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북한 주민의 탈북을 그린 최초의 영화

 

'크로싱'

 

감독은 '화산고' '늑대의 유혹'등을 만든 김태균 감독이다.

좀 더 많은 관객을 만나기 위해 휴먼 가족드라마 형식으로 연출됐다. /어수웅기자


 

 크로싱    
  • 정보 : 한국|미정|드라마
  • 감독 : 김태균
  • 출연 : 차인표, 신명철
  • 시놉시스 : 한국 영화 최초로 북한에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 <크로싱>은 2002년 베이징 주재 스페인 대사관 진입을 시도... 더보기
 
 
탈북자를 소재로 4년여의 기획·제작 기간을 거친 '크로싱(감독 김태균 제작 캠프B)'이 첫 공개됐다.

차인표와 아역배우 신명철이 주연을 맡은 '크로싱'은 2002년 베이징 주재 스페인 대사관 탈북자 진입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가난 때문에 북한을 탈출한 아버지 용수(차인표)와 아들 준이(신명철)의 여정을 담고 있다.

한국·중국·몽골 등 3개국에서 촬영을 진행했으며 실제 탈북자들의 인터뷰와 대규모 탈북 사건 등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시나리오 작업이 이루어졌다.

13일 공개된 예고편에서는 차인표와 6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발탁된 아역배우 신명철의 실제
탈북자 모습을 연상시키는 북한 사투리 연기가 눈길을 끌고 있다.

한편, 이 작품은 상반기 개봉 예정으로 18일 제작 발표회를 앞두고 있다.
 
‘크로싱’ 제작보고회 성황리에 개최!
2008-03-19 (수) 04:55   CNBNEWS
▲ CNB뉴스,CNBNEWS ,씨앤비뉴스 - 4년여의 제작기간,
한국 중국 몽골 3개국 비밀 로케이션을 마친 영화 <크로싱>이 드디어 그 실체를 드러냈다.
오늘, 3월 18일(화) 오전 11시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에서 개최된 제작보고회에서 4년간의 비밀 프로젝트로
수많은 궁금증을 일으켰던 제작과정과 영화의 하이라이트 공개로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8천 km, 3개국 비밀 로케이션 제작기, 강렬한 하이라이트 영상 최초 공개! 200여명의 취재진이 참석한 이번 제작보고회는 “1945년 이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대한민국과 북한. 2008년 지금 ‘그 절반의 땅’ 북한은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가까지만 가장 먼 나라가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라는 차인표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되었다.

오늘 상영된 제작 다큐멘터리에는 한국, 중국, 몽골 3개국에 걸친 8천km 대장정의 어려움 속에서도 영화의 리얼함을 담기 위한 제작진과 배우들의 눈물겨운 땀과 노력이 생생하게 담겨져 있다. 또한 평범한 아버지 모습으로 2년 만에 스크린에 컴백하는 배우 차인표와 600:1 의 경쟁을 뚫고 ‘준이’로 선발된 아역 신명철군의 생생한 촬영현장의 모습들과, 몸을 사라지 않고 펼친 그들의 진심 어린 연기가 감동과 함께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주었다.

또한, 지난 4년간 단 한번도 공개된 적 없는 영화 <크로싱>의 하이라이트 영상이 최초 공개되어 이목이 집중되었다. 3개국 로케이션 촬영으로 완성된 압도적인 영상미와 한국영화 최초로 북한에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리얼한 모습이 펼쳐졌다. 그리고 가족을 식량과 약을 구하기 위해 북한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차인표)와 그를 찾아 나선 아들의 안타까운 엇갈림을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자극했다.

뜨거운 취재열기! 김태균 감독, 차인표, 신명철의 기자 간담회. 이어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김태균 감독은 “정치적으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단지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 특히 아이들이 불과 몇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에 저렇게 어렵게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번 가족을 생각하게 되고, 사람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면서 봐 주길 바랍니다.”라며
영화를 제작하게 된 의도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영화출연 배경에 대해 차인표는 “처음 캐스팅 제의에 거절을 한 후 인터넷을 통해 여러 자료를 보다가 우연히 청진 역에서 가방을 꼭 끌어안고 죽어있는 너무 마른 소년의 사진을 보고 너무 많이 가슴이 아파 울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이 영화에 출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며 영화 출연의 결정적 계기에 답하였다. 또한 차인표 씨는 “영화 속 준이처럼 저의 친아들 정민이도 열 한살입니다. 그래서 촬영 내내 준이의 얼굴을 보면서 친아들 정민이의 얼굴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내 아들 정민이가 굶고 있다면, 약이 없어 많이 아프다면 아버지인 내가 얼마나 슬프고 가슴이 아플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습니다. ” 라며 촬영 중 느낀 점에 대해 답하였다. 마지막으로 깜짝 게트스로 무대에 올라온 준이역을
연기한 신명철군이 처음으로 언론에 공개되어 많은 관심을 받았다. 준이 역할을 하면서 어땠었냐는 질문에 “그 쪽의 아이들이
그렇게 힘든 것을 보고 슬펐습니다.”라고 답했다.

- CNB뉴스 차영환 기자 www.cnbnews.com
 

[쿠키 연예] ‘화산고’ ‘늑대의 유혹’ ‘백만장자의 첫사랑’을 만든 김태균 감독의 신작이 탈북자 이야기를 다룬 ‘크로싱’이라니 의외다. 병든 아내의 약을 구하기 위해, 굶고 있는 가족을 위해 탈북을 감행하는 아버지 용수를 연기한 배우가 ‘몸짱’ 차인표라는 사실도 낯설다. 그들이 이런 의외의 선택을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8일 오전 11시 서울 정동 이화여고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 ‘크로싱’ 제작보고회에서 김태곤 감독과 배우 차인표를 만났다. 정치적 영화로 오인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시키기 위해, 도움을 준 탈북자들의 신변 안전을 위해 3년 여 동안 비밀리에 진행된 ‘크로싱 프로젝트’. 감독과 배우는 할 말이 많았다.

김태균 감독 “꽃제비 아이의 얼굴이 저를 버텨준 힘”

먼저 상업적 대중영화를 찍어온 김 감독이 탈북자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 극영화를 찍게 된 것은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프로듀서 패트릭 최로부터 ‘태양의 부재’라는 작품의 영화화를 제안받았다. 그로부터 6개월 동안 100명 넘는 탈북자를 인터뷰하고 그들의 진술이나 구술이 출판된 2차 자료를 찾고, 귀하지만 사진과 영상자료를 구하며 자료조사를 마쳤다. 그 뒤에 시나리오 초고가 나왔고 2006년 여름부터 본격적 작업에 돌입했다.

김 감독으로 하여금 남들 모르게 진행하는 쉽지 않은 작업을 버티게 해준 힘은 ‘꽃제비’의 얼굴이었다. “10년 전 TV 앞에 앉은 가족들과 함께 우연히 북한 다큐멘터리를 보았어요. 다섯 살, 여섯 살 정도의 어린 아이들이 시장통 길바닥에 떨어진 국수를 허겁지겁 주워 시궁창 물에 씻어 먹고 있었죠.”

김 감독은 당시 금방이라도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은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공포스러울 만큼 믿기지 않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살아온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는 ‘크로싱’을 하기 위해 자신의 삶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며, 스스로의 인생에도 ‘전환점’이 되는 영화라고 밝혔다.

“그 이후 ‘꽃제비’ 아이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았어요.그 부끄러움이 ‘크로싱’이라는 작품을 끝까지 버틸 수 있게 해준 힘입니다.”

차인표 “화산고,늑대의 유혹 땐 안 부르더니…섭섭해 거절”

분명 흥행을 목표로 한 상업영화와는 근본적 궤를 달리하는, 인권과 가치를 중시하는 영화에 출연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차인표는 캐스팅 전 단계부터 솔직하게 설명했다. 처음에는 김태균 감독에게 섭섭한 감정이 들어 캐스팅을 거절했던 1년 전 일을 회상하며 환하게 웃었다.

저간의 사정인 즉 이렇다. 차인표는 김태균 감독과 알고 지낸 지 14년이 됐고, 각자의 분야에서 쉬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해오면서도 한 번도 작업을 함께 한 적이 없었다. 1년 전 김 감독이 느닷없이 ‘크로싱’ 대본을 주더니 ‘같이 하자’고 청했다. 솔직히 대본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화산고’나 ‘늑대의 유혹’은 다른 배우들이랑 하면서, 어쩜 이렇게 앞이 안 보이는 영화는 나랑 하자고 할까 싶어 섭섭했단다.

하지만 차인표가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탈북자가 세상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듯 이 영화도 관객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컸어요.”

거절을 해놓고 집에 돌아왔지만 생각은 끊을 수 없었다. 인터넷을 뒤지다 청진 역에서 굶어죽은 소년의 사진을 보게 됐다.

“제 팔목의 3분의 1도 안 되는 가느다란 팔목으로 가방을 꼭 끌어안고 죽어있는 모습이었어요. 얘가 이렇게 될 때까지 나는 도대체 뭘 했나, 2000만 동포들이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나는 뭘했나 싶어 많이 울었습니다. 비단 탈북자뿐 아니라 배고픔 질병 압제에 그대로 노출된 채 숨도 못 쉬면서 살아가고 있는 분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가 생각하게 됐고, 출연을 결심했습니다.”

김 감독 “인표씨 근육은 포기하세요”

‘꽃제비’의 얼굴, 굶어죽은 소년의 팔목이 그들을 ‘크로싱’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감독과 배우는 만났다. 물론, 드러내지 않고 중국과 몽골 사막에서 촬영해야 하는 영화, 배우의 희생과 고생이 뒷받침돼야 가능한 영화에 차인표 정도의 스타배우가 출연하겠다면 감독은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한다. 게다가 스크린 밖 차인표의 모범적 모습은 진정성 있는 연기에 대한 기대를 키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뷔 당시부터 굳어온 ‘근육맨’으로서의 이미지, 도회적 얼굴은 작품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감독에게는 부담이 되지 않았을까. 실제로 주변에서 ‘왜 차인표냐’는 의구심이 많았지만 감독은 가장 어울리는 배우라고 생각했다며 두터운 신뢰를 표했다.

“탄광노동자와 차인표, 하층민과 차인표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제 눈엔 뭔가 보였어요. 살아가는 모습이 진정성 있는 연기를 가능하게 하리라는 믿음을 주었죠. 물론 탈북자를 연기하기엔 몸이 참 좋죠. 촬영 전 ‘운동을 중지하십시오, 달리기만 하십시오, 근육은 포기하십시오’라고 요청했습니다. 4㎏ 정도 빠진 상태에서 시작했고 촬영 중 더 빠졌을 거예요.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를 직접 보시면 왜 차인표여야 했는가를 아시게 되리라 믿습니다.”

김 감독은 “연기자의 몸과 마음의 희생이 없으면 불가능한 영화”라면서 “잠자리와 먹는 것이 정말 열악했기 때문에 그 고통을 감수할 수 있는 의지가 있어야 했어요. 배우와 스태프 모두 고생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감동을 맛봤습니다”라고 전했다.

“배고픈 아이들에게 희망이 되는 영화였으면”

고생의 보람은 있었다. 차인표는 아버지로서, 배우로서, 하나의 인간으로서 한층 성숙한 면모를 드러냈다.

“극중 아들 준이가 열한 살로 설정돼 있는데 제 아들이 같은 나이입니다. 준이의 얼굴이 아들 정민의 얼굴과 오버랩됐어요. 연기에 방해가 됐는 지 도움이 됐는 지는 관객 여러분이 평가해 주시겠지만 제게는 힘이 됐습니다. 정민이가 도대체 먹을 게 없어 굶고 아픈데 약도 없다고 해보세요. 미국이 됐든 이디오피아가 됐든 단 한 사람이라도 ‘내가 너를 알고 있단다. 너를 도와주기 위해 일을 하고 있단다’라고 말해 준다면 얼마나 기운이 나겠습니까. 저도 그 한 사람이 되기 위해 이 영화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차인표의 호소가 이어졌다. “질병과 배고픔은 가난의 증상이라고 생각해요. 가난이란 희망이 없는 거죠. 세상의 배고픈 아이들은 ‘네가 배고픈 걸 알고 있다. 내가 침묵하지 않고 실천하겠다’는 메시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아이들이 메시지를 받아야 희망이 생길 거잖아요.”

차인표는 마치 극중 용수처럼 말했다. 사실 주인공이 겪는 고통을 똑같이 겪을 수 없는 상황에서 차인표가 용수에게 가까워지는 일이 있었다. 촬영 전 장소 물색을 위해 김 감독과 함께 몽골 달란다드가드 사막에 갔다가 병이 났다. 고열에 시달리며 사흘을 앓았다.

“아파서 80시간 넘게 아무 것도 먹지 못했어요. 사흘이 넘어가니까 먹고 싶단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요. 너무 배고프다, 뭐라도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었죠. 선택해서 한 경험은 아니지만 용수라는 인물로 빠져드는데 도움이 됐습니다.”

‘슛 배우’ 신명철,참석자들 심금 울려

영화 ‘크로싱’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배우가 있으니 6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캐스팅 된 신명철 군이다. 헤어진 아버지를 만나겠다고 사막을 횡단하는 용수의 아들 준이를 맡아 열연했다. 제작보고회에서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이 상영됐는데, 토막 난 필름 속 연기로도 많은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거의 모든 기성 아역배우들을 만났지만 적격이라 생각되는 배우를 찾지 못했던 김태균 감독. 우연찮게 편집 중인 다른 영화의 필름 속에서 신명철 군을 보고는 ‘느낌’이 왔단다. 충북 영동 산골에서 촬영을 하던 중 현지 오디션을 거쳐 뽑은 아이였다는 설명을 듣고 연락처를 받았다. 실제로 만나보니 느낌은 너무 좋은데 감독 스스로 자신이 없었단다. 여느 기성배우들에게는 없는 ‘때 묻지 않은 특별함’이 있었지만 연기 경험이 없어 얼른 연기를 끌어낼 수 없었기 때문. 명철 군을 두고 거듭 오디션을 치르던 중 세 번째 만났을 때 우는 연기를 보고 결심을 했다고.

산 넘어 산이라고, 캐스팅을 결정하고 나니 걱정이 됐다. 열두 살 아이가 낯선 나라, 낯선 환경에서 견딜 수 있을까 염려된 것. 막내 아들과 동갑이어서 더욱 살뜰하게 챙기는 김 감독, 아동학대보호센터의 홍보대사인 차인표의 감시 아닌 감시 속에 신명철 군은 촬영을 마쳤다. 평소 하루 세 마디를 하지 않을 정도로 과묵한 성격을 가졌으면서도 ‘슛’만 들어가면 불 같은 연기력을 뿜어내 ‘슛 배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차인표는 “연기에 대한 욕심도 많고, 너무 힘든 촬영을 끝낸터라 지금은 계속 연기를 할 지 잘 모르겠다고 하지만 하게 되면 대성할 배우”라고 칭찬하면서 “어려운 한국영화계가 살아나려면 명철이가 연기를 계속 해야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추격자’ 제공사가 선보이는 또 하나의 문제작

과묵하다는 신명철 군이 이날 남긴 말은 제작보고회 현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신 군은 타지에서의 촬영이 어렵지 않았냐고 묻자 “지금 연기 안 하면 집에 못 간다는 생각으로 연기했다”고 답했다. 어린이다운 천진난만함과 촬영 현장의 힘겨움이 동시에 묻어났다.

마지막으로 김태균 감독은 영화를 처음 만들 때의 감정을 털어놨다. “이 영화를 통해서 북쪽에 있는 우리 핏줄들, 탈북해서 중국 몽골 동남아시아를 떠돌고 있는 탈북자들에 대해 관객 여러분의 마음이 많이 움직였으면 합니다. ‘그들’의 얘기가 아니라 핏줄, 우리의 얘기로 받아들여 졌으면 좋겠습니다.”

영화 자체의 의도를 떠나 정치적 해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인식한 듯 차인표는 영화의 순수한 목적에 대해 거듭 강조했다. 그는 “항간에는 총선 출마하려고 찍었냐는 분들도 있다. 결코 정치할 생각도 없고, ‘크로싱’이 정치적 영화라고 생각지도 않는다. 이 순간에도 굶고 있는 아이들을 대신해서 울어주려고 만든 영화”라고 분명하게 정치와 선을 그었다.

영화 ‘크로싱’은 지난 해 ‘스카우트’ ‘내사랑’을 선보였으며 올들어 관객 400만명을 돌파하며 2008년 최고 히트작으로 떠오른 ‘추격자’의 제공·배급을 담당한 빅하우스㈜벤티지홀딩스의 네 번째 작품이다. 지난 2002년 3월 탈북자 25명이 중국 주재 스페인대사관에 진입한 사건을 기초로 10만 탈북자들의 애환을 담았다. 후반 작업을 거쳐 5월 관객 맞이에 나선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홍종선 기자 dunasta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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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eastsarang.com <동영상 출처: 동부사랑의 교회>
  "내가 만난 하나님"

 


피아니스트 김철웅 교수


그의 직함에는 이 말 외에도 ‘탈북‘이라는 말이 덧붙는다.

탈북 피아니스트라는 이력을 가진 그는 피아노가 좋아,

피아노를 자유롭게 치기위해 목숨을 건 탈북을 결심했다.

그는 피아노를 위해 탈북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피아노를 위해 목숨을 걸지 않는다. 이제 그 목숨과도 같은

피아노를 하나님을 위해 연주하기 때문이다.

피아노 연주가 목적이 아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삶의 이유가 된 김철웅 교수. 촉망받는 북한 피아니스트에서

탈북까지 영화 같은 스토리와 그 속에서 만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북한의 촉망받는 음악가로...



북한에서 클래식 음악가가 되는 일은 말 그대로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 만큼 힘든 일이다. 음악적 재능은

물론이고 출신성분까지 좋아야 한다.

당 간부의 아들로 8살 때, 북한 전역에서 단 두 명을 뽑는

예비 피아니스트 자격에 합격한 그는 이 후 초등학교부터

철저히 전문교육을 하는 영재교육기관인 평양 음악무용대학에서

14년간 피아노를 전공한 수재였다. 이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보통 6천여명이 응시하는데 이중 9명이 선발될 뿐이었다.

이런 교육을 거쳐 정부의 배려로 외국 유학까지 다녀온

북한의 대표적 피아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 김철웅 교수다.

하지만 그는 이런 피아노 영재가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 또한

그치지 않았다. 하루에 3시간 이상 잠을 잔 기억이 없을 만큼

피아노에 열중했으며, 연습만으로도 하루 12시간을 족히 넘겼을

정도였다. 또한 차이코프스키 콩쿨대회에서 74년에 정명훈 씨가

2등으로 입상을 한 이후 20년간 아시아에서는 입상자가 나오지

않던 가운데 김철웅 교수가 95년 이 대회에 참가해 4등으로

입상할 만큼 실력을 갖춘 북한의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


자유를 찾아 탈북을 결심



이렇듯 촉망받던 그가 탈북을 결심한 것은 러시아 유학시절이었다.

북한에서는 여러 장르의 음악을 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러시아

유학시절 체제 찬양과 완전 별개인 진정한 클래식을 접한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음악가들은 음악에 죽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러시아 유학시절 카페에 갔다가 흘러나오는 리차드 클라이드만의

가을의 속삭임이란 곡을 듣고 세상에 피아노로 이런 음악을 연주할

수도 있구나 생각하며, 그동안의 음악생활에 큰 혼란을 느껴 탈북을

결심했습니다“고 고백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목숨을 건 탈북을

결심하게 만들었고, 그는 2002년 9월 15일 탈북 하기에 이르렀다.


하나님을 만나다



중국으로 탈북을 하게 된 그는 목재소에서 통나무를 지고,

머슴 일까지 하며 숨어지내는등 그동안의 생활과는 너무나 다른

환경에서 음악과는 전혀 거리가 먼 생활을 했다. 탈북을 하기전까지

그는 자신이 굉장히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음악과

피아노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 둘러쌓여 있으면서

그는 자신이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고 난 다음부터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더 작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고백했다.

그는 매일 중국 공안과 북한의 눈을 피하기에 바빴다.

매일 같이 힘겨운 노동을 하며 지내던 그는 북한에서 새벽 3시에서

5시 사이에 겨우 이불을 뒤집어쓰고 들었던 극동방송의 찬양을

흥얼거리며 힘든 노동을 이겨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는 그가

예수님을 믿기 전이었고, 교회라는 곳도 제대로 알지 못하던 때였다.

그저 찬송가 음이 좋아 그냥 따라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진정 하나님을 알게 되는 계기가 생겼다. 탈북을 하기는 했지만 그가

진정한 음악을 하기 위해 탈북을 결심한 것과는 달리 그가 놓인 현실은

음악도 피아노도 전혀 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선교단체를 알게 되었고, 김 교수는 그곳에 피아노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교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김 교수의 시련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지금 한국에 서 있기까지 그는 생사의 길목에 서는 일을 수없이 겪어야 했다.

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하나님을 영접하게 됐지만 자신이 자만하였을 때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한으로 강제 이송 되는등 죽을 고비를 겪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러한 어려움 가운데 아버지 후배 수사관을 만나 풀려나는등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똑똑히 보고 경험했다고 고백했다.


연주와 간증 통해 하나님 전해



음악을 통해 자유를 찾았지만 이제 그는 음악으로 자유를 표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현재까지 전국 132개의 교회를 다니며 피아노 연주와 함께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간증하며 그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아름다운 선율과

그의 간증으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그리고 극동방송의 홍보대사로 지난 1월 위촉돼 더욱더 하나님을

전하기에 열심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높이신 것을 믿고

자신이 가진 재능으로 하나님을 전할 수 있다는 기쁨으로 연주하겠다“고

고백했다.


현실에 부딪혀 힘들어하는 탈북자들에게...



많은 탈북자들이 남북한의 격차로 인해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를 힘들어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하지만 김철웅 교수는 지난 2003년 4월 한국에 들어와

서울대 음악대학원에 진학하는등 적극적으로 사회에 부딪혔기 때문에

오히려 적응이 빨랐다. 그리고 현재는 한세대 교수로 후진들을 양성하며

피아니스르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탈북자라는 꼬리표가 항상 그를

따라다녀 처음에는 상당히 부담스러웠지만 이제는 자신부터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 당당히 자신이 탈북자인 것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그 틀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소원하던 피아노와 하나님을 마음껏

만나며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리고 현실에 부딪혀 힘들어하는 탈북자들에게

김 교수는 “누군가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마음을

열고 적극적으로 다가서는 것이 가장 빠른 적응 방법“이라고 조언한다.


그의 소망...



이제 한국의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앞으로 통일이 되면 남북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 통일 한국의 음악방향을 잡아나가는 것이

소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껏 체험한 하나님을 전하며,

자신의 연주가 하나님을 위해 사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그는 어쩌면 아주 특별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탈북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분단이라는 현 시점에서 나눠진 우리에게 복음이 담긴

음악을 전해줌으로써 그 벌어진 틈 사이를 매꿔 줄 특별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는 세상에 보내실 때 각 사람마다 특별한 사명을 주셨다고 하셨다.

김철웅 교수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을 계획하고 계시고, 이루어 가실지...

곧 이루어주실 통일된 조국에서의 그의 활약이 궁금해진다.

<손진화 기자>



오직 피아노 때문에 탈북을 결심한 피아니스트 김철웅 교수!!!
북한에서 당 간부로 일했던 아버지와 대학교수인 어머니 밑에서
풍족하게 자란 그는 8살의 나이로 출신성분, 부모 직위 등을 합쳐
상위계급 1% 내에 들어야 입학가능한 평양음악무용대에 3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갔다. 그 후 1995년 러시아로 4년간 유학을 가게 된 그는
클래식 재즈 피아니스트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곡을 들으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몸에 전율이라는 걸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재즈라는 음악이 있다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
‘죽기 살기로 연주해 보고 안 되면 탈북이다!’.
1999년 평양 국립교향악단의 단원으로 러시아에서 외운 클레이더만의 곡을
연주하던 그는 결국 상부의 검열에 걸려 시말서를 10번이나 썼다.
당시 북한에서는 클래식 음악의 경우 1899년까지 작품만 연주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20년 이상 음악을 해 오면서 하고 싶은 음악 하나 제대로 못한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던 그는 결국 음악의 자유를 위해 2001년 중국으로 탈북하게 되었다.
탈북 후 피아노를 칠 수 없었던 그는 교회가면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어느 탈북자의 말에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피아노로 연주하며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 후 한국으로 오던 중 중국에서 붙잡혀 14시간 동안 매를 맞은 그는 북송되는
기차 안에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한 후 탈출에 성공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전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다.
1년 만에 한국으로 오게 되면서 북한에서의 경력을 바탕으로 현재 한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으며 좀 더 체계적인 음악공부를 위해 오는 3월부터
극동문제연구소 북한대학원에서 북한문화예술 수업도 듣는 김철웅 교수.
지금부터 그의 삶과 신앙 속으로 들어가보자.


김철웅 형제의 간증은 2월 3일 금요일 밤 9시, 2월 6일 월요일 낮 1시에 방송된다.

재즈에 미쳐 사선(死線)을 넘다

탈북자 피아니스트 김철웅씨
영재교육 받은 북한 상류층 출신... 러시아 유학서 재즈음악 접한 후 탈북 결심


 

 
2001년 10월 17일 새벽, 평양 국립교향악단의 피아니스트 김철웅(金哲雄·32)씨는 두만강을 건너 중국 옌볜으로 도망쳤다. 이유는 남들과 달랐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재즈 음악을 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달랐다. 처음 만난 사람들은 피아노가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도 몰랐다. 흑룡강성의 벌목장에 가서 두께 2m, 길이 18m 되는 나무들을 운반했다. 빵 두 조각과 죽 한 그릇만 먹고 새벽 5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했다. 피아노만 쳐봤던 곱디고운 손은 막노동하는 사람의 투박한 손으로 바뀌었다.

‘무엇이 아쉬워 이런 고난의 길에 들어선 걸까’ ‘부모님은 어떻게 됐을까’…. 마음만 춥고 시린 게 아니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은 고드름으로 변할 만큼 추웠다. 죽고 싶었다. 하지만 목숨을 내걸고서라도 연주하고 싶었던 음악들을 떠올리면 그렇게 죽을 순 없었다.

▲ 탈북한 피아니스트 김철웅씨는 "재즈에 미쳐서 모든 걸 버리겠다는 각오를 했는데 막상 원하던 것을 얻고 보니 다시 클래식 음악이 더 좋아진다"며 웃었다.
벌목장에서 일한 지 7개월쯤 지났을까. “교회에 가면 피아노가 있다”는 말을 듣고서 교회에 갔다. 피아노는 없었지만 성경공부 하고 밥 먹고 잠 잘 수 있었다. 2002년 6월 한국 선교사들이 참석하는 교회 부흥회에 가게 됐다. 그런데 꿈에 그리던 피아노가 놓여있는 게 아닌가. 김씨는 어느새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날로 교회 피아노 반주자가 돼 중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점점 더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정말 자유롭게 음악을 하려면 한국으로 가야할 것 같았다. 하지만 한국으로 가는 길은 그리 쉽지 않았다. 두 번이나 중국 공안에게 붙잡혔다. 한번은 기차에서 뛰어내려 도망쳤고, 북한으로 호송됐을 땐 감옥에서 지인을 만난 덕에 풀려나 다시 도망칠 수 있었다. 기적 같은 일들이었다. 2003년 봄 결국 그는 한국으로 왔다.

지난 1월 4일 오후 서울여대 대강당에서 만난 김철웅씨는 옷차림이나 말투가 여느 탈북자와 좀 달랐다. 180㎝가 넘는다는 훤칠한 키에 옷차림도 꽤 신경쓴 듯했다.

그는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리자마자 프랑스 팝피아니스트인 리처드 클라이더만의 ‘가을의 속삭임’을 연주했다. 러시아 유학 시절, 그에게 재즈 음악의 충격을 안겨줬고 결국 탈북의 결심까지 하게 한 곡이었다. 그가 편곡했다는 ‘아리랑’을 듣고 싶다고 했더니 그가 사뭇 진지해졌다. 잠시 숨을 몰아쉬더니 그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춤추듯 뛰어다녔다. 시작할 땐 클래식풍이더니 곡 중간엔 민요풍으로 바뀌었다. 조금 후엔 엉덩이까지 들썩거릴 정도로 온 힘을 다해 쾅쾅 피아노를 쳤다.

“북한에선 아이들이 줄넘기할 때 정겹게 ‘아리랑’을 불러요. 남한 노래방에서 젊은이가 이 노래를 부르면 다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걸요? 유럽에서도 ‘아리랑’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율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우리 음악을 지켜야죠.”

김씨는 “정치도 경제도 할 수 없는 일을 음악은 할 수 있다”며 “동족간에 싸움없이 손 잡고 이 노래를 부르는 날이 오면 좋겠다”고 했다.

김씨는 당 간부였던 아버지와 대학교수였던 어머니 밑에서 풍족하게 살았다. 8세 때부터 평양 음악무용대에서 음악 영재교육을 받았다. 우리나라 초·중·고에 해당하는 과정을 이 대학의 인민반, 예비반, 전문반에서 마쳤다. “1980년대 초 북한에서 예술인이 갑자기 대우를 받기 시작했거든요. 아들을 잘 키우려는 부모님 욕심 때문에 음악을 시작하게 된 거죠.”(웃음)

김씨는 3000 대 1의 경쟁을 뚫고 평양 음악무용대학의 피아노 부문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1995년엔 러시아 모스크바의 차이코프스키 국립음악원으로 유학갔다. 여기서 그의 인생이 뒤바뀌었다. “리처드 클라이더만의 곡을 들었는데 충격 그 자체였어요. 몸에 전율이 쫘악 흐르더군요. 이런 음악도 있었구나 싶데요.”

알고 싶은 음악, 해보고 싶은 음악에 대한 욕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북한에선 클래식곡 중에서도 20세기 현대음악은 사상이 자유스럽다는 이유로 금지돼 있다고 한다. 더군다나 ‘자즈’라고 발음한다는 재즈는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사악한 음악’으로 금지돼 있다. “북한에선 바그너의 음악은 나치주의 때문에 안되고 라흐마니노프의 곡은 미국에 망명한 사람의 곡이라 연주할 수 없어요.”

재즈는 음악에 대한 그의 욕구만 건드린 게 아니었다. 김씨가 살아온 30년 안되는 삶 자체를 되짚어보게 만들었다. “내가 아는 것, 내가 누려온 것이 전부가 아니었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됐어요. ‘난 그동안 기계나 다름없는 연주가였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사실 그때까지 김씨는 무엇에 대해 절실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평양시민의 1%만 갈 수 있다는 고려호텔 지하식당에 가서 왕제산 경음악단의 기쁨조 공연도 허구한날 즐기며 지냈고 ‘창광원’이라는 고급 수영장 겸 사우나도 외국인에게만 개방한다는 주말에만 갔었다. 주머니 속엔 늘 달러가 잔뜩 있었다. “잘나가는 친구들과 최진희, 주현미의 트로트와 이용의 ‘잊혀진 계절’ 같은 한국 곡이 담긴 테이프를 얻어서 들었죠. 참, 제가 처음 본 한국 영화가 ‘무릎과 무릎 사이’였는데….”(웃음) 김씨에게 “혹시 북한의 오렌지족 아니었느냐”고 농을 했더니 웃으면서 “네, 조금이요”라며 답했다.

김씨는 러시아 유학을 마치고 1999년 북한으로 돌아와 평양 국립교향악단의 피아니스트로 일했다. 하루는 연습실에서 리처드 클라이더만의 곡을 연주했다. 한데 보위부 지도원에게 발각돼 시말서를 10장이나 써야 했다. “예전엔 김일성 어록을 읽고 자아비판을 하는 것들이 모두 자연스러웠어요. 그런데 러시아 유학을 마친 뒤에 그런 걸 못 참겠더라고요. 여기는 있을 곳이 못되는구나 싶었죠.”

라이브 카페 연주자에서 대학 교수로

그러다가 결국 2년 뒤 탈북한 것이다. 2003년 봄 한국에 온 뒤로 그는 서울 화곡동의 라이브 카페에서 밤새워 연주했고 일원동의 피아노 학원에서 강사로도 일해봤다. 탈북자 중심으로 모인 ‘평양 예술단’을 만들어 전국의 구청과 시청을 다니며 공연하기도 했다.

요즘 그는 서울여대, 이화여대, 명지대, 숙명여대, 포항공대 등 대학교 채플 강의에 초청돼 ‘아리랑’을 연주하고 자신의 경험담을 전한다. 2004년 9월부턴 한세대에서 음대 교수로 일하고 있다. “제가 원래 자유분방한 사람이에요. 누굴 잘 믿지도 않고 종교도 없었고요. 한데 피아노나 음악에 관해서라면 달라져요. 교회는 피아노 치려고 탈북한 제게 피아노를 치도록 해준 곳이었어요.” 마음 둘 곳 없는 그는 종교에 의지한 덕에 남한 생활에 적응을 해가고 있다고 했다.

오는 2월엔 자신의 스토리를 책으로 펴내고 3월부터는 한세대 임미정 교수와 ‘백두에서 한라까지’라는 제목의 듀오 콘서트를 전국 각지에서 열 계획이다. “재즈에 미쳐서 모든 걸 버리겠다는 각오를 했는데 막상 절실하게 원하던 걸 얻고 보니 또 달라지네요. 요즘 들어선 다시 클래식 음악이 더 좋아져요.”(웃음)

그는 “어려웠던 시절들을 다 지우고 음악만 좋아하던, 과거의 나를 다시 찾고 싶다”며 “2~3년 후엔 피아노를 메고 산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황성혜 주간조선 기자 coby0729@chosun.com
 
 
“북한 있을땐 꿈도 못꾸던 독주회"

북한에서도 체르니로 피아노를 배울까요. 현대 음악은 맘껏 들을 수 있을까요.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다가 혹시 퇴행적 낭만주의자로 비판 받지는 않을까요. 북에서 떠나 한국에서 활동하는 피아니스트와의 만남을 앞두고 궁금증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와 대화를 나누다가 정체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북에서 엘리트 음악 교육을 받고 자라나, 중국에서는 탈북 노동자로 살았고, 이제 한국에서 다시 음악인으로 자리 잡는 과정 자체가 제게는 무척 이채로웠습니다. 처음에는 '탈북'이라는 수식어가 싫어서 "그냥 피아니스트로 불러달라"고 주문한 적이 적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수식어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는 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때로는 수식어가 한 사람을 이해하는 지름길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수식어만으로 사람의 모든 걸 설명하기에 수식어는 너무나 짧고 단순하며, 세상은 너무나 복잡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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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평양에서 태어나 음악 교육을 받고 연주자로 활동하다 탈북(脫北)한 피아니스트가 서울에서 첫 피아노 독주회를 연다. 피아니스트 김철웅(33)씨는 다음달 13일 장천아트홀에서 리사이틀 ‘평화를 위한 기도’를 갖는다.

피아노를 20년 이상 연주해온 김씨지만 개인 독주회를 갖는 건 생전 처음이다. 그는 “북한에서는 간혹 세계적 콩쿠르에서 입상한 사람들이나 리사이틀을 가질 뿐 보통 연주 활동은 단체 위주로 하기 때문에 개인 독주회는 상상하기도 힘들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평양에서 당 간부였던 아버지와 국문학을 전공하는 대학 교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여섯살 때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2년 뒤엔 평양 음악무용대(현 김원균 명칭 음악대학)에서 영재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한국의 초·중·고 과정에 해당하는 인민반, 예비반, 전문반을 이 대학에서 마치고 학부에서 피아노를 전공할 때만 해도 자신의 삶이 이처럼 파란만장할 줄 몰랐다고 했다. “북한에서도 체르니로 공부하고 베토벤 소나타와 쇼팽을 연습하는 건 똑같아요. 자체적으로 만든 연습곡을 함께 공부하고 연주해야 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지요.”

  • ▲ 탈북 피아니스트 김철웅씨

대학을 마친 뒤 1995년 유학을 떠난 러시아 모스크바의 차이코프스키음악원에서 그의 삶이 달라졌다. 소련 붕괴 이후 서방 문물이 물밀듯 쏟아졌고, 당시 20대의 청년 유학생이던 그도 그 물결에 휩싸였다. “마침 수업이 휴강이라 학교 건너편 찻집에 갔는데, 평소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던 그곳에서 낯선 피아노 음악이 흘러나왔어요. 주인에게 물어보니 팝 피아니스트인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음악이라고 하더군요. 예쁜 선율과 화성에 무척이나 놀랐어요.” 그렇게 유학 시절 그는 재즈와 록음악을 듣기 시작했고 그 음악에서 자유를 느꼈다고 했다.

1999년 북한으로 돌아와 평양 국립 교향악단의 피아니스트로 근무했다. 하지만 연습실에서 클레이더만의 곡을 연주하다가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았고 시말서만 10장을 썼다. “그 뒤부터 주변 사람들도 저를 조금씩 피하기 시작했어요. 예전 한국에서 중앙정보부나 안기부에서 조사받는 것을 떠올리면 짐작하실 수 있을까요.”

그는 2년 뒤인 2001년 두만강을 건너 중국 옌볜으로 향했다. 북한에서는 음악 전문 학교와 러시아 유학까지 마친 음악 엘리트였지만, 옌볜에서는 길이 18m의 나무를 운반하는 노동자일 뿐이었다.

“교회에 가면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간 교회에서 한국 선교사들을 만났고, 두 차례 중국 공안 당국에 붙들릴 뻔한 위기 끝에 2003년 봄 한국으로 건너 왔다. 북한의 아버지는 충격으로 뇌출혈 끝에 숨졌지만 어머니는 이듬해 한국으로 모셔 왔다고 했다. 지금 김씨는 한세대 강사로 음악을 가르치면서 북한 인권 단체의 홍보대사로 일하고, 경남대 북한대학원에서 석사 과정도 밟고 있다.

처음에는 탈북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견디기 힘들어 “탈북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그냥 피아니스트라고 불러달라”고 부탁했지만 지금은 “제 이름 앞에 붙어 있는 수식어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이번 리사이틀에서도 모차르트의 소나타 14번 등과 함께 ‘돈돌라리’ ‘환희의 노래’ 같은 북한 곡을 함께 연주한다. 그는 “제 정체성에서 북한을 떼어놓을 수 없다면 당당하게 인정하고 그 음악들을 소개하면서 남북 교류의 자산(資産)으로 삼고 싶다”고 말했다.

/글=김성현 기자 /사진=최순호 기자

2002/7/3(수)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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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탈북지원 한국인 선교사 4명 중형 위기 (No. 474)  

중국: 탈북지원 한국인 선교사 4명 중형 위기
(국민일보) 중국정부가 자국내에서 탈북자 지원활동을 한 혐의로 체포한 한국인 및 한국계 목회자 4명에 대해 인도적인 처리보다는 최대 7년형의 중형 등 강경책을 선택할 것으로 알려져 국내교계가 반짝 긴장하고 있다.  중국선교전문가들은 이번 중국정부의 강경자세와 관련,한국정부가 그간 탈북자들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지만 최근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데 대한 ‘선(先) 경계성’ 의미와 NGO(비정부기구)의 활동에 대한 ‘초(超)경고성’ 의미를 모두 담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중국내부에 정통한 소식통은 “그동안 종교사무국과 공안들이 담당하던 해외선교사들의 소재 및 활동파악을 국가안전부에서 관리키로 하는 등 급진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전하고 “현재 중국정부는 이번 기회에 선교금지 등 실정법을 위반하고 있는 선교사들에 관한 기존의 블랙리스트 파일을 재점검하는 등 광범위적인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이는 이번 조치가 단순히 탈북자지원 사역자에 맞춰진 것이 아니라 중국내 주요지역에서 한족선교 및 소수민족선교 등을 통해 활동영역을 넓혀가는 기존의 선교사들에게도 적용된다는 반증이다.
또 이번 조치는 정치적인 고려와 함께 향후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는 한국선교사들의 활동을 사전에 쐐기를 박아 단기선교를 위해 선교사들과 연결돼 중국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도 선교라는 카테고리 속에서 중국을 파악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다차원적 전술과 전략을 내포하고 있다고 중국전문가들은 파악하고 있다.  중국어문선교회 박성주 대표는 “현재 중국정부가 전역에서 현지선교사들에 대해 대대적인 단속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위축돼 있다”면서 “이번 여름에 중국으로 단기선교를 떠날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행동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중화기독교 한성교회 유전명 목사는 “한국선교사들에게 특히 한·중, 중·북한관계 속에서 파악해야하는 탈북자문제에서 완전히 손뗄 것을 경고하는 조치”라면서 “중국정부의 전향적인 변화가 없는 한 제2, 제3의 강경책이 뒷따르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 브라운백 상원의원, 탈북자 북송 중지 촉구
미국 공화당의 샘 브라운백 상원의원이 자신의 출신 지역인 캔사스주의 한국계 미국인 류 필립씨의 서신을 긴급 공개하며 중국 내 탈북자의 강제북송 중지를 강력촉구하고 나섰다.  브라운백 의원이 공개한 이 서신에 따르면 류필립씨의 조카인 류미화씨(43)와 미화씨의 딸(19)이 최근 북한을 탈출하였으나 중국 공안에 의해 체포되어 다른 수십 명의 탈북자들과 함께 이번 주 중에 북한에 강제 송환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샘 브라움백 의원은 이 서신의 내용을 근거로 현재 류미화씨 일행이 내몽골 자치구 내의 만주리 소재의 한 군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으며 강제 송환될 경우 처형 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미국 정부는 류필립씨가 미국 시민권을 소지하고 있어 이들 탈북자들이 미국 시민의 가족이 명백한 점을 고려하여 이들의 북송을 막아야 한가고 말했다.
브라운백 의원은 이들의 북송이 임박했다는 절박함을 고려하여 의회 차원의 활동과는 별도로 양제츠 주미 중국 대사를 별도로 만나 이들의 북송을 반대하는 입장을 전달했다.

콜롬비아: 반군, 100여 도시 시장 살해 협박
(조선일보) 콜롬비아의 최대 좌익 반군 단체 '콜롬비아 무장 혁명군(FARC)'이 전국 100여개 도시 시장들을 살해하겠다고 위협, 시장 25명이 사임하는 등 정권 교체를 앞둔 콜롬비아가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FARC는 최근 국가 혼란을 야기할 목적으로 기존의 무장 투쟁과 병행, 각 도시 시장들에게 자진 사임하지 않을 경우 살해하겠다는 협박을 가하고 있다고 콜롬비아의 '엘 엑스펙타도르'지가 26일 보도했다.  이로 인해 이미 25개시 시장들은 "내 목숨과 가족들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며 사직, 행정 공백 상태가 초래되고 있다.
시장들이 이처럼 동요하고 있는 것은 FARC의 위협이 단순한 말 장난에 그치지 않고 있기 때문.  이미 8명의 시장이 FARC요원들의 테러로 사망했으며, 이 중에는 인근 도시 시장들과 FARC의 위협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러 가던 중 살해된 시장도 있었다.  안드레스 파스트라나 콜롬비아 대통령은 이에 따라 모든 시장들에게 방탄 조끼와 방탄 차량을 지급하고, 중앙 정부에서 훈련을 받은 경호 요원들을 긴급히 파견하라고 지시했다.  또 모든 시장들은 가능한 한 집무실 밖으로 나오지 말고 외부인들과 접촉을 피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수도 보고타의 안타나스 목쿠스 시장은 이에 대해 "반군들의 위협은 민주 제도와 경제를 동시에 마비시키려는 것"이라고 비난하고,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시민들과 접촉을 끊고 시정을 수행할 수는 없다"면서, "경호를 강화하고 불필요한 외부 노출은 삼가할 것이지만, 대통령 말대로 집무실 안에만 머물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AP통신은 이와 관련, 보고타 주재 미국 대사관이 방탄 조끼, 차량 지급, 경호원 파견에 소요되는 경비를 미국이 부담하겠다는 의사를 콜롬비아 정부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콜롬비아는 지난달 26일 대선에서 무소속 알바로 우리베 후보가 당선돼 오는 8월 정권 교체를 앞두고 있다.  1983년 아버지가 FARC에 의해 살해된 알바로 당선자는 반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을 다짐하고 있다.

몰도바: 신형법에 종교 탄압 조항 포함
구소련 출신 국가인 몰도바의 인권운동가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새로 개정되는 형법의 몇몇 조항이 구소련의 1960년대의 형법과 거의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며 깊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Keston News Service의 보도에 따르면 지난 4월 18일에 개정된 신형법 의 186조의 내용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 조항은 "누군가의 건강에 해롭다고 판단될 경우나 개인의 일상적인 생활이나 공공활동이나 국민으로서의 의무의 이행을 방해할 경우 종교의식이나 종교적 활동을 제한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만일 이를 위반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이나 이에 상당하는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문제는 이 조항이 지나치게 애매하고 포괄적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나이가 많은 종교지도자들은 과거 60년대의 구 소련 시절에 똑같은 조항이 존재했으며, 이 조항이 소련의 종교를 사실상 말살하는데 악용되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당시 소련 정부는 방언이 사람의 정신건강을 해롭게하며, 예언이 공공생활과 사회 질서를 어지럽게 한다는 이유로 오순절계통을 탄압했었다.  또 교회에서 평화와 원수에 대한 사랑을 설교하면 공산주의의 기본 이념인 계급투쟁과 국방의 의무를 반대한다고 트집을 잡아 교회를 해산시켰었다.  그렇기 때문에 몰도바 교회 지도자들은 현재의 상황이 당시와는 다르기는 하지만 이 조항이 교회에 대한 탄압이나 교회 길들이기에 충분히 악용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회교원리주의 정당, 2개 주에 이슬람 율법 도입 추진
말레이시아는 회교를 국교로 하면서도 경제개발과 이를 위한 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하고 있는 나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레이시아는 여성의 배꼽티나 청바지 같은 다른 회교국가에서는 파격적인 장면도 낯설지 않다.  그런데 말레시이사의 13개 주 가운데 2개 주에서 다수당의 위치를 점하고 주지사를 보유하고 있는 회교원리주의 정당이 연방정부와 대다수의 사회단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집권하고 있는 주에서 샤리아법과 유사한 이슬람법의 도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흔히 파스당(PAS; Parti Islam se-Malaysia)이라고 불리는 이 회교원리주의 정당은 지난 6월 23일 각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집권하고 있는 2개 주에서 이슬람법 도입을 추진한다고 선언했다.  PAS는 법안의 기본 골격도 함께 소개했는데, 이 법안대로라면 다른 주와 비교하여 여성의 인권이 크게 뒷걸음질치고, 범죄자들에 대한 형벌이 기존의 금고나 징역, 벌금에서 돌로 쳐죽이기, 사지절단 등 엽기적인 내용이 추가된다.
이와 유사한 법을 이미 도입한 나이지리아의 경우 기독교인들의 반발과 이에 대한 회교도들의 과격 행동 등으로 수 천 명이 사망하는 등 심각한 사회 문제가 발생했었다.
http://www.wmission.net/technote/read.cgi?board=DailyMissionNews&command=window&nnew=1&r_search=%C3%87%C3%91%C2%B1%C2%B9&ssha=1&x_number=1025647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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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아시아방송: http://www.rfa.org/korean/features/defectors_world/2007/09/26/yu_sang_joon/

제3국을 떠도는 탈북자들

               

                 "중국에서의 삶은 천국이 아니고 지옥이었습니다."

중국에서의 삶은 천국이 아니고 지옥이었다

제가 북한에서 바라보는 중국은 그야말로 천국이었습니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빨강 파란 노랑색들로 형형색색을 이루는 거리와 건물들의 반짝이는 불빛의 조화는 아름다운 천국의 무릉도원을 연상케 하였습니다.
저희 쪽에는 1년 12달이 가도록 전기 불을 볼 수 있는 날짜와 시간이 얼마 안 되지만 강 건너편 저쪽에선 매일 밤 반짝이는 불빛이 마냥 살아 숨쉬는 하나의 생명체와도 같았습니다.
저희는 그때 몇 해째 전기 공급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하였습니다.
간혹 가다 하루에 몇 시간 공급이 될 때도 있었고, 저녁이면 집에 불이 없어 컴컴한데서 손더듬이로 일해야 하였습니다.
멀쑥한 시래기 죽물도 저녁이 늦어 어두워지면 내입에 들어가는지 남의 입에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나마도 저녁 시간만큼은 불을 보려고 석유등이나 디젤유로 등을 만들고, 아니면 소나무 옹이를 잘게 쪼개어 거기에 불을 붙여 어둠을 밝히었습니다.
때로는 다 꿰져서 너덜너덜한 신발짝을 주어다 고무를 뜯어 짤게 쪼개어 거기에 불을 붙여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1시간만 불을 켜놓으면 콧구멍은 그을음으로 새까맣게 됩니다.
그것도 다행이었죠.
이러다보니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륙은 한마디로 어둠을 모르는 낙원으로 보였습니다.
저도 거기에 가면 꼭 천국의 행복에 도취될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북에서 그처럼 부럽고 황홀하게 바라본 중국은 저에게서 절대로 천국이 아니었고 낙원이 아니었습니다.
화려한 불빛 속에 감춰진 인간들의 추악함은 그야말로 저를 경악케 하였습니다.
1998년6월4일 검푸른 두만강을 북한 경비대 군인들의 추격을 받으며 건너 중국 땅을 밟은 저의 가슴은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지만 그것은 그저 잠시일 뿐이었습니다.
당시 두만강 연선 중국 내 주민들(조선족 교포)중 일부, 돈에 눈이 어두워 인간의 양심을 팔아먹은 자들이 강변을 지키고 있다가 강을 건너오는 북한의 여성들을 강제로 붙잡아다 팔았습니다.
연변 내 조선족한테 팔 때에는 기혼여성은 2000~3000, 미혼여성은 4000~5000위안(중국인민페)씩 팔고, 내륙지방의 한족들한테 팔 때에는 한도 끝도 없었습니다.
얼마를 받느냐는 한마디로 말하여 자기들의 능력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뱃속에 아이를 갖고 (5~6개월)탈북하였는 데, 당시 한 몇 달만 돈을 벌면 고향에 가서 아이도 낳고 그럭저럭 먹고 살기도 괜찮아지리라는 희망을 갖고 탈북 하였습니다.
그런데 강을 건너자마자 인신매매하는 인간쓰레기 같은 조선족 교포들한테 같이 탈북 한 친구와 같이 붙잡혔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뿐이 아니고 저의 친구도 임신 8개월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저희를 강제로 끌어다 빈집에 가두어두고 자기들이 교대해가면서 우리를 지켰습니다. 저희는 울며불며 사정하였습니다.
저희를 놓아 달라고...

나쁜 짓 안하고 돈만 벌어 고향에 도로 가야 한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또 빌었지만 그들의 대답은 하나같이 우리가 자꾸 시끄럽게 굴면 중국공안에 고발해 버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희를 밖에 불러내다 차에 타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라는 대로 하였더니 어느 골목골목을 돌고 돌아 개인이 운영하는 자그마한 산부인과 병원에 데려 가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저희더러 아이를 지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울며불며 사정하고 하라는 대로 다하겠으니 아이는 못 지운다고 하자 "죽겠냐 아니면 살겠냐. 시키는 대로 하라"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여 자기 한목숨이 아까워 아직 이 세상에 빛도 보지 못한 불쌍한 어린 생명을 죽여야만 하였고 태어나지도 못한 자식한테 평생을 죄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애를 지우고와서 한 며칠 지나 출혈량이 작아지니 (그것도 주인 여자한테 시켜 저희 보고 물어보았음)저희보고 하는 소리가 "너희 오늘부터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게 되였다.
가서 살아보고 좋으면 살고 마음에 안 들면 연락해라. 그러면 더 좋은 남자를 소개 시켜 줄게. 그리고 시집갔었다 하지 말고 아직 처녀라 해라. 밤에 잠자리에 들 때 순결을 잃어서 피가 나온다 해라" 이렇게 뇌까리었습니다.

이렇게 제가 팔려간 집의 남자는 소아마비로 다리가 장애인이고 거기에 성장장애와 성격도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이 또한 15년 차이가 되였습니다.
제가 그 집에 들어가 너무 서러워 밥도 못 먹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자 저를 때리면서 썩어지지 않고 살겠으면 조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를 팔아먹은 그자들이 와서 저보고 재미가 좋으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싫으면 다른 사람한테 보내주겠다는 것입니다.
다른데 안 간다고 하니 네가 싫으면 그만두라"하고는 씽하고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밤에 자는데 갑자기 중국 공안이 집에 쳐들어왔습니다.
꼼짝도 못하고 붙잡혀 가보니 공안이 아니고 저를 그 집에 팔아먹은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보고 이죽거리면서 하는 말이 한족로반(술집 사장)이 네사진보고 너하고 살겠다고 하니 그쪽에 가면 부잣집이고 사장 마누라가 되어 잘살겠으니 팔자를 고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기차타고 길림으로 가서 역에 내려 기회를 봐 탈출하는데 성공 하였지만 어디에도 저를 오라는 곳은 없었습니다.
거리를 정처 없이 헤매다 마침 한식당에 들어가서 머물게 되였습니다.
말이 안 통하여 손짓 몸짓 다해 가며 겨우 찾은 거처 지였습니다.
이후 같은 민족이 사는 고장이 그리워 연변으로 나왔는데 거기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교포들의 대접에 아연 질색 하였습니다.
중국 땅에서 흘린 저의 눈물이 한평생 제가 흘려야할 눈물 중에 80%가 되는 것 같습니다.
때론 좋은 사람도 만나 도움도 받았지만 우리 탈북자들을 업신여기고 개, 돼지보다 못하게 취급한 그들을 생각하면 너무 너무 치가 떨립니다.
제가 북한에서 그토록 동경하고 부러워했던 중국은 저에게 하나의 지옥이었습니다.
수령을 잘못 만난 민족의 아픔이 아니겠습니까.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 하였는데 백성이 주권이 없고 무너져가는 사회의 배경 속에서 이국땅의 방황은 저를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그냥 하루하루 먹고 자고 하는 것으로 목숨이나 지키는데 급급하게 만들어 갔습니다.
지금도 중국 땅에서 수많은 우리 탈북자들이 쓰러져가는 생명의 빛을 잡고 서럽게, 서럽게 울고 있습니다. 수많은 탈북여성들이 중국 사람들에게 팔려가 아이를 낳고 살지만 며느리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고 다만 씨받이일 뿐입니다.
거기에 태여 난 자식들 또한 엄마처럼 국적도 취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북한국적도 아니요 중국국적도 아니요 국제고아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자식을 바라보는 엄마들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기고 있습니다.
불쌍한 우리 형제들을 안전하고 인권이 보장된 사회에서 살수 있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좋으련만. 정부에서도 중국 정부의 눈치만 보지 말고 탈북자 문제에서 강경하게 맞서 주었으면 좋으련만…,
정치계에는 우리가 모르는 무엇이 있어서 그렇게 못하겠지...
하지만 무식한 저로서는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오직 파도 사나운 망망대해에서 외롭게 이리 저리 떠밀리고 찢기고 사는 우리 형제들을 빨리 구원하여주었으면...
정부에서는 왜 그렇게 안하는지 야속하게만 생각됩니다.
2005년 10월 25일 아침이슬 출처:탈북자사이트 http://www.nkd.or.kr/
 

끊임없이 팔리고 팔려다니며.....

김 춘 애
탈북여성(2003년 6월 입국)
화룡시 변방구류소, 무산군 노동단련대, 청진 집결소 경험자


1. 비극의 시작

저는 평양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1997년에 탈출하여, 한국에는 2003년 6월 15일에 들어왔습니다. 중국에서의 인신매매는 제 자식들도 당했고, 제가 직접 본 것도 많았습니다. 북한에서는 1995년부터 배급이 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평양에서도 1995년 6월부터 배급이 줄어들었습니다. 저는 인민반장이었기 때문에 반원들을 관리해야 하는 주어진 임무가 있어서 장사도 하기 힘들었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맏딸은 1년 동안 청년근위대에 나갔습니다. 근위대 생활은 실제 군대생활하고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자꾸 딸에게 도둑질을 시켰습니다. “벽돌 채워라,” “모래 채워라.” 그래서 딸은 도둑질을 하다가 잡혀서 매를 맞기도 했고, 결국 집으로 도망쳐 왔습니다. 3일째가 되니까 1개 분대가 잡으러 왔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밤새 설득하다 못해 마지막에는 때리기도 하면서, 군대를 등지는 건 조국을 배반한 것과 같으니 강압적으로 끌고 새벽에 다시 군대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열흘만에 다시 도망쳐 나왔습니다. 또 도둑질을 시킨 것이었습니다. 또 문제가 제기되니까 부소장이 우리 애만 24시간 보초근무를 세우고, 못살게 한 것이었습니다. 청년근위대 안간 것, 배치 받고 자기 배치지역으로 안간 것, 학교 안간 것 등 나쁜 것들만 막 적어내니까, 저는 딸을 숨길 수도 없고 너무 속상해서 무산으로 보냈습니다.

1997년 8월 15일에 기차에 태워 딸을 보냈는데, 한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습니다. 뭔가 잘못됐구나 생각이 들었지만 연락체계가 다 끊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막내아들을 집에 두고 16살 된 둘째 딸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담당 주재원을 찾아가 통행증을 부탁했지만 거절했습니다. 국경에는 도강생(월경자)들이 많기 때문에 안 되며, 옛날에는 안면(뇌물)도 통하고 했지만 이제는 그마저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살던 곳의 지도원을 찾아가 당증까지 맡겼습니다. 당증은 곧 정치적 생명이니까 믿어주었고, 9·9절에 받는 고급담배 두 갑을 주고, 통행증이 분실되었다는 확인증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둘째 딸은 “당증 맡기고 갔다가 사고가 났다간 큰일 난다”고 펄쩍 뛰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는 중국에 가서 딸을 구해오겠다는 생각밖에 없었기 그런 생각조차 못했던 것입니다. 잘못되면 정치적 생명이 끊길 수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어 다시 돌아가 당증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확인증을 반납하고 당증을 돌려받았습니다. 결국 안되겠다 싶어서 대동강을 지나 강동까지는 통근열차를 타고, 어머니와 막내동생이 사는 청천까지 걸어서 갔습니다. 큰 딸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는 펄쩍 뛰시며 무산에는 도강생이 많은데 굶어죽지 않았다면 중국으로 넘어갔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중국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떠나는 날 아침에 어머니가 소금을 뿌려주셨습니다.

막내동생의 신랑이 안전부에 있었기에, 성천군 집결소에 가서 통행증 분실 확인서를 받아 성천 역전에 가서 청진까지 기차표를 받았습니다. 검열이 계속되었고, 결국 걸렸습니다. 남편이 압록강체육단에 있다고 속여 아들이 있으면 내가 체육단에 넣어주겠다고 봐달라고 했습니다. 다행히 험한 대우는 받지 않았습니다. 통행증이 없는 사람들을 한데 모아 부령에서 내려놓으려고 하기에 줄을 지어 내리던 중간에 살짝 빠져나와 다시 기차에 올랐습니다. 기차는 다시 달려 부령선을 지났지만 국경선 근처에 이르자 다시 검열이 시작되었고, 결국 또 걸리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남은 돈은 100원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를 찾으러 가니 제발 봐달라고 애걸하면서 그 돈을 모두 주었습니다. 더 이상 그렇게 무산까지 가면 다시 걸릴 것 같아 철산에서 내려 남동생이 있는 무산까지 15~20리 정도를 둘째 딸과 함께 걸었습니다.

<무산에 도착하니 남동생도 얼굴이 새까매져 있었습니다. 맏딸이 시누이와 함께 사발을 팔러 중국으로 건너간 것 같은데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딸이 없다는 걸 알았으니, 무산군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혹시나 10월 10일까지 기다려보다가, 중국으로 건너갈까 아들을 남겨두고 온 평양으로 돌아갈까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래도 아들은 평양에 있고 친척들이 있는데, 중국에 간 딸은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무슨 일을 당할까 더 걱정이 됐습니다. 그래서 갈림길에서 망설이다가 중국으로 떠나기로 했습니다. 10월 10일이 당창건기념일이라 군대도 휴일이겠거니 생각하고 건너려고 했지만, 눈이 내리는 통에 다음날인 11일 저녁 6시에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강을 건너려는데 눈이 녹아 불어난 물살에 둘째 딸을 놓쳤습니다. 한 두 시간 찾지 못하고 헤맨 것 같습니다. 이리 저리 헤매다 결국 저도 떠내려갔는데, 운 좋게도 딸은 돌 하나에 걸려 살아 있었습니다. 은인과 같은 돌이었습니다. 둘째 딸을 겨우 찾아 인공호흡을 시켜 정신을 차리게 하고 강 건너 둑으로 올라갔습니다. 근데 올라가 보니 변방대 차가 있었습니다. 도로로 나서려면 5m 정도의 바위를 타고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100m 정도 옮겨가는데 차소리가 들리면 다시 숨고 숨기를 반복했습니다. 차 불빛에 보니 변방대 같았습니다. 그래서 차가 지나간 다음에도 도로로 나서지 못하고 맨발로 논밭을 뛰어갔습니다. 뛰어간 곳에는 한 농가가 있었고 중년의 조선족부부와 딸이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 옷이 다 얼어 있으니 조선사람인 것을 알아보고 이불도 씌어주고 옷도 주었습니다. 그렇게 30분쯤 몸을 녹이고 있으니까 하얀 이밥(쌀밥)까지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보고 둘째 딸은 평양에서 굶고 있을 동생이 생각난다며 울었습니다. 저도 이밥은 1996년 이후 보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2. 계속되는 인신매매

그 부부로부터 중국에서는 조선여자들을 가리켜 나이도 상관없이 모두 ‘돼지’라고 부르며, ‘한 마리, 두 마리’ 하며 다 팔아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 곳에서 얼마간 일하는 것이 안전하겠다고 생각하여 일자리를 부탁했습니다. 그 부부로부터 소개 받아 화룡시에서 보모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한지 일주일 정도 지난 어느 날, 채소를 사러 장마당에 갔다가 돌아오니 둘째 딸까지 없어졌습니다. 딸이 어디 갔는지 물어보아도 그들은 모른다고만 대답했습니다. 저는 딸 찾으러 정신병자처럼 한 달 동안 헤메다 11월 5일, 22살 된 한 조선여자를 만났는데, 팔려와 있었던 그녀는 갈 곳 없는 제 처지가 딱해 보여 자기 집에 가자고 했습니다. 3일 정도 그 집에 머무르며 저보다 10살 아래의 한 남자를 알게 되었는데, 두 딸을 다 찾아주겠다는 말에 동하여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식모살이하던 집의 약도를 그려주었습니다. 그가 그곳을 찾아가보니 처음에는 모른다고만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때 용정시 깡패였던 남편이 그곳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데리고 가니까 가르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보모로 있던 그 집에서 둘째 딸을 팔아먹은 것이었습니다. 주인집에서 직접 못 팔고 자기 친구에게 넘겼다고 했습니다. 계속 알아보니, 딸은 흑룡강성 마룡현으로 4,000원에 팔려간 상태였습니다. 그곳에 찾아가니까 팔아먹은 당사자가 잠적하여 찾지 못했습니다. 두 달 동안 못 찾고 헤맸지만, 인신매매범도 수중에 돈이 다 떨어져 화룡현에 와있다는 것을 알고 붙잡았습니다. 16세인 딸은 팔려간 곳에서 매일 울었고, 불쌍해보여서 매일 이웃집들에서 재워주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동네에는 약 100세대가 있었는데 거의 각 집마다 조선여자가 팔려와 있었다고 합니다. 남편은 경찰을 꼬아내기 시작했고, 시아버지로부터 4,000원을 내와서 양력 설날 즈음 딸을 데리고 왔습니다.

하지만 파출소에서는 계속 저희들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다행히 마침 파출소장이 남편과 동창이라서 돈을 좀 먹였습니다. 그런데, 옆집에 살았던 혜영이라는 조선여자에 대해서는 파출소에서 계속 잡으려고 했습니다. 가난했던 그 집에서는 그 여자를 인신매매꾼들에게 다시 팔았습니다. 그녀는 그 집에 팔려 와서 열 세달 동안 며느리 구실을 했는데, 길림에 있는 한족에게 또 팔아먹은 것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다시 화룡의 인신매매꾼에게 넘겨졌고, 화룡에 왔다가 또 다시 어디론가 팔려 갔습니다. 문제는 그녀가 길림에 있는 동안, 인신매매꾼들에게 화룡현에서 살던 옆집에 조선에서 온 모녀가 함께 있다는 말을 해버린 것이었습니다.

인신매매꾼들로서는 저희 집 하나를 치면 두명이 나오는 돈벌이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한달 가량 저희들을 감시하고 순찰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게 1999년 5월 즈음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저희들은 낮에는 하루 종일 일하고, 밤에는 소외양간에서 숨어서 잤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순찰을 돌아도 찾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저희들 또한 인신매매꾼들이 저희들을 잡아가려고 밤마다 순찰을 돌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너무 아프고 해서 딱 하루만 집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저는 오랜만에 잠깐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영화하겠다 싶어 정신이 빠져 문도 걸지 않았습니다. 술 좋아하는 남편은 취해서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9시 20분 정도 되니 세명의 인신매매꾼들이 갑자기 나타나 하남 파출소에서 왔다고 하면서 후다닥 방안으로 들이닥쳤습니다. 황급히 남편을 깨우려고 하니까 못 깨우게 제지했습니다. 급한 김에 손길이 닿은 남편의 허벅지를 꼬집어 비틀었습니다. 어슴푸레 잠이 깬 남편이 놀라 눈을 뜨자, 인신매매꾼들은 그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머리를 발로 눌러 밟았습니다. 그들은 파출소에서 나온 것처럼 남편을 속이기 위해 호구를 보자고 했고, 남편이 바로 앞집인 시댁에 있으니 가져오겠다고 둘러대니까 나가지는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더니 딸과 저의 팔을 비틀면서 무조건 옷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했지만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밖으로 나가서라도 이 사람들이 진짜 파출소에서 왔는지 재차 확인하려고 하니까 제 뺨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딸이 “엄마 환자인데 왜 때리냐”고 악을 쓰니까 그들은 “그래 너희 엄마 심장병 있어서 환자인거 다 안다”고 윽박을 질렀습니다. 벌써 저희들을 감시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단은 순순히 따라나서는 척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가면 다시 못올 집이니, 반드시 가지고 갈게 있다”고 말했습니다. 당증과 시민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건 가지고 가서 뭐하나”하는 것이었습니다. 파출소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가서 보니까 파출소 차도 아닌 택시가 서 있었습니다. 딸에게 도망가라는 눈짓을 보냈습니다. 택시 쪽으로 끌려가던 딸이 오줌이 마렵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냥 그 자리에 앉아서 싸라”고 말했고, 딸은 정말 앉아서 오줌을 싸는 척 하다가 후다닥 밭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농촌이고 밤이라서 온통 새까맣기 때문에 금방 눈앞에서 달아났습니다. 인신매매꾼들이 당황한 틈을 타 저도 도망을 쳤습니다. 도망가면서 저희가 비명을 지르니까 그 사람들은 황급히 택시를 타고 달아났습니다. 그러던 찰나 저는 건너 시댁으로 달려가 사람들을 깨웠습니다. 그렇게 시부모님들이 밖으로 나오니 그 때부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그렇게 위험에서 일단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2달도 채 안되어 1999년 7월에 그들이 또 들이닥쳤습니다. 그날은 비가 축축하게 내려 외양간에 머물지 못하고 집안으로 들어가 자야했습니다. 밤 11시쯤 되었는데, 그 때는 바깥에서 남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그날도 술에 취해 깊은 잠에 들어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일로 개를 기르기 시작했는데, 개가 짖는 통에 무서워서 딸을 데리고 뒷문으로 도망을 치려고 했지만 이미 포위된 상황이었습니다. 한 남자가 칼을 배에 들이대며 저의 입을 틀어막아 옷도 챙겨 입지 못하게 하고 파출소 차인 것처럼 검게 칠한 차에 실어 끌고 갔습니다. 소리도 못 지르고 뛰지도 못하고 그대로 끌려갔습니다.

도착해 보니 화룡시 소가자 마을이었습니다. 찬찬히 보니 그 놈들은 한패가 아니라 두패였습니다. 운전수는 차를 대는 한 패였고, 뒤의 두 명은 납치를 맡는 다른 패였습니다. 운전수는 보초를 섰고, 둘은 저희를 데리고 꼬불꼬불한 길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좁은 곳에 가둬두고 며칠 동안 감시당하며 지냈습니다. 제가 몸이 안 좋으니까 일부러 말이 통하지 않는 한족병원으로 데려갔고, 혹시나 말이 통할까 계속 감시 했습니다. 그들은 한족말로 계속 전화를 하는데 분위기상 저쪽에서 저희 딸을 달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딸이 팔려가는 것이 어쩔 수 없다면 제발 저도 같은 마을로 팔려가게 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들은 조금이나마 감동하였는지 딸을 그 한족들한테는 못주겠다고 했습니다. 어쨌든 저희들은 화룡현 탄광이 있는 곳에 만원씩에 팔려가기로 결정되었고, 길림에 있는 사람들이 사러 온다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딸은 그 때 삼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갇혀있던 그 집 주인이 몰래 다가와 조용히 하는 말이 “가다가 도망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과 함께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일을 잘해서 한달에 500원씩 번다며, 같이 일하면 얼마든지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좋다. 전화번호를 달라”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너무 덥고 해서 앞 개울에 목욕을 하러 나갔는데, 화장실이든 어디든 말도 없이 나갔다고 막 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들 중 한 명과 언성을 높이며 싸웠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옆집에 사는 한족사람이 조선말을 알아듣고 헌정대에 신고를 했습니다. 눈치를 챈 집주인도 나가고 저와 싸운 놈도 달아난 뒤, 혹시나 했는지 한 명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제 집주인도 안 나타나고 우리도 도망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밖에서 누가 전화기 검열을 하러 왔다고 하면서 들어왔습니다. 제가 노골적으로 신분증을 보자고 했고 북한에서 왔다는 것도 말했습니다. 알고 보니 옆집에서 신고가 들어가자마자 파출소에서 집주인 패거리를 계속 감시했던 것이었습니다. 달아난 줄 알았던 집주인은 이미 잡혀서 족쇄가 채워져 있었고, 저는 헌정대에서 나온 듯한 사람에게 삼촌에게 빌려준 돈을 받으러 온 것 뿐이라고 했습니다. 헌정대는 집주인을 마구 때렸고 우리는 변방대로 넘겨졌습니다.


3.화룡시 변방구류소에서의 40일

거기서 12살짜리 여자아이를 만났습니다. 가정이 뭔지 시집이 뭔지도 모르는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같이 살던 남자 전화번호를 옷춤에 감추고서는 “다시 중국에 오게 되면 그 아저씨를 찾을거야”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너 그래서 그 아저씨가 뭐가 좋니” 물어보니, 밥을 해서 무릎에 앉혀놓고 먹였다는 것입니다. 12살짜리면 한참 부모 손 밑에서 어리광 부리고 응석부리고 공부할 아이인데 그 아이가 뭘 알았겠습니까. 그 아저씨가 매일 무릎에 앉혀 밥 먹이고 하다가 시장에 옷 사 입히러 나왔다가 잡혔다고 했습니다.

변방대에 있으면서 별별 이야기를 다 들었습니다. 가만 들어보면 질나쁜 조선족들은 북한 여자를 파는데, 거저 팔지도 않았습니다. 대개 저희가 실컷 데리고 놀다가 파는데, 고분고분 응하지 않으면 족쇄를 채워 강간하지 않으면 스패너를 자궁에다 꽂기도 한다는 끔찍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무산에서 온 한 여자는 북한에 남편과 애가 두명 있는데 그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팔려가면서 남편에게 500원을 주고 나왔습니다. 남편은 자기 각시를 팔면서 임신만 되지 말고 돌아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가정을 유지하려니까 각시마저 팔 수밖에 없었던가 봅니다. 그런데 그녀는 석달 동안 한족이랑 결혼해서 살다가 임신이 되었습니다. 한족말도 모르니까 병원을 찾아가 유산시켜달라고 할 수도 없어서 자기 발로 파출소에 뛰어 들었다고 합니다. 한족 시누이가 파출소로 찾아와 이제라도 동생이랑 살겠다면 돈을 들여서라도 꺼내주겠다고 하는 걸 거절했다고 합니다. 북한에 두고 온 새끼들이 있어서 제 발로 잡혀간 것이었습니다. 엄마가 딸을 팔아먹은 것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옛날에 심청이가 자기 아버지를 위해서 쌀 삼백섬에 팔려갔다는 이야기는 전설이 아니고, 지금의 북한이 그렇습니다. 저는 변방대에 40일 동안 있으면서 그걸 알았습니다. 딸이 엄마를 위해서 팔려가질 않나, 마누라가 남편과 자식을 위해서 팔려가질 않나, 식구를 먹여살리기 위해서 자기가 자기 몸 하나를 희사하질 않나. 그곳에 1999년 7월 2일에 들어가서 40일만인 8월 10일 북송되어 무산보위부로 끌려갔습니다.


4. 치욕스러웠던 무산보위부


무산보위부로 끌려갈 당시까지도 우리는 납치꾼들이 비싼 값에 우리를 팔아먹으려고 입힌 찐바바지(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미국 청바지 입고 왔다며 보위부 회관에서 당장 벗기는 것이었습니다. 여름인데 딸이 팬티만 입고 또 뭐 입었겠습니까? 그래서 한 여자가 입고 있던 춘추내의를 얻어 입히고 저는 하늘하늘 비치는 잠옷바지를 입었습니다.

무산회관에서 집주소를 조사하고 보위부로 보내졌습니다. 가니까 여자들이 열명 있었는데 모두 발가벗겼습니다. 머리에 낀 핀침까지 다 벗겼습니다. 가슴이 큰 여자들은 그 밑까지 들춰 검사합니다. 옛날에 누가 가슴 밑에 돈을 감추고 반창고까지 붙이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발가락 짬(사이)이며, 머리카락 속까지 다 검열합니다. 그리고 여자들은 팔을 머리 뒤로 넘겨 손가락을 끼게 하여 60번 앉았다 일어났다, 뽐쁘훈련이란 걸 시킵니다. 자궁이나 항문에 돈을 숨겨뒀으면 힘주면 나온다고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60번 일어났다 앉았다를 시키는데, 관절이 안좋아서 도저히 못하겠다고 하니까 그것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겨우 60번을 채우고 나니까 모두 엎드리라고 했습니다. 돈이 나왔나 안나왔나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여자들 생리대 갈피갈피까지 다 검사합니다.

2달 짜리 갓난아기를 한족씨라며 책으로 그 갓난아기 머리통을 막 때립니다. 애는 소리치며 막 웁니다. 애가 뭘 압니까. 태어난 것도 죄입니까. 무슨 죄를 지었다고. 임신한 여자들을 발로 막 찹니다. 저는 그 때 심장이 안 좋아서 약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도 다 제 놈들 주머니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다 검열해서 옷, 전화번호, 돈까지 모조리 뜯어 검사하고 무산군 안전부로 보냅니다. 군안전부에서 또 검사합니다. 거기서 그 날로 단련대로 보내집니다. 군안전부에서 단련대까지 그 먼 거리를 뛰어가도록 시킵니다.


5. 노동단련대의 비정함

단련대에 가니 저녁도 안주고 굶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딸이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담당주재원이 우리 딸을 데리고 들어갔는데 한시간만에 맞아서 새파래져서 돌아왔습니다. 이 사람들이 보기에 분명 우리가 평양사람인데 딸을 붙잡아 평양사람인가 속였는가 알아보기 위해서 때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애가 무슨 죄가 있냐”고 막 따졌습니다. 초소장이랑 두루두루 말해보니까 기막히게도 동생 신랑과 친구지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전해져 동생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면회를 안시켜줘서 울타리 높은 데서 동생은 밖에서, 나는 안에서 소곤소곤 말했습니다.

먹는 거라곤 썩어서 시꺼먼 밀가루로 죽을 쑨 것이었습니다. 냄새가 너무 심해서 한입도 못먹겠는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걸 더 먹겠다고 식사시간이면 우리 주변으로 모였습니다. 본 지방 사람인 무산아이들이 콩이랑 강냉이를 가져오면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걸 바꿔 먹기 위해 옷도 다 벗어주고 팬티만 입고 다니면서도 창피한 줄도 몰랐습니다.

어떤 여자는 강간을 너무 심하게 당해 자궁이 다 썩어서 뒤집어져 있었습니다. 걷는 것조차 힘들어 다리를 벌리고 걸었는데, 밤에는 썩은 자리가 저려서 잠도 못자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런 여자도 20리를 뛰게 했습니다. 8월이니까 뛰어다니면서 배추 영양단지도 키우게 하고, 무산에 있는 높은 산에 올라가 나무도 해오게 합니다. 저는 다리가 팅팅 부어서 뛰지 못하니까 빨리 뛰라고 뒤에서 돌로 막 깝니다. 그런다고 뛸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딸도 엄마 보위하겠다고 같이 맞으면서 뒤따라 달렸습니다.


6. 또 다시 두만강을 넘어

그렇게 3일이 지나 8월 14일이 되었습니다. 딸이 감기를 앓아서 막 열이 나고 설사가 나서 보초 서는 아이를 보고 약을 가져다 달라고 했습니다. 작업을 하러 나가는데 뜬금없이 저에게 대열에서 떨어지라고 하기에 일단 떨어져 나오면서도 왜 그런 줄은 몰랐습니다. 경리가 나를 불러 외출시키면서 돼지고기 2kg에 맛내게 고춧가루를 사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동생이 통하는 사람과 짜고 그런 줄도 모르고 딸을 거기다 두고 나왔습니다. 아침에 나가서 저녁 5시까지 들어오라고 하면서 그래도 경리가 뒤따라 다녔습니다. 그래서 먼저 동생네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동생이 하는 말이 “언니, 빨리 (중국으로) 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너무 아파서 변도 못보고 손이 다 마르고 다리는 한없이 부어 있었습니다. 사람이 속이 타면 변이 새까맣게 타서 간신히 똘롱똘롱 떨어집니다. 일 보는게 애 낳는 것보다 더 힘들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몸이 안 좋으니까 창피라는게 없었습니다. 그걸 보고 우리 동생은 일단 저라도 먼저 살아나가야 한다고 더 다그치며 빨리 도망가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무산군 바닥에서 뛰어봤자 어디로 뛰겠습니까. 5시까지 들어오라고 했는데, 5시면 벌써 기차도 안 다니고 금방 잡힐텐데. 그래서 저는 그날로 두만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첫째 딸부터 찾으러 다시 중국으로 나갔습니다. 평양시는 사람이 하나 없어지면 금방 수사포치(수배)를 했습니다. 인민반장이었던 사람이 없어졌고, 그리고 제가 무산으로 간다고 방향을 알렸으니까 무산 보위지도원들이 두 세 번씩 무산까지 잡으러 왔지만 동생들은 언니 여기 온 적 없다고 했다고 합니다. 때마침 1997년 9월에 무산쪽에 열차사고가 많이 나서 사람들이 꽤 죽었는데, 그래서 저는 거기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쨌든 중국으로 가기 위해 무산에서 칠성다리를 건너 산을 넘었는데, 오르막길은 그래도 걷겠는데 관절에 부종이 와서 내리막길을 못 걸을 지경이었습니다. 오로지 살아야 하니까 질질 끌고라도 가야하고, 5시까지 무산군을 벗어나지 못하고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에 새끼도 뭐고 모르겠고, 동생이 딸은 알아서 봐주겠다고 했으니 무조건 뛰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중국으로 뛰려는데 장마철이라 물길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렇잖아도 삐쩍 말라 힘도 없었기 때문에 강물에 떠내려갔습니다. 그러다가 정신을 잃었는데, 한 조선족 할머니가 논판에 씨앗을 뿌리러 나왔다가 정신을 잃고 떠내려 온 저를 업어다가 화룡시 룡현에 있는 집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깨어나 보니 하혈을 해서 온통 피였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와 이야기를 하다보니 제 조카들도 거기를 건너 다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 동생도 그 집을 건너다니며 저를 찾겠다고 수태 헤매고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게 바로 운명이라는 것인가 봅니다. 그래서 그 집에서 3일 동안 있으면서 한국으로 먼저 간 남동생이 남겨둔 삐삐 번호로 연락을 해보았지만 연결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3일 동안 그집 강냉이밭에 숨어서 꼬박 잠을 잤습니다. 그러던 중 화룡현 남편과 3일만에 연락이 닿았고, 남편은 택시를 타고 달려와 저를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딸을 살려야겠기에 옷가지 입던 거랑 두루두루 팔아 남편에게 500원을 주어 보냈습니다. 저를 살려준 할머니를 통해 북한으로 연락이 닿을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 있던 동생 조카가 국경지역으로 잠깐 나와서 딸은 탈출한 엄마 대신에 무지하게 매를 많이 맞았다는 소식을 전하고 돈을 갖고 돌아갔습니다. 딸은 걸상으로 머리를 맞는 등 나를 잡겠다고 많이 맞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딸이 워낙 이악하고 일도 잘하고 하니까 2달 반만인 11월 달에 풀려났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습니다. 하지만 딸을 풀어놓고 나를 잡겠다고 계속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18살이 된 딸은 스스로 500원에 팔려가기로 마음 먹고 그 돈으로 “우리 엄마한테 면회를 가 달라”고 하면서 조카를 붙잡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후 딸이 제가 있던 할머니 집에 들러 엄마도 여기 있다가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딸이 할머니한테 말해서 팔려가기로 약속하고 그 돈 500원을 조카한테 줬습니다. 조카도 사촌누나가 그렇게 팔려가니까 마음 아파서 둘이서 붙잡고 막 울었다고 합니다. 그 할머니도 도저히 못 봐주겠더라고 했습니다. 저는 딸이 건너왔다는 소리를 듣고 전화만 내내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딸은 제가 마음 아파할까봐 연락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딸은 훈천에 가서 또 잡히고 말았습니다. 잡혀서 파출소에 가니까 파출소사람들이 또 5,000원에 딸을 팔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5,000원은 비싸다고 한족들이 안 샀다고 합니다. 하지만 3일 있으면 딸은 다시 송환될 판이었습니다. 젊은 파출소 공안이 그런 이야기를 해주자 딸은 막 울었지만, 그런데도 혹시나 엄마가 잡힐까봐 제가 어디에 있다는 소리는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도움이었을까요. 그날 저녁 9시쯤 족쇄(수갑)에 묶여 있던 딸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쇠꼬챙이를 주워 구류소에서 익히 들어본 적이 있는 방법을 떠올려 운좋게 족쇄를 열고 3층에서 뛰어내려 탈출했습니다. 그리고 다리를 다친 줄도 모르고 택시를 잡아타고 500원을 뻐쳐서(외상으로) 택시를 타고 화룡의 그 할머니 집으로 갔습니다. 마침내 기다리던 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둘째딸이 살아 돌아오자 이제 아들이 걱정되었습니다. 아들은 화룡으로 나오다가 잠복에 걸려 다시 북송되고 변방대로 끌려갔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도망쳤다가 잡혔으니까 큰 문제였습니다. 아들 역시 화룡변방대에서 무산군으로 넘겨졌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월경자들을 심하게 대하지는 말라는) 김정일 방침이 떨어져 있었는지 심하게 처벌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한편, 우리는 2000년에 다시 북한으로 잡혀 들어갔습니다. 송환되는 사람들이 “뺏기지 않으려면 돈을 먹어야 한다”고 해서 모아둔 돈을 먹었습니다. 토하면 또 삼켰습니다. 딸은 먹은 돈이 나오지 않도록 아예 아무 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보위원들이 “이 년들이 중국에서 얼마나 잘 먹었길래 여기서 안먹느냐”며 막 때렸습니다. 그곳에서는 저희처럼 돈 먹는걸 알기 때문에, 변을 볼 때는 여자들도 화장실이 아닌 바깥에서 누게 하고 일일이 검사했습니다. 딸이 오랫동안 변을 안보니까 이것들이 세 번에 먹을 변비약을 한번에 먹였습니다. 딸은 너무 아파 데굴데굴 구르면서도 참았습니다. 거기서 저는 줄반장을 해서 끝에 앉았는데, 우연히 보초와 이야기 하다가 그의 어머니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들어보니 제가 군대생활 할 때 특무장으로 있던 여자였습니다. 서로 그걸 알게 되니까 좀 봐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보초의 눈을 피해 감방 안에 설치된 칸막이 간이화장실에서 변을 보고 바닥에서 건져서 돈을 하나를 건졌고, 근데 또 배가 아파서 설사를 했는데 하나는 건지고 하나는 보위원이 다가오기에 그냥 포기하고 떠내려 보냈습니다. 12월에 잡혀온 여자가 한명 있었는데, 그녀는 중국에서 한국으로부터 온 친척을 만나 3000원을 받았다는 죄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허약했기 때문에 정치범수용소로 바로 못 보내고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주사를 맞으러 나왔다가 우리가 돈을 먹고 들어온 것을 일렀습니다. 그래서 종합지도원에게 끌려가 맞았습니다. 한국이나 기독교와 관련되었는지 계속 취조를 당했습니다. 저는 죽어도 관계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틀 정도 취조를 하더니 다른 사람들은 보위부로 보내는데, 우리는 무산군안전부로 넘겨졌습니다. 안전부 감방에서 하루밤을 재우고 다시 단련대로 넘겼습니다.


7. 청진집결소에서의 40일

일주일 후 우리는 청진집결소로 보내졌습니다. 이동하는 동안 손가락 족쇄가 채워졌습니다. 19살 남자와 같이 손가락 족쇄가 채워진 딸은 청진까지 가는 길에 또 핀침으로 족쇄를 풀기도 했지만, 엄마가 있어서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집결소로 갔더니 또 검사를 했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방이었습니다. 10~15명씩 들어가는데 빈대가 너무 많아서 잠도 못잘 지경입니다. 저녁 5시에 일 끝나고 밥을 먹고 들어가면 6시부터 7시까지 한 시간만 전기가 들어옵니다. 정전되면 빈대라는 빈대는 다 나와서 배꼽짬, 손가락짬, 발가락짬, 귓구멍짬 안 들어가는 데가 없습니다. 어쨌든 빈대가 너무 많아서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하고 40일 동안 박쥐처럼 창문에 매달려 밤을 지냈습니다. 남은 돈 100원을 가지고 엿 1kg를 사다 달라고 부탁해서 그걸로 버텼습니다. 청진집결소에서는 7개월 된 여자아기를 담요로 덮어 강압적으로 죽이는 것도 보았습니다. 담요에 싸서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잔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8. 다시 탈북

40일째가 되던 날, 평안남도 송천에서 68호 군수품 안전원 하나가 집결소로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을 따라 어머니가 계신 송천군으로 보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도저히 그곳에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딱하게 여긴 지도원이 제 출신지를 평양이 아닌 송천군으로 고쳐주었습니다. 그 안전원은 기차가 한달이 걸릴지 열흘이 걸릴지 모르니, 식사보장을 시키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전 핸드백밖에 없는 빈털터리였습니다. 집결소에서 나와 청진역으로 가는 길에 저는 가지고 있던 핸드백을 500원에 팔고 돼지발족(족발), 두부를 200원어치 사서 안전원에게 먹였습니다. 자기는 이밥을 먹으면서 우리에게는 먹어보라는 말도 안합니다.

안전원이 끌고 다닌 사람들은 우리까지 모두 5명이었습니다. 집결소에서 가지고 온 강냉이밥을 옆에 있던 남자에게 불쌍해서 주니 너무 고마워하며 울었습니다. 우리가 도망온 걸 알고 그 남자도 도망가겠다고 했습니다. 안전원은 술을 마시고 쓰러져 있고, 동행한 5명과 함께 있다가 화장실을 갔다 와서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다섯 명이 다 달아나면 금방 잡힐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한낮 11시쯤 “나도 화장실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나오는데 딸이 뒤따라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나만 따라오라”고 하고는 가로질러 뛰고 뛰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무조건 뛰어 도착한 곳은 어이없게도 다시 집결소 마당이었습니다. 근처에서 돌고 돈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근처 아파트 복도에서 새벽 3시쯤까지 쭈그리고 잤습니다. 새벽에 나와서 다리 밑에서 통근차를 타고 수성까지, 그리고 무산까지 걸어서 갔습니다. 2000년 8월 29일이었습니다.


9. 탈북보다 더한 인신매매의 위협

다시 무산에 돌아와 아들을 찾으려고 보니까 장마가 닥쳤습니다. 무산에서 물난리가 나 사람들이 죽고 난리가 났습니다. 돈이 없어서 아들을 찾지도 못하겠기에 빨리 돈을 모아 중국으로 가야겠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장사하는 동생들과 동원 다니고 돌도 날랐으며, 인민반장 일을 따라다니면서 도왔습니다.

하지만 북한 남촌에서 다시 잡혔습니다. 대낮에 두만강을 못 건너니까 밤에 나왔다가 정치소 순찰에게 딱 걸렸습니다. 그냥 당당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중국에 친척이 있어서 돈 빌리러 가는 길이니 다시 오는 길에 꼭 뇌물을 좀 주겠다고 속였습니다. 밤에 조용히 림강쪽으로 걸어 높은 산을 넘어서니 중국 숭선 쪽이었습니다. 하지만 넘어가다가 다시 인신매매꾼인 백가라는 놈에게 걸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팔려도 좋다”고 하면서, 대신 화룡 시내로만 데려가 달라고 했습니다. 며칠간 낮에는 호박씨를 벗기는 일을 하고 밤에는 산 중턱에 초막을 치고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하루에 10원을 받았습니다. 화룡에 오니 산동인-한족에게 저를 넘기는 것이었습니다.

기회만을 노리며 택시를 타고 가면서 내려다 보니 조양촌이었습니다. 역전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는 길에 오줌을 누겠다고 하니까 인신매매꾼은 길바닥에서 오줌을 싸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차 역전으로 들어가 손씻고 오겠다고 하고서는 무조건 도망쳤습니다. 그 놈은 다리가 얼마나 긴지 금새 쫓아와서 제 옷을 붙잡았습니다. 살려달라고 소리를 쳤지만 아무도 안 돌보아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조선족 하나가 지나가다가 그 남자를 붙잡아 공안으로 넘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돈은 줄 수 있지만 제발 공안에게만은 넘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조선족 집으로 따라가다가 문득 이 사람도 인신매매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 높은 벽을 뛰어넘었습니다. 허허 벌판이었지만 비행기가 지나가는 것을 보며 방향을 잡아 수태 걸어가니 태양이라는 마을이 나타났습니다. 그 곳에서 남편과 아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시댁에서는 이제 저에게 다른데로 가라고 했습니다.

2005년 4월 19일
데일리 차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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