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장애인들과 노인들이 합동으로 집회를 열었다. 이로인해 울란바타르시 중심가의 교통흐름이 완전히 멈춰 버렸다. 6월 5일 아침 10시경부터 시작된 이번 집회에서 그들은 도로에 드러눕거나 앉아서 그들의 입장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들이 도로를 점거하게 된 이유는 국회를 통과한 결점 투성이의 새 법률 때문이다.
그동안 장애인들은 공공운송 이용시 이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무임 승차권을 정부로부터 발급받아 사용해 왔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새 법률을 제정하여 이러한 혜택을 축소시켰다.
정부는 무임승차권 대신 하루 400투그릭으로 계산, 월(4주 5일 기준) 6000투그릭을 대중교통 이용요금으로 장애인들에게 지급하도록 하는 새 법률을 마련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6월 6일까지 국회가 비정기 국회를 열어 오류 투성이인 법률을 다시 개정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이날 집회에 참가한 100여 명의 장애인들은 “우리를 집에만 앉혀놓음으로써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언성을 높였다.
그들은 울란바타르시장 비서실과 인민혁명당 그리고 민주당에 법률 개정 요구서를 제출했다. 이 세 곳에 요구서를 제출한 이유는 이번에 새로 제정된 법률안을 민주당과 인민혁명당에서 발의했기 때문이다. 


2008-06-05 몽골교민신문 토야

1.생활비

 작년(2007)과 금년(2008) 초 국제유가와 곡물류, 원자재류 가격이 급등하여 현재 몽골 물가 또한 많이 오른 상태다.

대략 정리하면, 2008 3월 현재 한국인 4인 가족 기준 식생활비(食生活費)는 최소 700$ ~1,000$ 정도이며, 향후 물가인상이 우려되기 때문에 이보다 더 예상해야 맞을 듯 싶다.

물론 현지인(몽골인)의 식생활을 기준으로 한다면 식생활비는 이보다 적게 든다고 할 수 있다.

* 환율 - 2008년 3월 기준 *

- 살 때 : 1달러 - 1175투그릭

 - 팔 때 : 1달러 - 1170투그릭

 

 2. 주택 가격

작년부터 몽골 현지의 부동산(주택, 토지) 가격이 폭등한 상태로 작년(2007 3)과 비교하면 현재(2008 3) 2배 정도 오른 상태이며,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몽골 경제의 급속한 성장에 따라 현재 부동산 시장 또한 투기양상까지 보이며, 토지 및 주택(아파트) 가격이 급격한 상승곡선을 그리며 치솟고 있다.

2008 3월 현재 몽골 수도인 울란바타르시 주택가격(아파트)을 살펴보면,

시내에 위치한 약 30~35평방미터, 2개 짜리 아파트의 경우 입지(교통, 편의시설 등 감안)에 따라 60,000 ~ 75,000$ 정도에 거래되고 있다.

그리고, 현지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시내에 위치한 약 40~50평방미터, 3개 짜리 아파트의 경우 입지(교통, 편의시설 등 감안)에 따라 65,000 ~ 100,000$ 정도에 거래되고 있다.

참고로 현지에는 한국의 건설회사에서 직접 건축한 아파트도 있는 데, 이 아파트들의 경우 다른 아파트들에 비해 가격이 많이 높은 편이다.

현재 울란바타르 시내는 물론 변두리에도 곳곳에 아파트 건설을 위한 타워그레인이 즐비하며, 요즘 신축되는 아파트의 경우 입지에 따라 분양가가 평방미터 당 900 ~2,000$정도로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근래에 신축되는 아파트들의 경우 중국산의 값싼 자재를 쓰는 경우가 많아 입주 후 하자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으며, 심지어는 건축 전 지반 조사 등을 제대로 실시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새로 분양되는 아파트의 경우, 사전에 시공사가 시공능력이 있는 신뢰할 수 있는 건설사인 지에 대해 그리고 업체 규모와 이전 건축 실적 등에 대해 필히 확인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현지인들은 신축 아파트보다 구형 아파트(러시아측에서 건설, 보통 건축된 지 15년이상 된 아파트)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3. 주택 임대료

작년(2007) 부동산 가격 급등에 따라, 아파트 임대료도 많이 오른 상태다. 몽골 현지에는 주택임대에 있어서 전세라는 것은 없고, 오직 월세만 있다.

월세의 경우 매월 임대료를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 3개월 ~ 12개월 분 임대료를 선지불하는 형대다.

시내에 위치한 약 30~35평방미터, 2개 짜리 아파트의 경우 입지(교통, 편의시설 등 감안)에 따라 월 임대료가 350 ~ 500$ 정도이며, 관리비는 별도로 지불해야 한다.

  

4. 난방비, 아파트 관리비

울란바타르 시내의 아파트 관리비(난방비, 전기요금, 상하수도 요금 포함)의 경우, 2인 가족 기준으로 대략 월 40~50$ 정도이며, 입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관리비에는 난방비, 전기요금, 상하수도 요금, 공동전기 이용료 등이 포함되는 데, 가족수에 따라 상하수도 요금 액수의 차이가 발생하고, 전기요금의 경우 계량기에 의해 계산된 요금을 납부하게 되며, 난방비의 경우 입방미터당 계산하여 요금이 부과된다.

 

5. 주요 식료품류 가격

교민들이 운영하는 한국 생필품, 식료품을 판매하는 슈퍼마켓이 많이 있다. 이곳에서 된장, 고추장, 조미료, 라면, 참치, 고등어, 미역, , 당면, 회 등 다양한 식료품을 구입할 수 있다.

또한, 몽골 현지에서 직접 교민들이 재배한 채소류도 구입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 식료품들은 몽골인들이 주로 먹는 중국산에 비해서는 다소 비싼 편이다.

2008 3월 현재 생필품의 현지 가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반 몽골 소매점 소비자가기준)

1)김치(중국산) 1kg  :  3,000 ~ 4,000투그릭

2)중국 쌀 1kg  :  800-1000투그릭

3)배추1kg  :  800-1000투그릭

4) 1kg  :  600-800투그릭

5)상추1kg  :  3500투그릭

6)양파 1kg  :  600-700투그릭

7)계란 1  :  220투그릭

8)소고기 1kg  :  4000-4200투그릭

9)돼지고기(일반) 1kg  :  4500-4600투그릭

10)닭고기 1kg  :  3600-3800투그릭

11)라면(한국산) 1 :  900 ~ 1,200 투그릭

12)참치캔() (한국산) 1 :  1,500 투그릭

13)조미김 6매들이(한국산)  :  1,200투그릭

14)오징어젓 ()(한국산)  :  13,000투그릭

15)호박1kg  :  2500투그릭                         

16)마늘 1kg  :  1500투그릭

17)고추1kg  :  2500투그릭

18)생강1kg  :  2500투그릭

19)고구마1kg  :  2000투그릭

20)돼지고기(삼겹살) 1kg : 8,000 - 12,000투그릭

21) 연료가격 :

- A92(고급휘발유)  1230투그릭/리터

- A80(저급휘발유)  1105투그릭/리터

- 디젤유  1328투그릭/리터

- 가스  920투그릭/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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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상황과 선교전략
몽골 선교의 선교적 당위성


  
들어가는 말

1991년 복음의 불모지 몽골에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하면서 전세계의 관심이 징키즈칸의 나라 몽골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많은 국제선교단체나 선교사들이 입국했고 지금은 약 2,500명의 신자와 크고 작은 교회들이 20개 정도로 성장했다.이제 몽골 선교의 당위성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1.몽골 선교의 선교적 당위성

우리가 선교를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루살렘까지 복음이 들어가야 비로소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가지신 중요한 계획이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에서 예루살렘까지 일직선으로 선을 그어 보면 우연히도 우리 선교의 가장 마지막 보루인 모슬렘의 영역이 나온다. 그것은 바로 중앙 아시아를 말하는 것이다. 중앙 아시아란 카자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키즈스탄,타지크스탄 및 투르크메니탄을 비롯한 5개 국가를 일컫는다. 이들 국가들은 전부 소련 연방에 속해 있다가 지난 1991년을 전후에 독립국가를 형성하여 현재에도 독립국가연합(CIS) 에 속해 있는 나라들이다. 이들은 과거 역사의 흐름에서 여러 정권들이나 나라들의 지배를 받아왔으며 소련 연방의 해체로 인하여 역사상에 개개의 국가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과거 소련연방에 속해 있었다는 공통점 이외에도 몇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 이들은 대부분 유량목축업계 종사하거나 이제 정착을 시작한 민족들로서 아직도 농업개발의 필요성과 잠재력을 갖고 있는 나라들이며 사막과 초원으로 구성된 영토를 갖고 있다.
* 이들은 대체로 이슬람의 배경을 가지고 있으나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단계는 아니고 오히려
무속신앙의 영향을 많이 받아 'Fork Islam'이라고 하는 샤머니즘과 이슬람의 혼합된 종교형태를
취하는 나라들이다.
* 이들의 언어는 알타이계에 속하며 한국어와 많은 유사성을 갖고 있다.
* 이 지역에는 스탈린 강제이주 결정에 의하여 사할린 지역에서 강제로 이주된 한국인 약 30만 명
거주하는 지역이다.
* 몽골은 국가의 종교법에도 나왔지만 라마불교,이슬람교,샤머니즘,기독교를 모두 종교로 인정한다.
대외적으로 몽골은 중앙아시아,특별히 이슬람의 문화에 들어가는 훈련의 장으로서 복음의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내적으로 전세계에서 티벳과 몽골만이 가지고 있는 라마불교의 문화는 불교와 샤머지즘,이슬람의
혼합사상이기에 그들 문화속에서, 전세계의 복음의 문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몽골과 티벳의 선교는 전세계 복음의 창문으로서 큰 가치가 있다.

2. 한국만이 몽골을 책임질 수 있다.

몽골말로 "안녕하십니까?"를 "싸인 바이 노"라고 한다. '싸인'은 '좋은','잘'이라는 뜻이고, '바인'은 '있다'라는 뜻이고,'노'는 의문형 어미이다. 잘 있었느냐는 뜻으로 우리말의 안녕하십니까와 비슷한 의미이다. 몽골말로 '오늘'은 '어너드르','어제'는 '어치그드르','내일'을 의미하는 '마르가시'는 우리말의 '모레'와 유사하다.이렇게 많은 단어가 한국말과 비슷하다. 접미사다 같다."집에서 학교로 간다"의 몽골어는 "겔에스 소르골로 야호"로서 "에서"와 "로"라는 접미사가 같다. 급한 경우에 우리말은 그대로 쓰면 뜻이 통하는 경우도 있다."자 나한테 얘기해"라는 말은 몽골어로 "자나다테 예리"로서 거의 비슷하다. 말이 비슷하기 때문에 한국사람이 몽골에 적응하기가 매우 쉽다. 한국은 여러 면에서 몽골을 돕기에 가장 적합한 나라로 인정되고 있다.

첫째로 몽골 주변의 여러 나라 중에서 몽골에 대해서 적대적인 감정을 유발시키지 않을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러시아는 과거 70년 동안 몽골을 사상적으로 지배하여 왔으며 경제적인 의존심을 부추겨 왔다. 이들은 몽골을 자신의 형제 나라라고 추켜 세웠지만 몽골인들 스스로 나라를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사실상 제거하여,항상 러시아에 의존하도록 모든 경제를 장악하여 왔다.

아울러 바이칼호 부근에 거주하고 있는 몽골족 브리야트와의 통합을 반대하여 몽골인들의 대동단결을 방해하고 있다. 중국은 과거에 러시아의 꼬임에 넘어가 소련의 괴퇴정권이 되어버린 몽골에 대하여 자신들이 아직도 종주국이라는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모든 몽골인들의 분노의 대상이 되고 있다. 불법체류 외국인 가운데 중국인이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은 폭력조직을 동원하여 몽골 경제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몽골인들은 증오심과 아울러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실정이다. 일본은 현재 몽골이 가장 의존하고 있는 나라임에 틀림이 없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몽골과 관계를 맺고 몽골을 도왔다. 단일국가로서는 일본의 도움이 가장 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과거 2차대전 당시 몽골을 침략하려다 만주리에서 일개 군단 병력이 몽-소 연합군에게 할힝골 전투에서 참패한 아픈 기억이 있다.

일본인의 도움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순수한 도움이라기보다 장래를 위한 투자의 성격으로 인식되고 있다. 소모품이나 반드시 필요한 장비들과 기계들의 무상원조,복잡하고 까다로워서 아프터 서비스가 계속 요구되는 복잡한 기계들은 단지 과거 소련에서 이제 일본으로 의존 상대국을 바꾼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일본인들은 몽골인들에게 비교적 환영받는 편에 속한다. 그러나 과거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추한 행태들에 대해서는 민족주의적 반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실정이다. 한국은 몽골인들에게 순수한 의미의 도움을 주기 원하는 나라로 인식되어 있는 듯하다. 과거 역사상 대립관계에 놓였던 시기가 있었지만 사돈관계를 맺어 비교적 원마하게 해결하였으며,몽골인들은 아직도 한국을 "무지개의 나라"(솔롱고스)라고 부르며 친근감을 표시하고 있다. 이렇게 한국은 세계 여러나라 중에서 몽골을 도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나라이며 아울러 몽골은 선교 초년생인 한국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 나라이다.

뒤늦게 선교의 현장에 뛰어든 한국에게 몽골은 가장 의미있는 선교지로 인식되어 지고 있다.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한국 선교사의 파송은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아직 해외선교에 대한 경험이 충분하지 않으며 해외선교 대한 이론적 기반도 잘 정립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과거 외국 선교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외국선교기관들의 이론과 전략을 그대로 베껴오거나 약간 수정한 상태에서, 외국선교기관의 한국지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선교전략으로 단지 선교사 파송의 양적인 팽창을 꾀하고 있을 뿐이다. 나라별로 전략을 세우고 구속의 모형(Analogy of Redemption)들을 발견하여 복음전파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노력은 뒷전으로 돌리고 교회개척만을 고집하고 있는 것같다. 교회개척을 조건으로 선교사를 파송한다든지,교회개척이 사실상 어렵다고 생각되는 평신도 선교사는 파송하지 않는다든지 하는 현상은 선교정책의 부재에서 일어나는 증상으로 생각된다. 한국은 이제 우리 실정과 분수와 능력에 맞는 선교지를 개척해야 할 필요성이 있고 우리의 능력에 맞는 선교전략을 개발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몽골은 한국기독교계를 위한 좋은 선교지 중의 하나라고 본다.

무엇보다도 몽골은 미전도종족에 속한다. 아직 복음이 정착되지 못한 지역인 것이다. 사실 몽골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3-4년밖에 되지 않았다. 과거에도 산발적으로 복음이 전파된 적이 있으나, 기독교가 뿌리내리지는 못하였고,대를 이어 내려오는 기독교인이나 집안도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역사상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몽골은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과 단계를 연구할 수 있는 좋은 훈련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선교사들은 몽골이 개방되던 시기부터 진출하여 활발하게 복음활동을 펴고 있다. 그러나 서방선교사들에게 몽골은 잘 이해되지 않는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그들은 몽골을 창의적접근지역으로 분류해 놓고 사실 한국선교사들로부터 결론을 기다리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주저하고 있다. 몽골어를 배우는 데 무척 오랜시간이 소요될 뿐 아니라 이들의 문화 풍습을 서양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몽골인들의 배타적이고 호전적인 습성을 낯선 외국인들이
접근하기에는 아주 큰 장애로 작용하기도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한국 선교사는 문법적인 유사성으로 인하여 몽골어를 쉽게 터득할 수 있고, 오랜 역사적인 교류관계로 인해 문화적인 괴리감이 적어 몽고인들에게 쉽게 접근하여 접촉점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아울러 인종적 유사성으로 만약에 내가 몽골 전통의상인 "델"을 입고 수염을 기르고 거리에 나가면 몽골인들이 전혀 한국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내가 한국인이라고 밝히면 모두들 농담으로 생각할 정도이다. 이러한 인종적인 유사성은 접촉점으로 쉽게 만들어 낼 수 있고, 몽골인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매우 적합한 것이다. 서방의 선교단체와 선교사들이 몽골인과 인종적으로 가장 유사한 한국사람들에게 많은 기대를 거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서방선교사들이 주축이 되어온 해외선교는 선교 초년생인 한국선교사들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거의 모든 것이 서양선교사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으며, 사실 선교 현장에서도 인종적 우월주의가 많이 작용했던 것이 현실이다. 가장 인종편견이 없어야 할 분야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사실 커다란 아이러니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몽골 선교에서는 상황이 다르다.한국인 사역자들이 중심이 되어 요소요소에서 활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외국선교사들은 누구보다도 한국인 사역자들과 동역하기를 원하고 있다. 여러 개의 개척교회가 한국인 사역자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아울러 몽골은 한국인이 감당할 수 있는, 부담이 크지 않은 나라라는 것이다.

선교지 선택에는 이유가 있을 수 없지만 망대를 세우기 전에 먼저 계산해 보라는 예수님의가르침을 상기할 때 몽골은 경제적인 면이나 장래성에 있어 매우 뛰어난 사역지인 것이다. 사실 중국과 러시아는 조선족과 고려인을 대상으로 한 선교가 아니라면 우리에게 조금은 벅찬 사역지이다. 충분한 사전이해와 사역지 연구기간이 필요하며, 중국인과 러시아인들이 가지고 있는 우월감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다. 특히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권의 핵심 인물들이나, 정치 현장에 가깝게 접근해야 하지만, 중국이나 러시아는 나라의 방대함 때문에 정치권의 핵심에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제약이 있다. 그러나 몽골은 나라가 작기 때문에 정치권의 핵심에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단위가 알맞아 사회주의가 붕괴는 모습을
피부 가깝게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한국은 몽골선교를 통하여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성공적인 결과는 다음 사역에 중요한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몽골선교를 통하여 주변국인 중앙아시아,중국,러시아,북한,중동으로 쉽게 사역을 확장시켜 나갈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가 예상되는 북한에 대한 선교전략 및 통일을 대비한 훈련장으로 가장 좋은 대상지가 바로 몽골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에게 필요한 것은 모범적인 선교전략과 자신감이다. 몽골은 그러한 측면에서 좋은 훈련장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한국은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절호의 챤스인 셈이다. 만일 우리가 이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몽골과 한국 모두에게 커다란 손실이 있게 될 것이다.

몽골 천강민 선교사


출처 : 장안중앙교회 최일환목사
글쓴이 : 최일환목사 원글보기
메모 :
[동아시아의 오늘과 내일](40)한국에 온 노동자들을 품어야하는 이유
-84년전, 몽골에 진 빚이 있다-

얼마 전 한 신문에서 몽골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몽골에도 외국인을 적대시하는 극우단체가 있는데 현금을 많이 지니고 다니는 한국인들이 주로 피해를 본다는 내용이다. 기자는 현지 교민의 입을 빌려 여러 피해 사례를 보고하면서 상황이 이런데도 대사관에서는 팔짱만 끼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사람을 때리고 금품을 뺏는 것은 물론 몹쓸 짓이다. 대사관도 교민 보호라는 고유의 업무를 게을리했다면 마땅히 비판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 한 구석에서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기에는 한국인들이 극우단체의 표적이 된 것은 꼭 현금 소지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 사람들에 대한 반감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깝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과 몽골과의 교류가 활발해면서 오히려 몽골인의 한국인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의 골은 점점 더 깊어가고 있는 듯 하다. 사진은 몽골 테를치 국립공원에서 연주하고 있는 몽골마두금합주단. /경향신문 자료사진

몽골 사람들은 원래 한국 사람에 대해 참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내가 처음 몽골에 간 1991년 무렵만 해도 분명히 그랬다. 한국인과 몽골인은 한 뿌리에서 나왔으니 잘 지내야 한다고 그럴 듯한 설명까지 늘어놓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호감은 확실히 같은 동아시아에 속한 중국인과 일본인에 대한 감정과는 차이가 있다. 무슨 특별한 이익도 없는데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무조건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덕분에 나는 대접도 잘 받고 한국에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좋은 시절도 잠깐 1990년대 중반 이후 한-몽 교류가 활발해지고 한국인들이 대거 몽골에 진출하면서 몽골인들의 한국에 대한 감정이 꼬이기 시작했다.

국내 언론에 자주 보도된 것처럼 울란바토르 시내를 질주하는 승용차 절반 이상이 한국 차다. 몽골을 찾는 외국 관광객 가운데도 한국 사람이 가장 많다. 몽골에 투자한 외국 업체도 회사 숫자로만 따지면 한국이 수위 그룹을 형성한다.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는 선교사도 숫자나 활동 반경에서 한국 출신이 가장 많고 가장 넓다. 당연하지만 1990년대 초 몇 십 명에 불과하던 교민 수도 1000여명으로 늘어났다. 다른 나라 교민에 비하면 턱없이 적지만 270여만 몽골 인구에 비하면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몽골 체류 한국인 중 절대 다수는 중소 상공인들이나 선교사 또는 선교 목적의 봉사단체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학교, 병원, 복지 시설을 건립하여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척박한 환경에 자본을 투자하여 막 시작된 몽골의 시장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선교사들의 공격적인 선교 활동이 불교의 나라에서 나고 자란 가난한 몽골인들의 마음에 상처를 안겨준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상공인들의 불법 탈법 행위는 기가 찰 정도다. 몽골에 퇴폐 유흥업소를 도입한 장본인들도 다름 아닌 우리 동포들이다. 그 주인들도 대부분 한국에서 간 사람들이다. 심지어 몇 년 전에는 한 대학 강의실에서 누드 사진을 찍다가 발각되어 몽골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몽골 정부에서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가라오케에 대한 일제 단속을 벌였다는 보도도 있다.

사랑이 미움으로 변해서일까? 나는 매년 몽골에 갈 때마다 한국 사람에 대한 반감을 피부로 느낀다. 이는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니다. 최근 몽골을 다녀왔다는 이주노동자 센터에서 일하는 한 활동가도 그렇게 보고하고 있다. 자신이 탄 택시 운전사들이 모두 한국인을 싫어하더라는 것이다. 한국인에게 반감을 가진 몽골인 중에는 한국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많다. 이유는 간단하다. 두들겨 맞고 욕먹고 비인간적인 대우에 대한 서러움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지금부터 정확히 84년 전인 1923년 7월5일이다. 그 당시 몽골의 국가수반인 보그드 칸에게 한 통의 청원서가 도착했다. 자신을 소련 거주 한인노동자연맹의 위원장이라고 소개한 최치언이라는 사람이 보낸 글이다. 사연은 소련에 사는 한인 3000명의 몽골 이주를 허락해달라는 내용이다. 몽골 정부는 처음에 이 청원을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모스크바 주재 대사에게 진상 파악을 지시하고 각료 회의까지 열어 사태에 신속하게 대처했다. 그러다 모스크바 주재 대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사건을 종결해버렸다. 소련의 압력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뿐 더 이상 자료가 없어서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몽골 각 기관 국립공문서 보관소에는 최가 올린 청원서 말고도 1920년대 몽골에서 살았던 한인에 관한 자료가 남아 있다. 대부분 일제의 압제를 피하여 중국이나 러시아를 떠돌다가 살길을 찾아 몽골에 간 사람들의 생활에 관한 기록이다. 주로 몽골에 귀화를 신청하거나 과태료 비용의 탕감을 요청하거나 호구지책으로 아편을 밀매하다가 적발되어 구속된 사람들이 선처를 청원하는 내용이다. 청원서에는 현지 몽골인들이 보증자로 등장한다. ‘몸이 다쳐 일을 못해 과태료를 마련하지 못했으니, 귀화만 허락해주면 국법을 준수하고, 추운 겨울이니 추방만을 면해주시기를’ 등 사연도 하나 같이 애절하다. 그들의 생활이 어땠을지 짐작할 만한 대목이다. 그중에는 더러 좋은 상전(몽골인)을 만나 그럭저럭 입에 풀칠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못된 주인의 구박과 굶주림에 허덕이다 제 명을 채우지 못하고 죽어간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천지가 개벽하여 80여 년 전 한인들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던 몽골인 후손들이 이제 돈벌이를 위해 한국에서 궂은일을 하고 있다. 물론 그 때 몽골 땅의 한인들과 지금 한국 땅의 몽골인들은 처지가 다르지만 먹고 살기 위해 남의 나라에서 살았거나 현재 살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하는 일도 현지 사람들이 꺼리는 3D 업종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아쉬운 사람들이라 별 도리가 없겠지만 두 나라 사람들이 시간을 사이에 두고 왜 그리도 똑같은 운명을 주고받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이 세상살인가 하는 묘한 생각마저 든다.

몽골인들이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오기 시작한 것은 한국인들이 본격으로 몽골에 들어가는 1990년대 중반부터다. 현재 한국 각지에서는 몽골 전체 인구의 1% 정도가 불법 또는 합법적으로 일하고 있다. 서울 동대문구 광희동 일대에 가면 아무 때나 몽골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 어느 한 건물은 말 그대로 한국 속의 작은 몽골을 방불케 한다. 그곳에 가면 음식점에서 미장원, 전화, 국제 우편물 취급소, 환전 등 몽골과 관련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몽골 세상을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현재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몽골 노동자 수는 다른 나라 노동자에 비하면 결코 많지 않다. 그러나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로 따지면 높은 편이고, 당연히 이들이 고국으로 보낸 돈은 몽골 경제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이주노동의 폐해도 적지 않다. 지금 한국에 와 있는 몽골인들은 전체 이주노동자 중에서 학력이 가장 높은 축에 속한다. 자기 나라에서 뭔가 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몽골에서 당장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렵고 구해봤자 임금이 낮아 그렇다고는 하나 지금 같은 추세는 몽골 장래를 위해 결코 바람직하지는 않다.

아무리 돈벌이라고 하지만 한국에서 생활하는 몽골 사람들의 삶은 고달프다. 이 땅의 모든 이주노동자들이 그렇듯이 몽골 친구들도 작은 공장이나 건설 현장 막일 또는 이삿짐센터 등에서 도우미 일을 한다. 대부분 몽골에서는 해보지도 생각해보지도 않은 일이다. 고달플 수밖에 없다. 사람대접은 고사하고 임금을 떼이는 일도 흔하고, 혹시 불법 체류자라면 불시에 들이닥치는 반속반의 눈을 피해야 하니 그 인생이 얼마나 팍팍하겠는가? 더구나 몽골 사람들이 한국에 오기 위해서는 상당한 돈을 들인다. 나는 그 메커니즘을 알 수 없지만 중간 브로커를 경유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벌써 오래 전이다. 나는 몽골을 공부하면서 잊을 수 없는 비극을 경험했다. 한밤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경기도 일산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음주 운전을 하여 큰 사고를 낸 몽골 노동자가 붙잡혀왔는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좀 와 달라는 부탁이었다. 급하게 택시를 타고 일산경찰서에 도착하자 남루한 옷을 입은 한 중년 남자가 하얗게 겁을 먹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한국에 온 지 1주일밖에 안 되는 쓰레기 처리장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 일이 끝나면 한국 노동자들과 함께 매일 술을 마셨다고 한다. 사고 당일도 술을 마시고 숙소로 돌아가는 차에 탔는데 한국 운전사가 물건을 사려고 잠깐 비운 동안 운전대를 만지다가 차가 전진하여 바로 앞의 승용차를 박살내 버렸다. 무면허에 음주운전이니 도리가 없었다. 구속되었다. 잘못을 했으니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나 그의 처지가 너무나 딱했다. 한국에 온 지 1주일, 그것도 거금을 주고 왔다가 고된 일에 시달리다 음주로 사고를 내고 철창 신세까지 지고 추방되었다. 그 사람 개인으로 보면 엄청난 비극이다.

그래서 글을 마치면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이 땅에서 일하는 몽골 노동자들에게 좀더 따뜻한 인심을 베풀어 보자고. 인간 평등 인권 등 거창한 구호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지금 한국의 몽골인들은 일제 때 시베리아를 떠돌던 한인들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 사람들의 후손이다. 따라서 그들은 선조들이 베푼 선행에 대한 보은을 향유할 권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 역시 이렇게 해야 과거 우리 동포들이 진 빚을 갚을 수 있다. 그래야 이 글 서두에 언급한 한국인에 대한 표적 테러도 사라질 것이다. 돌고 도는 것이 사람의 운명인데 100년 후 우리 후손들이 몽골에 가서 신세지지 않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평래 | 한국외국어대 연구교수·몽골사〉
[동아시아의 오늘과 내일](40)한국에 온 노동자들을 품어야하는 이유
-84년전, 몽골에 진 빚이 있다-

얼마 전 한 신문에서 몽골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몽골에도 외국인을 적대시하는 극우단체가 있는데 현금을 많이 지니고 다니는 한국인들이 주로 피해를 본다는 내용이다. 기자는 현지 교민의 입을 빌려 여러 피해 사례를 보고하면서 상황이 이런데도 대사관에서는 팔짱만 끼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사람을 때리고 금품을 뺏는 것은 물론 몹쓸 짓이다. 대사관도 교민 보호라는 고유의 업무를 게을리했다면 마땅히 비판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 한 구석에서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기에는 한국인들이 극우단체의 표적이 된 것은 꼭 현금 소지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 사람들에 대한 반감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깝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과 몽골과의 교류가 활발해면서 오히려 몽골인의 한국인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의 골은 점점 더 깊어가고 있는 듯 하다. 사진은 몽골 테를치 국립공원에서 연주하고 있는 몽골마두금합주단. /경향신문 자료사진

몽골 사람들은 원래 한국 사람에 대해 참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내가 처음 몽골에 간 1991년 무렵만 해도 분명히 그랬다. 한국인과 몽골인은 한 뿌리에서 나왔으니 잘 지내야 한다고 그럴 듯한 설명까지 늘어놓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호감은 확실히 같은 동아시아에 속한 중국인과 일본인에 대한 감정과는 차이가 있다. 무슨 특별한 이익도 없는데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무조건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덕분에 나는 대접도 잘 받고 한국에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좋은 시절도 잠깐 1990년대 중반 이후 한-몽 교류가 활발해지고 한국인들이 대거 몽골에 진출하면서 몽골인들의 한국에 대한 감정이 꼬이기 시작했다.

국내 언론에 자주 보도된 것처럼 울란바토르 시내를 질주하는 승용차 절반 이상이 한국 차다. 몽골을 찾는 외국 관광객 가운데도 한국 사람이 가장 많다. 몽골에 투자한 외국 업체도 회사 숫자로만 따지면 한국이 수위 그룹을 형성한다.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는 선교사도 숫자나 활동 반경에서 한국 출신이 가장 많고 가장 넓다. 당연하지만 1990년대 초 몇 십 명에 불과하던 교민 수도 1000여명으로 늘어났다. 다른 나라 교민에 비하면 턱없이 적지만 270여만 몽골 인구에 비하면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몽골 체류 한국인 중 절대 다수는 중소 상공인들이나 선교사 또는 선교 목적의 봉사단체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학교, 병원, 복지 시설을 건립하여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척박한 환경에 자본을 투자하여 막 시작된 몽골의 시장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선교사들의 공격적인 선교 활동이 불교의 나라에서 나고 자란 가난한 몽골인들의 마음에 상처를 안겨준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상공인들의 불법 탈법 행위는 기가 찰 정도다. 몽골에 퇴폐 유흥업소를 도입한 장본인들도 다름 아닌 우리 동포들이다. 그 주인들도 대부분 한국에서 간 사람들이다. 심지어 몇 년 전에는 한 대학 강의실에서 누드 사진을 찍다가 발각되어 몽골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몽골 정부에서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가라오케에 대한 일제 단속을 벌였다는 보도도 있다.

사랑이 미움으로 변해서일까? 나는 매년 몽골에 갈 때마다 한국 사람에 대한 반감을 피부로 느낀다. 이는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니다. 최근 몽골을 다녀왔다는 이주노동자 센터에서 일하는 한 활동가도 그렇게 보고하고 있다. 자신이 탄 택시 운전사들이 모두 한국인을 싫어하더라는 것이다. 한국인에게 반감을 가진 몽골인 중에는 한국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많다. 이유는 간단하다. 두들겨 맞고 욕먹고 비인간적인 대우에 대한 서러움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지금부터 정확히 84년 전인 1923년 7월5일이다. 그 당시 몽골의 국가수반인 보그드 칸에게 한 통의 청원서가 도착했다. 자신을 소련 거주 한인노동자연맹의 위원장이라고 소개한 최치언이라는 사람이 보낸 글이다. 사연은 소련에 사는 한인 3000명의 몽골 이주를 허락해달라는 내용이다. 몽골 정부는 처음에 이 청원을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모스크바 주재 대사에게 진상 파악을 지시하고 각료 회의까지 열어 사태에 신속하게 대처했다. 그러다 모스크바 주재 대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사건을 종결해버렸다. 소련의 압력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뿐 더 이상 자료가 없어서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몽골 각 기관 국립공문서 보관소에는 최가 올린 청원서 말고도 1920년대 몽골에서 살았던 한인에 관한 자료가 남아 있다. 대부분 일제의 압제를 피하여 중국이나 러시아를 떠돌다가 살길을 찾아 몽골에 간 사람들의 생활에 관한 기록이다. 주로 몽골에 귀화를 신청하거나 과태료 비용의 탕감을 요청하거나 호구지책으로 아편을 밀매하다가 적발되어 구속된 사람들이 선처를 청원하는 내용이다. 청원서에는 현지 몽골인들이 보증자로 등장한다. ‘몸이 다쳐 일을 못해 과태료를 마련하지 못했으니, 귀화만 허락해주면 국법을 준수하고, 추운 겨울이니 추방만을 면해주시기를’ 등 사연도 하나 같이 애절하다. 그들의 생활이 어땠을지 짐작할 만한 대목이다. 그중에는 더러 좋은 상전(몽골인)을 만나 그럭저럭 입에 풀칠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못된 주인의 구박과 굶주림에 허덕이다 제 명을 채우지 못하고 죽어간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천지가 개벽하여 80여 년 전 한인들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던 몽골인 후손들이 이제 돈벌이를 위해 한국에서 궂은일을 하고 있다. 물론 그 때 몽골 땅의 한인들과 지금 한국 땅의 몽골인들은 처지가 다르지만 먹고 살기 위해 남의 나라에서 살았거나 현재 살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하는 일도 현지 사람들이 꺼리는 3D 업종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아쉬운 사람들이라 별 도리가 없겠지만 두 나라 사람들이 시간을 사이에 두고 왜 그리도 똑같은 운명을 주고받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이 세상살인가 하는 묘한 생각마저 든다.

몽골인들이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오기 시작한 것은 한국인들이 본격으로 몽골에 들어가는 1990년대 중반부터다. 현재 한국 각지에서는 몽골 전체 인구의 1% 정도가 불법 또는 합법적으로 일하고 있다. 서울 동대문구 광희동 일대에 가면 아무 때나 몽골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 어느 한 건물은 말 그대로 한국 속의 작은 몽골을 방불케 한다. 그곳에 가면 음식점에서 미장원, 전화, 국제 우편물 취급소, 환전 등 몽골과 관련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몽골 세상을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현재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몽골 노동자 수는 다른 나라 노동자에 비하면 결코 많지 않다. 그러나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로 따지면 높은 편이고, 당연히 이들이 고국으로 보낸 돈은 몽골 경제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이주노동의 폐해도 적지 않다. 지금 한국에 와 있는 몽골인들은 전체 이주노동자 중에서 학력이 가장 높은 축에 속한다. 자기 나라에서 뭔가 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몽골에서 당장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렵고 구해봤자 임금이 낮아 그렇다고는 하나 지금 같은 추세는 몽골 장래를 위해 결코 바람직하지는 않다.

아무리 돈벌이라고 하지만 한국에서 생활하는 몽골 사람들의 삶은 고달프다. 이 땅의 모든 이주노동자들이 그렇듯이 몽골 친구들도 작은 공장이나 건설 현장 막일 또는 이삿짐센터 등에서 도우미 일을 한다. 대부분 몽골에서는 해보지도 생각해보지도 않은 일이다. 고달플 수밖에 없다. 사람대접은 고사하고 임금을 떼이는 일도 흔하고, 혹시 불법 체류자라면 불시에 들이닥치는 반속반의 눈을 피해야 하니 그 인생이 얼마나 팍팍하겠는가? 더구나 몽골 사람들이 한국에 오기 위해서는 상당한 돈을 들인다. 나는 그 메커니즘을 알 수 없지만 중간 브로커를 경유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벌써 오래 전이다. 나는 몽골을 공부하면서 잊을 수 없는 비극을 경험했다. 한밤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경기도 일산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음주 운전을 하여 큰 사고를 낸 몽골 노동자가 붙잡혀왔는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좀 와 달라는 부탁이었다. 급하게 택시를 타고 일산경찰서에 도착하자 남루한 옷을 입은 한 중년 남자가 하얗게 겁을 먹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한국에 온 지 1주일밖에 안 되는 쓰레기 처리장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 일이 끝나면 한국 노동자들과 함께 매일 술을 마셨다고 한다. 사고 당일도 술을 마시고 숙소로 돌아가는 차에 탔는데 한국 운전사가 물건을 사려고 잠깐 비운 동안 운전대를 만지다가 차가 전진하여 바로 앞의 승용차를 박살내 버렸다. 무면허에 음주운전이니 도리가 없었다. 구속되었다. 잘못을 했으니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나 그의 처지가 너무나 딱했다. 한국에 온 지 1주일, 그것도 거금을 주고 왔다가 고된 일에 시달리다 음주로 사고를 내고 철창 신세까지 지고 추방되었다. 그 사람 개인으로 보면 엄청난 비극이다.

그래서 글을 마치면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이 땅에서 일하는 몽골 노동자들에게 좀더 따뜻한 인심을 베풀어 보자고. 인간 평등 인권 등 거창한 구호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지금 한국의 몽골인들은 일제 때 시베리아를 떠돌던 한인들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 사람들의 후손이다. 따라서 그들은 선조들이 베푼 선행에 대한 보은을 향유할 권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 역시 이렇게 해야 과거 우리 동포들이 진 빚을 갚을 수 있다. 그래야 이 글 서두에 언급한 한국인에 대한 표적 테러도 사라질 것이다. 돌고 도는 것이 사람의 운명인데 100년 후 우리 후손들이 몽골에 가서 신세지지 않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평래 | 한국외국어대 연구교수·몽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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