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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빛내리 교회서 탈북자 마영애,최은철 찬양간증집회
탈북 동포 5명 구출을 위한 ‘아쉬르찬양의 밤’
헌금 전액 지원, 중국의 수많은 탈북자들 북송 공포로 떨고 있어..
뉴욕빛내리교회(담임 김명찬 목사)에서 3일(화) 오후 8시 30분에 창원중앙교회 아쉬르남성중창단을 초청, 탈북 동포 5명 구출을 위한 ‘아쉬르찬양의 밤’을 열었다.
아쉬르남성중창단은 복음찬양선교단으로 전속 무용단까지 포함해 23명으로 구성되어 제 2차 미국 공연 차 방문 중에 있다. 지난 1일에 필라제일장로교회(담임 김만우 목사)에서 공연을 가졌으며 5일에 서부로 출발해 오래곤 주 갈보리교회(담임 김성만 목사)에서 공연을 가지게 된다.
아쉬르의 뜻은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넌 후 바다에 수장되는 애굽 군사들을 쳐다보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데, ‘하나님을 향해 찬양하다’의 히브리어가 ‘아쉬르’다.
공연 시작에 앞서 중창단 단장 윤영수 장로는 “원해 쿠바에서 공연을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탈북자 5명의 도움이 시급해서 미주 공연을 계획했다”고 밝혔다.
워싱턴에서 온 피납 탈북인권연대이사장 배재현 장로는 “현재 중국에 수없이 많은 탈북자들이 북송 공포에 떨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며 “탈북자 한 사람을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오는데 1500-2000불이 필요해 금전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며 후원을 부탁했다.
이날 중창단을 후원하고 있는 메릴랜드 목사회장 최용호 목사(델라웨어 영원한 교회)도 참석했다.
아쉬르 중창단은 ‘야곱의 축복’ ‘나의 하나님’ ‘주는 반석’ 등 앵콜송까지 포함해 총 14곡의 곡을 불렀다. 또 빠른 곡은 경쾌한 율동을 가미해 신나게 부르기도 했다. 또한 이경미 씨의 소프라노, 서선애 씨의 색소폰 연주도 이어졌다.
모든 공연이 끝난 후 모은 헌금 전액은 김명찬 목사가 피납 탈북인권 연대이사장 배재현 장로에게 전달했다.
뉴욕빛내리교회에서는 매주 화요일 오후 8시 30분에 찬양집회 및 로마서강해가 있다.
뉴욕 빛내리 교회(김명찬 목사)가 탈북동포 5명 구출을 위한 아쉬르 찬양의 밤을 열고 이날의 헌금을 즉석에서 피랍.탈북 인권연대(배재현 이사장)에게 전달했다.
2006년 10월 3일 오후 8시 30분 열린 아쉬르 찬양의 밤은 7명의 남성 중창단이 야곱의 축복, 나의 하나님, 이제 내가 살아도, 주는 반석, 사랑 없으면 아무것도, 에바다, 실로암, 파송의 노래 등을 연주했다.
전국 CCM 경연대회에서 입상한 바 있는 아쉬르의 연주는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과 자세로 찬양하며 남성 중창의 묘미를 잘 살린 편곡과 발성 등으로 수준 높은 연주를 보여주었다.
아쉬르 남성중창단(단장: 윤영수장로 지휘: 조인국집사)은 창원중앙교회의 복음찬양선교단으로서 2002년 창단한 이후 연간 50회 통산 195회의 연주를 하는 등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치고 있다.
아쉬르 중창단은 테너1 테너2 바리톤 배스의 10명의 남성 중창단과 피아노와 드럼 그리고 전속무용단으로 조직되어 있는데 무용단 3명은 단원의 부인들로 구성되었다.
아쉬르 찬양에 앞서 빛내리 교회 찬양팀은 고개들어 주를 맞이해, 갈길을 밝히 보이시니, 주하나님 독생자 예수 등의 찬양을 30분간 뜨겁게 연주했다. 특히 이원희 부목사가 담당하는 파워포인트의 제작과 영상의 이미지는 세심하게 준비하고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 단순하게 가사와 배경 그림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것과 비교할 때 차별된 효과를 나타내었다.
김명찬 목사는 지리적 위치의 이점과 소리의 공명이 좋은 교회의 특성을 살려 이러한 찬양과 관련한 집회를 자주 가질 계획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당신 한 분의 기도로 나라와 민족을..’
뉴욕빛내리교회서 탈북자 마영애, 최은철 찬양 간증집회 가져
뉴욕빛내리교회(담임 김명찬 목사)는 9월 26일(화) 오후 8시 30분에 탈북자 마영애, 최은철 씨를 초대해 찬양 간증집회를 열었다.
마영애, 최은철씨는 탈북에 성공해 재혼한 부부로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들에게 미국 정부는 망명을 허용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명찬 목사의 찬양인도로 경배와 찬양이 30분간 진행된 후 김명찬 목사는 최씨 부부를 “북한 복음화를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분들”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최은철, 마영애 부부의 북한 노래 ‘반갑습니다’ 합창이 있은 후 간증이 이어졌다. 최은철씨는 북한을 탈출한 동기, 북한 탈출 과정, 하나님을 알게 된 동기 등을 1시간 30분 여간 실감나게 전했다. 최은철씨는 “북한에서 17세에 군대에 들어가 14년간 고향에 한번도 돌아오지 못했다. 북한은 된장, 간장이 있는 집이 잘사는 집”이라며 “대한민국에서 생활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북한 간부들 수준보다 훨씬 높을 정도로 북한은 열악한 상황이다”고 말했다.
또 최씨는 “너무 배고파서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12번을 다녔는데 인민군에게 한번도 잡히지 않았다. 남들은 처음 건널 때 인민군에게 잡히는데, 하나님의 은혜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최씨는 중국에서 남의 집 머슴살이 6개월간 하면서 중국 지도를 사서 연구 끝에 중국, 캄보디아, 태국, 베트남으로 4개월간 자유 찾아 떠난 이야기를 전했다. 최씨는 “베트남 한국 대사관에 가기 위해 한달 반 동안 생쌀로 목숨을 연명했는데 맛있게 잘 먹을 수 있었다. 모든 여행 일정에서 성령께서 이끌어 주셔서 살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최씨는 북한 정권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김정일 북한정권은 8억5천만 달러를 들여 죽은 김일성을 위해 사용했다. 그 돈이면 전 북한 국민이 3년 동안 먹고 살수 있는 돈. 또 정주영 회장이 북한 아이들에게 우유를 먹이라고 보내준 젖소 1천5백 마리는 다 잡아서 공산당 간부들끼리 보신탕으로 먹어 치웠다. 국민들이 죽어가든 말든, 김정일은 한번 간부들과 파티를 하면, 미화 3만불 짜리 와인을 공수해다가 마신다”고 말하며 “이런 상황에서 북한 지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북한에 지원을 하나 하지 않으나 죽어가는 국민들 수는 똑같다. 지원을 하면 할수록 북한 군사력만 증강되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최씨는 “기독교인들의 행실이 중요한 것 같다. 탈북한 후 한국에서 교회를 멀리 하다가 목사님 삶을 보고 교회를 다니게 됐다”며 “이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마영애씨는 “여러분들을 보니 북에 두고 온 고향 친척들과 이웃이 생각난다. 이 곳 미국에서는 마음껏 찬양하고 자유롭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북한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어 마음껏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성경책은 구할 수도 없다. 북한에서는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까지 300만이 넘는 노약자가 굶어 죽었다. 북한 동포를 위해서 하루에 커피 1잔 줄이고 3분간 기도해주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양금 연주를 하면서 "6살 때부터 11년간 북한에서 음악 영재 교육기관에서 양금 연주를 배웠다. 이전에는 이 악기로 김일성, 김정일이라는 우상을 찬양했지만, 지금은 이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어 하나님께 너무 감사하다.
앞으로 남한과 북한이 복음으로 통일 되는데 헌신하길 원하고, 통일된 그날 평양에 교회가 세워지기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간증했다.
뉴욕빛내리교회에서는 10월 3일(화) 저녁 8시 30분에 탈북동포 5명 구출을 위한 찬양의 밤 '아쉬르 중창단 공연'을 열 예정이다.
Reporter Daniel maeng Daniel@chdaily.com
u s a 아멘넷
설립1주년도 채 되지 않은 교회가 분단 조ㅏ국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뉴욕빛내리교회(김명찬 목사)는 9월26일(화) 저녁 8시30분 탈북자 출신 최은철 마영애 부부를 초청해 찬양 간증집회를 열고 탈북동포 5명을 구하기 위한 모금을 했다. 동교회는 2차 모금을 위해 오는 10월 3일에도 한국 창원중앙교회 아쉬르 중창단을 초청하여 공연을 가진다.
♦ 빛내리교회 찬양간증집회: 김명찬 목사가 인도하는 빛내리교회 찬양팀의 뜨거운 찬양으로 시작된 집회는 최은철씨와 마영애씨의 간증과 찬양으로 이어졌다. 동교회 옥연제 전도사가 대표기도를 이원희 목사가 헌금기도를 했다. 또 조국과 탈북자를 위한 통성기도도 이어졌다.
아픈만큼 할 말이 너무나 많은 최은철씨의 간증은 무려 1시간 10분이나 이어졌으며, 마영애씨는 아코디언과 양금을 이용해 노래를 불렀다. 양금은 마씨가 탈북시에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가지고 왔다. 아코디언 연주와 함께 다같이 "고향의 봄"을 부를때 분위기는 최고로 올랐다.
최은철씨는 "김정일 정권이 무너지기 전에는 한국이 북한을 도와주면 안된다"라고 북한정권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마영애씨는 "통일이 되는 날 4만 5천여개의 우상, 김일성 동상을 허물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돌격대가 되겠다"라고 말했다.
♦ 최은철 마영애 부부는? : 평양에서 태어난 마영애(43)씨는 조선인민군 예술단 배우(아코디언 및 양금 연주자)로 있다가 국가 안전보위부 해외담당 파견관으로 중국에서 활동하던 중 2001년 8월 한국행을 선택했다. 마영애씨는 서울에서 탈북자들을 단원으로 하는 ‘평양예술단’을 운영했다.
국군 포로의 아들인 남편 김정호씨는 마씨보다 한달 앞서 중국-베트남-캄보디아-태국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왔다. 10년동안 인민 무력부 직속 공병국 중사로 복무했으며 군 예술단에서 성악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들 부부는 탈북후 서울에서 만나 2001년 9월 결혼했다.
마 씨는 2004년 예술단의 미국 공연을 위해 1년 단수 여권을 발급받아 미국으로 왔다. 마씨는 여권연장 신청이 기각되자 국정원의 인권탄압, 공연중 탄압을 문제삼아 한국 정부의 정치적 탄압을 이유로 미국에 망명을 신청했다.
마영애(43)씨는 지난 9월 10일 드디어 노동허가서를 받았다. 뉴저지주의 한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중 아들 최효성군이 지난 1월 부시 대통령 부부에게 보낸 편지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아들 최군은 마씨를 찾아 북한을 탈출한 후 중국을 거쳐 한국에 도착해 마씨를 만났지만, 마씨가 다시 미국으로 가자 엄마를 찾아 미국에 불법입국해서 화제가 되었다. 뉴욕교계에서는 아들이 추방되지 않도록 서명운동도 벌인 바 있다.
마영애씨 부부는 현재 미주 각 지역으로 다니며 간증과 찬양집회를 하고 있으며, 미주피랍 탈북인권연대(chnk21.org)의 탈북자 구출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최은철씨 간증: 나는 국군 포로의 아들이라 성분이 나빴다. 한국정부는 북한에 있는 국군포로가 6백여명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3천여명이나 된다.
94년 김일성이 죽은 후 북한주민이 굶어죽는 일이 일어낫다. 너무나 배가고파 풀죽을 끓어 먹었고 새벽 한두시에 일어나 물을 먹었다. 90년부터 350만명의 북한동포가 굶어 죽었다. 특히 함경도 함흥지역이 심했다. 둘째형도 감옥에서 굶어 죽었다.
이판사판으로 먹을 것을 참아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다녔다. 12번이나 무사히 다녔는데 한번도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풍요하게 먹는 우리가족을 수상하게 여기는 이웃의 신고로 잡혔다. 감옥에 가면 굶어 죽기때문에 탈출하여 중국으로 도망갔다.
중국사람은 탈북자를 인신매매하기도 했다. 조선족도 다 나쁜것은 아니지만 비슷했다. 중국에서 모내기, 벌목등을 했다. 먹여주고 재워주기는 하지만 돈은 주지는 않는다. 6개월간 지도를 보고 연구하다 베트남을 통해 탈출하기로 하고 2명과 함께 중국의 남쪽으로 내려갔다. 중국-베트남-캄보디아-태국을 거쳐 한국으로 왔다.
대한민국에 살아 온 것은 성령이 역사하신 것이다. 한국에 와서 6개월동안 먹고 싶었던 설탕을 실컷 먹었다. 주변에서 당뇨병에 걸린다고 했지만 북한에는 있을수 없는 당뇨병이 무슨 병인지 몰랐다. 이제는 살까기(다이어트)를 해야 할 정도이다.
주변에서 전도를 하려고 했지만 방탕한 생활을 했다. 2달만에 교회에 가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보이지가 않기 때문에 전도자가 너무 강하게 해도 문제이다. 예수믿는 사람들은 언어와 행동을 잘해야 한다. 나는 처음 목사님 얼굴울 보고 교회에 나가 결국 예수를 영접했다. 기독교인은 순진하고 선하고 사랑이 있었다. 나도 저런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을 악질적으로 믿게 되었다. 하나님은 입에 달고 살던 고량주와 하루에 2갑씩 피던 담배를 끓게 하셨다. 이제는 못된 마음을 버리고 천국갈 것을 준비한다.
한국에서 북한을 도왔으나 상류층만 혜택을 받았다. 저녁에 곡식을 나누어 주고 다음날 다시 받아갔다. 밑빠진 독에 물붙기이다. 김정일 정권이 끝나야 북한을 지원 해야 한다. 북한의 국수 빵공장도 다 거짓이다. 녹쓴 기계를 닦아 지원을 받아낸다. 전기가 없는데 무슨공장인가? 북한에 하는 투자는 100% 사기이다. 군수품에 들어가는 돈 1%만 인민에게 돌려도 굶어 죽지 않는다.
북한은 한국보다 자원이 많아 잘살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한국은 기독교인이 많아 잘사는 것이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북한의 실정을 폭로하니 김형욱처럼 된다고 협박도 했다. 아직도 북한의 실정을 모르는 교회가 많다.
♦ 마영애씨 간증: 평양에서 태어나 어릴때부터 음악을 전공햇다. 스파이 활동을 하다 중국 칠도교회에 간 것을 문제로 삼아 고통을 당하다 북한을 탈출해 2001년 8월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 탈북을 할때 북한에 남아 있는 아들 효성이도 가슴에 걸렸는데 결국 중국 한국을 거쳐 미국에 왔다.
서울에 온 후 교회에 가서 무릎을 꿇고 "북한에 있는 가족들이 통일이 될때까지 굶어 죽지 안호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효성이와 만났는데 서로 몰라 보았다. 그러면서 그렇게 만든 김정일을 증오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땅에 북한의 사명을 알리는 사명을 주셨다.
하나님은 저를 북한에서 예비하게 하시고 주님을 찬양하라는데 사용하라고 하셨다. 통일이 되는날까지 복음사역자와 선교사로 일하겠다. 평양장대현교회 자리에는 현재 김일성 동상이 서있다. 통일이 되는 날 4만 5천여개의 우상, 김일성 동상을 허물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돌격대가 되겠다.
♦ 문석진기자가 본 마영애씨 찬양:마영애 초청 간증집회에 앞서 빛내리 교회 찬양팀은 [좋으신 하나님, 찬양이 언제나 넘치면, 일어나 걸어라,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예수 사랑하심은] 등을 뜨겁게 찬양했다. 배스 기타, 드럼, 피아노와 2 기타의 악기와 2 남성 1여성의 싱어들이 적극적으로 찬양하고 파워 포인트의 영상은 가사와 함께 다양한 그림을 준비하였다.
마영애의 찬양은 뉴욕에서 들을 기회가 거의 없는 북한인의 어투와 창법이었다. 아코디언을 함께 연주하면서 노래하는 마씨의 찬양은 쉽게 말하면 대중가요의 가수의 창법에 북한 사투리를 가미한 창법이었다. 그의 찬양은 고통과 죽음을 극복하고 자유와 기쁨을 성취한 믿음으로 고백하는 찬양이며 호소력과 설득력이 있었다.
한국에 와서 예수를 영접한 마씨의 찬양은 ‘반갑습니다 형제 여러분’ ‘세상에서 방황할 때’으로 이어지다가 간증 후에는 양금으로 ‘내 주의 보혈은’ ‘아리랑’ ‘고향의 봄’을 연주했다. 마씨는 양금을 소개하면서 “북한에서 가져온 것이며 다니엘서 3:5-7에 나오는 양금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어 너무 기쁘다”고 감격했다. 마씨는 주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이 악기로 김정일(우상)을 찬양하다가, 이제는 미국 상원 의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렇게 계속 찬양사역과 선교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했다.
양금은 철현 네 줄을 한 벌로 하여 열네 벌을 얹은 현악기로서 앉아서 연주하며 4각형 상자 모양의 판면(板面) 위에 줄을 받치는 긴 괘(棵)를 2개 세운 것이다. 이것을 연주하는 2개의 채는 주석과 철의 합금으로 되어있고 대나무의 껍질을 벗겨 끝을 약간 두껍게 깎아서 만든다(네이버 백과 사전 참조)
빛내리 교회 문의 718-362-0836 www.brightenchurch.org
아쉬르 중창단 카페주소 http://cafe.naver.com/ashir
피랍. 탈북 인권 연대 배재현 이사장 703-338-2388
아멘넷.문석진 기자 문의 : 718-362-0836(뉴욕빛내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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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들 산다는 게 참으로 간고하단 말입니다.
중국 농가에서 4년째 살고 있는 노부부를 만나다
- 계속되는 탈북자 강제 송환 … 끌려가는 버스에는 조선8도 사람이 다 있더라
- 늙은이들에게 이 쌍간나 개간나를 예삿말처럼 한다
- 조선에서 라디오를 갖고 있다는 것은 ‘정치적인 대상’
- 국가의 승인 하에 백도라지(양귀비)를 키운다
조선족 농부가 자신의 먼 친척 뻘 되는 북한 사람들을 숨겨주고 있는 소식을 들었다. 인근 마을에 사는 조선족의 소개로 저녁 무렵 그 집을 찾았다. 택시에서 내려 마을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옷차림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때가 없었다. 누추해서가 아니라 너무도 화려해서. 조그만 시골마을이다 보니 이방인이 찾아오면 모두 ‘누군가’하고 쳐다보는데, 그런 차림으로 탈북자들이 머무르는 집을 찾아간다는 것은 살인행위나 다름없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마을을 몇 바퀴 돌았다. 가로등도 없는 이곳은 해가 지자마자 한치 앞을 분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제야 마음을 놓고 대문을 두드렸다.
그들은 부부였다. 이제 환갑을 넘긴 노부부. 아주머니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필자를 반겼고, 누워있는 아저씨는 애써 몸을 일으켰다. 좁은 방안에 부뚜막이 있고 세면시설도 있는 전형적인 중국 농가의 풍경이다. 이들은 중국에 온지 4년째 되었다. 고향은 함경북도 길주군. 그곳 과수농장에서 일했다. 주로 배를 기르는 농장이라고 한다.
인터뷰 내내 아주머니는 혹시나 옆집에 얘기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웠고, 그럴 때마다 아저씨는 “일없다”며 손을 내저었다. 처음에는 필자를 경계하는 기색도 역력했으나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곧 자연스럽게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의 가족들은 모두 중국으로 나왔으나, 혹시라도 친척들이 화를 입을까봐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극히 꺼렸다. 아저씨는 꽤 오래 전부터 라디오로 남한 방송을 몰래 들어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남한 실정을 어느 정도 알고, 정치적인 견해도 청산유수처럼 이야기했다.
“조선이라는 게 말이야, 정치가 무서운 나라야. 다른 나라는 잘못을 하면 본인만 처벌을 받는데 조선에서는 대를 이어, 그 친척들까지 처벌을 받는단 말이지. 내가 잘못하면 내 친척은 당 일꾼으로 못쓰고, 자식도 대학교 같은 것도 못 가지…. 조선의 16호, 거 정치범 수용소라는 것 말이야, 거기선 사람이 개 돼지나 같지. 오직 일할 권리밖에 없단 말이야.”
- 요즘 탈북자들을 대대적으로 잡아간다는데 여기는 어떻습니까?
“이번 4월에만도 우리 곁에서 5명 잡혀갔습니다.” (아주머니)
이때 옆에 있던 조선족 친척이 거들었다.
http://www.dailynk.com/korean/keys/2002/26/04.php
“내가 버스로 다섯 대 빽빽하게 실려 가는 것을 바로 옆에서 봤습니다. 중국공안이 끌고 갔다가, 온성 국경에서 북한 보안원이 나와서 차를 바꿔 타고 데리고 갑디다. 거기에 조선 8도 사람이 다 있다고 하더군요. 물론 함경북도나 양강도 사람이 가장 많습니다.”
아주머니가 “요새는 탈북자들도 저절로 자수하면 다 용서해 준다는 소문이 돈다”하고 말했다. 그러자 아저씨는 “개소리지. 조선 정치라는 건 변할 수 없어. 다 개소리야.”라고 딱 잘라 말했다.
- 잡힐 뻔한 적은 없었습니까?
“없기는…, 여러 번 잡힐 뻔했습니다. 작년 6월에는 집에서 밥 먹는데 밖에서 웅성웅성 소리가 나 조용히 내다보니 우리집 앞에서 공안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 재빨리 뒤로 나와서 변소에 숨었습니다. 우리 집으로 공안이 들어 닥쳤는데, 휴….” (아주머니)
“작년에 호구 검사한다고 색출을 쎄게 했지. 한 개 마을을 포위하고 토끼잡이 식으로 했어. 그때 우리도 파출소에 간 적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보증해 줘 다행히 풀려났어.” (아저씨)
아주머니는 “그래도 함경도 사람들은 연변 말투를 쉽게 배울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한국의 한 코미디 프로그램중에 연변말투를 흉내내는 개그맨이 있는데, 사실 그의 말투는 연변보다는 평양 쪽에 가깝다. 연변 말은 북한 말과 상당히 다르다. 연변 사람들 틈에 북한 사람이 끼어서 이야기하면 금방 알아볼 수 있다. 함경도 말은 그런 대로 비슷한데, 평안도 말은 서울 지하철에서 부산사람이 핸드폰 통화를 하는 식이다. 그래서 탈북자들은 중국에서 언어문제로 2중고를 겪는다. 한족말(중국어)을 배워야 하고, 말투도 연변 식으로 바꿔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뒤이은 인터뷰에 등장하지만, 그래서 탈북한 지 5-6년 정도 된 사람들은 완전히 연변사람이 되어 있다.
- 조선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조선에서 일하셨던 농장은 어느 정도 규모였습니까?”
“상당히 큰 농장이죠. 한 2000정보 정도 된다 말입니다. 한 정보는 가로 세로 100미터 정돕니다.” (아저씨)
- 배를 길렀다는데, 북한에서도 배를 먹는 사람들이 있나요?
“다 수출하고, 도내 각 기업소에 보내고…. 거기는 배가 간식이 아니란 말입니다. 배를 주고 기름 받고 비료 받고 그럽니다. 6월말부터 감자가 나는데 그거 한달 먹으면 떨어집니다. 그때부터 옥수수 날 때까지, 그간에는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손가락 두 마디 만한 크기를 내보이며) 그때 배가 이만하단 말입니다. 그 배를 밤에 몰래 뜯어다가 삶아서 먹습니다. 그것도 숨어서 먹어야 하는데, 맨날 배 삶아낸 물만 먹다보니 나중에는 혓바닥이 갈라져서 먹지도 못합니다.” (아주머니)
“조선에 나무껍질 성한게 없지.” (아저씨)
“그럼, 그건 사실입니다. 나무껍질이라는게 아무리 삶아도 딱딱합니다. 그럼 두꺼운 부분을 돌에다 대고 두드리면 솜처럼 부드러워 집니다. 거기에 옥수수 가루 섞어서 먹습니다. 그걸먹은 아이들은 똥이 돌처럼 굳어져 나오는데, 우리 손주가 영감에게 ‘할아버지 나 똥 누는데 걸려서 안나와’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아주머니)
“풀을 끓여 먹어도 곡식을 조금이라도 섞어 먹어야해. 아니면 된장이나 소금이라도 좀 풀던지. 그런데 그것도 없는 집이 많단 말입니다. 우리 마을에 평양에서 추방되어 온 집이 있었는데, 그 집도 굶어 죽었습니다. 그 집 딸이 있었는데 1년 8개월 된 게 서지도 못했단 말입니다. 한번은 도대체 이 집이 뭘 먹나해서 살펴보니, 물에 땅콩 껍질, 두부 찌끼 조금 넣고 휘젖고 있더란 말야…. 그렇게 끓여서 아이를 먹였으니 영양실조 걸려 안 죽었겠나. 우리도 먹을 것이 없으니 어찌 도울 방도가 없었지.” (아저씨)
“우리는 우리 손주, 개구리 먹여 키웠습니다. 조선에서는 인민군대 지원하느라고 세대 당 1마리씩 돼지 키우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 먹을 것도 없는데, 돼지 줄게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개구리 잡아 뒷다리 잘라서 껍질 벗겨 그거는 아이 주고, 개구리 앞부분은 돼지 먹였습니다. 그거 먹이니까 애가 좀 나아지고 일어서더란 말입니다.” (아주머니)
“그런데 개구리도 못잡게 합니다. 개구리가 논밭에 벌레를 잡아먹는 이로운 동물이니까 보호해야 한다고….” (아저씨)
“혹시 옥수수를 대패로 깎아 먹는단 말은 들어 봤습니까? 옥수수 채 익기 전에, 바로 먹을 수 없으니까 대패날로 밀어 엷게 깎아서 풀 넣고 죽 쒀 먹습니다. 옥수수 통째로 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잘 갈리지 않아 고생합니다.” (아주머니)
지면에 다 옮기기 곤란할 만큼 이들은 식량난 시기의 어려웠던 삶에 대해 쉼 없이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잠깐 쉬며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하면 다 거짓말이라고 하겠지?”라고 허탈하게 웃었다. 아저씨는 “조선 사람 사는 게 이렇게 간고합니다”라고 하면서 천장을 보며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아저씨는 병 때문에 거동이 불편하다. 북한에 있었으면 딱 그대로 죽었을 판인데 중국에 와서 치료를 받아 그래도 좀 나아진 것이라 한다. 그는 연신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 도중 간간이 긴 한숨을 쉬었다.
- 식량난이 심화되고 인심이 흉흉해지면서 ‘조선에는 3가지가 없다’ - 즉 국정가격, 예의, 배급이 없어졌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나이 든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고 막 대하고 그럽니까?
“일단 군대 애들이 너무 날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한번은 어느 노(老)당원이 김정일에게 군대의 만행을 바로 잡아 줄 것을 건의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김정일이가 ‘나의 군대에는 그런 군대가 없다’고 말했다 합디다. 그러니 군대가 제일 날칠 수 밖에요.” (아저씨)
“일단 기차를 타보면 압니다. 나도 한번 라남에 간 적이 있는데 앉는 건 생각도 못합니다. 앉는 게 다 뭡니까. 머리고 뭐고 밟고서 막 기어올라간단 말입니다. 그러면 서로 쌍욕을 하고…, 그런 아수라장이 없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악밖에는 남지 않아서 보통 말하는 게 이 새끼 이 간나 이런 말밖에 하지 않습니다. 여행증 없이 다니다 붙잡히면 안전원이 ‘이 쌍간나 새끼 어디를 나다니냐, 집에 가만히 엎드려 있을 것이지’하면서 개간나 쌍간나 별난 욕을 다 퍼부어요. 웬 아매(할머니)가 여행증 없이 기차 탔다가 단속 됐는데, 안전원에게 사정을 해요. ‘아, 좀 가기요…, 가기요”하면서. 그래도 사정없이 잡아서 끌려가는데… 아… 그 늙은 아매에게 손주뻘한 놈들이 그러는데… 원. “ (아주머니)
“이제는 사람들이 상하(上下)라는 게 없어졌다 말입니다. 늙은이고 젊은이고 고저… 지금은 60동창이라고 합니다. 참 허…, 사회가 우리가 자랄 때하고 거꾸로 됐습니다.” (아저씨)
- 배급은 언제부터 나오지 않았습니까?
“95년부터 영 아니 줬습니다. 94년도까지는 그래도 얼마씩은 줬습니다. 한 달에 열흘 분치만 배급을 줘도 일없겠는데 하나도 안주니 굶어 죽는 겁니다.” (아저씨)
“조선에 아주머니들이 말하는 게, 가마 안에 뭐 넣을 것만 있으면 걱정할게 없겠다고 합니다. 사정이 그렇습니다.” (아주머니)
- 굶어 죽는 사람을 봤습니까?
“나는 청진역에서 많이 봤습니다. 청진역에서 하도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으니까 한때는 국가에서 돈주고 시체 치워 가는 일을 하는 사람을 썼습니다.” (아주머니)
- 두 분이 사시던 마을은 몇 가구나 되었고, 그 중에 몇 명이 굶어 죽었나?
“우리는 한 부락에 30호가 삽니다. 그런 마을이 4개 모여 농장을 이룹니다. 우리 마을에서는 한 가족이 죽고, 건너 마을에서도 식구가 무리로 죽고… 6명이라던가? 아무튼 그래도 농촌이 낫단 말입니다. 농촌은 그래도 풀이라도 뜯어먹고, 훔쳐먹을 것이라도 있습니다. 그런 게 없는 도시나 공장에서 많이 죽었습니다. 내 아는 사람이 광산에서 일하는데 거기선 한달 어간에 21명이 죽었다고 합디다.” (아저씨)
“부지런한 사람들은 풀이라도 뜯어먹고 산단 말입니다. 내 친척네 같은 경우에는 12살짜리가 온 식구를 살렸습니다. 식구가 다 드러누워 있는데, 그 어린것이 혼자 나무를 해서 내다 팔아 식구들 먹였습니다. 30리길을 걸어서 키 만한 나무를 매오고…. 그렇게 움직여야지, 맥없다고 누워 버리면 그 자리에서 굶어 죽는단 말입니다. 며칠 굶으면, 아침에 일어나면 팔다리가 방바닥에 딱 달라붙은 느낌이 듭니다. 나도 여러번 경험했습니다. 그럴 때 일어나 움직여야지, 그냥 누워 있으면 죽는단 말입니다.” (아주머니)
“처음에는 집 울타리를 뜯어서 관을 만들었단 말입니다. 나중에는 그것도 없어서 그냥 갖다 묻었습니다. 무산 같은 데는 관이 없어서 작업반마다 관을 만들어서 그거 가지고 갔다가 시체만 묻고, 관은 다시 가지고 온다 합디다.” (아저씨)
- 배급이 나오지 않는 이유를 사람들은 어떻게 말하는지?
“사람들이 생각이 뻔해도 말을 못한단 말입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안전부 보위부 끄나풀이 어디에 있을 줄 모르니까, 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이 7, 80 먹은 노인들이 ‘이때까지 살면서 이렇게 살아본 적은 없다’고 말합니다. 왜정 때도 살아보고, 해방도 맞아보고, 전쟁도 겪어 봤지만 사람 굶어 죽는 건 처음 봤다고 혀를 찹니다. 소문으로는 미국놈, 한국놈들이 조선에 쌀 들어오는 걸 막는다고 합디다. 그런데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조선에서 1958년도에 나온 트럭이 ‘승리58호’입니다. 뜨락또르(트랙터)는 1962년에 나온 것을 ‘천리마 뜨락또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나온지 40년이 넘도록 별로 개량되지도 않고 부속이 그 모양 그 꼴이란 말입니다. 과학이 이런데 인민생활이 어떻게 발전하겠나. 과학이 어떻게 발달하는지 세상이 변하는지, 이런걸 가르쳐 주지 않고 맨 날 허위 선전만 하고, 낼모레면 사정이 풀린다 풀린다 말만 합니다. 이젠 사람들이 그거 믿지 않습니다.” (아저씨)
- 그럼 조선 형편이 나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김정일이 말한게 있습니다. 나라를 개방하면 남의 노예가 된다고. 그래서 자기가 죽을지언정 노예가 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래 가지고 어떻게 살겠습니까?” (아저씨)
- 외국에서 식량지원을 한 후 배급상황을 확인한 적은 있습니까.
“함흥에 왔다고 들었습니다. 유엔식량기군가 하는데에서 화성군에 배급주는가 보자고 왔습니다. 배급소에서 배급 줬는데 나중에 다시 걷어 갔다고 합니다.” (아저씨)
설 명절, 4·15 같은 때에 하루분씩의 배급을 준다고 한다. 하루 분이라야 입쌀 한 킬로그램이 채 못된다. 필자는 그것을 며칠에 걸쳐서 아껴먹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북한 사람들은 “하루분 주면 한끼에 다 먹어 버린다”고 말했다. 속이 빌대로 비었기 때문에 일단 생기는 것만 있으면 한꺼번에 다 먹어 치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돌을 보고도 “옥수수 저만한 게 있었으면, 찰떡이 저만한 게 있었으면…” 말한다고 한다. 북한 대학생들은 그것을 ‘입말식사’라 한다. 말로 식사를 다한다는 뜻이다. 아주머니는 “조선에서는 사람들이 마냥 먹는 소리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 속에서도 정치에 대해 말하면 잘못되기 때문에, 정치적인 이야기는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한다. 화제를 주민생활에 대한 부분으로 바꿔보았다.
- 사시던 농장에 텔레비전은 몇 집이나 있었습니까?
“우리 농장에서 채색(컬러) 텔레비전을 갖춘 집이 3가구입니다. 당 세포비서랑 무슨 간부들 집이었습니다. 흑백 텔레비전을 포함하면 한 10여 가구 됐을 겁니다.”
- 냉장고는 있는가?
“전혀 없다.”
아저씨가 이렇게 이야기하자 아주머니가 “마을에서 소련 갔다온 한 집이 있는데 그 집에만 냉장고가 있다”고 거들었다. 보았냐고 물으니 “그냥 소문으로만 들었다”고 했다.
- 전화는 있는가?
“전화는 개인 집에는 근본(전혀) 없고, 혹시 있다면 군당 책임비서… 그런 집들에나 있을까? 일반 기업소 지배인이나 당비서 집에도 없고 기업소에도 없는 데가 있다.”
- 라디오는 있는가?
“(어처구니없는 웃음) 라디오는 없고 녹음기는 몇 집 있다. 국가 법에 라디오를 살 수 없게 되어있다. 라디오가 있다면 중앙방송으로 고정시켜야 하고 그것도 수시로 검열을 나온다. 듣지 말라는 소리나 같다.”
북한사람들을 만나서 집에 전화나 라디오가 있냐고 묻는 것은 무식한 소리다. 특히 라디오를 갖고 있는 것은 ‘정치적인 대상’이 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라디오를 훔치거나 밀수해서 갖고 있다 적발되었다 하자. 일반적인 사회에서는 그냥 절도죄 또는 밀수죄에 해당하겠지만, 북한에서는 만약 그 라디오가 채널이 고정되지 않은 것이었다면 정치범으로 몰릴 수 있다. 그래도 일부 사람들은 악착같이 라디오를 뜯어고쳐 남한 방송을 들으려고 한다. 필자가 한국에서 만난 탈북자중 상당수가 “북한에서 남한방송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북한방송에 너무도 들을게 없어 호기심에 들었다가, 나중에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완전히 집을 밀봉해놓고 밤새워 듣는다는 것이다.
여기 아저씨도 그런 사람이다. 아주머니 말로는 “중국에서 조그만 라디오를 가져다가 그거 듣느라고 온 가족이 들락날락 했다”고 한다. 들킬까봐 안절부절못했다는 말이다. “어느 집에서 아이들이 라디오를 들었는데 채널을 한국방송에 맞춰 놓은 채 라디오를 껐나봐. 나중에 불시에 검열이 나와서 라디오를 트니까 한국방송이 나와….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었겠어? 어른이고 아이고 몽땅 붙들려 갔지.”
- 그때 들은 한국방송 중에 기억이 나는 것이 있습니까?
“내가 케이비에스방송(사회교육방송)을 듣고 있는데 성혜림이 소련에서 망명했다고 들었어요. 그때 처음 성혜림에 대해 알게 됐지. 방송을 통해 다 들었어. 그리고 또… 어느 나라에 가서 경제 일을 하던 사람이… 대사관 직원들 보다 더 좋은 차를 타고 다녔는데… 한국으로 뛰었단 말이지. 한국 가서 진달래꽃 어쩌고 하는 책을 썼다는 내용을 들었다.”
여기서 ‘한국으로 뛰었다’는 사람은 북한의 외화벌이 전담업체인 대성경제연합회사 영국지사장을 지냈던 최세웅 씨를 말하는 것이다. 그는 기쁨조 출신의 아내 신영희 씨, 두 자녀와 함께 1995년 12월 한국으로 망명했다. 아저씨가 말하는 책은 신영희 씨가 쓴 ‘진달래꽃 필 때까지’다. 북한 기쁨조의 실상과 자신의 탈출과정을 담고 있는 ‘진달래꽃 필 때까지’는 1997년 TV 드라마로도 방영되었다. 당시 북한은 평양방송을 통해 “KBS 제2TV를 폭파하고 작가들과 가담자들을 살해하겠다”, “우리의 보복은 무자비하고 단호할 것이며 한국방송공사 제2텔레비전 창작단을 가차없이 폭파해 버릴 것이며 그 존재 자체를 하늘로 날려버릴 것”이라고 협박했다.
방영이 끝나가는 무렵까지 북한은 평양방송과 한민전 방송을 통해 위협을 계속하였으며 1998년 1월 17일에는 “도발자들은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이라는 제목 아래 “방영을 중지하지 않을 경우 그로부터 생겨나는 후과에 대해 책임지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다른 건 용납해도 김정일에 대한 언급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북한 특유의 태도다. 하긴 김정일이 그 방송을 보고 얼마나 길길이 날뛰었을까. 이 사건으로 KBS 건물에 대한 비상경계조치가 내려지는 등 한참 시끄러웠다.
- 조선의 전기 사정은 어떻습니까?
“전기라는게 전혀 없습니다. 텔레비전을 보게 되면 한 집에 몽땅 모이는데, 돌아다니면서 ‘전등 다 끄라’고 그래야 텔레비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는 속에서도 텔레비전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니까, 화면이 요만해 졌다 커졌다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이없어 웃는단 말입니다.” (아저씨)
- 집에서는 어떻게 불을 밝히는가
“뜨락또르 기름을 얻어다가 불을 본다. 병 조그만 거 얻어다가 기름을 넣고 심지 꽂아 불을 밝힌다.” (아주머니)
- 그거 갖고 얼마나 불을 볼 수 있습니까?
“한 두어 달은 켭니다. 그런데 그것도 오래 켜면 콧구멍이 새까매지기 때문에 오래 켤 수도 없습니다.” (아주머니)
“오래 켤 것도 없지요. 밤에 할 일도 없는데요, 뭐.” 아저씨의 이 말에 모두가 웃었다.
- 혹시 연탄을 때는 집이 있는가?
“연탄은 공급받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나무를 주로 때는데 산에 올라가서 풋나무(생나무)를 해서 땝니다. 내 동생네 보니까 남편이 직장에서 퇴근할 때마다 나무를 한 대씩 끌고 와서 그걸 팬단 말입니다. 생나무를 마른나무로 만들어내야 하는데, 밥가마에 물을 붓지 않고 그대로 나무를 넣어서 말립니다. 그래서 이튿날에 동생네 아이들… 열 다섯, 열 여섯 살 짜리들이 한 단씩 묶어 장마당에 가서 팝니다. 나무를 팔아 옥수수 가루를 사서 그날을 때운다고 합디다.”(아주머니)
“산이라는 산은 불이 나서 다 타버렸지. 불이 너무 나서 송이 밭도 거의 다 타버렸어. 모두 땅(뙈기밭)을 일구느라고 그랬는데, 그거 이제 다 어찌 살릴는지….” (아저씨)
- 군대(軍隊)는 어떻게 생활하는가.
“군대들도 통옥수수 먹으면서 생활합니다. 영양실조에 걸려서 집에 돌아오고, 돌아왔다가 회복되면 또 다시 나가고…. 그러니까 군대들이 강도가 된단 말입니다. 군대에 나가서 오래 있은 사람(고참)들은 그런 대로 나은데 신대원들은 까무잡잡하고 너무도 여위어서 견디기 어렵습니다. 훈련은 강하지, 먹을 것은 없지…, 견디지 못합니다.” (아저씨)
- 북한에서 공개총살 하는 것을 본 적은 있는가.
“물론 봤지. 청진에서도 총살했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중국에서 들어온 까밸선(케이블 선)에서 구리를 파내느라고… 그걸 한 10미터 정도 파서 꺼내 팔았단 말이에요. 총살했어요.” (아저씨)
케이블 선을 꺼내 팔았다가 총살당했다는 말은 이전에도 여러 번 들었던 증언이다. 북한에서 케이블 공사는 일체가 유사시(전쟁시)를 대비하는 공사다. 케이블 공사 자체를 교도대를 위주로 군사훈련 하듯 진행한다. 그래서 이 케이블을 건드렸다는 것은 전쟁물자를 건드린 것과 다름없고, 곧 정치범으로 취급된다.
- 농촌에서도 총살을 하나요?
“농촌에서는 총살 안하고 군(소재지)에서 합니다. 나는 72년도에 무산에서 총살하는걸 직접 봤습니다. 무산 읍농장 아이들인데 중국 밀수를 하다가 총살당했다지.” (아저씨)
“나는 화성에서 총살당하는 거를 봤습니다. 자기 가시어머니(장모)를 죽인 사건이었습니다. 그 가시어머니는 귀국동포인데, 그 노친한테서 돈 천 원을 뺏으려다가 안준다고 그러니까 가시어머니를 죽였단 말입니다. 농민시장에서 총살을 했습니다.” (아주머니)
- 총살은 어떤 식으로 하는가?
“시장 같은데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까, 거기서 총살을 합니다. 총살하기 일주일 또는 보름 전에 공시를 하지… ‘아무날 아무개를 총살한다’고 각 기업소마다 통보를 합니다. 자동보총수 3명이 나와서 한 사람에게 3발씩 쏘는데, 그러면 사람이 죽탕이 된다. 9발씩이나 맞으니…” (아저씨)
“그렇게 총살 하구서는 가족에게 시체를 주지도 않는다 합니다. 죽은 다음에 가마니에 말아서 자동차에 싣고 갑니다. 그 시체를 어디로 가져가는지도 모르죠.” (아주머니)
- 북한에서 마약을 많이 수출한다는 소문이 있다.
“나라에서 승인하는데요, 뭐. 조선에는 그걸 ‘백도라지’라고 합니다. 각 기업소에 과제를 내려보내는데, ‘너희 기업소는 백도라지를 얼마 심으라’는 식으로 과업을 줍니다. 수확할 때는 해당 기업소 사로청(‘김일성주의청년동맹’의 옛 이름) 위원장이 책임지고 진을 채취합니다. 말로는 이개(약담배)를 공해 상에서 판다고 합디다. 나는 한번은 우리 영감이 아파서 칼을 들고 나가 농장 약담배를 통째로 따온 적이 있어요. 치료에 쓰려고.” (아주머니)
- 통행증은 어떻게 발급 받습니까? 일반인들의 이동은 가능한가?
“통행증은 작업반에 휴가 신청 받고, 행정위원회 노동과에 신청 받고 보위부에 허가 받고… 그래야 여행증(공식명칭은 ‘여행 및 출장증명서’)을 발급합니다. 통행증은 종업원 350명 있는 기업소에 월(月) 몇 장, 이런 식으로 규정 매수가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본인 결혼식과 사망 이외에는 여행증을 낼 수 없습니다. 통행증을 얻기 위해서는 사망이나 결혼을 허위로 해야 하는데, 그래서 거짓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저씨)
“여행증은 군(君) 2부에서 발행하는데, 2부에서 각 기업소에 몇 장씩 나눠줍니다. (인민보안성 군안전부내에 2부가 따로 있다. 여행증 내주는 부서를 ‘2부’라고 부른다.) 기업소들에서 여행증을 발부받으면 자기네 업무상 필요한 양을 먼저 떼낸다 말입니다. 그거 떼고 나면 일반노동자에게 돌아올 게 없습니다.” (아주머니)
“평양시는 승인번호가 떨어져도, 역전에서 한 사람 한 사람 승인번호를 다 확인하고 객차를 통과시킨다. 평양시로 들어가는 통행증은 시뻘건 줄이 두 줄인지 세 줄인지 쳐 있단 말이야. 그 다음에…, 두만강 연변 지구로 나오는 거는 퍼런 줄이 쳐있어요. 그리고 나진 선봉은 평양처럼 빨간 줄. 거기 들어가자면 10호 초소를 통과해야 하는데 10호 초소 몇 개를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단 말이에요. 국경 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아저씨)
아저씨가 “시뻘건 줄이 두 줄인지 세 줄인지 쳐 있다”고 했는데 실제는 한 줄이다. 평양에 들어가는 통행증에는 붉은 줄이 그어져 있다. 또 국경지역에 있는 도시로 가는 통행증에는 파란 줄이 그어져 있다. 그런데 이렇게 줄이 그어진 지역은 통행증만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 통행증과 함께 ‘승인번호’를 받아야 한다. 아저씨가 “평양시는 승인번호가 떨어져도, 역전에서 한 사람 한 사람 승인번호를 다 확인하고 객차를 통과시킨다”고 한 말은, 승인번호를 받았다해도 평양역전에서 승인번호 장부를 보며 본인 여부를 한 명씩 확인한 다음에야 평양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만큼 평양은 출입이 철저히 통제된다. 평생 살면서 평양구경 한 번 못했다는 북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아저씨가 말한 ‘10호 초소’는 인민무력부에서 관할하는 초소로, 북한의 주요도로마다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통행증과 자동차 운행증을 검열한다. 국경지역에는 이러한 10호 초소가 수두룩하다. 경제 특구로 알려진 나진·선봉을 들어가려고 해도 이러한 10호 초소를 몇 개는 통과해야 한다는데, 이곳도 특별 관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혹시 북한에서 김정일이 현지지도 온 것을 본 적이 있나?
“김정일이 우리 농장에 사냥을 왔던 적이 있지.. 현지지도를 온 게 아니고 사냥을 왔단 말이에요. 하루는 보위부에서 길을 차단하더란 말입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과수농장으로 빨리 올라가라’고 소리를 지릅디다. 올라가고 있는데 혹시라도 차를 볼까봐, 사람들을 (길 반대방향으로) 돌려 앉혀 놓았습니다. 한참동안 펑펑 총소리가 나더니, 부관이 가서 ‘꿩을 세 마리나 잡았다’고 하고, 그 다음에 씽 달아났단 말이에요. 그렇게 분명히 사냥을 왔다 갔는데, 나중에 김정일이 현지지도를 왔다고 하면서 비석(현지지도비)을 세우더란 말입니다. 그 비석 돌도 양강도 어디에서 만들었다고 하던데…. 총으로 꿩 쏘는걸 내가 다 바라봤는데 그걸 현지지도라고 그런단 말이야. 그게 현지지돕니다.” (아저씨)
아저씨가 “양강도 어디에서 가져왔다는 비석돌”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황해북도 봉산에서 가져온 것일 가능성이 높다. 북한에서는 현지지도비를 대리석으로 세우는데, 이것을 만드는 공장이 황해북도 봉산에 있다. 특각에 쓰이는 대리석도 대체로 여기서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아저씨가 살았던 함경북도의 경우는 조금 다를 수도 있다. 아저씨는 그 웃기는 ‘현지지도’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와서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한 게 없는데, 무슨 말을 수두룩하게 적어 놓고 ‘교시’라고 합디다. 그날 무슨 일 때문에 우리 농장에서 소를 잡았는데, 김정일이 때문에 동원되었던 군안전부 사람들이 소고기만 다 먹고 갔습니다.” (아저씨)
인터뷰 후반으로 갈수록 부부는 긴장을 풀고 북한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서로 거들어 가며, 때로는 “아니지, 그게 아니지”라고 자기 기억이 맞다면서 술술 이어갔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밤이 늦어진 관계로 그쯤에서 인터뷰를 마쳐야 했다.
- 탈북자들이 대사관에 진입하여 한국으로 망명을 요청하는 사건을 알고 있나? 그렇게 해서 한국에 가고 싶지는 않나?
“우리도 알고 있지. 그것 참 대단한 일이라고 신기해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늦었지 않습니까. 그것도 처음에 해야지 성공하는 거지. 이제는 대사관 경계가 삼엄해져서 그것도 안될거란 말이야. … 내 만일 한국 갈 수 있다면 피를 물고라도 해보겠소.” (아저씨)
- 만약 대사관 진입에 실패해서 북한으로 끌려가면 어떻게 된다고 보십니까?
“그건 영락없이 죽었다고 생각해야지. 그건 무조건이란 말이야. 언론에 폭로됐기 때문에 무조건 죽인단 말이야.” (아저씨)
- 그래도 한국으로 가고 싶으세요?
“아 정말… 정말 가고 싶습니다. 우린 여기서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묻힐 데도 없지 않는가. 우리 여기서 햇수로 5년을 살았습니다. 심리적 고통은 말할 수도 없어요. 하루 밤에도 몇 번씩 끌려가는 꿈을 꿉니다. 우리는 잘 때 문을 꽁꽁 닫아 놓고 잡니다. 한순간이라도 마음 편히 발뻗고 자고 싶습니다.” (아주머니)
이외에도 인터뷰한 내용이 많지만 다 옮겨 적질 못했다. 독자들이 읽은 대로, 이들의 인터뷰는 최대한 그들의 말을 그대로 옮기려 했다. 두 분의 함경도 사투리가 너무도 정겨웠다. 글 속에, 독특한 억양까지 담을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쉽다. 이들의 한숨소리와 글썽이는 눈물까지 독자들에게 또렷이 그려 보여줄 수 없는 이 짧은 필력(筆力)이 원망스럽다.
이 부부가 사는 집에는 라디오가 있지만 오래되어서 듣지 못한다. “라디오가 있으면 한국방송이라도 들으며 지낼텐데”하는 아저씨의 말에, 내게 라디오가 있었다면 건네주고 싶었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돈이라도 많으면 사주고 싶지만, 그냥 돌아서기 미안해 “아저씨 약값에 보태라”며 아주머니 손에 인민폐 100원을 쥐어주었다. 고마워 어쩔 줄 몰라하는 부부를 뒤로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밤하늘의 별은 왜 그다지도 많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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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의 남한사회 정착문제
김중태 (통일부 남북관리사무소장, 전 하나원장)
탈북귀순 동포의 정착실태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1997.1.13) 제2조(정의)의 규정에 의하면, '북한이탈주민'이란 북한에 주소·직계가족·배우자·직장 등을 두고 있는 자로서 북한을 벗어난 후 외국의 국적을 취득하지 아니한 자를 일컫고 있다.
그러나 과거 법령용어는 월남귀순자('62∼'78), 월남귀순용사('79∼'93), 귀순북한동포('93∼'97)등으로 변천되어 왔으며 이외에도 탈북자, 탈북동포, 탈북귀순자, 귀순자, 귀순동포, 자유북한인 등 다양하게 사용되어져 왔다. 본 원고에서는 현행법 체계상 북한이탈주민의 의미는 해외 체류자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국내 입국 북한이탈주민을 '탈북귀순동포'로 정의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북한은 1995년 이후 지속된 자연재해로 심각한 경제난과 식량난에 직면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대내외 체제위기 속에서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이라는 구호를 통해 사회통제 시스템을 강화하고 경제난을 타개하고자 노력해 왔다. 하지만 국가배급체계의 붕괴와 북한사회에 만연한 것으로 알려진 부패로 인하여 일반주민들의 식량난은 더욱 가중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북한의 식량난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과 인접한 국경지역에서 주민들의 탈북현상이 확산되기 시작하여 매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이들은 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조선족 밀집지역, 즉 중국의 동북 3성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체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인권유린, 노동력 착취 등의 고통과 언제 공안에 체포되어 북한으로 강제 송환될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국체류 탈북동포들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물질적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남한으로의 입국을 희망하고 있다. 그들은 중국을 통해 여권위조, 밀항 등의 방법으로 남한으로 입국하거나 일부는 몽골·동남아 등의 제3국을 경유하여 UNHCR 등 국제기구의 협조로 한국에 입국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정상회담 이후 3년여 동안 남북관계 진전 및 대북식량지원 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생명을 걸고 탈북한 후 자유를 찾아 국내에 입국하는 탈북귀순동포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2003년 9월말 현재 4,010명이 귀순을 했으며, 2003년 현재 국내에 살고 있는 탈북귀순동포들의 숫자는 3,76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특히 1998년도 국내 입국자수가 71명이었으나, 1999년도에는 2배 증가한 148명에 이르렀으며 2000년 312명, 2001년 583명, 2002년 1,140명, 2003년 9월 현재 880명이 입국하는 등 매년 전년 대비 2배 이상 증가 추세를 보여오고 있으며, 금년에는 작년보다 약간 상회한 수준에서 증가세가 주춤한 상황이다.
또한 1990년대 중반까지는 단독 입국이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나 최근 들어 가족을 동반하거나 먼저 입국한 국내가족의 주선으로 입국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또한 과거에는 20∼40대 청·장년층 중심의 귀순에서 현재는 유아에서부터 60∼70대 고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입국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여성비율의 증가와 학령기에 접어든 청소년들의 숫자가 증가 추세를 보여주는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부분의 탈북귀순동포들에는 탈북, 제3국 은신 도피생활 과정에서 겪은 충격으로 인한 심리적 불안, 북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죄책감과 남한사회의 친척, 친구 등 연고관계가 적음에 따라 나타나는 외로움 등을 해소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생성해 가는 일이 쉽지 않은 실정이다. 이에 더해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새로운 환경 변화와 적응에 대한 걱정으로 인하여 정서적 불안 및 심리적 위축 등으로 초기 적응에 상당한 애로를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체제에 대한 이해부족, 언어·사고·생활습관 등의 차이로 인한 문화적 이질감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리고 생활방식에 있어 계획·통제사회의 타율적 시스템에서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시스템에 적응하는 데 있어 곤란을 겪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노동생산성을 강조하는 우리사회의 노동강도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남다른 각오와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정착 초기 상당한 애로를 겪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하나원의 사회적응 교육
탈북귀순동포들은 남한과는 체제와 사상이 다른 북한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정착초기 남한사회에 적응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탈북귀순동포들의 부적응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남한사회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응교육을 통해 남한사회에서 살아가면서 겪을 시행착오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남한사회에 되도록 빨리 정착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남한사회 정착교육시설인 하나원이 1999년 7월 8일에 문을 열었다.
2002년부터 국내 입국자들의 증가로 기존의 하나원 시설이 부족하여 정상적인 사회적응교육을 할 수 없게 되어 2002년 9월 30일자로 분당의 새마을중앙연수원 시설 일부를 임차하여 여성만의 사회적응교육을 위한 분원을 설치하여 특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안성본원 130명, 성남분원 80명)
탈북귀순동포들은 대부분 북에서 태어나 자라난 분단 2∼3세대들로서 육체는 남에 와 있지만 가치관, 의식구조, 행동규범 등은 아직 북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차이를 완화시키는 작업, 즉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기초 소양을 만들기 위한 준비기간, 본격적인 남한사회에서의 정착생활을 시작하기 전의 완충기간으로서 하나원에서의 남한사회 적응교육 기간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원의 사회적응교육은 탈북귀순동포들이 남한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삶의 방법을 배우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원에서는 지난 4년여 동안 관계전문가, 정착지원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하여 교육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보완, 발전시켜왔다. 특히 교육 당사자인 탈북귀순동포들의 의견 반영을 위해 교육을 마친 후 정착생활을 하고 있는 수료생을 대상으로 부적응 사례를 수시로 수집한다. 이것을 사회적응교육 프로그램에 반영함으로써 남한사회에서의 초기 정착과정에서 유사한 일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시행착오를 최소화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탈북귀순동포들이 남한사회에 적응하여 생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남한사회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하나원에서는 2개월 동안의 교육을 통해 남한사회에 적응하여 생활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출 수 있도록 교육훈련 프로그램을 집중적이고 체계적으로 구성하여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첫째, 탈북·제3국 은신·도피 생활과정에서 겪은 일로 인한 정서적 불안과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새로운 환경변화에 어떻게 적응해서 생활할 것인가에 대한 걱정으로 인한 심리적 불안감을 해소하도록 한다. 이를 위해 개별 심리상담, 심성수련 훈련 등을 통해 자기개방·자아인식·타인이해·대인관계 등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교육기간 중 지속적인 심리안정·정서순화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둘째,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체제에 대한 이해부족, 언어·사고·생활습관 등의 차이로 인한 문화적 이질감 해소를 위해 홈 스테이·문화탐방 등 현장체험 학습을 통해 남한사회 내면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교육중점을 두고 있다.
셋째, 유망직종보다는 실제 취업가능한 틈새시장의 사이드 직업에 대한 직업보도 및 인근 직업훈련기관 등에서의 현장실습, 산업체 견학 등을 통해 남한사회 직업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또한 취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성취프로그램 운영과 실생활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운전·컴퓨터·제빵·가정보건·피부미용 등에 대한 집중안내 및 기초체험 기회를 제공하여 건전한 민주시민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자립·자활 기반조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
넷째, 관련법의 규정에 의하여 서울가정법원에 취적 허가신청을 하고 취적 허가결정에 따라 호적편제·주민등록을 하고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게 된다. 사회편입초기 생활안정을 위해 영락교회·정동제일교회 등에서 주방용품·침구류 등을 지원해주고 있다.
하나원 개원 이후 2003년 9월 현재 2,700여 명이 교육을 받고 남쪽에서의 사회생활에 무난히 적응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탈북동포 문제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분단의 장기화로 인한 이념과 가치관, 생활양식 등에서 이질화가 심화되어 한민족의 동질성이 파괴되어 가고 있다. 분단된 민족과 체제를 하나로 통합하여 민족공동체를 건설하는 일, 즉 남북한의 통일은 국토의 통일, 체제의 통일을 이룬 후 진정한 의미에서의 통일인 사람의 통일이 실현되어야 완성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북한 주민이 함께 살아갈 통일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남한에서 살다가 북한으로 가서 살고 있는 이들과 북한에서 살다가 남한에 내려와서 살고있는 이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연구가 진행되기 불가능하기 때문에 후자, 즉 탈북귀순동포들이 그 동안의 삶을 영위해 온 북한체제를 떠나 이질적인 남한사회에서 어떻게 적응하고 있는지, 어떤 면에서 힘겨워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이는 통일 후 우리가 경험하게 될 남북한 주민간 사회통합에 대한 제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벤치마킹을 해 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탈북귀순동포들의 '남한사회 살아가기'는 바로 통일에 대비한 '작은 시험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과 북의 주민들은 그 동안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서로 다른 체제 속에서 이질적인 삶을 추구해 왔기 때문에 앞으로 통일이 될 경우 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겪게 될 혼란과 충격을 흡수하고 민족화합을 이루는 일은 매우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현재의 탈북귀순동포들은 본인 의사에 의해 자유를 찾아 한국에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사회에 적응하여 살기 위해서는 우리 문화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통일한국에서는 북한주민 모두에게 우리의 사고·체제에 적응하도록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뒤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체제에 적응하여 살아가기 위해 각자 필요에 의한 취사선택을 하게 되겠지만 일정기간 남북 양쪽의 문화는 공존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여진다.
현재 탈북귀순동포들의 특징적인 사고·행동 양태를 무조건적으로 이해 못할 것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분단 2∼3세들인 이들이 북한에서의 생활을 통해 갖게 된, 우리와는 다른 의식구조와 행동 양태를 이해하고 이들의 입장에서 배려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통일 이후에 겪게 될 것으로 예상되는 문제를 통일 이후에 준비해서는 늦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지금부터 차분한 사전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탈북 귀순동포 이해를 위한 새로운 인식
완전한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법적·제도적·영토적 통일뿐만 아니라 내적 통합의 의미에서 사람의 통일이 필요하다. 탈북귀순동포들이 우리사회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여 생활할 경우, 우리 국민들은 이들에 대해 긍정적 시각을 갖게 되고 이러한 인식은 법적·제도적 통일 이후 진정한 의미의 통일을 이룩하는 데 결정적 힘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이들이 적응에 실패하고 각종 범죄 등 사회일탈행위로 사회문제를 야기할 경우, 우리국민들은 탈북귀순동포들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게 되어 제도적 통일 이후 사람의 통일을 이룩하는 데 심각한 걸림돌로 작용될 수도 있다. 탈북귀순동포들의 우리사회 적응문제는 단순히 탈북귀순동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통일한국의 제도적 통일 이후 내적 통합 즉, 사람의 통일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실질적 통일준비 작업의 일환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탈북귀순동포들과 하나원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느낀 인식은 50여 년 분단의 세월로 남북한은 서로 이해하기 어려운 타문화권으로 변모한 상태라는 것이다. 소수자·약자일 수밖에 없는 탈북귀순동포들이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우리와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나 적응상의 애로점 등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바로 통일에 대비하여 준비해야 할 중요한 시사점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다른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특정 문화는 인간의 사고·행동 등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 때문에 어떤 특정 국가의 말을 잘한다고 해서 그 나라 문화를 이해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인격발달에 대한 이론과 과거 역사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면 남북 주민들간에는 인격발달이 상당히 다르게 진행되어 왔을 것으로 예상된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나와 다른 것에 대해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다를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 무엇이 왜 다른가를 알고자 하기보다는 '다름'을 우열의 개념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 탈북귀순동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남과 북의 문화적 차이를 서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고 북한실상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생기는 오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탈북귀순동포들의 적응장애를 인정하지 않고 이들의 조기 정착을 기대하는 것은 금물이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을 우리는 곧잘 인용하기도 한다. 봄철에 식목행사로 나무를 옮겨 심어 놓아도 최소한 3∼4년은 지나야 그 나무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게 된다. 하물며 체제와 사상이 다른 북한 땅에서 태어나서 살아온 탈북귀순동포들에 대해 남한 주민들이 자신들과 같아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한 그들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와 포용은 어려울 것이다.
남북한 문화차이로 인한 적응의 어려움
탈북귀순동포들이 남한사회에 정착하면서 겪는 애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과 북의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각 문화집단의 인성적 특징은 유전이나 혈통 같은 인종적, 종족적 유사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집단이 공통으로 경험한 역사와 각 개인이 어릴 때부터 체험한 양육 및 교육방식을 통해 형성된다고 한다. 부연하면 각자가 태어난 문화적 환경 속에서 체험을 통해 인성적 특징이 형성되고 학습을 통해 재생산되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태국 관광을 가게될 때 흔히 관광안내 가이드로부터 태국에서는 함부로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지 말라는 주의를 듣는다. 이런 행위를 태국인들은 모욕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의 우호적인 표현이 태국인들에게는 적대행위로 둔갑하는 이유는 두 나라의 문화적 차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경우로 LA교민들의 이민 초기 정착과정을 살펴보면 우리 교민들이 형사 입건된 사건이 상당수 있는데, 그것은 언어표현의 문화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다툼이 생겼을 때 화가 나면 언어를 거침없이 사용한다. 우리사회에서는 실제 폭력행사가 아닌 이런 투의 언어폭력은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미국에서는 거친 표현으로도 형사입건이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 교민들이 이민 정착 초기에 형사 입건된 숫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호를 보내는 사람이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경우도 종종 있다.
미국에서 중학교까지 다니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한 학생이 수업시간에 잘못하여 선생님으로부터 체벌을 받은 경우가 있었는데, 체벌을 당한 학생이 선생님의 눈을 쳐다보자 선생님은 이 학생의 시선을 반항으로 생각하고 체벌의 강도를 좀 더 높였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잘못을 시인하려면 상대방의 얼굴을 피해 고개를 숙여야 하지만 미국에서는 상대방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상대방의 얼굴, 특히 눈을 바라보도록 교육받는다는 것이다. 구미인들은 대화 시에 항상 상대방의 눈을 응시한다. 특히 상사가 훈계할 때 상사의 눈을 쳐다보지 않으면 몹시 무례하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위의 몇 가지 사례에서 보듯이 탈북귀순동포들의 경우에도 북한에서는 전혀 문제되지 않던 행위들로 인해 남한에서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동일 언어를 사용하고 생김새가 같기 때문에 남북한 주민들은 서로 이러한 문화적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갈등하게 되고, 탈북귀순동포들의 입장에서는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탈북귀순동포들이 남북한 문화차이로 인해 겪는 어려움에는 남한주민들이 갖고 있는 편견이나 선입관으로 인한 경우도 많다. 우리의 관점에서 이들을 평가하고 규정하는 편견으로 인해 탈북귀순동포들이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부분도 상당히 있다. 이런 점에서 문화적 차이와 다름을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없이 그 자체를 부정적이거나 이상한 것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시각으로 탈북귀순동포들을 평가하는 것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남한 주민들과 탈북귀순동포들 사이의 문화적 갈등은 적정한 수준에서 해결되면 오히려 역시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이루는 촉진제가 될 수도 있다. 서로 다른 견해를 인정하고 적절히 융화시켜 나간다면 앞으로 남북한은 커다란 어려움없이 사회통합을 이루게 될 것이다.
탈북 귀순동포의 직업과 거주지에 대한 선호
탈북귀순동포들은 체제·사상이 서로 다른 북한생활을 통해서 형성된 고정관념, 우리사회에 대한 이해 부족, 그릇된 정보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초기 정착생활에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탈북귀순동포들은 법·규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무조건 우기거나 큰소리치면 해결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모든 것이 사람이 하는 일인데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또한 취업·진학·거주지 문제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북한 또는 제3국에서의 경험에 비추어 판단하는 등 변화된 새로운 환경이나 여건을 고려하지 않으려는 현상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탈북귀순동포들은 북한에서의 직업 경험이나 중국 연변 등지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젊은 남성의 경우 한국에서 운전기사로 취업하기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북한에서는 운전기사가 되려면 우선적으로 당원이어야 하며 다른 직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북한사회에서 대접받는 직업이었다는 인식이 남아있고, 중국 연변 등지에서도 대학교수 등 전문직에 종사하던 엘리트들이 자본주의 물결이 들어오면서 택시기사 등으로 전업하여 많은 돈을 벌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남한에서의 운전기사는 고노동 저임금에 시달리는 직업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유통회사의 운전기사들은 각자 거래처의 주문을 받아 해당 상품들을 출하 받고 거래처별로 배달한 후 물건 판매대금을 회사에 납입하는 등 1인 2∼3역을 해야 하는 것을 탈북귀순동포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택시 자영업을 위한 개인택시 구입에 소요되는 프리미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으며 지입제로 운영되는 택시 운송회사의 운전기사로 고용되는 경우 노동시간이나 노동강도에 비해 박봉에 시달리는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탈북귀순동포들은 북한 생활 속에서 갖고 있던 소위 근로인테리에 대한 동경심이나 북한에서 해보지 못한 일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사무직을 선호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북한에서 근로인테리로 상당한 대접을 받은 사람들이 남한에서 생산직 근로를 하는 것을 자존심 상하는 일로 생각하여 사무직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탈북 젊은이들의 경우 대학 진학을 선호하고 있다. 이는 북한에서는 누구나 대학을 다닐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대학졸업이 바로 자신의 직업 배치와 출세의 지름길이었기 때문에 남한 사회에서도 대학 졸업이 곧 자신의 신분상승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데 따른 경우가 많다. 신학대학 진학을 희망하는 대부분의 탈북귀순동포들은 신자와 성직자에 대한 구분이 애매모호하여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신앙심이 깊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신학대학을 나와 전도사나 목사가 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들도 많다. 그들 중에는 성직자를 어려운 처지에 있는 탈북귀순동포들을 도와주는 등 자선을 베풀 수 있는 일종의 직업인으로서 존경한 나머지 선호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하나원에서 사회편입 거주지를 선정함에 있어서도 서울 등 수도권 집중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실제 탈북귀순동포들의 경우 평양 구경을 한 사람들이 20% 정도도 안되는 상황이다. 이는 평양에 한번 들어가려면 직계 가족이 있거나 꼭 필요한 공무적인 일 외에는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경우에도 평양여행 승인번호를 받은 특별여행증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평양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계급적 토대(출신성분)가 좋고 당에 대한 충성심이 아주 높아야 하며 가정에 장애인이 한 사람도 없어야 한다. 이러한 평양에 대한 동경심으로 인해 서울지역에 배치되는 것은 마치 평양에 배치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들이 많다. 특히 지방으로 전출된 경험이 있는 탈북귀순동포들의 경우에는 더욱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탈북귀순동포들 중에는 북한사회 생활 속에서 형성된 직업, 거주지, 사고방식 등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남한사회 초기 정착생활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우도 있다.
탈북 귀순동포의 자율성, 창의성의 결여문제
북한은 철저하게 당과 정부에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정치·사회구조로 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선택과 결정도 당과 정부가 내리고 일반 주민들은 오직 상부에서 결정한 것을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상부의 지시 없이 개인의 창의적인 생각으로 내린 결정과 행동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실패의 책임도 전적으로 본인이 져야 하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자의적이고 창의적으로 하기보다는 시키는 일만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모든 것을 자신의 윗사람에게 물어보고 거기서 내려지는 지령에 따라 타율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북한사람들은 늘 위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어떤 지시가 내려지는가 하는 것에만 그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을 뿐 스스로 어떤 일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일에 이들은 매우 취약하다.
탈북귀순동포은 우리사회의 다양성에서 가치체계의 혼란을 느끼고 있으며 특히 자신의 의지로 선택을 해야 하는 문제에 있어서 매우 어려워하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 주민들의 경우에 나타났던 공통적인 행태들이 탈북귀순동포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실제 예를 들어보면 특별히 하는 일없이 교회 사택에 기거하던 한 탈북귀순동포는 자신이 알아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해 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교회에서 교회 정원 청소를 해달라는 목사님의 부탁을 듣고, 매우 기쁘게 빗자루를 들고 정원을 쓸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정원에 흩어진 낙엽이며 휴지 등을 쓸어 정원 한 모퉁이에 있는 느티나무 밑에 모아 놓고 청소를 마쳤다. 그 광경을 본 목사님이 "왜 쓰레기는 치우지 않느냐?"라는 질문에, 청소를 하라고 했지, 쓰레기까지 치우라고 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2002년도에 지병으로 돌아가신 이웅평 대령도 귀순 초기 가장 어려웠던 일이 무엇이었던가 라는 질문에 "이제부터 모든 일을 자신이 알아서 하라"는 이야기였다고 회고하기도 하였다. KAL기 폭파범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현희 씨의 경우에도 어떤 목사님과의 대화 속에서 그냥 아무것이나 적당한 것을 주면 그만 일 텐데 이것저것 갖다놓고 "무엇을 가질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선택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던 일이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탈북귀순동포들이 이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동안 스스로 선택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현상들은 그 동안 탈북귀순동포들이 살아온 북한의 정치·사회체제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탈북 귀순동포의 인간관계 형성의 어려움
북한에서의 식량난, 제3국에서의 은둔·도피생활을 통해 '생존을 위한 삶'을 살아왔던 탈북귀순동포들에게는 남한사회에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생활을 위한 삶'과 같은 방식의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탈북귀순동포들이 정착과정에서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할 줄 모른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이들의 잠재의식 속에는 자기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이 국가에서 당연히 지원되거나 자기들은 약자이고 어려운 사람이기 때문에 주위의 봉사자들이 당연히 도와줘야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들이 있다.
이런 경향은 북한에서는 필요한 모든 것을 국가가 해결해 주는 배급문화 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데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정말 감사할 마음이 없어서보다는 그 동안 똑같이 배급받는 상황에서 별도로 특별히 어느 누구에게도 감사하다고 이야기할 일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직장의 상급자가 쓴 술 한잔을 주더라도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는 우리들 문화와는 사뭇 다른 점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도와줘도 감사인사 한마디 할 줄 모르는 몰염치한 사람으로 오해할 수 있는 일들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탈북귀순동포들에게 정착과정에서 남북간에 특별히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남한과 같이 선진화된 국가, 잘사는 나라에서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그것이 가장 큰 다른 점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북한사회가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시간, 돈을 들여가며 헌신하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사회에서 상대방에게 호의를 베푸는 경우는 손익을 모르는 모자란 사람이거나, 호감을 산 뒤에 역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의도라고 한다.
진정으로 호의를 베푼 일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그들이 유년시절부터 조직생활과 생활총화를 통해 자아비판 내지 상호비판을 해오면서 상대방을 비판하도록 강요받은 생활습관에 기인한 것일 수 있다.
금방 알려질 거짓말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그런 상황마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상습적으로 해온 습관이 몸에 배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는 경우들이 있다. 이런 일로 인해 상대방에게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 자주 생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를 그 동안 북한에서의 생활태도에서 엿볼 수 있다. 북한사회는 이동·거주의 통제가 심하고 언론·방송이나 전화시스템 등이 폐쇄적이기 때문에 설사 거짓말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원거리에 는 그러한 소문이 전달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음주문화도 남한처럼 인간관계나 조직 내 친목이나 화합·단결을 위한 자리로 활용되기보다는 취해보자는 생각에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급하게 많은 양의 술을 마셔 쉽게 취하고, 취하면 대부분 시비나 다툼으로 비화되기도 한다.
자유와 방종 개념 정립이 되어 있지 않아 "그런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면 자유민주사회의 장점이 무엇이냐?"는 등 많은 문제를 본인이 유리한 입장에서 해석하는 경향을 갖는 경우가 많다.
북한체제의 특성상 특별히 감사해야 할 일이 별로 없고, 도움을 받게 되는 경우에도 이에 상응하는 뇌물·상납 등의 뒷거래가 이루어졌던 생활에 젖어있는 탈북귀순동포들에게는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에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일이 쉽지 않다고 한다.
탈북 귀순동포의 잦은 이직과 취업부진
하나원 교육이수 후에는 희망거주지 등을 고려하여 주택지원, 정착금 등을 지급하고, 초기 6개월 동안 경찰관을 배정하여 우리사회 현장체험, 생활안내, 신변보호 등을 담당토록 하고 있다. 그리고 취업 이전 기간동안 의료보호·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하여 지원하고 취학자에게 대학 학비지원과 직업훈련자에 대해서는 직업훈련 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2000년도부터는 탈북귀순동포들의 취업지원과 직업훈련 업무지원을 위해 전국 지방노동청·사무소의 고용안전센터에 별도의 취업지원 창구를 설치 운영하고 있으며, 지방자치단체별로 거주지 보호담당관을 지정하여 각종 애로사항 및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북한이탈주민후원회, 북한이탈주민지원 민간단체협의회의 지원 등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민간차원의 정착지원망을 구축하여 운영하고 있다. 안정된 취업을 위해 북한이탈주민을 고용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일정기간(2년) 고용임금의 1/2을 정부에서 부담하는 등 정착초기 취업보호를 위한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부는 2000년도부터 탈북귀순동포들의 보다 안정된 정착생활 지원을 위해 관련법을 개정하여 취업보호제를 도입하는 등 보다 실질적인 지원방안을 마련하여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탈북귀순동포들의 안정적인 취업 지원 문제는 정부만의 몫이라고 하기보다는 '1기업 1명 채용운동' 등 민간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
탈북귀순동포의 취업은 소득 획득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직장생활을 통해 사회적 연대관계를 형성하여 남한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리를 구축하는 결정적 요건이다. 실제 일부 탈북귀순동포들은 남한사회 정착과정에서 인력난을 겪고 있는 소위 3D업종 등은 회피한 채, 봉급 많고 화려한 일자리만 찾아다니다가 허송세월을 하는 이들도 있다. 또 탈북귀순동포들의 대부분은 북한에서나 제3국에서 정상적인 노동을 해본 경험이 오래되어 본인들의 의지와는 달리 우리사회가 요구하는 정도의 노동강도를 따라갈 만한 능력이 대부분 부족한 실정이다.
IMF이후 우리 사회의 문제로 되어 있는 노숙자 생활도 6개월 이상 하게 되면 영원히 노숙자 생활을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북한의 경제난이 계속된 몇 년 동안 정상적인 노동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우리사회의 노동강도를 따라가기에는 정신적·체력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기본적으로 노동생산성과는 별 관계없는 북한사회에서의 생활이 몸에 배어 있는 이들에게는 남한사회에서의 노동이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이런 취약점으로 인해 탈북귀순동포들은 잦은 이직을 하게 되고 자신의 전문성이나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사무직을 선호하거나, 식당 등 자영업을 통해 빠른 시간 내 돈을 벌어야 하겠다는 조급한 마음이 앞서 실패를 자초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탈북 귀순동포의 언어소통의 어려움
남북한 사회통합의 기본은 언어 통일이다. 언어의 사회적 속성과 사회통합 기능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 체제 속에서 50여 년의 분단상태를 지속하여 온 남북한간에는 어휘와 어미, 발음과 억양, 화법, 언어예절 등에 상당한 차이가 발생하고 있다. 실제로 탈북귀순동포들은 남한사회 정착과정에서 언어차이로 인한 남한사회 적응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남한의 경우 상용 한자 1,800자가 일상에서 사용되기도 하고, 남북한 언어중 의미가 다른 뜻으로 이해되는 어휘가 약 3,000단어 정도 된다고 하니 분명 남북한 주민사이에는 의사 소통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2003년 9월 16일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남북한 언어차이와 통일언어 교육의 실태'에 관한 토론회가 있었다. 이 토론회에서 '북한교과서를 통해본 남북한 언어이질화 실태'에 대한 연구 보고가 있었다. 분단세월 만큼이나 멀어진 남북간 언어는 이질화가 심각하여 많은 부분에서 번역을 요구할 정도로 크게 달라져 있음을 확인해 주었다. 언어이질화 사례로 고등중학교 1학년(중학교 1년) 국어교과서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일남이는 고기를 잡느라고 물참봉이 된 바지를 억이 막혀 내려다보았다 《야, 너 물고기구 뭐구 어서 바지나 짜 입어라.》《일 없어, 난 오늘 물고기를 꼭 잡아야 해, 못 잡으면 꽝포쟁이가 되거던…》.
예문 중에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표현이 눈에 띈다. 우리말로 해석해 보면 일남이는 고기를 잡느라고 물에 흠뻑 젖은 바지를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야, 너 물고기고 뭐고 어서 바지나 짜 입어라," "괜찮아, 난 오늘 물고기를 꼭 잡아야 해, 못 잡으면 허풍쟁이가 되거든……"이란 뜻이 되는 것이다.
북한 사람의 '일없다'는 말은 남한의 '괜찮다. 좋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남한 사람의 '일없다'는 '당신 상관할 일이 아니다'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 '아글타글'이라는 말은 북한에서 많이 쓰이지만 남한에서는 거의 들을 수 없다. '아글타글'은 '무엇을 이루려고 몹시 애쓰거나 기를 쓰고 달라붙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로서 우리의 '필사적으로', '전력을 다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북한에서는 '오징어'를 '낙지'로 '낙지'를 '오징어'라고 한다. 그래서 탈북귀순동포들과 안주로 마른 오징어를 시키면 영락없이 "아, 낙지"라고 한다. 낙지가 아니고 오징어라고 하면 "이게 왜 오징어냐"고 반문하게 된다.
이처럼 어휘 등의 차이로 남한사람들이 탈북귀순동포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문제이다.
그리고 탈북귀순동포들은 우리사회에 범람하고 있는 영어·외래어·한자성어 등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원활한 언어소통이 되지 않아 초기 정착생활에 상당한 애로를 겪고 있다. '식료상점' 등 상점수준의 상호만 접해온 이들에게 있어서 '미니슈퍼'부터 시작하여 '슈퍼마켓', '원스톱', '쎄븐일레븐', '베스토아' 등 다양한 종류의 상점들에 대한 이해도 어렵다. 빵집이란 상호도 '크라운베이커리', '파리바케트', '하이몬드베이커리', '엠마' 등 여러 가지 브랜드로 사용되어 이해하기 어렵다.
이러한 이질화된 언어로 인하여 탈북귀순동포들이 의사소통 및 교감에 있어 장애를 느끼게 되면, 사람 만나는 것을 기피하거나 적극적인 의사표현을 하지 않는 등의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처럼 언어 부적응은 전반적인 남한사회 적응과 연계되어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탈북 귀순동포의 심리적 특성
탈북귀순동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이들의 심리적 특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심리적 특성에 개인차가 있듯이 탈북귀순동포들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탈북귀순동포들은 탈북 이후 완전히 이질적인 환경에 대처해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환경에 대처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는 탈북귀순동포들은 이러한 환경의 변화로 인해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고, 무력감, 좌절감에 빠지거나 위축되기도 한다. 또한 탈북귀순동포들은 자신의 탈북으로 인해 북에 있는 가족, 친지가 받게 될 처벌 때문에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이와 함께 부모 친척을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 사회적 관계의 단절로 인해 심각한 정서적 공황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죄책감, 외로움은 낯선 환경에서 오는 두려움, 갈등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이들의 적응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외로움의 문제는 심리적 갈등의 주요인으로 작용하여 우울증 등 심리적 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
최근 남한으로 입국하는 탈북귀순동포가 급증하면서 탈북 경로 또한 다양화되고 있다. 제3국에서 무국적자로 체류하면서 법적 제재를 피하기 위하여 극심한 피해를 감수한 이들은 정서적으로 피폐화되었으며 공격적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인권유린이나 모욕은 자존심이 강한 탈북귀순동포들에게 자칫 잠재된 공격성으로 내재될 수 있다. 특히 제3국에서 경험한 한국인에 대한 지극히 단편적인 체험을 전체인 것처럼 받아들여 남한사람에 대해 피해의식과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다. 또한 무국적자로 다년간 제3국에서 체류하면서 당한 멸시, 천대로 인해 상대방의 말을 오해하여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탈북귀순동포들에게 있어서 제3국 경험은 정서적으로 왜곡된 인식을 가지게 하고 또 다른 의미의 고통 경험을 갖게 했다.
이처럼 탈북 상황에서 겪은 많은 위협적인 사건들은 탈북귀순동포들에게 정서적 불안을 유발시키며 이러한 증상은 사건이 종결된 후에도 계속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심리적 스트레스는 계속 감정적, 심리적으로 각성 상태에 머무르게 하고, 불면을 유발하며 계속적인 악몽에 시달리게 한다. 이러한 반응은 추후 심리적·감정적 무감각증으로 나타나 다른 유형의 감정에도 무감각해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즉 기쁨과 즐거움과 같은 긍정적 감각에도 무감각해질 수 있고 심한 경우 삶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또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이중적인 입장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의사소통, 사고방식, 생활습관 등에서 느껴지는 차이들이 이러한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제3국에 체류했던 탈북귀순동포들은 자본주의를 다소 이해하게 되고 남한 사회 적응에 대한 스트레스가 다소 감소되는 효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실례로 제3국 체류 시 남한사람이 다수 있는 곳에 있던 탈북귀순동포들은 사회적 지지기반에 대한 불안감이 적으며 남한인에 대한 두려움, 적응에 대한 막연함이 상대적으로 적게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새로운 삶의 환경이 반드시 문제 상황을 발생시킨다고 볼 수는 없다. 이전의 상황보다 더 좋은 환경으로 변화하였을 경우 그것이 반드시 심리적·정신적으로 부정적인 증상으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 탈북귀순동포들은 남한이라는 새로운 삶의 환경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능력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부적응 양상은 성격, 연령, 학력, 사회적 계층 등의 개인적 배경에 따라 차이를 보이지만 대체로 다수의 탈북귀순동포들은 심리적으로 적지 않은 갈등을 겪고 있다.
또한 기존에 탈북한 가족의 권유로 북한에서 바로 탈북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북한체제에서 인식된 반미·남한에 대한 적대감으로 인하여 우선적으로 공포감을 느끼며 생명에 대한 위협까지 느끼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남한사회 정착과정에서 발전된 한국의 경제·산업·도시화를 체험하면서 북한체제에 대한 배신감과 불신을 표출하며, 발전된 한국에서 자신의 능력으로 어떻게 정착할 수 있을지 불안감을 느끼기도 한다.
북한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죄책감과 향수병
북한에서 태어나 삶의 대부분을 북한에서 살아온 탈북귀순동포들은 북에 두고 온 가족과 친지에게 죄책감을 느끼거나 외로움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다. 북에 남은 가족들이 조국과 민족의 배반자라고 자신을 욕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탈북 사실을 알리지 않고 남한에 도착했을 경우에는 자신을 찾기 위해 걱정하고 있을 가족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기도 한다. 한국에 온 기쁨보다는 북에 남은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자신이 누리고 있는 남한에서의 풍요·행복이 오히려 죄책감이 되어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특히 명절 때면 고향에 계신 부靜ㅔC뇟ㅔ1링涌?대한 그리움이 가중된다고 한다.
죄책감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앞으로 가족을 만나게 될 경우 물질적으로 보상해야 한다는 강한 욕구로 바뀌어 오로지 가족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돈을 벌어서 성공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가득 차게 만들기도 한다. 앞으로 통일이 되거나 제3국을 통해서라도 가족을 만날 수 있으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만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부모에게 사죄를 하기 위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은 탈북귀순동포들의 가족에 대한 보상 심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빨리 성공해야 한다는 조급증에 비해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에는 좌절감으로 인해 우울증을 초래하게 된다. 계속된 좌절감은 고향산천을 등지고 부모형제를 떠나 헤매던 긴 여정의 타국 생활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게 한다.
탈북귀순동포들은 남한에 정착해 생활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가족이나 친구가 없음으로 인해 외로움을 호소하기도 한다. 아무런 연고가 없이 막연하게 혼자라는 고독감을 경험하게 될 때 이들은 적극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을 개방하기보다는 자신을 더욱 소외시키고 단절시킨다. 심리적인 고충을 호소하고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만 상대방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지 염려하게 되고, 약점이 드러나 소문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불안해한다. 즉, 자신의 우울증을 해소하기 위해 인간관계를 더욱 확장시키고 지지기반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는 자신 혼자라는 생각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상이 지속될 경우 불행감, 무력감 등의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로 상습적으로 폭주를 하기도 하고, 외로움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걸맞지 않는 탈북귀순 상대자와의 결혼을 서두르는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신앙생활을 통한 정신적 안정과 폭넓은 교우관계를 통하여 인간관계를 넓혀 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일로 힘들어하고 고통 속에서 번민하고 있는 탈북귀순동포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그들을 마음속으로부터 끌어 안아주고 안정적으로 생활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진정한 마음의 동반자가 주위에 많다는 점을 인식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탈북 귀순동포의 피해의식으로 인한 공격성
남한사람에 비하여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을 많이 보이는 것이 탈북귀순동포들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탈북귀순동포들이 남한사람들에 대해 표현할 때 흔히 예술적이고 유순하고 부드럽다는 이야기를 많이 할 정도로 이들의 언행은 매우 직선적이고 거친 면이 있다. 이들은 자신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행동화하려는 성향과 인내심 부족, 조급성, 자존심, 고집을 억제하지 못하여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우선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들을 많이 보인다.
이러한 성향으로 인해 탈북귀순동포들은 일상생활에서도 사소한 일에 과격하고 극단적인 반응을 보인다거나 심한 욕설을 하거나 격렬한 몸싸움을 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의견과 다른 의견에 대해서는 흑백논리식으로 대응하며, 자신의 뜻을 좌절시키거나 자신에게 비판을 가하는 사람에게는 갑자기 심한 욕설을 하는 등 강한 공격성을 표출하는 경우가 많다.
탈북귀순동포들이 보이는 공격성에 대한 원인들을 살펴보면, 이는 유아기부터 정체된 욕구 불만이 공격성으로 표출된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욕구불만이 강해지면 공격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데, 적의나 분노가 쌓이면 공격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고 더욱 격화되면 심한 파괴적 행동이 나타난다. 욕구불만의 대상에 대해서 자기의 적대감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며, 직접적으로 공격할 수 없는 경우에는 다른 대상인 동료와 말다툼을 하거나 싸움을 한다. 욕구불만과 심리적 스트레스로 인하여 성격이 거칠어지고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습관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성향은 북한사회의 보편화된 인권유린과 인간존중 의식의 결여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체제유지를 위한 인간경시 풍조는 자신의 일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한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북한주민이 일주일에 1회 이상 실시하고 있는 생활총화가 그 원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일거수 일투족이 불특정 다수에 의하여 철저히 규제되고 비판된다고 생각할 때 우선적으로 긴장하게 된다.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을 때 자신을 피해자라고 간주하며 가해 당사자에 대한 응징과 복수심을 축적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주의 정권은 모든 개인이 원자화가 되어야 국가의 통제가 용이하다고 보기 때문에 인민대중이 다른 대상에 충성하는 것을 예방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북한사회에서도 인간관계가 원자화되어 있으며, 당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주민상호간의 인간관계를 억제한다. 인간관계의 원자화를 조장하는 제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상호 고발제도인데, 고발하지 않으면 고발하지 않는 사람이 처벌을 받게 된다. 누가 보위부 정보원인지 모르기 때문에 친구에게조차도 마음을 열지 못하고 서로를 불신하게 된다. 매주 실시하는 생활총화도 인간관계의 원자화를 조장하여 근본적으로 사람을 믿지 못하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생활을 경험하면서 성장한 탈북귀순동포들은 남한사회에 대해서도 자신의 귀중한 재산과 생명을 노릴 수 있다는 의심으로 인하여 경계심을 나타낸다. 대인관계에 대한 불신풍조로 서로에게 적대감을 표현하게 되며, 표출하지 못할 경우 분노가 내재되어 심리적으로 불안정감을 초래하게 된다.
탈북귀순동포들은 제3국에서의 은둔·도피생활을 하는 동안 생존을 위한 불안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거나 신뢰할 수 있는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갖고 있다. 이런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화풀이식 음주습관을 버리고 가급적 비슷한 성격의 소유자나 서로간에 나쁜 감정을 갖고 있는 탈북귀순동포들 상호간의 접촉을 자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어른들의 경험담을 듣거나 스스로의 감정을 통제하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탈북 귀순동포의 권력과 법에 대한 태도
우리 사회에도 지도자 그룹의 실세나 실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직위에 있는 사람에 대해 지극히 예민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탈북귀순동포들의 경우에는 이런 성향이 북한에서의 삶을 통해서 체질화되어 있는 측면이 있다.
북한사회는 철저한 권력사회, 계급사회, 집단사회이다. 인류의 보편적인 공동선이 존재하기보다는 김일성, 김정일이라는 무조건적인 최고 권력으로부터 모든 하부조직과 각 개인에 이르기까지 권력의 서열로 조직화되어 있고, 옳고 그른 것 역시 권력을 가진 자에 의하여 판단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런 것에 익숙해져 있는 탈북귀순동포들은 남한에 와서도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남한 사람들과 그 힘에 대하여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자신이 파악한 그 힘에 따라 대하는 태도에 큰 차이를 보인다.
탈북귀순동포들은 남한에서의 정착생활을 하기 전에 약 2개월 동안 하나원에서 남한사회의 적응교육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일부 교육생들은 이 교육기간 중에 하나원 원장 등 간부들과 거주지 배정직원, 물품보급관(소위 '창고장'이라고 호칭) 등과의 인간관계 개선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측면이 있다. 물론 남한사회에서 자신의 애로 사항 등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당사자란 측면에서 순수한 부분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상대하고 있는 사람들의 '힘'에 대하여 매우 민감하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원 입소전의 기관인 군이나 정보 계통의 사람들을 상대할 때에는 매우 순종적이지만 자신들에게 부드러운 태도로 대하는 공무원이나 자원봉사자들에 대하여는 비교적 그 권위와 힘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남한사회 정착 초기 일부 탈북귀순동포들은 남한의 실무담당 공무원들에게 요구사항을 제기하였다가 규정상 어렵다는 말을 들으면 매우 분개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개인적으로 봐주고 도와주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을 해주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무원보다 더 높은 공무원을 직접 찾아가 문제를 해결하려는 식의 태도를 보여 남한 공무원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이것 역시 북한에서의 이들의 경험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은 모든 선과 가÷?근원인 존재들이다. 그것은 북한이 어떤 상식이나 인류의 보편적 가치, 그리고 그와 연관된 규정과 법에 의하여 운영되고 통치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김일성, 김정일 그 개인의 뜻과 생각에 의하여 운영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다 보니 북한에서는 이러한 통치와 운영방식이 김일성, 김정일의 최고위급에서만이 아니라 가장 말단의 작업장에서조차도 그대로 적용된다.
규정보다도 상급자의 개인적 생각과 의지가 더 중요하고 실제적인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북한 사람들로 하여금 규정이나 법을 무시하려는 태도, 그리고 힘을 가지고 있는 개인과의 관계에 더 예민하게 되는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과 같은 독재국가에서는 누가 힘있는 사람인지를 파악하고 그와 어떻게 연관을 맺어야 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생존의 방법이 되어 왔던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탈북귀순동포들에게는 법치주의 국가의 실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함께 민주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왜 준법정신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교육이 필요하다.
북한사회에서는 전혀 문제되지 않을 일들이 이곳 남한사회에서는 법의 저촉을 받을 수밖에 없는 명확한 이유를 설명해주고 납득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남한사회는 법과 제도에 의해 모든 행정이 처리되며, 관계자의 힘이나 상부의 지시에 의해 안되는 일이 되는 사회가 아님을 분명하게 인식시켜 줄 필요가 있다.
탈북 귀순동포의 명분을 강조하는 태도
2002년 여름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에 모습을 드러낸 소위 북한의 '미녀 응원단'은 우리사회에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충격적이었던 사건은 양궁경기를 위해 예천 김진호양궁장으로 가던 예천 시내의 도로변에서 일어났다.
예천 시민들이 준비한 북한선수단 환영현수막에는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악수하는 사진이 들어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던 북한 응원단이 길거리에 김정일 위원장의 사진이 걸려있는 것을 보자 갑자기 차를 세우게 하고는 수십 명의 북한 여학생들이 뛰어가 그 현수막을 떼어낸 사건이 벌어졌다.
"장군님의 사진이 저렇게 길바닥에 걸려 있다가 비를 맞으면 어떻게 하느냐?"며 눈물을 글썽이는 이들의 태도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코미디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섬뜩한 생각이 드는 사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배자의 카리스마와 이미지 상징조작이 일상화되어 있는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정착 초기 일부 탈북귀순동포들이 보이는 심리적 특징 중 하나는 그들이 탈북과 남한에 들어온 행동에 대하여 공적인 가치와 명분을 앞세운다는 점이다. 위의 예를 염두에 두고 살펴보면 탈북귀순동포들의 이러한 태도를 이해하기 쉽다. 즉 많은 경우 개인적인 이유로 말미암아 탈북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반대와 통일을 위하여 탈북했다고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 솔직한 생각의 표현을 중시하는 남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과장하고 왜곡하며, 공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인간의 노동에 대해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보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그런 보상을 주지 않으면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하여 열심히 일하도록 유도하는 방법의 개발이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된다. 그런 방법 중 특히 북한에서 강조되는 것은 집단을 위한 공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다. 즉 국민들로 하여금 작은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민족과 국가, 집단의 이익과 승리를 위하여 헌신하여야 그것이 올바른 인간이 되는 길이라는 식의 생각을 가지도록 강력한 사상 주입을 하는 것이다.
어느 사회이건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성이지만 북한에서는 이것이 매우 극단적인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즉 유치원에서부터의 모든 공적인 교육, 사회 교육, 신문과 TV 등 대중매체의 모든 내용은 그런 사회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지도록 하는 데 철저히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 조국의 건설, 공산주의적 도덕과 양심, 충성과 효도 등 북한을 뒤덮고 있는 표어들은 모두 개인적인 생각을 버리고 집단주의적 가치에 자신을 헌신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개인적 생각, 개인의 행복과 이익을 추구하려는 태도 등은 철저히 매도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북한 사람들은 개인적인 생각과 행동에서도 공적인 가치와 명분을 붙이는 것을 중시하며 그것을 강조하는 표현 방식과 사고 방식이 발달해 있다는 점이 남한 사람들과의 차이라 할 수 있다.
남한사회에 정착하면서 흔히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기까지 벽돌 한 장 쌓지 않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환대해 준 데 대해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에게 깊이 감사하게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처음 이런 이야기를 듣는 남한주민들은 마치 정치인들의 기자회견 내용 같아 너무나 생소한 이야기로 들려 이질감을 느끼거나 오히려 거부감을 느낄 정도라고 한다.
정착 초기 탈북귀순동포들의 이러한 감사표현은 차츰 줄어들긴 하지만 공적인 자리에서는 예외없이 나오는 일이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기분 나쁘지 않게 지적해주면서 거창한 이야기보다는 실질적이고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도록 지도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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