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보스톡은 러시아 연방 프리모르스키(Primorsky)(연해주)주의 주도이며 항만 도시.
블라디보스톡이라는 말은 러시아어로 [동방을 지배하다] 라는 뜻으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제정 러시아의 적극적인 극동 정책에 따라 건설된 도시이다.
표트르 대제만을 아루르스키만과 우수리스키만으로 나누는 좁고 긴 산악 반도의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종착역으로 개인사업과 국제 무역, 관광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톡은 높고 나지막한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로마의 나폴리를 연상시키는 도시로 베주비오 화산을 제외한다면 커다란 항만과 아름다운 섬, 바다로부터 도시를 보는 경치 등은 다른 어떠한 도시와 비교하더라도 그 아름다움은 양보할 수 없는 도시인 듯.
2012년 APEC 정상회의 개최지
블라디보스톡이 2012년 APEC 정상회의 개최지로 지정되었다. 개최 준비예산 총 1,400억 루블(약 53억불)이 블라디보스톡에 배정될 것이라고 한다.
이 예산은 연해주 5년 치 예산에 해당하는 액수로 블라디보스톡시 각종 인프라시설 확충, 신규 주택단지 건설을 포함한 주요 프로젝트 실현에 쓰여질 것이라고.
남가주 사랑의 교회에서는
안과치료/치과치료을 위한 단기선교팀을 구성하여 7월말에 블라디보스톡을 찾아나섰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블라디보스톡 중심가에서 멀리 떨어진 외각지역은 농사일로 자급자족하는 가난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술과 담배와 마약으로 찌든 사람들이 많아 이빨이 성한 사람을 찾기가 힘들 정도. 술과 마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돕는 갱생시설이 있지만 여락하기 그지 없다.
갱생원에서 생활하는 한 현지인에게 썩어서 고통을 주는 이빨을 뽑아주자 너무 기뻐하며 기타를 들로 나와 노래를 한 곡 연주한다.
블라디보스톡는 일조량(햇볕이 쪼이는 시간)이 짧아 농사가 어렵다. 그리고 추운지역이다. 그래서 한국의 비닐 농법이 인기. 비닐하우스 재배를 통해 장기선교의 터를 닦고 있기도. 위 사진은 갱생원 옆에 위치한 주택 앞에 두 부부가 담소하며 서 있는 모습.
러시아는 세계 8분의 1의 땅을 차지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이다.(한반도의 약77배). 동에서 서까지 11시간의 시차가 나는 나라이다. 세계 제일의 자원 보유 국가이다. 문맹률이 0이며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과학 연구 인력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이다.
달나라에도 가장 먼저 발을 디딘 우주 개발의 선두주자 국가이며, 가장 많은 핵을 보유한 군사 대국이다. 74년 동안 사회주의를 시험하다 사회주의로는 안 된다는 것을 역사에 실제 보여준 나라이다.
1,000년이 넘는 기독교(동방 정교회)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뿌쉬킨, 톨스토이, 차이코프스키, 볼쇼이 극장을 가지고 있는 문화 대국이다. ‘겨울의 러시아를 가보지 않고는 러시아를 알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매서운 추위가 있는 나라이다. 춥고 배고픈 나라 러시아! 그러나 이제 서서히 회복의 기미를 보이고 있는 러시아! 러시아 선교를 정리해 보며, 러시아와 아세아 연합 신학 대학간의 코이노니아 선교의 전망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러시아 개관
1)자연환경 (1) 면 적 : - 독립국가연합 (CIS: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은 22,402,200km로 지구 면적의 1/6(한반도의 101배, 미국의 2.4배)로, 동에서 서까지의 거리는 11,000km로 11시간의 차이가 있는 세계 최대의 국가이다. - 러시아 공화국은 17, 078, 005km로 지구면적의 1/8이다. (동서 차의 거리는 10, 000km, 시차는 11시간이다. 한반도의 77배) 우랄 산맥을 중심으로4분의 3이 아시아 쪽에 4분지 1이 유럽 쪽에 위치함) (2) 기 후 : 차가운 대륙성 기후이다. 가장 큰 특징은 겨울의 혹독한 추위이다. 러시아에는 4계절이 있으나 봄과 가을은 매우 짧으며 대부분 여름과 겨울 두개 절이다.
2)인문환경 (1) 인구: 1억 4,800만명 (2) 인종: 100개가 넘는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음 (3) 언어: 러시아어
3)역사 (1) 고대 루시에서 모스크바 대공국까지 - 러시아 역사의 주역은 동슬라브족 중 백러시아인이다 - 9세기경에 키예프 루시 공국 시작 - 988년 그리스 정교를 국교화 함 - 1240년부터 몽고 타타르족이 200년간 지배 - 1480년 이반 3세 때 몽고 지배에서 벗어남 - 이반 4세 때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거대한 국가 형성 (2) 제정 러시아 - 1613년 로마노프 왕조 - 1712년 뾰트르 1세 때 성 뻬쩨르브르그를 수도로 함 - 에까떼리나 2세의 대외적 팽창정책 - 알렉산드르 1세 때 나폴레옹에게 승리함으로 유럽에서의 일등국이 됨 - 1825년 12월 24일 데카브리트 반란과 니콜라스 1세의 강권정치 - 1861년 알렉산드로 2세의 농노해방령(극동 지역 진출-블리디보스톡 건설,1867년 알래스카를 720만에 팜) - 알렉산드로 3세 때 철도건설, 학문과 문학의 발달 - 1891-92년 가뭄으로 수백만 명의 농민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음 - 1905년 1. 9일, 러시아 정교회 신부 카폰에 의해 혁명 시작(피의 일요일) - 1917년 2월 혁명 - 1917년 10월 혁명으로 최초 공산주의 정권 수립 (3) 소비에트 러시아 - 레닌 시대(1917-1924):수도를 모스크바로, 신 경제 정책 채택 - 스탈린 시대(1924-1953): 산업 근대화, 농업 집단화, 모스크바 지하철, 160만명 이상의 사람 숙청 - 후르시초프(1953-1964):스탈린 격하운동 (닥터지바고, 이반데소비치의 하루) - 브레즈네프(1964-1982): - 고르바쵸프(1982-1992):페레스토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정책 - 보리스 엘친(1992-1999):가격자유화, 무역자유화, 사유화, 세제개혁, 인플레 - 블라지미르 퓨친(2,000-현재): 애국, 민족주의 정신. 강대국 지위 회복을 꿈꿈, 경제 회복 분위기 존성, 남 북한에 대한 균형 정책 실시, 부정부패 정경 유착 최소화, 법치주의 강화, 개인의 소규모 사업과 무역이 자유롭게 행해지는 경제 체제 회복, 토지 사유화 정책 실시, 외국인 투자 유치 확대, 무기 현대화와 무기 수출 확대.
4) 사회, 문화, 교육 - 사회: 총체적 위기 상황에서 서서히 회복되고 있는 상황, 퓨친 대통령이 들어와 서서히 정치, 경제가 안정을 잡아가고 있음.(2,000년부터 경제가 흑자 상태이며, 루블의 인플레가 안정화되어 가고 있음). 치안은 아직도 다소 불안한 편임, 가치관의 파괴로 마약 성행함. - 문화: 러시아 문학, 음악, 발레는 세계적 - 교육: 유치원교육, 11학년제 의무교육, 5년제 대학.(기초과학의 발달)
5) 종교 - 러시아 정교회, 카톨릭, 신교, 회교, 불교, 유대교, 기타
6) 국민성 - 논리력이 발달되어 있는 동시에 감성이 풍부하며, 인내심이 강하고, 문학에 뛰어나며, 무한한 자원과 가능성을 지닌 민족이다. - 공산주의를 지내오는 동안 정직성이 많이 파괴 됨.(거짓과 도둑)
3. 극동지역 개관
극동지역은 행정 구역이 아니고 경제 구역이다. 구 소련시대에 광대한 지역으로 분포되어 있는 나라의 경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하여 경제적인 지역적 구분을 하였다.
1) 해당지역 :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주(유대자치지구 포함), 아무르주, 캄차 카주(코랴크 자치구 포함), 마가단주(추코트 자치주 포함), 사할린주, 사하공화국 2) 면적 : 622만km(전 러시아의 36%에 해당) 3) 인구 : 715.5만명 4) 지형 - 산지: 극동지역 전체의 4분의 3이 산악지대 - 하천: 태평양으로 흘러 들어가는 아무르 강과 아나디르 강이 있음. 겨울동안 5개월간 결빙함. - 풍부한 지하자원: 수력, 석탄, 천연가스, 금, 다이아몬드, 삼림 - 자연적 요인 : 사하공화국, 마가단 등은 1월 평균 -43도까지 내려가는 혹독한 자연조건
4. 연해주(쁘리모르스키) 개관
가. 연해주 1) 면적 : 165.9km(남한 면적의 약 1. 6배) 극동에서는 사할린 주 다음으로 작은 주로서 러시아 전체의 0. 97% 2) 지형 : 남북으로 시호테-알린 산맥, 산림 70%. 3) 기후 : 몬순성 기후(블라디보스톡 평균기온 1월-18도, 7월 17도) 4) 인구 : 228만명(90.1월, 러시아 인구의 1.5%) 5) 역사 : 1860년 북경 조약에 따라 러시아제국에 편입 6) 주요기관 : 주정부(구 주지사 Ye. Nazdratenko, 현재:달낀) 태평양 함대 사령부(사령관 M. Zakarenko 제독, 97년 임명) 7) 행정조직 : 25개군 9개 도시 8) 주요도시 : 블라디보스톡(수도, 80만명), 나호드카(30만명), 우수리스크(30 만명), 알쫌(20만명), 빨찌쟌스크(10만명), 스파스크(8만명)
나. 블라디보스톡 (연해주 수도) 1) 구라파 풍의 항구 도시로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구가 있다. 2)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종착역이 있다.(모스크바까지 일주이간 걸림) 3) 인구 : 80 만명(유동인구 포함 100만명) 4) 1860년 알렉산드로 2세의 영토확장에 의해 군사기지로 세워짐 5) 1930년 소련 태평양 함대 모항으로 도시 확장 - 러시아 태평양함대 사령부 소재 6) 1992. 1. 부터 외국인에 개방된 극동의 군항도시 - 주재 총영사관 : 한국, 미국, 일본, 인도, 베트남 - 북한은 나호드카, 중국은 하바롭프스크에 총영사관 운영 7) 한국 연결 국제 항공편 - 서울과 주 4회 직항로 (대한 항공 주 2회, 러시아 항공 주 2회) - 부산과 주 1회 직항로 ( 러시아 항공)
다. 연해주 동포 현황 1) 역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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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40년대 한인, 계절 영농 이민으로 연해주 체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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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대 초 경제적 목적 연해주 이민 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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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을사조약 전후로 정치적 목적 이민 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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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약 4만 명 거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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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삼일운동이후, 항일 이민 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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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약 11만 명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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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스탈린에 의해서 약 19만 명이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로 강제 이주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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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이후중앙아시아등에서 한인들이 개별적으로 연해주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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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연해주 거주 한인 8,45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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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소련 와해 이후 연해주로 한인이주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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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연해주 거주 한인 11,55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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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말 약 30,000명 거주 추정
2) 연해주 동포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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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다수의 한인들이 농업과 상업에 종사했으나, 현재는 교육, 행 정, 전문분야 등 각 분야에서활동하고 있으며, 소득 수준도 높은 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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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거주 한인들은 대부분 러시아 화되어 우리말과 문화를 상당부분 많이 잃어버린 상태이며, 2차 세계대전 후 이주해온 사할린 교포들과는 성향이 다소 상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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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는 북한 접경지역으로 한반도 분단이후 각 분야에서 북한과 교류 가 활발했던 지역이며, 한인동포도 상당수가 북한지역 출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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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오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주민촌이 7개 형 성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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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건설대, 농업대등이 체류하고 있음
5. 연해주 선교 상황
1) 정교회 정교회는 러시아에 들어온 지 1,000년이 넘는다. 정교회를 모르고는 러시아를 알 수 없다고 할 만큼 러시아에 끼친 영향력은 매우 크다. 마치 국교와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인들은 대부분 교회에 나가지는 않으나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정교회라고 대답한다. (러시아인은 곧 정교회인) 정교회는 블라디보스톡에 3개, 각 도시에 대개 1개씩 세워져 있다. 이콘(icon)을 중시하며, 말씀보다는 의식에 치중하는 예배가 특징이다. (‘알렉산드르 맨’의 후예들을 중심으로 일부 정교회는 설교를 함)
2) 복음주의 침례교회 복음주의 침례교회는 러시아에 들어온 지 대략 200년이 지난 개신교로 개신교회중에서는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복음주의 침례교회는 국가에 ‘등록하는 교회’와 ‘등록을 거부하는 교회’(지하교회)로 나누어져 있다. 등록교회는 대략 15교회 개척되어 있으며, 비 등록교회는 10개정도 개척되어 있다. 이외에 우크라이나에서 들어온 복음의 빛 침례교회가 약 15개 있으며, 이 교단은 성서 통신 신학교 (1년에 3번 모여 2주씩 5년 간 공부함)를 가지고 있다.
3)복음주의(오순절)교회 - 15개 교회, 캐나다의 도움으로 신학교가 설립되어 있음.
4) 한인 선교사 활동 - 한국 선교사는 약 46명(통합 6명), 교회는 40개 정도이다 - 한국 선교사의 협력 선교: 연해주 신학교, 야간 감리교 신학교. - 현지 교회와의 협력 선교: 침례교회와 연합으로 ‘크리스찬 신문을 만들고 있음. - 고려인, 중국, 북한 선교. - 사회 봉사 활동 5) ACTS와 코이노니아 선교 진행 2001년 8월 온누리교회(이수종 목사)의 블라디보스톡 방문과 함께 자루비나 교회와 노보솝스예프스키 교회를 방문한 후, 2002년부터 두 교회를 본격적으로 돕고 있음. - 자루비나( 사샤 전도사): 장년 40명, 사역비, 핫산과 크라스끼노 교회개척 지원 - 노보솝스예프스키(줴냐 스미르노프 목사 ;장년 40명, 어린이 20명): 사택 구입, 예배당 구입, 사역비 지원, 예배당 건축 중.
6.마감하며/ (행20:24)
러시아는 세계 8분의 1의 땅을 차지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이다.(한반도의 약77배). 동에서 서까지 11시간의 시차가 나는 나라이다. 세계 제일의 자원 보유 국가이다. 문맹률이 0이며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과학 연구 인력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이다.
달나라에도 가장 먼저 발을 디딘 우주 개발의 선두주자 국가이며, 가장 많은 핵을 보유한 군사 대국이다. 74년 동안 사회주의를 시험하다 사회주의로는 안 된다는 것을 역사에 실제 보여준 나라이다.
1,000년이 넘는 기독교(동방 정교회)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뿌쉬킨, 톨스토이, 차이코프스키, 볼쇼이 극장을 가지고 있는 문화 대국이다. ‘겨울의 러시아를 가보지 않고는 러시아를 알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매서운 추위가 있는 나라이다.
춥고 배고픈 나라 러시아! 그러나 이제 서서히 회복의 기미를 보이고 있는 러시아! 러시아 선교를 정리해 보며, 러시아와 아세아 연합 신학 대학간의 코이노니아 선교의 전망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연해주 신학교 봉헌패
연해주 신학교
“러시아는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나라이며, 평범한 잣대로는 가늠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러시아의 특수성과 다양성을 서구 제도와 문화에 익숙한 우리의 잣대로만 러시아를 보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 그러나 본인은 이러한 오류를 수없이 반복하고 있다. 러시아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러시아 문화에 맞는 선교를 해야 할 것을 다시끔 다짐해 본다.
선교 7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검은 빵은 먹어도 맛이 없다. 시금떨떨한 맛, 러시아 맛, 러시아 냄새. 러시아 선교사로서 러시아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기로 작정했지만 이 검정 색 빵은 여전히 손이 가지 않는다. 러시아인의 친구가 되려면 러시아인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 같이 먹고 같이 울어주는 선교사, 러시아인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선교사가 되고 싶다.
러시아의 미래를 생각하며 러시아의 영적 부흥과 도덕적 부흥, 경제적 부흥을 위해 기도하며 잘 섬길 것을 다시 다짐해 본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 가운데 1991년 11월에 러시아의 제 2의 도시인 쌍뜨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한 이래로 지금까지 축복하시고 사역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새해의 시작하는 1월 동역자님들의 가정과 사역과 교회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도드리며 러시아 선교의 활성화를 위한 지속적인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1. 미르고려사람교회의 소그룹팀과 심방팀의 활성화를 위하여
지난 가을부터 집사님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중년 집사 그룹을 중심으로 하는 소그룹팀이고 다른 하나는 장노년 집사 그룹을 중심으로 하는 심방팀입니다.
러시아 문화의 특성 상 가정에서 모임을 갖는 것이 쉽지 않지만 이미 세 그룹이 모임을 시작하였고 앞으로 세 네 그룹을 더 시작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심방팀은 매주 화요일 아침 9시에 모여서 주일에 결석한 성도들과 장기 결석자들을 주중에 방문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소그룹 모임과 심방팀을 통하여 미르고려사람교회가 질적, 양적으로 성장하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2. 미르고려사람교회의 창립 7주년 예배를 드렸다.
11월 9일 주일에 미르고려사람교회가 창립 7주년 예배를 드렸습니다. 가족과 이웃과 친지들을 초청하려고 하는데 현재 예배 장소는 좌석이 약 100석으로 협소하여 창립예배를 위한 예배 장소를 찾아 그 주일만 임대하여 드렸습니다. 시내 지역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적합한 장소를 찾아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많은 영혼들에게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증거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3. 러시아 개혁주의 목회자 협의회의 정기 기도회와 세미나를 위하여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러시아 목회자들이 개혁주의 목회자 협의회를 구성하였고 저도 그 모임에 가입하여 선교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모임의 건강한 성장을 위하여 정기적인 기도회와 세미나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현재 회장은 미하일 목사이며 서기는 막심 목사인데 미하일 목사의 건강을 위해 특별히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약 3개월 전에 심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입이 돌아간 상태(구안와사)인데 현재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기도회 및 세미나를 통한 모임의 성장과 미하일목사의 건강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4. 러시아 개신교회의 연합과12월25일 성탄 연합 예배를 드렸습니다.
러시아인의 50% 이상은 정교회 신자이며 개신교는 약 1% 정도입니다. 대표적인 개신교단은 공산 시절부터 존재한 오순절과 침례교이며 개신교는 최근에 선교사들에 의하여 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정교회의 영향력이 강하고 개신교의 활동이 제한되는 상황에서 개신교회들의 연합은 필수적입니다. 이를 위하여 종교개혁주일인 12월 25에 연합예배를 약 400명이 미르선교회 소속교회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연합 예배를 전도의 기회로 삼고 은혜가운데 잘 드렸습니다
5. 고려인교회와 문화센타 건립을 위하여
러시아에 150여 종족이 살고 있습니다. 그중에 우리민족인 고려인은 역사 속에 아픔이 있는 우리민족입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압제 당할시 나라를 잃고 있던 우리민족을 러시아와 일본 전쟁에서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 거기서 돌아오지 못하고 남을 수밖에 없는 자손들입니다.
구소련 전 지역에 약55만 인 흩어져 살고 있고 우주백스탄 약20만, 카작스탄 10만 키르기스탄 8만 로스토프 5만 원동지역 3만이 디아스포라로 살고 있는데 살던 나라가 공화국으로 독립하여 각자 러시아어를 쓰지 않고 자국어만 사용하여 고려인들이 러시아어만 배워서 그 나라 언어를 할 수 없기에 이방 민족은 떠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러시아도 어렵지만 그나마 언어가 되고 러시아로 가면 살길과 그곳에 자녀들의 장래가 없음으로 희망을 갖고 이곳 러시아로 이동하고 있다.
고려인교회는 이들을 이해하고 위로와 아픔을 품고 사랑으로 감싸고 안을 때 희망을 갖고 주님을 믿으며 역경과 고난가운데 주를 바라보며 제2의 고향을 떠나 난민이 되어 다시 러시아 쌍뻬쩨르부르그로 오고 있다. 러시아에서 오직 고려인교회로만 모이고 있다.
사도 바울 선교사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어 “[골육]으로서의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서 그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롬 11:14) “나의 형제(兄弟) 곧 골육(骨肉)의 친척을 위(爲)하여 내 자신(自身)이 저주(詛呪)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願)하는 바로라”(로9:3) “나의 동족 고려동포가 나라 없이 유린하는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알아 이들과 함께 나눌 수 만 있다면 생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사는 것이 나의 일념이라”
이제 미르선교회에서 공동개척한지 6년 120명이 전도되어 예배드리며 공동체의 삶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건물과 장소가 없어서 우리의 기도제목입니다. 이를 위해 선교사의 생을 다하여 고려인들과 함께 교회 건축과 한러 문화 센타를 통하여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전해주기를 소원한다.
하나님 ! 우리 고려 동포의 교회이며 주님의 교회와 문화센터가 세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수도 : 모스크바 / 55°45′N 37°37′E면적 : 17,075,200 km² (1위)
러시아 연방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이며, 구 소련의 종주국이었다. 이 나라의 잠재적인 부는 막대하지만, 풍부한 자연자원은 공산주의에 의해 약탈되고 오염되었다. 8세기 국가가 탄생하고 1991년까지 단지 독재정치와 전제군주정만을 알아왔다. 수백년 간 짜르 통치 끝에 러시아 제국은 붕괴되고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합이 들어섰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에, 러시아는 독립을 외치는 소수민족들과 대치해야만 했다. 공산정권 아래서, 기독교 교회는 세계의 근대사에서 아마도 가장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이제 종교의 자유는 헌법상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미전도종족은 많이 남아있다.
모스크바가 유럽에서 가장 아시아적인 도시라면, 상트 뻬쩨르부르그는 러시아에서 가장 유럽적인 도시다. 표트르 대제에 의해 '서구로의 창'으로 만들어진 이 도시는 옛 러시아 영토에서 유일하게 북부 유럽으로 통하는 항로가 이어지는 지역에 건설되었으며, 유럽 출신 건축가들에 의해 18세기와 19세기 유럽에 유행했던 화려함과 질서정연함을 반영하면서 지어졌다. 그 결과로 유럽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도시가 만들어졌다. 모스크바가 사람을 위협한다면, 상트 뻬쩨르부르그는 매혹시킨다. 오늘날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상트 뻬쩨르부르그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그냥 '피테르(Piter)'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매력을 느낀다. 한편으로는 개혁과 변형으로 인해 이 도시는 거의 80여년 간 지연되었던 변화를 겪고 있다.
이 지역의 역사는 바로 러시아 중세사의 역사이며 그 중심에 있다. 최초 이 지역이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1240년 알렉산드르 오브 노브고로드(Alexandr of Novgorod)가 네바 강 어귀 근처에서 스웨덴인들을 물리쳤고 그로 인해 네브스키(Nevsky, 네바의)라는 이름을 얻으면서이다. 17세기가 되자 스웨덴이 다시 이 지역을 장악했고, 상트 뻬쩨르부르그를 건설하는 계기가 된 것은 스웨덴을 물리치고 유럽으로 향하는 얼지 않는 항구를 얻어 러시아를 유럽의 세력으로 만들려는 표트르 대제의 야망에서이다.
북구 대 전쟁(Great Northern War, 1700-21)이 시작되자 표트르 대제는 네바 강변의 스웨덴 기지를 점령했고 1703년에는 바다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네바 강변에 표트르 폴 요새를 건설했다.
1709년 표트르 대제가 폴타바(Poltava)에서 스웨덴을 격파하자 그가 독일식으로 상트 피에테르 부르크(Sankt Pieter Burkh)라 이름지은 도시는 확장되기 시작했다. 늪지인 남쪽 강둑에서 물을 빼내기 위해 운하가 건설되었다. 1712년 표트르 대제는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고 관리, 귀족, 상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새로 집을 짓도록 강제했다. 농민들은 강제 노동을 위해 소집되었고 그 중 많은 수가 고생하다 죽어갔다. 전 유럽에서 건축가와 장인들이 불려왔다. 1725년 표트르 대제가 죽을 무렵에는 도시 인구가 엄청나게 많아졌고 러시아 해외 무역의 90%가 이 도시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표트르의 후계자는 수도를 다시 모스크바로 옮겼지만 안나 이바노브나 여제(Anna Ivanovna, 1730-40)는 상트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왔다. 1741년에서 1825년 사이, 엘리자베타 여제, 에카테리나 대제, 알렉산데르 1세 치하에서 상트 뻬쩨르부르그는 화려함으로 명성높은 궁정이 있는 국제적인 도시가 되었다. 이 황제들은 궁전, 정부 건물, 교회 등을 수없이 지었고 이로 인해 상트 페테르부르그는 유럽에서 가장 장대한 수도에 속하게 되었다.
1861 년의 농노 해방과 1890년대 절정을 이룬 산업화로 인해 가난한 노동자 물결이 상트 뻬쩨르부르그로 밀려 들어왔고 이는 인구 밀집, 열악한 위생상태, 전염병 등의 고질적인 문제거리를 야기했다.
상트 뻬쩨르부르그는 파업과 정치적 폭력의 온상이 되었고 '피의 일요일'로 시작된 1905년 혁명의 중심지였다.
1905 년 1월 9일, 짜르에게 청원하기 위해 겨울 궁전으로 가고 있던 파업 참가자들에게 군대가 총을 발사했던 것이다. 1914년 1차 대전이 시작되면서 애국심이 고양되는 가운데 상트 뻬쩨르부르그의 이름은 러시아식으로 페트로그라드(Petrograd)로 바뀌었고, 인구는 200만에 달했다.
페트로그라드는 또다시 1917년 혁명의 요람 역할을 했다. 노동자들의 항의가 대중 시위로 바뀌고 군대가 폭동을 일으킨 곳도 이곳이었으며, 이로 인해 1917년 3월 러시아 군주제는 막을 내렸다. 노동자와 군인의 요구를 대변하는 사회주의자들의 중심 조직이라 할 수 있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개혁주의 임시 정부 청사 바로 옆의 타우리드 궁전(Tauride Palace)에서 회합을 시작했다. 4월에 레닌이 볼셰비키 정당을 조직하기 위해 도착한 곳도 바로 페트로그라드였다. 진짜 혁명은 10월 24일 볼셰비키가 페트로그라드에서 핵심 위치를 점유한 후에 일어났다. 새 정부는 1918년 3월까지 페트로그라드에 머물다가 독일군의 공격을 우려해 모스크바로 옮겨갔다.
1924 년 레닌이 죽은 후 페트로그라드는 레닌그라드(Leningrad)로 이름이 바뀌었다. 레닌그라드는 1930년대 스탈린의 산업화 프로그램의 중심지였다 1939년이 되자 도시 인구는 300만에 달했고 소련 산업 생산물의 11%가 레닌그라드에서 생산되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 도시가 정적의 근거지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1934년 공산당 레닌그라드 지구당의 수장이었던 세르게이 키로프(Sergey Kirov)가 암살된 것을 시작으로 1930년대 공산당 내 숙청이 이루어졌다.
1941년 6월 소련을 공격한 독일군이 레닌그라드까지가 닿는 데는 고작 2개월 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볼셰비즘의 탄생지라는 이유로 히틀러는 레닌그라드를 증오했으며 이 도시를 지구상에서 없애버리겠다고 맹세했다.
히틀러의 군대는 1941년 9월에서 1944년 1월까지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50만에서 100만 가량의 사람들이 폭격, 기아, 질병 등으로 죽었다. 2차 대전 전 기간 동안 미국과 영국의 사망자가 70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숫자였다.
인구가 2차대전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된 것은 1960년대가 되어서지만, 전쟁 후 레닌그라드는 다시 서구를 향한 러시아의 창으로 재건되었다. 오늘날 상트 뻬쩨르부르그는 활발한 문화적, 예술적 정수를 보여주는 세계적 도시다. 외국 산업과 국내 산업이 모두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상트 뻬쩨르부르그는 러시아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이며, 현재 인구 오백만의 거대한 산업 중심지이고 진정으로 국제적인 아름다운 도시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러시아 미르 선교회
"МИР" Миссия "Иисус в России"
<미르> 란 "러시아 예수 선교회"의 러시아 약자로 세계 또는 평화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르선교회는 1996년 6월에 러시아 쌍뜨 뻬쩨르부르그에서 사역하던 몇몇 한인 선교사들이 러시아 현지 목회자들과 협력 선교하는 가운데 러시아 복음화와 나아가 세계선교를 위해 선교지 현장에서 만들어진 초교파 선교단체입니다.
“가서 제자삼으라” 는 주님의 지상명령 성취를 위해 미르 선교회는 전도, 양육, 파송및 구제사역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1. 미르신학교
미르 신학교("MIR" Bible Institute)는 러시아 성도들을 제자 양육하며 말씀으로 훈련하여 러시아 교회를 섬기도록 하는 교회 지도자 양육기관입니다. 미르 신학교는 1994년 2년제 야간 신학교로 출발, 96년 주간으로 변경하였고 현재 7회에 걸쳐 53명이 배출되어 목사로 전도사로 혹은 교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미르 신학교에서는 러시아 목회자들과 한인 선교사 그리고 미국 선교사들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르신학교는 미르선교회를 러시아 현지교회와 연합하는 선교공동체로 자라나게 하는 촉매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2. 미르선교훈련원
미르선교훈련원("MIR" Missionary Training Instiute)은 러시아 지역의 무교회지역에 교회 개척하는 것과 러시아인을 선교사로 파송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러시아와 세계의 복음화를 위하여 러시아인 헌신자들과 한국과 미국으로부터 러시아 현장에서 선교 훈련을 받기 원하는 선교사후보생들을 훈련합니다. 특별히 단기 선교팀들을 훈련하여 그들로 하여금 선교사적 삶을 살도록 비젼을 심고 있습니다
3. 미르한인교회
미르 한인교회는("MIR" Korean Church)는 2000년 새 밀레니엄의 해를 맞이하여 새로운 발상의 전환으로 선교사들이 섬기던 유학생 예배를 통합하여 이루어진 쌍뜨 뻬쩨르부르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을 위한 교회입니다. 여러 교단의 선교사들이 초교파적으로 공동사역을 하는 것이 특징이며 모든 교인들이 선교의 열정을 가지고 선교하는 교회로 자라가고 있습니다.
4. 미르고려인교회
2001년 11월에 고려인을 위한 교회를 미르선교회에서 개척하였습니다.. 이 교회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거주하는 약1만여명의 고려인 사역을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현재 100여명의 고려인이 모여 함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5.미르한글 학교
고려인교회가 개척되어 자연적으로 우리 동포들이 한글을 배워야겠다는 자생적 마음에 한글학교가 세워져 4-5세들에 들에게 한글교육이 시작되어 한글학교 교장인 이진우 집사님의 체계적인 한글학교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2004년 36명과 2005년 22명 총58명이 등록되어 다녔고 평균 학생은 20-30명이 수업을 받고 있고 저희 학교의 교실이 부족하여 현재는 30명이 적정 수준이라 판단되며, 더 많은 학생에게 모국어를 배울 기회를 제공하려면 무엇보다도 교사와 교실이 확충되어야 하리라 생각된다.
6. 한글 노인대학
고려인의 2세들로서 부모임으로부터 한글 말을 듣고 조금은 쓸 수가 있는 세대이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시다.
이들에게 한국어로 노래와 읽기 한국문화와 정신 한국의 풍습 등을 가르치며 전하는 노인학교다.
7.현지교회
디베랴교회/믿음교회/부흥교회/안디옥교회/예닮원교회/은혜교회/참빛교회/하나님의 평강교회/
내지선교사(안드레이/크라스노다르지역 개척)
카잔공화국(양 리따)
기도제목을 나눕니다.
1. 미르선교회 각 기관과 선교사들의 영적 성장과 건강을 위하여
2. 잊혀져가는 우리 민족인 러시아 고려인 교회가 성장 되어 가는데 500명 고려인이 드릴 수 있는 교회가 세워지기를
① 이를 위해 부지와 건물구입을 위해기도 부탁드립니다.
② 전도 목표
1차 목표 - 2008년 전도하여 120명 출석
2차 목표 - 2009년 “” 150명 “”
3차 목표 - 2010년 “” 200명 “”
4차 목표 - 2011년 “” 300명 “”
5차 목표 - 2012년 “” 400명 목표 달성치
3. 세워진 교회들과 지도자들이 성령에 충만하여 각 지역에 복음의 혁명이 일어나도록....
4. 미르 고려인 한글학교 노인대학 동서문화교류가 더욱 성장하여 발전되기를
5. 선교사의 가족이 영육 관에 강건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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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고려인들 다시 연해주와 러시아 근교 쌍페테스부르그로
독립국들, 자국민만 우대 - 고려인들 다시 난민 전락
1938년11월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농업부장 바꿀린은 소련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올렸다. "타슈켄트주의 고려인 거주 집단 농장은 대단히 높은 영농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불모지에서 높은 수확을 거두었다"
고려인들은 밤낮으로 황무지를 개척하며 지난날 강제이주의 악몽을 잊으려고 애쓰는 듯 했다. 맨 손에는 갈대숲을 베고 운하도 파야했던 것은 물론, 늪도 말려야 했으며 땅을 갈아 씨를 뿌리고 짚, 모래, 갈대, 흙을 섞어 벽돌을 만들어 집도 지었다.
소련 연방 전 지역에는 100개 이상의 민족들이 있는데 고려인은 인구 규모에서 28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고려인들은 특유의 근면과 성실로 비극적 상황을 극복하고 점차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했다. 적지 않은 돈과 집, 자동차 등을 소유하며 연간 소득도 늘렸다. 70-80년대는 일반 노동자들의 10배 이상의 소득을 올리는 고려인이 상당수였으며, 소련 내 모든 분야에서 전문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작가 아나톨리 김, 가수 율리 김, 빅토르 최, 성악가 넬리 리, 체조선수 넬리 김 등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뛰어난 재능과 근면함으로 다른 민족들의 존경을 받을 정도로 우수한 민족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리고 생활의 안정과 기반을 되찾은 후세들은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이 제 2의 고향, 제 2의 조국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강제이주 반세기만에 고려인들의 운명은 또다시 바뀌고야 만다.
1989 년 민족간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소련이 무너지고 독립 국가들이 생겨나면서 무시무시한 단어인 '난민'이라는 표현이 고려인들에게 적용된 것이다.
독립국가 들은 러시아어를 배척하고 자국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이민족 차별정책으로 고려인들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다.
고려인들이 생산하는 농산물과 가축들은 판매를 할 수 없었고, 공식 언어를 모른다는 이유로 취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대부분이 공무원, 교사, 의사, 연구종사자, 집단 농장장 등 사무직 또는 관리직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태는 더욱 심각했다.
이러한 실직자들이 단기간에 공식 언어를 습득하여 재취업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었기에 단순노동자 또는 도시빈민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집과 재산을 버리고 떠나라는 협박 편지까지 받게 되었다. 공식 언어를 모르면 물건 하나 살 수 없을 정도로 미래가 없는 암담한 현실로 바뀌어진 것이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또다시 어디론가 자신들이 살 곳을 찾아 떠나는 것뿐이었다. 조상들이 처음으로 한반도를 떠나 율도 국을 찾아 떠났던 연해주, 바로 그 곳이 부모들의 마음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또 다시 디아스포라가 되어 러시아 전 지역으로 흩어지면서 러시아 수도였던 상뻬쩨르부르그로 오고 있다. 이제 이 길목에서 고려인교회를 통하여 믿음을 주고 또한 소식을 듣고 스스로 교회를 찾아오는 것을 볼 때 한 민족으로서 피는 물보다 진한 감을 갖는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민족인 고려인의 고난을 위로 하고 희망을 주며 이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이 전해지기를 기도한다.
이제는 삶은 고단하여 흩어져 먼 곳에서 살지만 주일에 예배드리며 만나는 것이 이들의 기쁨이다.
2. 고려인 교회 건축과 문화센터를 위하여
러시아에 150여 종족이 살고 있습니다. 그중에 우리민족인 고려인은 역사 속에 아픔이 있는 우리민족입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압제 당할시 나라를 잃고 있던 우리민족을 러시아와 일본 전쟁에서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 거기서 돌아오지 못하고 남을 수밖에 없는 자손들입니다.
구소련 전 지역에 약55만 인 흩어져 살고 있고 우주백스탄 약20만, 카작스탄 10만 키르기스탄 8만 로스토프 5만 원동지역 3만이 디아스포라로 살고 있는데 살던 나라가 공화국으로 독립하여 각자 러시아어를 쓰지 않고 자국어만 사용하여 고려인들이 러시아어만 배워서 그 나라 언어를 할 수 없기에 이방 민족은 떠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러시아도 어렵지만 그나마 언어가 되고 러시아로 가면 살길과 그곳에 자녀들의 장래가 없음으로 희망을 갖고 이곳 러시아로 이동하고 있다.
고려인교회는 이들을 이해하고 위로와 아픔을 품고 사랑으로 감싸고 안을 때 희망을 갖고 주님을 믿으며 역경과 고난가운데 주를 바라보며 제2의 고향을 떠나 난민이 되어 다시 러시아 쌍뻬쩨르부르그로 오고 있다. 러시아에서 오직 고려인교회로만 모이고 있다.
사도 바울 선교사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어 “[골육]으로서의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서 그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롬 11:14)“나의 형제(兄弟) 곧 골육(骨肉)의 친척을 위(爲)하여 내 자신(自身)이 저주(詛呪)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願)하는 바로라”(로9:3) “나의 동족 고려동포가 나라 없이 유린하는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알아 이들과 함께 나눌 수 만 있다면 생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사는 것이 나의 일념이라”
이제 미르선교회에서 공동개척한지 6년 120명이 전도되어 예배드리며 공동체의 삶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건물과 장소가 없어서 우리의 기도제목입니다. 이를 위해 선교사의 생을 다하여 고려인들과 함께 교회 건축과 한러 문화 센타를 통하여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전해주기를 소원한다.
하나님 ! 우리 고려 동포의 교회이며 주님의 교회와 문화센터가 세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 가운데 1991년 11월에 러시아의 제 2의 도시인 쌍뜨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한 이래로 지금까지 축복하시고 사역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새해의 시작하는 1월 동역자님들의 가정과 사역과 교회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도드리며 러시아 선교의 활성화를 위한 지속적인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1. 미르고려사람교회의 소그룹팀과 심방팀의 활성화를 위하여
지난 가을부터 집사님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중년 집사 그룹을 중심으로 하는 소그룹팀이고 다른 하나는 장노년 집사 그룹을 중심으로 하는 심방팀입니다.
러시아 문화의 특성 상 가정에서 모임을 갖는 것이 쉽지 않지만 이미 세 그룹이 모임을 시작하였고 앞으로 세 네 그룹을 더 시작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심방팀은 매주 화요일 아침 9시에 모여서 주일에 결석한 성도들과 장기 결석자들을 주중에 방문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소그룹 모임과 심방팀을 통하여 미르고려사람교회가 질적, 양적으로 성장하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2. 미르고려사람교회의 창립 7주년 예배를 드렸다.
11월 9일 주일에 미르고려사람교회가 창립 7주년 예배를 드렸습니다. 가족과 이웃과 친지들을 초청하려고 하는데 현재 예배 장소는 좌석이 약 100석으로 협소하여 창립예배를 위한 예배 장소를 찾아 그 주일만 임대하여 드렸습니다. 시내 지역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적합한 장소를 찾아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많은 영혼들에게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증거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3. 러시아 개혁주의 목회자 협의회의 정기 기도회와 세미나를 위하여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러시아 목회자들이 개혁주의 목회자 협의회를 구성하였고 저도 그 모임에 가입하여 선교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모임의 건강한 성장을 위하여 정기적인 기도회와 세미나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현재 회장은 미하일 목사이며 서기는 막심 목사인데 미하일 목사의 건강을 위해 특별히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약 3개월 전에 심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입이 돌아간 상태(구안와사)인데 현재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기도회 및 세미나를 통한 모임의 성장과 미하일목사의 건강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4. 러시아 개신교회의 연합과12월25일 성탄 연합 예배를 드렸습니다.
러시아인의 50% 이상은 정교회 신자이며 개신교는 약 1% 정도입니다. 대표적인 개신교단은 공산 시절부터 존재한 오순절과 침례교이며 개신교는 최근에 선교사들에 의하여 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정교회의 영향력이 강하고 개신교의 활동이 제한되는 상황에서 개신교회들의 연합은 필수적입니다. 이를 위하여 종교개혁주일인 12월 25에 연합예배를 약 400명이 미르선교회 소속교회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연합 예배를 전도의 기회로 삼고 은혜가운데 잘 드렸습니다
5. 고려인교회와 문화센타 건립을 위하여
러시아에 150여 종족이 살고 있습니다. 그중에 우리민족인 고려인은 역사 속에 아픔이 있는 우리민족입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압제 당할시 나라를 잃고 있던 우리민족을 러시아와 일본 전쟁에서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 거기서 돌아오지 못하고 남을 수밖에 없는 자손들입니다.
구소련 전 지역에 약55만 인 흩어져 살고 있고 우주백스탄 약20만, 카작스탄 10만 키르기스탄 8만 로스토프 5만 원동지역 3만이 디아스포라로 살고 있는데 살던 나라가 공화국으로 독립하여 각자 러시아어를 쓰지 않고 자국어만 사용하여 고려인들이 러시아어만 배워서 그 나라 언어를 할 수 없기에 이방 민족은 떠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러시아도 어렵지만 그나마 언어가 되고 러시아로 가면 살길과 그곳에 자녀들의 장래가 없음으로 희망을 갖고 이곳 러시아로 이동하고 있다.
고려인교회는 이들을 이해하고 위로와 아픔을 품고 사랑으로 감싸고 안을 때 희망을 갖고 주님을 믿으며 역경과 고난가운데 주를 바라보며 제2의 고향을 떠나 난민이 되어 다시 러시아 쌍뻬쩨르부르그로 오고 있다. 러시아에서 오직 고려인교회로만 모이고 있다.
사도 바울 선교사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어 “[골육]으로서의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서 그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롬 11:14) “나의 형제(兄弟) 곧 골육(骨肉)의 친척을 위(爲)하여 내 자신(自身)이 저주(詛呪)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願)하는 바로라”(로9:3) “나의 동족 고려동포가 나라 없이 유린하는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알아 이들과 함께 나눌 수 만 있다면 생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사는 것이 나의 일념이라”
이제 미르선교회에서 공동개척한지 6년 120명이 전도되어 예배드리며 공동체의 삶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건물과 장소가 없어서 우리의 기도제목입니다. 이를 위해 선교사의 생을 다하여 고려인들과 함께 교회 건축과 한러 문화 센타를 통하여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전해주기를 소원한다.
하나님 ! 우리 고려 동포의 교회이며 주님의 교회와 문화센터가 세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