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중심으로 살펴본 선교역사

I. 로마제국의 기독교 (AD 30-500)

사도 바울 (St. Paul, 64)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였다. 다소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바리새파의 엄격한 율법 가운데 자라났으며 유대교에 위협을 가하는 소위 새로운 이단인 예수집단을 가혹하게 핍박하다 다메섹 도중에서 기적적인 회심을 하고 그 후 초대교회의 가장 열심있는 복음전도자가 되었다. 바울은 10년이 채 못되어 로마제국의 주요한 네 지방인 갈라디아, 마게도냐, 아가야, 아시아에 토착교회를 설립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64년 네로황제의 박해때 순교하였다고 한다.

이레니우스 (Irenaeus, 178-200) 리용의 감독. 켈트어와 라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런데 그 반응은 그리 크지 못했다. 250년이 흐르도록 5-6개 군데의 공동체에 있는 교회에는 소수의 회심자밖에 모이지 못하였다.
두르의 마틴 (Martin of Tours) 고올(Gaul)지역의 감독. 한때 군인이었던 마틴은 즉각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군대식 제도를 채택하였다. 그와 함께 여러 추종자들은 각 지방에 다니면 사원들을 허물고 우상들을 파괴시켰으며 복음을 전하고 회심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조명자 그레고리 (Gregory the Illuminator, 280) 대략 3세기 말에 위대한 선교사 그레고리가 주도한 대규모 운동의 결과와 티라다테스(Tiridates)왕의 회심에 불이 붙은 아르메니아(Armenia)는 기독교 왕국이 되었다. 410년에는 이미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된 신약성경이 나타났다. 아르메니아교회는 오늘날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중의 하나가 되었다.
울필라스 (Ulfilas, 311-380) 고트족이 체계적으로 복음을 접하게 된 것은 울필라스의 사역 결과인데 그의 부친은 갑바도기아인이고 모친은 고트인이었다. 그는 자기가 기독교인이 된 콘스탄티노플에서 10년을 보낸 후 자기 백성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귀국하였다. 그의 업적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성경을 고트족 언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이 일을 위하여 그는 문체에 맞도록 언어를 재정리해야 하였다. 그는 성경보급 뿐 아니라 언어와 문학에까지 현저한 공헌을 한 선교사 가운데 제 일인자였던 것이다.
패트릭 (Patrick, 389-460) 아일랜드의 사도 패트릭은 영국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12세때 아일랜드에 노예로 끌려가 양치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그 포로시기의 영적경험은 그의 온 생애를 변화시켰으며 탈출 후 영국으로 왔다가 꿈에 환상을 보고 다시 아일랜드로 들어가 그곳의 복음화를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그의 영향은 사후에도 지속되었고 그 나라를 넘어 타지에까지 확장되었다. 켈트족 기독교의 중요한 부분이었던 수도원들은 기독교 문화의 중심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선교열을 불붙이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다음 세대의 북부유럽을 복음화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기독교인 가정 초상

II. 유럽의 기독교화 (AD 500-1200)

알로펜 (Alopen, ?) 중국에 최초로 입국한 선교사는 네스토리안 기독교(소위 ‘경교’라고 함)의 알로펜으로서 AD 635년에 입국하여 당시 당조의 태종의 환영을 받았는데 그 당시 중국문화는 절정에 달한 시기였고 태종은 종교를 연구하고 인정하며 보급하였던 왕이었다. 알로펜은 자기가 지니고 간 성경을 동료와 함께 중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수도 장안에 그는 21명의 수도사를 위해 대진사를 설립하였다. 이 새로운 종교는 10개 도를 통해 확산되었으며 수백개 도시에 수도사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콜럼바 (Columba, 521-597) 초기에 영국으로부터 복음이 전해졌던 아일랜드가 반대로 스코트랜드에 가장 위대한 선교사를 파송하였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콜롬바로서 왕족이며 재능이 많고 학식이 넓은 인물이었다. 42세때 12명의 동행자와 함께 아일랜드 수로를 건너 스코트랜드 서해안 밖에 있는 아이오나섬에 수도원을 설립하였는데 그것은 선교역사상 가장 유명한 선교센터가 되었다.

어거스틴 (Augustine, ?-604) 콜롬바가 죽던 해(596년) 직전에 교황 그레고리 대제는 베네딕트 승려 40명과 함께 어거스틴을 영국에 파송하였다. 앵글로 색슨족의 야만성에 대한 무서운 이야기를 들은 어거스틴은 고올로 돌아왔지만 교황은 그가 가던 길을 계속 가도록 명령하였다. 켄트에 상륙한 어거스틴 일행 7명은 왕 에텔버트의 영접을 받았고 왕은 나중에 기독교로 개종하여 하룻만에 10,000명이 세례를 받고 캔터베리대성당이 건립되어 어거스틴은 그 유명한 대주교 가운데 첫 번째가 되었다.

콜럼반(Columban, 550-615) 아일랜드 출신 콜럼반의 첫 일터는 동부 프랑스였으며 그곳에 룩사이유 수도원을 세웠다. 20년 후에 그는 부르군드 왕의 부도덕을 담대히 꾸짖은 까닭으로 왕실의 미움을 사 그의 켈트 수도승들과 함께 쫓겨나 라인강을 넘어 현대 스위스의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부르군드의 세력이 확대되어 이곳에서도 쫓겨나게 된 그는 북이탈리아의 보비오에 세운 수도원에서 사망하였다.

아이단 (Aidan, ?-651) 콜럼바의 후계자인 아이단은 영국 동부 연안 도서인 린디스환에 수도원을 설립하였으며 거기서 아이단은 635년에 노덤브리아 중앙부까지 전도운동을 펼쳤다. 17년동안 여러 여러 동료들과 함께 앵글족과 색슨족에게 평화의 복음을 전하였으며 많은 성과를 얻었다.

윌리브로드 (Willibroard, 658-739) 리폰의 윌프리드와 아일랜드의 에그버트 하에서 훈련받은 노덤브리아 수도사인 윌리브로드가 11명을 동반하고 북해를 건너 프리시아의 첫 선교사로 들어갔다.

보니페이스 (Boniface, 680-754) 암흑시대에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알려진 영국의 베네딕트 수도사 보니페이스는 중년이 다 되어서야 독일로 선교를 떠나게 된다. 40년의 눈부신 선교사업을 통해 그는 “독일의 사도”라는 명칭을 받았다. 크리스토퍼 도우슨은 그를 일컬어 “아직까지 살았던 어떤 영국사람보다도 유럽역사에 깊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고 말했다.

안스카 (Anskar, 801-865) “북극의 사도”라고 불리는 안스카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콜롬바에 의해 꼬르비에 세워졌던 수도원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스웨덴에 파송되어 교회를 세우고 후에 스웨덴, 덴마크, 북부유럽의 슬라브족에 대한 교황사절로 임명되었고 후에 함부르크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이 직책을 통해 안스카는 선교사업의 방대한 연결망의 본부의 역할을 하여 스칸디나비아 전역에 파송할 선교사 훈련을 지원하였다.

콘스탄틴 (Constantine, 후에는 Cyril, 826-869)과 메소디우스(Methodius, 815-885) 데살로니가의 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한 사람은 철학자이고 한 사람은 화가인 이 형제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에 의해 모라비아(현재 체코와 슬로바키아 일부지역)의 황태자인 라티스라브의 요청으로 슬라브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클레멘트 (Clement) 불가리아인들의 회심은 865년에 왕 보리스가 세례를 받음으로 크게 촉진되었고 후에 그는 유명한 선교사인 클레멘트를 마게도냐에 파송하였으며 거기서 클레멘트는 선교사훈련대학을 설립하였다. 그후 불가리아인들은 슬라브세계의 기독교 지도자가 되었고 기독교 신앙이 퍼져 나가 현재 유고슬라비아와 러시아까지 확대되게 된다.

 

III. 로마 카톨릭 선교 (AD 1300-1700)
아시시의 프란시스 (Francis of Assisi, 1182-1226) 200년간 계속되었던 십자군 전쟁(1095-1291)등의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중세시대 로마 카톨릭의 회교권선교를 위한 노력은 너무나 미미하였다. 아직 십자군전쟁이 한창이었을 13세기 초에 앗시시의 프란시스는 미움이 아니라 사랑으로써만 회교도들을 얻을 수 있다고 호소하였다. 그의 처음 두 번의 선교사역은 실패로 끝났지만 1219년 세 번째에는 이집트의 술탄앞에 서게 되었다. 언어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란시스는 어렵게나마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다. 비록 이를 통하여 직접적인 회심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는 회교도들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으며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선교의 길을 닦아 놓을 수 있었다.

레이몬드 룰
(Raymond Rull, 1232-1315) 당시 가장 뛰어났던 회교권 선교사인 레이몬드 룰은 스페인 부유한 로마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판사생활을 했었다. 그의 선교전략은 변증법적으로 전할 것, 교육을 시킬 것, 복음적으로 사역할 것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논리적으로 불신자들에게 증거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였다. 북아프리카 회교권에서 여러 박해를 받으며 사역하던 그는 결국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룰의 인생과 사역은 교회사의 가장 암울한 시대에도 기독교 진리는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간증이다. 그는 회교도들에게 선교하기 위하여 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교회의 개혁을 주장했고 또한 교회 헌금 중 10분의 1은 선교에 써야한다고 강조했다. 로마 카톨릭은 대부분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였으나 룰은 그의 소명에 끝까지 소명을 다하였다.
몽테 콜비노의 죤 (John of Monte Corvino) 유럽 외 지역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선교는 프란시스 교단의 수도사인 몽테 콜비노의 죤이 1294년에 중국에 도착한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걸식수도사인 죤은 이미 페르시아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 사람이었다. 이상한 것은 중국인들이 반대한 것이 아니라 당나라 시대의 200년 동안 중국에서 번창했던 네스토리안교회의 일부 잔유자들이 카톨릭 선교를 반대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죤은 중국황제의 신임을 얻어 북경에 교회를 설립하였고 후에 교황 클레멘트 5세에 의하여 북경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바돌로매 드 라스 카사스 (Father Bartholomew de Las Casas, 1474-1566) 15세기 말에 시작된 지리상의 발견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 새로운 선교의 비젼을 가져다주었고 교황이나 세속통치자들은 이 신대륙을 카톨릭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하였다. 신대륙 최대의 적은 식민주의 그 자체였고 토착민들을 향한 착취와 만행이 선교사들의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식민지 관리들에게 정의를 행하라며 비판의 소리를 높였다. 그 중의 한 사람인 라스 카사스는 인디안들의 위대한 지도자로서 스페인 식민지에서 식민주의와 맞싸웠다. 그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선교의 정신과 인간존중심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역설하였던 가장 위대한 인도주의적 선교사로 기억될 것이다.
프란시스 자비에르 (Francis Xavier, 1506-1559) 가장 위대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선교사라고 간주되는 프란시스 자비에르는 1542년 남부인도에서 3년을 보내며 수천명의 개종자를 얻은 후 말레이반도와 그 부족 도서지방으로 가서 다시 3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1549년 다른 두명의 예수회원과 일본인 개종자를 통역으로 데리고 소위 “해뜨는 곳”, 일본에 가서 2년동안 교육하며 설교하며 또 각종 의식을 집전하면서 전국을 여행하였고 다른 예수회원들이 그를 따라 사역을 계속하였다.

가장위대한 로마카톨릭 선교사로 여겨지는
프란시스 자비에르

마테오 릿치 (Matteo Ricci, 1552-1610) 1368년에 명나라는 선교사를 축출하였고 따라서 중국내 기독교는 소멸하였었다. 200년후 로마 카톨릭을 중국에 부식코자 하는 두 번째 시도로 예수회 소속의 마테오 릿치가 마카오의 폴투갈 식민지를 디딤돌로 삼아 20년 이상에 미치는 길고도 힘든 달구지 여행으로 북경에 도착하였다. 중국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그는 중국문화를 채택하였고 유교학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1601년 수도에까지 들어가 황제의 공식적인 시계 담당관으로 행세하면서 많은 지식인들을 만나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북경에서 마테오 릿치의 영향력을 통해 다른 예수회원들에게도 여행이 허락되어 광대한 중국 대륙 각처에 거주하며 1650년에는 거의 250,000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로베르토 데 노빌리
(Robert de Nobili, 1577-1656) 명문가 출신의 젊은 이탈리아 예수회 수도사 로베르토 데 노빌리는 1605년 인도에 도착하였다. 피셔해안에서 몇 개월 체류하면서 타밀어를 공부한 다음 마두라이로 갔다. 그는 50년간을 남부인도에서 보내면서 인도세계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개척자로서의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의심할 나위 없이 노빌리는 마테오 릿치가 중국에서 사용한 방법에 대하여 알고있었으며 그와 같은 한도내에서 또는 그 이상으로 확대해서 그 방법들을 시도해볼 결심을 하였다. 그는 브라만의 관습과 선입견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 만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포기하였다. 인도인의 눈에 부정하게 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는 기존의 기독교회와의 거래도 끊었다. 노빌리의 대담한 시도는 당장에 성공을 거두었고 특별히 공개토론의 방법을 사용하여 상류계층에서 유례가 없었던 놀라운 사역을 이루었다.
앤드류 화이트 (Father Andrew White, 1579-1656) 앤드류 화이트는 두 명의 예수회 회원과 함께 종교적 자유를 찾아 1632년 체사피크만에 들어왔다. 화이트 신부는 인디언어를 배운 후에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하여 개종시키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목적으로 그는 교리문답집을 준비하였다. 2년 후에 버지니아에서 온 백인 약탈자들이 매릴랜드에 있는 예수회선교부를 침입하여 모든 것을 빼앗고 화이트 신부는 쇠사슬에 메인 채로 영국에 보내졌으며 거기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집행되지는 않았다.


IV. 개신교선교의 시작 (AD 1600-1750)


죠지 폭스 (George Fox, 1624-1691) 1661년에 동지회(The Society of Friends) 창설자인 죠지 폭스가 3명의 동료를 중국에 선교사로 파송하였으나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져스티니안 폰 벨츠 남작 (Baron Justinian von Weltz) 처음으로 선교를 시도한 루터교 선교사로 1664년 경 교회의 선교적 책임을 외친 인물이다. 세 종류의 소책자를 발간하여 교회의 선교적 책임이 어떠한 것인지를 주장하였고 그러한 사업수행을 위한 선교회나 기구를 조성할 것과, 선교사를 훈련하는 학교를 개설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순조롭지 못했고 교리적으로 정통을 주장하는 당시 교회들은 영적생명과 선교의 비젼이 많이 결여되어 있었고 반대와 조롱을 받았다. 그는 화란으로 가 남작의 지위도 버리고 “이방인의 사도”라는 명칭을 받고 화란 기아나(수리남)까지 항해하였으나 거기서 수확을 얻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어거스트 프랑케 (August Francke, 1663-1727) 경건주의의 지도자이며 할레대학의 교수였던 프랑케는 할레대학을 유럽의 경건주의와 복음운동, 18세기의 해외선교운동의 중심지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해외선교란 18세기에도 역시 교회의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에게는 내키지 않는 것이었으며 자연히 그들은 웃음거리와 놀림거리가 될 뿐이었다.

바돌로매 지겐발크와 헨리 플뤼차우 (Bartholemew Ziegenbalg & Henry Plutschau) 선교의 서곡은 경건주의자였던 덴마크의 왕 페르디난드 4세(Ferdinand IV)의 요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왕은 덴마크의 식민지인 인도 남쪽끝의 트랜퀴바(Tranquebar)를 복음화하기 위한 선교사를 파송해 달라고 할레대학에 부탁했다. 이에 대해 바돌로매 지겐발크와 헨리 플뤼차우가 자원하여 덴마크-할레 선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니콜라우스 진젠도르프 (Nicolaus Ludwig Zinzendorf, 1700-1760) 모라비안교회의 감독이었던 진젠도르프 백작은 30년간 세계선교활동을 격려하고 지원하였다. 진젠도르프와 프랑케는 18세기에 있어 가장 훌륭한 선교지도자로 꼽히고 있다. 1730년 코펜하겐을 방문중이던 그는 서인도에서 온 한 흑인과 그린랜드 출신의 두 에스키모인을 만났는데 그들은 모두 선교사를 원하고 있었다. 그들의 요청에 깊은 감동을 받은 진젠도르프는 헤른후트에 돌아오자 그 문제를 놓고 사람들에게 호소하였다. 그 호응은 즉각 나타났으며 대단히 열정적이었다. 그들의 첫 선교는 버진열도의 덴마크령 성 토마스 섬에 있는 흑인 노예들을 위한 것이었고(1732년), 그 다음 그린랜드, 수리남, 황금해안, 남아프리카, 북미 인디언, 자마이카, 안티구아로 확장되어 1732년에서 1760년 사이에 226명의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외국으로 들어갔다.


니콜라우스 진젠도르프 백작

대륙의 경건주의 운동에 있어 주요한 인물은 스패너, 프랑케, 진젠도르프이고 영국의 경우 복음적 각성에 있어 위대한 설교자는 웨슬레와 휫필드였고 미국의 경우는 조나단 에드워드였다. 이 두 측면 사이에 연결된 것은 웨슬레가 개인적으로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형제들을 만난 것과 휫필드가 프랑케의 글을 연구한 것이었다.


V. 개신교 선교 (AD 1750-)

윌리엄 케리 (William Carey, 1761-1834) 가난하기 짝이 없는 영국의 구두수선공 출신의 윌리엄 케리는 “근대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 이상하게도 그에게 선교에 대한 관심이 생긴 동기는 “쿡 선장의 마지막 항해”라는 책을 접하고 부터였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탐독하였고 독학으로 수개국어를 습득한 노력파였다. 1792년 87페이지에 달하는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기독교인들의 강구해야 할 수단들을 찾아”라는 책을 출간하였는데 이것은 선교에 관해 저술된 어떤 책보다도 가장 확신에 찬 선교적 호소를 하고 있다. 이 책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으며 후대 교회사에 끼친 영향을 생각한다면 마틴 루터의 95개 조항과 나란히 설 수 있을만큼 귀하다. 선교운동을 위한 여러역경을 거친후 1793년 인도로 들어가 40년간 선교사역에 힘썼다. 유럽과 미국에 케리의 노고와 편지를 통해 많은 선교기관이 설립되었는데 그중에는 런던선교회(1795), 스코트랜드와 글라스고우 선교회(1796), 네덜란드선교회(1797), 교회선교회(1799), 영국해외성서공회(1804), 미국해외선교위원회(1810), 미국침례선교협회(1814), 미국성서공회(1816) 등이 있다. 19세기에 있어서 선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윌리엄 케리라고 해도 결코 과장은 아닐 것이다.



헨리 노트
(Henry Nott, 1774-1844) 다른 지역과는 달리 태평양 지역에는 한번에 많은 수의 선교사들이 파송되었다. 1796년 런던선교회는 30명의 선교사들을 타이티로 파송했지만 선교사역은 선교사들이 원주민과 동화되고 낙심하고 병에 걸려 고생하는 등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던 벽돌공 헨리 노트 같은 이가 꿋꿋하게 16년을 아무런 성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도 견뎌내지 못했더라면 타이티 섬의 선교사역은 실패했을 것이었다. 1819년 포매어 왕의 세례식이 거행되었고 (비록 포매어 왕은 곧 옛생활로 돌아가 버렸지만) 타이티 원주민들 사이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곳을 방문했던 한 러시아 귀족은 유아살해, 식인축제, 전쟁 등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유럽 선교사들의 사역의 결과였던 것이다.
헨리 마틴 (Henry Martyn, 1781-1812) 그 당시 말썽없이 인도에 선교사로 들어가는 길은 동인도회사의 전속목사가 되어 들어가는 것 뿐이었다. 이렇게 동인도회사의 전속목사로 커다란 선교업적을 이룬 사람이 영국 콘월 태생의 헨리 마틴인데 그는 1806년 인도에 도착하여 짧은 기간 동안 사역했으나 중앙아시아에서 활동한 선교사 중 최고의 성경번역가였다. 4년동안 그는 군대에 종군하면서 유럽인들과 인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학교들을 세우는 등의 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신약성경을 힌두어, 페르시아어, 아랍어 등으로 번역했다.

아도니람 저드슨 (Adoniram Judson, 1788-1850) 1812년 인도에 들어간 아도니람 저드슨 부부와 다른 6명의 선교사들은 미국 최초의 해외선교사라는 영예를 안았다. 앤도버신학교의 소수의 학생들의 선교에 대한 높은 관심은 미국선교사파송위원회 결성의 촉진제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미국 해외선교의 소박한 시작이 되었다. 저드슨은 동인도회사의 방해공작으로 인도를 터나 미얀마로 들어가 일생동안 배타적이고 마음의 문이 굳게 닫힌 그들에게 온갖 어려움을 무릎쓰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충실하였고 저드슨은 미얀마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히람 빙햄 (Hiram Bingham) 하와이(당시 샌드위치섬)의 경우는 어떻게 적은 수의 미국 선교사들이 낯선 문화 속에서 수십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사회의 각 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독특한 것이다. 1819년 7쌍의 부부가 앤도버신학교를 졸업한 히람 빙햄을 지도자로 하여 하와이를 향해 떠났다. 그들이 선교를 시작한 지 10년이 겨우 지났을 때 선교사들은 섬의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으며 빙햄은 지극히 존경을 받았는데 여러 추장들은 그를 단순한 영적 지도자 이상으로 극진히 모셨다. 도덕성과 물질주의로 인한 문제점들, 선교부 임원들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복음사역은 계속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알렉산더 더프 (Alexander Duff) 인도에서 사역한 선교사들 중 가장 혁신적인 사람이 1830년 그의 아내와 함께 캘커타에 도착했던 스코트랜드 교회의 첫 번째 해외 선교사였던 알렉산더 더프였다. 더프는 인도의 개종자들은 대부분 하류층에서 나왔고 이들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기 때문에 인도선교는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상류층을 대상으로 학교를 개교하여 서구의 과학지식을 전해주면서 선교하였는데 호응이 대단하였다. 해외선교에 끼친 그의 공헌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의 영향력 때문에 수백명의 선교사 자원자들이 헌신을 하였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선교사업의 후원자가 되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약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교육사업과 복음사업을 연결한 그의 선교방법은 세계 도처에서 실행되었다.


죤 반더켐프 (John T. Vanderkemp, -1811) 최초로 남아프리카에 선교사로 온 사람은 홀랜드 출신의 의사였던 죤 반더켐프였다. 네덜란드 개혁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50세의 나이로 1799년 케이프 식민지에 도착하여 주로 호텐토트족 사이에서 사역하며 몇 번의 좌절을 이겨내고 수백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그는 매일 노예무역을 목격하며 대단히 마음아파하다가 노예를 해방시켜 주려고 수천 달러를 썼는데 그 중 17세의 나이로 그와 결혼했던 말라가시 여인도 있었다. 그는 선교사역을 시작한 지 12년만에 운명하였지만 런던선교회의 가장 훌륭한 개척자였다.


로버트 모리슨 (Robert Morrison, 1782-1834) 로버트 모리슨은 19세기의 초엽 외국인게 적대적인 중국땅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모습으로 사역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저를 어려움이 제일 많은 곳으로 보내주시고 가장 축복하기 어려운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게 해주소서”라는 것이었다. 그의 기도가 응답되어 중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25년 동안 인내하며 사역하였지만 10여명의 개종자밖에 얻지 못하였고 그가 죽을 즈음에는 전 중국을 통틀어 3명의 중국인 신자가 남았을 뿐이었다.



로버트 모팻 (Robert Moffat, 1795-1883) 남아프리카선교회의 창시자로 50년 이상 이 지역 선교에 큰 영향을 끼친 스코트랜드 출신의 로버트 모팻은 아프리카 선교에 있어 그보다 더욱 유명해진 사위 때문에 오히려 “데이빗 리빙스턴의 장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모팻은 리빙스턴보다 더 훌륭한 선교사였다. 그는 복음전파자, 번역가, 교육자, 외교관, 탐험가였는데 이러한 역할들을 잘 조화시켜 선교함으로써 아프리카 선교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다.


존 클라우 (John Clough) 알렉산더 더프는 상류층 사람들을 복음화 하는데 주력했지만 그의 뒤를 이은 많은 선교사들은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낮은 카스트 계급들을 위해 일하였다.
1865년 미국 침례교선교회 출신의 죤 클라우 박사 부부는 인도 옹골에 있는 로운스타선교회에서 사역하며 천민계급들 사이에서 큰 부흥을이룩하였다. 부흥은 꾸준히 지속되어 1878년 여름에는 하루에만 2,222명에게 침례를 준 일도 있었다.




죤 윌리암스 (John Williams, 1796-1839) 태평양 군도에서 일했던 선교사 중 가장 혁신적이고 먼 미래를 바라보고 일했던 사람은 영국 태생의 죤 윌리암스였다. 이 지역에 폭넓게 끼친 그의 영향 때문에 “태평양의 사도” 혹은 “폴리네시아의 사도”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는 원주민 사역자들을 훈련시켜 여러 섬들에 파송하고 자신은 규칙적으로 그들을 방문하여 선교사역을 지도하는 방식을 사용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섬들 을 찾아 에로망고 섬에 도착하였다가 원주민들에게 습격을 당해 창에 찔려 숨을 거두었다.








칼 구츨라프
(Karl F.A. Gutzlaff, 1803-1851) 칼 구츨라프를 언급하지 않고는 동양선교를 논할 수 없다. 독일태생으로 20대 초반에 네덜란드선교회에 의해 인도네시아로 파송되었는데 그곳에서 선교회 승인 없이 중국 피난민들을 위해 일하다가 후에 독립 선교사가 되어 홍콩에 거처를 정하고 한 세대 내에 중국을 복음화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15년이 못되어 300명이 넘는 중국인 사역자들을 훈련하여 파송했는데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수천 권의 신약성경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신앙서적과 소책자들이 배포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역들이 정직하지 못한 중국인 사역자들이 꾸며 낸 속임수였고 그의 명성은 훼손되었다. 그의 선교적 노력에 의해 중국복음화선교회가 조직되었으며 이 선교회는 1853년 허드슨 테일러를 중국에 파송하게 되는데 사실 구츨라프는 젊은 테일러가 선교의 방법과 목표를 설정하는 데 다른 누구보다도 더 큰 영향을 주었으며 후에 테일러는 그를 “중국내륙선교의 조부”라고 불렀다.



데이빗 리빙스턴 (David Livingstone, 1817-1873) 선교역사에 있어 빠뜨려서는 안되는 이가 바로 데이빗 리빙스턴이다. 그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가 꼭 필요로 했던 영웅이었으며 아프리카선교에 불을 당긴 사람이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힐 정도로 확고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20세기 중반까지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를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여겼다. 1세기 이상 그는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최고의 영웅이었으며 헌신과 충성의 화신으로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도전을 주었다. 그가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가장 큰 공헌을 했다는 점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으나 선교사역 자체에 얼만큼의 결실을 맺었는가에 대해서는 비판할 점이 없지 않다. 리빙스턴은 사실 그의 많은 전기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위대한 성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소심한데다가 변덕이 심한 사람이었으며 이런 점 때문에 선교사역에 많은 곤란을 겪었다. 그러나 이런 약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아프리카 선교에 집중시킨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신 사람이었다. 리빙스턴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심적 충격을 주었고 선교의 열풍이 온 나라를 휩쓸기 시작했으며 선교에 대한 희생의 대가가 무엇이든간에 헌신하겠다는 젊은 남녀의 무리가 줄을 이었다.





죤 게디
(John Geddie, 1815-1872) ‘태평양의 사도’라고 불리웠던 죤 윌리암스의 비극적인 죽음 후 수십명의 청년들이 그의 뒤를 잇겠다고 헌신하였다. 그중에서 ‘완고하고 유머가 전혀 없으며 단순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용감한 선교사’로 표현되는 게디는 노바 스코티아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면서부터 당시 인기를 얻었던 남태평양 선교에 대한 헌신의 마음을 가졌다. 1848년 그는 아내와 함께 뉴헤브리드즈의 섬들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안네이티움섬으로 가서 성경을 번역하고 복음을 전하며 원주민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했다. 그는 사역에 아주 뛰어났기 때문에 그 섬 주민 거의 전체가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의 비석에는 ‘그가 1848년 첫발을 내디뎠을 때 이 섬에는 단 한 사람의 기독교인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1872년 이 섬을 떠날 때에는 단 한 사람의 불신자도 없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죤 패튼 (John G. Paton, 1824-1906) 스코트랜드 태생인 죤 패튼은 남태평양에서 사역하였다. 뉴헤브리디즈의 아니와라는 작은 섬에서 두 번째 사역에서 많은 원주민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으며 원주민 기독교인들의 도움을 받아 2개의 고아원과 부흥이 계속되는 교회 및 여러 학교들을 세웠다. 개종한 추장의 후원으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패튼은 청교도적인 엄격한 법률을 만들어 섬 주민 모두가 이를 따르게 했다. 패튼은 말년에 선교지도자로서 호주, 영국, 미국을m방문하여 자금을 조달하고 뉴헤브리디즈에서 필요한 선교사를 헌신시키는 일을 주로 하였다. 그래서 19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30명 정도를 제외한 모든 주민들이 복음을 받아들였고 원주민 사역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학교가 세워져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부하였으며 24명의 선교사가 그들의 아내들과 더불어 봉사하였다.




죤 콜러릿지 패터슨 (John Coleridge Patterson, 1827-1871) 죤 콜러릿지 패터슨은 멜라네시아 최초의 성공회 주교였고 영국의 유명한 시인인 사무엘 테일러 콜러릿지의 조카로 영국의 명문집안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였다. 멜라네시아 주교직을 제수받고 그는 선교선을 타고 여러 섬을 돌며 자원하는 소년들을 모아 뉴질랜드로 데려와 훈련시켜 고향에 돌려보내 독자적으로 복음사역을 하게 하였다. 동시에 그는 여러 섬의 주민들과 추장들과 우호관계를 맺어 그들의 신뢰를 받았다. 하지만 노예상인들의 출현으로 그의 사역은 타격을 입고 결국 노예상으로 오인되어 화살을 맞고 숨졌다. 패터슨의 죽음의 소식은 노예상들의 비열한 행위에 세상의 주위를 끌게되어 마침내 노예밀매는 근절되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남태평양의 선교에 헌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허드슨 테일러 (Hudson Taylor, 1832-1905) 사도 바울 이후 19세기 선교사들 중 큰 비젼을 갖고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방대한 지역을 복음화시킨 사람으로 영국출신의 허드슨 테일러는 능가하는 인물은 없다. 중국내륙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는 그가 독창적으로 만들었으며 그의 생전에만도 800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사역하였고 훗날 후원자 없는 독립선교(Faith Mission)의 모형이 되었다. 1853년 21세의 나이로 중국복음화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중국 상해로 머물다가 사치스런 선교사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개신교 선교사들이 가본 적 없는 내륙으로 들어가 사역하기 시작하였고 1865년 그의 선교경험과 성격이 반영되어진 중국내륙선교회가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테일러는 지식인들과 정식목회자들로서는 중국복음화가 요원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영국의 노동자들 중 헌신된 남녀일군들을 모집하였다. 그것을 통해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른 선교단체들과 쓸데없는 경쟁을 피하고 선교노력을 극대화 할 수 있었다. 재정지원과 개인후원의 문제에서 선교회는 정규적인 봉급을 약속하지 않고 자신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만 의지하게 하였다. 허드슨 테일러가 기독교 선교에 끼친 공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의 통찰력과 비젼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날 기독교 선교가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 의문이다.


샬롯(로티) 딕스 문 (Charlotte Lottie Diggs Moon, 1840-1912) 침례교선교의 “수호성인”이라고 불리는 로티는 해외 선교사로 헌신한 첫 번째의 여성은 아니었지만 여자로서 큰 성공을 거둔 첫 번째 여성선교사였다. 버지니아 태생의 로티는 동생을 따라 중국 선교사로 떠났가 동생 귀환 후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여성선교사들에게 하찮은 일만 맡기는 선교풍토에 반기를 들고 핑투라는 지역에서 개척사역을 시작하였다 어려움 중 교회는 꾸준히 성장, 20년 내에 중국인 목사에 의해 천명 이상이 침례를 받았으며 핑투는 중국전역에서 남침례교 최대의 선교중심지가 되었다. 로티는 저술과 본국에서의 설교등을 통해 미국 남부의 많은 침례교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또 여성들에 의해서만 선교자금으로 쓰여질 크리스마스 특별헌금을 기획하였고 남자 선교사들이 사직함에 따라 비게 된 자리를 맡기 위한 여성들을 모집하였는데 그 결과는 엄청난 호응이었다. 로티의 사후에도 계속 로티 문 크리스마스 헌금은 증가하였고 그녀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여러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플로렌스 영 (Florence Young)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의 토박이인 플로렌스는 남태평양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영적복지를 위해 일하겠다고 표명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플리머스형제단((Plymough Brethren)에 속한 그녀는 하루 12시간 이상씩 사탕수수를 베는 살인적인 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여 농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사역이 커져갔다. 1890년 중국선교의 소명을 느끼고 10년간 중국에서 사역하다 돌아오자 노예매매와 강제노동이 금지되어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플로렌스와 그의 동역자들은 귀향하는 노동자들을 따라가 솔로몬 제도의 각 섬에서 귀향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웠다. 1907년 선교회는 남태평양복음선교회로 명칭을 바꾸고 그녀의 친척들과 솔로몬 제도를 위한 선교사역에 헌신하여 생동감있는 복음주의 교회가 뿌리를 내리게 되어 지금도 계속 부흥하고 있다.


제임스 찰머스 (James Chalmers, 1841-1901) 뉴기니아에서 사역했던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 중 하나가 제임스 찰머스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출신으로 1866년 부인 제인과 함께 런던선교사 파송으로 남태평양의 라로통가에서 10동안 사역하였지만 만족치 못하고 뉴기니아로 들어가 원주민들과 함께하면서 실천하는 사랑으로 효과적인 선교사역을 하였다. 그가 그 섬에 들어간지 5년이 지났을 때 사람을 잡아먹는 일도, 축제나 살인도 사람 해골을 가지고자 하는 욕망도 모두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원주민은 진실함을 가지고 일하는 챨머스를 사랑했으며 그에 대한 소문을 널리 퍼뜨렸다. 복음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열정으로 그는 젊은 동역자와 사나운 식인종 지역으로 알려진 플라이강 유역을 탐사하다 창에 찔려 숨지고 갈기갈기 찢겨 식인종에게 잡혀 먹었다는 소식을 남긴 채 실종되었다.


헨리 스탠리 (Henry M. Stanley, 1841) 사생아로 태어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뉴욕 헤럴드지의 기자가 되어 1871년 데이빗 리빙스턴을 찾기 위해 아프리카로 급파된 헨리 스탠리는 그곳에서 4개월을 지내고 와 “나는 리빙스턴을 어떻게 찾았는가”라는 책을 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리빙스턴이 죽은 지 1년 후 그는 아프리카 탐험을 떠났는데 스탠리는 자신을 탐험가이자 무소속 선교사로 생각했다. 선교에 대한 그의 가장 큰 공헌은 데일리 텔레그라프지에 게재한 한 편지로써 그것을 통하여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일생동안 했던 것보다 더 많은 선교일꾼을 헌신하게 만들었다. 몸바사로부터 콩고강 어귀까지 아프리카를 횡단하는 999일간의 탐험은 전세계를 자극하여 검은 대륙에 선교사를 보내는 촉진제가 되었다.

A.B. 심슨 (A.B. Simpson, 1843-1919) 국제적 선교사단체인 기독교인-선교사연합회(Christian and Missioanry Alliance: C&MA)의 창설자인 심슨은 실제 선교사로 활약한 적은 없지만 선교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 선교회들은 그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설교에 탁월한 목회자로 사역하던 슨은 환상속에 선교사의 부르심을 받고 몇 달동안 선교의 문이 열리도록 노력했으나 그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가 선교사로 헌신하는데 최대의 장애는 아내 마가렛과 6명의 아이들이었다. 교회를 사임한 그는 세계선교에 전적으로 헌신된 교회를 만드는 목표로 뉴욕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1887년 선교에 관심이 많은 신앙인들의 힘을 한곳으로 모으기 위한 기독교인연합(Christian Alliance)를 조직했고, 그 연합회가 더욱 발전하여 새로운 선교회인 복음주의선교사연합회가 창립되었다. 이 두 단체는 10년 후 1897년 기독교인-선교사연합회(C&MA)로 통합되었다. 심슨이 세상을 떠날때쯤에는 모든 대륙에서 C&MA 선교사들이 활약하였고 1919년 그가 세운 선교사학교가 뉴욕 나약에 기반을 잡았다. 그가 세운 선교사훈련학교를 본받아 북미 각처에 성경학교 붐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학교들은 그 후 수십년 동안 독립적인 믿음선교회를 형성하는 주된 원천이 되었다.



메리 슬레서 (Mary Slessor, 1848-1915)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탐험과 선교사역은 많은 사람에게 도전을 주어 수십명의 선교사들이 아프리카고 떠났다. 당시 탐험이나 개척사역은 결코 여성 독신 선교사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 최소한 메리 슬레서가 아프리카 선교에 헌신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스코트랜드 태생으로 가난과 가정불화로 얼룩진 어린시절을 보낸 그녀는 27세의 나이로 현재 나이지리아에 위치한 갤러바로 떠났다. 50년간 어떤 백인도 살아남지 못했던 오지 오코용 부족들 사이에 살면서 그들을 가르치고 치료하였으며 부족간의 분쟁을 해결해 주었다. 그녀가 중재자로서 뛰어나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메리는 그 지역의 전체 재판관과 같은 임무를 수행하였다. 1892년 그녀는 오코용의 첫 부영사로 임명되어 대영제국 최초로 여성 부영사가 되는 영예를 누렸다.


죠지 그렌펠 (George Grenfell, 1849-1906) 죠지 그렌펠은 리빙스턴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의 사후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헌신했던 많은 영국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헨리 스탠리가 999일간의 탐험중에 발견했던 콩고강 유역에서 개척사역을 하였다. 그렌펠의 탐험가적인 개척사역은 여러 가지 성공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는 콩고에서 20년 동안 침례교 선교를 감독하면서 자신의 선교지역인 볼로보(Bolobo)에 큰 영적부흥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렌펠은 비록 서부로부터 동부를 잇는 선교기지를 건설하겠다는 애초의 그의 비젼을 벨기에 당국의 방해로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열병으로 소천하기까지 그의 개척사역을 성공적으로 계속해 나갔다.



알렉산더 멕케이 (Alexander Mackay, 1850-1890) 그렌펠과 침례교선교사들이 아프리카의 서부로부터 대륙으로 들어오는 동안 교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 영국 국교회의 한 단체)는 대륙전체를 기독교 선교회의 기지들로 망을 짜놓겠다는 스탠리의 계획을 동부로부터 수행해 가고 있었다. 교회선교회가 아프리카 동부해안에 파송한 가장 유명한 선교사는 알렉산더 멕케이였다. 그는 1876년에 아프리카에 도착했는데 그 해는 그렌펠이 서부해안에 도착한 지 1년 반쯤 지난 때였다. 멕케이는 고등교육을 받은 스코트랜드인으로 본래 직업은 엔지니어였는데 특히 언어학과 신학에 해박한 만물박사였다. 그는 1876년 스탠리가 우간다 왕 므테사(Mtesa)가 선교사 파송을 요구한다는 강력한 선교적 도전을 주었을 때, 이에 대한 응답으로 교회선교회가 보낸 선교사 8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우간다에 도착한 그는 이후 우간다 교회성장의 초석을 놓았다.


죠나단 고포드 (Jonathan Goforth, 1859-1936)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 태어난 죠나단 고포드는 중국에서 주로 활동하며 한국과 만주에서도 사역하였고 가는 곳마다 놀라운 영적 부흥을 일으켰다. 중국에서의 사역 초기부터 고포드는 능력있는 전도자로 알려졌다. 중국인과 접촉하기 위한 고포드의 방식은 그 당시 선교사들의 방법과는 판이한 것으로 그는 기꺼이 사생활을 포기하고 가정을 개방하여 지역 주민들과 접촉하고 친구를 사귀는 수단으로 활용하자 몇 십리 밖에서도 손님들이 찾아왔으며 어떤 날에는 하루에 2,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몰려오기도 하였다. 20세기 초에 시작했던 고포드의 순회전도사역은 그가 1907년 한국을 방문하여 당시 온 한국교회를 휩쓸고 있던 부흥의 물결에 깊은 감동을 받고 나서부터였는데 그 후 계속된 부흥의 주춧돌이 되었다.

 


C.T. 스터드 (C.T. Studd, 1860-1931) 학생자원자 중에서 가장 명성이 높았던 사람은 아마 스터드일 것이다. 그는 모든 부와 특권을 기꺼이 포기하고 세계복음화의 과업 앞에 용기있게 마주서서 철저히 헌신한 학생 자원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캠브리지 대학생들, 이른바 “캠브리지 7인”이 중국내륙선교회의 선교사로 중국에 건너가 헌신한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당혹해 하였으며 한 신문기자는 ‘선교역사상 이렇게 머리 좋은 학생들이 한꺼번에 해외선교사로 나간 일은 없었다’고 쓰기도 하였다. 중국에서 10년정도 사역한 스터드는 그 후 학생자원운동(SVM)을 대표하여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강사로 활약하였는데 수천명의 학생들이 그의 집회에 모여들었고 수백명의 학생들이 해외선교사로 자원하였다. 그는 50세에 다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벨기에령 콩고에 들어가 18년간 선교사역을 하였다. 하지만 말년에 이르러 선교사들에 대한 엄격한 요구와 아프리카 기독교인들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시각, 그리고 그가 쓴 ‘D.C.D(Don’t Care a Damn : 비난에 개의치 말라)’라는 소책자가 큰 물의를 일으켰고 모르핀에 중독되었다는 소식 등으로 인해 면직처분을 받게 되었다. 갓 태어난 WEC은 스터드의 사후 사위 노만 그럽의 탁월한 지도력 하에 꾸준히 성장하여 수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있다.





윌프레드 그렌펠
(Wilfred Grenfell, 1865-1940) 영국 체스터 태생으로 바다를 동경하며 자란 그렌펠은 런던에서 의학공부 중 무디의 부흥회에서 C.T. 스터드와 J.E.K. 스터드의 간증을 듣고 회심하였다. 왕립원양선교회에 소속되어 북미 라브라도 해안을 여행하며 생존을 위해 거친 환경과 싸우며 희망없이 살고 있는 그곳 주민들의 육적, 영적 갈급함에 도전을 받고 선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사역을 시작하였다. 헐값으로 주민들을 착취하는 상행위에 분개하여 협동조합을 만드는 등 지역사회에 깊이 간여함으로 상인들과 선교회간에 반목이 조성되었다. 라브라도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위해 미국을 돌면서 설교하면서 그의 명성은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많은 젊은 남녀들이 그의 희생정신에 감동하여 라브라도 선교사역에 투신하였다. 라브라도의 빈민들에게 그는 성인 이상이었다. 그를 존경하는 한 사람은 “윌프레드 그렌펠이 문의 역할을 했다면 그 문을 통해 예수께서 오셨다고 생각합니다”
고 하였다.









죤 모트 (John R. Mott, 1865-1955) 죤 모트는 평신도였고 엄격한 실제 선교사로 일했던 적은 없지만 선교사역에 그가 미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무디의 후원으로 헐몬산에서 열렸던 첫 번째 기독학생수련회에서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면 어느 곳이든 선교사로 가겠다’는 프린스턴서약에 서명한 헐몬산의 100인중 하나가 되었고 후에 이 모임은 학생자원운동(SVM)으로 발전되었고 모트는 30년 이상 이 모임을 이끌었다. 그는 또한 YWMC에서 40년간 활동하면서 전세계의 선교사와 각국의 학생들과 함께 사역하였다. 모트의 가장 큰 공적은 그가 제창하고 주도하여 1910년에 열린 에딘버그선교대회로 이 10일간의 회의는 1,355명의 대표들이 참석한 최초의 초교파적이고 국제적인 선교사 연합회였으며 그 뒤 수십년동안 교회연합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에이미 카마이클 (Amy Carmichael, 1867-1951) 인도에서 55년간 사역하며 활동사항들을 자세하게 적어놓은 35권의 저서를 남긴 에이미 카마이클은 영국의 모든 개신교 여선교사를 대표할 만한 인물이었다. 케직운동의 열매인 그녀는 24세의 나이로 일본으로 떠났다가 후에 남인도에 정착하였다. 인도 도나버에서 사원의 창녀로 팔려간 아동들을 위한 사역에 일생동안 헌신하였는데 이 아동들의 존재는 선교사들까지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폐습을 타파하려는 인도의 개혁자들의 도움도 받으면서 에이미는 고집스레 이 사역을 계속해 그 후 수십 년 동안 수백명의 아이들이 구출되어 도나버에서 양육받았다. 그녀가 만들었다고 알려진 도나버공동체는 모든 사역자들이 인도 옷을 입고 인도식으로 이름을 지었으며 외국에서 온 사역자들과 인도의 사역자들은 모두 모여 공동생활을 하였다.  




사무엘 즈윔머 (Samuel Zwemer, 1867-1952) 13세기의 레이몬드 룰 이후 회교권은 보다 열매를 쉽게 맺을 수 있는 지역 때문에 무시되어왔다. 영국성공회가 1860년대에 이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할 때 교단의 도움 없이 선교를 시작한 이가 학생자원자인 사무엘 즈윔머였다. 그는 호프대학 재학중 헐몬산의 100인을 감동시킨 로버트 윌더의 설교를 듣고 선교사로 자원하였다. 회교지역으로의 파송을 희망했지만 선교부로부터 거절당한 즈윔머는 친구 제임스 켄틴과 함께 미국아랍선교회을 조직하여 아라비아선교를 시작하였다. 카이로에서 열린 회교권선교사총회의 초대의장이었고 미국에서는 학자원운동의 순회강사 사역을 통해 많은 학생들이 해외선교에 헌신하게 하였다. 비록 그의 사역으로 인한 개종자는 적었지만 회교권 사람들에게 꼭 복음을 전해야만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새롭게 일깨웠다.





로버트 스피어 (Robert E. Speer, 1867-1947) ‘학생자원운동(SVM) 정신의 구현자’라고
불렸던 로버트 스피어는 역시 SVM의 중추였던 죤 모트와 일생 내내 두터운 우정을 유지하
였고 모트처럼 평신도로서 해외선교운동에 헌신하였다. 프린스턴을 졸업한 그는 SVM의 순회서기가 되어 1년동안 천명 이상의 해외선교자원자들을 모집하였다. 선교사로 나가려고 준비하는 중 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선교부의 최고 행정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해왔다. 수많은 학생들을 선교사로 보내고 자신은 본국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아 번민했지만 핵심자리에서 해외선교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 수락하여 70세까지 46년간 사역하였다. 은퇴후에도 여러 대학과 집회에서 강연하며 해외선교를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아이다 스커더 (Ida Scudder, 1870-1952)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의료선교사 가문인 스커더 집안의 첫째 선교사였던 죤 스커더의 막내아들인 죤의 딸이 아이다 스커더로 그녀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인도에서 사역하였고 그녀도 인도에서 태어났다. 미국에 와서 코넬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마지못해 가문의 전통을 따라 인도의 의료선교사가 된 아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커더 가문 누구보다도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처음 조그만 방에서 몇 명 안되는 환자들을 데리고 시작하여 100명의 의사에 484개의 병상을 갖춘 종합병원과 60개의 병상을 갖춘 안과병원을 가진 현대적 의료단지를 이룩해 내었다. 또한 많은 이동진료소에서 20만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하며 매년 200명의 학생들을 배출하였다. 그녀가 얼마나 유명했던지 겉봉에 ‘인도, 아이다박사’라고만 써도 그녀에게 정확히 편지가 전달되었다.

 


롤랜드 빙햄
(Roland Bingham, 1872-1942) 젊은 캐나다 청년인 월터 고원즈(Walter Gowans)에 의해 설립된 수단내륙선교회(Sudan Inland Mission: SIM)를 이어 받은 롤랜드 빙햄의 끈질긴 집념으로 SIM은 기독교 역사상 아프리카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선교회가 되었다. 빙햄은 수차례 아프리카를 향해 떠났으나 말라리아로 인해 사역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고 동역한 사역자들도 죽거나 병으로 사역을 중단하였다. 굴하지 않고 빙햄은 세 번째 시도로 아프리카의 파티키에 본부를 두고 꾸준히 사역하였고 특히 나병퇴치사역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SIM의 사역범위는 넓어져 이디오피아에 교회를 세우게 됨으로 아프리카에 헌신한 그의 삶은 절정을 이루었다.


머드 캐리 (Maude Cary, 1878-0000) 20세기 초는 여성 선교사들의 수가 남성과 비슷하거나 많게 되었으며 어떤 지역에서는 여성 선교사가 없었더라면 선교사역이 사실상 와해될 뻔하였다. 그런 실례가 모로코에서 활동한 복음선교사연합(Gospel Missionary Union)에서 있었다. 복음선교사연합은 모로코에서 사역하고 있는 5개 선교단체 중 하나였는데 1894년 이래 회교도들에게 복음으로 접근하기 위해 분투중이었다. 그러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교의 높은 벽을 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졌으며 낙심된 마음과 풍토병이 선교사역에 손상을 가져왔다. 선교기지를 폐쇄하고 다른 곳에 집중하자는 사실 논리적인 해결방안이었다. 오직 그중에서 머드 캐리라는 독신 여성 선교사만이 끝까지 남아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이 없는 그 암울한 기간 동안 좀처럼 보기 힘든 탁월한 능력으로 사역하였다.

스탠리 죤스
(E. Stanley Jones, 1884-1973) 애즈베리대학 재학중 학생자원자가 된 스탠리 죤스는 감리교선교부로부터 인도로 파송받아 인도의 지식인들을 위해 일하는 선교사 중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그의 설교 초점은 그리스도였지 기독교가 아니었다. 서구선교사들이 인도에 들여온 것 역시 기독교였지 그리스도가 아니였으며 죤스는 만약 인도의 지식인들이 서구문명의 옷이 제거된 그리스도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리라고 믿었다. 복음전도자와 기독교 지도자로서 죤스의 명성이 높아져 인도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존경을 받았고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도 그의 친구였는데 비록 기독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지극히 존경하였다. 세계복음화에 대한 죤스의 사상은 그의 저서 ‘인도로 향하는 길의 그리스도(The Christ of the Indian Road)’라는 책에 잘 나와있다. 그 책은 20세기 선교사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


죠안나 빈스트라 (Johanna Veenstra, 1894-1933) 미국 뉴저지 패터슨 태생의 죠안나 빈스트라는 여러 가지 점에서 20세기에 자신의 몸을 드려 선교사로 헌신했던 수많은 독신 여성 선교사들을 대표한 표본이었다. 수단연합선교회(Sudan United Mission)에 지원하여 루페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청년들을 복음전도자로 훈련시키는 기숙사가 학교를 세워 많은 학생을 배출하였고 틈틈히 시간을 내어 복음사역과 의료봉사를 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녀의 기숙사 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특권으로 여겼고 특히 그녀의 의료사역은 큰 인기를 끌었다.




윌리암 캐머론 타운센드 (William Cameron Townsend, 1896-1982) 20세기 성경번역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이는 WBT/SIL의 설립자 윌라암 캐머론 타운센드로 빌리 그래함은 그를 “우리 시대 최고의 선교사”라고 극찬하였고, 미국선교센터의 랠프 윈터는 그가 지난 2세기 동안 윌리엄 캐리나 허드슨 테일러와 견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3인의 선교사 중의 한 사람이라고 찬양하였다. 캠은 로스앤젤스에 있는 옥시덴탈대학 2학년대 SVM(학생자원운동)에 가입하고 후에 죤 모트의 설교에 도전을 받고 선교사로 헌신할 결심을 굳혔다. 1917년 과테말라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한 캠은 그가 맡고 있던 지역의 칵키퀼 인디언들이 그들의 언어로 된 성경이 없다는 것과 한 인디언이 ‘당신네 신이 그렇게 똑똑하다면서 우리말도 모릅니까?’라는 말에 큰 도전을 받고 성경번역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후 캠은 알칸사스에서 위클리프캠프를 설립하였고 곧 개신교 선교회 중에서 두각을 나타나게 되었다. 그 후 캠은 성경번역사역에 온 일생을 투신하였는데 그것은 어떤 것보다도 성경에 대한 확신과 믿음 때문이었다. “가장 훌륭한 선교사는 선교지 원주민의 언어로 쓰여진 성경이다. 성경은 선교사들처럼 안식년도 필요없고 외국인이라고 배척받는 일도 없다.”

 

클래런스 죤스 (Clarence W. Jones, 1900) 다른 전문 직업선교와 마찬가지로 방송선교 역시 그 필요성을 인정받기까지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였다. 아마 클래런스 죤스같은 선견지명을 가진 지도자가 없었더라면 방송선교는 오늘날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죤스는 복음을 위해 ‘악마의 도구’인 방송을 활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국내에 수신 장비가 6대 밖에 없을 때 외국에 나가 방송국을 세우겠다고 해서 ‘바보같은 죤’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는 세계복음화를 위해서는 통신분야에서 선교사들이 선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실패와 역경 끝에 에콰도르 퀴토에 세운 HCJB (Heralding Christ Jesus’ Blessisngs)는 1931년 역사적인 첫 방송을 내었다. 그후 몇 달 내에 세계라디오선교회가 공식 결성되었다. 출력은 계속 강화되 방송을 청취한 사람들의 편지가 뉴질랜드, 일본, 인도, 소련 등지에서도 쇄도하게 되었다. 세계라디오선교회는 반세기를 넘게 사역해 오며 단순한 방송국 이상이 되어 병원, 이동진료소, 출판사, 컬러TV 방송국등을 운영하고 있다.

글래디스 아일워드 (Gladys Aylward, 1904-1970) 런던의 노동자의 딸로 태어나 하녀로 살며 향락에 빠진 생활을 하던 글래디스는 회심 후 선교사로 헌신하려 중국내지선교회의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내지선교회의 훈련을 마치지 못하고 탈락한 후에도 선교사의 꿈을 잃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중국으로 보내주실 것을 확신하고 기차삯을 모았고 중국에 대한 책을 읽고 조사하였다. 그러다 지니 로슨(Jeannie awson)이라는 중국 선교사 과부 할머니가 누군가 와서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알고 중국으로의 힘겨운 여행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로슨이 경영하는 양쳉의 여인숙에서 일하다가 로슨이 사망한 후 양쳉의 지사로부터 시골 여자들의 발을 조사해달라는 요청을 받아 여러 곳을 다니며 선교사역이 꽃피우기 시작했다. 일본과의 전쟁기간동안 그녀는 중국을 위해 구호품 조달과 스파이의 역할을 감당하기도 하다가 1940년 100명이 넘는 입양한 전쟁고아를 데리고 산을 넘고 황하를 건너 태국 국경을 넘어 안전지대로 피난하였다. 그녀는 전기, 영화, 방송등에 의해 국제적인 명사가 되었고 후에 대만에서 계속 사역을 하며 세계 각처를 여행하며 강연과 활동을 하였다.

 


죤 브로져
(John Broger) 2차대전이 끝나자 극동지역에서 방송으로 선교를 하려 했던 세 사람은 그 꿈을 실현시키기 시작했다. 태평양 제38기동함대 장교였던 죤 브로져는 방송선교의 강력한 꿈을 안고 귀국하였고 그의 친구였던 로버트 보우만(Robert owman - LA에서 기독교 방송국을 운영하고 있었다)과 윌리엄 로버츠(William Roberts - 목사로 LA에서 라디오 프로에 출연하고 있었다)가 그의 꿈을 지지하고 협력하였다. 브로저는 상해로 가 그곳에 중계소를 세우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필리핀에 극동방송국 Far East Broadcasting Company)를 설립하였다. FEBC의 가청범위가 넓어지면서 청취자들의 편지가 쏟아졌고 많은 이들이 성경통신학교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 시작한지 채 2년이 안되어 12,000명이 원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구소련과 중국에서의 청취율도 대단했다. 14년간 사역한 죤 브로져는 미 합참의장의 요청으로 군대로 돌아가 고문관으로 사역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사장이 된 로버트 보우만의 지도하에 FEBC는 더욱 크게 발전하였다.


제시와 레오 핼리웰 (Jessie and Leo Halliwell) 아마존 강 유역을 따라 18,000Km를 오르내리고, 정글을 따라 1,600Km를 여행하며 밀림에 둘러싸인 벨렘(Belem)과 마나우스(Manaus)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의료사역을 펼친 핼리웰 부부는 결혼 직후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결정하고 안식일교회의 선교부에 자원하여 브라질에서 사역하다 의료사역의 필요성을 깨닫고 안식년중에 의학공부를 하고 조직을 확대하였다. 1956년 아마존 인디언들 사이에서 25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핼리웰 부부는 은퇴하고 리오데자네이로에서 남미의 안식일교회의 의료선교를 총괄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들의 헌신적인 봉사를 통해 아마존강은 이동병원선으로 붐비게 되었으며 이로써 그들의 개척사역은 종결되었다.

 



칼 벡커
(Carl Becker) 다른 어느 지역보다 아프리카는 항상 의료선교사들의 흥미를 끌어왔고 또 의료선교사들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아프리카의 복음화는 크게 진전되었다. 수많은 유명한 이들중 아프리카인들의 생명을 구하고 건강을 돌보는데 특별히 헌신된 의료선교사를 한 명 뽑는다면 콩고의 위대한 문강가(Munganga)인 칼 벡커를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필라델피아에서 의사로 개업한 그는 아프리카내륙선교회의 의료선교사를 구한다는 편지를 받고 옛 서약을 기억하고 고민 끝에 콩고로 떠났다. 오이카에서의 의료사역은 빠른 속도로 확대되는 중 그의 첫 번째 목표였던 복음화를 위한 영적사역에 헌신치 못함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는 의료사역이 영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였듯이 의료선교는 복음전파의 밑거룸이었다. 그의 대하여 한 아프리카 의대생은 “많은 선교사들이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고 많은 선교사들이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나는 문강가(벡커 박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다”고 그를 찬사하였다.





케네스 파이크 (Kenneth Pike) 기독교계나 학문계를 통틀어 20세기에 가장 뛰어난 언어학자는 SIL(Summer Institute of Linguistics)의 원장을 수년간 역임했던 케네스 파이크였다. 그는 중국내륙선교회에서 선교사로 적합지 못하다고 파송을 받지 못하였고 여러 선교회에 지원했으나 거절당하다가 위클리프캠프에 입교가 허락되었다. 그후 멕시코에 가서 미즈텍부족의 언어공부에 두드러진 진보를 보여 여름 위클리프 캠프에 교사로 초빙되게 되었다. 캐머론 타운센드의 조카딸로 번역 선교사로 멕시코에서 사였하기 위해 준비하던 UCLA를 졸업한 수재인 에블린 그리셋(Evelyn Griset)과 결혼하여 최상의 번역 선교사 부부가 되었다. 미즈텍어 신약성경의 번역을 10년만에 완료하자 파이크는 언어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번역선교사들을 돕는 일에 전력하였다. 그는 미시간 대학교와 SIL에서 강의와 연구를 계속하면서 음성학 이외의 언어학의 다른 분야로도 연구를 확대하였고 그의 연구는 전세계에 흩어져 일하는 성경번역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시카고대학의 에릭 햄프교수는 파이크의 첫 저서인 ‘음성학’은 ‘그 분야에서 가히 혁명적인 것이다’라고 하였고 덧붙여 지난 25년간 언어학자들이 관심을 갖지 않던 생소한 언어들로부터 만들어진 자료의 거의 절반은 전적으로 케네스 파이크의 연구와 노력, 가르침의 결실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결코 과장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헬렌 로즈비어 (Helen Roseveare, 1925-) 영국의 지체높고 존경받던 콘월(Cornwall) 가문에서 태어나 캠브리지 대학 1학년때 회심, 숙부들과 이모가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선교사로 헌신한 헬렌 로즈비어는 1953년 세계복음화십자군(Worldwide Evangelization Crusade: WEC)의 선교사가 되어 콩고로 건너갔다. 의료선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그녀는 동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병원 및 훈련학교를 개설하여 성공하였다.
후에 네보봉고로 발령되어 그곳에서 병원을 손수 세웠으나 후에 젊은 영국인 의사인 죤 해리스에게 그 책임자직을 넘겨주어야만 했고 이것은 그녀에게 무척 힘든 일이었다. 1964년 반군들로 인해 콩고는 유혈내전사태에 빠졌고 헬렌은 반군들에게 잡혀 고문과 강간을 당했다. 안정된 후에 콩고에 다시 들어갔지만 흑인 민족주의에 영향을 받은 학생들은 그녀의 권위에 공공연히 도전하였고 심지어 동료들까지 그녀의 지도력에 회의를 표시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결국 20년 동안 이끌었던 학교를 사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후 더 큰 사역을 할 수 있게 하셨는데 그것은 기독교선교의 시급함과 필요성을 외치는 국제적인 강연자의 사역이었고 그것을 통해 더 큰 일을 감당하였다.



폴 프리드
(Paul Freed) 방송선교회 중에서 가장 크고 세계전역에 흩어져 있는 것이 트랜스 월드 라디오(Trans World Radio)이다. 1954년에 설립된 TWR은 오늘날 모두 합쳐 500만 와트 이상을 내보내고 있으며 전세계 인구의 80%가 가청대상이다. 이렇게 강력하고 훌륭한 방송 선교회가 설립되기까지는 랄프(Ralph)와 폴 프리드 부자의 헌신과 희생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TWR의 설립자인 폴 프리드는 선교사의 아들로 중동에서 자랐다. 휘튼대학과 나약선교사대학을 졸업한 폴은 유럽을 방문했을 때 스페인선교의 사명을 느꼈고 방송선교가 적합하다는 생각에 방송선교의 계획을 세웠다. 지브롤터 해협 건너편 모로코의 탕헤르(Tangier)에 아버지 랄프의 도움으로 어려움 끝에 “탕헤르의 목소리”가 유럽과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 철의 장막을 뚫고 동유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모로코의 독립으로 몬테카를로스로 옮긴 TWR은 그 이후 세계적으로 그 방송망을 확대하였다. 헌신적이고 유능한 직원들, 기적적인 재정의 해결, 매월 선교부에 쇄도하는 수백 통의 편지들이 모두 TWR의 성공을 대변해 주고 있다.


로버트 스피어 (Robert E. Speer, 1867-1947) ‘학생자원운동(SVM) 정신의 구현자’라고
불렸던 로버트 스피어는 역시 SVM의 중추였던 죤 모트와 일생 내내 두터운 우정을 유지하
였고 모트처럼 평신도로서 해외선교운동에 헌신하였다. 프린스턴을 졸업한 그는 SVM의 순회서기가 되어 1년동안 천명 이상의 해외선교자원자들을 모집하였다. 선교사로 나가려고 준비하는 중 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선교부의 최고 행정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해왔다. 수많은 학생들을 선교사로 보내고 자신은 본국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아 번민했지만 핵심자리에서 해외선교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 수락하여 70세까지 46년간 사역하였다. 은퇴후에도 여러 대학과 집회에서 강연하며 해외선교를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피터 데이네카
(Peter Deyneka) 피터 데이네카의 슬라브복음선교회(Slav Gospel Association)은 자체적으로 방송국을 소유하지는 않았지만 방송을 복음전파의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 여겨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전세계 선교방송국을 통해 방송하였다. 1914년 16세의 나이로 러시아에서 미국에 온 피터는 회심 후 러시아를 오가며 복음을 전하다 정치적 상황이 급변하여 1930년 이후로는 여행도 복음도 전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동유럽선교에 열정을 가지고 그는 비슷한 비젼을 가진 이들과 슬라브복음선교회를 조직하였다. 클래런스 죤스의 주선으로 HCJB의 단파로 소련에 방송을 시작하였고 폴 프리드가 탕헤르에 TWR 방송국을 세우자 피터는 이를 활용하여 더 많은 프로그램을 슬라브 국가에 보냈다. 극동방송국과 다른 방송선교회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1960년대에는 소련에만 매달 600개 이상의 SGA 프로그램이 방송되었고 피터는 소련을 다니면서 SGA의 방송 프로그램에 대해 고마워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SGA는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지만 방송선교가 역시 주된 사역
이었다.



죠이 리더호프
(Joy Ridderhof) 방송선교가 세계복음화를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한편 그 한계점이 있었다. 그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언어를 쓰는 부족들은 그 혜택에서 제외되어 있으며 설령 언어가 알려져 있다 할지라도 사용인구가 적으면 그들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 프로그램을 제작하거나 방송할 수 없었다. 성경번역은 부족을 언어를 배운다는 것도 쉽지 않았고 또 그 언어를 문자화해서 부족들을 공부시켜 성경을 읽게 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죠이 리더호프가 이런 문제점들을 위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는데 그녀는 온두라스의 작은 부족을 위한 녹음선교의 길을 개척했던 것이다. 1930년대 초에 죠이는 독신선교사로 온두라스에 갔는데 6년 뒤 건강을 헤쳐 고향 로스 엔젤스로 돌아왔다. 거기서 두고온 선교지 사람들을 생각하고 녹음을 통한 선교를 고안해 내었다. 그 이후 원주민의 목소리로 복음의 내용과 음악을 녹음하여 선교하는 녹음선교회(Gospel Recording)가 1941년 정식으로 조직되었다. 멕시코와 중미를 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35개의 새로운 언어와 방언을 녹음하였고, 알래스카, 필리핀 그렇게 녹음선교의 사역이 펼쳐졌다. 현재까지도 녹음선교회는 그 사역을 계속해 오며 수많은 언어와 방언으로 녹음 테이프를 만들어 전세계에 배포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베티’ 그린
(Elizabeth ‘Betty’ Greene, 1920-1997) 항공선교는 묘하게도 여성에 의해 시작되었다. 베티 그리인을 MAF (Mission Aviation Fellowship)의 설립자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전문사역으로서의 항공선교의 개념을 처음 소개하고 항공선교 초기에 가장 큰 공헌을 했던 사람이었음에는 틀림없다. 그녀는 최초의 전임 사역자였으며 새로 탄생한 선교회의 최초의 조종사였다. 2차대전 초기에 공군에서 복무했던 뛰어난 조종사로 전쟁중에 기독학생회지에 항공선교의 필요성과 방향, 계획에 대한 논문을 썼고 그것을 읽은 해군 조종사 짐 트럭스톤(Jim Truxton)은 크게 공감을 하여 베티에게 항공선교회를 조직하는데 합류를 권하였다. 그리하여 MAF가 조직되었고 곧 위클리프선교회의 요청을 받고 베티는 멕시코 정글, 페루에서 사역하였고, 수단오지선교회의 요청으로 동부 아프리카에서 수단, 에티오피아, 우간다. 케냐, 콩고 등지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을 조력해 주었으며, 마지막 사역을 이리안 자야에서 수행하고 은퇴하여 본부에서 사역하며 항공선교를 홍보하고 조종사를 모집하는 일을 하였다.



도날드 맥가브란
(Donald McGvran, 1897) 맥가브란은 인도의 하다에서 선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콜롬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은 후 다시 20년 정도 더 인도에서 사역하면서 대중운동(Mass Movements)에 대해 연구하였다. 오래전부터 그는 현재와 같은 선교사들의 사역을 통해서는 세계복음화라는 목표의 달성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전략이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때부터 여러 기독교학교들에서 선교학에 대해 강의하였고 1961년에는 기독교 역사상 선교방법론에 대한 연구가 가장 활발했던 것으로 유명한 교회성장연구소(Institute of Church Growth)를 세웠다. 그에게 있어 개선책은 대중운동이었다. 즉 부족 전체나 혹은 동질성집단(Homogeneous Units) 전체를 기독교로 이끄는 것이다. 그런 집단-개인의 개종은 개별적인 회심보다 훨씬 더 안정되고 교회성장을 지속하게 해준다. 동질성집단의 원리라고 명명한 맥가브란의 대중운동 개념은 1974년 로잔회의에서 발표된 후 세계에 널리 퍼졌다. 그는 1955년 이전까지 모든 선교회를 지배하고 있던 전통적이고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선교방법을 뒤흔들어 놓았다. 맥가브란이 그처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몇몇 신학교에서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렀던 선교학을 전문적 연구 차원으로 부상시켰다는 데 있다.





케네스 스트래컨
(R. Kenneth Strachan) 라틴아메리카선교회(Latin American Mission)의 설립자인 캔 스트래건과 그의 아내 수잔 사이에서 태어나 라틴 아메리카에서 자란 케네스 스트래건은 20세기 선교전략에 있어 탁월한 식견을 보여주었다. 그가 개발한 심층복음화(Evangelism in Depth)는 그의 저서 「복음화를 위한 혁명」 보여주는 바와 같이 가히 혁명적인 것이다. 아버지 사후 원치 않았던 선교회를 떠맡게 되었고 점차 사명감을 가지고 사역하기 시작하였다. 대규모집회를 통한 전도활동들은 외적으로 성공을 거두어 왔으나 그런 방법으로는 라틴 아메리카 복음화를 이룰 수 없겠다는 회의가 일기 시작했고 결국 대규모 전도팀이 내방하는 것보다 교회가 중심이 되어 전도에 전도에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복음화를 위한 하나님의 중점적인 계획이라고 믿었다. 이로부터 교회의 총력동원(Total Mobilization of the church)이라는 전략을 개발해 내었다. 평신도를 훈련시켜 전도활동을 극대화한다는 취지의 심층복음화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고 선교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밥 피어스 (Bob Pierce, 1914-1978)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일에 나도 마음 아파하자”라는 좌우명을 가졌던 밥은 실로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의 친구였다. 미국 대공황의 어려움속에서 근근히 순회전도자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던 그는 청소년사역에 헌신하다가 중국에서 청소년집회를 인도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1947년 중국을 방문하였다. 두번째 중국에 갔을때 고아원을 방문했다. 뼈만 앙상하게 남고 감기에 걸려있는 어린 소녀를 보고 ‘이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느냐?’라고 보모에게 항의할때 이미 수용인원의 4배가 넘는 고아들을 돌보고 있던 그 고아원의 보모는 ‘그러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하며 그 아이를 그의 품에 안겨 주었다. 이것이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어 그 후로 밥은 기독교자선사업에 헌신하게 된다. 중국의 공산화로 그곳에서 사역할 수 없게 되자 1950년 전쟁으로 초토화된 한국을 방문하여 불쌍한 아이들의 고통을 보고 국제선명회(World Vision International)와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음식과 의복과 약을 제공하기 시작했고 몇 년이 안 되어 2,000명이 넘는 고아들을 돌보았고 수 년이 지나자 그 수는 100배 이상 늘어났다. 10여년간 그는 세계에서 여행을 가장 많이 하는 10인 중의 한 사람이 되었고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보낸 사자로서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동서를 횡단하며 기독교인들에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도와 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렇게 모금된 수십만 달러는 세계각처의 고아원, 병원, 복음전도집회소 건축을 비롯한 구호사역에 쓰여졌다.


브라더 앤드류와 오픈도어스 선교회 (Brother Andrew & Open Doors) 브라더 앤드류는 네덜란드의 평신도로 성경을 자유롭게 사거나 읽을 수 없는 지역에 성경을 밀입하여 배포하는데 헌신하였다. 오픈도어스 선교회는 반기독교정권과 정면대결하는 정책을 펴고 있어 국가의 법과 권위를 무시한다는 비난을 받으면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대답한다. 15년간 앤드류는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단 한번도 체포당하는 일 없이 성경을 철의 장막 안으로 반입했다. 그가 「하나님의 일군」책을 쓰기까지 그의 사역은 거의 비밀에 싸여있었다. 그 책이 출판디자 후원금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전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사역에의 참여를 희망해왔다. 동시에 공산국가들도 그의 사역을 알게 되어 그는 요시찰 인물이 되었으며 동구권 여행을 사실상 금지당했다. 오픈도어스의 유명하고 논란이 많았던 성경밀수작전은 1981년 “진주작전”이라고 불린 600만 달러를 들여 200백톤의 성경을 중국으로 반입했던 작전으로 타임스지는 ‘중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성경반입작전이었다’고 표현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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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윈터 (Ralph Winter, 1924-) 오늘날 혁신적이고 비젼에 가득 찬 선교의 지도자로 미국선교센터(U.S. Mission Center)의 랄프 윈터를 꼽을 수 있다. 캘리포니아 공대를 졸업하고 코넬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프린스톤 신학교까지 마친 그는 과테말라의 마야 인디언 가운데서 10년간 사역하다가 도날드 맥가브란의 요청을 받고 풀러신학교 세계선교원에 합류하였다. 그후 1976년 무일푼으로 미국세계선교센터를 건립하고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곳에 사는 1,700으로 추산되는, 20억이 넘는 미전도종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막중한 짐을 짊어졌다. 미국선교센터는 여러 교회와 학생단체들과 연계된, 수십개 선교회로부터 온 300명이나 되는 사역자들을 망라한 ‘벌집’이었다. 센터는 본질적으로 선교단체들이 협력하는 ‘전략창고(Think Tank)’의 역할을 감당했다. 랄프는 ‘전시생활(wartime lifestyle)’을 하였는데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전시생활은 보통 때보다 돈이 더 들 수도 있고, 덜 들 수도 있다. 만일 어떤 군인이 참호 밖에서 휴대용 식량을 먹고 있다면 그는 많은 돈을 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조종하는 전투기는 한달에 4만 달러를 유지비로 쓸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전시는 평상시와 모든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다. 선교를 위해 뛰는 사람은 그런 전시생활을 해야만 한다.’ 랄프가 선교에 끼친 최대 공헌은 많은 선교회들과 개인들이 그를 통하여 세계선교에 대한 계획과 비젼을 새롭게 하고 아이디어를 얻었으며 결심을 새롭게 했다는 데 있다



돈 리챠드슨 (Don Richardson) 오늘날 서구에서 가장 흥미를 자아내고 실제적인 선교이론가 중 한 사람이 돈 리챠드슨이다. 그의 책 「평화의 아이(Peach Child)」「대지의 주인들(Lords of the Earth)」은 타문화권 선교의 어려움을 평신도들에게 전해주었다. 그의 화해유비론(Redemptive Analogy: 영적진리를 토착민 풍습에 적용하는 원리)은 1973년 달라스 신학교의 한 세미나에서 발표된 후 많은 비판과 지지,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20세 청년이었던돈은 1955년 프레이리성경학교의 예배 때 뉴기니아 식인종에게 가겠다는 서약을 하고 1962년 첫 아이가 태어나길 기다렸다가 아내 캐롤과 함께 뉴기니아로 건너갔다. 그들에게 맡겨진 싸위(Sawi)족은 배반과 배신은 이상적인 규범이고 식인풍습과 해골사냥의 풍습이 복합된 문화를 가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부족이었다. 오히려 그의 사역때문에 가까이 오게된 부족들이 싸움만을 일삼자 그는 포기하고 떠나기로 하였다. 돈이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그들은 서로 화해하기로 결정하고 특유의 평화의식을 거행했다. 그것은 자기의 자식을 적에게 주고 대신 한 아이를 데려옴으로써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것은 돈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희생하신 뜻을 싸위족들에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유비가 되었다. 돈의 가장 뛰어난 학문적 걸작은 기독교 개종운동을 다룬 그들 마음 속에 있는 영원(Eternity in Their Hearts)라는 책이다. 그가 다년간의 연구를 통해 얻은 결과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창조자를 인정하는 “어떤 위대한 정신(One Great Spirit)”이 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4장 16-17절의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을 증거하셨다는 말씀에 기초하여 돈은 선교사들에게 자신감을 갖고 사역하라고 권했다. 그는 연구를 통하여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창조의 신 개념을 기독교와 관련시키면 큰 성공을 거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선교사들은 이 엄연한 사실을 무시하고 무조건 열심만 내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아마 돈 리챠드슨 처럼 평신도나 학자들에게 똑같이 지지를 받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토마스 왕
(Thomas Wang) 중국 북경의 3대째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토마스 왕은 11살때 불타는 전도자 죤 성을 통해 회심하고 15세때 하나님의 사역에 전임으로 사역하기 시작하였다. 어바나선교대회에서 도전을 받고 1차 NACOCE(중국선교를 위한 북미대회)를 개최, 중국교회 지도자들이 380명 모임으로써 선교를 위한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1974년 스위스에서 열린 로쟌대회에서 중국교회 지도자들을 독려하여 CCCOWE (Chinese Coordination Center of World Evangelism - 세계선교를 위한 중국협력센터)를 창설하고 1976년 홍콩에서 중국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선교를 위한 선교대회를 개최하였다. 그 후 로쟌운동의 국제총무로 임명되어 1989년 마닐라에서 열린 2차 로쟌대회의 사무총장으로 운영을 담당하였다. 1989년 서기 2000년까지 대사명의 미완성과업달성을 목표로 미전도종족을 향한 교회와 선교세력들을 규합, 조정하는 기독교 21세기운동(AD 2000&Beyond Movement)을 주도하였다. 기독교 21세기운동의 여호수아작전2000은 세계종족의 제자화를 향한 기독교역사상 최대의 전략적 동원운동으로 이 운동을 위하여 여러 나라의 여러 교단과 선교기관들이 열정적으로 후원하였다. “2000년까지 모든 종족에게 교회를!”이었다. 그 비젼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우리는 교회가 없는 종족가운데의 교회개척사역에 헌신하는 움직임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음을 보고 있다.

 


패트릭 죤스톤
(Patrick Johnstone) 패트릭 존스톤은 20세기 선교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세계선교의 비젼에 관한 한 그는 윌리엄 캐리에 근접한 인물이며 어떤 면에서는 이 시대의 윌리엄 캐리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아프리카에서 선교사역을 하였고 현재는 WEC 국제본부 선교정보연구실 대표로 있는 그는 그의 책 「세계기도정보Operation World)」를 통해 20세기 교회의 선교사역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전세계의 각나라, 각 족속의 복음화상황이 손에 잡히게 들어옴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남은 과업을 바라보며 비젼에 불타게 했다. 선교정보 수집과 분석, 전략설정에 평생을 바치고 있는 선교전략의 세계적 권위자인 죤스톤의 두 번째 저서 「교회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큽니다」는 매우 광범위하며 현재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사건들에 선교적인 통찰력을 더해준다.



루이스 부시 (Luis Bush) 현대 세계적인 선교지도자인 아르헨티나에서 태생의 루이스 부시는 1989년 마닐라에서 열렸던 2차 로쟌대회에서 미전도종족이 집중되어 있는 위도 10-40도 지역을 표현한 “10/40창” 개념을 주창하여 이 지역의 복음화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 개념을 통해 1993년부터 시작된 “창을 통한 기도”운동은 3천5백만명의 중보기도군단을 동원하였다. 부시는 한국 서울에서 열렸던 GCOWE’95에서 전세계에서 최우선 미전도종족을 향한 교회개척운동인 여호수아작전 2000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현재까지 있어왔던 어느 것보다도 그 규모가 크고 널리 보급되어진 세계선교의 네트워크인 기독교 21세기운동(AD2000 & Beyond Movement)의 국제총무로 사역하였고 현재도 선교운동의 지도자로 선교동원과 강연에 힘쓰고 있다.



죤 럽
(John Robb) OMF의 선교사로 말레이시아에서 사역하였던 죤 럽은 그후 월드비젼에 속하여 100여개국을 돌며 선교사훈련 및 자문으로 일하였고 부탄, 캄보디아, 보스니아, 모로코 등지에서 초교파적 특별기도운동을 일으켰다. 기독교21세기운동(AD2000 & Beyond Movement)에서 미전도종족 국제총무로 사역하였고 현재 전세계의 선교 네트워크들 간에 연결점이 되어 협력사역을 조장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어진 대사명라운드테이블(GCR- Great Commission Roundtable)의 지도자로 협력선교의 선봉장으로 사역하고 있다. 저서로「종족선교개념의 힘」,「평화를 만드는 기도의 권능:발칸반도 등 분쟁지역 사례」등이 있다.
선교자료: http://www.omygod.us/

[한국교회 선교사 파송 현황] 동아시아↑유럽↓

지역간 평준화 시급

 



선교사 파송 2만명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선교사 파송 주체와 지역 다원화,‘선교사 토털케어’(선교사자녀 문제 등 선교사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체계) 인프라 구축이 요청된다. 이번 조사 결과 200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한 단체는 12개로 선교단체 파송 선교사 7336명 중 68%를 차지,선교사 파송이 일부 단체에 너무 집중돼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UBF CMI YWAM CCC 등 청년·학생선교단체들이 대거 상위권에 진입,이들이 한국 선교운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여전히 큰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선교사 1만4012명 중 2년 이상 장기선교사는 1만2594명(89.9%),2년 미만 단기선교사는 1418명(10.1%)로 전년 대비 각각 1410명,507명 증가했다. 이는 한국 교회가 전반적으로 성장 침체에도 불구하고 선교 헌신자들이 증가하고 있으며 파송단체나 선교사 스스로가 장기선교를 선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현재 개교회나 선교단체를 통해 1주에서 1개월여의 단기선교 활동을 경험한 젊은 기독인 중 선교사 헌신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감안해 이들이 6개월에서 2년까지 활동하는 단기선교사가 된다면 선교사 수는 대폭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모 포함,목사 선교사는 1만2295명(64.7%)인 반면 평신도 선교사는 2963명(35.3%)으로 한국 교회는 여전히 목사 선교사 위주로 파송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따라서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최성규 목사)와 KWMA가 추진하고 있는 ‘2020년까지 100만 자비량 선교사 양성,2030년까지 10만명 선교사 파송’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개선이 시급한 것으로 분석된다.

선교사자녀(MK)는 19세 미만이 5499명(74.5%),20세 이상이 1881명(25.5%)으로 전년 대비 각각 503명,906명 증가했다. 파악되지 않은 단체의 선교사자녀 수를 감안하면 1만여명에 이를 것이라고 선교전문가들은 전망한다. MK 증가에 따른 후속 대책이 절실하다. 이는 선교사에 대한 전략적 재배치나 사역 확대의 걸림돌로 최우선적으로 제기되는 것이 MK 문제이기 때문이다.

선교사의 지역별 분포를 보면 중국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가 4068명(29.3%)으로 전년에 비해 1208명 증가했다. 증가 추세는 타지역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동남아 2012명(14,5%·전년 대비 +72명) 태평양·오세아니아지역 941명(6.8%,+462명) 중남미 863명(6.2%,+65명) 중앙아시아는 825명(5.9%,+142명) 인도를 중심으로 하는 서아시아 756명(5.4%,+48명)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 697명(5.0%,+17명) 중동 623명(4.5%,+12명) 사하라 사막 이북 북아프리카 366명(2.6%,+106명)으로 나타났다.

반면 유럽은 1422명(10.2%)으로 전년 대비 104명이나 줄어들었다. 이는 유럽이 점차 이슬람화가 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상적인’ 수치가 아니다. 또 중앙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 등 이슬람권 선교사가 1814명(13.1%)에 불과해 이들 지역에 대한 한국 교회의 관심이 요청된다.

순회선교사 및 국내 외국인근로자 대상 선교사와 비거주 선교사는 138명(1.0%)으로 전년에 비해 33명 증가했다. 그밖의 국내 행정·동원 사역선교사는 327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파송 선교사 중 향후 5년내 은퇴 예정자는 전체의 2% 미만에 불과하는 등 한국인 선교사들의 평균 연령대가 아직 젊은 것으로 보인다. 미국 영국 등 전통적인 선교강국은 향후 은퇴할 선교사 수가 새롭게 선교사로 허입될 수보다 더 많은 것으로 예상된다. 이 때문에 세계 선교계는 한결같이 한국 교회에 남다른 기대를 갖고 있다. 랠프 윈터(미국 세계선교센터 설립자) 데이비드 할리(OMF 국제총재) 박사 등은 앞서 본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 교회가 향후 미국을 대체할 선교강국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선교전문가들은 이번 조사와 관련,“선교사 파송 수 증가에 못지않게 교단 선교부와 선교단체간 보다 원활한 협력 방안을 모색하고 목사 선교사와 평신도 선교사간 사역적인 균형을 이루고 지역적 편중화를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번 결과는 오는 9일 KWMA 정기총회를 통해 1차로 발표되며 향후 보강조사를 거쳐 최종적인 분석 자료가 공표될 예정이다.

◇ 한국세계선교협의회란

(사)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는 14개 교단 선교부와 90개 선교단체,239개 지역교회가 회원으로 가입된 국내 최대 선교협의체다.

1990년에 창립된 KWMA는 교회 선교의 활성화,선교 정보 수집 및 제공을 통한 선교의 정보화,효과적 선교를 위한 선교의 전략화,상호 협의·조정 및 네트워크를 통한 선교 동력화 등 4대 비전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증경회장은 곽선희(소망교회 원로) 정진경(신촌성결교회 원로) 목사 등이며 현재 대표회장은 박종순(충신교회) 목사이다. 정 목사는 명예이사장,박 목사는 이사장으로도 재임하고 있다.

부설기구로 선교행정학교 한국선교정보네트웍 선교신용평가기구 선교사위기관리연구소 선교사계속교육진흥원 선교전략연구소 등이 있다. KWMA 산하기구로 연합선교훈련원,독립연대기구로 미전도종족선교연대(UPMA) 선교상담지원센터(MCC) 한국선교사자녀교육개발원(KOMKED) 등이 있다. 선교사자녀 학교인 한국마닐라아카데미와 방콕국제학교 지구촌고등학교 한동국제학교 등과도 협력하고 있다. 부산에는 (지역)세계선교협의회를 두고 있다.

KWMA는 특히 오는 6월 한달간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공동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세계선교대회와 선교전략회의를 갖고 새로운 선교 부흥 열기를 점화시킬 계획이다. 구체적인 선교전략 및 동원계획 등을 세워 2030년까지 10만명 선교사 파송 시대를 열어갈 예정이다. 특히 본보와 함께 해마다 한국 교회의 선교 계량화 작업을 추진,선교의 내적 성장에도 힘쓰게 된다(02-3280-7981).

[한국교회 선교동향 조사] 지구촌 곳곳 선교한류…내실 다질때

 



한국선교연구원(KRIM·원장 문상철)은 한국 교회 선교동향을 조사한 결과 2004년 12월말 현재 한인 선교사가 가장 많이 활동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1482명)이라고 10일 밝혔다. 이어 미국 994명,일본 691명,필리핀 666명,러시아 407명,독일 346명,태국 327명,인도네시아 322명,인도 300명,캐나다 221명 순으로 나타났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 독일 캐나다의 경우 한국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 국제대학선교협의회(CMI)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소속 선교사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또 한인 선교사의 종교권별 분포는 기독교권 31.8%,이슬람권 22.9%,공산권 19%,불교권 14.4%,정령숭배권 7.7%,힌두권 3.9% 등으로 조사됐다.

문 원장은 “한국 교회는 2004년말까지 165개 선교단체를 통해 160개국에 1만2874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면서 “한국은 비서구선교의 중심국가일 뿐 아니라 세계선교의 주도 세력으로 선교를 통해 세계 교회에 ‘영적 한류(韓流)’를 확산시켜가고 있다”고 말했다.

문 원장은 “한국 선교계는 향후 국제단체와 국내 자생선교단체간 파트너십과 네트워킹,전문인 선교 패러다임의 완전 정착 등을 통해 새로운 선교 열정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구와 달리 선교의 압축 성장을 경험한 한국 교회는 선교 운동의 국제화와 지역화간의 조화,선교사에 대한 유지 관리 시스템 구축,선교사 자녀(MK)의 전략적 양육 등에 힘써야 할 것으로 분석됐다.

이번 조사에 따르면 선교사의 중도탈락도 적지 않다. 1995년부터 2004년까지 2785명,2004년에는 443명으로 중도탈락률이 3.4%에 달했다. 문 원장은 “선교사의 중도탈락은 파송단체와의 갈등,건강 및 동료들과의 문제 등 복합적인 원인 때문”이라며 “이를 막기 위해서는 커뮤니케이션 훈련,선교사 케어(선교사 허입에서부터 은퇴까지 관련된 모든 분야에 대한 돌봄) 분야 개선 등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선교사 훈련 개선 방안과 관련해 인성 및 영성훈련 보강,선발 과정의 전문화,재교육 기회 확보 등이 우선 고려돼야 할 것으로 지적됐다.

한편 선교사의 학력은 대졸 이상이 94.1%이며 그중 박사학위 소지자도 3.3%에 달했다. 이는 서구 선교사들의 평균 학력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문 원장은 “이런 고급 인력은 한국 교회의 자원일 뿐 아니라 국가적 자원으로 이해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국민일보 / 함태경 기자

 


 

세계선교 현황과 한국교회의 선교적 사명  / 노봉린

 여는 글

한국교회는 20세기 말에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부여받은 교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택해 주신 이유는 우리 한국교회가 세계복음화를 위한 선교사역에 가장 중요한 신앙갱신의 요소를 소유하고 있다. 급변하는 세계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한국교회가 더 효과적인 선교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가에 대해 더 깊은 연구와 기도가 요구되고 있다.

 

I. 급변하는 세계 선교지 현황

우리는 오늘날 급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정치,경제,문화가 사회 구조와 방식이 급변한 상황 하에서 한국교회는 변화하는 선교지 실정을 자세히 연구하여 이 시대에 맞는 선교전략을 창조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1. 서구교회의 선교 역사

현대 개신교 선교의 근원지는 유럽과 미국이라 할 수 있다."현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William Carey가 영국을 떠나 1792년에 India, Calcutta에 도착하여 선교 운동을 시작하였고 그후에 Robert Morrison은 중국남부로 (1809),Judson Taylor는 중국대륙으로 (1865),Adoniram Judson은 버마로(1813),Divid Livingston은 아프리카로 (1841),그외에도 수많은 서양의 선교사들이 복음 사역자로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서양 식민지 세력의 물결을 타고 선진국가의 풍부한 교육, 기술 재정을 바탕으로 선교운동을 하였기 때문에 후진국가들은 이들에게 많은 것들을 기대하고 의존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선교지 원주민들의 교육,문호,경제의 질적 성장으로 인해 선교사와 원주민들 간의 관계가 의존적인 것이 아닌 이전과는 다른 상호 동등한 입장이라는 동반자 개념이 되었다. 요약한다면,유럽 Portugal의 Vasco da Gama가 남아프리카의 Cape Town을 1498년 처음으로 발견한 이후 제2차 세계대전까지는 Vasco de Gama시대 (서구 식민지 시대,1498-1945)로 칭해지는 시기로써 이 시기에는 주로 서양인이 제3세계인을 지배하는 형태의 선교전략을 볼 수 있다. 그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는 100여개의 국가들이 식민지로부터 독립해 자유국가로서 자발적인 정책을 쓰고 있는데 오늘날 제3세계국가에 찾아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특징은 자국의 전통문화를 부흥시키려는 운동이다. 예를 들면, 대만의 거리에서는 "중국문화 부흥운동"이라는 커다란 간판들이 어디서나 흔히 눈에 띄이고 정부에서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매스콤을 통해 전통문화를 강조하고 있다. 불교,유교,도교를 함께 중국 전통종교로 강조하는 반면, 기독교를 서양인의 종교로 내몰고 선교사들의 입국과 선교 활동에 규제를 가하는 정책을 쓰기도 한다. 서양의 기술은 받아드리되, 자국의 전통문화를 지키자는 주장인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선교지의 실정을 잘 파악하고 연구하여 각 지역에 적합한 선교정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특히 한국교회가 동양인으로서 아시아 뿐 아니라 아프리카, 남미, 유럽,북미에까지 선교사를 파송하여 선교운동을 전개해야 하는 이때에 세계 선교에 대한 책임을 다시한번 느끼지 않을 수 없다.

2. 10도/40도 창(10도/40도 window)

지구상의 위도 10도로부터 40도 사이의 지역을 창문을 통해 들여다 보면 그곳에서 62개 국가를 찾아볼 수 있는데 그 국가들에 살고 있는 인구는 전세계 인구 53억의 거의 2/3을 차지한다. 그러면 10도/40도 창 내에 살고 있는 막대한 인구와 한국교회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한국교회는 교회사적으로 볼 때 초창기부터 선교에 관심이 많은 교회였다. 특별히 1970년대로부터 한국교회는 외국선교에 비중을 두고 현재 1700여명이 가까운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이러한 선교운동은 한국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아시아의 많은 국가에서도 전개되고 있다. 1990년 8월에 충현교회에서 열렸던 아시아 선교대회(Asia Missions Congress)에서는 한국인 100명을 포함, 1,300명이 참석하여 "세계 선교는 아시아의 도전"(World Mission The Asina Challenge)이라는 주제하에, 이전의 서방교회 선교사들이 했던 일을 이제는 전세계 복음화를 위해 아시아의 선교사를 세계 각지에 파송하자고 결의하였다.

기독교는 세계 4대 종교의 하나이며 힌두교, 불교,이슬람교보다도 더 많은 신자를 가지고 있다. 세계 인구 53억의 32%를 차지하는 기독교인의 대다수가 10도/40도 창내의 62개국에 살고 있는데 비율로 말하면 전세계 인구의 거의 2/3가 되는 것이다. 또 31억 인구 가운데 97%가 55개국의 비기독교 국가이다. 미국의 선교학자 Luis Bush박사는 10도/40도 window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 창내의 지역은 비기독교 국가 지역으로서 기독교에 심각한 도전을 던져 주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최초로 복음화 된 지역, 10도/40도 창내에는 4개의 대그룹이 있다. 첫째로 이슬람국가 28개국에 7억 6백만이 이슬람신도(10도/40도 창내 인구 31억 4천만 중 22%)가 있고 둘째로 2개의 힌두교국가(인도,네팔)에 7억 천 칠백만의 힌두교인(23%),세째로 10개의 불교국가에 약 3억의 불교인(10%)이 있으며 네째로 6개의 공산국가에 12억(38%)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다. 이 10도/40도 창내의 비기독교국가들은 1945년 이후 각기 "국가의 전통문화 부흥"이라는 명칭을 걸고 막대한 비용을 소비하면서 매스컴을 통해 전통문화 부흥운동을 강조하는 동시에 전통 종교를 강조하고 있다. 이 10도/40도 창내의 많은 비기독교 국가들은 선교사수를 \'b0㉫老求?정책을 시행했을 뿐 아니라 선교사들의 사역을 제한하는 경우가 많았었고, 그 국내 교회와 기독교인을 억제하며 교회 성장 활동을 용납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한국선교의 대비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한국교회의 선교운동은 앞으로 특히 10도/40도창내의 비기독교인을 상대로 열심을 다해야 할 것이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10도/40도 창내의 비기독교인에 대한 새로운 선교정책을 창조해야 할 것이다. 10도/40도창내 국가들의 실정을 먼저 충분히 연구하며 앞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데에도 다양한 형태의 선교사, 즉 신학교를 졸업한 professional 선교사, 직업 선교사, 학생선교사들이 다종의 선교활동을 통하여 선교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10도/40도 창내의 국가는 사탄의 영력이 강한 지역으로 인간의 수단과 방법만으로는 복음이 들어가기 어려운,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필요한 지역임을 더불어 기억해야 할 것이다.

3. 외국선교사 VISA제한

선교사가 외국에서 선교하는데 VISA는 필수적으로 요구되는데 특별히 아시아의 선교지들을 볼때 외국 선교사의 VISA규제정책을 채택하는 나라들이 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선교사들의 VISA 규제 문제는 3개 지역으로 구분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선교사 VISA 를 받기가 상당히 어려운 나라로서 인도, 파키스탄,방글라데시,스리랑카,싱가폴,말레이지아,버마,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북한 등이 있다.
둘째로 선교사 VISA가 나오지만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 나라로서 인도네시아,태국을 들 수 있다.
셋째로 VISA얻기가 그리 어렵지 않은나라들로서 필리핀,홍콩,대만,한국,일본을 들 수 있다. 각국의 상황을 고려하여 특별히 VISA획득이 어려운 지역에서는 직업선교, 의료선교 등의 방법을 통한 선교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4. 동구라파와 중공선교 활동 가능성

공산주의 무너지게 됨에 따라 동구라파의 전국가들이 민주화를 향한 변화에로 나아가 종교의 자유를 회복해 가는 이때에 우리에게는 해외선교를 위한 또 하나의 가능성이라는 기회가 주어졌다.

또 현재 중국대륙에서는 12억 인구를 대상으로 하는 선교운동의 여러가지 가능성들이 보여지고 또 들려지고 있다. 아직은 선교사라는 명칭으로 중국대륙의 입국이 불가능하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는 많이 있으며 이 나라에서 역시 빠른 시일내에 민주화와 종교자유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교회는 특별히 동구권의 나라들과 중공을 비롯한 타 공산권국가를 향한 선교운동을 강력히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한가지 방면으로만 선교할 수 있는 나라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 반면 선교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나라들의 수가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이에 대한 한국교회의 적절한 선교전략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II. 아시아교회의 근본적인 7가지 문제점

필자는 1974년부터 1990년까지 지난 15년동안 싱가폴,대만 지역에서 아시아 신학협의회(ATA) 의 총무로 일하면서 Asia Theological News라는 잡지를 매3개월 출간했는데 한번은 이 잡지에서 아시아교회의 근본적인 문제라는 주제로 아시아 11개국 교회 지도자들에게 4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예를들면 당신 나라의 교회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이 무엇입니까? 또 이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방안은 무엇입니까? 등의 질문이었다. 11개국의 교회들로부터 받은 답변을 종합한 결과 7개의 근본적인 문제점 및 그 해결방안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1. 아시아의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전도의 열정을 더욱 강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아시아는 다른 대륙과는 달리 기독교의 역사가 짧고 필리핀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이 기독교 문화적인 옇양이 쇠약한 대륙이기 때문에 아직도 대다수의 아시아인이 복음의 메세지를 들어보지 못한 실정이며 또 아시아에는 정통종교의 영향이 상당히 강하므로 여타 종교들의 압력이 크다. 이런 상황하에서 전도를 남에게 미룰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언어행동 하나에도 심혈을 기울여 최선을 다 해야할 것이다.

2. 아시아의 교회 성장을 각 곳에서 볼 수 있으나 이 성장하는 교회들을 돌보아 줄 수 있는 목회자의 수가 적다는 것이다. 즉 교역자 빈곤난을 의미한다. 한국 내에서는 180여개의 신학교와 수만명의 신학생들이 있으므로 매년 3000명 이상의 졸업생을 배출하여 교회에 필요한 교역자를 충원할 수 있으나 아시아 타국교회의 상황은 우리와 상당히 다르다. 예를들면 현재 대만 2500교회 가운데 목회자가 없는 교회는 약 500개가 된다. 또 태국에서 제일 큰 교파인 태국 그리스도 연합교회는 263 교회에 목회자수가 68명뿐이다. 졸업생들에게 목회자로 헌신할 수 있도록 권면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3. 평신도 제자훈련이 긴급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현대에 와서 평신도의 사회적 위치가 중요하게 되었고 그들 자신 또한 성경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자 하므로 교회지도자들은 평신도 제자훈련에 대한 관심을 높일 뿐더러 좋은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4.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에 아시아 상황에 적합한 여러가지 방법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양선교사로부터 받아들인 그들 풍속의 기독교를 아시아 상황에 맞게 새로운 프로그램을 창조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한국교회의 새벽기도와 철야기도,기도원은 외국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한국적인 상황에서 일어난 기독교의 특징이라고 할 것이다.이와같은 상황에서 창조할 수 있는 신앙의 표현들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5. 신학적이 문제가 인본주의신학자들의 영향을 말미암아 아시아교회에 큰 도전을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이 주동이 되어 강조해 온 인권주의(Human Rights),한국의 민중신학을 포함하여 나날이 늘어가고 있는 아시아신학(Asian Theology),타종교와의 관계성을 맺는 종교다윈주의 신학들이 아시아 신학 토론에 큰 주제들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 하에서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정통으로 이어받을 보수신학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6. 아시아교회는 인간의 영위 세계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크리스챤의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불법,정치적인 압력,늘어만가는 빈부의 격차,사회불공평제도,도덕문란 등의 문제들을 성경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운동이 필요하다.

7.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무엇보다도 교회 내 자신들의 신앙 갱신문제라는 것이다. 기독자의 신앙과 행동이 일치되는 생활에서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죄악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비록 소수의 아시아 기독교인이지만 그들이 신앙갱신을 통하여 비기독교적인 사회에 커다란 영적인 도전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새로운 갱신을 경험할 때 더 큰 성장을 볼 수 있는 것이다.

III. 현대 세계 선교를 위한 기본 전제들

주후 2000년을 맞이하는 현대에 있어서 선교전략은 지난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것과는 다른 현실에 맞는 새로운 방법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아시아를 예로 든다면 전대륙 30억 인구중 기독교인이 단지 3%에 지나지 않는 이 세계 최대 대륙에서 나머지 97%의 비기독교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현대선교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각 나라 교회들이 외국선교사들의 재력이나 선교헌금에 의지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목회자나 평신도지도자들을 훈련시켜 그들로 하여금 자국복음화 운동에 적극 참여토록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21세기를 향한 현대선교전략은 다음 세가지면에서 살펴 볼 수 있다.

1. 자국민들을 향한 복음전파와 평신도제자훈련을 바로 자국내 기독교인들이 근본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2.제3세게 내에서 성장하고 있는 교회들을 교회 성장학적인 면에서 분석해 볼 때 성장의 주된 요인 중 하나를 성령충만한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의역할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런 이유에서 현대 선교사역의 우선적인 전략은 자국민 지도자 양성에 있다고 하겠다. 이들에게 교육을 시킨 후 책임을 부여하여 이들이 주의 사업에 전념케 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3.각 나라 교회 지도자들을 교육시키는데 있어 그들을 그들 대륙 안에서 교육시킬 장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시아안은 아시아에서 교육시키자"라는 운동이 아시아신학협의회 (Asia Theologica Association)를 통해 수년간 강조 되어왔는데 그 주된 이유는 이런 방식의 교육이 아시아 상황에 맞는 신학교육을 제공할 수 있으며 서양국가보다 훨씬 싼 학비, 숙비로 경비 절감이 가능하며 또 아시아의 신학생들이 서양에서 공부한 후 본국에 돌아가지않고 그곳에 계속 유하는 인재상실(Brain Drain)을 막을 수 있기에 더 많은 교역자 배출이 가능하다는 이유에서이다.

IV. 한국교회가 도울 수 있는 2개의 협력사역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과 교회 신앙 갱신에 관한 보고는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바이다. 특히 1980년대의 세계교회의 관심은 미국이나 유럽 교회가 아닌 한국교회에 있었으며 아직도 상당한 영적인 기대가 이 한국교회를 향하고 있다. 기독교인 수가 전세계적인 비율로 볼때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니고 경제력도 선진국과 비교해 볼 때는 떨어지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 한국교회가 타국교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마치 사도행전 3장에 기록한 바와 같이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 갔었을때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구걸할 때에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내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글어라"하고 그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게 한 것처럼 한국교회가 비록 많은 금과 은으로 타국교회를 도울수는 없을지라도 나사렛 예수와 성령이 한국교회에 베푼 충만한 은혜를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타국교회로부터 칭찬받고 있는 부분은 여러 영역이나 그 가운데서도 특히 다음 2가지 면은 그 특징으로 강조할 수 있는데 이는 타국 교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서 그들이 한국교회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들이라 본다.

1. 새벽기도,철야기도,기도원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에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특이하고 중요한 것은 새벽기도이다. 새벽기도는 1920년대 초 일제치하에서 핍박받고 있던 한국교회가 그 어려움의 상황 하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새벽마다 기도한 것이 기원이 되었으며 길선주 목사를 중심으로 이 새벽기도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현재 서울 명성교회(김삼환 목사)에서는 평상시 매일 새벽 4,000여명이 모여 기도하고 있으며 특히 새벽기도의 달(4월,9월)에는 만여명이 넘는 교인들이 오전 5시,6시,9시 3차례에 걸쳐 새벽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데 이는 전세게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국교회만이 특징이다.

충현교회에선느 이미 2차례에 걸친 KIMCHI(Korea Institute for Mission and Church Growth international) 세미나 기간 동안 작년 11월에는 동구권 7개국에서 온 29명의 목회자들과 또 금년 5월에는 동남아시아에서 온 65명의 중국교회 교역자들과 10일간의 신앙갱신 세미나가 있었는데 이들 외국손님들은 충현교회의 새벽기도회에 참석한 4-5천명의 신자들과 함께 기도회에 참석하면서 자신드의 신앙에 적지않은 충격을 받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에 몇몇 목회자들이 홍콩,마닐라에서 새벽기도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는것을 들었다. 이와같은 새벽기도, 철야기도,기도원 운동등의 외국교회로 수출할 수 있는 한국교회의 출산품이라고 할 수 있다.

2. 다수의 교역자 배출

한국교회는 교역자가 풍부하기로 유명하다. 170여개나 되는 신학교에 수만명의 신학생들이 있으며 매년 수천명의 신학교 졸업생이 배출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학구적이고 실천적이며 신앙생활을 겸비한 신학교육이 선교지에서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한국의 많은 대학졸업자들이 신학교에 진학한다는 사실은 한국교회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다. 방콕이나 마닐라에서는 한국선교사들이 합심하여 신학교를 세워 교회 사역에 적합한 교역자 양성 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러한 운동은 타선교지에서도 계속 일어나야 할 것이다.

V. 한국교회 선교전략의 10계명

오늘날 한국교회는 선교에 열정을 가지고 많은 교회들이 선교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선교에의 열정은 좋은 것이나 거기에 좋은 선교 방법과 전략이 따르지 않을 때는 여러가지로 비효율적인 결과가 될 것임을 명심하여 한국교회는 적합한 선교전략을 창조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한국교회 선교전략 10계명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1.세계 복음화를 위한 한국교회의 근본적인 선교전략을 한국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신앙의 요소를 통해 전세게적인 신앙갱신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데 있다.
2. 한국교회에서 대학생,평신도,교역자,선교사들을 가능한 한 많이 계속 파송해야 한다.
3. 외국의 교회지도자(교역자,평신도 지도자)들을 한국에 초청하여 단기간, 장기간에 걸쳐 교회성장과 신앙갱신운동을 성서적으로 가르쳐주며 그들에게 한국교회를 깊이 연구하며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4. 한국이 세계 선진국이 되기 위하여 국제화가 필요한 것 같아 한국교회도 선교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화가 필요하다.
5. 한국교회 선교는 각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는 원주민 교역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을 양성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6. 한국교회 선교는 독단적인 태도를 벗어나 선교지 원주민 교회와 다른 해외 선교단체들과 긴밀한 동반자 관계를 맺고 협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7. 한국교회 선교의 특징은 개교회 중심의 선교운동이 되어 왔으므로 선교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을 관할하기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으므로 앞으로는 국내 선교단체들과 선교지 선교사들 간의 연합운동을 일으켜 더 효과적인 선교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8. 한국선교사 자녀교육과 선교사 계속 교육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한국교회는 과거의 선교운동을 다시 회고하며 더 깊은 연구를 통하여 새로운 방안을 창조해야 한다.
9. 한국 내에 세계 선교 연구원들을 설치하여 지역별로 선교지의 실정과 선교정책을 철저히 연구하는 동시에 선교자료를 공급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각 지역 상황에 맞는 선교정책을 채택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의료선교,직업선교,단장기간선교 등의 필요성을 연구하는 것이다.
10.한국내의 많은 선교단체들 간 협조운동을 조성하기 위하여 한국세계선교협의회 같은 선교연합기관의 역할을 확대시켜 선교연합운동을 촉진시켜야 한다. 미국의 Interdenominational Foreign Mission Association (IFMA)과 Evangelical Foreign Mission Association(EFMA)를 좋은 예로 볼 수 있다.

VI. 한국교회가 가져야 할 자세

필자는 세계복음주의 협의회 신학분과 위원회의 총무직을 맡고 있는 까닭에 매년 3개월 내지 4개월 동안은 외국의 신학교를 방문하여 각 대륙에서 열리는 신학자회의에 참석하고 있으며 수많은 복음주의 교회지도자 및 신학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많은 회의들에 참석하는 동안 필자는 한국에서 왔다는 이유로 외국교회 지도자들 및 평신도 지도자들로부터 한국교회에 대한 질문을 여러차례 받았었는데,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반면 또 적지않은 수의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비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난 4월에는 Yugoslavia,Osejik시에 있는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복음주의 선교신학자들의 모임에 참석한 바 있는데 이 모임에는 세계 6대륙에서 90여명의 교역자, 신학자,선교학자들이 참석하여 "교회와 정부가 유지할 정의와 평화"라는 주제하에 토론을 벌였다. 이 모임에 참석한 동안 필자는 필리핀의 한 교회 여지도자가 마닐라에 거주하고 있는 백여명의 한국선교사들을 향해 던지는비난을 듣게 되었다. "그들은 한국교회가 필리핀교회보다 모든 면에서 우수하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사역에 있어서도 필리핀교회와 상의없이 자기나름대로 한국방식으로 선교를 하려 하기에 필리핀교회에 도움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피해를 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필자 자신이 상당한 충격과 더불어 슬픈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물론 마닐라에서 선교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선교사들이 모두 다 꼭 이런 비난에 대상이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왜 필리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했을까 하는 질문이 생기게 되었다.

지난 7월 중순에는 세계도처에서 60여명의 신학자들이 모였던 영국 런던바이블 칼리지에서의 국제신학교 인준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f Accrediting Agencies)에 필자역시 참석하였는데 여기서 필자는 오스탈리아 신학교 협의회 총무이자 신학교 학장을 맡고있는 한사람으로부터 "한국 교회가 근대에 급속도로 성장한 것은 좋았으나 제 자신이 볼 때는 그들이 세게에서 제일 나쁜 식민지 정책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는 평을 듣게 되었다.

이 두사람 외에도 타국교회 지도자들로부터 한국교회에 대한 비난의 소리를 여러번 득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필자는 내심 한국교회가 앞으로 세계 교회에 영적인 은혜를 베풀며 지도자적인 역할을 감당하려면 새로운 반성과 각오하에 타교회를 섬길 수 있는 종의 자세를 가져야함을 절실히 느꼈다. 타국의 기독교인들이 성장하는 한국교회로부터 은혜의 감격을 얻지 못할 때 그들은 한국교회만큼 성장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교회를 바라보며 열등감을 가질 수 있으며 또 그들로하여금 한국교회의 성장원인이 영적인 차원이 아닌 세속적인 차원에 있는 것으로 해석케 하는 결과를 빚을 것이다.

물론 1970년대와 1980년대의 한국교회의 영적부흥과 수적증가는 세계 교회에 자랑할 만한 것이다. 한국대학생선교회 김준곤 목사님의 통계에 의하면 1980년대초의 한국교회 성장비율은 매일 여섯개의 교회가 생겨나는 것이었으며 현재 한국의 교회수는 3,600이 넘으며 기독교인수는 전인구의 29%을 차지하는 천만이 되는 숫자이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만 하더라도 단일교회로서 60만이 넘는 교인이 있으며 신학교의 수는 180개가 넘고 매년 수천명의 신학생들이 이들 신학교에서 배출되고 있으며 1600여명의 선교사들을 전세계에 파송하고 있다. 특히 한국교회의 새벽기도,철야기도,기도원 등의 성령의 역사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 모든 것이 한국교회의 영적인 보배이며 자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꼭 기억해야할 것은 교회의 수적 증가나 대교회건물, 거액의 헌금, 수많은 신학교와 수만명의 신학생, 외국선교, 새벽기도, 기도원 등을 자랑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축복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섬기는 그리스도의 종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에 각국에서 찾아오는 외국교인들이 영적인 은혜와 감동을 받을 것이며 한국교회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주었던 교훈,"내가 그리스도아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말씀이 한국교회에 들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내생의 주인공이 된다는 말로 이렇게 될때 그리스도께서 새로운생의 각오와 사명을 주시고 모든 일에 축복을 내리신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가 겉모습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높일 때 우리는 더 많은 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을뿐 아니라 외국교회에도 은혜를 끼치며 그들로하여금 힘을 얻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외국교회의 한국교회에 대한 관심이 우리 교회의 외적인 숫자 증가나 겉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기독인들의 생활 속에 드러나는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관계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자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며 이런 모습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바이다.

결론

서론에서도 말했듯이 한국민족은 21세기로 향하는 이 시대에 세계복음화를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민족이다. 따라서 한국교회 선교운동은 세계 복음화를 위할 뿐만 아니라 세계 선교 비젼을 통한 국내교회의 신앙 갱신 운동과 교회성장에 큰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강신권 코헨대학원장이 말하는 ‘비전 153 프로젝트’ [2009-02-24 10:06]

▲코헨대학원 강신권 원장은 세계 153개국에 신학교를 세우겠다는 꿈을 가슴에 품고 사역에 매진하고 있다. ⓒ최우철 기자
강신권 코헨대학원장은 지금도 세계 153개국에 신학교를 세우는 꿈으로 가슴이 벅차다. 21일 새벽 비행기로 한국에 도착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일주일간 목도했던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변화들을 증거하며 여독을 잊은 듯 열변을 토했다. 인도네시아는 그가 신학교를 세우기로 목표한 153개 국가 중 75번째에 해당한다. 목표의 절반 가량을 이루는 시점에 인도네시아에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그는, 더욱 세계선교 목표에 대한 강한 믿음을 드러냈다.

세계 153개 나라에 신학교를 세우는 ‘비전 153’은 미국 남가주 토렌스에 위치한 코헨대학교가 30년 전부터 추진해 온 거대한 선교프로젝트다. 요한복음 21장에 근거한 이 ‘비전 153’ 프로젝트는 세계 153개 나라 현지에 신학교를 세우고 이 신학교 주변의 10개 도시에 분교를 세워 총 1530개 신학교를 세계 각지의 선교 전초기지로 삼는 것이 그 주 내용이다. 목표를 절반 가량 이룬 현재 강신권 박사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지난 30년간 이룬 75개 나라의 신학교 개척도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었다. 때때로 난관에 부딪혀가며 온 길이지만 개척 과정에서 체험한 세계선교의 큰 가능성들은 늘 마음을 새롭게 한다.

최근 다녀온 인도네시아는 전 국민의 85%가 무슬림인 대표적인 이슬람 국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슬림 학생들이 기독교학교에서 단체로 세례를 받는 등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 코헨대학교의 ‘비전 153’을 위해 인도네시아에서 협력하고 있는 교회는 1만6천명이 출석하고 있는 스므랑교회다. 이곳을 담임하고 있는 빼뚜루스 아궁 목사는 영혼구원과 사회구원을 늘 함께 강조하는데 실제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한 사역으로 거의 매일 2만 명에게 무료급식을 제공하고 있고 이러한 사역에 무슬림들은 큰 감명을 받고 있다.

이러한 영향으로 코헨대학교가 관계하는 현지 초·중·고 학교에는 30%에 달하는 2천여명이 무슬림이다. 무슬림 자녀는 기독교학교로 절대 보내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영혼구원 사역과 함께 사회구원에도 앞장서서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 모습에 무슬림조차 감명을 받고 기독교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무슬림 부모들의 동의하에 1천여명의 학생들이 세례를 받는 일도 있었다. 강신권 박사가 ‘비전 153’ 프로젝트를 위해 현지 스므랑교회 머물 당시 자카르타 수도경비사령관이 직접 찾아와 세계선교 비전에 대해 함께 공감하며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강신권 박사는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큰 변화를 주목하고 20개 무슬림 국가에 현지 신학교를 세우고 가까운 시일 내에 인도네시아에 국제센터를 세워 무슬림 국가를 기점으로 하는 선교의 기틀을 마련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비전 153’ 프로젝트는 사람을 남기는 사역

강신권 박사는 ‘비전 153’ 프로젝트 중요성과 관련, 현지 선교사들의 신학교육을 강조했다. 실제로 인도네시아의 경우 현지 선교사들은 더 이상의 신학교육을 공급받지 못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다. 이에 그 나라에 신학교를 세우고 선교사들에게 연장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비전 153’ 프로젝트의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하다. 현재 인도네시아 선교사 20여명이 박사원 과정에 있다.

 

‘비전 153’ 프로젝트는 각 나라 현지인을 통해서만 선교한다는 원칙을 매우 중시하고 있다. 그 나라의 선교사들이 ‘비전 153’ 프로젝트로 세워진 신학교를 졸업하고, 이들은 또 주변 거점도시에 교회와 신학교를 10개 이상 세우며 현지 선교의 영역이 더욱 확대돼 나가는 것이다. 이에 강신권 박사는 코헨대학교의 ‘비전 153’ 프로젝트에 대해 “사람을 얻고 길러서 사람을 남기는 사역”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때문에 코헨대학교는 ‘비전 153’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양성되는 현지 선교사에 대해서는 신학교육비 100% 장학금 혜택을 주고 있다.

‘비전 153’ 프로젝트는 (롬 11:36), (행 1:8) 말씀에 입각해 세계선교의 큰 목표를 갖고 시작됐다. 마태복음 28장과 마가복음 16장은 제4세계를 선교하는 ‘비전 153’ 프로젝트를 뒷받침해주는 성경말씀이다. 강신권 박사는 특히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구절을 강조했다. 이미 선교의 발판이 마련돼 있는 제3세계에서도 눈을 돌려 제4세계의 척박한 땅을 개척하려는 ‘비전 153’ 프로젝트는 이러한 철저한 주권사상 아래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이에 더 나아가 강신권 박사는 ‘비전 153’ 프로젝트의 마지막 목표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세계 153개국에 현지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선교의 기틀이 모두 마련됐을 때 한국의 인천지역에 기독교UN을 세워 세계선교의 구심역할을 담당하게 한다는 것이다. 각 나라의 대표가 1년에 한 차례 모여 각 나라에서의 선교평가를 발표하고, 다양한 선교전략도 함께 세우며 각 나라의 문화페스티벌도 개최하는 등 세계선교의 총본부 역할을 하는 기독교UN이 세워진다면 ‘비전 153’ 프로젝트는 어떠한 의미에서 그 목적을 모두 달성한 것이다. 이에 강신권 박사는 “기독교 UN을 세우기 위해서는 각 나라에 인재가 필요하다”며 “세계 복음화의 큰 포부를 지닌 비전리더 1백만명을 양성하는 것이 목표”라며 밝혔다.

강신권 박사는 최근 무슬림의 전략적인 한국진출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실제로 이슬람 전문가에 따르면 현재 무슬림의 전략적 선교 방법 가운데는 1년에 2천명의 한국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는 것을 알려져 있다. 이들이 결혼하면 당분간 자녀의 종교에 대해서는 언급은 하지 않은 채 지내다가 아이가 성장할 때 다양한 방법을 통해 무슬림으로 성장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강신권 박사는 이러한 가운데 오히려 무슬림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비전 153’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사례는 중요한 모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융합신학으로 기독교는 더 비약할 수 있다”

▲강신권 박사는 히브리적 융합사고가 성경주석을 더욱 깊이 할 수 있는 활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우철 기자

강신권 박사가 몸담고 있는 코헨대학교는 기존의 정통신학 기반 위에 융합신학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코헨대학교 총장인 게리 코헨 박사는 유대인 크리스천으로, 유대인 아론 제사장의 후손인 그가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세운 학교가 코헨대학교다. 대학교 이름 중 ‘코헨’은 바로 제사장을 뜻한다.

 

유대인 총장의 영향으로 코헨대학교의 신학적 풍토는 성경을 주석하고 융합적 보는 히브리식 사고에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예컨대 히브리식 사고로 기록된 성경을 현재 자기가 속한 문화권의 틀에서 해석하지 않고 당시의 히브리식 사고를 기초로 성경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밖에서의 색깔을 갖고 성경을 보는 것과 성경이 기록된 당시의 사고로 성경을 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 강신권 박사의 설명이다.

강신권 박사는 현재 미국에서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례가 최근 들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현재 유대교 내에서도 기독교와 거리가 멀고 강경한 부류인 정통파의 비율은 15%에 그치고 있고, 중도적이거나 오히려 기독교와 가까운 재건파 등은 85%에 이르고 있으며, 앞으로 이러한 추세는 더 가속화될 것이라고 강신권 박사는 내다봤다. 이에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실력 있는 학자들은 더욱 코헨대학교로 몰려 더욱 히브리식 사고를 기초로 한 성경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코헨대학교는 성서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이 4개의 정통신학 토대 위에 세계 최초로 히브리식 사고를 기초로 하는 주영론(주께 영광), 목회론, 고영론(고난과 영광), 구속론, 목적론 등의 7개 융합신학을 두어 더욱 깊이 성경주석을 하고 있다. 강신권 박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추구하는 목표는 궁극적으로 ‘신앙의 체질화’라고 설명했다.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신학이 삶이자 삶이 신학이라는 교육을 받고 자라는데 융합신학이란 삶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되는 신학인 것이다. 어릴 때부터 말씀을 전수하고 ‘말씀의 체질화’를 이루어야 기독교는 더욱 비약할 것이라고 강신권 박사는 강조했다.

 

강신권 박사는 “유대교는 말씀 전수는 잘하는데 선교는 약한 반면, 기독교는 선교는 잘하지만 말씀 전수는 약한 경향이 있다”며 “이 두 가지의 장점을 모두 살려 안으로는 말씀을 전수하고 밖으로는 선교를 훌륭히 해낸다는 것이 융합신학의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코헨대학교가 진행하고 있는 ‘비전 153’ 프로젝트도 이러한 두 양면을 더욱 성공적인 이끌기 위한 모델로 제시된 것으로 현재 목표의 50% 가량을 성취하며 그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다.

한국에 2천여 명 가량의 제자를 두고 있는 강신권 박사는 지금도 ‘비전 153’ 프로젝트를 위해 분주히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며 교육하고 있다. 현지인을 세우기 위해 언어와 문화의 장벽들을 넘어야 하는 어려움과 신학교 설립 과정에서 부딪히는 난관들도 있었으나 강신권 박사는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라는 마가복음 16장 15절 말씀을 붙들고 세계선교의 부푼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코헨대학교 한국에서도 저변 확대

최근에는 코헨대학교 신학대학원 총동문회가 결성, 동문들과 재학생들을 연결하는 네트웍 구성과 함께 정기적인 학술 심포지엄, 공개 학술 세미나 등을 계획하는 등 한국 내에서도 코헨대학교의 저변이 확대되고 있다. 총동문회는 코헨대학교에서 M.Div, Th.M, D.Min, Th.D 등 정규 과정을 통해 졸업한 동문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모교 발전과 세계복음화를 위해 적극 앞장설 것을 다짐하고 있다.

 

이들은 타 문화권 복음화를 위해 세계 70여 개국에 세워진 코헨대학교 사역을 위해 장학기금을 조성해 적극 지원할 방침이다. 정관창 총동문회장은 “전 세계에서 공부하고 있는 재학생 및 동문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감당해 나갈 것”이라며 “단순한 모임으로 그치지 않고 연구하고 노력하는 동문회로 만들어갈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코헨대학교와 관련해 강신권 박사는 “현재 2천5백여 명의 졸업생들이 열방 지역에서 목회, 교수, 복지사, 선교사, 기관 사역자 등으로 봉사하고 있으며 세계 각 국의 3천7백여 명의 재학생들이 전 세계복음화를 위한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며 “본 교는 ACSI 및 ETA 회원으로 졸업 후 미국장로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게 되며, 세계선교 사역에 직접 동참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학교재단 폴엔미셀 강 재단은 코헨신학을 중심으로 코헨학파를 형성, 다양한 논문과 저서 활동을 펼쳐 왔다.

코헨대학교는 대학 과정으로 평신도신학과, 기독교교육학과, 기독교음악학과, 기독교상담학과가 있으며, 대학원은 목회학, 기독교음악목회학, 기독교상담학, 신학과 등을 개설하고 있다. 박사원은 목회학, 기독교교육학, 선교학, 기독교상담학, 기독교음악, 기독교복지학, 신학박사 등의 과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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