프랑케는 할레대학을 유럽의 경건주의와 복음운동, 18세기의 해외선교운동의 중심지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해외선교란 18세기에도 역시 교회의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에게는 내키지 않는 것이었으며 자연히 그들은 웃음거리와 놀림거리가 될 뿐이었다. | |
바돌로매 지겐발크와 헨리 플뤼차우 (Bartholemew Ziegenbalg & Henry Plutschau) 선교의 서곡은 경건주의자였던 덴마크의 왕 페르디난드 4세(Ferdinand IV)의 요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왕은 덴마크의 식민지인 인도 남쪽끝의 트랜퀴바(Tranquebar)를 복음화하기 위한 선교사를 파송해 달라고 할레대학에 부탁했다. 이에 대해 바돌로매 지겐발크와 헨리 플뤼차우가 자원하여 덴마크-할레 선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
니콜라우스 진젠도르프 (Nicolaus Ludwig Zinzendorf, 1700-1760) 모라비안교회의 감독이었던 진젠도르프 백작은 30년간 세계선교활동을 격려하고 지원하였다. 진젠도르프와 프랑케는 18세기에 있어 가장 훌륭한 선교지도자로 꼽히고 있다. 1730년 코펜하겐을 방문중이던 그는 서인도에서 온 한 흑인과 그린랜드 출신의 두 에스키모인을 만났는데 그들은 모두 선교사를 원하고 있었다. 그들의 요청에 깊은 감동을 받은 진젠도르프는 헤른후트에 돌아오자 그 문제를 놓고 사람들에게 호소하였다. 그 호응은 즉각 나타났으며 대단히 열정적이었다. 그들의 첫 선교는 버진열도의 덴마크령 성 토마스 섬에 있는 흑인 노예들을 위한 것이었고(1732년), 그 다음 그린랜드, 수리남, 황금해안, 남아프리카, 북미 인디언, 자마이카, 안티구아로 확장되어 1732년에서 1760년 사이에 226명의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외국으로 들어갔다. |
니콜라우스 진젠도르프 백작 |
대륙의 경건주의 운동에 있어 주요한 인물은 스패너, 프랑케, 진젠도르프이고 영국의 경우 복음적 각성에 있어 위대한 설교자는 웨슬레와 휫필드였고 미국의 경우는 조나단 에드워드였다. 이 두 측면 사이에 연결된 것은 웨슬레가 개인적으로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형제들을 만난 것과 휫필드가 프랑케의 글을 연구한 것이었다. |
V. 개신교 선교 (AD 1750-) | |
윌리엄 케리 (William Carey, 1761-1834) 가난하기 짝이 없는 영국의 구두수선공 출신의 윌리엄 케리는 “근대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 이상하게도 그에게 선교에 대한 관심이 생긴 동기는 “쿡 선장의 마지막 항해”라는 책을 접하고 부터였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탐독하였고 독학으로 수개국어를 습득한 노력파였다. 1792년 87페이지에 달하는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기독교인들의 강구해야 할 수단들을 찾아”라는 책을 출간하였는데 이것은 선교에 관해 저술된 어떤 책보다도 가장 확신에 찬 선교적 호소를 하고 있다. 이 책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으며 후대 교회사에 끼친 영향을 생각한다면 마틴 루터의 95개 조항과 나란히 설 수 있을만큼 귀하다. 선교운동을 위한 여러역경을 거친후 1793년 인도로 들어가 40년간 선교사역에 힘썼다. 유럽과 미국에 케리의 노고와 편지를 통해 많은 선교기관이 설립되었는데 그중에는 런던선교회(1795), 스코트랜드와 글라스고우 선교회(1796), 네덜란드선교회(1797), 교회선교회(1799), 영국해외성서공회(1804), 미국해외선교위원회(1810), 미국침례선교협회(1814), 미국성서공회(1816) 등이 있다. 19세기에 있어서 선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윌리엄 케리라고 해도 결코 과장은 아닐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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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노트 (Henry Nott, 1774-1844) 다른 지역과는 달리 태평양 지역에는 한번에 많은 수의 선교사들이 파송되었다. 1796년 런던선교회는 30명의 선교사들을 타이티로 파송했지만 선교사역은 선교사들이 원주민과 동화되고 낙심하고 병에 걸려 고생하는 등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던 벽돌공 헨리 노트 같은 이가 꿋꿋하게 16년을 아무런 성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도 견뎌내지 못했더라면 타이티 섬의 선교사역은 실패했을 것이었다. 1819년 포매어 왕의 세례식이 거행되었고 (비록 포매어 왕은 곧 옛생활로 돌아가 버렸지만) 타이티 원주민들 사이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곳을 방문했던 한 러시아 귀족은 유아살해, 식인축제, 전쟁 등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유럽 선교사들의 사역의 결과였던 것이다. |
헨리 마틴 (Henry Martyn, 1781-1812) 그 당시 말썽없이 인도에 선교사로 들어가는 길은 동인도회사의 전속목사가 되어 들어가는 것 뿐이었다. 이렇게 동인도회사의 전속목사로 커다란 선교업적을 이룬 사람이 영국 콘월 태생의 헨리 마틴인데 그는 1806년 인도에 도착하여 짧은 기간 동안 사역했으나 중앙아시아에서 활동한 선교사 중 최고의 성경번역가였다. 4년동안 그는 군대에 종군하면서 유럽인들과 인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학교들을 세우는 등의 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신약성경을 힌두어, 페르시아어, 아랍어 등으로 번역했다. |
아도니람 저드슨 (Adoniram Judson, 1788-1850) 1812년 인도에 들어간 아도니람 저드슨 부부와 다른 6명의 선교사들은 미국 최초의 해외선교사라는 영예를 안았다. 앤도버신학교의 소수의 학생들의 선교에 대한 높은 관심은 미국선교사파송위원회 결성의 촉진제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미국 해외선교의 소박한 시작이 되었다. 저드슨은 동인도회사의 방해공작으로 인도를 터나 미얀마로 들어가 일생동안 배타적이고 마음의 문이 굳게 닫힌 그들에게 온갖 어려움을 무릎쓰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충실하였고 저드슨은 미얀마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
히람 빙햄 (Hiram Bingham) 하와이(당시 샌드위치섬)의 경우는 어떻게 적은 수의 미국 선교사들이 낯선 문화 속에서 수십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사회의 각 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독특한 것이다. 1819년 7쌍의 부부가 앤도버신학교를 졸업한 히람 빙햄을 지도자로 하여 하와이를 향해 떠났다. 그들이 선교를 시작한 지 10년이 겨우 지났을 때 선교사들은 섬의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으며 빙햄은 지극히 존경을 받았는데 여러 추장들은 그를 단순한 영적 지도자 이상으로 극진히 모셨다. 도덕성과 물질주의로 인한 문제점들, 선교부 임원들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복음사역은 계속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
알렉산더 더프 (Alexander Duff) 인도에서 사역한 선교사들 중 가장 혁신적인 사람이 1830년 그의 아내와 함께 캘커타에 도착했던 스코트랜드 교회의 첫 번째 해외 선교사였던 알렉산더 더프였다. 더프는 인도의 개종자들은 대부분 하류층에서 나왔고 이들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기 때문에 인도선교는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상류층을 대상으로 학교를 개교하여 서구의 과학지식을 전해주면서 선교하였는데 호응이 대단하였다. 해외선교에 끼친 그의 공헌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의 영향력 때문에 수백명의 선교사 자원자들이 헌신을 하였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선교사업의 후원자가 되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약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교육사업과 복음사업을 연결한 그의 선교방법은 세계 도처에서 실행되었다. |
죤 반더켐프 (John T. Vanderkemp, -1811) 최초로 남아프리카에 선교사로 온 사람은 홀랜드 출신의 의사였던 죤 반더켐프였다. 네덜란드 개혁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50세의 나이로 1799년 케이프 식민지에 도착하여 주로 호텐토트족 사이에서 사역하며 몇 번의 좌절을 이겨내고 수백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그는 매일 노예무역을 목격하며 대단히 마음아파하다가 노예를 해방시켜 주려고 수천 달러를 썼는데 그 중 17세의 나이로 그와 결혼했던 말라가시 여인도 있었다. 그는 선교사역을 시작한 지 12년만에 운명하였지만 런던선교회의 가장 훌륭한 개척자였다. |
로버트 모리슨 (Robert Morrison, 1782-1834) 로버트 모리슨은 19세기의 초엽 외국인게 적대적인 중국땅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모습으로 사역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저를 어려움이 제일 많은 곳으로 보내주시고 가장 축복하기 어려운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게 해주소서”라는 것이었다. 그의 기도가 응답되어 중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25년 동안 인내하며 사역하였지만 10여명의 개종자밖에 얻지 못하였고 그가 죽을 즈음에는 전 중국을 통틀어 3명의 중국인 신자가 남았을 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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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모팻 (Robert Moffat, 1795-1883) 남아프리카선교회의 창시자로 50년 이상 이 지역 선교에 큰 영향을 끼친 스코트랜드 출신의 로버트 모팻은 아프리카 선교에 있어 그보다 더욱 유명해진 사위 때문에 오히려 “데이빗 리빙스턴의 장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모팻은 리빙스턴보다 더 훌륭한 선교사였다. 그는 복음전파자, 번역가, 교육자, 외교관, 탐험가였는데 이러한 역할들을 잘 조화시켜 선교함으로써 아프리카 선교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다. |
존 클라우 (John Clough) 알렉산더 더프는 상류층 사람들을 복음화 하는데 주력했지만 그의 뒤를 이은 많은 선교사들은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낮은 카스트 계급들을 위해 일하였다. 1865년 미국 침례교선교회 출신의 죤 클라우 박사 부부는 인도 옹골에 있는 로운스타선교회에서 사역하며 천민계급들 사이에서 큰 부흥을이룩하였다. 부흥은 꾸준히 지속되어 1878년 여름에는 하루에만 2,222명에게 침례를 준 일도 있었다. |
죤 윌리암스 (John Williams, 1796-1839) 태평양 군도에서 일했던 선교사 중 가장 혁신적이고 먼 미래를 바라보고 일했던 사람은 영국 태생의 죤 윌리암스였다. 이 지역에 폭넓게 끼친 그의 영향 때문에 “태평양의 사도” 혹은 “폴리네시아의 사도”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는 원주민 사역자들을 훈련시켜 여러 섬들에 파송하고 자신은 규칙적으로 그들을 방문하여 선교사역을 지도하는 방식을 사용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섬들 을 찾아 에로망고 섬에 도착하였다가 원주민들에게 습격을 당해 창에 찔려 숨을 거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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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구츨라프 (Karl F.A. Gutzlaff, 1803-1851) 칼 구츨라프를 언급하지 않고는 동양선교를 논할 수 없다. 독일태생으로 20대 초반에 네덜란드선교회에 의해 인도네시아로 파송되었는데 그곳에서 선교회 승인 없이 중국 피난민들을 위해 일하다가 후에 독립 선교사가 되어 홍콩에 거처를 정하고 한 세대 내에 중국을 복음화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15년이 못되어 300명이 넘는 중국인 사역자들을 훈련하여 파송했는데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수천 권의 신약성경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신앙서적과 소책자들이 배포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역들이 정직하지 못한 중국인 사역자들이 꾸며 낸 속임수였고 그의 명성은 훼손되었다. 그의 선교적 노력에 의해 중국복음화선교회가 조직되었으며 이 선교회는 1853년 허드슨 테일러를 중국에 파송하게 되는데 사실 구츨라프는 젊은 테일러가 선교의 방법과 목표를 설정하는 데 다른 누구보다도 더 큰 영향을 주었으며 후에 테일러는 그를 “중국내륙선교의 조부”라고 불렀다. |
데이빗 리빙스턴 (David Livingstone, 1817-1873) 선교역사에 있어 빠뜨려서는 안되는 이가 바로 데이빗 리빙스턴이다. 그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가 꼭 필요로 했던 영웅이었으며 아프리카선교에 불을 당긴 사람이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힐 정도로 확고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20세기 중반까지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를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여겼다. 1세기 이상 그는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최고의 영웅이었으며 헌신과 충성의 화신으로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도전을 주었다. 그가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가장 큰 공헌을 했다는 점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으나 선교사역 자체에 얼만큼의 결실을 맺었는가에 대해서는 비판할 점이 없지 않다. 리빙스턴은 사실 그의 많은 전기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위대한 성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소심한데다가 변덕이 심한 사람이었으며 이런 점 때문에 선교사역에 많은 곤란을 겪었다. 그러나 이런 약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아프리카 선교에 집중시킨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신 사람이었다. 리빙스턴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심적 충격을 주었고 선교의 열풍이 온 나라를 휩쓸기 시작했으며 선교에 대한 희생의 대가가 무엇이든간에 헌신하겠다는 젊은 남녀의 무리가 줄을 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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죤 게디 (John Geddie, 1815-1872) ‘태평양의 사도’라고 불리웠던 죤 윌리암스의 비극적인 죽음 후 수십명의 청년들이 그의 뒤를 잇겠다고 헌신하였다. 그중에서 ‘완고하고 유머가 전혀 없으며 단순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용감한 선교사’로 표현되는 게디는 노바 스코티아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면서부터 당시 인기를 얻었던 남태평양 선교에 대한 헌신의 마음을 가졌다. 1848년 그는 아내와 함께 뉴헤브리드즈의 섬들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안네이티움섬으로 가서 성경을 번역하고 복음을 전하며 원주민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했다. 그는 사역에 아주 뛰어났기 때문에 그 섬 주민 거의 전체가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의 비석에는 ‘그가 1848년 첫발을 내디뎠을 때 이 섬에는 단 한 사람의 기독교인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1872년 이 섬을 떠날 때에는 단 한 사람의 불신자도 없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죤 패튼 (John G. Paton, 1824-1906) 스코트랜드 태생인 죤 패튼은 남태평양에서 사역하였다. 뉴헤브리디즈의 아니와라는 작은 섬에서 두 번째 사역에서 많은 원주민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으며 원주민 기독교인들의 도움을 받아 2개의 고아원과 부흥이 계속되는 교회 및 여러 학교들을 세웠다. 개종한 추장의 후원으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패튼은 청교도적인 엄격한 법률을 만들어 섬 주민 모두가 이를 따르게 했다. 패튼은 말년에 선교지도자로서 호주, 영국, 미국을m방문하여 자금을 조달하고 뉴헤브리디즈에서 필요한 선교사를 헌신시키는 일을 주로 하였다. 그래서 19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30명 정도를 제외한 모든 주민들이 복음을 받아들였고 원주민 사역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학교가 세워져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부하였으며 24명의 선교사가 그들의 아내들과 더불어 봉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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죤 콜러릿지 패터슨 (John Coleridge Patterson, 1827-1871) 죤 콜러릿지 패터슨은 멜라네시아 최초의 성공회 주교였고 영국의 유명한 시인인 사무엘 테일러 콜러릿지의 조카로 영국의 명문집안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였다. 멜라네시아 주교직을 제수받고 그는 선교선을 타고 여러 섬을 돌며 자원하는 소년들을 모아 뉴질랜드로 데려와 훈련시켜 고향에 돌려보내 독자적으로 복음사역을 하게 하였다. 동시에 그는 여러 섬의 주민들과 추장들과 우호관계를 맺어 그들의 신뢰를 받았다. 하지만 노예상인들의 출현으로 그의 사역은 타격을 입고 결국 노예상으로 오인되어 화살을 맞고 숨졌다. 패터슨의 죽음의 소식은 노예상들의 비열한 행위에 세상의 주위를 끌게되어 마침내 노예밀매는 근절되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남태평양의 선교에 헌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
허드슨 테일러 (Hudson Taylor, 1832-1905) 사도 바울 이후 19세기 선교사들 중 큰 비젼을 갖고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방대한 지역을 복음화시킨 사람으로 영국출신의 허드슨 테일러는 능가하는 인물은 없다. 중국내륙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는 그가 독창적으로 만들었으며 그의 생전에만도 800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사역하였고 훗날 후원자 없는 독립선교(Faith Mission)의 모형이 되었다. 1853년 21세의 나이로 중국복음화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중국 상해로 머물다가 사치스런 선교사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개신교 선교사들이 가본 적 없는 내륙으로 들어가 사역하기 시작하였고 1865년 그의 선교경험과 성격이 반영되어진 중국내륙선교회가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테일러는 지식인들과 정식목회자들로서는 중국복음화가 요원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영국의 노동자들 중 헌신된 남녀일군들을 모집하였다. 그것을 통해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른 선교단체들과 쓸데없는 경쟁을 피하고 선교노력을 극대화 할 수 있었다. 재정지원과 개인후원의 문제에서 선교회는 정규적인 봉급을 약속하지 않고 자신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만 의지하게 하였다. 허드슨 테일러가 기독교 선교에 끼친 공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의 통찰력과 비젼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날 기독교 선교가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 의문이다. |
샬롯(로티) 딕스 문 (Charlotte Lottie Diggs Moon, 1840-1912) 침례교선교의 “수호성인”이라고 불리는 로티는 해외 선교사로 헌신한 첫 번째의 여성은 아니었지만 여자로서 큰 성공을 거둔 첫 번째 여성선교사였다. 버지니아 태생의 로티는 동생을 따라 중국 선교사로 떠났가 동생 귀환 후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여성선교사들에게 하찮은 일만 맡기는 선교풍토에 반기를 들고 핑투라는 지역에서 개척사역을 시작하였다 어려움 중 교회는 꾸준히 성장, 20년 내에 중국인 목사에 의해 천명 이상이 침례를 받았으며 핑투는 중국전역에서 남침례교 최대의 선교중심지가 되었다. 로티는 저술과 본국에서의 설교등을 통해 미국 남부의 많은 침례교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또 여성들에 의해서만 선교자금으로 쓰여질 크리스마스 특별헌금을 기획하였고 남자 선교사들이 사직함에 따라 비게 된 자리를 맡기 위한 여성들을 모집하였는데 그 결과는 엄청난 호응이었다. 로티의 사후에도 계속 로티 문 크리스마스 헌금은 증가하였고 그녀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여러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
플로렌스 영 (Florence Young)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의 토박이인 플로렌스는 남태평양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영적복지를 위해 일하겠다고 표명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플리머스형제단((Plymough Brethren)에 속한 그녀는 하루 12시간 이상씩 사탕수수를 베는 살인적인 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여 농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사역이 커져갔다. 1890년 중국선교의 소명을 느끼고 10년간 중국에서 사역하다 돌아오자 노예매매와 강제노동이 금지되어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플로렌스와 그의 동역자들은 귀향하는 노동자들을 따라가 솔로몬 제도의 각 섬에서 귀향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웠다. 1907년 선교회는 남태평양복음선교회로 명칭을 바꾸고 그녀의 친척들과 솔로몬 제도를 위한 선교사역에 헌신하여 생동감있는 복음주의 교회가 뿌리를 내리게 되어 지금도 계속 부흥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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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찰머스 (James Chalmers, 1841-1901) 뉴기니아에서 사역했던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 중 하나가 제임스 찰머스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출신으로 1866년 부인 제인과 함께 런던선교사 파송으로 남태평양의 라로통가에서 10동안 사역하였지만 만족치 못하고 뉴기니아로 들어가 원주민들과 함께하면서 실천하는 사랑으로 효과적인 선교사역을 하였다. 그가 그 섬에 들어간지 5년이 지났을 때 사람을 잡아먹는 일도, 축제나 살인도 사람 해골을 가지고자 하는 욕망도 모두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원주민은 진실함을 가지고 일하는 챨머스를 사랑했으며 그에 대한 소문을 널리 퍼뜨렸다. 복음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열정으로 그는 젊은 동역자와 사나운 식인종 지역으로 알려진 플라이강 유역을 탐사하다 창에 찔려 숨지고 갈기갈기 찢겨 식인종에게 잡혀 먹었다는 소식을 남긴 채 실종되었다. |
헨리 스탠리 (Henry M. Stanley, 1841) 사생아로 태어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뉴욕 헤럴드지의 기자가 되어 1871년 데이빗 리빙스턴을 찾기 위해 아프리카로 급파된 헨리 스탠리는 그곳에서 4개월을 지내고 와 “나는 리빙스턴을 어떻게 찾았는가”라는 책을 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리빙스턴이 죽은 지 1년 후 그는 아프리카 탐험을 떠났는데 스탠리는 자신을 탐험가이자 무소속 선교사로 생각했다. 선교에 대한 그의 가장 큰 공헌은 데일리 텔레그라프지에 게재한 한 편지로써 그것을 통하여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일생동안 했던 것보다 더 많은 선교일꾼을 헌신하게 만들었다. 몸바사로부터 콩고강 어귀까지 아프리카를 횡단하는 999일간의 탐험은 전세계를 자극하여 검은 대륙에 선교사를 보내는 촉진제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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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 심슨 (A.B. Simpson, 1843-1919) 국제적 선교사단체인 기독교인-선교사연합회(Christian and Missioanry Alliance: C&MA)의 창설자인 심슨은 실제 선교사로 활약한 적은 없지만 선교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 선교회들은 그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설교에 탁월한 목회자로 사역하던 슨은 환상속에 선교사의 부르심을 받고 몇 달동안 선교의 문이 열리도록 노력했으나 그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가 선교사로 헌신하는데 최대의 장애는 아내 마가렛과 6명의 아이들이었다. 교회를 사임한 그는 세계선교에 전적으로 헌신된 교회를 만드는 목표로 뉴욕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1887년 선교에 관심이 많은 신앙인들의 힘을 한곳으로 모으기 위한 기독교인연합(Christian Alliance)를 조직했고, 그 연합회가 더욱 발전하여 새로운 선교회인 복음주의선교사연합회가 창립되었다. 이 두 단체는 10년 후 1897년 기독교인-선교사연합회(C&MA)로 통합되었다. 심슨이 세상을 떠날때쯤에는 모든 대륙에서 C&MA 선교사들이 활약하였고 1919년 그가 세운 선교사학교가 뉴욕 나약에 기반을 잡았다. 그가 세운 선교사훈련학교를 본받아 북미 각처에 성경학교 붐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학교들은 그 후 수십년 동안 독립적인 믿음선교회를 형성하는 주된 원천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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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늘날 급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정치,경제,문화가 사회 구조와 방식이 급변한 상황 하에서 한국교회는 변화하는 선교지 실정을 자세히 연구하여 이 시대에 맞는 선교전략을 창조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현대 개신교 선교의 근원지는 유럽과 미국이라 할 수 있다."현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William Carey가 영국을 떠나 1792년에 India, Calcutta에 도착하여 선교 운동을 시작하였고 그후에 Robert Morrison은 중국남부로 (1809),Judson Taylor는 중국대륙으로 (1865),Adoniram Judson은 버마로(1813),Divid Livingston은 아프리카로 (1841),그외에도 수많은 서양의 선교사들이 복음 사역자로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서양 식민지 세력의 물결을 타고 선진국가의 풍부한 교육, 기술 재정을 바탕으로 선교운동을 하였기 때문에 후진국가들은 이들에게 많은 것들을 기대하고 의존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선교지 원주민들의 교육,문호,경제의 질적 성장으로 인해 선교사와 원주민들 간의 관계가 의존적인 것이 아닌 이전과는 다른 상호 동등한 입장이라는 동반자 개념이 되었다. 요약한다면,유럽 Portugal의 Vasco da Gama가 남아프리카의 Cape Town을 1498년 처음으로 발견한 이후 제2차 세계대전까지는 Vasco de Gama시대 (서구 식민지 시대,1498-1945)로 칭해지는 시기로써 이 시기에는 주로 서양인이 제3세계인을 지배하는 형태의 선교전략을 볼 수 있다. 그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는 100여개의 국가들이 식민지로부터 독립해 자유국가로서 자발적인 정책을 쓰고 있는데 오늘날 제3세계국가에 찾아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특징은 자국의 전통문화를 부흥시키려는 운동이다. 예를 들면, 대만의 거리에서는 "중국문화 부흥운동"이라는 커다란 간판들이 어디서나 흔히 눈에 띄이고 정부에서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매스콤을 통해 전통문화를 강조하고 있다. 불교,유교,도교를 함께 중국 전통종교로 강조하는 반면, 기독교를 서양인의 종교로 내몰고 선교사들의 입국과 선교 활동에 규제를 가하는 정책을 쓰기도 한다. 서양의 기술은 받아드리되, 자국의 전통문화를 지키자는 주장인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선교지의 실정을 잘 파악하고 연구하여 각 지역에 적합한 선교정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특히 한국교회가 동양인으로서 아시아 뿐 아니라 아프리카, 남미, 유럽,북미에까지 선교사를 파송하여 선교운동을 전개해야 하는 이때에 세계 선교에 대한 책임을 다시한번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지구상의 위도 10도로부터 40도 사이의 지역을 창문을 통해 들여다 보면 그곳에서 62개 국가를 찾아볼 수 있는데 그 국가들에 살고 있는 인구는 전세계 인구 53억의 거의 2/3을 차지한다. 그러면 10도/40도 창 내에 살고 있는 막대한 인구와 한국교회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한국교회는 교회사적으로 볼 때 초창기부터 선교에 관심이 많은 교회였다. 특별히 1970년대로부터 한국교회는 외국선교에 비중을 두고 현재 1700여명이 가까운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이러한 선교운동은 한국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아시아의 많은 국가에서도 전개되고 있다. 1990년 8월에 충현교회에서 열렸던 아시아 선교대회(Asia Missions Congress)에서는 한국인 100명을 포함, 1,300명이 참석하여 "세계 선교는 아시아의 도전"(World Mission The Asina Challenge)이라는 주제하에, 이전의 서방교회 선교사들이 했던 일을 이제는 전세계 복음화를 위해 아시아의 선교사를 세계 각지에 파송하자고 결의하였다.
기독교는 세계 4대 종교의 하나이며 힌두교, 불교,이슬람교보다도 더 많은 신자를 가지고 있다. 세계 인구 53억의 32%를 차지하는 기독교인의 대다수가 10도/40도 창내의 62개국에 살고 있는데 비율로 말하면 전세계 인구의 거의 2/3가 되는 것이다. 또 31억 인구 가운데 97%가 55개국의 비기독교 국가이다. 미국의 선교학자 Luis Bush박사는 10도/40도 window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 창내의 지역은 비기독교 국가 지역으로서 기독교에 심각한 도전을 던져 주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최초로 복음화 된 지역, 10도/40도 창내에는 4개의 대그룹이 있다. 첫째로 이슬람국가 28개국에 7억 6백만이 이슬람신도(10도/40도 창내 인구 31억 4천만 중 22%)가 있고 둘째로 2개의 힌두교국가(인도,네팔)에 7억 천 칠백만의 힌두교인(23%),세째로 10개의 불교국가에 약 3억의 불교인(10%)이 있으며 네째로 6개의 공산국가에 12억(38%)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다. 이 10도/40도 창내의 비기독교국가들은 1945년 이후 각기 "국가의 전통문화 부흥"이라는 명칭을 걸고 막대한 비용을 소비하면서 매스컴을 통해 전통문화 부흥운동을 강조하는 동시에 전통 종교를 강조하고 있다. 이 10도/40도 창내의 많은 비기독교 국가들은 선교사수를 \'b0㉫老求?정책을 시행했을 뿐 아니라 선교사들의 사역을 제한하는 경우가 많았었고, 그 국내 교회와 기독교인을 억제하며 교회 성장 활동을 용납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한국선교의 대비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한국교회의 선교운동은 앞으로 특히 10도/40도창내의 비기독교인을 상대로 열심을 다해야 할 것이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10도/40도 창내의 비기독교인에 대한 새로운 선교정책을 창조해야 할 것이다. 10도/40도창내 국가들의 실정을 먼저 충분히 연구하며 앞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데에도 다양한 형태의 선교사, 즉 신학교를 졸업한 professional 선교사, 직업 선교사, 학생선교사들이 다종의 선교활동을 통하여 선교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10도/40도 창내의 국가는 사탄의 영력이 강한 지역으로 인간의 수단과 방법만으로는 복음이 들어가기 어려운,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필요한 지역임을 더불어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선교사가 외국에서 선교하는데 VISA는 필수적으로 요구되는데 특별히 아시아의 선교지들을 볼때 외국 선교사의 VISA규제정책을 채택하는 나라들이 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선교사들의 VISA 규제 문제는 3개 지역으로 구분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선교사 VISA 를 받기가 상당히 어려운 나라로서 인도, 파키스탄,방글라데시,스리랑카,싱가폴,말레이지아,버마,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북한 등이 있다.
둘째로 선교사 VISA가 나오지만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 나라로서 인도네시아,태국을 들 수 있다.
셋째로 VISA얻기가 그리 어렵지 않은나라들로서 필리핀,홍콩,대만,한국,일본을 들 수 있다. 각국의 상황을 고려하여 특별히 VISA획득이 어려운 지역에서는 직업선교, 의료선교 등의 방법을 통한 선교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공산주의 무너지게 됨에 따라 동구라파의 전국가들이 민주화를 향한 변화에로 나아가 종교의 자유를 회복해 가는 이때에 우리에게는 해외선교를 위한 또 하나의 가능성이라는 기회가 주어졌다.
또 현재 중국대륙에서는 12억 인구를 대상으로 하는 선교운동의 여러가지 가능성들이 보여지고 또 들려지고 있다. 아직은 선교사라는 명칭으로 중국대륙의 입국이 불가능하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는 많이 있으며 이 나라에서 역시 빠른 시일내에 민주화와 종교자유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교회는 특별히 동구권의 나라들과 중공을 비롯한 타 공산권국가를 향한 선교운동을 강력히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한가지 방면으로만 선교할 수 있는 나라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 반면 선교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나라들의 수가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이에 대한 한국교회의 적절한 선교전략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1974년부터 1990년까지 지난 15년동안 싱가폴,대만 지역에서 아시아 신학협의회(ATA) 의 총무로 일하면서 Asia Theological News라는 잡지를 매3개월 출간했는데 한번은 이 잡지에서 아시아교회의 근본적인 문제라는 주제로 아시아 11개국 교회 지도자들에게 4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예를들면 당신 나라의 교회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이 무엇입니까? 또 이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방안은 무엇입니까? 등의 질문이었다. 11개국의 교회들로부터 받은 답변을 종합한 결과 7개의 근본적인 문제점 및 그 해결방안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1. 아시아의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전도의 열정을 더욱 강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아시아는 다른 대륙과는 달리 기독교의 역사가 짧고 필리핀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이 기독교 문화적인 옇양이 쇠약한 대륙이기 때문에 아직도 대다수의 아시아인이 복음의 메세지를 들어보지 못한 실정이며 또 아시아에는 정통종교의 영향이 상당히 강하므로 여타 종교들의 압력이 크다. 이런 상황하에서 전도를 남에게 미룰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언어행동 하나에도 심혈을 기울여 최선을 다 해야할 것이다.
2. 아시아의 교회 성장을 각 곳에서 볼 수 있으나 이 성장하는 교회들을 돌보아 줄 수 있는 목회자의 수가 적다는 것이다. 즉 교역자 빈곤난을 의미한다. 한국 내에서는 180여개의 신학교와 수만명의 신학생들이 있으므로 매년 3000명 이상의 졸업생을 배출하여 교회에 필요한 교역자를 충원할 수 있으나 아시아 타국교회의 상황은 우리와 상당히 다르다. 예를들면 현재 대만 2500교회 가운데 목회자가 없는 교회는 약 500개가 된다. 또 태국에서 제일 큰 교파인 태국 그리스도 연합교회는 263 교회에 목회자수가 68명뿐이다. 졸업생들에게 목회자로 헌신할 수 있도록 권면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3. 평신도 제자훈련이 긴급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현대에 와서 평신도의 사회적 위치가 중요하게 되었고 그들 자신 또한 성경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자 하므로 교회지도자들은 평신도 제자훈련에 대한 관심을 높일 뿐더러 좋은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4.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에 아시아 상황에 적합한 여러가지 방법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양선교사로부터 받아들인 그들 풍속의 기독교를 아시아 상황에 맞게 새로운 프로그램을 창조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한국교회의 새벽기도와 철야기도,기도원은 외국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한국적인 상황에서 일어난 기독교의 특징이라고 할 것이다.이와같은 상황에서 창조할 수 있는 신앙의 표현들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5. 신학적이 문제가 인본주의신학자들의 영향을 말미암아 아시아교회에 큰 도전을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이 주동이 되어 강조해 온 인권주의(Human Rights),한국의 민중신학을 포함하여 나날이 늘어가고 있는 아시아신학(Asian Theology),타종교와의 관계성을 맺는 종교다윈주의 신학들이 아시아 신학 토론에 큰 주제들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 하에서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정통으로 이어받을 보수신학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6. 아시아교회는 인간의 영위 세계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크리스챤의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불법,정치적인 압력,늘어만가는 빈부의 격차,사회불공평제도,도덕문란 등의 문제들을 성경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운동이 필요하다.
7.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무엇보다도 교회 내 자신들의 신앙 갱신문제라는 것이다. 기독자의 신앙과 행동이 일치되는 생활에서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죄악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비록 소수의 아시아 기독교인이지만 그들이 신앙갱신을 통하여 비기독교적인 사회에 커다란 영적인 도전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새로운 갱신을 경험할 때 더 큰 성장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주후 2000년을 맞이하는 현대에 있어서 선교전략은 지난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것과는 다른 현실에 맞는 새로운 방법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아시아를 예로 든다면 전대륙 30억 인구중 기독교인이 단지 3%에 지나지 않는 이 세계 최대 대륙에서 나머지 97%의 비기독교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현대선교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각 나라 교회들이 외국선교사들의 재력이나 선교헌금에 의지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목회자나 평신도지도자들을 훈련시켜 그들로 하여금 자국복음화 운동에 적극 참여토록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21세기를 향한 현대선교전략은 다음 세가지면에서 살펴 볼 수 있다.
1. 자국민들을 향한 복음전파와 평신도제자훈련을 바로 자국내 기독교인들이 근본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2.제3세게 내에서 성장하고 있는 교회들을 교회 성장학적인 면에서 분석해 볼 때 성장의 주된 요인 중 하나를 성령충만한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의역할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런 이유에서 현대 선교사역의 우선적인 전략은 자국민 지도자 양성에 있다고 하겠다. 이들에게 교육을 시킨 후 책임을 부여하여 이들이 주의 사업에 전념케 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3.각 나라 교회 지도자들을 교육시키는데 있어 그들을 그들 대륙 안에서 교육시킬 장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시아안은 아시아에서 교육시키자"라는 운동이 아시아신학협의회 (Asia Theologica Association)를 통해 수년간 강조 되어왔는데 그 주된 이유는 이런 방식의 교육이 아시아 상황에 맞는 신학교육을 제공할 수 있으며 서양국가보다 훨씬 싼 학비, 숙비로 경비 절감이 가능하며 또 아시아의 신학생들이 서양에서 공부한 후 본국에 돌아가지않고 그곳에 계속 유하는 인재상실(Brain Drain)을 막을 수 있기에 더 많은 교역자 배출이 가능하다는 이유에서이다.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과 교회 신앙 갱신에 관한 보고는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바이다. 특히 1980년대의 세계교회의 관심은 미국이나 유럽 교회가 아닌 한국교회에 있었으며 아직도 상당한 영적인 기대가 이 한국교회를 향하고 있다. 기독교인 수가 전세계적인 비율로 볼때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니고 경제력도 선진국과 비교해 볼 때는 떨어지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 한국교회가 타국교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마치 사도행전 3장에 기록한 바와 같이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 갔었을때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구걸할 때에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내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글어라"하고 그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게 한 것처럼 한국교회가 비록 많은 금과 은으로 타국교회를 도울수는 없을지라도 나사렛 예수와 성령이 한국교회에 베푼 충만한 은혜를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타국교회로부터 칭찬받고 있는 부분은 여러 영역이나 그 가운데서도 특히 다음 2가지 면은 그 특징으로 강조할 수 있는데 이는 타국 교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서 그들이 한국교회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들이라 본다.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에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특이하고 중요한 것은 새벽기도이다. 새벽기도는 1920년대 초 일제치하에서 핍박받고 있던 한국교회가 그 어려움의 상황 하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새벽마다 기도한 것이 기원이 되었으며 길선주 목사를 중심으로 이 새벽기도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현재 서울 명성교회(김삼환 목사)에서는 평상시 매일 새벽 4,000여명이 모여 기도하고 있으며 특히 새벽기도의 달(4월,9월)에는 만여명이 넘는 교인들이 오전 5시,6시,9시 3차례에 걸쳐 새벽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데 이는 전세게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국교회만이 특징이다.
충현교회에선느 이미 2차례에 걸친 KIMCHI(Korea Institute for Mission and Church Growth international) 세미나 기간 동안 작년 11월에는 동구권 7개국에서 온 29명의 목회자들과 또 금년 5월에는 동남아시아에서 온 65명의 중국교회 교역자들과 10일간의 신앙갱신 세미나가 있었는데 이들 외국손님들은 충현교회의 새벽기도회에 참석한 4-5천명의 신자들과 함께 기도회에 참석하면서 자신드의 신앙에 적지않은 충격을 받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에 몇몇 목회자들이 홍콩,마닐라에서 새벽기도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는것을 들었다. 이와같은 새벽기도, 철야기도,기도원 운동등의 외국교회로 수출할 수 있는 한국교회의 출산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교역자가 풍부하기로 유명하다. 170여개나 되는 신학교에 수만명의 신학생들이 있으며 매년 수천명의 신학교 졸업생이 배출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학구적이고 실천적이며 신앙생활을 겸비한 신학교육이 선교지에서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한국의 많은 대학졸업자들이 신학교에 진학한다는 사실은 한국교회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다. 방콕이나 마닐라에서는 한국선교사들이 합심하여 신학교를 세워 교회 사역에 적합한 교역자 양성 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러한 운동은 타선교지에서도 계속 일어나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선교에 열정을 가지고 많은 교회들이 선교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선교에의 열정은 좋은 것이나 거기에 좋은 선교 방법과 전략이 따르지 않을 때는 여러가지로 비효율적인 결과가 될 것임을 명심하여 한국교회는 적합한 선교전략을 창조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한국교회 선교전략 10계명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1.세계 복음화를 위한 한국교회의 근본적인 선교전략을 한국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신앙의 요소를 통해 전세게적인 신앙갱신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데 있다.
2. 한국교회에서 대학생,평신도,교역자,선교사들을 가능한 한 많이 계속 파송해야 한다.
3. 외국의 교회지도자(교역자,평신도 지도자)들을 한국에 초청하여 단기간, 장기간에 걸쳐 교회성장과 신앙갱신운동을 성서적으로 가르쳐주며 그들에게 한국교회를 깊이 연구하며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4. 한국이 세계 선진국이 되기 위하여 국제화가 필요한 것 같아 한국교회도 선교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화가 필요하다.
5. 한국교회 선교는 각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는 원주민 교역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을 양성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6. 한국교회 선교는 독단적인 태도를 벗어나 선교지 원주민 교회와 다른 해외 선교단체들과 긴밀한 동반자 관계를 맺고 협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7. 한국교회 선교의 특징은 개교회 중심의 선교운동이 되어 왔으므로 선교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을 관할하기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으므로 앞으로는 국내 선교단체들과 선교지 선교사들 간의 연합운동을 일으켜 더 효과적인 선교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8. 한국선교사 자녀교육과 선교사 계속 교육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한국교회는 과거의 선교운동을 다시 회고하며 더 깊은 연구를 통하여 새로운 방안을 창조해야 한다.
9. 한국 내에 세계 선교 연구원들을 설치하여 지역별로 선교지의 실정과 선교정책을 철저히 연구하는 동시에 선교자료를 공급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각 지역 상황에 맞는 선교정책을 채택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의료선교,직업선교,단장기간선교 등의 필요성을 연구하는 것이다.
10.한국내의 많은 선교단체들 간 협조운동을 조성하기 위하여 한국세계선교협의회 같은 선교연합기관의 역할을 확대시켜 선교연합운동을 촉진시켜야 한다. 미국의 Interdenominational Foreign Mission Association (IFMA)과 Evangelical Foreign Mission Association(EFMA)를 좋은 예로 볼 수 있다.
필자는 세계복음주의 협의회 신학분과 위원회의 총무직을 맡고 있는 까닭에 매년 3개월 내지 4개월 동안은 외국의 신학교를 방문하여 각 대륙에서 열리는 신학자회의에 참석하고 있으며 수많은 복음주의 교회지도자 및 신학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많은 회의들에 참석하는 동안 필자는 한국에서 왔다는 이유로 외국교회 지도자들 및 평신도 지도자들로부터 한국교회에 대한 질문을 여러차례 받았었는데,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반면 또 적지않은 수의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비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난 4월에는 Yugoslavia,Osejik시에 있는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복음주의 선교신학자들의 모임에 참석한 바 있는데 이 모임에는 세계 6대륙에서 90여명의 교역자, 신학자,선교학자들이 참석하여 "교회와 정부가 유지할 정의와 평화"라는 주제하에 토론을 벌였다. 이 모임에 참석한 동안 필자는 필리핀의 한 교회 여지도자가 마닐라에 거주하고 있는 백여명의 한국선교사들을 향해 던지는비난을 듣게 되었다. "그들은 한국교회가 필리핀교회보다 모든 면에서 우수하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사역에 있어서도 필리핀교회와 상의없이 자기나름대로 한국방식으로 선교를 하려 하기에 필리핀교회에 도움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피해를 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필자 자신이 상당한 충격과 더불어 슬픈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물론 마닐라에서 선교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선교사들이 모두 다 꼭 이런 비난에 대상이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왜 필리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했을까 하는 질문이 생기게 되었다.
지난 7월 중순에는 세계도처에서 60여명의 신학자들이 모였던 영국 런던바이블 칼리지에서의 국제신학교 인준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f Accrediting Agencies)에 필자역시 참석하였는데 여기서 필자는 오스탈리아 신학교 협의회 총무이자 신학교 학장을 맡고있는 한사람으로부터 "한국 교회가 근대에 급속도로 성장한 것은 좋았으나 제 자신이 볼 때는 그들이 세게에서 제일 나쁜 식민지 정책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는 평을 듣게 되었다.
이 두사람 외에도 타국교회 지도자들로부터 한국교회에 대한 비난의 소리를 여러번 득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필자는 내심 한국교회가 앞으로 세계 교회에 영적인 은혜를 베풀며 지도자적인 역할을 감당하려면 새로운 반성과 각오하에 타교회를 섬길 수 있는 종의 자세를 가져야함을 절실히 느꼈다. 타국의 기독교인들이 성장하는 한국교회로부터 은혜의 감격을 얻지 못할 때 그들은 한국교회만큼 성장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교회를 바라보며 열등감을 가질 수 있으며 또 그들로하여금 한국교회의 성장원인이 영적인 차원이 아닌 세속적인 차원에 있는 것으로 해석케 하는 결과를 빚을 것이다.
물론 1970년대와 1980년대의 한국교회의 영적부흥과 수적증가는 세계 교회에 자랑할 만한 것이다. 한국대학생선교회 김준곤 목사님의 통계에 의하면 1980년대초의 한국교회 성장비율은 매일 여섯개의 교회가 생겨나는 것이었으며 현재 한국의 교회수는 3,600이 넘으며 기독교인수는 전인구의 29%을 차지하는 천만이 되는 숫자이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만 하더라도 단일교회로서 60만이 넘는 교인이 있으며 신학교의 수는 180개가 넘고 매년 수천명의 신학생들이 이들 신학교에서 배출되고 있으며 1600여명의 선교사들을 전세계에 파송하고 있다. 특히 한국교회의 새벽기도,철야기도,기도원 등의 성령의 역사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 모든 것이 한국교회의 영적인 보배이며 자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꼭 기억해야할 것은 교회의 수적 증가나 대교회건물, 거액의 헌금, 수많은 신학교와 수만명의 신학생, 외국선교, 새벽기도, 기도원 등을 자랑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축복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섬기는 그리스도의 종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에 각국에서 찾아오는 외국교인들이 영적인 은혜와 감동을 받을 것이며 한국교회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주었던 교훈,"내가 그리스도아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말씀이 한국교회에 들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내생의 주인공이 된다는 말로 이렇게 될때 그리스도께서 새로운생의 각오와 사명을 주시고 모든 일에 축복을 내리신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가 겉모습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높일 때 우리는 더 많은 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을뿐 아니라 외국교회에도 은혜를 끼치며 그들로하여금 힘을 얻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외국교회의 한국교회에 대한 관심이 우리 교회의 외적인 숫자 증가나 겉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기독인들의 생활 속에 드러나는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관계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자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며 이런 모습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바이다.
서론에서도 말했듯이 한국민족은 21세기로 향하는 이 시대에 세계복음화를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민족이다. 따라서 한국교회 선교운동은 세계 복음화를 위할 뿐만 아니라 세계 선교 비젼을 통한 국내교회의 신앙 갱신 운동과 교회성장에 큰 원동력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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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헨대학원 강신권 원장은 세계 153개국에 신학교를 세우겠다는 꿈을 가슴에 품고 사역에 매진하고 있다. ⓒ최우철 기자 |
세계 153개 나라에 신학교를 세우는 ‘비전 153’은 미국 남가주 토렌스에 위치한 코헨대학교가 30년 전부터 추진해 온 거대한 선교프로젝트다. 요한복음 21장에 근거한 이 ‘비전 153’ 프로젝트는 세계 153개 나라 현지에 신학교를 세우고 이 신학교 주변의 10개 도시에 분교를 세워 총 1530개 신학교를 세계 각지의 선교 전초기지로 삼는 것이 그 주 내용이다. 목표를 절반 가량 이룬 현재 강신권 박사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지난 30년간 이룬 75개 나라의 신학교 개척도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었다. 때때로 난관에 부딪혀가며 온 길이지만 개척 과정에서 체험한 세계선교의 큰 가능성들은 늘 마음을 새롭게 한다.
최근 다녀온 인도네시아는 전 국민의 85%가 무슬림인 대표적인 이슬람 국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슬림 학생들이 기독교학교에서 단체로 세례를 받는 등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 코헨대학교의 ‘비전 153’을 위해 인도네시아에서 협력하고 있는 교회는 1만6천명이 출석하고 있는 스므랑교회다. 이곳을 담임하고 있는 빼뚜루스 아궁 목사는 영혼구원과 사회구원을 늘 함께 강조하는데 실제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한 사역으로 거의 매일 2만 명에게 무료급식을 제공하고 있고 이러한 사역에 무슬림들은 큰 감명을 받고 있다.
이러한 영향으로 코헨대학교가 관계하는 현지 초·중·고 학교에는 30%에 달하는 2천여명이 무슬림이다. 무슬림 자녀는 기독교학교로 절대 보내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영혼구원 사역과 함께 사회구원에도 앞장서서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 모습에 무슬림조차 감명을 받고 기독교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무슬림 부모들의 동의하에 1천여명의 학생들이 세례를 받는 일도 있었다. 강신권 박사가 ‘비전 153’ 프로젝트를 위해 현지 스므랑교회 머물 당시 자카르타 수도경비사령관이 직접 찾아와 세계선교 비전에 대해 함께 공감하며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강신권 박사는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큰 변화를 주목하고 20개 무슬림 국가에 현지 신학교를 세우고 가까운 시일 내에 인도네시아에 국제센터를 세워 무슬림 국가를 기점으로 하는 선교의 기틀을 마련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비전 153’ 프로젝트는 사람을 남기는 사역
강신권 박사는 ‘비전 153’ 프로젝트 중요성과 관련, 현지 선교사들의 신학교육을 강조했다. 실제로 인도네시아의 경우 현지 선교사들은 더 이상의 신학교육을 공급받지 못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다. 이에 그 나라에 신학교를 세우고 선교사들에게 연장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비전 153’ 프로젝트의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하다. 현재 인도네시아 선교사 20여명이 박사원 과정에 있다.
‘비전 153’ 프로젝트는 각 나라 현지인을 통해서만 선교한다는 원칙을 매우 중시하고 있다. 그 나라의 선교사들이 ‘비전 153’ 프로젝트로 세워진 신학교를 졸업하고, 이들은 또 주변 거점도시에 교회와 신학교를 10개 이상 세우며 현지 선교의 영역이 더욱 확대돼 나가는 것이다. 이에 강신권 박사는 코헨대학교의 ‘비전 153’ 프로젝트에 대해 “사람을 얻고 길러서 사람을 남기는 사역”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때문에 코헨대학교는 ‘비전 153’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양성되는 현지 선교사에 대해서는 신학교육비 100% 장학금 혜택을 주고 있다.
‘비전 153’ 프로젝트는 (롬 11:36), (행 1:8) 말씀에 입각해 세계선교의 큰 목표를 갖고 시작됐다. 마태복음 28장과 마가복음 16장은 제4세계를 선교하는 ‘비전 153’ 프로젝트를 뒷받침해주는 성경말씀이다. 강신권 박사는 특히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구절을 강조했다. 이미 선교의 발판이 마련돼 있는 제3세계에서도 눈을 돌려 제4세계의 척박한 땅을 개척하려는 ‘비전 153’ 프로젝트는 이러한 철저한 주권사상 아래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이에 더 나아가 강신권 박사는 ‘비전 153’ 프로젝트의 마지막 목표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세계 153개국에 현지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선교의 기틀이 모두 마련됐을 때 한국의 인천지역에 기독교UN을 세워 세계선교의 구심역할을 담당하게 한다는 것이다. 각 나라의 대표가 1년에 한 차례 모여 각 나라에서의 선교평가를 발표하고, 다양한 선교전략도 함께 세우며 각 나라의 문화페스티벌도 개최하는 등 세계선교의 총본부 역할을 하는 기독교UN이 세워진다면 ‘비전 153’ 프로젝트는 어떠한 의미에서 그 목적을 모두 달성한 것이다. 이에 강신권 박사는 “기독교 UN을 세우기 위해서는 각 나라에 인재가 필요하다”며 “세계 복음화의 큰 포부를 지닌 비전리더 1백만명을 양성하는 것이 목표”라며 밝혔다.
강신권 박사는 최근 무슬림의 전략적인 한국진출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실제로 이슬람 전문가에 따르면 현재 무슬림의 전략적 선교 방법 가운데는 1년에 2천명의 한국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는 것을 알려져 있다. 이들이 결혼하면 당분간 자녀의 종교에 대해서는 언급은 하지 않은 채 지내다가 아이가 성장할 때 다양한 방법을 통해 무슬림으로 성장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강신권 박사는 이러한 가운데 오히려 무슬림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비전 153’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사례는 중요한 모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융합신학으로 기독교는 더 비약할 수 있다”
▲강신권 박사는 히브리적 융합사고가 성경주석을 더욱 깊이 할 수 있는 활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우철 기자 |
강신권 박사가 몸담고 있는 코헨대학교는 기존의 정통신학 기반 위에 융합신학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코헨대학교 총장인 게리 코헨 박사는 유대인 크리스천으로, 유대인 아론 제사장의 후손인 그가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세운 학교가 코헨대학교다. 대학교 이름 중 ‘코헨’은 바로 제사장을 뜻한다.
유대인 총장의 영향으로 코헨대학교의 신학적 풍토는 성경을 주석하고 융합적 보는 히브리식 사고에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예컨대 히브리식 사고로 기록된 성경을 현재 자기가 속한 문화권의 틀에서 해석하지 않고 당시의 히브리식 사고를 기초로 성경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밖에서의 색깔을 갖고 성경을 보는 것과 성경이 기록된 당시의 사고로 성경을 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 강신권 박사의 설명이다.
강신권 박사는 현재 미국에서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례가 최근 들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현재 유대교 내에서도 기독교와 거리가 멀고 강경한 부류인 정통파의 비율은 15%에 그치고 있고, 중도적이거나 오히려 기독교와 가까운 재건파 등은 85%에 이르고 있으며, 앞으로 이러한 추세는 더 가속화될 것이라고 강신권 박사는 내다봤다. 이에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실력 있는 학자들은 더욱 코헨대학교로 몰려 더욱 히브리식 사고를 기초로 한 성경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코헨대학교는 성서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이 4개의 정통신학 토대 위에 세계 최초로 히브리식 사고를 기초로 하는 주영론(주께 영광), 목회론, 고영론(고난과 영광), 구속론, 목적론 등의 7개 융합신학을 두어 더욱 깊이 성경주석을 하고 있다. 강신권 박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추구하는 목표는 궁극적으로 ‘신앙의 체질화’라고 설명했다.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신학이 삶이자 삶이 신학이라는 교육을 받고 자라는데 융합신학이란 삶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되는 신학인 것이다. 어릴 때부터 말씀을 전수하고 ‘말씀의 체질화’를 이루어야 기독교는 더욱 비약할 것이라고 강신권 박사는 강조했다.
강신권 박사는 “유대교는 말씀 전수는 잘하는데 선교는 약한 반면, 기독교는 선교는 잘하지만 말씀 전수는 약한 경향이 있다”며 “이 두 가지의 장점을 모두 살려 안으로는 말씀을 전수하고 밖으로는 선교를 훌륭히 해낸다는 것이 융합신학의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코헨대학교가 진행하고 있는 ‘비전 153’ 프로젝트도 이러한 두 양면을 더욱 성공적인 이끌기 위한 모델로 제시된 것으로 현재 목표의 50% 가량을 성취하며 그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다.
한국에 2천여 명 가량의 제자를 두고 있는 강신권 박사는 지금도 ‘비전 153’ 프로젝트를 위해 분주히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며 교육하고 있다. 현지인을 세우기 위해 언어와 문화의 장벽들을 넘어야 하는 어려움과 신학교 설립 과정에서 부딪히는 난관들도 있었으나 강신권 박사는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라는 마가복음 16장 15절 말씀을 붙들고 세계선교의 부푼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코헨대학교 한국에서도 저변 확대
최근에는 코헨대학교 신학대학원 총동문회가 결성, 동문들과 재학생들을 연결하는 네트웍 구성과 함께 정기적인 학술 심포지엄, 공개 학술 세미나 등을 계획하는 등 한국 내에서도 코헨대학교의 저변이 확대되고 있다. 총동문회는 코헨대학교에서 M.Div, Th.M, D.Min, Th.D 등 정규 과정을 통해 졸업한 동문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모교 발전과 세계복음화를 위해 적극 앞장설 것을 다짐하고 있다.
이들은 타 문화권 복음화를 위해 세계 70여 개국에 세워진 코헨대학교 사역을 위해 장학기금을 조성해 적극 지원할 방침이다. 정관창 총동문회장은 “전 세계에서 공부하고 있는 재학생 및 동문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감당해 나갈 것”이라며 “단순한 모임으로 그치지 않고 연구하고 노력하는 동문회로 만들어갈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코헨대학교와 관련해 강신권 박사는 “현재 2천5백여 명의 졸업생들이 열방 지역에서 목회, 교수, 복지사, 선교사, 기관 사역자 등으로 봉사하고 있으며 세계 각 국의 3천7백여 명의 재학생들이 전 세계복음화를 위한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며 “본 교는 ACSI 및 ETA 회원으로 졸업 후 미국장로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게 되며, 세계선교 사역에 직접 동참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학교재단 폴엔미셀 강 재단은 코헨신학을 중심으로 코헨학파를 형성, 다양한 논문과 저서 활동을 펼쳐 왔다.
코헨대학교는 대학 과정으로 평신도신학과, 기독교교육학과, 기독교음악학과, 기독교상담학과가 있으며, 대학원은 목회학, 기독교음악목회학, 기독교상담학, 신학과 등을 개설하고 있다. 박사원은 목회학, 기독교교육학, 선교학, 기독교상담학, 기독교음악, 기독교복지학, 신학박사 등의 과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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