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 하상 시각장애인 재활쎈터에서는 설립 15년래 조선족 시각장애인들에게 무상으로 안마기술과 각종 의학지식을 가르쳐 그들의 창업과 취업을 적극 부축이고 있습니다. 

  연변 하상 시각장애인 재활쎈터는 주민정국 산하 연변영예원과 사회복지법인 한국 하상복지회가 련합하여 세운 사회복지 자선사업쎈터입니다. 학제가 3년인 이 쎈터에서는 시각장애인들에게 맹인점자, 보행훈련, 음악, 체육 등 기초과목을 가르치는 외  인체정상해부학, 생리학, 병리학, 중의기초학, 중의진단학 등 17개 과목을  무료로 전수하고 있습니다. 연변 하상시각장애인 재활쎈터 제3기졸업생인 박인철은  1999년도부터 연길시에 안마진료소를 꾸리고 질병에 시달리는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해주어 호평을 받고있습니다. 박인철입니다. 
< 우리는 학교에서 지식을 많이 배웠습니다. 연변의학원 교수님들이 배워줬는데 전부 본과교재를 배웠습니다. 그지식으로 다 치료할수 있습니다.>
    
   올해 6월 10일까지 연변 하상 시각장애인 재활쎈터에서는 학원 59명을 졸업시켰는데  90%에 달하는 졸업생들이 자체로 안마원을 꾸리거나 취업햇습니다.  연변 하상 시각장애인 재활쎈터 주임 손인숙입니다. 
< 잘되는 사람들은 한달에 만원이상 벌고 여자인경우에는 보통 다른 안마원에 가서 일하게 되므로 2천원에서 3천원정도 벌고있습니다.>


2008년 06월 13일  연변인민방송국 김홍희기자 

 버려진 아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글: 퉁신(童心)


정부의 한 자녀 정책, 가난, 생명경시, 전통적인 남아선호 풍조로 인해 버려지는 아이들의 증가는 중국에서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고아들을 입양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중국의 성도들, 이 글은 버려진 아이들을 입양하여 키우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경험한 이들의 간증이다.


버려진 모세와의 첫 만남

 내 곁에서 신나게 왔다갔다 뛰어노는 모세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볼 때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넘친다. 나는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을 보았고, 더불어 인간의 무능력함과 유한함을 깨달았다.

 어느 일요일 오후, 나는 딸을 데리고 놀러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원래는 직접 아이에게 옷을 입히지만 이 날만은 아이 스스로 입도록 했다. 워낙 동작이 느려서 옷을 입는 데 한참 걸리는 아이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L자매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어느 병원 복도에서 버려진 아기를 발견했는데, 그냥 버려두자니 마음이 편치 않고 데려가 돌보자니 미혼인 그녀에게는 너무나 벅찬 일이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던 차에, 하나님께서 나를 생각나게 하셔서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다. 그 순간 딸 아이가 조금만 더 빨리 준비를 했거나, 내가 직접 아이를 챙겼다면 전화를 받지 못한 채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곧바로 가겠다고 말했고, 딸과 함께 하나님께서 이 일을 선하게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한 후 병원으로 출발했다.

 지금의 모세는 무척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처음 봤을 때 나는 차마 만지지도 못했다. 태어난 지 한 달 정도 된 앙상하게 뼈만 남은 아기가 종이상자에 누워 있었는데 냄새가 지독했다. 얼굴에는 모기에 물려 긁어댄 상처 자국이 가득하여 흉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허리에는 주먹만한 종기가 나 있었다. 나는 아이가 피부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였고, 병이 전염이 될까 무서워 감히 다가갈 수 없었다. 만약 이 아이가 평일에 발견되었다면 곧바로 고아원으로 보내졌겠지만, 토요일에 버려졌기 때문에 병원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만해도 아이를 집으로 데려올 생각은 없었다. 아이가 하룻밤만 더 모기에 물리면 큰일나겠구나 하는 걱정에, 빨리 아이를 고아원으로 보낼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지난 1년 동안 교회에서 지체들과 함께 버려진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보내는 일을 하면서 알게 된 고아원 원장의 명함을 찾기 시작했다. 이 아이도 데리고 가서 잘 돌봐달라고 부탁을 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아무리 찾아도 명함을 찾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연을 통해 아이를 고아원에 보내는 것을 막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아이를 향한 연민을 느끼게 하셔서, 마침내 아이를 안고 집에 오게 되었다. 이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은, “당신은 정말 사랑이 많고 착한 분이군요”라고 칭찬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모세는 가장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있었지만 나는 아이를 데려갈 마음이 전혀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모세에게 얼마나 미안하고 부끄러운지…. 만일 그 때 성령의 감동이 없었다면 지금 모세와 함께 하는 이 행복은 결코 맛보지 못했으리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나에게 전화를 걸었던 L자매가 이튿날 한 아동병원의 외과의사를 소개해주었다.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아갔을 때 의사는, “당장 수술을 받지 않으면 이 아이는 죽습니다. 수술을 하더라도 하반신이 마비될 가능성이 큽니다.”라고 말했다. 걱정이 된 나는 형제 자매들에게 기도를 요청하였다.

 모세가 입원해 있을 때, 미국과 이탈리아에서 온 두 자매가 문병을 왔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닫는 데 도움을 주고 있었다. 외국인까지 문병을 오자 병원 측에서는 모세가 특별한 환자라고 생각했는지 잘 돌봐주었다. 모세의 주치의는 수술 실력이 매우 뛰어났지만 혼자 수술하는 것이 불안했는지, 큰 병원의 전문의를 모셔오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 전문의는 너무 유명한 사람이라 과연 시간을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하였다.

 월요일 오후 5시에 주치의와 함께 그 의사를 찾아갔다. 그는, 수요일에는 다른 수술이 예약되어 있고 목요일에는 출장을 가야 하니 모세를 수술할 시간은 내일 오전밖에 없다고 하였다. 가장 유능한 의사 선생님에게 수술 받을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내일 수술을 하려면 오늘 준비를 해야 하므로 나는 급하게 병원으로 돌아왔지만, 직원들은 이미 모두 퇴근한 터였다. 기도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감사하게도 그때 마침 아동병동을 돌아보고 있는 병원장을 만나게 되었다. 주치의가 그에게 이 수술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는, “좋습니다. 모든 파트에 특근을 하도록 지시하여 내일 오전 수술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주치의와 전문의, 병원장 등을 통해 모든 것을 세심하게 준비하셨던 것이다.

 이튿날, 수술하기 전에 보호자 서명을 했다. 수술 시 발생할 수 있는 좋지 않은 결과를 명시한 여덟 가지 조항들은, 죽지 않더라도 아이가 평생 장애를 안고 살 수도 있다는 심각한 내용들이었다. 아직 2개월도 안 된 젖먹이 모세를 수술실로 보내기 전 우리는 간절히 기도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음은…(시 23:4)” .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시 91:7)” 이 말씀들이 우리를 위로하고 강하게 해 주었다. 어린 모세가 받을 고통을 생각하면 막막하고 괴로웠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하여 나는 평안하였다.

 나는 다시 한번 의사를 만나보았다. 그는 나를 위로하면서 말했다. “이와 같은 경우 대부분의 아이들이 기능상의 문제를 겪지만, 이 아이의 상반신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담대하게 말했다. “우리 모세는 하반신에도 문제가 없을 겁니다!” 수술 전 나는 의사에게 말했다. “당신은 의사입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길 바라시겠지요,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보호자 분께서 믿으셔야 할 것은 신이 아니라 과학입니다.”

 이후 모세가 돌이 지나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 나는 이 사실을 의사에게 말했다. “모세의 다리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는 안됐다는 표정으로, “그렇게라도 희망을 가지고 계시니 다행입니다”라고 했다. 모세가 이미 걸음마를 하고 있다고 말하자 그는 감짝 놀라며 “정말입니까?”라고 되물었다. 나중에 내가 모세를 데리고 병원을 방문하였을 때 그는 모세에게 뛰어보라고 했고 모세는 깡충깡충 뛰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말했다. “당신이 믿는 신이 영험하긴 한가 보군요.” 나는 그의 말을 바로 고쳐주었다. “영험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모든 이들을 하셨습니다.” 그는 기분이 나쁘다는 듯 따져 물었다. “당신이 믿는 신이 정말 이 일들을 했다고 칩시다. 그럼 왜 당신은 나를 찾아와 수술을 부탁했습니까?” 나는 대답했다. “당신은 단지 하나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마치 당신이 수술할 때 쓰는 메스처럼 말이죠. 수술이 성공하고 난 후에 당신은 이 수술칼이 이 모든 일을 해냈다고 말하나요?”

 그는 나에게 더 많은 것을 물어보고 싶어했지만, 그가 믿는 과학과 하나님은 상충된다고 여기는 듯 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도구가 아니었던가. 겉으로 볼 때는 우리 몇몇 가정이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것 같지만, 그 뒤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기도의 손길들이 있다. 하나님은 각 사람들을 향한 선한 뜻을 가지고 계시며, 한 사람이 아닌 각각의 지체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뤄가게 하신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

 모세가 퇴원한 후 아이의 거취를 놓고 나는 다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만한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잠 3:27~28)”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나를 인도하시고 사명을 주셨다. 또한 귀중한 약속도 주셨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엡 3:20)

 이제 모세는 우리의 정식 가족이 되었다. 가족 모두 모세를 끔찍이 예뻐한다. 이 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나는 믿고있다. 나의 바라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뛰어넘어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들을 온전히 이루어 가실 것을….

마지막으로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면 모세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바 되어 귀하게 쓰임받는 것이다. 이 아이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찬송을 돌려드리기를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모세의 일 이후, 하나님은 우리에게 버려진 아이들을 돕는 일을 시작하게 하셨다. 어느날, 모세가 입원해 있을 때 알게 된 의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병원에 버려진 아이가 있는데 우리가 그 아이를 맡을 의향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것이 우리와 여호수아의 첫 만남이었다.

 설명을 들어보니 여호수아의 친부모는 아이를 원치 않아 아이 엄마가 몇 년 전 피임 수술을 받았는데 뜻밖에도 임신이 된 것이었다. 애를 낳고 보니 선천적인 병까지 있어 부모는 아이를 버리기로 하였다. 우리 품에 안겨 집으로 온 여호수아는 태어난 지 겨우 열흘밖에 안 된 갓난아이였다.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아이는 폐렴으로 곧바로 병원에 실려갔고, 얼마 후에는 결장(結腸)으로 또다시 입원해야만 했다.

 아이는 정상적으로 배설을 할 수가 없었고, 수술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간호사들이 매일 관장을 해서 대소변을 볼 수 있게 했는데, 이로 인해 아이의 신체기능이 떨어지고 쇠약해져서 수술을 하기 어렵게 되었다. 의사들은 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내 영양을 보충하고, 체중이 조금이라도 늘고 건강해 진 후에 다시 수술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전문적으로 아이 돌보는 사람에게 아이를 맡겨야 하고, 또 관장을 해서 대소변을 볼 수 있게 해주어야만 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통해 이 아이를 보살펴주셨다. 한 부부가 여호수아를 입양하여 돌보겠다고 자원하였다. 이들은 매일같이 정성껏 아이를 간호할 뿐 아니라 합심하여 여호수아를 위해 기도하였다. 그들은 아이가 수술받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깨끗이 치유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직접 고치시는 대신 병원에 입원시켜 수술을 받게 하셨다. 당시에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우연이란 없다. 여호수아가 입원해 있는 동안 이 부부는 같은 병동에 입원해있는 어린이들의 부모들에게 전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세 명의 부모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고, 여호수아의 주치의 역시 주님을 영접하였다.

 이런 부모들은 빠른 시일 내에, 혹은 더 좋은 의사에게 수술을 받기 위해 의사들에게 뇌물을 갖다 바치기도 하였다. 우리 역시 안타까운 마음에 그런 움직임에 동참해볼까 하는 유혹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케 하느니라(전7:7)” 이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고,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세워주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여호수아에 관한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겠다.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하게 하였다. 가장 좋은 시간에 수술이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더더욱 신기한 것은 다른 아이들의 수술에는 겨우 한 명 정도 참가했던 전문의들이 여호수아의 수술에는 세 명이나 와서 집도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수술은 순조롭게 끝났다.

 퇴원 이후 여호수아의 신체 기능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양부모들은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하나님의 은혜가 다시 한번 여호수아에게 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한 하나님의 종이 집회 후에 여호수아를 위해 안수기도를 하였는데, 그날 이후부터 여호수아의 배설 기능은 완전히 정상이 되었고, 지금은 보통 아이들과 다름없는 건강한 아이로 잘 자라고 있다.

 여호수아의 ‘우연한’ 출생, 그리고 이후의 고난은 이미 아름다운 열매로 바뀌어졌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계속 지키고 도우심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작고 작은 여호수아를 통해 기적을 베푸셨다. 병동에 복음이 전파되게 하셨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케 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출처 | “絕非偶然” , 「展望中華」12기

중국어문선교회ㅣ번역 | 김미나

中国北方宣敎地消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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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中国北方宣敎地消息

 

                 어느 한국인의 '사랑의 집' 감동 스토리


                                      "요놈들이 자꾸 나를 아버지라 부르니 이곳 떠나지 못하게 되였습니다"  





"요놈들이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안아달라고 조를 때마다 내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애수에 젖어 듭니다.이 피덩어리들을 버리고 어떻게 가겠습니까"라고 측은한 눈길로 천진란만한 어린이들을 보면서 기자에게 설명하고 있는 한 중년사나이, 그가 바로 "사랑의 집(원장)"을 운영하고 있는 김학원(한국인,남,1958년생)씨이다.

김학원씨가 연길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1992년3월 즉 중한수교가 이루어지기 몇 달 전이였다.그가  연길을 찾게 된 것은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가문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여 난 김학원씨는 어머니의 얼굴을 익힐 사이도 없었다.

"어른들의 얘기에 따르면 어머니가 세상을 떴는 데도 내가 어머니의 젖꼭지를 물고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초등학교(소학교) 5학년 때에 우리 집에 들어왔던 계모가 떠나게 되였는데 그때 울면서 어머니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래서 동네에서는 저를 울보라고 했습니다.나를 낳아 준 어머니는 어머니라고 불러 보지도 못했지만 계모의 사랑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집을 몰래 떠났어도 계속 애타게 찾았습니다"고 김학원씨는 무거운 마음으로 그때의 정경을 회고했다.

그후 아버지도 그가 고등학교(고급중학교)를 다닐 때에 저 세상으로 갔고  7남매 중 3남매가 선후로 세상을 떠가면서 현재 4남매만 남아있다고 한다.

이런 가슴아픈 사연이 그의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못했다 저 멀리 중국 연변에도 나와 같은 운명을 가진 어린이들이 분명 있으리라 생각하고 아내와 함께 연길시에 첫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 인젠 장장 14년이란 세월이 흘렀단다.그는 연길시에 첫 발을 들여놓으면서 그 무슨 뚜렷한 후원이 있어 용기를 가지고 이 일을 시작한 것도 아니고 바로 그 가슴 쓰라린 상처이기 때문이였단다.

처음 연길에 왔을 때, 버려진 아이들이 적지 않은 것을 목격하게 된 김학원씨는 "사랑의 집"인 고아원을 설립하기로 작심했다.

    
'길봉의 집'

"사랑의 집"고아원에는 다른 이름 "길봉의 집"으로 지엇는데 여기에는 그러한 원인이 있다.

1993년 10월28일에 최초로 "사랑의 집"을 찾아 온 애가 바로 길봉이란다.그 어린이는 학교를 다니지 못한 애였다.이 집에서 11살 나이에 소학교 1학년에 입학하여 겨우 졸업할 수 있었다. 그 후로 많은 고아들이 이 사랑의 집에 찾아왔다.

"먹이고 입히고 학교를 보내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모든 아이들에에 사랑을 나누어 주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라고 김원장은 설명하면서 "여기에 온 애들은 모두 고아들이기에 진정 가정의 사랑을 피부로 느끼게 하자면 진짜 한 식솔이 되여야 합니다"라고 가족의 분위기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인젠 셈이 든 아이들에게는 늘 부모들은 어차피 저 세상을 가기 마련인데 너희 부모들이 일직 세상을 떠났을 따름이고 나도 너희 들보다 먼저 제 세상을 가기 마련이니 별로 이상할 것이 아니니 절대 친부모가 없다고 상심해서는 안된다고 타이르고 있다.

또 학교에서 교원들이 "사랑의 집"의 아이라고 봐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한번은 사랑의 집 아이가 학교에서 다른 학생들과 싸움이 벌어졌는데 하학하여 집에 와 자랑삼아 그 애가 자기보다 더 맞았다고 얘기하자 김학원 원장은 대뜸 "사랑의 매"를 치면서 호되게 꾸짖었다고 한다.또 아이들의 자신심을 키워주기 위해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위축감이 없게끔 자랑할 것은 마음 놓고 자랑하라고 타이른단다.지금 이 "길봉의 집"에 58명의 애들이 친형제처럼 살아가고 있다


"신애의 집" 과 "은애의 집"

김 원장은 장애아동의 집을 "신애의 집”이라 이름지었다. 주신애(여,3살,뇌성마비)라는 장애어린이가 이 집에 처음 왔다 해서 이렇게 이름을 지은것 이다.이러한 뇌성마비 등 장애인 어린이들이 지금 이 집에 12명이 있다. 물리치료를 해주면 걸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손을 쓰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까워 하고 있다.현재 나름대로의 놀이기구도 갗추어져 있지만 물리치료사, 특수교육전공자,사회복지사와 그 외 장애아동들의 옷을 씻어주고 먹여주고 교육하는 일이 너무나도 많으므로 이런 일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김 원장은 내심을 털어놓고 있다.

저소득층을 위한 무료진료소를 "은애의 집"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여기에는 눈물겨운 얘기가 깃들어 있다.

1999년 7월12일에 태여난후 하루 되는 뇌수막종양 어린이를 받게 되였는데 당시 뒤통수에 뇌수가 밖으로 흘러나와 일단 부딛쳐 터지기만 하면 생명이 매우 위태로웠다.김 원장은 즉시 생명의 경각을 다투는 그 어린이를 한국에 가서 수술을 진행, 지금은 아주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그래서 그 애를 주은애라고 이름짓고 이 진료소도 "은애의 집"이라고 이름을 지었다.지금 "은애의 집" 무료진료소는 정부에서 생활 보조를 받아 살아가고 있는 저소득층 자들에게 무료로 의료혜택을 베푸는 곳이다.기자가 찾아갔을 때 주은애는 활발하고 영리했고 카메라를 보고 자기들에게도 사진을 찍어 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샤타를 눌러 주었다.(뒤의 여자애)


"사랑의 집" 애들은 모두 버려진 애들

전에 연변에는 고아원이 별도로 없어 일단 고아만 있게 되면 성에서 운영하는 장춘고아원에 아이를 보내지 않으면 경노원 같은 곳에 의탁하는 경우가 있었다.이렇게 버려진 애들 대부분은 병원에서 오는데 발육이 정상인 애들은 이러저러한 소문 끝에 아이가 없는 집으로 입양가는 경우가 많지만 입양하는 가정이 없으면 "사랑의 집"에 오게 된다고 한다.그러나 장애를 가진 어린이는 그 누구도 입양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 세상에 생명으로 태여 났으면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살아갈 자격은 같은 것입니다. 생명은 다 마찬가지 일뿐만 아니라  장애인을 더 잘 보살펴야 함이 인간적인 책임이 아니겠습니까?"라고 김 원장은 의미심장하게 얘기하고 있다.

이 집에 오는 애들은 버려진 애들인 것만큼 대부분 성씨도 모르거니와 이름도 지어지지 않았다.그래서 상황에 따라 이름을 지어주는데 우에서 언급한 '주은애'가 바로 그 일례다. '주은애'란 주어왔다는 의미가 아니라 은혜를 받은 애라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또한 어느 민족할 것 없이 고아이면 모두 수용하는데 이 집에는 3분의 1의 애들이 한족애들이라 한다.

처음 연길시에 "사랑의 집"을 세웠을 때 정부의 일부 관원은 물론 세간에서도 이러저러한 얘기들이 많았다. "한국인이 무슨 의도로 중국에 와서 고아원을 꾸리는 걸가?", "그 한국인이 이제 며칠이나 고아원을 꾸리고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가 두고 보자", "저 사람이 정신없는 사람이다"라는 등 얘기들이 오가고 있었지만 김 원장은 색안경을 쓰고 보는 사람들에게  이미 정답을 주었다.

하여 2005년에는 길림성 외사청,길림성 교육청,길림성 민정청으로부터 "외국우수전문가" 칭호를 수여했고 그 해에 또 연길시 새세대관심위원회로부터 "감사패"를 기증받았으며 2006년에는 중공연변주위,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로부터 "연변우수외국전문가" 칭호를 수여했다.


사회적 복지가 잘 될 때는 바로 사랑의 사회가 온다

"사회적 복지가 잘 될 때는 바로 사랑의 사회가 오는 시대입니다"라고 김 원장은 사회복지의 중요성을 재삼 강조하고 있다.

김 원장은 초창기에 그 무슨 후원의 손길을 바라거나 후원회를 세우고 이 사업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하여 당시 저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느냐 하면서 찾아 오는 사람도 별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사랑의 집"이 인근에 알려지면서 연길시의 부분적 학교 학생들이 자원봉사로 찾아와 봉사자들이 점차 늘기 시작, 이 학생들은 남을 도우러 왔다가 되려 인간의 됨됨과 사랑을 나누는 도리를 알게 되였다면서 작년에는 무려 천여 명의 학생들이 자원봉사자로 여기를 찾아왔단다. 지난해 방학기간에도 북경에서 공부하고 있는 연변적 대학생들이 이 "사랑의 집"을 찾아와 며칠간 자원봉사를 하고 대학에서 배우지 못한 인간애를 여기에서 되려 배우고 가니 얼마나 즐거운지 모르겠다면서 이제 시간만 나면 꼭 찾겠다고 한단다.

몇 년 전에 미국 청년봉사단이 이 "사랑의 집"에 왔는데 그들은 집 기초파기를 도왔던 것이다. 밤에도 등불을 켜 놓고 한삽한삽 기초흙을 파헤치면서 그들은 기초를 판다는 자체가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또 독일의 한 유지인은 상해에서 김 원장의 사업을 알고 무료로 유리를 제공함과 아울러 보온성이 아주 좋은 삼겹유리문까지 지원해 주었단다.

이미 70명을 이 고아원에서 "졸업"시켰는데 이들은 이 고아원에서 유치원은 물론 소학교,중학교,대학까지 마치고 사회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매번 휴가일이나 설 명절이면 이들은 "아버지", "어머니"인 사랑의 집을 꼭 찾아 온단다.

현재 이 "사랑의 집"에는 68명의 고아들이 행복하게 자라고 있는데 나이가 가장 어린애는 불과 몇 달, 가장 많은 애는 20살이다.

기자가 찾아갔을 때 마침 며칠 전에 병원에서 버려진 애 4명을 안아왔다. 그 중 살아갈 가망이 없다는 애기를 한명 안아왔는데 김 원장의 보살핌 속에서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다른 한 아기는 언청이인데 애들의 장래를 위해 시기가 되면 제때에 수술을 해 주고 있는데 몇 차례의  성형수술을 해야 하므로 수술비용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김 원장 부부는 지금도 어린 애들과 한 집을 쓰고 산다.밤마다 잠을 못 자는 것이 제일 고통스럽지만 인제 아주 습관이 되여 있단다.아이들이 곁방에서 울면 당연히 잠을 못 자는 것은 물론 보모가 일단 문만 두드리면 "아이가 잘못되지나 않아나?"하고 가슴이 철렁한단다. 그래서 밤에 아이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에 가장 행복하단다.

김 원장 내외는 아이를 갖지 않았다.기자의 의아한 질문에 김 원장은 "일단 아이가 있으면 '사랑의 집' 애들이 소외감을 가질가 봐 완전히 중절수술을 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김 원장과 부인의 피타는 노력으로 지금 이 사랑의 집은 호텔도 비할바가 안된다. 그 일례로 화장실만 해도 46칸 즉 매 칸 마다 화장실과 세면실 목욕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어찌나 깨끗한지 신을 신고 들어가기 부끄러울 정도이고 8대의 세탁기로 어린이들의 옷을 빨고 있어 어린이마다 깨끗한 옷들을 입고 있었다.또한 아이들의 식사 메뉴는 아주 정결하게 짜여져 있다.이미 10여 년간 식당 일을 보고 있는 현지 아줌마들은 각자 아이들의 식성도 너무나도 잘 아는 전문가로 변신했단다.

현재 이 사랑의 집은 어린이들의 과외를 위해 수천 권의 도서들이 갖추어 져있는 도서관들이 집집마다 있고 칸칸 마다 TVRK 있는가 하면 탁구장, 놀이기구,건신기구 등 체육시설들이 아주 구전하게 갖추어져 있고 또 앞으로 고아들의 늘어남을 대비해 계속 신축공사를 하고 있다.

김 원장은 "이제 연변지역에서도 사회복지의 인식이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해야 하며 남을 도와 나서는 것이 바로 나를 건강하게 한다는 인식전환이 절실히 필요합니다"고 하면서 "이제 나는 죽어도 원이 없고 또 죽은 다음에는 '사랑의 집' 앞산에 묻는 것이 소원"이라 했다.

하여 "사랑의 집" 청사를 등록할 때에 그 어느 개인의 집으로도 등록하지 말고 바로 "사랑의 집"으로 등록했다 한다.

<윤운걸 길림성 특파원 / 흑룡강신문>

중국고아, 장애자 아이들을 위해 중국 동업자들이 칭다오에서 “아동복지”에 대하여 논의

 

어제, 회의기간이 2일인 중국 아동복지정책연구 및 제3기 중국아동복지원 원장 심포지엄이 칭다오 황하이호텔에서 거행이 되였다. 회의주요내용은 “블루 스카이 계획”을 실시하는 계기로 《고아, 장애자 아이 구조업무에 대한 의견》을 전반적으로 실시하여 아동복지시설건설을 강화하고 아동복지서비스기능을 확장하여 아동복지사업의 발전을 추진하는 것이다.

 

왕원화(王文華)시위부서기, 민정부사회복지와 사회사무사 장밍량(張明亮)司長, 성 민정청 양진징(楊金鏡)청장께서 회의에 출석하시고 발언을 하셨다.

 

소식에 의하면 15部委에서 《고아, 장애자 아이 구조업무에 대한 의견》을 전반적으로 실시하기 위하여 아동복지사업발전을 제약하는 돋보이는 문제들을 중점적으로 해결하고 아동복지기구시설건설을 강화하여 “十一五”기간내에 민정부에서는 “아동복지기구시설 건설 블루 스카이 계획”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민정부에서는 매년 복지복권 공익금에서 2억위안을 인출하여 地區급이상의 대, 중도시에서 기능이 완벽하고 시설이 완전하고 환경이 아름다운 아동복시기구를 신설, 개조, 확장한다. 각 지역 민정부문에서도 보류한 복권 공익금으로 중점적으로 “블루 스카이 계획”을 지원할 것이다.

 

우리 시에서는 《사람을 근본으로 하여 정책을 완화하고 칭다오시 아동복지사업의 과학적인 발전을 추진》이라는 주제로 경험을 회의참석자들한테 소개하였다. 회의에 참석하신 전문가들은 칭다오시 아동복지사업발전경험이 전국에 전형적인 시범작용이 있다고 말씀하였다.

 

중국 각지 민정부문의 유관책임자, 아동복지원원장 및 유관 전문가, 학자 260여명이 회의에 참석하셨다.

'한인 쉰들러' 굶주린 탈북어린이들의 구세주  

[조-중국경 꽃제비들]

"한핏줄인데" 먹이고 재워.

조-중 국경 마을에 있는 한 '비밀 고아원'. 겉으로는 허름한 가정 집으로 보이는 한 다가구주택 방 3칸에 8∼15살 어린이들 20여명이 살 고 있다. 모두가 굶주림을 참다못해 북한을 탈출한 아이들이다.  2명의 조선족 보모가 아이들을 돌보며 공부를 시킨다. 과목은 한글 과 중국어, 수학, 미술, 음악 등. 아이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중국의 초등학교 1∼2학년 과정을 배운다.


사진설명 :
중국의 조선족 동포들이 운영하고 있는 한 비밀 고아원의 탈북 아이들. 영양 부족으로 대부분 나이에 바해 3∼4살 정도 키가 작은 아이들이지만 고아원 생활이 만족스러운 듯 표정은 밝았다.

"되는대로 사는 거이디요, 뭐." 작년 7월 중국으로 도망온 수정(15, 여, 가명)이는 "장래 희망이 뭐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함남의 한 도시에서 살던 수정이는 지난해 초 중국으로 달아난 아버지를 찾기 위해 뒤따라 탈북했다. 두만강을 건너서 훈춘∼화룡∼용정을 거쳐 중 국 내지로 들어가는데 성공했지만,이후 한족에게 팔려가기도 하고, 다 방-음식점 등에서 일하면서 성추행을 당하기도 했다. 인민학교 다닐 때는 학교 선생님이 되는것이 꿈이었다는 수정이는 "이젠 그저 살아남 는 게 다야요"라며 눈물을 쏟았다.

중국에는 최근 이 고아원처럼 남몰래 탈북 주민을 돕는 '쉰들러'들 이 부쩍 늘었다. 당국 모르게 활동하는 국제구호단체부터 평범한 조선 족에 이르기까지 층은 다양하다. 탈북 주민을 보호하다 중국 공안당국 에 적발되면 벌금만 5000∼2만위엔(한화 50만∼200만원)을 물어야 하 지만, 이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탈북자의 정착을 돕는다.

"요즘은 보안이 최우선입니다. 외부 인사 방문도 사절하고, 우리끼 리도 가급적 전화 대신 직접 만나 정보를 교환합니다." 비밀고아원의 한 자원봉사 보모는 "북한이 중국 동북 3성(요령-흑룡강-길림성)에 파 견한 보위부 요원이 전보다 2배 이상 많은 500여명으로 늘고, 중국 공 안들도 일제단속을 빈번히 하고 있다"며 "감시를 피해 2∼3개월에 한 번씩 이사를 다닌다"고 말했다. 만일을 위해 현관에는 어른 신발 몇개 만 놔두고, 아이들에게는 초인종소리가 나면 곧장 골방에 숨도록 가르 친다고 했다.

언제 공안요원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도 탈북주민을 1∼4 명씩 집에서 보호하는 조선족 가정도 적지 않다. 탈북 어린이 2명을 데리고 있는 조선족 A(45)씨는 "창자가 말라붙는 고통을 못 이겨 사선 을 넘어온 사람들을 돌봐주는 것은 한 겨레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말 했다. 조선족 거주 도시의 시장에서 떠도는 탈북 어린이를 돌보는 한 아주머니는 "모두 내 손자같은 아이들인데 모른 척 할 수 없다"며 "오 늘 아침 길가에서 만난 북한 아이 2명에게 아들이 입던 옷을 줬다"고 말했다.

국제구호단체에서 활동하는 한 인사는 "북한측에서 구호단체에 공 작원을 침투시키거나 위장 탈북 소년을 보내기도 한다"며 "탈북 주민 들은 '안네의 일기'처럼 불안에 떨며 살아가고, 우리는 '레지스탕스' 처럼 비밀스럽게 도와줄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어린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며 "탈북 어린이들이 국 제 난민으로 인정받아 제3국으로 갈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한다"고 말 했다.

 

'꽃제비'란 먹을것 찾아 떠도는 아이들

국가정보원 인터넷 홈페이지에 따르면 {꽃제비는 먹고 잘 곳이 없어 떼지어 떠돌아 다니며 구걸하거나 소매치기하는 아이들을 지칭한다}고 돼있다. 제비가 따뜻한 곳을 찾아다니는 데 빗대어 만든 말로, [노제비](나이든 거지) [청제비](젊은 거지)란 말도 사용한다. 94년 김일성 사후 극심한 식량난과 함께 확산됐으며, 공식 출판물에는 올라있지 않다. 조선족들은 [꽃]은 중국말로 거지를 뜻하는 [화자]에서 유래됐으며, [제비]는 [잡이, 잽이]의 낚아챈다는 의미라고 한다. 때문에 일부에선 [꽃잽이]가 정확한 표현이라고 하지만, 대다수 귀순자들은 [꽃제비]가 맞다고 전한다.

 

<http://www.duri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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