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예배

1. 예배의 정의.

예배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행위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령 전체를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과 교제하시며 종들에게 사명과 능력과 은사를 부여하시며 자녀들에게 은혜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베푸신다. 따라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기독교의 근본이며 기본이고 대 전제다.

2. 예배의 본질.

일반 종교의 제사는 제사를 통하여 섬기는 대상을 위무하는 가운데 무엇을 얻고자 함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 예배는 그와 같은 종교적 개념을 초월한다.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을 위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고 경외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무엇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다. 기독교 예배는 신학적 차원에서의 예배와 신앙적 차원의 예배로 구분된다. 신학적 차원에서의 하나님 예배는 창조주와 피조의 관계 하에 진행되는 것으로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과 명령권을 가지신 주권주<主權主>로서 예배를 받으시고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피조의 입장에서 주권주<主權主>에게 법적 행정적 차원에서 사명과 책임과 의무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차원의 예배를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법률적 관계 하에서의 예배를 기뻐하시지 아니하시고 아버지로서 자녀들의 신앙적 경배와 경외를 기뻐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예배는 법적 행정적으로는 신학적 예배와 신앙적 예배로 구분되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신학적 차원의 예배가 아니라 신앙적 예배로서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1) 예배는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것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것은 기독교에 부여된 사명이며 책임이고 의무다. 그러나 기독교는 사명과 책임과 의무에 의한 신학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신앙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한다.

2) 예배는 하나님의 속성을 선포하는 것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선포하는 것은 기독교에 부여된 사명이며 책임이고 의무다. 그러나 기독교는 사명과 책임과 의무에 의한 신학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신앙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선포한다. 기독교는 자신의 실천 신앙적 삶과 그러한 삶이 전제되고 반영된 사명현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선포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자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자신의 실천 신앙적 삶과 사명을 통하여 증거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의 속성을 증거하고 나타내는 실천 신앙적 삶과 사명이행 자체이다.

3) 예배는 하나님의 섭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선포하는 것은 기독교에 부여된 사명이며 책임이고 의무다. 그러나 기독교는 사명과 책임과 의무에 의한 신학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신앙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선포한다. 기독교는 자신의 실천 신앙적 삶과 그러한 삶이 전제되고 반영된 사명 현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께 부여받은 사명을 자신의 실천 신앙적 삶과 사명을 통하여 증거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실천 신앙적 삶과 사명의 진행이다.

4)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은 기독교에 부여된 사명이며 책임이고 의무다. 그러나 기독교는 사명과 책임과 의무에 의한 신학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신앙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께 부여받은 사명을 자신의 실천 신앙적 삶과 사명을 이행하는 가운데 그 사명현장과 자신의 실천 신앙적 삶의 현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사명의 진행이며 빛과 소금의 실천 신앙적 삶이다.

5) 예배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경외하는 것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피조의 책임이며 의무이고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하여 피조로부터 경배와 경외를 받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며 권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권과 권리에 의한 신학적 차원에서의 경배와 경외를 기뻐하시지 않고 아버지로서 자녀가 드리는 진실과 진심의 경배와 경외를 원하신다. 따라서 기독교 예배는 아버지에 대한 자녀로서의 진실과 진심의 경배이며 경외이고 사랑이며 존경이다.

6)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피조로서의 의무이고 책임이며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하여 피조로부터 기쁨을 취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며 권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권과 권리에 의한 신학적 차원에서 예배를 통한 기뻐하심을 원하시지 않고 예배를 통한 자녀와의 함께하심을 통한 기쁨을 원하신다. 따라서 기독교 예배는 아버지와 자녀간의 만남의 기쁨이며 대화의 기쁨이고 화평의 기쁨이다.

7)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은 교회의 교육이며 성도에 대한 관리이다. 따라서 그것은 교회와 성도에게 공동으로 주어진 의무이며 책임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사명과 책임과 의무에 의한 신학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위상을 갖추고 하나님께 부여받은 사명을 원활하게 이행하려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다. 따라서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자녀와 종으로서의 충성이며 순종이다.

8) 예배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찬양을 받으실 권리가 있으며 기독교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권리에 의한 찬양과 의무에 의한 찬양을 기뻐하시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찬양을 기뻐하신다.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효<孝>와 사랑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따라서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자녀들의 효<孝>이며 사랑이다.

10)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속주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이며 하나님의 종들이 주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이며 자녀들이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이다.

11)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고백이며 주의 종들이 주 하나님께 드리는 보고이며 자녀들이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문안<問安>이고 간구이다.

12)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이다.

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속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종들은 섭리주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한다.

3. 진정과 신령의 예배.

구약시대의 하나님 예배는 그것이 끊임없이 반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예배가 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드려진 제물의 불완전성 때문이었다. 반면에 신약 기독교의 하나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 속에서 <완전한 예배> 그리하여 <진정과 신령의 예배>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제물로서 완전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성도들은 신학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완전한 예배> <진정한 예배>를 드리게 되었지만 현세를 사는 동안에는 완전한 성화를 이루지 못하므로 신앙적으로는 여전히 <신령한 예배>를 드릴 수 없다. 때문에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예배에 함께 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신령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역사하신다. 따라서 기독교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완전한 예배> <진정한 예배>를 드리며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신령의 예배>를 드리게 된다.

4. 예배의 오류.

현대 기독교는 기독교의 본질을 오해하여 기독교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설립 되어진 것으로 인식 하고 있다. 때문에 기독교의 모든 중심을 <하나님 예배>에 집약 시키고 있으며 심지어는 <예배를 위한 예배>를 드리기까지 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 교회의 오류적 예배 실태를 고찰하여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제사적 예배.

구약 기독교 예배는 제사였다. 당시에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제사의 완성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식에 다양한 의미의 제물이 요구되었고 따라서 그 의식도 드려지는 제물에 따라 달랐기 때문에 신약시대 기독교와 같은 차원의 예배가 성립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통하여 모든 제사의식이 완성됨에 따라 기독교의 하나님 경외의식은 제사의 차원을 넘어 <경배와 찬양> <예배와 기도>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배의식은 <피조의 경배> <백성의 경배>가 아니라 <자녀의 경배>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러한 차원의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여전히 구약 기독교 시대의 제사적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있다. 제사적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사용하는 용어 자체부터가 제사적이다. 저들은 주일을 <안식일>이라 하고 강단을 <제단>이라 하며 예물을 <제물>이라 하고 목사를 <제사장>이라 한다. 그리고 예배의 경건한 외적 분위기를 거룩한 것으로 인식하여 예배하는 자세와 찬양하는 음성을 거룩하게 변조한다. 이러한 자들은 솔로몬의 일천 번제를 새벽예배에 적용하여 새벽제단에 제물을 일천 번 드리면서 자신의 서원을 하나님께 기도한다.

2) 강복이 전제된 예배.

현대 목회자들 중에는 하나님의 강복을 전제로 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있다. 저들은 <아브라함이 예배 한번 잘 드리고 얼마나 복을 받았는가 보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면서 예배와 하나님의 복을 연계 시키고 있다. 예배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개념으로 인하여 현대 기독교인들은 예배 위주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특히 <복과 관계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즉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예배에 불참하면 하나님께 복을 못 받을 뿐만 아니라 어떤 징계나 책망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3) 영상 예배.

20세기에 들어서서 시청각적인 예배가 주장 되어 지는 가운데 교회는 점점 예배의 본질에서 멀어져 가는 예배를 드리기 시작 하였다. 강단이 점점 호화 로와 저 갔고, 성가대가 점점 화려하기 시작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는 근래에 이르러 방송을 통한 예배, 인터넷을 통한 예배들이 등장하는 가운데 거창한 영상 예배까지 등장하였다. 목사가 설교 할 때에 시각적 효과를 나타내기 위하여 대형 TV가 설치되어 지는가 하면, 청각적인 효과를 나타내기 위하여 음향효과를 전담하는 특별 요원들이 투입 되어지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서 성도들은 예배 때에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과 찬양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시청각적인 분위기를 즐기고 누리는 예배를 즐거워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예배 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 분위기를 즐기는 예배가 된 것이다. 이러한 예배를 드린 자들의 공통된 감정은 <오늘 예배 분위기 참으로 은혜로웠다>이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은혜의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예배 분위기의 은혜>이다.

4) 사람을 축하하는 예배.

예배를 즐기는 것에 심취한 자들은 이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예배>를 주장하기 시작 하였다. 예배는 받으시는 하나님만 즐거워서는 안 되고 드리는 사람도 기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가볍게 들으면 대단히 진리적인 것 같은 이 주장은, 그러나 참으로 망령된 주장이다. 물론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 예배하는 자에게도 기쁨이 충만 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예배 하는 자의 기쁨이 결여된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기쁨인 예배가 되어야지 예배를 통하여 나도 기뻐해야 된다는 전제가 되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 그것은 예배의 목적 자체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예배 의식으로 인하여 더욱 비 진리적 예배가 도처에서 진행 되어지고 있는바 <XX교회 창립 축하 예배> <OO교회 창립 O주년 기념 축하 예배> <XXX 회갑 축하 예배> <OOO 박사 학위 영득 축하 예배> <XXX 총회장 취임 축하 예배> 등등이 바로 그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러한 예배는 하나님을 예배 하는 것과 전혀 관계없다. 예배의 명칭 자체가 하나님을 예배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축하 하는 것이며, 예배의 내용 자체도 하나님을 예배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축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명칭도 내용도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람을 축하하기 위한 모임을 예배라고 명칭 할 수 없으며, 사람을 축하하기 위하여 모였으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 예배를 사람축하의 들러리로 세우는 망령된 행악이다. 교회 창립이나 회갑이나 또는 어떤 지위를 획득한 것에 대하여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 하다면 그리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려 한다면 예배의 명칭도 <감사예배>라고 해야 할 것이며, 예배 내용도 오직 <하나님께 감사>이어야 한다. 그러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나서 <축하>의 시간을 갖는 것이 옳은 것이다. 처음부터 목적 자체가 사람에 대한 <축하>이고 예배는 하나의 의식에 불과 하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며 무시로서 책망 받아 마땅한 악행이다.

5) 헌금을 목적으로 하는 예배.

현대 교회들의 오류 적 예배 중에 또 하나는 헌금을 목적으로 하는 예배이다. 추수와 전혀 관계없는 교회들이 추수 감사예배 또는 맥추 감사예배를 드리는 것은 분명한 오류이다. 추수감사와 맥추감사 예배를 실시하는 자들은 그 예배에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 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참으로 옹색한 변명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정직해야 하며 진실해야 한다. 전혀 농사를 하지 아니하는 자들이 추수도 하지 않으면서 추수 감사예배 맥추 감사예배를 드린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저들은 추수감사 또는 맥추감사절 예배를 일년에 대한 총체적인 감사 예배라고 변명 하는데 그렇다면 예배의 명칭과 내용을 바꿔야 한다. 물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천번 만번을 드려도 부족하기 때문에 어떤 감사예배를 드려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엇을 얼마나 드리느냐 하는 것 보다 무엇을 왜 그리고 어떻게 드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분명하고 정직하게 드려야 하며 형식이나 의식이 아닌 진정한 감사를 드려야 한다. 명분 없는 절기를 형식적 의식적으로 드릴 것이 아니라 참으로 <진정과 신령의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점을 분명히 하시어 사도 바울을 통하여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라고 정립하여 주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어리석은 자들은 이와 같은 예배의 본질을 무시하고 추수 감사예배 또는 맥추 감사예배를 통하여 헌금을 유도 하는가 하면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건축헌금이나 또는 어떤 목적 있는 헌금을 유도해 내기 위한 전략적 예배를 드리기 까지 한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악이며 하나님을 능멸하는 죄악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경외와 감사이지 헌금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 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6) 축제위주 예배.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원리가 왜곡되어 축제적 예배가 성행되고 있다. 찬양 예배라는 명목 하에 굉음적 악기들이 동원되어 빠르고 요란한 찬양과 현란한 춤이 광란적으로 진행되는 예배가 성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배는 미국의 흑인 교회와 중남미 카토릭 교회들의 축제적 예배에서 전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 인간적 기쁨을 추구하는 축제에 불과하며 그것도 <광란적 축제>이다.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 각종 악기들이 동원되고 박수와 율동이 어우러지는 찬양 모습은 아름답다. 그러나 찬양 예배는 인간의 감정과 흥분을 표출하는 축제 마당이 아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때에 비로소 찬양이 예배가 되는 것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고 사람을 흥분시킬 뿐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않는 찬양은 결코 예배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통하여 사람이 기뻐할 수 있을 때 그것이 곧 예배이지 하나님의 기쁨 없이 다만 사람만 기뻐하는 것은 예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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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장. 기독교 절기

기독교는 구약교회 시대이래 전통적으로 다양한 절기들을 지켜왔다. 그러나 구약시대에 지켰던 절기들은 신약시대 기독교에서는 거의 대부분 지켜지지 않는다. 구약시대의 절기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의미하고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가 드려짐에 따라 종료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약시대의 절기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에 의하여 폐지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는 모든 것을 완성한 것이지 폐지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장에서는 구약교회 시대의 절기들은 생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 안에서 완성되어진 신약교회 시대의 절기들만을 정리한다.

1. 주일<主日>

1) 주일의 의미.

현재 기독교가 역사적, 전통적으로 지켜온 주일<主日>은 <신학>적으로는 <주권주 성부 하나님의 날>이며 <신앙>적으로는 <완성주의 날-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다. 주의 날이란 명칭을 삼위일체 하나님 신학으로 정립하면 그날은 <주권주이신 하나님의 날>로서 곧 <성부 하나님>의 날이다. 현존하는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은 곧 창조주 하나님의 날로서 <성부 하나님의 날>인 것이다.
한편 현재 기독교가 지키는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된 구약기독교의 <안식일>을 의미한다. 반면에 그 <주일-안식일>은 구약 기독교의 <안식일>과는 의미가 다르다. 구약 기독교의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6일 간의 창조 역사를 마치시고 제7일 째 되는 날에 안식하시면서 그날을 성별하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구약 기독교의 안식일은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이 곧 <주권주 하나님-창조주 하나님>의 날임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신약 기독교의 주일은 그것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을 완성하신 원리에 의하여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이 성부 하나님의 날임을 자신들의 신앙적, 실제적 삶을 통하여 증명하고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적, 실제적 삶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진정과 신령의 예배와 기도>로 나타난다. 이러한 신앙 원리에 의하여 주일<主日>은 그날을 완성하신 <완성주의 날-예수 그리스도의 날>로 명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일<主日>은 <신학>에서는 <주권주 성부 하나님의 날>이며 <신앙>으로는 <완성주의 날-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다. 주일<主日>이 <신학>에서는 <주권주 성부 하나님의 날>인 것은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이 성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며 주일<主日>이 <신앙>으로는 <완성주의 날-예수 그리스도의 날>이 되는 것은 기독교인들은 오직 주일 하루만을 <하나님의 날>로 기념하고 예배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을 하나님의 것으로 알아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을 하나님의 법<말씀-로고스-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현실적인 다양한 문제들로 인하여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을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못한다.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으로서 특히 주일<主日>을 온전하고 순전하게 지키는 것이며 이러한 신앙적 차원에서 주일<主日>을 <완성주-말씀-로고스-예수 그리스도의 날>로 정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를 곡해<曲解>하여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기독교는 <중보주-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사면주-성부 하나님>을 믿는다. 신앙적 차원에서 주일<主日>을 <완성주-말씀-로고스-예수 그리스도의 날>로 정립하는 것은 그날에 대한 주권이 <중보주-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 아니라 <중보주-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대속죄제를 통하여 <안식일>을 완성시킨 안식일의 주인<완성주-마12:1-8>라는 신학 원리에 근거한 것이다.

2) 주일의 유래.

신약초기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첫날을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날로 정하여 <주의 날>로 지켰다. 기독교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전 세계로 확산되어지는 가운데 모든 기독교인들은 <주의 날>에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축하하고 기념하고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로마 제국의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기독교인들은 <주일 성수>를 하였다. 그들은 지하 묘지와 성도들의 가정들을 순회하면서 열심히 주일 성수를 하였다. 콘스탄틴 대재에 의하여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가 종료되었을 때 콘스탄틴 대제는 A.D. 321년에 기독교인들의 예배를 공식적으로 허락하였고 기독교인들의 예배일이었던 <주의 날>을 법적 공휴일로 제정하였다. 기독교의 <주의 날>은 로마력의 <sunday>였는데 이날은 로마인들의 전통적 종교 중 하나인 <태양신 숭배>의 날이었다. 콘스탄틴 대제의 가문 역시 태양신을 섬겼는데 주일의 유래를 오해하는 자들<특히 안식교>는 이러한 점을 근거로 하여 기독교의 주일이 우상 숭배의 날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안식교의 주장은 기독교의 <주의 날>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모르는 무지와 자기들의 안식일에 대한 합법성을 내세우기 위한 고의적 계략으로서 오히려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자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들이 지키는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유대교의 안식일로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주의 날로 완성된 날이기 때문이다.

3) 온전한 주일성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주일날 하루를 교회에서 예배와 기도로 보내는 것이 곧 온전한 주일 성수로 이해한다. 뿐만 아니라 많은 기독교인들이 온전한 주일 성수는 <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온전한 주일 성수로 이해하며 심지어는 주일날 물건을 사거나 팔지 않는 것이 온전한 주일 성수인 것으로 믿는다. 이러한 개념 때문에 주일을 <안식일>로 이해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그러한 개념의 주일 성수는 기독교의 온전한 주일 성수가 아니라 유대교적, 율법적, 안식일 성수이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러한 주일 성수는 유대교적, 율법적, 안식일 성수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서 3류 무속 종교와 같은 종교적 신앙 사상일 뿐이다. 기독교에는 <소속교회>는 있으나 <본 교회>는 현세에는 없고 내세의 <하나님 나라 교회-천상교회>가 곧 <본 교회>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주일 성수는 예배 위주의 주일성수나 기도 위주의 주일성수가 아니다. 기독교의 주일성수는 오직 주일 하루만을 <하나님의 날>로 기념하고 예배하고 기도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을 하나님의 것으로 알아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을 하나님의 법 <말씀-로고스-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실천 신앙적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다양한 문제들로 인하여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을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께 송구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하나님을 더욱 공경하는 사명감으로 특히 주일<主日> 하루만이라도 온전하고 순전하게 지키는 것이 곧 기독교인들의 주일성수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주일 성수는 다음과 같은 점을 유념해야 한다.

(1) 주일은 안식일이 아니다.

안식일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것으로서 창조 사역을 비롯한 하나님의 모든 것을 기념하고 예배하는 날로서 현재의 토요일이었다. 구약 기독교의 안식일을 지키는 의식은 율법적인 것으로서 제사 중심이다. 반면에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을 완성하신 원리에 의하여 제사 중심으로 성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적, 실제적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실천 신앙적 삶으로 성수한다. 따라서 물건을 사고파는 것 등등만을 삼가는 제한적 율법주의로 주일 성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과 신령의 예배와 기도>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일에 전념하는 온전하고 순전한 주일 성수를 해야 한다.

(2) 주일은 일요일만이 아니다.

주일<주의 날-하나님의 날-예수 그리스도의 날>은 일요일 하루 만이 아니다.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이 <주의 날-하나님의 날>이며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이 <주의 날-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다. 따라서 모든 기독교인들은 일요일 하루 만을 주의 날로 지킬 것이 아니라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을 <주의 날-하나님의 날-예수 그리스도의 날>로 지켜야 한다.

2. 성탄절.

1) 성탄절의 유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지키는 관례는 <A.D.354년>에 편집된 <필로칼루스 월력>에 최초로 나타난다. 이 달력은 <A.D.336년>에 로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축제가 있었다고 언급한다. <예수 그리스도 탄생 축하>는 <A.D.380년>부터 콘스탄티노플에서 지켜졌고 <A.D.430년>부터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지켜졌다. 성탄 축하는 초기에는 <1월 6일>이었다. 당시에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켰던 것은 영지주의자들을 비롯한 일부 종파들이 그날을 주현절<主顯節-epiphany>로 지켰기 때문이었다. 주현절은 여러 가지 의미로 지켜졌는데 예수 그리스도 탄생시 동방 박사들이 방문한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은 것과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이적을 베푸신 것<요2:1-11> 등등에 대한 날자로 지켜졌다. 기원 6세기 경부터 성탄절은 12월 25일로 변경되었다. 12월 25일은 본래 정복되지 않은 태양신의 탄생일로서 기원 274년부터 지켜진 로마의 축제일이었다. 로마교회가 무엇을 근거로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켰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역사가들은 로마교회가 이교도들의 우상 숭배적 축제를 없애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그들의 태양신 축제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변경시켰을 것으로 추정한다.

2) 성탄절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은 온 인류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날로서 영원히 기념하고 감사해야 할 <축제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날을 감추셨다. 우리는 그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어리석은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일에만 광분할 것을 염려하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매년 성탄절 때가 되면 기독교인들은 물론이요 비기독교인들 조차 성탄절 축제에 광분하면서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의의를 모독하고 있다. 도처에서 술판, 도박판, 춤판, 등등이 벌어지며 문란하고 음탕한 성의 축제가 벌어지며 선물을 빙자한 각종 뇌물이 주고 받아진다. 이제 성탄절은 아예 <선물 받는 날> <뇌물 받는 날> <술 취하는 날> <노래하고 춤추는 날> <sex하는 날>이 되어 버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신 것은 그러한 것들을 위함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인류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었으며 인류사회가 하나님의 법과 질서와 사랑 안에 거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의의를 살리는 성탄절 축제를 실행해야 한다.

3. 부활절.

1) 부활절 유래.

기독교는 사도시대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였다. 사도시대의 기독교가 언제를 부활절로 지켰는지에 대한 자료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2-3세기에 일부 카토릭 교회들과 로마 교회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자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당시의 논쟁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린 날을 부활절로 할 것인가? 아니면 그로부터 3일 후인 부활의 날을 부활절로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쿠아르토데키마니-Quartodecimani>로 알려진 동방교회 집단은 부활절을 유월절 <니산월 14일-태양력으로 3-4월 14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다른 교회들은 반대하였다.
이러한 논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2세기 말경에는 그로 인한 갈등이 너무 심하여 로마 주교 빅토르가 쿠아르토데키마니 주의자들을 이단으로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부활절 논쟁은 니케아 교회회의<A.D. 325년>를 통하여 종결되었다. 니케아 교회회의는 춘분 후 만월<보름>이 지난 후 첫 번째 주일을 부활절로 결정하였고 <니산월 14일>에 부활절 지키는 것을 금지하였다.

2) 부활절의 의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이며 하나님 섭리 회복의 완성이다. 따라서 부활절의 의미는 당연히 하나님의 승리,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기독교의 승리,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종들의 승리이다. 그리고 그 승리는 곧 영광의 승리이며 완전한 승리이며 영원한 승리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승리는 부활절이라는 절기의 승리가 아니라 시간적으로는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의 승리이며 영역적으로는 하나님의 전 피조 영역에 대한 승리이며 특히 기독교인들의 삶 전체에 영원히 그리고 완전하게 존재하는 승리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진정과 신령으로 감사하고 영원히 감사하는 승리의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한다.

4. 사순절.

1) 사순절의 유래.

사순절이란 부활절로부터 40일 이전의 기간을 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받은 후 40일간 금식한 것을 대비<對比>시켜 40일간 금식하는 것에서 유례되어 사순절이라 하였다. 기원 3세기 경에는 이레나이우스에 의하여 부활절 앞두고 2-3일간 금식하는 관행이 있었는데 그것이 발전하여 사순절이 되었다. 사순절에 대한 기록은 니케아 교회회의<A.D.325>의 제5법령에 나타난다. 그러나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간에 금식기간이 달라서 서방교회는 3주간 금식하였고 동방교회는 7주간 금식하였는데 7세기 경에 이르러 40일 금식으로 통일되었다. 사순절 기간의 금식은 매우 엄격하여 하루에 한 끼만 허용되었고 모든 육류의 살코기가 금지되었다. 그러나 사순절 기간의 금식으로 인한 문제들이 발생하여 8세기부터는 금식이 크게 완화되었다. 사순절 기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의미하는 각종 행사들과 기도회가 열렸고 매우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 전례가 되었다.

2) 사순절의 의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십자가 대속죄제 만의 고난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의 생애 전체가 모두 고난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육신적 고난으로만 이해하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고난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자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고난과 무관하시다. 성자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고난 받으실 수 없으며 고난 받으셔서도 안 된다. 때문에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성부 하나님을 위한 고난이며 또한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하나님께 적용될 때와 우리에게 적용될 때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공의를 회복하기 위한 고난이며 하나님의 섭리를 위한 고난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이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구속사적 고난을 받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종 순전한 종이 되게 하기 위하여 교육적 차원에서 고난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단 따위에게 시험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으나 하나님의 종들이 사단의 시험을 통과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40일 간을 금식한 후 사단에게 시험받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군왕도 살아보지 못한 최고의 궁전에 사신다 하여도 부족한 분이셨지만 하나님의 종들에게 가장 검소한 삶을 전승하시기 위하여 광야를 숙소로 하는 삶을 사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혀 무죄하시었으나 정죄 당하셨고 비천한 자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수모와 천대를 받으시면서도 털 깎는 자 앞에 엎드린 양과 같이 묵묵히 그 모든 고난을 감내하셨던 것은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그와 같은 고난을 감내해야 함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다만 육신의 고난으로 이해하여 금식같은 육체적 고난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정립해 주신 하나님 종으로서의 사명적 삶을 살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따라서 우리는 사순절과 같은 절기를 지키며 금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일생 전체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헌신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결국은 승리의 영광이었던 것과 같이 우리의 고난도 승리의 영광이 되게 한다.

5. 오순절.

1) 오순절의 유래.

오순절은 유월절의 2일 째로부터 계산하여 50일째 되는 날에 지켜진다 하여 오순절이라는 명칭으로 지켜지는데 7일씩 7번째 날에 지킨다 하여 <칠칠절>로도 명칭되며 보리 추수를 끝내고 밀 추수를 시작하는 날로서 <맥추절>이라고도 한다. 오순절은 이스라엘 남자들이 1년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하는 3대 절기중 하나로서 유월절을 매듭 짖는 날이기도 하다<신16:16>. 신약 초기 기독교에서는 오순절 날에 성령 강림이 있었던 것<사도행전 2장>에 연유하여 오순절을 <성령 강림절>로 지켰다. 로마 카토릭 교회는 오순절을 세례 받는 절기로 지켰고 이때에 세례 받는 자들이 흰옷을 입었기 때문에 <흰 일요일>이라고도 하였다. 개혁주의 교회들도 처음에는 오순절을 <성령 강림절>로 지켰으나 성령 강림에 대한 바른 신학이 정립되면서부터 오순절에 대한 의미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오순절 계통의 교파들은 여전히 오순절을 <성령 강림절>로 지킨다.

2) 오순절의 의의.

오순절은 본래 유월절을 마무리하는 절기이며 밀을 추수하는 맥추절 절기였다. 한편 사도행전 2장의 성령 하나님 역사하심 이후부터 오순절은 그 <성령 강림절>로 지켜졌는데 오순절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개념은 신약 기독교에서 의미가 없다. 구약시대 기독교의 오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이후 모든 율법적 의식<儀式>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되었으므로 <진리 안에서의 자유> 원리에 따라 의미가 없게 되었고, 신약 기독교 시대의 오순절은 <성령 강림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오순절을 지켜야 할 명분이 없다.

6. 추수 감사절.

1) 추수 감사절의 유래.

현대 기독교가 지키는 추수 감사절은 성경에 없는 절기로서 미국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필그림 파더즈<Pilgrim Fathers-영국 청교도>가 거행한 최초의 추수 감사는 1621년 플리머스 식민주<植民州>에서 첫 추수를 한 후에 브래드퍼드 총독의 명령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1649년에는 코네티컷에서도 추수 감사가 있었고 1789년에 죠지 워싱턴이 추수 감사제를 국가 절기로 선포함에 따라 뉴잉글랜드 전 지역에서 추수 감사제가 거행되었다. 추수 감사제는 1863년에 링컨에 의하여 연례 절기로 선포되었고 1941년에 국회에서 법령으로 제정되어 11월 넷째 목요일로 제정되었다. 미국의 추수 감사제는 교회 예배로 지켜지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가족 단위의 축제일이다.
한국 기독교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1904년에 이르러 한국의 모든 장로교가 추수 감사절을 지키기로 협의함으로서 11월 11일을 추수 감사절로 지켰다.

2) 추수 감사절의 의의.

추수 감사절은 미국에 건너간 영국 청교도들이 첫 추수를 감사하여 하나님께 감사한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그것은 신학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신앙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추수와 관련된 지역 교회에서는 의미가 있겠으나 추수와 관계없는 지역 교회에서는 의미가 없다. 일부 목회자들은 추수 감사절의 의미를 농경적 추수에 대한 것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일년간의 모든 소득을 추수로 간주하는 추수 감사제를 주장하고 있는데 그것은 억지이다. 왜냐하면 모든 기독교인들은 매달의 소득에 대한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드릴 뿐만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는 감사 예물을 드리기 때문이다. 또 어떤 목회자들은 추수 감사절을 더욱 확대해석하여 일년 동안의 모든 것에 대한 총체적인 감사절로 주장하는데 그것은 더욱 해괴한 억지이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이미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적 삶을 살 뿐만 아니라 한해가 시작되는 첫날과 한해가 종료되는 마지막 날을 통하여 하나님께 지나온 일년간의 모든 것과 지나온 생애의 모든 것을 감사하며 또한 앞으로의 일년과 앞으로의 일생에 대한 감사를 드리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현대 기독교의 추수 감사절은 추수 감사제가 아니라 헌금을 독려하기 위한 추수 감사절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밀농사도 경작하지 않으면서 <맥추 감사절>을 지키는 자들을 통하여 입증된다. 기독교는 이제 이러한 의식적 관행들을 종료시켜야 한다. 기독교는 오직 진리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기독교로서 3류 무속 종교들이나 하는 의식적 관행들을 거행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추수 감사절 같은 것을 통하여 헌금을 독려할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신앙적 삶을 살도록 독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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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장. 은사<恩賜>

1960년대에 이르러 한국 기독교에 은사<恩賜>위주 신앙이 발생하였다. 은사위주 신앙은 21세기 현대 기독교에 이르기까지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선호되고 있다. 한국 기독교가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위에 신앙을 정립하지 못하고 은사위주의 신앙을 선호하게 된 것은 신학부재의 부흥강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을 무시하고 은사 체험위주 신앙을 더욱 강조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보다는 각종 체험적 신앙을 더욱 좋아하는 성도들이 부흥강사들의 은사체험 주의를 대대적으로 추종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하에서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 위주의 설교자들보다는 각종 은사들이 강조되고 나타나는 부흥 강사들을 더욱 받들어 섬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한국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으로부터 멀리 이탈되어진 3류 무속 신앙적 종교 형태로 낙후되어져버린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들은 모두 신학 부재의 부흥강사들과 기도원 집회 인도자들이 은사 체험주의 신앙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 진리들이며 특히 사이비 이단들과 각종 사기군들이 끼어들어 활동하는 가운데 오류되어진 한국 기독교의 안타까운 병폐적 역사였다. 우리는 이와 같은 병폐와 오류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은사에 관한 신학적, 신앙적, 진리를 다음과 같이 정립한다.

1. 은사<恩賜>의 정의<正意>

은사<恩賜>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어질 때에는 임금이 신하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스승이 제자에게 어떤 것을 하사<下賜>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은사가 종교적 용어로서 사용될 때에는 신으로부터 <각종 은혜가 하사되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용어가 기독교에 적용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종들에게 부여하시는 각종 능력들을 말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 능력들이 사역 현장에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능력> 또는 <하나님 종들의 은혜로운 사역적 능력>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따라서 은사는 하나님의 종들이 부여된 사명을 이행하는 과정에 <부수적, 보조적, 지원적, 후원적, 보완적,> 차원에서 부여된 제반능력을 의미하며 또한 그 능력들이 실제적으로 행사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은사 부여의 목적.

하나님 자녀, 하나님 종들에게 존재하는 은사들은 그들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어진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 하에서 부여하신 능력들이다. 하나님께서 자녀와 종들에게 은사들을 부여하신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와 목적이 있지만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된다.

1) 자녀들을 위한 은사부여.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은사를 부여하시는 목적은 그들의 신앙을 위해서이다. 성도들은 인간적인 속성에 따라 이론<신학>적인 것보다는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각종 현상<기적, 이적,>을 더욱 선호한다. 때문에 성도들은 자신들의 삶에 실제적,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체험적인 것을 더욱 갈망하고 신뢰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성도들의 특성을 고려하시어 그들의 신앙을 정립, 확립하시기 위하여 다양한 은사들을 그들에게 부여하신다.

2) 종들을 위한 은사부여.

하나님의 종들이 맡은바 사명을 이행하는 과정에는 경우에 따라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자비, 등등이 실제적으로 나타나야 할 필요성이 있다. 하나님을 잘 모르는 초신자들이나 믿음이 약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보다는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각종 현상<기적, 이적,>을 더욱 선호하고 신뢰한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이 맡은바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능력을 행사하게 하시어 초신자들이나 믿음이 약한 자들이 하나님 종들의 능력을 보고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자비, 등등을 보고, 알고, 깨닫고, 믿게 하시는 것이다.

3. 은사의 구분.

하나님께서 자녀와 종들에게 부여하시는 은사는 매우 다양하지만 그중에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12:6-11>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1) 지혜의 말씀.

지혜의 말씀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지혜롭게 풀어 적용하는 것으로서 신학자, 설교자, 교사, 전도자, 신앙 상담자, 등등에 부여되는 은사이다. 지혜의 말씀 은사를 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아름다운 설교, 감동적인 설교, 감격적인 설교, 은혜로운 설교를 통하여 성도들이 때로는 회개하고 때로는 감사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충성과 순종을 다짐하는 신앙적 결단을 하게 한다.

2) 지식의 말씀.

지식의 말씀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정립하는 것으로서 신학자, 설교자, 교사, 전도자, 신앙 상담자, 등등에 부여되는 은사이다. 지식의 말씀은사를 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차원높은 신학으로 해석하고 정립하여 말씀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계시와 섭리를 다양하고 절묘하게 풀어 가르친다.

3) 병 고치는 은사.

병 고치는 은사는 각종 질병을 치유하는 특별한 은사이다.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각종 질병을 고치며 귀신을 퇴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은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의 병행을 통하여 진행한다. 하나님께서 종들에게 병 고치는 은사를 부여한 이유는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고 깨닫게 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을 믿고 따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병 고치는 은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이점을 명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병 고치는 은사를 뒤에 따르게 해야 한다. 많은 자들이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병 고치는 은사를 뒤에 따르게 하다가 나중에는 병 고치는 은사를 앞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뒤따르게 하다가 종래에는 아예 하나님의 말씀을 형식적으로 데리고 다니며 병 고치는 은사를 전문으로 행사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데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 능력으로 오해하고 착각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악행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에게서 병 고치는 은사를 거두신다. 그리하여 그들은 거짓 은사를 진행하거나 사이비 이단적 오류에 빠져 3류 무당으로 전락한다. 이 분야의 한국 기독교 역사상 대표적인 전례가 전도관의 박태선이다.

4) 능력 행함.

능력 행함의 은사는 일반적으로 각종 질병 고치는 은사와 귀신을 퇴치하는 은사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종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각종 능력에 대한 은사를 총체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5) 예언함.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언에 대한 은사를 오해하여 3류 무속인들이 행하는 인간의 길흉화복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러한 3류 무속적 차원의 예언을 오히려 금지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예언은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할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신앙적 삶에 오히려 해악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미래를 안다는 것은 때로는 사고나 위기에 대한 사전예방을 위하여 필요할 수도 있으나 그것이 오히려 성도의 삶을 비 진리로 몰아넣을 수 있다. 자신의 미래를 알게 되면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한 각종 방법을 세우게 되는데 이때에 누구나 보다 더 좋은 미래를 세우기 위하여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각종 불의한 방법까지도 동원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성도들의 인간적 성향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자신의 미래를 예고해 주는 차원의 예언은사를 허락하시지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것으로서 장차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진행된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구별하고 이해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은사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은사와 병행된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중대한 일이 발생하거나 또는 성도들의 일신상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게 될 때에 꿈, 환상, 환청, 등등의 비상섭리를 발동하시어 교회와 성도들이 그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게 하신다.

6) 영들 분별함.

영들 분별함이란 하나님의 영<성령>의 역사하심과 귀신<사탄> 역사함을 분별하는 은사를 말한다. 사단은 매우 교활하여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장하여 성도들을 미혹하고 유혹한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신학>을 알지 못하면 사단의 흉계를 하나님의 계시로 오해하여 비 진리에 빠지게 된다.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종말론에 성도들이 미혹당하거나 또는 비 진리 이단들의 주장들에 현혹되어 그들을 추종하는 것은 모두가 신학을 모르기 때문d다. 1990년대 초 하방익, 권미나, 이장림, 등등의 종말론에 많은 성도들이 미혹되고 심지어는 목회자들까지 그들을 추종하였던 것과 성락교회 김기동, 예루살렘교회 이초석,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구원파, 박옥수, 용문산 기도원의 나운몽 등등을 추종하는 자들은 모두 신학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말이 진리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말씀<신학>을 알면 하나님의 계시와 사단의 흉계를 분별하게 되고 하나님의 종과 사단의 종들을 분별하게 되고 비 진리에 빠지지 않는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교회에 진리<말씀-신학>을 가르치라는 사명을 일률적으로 부여하신 것이다.

7) 각종 방언 말함.

각종 방언 말함의 은사는 두 가지 차원에서 부여되는데 하나는 개인적 신앙을 확립시켜 주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을 위하여 <도고-대도>하게 하기 위함이다. 초신자나 믿음 약한 자들은 방언의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확립한다. 한편 타인을 위하여 은밀하게 도고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방언으로 기도하게 하시어 기도의 내용을 감추어 주심으로서 기도하는 대상의 수치를 가려주신다.

8) 방언들 통역함.

방언들 통역함의 은사는 각종 방언에 대한 통역의 은사를 말한다. 그러나 방언 통역의 은사는 특별한 경우에만 부여될 뿐 일상적으로 행사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방언의 은사를 주신 것과 방언으로 기도하게 하시는 것은 통역이 필요하지 않은 경우가 오히려 더욱 많기 때문이다.

9) 믿음.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서 모든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일률적으로 부여되는 은사이다. 믿음은 성도 본인의 것이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사하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느끼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그리하여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신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하사하시는 믿음의 은사는 믿고 신뢰하는 차원의 종교적인 신앙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경륜적 신앙이다. 따라서 믿음의 은사는 가장 큰 <3대 은사>에 속한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이 이러한 믿음의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에 많은 이들이 믿음의 은사보다는 체험적 은사를 선호하여 하나님을 위한 경륜적 신앙을 갖지 못하고 3류 일반종교적 신앙에 머물러 있다.

10) 소망.

소망의 은사는 두 가지로서 하나는 하나님 나라<천국>에 대한 소망이고 다른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날마다 순간마다 함께하시므로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기쁘고 즐겁고 평안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망의 은사는 믿음, 사랑과 함께 가장 큰<3대 은사>에 속한다. 소망의 은사는 믿음을 전제로 하여 부여되는 은사로서 믿음에 의한 결과적 은사이다. 성도들은 소망의 은사에 의하여 현세를 사는 동안에 발생하고 조성되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한다.

11)사랑.

사랑의 은사는 믿음, 소망과 함께 가장 큰 <3대 은사>에 속한다. 사랑의 은사는 소망과 마찬가지로 믿음을 전제로 하여 부여되는 은사로서 믿음에 의한 결과적 은사이다. 사랑의 은사는 기독교 은사 중 최고의 은사이다. 사랑의 은사가 기독교 은사 중 최고의 은사인 것은 기독교의 모든 것에 대한 원인과 과정과 결론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출발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진행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결론된다. 이러한 하나님 사랑의 섭리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통하여 나타나고 정립되고 확인되며 피조가 하나님 섭리의 동반자로,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 승귀됨을 통하여 나타나고 정립되고 확인된다. 이와 같은 하나님 사랑에 의하여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사랑의 은사를 부여하시고 사랑의 은사를 이행하게 하신다. 따라서 기독교 성도의 사랑은 사는 신앙의 결산이고 사명의 결산이다.

4. 은사의 우열.

은사주의 신앙자들 대부분은 은사에 대한 우열을 주장한다. 그들은 특히 병 고치는 은사, 귀신 쫓는 은사, 예언의 은사를 능력의 은사로 평가한다. 반면에 또 어떤 자들은 방언의 은사를 개인적인 것, 또는 믿음 약한 자들을 위한 것 등등으로 폄하하여 무시하기도 한다. 한편 <고전13장,14장>은 사랑을 강조하고 예언의 은사를 강조하는 반면에 방언의 은사를 폄하하는 듯 하다. 그러나 <고전13장,14장>의 내용은 예언의 은사와 사랑의 은사를 강조하고 방언의 은사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전체적인 문맥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모든 은사가 우열의 구분 없이 동일함을 강조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방언을 높이 평가하여 분란을 일으키는 것을 다독이기 위하여 방언의 중요성보다는 예언<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바울의 의도는 하나님의 모든 은사는 예언<하나님의 말씀>안에 행사되어질 때에 비로소 그 <의의>가 살아 역사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바울의 강조와 같이 하나님의 은사는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던 교회적인 것이던가에 관계없이 어떤 우열이 없이 모두가 동일하게 중요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은사이며 하나님을 위하여 부여하신 은사이기 때문이다.

현대 교회, 특히 한국 교회에는 말씀의 은사보다 신유의 은사를 더욱 강조하는 풍조가 있다. 그리하여 병 고치는 은사, 귀신 쫓는 은사, 예언하는 은사들을 선호하여 우르르 몰려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분명히 명심해야할 것이 있다. 신유의 은사를 비롯한 특별한 은사들은 모두가 말씀을 전하는 것에 대한 보조적 수단으로 주어진 것들이다. 교회의 모든 사명은 오직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각종 은사와 이적과 기적들은 말씀을 보좌하고 보조하는 도구들로 사용되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성경은 말씀을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 수차, 강조하고 있으며 가르치는 자들을 배나 존경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몰지각한 자들은 말씀은 등한시하고 눈에 나타나는 일에만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 현대 교회는 특히 예언을 선호하여 소위<예언하는 자> <기도하는 자>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그러한 자들을 <영안이 밝은 자> <영적인 자> 등으로 호칭하고 있다. 이러한 풍조 속에서 기도원들을 중심으로 기독교 무당들이 속출하여 독버섯처럼 암약하고 있다. 기도원을 운영하고 있는 자들 중에는 신학 공부를 충분히 하지 않은 자들이 많고 심지어는 전혀 신학 공부를 하지 않은 자들도 있다. 때문에 말씀에 대하여 전혀 무지한 가운데 3류 종교의 무당들이 하는 짓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섭리, 모든 계시를 성경에 담아주셨다. 성경의 하나님 계시는 완전하여 더 하거나 제할 것이 없다<계22 : 18-19>. 따라서 모든 것은 성경, 곧 말씀을 통하여 증거 되는 것이지 3류 종교의 무당들과 같이 점치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예언의 은사란 무당들이나 점쟁이들처럼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로 알고 바로 가르치는 것을 말하며, 영적으로 밝다는 것은 성경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바로 알고 바로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은사와 능력은 기도만 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말씀에 대한 연구와 기도가 병행되어졌을 때에 비로소 주어진다. 말씀에 대한 구별의 기초가 되어있지 않은 자가 아무리 기도해도 그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진행되고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특별하고 다급한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꿈이나 환상을 통하여, 또는 직접 들려 주시기도하고 보여주시기도 하는 가운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고하시기도 하며, 종들에게 초자연적 능력을 부여하사 어떤 일을 진행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상적인 일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있는 계시와 섭리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것이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받아서 하나님의 섭리와 계시를 선포하셨다. 그러나 말씀<성경>이 정립된 후에는 모든 일은 말씀<성경>을 통하여 진행되어진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종들에게 무당이나 점쟁이들과 같은 형식으로 일하게 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무당이나 점쟁이들에게도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알고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무속 신앙인들은 점쟁이나 무당들의 <예언>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들은 과거의 일들은 때때로 잘 알아 맞추지만 미래의 일들에 대해서는 순전히 엉터리이다. 종교 심리학자, 또는 종교학자들의 연구조사에 의하면 그들은 과거의 일들은 어느 정도 감지하지만 미래의 일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들을 찾고 그들의 말을 신봉하는 것은, 좋은 것을 원하는 어떤 기대심리와 나쁜 것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그들의 연구 조사에 의하면 무당이나 점쟁이들의 예언들은 무엇을 아는 것에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것이다>라는 추측과 어떤 경험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무당과 점쟁이들이 오로지 추측과 경험에 의해서 예고 한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자들도 있겠지만 그들은 자신과 연결되어 있은 어떤 존재를 통하여 예언한다. 그 존재는 사단이거나 아니면 사단의 휘하에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 존재<사단 또는 사단의 졸개>는 사실상 앞으로 되어질 일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존재이다. 사단은 능력이 있어 과거의 일은 알지만 미래의 일은 전혀 모른다. 왜냐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만약에 사단에게 미래의 일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불순종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로 인하여 자신에게 닥칠 고통을 알면서도 아담을 타락시키지 않았을 것이며, 자신에게 닥칠 무서운 심판을 알면서도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지 않았을 것이며, 이미 끝난 싸움을 아직도 계속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무당이나 점쟁이들에게 역사하는 존재들은 미래의 일들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전히 그러한 역사를 전개하는 것은 사실상 미래에 대해서 모르고 있기 때문에, 즉 그러한 자신들의 행위가 나중에 얼마나 많은 심판을 받을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싸움이 처음부터 승패가 이미 결정된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아직도 기회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유혹시키고 있는 것이다.

5. 은사의 수여자.

은사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행사되지만 그들에게 은사를 부여하시고 그들이 은사를 행사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은사를 수여하시는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성령 하나님은 은사를 <적용하시고 진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와 같은 진리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자신을 통하여 행사되어지는 은사를 과시하거나 자랑할 수 없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도구로서 하나님의 섭리 역사에 쓰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은사를 통하여 영광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지 사람이 아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임 받았다는 그 자체가 곧 영광이다.

6. 은사의 진행원리.

모든 은사를 전개함에 있어서 진행 원리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법-로고스-예수 그리스도>이다. 기독교의 모든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법-로고스-예수그리스도>가 기독교의 출발이며 핵심이고 결론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 이외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좌하고 보증하는 방법이고 수단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우선이고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각종 신비한 은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을 뒤따르며 보좌하고 보증하는 방법이고 수단인 것이다. 이와 같은 원리가 바르게 정립되지 않고 순서가 바뀐다거나 또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신학-법-로고스-예수 그리스도>가 무시되거나 약화되고 은사들이 우선적으로 강조되면 기독교로부터 오류 되고 변질되는 비 진리에 빠지게 된다. 기독교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비주의자들이나 이단자들이 이와 같은 경우에 해당된다. 이와 같은 원리를 알지 못하는 신학 부재의 부흥강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법-로고스-예수그리스도>보다 은사체험 위주신앙을 강조함으로서 기독교 신자들을 기독교로부터 이탈시키고 변질시킨 것이다.

7. 은사의 진행방법.

모든 은사를 전개함에 있어서 진행 방법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진행<기도, 명령>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사를 진행을 해야 하는 이유는<예수 그리스도>가 곧 은사 진행의 법적 행정적 근거<말씀-법-로고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를 모르는 자들은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진행하지만 개념은 <안수> 또는 <안찰>을 통하여 능력이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1) 안수.

안수는 구약시대에서부터 전승되어온 관례이다. 구약시대의 안수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축복할 때에 머리에 손을 얹는 것으로서 일반적인 관례이고 다른 하나는 임직에 대한 의례로서 의례<儀禮>적 관례이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하나님의 <영력>이 안수를 통하여 전달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신약시대의 안수례 역시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졌는데 후기신약 시대의 안수례는 하나님의 종들을 임직할 때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이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이 은사를 진행할 때에 시행하는 안수례는 그, 안수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력이 전달된다는 의미로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사 진행의 법적 행정적 근거인 <말씀-법-로고스-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사를 진행할 때에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은사 진행을 통하여 나타나는 능력의 결과는 <말씀-법-로고스-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한 것이고 그러한 역사적 진행에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의미하는 차원에서 안수례를 시행하는 것이다.

2) 안찰.

안찰이란 용어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 현대 기독교에서 많은 사람들이 안수와 안찰을 같은 차원의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그것은 분명한 오류다. 안찰<按擦>이란 용어는 누르거나 비비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환자의 경직된 신체를 풀어주는 것이다. 반면에 무속인들은 안찰을 귀신을 쫓아내는 무속적 행위로 사용하는데 이때에 주로 대나무, 소나무, 복숭아나무 등등으로 때리고 훑어냄으로서 귀신을 쫓아낸다. 기독교를 자처하는 <그러나 전혀 기독교가 아닌> 일부 기도원들이 환자를 치유한다거나 또는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묶어놓고 안찰하는 가운데 사고를 일으킨다. 심하게 누르고 때려서 부상을 입히거나 사망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들은 <말씀-법-로고스-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사를 진행할 때에 각종 능력이 나타난다는 원리를 모르고 안수 또는 안찰을 통하여 어떤 능력이 나타나는 것으로 오해하는 무지에서 발생된 것이다.

8. 은사 활용에 대한 원칙.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께 부여받은 은사를 활용할 때에 신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녀와 종들에게 은사를 부여하신 목적은 자녀들과 종들과 교회에 덕이 되고 유익이 되게 하심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은사를 진행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1) 은사의 분별.

성도들은 자신들에게 어떤 은사가 나타날 때에 먼저 그 은사가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된 은사인가 하는 것을 분별해야 한다. 같은 은사라도 하나님께서 부여한 은사가 있고 사단의 음흉한 계략에 의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1)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은사.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은사는 은사를 부여받은 본인은 물론이요 성도들과 교회 전체에 덕을 세우고 유익을 주는 은사이다. 따라서 그 은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은사이며 그 은사가 진행되는 과정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 등등이 나타난다.

(2) 사단의 음흉한 역사.

사단은 항상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한다. 때문에 사단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사를 가장한 교묘한 역사를 진행한다. 그러나 사단의 역사는 교묘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불의와 비 진리적 상황을 전개하므로 그 진상을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소위 <투시의 은사>라고 하여 성도들의 일상적 삶이나 또는 성도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단은 성도들의 일상적 삶이나 또는 성도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게 하여 성도간의 갈등과 분열과 불화를 일으키고 나아가서는 교회 전체의 갈등과 불화를 조성한다. 뿐만 아니라 거짓 <투시의 은사>를 제공하여 성도들을 이간하고 분열하여 교회 전체를 어지럽게 만들기도 한다. 사단은 또한 말씀이 전혀 정립되지 않은 자들에게 치유의 은사, 예언의 은사, 귀신쫓는 은사, 기도의 은사, 등등을 가장한 여러 가지 유형의 능력을 제공하여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분열시키기도 한다. 말씀이 전혀 정립되지 않은 자들이 사단의 역사에 휘말리어 치유의 은사, 예언의 은사, 귀신쫓는 은사, 기도의 은사, 등등을 가장한 여러 가지 유형의 능력을 제공받으면 교회 내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한 능력을 제공받은 자들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은사인 것으로 믿는 가운데 그 은사를 기쁘고 자랑스럽게 여기어 열심히 활용한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말씀에 근거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부여한 은사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교회에 각종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이때에 목회자를 비롯한 주변의 성도들이 그들에게 말씀으로 충고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들은 그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교회를 떠나 개인적인 활동을 계속하는데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으로 알지만 사실은 3류 무속인들과 같은 자들이 되고 만다.

3) 교회 질서에 순응.

은사를 부여받은 자들은 그 은사를 활용함에 있어서 반드시 교회의 질서에 순응해야 하는바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목회자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은사자들이 은사를 활용할 때에는 반드시 담임 목회자의 지도와 지시를 받는다. 어떠한 경우에도 담임 목회자의 지도와 지시없이 활동하지 않으며 만약에 담임 목회자와 연락이 닿지 않아 부득이한 사정이 될 때에는 장로나 전도사 등등의 지도자들과 상의하거나 또는 그들과 함께 활동한다.
한편 담임 목회자는 동역자나 성도들 중에 은사자가 있으면 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교회에 덕을 세우고 유익이 되게 한다. 교회에 은사자가 많을수록 교회가 부흥되고 발전한다. 특히 담임 목회자 자신에게 없는 은사를 받은 자들이 있는 경우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신의 목회 동역자로 주신줄 알고 그들의 활동을 지혜롭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반면에 사단의 역사에 휘말린 자들이 있게 되면 교회는 심한 몸살을 앓게 된다. 따라서 그러한 자들이 교회의 질서를 무시하고 함부로 활동하면 담임 목회자는 지혜롭게 그들을 다스리어 교회의 분열을 막아야 한다.
성도들은 은사자들의 활동이 교회의 질서를 무시할 때에 그것이 사단의 역사인 것으로 알아 그들을 초청하거나 그들을 추종하지 않아야 한다. 즉, 은사자들이 담임 목회자의 지휘를 받지 않고 개인적으로 활동할 때에 그들을 초청하거나 추종하지 않음은 물론이요 그들의 래방을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

(2) 자랑하지 않는다.

은사자들은 자신의 은사를 자랑해서는 안 된다. 특히 담임 목회자에게 없는 은사를 받은 자들은 교회의 질서에 철저하게 순종하여 담임 목회자의 목회 권위와 권세를 약화시키지 않도록 삼가고 주의해야 한다. 은사자들이 교회의 질서를 무시하거나 담임 목회자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하면 교회의 질서가 무너지게 되는바 그것이 바로 사단이 노리는 결과이다.

(3) 사례받지 않는다.

은사자들이 은사를 활용할 때에 어떠한 경우에도 사례를 받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며<마10:8>,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다. 은혜 입은 자가 사례를 하고자 하면 그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임을 가르쳐 주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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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소위 <기도원> 또는 <기도하는 자>들이 은사 활용을 빙자하여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게 하고 그것을 자신들이 착복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3류 무속적 행위이며 하나님을 상품으로 팔아 자기 유익을 구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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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장. 하나님의 성도

1. 성도의 신분.

1)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교회의 구성원들은 직분에 관계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성도이다. 하나님의 성도는 행정상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도 호칭되지만 가장 확실한 법적 호칭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리고 그 호칭<하나님의 자녀>은 그 어떤 호칭과도 비교되어질 수 없는 최고, 최대, 최상의 호칭이다. <하나님의 자녀>보다 더 높고 더 나은 호칭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의 종>이 성도보다도 우월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성도의 본질이 어떠한 것인지를 모르는 신학적 무지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에서 최고, 최대, 최상의 존재이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자녀를 섬기게 하기 위하여 세워진 존재이다.

2) 교회와의 관계에서.

성도가 교회직원<하나님의 종>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에서 최고의 법적 신분을 가지며 따라서 주의 종들로부터 섬김을 받는 존재이지만, 반면에 교회와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위치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하는 것이다. 이때에 있어서 교회의 직원<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진행하는 <하나님의 전권 대사>들로서의 권위와 권세를 갖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종들의 지휘 체제 아래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성도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존경하고 섬겨야하며 그 권세와 권위를 존중하고 순종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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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관계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종들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최고의 존재임을 명심하고, 또한 자신들은 그들을 섬기기 위하여 세움 받은 존재임을 명심하여, 그들<하나님의 자녀들>을 최선을 다하여 섬기고, 존중하고, 사랑할 것이며, 반면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직분 자들과도 비교될 수 없는 최고의 존재임을 명심하고, 또한 자신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서 그들의 지휘 통제를 받게 되어 있다는 진리를 명심하여, 하나님의 종들을 존경하고, 섬기고, 사랑하며, 그들의 권위와 권세를 존중하고 순종해야한다. 이렇듯 피차에 대한 섬김과 사랑함과 존중함과 순종함이 굴절 없이 순전하게 양립될 때에, 교회는 영광과 승리를 얻을 것이며, 교회의 영광과 승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 선포되어질 것이다.

3) 성도와의 관계에서.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형제, 자매의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유기적 가족관계는 그러나 법적, 행정적 관계가 아니라 실제적관계이다. 그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에 의하여 혈맹<血盟>되어진 가족<家族>관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서로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사랑해야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윤리적, 도덕적, 의무적, 신앙적>인 차원의 사랑이 아니라 오직 순수한 사랑으로서 즉 자신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어야한다.

4) 사회적 차원에서.

성도는 기독교인임과 동시에 사회의 일원이며 국가와 민족의 일원이다. 사회도 국가와 민족도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섭리 역사의 한 영역이며 모든 성도가 그 사회, 그 국가, 그 민족에 소속되어 있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사회와 국가와 민족의 일원으로서 그 영역의 제반 법규와 질서에 순종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와 민족의 안녕과 평화와 질서와 발전과 번영을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야한다. 특히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하게 될 때에는 생명을 다 바쳐 그 위기에 대처해야한다.

2. 성도의 권리와 임무와 자유.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권리와 임무와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성도의 권리와 임무와 자유의 행사는 세례 교인이상<유아 세례자는 입교 후>으로 제한되어지며, 또한 교회의 내규에 의한 제한을 받는다.

1) 선거권, 피선거권

성도는 교회 직원 선출에 있어서 선거권과 피선거권에 대한 권리와 임무와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

2) 참정권.

성도는 교회 정치에 참여할 권리와 임무와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

3) 발언권.

성도는 교회의 각종 사업과 운영에 대하여 자기의 견해를 밝힐 수 있는 발언권에 대한 권리와 임무와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

4) 잔존권.

성도는 어떤 사태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남아 잔존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

5) 전출권.

성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교회를 떠날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

6) 순종.

성도는 교회의 각종 정책과 법규와 지도에 순종하고 참여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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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이러한 권리와 임무와 자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구속당하거나 침해당하지 않으며 <따라서 서로가 서로에게 간섭하거나 제한할 수 없으며> 오히려 양보하고 스스로를 제한하는 가운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야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그리고 교회의 영광과 유익을 위하여 스스로 제한하고 양보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다.

3. 성도의 속성.

성도들은 법적, 행정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로운 자이며 거듭난 자로서 거룩한 자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현세를 사는 동안에는 완전한 성화를 이루지 못하므로 여전히 타락한 본성의 영향을 받는다. 때문에 성도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매우 특별한 속성들이 있다.

1) 순전...순수, 순전, 감동, 눈물, 애정, 동정, 순정,
2) 순종....하나님, 말씀, 목회자, 교회질서와 제도, 등등에 순종.
3) 충성 봉사..하나님, 말씀, 목회자, 교회질서와 제도, 등등에 충성, 봉사.
4) 욕심....물질, 강복, 권력, 권세, 권위, 지위, 직분, 명예, 미모, 등등에 대한 욕심.
5) 자랑....물질, 문벌, 학벌, 권력, 권세, 권위, 지위, 직분, 명예, 지식, 지혜, 미모, 등등에 대한 자랑과 과시.
6) 질투....모든 것에 대한 상대적인 유약함과 자존심에 의한 질투.
7) 착각....자신이 매우 똑똑하거나 잘하거나 잘난 것으로 착각함.
8) 유약....판단부족, 불신, 호기심, 신비주의 유혹, 미혹, 오류, 이탈, 연약, 질병, 오해, 비관, 소외감, 자기비하, 외로움, 염세주의, 두려움, 무서움,
9) 고집....고집, 독선, 이기주의, 과신, 맹신, 외골수,
10) 혈기....포악, 무례, 난폭, 투쟁, 분파, 분당,
11) 기타...약자무시, 강자에 아부, 호들갑, 수선, 무책임, 무성의,

4. 성도의 삶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신분에 적합하고 합당한 신학적, 신앙적, 인격적, 삶을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바 성도가 마땅히 행하고 지켜 살아야 할 삶을 고찰하여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신앙에 있어서.

(1) 예배적 삶을 살아야한다.

성도는 삶 그 자체가 예배가 되는 삶을 살아야한다. 성도의 삶에는 교회 안과 교회 밖의 삶이 구별되어져서는 안 된다. 성도의 삶은 또한 예배 시간과 일상 시간의 삶으로 구별되어져서도 안 된다. 성도의 삶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으로 일관되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을 오해하여 항상 교회에 엎드려 찬송하고 기도하는 삶을 살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성도의 삶이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그리고 순전히 일치되는 신학적, 신앙적, 인격적 삶이 되어야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2)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어야한다.

성도들은 법률적, 행정적으로 온전하고 순전하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통하여 원죄는 물론이요 그 밖의 일생적 삶 속에 일어나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일체의 모든 죄를 용서함 받았기 때문에 법률적, 행정적으로 완전무결하게 온전하며 순전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현세적 삶은 사실상 실제로 온전하며 순전할 수없다. 성도들은 현세에서는 온전한 성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도들의 삶이 법률적, 행정적으로만 순전하고 온전할 뿐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자신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를 모독하는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망극하신 사랑을 만홀히 여기는 결과를 초래한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어 성도들이 현세를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수 있도록 그들의 삶을 조명하시어 그들을 순전하고 온전하게 하신다. 따라서 성도들은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에 철저하게 순응하여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여야한다.

(3) 기도 생활을 해야 한다.

성도는 항상 쉬지 않고 기도함으로서 영육 간에 깨어있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한다. 성도가 기도를 게을리 하면 사단의 유혹에 넘어져서 하나님께 범죄 할 가능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성도가 기도를 게을리 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께 불충, 불효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성도의 기도는 삶을 통한 기도이어야 한다. 성도의 삶 자체가 곧 기도이어야 하는 것이다. 기도를 통하여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항상 자신의 생각과 형편을 하나님께 아뢰는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며, 기도를 통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4) 하나님의 말씀을 교육받아야한다.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야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푯대가 되고 지주가 되고 방법이 되어야한다. 따라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음미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공적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익힐 것이며 기회 있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한다. 성도가 하나님 말씀 배우는 일을 등한히 하면 하나님의 진리에서 벗어나게 되며 사이비 이단들의 비 진리에 빠져 하나님의 섭리 밖에 있게 된다.

2) 가정에 관하여

성도는 가정 사회의 일원으로서 가족을 사랑하고 돌보아야 할 책임과 의무를 가지며 또한 협력과 상부상조의 책임과 의무를 갖는다. 개인주의적, 이기주의적, 사고방식은 가정을 분리시키고 파괴시키는 악행의 근원이 된다. 따라서 가족을 사랑하고 돌보며 상부상조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되 법률적, 의무적, 책임적 차원에서 할 것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행하여야한다. 가정이 내게 어떤 존재인가? 와 가정이 내게 무엇을 해주었는가? 를 계산하지 않고 내가 가정에 어떤 존재인가? 와 내가 가정을 위해서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를 연구하고 고민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성도는 또한 가문의 훌륭한 전통과 고귀한 명예를 자랑으로 여기고 존중하여 후대에 길이 전하여야 하며 더욱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가문의 전통과 명예를 세워 후대에 전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가문의 의미를 바로 살려야한다. 따라서 성도는 가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신앙적 삶을 살아야한다.

(1) 부모에 대하여.

성도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여야한다. 부모에 대한 공경과 순종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계명 중 제 5계명이며 인류 사회 간에 주신 계명 중 첫째 계명이다. 따라서 부모에 대한 공경과 순종의 계명은 인류간의 계명 중 최고, 최대, 최상의 계명이다. 때문에 부모에 대한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은 부모에 대한 불효의 죄를 범하는 것인 동시에 결국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이 때에 있어서 부모라 함은 자신의 직계 부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부모에 대한 개념은 자신 가문의 모든 선대<先代>를 뜻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비록 자신 가문의 조상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신의 반열적 차원의 모든 이들의 조상이 곧 자신의 부모의 반열이 되는 것이다.

(2) 형제에 대하여.

성도는 형제자매가 자신의 분신인 것을 알아 그들을 대할 때 자신에게 하듯 하여야한다.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어야하며 형제자매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포기할 수 있는 사랑의 형제가 되어야 한다. 이 때에 있어서 형제의 개념도 부모에 대한 개념과 마찬가지로 같은 반열의 모든 이웃이 나의 형제가 되는 것이다.

(3) 자녀에 대하여.

자녀에 대한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적 개념에 있어서 이 세상의 모든 자녀들이 곧 나의 자녀인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모든 자녀들을 사랑하고 보살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육하고 지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학적, 신앙적, 인격적 삶을 살게 하여야한다.

(4) 배우자에 대하여.

성도는 배우자가 자신의 일부인 것을 알아 그를 대할 때에 자신에게 하듯 하여야한다. 배우자의 모든 것<부모, 형제, 기쁨, 슬픔, 고통, 아픔, 등등>을 곧 자신의 것으로 여기어 함께 나누어야하며 배우자를 위하여 오히려 자신을 희생하고 포기하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한다.

3)사회에 대하여.

성도는 자신이 소속한 모든 사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삶을 살아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1) 빛과 소금의 직분 감당.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향하여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고 빛과 소금의 신앙적 삶을 살아 세상을 밝히고 정화시키며 그러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셨다<마5 : 13>. 따라서 성도는 빛과 소금의 직분적 삶을 살아 자신이 소속된 사회를 진리에 입각한 아름답고 깨끗한 사회로 만들어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으며 아울러 자신의 신앙적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해야할 중대한 사명 완수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2) 사회의 법과 질서에 순응.

성도는 자신이 소속된 사회의 제반 법규와 질서를 솔선수범하여 지켜야하며 또한 그 사회의 윤리와 도덕에 일점의 하자가 없는 삶을 살아 타의 모범이 되고 귀감이 되어야한다. 성도가 불법, 불의, 편법, 위법, 탈법, 등등을 행하거나 윤리도덕 등등을 준행하지 않는 것은 사회에 대한 범법행위이지만 그보다 먼저 하나님의 법과 질서에 불순종하는 행악이다. 따라서 성도는 사회의 제반 법규와 질서를 솔선수범하여 준행함은 물론이고 법률로 정해지지 않은 문제라 할지라도 사회가 통상적으로 요구하는 제반질서를 반드시 준행해야 한다.

(3) 상부상조.

성도는 자신이 소속된 사회의 모든 사람들과 상부상조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덕을 세워야하며, 특히 각종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하여 돌보아 줌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하여야 한다. 성경은 성도의 이웃사랑에 대한원리를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0-48>

이 말씀은 기독교의 이웃 사랑에 대한 원리이다. 기독교의 이웃 사랑은 윤리적, 도덕적, 종교적 차원의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적 차원에서 시행되어져야 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5:40-48>에 합당한 형이상학적 이웃 사랑을 시행해야 한다. 기독교의 이웃 사랑은 윤리적, 도덕적, 차원의 의무나 책임이 아니며 종교적 선행도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지극히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신앙적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기독교의 이웃 사랑을 선한 사마리아인<<눅10:30-37>을 통하여 가르치셨다.

그리고 이러한 기독교의 이웃 사랑은 결국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며 섬김이다.<마25:34-45>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 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 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마25:34-45>

3) 국가에 대하여.

국가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부름 받고 세움 받은 하나님의 섭리적 도구이며 하나님의 종이다. 모든 성도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가와 민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책임과 의무를 갖는다.

(1) 애국애족<愛國愛族>

① 모든 기독교인들은 국가와 민족을 자신보다 더욱 우선시하며 자신보다 더욱 사랑한다. 국가와 민족이 있음으로 내가 존재할 수 있으며 국가와 민족이 없는 나의 존재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② 국가와 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갖으며 조국에 대한 자부심으로 세계의 열강들과 당당히 맞선다. 강대국들 앞에 열등의식을 갖지 않으며 그들에게 비굴하지 않으며 그들에게 아부하지 않으며 그들을 사대<事大>하지 않는다.

③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조국과 민족을 버리지 않으며,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조국과 민족에게 해가 되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으며, 조국과 민족의 안녕과 안전과 명예와 유익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조차 돌보지 아니하는 희생적 삶을 산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라면 사지<死地>라 할지라도 주저하지 않고 달려가며 조국과 민족이 위기에 처하면 비록 해외<海外>에 나가있다 할지라도 만사를 제쳐놓고 즉시 달려와 목숨을 다 바쳐 헌신하고 충성한다.

(2) 법과 질서 준수.

모든 기독교인들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가가 법률로 제정한 모든 것을 솔선수범하여 지키어 국민의 의무를 철저하게 이행하되 책임과 의무적 차원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차원에서 국가와 민족의 무궁한 발전과 성장을 기원하는 차원에서 준수한다. 또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모든 질서와 윤리와 도덕을 실천하며 정의와 진리에 빛나는 삶을 살아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도모하고 아름다운 복지국가를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최선의 국민적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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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장. 교회 직원

1. 교회 직원의 역사.

1) 구약교회

구약시대 교회의 직원조직 형태는 민족교회 시대 이전까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교회 내에 특별한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지 않았고 따라서 교회 내에 어떤 형태의 조직이 세워지지 않았다. 부족 교회들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은 당연히 족장들이었다. 족장들은 부족의 영수<領首>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 지도자이며 동시에 정치적 지도자였다. 때문에 부족교회의 모든 것은 족장을 중심으로 하여 진행되었고, 족장들이 대소사<大小事>를 계획하고 진행하고 처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구약시대 교회가 민족적 교회로 발전하게 되었을 때부터 교회 내에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야곱의 12부족 교회가 애굽의 고센에서 정착하는 동안 민족교회로 발전해 나가게 되었을 때 부족교회의 문제들은 부족의 족장들을 중심으로 하여 모든 것을 진행해 나갔고 부족교회 차원을 넘어서 민족교회적인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에는 각 부족의 족장들이 모여서 그 문제를 협의하여 처결하였다. 그러나 부족교회들이 크게 성장함에 따라 민족교회도 아울러 성장하였을 때 족장들이 부족교회와 민족교회를 이끌어 가기에는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따라서 이때부터 교회 내에 직원 조직제도가 세워지게 되었다. 구약시대 교회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직원조직 형태는 장로<출3:1619:7,22; 24:1>였다. 당시의 장로들이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세워졌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당시 근동 일대의 부족들은 거의 대부분 장로들을 세워 족장들과 함께 부족을 이끌어 가게 하였다<창50:7;민22:7>.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명을 받았을 때 이스라엘에게는 이미 70명 이상의 장로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민족교회는 이미 장로라는 직분자들을 세워 교회를 운영했던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의 민족교회는 애굽을 떠난 후 몇 차례에 걸쳐 교회를 조직화한다.
제1차 교회조직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충고에 의하여 실시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출18:13-26> 등등의 제도이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 혼자서 이스라엘 전체 교회를 이끌어 가는 과정에 발생하는 각종 문제점들을 지적한 후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등등의 조직체계를 수립하도록 충고하였고, 모세가 그것을 받아들여 교회를 조직화한 것이다. 그러나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등등은 교회 직원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일반 사회적 직무를 행하는 자들이었다. 당시에는 아직 교회조직이나 국가적 조직이 결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도자들은 교회적 직분과 국가적, 민족적, 사회적 직분을 함께 행사하였다.
제2차 교회 조직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사장 제도이다<출28장>. 하나님께서는 광야교회를 건축하신 후 모세와 아론이 소속되어 있는 레위 지파를 제사장 지파로 지정하시어 교회를 이끌어가게 하셨다. 이때에 아론을 전체 제사장의 수장인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셨고 아론의 아들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 등등을 일반 제사장으로 세우셨다.
제3차 교회 조직은 재판관과 유사 제도이다<신16:18>. 재판관과 유사들은 각 지파별로 세워졌는데 그것은 모세를 통하여 세워진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를 통하여 세워졌다. 재판관과 유사 제도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제도이지만,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 세워진 제도이기 때문에 여호수아를 통하여 세워진 것이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 <신16:18>을 근거로 하여 12지파들에게 재판정<裁判廷>을 설립하였고 각 재판정마다 7명의 재판관을 두었으며 그들을 돕는 유사들을 세웠다. 이때의 재판관들은 장로들이었고 이 제도가 훗날 70명의 장로들로 구성된 <예루살렘 공의회-산헤드린-Sanhedrin>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 직원들 중에 실질적인 교회 직원은 제사장들이었고 그 이외의 직원들은 처음에는 교회 직무에 관여하였으나 나중에는 일반적인 차원의 민족적, 정치적, 행정적인 일들에만 종사하였다. 구약교회 시대에 교회적조직이 처음으로 세워진 것은 그들에게 10계명이 주어지고 성막교회라는 외적 형태의 종교적 구심점이 세워진 이후였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여러 계층의 제사장들을 세우셨고 또한 레위 부족들로 하여금 교회를 섬기는 직책을 담당하게 하시어 교회를 조직화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구약교회의 조직은 이스라엘이 남북 왕조로 분리된 이후까지도 계속되었다. 남왕국 유다는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 조직을 이루었고 북 왕국 이스라엘은 사마리아 성전<그리심 산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 조직을 결성하였다. 이스라엘은 비록 남북 왕조로 분리되었으나 여전히 제사장 제도 중심의 교회 조직형태를 유지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남북 왕국이 패망하고 유대인들이 본국을 떠나 디아스포라적 삶을 살게 되었을 때의 교회 조직 형태는 그와 같지 못하였다. 이스라엘 남북 왕조가 멸망하였을지라도 남 왕국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 본토의 국민들은 나중에 성전들이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는 나름대로의 제사장 중심적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제사장들은 레위 지파에 의하여 세습되어지던 관행이 사라지고 정치적 이유와 매관매직<賣官賣職>에 의하여 레위인 아닌 자들이 제사장이 되었다. 때문에 대제사장들이 수시로 바뀌었고 대제사장들은 재임기간 동안 권력과 결탁하여 각종 유익을 챙기기에 급급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 북 왕국 이스라엘은 정복자들의 정책에 의하여 이방인들과의 통혼<通婚>으로 전통적 신앙생활이 유명무실하였고, 따라서 제사장 제도도 같은 상황이었다. 반면에 남 왕국 유다는 아직도 여전히 제사장 제도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당시의 제사장 제도나 신앙적 형태는 이미 과거와 같지 않았다. 제사장들은 종교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관료적인 직분자였고 백성들의 신앙 역시 야훼 중심의 신앙이 아니라 민족 중심의 신앙이었다.

한편 국외로 나가 흩어져 살았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제사장 중심적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고 따라서 회당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에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이끌어 가는 구심점은 회당장이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장로들이었다. 회당장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종교적, 신앙적 구심점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일상생활의 모든 문제를 지도하는 정치적 행정적 지도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2) 신약교회.

예루살렘, 또는 안디옥으로부터 출발한 사도들에 의해서 교회들이 세워졌을 때, 처음에는 교회 내에 직원조직이 구성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곧,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에 교회를 조직적으로 구성하여 관리 운영해야 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성도들은 다만 모여서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배우며 애찬식을 거행하는 가운데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돌보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러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교회를 조직적으로 운영하시는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설립되자 즉시 교회에 직원들을 세우셨다. 신약 교회 최초의 직원조직은 신약시대 최초의 교회이며 유일한 교회였던 예루살렘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예루살렘 교회에 성도들이 점차 늘어가는 가운데 교회 내에 직분자들을 세워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행6:1-6>.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은 이때에 7명<스데반,빌립,브로고로,니가노르,디몬,바메나,니골라,>의 직원들을 안수하여 세웠는데, 사도들이 교회에 직원들을 세우게 된 동기는 과부들에 대한 구제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교회에 직원들을 세우시는 역사적, 섭리적 제도에 의한 것이었다. 한편 기독교 학자들은 이때에 세워진 7명을 장로로 주장하는 자들과 집사로 주장하는 자들로 양분되는데 일반적인 견해에 의하면 그들은 장로가 아닌 집사<현대 장로교회의 안수 집사>였다.
한편 초기 신약시대의 교회들은 거의 대부분 사도들을 비롯한 전도자들에 의하여 세워지고 운영되어졌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의 지휘를 받았다. 이때에 사도들과 전도자들은 한곳에 계속하여 머무르지 않고 교회가 어느 정도 자립의 기틀을 갖출 정도로 성장하면 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교회들을 세워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세운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돌보았다. 때문에 교회는 그들을 <순회 사도> 또는 <순회 전도자>라고 불렀다. 순회 사도 또는 순회 전도자들이 계속하여 교회를 설립해 나감에 따라 더욱 많은 지역에 더욱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자 교회들은 순회 사도 또는 순회 전도자들의 보호로부터 차츰차츰 격조<隔阻>하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들은 자체적인 지도자를 세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교회 내의 직원 조직의 필요성도 아울러 절감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곧 이루어지리라고 믿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고 성도들이 계속하여 늘어나면서 교회가 하나의 집단 사회로 성장하게 되었을 때에 교회 직원조직의 필요성은 더욱 시급하게 요구되었다. 이에 사도들은 각지 교회에 집사들과 장로들과 감독들을 세워 그들이 자체적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게 함으로서 교회가 안정을 누림과 동시에 발전하고 성장하게 하였다<딛1:5-9>.

2. 교회 직원들.

1) 구약교회.

구약교회 시대의 교회 직원들은 이미 언급한바 있듯이 제사장 중심이었다. 당시의 제사장들은 대제사장과 차석 제사장과 평 제사장의 3종류가 있었다. 그러나 구약 교회시대 말기인 왕국 교회시대 이후부터는 제사장 외에 또 다른 직분자들이 있었다. 구약시대 교회의 직분자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제사장.

구약시대 제사장 제도는 모세 인도하의 광야교회 시대에 공식적으로 수립되어지지만 제사장 제도는 이미 오래전부터 구약 성경들을 통하여 예시되어 지고 있다. 가정교회 시대에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도 제사장적 기능이 보여지고 있고 부족교회 시대에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욥, 등등의 족장들도 제사장적 직무를 행사하였다. 야곱의 12부족 교회가 애굽에 거할 때에 그들은 애굽의 종교적 제도를 본 따서 자신들의 종교에도 제사장직을 세웠다<출19:22>. 그러나 기독교의 제사장직은 인류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예표 하는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창14:17-20>을 통하여 이미 예고되어져 있었다. 하나님께서 구약교회에 공식적인 제사장 제도를 세워주신 것은 모세 인도하의 광야교회 시대 때부터였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10계명을 주시고 또한 성막교회를 세우시어 교회의 외적 형태를 갖추신 후에 그들에게 제사장을 세워 교회의 내적형태인 조직 체계를 갖추신 것이다. 구약교회의 제사장 제도는 대제사장, 차석 제사장, 평 제사장 등등의 3가지였는데 그중에 가장 막중한 직무를 행하며 전체 제사장직을 대표하는 것은 대제사장이었다<왕하25:18><대하31:13><느11:11>. 하나님께서 구약교회에 최초로 세우신 대제사장은 아론이었고 그 외의 제사장들도 모두 아론의 후손들로 세워졌다.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을 비롯한 모든 제사장들을 아론의 반차를 따라 세우도록 명령하셨으며 따라서 모든 제사장들은 아론의 후손들이 세습하게 되었다.

(2) 장로.

구약교회에 장로 제도가 처음 세워진 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교회를 더욱 조직화하였을 때이다<신16:18>. 그러나 그 당시 모세가 장로들을 교회 내에 세운 것이 아니라 이미 세워져 있던 장로들을 부족교회 또는 민족교회의 유사와 재판장으로 세운 것이었다. 당시의 장로들은 근동 일대에 산재하였던 대부분의 부족들에게 존재하는 장로들과 같은 형태의 장로들이었다. 당시 근동 일대의 장로들은 학식이나 군사적 지도력을 겸비한 경우도 물론 있었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삶의 경륜이 있는 연장자들로서 부족들을 이끌어가는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있었고 따라서 부족들로부터 존경받고 추앙받는 지도자들이었으며, 대부분의 경우 부족들의 회의에서 추대된 존재였다. 이와 같이 야곱의 12부족 교회에 존재하고 있었던 장로들도 기름부음 받아 세워진 훗날의 장로들과는 달랐지만 그들은 이미 민족 또는 부족들을 이끌어 가는 민족적, 종교적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장로들은 사실상 교회적인 직원들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차원의 민족적, 정치적, 행정적, 지도자들이었다. 당시의 이스라엘 12부족들이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분명하였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섬김은 다만 하나의 종교적인 전통이요 신앙적인 것이었을 뿐 아직 그들에게는 기독교라는 조직적 형태의 종교에 대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장로들은 매우 중요한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다. 모세는 특히 70인의 장로들을 세워 그들로 하여금 백성들을 대표하게 함으로서 민족교회로서의 조직체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구약교회 시대에 교회적 조직이 세워지고 제사장 중심의 교회 조직체계가 이루어지게 되었을 때부터 장로들의 지도력은 일반적인 것으로 제한되어지게 되었다. 이스라엘 남북 왕국이 멸망하였을 때부터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다시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의 위치로 복귀하였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정복자들이 세운 분봉왕들을 섬기게 되었지만 그들을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또한 분봉왕들과 정치적으로 결탁한 비 진리적 제사장들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들은 자신들이 추대하여 세운 장로들을 더욱 믿고 의지하였다. 때문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백성들의 종교적, 정치적, 도덕적, 지도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여호수아시대 때부터 구성된 성읍의 7장로<재판장>제도와 그것이 발전하여 수립된 <예루살렘 공의회-산헤드린>의 구성원들은 모두 장로들이었다. 장로들의 역할은 이스라엘 남북 왕조 멸망 후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더욱 중요하였다. 그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신앙적 구심체였던 회당의 지도자<회당장>로서 예배를 인도하고 율법을 가르쳤으며 백성들의 대소사를 해결해 주는 오직 유일한 종교적, 정치적, 도덕적 삶의 구심점이 되었던 것이다.

(3) 서기관.

서기관들은 본래 교회직원으로 세워진 자들이 아니라 왕국 궁정의 사관<史官>들과 함께 중요한 사건을 기록하는 관리들이었다. 서기관 제도는 다윗 시대에 세워졌으나 그 기원은 여호수아 시대에 세워진 재판관들의 보좌관<유사>이다. 다윗은 애굽 왕정의 관리 제도를 도입하여 왕국 관리 제도를 세웠는데 그때에 세워진 관리중 하나가 곧 서기관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국가 역사의 기록자로서의 임무와 국왕의 비서 임무를 맡았는데 이러한 직무적 특성 때문에 율법을 필사하는 임무가 추가되었다. 그리고 율법을 필사하는 임무를 수행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임무까지 행사하게 되었다. 남북 왕조가 멸망한 후 분봉왕들이 세워졌을 때부터 서기관들은 왕국 관리로서의 직무에만 충실하는 자와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종교적 지도자로서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나뉘어졌는데 그중에 왕국 관리들은 유대 민족들로부터 거부되어진 반면에 종교적 지도자들은 더욱 존중되었다. 종교적 지도자 위치에 있는 서기관들은 거의 대부분 레위지파 출신의 제사장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들만의 집단을 구성하여 활동하였다. 그들은 이때로부터 서기관으로 불리어지지 않고 선지자 또는 율법학자로 불리어졌는데 그중에 제1인자는 <에스라>였다. 포로기가 종료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됨에 따라 제사장 중심의 신앙생활이 복원되자 제사장들의 직무가 본격화되었고 제사장들은 더 이상 서기관<율법학자>의 직무를 겸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때로부터 제사장 계열과 율법학자 계열의 분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서기관 <율법학자>가 되기 위해서 오랫동안 율법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훈련을 쌓았다. 따라서 율법학자가 되려는 자들은 어릴 때부터 율법을 공부했다. 율법학자이며 역사학자였던 요세푸스는 어릴 때부터 율법 교육을 받아 이미 14세 때에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율법학자 지원자는 교사의 개인적 가정이나 율법학교에서 수학한 후 소정의 교육과정을 거치어 그 실력을 인정받으면 보조교사<補助敎師>가 되었고 40세가 되면 안수 받은 후 정식 교사<율법학자>가 되었다. 율법학자들은 <랍비> <교법사>라는 명칭으로도 불리었으며 능력있는 자들은 학파를 형성하여 율법학교를 세우기도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 가장 유명한 율법학파는 샴마이<Shammai> 학파와 힐렐<Rabbi Hillel>학파였는데 힐렐 학파의 문하에 가말리엘이 었었고 가말리엘의 문하에 사도 바울이 있었다. 그들은 산헤드린의 회원으로도 활약했으며 지방 도시의 재판관의 직무도 수행하였다. 그들은 교회의 내적 직분을 가진 것은 아니었으나 국민적인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대제사장들조차도 그들의 권위적 자문을 무시할 수 없었다.

(4) 선지자.

구약교회 시대의 중요한 직분자중 하나는 선지자<선견자>였다. 선지자들의 직무는 제사장들의 직무와는 달리 교회 내의 직무가 아니라 교회 밖의 직무이었지만 신학적인 차원에서는 오히려 제사장들보다도 더욱 중요한 직무였다. 당시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신학적, 신앙적 지도자의 역할을 겸임하였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구분할 때에 제사장들은 신앙적 지도자들인 반면에 선지자들은 신학적 지도자들이었다. 선지자들은 현재적인 상황을 선포하는 동시에 미래적인 것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입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선지자들은 구약교회 시대를 이끌어가는 신학적 지도자로서 제사장들보다도 오히려 더욱 중요한 직분자 들이었다. 선지자들은 사무엘 시대 이전에도 활동했지만 선지자들의 단체가 등장한 것은 사무엘시대 때부터였다. 한편 선지자들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것은 남북 왕국이 분열한 이후부터였다.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 엘리사, 미가야, 아모스, 호세아, 등등의 선지자들이 활동하였으며 남 왕국 유다에서는 이사야, 미가, 나훔, 스바냐, 하박국, 예레미야, 등등이 활동하였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시대에는 에스겔, 학개, 스가랴, 오바댜, 요엘, 말라기, 등등의 선지자들이 활동했다. <B.C. 8세기>이후 선지자들의 활동은 문서로 기록되어 구약 성경에 전승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기술선지자<記述先知者>로도 불리어진다.
한편 선지자들은 교회의 행정조직에 편입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무에 있어서는 제사장들의 직무에 전혀 관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전념하는 특별 직무를 담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은 일반 정치에 대하여서도 관여하지 않는 특별한 직무자들이었다. 세례 요한은 말라기 이후의 선지자로서 구약 교회와 신약 교회의 선지자 직무를 겸임하였다.

2) 신약교회.

(1) 신약교회 직원의 역사성.

바울 사도의 증거에 의하면 기원 1세기 말경의 교회에는 다양한 은사를 가진 다양한 직분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전12:28>

바울이 증거하는 교회 직분자의 중요함을 순서적으로 말하면 사도가 첫째요 선지자가 둘째이며 교사가 셋째이고 그 다음은 능력이고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교회의 직분에 대한 중요성대로라면 첫째가 사도이고 둘째가 선지자이며 셋째가 교사였다.
한편 이그나티우스의 증언에 의하면 기원 2세기 초에 이르러 안디옥을 비롯한 아시아 교회들에는 집사, 장로들과 함께 왕적인 권한을 가진 감독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 당시에는 사도들이 모두 소천 하였을 때이며 선지자들의 직분도 거의 종료되었을 때였다. 따라서 교회의 교직 제도에는 사도나 선지자 제도가 존재하지 않았고 집사나 장로나 감독들의 체제로 전환되었음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당시에 로마의 클레멘트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나타난다. 클레멘트의 서신에 의하면 고린도 교회에는 집사와 장로의 두 직분자들이 있었는데 이때의 장로가 감독의 호칭으로도 불리어졌던 것으로 보아 장로들 중에 감독 직분을 겸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이중적 직분 제도는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통해서도 증명된다.<행20:17><빌1:1><딛1:5-7>
한편 디다케에 나타나는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언급을 보면 당시에 집사, 장로, 감독, 등등의 교직자들이 교회의 전반적인 문제를 관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디다케에 나오는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언급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주께 합당한 자들을 감독과 집사들로 지명하되, 온유하고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진실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할 것이니, 이는 그들이 선지자들과 교사들의 임무를 감당하는 까닭이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그들이 선지자들과 교사들의 명예를 함께 나누는 자들이니라.

따라서 성경과 역사학자들과 디다케 등등이 전하는 모든 것들을 근거로 할 때에 우리는 기원 1-2세기의 교회들이 다음과 같이 운영되어졌음을 추론하게 된다.

*사도들과 전도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들은 처음에는 사도들의 순회목회 하에 인도되었으나 교회들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사도들의 인도함이 격조<隔阻>하게 되었고, 따라서 자체적인 지도자<집사, 장로, 감독>들을 세워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인도 관리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세월이 많이 지남에 따라 사도나 전도자, 그리고 선지자들은 이제 그 임무를 다하고 소천하였으며 그들의 직분은 그들의 직무 자체가 완결되었음으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음에 따라 완전히 종료되었다. 한편 교사 직분은 그 직무가 여전히 계속됨으로 여전히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는 장로 또는 감독들이 교사의 직무를 이행하게 되었으므로 더 이상 별도의 존재적 의의가 없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교사라는 직분도 역시 종료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모든 교회들은 전적으로 자체 지도자들인 집사, 장로, 감독들에 의하여 운영되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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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다케.

“디다케”<Didache-12사도의 교훈> 또는 <사도들의 가르침-Teaching of the Apostles>은 명칭 그대로 12사도들의 교훈을 집대성한 책으로 알려져 왔다. 이 책은 많은 초기 교부들에 의해서 성경과 다름없이 사용되었는데 한때 사라졌다가 1883년 대주교 브리엔니오스<Archbishop Bryennios>가 현재 예루살렘에 있는 1056년경의 사본으로부터 인쇄하여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디다케가 작성된 연대와 목적에 대하여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디다케에 나타나는 교회의 질서에 관한 내용을 근거로 할 때에 그것은 <A.D.70-11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어떤 사람은 디다케가 <바나바서-Epistle of Barnabas>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졌다고 하여 보다 더 후대의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디다케는 처음부터 교회적인 여러 가지를 종합하여 작성한 것이었다. 디다케는 기독교에 새로 입문하는 성도들을 도덕적으로 권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일부는 유대인들의 소책자인 <두 가지의 길-The Two Ways>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디다케에는 그밖에 세례의 방법과 수요일과 금요일에 행하던 금식 문제와 하루에 세 번씩 시편을 낭송하던 것과 주기도문의 정확한 형태 및 성찬식 때의 기도 등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지역 기독교 사회를 이끌어 가는 사도들에 대한 것과 선지자들 및 기타 방문객들을 대접하는 문제에 대한 것이 들어 있고 마지막 부분에는 사이비 비 진리자들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다.
반면에 디다케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 대속죄적 죽음을 치룬 것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는 것이 특징이다.

(2) 신약교회 직원의 구분.

신약초기 기독교에서 교회 조직의 필요성에 따라 세워진 직분제도는 집사, 장로, 감독, 목사였다. 그러나 교회가 처음부터 집사와 장로와 감독과 목사를 한꺼번에 세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직분자들은 교회의 성장 발전과 아울러 함께 이루어졌던 교회 조직의 확대 과정에서 점진적, 단계적으로 세워졌다. 우리는 여기에서 신약교회 직원들을 구분하여 고찰함으로서 교회 직분자들의 본래적 의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① 사도.<使徒-αποστολος-apostolos> <αποστολη-apostole>

교회의 직원 조직을 논증함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으로 소개해야 할 것은 당연히 사도 직분이다. 사도직은 구약교회 시대의 제사장 제도를 비롯한 모든 교직제도가 종료된 이후 교회에 최초로 세워진 교직이었다. 사도라는 직분은 <파견된 자> <사자>라는 뜻의 히브리어 <샬리아-חילשׁ-shaliach>에서 유래된 것이고 헬라어의 <아포스톨로스-αποστολος-apostolos>와 동의어<同義語>이다. 따라서 사도라는 직분의 정확한 뜻은 <전권이 위탁된 자>이다. 사도직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요13:16>과 <히3:1>에 있다. 따라서 사도란 일정한 사명을 위해 절대적 권위자<하나님>로부터 파견된 <대표자-사자>이다. 즉, 사도는 하나님에 의해 직접 세워진 특별한 직분이었다. 따라서 사도의 권위는 매우 특별한 것으로서 여타 하나님 종들의 권위와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② 교부.

교부<敎父>는 사도<使徒>들의 직무를 직접적으로 계승하였던 자들에 대한 호칭이다. 교부들은 사도의 뒤를 계승하였다는 차원에서 <속사도-續使徒>라는 호칭으로 불리어지기도 한다. 한편 어떤 역사학자들은 속사도와 교부를 구별하기도 한다. 그들은 사도들의 직계 제자들이 사도들의 뒤를 계승하였다는 차원에서 <속사도-續使徒>라고 호칭하고 반면에 속사도들의 직계 제자들을 <교부-敎父>라고 호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속사도와 교부의 호칭은 사도 이후 초기 신약교회 시대의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으로 사용되어졌다. 신약교회 초기 시대에 사도들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들은 사도들에 의하여 임명된 교회 지도자들이 사도들의 직계 제자로서 사도들의 직무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사도-속사도-교부> 등등으로 계승되는 교회적 전통을 가지게 되었다. 반면에 사도들에 의하여 세워지지 아니하고 다양한 전도자들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들은 사도들을 전혀 알지 못하고 다만 전도자들에 의하여 세워진 지도자들에 의하여 인도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교회적 전통이 세워지지 못했다.
사도 이후 초기 신약교회 시대의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사도들을 계승하였다는 차원에서 대단한 자부심과 긍지를 내세웠다. 특히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의 교부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사도의 권위와 동일한 것으로 선포하였고 서방교회는 로마 감독의 권위를 사도적 권위와 동일한 것으로 주장하여 로마의 감독을 교황의 지위에 추대하였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사도들의 권위와 교부들의 권위를 구별하였으며 특히 로마 교황의 사도적 권위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이 거부한 것은 교황과 교부들의 비 진리적 권위 즉, 그들의 권력적 권위였다. 개혁주의자들은 교부들과 교황이 사도들의 권위를 내세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교회와 성도들 위에 군림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교부들의 사명적 권위는 오히려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들은 교부들의 사명적 권위가 사도들의 사명적 권위를 계승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권위는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서 교부들의 사명에 대한 아름다운 권위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③ 집사.

사도 직분 이외에 교회에 처음 세워진 직분은 집사였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운영하던 교회에 새로운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교회 내에 직원들을 세움으로서 교회를 조직화하였다. 그 첫 번째 조직은 예루살렘 교회를 통하여 세워진 7집사이다<행6:1-6>. 사도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7명의 집사를 세운 것은 구약교회 시대의 <성읍의 7장로> 제도를 계승한 것이었다.
당시에 로마교회나 소아시아 교회들은 기원 3-4세기 경까지 7집사 제도를 존중하였다. 교회가 처음에 집사들을 세운 것은 장로 후보생을 전제로 하여 선출한 것이 아니었다. 교회들은 다만 교회 조직의 필요성과 교회 사명 완수의 필요성에 의하여 집사들을 세운 것이었다. 그러나 집사들은 자연스럽게 장로들에 대한 후보의 위치를 지켜 나갔다. 기원 4세기에 이르기까지 집사들은 순차적인 승진을 거쳐서 장로나 감독의 지위에 올랐고 이러한 관행은 교회의 질서와 전통이 되었다. 그러나 집사들 중에는 장로나 감독으로 승진되지 않고 종신적 집사로 일한 경우도 많았다. 로마와 같이 큰 교회에서는 집사 직분이 매우 중요하였다. 로마 교회들의 집사 직분은 지방의 작은 교회 장로들보다 더욱 권위가 있었다. 한편 교회가 커지고 집사들이 많이 세워지게 됨에 따라 집사직에도 차등이 있게 되었다. 집사직 제도의 차등이 기록상의 문헌으로 처음 나타난 것은 기원 4세기 초 북아프리카 교회에서였다. 북아프리카 교회 역사에는 집사직이 평집사<평집事>와 대집사<大執事>로 구분되어 나타나는데 대집사는 집사장<Archdeacon>으로도 명칭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이러한 집사 직분 제도는 북아프리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대형교회들에서도 시행되어졌다. 기원 4세기 경 교회의 대집사, 또는 집사장들은 교회의 행정적, 재정적, 책임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장차 장로 또는 감독으로 승차되었다. 그들은 서열상으로는 현대교회의 안수집사와 같은 위치에 있었으나 직무는 오히려 현대교회의 장로들보다도 권위 있고 막중하였다. 당시에는 장로 또는 감독들이 대부분 현대 교회의 목사와 같은 직무를 행하였고 따라서 대집사, 또는 집사장들이 현대교회의 장로직무를 행하였던 것이다. 일반 집사<평집사>에는 여자 집사들도 세워졌는데 그들은 예배의식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구제를 비롯한 교회행사에만 봉사하였다.
한편 집사들로 인한 문제들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초기 신약교회는 거의 대부분 장로와 감독들에 의하여 인도되었고 집사들은 감독과 장로들을 보좌하였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는 집사들이 감독이나 장로들이 하는 직무에 사용되어지기도 하였다. 저스틴 마터의 기록에 의하면 <A.D.150년경> 로마에서는 집사들이 투옥당한 성도들이나 부상, 또는 노환 등등으로 인하여 성찬식에 참여하지 못한 성도들에게 감독이나 장로들이 교회에서 집례한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를 갖다 주어 그들이 성찬식에 참여하게 해주었으며 일부 교회에서는 집사들이 예배 때에 복음서를 낭독하기도 했다. 또한 기원 3세기 경에 이르러 성도들이 증가하게 되자 북아프리카 교회에서는 성찬식 때 집사들이 잔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집사들은 또한 장로나 감독들의 명을 받아 교회로부터 먼 지역에 있는 성도들을 심방하여 돌보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집사들의 비 진리적 직무가 성행하기도 했는데 일부 집사들이 장로나 감독의 지휘를 받지 않고 임의로 성찬식을 거행하거나 또는 심방하면서 설교를 하거나 함부로 안수 기도하는 사례가 발생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일부 교회들에게 문제가 발생하였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전체 교회로 확산될 조짐이 보이자 교회는 더 이상 그 문제를 방관하지 않고 교회회의<아를르 회의-A.D.314년> <니케아 회의-A.D.325년>를 열어 집사들의 그러한 활동들을 정지시켰다. 그리하여 예배를 인도하는 일이나 성찬식을 거행하는 임무는 전적으로 장로와 감독들이 맡아 수행하였다.

④ 장로.

신약교회 시대의 장로들은 구약교회 시대의 장로들과 달랐다. 신약교회 초기의 장로들은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하나는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어 갔던 장로들<행11:30; 15:2>이었고, 다른 또 하나는 각 교회들이 세운 장로들이었다. 바울은 교회마다 장로들을 세웠다<행14:23>. 그들은 한 지방 교회의 감독으로서<딛1:5> 신자들의 영적 생활을 지도했고 회중을 가르쳤다<딤전3:1-5><딛1:9><약5:14><벧전5:1-4>. 당시에 한 지방의 교회에는 몇 명의 장로<행11:30> 또는 감독<빌1:1>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안수받아 임직된 정규의 교사들이었고 목사들이었다<딤전4:14>. 당시의 장로들은 가르치는 일과 다스리는 일을 하였는데<딤전5:17-> 칼빈은 이것을 근거로 하여 두 종류의 장로 제도를 수립하였다. 칼빈은 두 종류의 장로 중에 가르치는 장로를 목사로 세우고 다스리는 장로를 현대교회의 장로로 세웠던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는 24장로가 소개되는데 신학자들은 그것을 구약교회의 12지파와 신약교회의 12사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⑤ 감독.<監督-superintendent>. 주교<主敎-bishop>

예루살렘 교회에는 처음부터 교회의 수장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베드로가 수장이었다가 베드로가 교회를 떠나게 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인 야고보가 그 직분을 계승했고 야고보가 순교한 후에도 또 다른 자들이 그 직분을 계승하였다. 이그나티우스의 기록 문서들을 보면 안디옥 교회에서도 이러한 교회 직분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 사도들이 퇴진한 이후, 초기 기독교 지교회의 수장들은 처음에는 장로들이었으나 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감독들이 교회의 수장이 되었다.
감독 또는 주교라는 직분은 헬라어<에피스코포스-επιςκοπος>를 직역한 단어적 명칭이다. 이 직분은 장로와 동일시되는 직분자들이다. 구약성경에서 이 직분은 거의 장로들에게 사용되었으며 신약 성경에서 이 직분은 교회의 목회자들에 대한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신약초기 시대의 초창기에는 교회에 감독이라는 직분 제도가 없었으며 교회에 대한 감독권은 오직 사도들에게만 있었다. 그러나 <A.D. 1세기 말>에 이르러 사도들이 모두 소천<所天>하고 교부들이 교회들을 인도하게 되었을 때부터 교회는 자체적인 운영을 해야만 하였다. 사도적 권위를 가진 지도자가 없었던 당시의 교회들은 어떤 하나의 특정적 지도자에 의해서 운영되어지지 못했고 따라서 여러 명의 지도자들을 통하여 운영되어지게 되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교회는 점차 조직화 되어갔다. 이때에 교회들은 집사, 장로, 감독들을 세워 교회를 조직화하였는데 초창기에는 장로와 감독간의 뚜렷한 구분이 없었다<딤전3:2><딛1:7>. 그러나 사도들이 없는 상태에서 로마 제국의 극심한 탄압과 각종 이단주의자들의 집요한 공격에 시달려야 했던 교회들은 강력한 지도자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따라서 감독들을 세우게 되었다. 감독제도는 크게 두 가지 이유에 의하여 시행되었다. 첫째 여러 명의 장로들 가운데 수석 장로를 세워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이때에 교회들 간에 서신을 주고받아야 할 경우라던가 또는 교회회의에 대표를 파견해야 한다던가 하는 등등의 대외적인 문제와 또한 교회안의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할 때에 교회 안의 중지<衆智>를 모아야 할 필요가 발생하였다. 따라서 교회들은 교회를 대표하는 직위를 가지고 교회를 일사분란하게 이끌어 가야할 대표적 지도자를 세워야 했던 것이다. 둘째 영지주의를 비롯한 각종 이단자들이 범람함에 따라 교회의 통일된 권위가 필연적으로 요구되어졌다. 따라서 개 교회들을 대표하는 권위적 지도자와 지역 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권위적 지도자와 기독교 전체를 대표하는 권위적 지도자들이 요구되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이유들로 인하여 지교회들이 감독들을 세우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감독들은 교회를 더욱 조직화하여 지방감독 제도와 대감독 제도<교구 감독제>들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하여 감독들로 하여금 개 교회를 감독하게 하는 동시에 지방교회들을 아울러 감독할 수 있게 하였다. 이로서 교회에는 집사-장로-감독의 교직제도가 수립되었고 감독은 다시 개 교회 감독-지방교회 감독<교구 감독>-대교구 감독의 단계적 권위를 갖게 된 것이다. 이때로부터 감독들은 각급 교회들의 수장<首長>들이 되어 교회들의 대소사를 처결하게 되었다. 당시 대교구는 로마, 안디옥, 알렉산드리아의 세 교구였다.
초기 신약교회 시대에 감독직이 장로들과 같은 직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로들의 권한위의 직무를 행사하였던 것은 이와 같은 교회의 조직체계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감독들은 대부분 존경받는 장로들 중에서 선출되었고 교회의 확장과 발전에 따라 더욱 강력한 권위를 갖게 되었다. 각종 교회회의들은 감독들에 의해서만 소집되었고 운영되었으며 때때로 장로들이 교회회의에 참석하기도 했으나 그들에게는 대표권이 허락되지 아니하였고 다만 감독들의 수행원이나 또는 참관인의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당시의 감독들은 개별적인 행동들에 대하여 절대적인 자유를 누렸으며 각 교회들은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감독들을 선출하였다. 때문에 감독들은 자신들의 임지를 마음대로 결정하여 옮겼으며 새로운 감독을 선출할 때에도 독단적으로 감독을 임명하여 세우거나 또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때문에 감독들의 권위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으며 상대적으로 비 진리적 관행들이 속출하였다. <A.D.325년>에 열린 니케아 회의에서는 이러한 비 진리적 관행들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감독들이 다른 교구로 옮겨가는 것을 법으로 규제하였으며 새로운 감독들은 그 지역 교구의 모든 감독들의 결정에 의하여 세워지도록 하되 최소한 3명 이상의 감독들의 추천과 결정에 의하여 감독이 세워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아울러 각 지방의 행정수도에 소재한 대교구<大敎區-또는 대주교구-大主敎區>의 대감독<大監督-또는 대주교-大主敎>들에게는 다른 감독들의 임명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법규는 대교구 감독들의 권위를 더욱 높인 결과를 초래하여 또 다른 비 진리적 폐해들을 양산하게 하였다. 종교개혁 시대에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의 루터파 교회들은 주교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감독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이 로마 카토릭 교회가 사용하는 주교라는 명칭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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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들의 권위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르게 되었을 때 감독들로 인하여 비 진리적 만행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당시의 감독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는 것에 물불을 가리지 않았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A.D.?-98/117>였다.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는 감독의 절대적인 주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카토릭 교회(보편적 교회) 하나 밖에 없으며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려면 누구나 반드시 교회에 소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감독은 사도의 계승자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서 선택받은 사람이며 실제로 제사장과 같은 존재이다. 감독은 지상교회를 이끌어 가는 하나님의 대표자이며 천국에 대응하는 지상의 그림자이므로 성도들은 주님을 대하듯 감독들을 대해야 한다. 성례전을 집전하는 중대한 직무는 오직 감독들에게만 주어진 고유적 권한이며 따라서 교회 밖에서 행하는 어떤 성례전도 무효이다. 교회의 모든 결정권은 오직 감독들에게만 있으며<마16:18>, 따라서 모든 성도들은 감독들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 감독들에게 거역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반역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감독들의 결정에 불순종하는 분파주의자들은 이단이며 그들을 따르는 자들도 모두 저주받을 사단의 수하들이다.>

이러한 그의 교회론은 어거스틴에게 그대로 전수되어서 보다 확고한 서방교회의 감독정치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고 그것이 더욱 발전되어 훗날에 교황정치 체제를 이루는 발판이 되었다.

감독들의 이러한 오류적 주장들은 결국 교회를 교권주의적 행정체제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교권주의적 행정 체제하에서의 교회들은 교권주의자들의 독재와 만행의 통치로 연계되어졌다. 교회는 드디어 하나님의 교회가 아닌 교권주의자들의 교회로 전락되어져 갔던 것이다,

⑥ 목사.

신약성경에 목사라는 직분적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엡4:11>이다. 그리고 목사에 대한 성경의 증거는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또한 오직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목사라는 직분은 이미 <목자> <목양자> 등등을 통하여 예표 되어진 교회의 지도자였다. 목사라는 직분을 교회에 도입한 개혁주의자들은 <목자> <목양자> 등등에서 목사의 직분을 찾음과 동시에 <딤전4:14><딤전5:17->에 나타나는 두 종류의 장로 중에 가르치는 장로를 목사의 근원으로 세운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체계적인 조직을 요구하게 됨과 동시에 전문적인 지도자들을 또한 요구하게 되었을 때부터 가르치는 장로<목사>와 치리하는 장로<현행의 장로>들로 구별되어졌던 것이다. 이와 같은 성경적 원리에 의하여 개혁주의 교회들은 목사와 장로를 같은 반열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초기 개혁주의 시대의 교회들은 목사와 장로를 같은 반열에서 존중하였으며 목사들은 <행6:1-6>을 근거로 하여 오직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과 성도들을 위한 기도에 전념하는 목회 전문의 사역을 하였고 장로들은 교회 운영의 전반적인 사항을 돌보는 치리하는 사역을 전문적으로 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되었다.

3. 교회 직원들의 선출 역사.

1) 구약교회.

구약 교회 시대의 교회 직분자들은 거의 임명제이거나 또는 세습제였다. 민족교회 시대 이전까지의 구약교회 지도자들은 족장들이었으며 따라서 그때까지의 교회 지도자는 당연히 족장들에 의한 세습제였다. 민족교회 시대에 이르러 교회가 크게 성장했을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족장들이 연합하여 교회를 이끌어갔다는 것만이 다를 뿐이었다. 그러나 모세시대 이후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모세시대의 광야교회로부터 제사장 제도가 수립되어지고 장로들의 역할이 크게 신장되어짐에 따라 교회 지도자들의 역할도 아울러 크게 신장되었다. 이때에 제사장 제도는 레위 지파에 의한 세습제였고 장로들은 임명제였다. 모세는 70 장로들을 세워 민족교회를 인도하게 하였는데<민11:16>, 그 역시 족장들 중에서 선발되어졌기 때문에 세습제와 임명제의 연합이었다. 구약교회의 직분자들에 대한 선출방법은 신약교회 시대 이전까지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남북 왕조의 패망 후 정복자들에 의한 분봉 왕 제도가 실시되었을 때에 제사장이나 장로들의 전통적 선출 방법이 무시되었다. 레위지파 아닌 자들이 금품으로 왕을 매수하여 제사장이 되는가 하면 정치적 이유에 의하여 왕들의 측근들이 제사장이 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장로들조차도 족장들의 반열에서 세습되어지지 않고 재력과 권력에 의하여 장로가 되는 경우들이 있었다. 특히 장로들의 정치적, 종교적, 기관이었던 <산헤드린> 의회가 명예와 권력을 행사하게 되자 산헤드린 회원이 되기 위하여 많은 비 진리적 행위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2) 신약교회.

신약교회 시대 최초의 교회직원이었던 사도들과 전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임명하였다. 바울 역시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임명하여 세운 사도였다. 반면에 사도 이후의 교회 직분자들은 사도들에 의하여 세워지거나 또는 속사도 및 교부들에 의하여 세워졌다. 초기 신약교회 시대의 집사, 장로, 감독들은 민주적인 방법으로 선출되었다. 성경은 교회의 직분자들이 민주적인 방법으로 선출되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에 처음으로 집사들이 세워졌던 <행6:1-6> 경위를 근거로 할 때에 그리고 사도 바울이 집사와 장로와 감독들에 대한 자격을 명시한 <딤전3:1-13>을 근거로 할 때에 초기 신약교회의 교회 직분자들이 민주적인 방법으로 선출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장로와 감독들의 선출은 성직자들과 일반 성도들이 함께 모여 선출했으며 전체의 만장일치 찬성에 의하여 선출하였고 선출이나 임직식은 주일날에 거행하였다.
그러나 교회 직분자들의 권위와 권력이 점차 강화되어지기 시작하였을 때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특히 교회에 감독의 직분이 세워지고 그들에게 교회 지휘에 대한 전반적인 권한이 주어졌을 때, 그리하여 감독들의 권한이 크게 강화되었을 때부터 교회 직분자들의 선출 문제에 이상 기류들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감독들은 집사나 장로들을 세움에 있어서 자신에게 충성하는 자들을 위주로 하였으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제외시켰다. 그들은 또한 새로운 감독을 선출할 때에도 독단적으로 감독을 임명하여 세우거나 또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리하여 교회 직분을 받기 위해서 감독들의 눈치를 보거나 감독들의 비위를 맞추는 자들이 속출하게 되었다. 교회 직분자들을 선출함에 있어서 황제를 비롯한 정치 권력자들의 비 진리적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황제와 정치 권력자들은 교회 직분자, 특히 감독들을 세우는 일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여 자기중심의 사람들을 교회 직분자로 세웠던 것이다. 기원 4세기 경에 이르러 황제들이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 내분이 있는 교회들이나 큰 도시 교회의 중요한 감독들은 황제가 임명하는 제도를 신설하였다. 그러나 때때로 황제의 감독 임명이 편파적인 것이 됨으로 교회 내에 더 큰 갈등과 내분을 야기시켰고 그로 인하여 교회의 갈등과 혼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3) 교회 직분자들에 대한 안수.

교회 직분자들을 세울 때에는 안수례<按手禮>가 거행되었다.
안수례에 대한 역사적 증언은 히폴리투스<Hippolytus:A.D.200?-220>의 저작인 <사도의 전통-Apostolic Tradition>을 통하여 전승되어진다. <사도의 전통>에는 성경 이외의 안수식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들어 있는데 그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집사 안수.

집사에 대한 안수에는 장로들이 동참하지 않고 감독 혼자만이 안수하였다. <사도의 전통>은 그 이유를 <집사들은 사제직분으로 안수 받는 것이 아니라 감독을 보좌하는 직분으로 안수받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2) 장로 안수.

장로에 대한 안수에는 장로들과 감독들이 함께 동참하였다. 당시에 교회에서 장로 안수식이 있을 때에는 타 교회의 장로들과 감독들도 초청되어서 함께 안수하기도 하였다.

(3) 감독 안수.

처음으로 감독이 세워지게 되어 감독을 안수하여 세울 때에는 장로들이 안수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 감독을 안수하여 세울 때에는 장로들과 감독들이 함께 안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감독들이 많아지게 되었을 때에 장로가 감독을 안수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감독들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감독들에 의하여 제기되었는데 물론 장로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았다. 감독에 대한 장로 안수 문제는 로마 카토릭 교회가 교황권을 포함한 교직자 제도를 크게 강화하기 전까지는 종전대로 유지되어 장로와 감독들이 함께 감독을 안수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는 3세기 경까지 장로와 감독들이 함께 감독을 안수하였다. 한편 로마교회에서는 감독을 세울 때에 자체적으로 안수하지 아니하고 타 교회에서 감독들을 초청하여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감독들을 안수하게 하였다.

4. 직원의 위치와 권위.

교회 직원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종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하나님 나라의 직원이며 하나님에 의하여 관리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따라서 그 직분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직분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존귀와 영광과 명예>의 권위와 권세를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자들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직원들에게는 직분적 우열이나 서열 같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각자의 고유한 은사와 사명이 있으며 그 은사와 사명을 통하여 하나님께 부여 받은 직무를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직무를 행하는 과정에서 다른 직원들과 <연합하여 선을 이루는-요8 : 28>것이다. 따라서 아무도 그들을 홀대하거나 무시할 수 없으며,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최고의 예우와 최대의 존경과 최상의 섬김을 받게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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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다수의 교회들이 이와 같은 진리를 외면하고 교회 직원들을 계급적으로 분류하여 담임목사를 최고의 자리에 앉히고 동역하는 목사들과 강도사, 전도사들을 담임목사의 부하 직원으로 만들며, 또한 장로와 권사들을 목사를 보좌하는 보좌관으로 취급하고 있는바 그것은 참으로 야단맞아 마땅한 행악이다. 심지어 어떤 부흥강사 목사는 <목사가 가는 천국과 장로가 가는 천국이 같은 줄로 아느냐?>고 호통을 치는가 하면, 같은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큰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들이 작은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들을 무시하고 경시하기까지 하는데, 그것은 참으로 자신의 신학적 무지를 스스로 들어내는 한심한 작태들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신실한 모든 종들을 전혀 구별하지 않고, 오직 <착하고 충성된 종-마25 : 23>으로 예우하고 있으며 그들의 사역에 대하여 크고 작은 것, 많고 적은 것을 구별 하지 않고, 다만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다-마25 : 23>고 칭찬하면서 그를 높이시고 예우하시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선포하고 증거 한다. 이렇듯 성경이 증거 하는 바와 같이 교회의 직원들은 하나님의 종이지 목사의 부하가 아니며, 그들은 모두가 같은 반열<하나님의 종의 반열>에 위치함으로서 우열이 없으며, 그들의 권위와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것으로 우열도 있을 수 없다. 교회의 모든 직원들은 동등한 예우를 받으며 동등한 존경을 받으며 동등한 섬김을 받아야한다. 따라서 호칭부터 바로 정립하여야한다. 오늘날 대다수의 교회에서 담임목사와 동역하는 목사들을 <부목사> 또는 <부교역자>로 호칭하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들의 호칭 앞에 <부>라는 용어가 붙을 이유가 없다. 그들은 다만 그들의 직책과 직무에 맞는 명칭으로 호칭되어야한다.

5. 직원의 자격.

교회 직원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 있어서는 일반 사회가 요구하는 자격들로부터 자유 할 수 있다. 구약 시대에는 신체적인 결함까지 제한적 요소가 되었지만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 : 32>의 원리에 의하여 자격에 대한 일반적인 구속력이나 제한성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직원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보다 더욱 강하고 엄격한 구속력과 제한성을 받게 된다. 성경 <딤전 3장>은 하나님의 종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자격을 요구한다.

1) 신학적인 온전성을 갖추어야 한다.

교회 직원들은 먼저 신학적으로 온전하여야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서서 진리와 비 진리를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어야하며, 특히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를 정확하게 정립하여야한다. 자신의 사명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할지라도 신앙의 선배로서 특히 초신 자들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정도의 신학적 온전함을 갖추어야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신학적인 개념이 바로 정립되어져 있어야한다. 하나님 앞에 자신은 어떤 존재이며 <가정, 교회, 이웃, 직장, 사회, 민족, 국가> 등등에 대한 자신의 존재와 그것에 대한 자신의 의무와 책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신학적 차원에서 바로 정립하여 자신의 신분에 합당한 신학적 삶을 살수 있도록 하여야한다.

2) 신앙적인 온전성을 갖추어야한다.

교회 직원들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앙이 정립되어져 있어야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의 신앙이 있어야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낙심하거나 절망하는 일이 없이 항상 범사에 감사하고, 범사에 만족하고, 범사에 행복하고, 범사에 평안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보다는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고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신앙의 온전성을 갖추어야하는 것이다.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신앙의 온전성을 갖추어야하며 교회적, 가정적, 사회적, 국가적인 제반 법규와 질서<아주 작은 것 하나까지도>들을 준수하여 타의 모범이 되고 규범이 되는 신앙의 온전성을 갖추어야한다. 교회 직원의 신앙은 반드시 실천적인 신앙이어야 한다. 가정, 교회, 직장, 사회 등등 자신이 소속된 영역에서 어떤 경우에나 누구에게나 교회 직원으로 인정받고 존경받는 실천 신앙적 삶을 살아, 그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증거하고 선포하는 자가 되어야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 직원들의 신앙이 이중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데 그것은 그들의 신앙이 <교회 내>적인 것과 <교회 외>적인 것으로 구분되어지며, 그 정도의 차이가 심지어는 극과 극의 교차를 이루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특히 교회 직원>들의 삶은 이중적일 수가 없다. <교회 내>적인 것과 <교회 외>적인 것의 구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교회 직원들의 삶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오직 동일하여야 한다.

3) 인격적인 온전성을 갖추어야한다.

교회 직원의 신학과 실천 신앙적 삶은 당연히 내면적으로 다져져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자연스럽게 외면적으로 표출될 수 있어야한다. 말이나 행동이나 생각까지도 세련되고 품위가 있어야하며 그야말로 멋이 있어야한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반면에 강하고 담대하여야하며 차분하고 여유가 있되 결단성과 추진력이 있어야하고 사랑과 자비가 넘치되 의와 진리를 위해서는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기개가 넘쳐야한다. 교회 직원에게 이와 같은 인격이 요구되는 것은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증거 되고, 선포되기 때문이다.

4) 사명 완수를 위하여 노력하는 자이어야 한다.

교회 직원은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는 자이어야 한다. 사명 완수를 위하여 자신에게 부여된 은사를 끊임없이 계발하고 항상 쉬지 않고 기도하며 말씀에 정진하는, 사명자로서의 노력적 삶을 살아야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게으른 자를 기뻐하시지 아니하시며,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소홀히 여기는 자를 준엄하게 책망하신다<마25 : 14-30>.

6. 직원의 사명 완수.

교회의 직원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다양한 사명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사명은 다양하지만 사명을 완수하는 원리는 동일하다. 교회 직원의 사명 완수에 있어서 반드시 유념해야할 몇 가지를 고찰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교회 직원은 하나님의 섭리를 위하여 세움 받은 하나님의 종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보다 그 신분이 우선 할 수 없다.

교회 직원들 중에 하나님의 섭리보다 자신의 신분에 대한 자존심과 명예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그리하여 자신의 자존심과 명예를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종>의 도<道>에서 떨어져나간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오직 하나님의 섭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고 포기하여야한다. 성경은 이와 같은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증거하고 선포한다<빌2 : 5-8>.

2) 교회 직원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세움 받은 하나님의 종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보다 종의 입장이 우선 할 수 없다.

교회 직원들 중에 하나님의 교회보다 자신의 입장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이와 같은 개념은 마치 자신을 위하여 교회가 세워진 것으로 착각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교회 직원을 위하여 교회가 세워진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하여 교회 직원이 세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 직원은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바치고 자신을 포기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살신성인<殺身成仁>적인 사명을 완수하여야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앞에 두고도 자신의 입장보다 아버지의 입장을 더욱 귀히 여겼다<마26 : 42>.

3) 교회 직원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세움 받은 하나님의 종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보다 종의 입장이 우선할 수 없다.

교회 직원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 세워진 존재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세워진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섬기게 하기 위하여 교회에 직원들을 세우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섬김의 정도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진리는 <종>과 <자녀>의 신분의 차이에서 명백하게 증거 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 받은 <상속자>이고, 교회 직원은 그 상속자들을 섬기게 하기 위하여 세워진 <종>이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섬김의 정도를 가르치셨고<요13 : 4-5>,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마25 : 35-40>.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 직원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모르고 오직 섬김을 받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는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없다. 성경은 섬길 줄 모르고 섬김 받기만을 즐거워하는 자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 한다 <저희는 이미 자기상을 받았느니라.-마6 : 16>

4) 교회 직원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위하여 세움 받은 하나님의 섭리적 도구이다. 따라서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드려야한다.

교회 직원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사용되어지는 도구이다. 도구에게는 도구로서의 역할만 강조되어질 뿐 그에게 어떤 칭찬이나 감사나 사례가 돌아가지 않는다. 비록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베푸실지라도 <종>은 다만 도구의 위치를 철저하게 고수하여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모든 영광을 오직 아버지께 드림으로서 이와 같은 진리<종의 위치 고수>를 몸소 이행하셨다. 오늘날 많은 교회 직원들이 이와 같은 진리를 망각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셔야할 온갖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가로채고 있는바,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것으로서 정죄 받아 마땅한 행악이다. 교회 직원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아름다운 결과는 하나님의 것으로 드리고, 불미스러운 결과들은 자신의 실책으로 돌리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요 자신은 겸손한 하나님의 도구의 위치를 고수하여야한다.

5) 교회 직원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세움 받은 하나님의 종이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의 법에 근거하여 맡은바 사명을 완수하여야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의는 불의를 싫어하며 그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필연성을 갖는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의는 오직 정의<正義>와 준법<遵法>만을 요구한다. 성경은 이와 같은 사실을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딤후2 : 5>이라고 경고하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 : 23>고 호령하신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하여>라는 제목 하에 온갖 불의, 불법, 탈법, 편법, 위법을 자행하고 있는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어떤 자 는 이러한 불법을 오히려 미화 하여 <꿩 잡는 것이 매다 > 라고주장하면서 결과만 좋으면 되었지 방법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 고 한다. 그러나 꿩을 잡아도 어떻게 잡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먹을 수 도 없고 박제를 만들 수 도 없게 꿩을 잡는다면 그것은 차라리 잡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낳다. 불의, 불법, 탈법, 편법, 위법으로 이루어진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결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이다. 저들이 하나님의 법대로 일하지 않고 온갖 불의한 일들과 권모술수를 동원하는 것은 물론 신학 부족에서 비롯되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 보다는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고자 하는 욕심에 눈이 멀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자랑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법까지 무시하고 외면하는 부정을 저지르는 것이다.

6) 교회 직원은 다투거나 혈기를 부려서는 안 된다.

교회 직원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다투거나 혈기를 부려서는 안 된다. 비록 자신의 주장이 정당하고 진리이며 따라서 자신의 주장대로 하지 아니하면 커다란 문제가 발생한다고 할지라도 언성을 높인다거나 혈기를 부린다거나 다투어서는 안 된다. 비 진리적 사태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맞서되 온유하고 논리적이며 결코 품위를 잃지 않는 자세로 최선을 다하여 주어진 법과 질서 하에서 끝까지 비 진리에 대항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비진리가 채택되고 진리가 거부되면 남은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조용히 물러나야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지 않게 하는 일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다. 만약에 <정의에 불타는 사명감에 의해서> 혈기를 부리거나 어떤 물리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다투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다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후에 결론은 언제나 하나님께 맡겨야한다. 그리하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자들의 욕심을 책망하실 것이며 비 진리 자 들의 일시적인 승리를 오히려 부끄럽게 하실 것이다.

7. 직원의 전출.

교회 직원들이 전출하게 될 때에 교회는 그들에 관한 행정일체를 전출하는 교회에 보내주어야 하며, 교회 직원을 맞아들이는 교회에서는 전임 교회에서의 그의 직분을 그대로 받아들여야한다. 교회 직원은 <비록 담임목사에 의하여 임명된 경우라 할지라도> 그 직분의 본래 임명 자 는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하나님의 종들을 당연히 받아들여야한다. 교회에게는 하나님의 종들을 받아들이느냐? 또는 거부하느냐? 하는 결정권이 없다. 교회에게는 하나님의 종들을 받아들여야하는 의무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이비 또는 이단>에서 받은 직분이나 또는 정상적인 기독교 교회에서 받은 직분이라 할지라도 불법적으로 받은 경우에는 교회가 그것을 심사하여 거부해야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이와 같은 원리를 무시하고 적법 절차를 밟아 하나님께 임명받은 하나님의 종들을 거부하고 무시하는가 하면, 오히려 불법적으로 <하나님과 관계없이> 직분을 받아 행세하는 자들을 교회가 아무런 생각 없이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경우들이 허다한바, 참으로 괴이한 일이라 아니할 수없다.

8. 현대교회 직원.

1) 직원의 종류.

현대교회 직원은 교파와 교단에 따라 다르나 대부분의 경우 목사, 강도사,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 등등이며 집사는 안수집사와 평집사<서리집사>로 구분된다. 그중에 목사, 강도사, 전도사, 장로, 권사, 안수집사, 항존직으로서 노회 소속이다. 평집사<서리집사>는 교회 소속으로서 임기는 1년이다.

2) 직원의 선출.

현대교회 직원선출 방법은 직분에 따라 다르다. 장로교회를 기준으로 할 때에 목사는 목회자로서 정규 신학과정을 이수한 후에 노회의 시험과 인준을 거친 후 노회 주관 하에 안수 받아 장립된다. 강도사, 전도사는 정규 신학과정을 이수한 후에 노회의 시험과 인준을 거친 후 노회 주관 하에 안수 받아 장립되지 않고 임명된다. 장로, 안수 집사는 남자에 국한되며 공동회의<교회총회>를 통하여 선출하고 노회의 시험과 인준을 거친 후 노회 주관 하에 안수 받아 장립된다. 반면에 권사는 여자에 국한되며 공동회의<교회총회>를 통하여 선출한 후 노회로부터 임명받아 세워진다. 평집사<서리집사>는 당회에서 심사하여 임명한다. 장로와 안수집사가 남자로 제한되는 것과 권사가 안수 받아 장립되지 않고 임명되는 것은 기독교 역사에 여자가 안수 받아 장립되는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직원 제도는 근래에 이르러 크게 바뀌었다. 최근의 어떤 교단에서는 권사를 세울 때에 안수하여 세우고 있다.

9. 현대교회의 직원 선출에 대한 오류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교회의 직원 선출과정에서 심한 비 진리와 오류적인 관행들을 계속하고 있는바 그중에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들은 디음과 같다.

1) 장로, 권사 선출.

(1) 선출과정.

① 정책적 오류.

장로와 권사를 선출하는 과정에 교회적인 정책이 적용되는 경우가 있는바 그중에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A. 교회건축을 비롯한 교회의 각종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정책적 차원에서 장로와 권사들을 세우는 경우.

B. 목회자가 자신의 목회적 권세와 권위를 도모하기 위하여 측근들을 장로와 권사로 세우는 경우.

C. 성도들이 목사의 파행과 전횡을 막기 위하여 바른말 하는 자들을 장로와 권사로 세우는 경우.
② 목회자들의 농간.

장로와 권사를 선출하는 과정에 목회자들이 농간을 부리는 경우가 있다. 현대교회 목사들 중에 많은 자들이 교회에 장로나 권사를 세움에 있어서 자신의 측근들 위주로 하고 있으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들이나 비협조적인 자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거부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목사들은 자신의 목회에 어려움을 준다고 하여 아예 장로들을 세우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일부 목사들 중에는 목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교회에 장로들을 세울 수 있으나 목사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교회에 장로들을 안 세울 수 있다는 자체적인 규약까지 세워서 장로들을 세우지 않고 있는 경우들도 허다하다.

이러한 목사들의 만행이 교파적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시행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교단<침례교>에서는 장로들이 목사의 목회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장로 제도를 아예 폐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장로제 폐지에 대한 자신들의 내면적인 이유를 감추고 장로 직분에 대한 성경의 해석을 근거로 제시한다. 저들은 성경에 나오는 장로와 감독과 목사를 목사, 한 사람에 대한 다양한 호칭이라고 주장한다. 저들은 목사가 곧 장로요 감독이기 때문에 교회에 장로를 세워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장로 직분에 대한 유권해석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저들의 주장이 사실은 장로들을 세우지 아니하려는 거짓된 주장이라는 사실을 그들 자신도 분명하게 알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교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들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하여 증명된다. 저들은 교회의 장로제도가 비성경적이기 때문에 장로를 세울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자신들의 교회에 장로 직분자들을 존재하게 함으로서 스스로 자기 모순을 입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부 침례교회에서는 장로를 세우기도 한다. 저들이 장로 직분을 불법이라고 하면서도 장로들의 전입을 허용하거나 심지어는 교단법을 어기면서까지 장로들을 세우는 이유는 불을 보듯 뻔하다. 장로들이 내는 거액의 헌금과 장로들로 인한 교세의 확장 때문이다. 한편 어떤 목사는 자신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장로와 권사를 세우고자 할 때에 문제 있는 자들을 의도적으로 장로와 권사로 세워 교회를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2) 금품의 요구.

장로와 권사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금액의 헌금이 요구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경우 장로와 권사로 세움 받은 자들은 교회가 <묵시적으로> 지정하는 일정액을 교회에 헌금하는데 그것은 거의 강제적이다. 어떤 교단에서는 장로와 권사로 추대되었으나 교회가 지정해주는 헌금을 하지 않는 경우 그들을 장로와 권사로 세우지 않는다.

(3) 안수문제.

초기 신약교회는 장로와 집사를 안수할 때에 장로들이 그 직무를 행사하였다. 그러나 로마 카토릭주의자들은 교권주의를 강화하기 위하여 장로들의 안수를 크게 제한하였다. 감독<현재의 목사>과 장로는 장로와 안수 집사를 안수할 수는 있으나 장로는 감독을 안수할수 없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개혁주의자들에 의하여 시정되었다. 그러나 현대 목사들 중 일부는 목사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목사와 장로는 장로를 안수할 수 있으나 장로는 장로와 안수 집사는 안수할 수 있는 반면에 목사는 안수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저들이 이와 같은 규례를 만들은 것은 목사들의 권위를 장로들의 권위위에 두고자 한 것이다. 저들은 목사와 장로가 같은 반열이라는 것을 거부하고 장로들을 목사의 권위 하에 두기 위하여 이와 같은 만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목사의 권위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목사의 권위는 목사가 오직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대로 목회하며 그 진리의 말씀에 동행하는 실천 신학적 삶을 살 때에 비로소 세워지는 것이다. 비 진리와 오류로 일관된 신학적, 신앙적, 인격적, 사명적 삶을 살면서 제아무리 목사의 권위를 세우려 한들 하나님께서 그것을 용납하시지 아니하시며 성도들도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고 심지어는 비 기독교인들까지도 그러한 목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2) 여자목사 여자장로에 대한 오류.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는 성경에 없으며 기독교 역사에도 전혀 유례가 없다. 현대 교회에서 미국을 비롯한 몇몇 국가의 기독교들 중에 소규모 이단교파들이 여자목사, 여자장로를 세우고 있으나 그들의 활동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는 현대 한국 기독교에서만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1) 여자목사 여자장로 장립의 역사.

한국 기독교에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가 최초로 거론된 것은 1920년대 초였다. 기독교를 통하여 유입된 서양문화는 한국의 전통적인 남존여비 문화를 서서히 무너뜨렸고 여자들의 사회적 지위가 점점 신장되면서 여자들의 사회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여자들의 활동은 특히 교회를 통하여 확장되었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감리교회가 가장 먼저 여자 장로들을 세웠고 1930년에 남북 감리교회가 연합하면서 14명의 여자목사를 세웠다. 장로교회는 1932년 제21차 총회에서 여자장로 제도에 대한 의제가 상정되었으나 거부되었고 그 후에도 계속하여 그 문제가 상정되었으나 여전히 총회에서 부결되었다. 해방 후 이단으로 정죄되어 장로교단으로부터 축출된 기독교 장로회가 여자장로를 합법화하였으나 장로교단은 여전히 여자장로 제도를 거부하였다.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는 감리교에만 존재하였고 장로교, 성결교, 침례교 등등의 교단에서는 계속하여 거부되어 왔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등장한 순복음 교회가 최자실을 목사로 장립하면서 여자목사 여자장로 문제가 더욱 활발하게 거론되었고 군소 교단들이 그 제도를 채택함에 따라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였다. 특히 여자목사들로 구성된 교단들이 설립되어지고 여자목사가 되려는 자들이 신학교에 대거 입학하면서 여자장로 문제보다 여자목사 문제가 더욱 크게 부각되었다. 결국 20세기 말에 이르러 장로교 <통합 측>이 여자장로 제도와 여자목사 제도를 합법화함에 따라 다른 교단에서도 그 문제로 인하여 점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2) 여자목사 여자장로 장립에 대한 성경적 근거.

성경에는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에 대한 근거와 전례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성경은 오히려 여자목사 여자장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거부한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 하노니 오직 종용할 찌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딤전 2:11-14>

이 말씀은 여자의 가르치는 직무 <복음 전파 및 성경의 교육> 자체를 불허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가르치는 직분 <여자목사 여자장로>을 불허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서>를 통하여 말하는 <여자의 가르치는> 것은 <가르치는 장로>를 말하는 것으로서, 현대교회의 <목사>를 말하는 것이며 <여자의 남자를 주관 하는 것>은 <치리하는 장로>를 말하는 것으로서 현대교회의 <장로>를 말하는 것이다. 당시에 교회에 남녀평등 사상이 주입되면서 여자들의 직분과 직무에 대한 의견이 분분 하였고, 드디어는 여자들의 직분과 직무에 대한 주장들이 강력하게 제기됨에 따라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통하여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분명하게 정립하여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왜 여자목사와 여자장로가 세워 질수 없는가? 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통하여 선포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대표로 아담 <남자>를 먼저 창조 하신 후 여자<이와-하와>를 창조 하셨다. 때문에 아담 <남자>는 이와 <여자>로 인하여 죄가 인류사회에 도입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대표자로서 <죄>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원리에 의하여 구약시대의 장로나 제사장들은 모두 남자로 세워 졌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남자들에 비하여 진실과 성심으로 순종하는 여자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사도>의 반열에 세우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신을 저주까지 하면서 불순종한 남자들을 제자<사도>로 세우셨다. 교회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오직 남자들만을 교회의 지도자<목사 장로>로 세워왔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의 전통이 현대교회 <특히 한국의 기독교>에서 무너지고 있다.

(3) 한국기독교가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를 거부한 근거.

지금까지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를 거부한 자 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거부하지 않고 교회 헌법을 근거로 하여 거부해 왔다. 장로교 교단을 예로 들면 <장로교 교회 헌법 제5장 제3조, 장로의 자격>에 <만 35세 이상 된 남자 중....>으로 명시되어 있다. 반면에 <장로교 교회 헌법 제4장 제2조, 목사의 자격>에는 남자로 제한한다는 내용이 문자적으로는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딤전3:1-7>라고 명시되어 있으므로 남자라는 것이 묵시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그들은 교회법 보다는 아직도 남존여비 사상에 의하여 여자에 대한 비하적 개념 때문에 거부한 것이었다. 만약에 저들이 하나님의 섭리, 성경, 교회법, 등등에 의하여 지금까지 그 제도를 거부해 왔다면 이제 와서 그 제도의 시행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이유가 성립되지 않거니와 여자장로 여자목사들을 세운 후에도 여전히 그들을 무시하고 홀대하여 중요한 직무를 함께 하지 아니하는 명분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향하여 지금까지 그 제도를 반대했던 성경적 근거는 과연 무엇이며, 이제 와서 그 제도를 시행하는 성경적 근거는 또 무엇이냐고 질문하게 되는 것이다. 저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두 가지의 변명을 내어놓고 있다. 하나는 <시대와 문화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요 다른 또 하나는 <성경을 자세히 보니 그것이 하나님의 뜻 이었다>는 것이다. 저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합법화시키기 위하여 여선지 <드보라>의 사사 직무 수행과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 할 것이요-행2:18>를 근거로 제기한다.

(4)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를 찬성하는 자들이 제시하는 근거.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를 찬성하는 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근거로 제시한다.

① 미리암의 여선지 직<민12:9-16; 신24:9>
② 드보라의 여선지 직<삿4:5-23>>
③ 남종과 여종<<행2:18>
④ 시대와 문화가 여자목사와 여자장로를 요구 한다.
⑤ 하나님의 남녀평등
⑥ 그동안 성경을 잘못 보았다.

우리는 저들이 제시하는 근거들을 다음과 같이 신학적으로 반박한다.

① 미리암의 여선지 직<민12:9-16; 신24:9>에 대하여.

성경에는 구약시대뿐만 아니라 신약시대에도 여선지자들의 활동이 있었다. 그러나 여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계고하고 가르치는 직무를 행하였으나 교회, 국가, 민족, 등등을 대표하는 수장<首長>적 직분자는 아니었다. 미리암이나 드보라를 비롯한 여선지자들은 남자 선지자들이 행하는 선지자의 직무는 행하였으나 교회, 민족, 국가를 대표하는 지도자의 직분과 직무는 허락되지 않았다. 구약시대의 교회 대표는 대제사장들이었고 민족대표는 장로 또는 국왕이었다.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를 찬성하는 자들은 미리암의 여선지직<민12:9-16; 신24:9>을 근거로 제시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저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반박하는 증거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이 자신들의 지위가 모세와 대등한 것으로 착각하여 월권을 행사하자 즉시 그들을 징계하셨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여 범죄하였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지도자 위치를 세워주시기 위하여 아론과 미리암을 즉시 징계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징계에도 차등이 있었다. 아론은 다만 책망을 받은 반면에 미리암은 문둥병의 징계를 받았다. 그것은 아론이 대제사장으로서 교회의 대표자였기 때문이다.

② 드보라의 여선지 직<삿4:5-23>에 대하여.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를 찬성하는 자들은 드보라의 여선지 직<삿4:5-23>을 근거로 제시하지만 그것 역시 오히려 저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반박하는 증거가 된다. 사사 시대에 여선지 드보라가 선지자의 직무를 행할 때에 가나안과의 전쟁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전쟁에 여자 <드보라>를 대표로 세우시지 않고 남자 <바락>를 대표로 세우신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한 바락에게 승리를 주시지 않으신다. 우리는 이와 같은 역사적 사건들을 통하여 여선지자들이 선지자 직분을 받아 선지자 직무를 행사하지만 교회의 대표로 세움 받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③ 남종과 여종<행2:18>에 대하여.

<그때에 내가 내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행2:18>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를 찬성하는 자들은 <행2:18>의 남종과 여종을 목사로 내세워 여자목사가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행2:18>의 남종과 여종에 대한 저들의 오류는 저들의 신학적 무지함을 더욱 자증 한다. 이 성경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미 <요엘2:28>을 통하여 말씀 하신 것으로서 하나님의 종들이 성령의 조명하심 속에서 능력을 받아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남종과 여종은 목사와 장로에게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모든 하나님의 종들에게 일률적으로 적용 되는 것이다. 따라서 <행2:18>을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제시 하는 것은 자신들의 신학적 무지를 스스로 들어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의 종들은 오직 목사에게만 국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④ 시대와 문화가 여자목사와 여자장로를 요구 한다는 것에 대하여.

시대와 문화가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를 요구하기 때문에 그 제도를 세운다는 변명은 신학자로서는 할 수 없는 주장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와 규례와 법도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그 해석 원리와 적용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와 규례와 법도가 시대와 문화에 따라 그 해석 원리와 적용이 달라진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될 자격이 없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신 것은 그분은 영원한 능력과 절대적 능력과 완전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와 계시록의 기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완전성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 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 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히4:12-13>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시대와 문화의 요구에 부응하는 차원까지도 모두 감안하시어 기독교의 법과 질서를 완전하게 세우셨다. 따라서 이제는 시대와 문화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여자목사 여자장로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을 부인하는 악행이며 자신들이 소경 적 지도자임을 자증하는 것이 될 뿐이다.

⑤ 하나님의 남녀평등에 대하여.

하나님의 남녀평등을 근거로 내세우는 것도 역시 마찬 가지로 자신들의 성경적 무지함을 스스로 들어내는 어리석은 짓이다. 인류사회의 남녀평등 원리는 모든 면에서 적용 되어지는 하나님의 섭리이지만, 반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을 동시에 대표로 세우시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남자>를 대표로 세우셨다. 그것은 대표가 둘이 되면 사회질서가 성립 되지 않기 때문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주장을 한다는 것은 사회의 질서원리 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무지함을 스스로 자증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남녀평등 원칙을 세워주셨지만 교회의 질서를 세우심에 있어서는 남자를 대표로 세우셨다.

⑥ 그동안 성경을 잘못 보았다는 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를 거부하다가 그 제도를 합법화 하는 자들 중에 성경을 자세히 보니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라고 하면서 자신들이 그동안 성경을 잘못 보았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주장은 신학적 무지함에서 비롯되어 진 것 이라기보다는 참으로 악함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라는 책망을 받아 마땅하다. 이미 논증 한바 있듯이 성경은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오히려 그것의 확실성을 더욱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비 진리적 주장을 하는 것은 사실상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진리를 비 진리로 바꾸려는 악행이 되는 것이다.

3) 여자장로, 여자목사 장립에 대한 반대.

우리는 지금까지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를 시행하여 왔던 자들이나 여자목사 여자장로가 된 자들이나 앞으로 여자목사 여자장로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자들을 두 종류로 구분한다. 하나는 신학적으로 무지한자 들이요 다른 또 하나는 하나님의 뜻 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 둘은 결국 하나이다. 신학적으로 온전한 자라면 성경이 그 제도를 절대 불허 한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온전한 자들 이라면 하나님의뜻을 거부 하면서 자기욕심을 채울 수도 없다. 신학적으로 온전한 자들 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뜻을 거부 하면서 까지 자기욕심을 채우는 것이며 욕심 때문에 신학이 온전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 둘은 결국 하나인 것이다.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를 둘러싸고 욕심에 휘말린 자들은 두 종류이다. 하나는 여자목사 여자장로가 되어 권위와 권세를 누리려는 자들이고 다른 또 하나는 그 제도를 통하여 어떤 유익을 얻으려는 자들이다. 그러나 성경은 욕심으로 인하여 죄를 범하는 자들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하나님께서 남자들에게만 목사나 장로의 직분을 부여하신 것은 남자가 여자보다 우수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성경에는 남자가 여자보다 부족한 것이 수없이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남자를 교회의 대표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였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피조가 그것을 찬성하느냐? 또는 거부하느냐? 하는 것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오직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반대되는 것은 목숨을 다바쳐 물리쳐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절대 순종하여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를 다음과 같이 거부한다.

(1) 하나님의 섭리이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에게 대표권을 부여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남자를 먼저 창조하셨고, 그에게 모든 대표권을 부여하셨다. 반면에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동역자, 동반자>로 창조되어졌다. 남자가 대표권을 갖는 것은 여자가 먼저 죄를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모든 책임을 진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증거 되어진다.

(2) 성경이 증거 한다.

여자 장로, 여자 목사를 주장하는 자들은 미리암, 드보라, 등등의 여자 선지자들의 활동을 근거로 내세워 여자 장로 및 여자 목사의 합법성을 주장하고 있으나 성경이 증거 하는 바에 의하면 그들은 오히려 여자 장로 및 여자 목사장립의 불법성을 증거 해주고 있다. 미리암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였으나 대표자의 위치에 있지 않았다. 당시의 대표자는 분명히 남자<모세>였으며,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미리암이 모세의 대표권에 맞서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모세가 지도자답지 않은 행동을 하였을 때, 미리암이 그것을 통하여 모세를 대적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은 것이 증거하고 있다<민12 : 1이하>. 뿐만 아니라 여선지자 드보라에 대한 성경 역시 여자 장로 및 여자 목사의 불법성을 증거 한다. 여선지자 드보라는 사사로서 재판장의 위치에 까지 있었으나 국가적인 행사<가나안과의 전투>에는 남자<바락>을 대표로 내세웠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이 증거 하는 바에 의하면 구약 시대는 물론이요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도 여자가 안수 받아 <기름 부음 받아> 장로 또는 목사가 된 전례가 없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 장로, 왕, 등등의 부족적, 사회적, 민족적, 국가적, 지도자<대표>들은 모두가 한결 같이 남자였으며 신약 시대의 사도, 장로, 목사들도 모두가 남자였다. 여자는 단 한명도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3) 성경에 전례가 없다.

오늘날 여자 장로, 여자 목사장립 문제로 인하여 교회 회의<총회>들이 상당한 논란을 벌이고 있는데 여자 장로, 여자 목사안수와 같은 제도는 교회 회의 같은 것을 통하여 결정할 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하여 제정되어지는 것이며 교회는 성경의 증거에 따르면 된다. 그것이 만약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하여 허용된 것이라면 성경에 반드시 그에 대한 전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고찰한 바 있듯이 성경은 그러한 전례를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만약에 여자 장로, 여자 목사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단 한명의 여자 제사장이나 여자 장로들을 세우지 아니하셨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찌하여 12제자들 중에 단 한명의 여자도 허용하지 않으셨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사도 시대교회는 물론이요 현대 교회에 이르기까지 여자 장로, 여자 목사가 안수되어 장립한 바가 없는 교회의 역사와 전통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전례를 따라야한다. 성경의 전례를 따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항하는 것으로서 용서받지 못할 불충이요 대죄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항하는 불충한 자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4) 신학 부재 때문이다.

과거에 일부 교파에서 여자 장로, 여자 목사를 안수하여 장립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항하는 불충이요, 대죄인 것을 알지 못했던 신학 부재에서 비롯되어진 불미스러운 결과였다. 저들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를 전혀 알지 못하였고 더욱 이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는 상상조차 할 수없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여자 장로, 여자 목사를 안수하여 장립한 교파의 신학을 보면 분명하게 나타난다. 저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그 주권적 섭리에 의한 예정론을 이해하지 못한다. 때문에 하나님의 예정을 알고는 있으면서도 그것을 적용하지 못하고 주저하면서 신앙의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자장로 여자목사 제도가 하나님의 섭리에 위배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며 그리하여 여자장로 여자목사 제도를 성경적인 것, 합법적인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5) 욕심 때문이다.

여자장로 여자목사가 되기 위하여 고군분투 하는 자들 중에 대부분은 신학적 부재 때문이라기보다는 여자장로 여자목사에 대한 욕심 때문에 여자장로 여자목사가 되려고 한다. 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일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궤변이다. 저들에게는 여자장로 여자목사에 대한 욕심만 있을 뿐 하나님의 섭리는 전혀 안중에 없다. 물론 저들은 이와 같은 우리의 주장을 단호하게 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양심을 속이지 말고 묵상하며 기도하여 보라> 만약에 진정으로 욕심 때문이 아니라면 그들은 신학을 모르는 자들이다.

(6) 양심의 문제이다.

여자 목사, 여자 장로를 안수하여 장립하였던 과거의 전례가 신학 부재에서 비롯되어진 결과였던 반면에, 그것을 목숨 걸고 반대했던 교파 및 교단들이 이제 와서 그것을 슬그머니 허용한 것은, 신학적인 문제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신앙의 양심을 내다버린 한심한 작태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저들은 현대의 시대적 환경과 문화적 발전이 여자 장로, 여자 목사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을 반대할 명분이 없게 되었다고 너절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그것은 순전히 거짓말이다. 저들이 여자 목사, 여자 장로를 안수하기로 결정한 것은 여자들이 그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기 때문이기보다는 그것이 자기들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총회에서 결정해야 할 문제이지만, 사실적으로 말하면 여자 장로문제는 교회적인 문제요 여자 목사문제는 신학교의 문제이다. 교회들은 여자 장로를 세움으로서 얻어지는 유익 때문에 그리고 신학교는 여자 목사 안수로 인하여 얻어지는 유익 때문에 그들을 세운다. 그리고 그 유익이란 신학적, 신앙적 차원의 유익이 아니라 순전히 금전적 유익이다. 금전적 유익을 위하여 일부 교회에서는 교단을 옮기면서까지 여자 장로를 세우고 있고 일부 군소 교단신학교에서는 총회의 반대 결의에도 불구하고 여자 목사를 세우기까지 한다. 저들에게는 이미 신학적 양심이나 신앙적 양심 같은 것은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쳐진지 오래이다. 저들에게는 이제 하나님의 섭리 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유익만이 중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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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자들은 성경에 여자 장로 또는 여자 목사를 세우지 말라고 한 것이 없다고 항변한다. 우리는 그러한 어리석은 항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책망한다. <그렇다면 성경에 여자 장로, 여자 목사를 세우라고 한 적이 있는가?>
뿐만 아니라 성경은 미리암, 드보라를 통하여 여자목사, 여자장로의 불법성을 선포하였고 오직 남자로만 구성된 장로, 제사장, 12사도를 통하여 여자목사, 여자장로의 불법성을 선포하였으며, 특히 <딤전 2:11-14>을 통하여 여자목사, 여자장로의 불법성을 분명하고 단호하게 선포하고 있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 하노니 오직 종용할 찌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딤전 2:11-14>

<딤전 2:11-14>에는 여자목사, 여자장로의 불법성을 창조 원리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통하여 선포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자목사, 여자장로를 고집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성경은 분명히 여자목사, 여자장로의 불법성을 선포한다. 그러나 그대들이 성경이 문자적으로 그것을 금지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그대들의 주장에 맞게 충고한다. 성경이 어떤 것을 하라, 또는 하지 말라고 분명히 정해주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성경에 증거 된 역사적 또는 전통적 증거들을 따르면 된다. 성경 어디에 여자목사, 여자장로들이 존재하였던가? 성경이 증거 하는 역사적 전통적 전례들은 이미 논증한 바대로 여자 장로 여자목사의 장립불가를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들은 오직 욕심에 눈이 멀어 성경의 모든 것을 부인하고 있도다. 악하고 불쌍한 자들이여 더 이상 욕심 부리지 말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진리에 바로 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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