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장. 기도
1. 기도의 정의.
일반 종교에서의 기도<祈禱>는 섬기는 자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섬기는 존재에게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도는 그와 같은 차원을 초월한다.
1)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대화이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대화한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아뢰며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에게 특별히 하실 말씀이 있을때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의 기도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러하실 때에 그들에게 기도하게 하신다.
2)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이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3)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접하며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한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에게 기도는 곧 신앙적 생각이며 언어이고 행동이며 삶이고 사명의 진행이다.
2. 바른 기도.
기도는 신앙으로 하지만 신학에 근거하여 기도할 때에 바른 기도가 된다. 따라서 기도는 다음과 같은 신학 원리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1) 성부 하나님께 기도.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반드시 성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기도할 때에 주, 주 하나님, 하나님, 등등의 명칭을 부를 수 있으나 그 대상은 언제나 성부 하나님이어야 한다. 기도할 때에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님을 부르고 기도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신학을 모르기 때문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기도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죄제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하고 완전하고 유일하신 중보자가 되셨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에 <예수 이름으로-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거나 또는 <예수님 이름으로-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기도이다. <예수>는 단독으로 사용되어질 때에는 <주님_구주-중보자-메시야>가 될 수 없고 다만 제물이 될 뿐이며 반드시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에 <주님_구주-중보자-메시야>가 되는 것이다.
3)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사모하며 기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종들이 기도할 때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다음과 같다.
(1) 성부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받으시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고
(2) 성자 하나님께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로서 기도를 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되시며
(3) 성령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종들은 기도할 때에 성령 하나님께서 기도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기를 사모하며 기도해야 한다.
4) 온전한 기도.
기독교 성도들은 초기 신앙 때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모르며 배운다 하여도 실감하지 못한다. 때문에 초기 신앙 때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모르며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도 잘 모른다. 그리하여 중언부언의 기도를 하기도 하고 또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 대한 기도만 하게 된다. 그러나 신앙이 성숙해짐에 따라 기도에 대한 개념과 방법도 성숙해져서 점차 기도의 지경이 넓혀지고 그리하여 이웃, 교회, 국가와 민족, 등등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되며 드디어는 온전한 기도를 할 수 있게 된다. 온전한 기도란 기도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기도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위하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종들의 신앙이 성숙해지면 기도의 궁극적 목표가 하나님을 위한 온전한 기도로 발전하게 된다. 과거에는 자신, 가족, 가정을 위해 기도할 때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기도를 하였고 이웃, 교회, 사회, 국가, 민족, 등등을 위한 모든 기도 역시 현세적인 안녕과 유익을 추구하고 소망하는 간청의 기도였으나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차원 높은 형이상학적인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3.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성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의 기도를 직접 들으시며 그 기도에 직접 응답하신다. 하나님의 응답하심의 방법과 시기는 다음과 같다.
1) 응답의 방법.
(1) 신학, 신앙, 사명, 인격, 등등에 관한 응답.
① 말씀으로 응답.
기도의 응답이 신학, 신앙, 사명, 인격, 등등에 관한 것으로서 분별, 깨달음, 정립의 필요성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말씀<신학>을 통하여 응답하신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설교, 성경, 상담, 등등을 듣거나 보게 하시고 그 과정을 통하여 분별하고 알고 깨닫고 감동받고 믿고 정립하게 하시는 것이다.
② 환상, 꿈, 환청, 감동, 등등으로 응답.
기도의 응답이 신학, 신앙, 사명, 인격, 등등에 관한 것으로서 분별, 깨달음, 정립이 요구되어질 때에 응답이 더욱 구체적이어야 할 필요성이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환상, 꿈, 환청, 등등을 통하여 보여주시고 듣게 하시므로서 기도에 응답하신다.
(2) 삶에 관한 응답.
기도의 응답이 경제, 건강, 사업, 직장, 학교, 등등의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삶과 연관된 것일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합당한 응답을 실제적, 현제적으로 주신다.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고 사업을 번창하게 하시며 직장문제 학교문제 등등을 실제적, 현제적으로 해결해 주시는 것이다.
2) 응답의 시기.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실 때에 경우와 상황에 따라 즉시 응답하실 때가 있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응답하실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자녀와 종들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이시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시기를 조정하시는 것은 그렇게 하셔야만 하는 절대적 필요성 때문이다. 즉 일찍 응답해 주시어야 할때에는 일찍 응답해 주시고 그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나타나게 될 때에는 시간을 조절하시어 좋은 결과가 될 때에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
3) 거부적 응답.
하나님께서 기도에 전혀 응답하시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모두 자녀와 종들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이시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하셔야만 하는 절대적 필요성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으로 선포하는 바<마7:7-11> 그것은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녀와 종들이 간구할 때에 언제나 그들이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녀와 종들이 간구할 때에 주어서는 안 될 것을 구하면 주시지 않는다. 그들의 안목과 생각에 의하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므로 간구하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오히려 그것이 해악이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시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허락하시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응답이다.
4. 기도의 오류.
현대 기독교 성도들 중에 많은 자들이 기도의 원칙을 벗어난 오류적 기도를 하고 있는바 그중에 대표적인 것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섭리에 위배되는 기도.
목회자들이 관광지나 호텔에 모여 기도회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위배되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 목회자들의 그러한 기도회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어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게 일컬어진다.
2) 의례적인 기도.
독재적 위정자를 위한 조찬 기도회에서 독재자를 찬양하는 기도를 하는 것과, 비 기독교인들의 행사에 들러리를 서는 기도회, 각종 사회단체들의 행사에 참여하는 기도회 등등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 하는 것이지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다.
3) 무례한 기도.
하나님께 항의적인 기도를 하거나 시위적인 기도를 하거나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은사와 능력을 함부로 요구하면서 무례한 언어와 태도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의 언어와 태도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존경의 예의를 갖춘 것이어야 한다.
4) 과시적인 기도.
하나님께 받은 복과 능력과 은사를 자랑하고 과시하거나 또는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기도를 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였다<마6:5>.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지 자신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수단이 아니다.
5) 일방적인 기도.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한 채 자신의 욕심과 취향에 따라 스스로 어떤 결정을 내려놓고 그것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기도는 언제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이어야 한다.
6) 무질서한 기도.
예배의 대표 기도를 할 때 중언부언하거나 오랫동안 많은 문제를 열거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예배의 대표 기도를 하는 자는 미리 기도하는 가운데 준비하여 간단명료하게 기도해야 한다.
7). 거짓 기도.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오직 진실과 진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진실을 은폐하고 하나님을 기만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8) 조건적인 기도.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자신의 뜻을 이루어 주시면 하나님께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9) 품위 없는 기도.
기독교인은 기도 할 때에도 경건함과 품위를 지켜야 한다. 기도 할 때에 우상숭배 자들과 같은 미신적인 기도, 광란적인 기도를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기도회에서 북을 정신없이 두드리거나 또는 단상을 요란하게 두드리고 발로 구르고 하면서 <주여 주여 주여>를 반복적으로 외치는 가운데 광란적인 기도를 유도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비기독교적인 기도 모습이다. 기도하기 전에 <주여 주여 주여>를 크게 삼창하고 기도하는 것도 아름답지 못하다. 그러한 것은 하나의 형식이다. 기독교의 기도는 무형식 이면서 그러나 형이상학적인 절도와 질서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자녀들이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 하는 것 까지도 알고 계시며 이미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마6:5-8> 하나님께서는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졸지도 아니하시며 <시121:3-4> 우리를 지켜보시며 우리가 부를 때에 언제나 즉시 응답하신다. 절망적인 것은 언제나 우리의 입장이지 하나님 아버지의 입장은 아니다. 하나님 우리아버지께서는 오히려 절망 가운데 품위를 잃고 울부짖는 우리를 안타까워하신다. <내가 날마다 순간마다 너와 함께 있거늘 어찌하여 나를 신뢰하지 않고 절망 하는가?>하고 안타까워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 속에서 절망할 이유 없이 광란적으로 구할 것 없이 품위 있고 절도 있게 기도해야 한다.
10) 금식 기도.
사람들은 금식 기도 하는 자들을 경건한 신앙인으로 알아 존경하지만 금식기도 하는 자들 중에 많은 자들이 하나님께 무례를 범하고 있다. 특히 일방적으로 날자를 정해 놓고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자녀가 부모에게 무엇을 요구하면서 밥 안 먹고 떼쓰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7일 금식, 10일 금식 , 심지어는 40일 금식을 정해 놓고 금식 기도를 하는 바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단식 투쟁이다. 인간은 정상적인 식사를 통하여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하루만 금식해도 건강에 지장을 받는 것이 인간의 육체다. 인간이 7일 10일 40일을 금식하는 것은 상식을 초월하는 무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을 소유한 분이시므로 40일이 아니라 400일도 금식할 수 있는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40일간 금식하셨다하여 인간도 40일 금식하는 것은 참으로 무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러한 기도를 기뻐하시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금식 기도를 요구하시지 않았고 무지한 금식 기도를 금지하시어 금식 기도에 대한 신학 원리를 다음과 같이 정립하셨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 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 마9:14-15>
이와 같은 신학 원리에 의하여 기독교인들은 함부로 금식하지 않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교회의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tm도의 통치를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잃고 슬퍼하며 괴로움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즐기며 살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영광의 삶, 기쁨의 삶을 누리고 즐기며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금식하며 기도할 명분도 이유도 없다.
반면에 기독교는 다음과 같을 때에 금식하며 기도해야 한다.
(1) 교회에 절대적 위기가 발생하였을 때.
(2) 국가와 민족에게 절대적 위기가 발생하였을 때.
(3) 하나님께 사명받은 자가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기로 결단해야 할 때에.
우리는 금식 기도할 때에 자신이 과연 무엇 때문에 금식하며 기도하는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만약에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 즉, 경제, 건강, 사업, 직장, 학업, 등등의 일상적인 문제 때문에 금식하며 기도한다면 그는 즉시 금식 기도를 중단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그러한 문제에 연연하며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사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그러한 문제들은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살며 비록 그러한 것들로 인하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그것을 극복하고 인내하며 사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것들에 연연하여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모독하는 망령된 행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일상적인 삶을 위하여 기도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 25-33>
11) 목사의 중보기도.
현대 기독교 목사들 중에 신학이 없는 자들이 도고<禱告-대도-代禱-딤전2:1>를 착각하여 <중보기도>한다고 말한다. 저들은 중보 기도는 오직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기도라는 신학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는 도고<대도>를 <중보기도>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목사들의 오류가 점점 확산되어 많은 성도들이 도고를 중보기도로 오해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자신들도 중보기도 한다고 말한다. 비록 모르고 하는 것이지만 자신이 중보기도 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이행한다고 하는 것으로서 심히 망령된 것이다.
12) 기도 받는 것.
기도에 관한 오류 중 또 하나가 기도 받는 것 기도해 주는 것이다. 많은 성도들이 유명한 목사들의 기도를 받으면 질병이 고쳐지고 은사를 받고 축복을 받는 것으로 믿어 유명 목사들을 찾아가 기도를 받는가 하면 기독교 방송국에서는 아예 그러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유명한 목사들에게 기도 받기를 권장하고 있다. 목사가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목사에게 주어진 고유한 책임이며 의무다. 목사는 특히 아직 기도에 익숙하지 않은 성도들을 위하여 도고<대도>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유명목사에게 기도 받으면 질병이 고쳐지고 은사를 받고 축복을 받는 다는 것은 목사들<특히 부흥 강사들과 기도원 집회 인도자들>이 오류, 왜곡, 변질시킨 비 진리이다.
그들은 부흥회나 기도원 집회 때에 안수 기도를 받으면 각종 질병이 치유되고 은사를 체험하게 되고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서 성도들에게 유명 목사의 기도 받는 관습을 유행시켰다. 하나님의 종들이 부흥집회와 같은 특별 집회를 인도할 때에 말씀을 선포하거나 안수하거나 기도할 때에 각종 질병이 치유되고 은사를 체험하게 되고 축복을 받는 등등의 성령 하나님 역사하심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들은 성도들에게 언제나 바른 신학을 가르치어 그들이 정상적인 신앙을 유지하게 해야 한다. 즉, 그러한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 역사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역사라는 원리를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목사들은 방송시간 같은 것을 통하여 기도 받으려는 자들과 유명 목사들을 찾아다니며 기도 받으려는 자들에게 <기도는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며 기도에 대한 응답도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어 그들이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아울러 자신을 위하여 목회자에게 도고의 기도를 부탁해야 할 때에는 유명 목사들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소속교회의 담임 목회자에게 도고의 기도를 부탁하라고 가르쳐 주어야 한다.
즉, 유명 목사의 기도에 따라 기도 응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 대한 응답은 오직 성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므로 담임 목회자에게 도고의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 기도에 대한 바른 질서인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마치 자신이 기도해 주어 질병이 치유되고 은사를 체험하고 축복을 받는 것으로 주장함에 따라 분별없는 성도들이 유명목사에게 기도 받으려고 동분서주하고 있다. 도대체 <기도해 준다>는 것은 무엇이며 <기도 받는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내용에 관계없이 용어 자체가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지 않는가? 기도를 해주는 자는 자신이 기도를 해주므로 역사가 일어났다는 차원에서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욱 내세우고 있으며, 기도를 받은 자는 유명 목사에게 기도 받아 역사가 일어났다는 차원에서 하나님보다 목사를 더욱 받들게 되므로 그들 모두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즉 말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기도해 준 목사가 하나님보다 더욱 받들어지는 것이다. 도대체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이러한 비 진리적 만행들이 언제가 돼야 기독교에서 사라지고 하나님 중심의 기독교가 세워질 것인지 참으로 안타깝다.
13) 헌금이 첨가되는 기도.
부흥 강사들과 기도원에서 발생한 기도의 오류 중에 헌금 첨가를 원칙으로 하는 기도가 있다. 부흥 강사들과 기도원에서는 회개할 때에나 안수 받을 때에 반드시 헌금을 드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에나 또는 어떤 문제로 목회자들에게 안수 기도를 받을 때에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으로 예물을 드리는 것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의무와 원칙으로 주장된다는 것은 묵과할 수 없는 오류이다. 하나님께서 자녀와 종들에게 베푸시는 모든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근거로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완벽한 예물로서 십자가의 대속죄제를 드렸기 때문에 그 예물<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오직 유일하면서도 영원히 완벽한 예물<중보>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회개할 때에 또는 안수 받을 때에 예물을 필수적으로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히 완벽한 십자가 대속죄제를 무시하고 모독하는 대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의 요구대로 헌금을 하는 자들도 같은 대죄를 범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모르고 그랬겠지만 이제 기독교인들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자기 유익을 도모하는 자들의 범죄에 더 이상 동참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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