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장. 기도

1. 기도의 정의.

일반 종교에서의 기도<祈禱>는 섬기는 자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섬기는 존재에게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도는 그와 같은 차원을 초월한다.

1)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대화이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대화한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아뢰며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에게 특별히 하실 말씀이 있을때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의 기도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러하실 때에 그들에게 기도하게 하신다.

2)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이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3)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접하며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한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에게 기도는 곧 신앙적 생각이며 언어이고 행동이며 삶이고 사명의 진행이다.

2. 바른 기도.

기도는 신앙으로 하지만 신학에 근거하여 기도할 때에 바른 기도가 된다. 따라서 기도는 다음과 같은 신학 원리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1) 성부 하나님께 기도.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반드시 성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기도할 때에 주, 주 하나님, 하나님, 등등의 명칭을 부를 수 있으나 그 대상은 언제나 성부 하나님이어야 한다. 기도할 때에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님을 부르고 기도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신학을 모르기 때문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기도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죄제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하고 완전하고 유일하신 중보자가 되셨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에 <예수 이름으로-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거나 또는 <예수님 이름으로-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기도이다. <예수>는 단독으로 사용되어질 때에는 <주님_구주-중보자-메시야>가 될 수 없고 다만 제물이 될 뿐이며 반드시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에 <주님_구주-중보자-메시야>가 되는 것이다.

3)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사모하며 기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종들이 기도할 때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다음과 같다.

(1) 성부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받으시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고
(2) 성자 하나님께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로서 기도를 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되시며
(3) 성령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종들은 기도할 때에 성령 하나님께서 기도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기를 사모하며 기도해야 한다.

4) 온전한 기도.

기독교 성도들은 초기 신앙 때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모르며 배운다 하여도 실감하지 못한다. 때문에 초기 신앙 때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모르며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도 잘 모른다. 그리하여 중언부언의 기도를 하기도 하고 또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 대한 기도만 하게 된다. 그러나 신앙이 성숙해짐에 따라 기도에 대한 개념과 방법도 성숙해져서 점차 기도의 지경이 넓혀지고 그리하여 이웃, 교회, 국가와 민족, 등등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되며 드디어는 온전한 기도를 할 수 있게 된다. 온전한 기도란 기도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기도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위하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종들의 신앙이 성숙해지면 기도의 궁극적 목표가 하나님을 위한 온전한 기도로 발전하게 된다. 과거에는 자신, 가족, 가정을 위해 기도할 때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기도를 하였고 이웃, 교회, 사회, 국가, 민족, 등등을 위한 모든 기도 역시 현세적인 안녕과 유익을 추구하고 소망하는 간청의 기도였으나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차원 높은 형이상학적인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3.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성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의 기도를 직접 들으시며 그 기도에 직접 응답하신다. 하나님의 응답하심의 방법과 시기는 다음과 같다.

1) 응답의 방법.

(1) 신학, 신앙, 사명, 인격, 등등에 관한 응답.

① 말씀으로 응답.

기도의 응답이 신학, 신앙, 사명, 인격, 등등에 관한 것으로서 분별, 깨달음, 정립의 필요성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말씀<신학>을 통하여 응답하신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설교, 성경, 상담, 등등을 듣거나 보게 하시고 그 과정을 통하여 분별하고 알고 깨닫고 감동받고 믿고 정립하게 하시는 것이다.

② 환상, 꿈, 환청, 감동, 등등으로 응답.

기도의 응답이 신학, 신앙, 사명, 인격, 등등에 관한 것으로서 분별, 깨달음, 정립이 요구되어질 때에 응답이 더욱 구체적이어야 할 필요성이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환상, 꿈, 환청, 등등을 통하여 보여주시고 듣게 하시므로서 기도에 응답하신다.

(2) 삶에 관한 응답.

기도의 응답이 경제, 건강, 사업, 직장, 학교, 등등의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삶과 연관된 것일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합당한 응답을 실제적, 현제적으로 주신다.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고 사업을 번창하게 하시며 직장문제 학교문제 등등을 실제적, 현제적으로 해결해 주시는 것이다.

2) 응답의 시기.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실 때에 경우와 상황에 따라 즉시 응답하실 때가 있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응답하실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자녀와 종들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이시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시기를 조정하시는 것은 그렇게 하셔야만 하는 절대적 필요성 때문이다. 즉 일찍 응답해 주시어야 할때에는 일찍 응답해 주시고 그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나타나게 될 때에는 시간을 조절하시어 좋은 결과가 될 때에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

3) 거부적 응답.

하나님께서 기도에 전혀 응답하시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모두 자녀와 종들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이시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하셔야만 하는 절대적 필요성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으로 선포하는 바<마7:7-11> 그것은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녀와 종들이 간구할 때에 언제나 그들이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녀와 종들이 간구할 때에 주어서는 안 될 것을 구하면 주시지 않는다. 그들의 안목과 생각에 의하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므로 간구하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오히려 그것이 해악이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시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허락하시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응답이다.

4. 기도의 오류.

현대 기독교 성도들 중에 많은 자들이 기도의 원칙을 벗어난 오류적 기도를 하고 있는바 그중에 대표적인 것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섭리에 위배되는 기도.

목회자들이 관광지나 호텔에 모여 기도회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위배되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 목회자들의 그러한 기도회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어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게 일컬어진다.

2) 의례적인 기도.

독재적 위정자를 위한 조찬 기도회에서 독재자를 찬양하는 기도를 하는 것과, 비 기독교인들의 행사에 들러리를 서는 기도회, 각종 사회단체들의 행사에 참여하는 기도회 등등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 하는 것이지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다.

3) 무례한 기도.

하나님께 항의적인 기도를 하거나 시위적인 기도를 하거나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은사와 능력을 함부로 요구하면서 무례한 언어와 태도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의 언어와 태도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존경의 예의를 갖춘 것이어야 한다.

4) 과시적인 기도.

하나님께 받은 복과 능력과 은사를 자랑하고 과시하거나 또는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기도를 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였다<마6:5>.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지 자신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수단이 아니다.

5) 일방적인 기도.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한 채 자신의 욕심과 취향에 따라 스스로 어떤 결정을 내려놓고 그것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기도는 언제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이어야 한다.

6) 무질서한 기도.

예배의 대표 기도를 할 때 중언부언하거나 오랫동안 많은 문제를 열거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예배의 대표 기도를 하는 자는 미리 기도하는 가운데 준비하여 간단명료하게 기도해야 한다.

7). 거짓 기도.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오직 진실과 진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진실을 은폐하고 하나님을 기만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8) 조건적인 기도.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자신의 뜻을 이루어 주시면 하나님께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9) 품위 없는 기도.

기독교인은 기도 할 때에도 경건함과 품위를 지켜야 한다. 기도 할 때에 우상숭배 자들과 같은 미신적인 기도, 광란적인 기도를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기도회에서 북을 정신없이 두드리거나 또는 단상을 요란하게 두드리고 발로 구르고 하면서 <주여 주여 주여>를 반복적으로 외치는 가운데 광란적인 기도를 유도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비기독교적인 기도 모습이다. 기도하기 전에 <주여 주여 주여>를 크게 삼창하고 기도하는 것도 아름답지 못하다. 그러한 것은 하나의 형식이다. 기독교의 기도는 무형식 이면서 그러나 형이상학적인 절도와 질서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자녀들이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 하는 것 까지도 알고 계시며 이미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마6:5-8> 하나님께서는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졸지도 아니하시며 <시121:3-4> 우리를 지켜보시며 우리가 부를 때에 언제나 즉시 응답하신다. 절망적인 것은 언제나 우리의 입장이지 하나님 아버지의 입장은 아니다. 하나님 우리아버지께서는 오히려 절망 가운데 품위를 잃고 울부짖는 우리를 안타까워하신다. <내가 날마다 순간마다 너와 함께 있거늘 어찌하여 나를 신뢰하지 않고 절망 하는가?>하고 안타까워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 속에서 절망할 이유 없이 광란적으로 구할 것 없이 품위 있고 절도 있게 기도해야 한다.

10) 금식 기도.

사람들은 금식 기도 하는 자들을 경건한 신앙인으로 알아 존경하지만 금식기도 하는 자들 중에 많은 자들이 하나님께 무례를 범하고 있다. 특히 일방적으로 날자를 정해 놓고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자녀가 부모에게 무엇을 요구하면서 밥 안 먹고 떼쓰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7일 금식, 10일 금식 , 심지어는 40일 금식을 정해 놓고 금식 기도를 하는 바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단식 투쟁이다. 인간은 정상적인 식사를 통하여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하루만 금식해도 건강에 지장을 받는 것이 인간의 육체다. 인간이 7일 10일 40일을 금식하는 것은 상식을 초월하는 무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을 소유한 분이시므로 40일이 아니라 400일도 금식할 수 있는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40일간 금식하셨다하여 인간도 40일 금식하는 것은 참으로 무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러한 기도를 기뻐하시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금식 기도를 요구하시지 않았고 무지한 금식 기도를 금지하시어 금식 기도에 대한 신학 원리를 다음과 같이 정립하셨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 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 마9:14-15>

이와 같은 신학 원리에 의하여 기독교인들은 함부로 금식하지 않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교회의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tm도의 통치를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잃고 슬퍼하며 괴로움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즐기며 살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영광의 삶, 기쁨의 삶을 누리고 즐기며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금식하며 기도할 명분도 이유도 없다.

반면에 기독교는 다음과 같을 때에 금식하며 기도해야 한다.

(1) 교회에 절대적 위기가 발생하였을 때.
(2) 국가와 민족에게 절대적 위기가 발생하였을 때.
(3) 하나님께 사명받은 자가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기로 결단해야 할 때에.

우리는 금식 기도할 때에 자신이 과연 무엇 때문에 금식하며 기도하는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만약에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 즉, 경제, 건강, 사업, 직장, 학업, 등등의 일상적인 문제 때문에 금식하며 기도한다면 그는 즉시 금식 기도를 중단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그러한 문제에 연연하며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사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그러한 문제들은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살며 비록 그러한 것들로 인하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그것을 극복하고 인내하며 사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것들에 연연하여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모독하는 망령된 행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일상적인 삶을 위하여 기도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 25-33>

11) 목사의 중보기도.

현대 기독교 목사들 중에 신학이 없는 자들이 도고<禱告-대도-代禱-딤전2:1>를 착각하여 <중보기도>한다고 말한다. 저들은 중보 기도는 오직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기도라는 신학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는 도고<대도>를 <중보기도>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목사들의 오류가 점점 확산되어 많은 성도들이 도고를 중보기도로 오해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자신들도 중보기도 한다고 말한다. 비록 모르고 하는 것이지만 자신이 중보기도 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이행한다고 하는 것으로서 심히 망령된 것이다.

12) 기도 받는 것.

기도에 관한 오류 중 또 하나가 기도 받는 것 기도해 주는 것이다. 많은 성도들이 유명한 목사들의 기도를 받으면 질병이 고쳐지고 은사를 받고 축복을 받는 것으로 믿어 유명 목사들을 찾아가 기도를 받는가 하면 기독교 방송국에서는 아예 그러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유명한 목사들에게 기도 받기를 권장하고 있다. 목사가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목사에게 주어진 고유한 책임이며 의무다. 목사는 특히 아직 기도에 익숙하지 않은 성도들을 위하여 도고<대도>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유명목사에게 기도 받으면 질병이 고쳐지고 은사를 받고 축복을 받는 다는 것은 목사들<특히 부흥 강사들과 기도원 집회 인도자들>이 오류, 왜곡, 변질시킨 비 진리이다.

 

그들은 부흥회나 기도원 집회 때에 안수 기도를 받으면 각종 질병이 치유되고 은사를 체험하게 되고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서 성도들에게 유명 목사의 기도 받는 관습을 유행시켰다. 하나님의 종들이 부흥집회와 같은 특별 집회를 인도할 때에 말씀을 선포하거나 안수하거나 기도할 때에 각종 질병이 치유되고 은사를 체험하게 되고 축복을 받는 등등의 성령 하나님 역사하심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들은 성도들에게 언제나 바른 신학을 가르치어 그들이 정상적인 신앙을 유지하게 해야 한다. 즉, 그러한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 역사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역사라는 원리를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목사들은 방송시간 같은 것을 통하여 기도 받으려는 자들과 유명 목사들을 찾아다니며 기도 받으려는 자들에게 <기도는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며 기도에 대한 응답도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어 그들이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아울러 자신을 위하여 목회자에게 도고의 기도를 부탁해야 할 때에는 유명 목사들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소속교회의 담임 목회자에게 도고의 기도를 부탁하라고 가르쳐 주어야 한다.

 

즉, 유명 목사의 기도에 따라 기도 응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 대한 응답은 오직 성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므로 담임 목회자에게 도고의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 기도에 대한 바른 질서인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마치 자신이 기도해 주어 질병이 치유되고 은사를 체험하고 축복을 받는 것으로 주장함에 따라 분별없는 성도들이 유명목사에게 기도 받으려고 동분서주하고 있다. 도대체 <기도해 준다>는 것은 무엇이며 <기도 받는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내용에 관계없이 용어 자체가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지 않는가? 기도를 해주는 자는 자신이 기도를 해주므로 역사가 일어났다는 차원에서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욱 내세우고 있으며, 기도를 받은 자는 유명 목사에게 기도 받아 역사가 일어났다는 차원에서 하나님보다 목사를 더욱 받들게 되므로 그들 모두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즉 말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기도해 준 목사가 하나님보다 더욱 받들어지는 것이다. 도대체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이러한 비 진리적 만행들이 언제가 돼야 기독교에서 사라지고 하나님 중심의 기독교가 세워질 것인지 참으로 안타깝다.

13) 헌금이 첨가되는 기도.

부흥 강사들과 기도원에서 발생한 기도의 오류 중에 헌금 첨가를 원칙으로 하는 기도가 있다. 부흥 강사들과 기도원에서는 회개할 때에나 안수 받을 때에 반드시 헌금을 드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에나 또는 어떤 문제로 목회자들에게 안수 기도를 받을 때에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으로 예물을 드리는 것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의무와 원칙으로 주장된다는 것은 묵과할 수 없는 오류이다. 하나님께서 자녀와 종들에게 베푸시는 모든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근거로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완벽한 예물로서 십자가의 대속죄제를 드렸기 때문에 그 예물<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오직 유일하면서도 영원히 완벽한 예물<중보>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회개할 때에 또는 안수 받을 때에 예물을 필수적으로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히 완벽한 십자가 대속죄제를 무시하고 모독하는 대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의 요구대로 헌금을 하는 자들도 같은 대죄를 범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모르고 그랬겠지만 이제 기독교인들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자기 유익을 도모하는 자들의 범죄에 더 이상 동참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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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장. 헌금

1. 헌금의 정의.

헌금 제도는 하나님에 의하여 제정 되어진 것이지만 구약시대의 헌금과 신약시대의 헌금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1) 구약시대의 헌금.

구약시대의 헌금<헌물 제물 예물>은 두 가지의 큰 의미를 내포하였다. 하나는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소유가 본래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천명 하셨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물<특히 십일조>을 드림으로서 하나님의 것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갖게 하였다.<창14:20;28:22> <민18:21-> <신12:17;14:23> 따라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 <아브라함, 욥>은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께 예물 드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구약시대 예물의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적 의미로 드려진 것이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속죄제, 화목죄 등등의 제사를 부여 하셨으며 제사 때에 동물이나 곡식 등등의 제물을 사용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러한 제사와 제물은 일시적인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적 제사를 예표 하는 것이었다. 한편 구약시대 예물 중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목을 위한 예물이 드려지기도 하였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목 예물이 드려진 것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한 배상적 의미가 포함되지만 하나님과의 화목을 전제로 하는 차원에서 화목 예물을 드린 것이었다.

2) 신약시대의 헌금.

신약시대의 예물도 그것이 본래 하나님의 것이라는 근본적인 의미는 구약시대와 동일하다. 반면에 신약시대의 예물 드림은 이제는 중보적인 의미로 드려지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중보자로서 완전한 제물이 되어 완전한 중보의 제사를 드리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했던 제물과 제사는 종료 되어졌고, 이제는 오히려 차원 높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예물로 승화 되어졌다. 이제 예물은 제단에 드려지는 의식적 차원의 의미를 떠나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의 자유> 원리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섭리를 위하여 드려지는 모든 행위로 승화 되어진 것이다. 따라서 신약시대의 예물은 보다 차원 높은 의미로 드려지게 된다. 신약시대의 예물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전개 되어지는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자신의 모든 것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드리는 신앙의 예배인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의 하나님을 향한 모든 순종과 충성과 봉사가 곧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예물>이 되며, 따라서 물질과 시간 까지도 예물에 포함되는 것이다.
화목적 의미로 드렸던 예물도 신약 시대 기독교에서는 드려지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한 예물로서 하나님과의 완전한 화목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한 예물이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목을 위한 예물이 드려지지 않는다. 반면에 신약 기독교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목은 하나님의 사랑에 입각한 실천적 신앙으로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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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예물을 기뻐하시는 것에는 또 다른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포함 되어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 당신의 종들이 그 예물 드림을 통하여 장차 하나님께 받을 상급을 예비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녀와 종들이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과 시간과 물질과 순종과 봉사와 충성> 등등의 예물을 하나님께 드릴 때에 그 모든 것들을 일일이 기억하시어 그들이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입국 할 때에 <착하고 충성된 내종>이라는 칭찬과 함께 그들이 드린 예물에 비하여 참으로 비교 할 수 없는 상급과 면류관을 선물로 하사 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원리에 의하여 예물은 헌금만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과 시간과 물질과 순종과 봉사와 충성>이 되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물.

하나님께서 제정하여 주신 <예물드림의 원리>에는 세 가지의 원칙이 있다.
첫째는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것이며 <출25:2>
둘째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릴 것이며<신16:10>
셋째는 분수에 맞게 드릴 것이다.<신16:10>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의 요구하심을 충족시켜 드리기 위한 차원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드려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다음과 같은 차원에서 드려야한다.

1) 하나님의 것임을 명심하여 드린다.
2)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드린다.
3) 하나님의 섭리에 드림이 되기 위하여 드린다.
4)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드린다.
5)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인에게 순종하고 충성하기 위하여 드린다.
6)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린다.
7) 즐거움으로 드린다.
8) 분수에 맞게 드린다.
9) 욕심이나 사심이 없이 드린다.
10) 대가를 바라지 않고 조건 없이 순수하게 드린다.
11) 허례허식 없이 드린다.
12) 최선을 다하여 드린다.

3. 현대교회의 헌금 종류.

1) 십일조헌금.
2) 감사헌금. <각종 명목의 감사헌금 및 특별 감사헌금>
3) 주일헌금.
4) 주정헌금.
5) 월정헌금.
6)절기헌금. <신년, 부활절, 성탄절, 맥추절, 추수 감사절 기타>
7) 구제헌금.
8) 전도헌금.
9) 선교헌금.
10) 건축헌금.
11) 서원헌금.
12) 회개헌금.
13) 직분헌금.
14) 안수헌금.
15) 은혜 사모헌금.
16) 성미.
17) 일천번제헌금.

4. 오류된 헌금.

위에서 고찰 하여 본 바에 의하면 현대교회의 헌금은 예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독재자들에 의하여 징수되는 세금이라고 해야 할 정도이다. 그것은 헌금의 종류에서도 나타나거니와 현대 교회의 헌금에 대한 강조<강요>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현대교회에서 드려지는 헌금의 실태를 보면 거의 다음과 같다.

1) 목적 있는 헌금.

헌금 강조자들은 <성령, 체험, 은혜, 강복, 은사, 등등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마음이 있는 곳에 물질이 있다>고 부추기며 <받기 위하여 드리는 것이 아니라 받을 것을 감사하므로 드리는 것>이라는 궤변으로 헌금을 유도한다.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성령, 체험, 은혜, 강복, 은사, 등등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헌금을 한다. 그러나 헌금 강조자들의 목적은 성도들에게 진정과 신령의 헌금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순전히 많은 헌금을 거두기 위함이다. 하나님께 어떤 무엇을 받기 위한 목적이 전제되어 있는 헌금은 온전한 헌금이 아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섭리 역사에 기쁨으로, 자의적으로 참여하는 신앙으로 드려야 한다.

2) 조건적인 헌금.

성도들이 하나님께 어떤 것을 요구하면서 자신의 요구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헌금을 드린다. 이러한 헌금은 목적을 전제로 한 헌금과 같은 것이며 따라서 기독교의 헌금이 아니라 3류 일반종교의 헌금이다. 3류 일반종교에서는 항상 목적적, 조건적, 헌금이 드려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러한 헌금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어떤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대속죄제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는 주장을 하면서 성도들의 조건적, 목적적, 헌금의 정당성을 합법화한다. 즉, 성도들이 기도할 때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료하게 명시하여 기도하면서 헌금하는 것이 바른 헌금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울러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성도의 감사이며 예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하나님을 3류로 하락시키는 망언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감사와 예의에 대한 기준을 헌금으로 책정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뢰, 진심의 감사, 자원의 순종, 기쁨의 충성 등등을 기뻐하신다.

3) 의무적인 헌금.

직분자로서 교회 운영에 대한 의무감에서 헌금을 드리는 경우가 있다. 특히 교회 재정이 어려울 때나 또는 교회적인 큰 행사가 있을 때 교회직원으로서의 의무감으로 헌금을 드리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헌금이 불의한 헌금일수는 없으나 진정과 신령의 헌금이 아니라는 차원에서 역시 정당한 헌금은 아니다.

4) 책임적인 헌금.

의무적인 헌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직분자로서 교회 운영에 대한 책임감에서 헌금을 드리는 경우이다. 이러한 헌금 역시 진정과 신령의 헌금이 아니라는 차원에서 역시 정당한 헌금은 아니다.

5) 두려움에 의한 헌금.

하나님께 헌금 드리지 아니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는 두려움에서 드리는 헌금이 있다. 하나님을 두려운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공경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서운해 하시거나 또는 진노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여 열심히 헌금한다. 하나님 공경의 방법을 헌금으로 인식하는 개념은 일반 종교적 개념 특히 무속 신앙과 불교적 개념에서 전이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경외에 대한 기준을 헌금으로 책정하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 두려운 존재로 군림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랑의 아버지로 자녀들에게 영원히 함께 하시는 것이다.

6) 체면과 위신에 의한 헌금.

직분자로서의 체면이나 위신을 지키기 위하여 드리는 헌금이 있다. 이러한 헌금 자세는 의무감이나 책임감에 의하여 드리는 헌금보다 더욱 비 진리적이다. 그것은 허세이며 형식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7) 자기 과시적 헌금.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에서 드리는 헌금이 있다. 이러한 헌금은 허세이며 위선이고 자기 자랑이며 자기 과시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8) 타산적, 계산적인 헌금.

헌금을 드림으로서 하나님께 어떤 대가가 주어지리라는 계산에서 드리는 헌금이 있다. 이러한 헌금은 목적이나 조건이 포함되지만 그보다도 계산적이라는 이유에서 하나님께 더욱 불경이다. 하나님은 계산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9) 아까움이 있는 헌금.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하여 헌금을 드리면서 아까워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헌금은 책임감이나 의무감이 포함되는 반면에 진심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신앙적 헌금이 아니라 일종의 종교적 헌금이다. 따라서 이러한 헌금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는 것이다.

10) 준비되지 않은 헌금.

헌금할 신앙적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배의식에 따라 드리는 무심히 헌금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헌금은 의식<儀式>적 헌금이며 성의 없는 것이므로 진정한 헌금이 아니다. 헌금은 준비하고 기도하면서 드리는 것이다.

11) 무리한 헌금.

자신의 경제적 능력에 비하여 과하거나 또는 빚을 내어 드리는 헌금이 있다. 대개의 경우 교회가 이전, 건축, 증축, 기도원 설립, 등등의 큰 행사를 목표로 하여 성도들에게 작정헌금을 명령하므로 성도들이 무리한 헌금을 하게 된다. 삯꾼 목회자들은 의도적으로 부흥 집회를 개최한 후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성도들의 무리한 헌금을 요구한다. 이때에 순박한 성도들은 부흥집회의 분위기와 부흥 강사들의 교묘한 술책에 휘말리어 충동적인 헌금 작정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자신이 충동적으로 무리한 헌금 작정했음을 깨닫고 후회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작정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목회자들의 강압적 협박 때문에 결국은 헌금을 하게 되고 그러한 과정에서 많은 고난을 겪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헌금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금이 아니며 헌금의 정의에 어긋나는 것으로서 일종의 사기 행각이기 때문에 헌금하지 않아도 무관하며 오히려 헌금하지 않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그러한 헌금은 불법적 헌금이므로 헌금하지 않는 것이 옳으며 헌금하지 않아야 그러한 불법자들의 악행을 근절시킬 수 있는 것이다.

12) 무례한 헌금.

헌금을 던져 넣는다거나 헌금으로 장난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헌금자세는 하나님께 무례한 것으로서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행악이 된다. 헌금할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께 예의를 갖추어 진정과 신령의 헌금을 드려야 한다.

13) 불의한 수입에 대한 헌금.

윤리적, 도덕적, 사회 통념상 용납될 수 없는 각종 불의한 수입에 대하여 드리는 헌금이 있다. 불의한 헌금은 하나님을 불의한 하나님이 되게 하므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 따라서 그것은 헌금이 아니라 악행이다.

14) 강제에 의한 헌금.

성도들에게 헌금을 강요하는 목회자들이 있다. 이때에 성도들은 목회자의 강요를 거절하지 못하여 마음에 없는 헌금을 드리게 된다. 강요에 의한 헌금은 헌금이 아니다. 특히 그것이 목회자 개인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헌금이 아니라 착취다. 따라서 그러한 헌금은 드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자들은 목회자의 명령에 맹종적으로 순종하여 헌금을 드리는바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 아니라 목회자에게 바치는 뇌물이다.

15) 사죄의 헌금.

하나님께 속죄받기 위하여 헌금하거나 또는 회개하면서 헌금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헌금은 잘못된 헌금이다. 성도들이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사죄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에 예물이 부과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대속죄제의 의의<意義>를 모독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이다. 헌금은 사죄와 회개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전제로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 역사에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드리는 차원에서 드리는 것이다.

16) 종말론적 신앙에 의한 헌금.

하나님의 심판이 즉시 임하게 될 것으로 믿고 현세의 것이 모두 무의미 하다고 생각되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경우가 있다. 사단의 사주 하에 있는 사이비 비 진리자들과 이단들은 종말론을 선포하면서 성도들의 재산을 갈취한다. 성도들은 그러한 자들의 술책에 휘말리어 자신의 전 재산을 그들에게 바치는데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이다. 진실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면 모든 것이 종료되기 때문에 재산은 그들에게도 아무 의미가 없다. 따라서 지혜로운 자들이라면 그러한 자들에게 사기 당하지 않는다.

17) 미신적 신앙에 의한 헌금.

재앙에 대한 예방책으로 헌금을 드리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 기도원을 차려놓고 무당질을 하는 자들에게 속아 그러한 헌금을 드리는 자들이 있는데 이러한 헌금은 예물의 진정한 의미를 오류, 왜곡하는 것으로서 십자가에 완전한 예물로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죄제를 무시하는 헌금이다. 따라서 이러한 헌금은 드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께 바른 신앙이다.

18) 일천번제 헌금.

솔로몬이 하나님께 드린 일천번제<왕상3:4>에 근거하여 일천번제 헌금을 드리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행위는 기독교적 행위가 아니라 유대교적 행위이다. 기독교적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며 유대교는 율법 중심이다. 유대교가 본래 기독교였으나 스스로 유대교로 분리되어 나간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오히려 거부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을 진행한다. 일천번제나 일천번제 헌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기독교 행위가 아니라 유대교 행위인 것이다. 일천번제나 일천번제 헌금은 신학을 모르는 자들이 주장하는 것으로서 유대교적일뿐만 아니라 3류 무속 종교적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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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적인 헌금은 대부분 기도원이나 부흥집회를 통하여 드려지게 되지만 일반 교회에서도 목사들의 강압적 또는 기복 신앙적 설교에 의하여 드려지고 있다. 현대교회 목사들 중에는 신앙의 척도를 헌금에 비례하는 자들이 많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은 거의 대부분 교회 재정에 집착하며 특히 돈을 사랑하는 자 들이다.

5. 교회 재정의 집행

목사는 교회의 총체적 책임자로서 교회 재정을 관장 하여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최종적 책임자로서의 확인이고 감사<監査>인 것이지 재정에 대한 독단적 행사나 일체적인 간섭을 의미 하는 것은 아니다. 목사는 교회 재정의 지출과 관리에 대하여 엄정하고 공정해야 한다. 교회법에 따라 집행하고 관리하되 재정부의 기능이 살아있는 집행과 관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적법 절차에 따라 집행되고 관리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1) 교회 재정 집행의 원칙.

교회 재정은 액수나 드린 자의 신분에 관계없이 하나님께 드려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드려진 그 자체로서 이미 소중하고 귀중한 것이다. 따라서 교회 재정을 집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집행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 재정의 집행은 다음과 같은 3 가지의 원칙에 입각하여 집행 되어져야 한다.

(1) 하나님의 주권이 세워져야 한다.

교회 재정 집행은 교회의 법에 근거하여 집행 되어야 한다. 교회마다 헌금 집행원칙이 다를 수는 있으나 그 원리는 같다. 즉, 하나님의 주권이 적용되어야 한다. 교회 재정 집행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적용된다는 것은 교회가 정한 교회 재정 집행 원칙을 준수한다는 것이다. 많은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교회 재정 집행 원칙을 무시하고 독단적 임의적으로 교회 재정을 집행하는바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재정 집행 원칙을 무시하는 것으로서 곧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속성이 증거 되어져야 한다.

교회 재정 집행에는 하나님의 공의 사랑 자비 긍휼 등등이 나타나야 한다. 교회 재정이 하나님의 속성을 증거하지 않고 어느 특정인들의 속성대로 집행되어 비 진리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만홀히 여기는 행악이다.

(3) 하나님의 섭리에 근거 하여야 한다.

교회 재정 집행은 하나님의 섭리대로 집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 재정은 교회적, 사회적, 민족적, 국가적, 공익을 위해서 집행되어져야 하며 개인의 사리사욕이나 비 진리적인 것을 위하여 집행 되어져서는 안 된다.

2) 정당한 교회 재정 지출과 관리.

교회 재정의 집행은 위와 같은 집행의 원칙에 입각하여 다음과 같이 집행 되어져야 한다.

(1) 교회의 합의를 이루어 집행한다.

교회의 예산에 의거하여 집행하며 예산에 들어있지 않은 것은 교회회의의 의결을 거쳐서 집행한다.

(2) 질서와 절차에 따라 집행한다.

반드시 재정부의 승인을 거쳐서 집행한다.

(3) 검소하게 집행한다.

낭비적인 집행을 하지 않으며 작은 것 하나라도 아끼고 절약한다.

(4) 규모 있게 집행한다.

반드시 필요한 것에만 집행한다.

(5) 과감하게 집행한다.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것에는 과감하게 집행한다.

(6) 정직하게 집행한다.

공과 사를 구분하여 집행한다.

(7) 기관의 재정은 기관의 자율에 맡긴다.

각 기관의 재정은 각 기관의 자율 하에 관리 되어지게 하며 오히려 교회적인 차원에서 기관을 지원함으로서 기관이 성장하고 발전하게 한다.

(8) 특별 헌금은 별도로 관리 집행한다.

교회 건축, 선교사업, 구제, 장학회 등등의 특정 사업을 위하여 드려진 특별 헌금은 일반 재정과 구분하여 별도로 관리하며 원래 드려진 목적대로 집행한다.

3) 비 진리적 교회 재정집행.

현대 교회의 재정집행 실태를 고찰하여 보면 지극히 비 진리적인 경우가 많은바 그 실태를 예로 들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질서와 절차 무시.

교회의 예산과 정책에 관계없이 재정부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 집행한다.

(2) 특정인이 임의로 사용.

재정부의 합의나 승낙 없이 특정인이 마음대로 사용한다. 어떤 목사는 <목사는 교회재정의 70%를 임의로 사용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그것을 막으려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 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3) 불법 불의한 곳에 사용.

부동산투기, 사채놀이, 관광, 오락 등등에 사용한다.

(4) 규모 없는 과소비.

교회 재정은 쓰면 하나님께서 채워 주신다면서 함부로 과다하게 사용한다.

(5) 심방헌금 착복.

심방 헌금을 착복하는 자들이 있다. 목회자들 중에는 <심방 헌금은 목회자의 분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6) 부흥회 헌금 착복.

부흥집회 때 드려진 헌금 을 부흥강사와 담임목사에게 사례비로 주는 교회가 있으며 심지어는 아예 전액을 부흥강사와 담임목사가 나누어가지는 자들도 있다.

(7) 연말연시의 헌금 남용.

연말연시 및 명절 때에 선물 구입에 교회 재정을 지나치게 집행하는 경우가 있다. 일년 동안 수고한 교회 직분자 들에게 선물을 주는 관례는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은 검소한 선물 이어야 한다. 어떤 교회 에서는 명절이나 연말연시에 교회재정으로 목회자에게 과다한 선물이나 사례비를 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관례는 퇴출 되어져야 한다.

(8) 빚 얻어 집행 하는 것.

교회가 행사를 위하여 또는 교회 건축을 하기 위하여 빚을 얻어 집행 하는 경우가 있다. 교회가 특별한 경우에 금융기관을 통하여 대출 받을 수 는 있으나 무리한 행사, 또는 교회건축을 위하여 빚을 얻어 집행하는 것은 교회를 환란에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한다.

(9) 교회 내 외부에 대한 과다한 치장을 위하여 교회 재정을 허비하는 것.

교회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은 좋으나 과다한 비용을 들여 교회를 호화롭게 치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교회 건물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나타난다.

(10) 과다한 목회비 지출.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이 목회자에게 과다한 목회비를 지출하는 바 이와 같은 관행은 하루빨리 퇴출되어야 한다. 현대 목회자들 중에 미자립 교회나 작은 교회의 목회자들은 너무 어렵게 사는 반면에 대형교회 목사들은 지나치게 호화로운 삶을 산다. 목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삶을 통하여 정립시켜 주신 목사의 삶의 원리로 돌아가야 한다. 목사가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 즐기는 삶을 살면 존경받으나 반대로 현실적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즐기는 삶을 살면 비난받고 비판받는다.

(11) 기도원 구입.

많은 교회들이 기도원 및 수양관을 설립하는 것에 막대한 교회 재정을 투입하고 심지어는 성도들에게 특별 헌금까지 강요하고 있는바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교회가 해야 할 사명이 얼마나 많으며 돌아보아야 할 곳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명을 이행하지 않고 그러한 일에 교회 재정을 집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이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것으로서 지탄받아 마땅하다. 교회가 개교회적으로 기도원 및 수양관을 설립하는 것은 교회 재정을 낭비하는 것이며 <합하여 선을 이루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다. 기도원이나 수양관은 범 기독교적 차원에서 설립 운영해야 한다.

(12) 교회 묘지 구입.

교회가 성도들의 공동묘지를 구입하기 위하여 교회 재정을 집행 하는 것은 기독교의 부활 신학을 스스로 무시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죽음은 곧 하나님 나라의 입국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현세적 죽음에 대하여 결코 슬퍼하지 않으며 흙으로 돌아가는 육체를 위하여 묘소를 세우고 가꾸는 일에 시간과 재정을 낭비하지 않아야 한다. 도처에 돌아보아야 할 어려운 이웃들이 산재해 있는데 교회 공동묘지를 구입하는 것에 귀중한 하나님 교회의 재정을 집행하는 것은 기독교이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망령된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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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장. 목사들의 축복권과 저주권

한국 기독교 목회자 중에 목사들의 축복권과 저주권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저들은 로마 카토릭이 주장하는 <매고 푸는 권세-마16:13-19>를 근거로 하여 <목사의 축복권과 저주권> <목사의 매고 푸는 권세> <목사에게 부여된 천국문을 열고 닫는 열쇠> 등등을 주장한다. 한국 기독교의 많은 성도들은 이 해괴한 주장들로 인하여 목사들의 온갖 공갈 협박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목사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그리고 목사의 저주를 받지 않기 위하여 목사에게 절대 충성한다. 우리는 저들의 악행이 더 이상 하나님의 성도들을 착취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목사의 축복권과 저주권> <목사의 매고푸는 권세> <목사에게 부여된 천국문을 열고 닫는 열쇠>에 대한 문제를 신학적으로 정립한다.

1. <마16:13-19>.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16:13-19>

1)<마16:13-19>에 대한 로마 카토릭의 주장.

로마 카토릭은 교황제도를 확립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다양한 오류를 조작해 내었다. 저들은 사도 베드로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섭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좌정시켰다. 그리고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좌정시키는 과정에서 <마16:13-19>을 아전인수<我田引水>로 해석하였다. 로마 카토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매고 푸는 권세>와 <천국문의 열쇠>를 주었으며 그것은 곧 교황에게 준 것으로서 오직 역대 교황에게 대대로 내려지는 권세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매고 푸는 권세>와 <천국문의 열쇠>가 오직 베드로에게만 주어진 것으로서 곧 교황에게만 주어진 권세라는 주장은 <마18:18>을 통하여 억지 주장임이 들어난다. <마18:18>은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이기 때문이다.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8:18>

그러나 로마 카토릭은 <마18:18>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침묵하고 무시하였다. 로마 카토릭은 <매고 푸는 권세>와 <천국문의 열쇠>를 교황의 절대적 권세로 확립시키기 위하여 그것이 곧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에 대한 권한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로마 카토릭의 주장은 인류 구원이 하나님에 의하여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교황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질 수도 있고 거부될 수도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그러한 주장은 교황의 권위와 권세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위에 두는 망령되고 패역한 악행이다.

2) <마16:13-19>의 신학.

(1) 교회에 대한 신학.

<마16:13-19>에는 교회에 대한 신학이 다음과 같이 정립되어 있다.

①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워진다.
②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야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다.
③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로 세워진다.
④ 하나님의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하에 운영된다.
⑤ 하나님의 교회는 인간에 의하여 세워지고 인간에 의하여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적 섭리에 의하여 세워지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부여되는 권위와 권세에 의하여 운영되므로 사단의 역사가 범접하지 못한다.

(2)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신학.

<마16:13-19>을 하나님 종들에게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복음<천국 열쇠>이 주어졌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들은 복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인도해야 한다. 복음<무엇이든지>을 비 진리로 가르치면<매면> 하나님의 징계<하늘에서도 매일 것>를 받을 것이요 너희가 복음<무엇이든지>을 진리로 가르치면<풀면>,하나님의 상급<하늘에서도 풀릴 것>을 받으리라.

2. 매고 푸는 것.

<마16:13-19>에는 <매는 것>과 <푸는 것>에 대한 언급은 있으나 그것을 <매는 권세> <푸는 권세>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매는 권세> <푸는 권세>는 로마 카토릭이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가 주어졌다는 것을 교황에 대한 절대적 권세로 적용하기 위하여 조작해 낸 것이다. 즉 로마 카토릭은 교황에게 교회의 수장<首長>권을 부여하면서 교황의 수장권을 절대적인 것으로 확립시키기 위하여 <천국 열쇠>를 천국에 들여보낼 수 있는 교황의 절대권한으로 조작했고 그것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매는 것>과 <푸는 것>에 권세를 부여하여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천국 문을 열수도 있고-풀 수도 있고> <천국 문을 닫을 수도 있는-맬 수도 있는> 절대적 권세를 부여받았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저들은 <매고 푸는 권세>를 더욱 확대해석하여 교황에게는 <축복권>이 부여되었으므로 교황이 축복하면 하나님께서도 강복하신다고 주장하였다.

 

로마 카토릭은 본래 <교황의 축복권과 저주권>을 주장하였지만 저주권에 대한 반대가 심하여 저주권에 대한 주장은 슬그머니 후퇴하고 축복권만 주장한다. 이와 같은 로마 카토릭의 만행은 당연히 하나님께 징계받아 마땅하므로 기독교로부터 분리되는 허용적 징계를 받았지만 로마 카토릭보다 더 악한 자들이 있는바 그들은 바로 그와 같은 로마 카토릭의 주장을 자신의 권세로 적용하여 <목사에게 축복권 저주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목사들이다. <마16:13-19>에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부여된 두 가지의 특별한 사명이 명시되어 있는 반면에 그들이 그 사명을 바로 이행하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무서운 징계가 있음이 선포되어져 있다. 그러나 <목사의 축복권과 저주권>을 주장하는 자들은 <마16:13-19>을 통하여 하나님의 종들에게 일률적으로 부여된 무서운 경고를 알지 못하고 오직 목사의 권세에 대한 욕심만 가득하다.

1) <마16:13-19>과 관련된 사명.

<마16:13-19>을 통하여 하나님의 종들에게 일률적으로 부여된 사명은
두 가지로서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명.

① 하나님 진리<말씀>의 보존.
② 하나님 진리<말씀>의 사수.
③ 하나님 진리<말씀>의 보전.
④ 하나님 진리<말씀>의 교육.
⑤ 하나님 진리<말씀>의 전파.

(2) 하나님의 성도 양육에 대한 사명.

① 하나님 성도에 대한 용서.
② 하나님 성도에 대한 사랑.
③ 하나님 성도에 대한 교육.
④ 하나님 성도에 대한 보호.
⑤ 하나님 성도에 대한 인도.
⑥ 하나님 성도에 대한 축복.
⑦ 하나님 성도에 대한 기도.

따라서 <마16:13-19>에 명시된 목사들의 사명은 목양자로서의 사역적 권세인데 하나는 <하나님의 진리-말씀>에 대한 권세이고 다른 하나는 성도들을 <양육하고 보호하는 권세>이다. 그리고 그 권세는 <통치적 권세나 군림적 권세> <권위적 권세-세우는 권세>가 아니라 <임무적 권세-사역적 권세>로서 <섬기는 권세-봉사의 권세>이다.

2) 땅에서 매는 것.

땅에서 매는 것이란 하나님의 종들이 교회를 통하여 진행하는 사명을 바로 이행하지 않고 비 진리적으로 행사하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하나님의 진리<말씀>에 대하여 매는 것.

하나님의 진리<말씀>를 맨다는 것은 목사들이 하나님의 진리<말씀>를 보존, 사수, 보전, 교육, 전파하지 않거나 또는 오류, 왜곡, 변질시켜 비 진리가 되게 하는 것이다. 목사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그러한 오류를 범한다.

① 무지<無知>와 무식<無識>에 의해 매는 것.

신학이 정립되지 않은 목사들은 신학적 무지와 무식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오류, 왜곡, 변질시킴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 사수, 보전하지 못하며 잘못 가르치고 잘못 전한다.

② 자신들의 권위를 위해 의도적으로 매는 것.

신학이 정립되지 않은 목사들 중에 많은 자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려는 욕심을 발동하여 의도적,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오류, 왜곡, 변질시킨다.

③ 게으르고 나태하여 방관적으로 매는 것

사명감 부재의 목사들은 누리고 즐기는 것에 심취하거나 또는 게으르고 나태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오류, 왜곡, 변질되거나 또는 기독교를 빙자한 사이비 이단과 각종 비 진리자들이 횡행하고 난무하여도 수수방관한다. 저들은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오히려 즐거워하고 그들을 비난하면서 자신이 진리 안에 있음을 과시하고 자랑한다. 기독교를 빙자한 사이비 이단과 각종 비 진리자들이 횡행하고 난무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이 오류, 왜곡, 변질되는 것은 가슴이 저미도록 아픈 일이며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왜냐하면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어지고 하나님의 존귀하고 거룩한 이름이 망령되게 일컬어지며 수많은 교회들이 무너지고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시련과 고통과 아픔을 겪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사명을 이행하기 위하여 비 진리자들과 이단자들의 횡행과 난무를 근절시켜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오류, 왜곡, 변질되는 것을 생명을 다 바쳐 막고 퇴치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 사수, 보전하고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존, 사수, 보전해야 한다.

(2) 하나님의 성도 양육에 대하여 매는 것.

<마16:13-19>의 땅에서 매는 또 하나는 목사들의 하나님의 성도 양육사명을 매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성도들을 바로 섬기지 아니하는 제반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즉, 목회자들이 하나님 성도에 대하여 용서, 사랑, 보호, 인도, 축복, 기도, 등등의 섬김적 사명을 이행하지 않고 목사의 권위를 내세워 그것을 제한하거나 또는 하나님 성도들을 착취하거나 갈취하거나 편애하거나 상처를 줌으로서 그들을 슬프게 하고 낙심하게 하고 유리방황하게 하는 비 진리적 제반 행위들을 말하는 것이다.
.
3) 땅에서 푸는 것.

(1) 하나님의 진리<말씀>에 대하여 푸는 것.

하나님의 진리<말씀>를 푸는 것은 매는 행위에 대하여 상대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말씀>를 푼다는 것은 목사들이 하나님의 진리<말씀>를 최선을 다하여 보존, 사수, 보전, 교육, 전파하는 것이며 열심히 공부하여 하나님의 진리<말씀>를 오류, 왜곡, 변질시키지 않고 바로 전하고 바로 가리키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성도 양육에 대하여 푸는 것.

하나님의 성도 양육 사명을 푼다는 것은 매는 행위에 대하여 상대적인 것이다. 즉, 목회자들이 하나님 성도에 대하여 용서, 사랑, 보호, 인도, 축복, 기도, 등등의 섬김적 사명을 최선을 다하여 이행하고 그들에게 기쁨과 소망을 주며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평안과 행복과 영광의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4) 하늘에서 매는 것.

<하늘에서 맨다>는 것은 하나님의 종들이 부여받은 사명을 바르고 진실되게,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이행하지 않고 불법과 악행을 범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상대적인 징계를 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에서 맨다>는 것은 용서받지 못하는 것으로서 성령 훼방죄에 해당하는 징계를 말하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진리<말씀>에 대하여 매는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16:13-19>을 통하여 불법을 행하는 자들과 나태하고 게으른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선포하셨다. <땅에서 매는 자들이 하늘에서 매일 것>이란 말씀은 다음과 같은 말씀이다.

<목사들이 무지와 무식에 의하여, 또는 목사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하여, 또는 나태하고 게을러서 하나님의 말씀<진리>를 오류, 왜곡, 변질시키거나 또는 잘못 가르치거나 잘못 전하거나 사이비 이단들과 비 진리자들의 범람을 수수방관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보존, 보전, 사수하는 사명을 바로 이행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대로 보응하신다.>

.(2) 하나님의 성도 양육에 대하여 매는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16:13-19>을 통하여 불법을 행하는 자들과 비 진리를 행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선포하셨다. <땅에서 매는 자들이 하늘에서 매일 것>이란 말씀은 다음과 같은 말씀이다.

<목사들이 하나님의 성도들을 양육함에 있어 하나님 성도들을 용서, 사랑, 보호, 인도, 축복, 기도 등등으로 바로 섬기지 않고 목사의 권위를 내세워 그것을 제한하거나 또는 하나님 성도들을 착취하거나 갈취하거나 편애하거나 상처를 줌으로서 그들을 슬프게 하고 낙심하게 하고 유리방황하게 하는 비 진리적 행위들을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대로 보응하신다.>

5) 하늘에서 푸는 것.

<하늘에서 푼다>는 것은 하나님의 종들이 부여받은 사명을 바르고 진실되게, 그리고 최선을 다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상대적인 보상을 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에서 푼다>는 것은 착하고 충성된 종들에게 하사되는 상급과 면류관을 말하는 것이다.

3. 천국문의 열쇠.

<마16:13-19>의 천국 열쇠는 <매고 푸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천국<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완성되어졌으며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섭리이다. 따라서 목사에게 천국문의 열쇠가 주어졌다는 것은 <열을 수도 있고 닫을 수도 있는 권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전하게 열려진 <천국문-구원>으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을 인도하라는 것이다. 열쇠는 열기 위한 도구이지 잠그기 위한 자물쇠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열쇠를 말하였을 뿐 자물쇠를 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들이 천국문을 <열을 수도 있고 닫을 수도 있는 권세>를 가진 것으로 주장한다거나 또는 축복을 할 수도 있고 저주를 할 수도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목사에게 부여되지도 않은 그러한 권세를 주장하면서 성도들을 기만하고 협박하는 악행이다. 만약에 목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완전하게 열어놓은 천국<구원>을 목사의 권위를 내세워 제한한다거나 또는 복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강복을 목사의 권위를 내세워 제한한다면 그것은 결코 제한되지 않는 반면에 그것을 함부로 제한한 그 목사는 하나님께 <불법을 행한 악한 자>라는 책망과 함께 영원히 정죄될 것이다.

4. 목사의 축복권과 저주권.

하나님의 모든 피조세계에 대한 강복권과 징계권은 그들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만 존재하는 절대 고유의 특권이다. 한편 목사에게는 실제로 축복권이 부여되어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목회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를 축복하라는 특별한 권세를 부여하셨다. 그러나 그 권세는 <권위적 권세-세우는 권세>가 아니라 <임무적 권세-사역적 권세>로서 <섬기는 권세-봉사의 권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들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이 피차에 서로를 축복하고 사랑하는 것을 기뻐하시며 따라서 그와 같은 <축복과 사랑의 삶>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통하여 <절대적 법령으로> 제정하여 주셨다. 특히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돌보고 양육해야 할 사명을 받은 자들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강복이 내려지기를 사명적 차원에서 <그러나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차원에서> 원하고 간구하는 <축복권>을 행사해야 한다. 그러나 현대 목사들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축복권은 그러한 축복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사하시는 <강복권>이다. 목사의 축복권을 주장하는 자들의 개념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목사에게 하나님의 강복하시는 권세와 저주<징계>하시는 권세와 같은 권세가 실제로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한 주장은 신학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것이며 신앙적 사명적으로도 전혀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강복하심과 저주<징계>하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특권이지 목사들에게 위임되거나 부여된 권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또 하나는 목사가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강복하시는 반면에 목사가 저주하면 하나님께서 저주하신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도 책망 받아 마땅한 악행이다. 만약에 목사의 축복과 저주에 따라 하나님께서 강복하시고 징계하신다면 하나님은 목사의 부하가 되는 것이다. 저들은 이와 같은 우리의 책망에 자신들을 변호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목사들에게 그러한 권세를 부여하신 것은 목사들의 권위를 세우시기 위함이며 따라서 목사의 축복과 저주에 따라 하나님께서 강복하시고 징계하신다하여 하나님께서 목사의 부하가 된다고 하는 것은 망언이라고 변증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변증도 같은 악행이다. 목사의 축복과 저주에 따라 하나님께서 강복하시고 징계하신다는 주장은 결국 목사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하여 조작해 낸 비 진리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저주라는 용어를 기독교에 허락하지 않으셨다. 때문에 저주하는 자들은 오히려 그 저주가 자신에게 돌아가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이다. 따라서 목사에게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다는 주장을 하는 자들은 자신의 신학적 무지와 무식을 스스로 자증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권한과 권위와 영광을 가로채려는 망령되고 패역한 악행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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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장. 축복과 저주

1. 축복<祝福>

1) 축복의 정의.

축복<히- 바락 ???> <헬- 율로게오 ευλοϒεω> <영-Bless, Blessing> 이라는 용어는 하나님께서 은총을 내린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복을 빈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반면에 한국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축복<祝福> 이라는 단어는 순전히 어떤 존재로부터 복이 내려질 것을 원하고 부탁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인간이 피차에 하나님의 은혜 또는 하나님의 복이 하사되어지기를 기원 할 때에는 축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 또는 복<福>을 하사하시는 것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강복<降福>으로 표현해야 한다.

2) 축복의 오류.

한국기독교는 하나님의 강복<降福>을 하나님의 축복<祝福>이라는 용어로 잘못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강복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사용되면 다음과 같은 뜻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다>....하나님께서 어떤 존재를 향하여 <복을 내려주소서>하고 빌었다.
<하나님께 축복 받았다.>.....하나님께서 어떤 존재를 향하여 <복을 빌어 주셨다>
<하나님 축복하여 주소서>.....하나님 우리에게 <복이 내려지도록 빌어 주시옵소서.>

따라서 하나님의 축복은 신학적으로 다음과 같은 무서운 문제를 발생시킨다.

첫째 :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강판시키게 된다. 하나님이 강복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축복하시는 하나님이 되신다면 하나님은 복을 비는 존재로서 복을 주시는 어떤 지고의 존재보다 열등함을 스스로 증거 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자리를 거부하고 강판 시키는 망령된 언어이다.

둘째 : 하나님의 주권이 무시되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인 것으로서 타의 추종이나 이의 같은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복을 주지 못하고 복을 비는 정도의 하나님이라면 그러한 하나님에게 절대적 주권이라는 것은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서 기만이요 사기인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망령된 언어이다.

이러한 논증에 대하여<비록 축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할지라도 그 의미는 당연히 강복인 것이며 따라서 용어 하나를 가지고 너무 비약하는 것이다.>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의는 당연히 그리고 단호하게 야단맞아야 한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이 과연 아무렇게나 함부로 불려져도 되는 분이신가? 그 분의 이름이 인간의 말이나 인간의 글로 불려지고 씌어진다고 해서 그렇게 간단하게 그렇게 대충, 불려지고 씌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한다거나 그런 생각을 갖는 사람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홀대하는 자임이 분명하다. 하나님께는 최상, 최고, 최대의 예를 갖추어 도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렇게나 말하면서 해석만 바로 하면 된다는 자세는 하나님께 참으로 무례하고 무엄한 악행이다.

2. 저주<詛呪>

1) 저주의 정의.

저주<詛呪-히-מר?-cherem-히-הללק-qlalah-헬-αναθεμα-anathema>는 축복에 대한 반대 용어로서 상대방에게 불행이 닥칠 것을 기원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저주.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언급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저주와 무관하시다.

(1) 하나님께서는 신분상 저주와 무관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분으로서 최고, 최상, 최대의 존재이시다. 아니 그러한 용어로 표현한다 해도 부족한 것이 하나님의 신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저주와 같은 저속한 것과는 전혀 무관하시다.

(2) 하나님께서는 주권주로서 저주와 무관하다.

현존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피조로서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의 주인이신 주권주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세계를 저주할 수 없다.

(3) 하나님께서는 속성상서 저주와 무관하다.

하나님의 속성<거룩, 자비, 긍휼, 사랑,>은 저주와 전혀 무관하시다.

(4) 하나님께서는 섭리주로서 저주와 무관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진행하시는 섭리주로서 당신의 섭리 역사 하에 있는 것들을 저주하실 수 없다.

하나님께서 저주와 무관하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저주를 하실 수 없다는 표현은 하나님께 어떤 제약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저주와 무관하시다는 것이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저주를 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3) 기독교와 저주.

기독교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저주와 무관하다.

(1) 하나님께서 저주와 무관하시다.

하나님께서 저주와 무관하시므로 하나님의 기독교도 당연히 저주와 무관하다.

(2) 하나님께서 저주를 싫어하신다.

하나님께서 저주를 싫어하시므로 하나님의 기독교는 저주를 할 수 없다.

(3) 하나님께서 저주를 금지하셨다.

하나님께서 저주를 금지하셨으므로 하나님의 기독교는 저주를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피차에 축복할 것을 명령하신 대신에 저주를 금지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주하는 자들에게는 그 저주가 자신에게로 돌아간다고 선포하셨다<창12:3><출21:17>.

(4) 기독교인들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죄의 저주 하에 있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사면 받은 자이기 때문에 저주할 수 없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도 저주아래 있었던 자들로서 용서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아무도 저주할 수 없다.

(5)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자이기 때문에 아무도 저주할 수 없다.

기독교인들은 <인격, 거룩, 자비, 긍휼, 사랑> 등등의 하나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자로서 아무도 저주할 수 없다.

(6)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아무도 저주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상 저주와 무관하므로 어떤 경우에도 저주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가 저주한다면 그는 하나님 자녀의 품위와 인격을 스스로 손상시키는 것이다.

(7)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아무도 저주할 수 없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자들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자들로서 어떤 경우에도 저주할 수 없다. 특히 현존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것을 하나님의 종이 저주할 수 없다.

4) 저주에 대한 성경해석.

(1)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해석.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언급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저주의 관계를 근거로 할 때에 하나님의 저주란 곧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2) 사도들의 저주에 대한 해석.

사도 바울은 저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1:8-9>

바울의 말은 자신이 저주를 한다거나 또는 성도들에게 저주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롬9:3>은 동포의 구원을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희생도 불사하겠다는 열정의 표현이며, <갈1:8-9>은 비 진리를 전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이다.

(3) 사람의 저주에 대한 해석.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저주를 금지하셨으며 저주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것을 선포하신다<창12:3><출21:17>. 따라서 모든 사람, 특히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저주할 수 없다. 인간은 다만 용서와 관용, 사랑과 긍휼, 자비와 축복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 기독교에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비 진리가 등장하여 많은 사람들을 심란하게 한다. 대부분 기도원을 차려놓고 무당 노릇을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괴이한 비 진리들을 남발하고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조상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가 가문에 내려진다>는 것이다. 저들은 그러한 주장을 하면서 괴상한 주문까지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저들이 이러한 비 진리를 주장하는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중에 대표적인 것은 두 가지로서 하나는 아담의 죄가 온 인류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이요 다른 또 하나는 <출34:6-7>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출34:6-7>

그러나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조상의 죄를 가문에 대대로 내리실 이유가 없다. 성경은 이와 같은 진리를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비의 죄를 담당치 않겠느뇨 하는도다 아들이 법과 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정녕 살려니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18: 19-20>

따라서 아담의 죄가 인류에게 전가된 것과 <출34:6-7>은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1) 아담의 죄가 인류에게 전가된 것.

아담의 죄가 인류에게 전가된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발생한 원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된 것이며 다른 또 하나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발생한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이 혈통을 따라 인류에게 전가된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원죄로 인한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징계 받으며 또한 부패한 본성에 의하여 범죄하는 일상죄에 대한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징계받게 된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죄없이 다만 아담의 범죄를 연대적으로 저주<징계>받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들의 죄에 대한 징계를 받는 것이다.

(2) <출34:6-7>

<출34:6-7>의 말씀은 조상의 죄를 후손에게 대대로 내리신다는 것이 아니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진리는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 한다는 말씀에서 증명된다. 반면에 <겔18:19-20>은 분명히 아비의 죄를 자식에게 전가하지 않는다고 선포한다. 따라서 <출34:6-7>의 말씀은 조상의 죄를 후손에게 대대로 내리신다는 것이 아니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이 분명하다. 따라서 성도들은 기독교를 빙자한 3류 무당들의 비 진리에 속아 심란할 필요 없다. 기독교에 저주란 허용되지 않으며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절대 보호하심 하에 있으므로 사단조차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침노할 수 없다. 따라서 3류 무당들의 저주와 주문 따위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전혀 해당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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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장. 하나님의 은혜

1. 하나님 은혜에 대한 정의.

은혜<恩惠>라는 용어는 혜택<惠澤>이나 특혜<特惠>에 대한 차원을 나타나는 용어이다. 혜택 또는 특혜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보상이나 대가가 지나치게 과다했을 때에 적용되는 용어이다. 그러나 은혜라는 용어는 혜택이나 특혜보다도 더욱 과다한 것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사용하는 은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 자비, 긍휼, 사랑, 용서, 강복, 신앙, 등등의 모든 것에 대한 총체적인 용어이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2. 하나님 은혜의 특성.

1) 과거적이다.

기독교의 하나님 은혜는 일반 종교의 은혜와는 그 성격과 본질이 전혀 다르다. 일반 종교의 은혜는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것으로서 현재 받는 은혜와 앞으로 받을 은혜를 말하지만 기독교의 하나님 은혜는 과거적인 것으로서 이미 받은 은혜를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창세전에 하사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신앙적 행위를 근거로 하여 시시때때로 은혜를 하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자녀의 신분을 전제로 하여 창세전에 조건 없는 <자녀를 조건으로 하여> 은혜를 하사하셨다. 그리고 그 은혜는 일회<一回>로 끝나는 은혜가 아니라 자녀들의 일생동안에 계속하여 공급되는 영원한 은혜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과거는 물론이요 현재와 미래에 대한 모든 은혜를 이미 창세전에 받은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은혜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를 감사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며 은혜받기 위한 신앙적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를 누리고 즐기는 신앙적 삶을 사는 것이다. 즉, 날마다 순간마다 이미 주신 은혜를 그때그때 <예금통장에서 현금 찾아 쓰듯이> <냉장고에서 음료수 꺼내 먹듯이> 즐기고 누리는 신앙적 삶을 사는 것이다.

2) 완전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완전하게 유효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경우에도 부족하거나 미완성적이지 않고 충분하며 완성적이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이유는 두 가지로서 첫째는 아담 이래의 모든 인류는 하나님을 거역한 원죄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진정한 이유는 두 번째 이유로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면서도 하나님 은혜를 헤아릴 수도 없이 거부하고 모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징계 받아야할 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자녀삼아 주시고 그 <자녀>라는 것을 이유로 하여 참으로 받자옵기 민망한 은혜를 하사하셨다. 우리는 본래 아무리 물을 퍼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밑빠진 독>이었고 지금은 아예 물을 퍼부을수도 없는 <깨어진 독>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당신의 <은혜의 바다>에 던져 버리시어 우리가 은혜 안에 빠져 살게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부족하다고 느끼는 자들이나 하나님 은혜를 갈망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어떠한 은혜를 얼마나 받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며, 어떤 것이 귀중한 은혜인지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줄 모르는 패역한 자들이며, 더 큰 은혜를 욕심내는 망령된 자들이다.

3. 하나님 은혜의 종류.

하나님의 은혜는 전체적이며 포괄적인 것으로서 그중에 중요한 것을 정립하면 다음과 같다.

1) 창조의 은혜.

(1) 인간으로 창조된 은혜.

인간은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모든 피조들 중에 가장 특별하고 우수한 존재인 인간으로 창조된 것이다. 인간은 신체의 균형과 미모, 생활관습 등등에서 다른 피조들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은혜를 받았으며 특히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우아하고 고매한 인격과 자유의지를 하사받았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인류 사회를 통하여 입증된다. 인류 사회에는 다른 피조들의 영역에는 없는 문화와 문명이 있으며 정치, 경제, 군사, 예술, 학문, 과학, 스포츠, 가정, 등등의 각종 영역이 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는 다른 피조 세계가 다만 무에서 말씀으로 창조된 것과 달리, 흙이라는 재료를 통하여 창조된 것을 통하여 입증된다. 인간 창조에 흙이라는 재료가 사용되었다는 것 자체도 은혜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흙으로 지으신<빚으신> 은혜를 하사하신 것이다.
(2) 대자연을 주신 은혜.

하나님의 모든 피조세계는 인간을 중심으로 창조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인간의 삶을 위하여 선물로 하사하셨다. 해, 달, 별, 산, 평야, 시냇물, 강, 바다와 각종 생물들은 모두 인간에게 하사된 하나님 은혜의 선물들이다.

2) 신분적 은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중 가장 최고의 은혜는 신분적 은혜이다.

(1) 하나님 나라의 백성.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현세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살지만 장차에는 하나님 나라<천국>에서 최고 최상의 영원무궁한 삶을 살게 된다.

(2) 하나님의 자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로 모시고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와 은총과 긍휼 안에서 수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즐기는 삶을 산다.

(3) 하나님의 종.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 섭리 역사에 귀한 존재로 쓰임 받으며 하나님 섭리 역사의 동반자로 예우 받으며 각종 능력과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영광의 삶을 산다.

4. 하나님 은혜에 대한 성도의 자세.

하나님의 은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도록 전체적이고 포괄적이며 완전하고 영원하다. 따라서 성도들은 더 이상의 은혜를 간구하거나 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무지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고 무시하는 패역이며 어리석고 지나친 욕심이다. 성도들이 때때로 하나님의 은혜안에 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거나 또는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하나님 안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 사는 자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고 행복하고 그리하여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않고 하나님께 찬양으로 기도하고 감사로 기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즐기는 삶>을 산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즐기는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만족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만족하는 삶을 사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행복하고 평안하다. 때문에 그들은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않고 하나님께 찬양으로 기도하고 감사로 기도하는 삶을 살게 된다. 어떠한 경우에도 만족하는 삶을 사는 자들은 재물, 명예, 권세, 부귀, 영화, 쾌락 등등에 연연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것들로부터 초월하고 자유하는 자들이다. 반면에 재물, 명예, 권세, 부귀, 영화, 쾌락 등등으로부터 초월하고 자유하지 못하는 자들은 반대로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만족하지 못하며 때문에 행복하고 평안하지 못하며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할 수 없으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즐기는 삶>을 살지 못하고 항상 은혜를 갈망하며 은혜를 받기 위하여 전전긍긍하며 기도원이나 부흥집회를 배회하느라 동분서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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