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 종교법 >

러시아 연방 법무기관들에서의 종교단체들의 국가 등록에 관한 신청서의 심사 규칙
본 규칙은 1998년 2월 16일 러시아 연방 법무성 령 제19호에 의해 확정되었음

I. 총칙
   1. 본 규칙은 1997년 9월 26일자의 양심의 자유와 종교 연맹들에 관한 러시아 연방법
(러시아 연방법 전집 제39호 4465조) - 이하 법 (종교법)으로 칭한다 - 및 러시아 연방
법률의 다른 법규들에 기초하여 작성되었으며, 러시아 연방 법무기관들에서 종교단체의
국가 등록에 관한 신청서 심사절차를 규율하고 있다.
   2. 러시아 연방의 법무 기관 - 러시아 연방의 법무성과 러시아 연방 주체들의 법무기관
들은(이하 등록기관들이라 칭한다) 종교법 11조 1항에 의하여 종교단체들의 국가 등록을
수행한다.
   러시아 연방 법무성은 2개 이상의 러시아 연방 주체들의 영역에서 지방 종교단체들을
두고 있는 중앙 종교단체들과 러시아 연방 법무성에 등록이 된 중앙 종교단체들에 의해
조직된 종교 기관 및 종교단체들을 등록한다.
   러시아 연방 주체들의 법무 기관들은 지방 종교단체들, 러시아 연방 주체의 동일한
지역내에서 소재하고 있는 지방 종교 단체들로부터 성립된 중앙종교단체들, 그리고 역시
러시아 연방 주체의 법무 기관에 등록된 중앙종교단체들에 의해 조직된 종교기관들 및
종교 단체들을 등록한다.
   3. 본 종교법이 발효되기 전, 자신의 정관들을 법무 기관들에 등록했던 종교단체들은
본 법의 요구에 따라 1999년 12월 31일까지 수행되어야만 하는 국가 등록을 해야 한다.
   종교 단체들의 국가 재 등록에 관한 신청서의 심사는 종교단체들의 국가 등록과 동일한
절차 및 동일한 기간으로 수행된다. 재 등록을 실행치 아니한 종교단체들은 지정된 기간이
경과 후 등록기관의 신청에 의해 재판 절차에 따라 해산될 수 있다.
   종교법 제27조 3항에 의해 종교단체들의 관계에서 본 법에 지시 된 종교 단체들의
해산이나 종교단체들의 활동금지 사유를 지니고 있는 종교단체들의 등록은 실시 되지
아니한다.
   위의 사유에 따라 재 등록을 거부할 시 등록 기관은 법원으로 자료들을 송부한다.
15년 이상 기간의 해당영역에서 그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증명서나, 혹은 중앙종교
단체들에그들의 가입을 확인하는 증명서를 소지하지 아니한 종교단체들은 지정된
15년 기간이 도래할 때까지 그들의 매년 등록의 조건하에 법인의 권리들을 갖는다.
II. 종교 단체들의 국가 등록을 위한 서류 제출 절차
   4. 지방종교단체들의 국가등록을 위해 그 설립자들은 해당 등록기관으로 다음
서류들을 제출한다.
   4-1 본 규칙 별표 1호에 따라 정해진 형식의 국가등록 신청서
   4-2 종교단체 설립자들의 인명부 - 국적, 거주지, 생년월일의 표기와 함께
   4-3 종교법 10조의 요구에 부합하는 종교 단체 정관 2부 - 2부의 정관은 타이핑한
형태로 동일하게 되어야 하고 번호가 부여 되어야 하며 지도 기관(지도자)에 의해
인증되어야만 한다.
   4-4 (다음과 같은) 정보를 지니고 있는 창립 총회 회의록 - 회의 일시 및 개최 장소,
회의 참가자들과 종교단체 작업기관의 수적 인적 구성, 주요 결의 사항(종교 단체의
설립, 정관 채택, 지도 기관들의 선출에 관한), 결정들에 관한 투표 결과들
   4-5 지방자치단체에 의해 발행되는 해당된 지역에서 15년 이상 기간동안 종교그룹의
존재 확인 증명서, 혹은 중앙종교 단체의 지도부에 의해 발급되는 그 종교그룹의 중앙
종교단체들로의 가입을 확인하는 증서
   4-6 기본 교리 및 이에 일치한 실제에 관한 정보 - 그 속에는 종교 및 그 종교단체의
발생 역사, 그 종교단체의 활동 형태 및 방법, 가정과 결혼 및 교육에 대한 태도, 해당
종교 신도들의 건강에 관한 태도의 특성, 신도들의 시민적 권리와 의무에 관계에서
종교단체 회원들과 직원들을 위한 제한에 관한 정보들이 포함된다.
   4-7 설립되는 종교단체의 주소지(법적 주소)를 확인하는 증서. 종교단체의 주소지와
법적 주소가 같지 아니한 경우에는 역시 종교단체의 사실적인 주소가 명시된다.
   4-8 만약 설립되고 있는 종교단체의 최고 지도기관(본부)이 러시아 연방 영역 외에
존재하고 있는 경우에는 그 종교단체 소재국의 국가 기관에 의해 확인된 외국 종교단체의
정관, 혹은 그 밖에 가장 중요한 문서가 추가적으로 제출된다.
   5. 중앙종교단체들과 중앙종교단체들에 의해 설립되고 있는 종교단체들의 국가등록을
위해 등록기관으로 (다음서류가) 제출된다.
   5-1 본 규칙 4조 1항에 규정된 형식에 따른 국가등록 신청서
   5-2 종교단체설립자들의 명부, 종교단체들의 명칭, 주소지, 지도기관(지도자) 및
등록자료
   5-3 공증으로 확인된 정관 및 설립자들(설립자)의 국가등록증명서 사본.
만약 설립자들(설립자)이 설립되고 있는 종교단체의 국가등록을 신청하고 있는
그 등록기관에 등록되었다면 본 항 3에 지시된 서류들은 제출되지 아니한다.
   5-4 종교법 10조에 규정된 요구들에 부합되며 그 설립자들(설립자)에 의해
확인되어진 설립되고 있는 종교단체의 정관 2부
   5-5 설립자(설립자들)의 직권기관의 적합한 결정
   5-6 설립되고 있는 중앙종교단체의 조직으로 가입하고 있는 세 개이상의 지방
종교단체들의 국가등록증 사본 및 정관의 첨부와 더불어 설립중인 중앙단체조직
으로 가입하고있는 종교단체들에 관한 정보
   5-7 설립중인 종교 단체의 지도기관의 소재지(법적 주소)를 확인하는 증서
   5-8 만약 설립중인 종교단체의 최상급 지도기관(본부) 이 러시아 연방 영역
외에 존재할 경우 본 규칙 4조 8항에 규정된 서류들이 제출된다.
   5-9 서류들과 다른 자료들은 러시아어 - 러시아 연방국어("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민족언어들에 관한" 러시아 소비에트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법률 - 러시아 소비에트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인민대의원 대회 및 최고
소비에트 대회 통보 1991년 50호 1740조)로 제출된다.
   6. 규정된 절차에 의해 인증된어진 외국단체 및 외국기관으로부터 발행되는
서류들은 러시아어 번역본과 더블어 소재지 국가의 국어(공용어)로 제출된다.
   만일 러시아 연방과 타국들간의 조약이나 협정들에 의해 별도로 규정된바
없으면 서명의 사실성, 문서서명자의 자격, 그리고 문서에 존재하는 인장 및
스탬프의 사실성을 확인하는 증명 특별직인이 그 서류들 위에 실재시 외국 -
1992년 러시아 연방이 가입한 1961년의 헤이그 협약 참가국들 - 의 단체나
기관들로부터 발행되는 문서와 증서들은 심사를 위해 접수된다.
   만일 러시아 연방과 타국간의 유효한 조약이나 협정에 의해 별도로 규정된
바가 없으면 외국에 있는 러시아연방의 영사기관들이나 러시아 연방 외무성
영사국이 수행하는 영사증명의 실재시 1961년 헤이그 협약 비참가국인 외국의
단체나 기관에서 발행되는 공식문서나 증서들은 심사를 위해 접수된다.
   독립국가연합 소속 국가들로부터 발행되는 공식문서나 증서들은 만약 그
문서나 증서들이 기관이나 혹은 그 권한내에서 전권을 위임받은 자에 의해
작성되고 증명되며 규정된 형식에 따라 문장인으로 인증되면 어떤 특별확인
없이 심사를 위해 접수된다.( 1993년 러시아 연방에 의해 서명된 민사, 가사 ,
형사사건에 있어서 법률적 원조 및 법률적 관계들에 관한 민스크협약)
III 종교단체들의 국가등록에 관한 신청서의 심사절차
   7. 종교단체들의 국가 등록신청서 및 설립문서들은 종교단체의 지도자들에
의해 등록 기관으로 제출되거나 혹은 이에 관한 전권을 부여받은 자들에 의해
직접 혹은 통지서및 동봉물 목록과 함께 우편 발송에 의해 제출된다.
   8. 국가 등록을 위해 접수된 종교단체들의 문서들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심사되며 실무자에게 이송된다. 서류들이 등록기관으로 접수된 날이 설립
문서들이 제출된 날이다.
   등록기관은 제출된 서류들의 사실성을 확인해야 하며 필요한 경우 서류의
신빙성에 관한 조사를 실시할 권리가 있다.
   9. 종교법 11장9항에 따라 신청자(신청자들)가 본법에 규정된 요구들을 준수
하지 아니한 경우 등록기관은 신청자(신청자들)의 신청서에 대하여 심사하지
않고 통지와 함께 신청서를 보류할 권리가 있다. 이때는 등록기관으로 제출된
문서들은 종교단체로 반송된다.
   10. 종교법 11조 8항에 따라 중앙종교단체에 의해 설립되거나 혹은 중앙종교
단체에서 발급하는 확인서의 기초 위에서 설립되는 종교단체의 국가등록에 관한
신청서는 제반 구비서류의 제출 일로부터 한 달 기간 내에 심사된다.
    그 외의 경우에는 국가 종교학적 감정의 실시를 위해 등록기관은 문서심사의
기간을 6개월까지 연장할 수 있다. 국가종교학적 감정 실시절차는 러시아 연방
정부에 의해 제정된다.
   11. 신청서의 심사결과에 따라 등록기관은 종교단체의 국가 등록여부를 결정한다.
   12. 종교단체의 국가 등록에 관한 결정은 결론형식으로 형성되며 등록기관의
지시에 의하거나 등록기관의 전권을 부여받은 공무원에 의해 공표 된다.
   13. 본 규칙 별표2호에 따라 작성된 형식의 국가등록증과 등록기관에 의해
인증된 철한 상태의 정관 1부가 등록된 종교단체에 발급된다. 2부의 정관 각
페이지에는 종교단체의 명칭 등록 번호, 등록일자를 나타내는, 특별 직인이
날인된다.
   종교단체의 정관2부는 철해지며 문서의 마지막장의 이면에 전권을 부여받은
자의 서명이나 등록기관의 문장인에 의해 인증된다. 종교단체의 정관의 다른 한
부와 종교단체의 국가등록증 사본은 등록기관에 보관되는 등록 문서로 철하여
진다.
   14. 종교단체의 국가 등록에 관한 결정의 근거 위에 종교단체에게 등록 번호가
부여되며 종교단체는 그 등록번호와 함께, 본 규칙 별표 3호와 같은 형태로 등록
기관이 관리하고 있는 국가 단일 법인등기부에 등재된다.
   그리고 종교단체의 국가등록에 관한 정보들은 러시아 연방 법무성에 의해 제정된
기간과 형태에 따라 러시아 연방 법무성으로 송부한다. 국가 단일 등기부에 포함되는
문서의 변경의 경우 종교단체는 종교법 11조 12항에 의거 그런 변경 일로부터 한달
내에 등록기관에 그 사실을 통보해야 한다.
   15. 종교법 12조 1항에 따라 종교단체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국가 등록이
거부 될 수 있다.
   종교단체의 목적 및 활동이 러시아 연방헌법과 러시아 연방 법률에 위반 된
경우 - 법률의 구체적인 조항들의 인용과 함께 설립되고 있는 종교단체가
종교적인 것으로 인정되지 아니할 때
   정관이나 다른 제출문서가 러시아 연방 법률의 요구에 부응하지 아니하거나
그 서류들 속에 신빙성을 지니지 못할 경우
   동일한 명칭의 종교 단체가 이미 국가 단일 등기부에 등록되었을 경우
   종교단체의 설립자(설립자들)가 권한이 없을 경우
   16. 종교단체의 국가 등록을 거부 할 경우에는 서신 형태로 거부사유의 명시와
함께 신청자(신청자들)에게 그 결정에 대해 알린다.
   종교단체의 국가 등록 거부는 그 설립의 비 합목적성의 동기에 의해서는 허용
되지 아니한다. 이런 경우 국가 등록으로 제출된 서류들은 오직 종교단체 신청서의
실재시 종교단체로 반송된다. 이때는 국가등록 거부 시에 존재했던 모든 서류의
복사 본이 등록 기관에 남겨진다.
   17. 종교단체의 국가 등록 거부는 등록 거부를 초래하는 사유의 제거를
조건으로 국가등록기관에 재차 서류 제출을 위한 방해가 되지 않는다.
   등록기관으로 제출된 종교단체 등록의 재 신청서에 관한 심사 및 그 재 신청서에
관한 결정은 본 규칙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행해진다.
   18. 등록 기관의 종교단체의 국가등록거부 및 등록 회피는 법원으로 제소
될 수 있다.
   19. 종교법에 근거하지 아니한 종교단체의 국가 등록 거부를 법원이 인정한
경우 법적 효력을 발한 법원 판결의 이행은 법률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수행된다.
   20. 종교단체 정관의 변경 및 추가는 종교 단체 등록을 위해 종교법 11조
11항에 의해 규정된 절차에 따라 수행되는 국가 등록에 해당된다.
   21. 종교단체 명칭 및 행정적인 관할의 변경을 초래하는 종교단체 정관의 변경
및 추가 사항의 국가 등록의 경우에는 종교단체에게 종전 등록 번호와 함께 국가
등록에 관한 새로운 증명서가 교부된다. 이전에 교부된 국가등록증과 정관은 무효가
되며 등록기관으로 반납되어야 한다.
   22. 종교법 8조 9항에 의해 종교단체는 매년 등록기관으로 국가 단일 법인
등기부에 포함되고 있는 정보들의 제시와 함께 자신의 활동의 계속성에 대해
알려야 한다.
   지방종교단체에 대한 지정 정보들은 해당 중앙 종교단체에 의해 등록기관으로
제출될 수 있다. 3년 기간동안 지시된 정보들의 미 제출은 자신의 활동을 중지한
종교단체로의 확인에 관한 등록기관의 소송 제기 사유가 된다.
VI. 종교단체의 국가 등록에 관한 취소
   23. 종교법 14조 1항에 따라 다음과 같이 종교단체는 해산 될 수 있다.
   * 종교 단체 설립자들이나 종교단체 정관에 의해 그 전권을 부여받은 기관의
결정에 따라
   * 종교법에 규정된 경우에는 법원의 판결에 따라
   24. 종교단체의 해산시 등록기관은 국가 단일 법인 등기부로부터 종교단체
제명에 대한 명령을 발한다.
   등록기관에 의해 확인된 종교 단체의 국가 등록 증명서와 종교단체의 정관은
회수되며, 등록기관에서 보존되고있는 등록문서 자료로 합해진다.
V. 증명서 등본 발급에 관한 신청서의 심사
   25. 종교단체의 국가등록증 및 종교단체의 정관의 원본을 분실한 경우
등록기관은 그 등본을 발급 할 수 있다.
   26. 종교단체의 국가 등록증 그리고(혹은) 종교단체의 정관의 등본 발급을
위해 등록기관으로 다음과 같은 서류가 제출된다.
   * 종교단체의 지도자에 의해 서명된 신청서
   * 증명서 원본 분실의 사실에 관한 종교단체 지도기관의 결정
   이 증명서의 분실을 확인하는 조사 자료, 문서, 증명서 및 다른 서류들
   27. 종교단체의 국가 등록 증명서 및 정관의 등본 발급에 관한 신청서는
1개월 내에 등록기관에 의해 심사된다. 필요한 경우 분실 사실의 신빙성에
관한 조사를 실시한다.
   신청서 심사 결과에 따라 적합한 결정이 이루어진다.
   28. 신청서에 따라서 증명서 등본 발급의 여부가 결정될 수 있다.
   증명서 등본 발급에 관한 결정은 등록기관의 지시 혹은 법무기관의 전권을
부여받은 공무원의 결정에 의해 공표 된다.
   증명서 발급 거부의 경우 거부 사유의 명시와 함께 서신 형식으로 이  
대해 신청자에게 알린다.
   29. 등록문서의 등본 작성시 그 표면에 "등본"이라는 표시가 된다.
   발행된 증명서 등본의 사본 그리고 역시 등본 발급을 위해 기초가 되는
자료들은 등록문서 자료로 합해진다.
VI. 종교단체의 국가 등록에 대한 자료의 형성과 보존
   30. 종교단체의 국가 등록에 관한 자료들은 국가 등록을 위해 제출된
모든 문서들과 그리고 역시 종교단체 등록 증명서 사본이 존재되어야
하는 별도의 등록 문서로 작성되어야 한다.
   해당 종교단체에 따라 추후 모든 교신서, 종교단체의 정관적인 활동에
관한 조사 증명서, 종교단체 활동에 관한 매년 정보 및 그 종교단체에
관계된 다른 자료들은 등록 문서로 합해진다.
   등록 문서의 목록은 번호가 부여되며 그 속에 들어 있는 문서들의
표지 목록과 함께 문서철로 된다.
   31. 등록 문서들은 등록 기관에서 보존된다. 그리고 이는 항구 보존
문서이다. 등록 문서 사본과 고 증서의 발급 그리고 역시 연구자들의
그 곳으로의 입장 허락은 규정된 절차에 따라 실시된다.
*** 아래 페이지의 별첨 1, 2, 3,호 부록 참고
별표 제 1 호
러시아 연방 법무성령에 의해 확정된 러시아 연방 법무기관 들에서의
종교단체 국가 등록 에 관한 신청서의 심사규칙(1998년 2월 16일
제 19호)에 따른 것임. 등록기관의 명칭 신청서 신청자들은 _ 1(시민 -
지방 종교 단체 설립자들 혹은 _ 1 중앙 종교 단체의 지도자들의 성명,
부칭) 국가 등록을 위해 제출한다. _ 1(종교단체의 명칭) 1 부록에 따른
정관 및 다른 문서들 종교 단체의 설립 일자 종교 단체의 조직 법적인
형태 신조 중앙 종교 단체 소속 _ 1(중앙 종교 단체 명칭) 종교 단체
소재지 _ 1(주소) 종교 단체의 법적 주소 _ 1(주소, 전화, 팩스) 종교 단체
등록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은 자 1(성명,부칭,주소,전화) 설립자들의 성
및 서명 신청서 제출 일자
별표 제 2 호
러시아 연방 법무성령에 의해 확정된 러시 아 연방 법무기관들에서의
종교단체 국가 등록에 관한 신청서의 심사규칙 (1998년 2 월 16일
제 19호)에 따른 것임. 러시아 연방 법무성 (등록 기관의 명칭) 종교
단체의 국가 등록증 . . 199 년 N 종교단체의 명칭 신조 소속중앙종교
단체 지도기관 소재지(법적주소) 직 인 서 명
별표 제 3 호
러시아 연방 법무성 령에 의해 확정된 러시 아 연방 법무기관들에서의
종교단체 국가 등록에 관한 신청서의 심사규칙(1998년 2월 16일 제 19호)
에 따른 것임. 등록된 법인-종교 단체의 국가 등기부 1 (등록 기관의 명칭)
종교 단체의 명칭 등록 일자 등록 번호 종교 단체의 형태 신조 소속 중앙
종교 단체 종교 단체의 지도 기관 종교 단체의 지도자 법적 주소 전화 팩스
번역 : 모스크바 한인 선교사회, 1998년 3월.

 

 

러시아 - 몽골 Care-workshop 기행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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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 6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
시베리아의 3개 지역 및 몽골의 울란바토르를
방문하여 선교사님들 care-workshop을 하면서
느낀 점을 적은 글입니다.
선교사 Care 를 위한 책의 원고이기도 합니다.
도움이 되실길 바라며,
2005, 성탄절을 앞두고
임경심드림

 

 

알타이 선교회 초청으로 2005년 6월 30일 - 7월 14일까지 러시아 극동지역인 블라디보스톡과 시베리아 지역의 몇몇 도시 그리고 몽골의 울란바토르를 방문하여 선교사님들 워크샵을 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전혀 생소한 나라였기에 선교사님들이 어떤 형편에 계실지 그래서 정확하게 무엇으로 도와드려야 할지 알지 못한 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며 몇몇 강의안과 검사 도구들을 챙겨 출발을 하였다.

 

서울에서 2시간도 되지 않는 거리에 이토록 색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공항에서 나오면서 느끼는 것이 말 그대로 슬라브계인 러시아인들은 첫눈에 보기에도 눈부실 정도의 타고난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젊은 여성들은 백옥 같은 흰 피부에 훤칠한 키 , 조그마한 얼굴에 분명한 이목구비, 걸어 다니는 수퍼 모델들 같았다. 행동거지는 다른 서구나라와는 좀 다르게 수동적이어 보이면서 다소 보수적이어서 더욱 우리 눈에는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 통역을 통해 러시아 자매들에게 말을 걸면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고개를 숙이거나 얼굴이 빨개지거나 하면서도 자신들의 느낌이나 생각을 조리 있게 표현을 잘 했다. 그런데 이런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일 뿐, 이들 안에는 우리가 상상 못할 민족적 자부심, 자존감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2차 대전당시 온 세계를 점령하다시피 했던 독일을 유일하게 이긴 나라, 특히 이 기념일은 온 나라의 제일 큰 경축일이며 금년에는 50주년이었는데 강대국 정상들이 다 초청이 되어져 와서 성대하게 기념식을 하였다고 하며 그런 것을 온 나라에 중계하였다. 그런 것을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라면서 자긍심을 키우게 한다고 한다.

 

그리고 세계사 속에 나오는 문학가, 음악가, 미술가 등 많은 예술가들을 배출한 나라로써 굳이 이념을 떠나 타민족에 대한 우월감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인지 경제적인 이유에서인지 외국 관광객들을 배려한 어떠한 서비스도 없었다. 배려는 고사하고 트집만 잡지 말았으면 하는 심정이 생기기까지 했다. 한국에서 비자 받을 때 방문하겠다고 허락받은 도시이외의 곳을 가게 되면 불법여행자가 되는 것이었다. 또 숙소도 반드시 나라에서 정해진 곳 중에서 선택을 하여야 하고 그곳 인증을 받아야 했다. 사회주의국가의 강한 기운을 느꼈다. 우리 일행도 블라디보스톡을 떠날 때 불시 검문을 받고 비행기 이륙시간에 임박할 때까지 체류증이며 머문 곳의 확인 등을 검사받기도 하였다.

이런 땅에서 이런 사람들에게 한국인으로써 선교할 때 얼마나 힘들까하는 느낌이 강하게 마음에 와 닿았다. 더군다나 러시아 국교는 러시아정교회인데 개신교를 거의 이단시해서 개신교도들이나 선교사들이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인종적, 민족적, 문화적, 장벽을 넘어 블라디보스톡에서 만난 한국선교사님들은 러시아인 여인들을 처럼 학생들을 자식처럼 친밀하게 더불어 지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접했다. 참으로 존경스럽기만 했다.

도착한 다음날 저녁 주로 부인선교사님들이 한국선교사님이 운영하시는 교회에 12명 정도 모였다. 우선 탈진, 스트레스 등을 알 수 있는 간단한 검사부터 시작하고 나서 그 내용이나 결과가 의미하는 바들을 설명과 함께 돌아가면서 자신의 이야기들을 하도록 하였다. 이 분들은 그 결과가 자신들을 이해해 주는 것이라고 느끼면서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과정들을 생각해 보며 그간 서로 기도만 해오던 아픔들을 털어 놓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그것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가 겪고 있었다는 사실에 매우 위로를 받고 격려를 받았으며 또 서로 당신은 매우 자신감 있고 별 문제없어 보였는데 그런 고통이 있었냐면서 내 자신이 무슨 말을 할 것도 없이 그들 스스로 문제들을 이해하고 해결점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 내가 한 역할 이었다.

 

부인 선교사들에게서 흔히 있는 어려움은 실질적으로 선교사역이라거나 전도는 앞장서서 매우 적극적으로 하는데 비해서 선교 팀이나 개척되는 교회에서의 위치나 인정은 매우 낮아 자기정체감의 위기 또는 갈등이 많았다. 대부분의 선교사부인들은 국내에서는 매우 적극적으로 사역에 참여하던 분들이고 단기선교 등을 통해 선교에 부르심을 사역에 있어서 공적인 역할, 또는 의사결정권 등이 남편 선교사들에게 편중되면서 오는 갈등은 대부분 부부갈등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는 여성이 매우 기득권을 갖고 있는 나라여서 이런 우리나라 정서적 갈등이 상대적으로 심각하게 여겨지는 것 같았다. 여기에 참여했던 대부분이 다음에는 꼭 부부동참 워크샵을 개최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또한 1년 내내 습도가 높고 기후가 흐리며 일조량이 적은데다 스트레스 상황이 심각하여서 인지 약간의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분들도 꽤 되었다. 또 이런 압박을 표현하지 못해서 인지 신체화 전환증세도 많이 있었다. 이런 것들에 대한 여러 상식적이고 필요한 지식들도 전해 드렸지만 일시적이어서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구심이 생겼다.

이곳은 북극과 가까워 필자가 방문한 시기가 백야현상이 일어나는 때였다. 강의를 오후에 시작하여 저녁 7시 정도까지 였는데 아무리 해도 너무 밖이 너무 밝은 것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니 밤 11시였다.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내 자신이 생각의 전환이 되지 않았다. 시간을 지키지 못한 것,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것, 이렇게 환한 밤중이 있다는 것, 왜 이들은 알려주지 않았을까 등등 잠깐 사이에 너무도 많은 스트레스가 몰려 왔다. 그런데 이들은 시간이 넘어가는 것을 알았지만, 필요한 시간이라고 느꼈고 또 내가 알면서도 더 해준다고 여겨서 고맙게 생각했고 그래서 아무도 미동을 하지 않고 그냥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들은 이런 실수 또는 스트레스가 한 두가지가 않일텐데 .. 나의 실수를 내가 어떻게 대하는가의 모습 자체가 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강의요 학습이려니 생각하며 러시아에서의 소중한 타문화 경험으로 간직하기로 하였다.

 

블라디보스톡에서 6시간의 비행을 하여 그 거대한 러시아 땅의 정중앙이며 시베리아 지역의 중심도시인 노보시비리스크에 도착했다. 그곳은 러시아의 정중앙을 표시하는 시계탑이라든가 그 위치에 있는 정교회 건물 등이 명물이었으며 그 지역 사람들은 그런 자부심이 매우 강했다. 그곳에서는 공항에서 나오는 것부터 난항을 겪었다. 여객기가 국내선이어서도 그랬지만 어떤 안내방송도 영어가 없었다. 우리는 공항 한가운데서 새벽 5시쯤 도착을 했는데 버스가 두 대가 와 있었다. 첫 번 버스가 다 차서 우리는 두 번째 버스를 타고 입국장까지 갔다. 가서 아무리 찾아도 밖으로 나가는 게이트가 없는 것이었다. 직원들에게 손짓 발짓해도 통하지 않았다. 영어하는 직원에게 데려다 달라고 해 보아도 우리 티켓을 보여주고 나가게 해달라고 해도 아무도 상관을 안했다.

 

그러면서 1시간도 뱅뱅 돌다가 잘못하면 마중 나온 분도 못 만나고 국제 미아가 되겠다 싶었다.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건물 밖으로까지 나와서 다시 헤매다가(그래도 왜 그러는지 검문하는 경찰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짐이 들락거리는 gate에서 우왕좌왕하는데 한국 사람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그 분은 우리를 마중 나오신 선교사님이었다. 너무도 놀랐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었는지.. 서로 놀라서 사정을 알고 본 즉, 우리가 타려 했던 버스 중 첫 번째 버스는 출입국장으로 가는 것이었고 우리가 탄 두 번째 버스는 이곳을 경유지로 온 사람들이 타고 가서 다른 비행기로 갈아 타는 곳으로 가는 버스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내렸던 곳에 입국서비스가 없었다. 이 분은 우리가 나오기를 목이 빠지라 기다리다가 간혹 그런 실수를 한 사람을 기억해 내고 혹시나 하고 우리가 있던 장소를 왔다가 그래도 없어서 밖으로 나와 집에 가려던 참에 왠 동양인들이 힐끗 보여 말을 걸었던 것이다.

 

그 시간에 그 장소에 없었다면 도대체 어떤 일을 겪어야 했을지 아찔하다. 주님의 도우심이었다. 우리 일행은 그야말로 탈진이 되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빨리 고향땅으로 가고 싶은 생각만이 간절했었다. 이런 잠깐의 여행도 이러니 하물며 이곳에 살면서 사역을 해야하는 선교사님들은 뭐라 말할 수 있을까... 러시아어로 직원들에게 마구 말하면서 우리 짐을 찾아 주시던 선교사님이 왜 그리도 대단하고 존경스러워 보이던지 몰랐다.

이곳에서도 부인선교사들이 모여 워크샵을 열었는데 그들과의 워크샵전에 내 자신부터 추슬러야 했으므로 좀 정신이 없었다. 이 곳에서의 전반적인 느낌은 외로움, 고독감과의 싸움이 아닌가 느껴졌다. 도시가 큰 것에 비해서 한국선교사님들은 별로 없었고 오셔서도 팀이 아니라 각자 일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이들을 기르며 집에 계시는 젊은 선교사 부인들이었는데 매우 답답하고 외로와하였다.

육아에 대한 부담과 탈진이 주증세였다. 육아에 대한 이야기 역시 부부관계에 대해서 많은 내용이 와닿았다. 이들도 매우 갈급해 하면서 나눔의 시간을 더 갖기를 갈망하였다. 아이들로 인하여 자신에게 투자할 시간이 없음이 더 문제시 되었다. 이곳에서는 인생주기와 인격발달 등을 중심으로 이들이 지금 투자하는 시간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강조하게 된 것 같다.

 

노보시비리스크에서 하룻밤을 자는 열차로 12시간 이상 남쪽으로 가니까 러시아의 연방공화국으로 되어 있으며 우리나라 언어를 포함한 알타이언어권의 어원의 나라인 알타이공화국의 수도인 알타이리스크에 닿았다. 가는 역까지는 안내를 받았고 또 우리가 내릴 역에 바로 아는 분이 나오기로 하여 역과 역 사이에는 우리 일행만이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그 비행장에서의 일 같은 것이 또 일어난 것이다. 아주 끔찍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러시아 인들이 도와주었다. 오히려 시골 아주머니 같은 분이 우리를 신기해하면서도 손짓 발짓으로 우리가 타야할 기차, 예약 된 좌석을 찾아가는 일, 자고 먹고 내리는 데에 필요한 아주 복잡한 절차 등을 안내해 주었다. 어느 나라든 역시 아줌마 배짱이 제일이다. 가는 동안 서로의 언어는 전혀 몰랐지만, 아줌마들만의 의사소통 법으로 그 집안 대략적 소개, 또 여행 목적정도까지 서로 상통하게 되었고 그로인해 처음으로 러시아인에 대한 정을 느끼게 된 것이다.

한국선교사님께서 이곳에서 이 나라 태생인데 한국말을 할 줄 아는 고려인을 전도하고 양육하고 신학공부까지 시켜서 동역자로 키웠고 이제는 팀으로 함께 사역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특히 그 도시는 이야기를 들으니 거의 우울증의 도시였다. 한 마을은 세집건너 한명씩 자살자가 있을 정도였다. 그곳에 복음으로 돌보고 사랑을 주고 하니 한국선교사님들이 어머니요 아버지 같은 존재였고 이들은 20년씩 아프던 우울증 심인성 질병에서 나음을 얻었다. 성령님께서 이들을 통한 사랑을 보여 주심으로 일어난 치유 이시리라. 이런 마을은 대대적으로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고 이 부족인들 중에 선교사가 되어 같은 민족이 있는 다른 나라로 파송되기도 하였다. 한국인 선교사, 고려인계 러시아인, 원주민, 슬라브계 러시아인들이 혼합된 곳이라서 인지 보다 개방적이고 자유롭고 낙천적인 분위기였다. 주님의 역사도 강하게 일어났다.

이곳에서 필자는 이 들에게 심리검사나 이론 적인 강의가 별 의미가 없어 보였고 다만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양 드리고 이들의 수고와 애씀을 인정하고 감사하고 위로하며 함께 식사하고 나누는 시간을 갖었다. 이것으로 충분했다. 이들도 필자에게도 너무도 진한 친밀감 유대감 감동 같은 것이 교통됨을 느꼈고 헤어질 때도 마치 형제를 두고 떠나는 듯한 아쉬움 등을 서로 느끼고 함께 기도하기로 하였다. 돌아와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것을 이 시간 회개하면서 그들이 더욱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그들 자신 스스로를 돌보며 사역을 잘 감당하시도록 기도한다.

 

사실 이번 여행이 매우 길어서 일정에 부담이 되었고 한 주부로써 가정을 비워야하는 어려움 등이 있었지만 선교사님들의 워크샵에 응하도록 동기부여가 된 것은 바이칼호 덕분이기도 하다. 늘 세계지리시간에 외우고 지도에서만 보던 세계에서 가장 크고 신비한 담수호의 도시로 간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마음을 설레게 했다.

 

머물던 도시에서 3일간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횡단열차의 전체 운행시간의 1/3 밖에는 안된다니 놀라

울 수밖에 없었다. 거기는 미리 책도 사서 읽으면서 약간의 지식을 습득을 했지만 사실 내가 알고 있었던 것 보다 훨씬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의미가 있는 도시였다. 재정러시아 시기에 젊은 소장파귀족들이 부패한 왕정에 맞서 구테타를 일으켰는데 실패로 돌아가자 그 많은 귀족들을 유배시킨 시베리아 유배지가 바로 이곳이었다. 곳곳에 그 당시 귀족죄수들이 살던 건물들이 있었다. 이 도시 전체가 감옥이었던 가 보다. 이 도시를 떠나면 죽음의 땅이었기에 이 도시 안에서 나갈 생각을 못했고 이 안에서는 자유를 누리며 음악, 문학, 예술을 꽃피웠고 건물도 귀족출신답게 아름답게 유럽풍으로 지어서 살았던 것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톨스토이가 이런 유배인 지인에게 보낸 편지들도 전시되어 있곤 했다. 이런 죄수들의 몸으로도 역사속에 자취를 남기고 문화와 예술의 족적을 남겼는데 오늘 날 미약해 보이지만 이 그리스도의 대사인 선교사님들도 이 나라 역사에 변화와 영향을 주는 인물들이리라는 교훈을 받았다.

 

많은 한국인들이 찾는 곳이고 사역이 다소 활발해 보였다. 또 바이칼 호수의 수력자원 덕분에 물가나 공공료금이 다소 낮은 편이어서 한국인 선교사님들도 조금은 여유로와 보였고 바쁘고 활기가 있었으며 검사 상에서도 그렇게 도출이 되었다. 다만 이곳에서는 사역을 활발하게 하다보면 의례 그렇듯이 선교사님들이 공통적으로 관계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서는 그 결과를 갖고 개별적으로 만나는 시간을 갖게 하셨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으며 개인 및 관계를 이해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선교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풀어야하는 인간관계란 어디서나 존재하는 것을 아는 것이 필요했다.

기대하던 바이칼호수를 찾았는데 정말 파도가 없는 바다 같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 맑기는 세계에서 최고라 할 정도로 깨끗함이 보존되어 있었다. 그곳은 한달이라 하였다. 그 기간만이 해가 나는 기간이라 온 도시가 해수욕장 같았다. 그냥 수영복차림으로 일상을 하는 듯 보였다. 노출증들이 심하다 했는데 이유를 들으니 이해가 되었다.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은 우리 사고의 틀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고, 자신의 투사 현상의 정도를 보여 줄 뿐이다.

 

특히 바이칼 호 주변에는 더 북극에 가까운 곳에서 여름 휴가를 온 사람들이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처음이지 마지막으로 러시아에서 영어로 말을 걸어온 사람을 만났다. 외국인처럼 보이자 어디서 왔냐고 영어로 물어보는데 그 어렵던 영어가 모국어처럼 들리는 순간이었다. 그 비키니 차림의 여성은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러시아 위쪽에 있는 그린랜드라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1년에 한번 돈을 모아서 온가족이 이곳에 와서 해를 보고 가는 것이 삶의 큰 낙이었다. 그곳은 영하 40-50도의 날씨가 일 년이면 반 이상이란다. 이쪽에서 궁금한 것이 많은데 그녀는 우리 쪽에 대해 물어 보느라 오히려 여념이 없었다. 필자가 거기서 만났던 선교사님 중에도 다음 사역지로 그곳을 정해 놓고 기도하고 계시던 분이 있었다. 놀라운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고서는 그런 마음을 갖는 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선교사는 부르심을 받고 거기에 응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을 더 하게 되었고 국내에서 선교에 부르심을 받은 젊은이들을 훈련할 때 그 소명의 부분이 오염되지 않았는지 함께 점검하고 식별하고 나아가도록 도와야할 책임감을 다시 한번 느끼는 시간이었다.

기마의 나라 몽골

이루쿠츠크에서 밤 2시에 비행기를 타고 새벽 5시에 울란바토르에 도착을 했다. 배웅하고 마중하는 사람들에게도 미안하고 잠도 설치고 왜 이렇게 불편한 시간대에 비행을 하는지 이해가 안되었다. 추측컨대 가난한 나라여서 좋은 시간대는 공항을 빌리기도 어려운가 보다하는 생각을 가졌는데 그것도 역시 내 선입관이요 사고의 틀이었다. 이 울란바토르는 매우 고지대에 있어서 기류의 변화가 극심하다고 한다. 맑았다가도 회오리바람이 몰아치고 해서 항공기가 돌아가는 예가 빈번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기류가 제일 조용하고 잠잠한 시간대가 이른 새벽이라는 이유였다. 또 이곳은 건조한 그야말로 광야였다. 돌아보면서 예수님이 사셨던 곳이 이렇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광야에 그나마 푸릇푸릇한 풀이나 나무들은 밤과 낮의 일교차로 인해 맺어지는 새벽이슬의 수분덕분으로 살아간다고 했다. 시편의 새벽이슬의 의미가 바로 가슴 깊이 다가왔다. 우리나라처럼 홍수, 폭풍, 장마 등에 젖어 사는 민족에게는 이슬이 깨끗하고 영롱하다는 이미지로 다가오지만 이런 몽골같이 광야의 나라는 이슬은 곧 생명인 것이었다.

또 하나 기억나는 것은 내가 스트레스 측정을 위해 사용하는 검사도구중에는 비그림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만 결과가 매우 다르게 나오는 것이었다. 알고 본 즉 이 나라는 비라는 것이 매우 좋은 의미의 것이다. 어느 손님이 왔을 때 비가 오면 그것은 행운을 갖고 오는 손님이라 매우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또 우산이라는 것이 없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맞고 일부러 다 나가서 비를 환영한다고 한다. 그러니 이 문화에 젖어 있는 선교사님들에게도 빗줄기를 스트레스 요인으로 측정하는 검사에서는 결과가 전혀 예상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이 나라는 러시아에서 독립한지 20여년도 채 되지 않는 나라로 가난과 싸우고 있었다. 선교사님들도 역시 이 점에 대해서 많은 사역들을 했고 열매도 많이 보여주셔서 매우 의욕적인 점이 특징이었다. 이들은 어떻하면 복음이 더 효율적으로 뿌리르 내리기 위하여 이들을 제대로 도울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상담을 공부하고 있는 분들도 많이 있었고 더 공부하고 싶어하는 분들도 있었다. 그래서 보다 이들이 그런 쪽으로

준비되도록 돕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 같았다. 열악한 환경 안에서도 서로 돕고 격려하고 나누고 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물론 매우 힘든 과정들을 거친 분들, 겪고 있는 분들이 있었다. 아무쪼록 모든 선교사님들께서 이 모든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했던 일의 한 부분을 함께 감당하신다는 마음으로 계시길 기도한다.

 

헨리 나우엔은 <마음에서 들려오는 사랑의 소리>라는 그의 저서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몸을 빌려 인간이 되셨다. 성령이 마리아에게 임하시자 마리아의 영혼과 몸의 적대관계가 사라지고 화합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하나님의 성령이 인간의 영혼과 화합하게 되었고 인간의 육체는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인간의 몸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품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다.” 고 쓰고 있다. 예수님의 성육신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 선교사님을 통해 몸으로 직접 그들의 땅에 가서 그 땅의 사람들과 하나님사이가 화해되고 그들이 영원한 주님의 자녀가 되는 중요성이 성탄절을 하루 앞둔 이 시점에서 더욱 가슴깊이 다가온다.

 
연해주지역 한인선교사 교회역사(1991-2001)

<나호드까 지역>

★나호드까장로교회
박광배 선교사가 91년 9월 21일 들어와 10월 6일 첫예배를 드리면서 나호드까 장로교회가 개척이 되었다. 정부에서 허락한 땅에 95년 3월에 예배당 건축을 시작하여 97년 10월에 준공 감사예배를 드렸다.교회 건축 1995년 03월05일 교회 완공 및 입당1996년10월07일 1998년 연해주 올해의 건축상 수상.
2000년03월04일 러시아 국적자로 귀화 2001년 08월 전 가족 러시아 국적자들로 귀화.

★나홋까장로교회 (방주)
김영곤 선교사가 91년 10월 19일 들어와 나호드까 장로교회를 개척하여 92년 2월에 교회를 등록했고 92년 11월부터 예배당을 건축을 시작해서 93년 9월 입당예배를 드렸다.

★나홋까 제일교회
1993년 김성필 목사님의 교회개척이 있었다. 1996년 본국으로 귀임함


<알르쫌지역>

★알쫌장로교회
1991년 11월 6일 정득수 선교사가 들어와 Артёмовская Христианская Пресвитерианская Церковь로 개척창립을 하였다. 처음에는 음악학교, 11번학교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현재 ул.ЧЕлюскна 69에 있는 독립가옥을 구입하여 현지인을 중심으로한 사역을 하고 있다.

★알쫌 에덴교회 (구 포도원교회))
1994년 9월 한석우 선교사가 부임하여 포도원교회가 개척하였다.
1996년 1월 한석우 선교사가 카잔 지역으로 사역지를 옮겼다.
1996년 2대 전은수 선교사가 부임하여 에덴교회 개명하여 주정부에 등록하였다.
현재 ул. Бельрнского 12에 독립가옥을 매입하여 2001년4월 입당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고 있다.

★알쫌 선교교회
1994년 11월 2일 최남식선교사에 의하여 Пс. Суражевка문화회관 장소를 시작으로 예배를 드렸고 1995년 3월 25일 Христианская Пресвитерианская Церковь "Деяния"로 교회등록하였다. 2001년 교회건물 매입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

★알쫌새롬교회
1992년 6월 15일에 이승신 선교사에 의해서 기독장로교회가 개척예배를 드림(장소 아르쫌 문화회관). 1994년 2대 김회관 선교사 부임 1996년8월30일 Христианская
Пресвитерианская Церковь "СЭРОМ" 재 등록 1997년8월10일 2층 단독건물을 매입하여 재건축하여 현제 예배를 드리고 있다. 1999년 새 종교법에 따라 제등록 2000년 6월12일
헌당 및 봉헌 예배를 드림.

★알쫌화목성결교회 (구 평강교회)
1996년 4월 22일 임재규 선교사 부임 하여 평강성결교회를 개척하였다.1998년 본국에 귀임함에 따라 최남식 선교사가 위임함. (
1999년 2대 김덕근 선교사 부임하여 화해교회를 창립 주정부에 재등록 함. 블라디보스톡 으로 사역지 변경
3대 윤두삼 선교사부임 화목교회로 창립


<빠르티쟌스크 지역>

★빨티잔스크순복음교회

1991년 11월 김장명선교사가 들어와 партизанская Евангельская Церковь "СУН БОК ЫМ"를 개척하여 교회를 등록하였다. 1993년 6월 김장명선교사가 병으로 귀국하였다.
2대 김성중 선교사 부임 3대 이강수 선교사 부임

★빨티쟌스크 동양선교교회

<블라디보스톡 지역>

★블라디보스톡 장로교회 (영락교회)
1991년12월16일에 들어와서 12월 24일 송상천 목사등 5명이 지유라씨 가정에서 첫예배를 드림으로 시작하였다.
1992년4월 Пресвитерианская Церковь г. Владивосток 주 정부에 등록 첫예배장소는 블라디보스톡 침례교회 예배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림.
1993년 5월 출낀장로교회를 지교회세움
1996년 현 블라디보스톡뽀치따브이 뻬레울록 5 건물을 매입하여 입당함

★블라디보스톡 감리교회
이동건 선교사가 1992년 3월 15일에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여 3월 19일 Владивостокская Христианская Методистская церкввь로 창립예배를 드리고 9월 4일 교회를 등록함. 96년 7월 17일 건축허가를 받아 10월20일에 기공하여 97년 10월 21일에 봉헌예배를 드림.
2대 김 아나톨리 전도사 담임으로 부임


★블라디보스톡 베료자 교회
박용호 선교사가 92년 5월 27일 들어와 후원교회와 함께 탐방하고 준비이후 92년 10월 31일 가족과 함께 들어와 국민학교 강당에서 92년 12월29일 Хрстианская пресвитерианская первореченская церковь 창립예배를 드리고 93년에 교회를 등록하였다.
현 사나또르나야 지역 유치원건물을 매입하여 개축 수리중이며 2002년 입당할 예정이다.

★블라디보스톡 동부교회
1992년 6월 12일 정호상 선교사가 가족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에 들어와 1992년 6월 28일 블라디보스톡 동부교회(Восточная Христианская Церковь)를 창립하여 1992년 11월 4일에 교회를 등록했다.
1993년 11월 3일 시로부터 교회부지를 불하받음 (ул.빠뜨리사 루뭄부 12- Г 0.4헥타르)
1997년 착공 1998년2월 1차 공사후 입당 예배를 드리고 있다.

★블라디보스톡 제일교회
윤미경 선교사가 92년 7월에 들어와서 도시를 둘러보고 11월달에 가족과 함께 와서 92년 12월 13일에 63번 학교에서 Владивостокская Хрстианская Пресвитерианская церкввь로 첫예배를 드렸다. ( ул.Бородинская 7) 교회등록은 93년 6월에 등록을 하였다.
1995년에 교회예배장소를 Русская 17 1층을 매입하여 예배당과 사무실로 수리하여 입당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

★블라디보스톡 주안감리교회
유재호 선교사가 92년 8월 1일 들어와서 93년 5월 16일에 Христианской Протестанской Методистской Церкви Живой Камень 를 개척하여 주정부에 등록하였다.
스뽀르찌부나야 지역에 상가건물 1층을 매입하여 교회로 개축 하고 입당하여 에배를 드리고 있다

★우걸라야 감리교회
조학철 선교사가 93년 1월 30일에 들어와 93년 4월 4일 창립예배들 드림으로 Угольная церковь를 개척하여 4월 16일 등록을 하였다. 예배당을 94년 12월 11일에 건축하여 입당예배를 드렸다.
★블라디보스톡 순복음교회
1992년 11월 28일 이강수선교사가 들어와서 1993년 3월 8일 교회를 창립하였다.(돔 말라죠지) 이강수 선교사가 본부발령으로 빨티쟌스크롤 이임하고 2대 이규호 선교사 부임
1999년 이규호 선교사 본국 귀임
이규호 선교사는 1994년 8월 17일 순복음 성경학교(신학교)를 개교하여 1995년5월 1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1995년 7월 4일 폐교하다.

★블라디보스톡 동부장로교회
최응규 선교사가 92년 12월 들어와 93년 4월 4일에 Христианская пресвитерианская церковь донбу "Восточная"를 개척하였다. 그해 7월에 교회를 등록하였다.
1997년 아파트1층을 매입하여 개조하고 예배를 드리던중 2001년 단독건물을 매입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

★블라디보스톡 믿음교회
최진선 선교사가 95년 3월 25일 들어와 96년 8월 4일 ул.Интернациональная 63-65에서 12명의 이웃과 함께 첫예배를 드림으로 Владивостокская Христианская Пресвитерианская Церковь"Вера"가 개척이 되었다. 96년 12월에 교회를 주정부에 등록하고, 99년 상가건물 매입후 예배드리고 있다.

★블라디보스톡 구세군교회
1997년 3월 29일 이정훈.박선례 사관이 가족과 함께 들어와 6월 17일 주정부로부터 구세군 신임에 대한 승인을 얻어 9월 22일 구세군 대표부로 등록하여 1997년 10월 29일
구세군 블라디보스톡 영문 창립예배를 드림. 2000년9월 본부명령에 따라 이정훈사관 이임함 2000년 8월 2대 박성하. 최영미 사관 부임.사역중

★진리와 자유교회
이용훈 선교사가 97년 8월 26일 들어와 언어연수를 마치고동부교회 정호산 선교사와 2년간 협력사역후 99년 10월 10일 첫예배를 의과대학 부속건물에서 시작 Хритианская Пресвитерианская Церковь "Истина и Свабода"를 개척하였음.1999년12월 주정부에 등록함
이후 Фокина로 옮겨 예배를 드리고 있다.

★농아인교회
백경숙 선교사가 1997년 8월 23일에 입국하여 98년 1월 첫주예배를 드림으로 Владивостокская Христианская Пресвитерианская Церковь" Глухих"가 창립되었다. 1999년 8월 17일에 새종교법에 따라서 장로교로 등록을 하였다.
농아인(глухий)대상의 선교를 하고 있다. 2001년 상가건물을 매입하여 개축 예배를 드림.

★블라디보스톡 창신교회
1998년 10월 우종철 선교사가 부임하여 언어 연수후 2000년6월 돔 삐오네르를 임대하여 예배를 드리던중 2001년10월7일 단독건물을 매입하여 개축후 예배를 드리고 있다.

★블라디보스톡 성결의 집
2001년5월 김덕근 선교사가 아르쫌 화목교회를 사임하고 사역지를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김에 따라 성결의집 을 창립하여 주정부에 등록중이다.

★연해주 신학교
1995년11월27일 나호드까 김영곤 선교사댁에서 신학교 발족을 위한 준비모임.
운영위원을 중심으로 공동운영키로 하고 운영위원장에 정균오 선교사를 선임하였다.
운영위원에김영곤.정득수.송상천.박용호.박광배.한석우.권영세.정호상.김성필.윤미경.최남식
최진선.선교사가 함께 동참하였다.
1996년9월 나홋까장로교회(김영곤선교사)에서 개교하였다.
1998년9월 블라디보스톡 세단카 지역에 새문안교회의 후원으로 건물을 매입하여 신학교를 이전 하였다. 신학교운영을 교장체제로 바꾸어서 초대교장 박용호 선교사 2대 정균오 선교사가 임명되어 운영중이다.


<우수리스크 지역>

★우수리스크 성서교회
1992년 8월 30일 양영근목사에 의하여 Евангельско-Христианская церковь "Виблия"가 우스리스크에 창립되었고 11월에 교회를 등록하였다. 첫예배장소는 아게에바거리 75에 있는 예술대학강당을 빌려사용하였으며 주로 제자양육을 주력하여 선교하고 있다.

★우수리스크 장로교회
1993년 10월 1일에 전용옥선교사에 의하여 교회가 창립되었으며, 1994년 10월 28일에 우 스리스크 장로교회로 국가에 등록하였다. 첫예배장소는 메즈디리치에 있는 32번학교이었 으며 주로 사회봉사활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선교하고 있다.
1996년 4월 6일에 우스리스크 장로교회의 전용옥선교사의 뒤를 이어 김창식선교사가 부임 하여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으며 1999년 3월 29일에 장로교회 자료에 근거하여 교회를 재 등록하였다. 2000년8월29일 고 김창식 선교사 불의의 사고로 순직후 미망인 박은희 선 교사가 사역을 계승하여 사역하고 있다.


★우수리스크 니콜스크교회 (구 창조교회)
1992년 4월 12일 윤우업, 조은주,김근경 선교사에 의해 Методистская церковь"Никольск" 창립되어 1992년 8월 1일에 교회를 등록했다.(예배장소:우스리스크 사범대학강당)
2대 조은혜선교사 부임 3대 장명수 선교사 부임 4대 박 이글 전도사 부임


★우수리스크 소망교회 (구 청암교회)
1992년 3월15일 황성익 선교사의 의하여 창립되어었다.1995년 황성익선교사가 성직을
사임함에 따라 1995년7월9일에 박필려 선교사에 의해서 Уссурийская Хрисанская Методистская церковь "Со Ман"가 재 창립되었으며,
1996년 9월 15일에 소망감리교회로 국가에 등록하였다.


★우수리스크 미르교회
1998년 3월 29일 김건수 선교사에 의해서 교회가 창립되었으며 1999년 6월에 장로교회 자료에 의하여 미르장로교회로 국가에 등록하였다. 1999년 시내 중심에 단독 건물을 매입하여 개축중에 있으며 입당하여 에배를 드리고 있다.

★사랑의 빛 교회

1999년 12월12일 박광정 선교사에 의해 창립, 우스리중국시장에 땅집 구입 후 동년 12월에 교회시작, 2001년3월 국가에 정식 교회등록됨.

★레스자봇스크 벧엘교회
2001년 5월1일 한기복 선교사입국, 2001년 12월24일 “네스자봇벧엘교회”를 정식 교회등록 마치고 2002년 새로운 사역을 준비중이다.

★블라디보스톡 미션스쿨
2001년 5월1일 홍정웅 선교사 입국, 2001년 8월부터 블라디보스톡에 교사매입후 학교사역을 시작으로 2002년 학교와관계된 여러사역 준비 중이시다.

★미하일로브까 은혜교회
2000년 9월3일 김문일 선교사 러시아입국 후, 2001년10월 “미하일노브까은혜교회” 정식등록마치고 2001년 12월2일 첫예배를 드리다. 김기남 윤영곤 선교사가 각각 건축 병원의료선교등 특수사역을 담당하기 위해 합류, 사역하고 있다.

★스파스크 시온교회
권영세 선교사가 1992년 11월 25일 들어와 1994년 1월 9일 첫예배를 드림으로 Церковь "Силоам"를 개척하였다. 1994년 8월 20일 교회를 등록하였다.
1999년 시내중심의 단독 건물을 매입하여 개축하여 2000년 입당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
2001년 5월 시온교회로 개명하여 주정부에 등록하였다


Copyright (c) 2003, All right reserved.
러시아 연해주 한인 선교사 협의회

출처 : Marketer2080
글쓴이 : 최지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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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러시아는 세계 8분의 1의 땅을 차지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이다.(한반도의 약77배).
동에서 서까지 11시간의 시차가 나는 나라이다. 세계 제일의 자원 보유 국가이다.
문맹률이 0이며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과학 연구 인력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이다.

달나라에도 가장 먼저 발을 디딘 우주 개발의 선두주자 국가이며, 가장 많은 핵을 보유한
군사 대국이다. 74년 동안 사회주의를 시험하다 사회주의로는 안 된다는 것을 역사에 실제
보여준 나라이다.

1,000년이 넘는 기독교(동방 정교회)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뿌쉬킨, 톨스토이, 차이코프스키, 볼쇼이 극장을 가지고 있는 문화 대국이다.
‘겨울의 러시아를 가보지 않고는 러시아를 알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매서운 추위가 있는
나라이다.
춥고 배고픈 나라 러시아! 그러나 이제 서서히 회복의 기미를 보이고 있는 러시아! 러시아 선교를
정리해 보며, 러시아와 아세아 연합 신학 대학간의 코이노니아 선교의 전망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러시아 개관
  1)자연환경
(1) 면 적 :
- 독립국가연합 (CIS: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은 22,402,200km로 지구 면적의 1/6(한반도의 101배, 미국의 2.4배)로, 동에서 서까지의 거리는 11,000km로 11시간의 차이가
있는 세계 최대의 국가이다.
- 러시아 공화국은 17, 078, 005km로 지구면적의 1/8이다.
(동서 차의 거리는 10, 000km, 시차는 11시간이다. 한반도의 77배)
우랄 산맥을 중심으로4분의 3이 아시아 쪽에 4분지 1이 유럽 쪽에 위치함)
(2) 기 후 :
차가운 대륙성 기후이다. 가장 큰 특징은 겨울의 혹독한 추위이다. 러시아에는 4계절이 있으나 봄과 가을은 매우 짧으며 대부분 여름과 겨울 두개 절이다.

2)인문환경
(1) 인구: 1억 4,800만명
(2) 인종: 100개가 넘는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음
(3) 언어: 러시아어

3)역사
(1) 고대 루시에서 모스크바 대공국까지
- 러시아 역사의 주역은 동슬라브족 중 백러시아인이다
- 9세기경에 키예프 루시 공국 시작
- 988년 그리스 정교를 국교화 함
- 1240년부터 몽고 타타르족이 200년간 지배
- 1480년 이반 3세 때 몽고 지배에서 벗어남
- 이반 4세 때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거대한 국가 형성
(2) 제정 러시아
- 1613년 로마노프 왕조
- 1712년 뾰트르 1세 때 성 뻬쩨르브르그를 수도로 함
- 에까떼리나 2세의 대외적 팽창정책
- 알렉산드르 1세 때 나폴레옹에게 승리함으로 유럽에서의 일등국이 됨
- 1825년 12월 24일 데카브리트 반란과 니콜라스 1세의 강권정치
- 1861년 알렉산드로 2세의 농노해방령(극동 지역 진출-블리디보스톡 건설,1867년 알래스카를
720만에 팜)
- 알렉산드로 3세 때 철도건설, 학문과 문학의 발달
- 1891-92년 가뭄으로 수백만 명의 농민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음
- 1905년 1. 9일, 러시아 정교회 신부 카폰에 의해 혁명 시작(피의 일요일)
- 1917년 2월 혁명
- 1917년 10월 혁명으로 최초 공산주의 정권 수립
(3) 소비에트 러시아
- 레닌 시대(1917-1924):수도를 모스크바로, 신 경제 정책 채택
- 스탈린 시대(1924-1953): 산업 근대화, 농업 집단화, 모스크바 지하철, 160만명 이상의 사람 숙청
- 후르시초프(1953-1964):스탈린 격하운동 (닥터지바고, 이반데소비치의 하루)
- 브레즈네프(1964-1982):
- 고르바쵸프(1982-1992):페레스토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정책
- 보리스 엘친(1992-1999):가격자유화, 무역자유화, 사유화, 세제개혁, 인플레
- 블라지미르 퓨친(2,000-현재): 애국, 민족주의 정신. 강대국 지위 회복을 꿈꿈,
경제 회복 분위기 존성, 남 북한에 대한 균형 정책 실시, 부정부패 정경 유착 최소화, 법치주의
강화, 개인의 소규모 사업과 무역이 자유롭게 행해지는 경제 체제 회복, 토지 사유화 정책 실시,
외국인 투자 유치 확대, 무기 현대화와 무기 수출 확대.

4) 사회, 문화, 교육
- 사회: 총체적 위기 상황에서 서서히 회복되고 있는 상황, 퓨친 대통령이 들어와 서서히 정치,
경제가 안정을 잡아가고 있음.(2,000년부터 경제가 흑자 상태이며, 루블의 인플레가 안정화되어 가고 있음). 치안은 아직도 다소 불안한 편임, 가치관의 파괴로 마약 성행함.
- 문화: 러시아 문학, 음악, 발레는 세계적
- 교육: 유치원교육, 11학년제 의무교육, 5년제 대학.(기초과학의 발달)

5) 종교
- 러시아 정교회, 카톨릭, 신교, 회교, 불교, 유대교, 기타

6) 국민성
- 논리력이 발달되어 있는 동시에 감성이 풍부하며, 인내심이 강하고, 문학에 뛰어나며,
무한한 자원과 가능성을 지닌 민족이다.
- 공산주의를 지내오는 동안 정직성이 많이 파괴 됨.(거짓과 도둑)
3. 극동지역 개관
 
극동지역은 행정 구역이 아니고 경제 구역이다. 구 소련시대에 광대한 지역으로 분포되어 있는
나라의 경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하여 경제적인 지역적 구분을 하였다.

1) 해당지역 :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주(유대자치지구 포함), 아무르주,
캄차 카주(코랴크 자치구 포함), 마가단주(추코트 자치주 포함), 사할린주, 사하공화국
2) 면적 : 622만km(전 러시아의 36%에 해당)
3) 인구 : 715.5만명
4) 지형
- 산지: 극동지역 전체의 4분의 3이 산악지대
- 하천: 태평양으로 흘러 들어가는 아무르 강과 아나디르 강이 있음. 겨울동안 5개월간 결빙함.
- 풍부한 지하자원: 수력, 석탄, 천연가스, 금, 다이아몬드, 삼림
- 자연적 요인 : 사하공화국, 마가단 등은 1월 평균 -43도까지 내려가는 혹독한 자연조건

4. 연해주(쁘리모르스키) 개관
 
가. 연해주
1) 면적 : 165.9km(남한 면적의 약 1. 6배)
극동에서는 사할린 주 다음으로 작은 주로서 러시아 전체의 0. 97%
2) 지형 : 남북으로 시호테-알린 산맥, 산림 70%.
3) 기후 : 몬순성 기후(블라디보스톡 평균기온 1월-18도, 7월 17도)
4) 인구 : 228만명(90.1월, 러시아 인구의 1.5%)
5) 역사 : 1860년 북경 조약에 따라 러시아제국에 편입
6) 주요기관 : 주정부(구 주지사 Ye. Nazdratenko, 현재:달낀)
태평양 함대 사령부(사령관 M. Zakarenko 제독, 97년 임명)
7) 행정조직 : 25개군 9개 도시
8) 주요도시 : 블라디보스톡(수도, 80만명), 나호드카(30만명), 우수리스크(30 만명), 알쫌(20만명),
빨찌쟌스크(10만명), 스파스크(8만명)

나. 블라디보스톡 (연해주 수도)
1) 구라파 풍의 항구 도시로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구가 있다.
2)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종착역이 있다.(모스크바까지 일주이간 걸림)
3) 인구 : 80 만명(유동인구 포함 100만명)
4) 1860년 알렉산드로 2세의 영토확장에 의해 군사기지로 세워짐
5) 1930년 소련 태평양 함대 모항으로 도시 확장
- 러시아 태평양함대 사령부 소재
6) 1992. 1. 부터 외국인에 개방된 극동의 군항도시
- 주재 총영사관 : 한국, 미국, 일본, 인도, 베트남
- 북한은 나호드카, 중국은 하바롭프스크에 총영사관 운영
7) 한국 연결 국제 항공편
- 서울과 주 4회 직항로 (대한 항공 주 2회, 러시아 항공 주 2회)
- 부산과 주 1회 직항로 ( 러시아 항공)
다. 연해주 동포 현황
1) 역 사
- 1830-40년대 한인, 계절 영농 이민으로 연해주 체류
- 1860년대 초 경제적 목적 연해주 이민 급증
- 1905년 을사조약 전후로 정치적 목적 이민 급증
- 1910년 약 4만 명 거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 형성
- 1919년 삼일운동이후, 항일 이민 급증
- 1923년 약 11만 명 거주
- 1937년 스탈린에 의해서 약 19만 명이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로 강제 이주됨
- 1953년 이후중앙아시아등에서 한인들이 개별적으로 연해주로 이동
- 1989년 연해주 거주 한인 8,455명
- 1991년 소련 와해 이후 연해주로 한인이주 증가
- 1993년 연해주 거주 한인 11,552명
- 1998년 말 약 30,000명 거주 추정

2) 연해주 동포 동향
- 과거에는 다수의 한인들이 농업과 상업에 종사했으나, 현재는 교육, 행 정, 전문분야 등
각 분야에서활동하고 있으며, 소득 수준도 높은 편임
- 대륙 거주 한인들은 대부분 러시아 화되어 우리말과 문화를 상당부분 많이 잃어버린 상태이며,
2차 세계대전 후 이주해온 사할린 교포들과는 성향이 다소 상이함
- 연해주는 북한 접경지역으로 한반도 분단이후 각 분야에서 북한과 교류 가 활발했던 지역이며,
한인동포도 상당수가 북한지역 출신임
- 현재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오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주민촌이 7개 형 성되어 있음
- 북한 건설대, 농업대등이 체류하고 있음

5. 연해주 선교 상황
 
1) 정교회
정교회는 러시아에 들어온 지 1,000년이 넘는다. 정교회를 모르고는 러시아를 알 수 없다고
할 만큼 러시아에 끼친 영향력은 매우 크다. 마치 국교와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인들은 대부분 교회에 나가지는 않으나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정교회라고 대답한다.
(러시아인은 곧 정교회인)
정교회는 블라디보스톡에 3개, 각 도시에 대개 1개씩 세워져 있다.
이콘(icon)을 중시하며, 말씀보다는 의식에 치중하는 예배가 특징이다.
(‘알렉산드르 맨’의 후예들을 중심으로 일부 정교회는 설교를 함)

2) 복음주의 침례교회
복음주의 침례교회는 러시아에 들어온 지 대략 200년이 지난 개신교로 개신교회중에서는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복음주의 침례교회는 국가에 ‘등록하는 교회’와 ‘등록을 거부하는
교회’(지하교회)로 나누어져 있다.
등록교회는 대략 15교회 개척되어 있으며, 비 등록교회는 10개정도 개척되어 있다.
이외에 우크라이나에서 들어온 복음의 빛 침례교회가 약 15개 있으며,
이 교단은 성서 통신 신학교 (1년에 3번 모여 2주씩 5년 간 공부함)를 가지고 있다.

3)복음주의(오순절)교회
- 15개 교회, 캐나다의 도움으로 신학교가 설립되어 있음.

4) 한인 선교사 활동
- 한국 선교사는 약 46명(통합 6명), 교회는 40개 정도이다
- 한국 선교사의 협력 선교: 연해주 신학교, 야간 감리교 신학교.
- 현지 교회와의 협력 선교: 침례교회와 연합으로 ‘크리스찬 신문을 만들고 있음.
- 고려인, 중국, 북한 선교.
- 사회 봉사 활동

5) ACTS와 코이노니아 선교 진행

2001년 8월 온누리교회(이수종 목사)의 블라디보스톡 방문과 함께 자루비나 교회와
노보솝스예프스키 교회를 방문한 후, 2002년부터 두 교회를 본격적으로 돕고 있음.
- 자루비나( 사샤 전도사): 장년 40명, 사역비, 핫산과 크라스끼노 교회개척 지원
- 노보솝스예프스키(줴냐 스미르노프 목사 ;장년 40명, 어린이 20명): 사택 구입, 예배당 구입,
사역비 지원, 예배당 건축 중.
6.마감하며/ (행20:24)
  러시아는 세계 8분의 1의 땅을 차지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이다.(한반도의 약77배).
동에서 서까지 11시간의 시차가 나는 나라이다. 세계 제일의 자원 보유 국가이다.
문맹률이 0이며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과학 연구 인력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이다.

달나라에도 가장 먼저 발을 디딘 우주 개발의 선두주자 국가이며, 가장 많은 핵을 보유한
군사 대국이다. 74년 동안 사회주의를 시험하다 사회주의로는 안 된다는 것을 역사에 실제 보여준
나라이다.

1,000년이 넘는 기독교(동방 정교회)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뿌쉬킨, 톨스토이, 차이코프스키, 볼쇼이 극장을 가지고 있는 문화 대국이다.
‘겨울의 러시아를 가보지 않고는 러시아를 알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매서운 추위가 있는
나라이다.

춥고 배고픈 나라 러시아! 그러나 이제 서서히 회복의 기미를 보이고 있는 러시아! 러시아 선교를
정리해 보며, 러시아와 아세아 연합 신학 대학간의 코이노니아 선교의 전망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연해주 신학교 봉헌패 연해주 신학교
  “러시아는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나라이며, 평범한 잣대로는 가늠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러시아의 특수성과 다양성을 서구 제도와 문화에 익숙한 우리의 잣대로만 러시아를 보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 그러나 본인은 이러한 오류를 수없이 반복하고 있다.
러시아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러시아 문화에 맞는 선교를 해야 할 것을 다시끔 다짐해 본다.

선교 7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검은 빵은 먹어도 맛이 없다. 시금떨떨한 맛, 러시아 맛, 러시아 냄새.
러시아 선교사로서 러시아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기로 작정했지만 이 검정 색 빵은 여전히 손이
가지 않는다. 러시아인의 친구가 되려면 러시아인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 같이 먹고
같이 울어주는 선교사, 러시아인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선교사가 되고 싶다.

러시아의 미래를 생각하며 러시아의 영적 부흥과 도덕적 부흥, 경제적 부흥을 위해 기도하며
잘 섬길 것을 다시 다짐해 본다.

출처 : 미라클
글쓴이 : 최정남목사 원글보기
메모 :

러시아 (RUSSIA)

 

 

 

국가 소개

수도 : 모스크바 / 55°45′N 37°37′E면적 : 17,075,200 km² (1위)

러시아 연방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이며, 구 소련의 종주국이었다. 이 나라의 잠재적인 부는 막대하지만, 풍부한 자연자원은 공산주의에 의해 약탈되고 오염되었다. 8세기 국가가 탄생하고 1991년까지 단지 독재정치와 전제군주정만을 알아왔다. 수백년 간 짜르 통치 끝에 러시아 제국은 붕괴되고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합이 들어섰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에, 러시아는 독립을 외치는 소수민족들과 대치해야만 했다. 공산정권 아래서, 기독교 교회는 세계의 근대사에서 아마도 가장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이제 종교의 자유는 헌법상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미전도종족은 많이 남아있다.

국가 개요

• 일반정보 국가명 : 러시아영문국가명 : Russia영문공식국가명 : Russian Federation지역 : CIS선교지도국가번호 : CI1수도 : 모스크바주언어 : 러시아어, 여러 지역어들

• 인구,경제 인구(명) : 142,893,540 인구성장율(%) : -0.37유아사망율(%) : 15.1 평균수명(세) : 67.1식자율(%) : 99.6 1인당GDP(US$/인) : 10,700 GDP성장율(%) : 5.9 화폐단위 : 러시아 루블(Rub)환율(현지화폐/US$) : RUB27.1HDI순위 : 62HDI : 0.795

• 종교 개신교(%) : 2.12기독교(%) : 54.1주종교(%) : 정교(41.3)제2종교(%) : 무종교(31.1)

 

러시아 쌍트 뻬쩨르부르그 (St petersburg)

모스크바가 유럽에서 가장 아시아적인 도시라면, 상트 뻬쩨르부르그는 러시아에서 가장 유럽적인 도시다. 표트르 대제에 의해 '서구로의 창'으로 만들어진 이 도시는 옛 러시아 영토에서 유일하게 북부 유럽으로 통하는 항로가 이어지는 지역에 건설되었으며, 유럽 출신 건축가들에 의해 18세기와 19세기 유럽에 유행했던 화려함과 질서정연함을 반영하면서 지어졌다. 그 결과로 유럽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도시가 만들어졌다. 모스크바가 사람을 위협한다면, 상트 뻬쩨르부르그는 매혹시킨다. 오늘날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상트 뻬쩨르부르그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그냥 '피테르(Piter)'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매력을 느낀다. 한편으로는 개혁과 변형으로 인해 이 도시는 거의 80여년 간 지연되었던 변화를 겪고 있다.

이 지역의 역사는 바로 러시아 중세사의 역사이며 그 중심에 있다. 최초 이 지역이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1240년 알렉산드르 오브 노브고로드(Alexandr of Novgorod)가 네바 강 어귀 근처에서 스웨덴인들을 물리쳤고 그로 인해 네브스키(Nevsky, 네바의)라는 이름을 얻으면서이다. 17세기가 되자 스웨덴이 다시 이 지역을 장악했고, 상트 뻬쩨르부르그를 건설하는 계기가 된 것은 스웨덴을 물리치고 유럽으로 향하는 얼지 않는 항구를 얻어 러시아를 유럽의 세력으로 만들려는 표트르 대제의 야망에서이다.

북구 대 전쟁(Great Northern War, 1700-21)이 시작되자 표트르 대제는 네바 강변의 스웨덴 기지를 점령했고 1703년에는 바다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네바 강변에 표트르 폴 요새를 건설했다.

1709년 표트르 대제가 폴타바(Poltava)에서 스웨덴을 격파하자 그가 독일식으로 상트 피에테르 부르크(Sankt Pieter Burkh)라 이름지은 도시는 확장되기 시작했다. 늪지인 남쪽 강둑에서 물을 빼내기 위해 운하가 건설되었다. 1712년 표트르 대제는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고 관리, 귀족, 상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새로 집을 짓도록 강제했다. 농민들은 강제 노동을 위해 소집되었고 그 중 많은 수가 고생하다 죽어갔다. 전 유럽에서 건축가와 장인들이 불려왔다. 1725년 표트르 대제가 죽을 무렵에는 도시 인구가 엄청나게 많아졌고 러시아 해외 무역의 90%가 이 도시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표트르의 후계자는 수도를 다시 모스크바로 옮겼지만 안나 이바노브나 여제(Anna Ivanovna, 1730-40)는 상트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왔다. 1741년에서 1825년 사이, 엘리자베타 여제, 에카테리나 대제, 알렉산데르 1세 치하에서 상트 뻬쩨르부르그는 화려함으로 명성높은 궁정이 있는 국제적인 도시가 되었다. 이 황제들은 궁전, 정부 건물, 교회 등을 수없이 지었고 이로 인해 상트 페테르부르그는 유럽에서 가장 장대한 수도에 속하게 되었다.

1861 년의 농노 해방과 1890년대 절정을 이룬 산업화로 인해 가난한 노동자 물결이 상트 뻬쩨르부르그로 밀려 들어왔고 이는 인구 밀집, 열악한 위생상태, 전염병 등의 고질적인 문제거리를 야기했다.

상트 뻬쩨르부르그는 파업과 정치적 폭력의 온상이 되었고 '피의 일요일'로 시작된 1905년 혁명의 중심지였다.

1905 년 1월 9일, 짜르에게 청원하기 위해 겨울 궁전으로 가고 있던 파업 참가자들에게 군대가 총을 발사했던 것이다. 1914년 1차 대전이 시작되면서 애국심이 고양되는 가운데 상트 뻬쩨르부르그의 이름은 러시아식으로 페트로그라드(Petrograd)로 바뀌었고, 인구는 200만에 달했다.

페트로그라드는 또다시 1917년 혁명의 요람 역할을 했다. 노동자들의 항의가 대중 시위로 바뀌고 군대가 폭동을 일으킨 곳도 이곳이었으며, 이로 인해 1917년 3월 러시아 군주제는 막을 내렸다. 노동자와 군인의 요구를 대변하는 사회주의자들의 중심 조직이라 할 수 있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개혁주의 임시 정부 청사 바로 옆의 타우리드 궁전(Tauride Palace)에서 회합을 시작했다. 4월에 레닌이 볼셰비키 정당을 조직하기 위해 도착한 곳도 바로 페트로그라드였다. 진짜 혁명은 10월 24일 볼셰비키가 페트로그라드에서 핵심 위치를 점유한 후에 일어났다. 새 정부는 1918년 3월까지 페트로그라드에 머물다가 독일군의 공격을 우려해 모스크바로 옮겨갔다.

1924 년 레닌이 죽은 후 페트로그라드는 레닌그라드(Leningrad)로 이름이 바뀌었다. 레닌그라드는 1930년대 스탈린의 산업화 프로그램의 중심지였다 1939년이 되자 도시 인구는 300만에 달했고 소련 산업 생산물의 11%가 레닌그라드에서 생산되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 도시가 정적의 근거지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1934년 공산당 레닌그라드 지구당의 수장이었던 세르게이 키로프(Sergey Kirov)가 암살된 것을 시작으로 1930년대 공산당 내 숙청이 이루어졌다.

1941년 6월 소련을 공격한 독일군이 레닌그라드까지가 닿는 데는 고작 2개월 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볼셰비즘의 탄생지라는 이유로 히틀러는 레닌그라드를 증오했으며 이 도시를 지구상에서 없애버리겠다고 맹세했다.

히틀러의 군대는 1941년 9월에서 1944년 1월까지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50만에서 100만 가량의 사람들이 폭격, 기아, 질병 등으로 죽었다. 2차 대전 전 기간 동안 미국과 영국의 사망자가 70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숫자였다.

인구가 2차대전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된 것은 1960년대가 되어서지만, 전쟁 후 레닌그라드는 다시 서구를 향한 러시아의 창으로 재건되었다. 오늘날 상트 뻬쩨르부르그는 활발한 문화적, 예술적 정수를 보여주는 세계적 도시다. 외국 산업과 국내 산업이 모두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상트 뻬쩨르부르그는 러시아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이며, 현재 인구 오백만의 거대한 산업 중심지이고 진정으로 국제적인 아름다운 도시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러시아 미르 선교회

"МИР" Миссия "Иисус в России"

<미르> 란 "러시아 예수 선교회"의 러시아 약자로 세계 또는 평화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르선교회는 1996년 6월에 러시아 쌍뜨 뻬쩨르부르그에서 사역하던 몇몇 한인 선교사들이 러시아 현지 목회자들과 협력 선교하는 가운데 러시아 복음화와 나아가 세계선교를 위해 선교지 현장에서 만들어진 초교파 선교단체입니다.

“가서 제자삼으라” 는 주님의 지상명령 성취를 위해 미르 선교회는 전도, 양육, 파송및 구제사역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1. 미르신학교

미르 신학교("MIR" Bible Institute)는 러시아 성도들을 제자 양육하며 말씀으로 훈련하여 러시아 교회를 섬기도록 하는 교회 지도자 양육기관입니다. 미르 신학교는 1994년 2년제 야간 신학교로 출발, 96년 주간으로 변경하였고 현재 7회에 걸쳐 53명이 배출되어 목사로 전도사로 혹은 교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미르 신학교에서는 러시아 목회자들과 한인 선교사 그리고 미국 선교사들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르신학교는 미르선교회를 러시아 현지교회와 연합하는 선교공동체로 자라나게 하는 촉매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2. 미르선교훈련원

미르선교훈련원("MIR" Missionary Training Instiute)은 러시아 지역의 무교회지역에 교회 개척하는 것과 러시아인을 선교사로 파송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러시아와 세계의 복음화를 위하여 러시아인 헌신자들과 한국과 미국으로부터 러시아 현장에서 선교 훈련을 받기 원하는 선교사후보생들을 훈련합니다. 특별히 단기 선교팀들을 훈련하여 그들로 하여금 선교사적 삶을 살도록 비젼을 심고 있습니다

3. 미르한인교회

미르 한인교회는("MIR" Korean Church)는 2000년 새 밀레니엄의 해를 맞이하여 새로운 발상의 전환으로 선교사들이 섬기던 유학생 예배를 통합하여 이루어진 쌍뜨 뻬쩨르부르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을 위한 교회입니다. 여러 교단의 선교사들이 초교파적으로 공동사역을 하는 것이 특징이며 모든 교인들이 선교의 열정을 가지고 선교하는 교회로 자라가고 있습니다.

4. 미르고려인교회

2001년 11월에 고려인을 위한 교회를 미르선교회에서 개척하였습니다.. 이 교회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거주하는 약1만여명의 고려인 사역을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현재 100여명의 고려인이 모여 함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5.미르한글 학교

고려인교회가 개척되어 자연적으로 우리 동포들이 한글을 배워야겠다는 자생적 마음에 한글학교가 세워져 4-5세들에 들에게 한글교육이 시작되어 한글학교 교장인 이진우 집사님의 체계적인 한글학교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2004년 36명과 2005년 22명 총58명이 등록되어 다녔고 평균 학생은 20-30명이 수업을 받고 있고 저희 학교의 교실이 부족하여 현재는 30명이 적정 수준이라 판단되며, 더 많은 학생에게 모국어를 배울 기회를 제공하려면 무엇보다도 교사와 교실이 확충되어야 하리라 생각된다.

6. 한글 노인대학

고려인의 2세들로서 부모임으로부터 한글 말을 듣고 조금은 쓸 수가 있는 세대이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시다.

이들에게 한국어로 노래와 읽기 한국문화와 정신 한국의 풍습 등을 가르치며 전하는 노인학교다.

7.현지교회

디베랴교회/믿음교회/부흥교회/안디옥교회/예닮원교회/은혜교회/참빛교회/하나님의 평강교회/

내지선교사(안드레이/크라스노다르지역 개척)

카잔공화국(양 리따)

기도제목을 나눕니다.

1. 미르선교회 각 기관과 선교사들의 영적 성장과 건강을 위하여

2. 잊혀져가는 우리 민족인 러시아 고려인 교회가 성장 되어 가는데 500명 고려인이 드릴 수 있는 교회가 세워지기를

① 이를 위해 부지와 건물구입을 위해기도 부탁드립니다.

② 전도 목표

1차 목표 - 2008년 전도하여 120명 출석

2차 목표 - 2009년 “” 150명 “”

3차 목표 - 2010년 “” 200명 “”

4차 목표 - 2011년 “” 300명 “”

5차 목표 - 2012년 “” 400명 목표 달성치

3. 세워진 교회들과 지도자들이 성령에 충만하여 각 지역에 복음의 혁명이 일어나도록....

4. 미르 고려인 한글학교 노인대학 동서문화교류가 더욱 성장하여 발전되기를

5. 선교사의 가족이 영육 관에 강건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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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고려인들 다시 연해주와 러시아 근교 쌍페테스부르그로

독립국들, 자국민만 우대 - 고려인들 다시 난민 전락

1938년11월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농업부장 바꿀린은 소련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올렸다. "타슈켄트주의 고려인 거주 집단 농장은 대단히 높은 영농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불모지에서 높은 수확을 거두었다"

고려인들은 밤낮으로 황무지를 개척하며 지난날 강제이주의 악몽을 잊으려고 애쓰는 듯 했다. 맨 손에는 갈대숲을 베고 운하도 파야했던 것은 물론, 늪도 말려야 했으며 땅을 갈아 씨를 뿌리고 짚, 모래, 갈대, 흙을 섞어 벽돌을 만들어 집도 지었다.

소련 연방 전 지역에는 100개 이상의 민족들이 있는데 고려인은 인구 규모에서 28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고려인들은 특유의 근면과 성실로 비극적 상황을 극복하고 점차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했다. 적지 않은 돈과 집, 자동차 등을 소유하며 연간 소득도 늘렸다. 70-80년대는 일반 노동자들의 10배 이상의 소득을 올리는 고려인이 상당수였으며, 소련 내 모든 분야에서 전문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작가 아나톨리 김, 가수 율리 김, 빅토르 최, 성악가 넬리 리, 체조선수 넬리 김 등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뛰어난 재능과 근면함으로 다른 민족들의 존경을 받을 정도로 우수한 민족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리고 생활의 안정과 기반을 되찾은 후세들은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이 제 2의 고향, 제 2의 조국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강제이주 반세기만에 고려인들의 운명은 또다시 바뀌고야 만다.

1989 년 민족간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소련이 무너지고 독립 국가들이 생겨나면서 무시무시한 단어인 '난민'이라는 표현이 고려인들에게 적용된 것이다.

독립국가 들은 러시아어를 배척하고 자국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이민족 차별정책으로 고려인들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다.

고려인들이 생산하는 농산물과 가축들은 판매를 할 수 없었고, 공식 언어를 모른다는 이유로 취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대부분이 공무원, 교사, 의사, 연구종사자, 집단 농장장 등 사무직 또는 관리직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태는 더욱 심각했다.

이러한 실직자들이 단기간에 공식 언어를 습득하여 재취업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었기에 단순노동자 또는 도시빈민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집과 재산을 버리고 떠나라는 협박 편지까지 받게 되었다. 공식 언어를 모르면 물건 하나 살 수 없을 정도로 미래가 없는 암담한 현실로 바뀌어진 것이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또다시 어디론가 자신들이 살 곳을 찾아 떠나는 것뿐이었다. 조상들이 처음으로 한반도를 떠나 율도 국을 찾아 떠났던 연해주, 바로 그 곳이 부모들의 마음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또 다시 디아스포라가 되어 러시아 전 지역으로 흩어지면서 러시아 수도였던 상뻬쩨르부르그로 오고 있다. 이제 이 길목에서 고려인교회를 통하여 믿음을 주고 또한 소식을 듣고 스스로 교회를 찾아오는 것을 볼 때 한 민족으로서 피는 물보다 진한 감을 갖는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민족인 고려인의 고난을 위로 하고 희망을 주며 이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이 전해지기를 기도한다.

이제는 삶은 고단하여 흩어져 먼 곳에서 살지만 주일에 예배드리며 만나는 것이 이들의 기쁨이다.

2. 고려인 교회 건축과 문화센터를 위하여

러시아에 150여 종족이 살고 있습니다. 그중에 우리민족인 고려인은 역사 속에 아픔이 있는 우리민족입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압제 당할시 나라를 잃고 있던 우리민족을 러시아와 일본 전쟁에서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 거기서 돌아오지 못하고 남을 수밖에 없는 자손들입니다.

구소련 전 지역에 약55만 인 흩어져 살고 있고 우주백스탄 약20만, 카작스탄 10만 키르기스탄 8만 로스토프 5만 원동지역 3만이 디아스포라로 살고 있는데 살던 나라가 공화국으로 독립하여 각자 러시아어를 쓰지 않고 자국어만 사용하여 고려인들이 러시아어만 배워서 그 나라 언어를 할 수 없기에 이방 민족은 떠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러시아도 어렵지만 그나마 언어가 되고 러시아로 가면 살길과 그곳에 자녀들의 장래가 없음으로 희망을 갖고 이곳 러시아로 이동하고 있다.

고려인교회는 이들을 이해하고 위로와 아픔을 품고 사랑으로 감싸고 안을 때 희망을 갖고 주님을 믿으며 역경과 고난가운데 주를 바라보며 제2의 고향을 떠나 난민이 되어 다시 러시아 쌍뻬쩨르부르그로 오고 있다. 러시아에서 오직 고려인교회로만 모이고 있다.

사도 바울 선교사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어 [골육]으로서의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서 그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롬 11:14) 나의 형제(兄弟) 곧 골육(骨肉)의 친척을 위(爲)하여 내 자신(自身)이 저주(詛呪)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願)하는 바로라”(로9:3) “나의 동족 고려동포가 나라 없이 유린하는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알아 이들과 함께 나눌 수 만 있다면 생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사는 것이 나의 일념이라”

이제 미르선교회에서 공동개척한지 6년 120명이 전도되어 예배드리며 공동체의 삶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건물과 장소가 없어서 우리의 기도제목입니다. 이를 위해 선교사의 생을 다하여 고려인들과 함께 교회 건축과 한러 문화 센타를 통하여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전해주기를 소원한다.

하나님 ! 우리 고려 동포의 교회이며 주님의 교회와 문화센터가 세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출처 : 카라세상홍숙년
글쓴이 : 성락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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